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 12
사쿠라이 가몬 지음, 미우라 츠이나 / 학산문화사(만화)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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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기가 되면 사토가 미쳐 날뛰기 시작하는지라 본격적으로 군대가 나오기 때문에 이런 복장이 나오기 시작한다. 더불어 미군 부대도 등장.

애니메이션의 아인은 많은 의문을 남긴 채 끝났다.
1. 플래토 현상이란 사실 무언가를 계속 하다보면 정체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죠슈아 포어라는 사람은 기억력 대회에 참여하기 위해 맹훈련을 계속하다 한계에 봉착했다고 한다. 그 현상이 꽤 심각했는지 에릭슨에 의해 극복되었다 하는데, 애니메이션에서 나타나는 그런 증상처럼 되지 않았을까 생각도 되는 바이다. 이중인격이라 해석한 사람이 있는데, 나는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고 본다. 애니를 끝까지 보면 그저 똑같은 인격이 인간보다 좀 더 단순한 형태로 계속 늘어난 것처럼 보인다.
이전에도 말한 것처럼 난 멀티다. 그래서 인격도 하나여야만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세상에 강요당해서는 안 되지만, 상황에 맞게 다양한 인격을 사용한다면 다ㄱ... 아니 인생을 사는 데에 좀 더 유용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플래토 현상으로 다시 돌아가자면, 플래토 현상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몰입과 집중이다.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세상에 관심이 없는 나가이도 세상을 구하는 데 몰입할 수 있는 방법으로 소산 구조의 힘을 예로 들고 있다. 그 힘은 동료들의 신뢰로 인해 형성된 자의식 없는 자신감, (친구 카이를 통해 나름대로) 세계로의 자기 전환, 그리고 마지막으로 새로운 해결책의 방법같은 걸로 끌어올려야 한다. 나가이는 조용히 살려는 자신의 목표에 방해가 되는 장애물을 제거하려 했다. 그게 문제에 대한 신선한 해결책(다ㄱ... 아니 분신술)을 안겨다 주었다. 더불어 게임 형식의 사건 진행이 오히려 그에게 더욱 이득이 된 게 아닌가 생각한다. 심리학 과정을 굉장히 전형적으로 보여줘서 흥미가 생겼다고 할까. 아무튼 열심히 봤다.

 

2. 사토의 말과는 달리 머리가 떨어진 뒤 다시 재생되어도 그 사람 그대로인 것 같다. 떨어진 머리가 눈을 감아버리기도 했고. 결국 그 말도 사토가 살기 위해 들어놓은 최후의 보험이 아니었는지. 결말은 3기를 예고하며 마무리되었지만 워낙 잔인해서 대중들 모두에게 인기를 끌기는 힘들고, 애초 3D애니라 오덕계에서도 반발감이 심해서 무리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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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처녀 민음의 시 168
문정희 지음 / 민음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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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팡이 중에서

멕시코 중부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지팡이와 함께 앉은 노인을 보았다
지팡이는 무기가 아닌가
까다로운 공항 수속을 통과한 지팡이를 보며
그의 뒷자리에 앉았다

중남미 도서전이 열리는 과달라하라 공항에 내리니
마중 나온 여교수가 흥분해서
가르시아 마르케스 씨도 이 비행기로 오셨어요
그녀가 가리킨 곳에
지팡이가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
많은 고독한 막대기들을 보았지만
보았을 것이지만
바로 옆자리에서 뒷자리에서
그와 어깨를 부딪혔지만
마르케스는 보지 못하고 지팡이만 보았을 것이다


 


미리 말해두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진짜 좋다고 볼만한 시가 없어서 이 시를 올린 것이다. 다시 말해 나에겐 이 시가 좋은 건 아니다. 간지럼 정도는 기발하다 보지만 애를 낳아본 적도 없고 M은 내 취향이 아니라서(...) 아이 다 키우고 50대 된 어머니들에겐 공감할 만한 요소가 많겠다.


