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과 시작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선집 대산세계문학총서 62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지음, 최성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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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여인이여, 그대 이름은 무엇인가? ㅡ몰라요.
어디서 태어났으며, 어디 출신인가? ㅡ몰라요.
왜 땅굴을 팠지? ㅡ몰라요.
언제부터 여기에 숨어 있었나? ㅡ몰라요.
왜 내 약지를 물어뜯었느냐? ㅡ몰라요.
우리가 당신에게 절대로 해로운 짓을 하지 않으리라는 걸 아는가? ㅡ몰라요.
당신은 누구 편이지? ㅡ몰라요.
지금은 전쟁 중이므로 어느 편이든 선택해야만 한다. ㅡ몰라요.
당신의 마을은 아직 존재하는가? ㅡ몰라요.
이 아이들이 당신 아이들인가? ㅡ네, 맞아요.

 
   

 

 간단하게 시 하나 올리고 시작. 비슬라바 쉼... 발음하기도 힘든 이 분. 아무튼 비슬라바 씨는 폴란드 출신으로 상당히 현실적인 시를 많이 썼다고 한다. 전쟁의 참혹함과 노동문제와 페미니즘 뿐만 아니라, 인간이 어떻게 살면 되는지 언어과 글자를 어떤 식으로 보아야 하는지에 대해 철학적으로 고민한 흔적이 돋보인다. 자신의 일상을 소박하게 일기처럼 적어낸 시들도 꽤 있는데, 노동운동에 참여했다거나 병원에서 봉사활동을 했다는 기록들이 대부분이다. 전업시인의 삶을 살면서도 꽤나 열심히 일하시는가보다. 딱 내가 어렸을 때 소망했던 삶을 살고 계시는, 그런 사람이다. 1923년도에 태어났다고 하셨는데 아직도 살아계신다고 한다... 수명이 거의 촘스키와 동급이로군. 그녀는 당당하게 여류 시인으로서 노벨문학상을 탔다. 사실 매우 편파적인 노벨상에서는 꽤 이례적인 일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녀의 시가 단순히 현실의 어려움만 담아낸 게 아닌 탓이리라.

 위의 '베트남'에서도 보여지듯이, 그녀의 시는 읽을 수록 미묘한 분위기가 풍겨난다. 일단 굉장히 쉬운 듯해 보이는 무언가를 소재로 삼는다. 그러나 독자들은 시를 읽으면서 시에서 표현되는 장면이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하게 만들고, 그녀가 왜 이런 시를 썼는지 현실에서 무엇을 담아냈는지 고민하도록 만든다. 대중들이 자신의 생각을 시로서 알아볼 수 있도록, 쉽게 쓰려는 그녀의 의지는 곳곳에서 드러난다. 단점이 있다면, 그것 때문에 시 자체의 특성인 운율과 여유로움, 예술성을 충분히 담아낼 수 없었다는 점. 하지만 리얼리즘 혹은 실사구시를 중시하는 문학에서 이 정도면 상당히 고퀄리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베트남' 시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녀의 시를 읽기 위해 역사를 깊이 알 필요도 없으니, 시사시에 입문하고 싶으신 분들이라면 일단 이 책부터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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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오울프 (구) 문지 스펙트럼 11
작자 미상, 이동일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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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명한 사람은 이세상의 모든 재물이-지금 이세상 도처에서 벽이 바람에 부딪치고, 하얀 서리에 덮인 채 서 있으며, 집들이 폭풍우로 허물어지고 있는 것같이-황폐하게 되면 얼마나 끔찍하겠는가를 깨달아야 하느니라. - p. 339~340

 
   

  일단 책이 겉모양부터 누렇게 뜬 것이 매우 고전적인 맛이 있다. 오른쪽에 베오울프를 원문 그대로 올린 것도 신기하지만, 역자가 번역을 하면서도 (원문)란에 시를 문자 그대로 번역한 결과를 올려준 게 가장 흥미로웠다. 딱 하나 마이너스 요소가 있다면 시를 산문처럼 그냥 쭉 열거해서 올렸다는 것 정도? 게르만 신화 특유의 잔인성으로 인해 장면 곳곳에서 피가 많이 튀는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세상사를 대화체로서 제법 현실감있게 썼기 때문에 세련된 면이 있다. 예를 들자면 이 구절. 그런데 아무리 수도승이 필사했다고 하지만 걸핏하면 하느님 운운하는 구절은 좀 많이 불편하다. 분명 그 시절 게르만 민족들은 베오울프 이야기를 할 때 자기네 신들의 이름으로 기도했을 텐데.

