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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치는 여자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4
엘프리데 옐리네크 지음, 이병애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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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뜩해하며 에리카는 자신이 백칠십오 센티미터 길이의 크고 무감각한 구멍이 되어 관 속에 누워있고 흙이 되어버리는 것을 상상한다. 그녀가 경멸하고 소홀히 했던 구멍이 이제 와서 그녀를 완전히 지배하게 돼버린 것이다. -p. 2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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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독자는 이 소설을 자신있게 일본과 같은 급인 SM소설이라고 추천해줬는데, 글쎄 무라카미 류 소설과 비교해봤을 때 이 소설이 SM소설의 축에 속할지 어떨지... 아마 그 사람은 이 소설이 진정으로 뜻하는 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추측해본다. 이야기가 살짝 무라카미 류의 '피어싱'과 가깝긴 하지만, 두 소설 다 무시무시한 자해과 자기비하로 남자를 쥐어짜고 속박하는 여자가 등장하지만, 이 소설에서 결국 여자는 남자의 털 한 오라기조차 상처를 가하지 못한 채 자기 자신에게 조치를 취해버린다. 일부러 그런 어투를 택했는지 모르겠지만, 소설에서 '페니스'라던가 '성기'같은 단어들은 의학용어처럼 차갑게 냉동되어 흰 종이에 내던져진다. 왠만해서는 무라카미 류의 소설에서 나오는 엑스터시를 느낄 순 없을 것이다. 철저히 고통스럽고, 철저히 독자들에게 거북함을 선사하며, 남녀의 사랑 속에서 얼마나 부당한 차별의식들이 숨어있는지를 정면에서 파헤친 소설이다. 에리카의 어머니도 사실 이 소설에서 과하게 묘사되었을 뿐이지, 그녀는 사실 우리나라에서 딸을 질투하면서도 감싸는 거의 모든 어머니들과 다를 바가 없다. 가장 섬뜩한 건 남편에게 피해를 본 그녀마저도 에리카의 애인에 대해 현명한 조언을 해주지 못하고, 그로 인해 딸이 강간을 당해도 신고도 못한 채 그녀의 품성을 탓하던 것이다. (그녀는 잠긴 문 너머로 딸이 폭력을 겪고 있는 판국에서도 딸이 이전에 자신의 말을 들었으면 이런 일이 없었으리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녀가 딸에게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었던가?)
까놓고 말하자면 남성이 동물이듯 여성도 동물이다. 단지 남자들처럼 '지렁이같은 그 것'이 없고, 사회적인 억압으로 인해 성기에 그닥 관심을 기울이지 못할 뿐이다. 옛날 소설들에선 '순결한 여성이 욕망에 잘못 대처해서' 생기는 일들을 얼마나 무섭게 묘사하고 있는지! 특히 한국은 아직까지도 성적 관계에 의해 일어난 피해를 거의 99.9% 여성의 책임으로 돌리고 있는 판국이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몇 년 전만 해도 강간당한 여자아이는 중년 남성이 자신에게 한 끔찍한 행동을 판사들이 보는 앞에서 엄숙하게 재현해야 했다. 여성에 대한 근본적인 시각부터 개선해야 에리카에게 둘러싸인 이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물론, 책에서 보다시피 여성과 남성의 말과 생각은 왼쪽과 오른쪽처럼 정반대방향으로 틀어져 있으니 두 사람 다 열심히 노력하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겠지만.
이 소설에 대해서도 말이 길어졌지만, 소설의 주인공인 에리카가 아주 이 사태에 대해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라고 강조하고 싶다. 그녀가 솔직하게 정정당당하게 사랑을 갈구했더라면, 처음부터 그녀의 육체만을 갈구했던 클래머가 먼저 수치심을 느끼고 떠나갔을 수도 있다. 아주 운이 좋았다면 마음을 고쳐먹었을지도 모르고. 모름지기 사람은 남을 변화시키려면 자신부터 변화시켜야 한다. 에리카가 정말로 예술에 대해 범상치 않은 소질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우리 모두가 그랬듯이 어머니의 자식이며, 그녀를 포함한 우리는 결국 의사소통을 나누는 동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