아무튼 지팡이를 가져갈거면 그냥 개인 전용 비행기를 타던가 흠. 소설도 꼰대스러웠지만 이 정도면 혼모노네. 그나저나 저분 저거 땅콩갑질부린 거 아님?
검색해보니 노약자와 장애인의 보행용 지팡이는 허가된다고 한다. 문정희 시인이 그냥 비행기가 지체되는 게 짜증나서 썼을 수도 있고, 그 상황과 맥락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도 있긴 하겠다. 시가 대표하는 게 뭔진 알겠는데 이렇게 직접적으로 사람의 이름을 담아 시를 쓴 게 살짝 불편하다. 오랜만에 보니 전반적으로 맘에 안 드는 게 한두가지가 아니네.



 


단순히 살이 찌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공부를 할 때 좀 더 둔부가 커지고 땀 흘리는 일을 할 때 작아지는 건 있다. 요즘 공부라던가 글쓰기기법이 중요하네 어쩌네 하지만 중요한 건 앉아서 공부를 하거나 글을 쓰는 것이다. 뭐라도 해야 결과물이 나온다. 그나저나 의자의 갈비뼈에서 시가 태어난다는 발상은 특이하네. 생각해보면 아무리 시인들이 뮤즈를 찬양했다고는 하지만, 현실을 보자면 그 뮤즈랑 놀았던 걸 의자에 앉아서 쓰게 되었고 결국 의자는 홀대되었던 게 아닌지.


영감은 결국 노력에서 나온다는 걸 이 시집은 겸손하게 일깨우고 있다. 이제는 그래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 같다. 세상이 워낙 어렵다보니 다들 열심히 살아야 해서. 왜 우리나라 청년들이 노오력하라는 말을 싫어하냐면, 일로 먹고사는 걸 전제하기 때문이다. 옛날엔 열심히 일해서 자식들을 먹여 살리는 게 일이기 때문에, 굉장히 그것을 숭고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가족이기주의라는 게 알려졌고, 청년들은 자신의 노후를 위해서 살아야 한다. 그들은 너무나 불안에 떤다. 걱정하는 자나 걱정하지 않는 자나 전부 노인이 된 자신에 대한 모습에 시선을 둔다. 현재 노인들은 청년들에게 열심히 일해서 돈을 모으라 한다. 그러나 자신을 위해서 일을 하기엔 동기가 굉장히 낮아진다. 내가 이렇게 노후나 대비하기 위해 태어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사는 의미가 없어진다. 그러다 불안에 싸여 투자하다 돈 날리고, 연금이나 보험에 돈 싸들고 가지만 결국 돌고 돌아 그것은 전부 그쪽 직원들 입속으로 들어간다. 그래서 함부로 노력해봐라, 열심히 일해라하는 말을 입에 올리면 안 되는 것이다. 자기 하고 싶은 걸 한다는 사람들도 노후의 공포를 잊으려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일테니.

내 또래 여성들? 난 30대 되면 죽겠지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마구 사람들과 부딪치며 살았는데 그래도 좀처럼 죽질 않는다. 여성은 크리스마스 케잌이고 팔리지 않으면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려져 썩는 것이다. 아마 노인이 되면 연금도 떨어지고, 남성 노인들보다 훨씬 못하게 살겠지. 그런 사람들이 운동권을 하면 그때 참여해나갈 생각이다. 아무튼 이젠 이렇게 훌륭한 시도 옛말이 되어버렸다.


 


 


문정희의 다산의 처녀는 여성이 홀로 아이를 낳고 울고 있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고독 끝에 태어난 아이는 핏빛처럼 붉고, 여성은 기쁨과 슬픔에 싸여 감정에 복받쳐 타오르듯이 운다. 그 여성은 강해서 그 순간은 곧 지나가고 그녀는 울음을 그친 뒤 길을 잃은 채 길을 찾아갈 것이다. 다소 앞뒤 분별이 없는 그녀의 짧은 시들은 너무나 매력있다. 마치 마리아가 하늘의 질문에 "응"하고 대답하지 않았다면 역사를 깨뜨려 처음으로 만드는 그 모든 순간이 시작되지 않았듯이.

