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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제1009호 2014.05.05
한겨레21 편집부 엮음 / 한겨레신문사(잡지)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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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에겐 학교라는 세계가 거의 전부인데, 단원고 비극은 같은 세계 다른 공간에서 일어난 것이라 주변 사람들이 심적으로 더 흔들리는 것 같아요.- p. 27

 

 순천 팔마고 고승효 씨가 한 말이라고 한다. 이 분이 '책임을 다하는 어른이 되고 싶다'라고 말한 것도 인상깊었다. 독후감대회나 논술대회에서 많은 수상을 하고 있는 중인 것 같은데 지켜보고 있다는 말을 하고 싶고, 인간에 신물이 나 도시를 떠나 평범하게 살고 있는 나와는 또 다른 삶을 살라고 이야기해주고 싶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집회에도 참가해보고, 독서모임도 해보고, 무엇보다 행복하게 살라고 말해주고 싶다. 한겨레21에서는 부모보다는 참사 희생자들의 또래인 10대 학생들의 입장에서 취재하고 있다. 의미심장할 정도로 간단한 표지도 그렇지만, 한겨레21이 우여곡절을 겪은 이후 여러모로 괜찮은 언론으로 성장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오빠가 나중에 우리가 같이 한 집에서 살면 꼭 한겨레21을 구독했음 좋겠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번 세월호 특집호를 보니 이해가 간다.

 한겨레21은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원인으로 크게 4가지를 짚고 있다.

 어른들의 탐욕, 속도만 중요시한 언론들의 거짓말들로 인해 일어난 사람들의 불신, 누군가는 분명 '내 탓이오'라고 주장하고 됫박차야 하는데 끝까지 십자가를 지지 않겠다는 치사한 정부, 그러다보니 평소 병든 마음을 치료하지 못하고 있다가 돌연 PTSD에 빠져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는 사람들.

 이에 대해서 한겨레는 냉정하게 주장한다.



수학여행가다 수장된 학생들을 그렇게 걱정하고 세월호에 대한 반발로 수학여행을 폐지하자 주장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눈앞의 원자력 발전소는 괜찮다고 생각하는가?

우리나라가 후쿠시마처럼 되면 정부가 얼마나 무능해질지 아직도 파악이 안 되냐? 눈을 떠라 좀.


김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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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제345호 2014.04.26
시사IN 편집부 엮음 / 참언론(잡지)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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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닌 게 아니라 속내가 복잡한 건 새정연이다. 자칫 세월호 침몰 참사를 정치적으로 엮으려 하다가는 역풍을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새정연 쪽에서 참사 이튿날부터 '입단속'에 나선 것은 그런 염려 때문이다. 그렇다고 계속 닥치고 '좋은 말씀'만 하는 것도 책임 있는 정치 세력의 태도는 아니다.- p. 29

 


 


나라가 이 정도로 파국이 났으면 이제 서민들을 좀 생각해줘야 할 때가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5일인가 6일 전에 새정연은 새누리당 절충안과 함께 애초 당론을 담았던 법안을 수정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시사in은, 우리는 뭘 기대한 걸까.

이런 거 보면 4대연금이고 뭐고 다 때려치고 싶은데 정직원이라 선택권이 없다.

퇴화시킬 거면 적어도 안 낼 수 있게 해줘... 돈 아까워... 


 이 때만 해도 시사in은 특집 기사를 준비중에 있었는지, 세월호 참사를 커버스토리로만 조용히 다룬 다음 평소처럼 여러가지 국제기사들을 실었다. 그러나 언제나 다른 언론과는 다른 기사를 준비하는 시사in답게, 세월호 참사를 다루는 언론인들과 종편의 행태를 집중적으로 조명한 흐름이 돋보였다. 그러나 기사 제목에서는 그런 흐름이 보이지 않도록 했다. 말을 아끼는 정치권으로 인해 문제가 더욱 커졌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세월호 참사와 사람들의 반응을 시간대별로 구성하여 깔끔하게 설명해 놓은 것, 학부모 한 명을 중심으로 하여 그들의 심정을 객관적으로 표현해 놓은 것도 볼만했다.

