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보이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17-1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17
앤드루 테일러 지음, 박아람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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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할아버지가 처음 몽크스힐에 왔을 때는 지주에게 모자를 벗고 인사를 했지. 이젠 내가 지주야(...) 이제 누가 주인인가? 말해보게. 누가 주인이냐고?"- p. 250  
   

 사실 낚였다고밖에 설명되지 않는다. 분명 에드가 앨런 포의 어린 시절을 소재로 썼다 하길래 급히 구해서 들여다봤더니 주인공은 쉴드라는 어떤 백수이고, 철저히 쉴드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시작되는 소설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쉴드가 지극히 선남처럼 나타나는 면도 있고, 부자인 은행가들이 사악하기 이를바 없는 악당처럼 나타나는 면도 있다. (어느정도 이야기를 읽으면 쉽게 짐작할 수 있겠지만, 주인공은 매우 계산에 능숙하며 선남도 아니다. 사실 그는 소피를 사랑하기보다는 그녀의 부를 사랑했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에드가가 그닥 많이 등장하는 것도 아니다. 아마 이야기가 완료될 때까지 독자들은 이 이야기가 도대체 어째서 최초의 추리소설과 고딕소설들을 지어낸 에드가 앨런 포와 연결되는지 전혀 알 수 없을 것이다. 부록을 읽어보면 머릿속에서 어떤 결론이 명확히 떠오르겠지만. 에드가 앨런 포의 어린시절이 전혀 공개되지 않았기에 이 소설은 그의 어린 시절을 표현할 때 조심스럽게 성격과 배경을 짐작하고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책은 부록이 중요하다. 그저 어떤 미스테리한 역사적 사실을 기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읽는 독자를 어안이 벙벙하게 만들다 마지막에서는 소름이 오싹 끼치게 만든다. 그 느낌을 공포보다는 ’분노’라는 단어로 표현해야 맞을 것이다.  책은 매우 두껍지만, 읽다보면 금방 지나간다. 한 사건이 일어난 뒤에 간헐적으로 맞춰지는 퍼즐들, 사소해보이는 일들, 그 뒤에 잠시 간격을 두고 작가가 띄워주는 무시무시한 진실들이 이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도록 만든다. 돈이 사람을 어찌 이렇게까지 만들 수 있는가, 진지하게 고심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P.S 좋은글귀를 저 글로 지정한 이유. 쉴드와 카스월이 이야기를 나눌 때 카스월이 했던 말이다. 섬뜩하게도 조이스 캐럴 오츠의 ’좀비’라는 소설에서 주인공이 시간을 하면서 "누가 주인이지?"라고 말했던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둘 다 소설 속 시대도 각각 다르고 이 글을 쓴 시대도 각각 다르고 장르까지 다르지만 인간의 소유욕과 지배욕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에 대해 적절히 다룬 책이라는 점에선 일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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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생태 2011.5
자연과생태 편집부 엮음 / 자연과생태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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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산천에 너무나 흔한 나무여서 그런지 벚꽃을 찬양하는 시나 노래는 거의 접할 수 없다. 그러나 고려 고종 24~35년, 몽고의 침입을 불교의 힘으로 막아보자는 마음을 담아 제작된 팔만대장경은 60퍼센트 이상이 산벚나무로 만들어졌다.- 벚나무 이야기 벚꽃 진 봄을 아쉬워하며, p. 100  
   

  이번 잡지에서는 노랑색 자주색 보라색 무지개빛... 사방이 온통 알록달록한 색깔 천지이다. 꽃이 많이 피다보니 꽃가루나 꿀을 탐하는 곤충들이 많이 생겨나게 되고, 짧게나마 봄 기운을 느낀 4월달에 찍은 사진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중요한 순간에 호화롭게 옷을 차려입고 사진을 찍을 때, 사진을 찍는 대상의 외모와 옷도 중요하지만 그 사진의 선명도와 색깔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잡지회사는 뛰어난 사진기자들이 너무 많은 게 아닌가 생각될 정도이다. 몇몇 코너에서는 매우 감상적이고 눈 앞에서 생생히 보이듯 자연을 설명하는 기자도 있다. 독침에 쏘인 경험 때문에 벌을 매우 싫어하는 나는 처음에 사진을 보았을 때 겁이 덜컥 났었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나서 등에가 꽃을 좋아하는 파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벌과 구분하는 법도 알게되었다. (그래도 귀에서 윙윙거리고 있으면 일단 겁부터 날 것 같다;;)
 요번에 가장 인상깊었던 글귀는 위에 적혀있는 저 것이다. 간혹 애국심이 넘치는 사람들과 같이 경복궁에 가면 ’저 벚꽃나무 너무 지긋지긋한데 이젠 잘라버려야 하지 않나’라는 불평을 옆에서 자주 듣게 된다. 일본에서 심은 나무를 뭐가 좋다고 저렇게 한국의 궁궐에 버젓이 냅두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하지만 저 벚꽃나무도 의도치 않게 우리나라 땅으로 왔을 테고, 한국에서 몇 십년 이상은 살지 않았는가. 만일 벚나무가 우리의 이야기를 듣는다면 얼마나 슬퍼할까라는 걱정이 문득 들었다. 이제는 고려시대부터 시작하여 우리나라 일상에서도 벚나무가 흔하게 쓰였다는 지식을 얻었으니 사람들에게 이 말을 꼭 해줘야겠다고 다짐해본다. 요번에도 <자연과 생태> 덕분에 많은 상식들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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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털 같은 나날
류전윈 지음, 김영철 옮김 / 밀리언하우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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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로부터 50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처칠, 간디, 아름답던 송메이링, 스탈린그라드 대혈전은 알아도, 내 고향에서 3백만 명이 넘게 굶어 죽었다는 것은 모른다.- p. 189  
   