 

흰나비 중에서

줄타기에서 모처럼 땅으로 내려온 소녀를
북한강가 누구네 집 여름 별장에서 만났다
엘비라 마디간! 그녀는 흰나비처럼
포도주 잔 주위로 날아다녔다

속도가 전공인 카레이서가
그녀의 날개를 잡았다
엑셀을 힘껏 밟고 달려가 신호도 무시한 채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쥐더니
얇은 치마를 건드리며 호탕하게 웃었다


엘비라 마디간은 영화이름이기도 하다. 후반부에 있는 시 중 하나이다. 개인적으로 이 시집은 뒤로 갈수록 점점 재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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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오 2018-12-09 09: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 잘 읽고 갑니다^

갈매미르 2018-12-09 09:43   좋아요 0 | URL
엇 댓글 고맙습니다 ㅎㅎ
 
アメリカひじき·火垂るの墓 (改版, 文庫)
노사카 아키유키 / 新潮社 / 197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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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미군이 온다는데 창피하게 이런 게 역에 있다니.

 

'전쟁으로 국민을 참화로 몰아넣고 지금까지 모른 척 하는 나쁜 권력자들!' 하고 만들었는데, '와 미국놈들이 이렇게 잔인하다 잊지말자 야스꾸니'로 해석 당하는 작품을 감상했다. 집이 다 불탈 때 누군가가 천황 폐하 만세를 왜 외치고 다녔는지는 모르고 당장 처음에 시체를 보면서 '미국이 올텐데 왜 이런 꼴로 누워 있는 거야!'라고 하는 그 사람들 목소리만 들었을 수 있다. 혹은 아예 안 봤을지도...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바스터즈'에 나오는 나찌 죽이고 다니는 독일군 장교처럼 일본군 죽이고 다니는 일본인이 나와야 한국 사람들도 재미있다고 볼 거다. 그런 영화가 일본에서 나올리 없지만.
한국이나 일본이나 이런 건 참 종특인거 같다. 국가랑 관련된 장르는 맥락파악 안 하는 거.

보다시피 부제를 이렇게 정했다. 이게 진정 혀언실이자 최ㅡ선입니까?
애비는 전쟁에 죽었는지 애들 내팽개쳤는지 모르고 어머니는 전신화상으로 괴롭게 죽은 애들한테 뭐? 군인이 되서 나라를 위해 보옹사해? 세츠코한테 엄마가 죽었다고 직접적으로 말하고 심신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준 사람들이 득시글한 이 나라에 무슨 충성을 하라고?
동네 사람들은 돌아가서 친척 아줌마에게 용서를 빌라고 하는데 빌 사람이 따로 있지. 조금만 더 있음 세츠코가 운다고 비오는 날 먼지나게 두들겨 팰 것 같은데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그냥 아는 사람 곁에서 편안히 죽는 게 나을 것 같지 않냐? 그리고 나라는 국민이 주인이라며? 전쟁나면 약 없고 밥 주지 않고 애 두들겨 패는 지역사회가 지역사회냐? 그런 나라가 나라냐?
그리고 일 안 하고 밥 먹는 게 무슨 도둑놈 심보냐?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기업이 면접에서 '아가씨 커피 탈 수 있어요?'라고 물어보는 건 도둑놈에 처음부터 희롱할 심보 아니냐? 이외수 할아버지는 꼭 이 애니메이션을 보길 바란다. 뭐 불로소득은 지옥에 떨어지는 중죄라고? 그거 하루하루 목숨만 연명하는 세츠코와 주인공들에게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다시 말해줄 수 있을까?
어른들 말투 진짜 씨발 졸라 현실 타령하고 노숙자들 굶어 죽어야 한다고 하는 거 보니 내 전남친과 똑디네. 전쟁나서 포탄 떨어지면 제일 먼저 뒤졌으면 하고 기도하게 된다. 일단 그 친척 아줌마부터.