 무엇보다도 이 놈들 영웅이라면서 왜 이렇게 돈을 밝히는지... 황금이 쌓여있는 용의 보물창고를 보고 죽겠다는 베오울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순간 정신이 아연해졌다. 자신이 죽은 이유가 자신의 백성 중 한 사람이 저 금을 탐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 책에서는 베오울프가 죽은 이후 상황이 많이 안 좋아졌음을 '방랑자' 등의 시를 붙임으로서 표현하고 있다. 앞에서 한창 잘나가는 용사의 이야기를 읽고 난 후에 이 <방랑자>라는 시를 읽으니, 허무함과 씁쓸함이 더 고조되는 것 같다. 방패와 투구의 장식에서 드러나는 애니미즘이라던가, 소소한 데에서 게르만의 전통적인 풍습을 볼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그리고 괴물보다 무서운 것이 사람이라는 교훈을 여기서 다시 한 번 되새겼다.

 베오울프와 관련된 책으로는 <그란델>이라는 이름의 심리적 소설과 동일한 제목의 소설이 또 한 권 있는데, 원본을 읽었으니 다른 책들도 좀 더 읽기가 쉬워지리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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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추구 - 소란한 삶에 찾아온 의미 있는 변화
조지 프로흐니크 지음, 안기순 옮김 / 고즈윈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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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라는 소리를 계속 들으면 언젠가 큰 소리로 으르렁거리며 대들지 모른다. 이와 마찬가지로 상대방을 비범한 사람으로, 더 고귀하고 풍부한 본성을 지닌 사람으로 대우하면 자발적으로 침묵을 지킬 사람이 많아질 것이다. 레싱의 주장은, 현대 문화에서 침묵이 부족한 이유가 교육의 붕괴 때문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p. 316  
   

 '옆집에서 소음이 나면 이어폰을 꽃고 시끄러운 음악을 최대치로 틀어놓고 잠든다'라는 사상을 가진 나에게 색다른 견해와 느낌을 가져다 준 책이었기 때문이다. 조용한 곳에서 읽으면 더욱 인상이 깊어질 책이라고 미리 말해두어야겠다. 이 책의 저자는 완전한 침묵을 추구하기보다는, 현대 시대의 클럽 음악들과 기계소리에 파묻히는 소리를 찾고 싶어한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침묵보다는 소리에 대해 더 많이 다루고 있다. 전체적으로 좋은 책이었지만, 큰 소리를 내거나 욕이 섞인 꾸중과 체벌이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고려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조금 남는다. '개 같다는 소리를 들으면 인간마저 개가 된다.' 라는 은연 중의 메세지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생각해봐야겠다.
 그러고보니 알고 지내는 사람 한 분이 옆에 붙어있는 공장의 극심한 소음때문에 고통받고 계셨다. 나중에 만나게 되면 그 분께 이 책을 선물해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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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수 애장판 1~8 박스 세트 (완결)
이와아키 히토시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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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이치... 악마라는 단어를 책에서 찾아봤는데... 가장 그것에 가까운 생물은 역시 인간으로 판명된다. 인간은 거의 모든 종류의 생물을 잡아먹지만, 내 동족들이 먹는 것은 고작 한두종류야... 훨씬 간소하지.- <기생수 1>  
   

 막판에서는 신이치가 이 말을 다시 뒤집는 행동을 하면서, 인간답게 돌아간다. 지금까지 봤던 만화책 중에서 바람의 검심 다음으로 훌륭한 엔딩이었다. (그 반전 외에 또 다른 반전도 있지만 스포일러이므로 생략. 오른쪽이가 신이 되려고 한다는 사실 하나만 밝혀두겠다. 역시 공부하는 천재는 당해낼 수가 없음.) 사실 오른쪽이처럼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음. 인간이 다른 인간을 생각하는 것조차 힘든데, 세상을 지킬 겨를이 있는가? 바람의 검심 1권에서 켄신이 말한 대로, 소중한 사람 하나 지키기에도 벅찰 노릇인데. 그런 점에서 나는 신이치의 선택이 탁월했다고 본다. 그는 지구를 지키기 위해서 싸우는 용사가 아니라, 그저 가족들의 원수를 갚기 위해, 사랑하는 여자를 지키기 위해 오른손의 괴물과 계약을 맺고 싸우는 고등학생일 뿐이었다.
 사실 전투장면도 SF장르답고 꽤나 임펙트했지만 오른쪽이와 신이치 사이의 미묘한 우정관계와 대화에 관심을 좀 더 집중했다. 작가는 대체 어떤 마음의 자세를 갖추고 이 글을 썼을까? 오른손에 또 다른 생명체를 그리고, 자신에게 철학적인 질문들을 던져보며 오래 곱씹지 않았을까? 더불어 인간이 환경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 매우 독특한 견해을 갖추고 있다. 최근 환경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유심히 보아야 할 책이다. 기생수가 인간과 섞여서 지내는 장면이 약간 껄끄럽고 찝찝해보일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살아가기 위해서라면 모든 생물들이 같이 공생해야 하지 않겠는가?