 

 아아 또 회사로 진출하기 싫어지는 글을 보게 되었네ㅠㅠ 아무튼 황석영이 추천한 소설이라서 그런지 우리나라에서 이 책이 다시 인기를 끌게 되었던 듯하다. 2004년에 출판된 책이 하나 더 있었고, 이 책의 배경은 90년대 중국이었다. 오래된 내용이라고 하면 오래된 내용이라고 할 수도 있고. 그런데 진짜 어딜 가나 어느 시대에 사나 사회란 정말 무섭고 가혹한가보다. 최근에 주변에 아는 분들 중에서도 무려 두 분이 회사에서 심각하게 고려할 만한 봉변을 당하셔서, 공감까지는 아니지만 무슨 내용인지 이해를 할 수는 있었다. 사실주의에 기초한 소설이며, 처음엔 가정으로 시작했다가 서서히 회사의 이야기로 진출했다. 그 다음엔 느닷없이 1942년의 대기근 이야기. 솔직히 거기서 왜 대기근과 장제스 이야기가 나오는지 나는 아직 분위기를 제대로 파악 못했다. 책을 덮고 골똘히 생각한 어설픈 추측 하나를 말해보겠다. 중국은 아직까지도 마오쩌둥을 숭배하는 분위기이니, 장제스가 망하게 된 계기인 대기근도 ’결과가 좋은 게 좋은 거다’ 식으로 덮였겠지. 그래서 장제스가 지배하던 시대를 공산당의 시선이 아닌 인간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까일 수밖에 없겠지. 그러나 부담없이 현대의 이기적인 사람들을 보면서 실컷 욕을 하다가 맨 뒤의 <1942년을 돌아보다>라는 소설 차례로 넘어가면, 할 말이 없어진다. ’이기적인 현대인’ 아니 ’이기적인 인간’인 우리들은 장제스에게 아니 1942년을 방관한 그 시대 사람들에게 돌을 던질 수 없게 된다. 만일 내 추측이 맞다면 이 책은 어찌보면 우리에게 정말 무섭고 두려운 책인지도 모른다. 거울처럼 책 속 등장인물들의 시커먼 마음 속을 살피던 글자들이 갑자기 우르르 달려들어 우리 마음 속을 비추기 때문이다. 꿈보다 해몽이 좋다고는 하지만, 좋은 책을 얻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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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치는 여자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4
엘프리데 옐리네크 지음, 이병애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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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뜩해하며 에리카는 자신이 백칠십오 센티미터 길이의 크고 무감각한 구멍이 되어 관 속에 누워있고 흙이 되어버리는 것을 상상한다. 그녀가 경멸하고 소홀히 했던 구멍이 이제 와서 그녀를 완전히 지배하게 돼버린 것이다. -p. 237  
   