 다양성 영화 전용관에 대한 이야기도 재미있었다. 본인도 영화를 스크린으로 직접 보는 걸 선호하는 편인데, 가끔 우리나라의 큰 영화관에서 상영해주지 않는 영화들이 있어서 직접 보러 서울까지 올라가는 편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강릉에 독립극장 신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지금은 무리해서 서울에 올라가는 일 없이 신영을 찾아가고 있다. 그리 유명하지 않은지 시사in 기사에서도 나오지 않아서 안타까웠다. 현재 본인이 기부금을 내는 기관이 얼마나 되는지 조사하고 있는데, (최근 통장을 정리하다보니 상당히 많은 기관들이 발견되었다;;;) 그 조사가 끝나고 한바탕 걸러내고 나면, 그 극장에 기부회원이 되어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영화를 보러 갈 생각이다. (사실 나이가 드니 크고 북적북적한 영화관보다는 작고 조용한 데가 좋다...)


김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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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경향 2014.04.22 - 1072호
위클리경향 편집부 엮음 / 경향신문사(잡지)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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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경제연구소가 지난해 말 낸 '웨어러블의 미래, 패션에서 길을 찾아야' 보고서가 제시한 가설에 따르면 종전의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은 DOP(Display Only Product)라는 전형적인 '폼팩터'로 제작된 기기다. '직사각형의 디스플레이가 적용된 네모난 기기'라는 기본틀 아래 제조사나 제품군은 화면 비율이라든지 버튼의 위치 등을 두고 차이가 난다. 말하자면 경쟁의 룰이 이미 정해져 있는 제품이다. 하지만 웨어러블 기기는 다르다. 근본적으로 웨어러블은 틈새시장에 가깝다.- p. 20

 



이미 드래곤볼에서 나오는 정도의 기술 대부분은 실용화되고 있는 상태이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지금의 웨어러블 기기들이다.


 아마 위에 그림이 실용화된 것이 구글 글래스일 것이다. 하지만 구글 사장님이 계속 그 안경을 끼고 거리를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별반 인기를 끌지 못했다. 그리고 그에 무색할 정도로 스타일리쉬하고 가벼운 웨어러블 기기가 속속들이 등장하고 있다. 아마도 프로그래머를 꿈꾸는 거의 모든 사람들의 야망은 유비쿼터스에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이미 핸드폰에 있는 앱을 웨어러블 기기에 전송하는 것까지 가능하다고 한다. 이미 유비쿼터스 관련 백신사업까지 추진 중에 있다 하니, 창업을 하여 '새로운' 웨어러블 사업에 뛰어들기엔 이미 힘들지 않을까 싶다.

 이 기사에서도 지적하듯이 삼성이 문제다. 뭐 이전부터 삼성의 과대광고엔 이골이 났으니 심장박동을 체크해 준다는 그 기술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겠다. 분명 그 기술이 도움되는 사람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갤럭시노트 3와 갤럭시워치를 동시에 시장에 내놓았을 때, 얼리어댑터들은 여러가지로 실망이 많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애플과 속도로 경쟁하려는 생각은 좋았다. 덕분에 삼성을 의식한 애플이 웨어러블 기기를 출시하는데 상당히 지체하고 있으니 말이다. 전반적으로 볼 때 삼성의 웨어러블 기기는 그냥 삼성 핸드폰 기기의 부속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드는 게 큰일이다. 다른 웨어러블 기기들은 자유롭게 프로그램과 연계되어 쉽게 다운로드를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삼성은 '자사 제품을 더 많이 팔게 하기 위해 그랬다'라고 해명하는데, 마케팅 수단이라고 좋게 말할 수도 없고 소비자들에게는 답답한 기분과 불쾌감마저 든다. 이제 점점 세계의 기업과 대결할 날이 가까워오는데 이런 회사에서 최소 외국 대기업만큼의 창의성을 바랄 수 있을까 싶다.