아니 그리고 도와주려는 어른들도 왜 미친듯이 가식적이야 순경새끼 맞아 죽어가는 주인공 도와주나 싶더니 저기 가서 물마시고 오래 ㅋ 야 니 배급을 반 띄어서 줘도 세츠코 줄 밥이 모자랄 판인데 뭔 개소리야 밥을 달라고 이자식아 ㅋㅋ 그리고 생각해보니 처음에 시체한테 주먹밥 준 놈도 그래 시체가 어떻게 밥먹냐 슈발 ㅋㅋㅋ 니가 죽어서 먹어보던가?! 저러고 나서는 성당이나 교회나 절에 가서 신님 저는 오늘도 봉사했습니다 천국가게 해주세요하고 기도했겠지 ㅋㅋㅋㅋ 우웩이다 웨엑!!!

 

애니에선 세츠코의 죽음 이후 역에서 죽어갈 때까지의 주인공의 삶은 나오지 않는다. 혈육을 포함하여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세상은 그에겐 지옥과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우리는 여태 죽은 사람을 짓밟고 기어오르는 세상을 살고 있었다. 이제는 경제 성장도 한동안 되지 않을 거라 한다. 우리가 좀 덜 먹게 되더라도 이제 그들을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게 내 생각이다. 복지는 효율적이어야 한다. 단시간에 많은 성과를 내는 게 끝이 아니라, 가난한 아이들이 돌봐줄 어른 하나 없이 혼자서 살기 전에, 굶어 죽어가기 전에, 나아가 정서적으로 심각한 상처를 입기 전에 제때제때 도움을 줘야 한다. 또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가정과 유사한 집에서 살게 되더라도 불편한 점은 항상 있을 것이다. 가정과 유사할 뿐이지 가정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은 부모 없는 아이들이 모두 그룹홈에 가게 된다지만, 모두가 알듯이 기숙사 생활은 또 얼마나 어려운가. 이런 것들을 나부터 고려해서 실천에 반영해야겠다.

우리나라도 이 애니 보고 반성해야 한다. 적어도 주인공이 학교에서 지원을 받아서 세츠코와 같이 급식도 먹고 졸업해서 일을 했다면 저런 일이 발생했을까? 생계도 생계지만 교육 관련 지원이 부실해서 생계가 해결되도 양극화를 피할수가 없는게 약자이다.  시대도 그랬겠지만 지금은 지식 자체가 돈이 갖는 계급성의 하위호환이다. 페친이 아는 다문화가정 애가 하나 있는데 생계가 지원되도 결국 뭘 배울 수가 없어서 현장일 한다고 한다. 대학도 어떻게 해야하고 우리나라는 교육에 관심이 많다면서 정작 필요한 지원은 하나도 안 하는 것 같다. 학교사회복지사한테 지원 책임 돌리고 다 맡기고 있는데 이들은 그냥 학교의 비정규직 따까리일 뿐이고. 이번에 자격증 보장해준다고 하는데 자한당에서 또 이런 저런 법 써서 예산 안 나오게 막으면 도로아미타불이다. 이번에 자한당과 무슨 계약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밖에 지원이 안 된다는 게 너무 안타깝다. 사람 몇 죽어야 지원해주고 말이다. 권력도 변화해야 하며, 우리도 행동에 옮겨 국가가 한국의 세츠코를 지원하기를 목청껏 외쳐야 한다. 그리고 국가를 너무 믿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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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스의 종말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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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운동을 배경으로 하여 생겨나는 사랑 이야기들은 에로스와 정치 사이의 비밀스러운 연결을 드러낸다. 바디우는 정치와 사랑의 직접적 결합을 부정하지만, 정치적 이념의 기치 아래 실천과 참여로 점철된 삶과 사랑 특유의 강렬함 사이에는 "신비로운 공명" 같은 것이 있다고 본다. 이들은 마치 "그 소리와 힘에서는 완전히 상이한 두 악기가 위대한 음악가에 의해 하나의 곡 속에 합쳐져서 신비로운 어울림을 만들어내는 것 같다.