  어떤 독자는 이 소설을 자신있게 일본과 같은 급인 SM소설이라고 추천해줬는데, 글쎄 무라카미 류 소설과 비교해봤을 때 이 소설이 SM소설의 축에 속할지 어떨지... 아마 그 사람은 이 소설이 진정으로 뜻하는 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추측해본다. 이야기가 살짝 무라카미 류의 '피어싱'과 가깝긴 하지만, 두 소설 다 무시무시한 자해과 자기비하로 남자를 쥐어짜고 속박하는 여자가 등장하지만, 이 소설에서 결국 여자는 남자의 털 한 오라기조차 상처를 가하지 못한 채 자기 자신에게 조치를 취해버린다. 일부러 그런 어투를 택했는지 모르겠지만, 소설에서 '페니스'라던가 '성기'같은 단어들은 의학용어처럼 차갑게 냉동되어 흰 종이에 내던져진다. 왠만해서는 무라카미 류의 소설에서 나오는 엑스터시를 느낄 순 없을 것이다. 철저히 고통스럽고, 철저히 독자들에게 거북함을 선사하며, 남녀의 사랑 속에서 얼마나 부당한 차별의식들이 숨어있는지를 정면에서 파헤친 소설이다. 에리카의 어머니도 사실 이 소설에서 과하게 묘사되었을 뿐이지, 그녀는 사실 우리나라에서 딸을 질투하면서도 감싸는 거의 모든 어머니들과 다를 바가 없다. 가장 섬뜩한 건 남편에게 피해를 본 그녀마저도 에리카의 애인에 대해 현명한 조언을 해주지 못하고, 그로 인해 딸이 강간을 당해도 신고도 못한 채 그녀의 품성을 탓하던 것이다. (그녀는 잠긴 문 너머로 딸이 폭력을 겪고 있는 판국에서도 딸이 이전에 자신의 말을 들었으면 이런 일이 없었으리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녀가 딸에게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었던가?)
 까놓고 말하자면 남성이 동물이듯 여성도 동물이다. 단지 남자들처럼 '지렁이같은 그 것'이 없고, 사회적인 억압으로 인해 성기에 그닥 관심을 기울이지 못할 뿐이다. 옛날 소설들에선 '순결한 여성이 욕망에 잘못 대처해서' 생기는 일들을 얼마나 무섭게 묘사하고 있는지! 특히 한국은 아직까지도 성적 관계에 의해 일어난 피해를 거의 99.9% 여성의 책임으로 돌리고 있는 판국이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몇 년 전만 해도 강간당한 여자아이는 중년 남성이 자신에게 한 끔찍한 행동을 판사들이 보는 앞에서 엄숙하게 재현해야 했다. 여성에 대한 근본적인 시각부터 개선해야 에리카에게 둘러싸인 이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물론, 책에서 보다시피 여성과 남성의 말과 생각은 왼쪽과 오른쪽처럼 정반대방향으로 틀어져 있으니 두 사람 다 열심히 노력하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겠지만. 
 이 소설에 대해서도 말이 길어졌지만, 소설의 주인공인 에리카가 아주 이 사태에 대해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라고 강조하고 싶다. 그녀가 솔직하게 정정당당하게 사랑을 갈구했더라면, 처음부터 그녀의 육체만을 갈구했던 클래머가 먼저 수치심을 느끼고 떠나갔을 수도 있다. 아주 운이 좋았다면 마음을 고쳐먹었을지도 모르고. 모름지기 사람은 남을 변화시키려면 자신부터 변화시켜야 한다. 에리카가 정말로 예술에 대해 범상치 않은 소질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우리 모두가 그랬듯이 어머니의 자식이며, 그녀를 포함한 우리는 결국 의사소통을 나누는 동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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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의 과학 - 이윤석의 웃기지 않는 과학책
이윤석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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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여성 코미디언들의 직업적인 성공과 가정에서의 행복이 우리 사회의 진보성을 시험하는 잣대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p. 151  
   

  매일 코미디 프로에서는 절대약골로 등장하는 이윤석 씨가 이렇게 책을 많이 읽은 박식한 분이었다니, 새삼 감탄했다. 사실 교수라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다른 이야기들도 재미있었지만, 특히 과학에 대한 설명을 상당히 쉽게 해주기 때문에 나 같이 이기적 유전자를 읽다가 잠들어버리는 초짜마저도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저렇게 작고 얇은 책에 웃음에 대한 인문적 과학적 사회적 이야기가 알짜배기로 들어있다니 이 책을 다 읽은 나로서도 그저 신기할 뿐이다. 참고문헌에 나온 책들은, 이름만 한국어지 책을 들춰보면 검은 건 잉크요 하얀 건 종이라는 사실만 간신히 알아볼 정도로 난해한 책들도 많다(...) 그런데도 약간 아쉬운 건 이윤석 씨가 귀찮아서 그랬던건지 아니면 그동안 보았던 책들을 다 기억하지 못했던건지... 몇몇 이야기는 참고문헌에서 나온 저서에서 본 적이 없는 지식들이었다. (예를 들면 고위직의 인사들을 만날 때 긴장을 풀기 위해 그 사람이 화장실에 앉는 장면을 생각한다는 이윤석의 이야기는 몽테뉴의 저서에서 따온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아무튼 웃음거리가 되는 대상이 고위직이고 거만한 사람들일수록 웃음이 진보적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는 내심 알고 있으면서도 새로운 이야기이다. 위에 적혀있는 명언은 여성 코미디언들이 직업상으로 인해 차별을 겪을 수밖에 없는 사정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이윤석 씨 개인의 격려를 써놓은 잔잔한 감동의 글이다. 저 글 역시 이윤석 씨의 진보에 대한 견해를 알 듯 말 듯하게 드러내보여서 좋았다.
 그러나 가장 새로웠던 글은 위험한 일을 감지했을 때 공격을 표시하려 어금니를 드러냈다가, 곧 대수롭지 않은 일임을 알아차리고 표정을 약간 풀은 어정쩡한 표정이 웃음의 시초가 되었다는 초반의 글이었다. 웃음은 진지하게 생각하는 일조차도 대수롭지 않게 만든다. 때로는 웃음으로 사람을 공격하는 일도 있다. 잔소리하는 아내를 간지럽히는 남편의 심리도 사실 자신이 느끼는 모욕에 대한 방어적 공격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도 행복하게 살려면 같이 웃어야 한다니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한다. 본인은 아직도 집단의 웃음에 대한 상처를 간직하면서 살고 있는데, 그들과 같이 진심으로 행복하게 웃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도 모르겠는데... 나 같은 사람 외에도 웃음으로 인해 상처를 받는 사람들도 많을 텐데.... 이 책을 읽으면서 어딘지 모르게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내가 너무 심각하게 생각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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