 

김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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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 말씀의이삭 1
최인호 / 샘터사 / 199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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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죽음이 우리들에게는 멸망이요 작별이며 떠돌며 우는 슬픈 일이지만 주님에게 있어서 죽음은 부활이며 영원한 만남이며 다만 잠을 자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 주님에게 있어 죽음은 다만 영적으로 '죽은 자'를 말할 뿐입니다.- p. 299

 


 


역시 난 오덕이라 이 책 제목을 보면 성경보다는 천원돌파 그렌라간이 생각난다 ㅋㅋㅋ


 딴 길로 새나가는 것 같지만 이 썰은 꼭 풀어나가야겠다. 문학작품에서도 돌연 성경에서 인용한 구절이 튀어나오는 것처럼 애니메이션에도 성경구절이 문득 튀어나올 때가 있다.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종교가 뭔지를 떠나 불교 경전이나 성경이나 베다를 읽은 적이 없다면 그건 그냥 헛껍데기에 다름이 없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일 것이다. (이런 걸 보고 잉여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는 구절이 그렇다. 사실 전체 문장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렇다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이다. 이는 예수가 제자들에게 던진 질문으로서 첫번째 질문엔 여러가지 답변이 있었지만, 두번째 질문엔 단 한가지 대답뿐이다. "스승님께서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정신적 지주인 카미나 형이 세상을 바꿀 혁명을 이루려다 죽자 이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인 시몬은 큰 좌절과 실망을 겪지만 결국 자아를 찾고, 형이 이루려는 혁명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이 생각하는 혁명을 이루려 결심한다. 이 대사는 사람들에게 많은 감동을 줬지만 정작 이 대사가 성경에서 나왔음을 아는 사람들은 몇이나 될까?

 


발브레이브의 신부설도 마찬가지로 성서에서 나온 것이다.

본인도 BL인지 잠시 헷갈렸으나 나중에 영생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고 성경을 인용한 것임을 알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것은 예수가 아니라 세례자 요한의 말이다. 예수의 제자들이 세례자 요한이 살아있을 적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기 때문에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 사이에 미묘한 경쟁이 붙었던 적이 있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스승에게 예수의 행위를 고자질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예수님이 하느님을 신랑으로, 신자들을 신부로 비유한 구절도 여럿 있기는 하다. 그러나 카인이 프루를 숭배하듯이 다루는 것을 보건대 절대 프루를 자신의 종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세례자 요한의 말을 인용한 게 틀림없다.

 이 책은 신약성서 중 유명한 글귀들, 특히 4개의 복음 중 가장 어렵다는 요한복음을 가장 많이 해설해놓은 책이다. 성경구절을 적어놓고 옆에 관련있는 그림을 달아놓은 뒤, 다음 장에 소설가 최인호의 해설이 적혀있는 식이다. 에반게리온에서도 그랬지만 최근에도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의 대사 중 성경의 구절을 상황에 맞게 적절히 달아놓는 게 트렌드인 것 같다. 서브컬쳐를 보는 사람들도 고전이나 경전을 한 번쯤 눈여겨보시길 바란다. 재미가 두 배가 된다.

 

김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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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 - 전혜린 에세이 2
전혜린 지음 / 민서출판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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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진리. '나는 해야만 한다'는 것.......그것에 의해 살고, 그것에 의해 나의 생과 정신을 분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고 싶다'가 아니라 '...... 해야만 한다'가 이것을 할 것인가, 저것을 할 것인가를 나에게 결정해 줘야 한다.
자기 훈련, 목적 의식, 겸손하고 자기의 환경을 의식한 일에 대한 인내, 인생에 다르게 마련인 가지가지 불쾌감에 대한 관용.......
행복이란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의해 주어지지 않는, 그것을 얻기 위해 우리가 밤낮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충만하고 완벽한 순간에 근거를 두고 있다.
자신으로의 복귀한 당위적 자아로의 복귀, 진정한 자아로의 복귀, 본질에로의, 근원에로의 복귀를 의미한다. - p. 80

 


 


오늘 3시간 잤고 부들부들 떨다가 진짜 리뷰쓰는 거 포기할까 생각하다 간신히 글 올린다.