이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좋아하는 일을 하려면 설령 자신이 그 일만 하다가 죽더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나는 그런 정신도 존경하는 편이다. 사랑 또한 그렇다. 사랑은 자아를 어느 정도 놓아버리는 일이며, 심지어 그건 좋아하는 일까지 포함되기도 한다. 타자는 자신의 모든 인생 철칙을 단호히 거부할 수도 있다. 심지어 타자는 인격까지도 이전과 전혀 다르게 변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들은 오랫동안 서로 같이 살기를 원한다. 심지어 연인이 먼저 떠나가더라도 자신의 마음 속에 연인을 품고 있다면, 끝까지 그것을 품고 살아가길 원한다. 죽음은 결국 스튁스 강, 즉 망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다만 서로를 아껴주며 살지 않으면 사랑은 깨질 수밖에 없다. 연애할 때 날 나만큼 아껴주지 않는 인간이라면 결혼하고 사랑이 식어갈 땐 대체 어떻게 되겠는가.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사람의 방귀 냄새도 향기로워 보일 수 있다. 사랑한다면 상대방이 돈 없어도 예뻐 보인다. (그렇다고 내 동생처럼 돈 안 벌고 여자 만나 등골 뺄 생각 하면 안 된다. 생명체로서 살기 위해 노력 좀.) 사랑한다면 남자가 한남이고 여자가 메갈인게 보이지 않는다. 사랑한다면 지구가 둥근지 평평한지 분간되지 않는다.

여성들은 올바른 것을 강조하고, 그것을 강화하고 싶어한다. 예술가들은 시대성에 감안해 책을 잘 팔려면 자신의 꼰대성을 감춰야 한다. 나는 그게 그들의 꼰대성을 바꾸지는 못한다고 본다. 개인의 범죄는 지적하되 창작물의 자율성은 보장해야 한다.

반면 남성들은 남성들대로 오토코노코를 만들거나 고분고분하게 자신의 말을 잘 듣는 여성을 만들어 멋대로 숭배하려 한다. 만일 그들이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면 남성들은 자신이 산 굿즈들을 부숨으로서 분노를 표시한다. 이는 철저히 돈으로 여성을 사고 지배하려는 상업주의를 나타낸다.

 


페친의 프사가 에반게리온의 아스카다. 그 분이 현재 중1인 아는 덕후 한명이 있는데 프사 캐릭터가 누구냐는 질문을 받았다 한다.


나도 그와 비슷한 연령대에게서 헤븐즈필은 모르는데 페그오 난릉왕 최애라는 식의 얘기들도 꽤 자주 접했다. 아니 잠깐만 무슨 세대 차이가 이런식인가. '세대 차이라기엔 너무 말이 안되고, 덕질이라는 개념이 내 세대가 하던 그런 것 과는 상당히 다른 형태가 된 건가'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생각하고 알고있는 방식의 덕질이라면 저런 식의 편향적인 앎이 나올수가 없는데. 이야말로 자기가 보고 싶은 애니나 최근에 뜨고 있는 애니만 볼 뿐이지 애니메이션을 진정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지 않나. 이 때 책 한 구절이 생각난다. 자기애는 타자와 명확한 선을 긋는데 나르시스트는 그게 없다. 나르시스트는 애니를 감상하는 폭이 좁은 것이다.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하는 태도다. 책에서는 세상에는 나르시스트가 많고 그게 생성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불가항력 참 싫은 듯 ㅎㅎ

 


이 책에 의문을 제기하고 싶은 게 한 가지 있는데, 왜 내가 희생을 해야 하느냐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서 남자친구가 알고보니 굉장히 전형적인 한국남자의 가부장적 사상을 지니고 있었다. 그럼 나는 죽어서 그 집 귀신이 될 각오를 하고 사랑해야 하나?