 일본 정치를 포함하여 지구를 지킬 줄 모르는 인간사회에 대해 매우 냉소적인 시선을 던지고 있는 점이 흥미로웠다. 결국 긍정적으로 전개되나, 싶다가도 날카로운 풍자로 독자들을 콕콕 찌른다. 인간의 몸으로 낳은 아기를 지키다가 죽은 기생수, 기생수보다 더 끔찍하게 인간들을 죽이는 인간. 인간답다는 건 무슨 뜻이고 괴물답다는 뜻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인간답다는 개념은 존재한다. 굳이 신이치의 여자친구가 제시한 개념으로 축소시킬 수는 없는 것 같지만. 인간같은 기생수가 있고 기생수같은 인간이 있다. '나는 누구인가,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우리 인류의 영원한 숙제인 듯하다.
 

 P.S (SF 캐릭터들을 수집하고 있는) 남자들에게 질문. 당신의 팔에 기생할 생물을 고른다면, SF 괴물을 고르겠습니까, 아니면 초미소녀를 고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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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로 읽는 여성성 She - 동연총서 208
로버트 A. 존슨 지음, 고혜경 옮김 / 동연출판사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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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혼의 시작은 대게 사랑에 빠지는 것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바라건데 사랑하는 것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p. 73  
   

  내가 존경하는 어떤 분이 책을 빌려주셨다. 그런데, 그 분께 미안하지만 이 책에 주는 점수는 낮다. 일단 가장 마음에 안 드는 점은 가끔씩 나오는 저자의 망언이다. 일단 자신이 여자의 양면성을 다루고 있으면서, 그리스에서는 성모에 견주어지는 아프로디테의 우아한 면모에 대해선 아예 언급을 하지 않는다. 마치 그녀를 수다스럽고 뻔뻔한 아줌마처럼 묘사하는 것이다. 게다가 서양 사람들에게 동양적인 종교는 맞지 않는다니 그런 말도 안되는 이야기가 세상 어느 천지에 있단 말인가! 그럼 반대로 동양 사람들에게 서양적인 종교는 맞지 않는다는 이야기인가? 게다가 어디서 어줍잖은 동양신화의 껍데기만 줏어듣고 멋대로 변형시켜 책에 실어놓는지. 솔직히 누군가가 빌려준 책은 아무리 재미없어도 끝까지 읽는다는 내 신조만 아니라면, 당장에 덮었을 책이다.

 그렇다고 전반적인 내용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저자는 프쉬케 이야기를 중심으로 여성성(혹은 아니마)을 설명하고 있다. 역시 어려운 단어가 나왔다고 외면하지는 마시길. 좀 심하게 과장된 듯하지만 아무튼 프쉬케 이야기는 이미 책에서 실려 있고, 구스타프 융이라는 이름을 한 번이라도 들어본 적이 있다면 아주 쉽게 읽을 수 있다. 얇은 책 만큼이나 가볍게 보고 넘길 수 있는 책이다. 신화가 진행되는 단계마다 누구나 알아듣기 쉬운 설명을 제공한다. 융 심리학 이론을 채택한 듯 하지만, '아니마'와 '아니무스'라는 개념에 살짝 발만 담그고 있다. 두껍고 상세한 심리학 책은 읽기 싫은데, 여성성을 알고 싶어서 책을 찾는 사람이 있다면 일단 이 책을 추천하고 싶기는 하다. 특히 여성이 남성에게 어떤 중요한 일을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들어있던 점에선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카린 블렉센이 여성은 남자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소리를 했다고 했는데, 생각해보니 프쉬케 이야기도 비슷한 장면이 등장하더라. 남성들은 여성의 존재만으로 누구나 에로스가 될 수 있고, 여성들도 매우 힘들지만 일단 조이와 엑스터시를 느끼는 프쉬케가 될 수 있다. 나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넘어서, 내 스스로 한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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