'4월은 잔인한 달'이라더니 이젠 정말 진지해져서 그 말 꺼내다간 돌 맞을 시기다.

4.19 새벽에 세월호 유가족들이 시위하시고 계시고 4월 20일 지금은 부활절에 경찰들과 대치중이다.

그리고 난 이 책을 봤다.


 어느 언론이 '시신 수습 성공'이라는 단어를 올려서 맘에 걸린다. 욕하기 전에 검색이라도 해보자 싶어서 '시신을 수습하다'와 '시신 수습에 성공하다'라는 문장을 동시에 구글에 검색해보았다. '시신을 수습하다'라는 검색어엔 그나마 얌전한 기사들이 나온다. 그러나 '시신 수습에 성공하다'라는 문장을 검색하니 갑자기 '호박죽 만들기에 성공하다'같은 기사가 떠서 본인을 멘붕에 빠뜨렸다.

 


 그렇다. 분명히 어감이 다르다.

 '성공을 거두다'라는 말은 분명히 있다.

 우리나라는 종교를 믿는 국가니 종교적으로 설명하자면,

 '주님의 시신을 거두다'같은 말은 할 수 있지만, '주님의 시신을 거두기에 성공하다' 같은 말을 할 수 있는가?

 아마 그 땐 수습이라는 말도 꺼내지 못할 것이다.


 이 책을 분명 자살한 사람의 감상적인 독백이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녀는 분명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으며 지식인이 되고 싶은 여성으로서 최고로 부러운 교육들을 받았다. 한국에 와서도 독일어 교수로 채용되어 명문대를 전진하고 다니고 수많은 지식인들과 더불어 많은 활동을 했다. 아마 자기계발서 같은 걸 읽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여성의 인생이 '성공'한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그녀가 자서전이 아닌 비밀스런 일기를 쓰고, 31살이란 젊은 나이에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죽었다는 사실에 고개를 갸웃할 것이다.

 그러나 요컨대 너무 큰 '성공'을 했다는 게 문제이다. 영혼과 지식이 너무나 풍부했던 그 여자는 겸손했고 자신이 좀 더 성숙해지길 바랬다. 우회해서 발언했지만 박정희식 정치의 맹점에 대해서도 상당히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먹고 살기에 바쁜 사람들이 너무 많았고, 지붕수리한다고 망치를 땅땅 치느라 옆에 있는 사람의 말은 잘 들리지 않는 '불통의 시대'였다. 사회적 동물은 소통과 공감을 못하면 정신이 고파서 죽는다. 그 유명한 예수님도 총 12명의 제자를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소통을 하지 못하여 그 감정을 '목이 마르다'라고 표현했다. 신체상으로 볼 때 물은 3일 이상 안 마시면 죽는다.

 그녀는 '그의 의식에 비친 내 의식에 구토를 느꼈다'라는 단 한 구절을 썼다. 이게 1964년 12월 8일날 쓰여졌고 그녀는 1965년 1월 10일에 자살했다.

 더 늦기 전에 내 모습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겐 어떻게 비치는지를 돌아보라. 그리고 그들과 자신의 모습에 대해 대화를 나눠라. 아직 맨 정신이 유지되고 있을 때 실행하는 게 좋을 것이다.

 어차피 우리가 원해서 선택한 부모도, 나라도 아니다. 애초에 세상에 나오고 싶었는지는 우리 영혼에게 물어봐도 대답할 수 없을 테니. 그 질문을 할 만큼 머리가 무르익었다면 영혼은 속세에 찌든지 오래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시신 수습에 성공'이라는 단어를 봐도 분노할 기운이 없을 만큼 무기력해지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산 자들이 행복해지려면, 가끔은 이렇게 영혼을 갈고 닦아주는 책을 읽으면서 순간순간에 일어나는 각성과 근원적 자아로의 복귀에 만족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근원적 자아로부터 다시 현실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에 올 때, 우리는 그것과 기꺼이 헤어지며 또 만날 순간을 즐겁게 기다려야 한다.


김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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