그리고 프리랜서는 일단 근로복지부터 보장받지 못한다. 그게 생각보다 굉장히 치명적이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는 일은 프리랜서가 되지 않음 해내기가 불가능하다. 그럼 죽을 마음으로 사랑하는 내 일에 목숨을 쏟아부어야 하나? 그리고 이들은 안 그래도 잘 될 거라 자기 자신에게 최면을 걸고 일을 완수하려 하는데, 그런 이들에게 자기 강제의 죄를 짓고 있다고 까지 말할 수 있는가? 사랑은 진보적이며 건설적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난 생각한다. 생각해보면 자기를 비우는 건 옛날부터 전통적으로 사랑을 말할 때 따라붙는 의무같은 것이었다. 이젠 좀 진부하지 않을까? 대체 그 '죽음을 각오한 사랑' 속에서 창조된 게 무엇인가? 사랑을 재발명하려는 투쟁 모두가 신자유주의를 무너뜨리는 데에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 같다.

 

에로스는 우울증을 제압한다. 사랑과 우울증의 긴장 관계는 멜랑콜리아의 영화 담론을 처음부터 규정한다. 영화의 음악적 틀을 제공하는 트리스탄과 이졸데 서곡은 사랑의 힘을 강하게 환기한다. 우울증은 사랑의 불가능성을 의미한다. 또는 불가능한 사랑이 우울증을 낳는다.


좋아하는 감독이죠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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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Danganronpa 3: End Of Hope's Peak High - Future (단간론파)(한글무자막)(Blu-ray+DVD)
Funimation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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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는 광신적으로 하면 현실에 맞설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게임을 우습게 보는 인간은 게임으로 인해 망한다.
그런건 둘째치고 자신의 주변에 절망이 있다는 것도 모른 채 행동하는 무나카타야말로 꽉 막힌 사람이지. 그리고 '진짜' 절망이라는 건 대체 뭐란 말인가? 단 한 사람이라도 부조리한 이유로 죽는다면 그것이 절망이다. 단간론파3의 과거편에서 단간론파2의 팀들이 부장 한 명이 죽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모두가 절망이 되지 않았던가.

루루카와 세이코에 대한 잔영이 굉장히 오래 남는다. 세이코는 루루카를 도와주고, 루루카는 세이코에게 도움을 받는다. 그럼으로서 친구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뭐 결론만 말하자면 이런 관계는 좋지 않게 끝나는 경우가 많다. 사실 이게 초고교급 행운으로 인해 촉발되긴 했지만(...) 누구 하나 잘못했다고 꼬집어 말할 수 있는 게 없다. 둘다 말을 안하고 속으로 쌓아두는 성격인 것 같으니. 세이코는 가끔씩 감정에 한계가 올 때나 혹은 바쁠 때 루루카에 대한 도움을 거절함으로써 이용당한다는 느낌을 받지 않거나 최소한으로 줄였어야 했다. 그러나 루루카에게서 관심과 칭찬을 받기 위해 그렇게 하지 않았다. 루루카는 계속 도움을 받음으로써 자신이 세이코에게 쓸모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생각을 키우지 말았어야 했다. 그녀가 상당히 의존적인 성격이 된 책임은 세이코에게 있다. 사실 화장실도 같이 들어가는 게 여자들의 우정인지라, 이런 경우가 제법 흔하다. 대부분은 내가 세이코인 경우가 많았으나, 드물게 어떤 경우엔 루루카일 경우도 있었다. 근데 난 이 관계가 교훈적으로 해소되진 않더라도 허심탄회하게 끝나는 걸 보고 싶었어(...) 마구 죽인다고 해서 그게 절망인 건 아니지 않나. 물론 루루카에게는 그것이 절망이 되었지만. 세이코는 정말 아무것도 모른 채 깔끔히 죽었고, 그래서 상대적으로 생각할 시간을 갖게 된 루루카보단 편했을 것이다. 그 정도로 중고등학교 시절 여성들의 친구관계는 그녀들의 인생에 강력한 영향을 끼친다. 나도 저 시절에 친구에게 잘못한 일은 생각나기도 하고. 30년 살다보니, 오래 산다는 건 그런 죄책감에서 생겨난 독을 다 품는 것 같다. 그게 날 좀먹을 수도 있고, 그냥 마음속에서 다른 감정과 같이 공존하며 살 수도 있고. 왠만하면 용서하고 감사하고 사과하면서 어떻게든 관계 회복하고 사는 게 좋다. 정 싫으면 시간이 지나면서 천천히 멀어지게 하고. 근데 그런 건 너무 늦게 깨닫게 되는 것 같다.

무나카타는 나에기가 게임 속에서 살아났다고 집요하게 까댄다. 근데 그 게임때문에 동료에게 배신당했다는 걸 아는 순간 왜 살인귀가 되는지 의문 ㅋㅋ 문제는 이거다. 나무위키에서는 게임에서 생존한 게 나에기 단점이라는데 그게 왜 나에기의 단점이냐는 거 ㅋㅋㅋㅋ 내가 보기에 중요한 건 나에기가 시간이 지날수록 동료들만을 챙기려 한다는 점이다.

 

 안도 루루카는 배신이라곤 하지만 생존을 위해서 무엇이든 하는 인간적인 케이스라고 본다. 그런데 죽은 이후 사람들이 아예 그녀의 존재조차 싹 잊어버리는 듯하다. 심지어 나에기조차 처음 일어나면서 말한 게 '다행이야 아무도 안 죽었어!'인데, 일단 자기와 같이 있는 동료가 죽지 않았다는 뜻일 것이다. 그렇지만 제작진이 단간론파 제작진인 만큼(...) 시니컬한 구석이 있다고 여겨진다. 근데 난 진짜 궁금한게, 물론 희생하는 키리기리의 정신은 숭고하지만 서바이벌 상황에서 살려고 노력하는 건 인간의 기본적 본능이지 않나? 그게 어떤 점에서 잘못인지 모르겠다. 루루카의 의지가 그렇게 약해보이진 않았는데, 죽는 장면이 너무 갑작스러운 건 둘째치고 꼭 저렇게 죽였어야 했나 의문이 든다.
그러나 루루카가 미래편 중 제일 잔인하게 죽은 것도 마찬가지로 괜찮은 연출이었다 생각한다. 무나카타는 나에기 관련 인물들에게만 관심이 많으니 그녀는 결국 자기 자신을 벌한 것일텐데, 저렇게까지 죽으려 했다면 아마 키리기리에게 한 마디 들었기 때문에 충격이 심해서이겠지. 결국 주인공 둘이 연계해서 두 번 루루카를 죽인 셈이다(...) 저런 서바이벌 상에선 결국 멘탈이 강한 자가 살아남지만, 루루카를 통해 제작진들이 할 말을 제대로 전달한 게 아닌가 싶다. 개인적으론 젠부 픽ㅡ숀보다 훨씬 나았다. 물론 게임과 애니는 평가를 다르게 해야 하지만, 일단 스토리만 놓고 보자면 말이다.

 

 에반게리온 같은 오프닝도 그렇고 감정적인 장면에 시간 너무 잡아먹는다. 과거편에서 저 세 사람이 사이 좋았고 무나카타가 자신 관점에선 어쩔 수 없이 여친 희생한 건 충분히 이해가는데. 이럴거면 차라리 오버로드처럼 감정적 씬 다 잘라먹고 속전속결로 가는 게 나을텐데 원작이라서 그냥 편집도 안 하고 내보냈나(...) 그리고 모나카 급퇴장 대체 뭔가 싶다. 니트된 결말에 대해선 지극히 맘에 든다. 참 모나카답긴 한데 한편으로는 뭐야 병맛이 이걸로 끝이야?! 싶고. 8090년대 애니에서나 등장할 방귀라니.. 그리고 난 코마X모나 커플 머리에서 엮고 있었다고 제작진놈들아. 둘 좀 맺어줘 엉엉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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