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시선 298
김기택 지음 / 창비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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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바이와 개

오토바이에 달린 개줄에 끌리어
개 한 마리
오토바이 따라 달려간다.
두 바퀴와 네 다리가 조금이라도 엇갈리면
개줄은 가차없이 팽팽해지고
그때마다 개다리는 바퀴처럼 땅에 붙어서 간다.
속도가 늘어나도 바퀴는 언제나 한 가지
둥근 모양인데
개다리는 네 개에서 여덟, 열여섯.....
활짝 펼쳐지는 부챗살처럼 늘어진다.
사정없이 목을 잡아당기는 개줄에 저항하면
네 다리는 갑자기 하나가 되어
스파크를 일으키며 아스팔트에 끌린다.
아무리 달려도 서 있을 때처럼 조용한 바퀴 옆에서
심장과 허파를 다해 헐떡거리는 다리.
오토바이 굉음소리에 빨려들어가는 헐떡거림.
아무리 있는 힘을 다해 종종거려도
도저히 둥글어지지 않는 네 개의 막대기.
느슨해지자마자 팽팽해지는 개줄.


 

 

이런 사건이 실제로 있었는데 시인이 시로 적은 것 같다. 

 

부챗살처럼 펼쳐지는 다리에서 전율했다. 글을 잘 쓰면 사진보다도 훨씬 더 그로테스크할 수 있음을 잘 보여주는 시 같다. 실제로 이 시집 중에서 가장 잔인하고 말이다. 고양이는 로드킬로 한방에 죽기라도 했지 저 개는 서서히 죽어가는 게 아닌가. 실제로 치인 것도 아니고 자리에서 도망가려다가 자동차 바퀴에 서서히 깔려 납작해진 강아지를 본 적도 있고, 내가 키우는 반려견도 에스컬레이터에 끼어 발가락을 잃은지라 기분이 묘하다. 그 사건을 사진으로 봤을 때보다 더욱 많은 생각이 들고 말이다. 왠지 이게 우리 인생같지 않은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직업으로밖에 보지 않는데, 인공지능들이 인간의 직업을 대신하고 있고. 사람들은 인공지능을 미워하면서도 결국은 그들의 속도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결국 질질 끌려가게 되고 발은 살집이 통째로 떨어져 나가고 무릎뼈는 아작이 나고. 그런데 나를 지켜보는 사람들은 더더욱 노력하라네. 병원에 입원할 때까지.

근데 글을 읽으면서 현대인의 삶에 감정을 이입해야할지 부서져 가는 개에게 감정을 이입해야할지 모르겠다. 현대인도 개도 둘다 부서져가는 아포칼립스의 저녁놀을 보면서 마지막 팝콘 한 조각을 입안에 넣을지 말지 고민하는 기분. (캐이오스...)

 

 

 

설날에 아파트 계단을 올라간다. 

 

1층, 2층, 3층, 4층...
층마다 다른 음식의 냄새가 난다.
어쩌다 차례를 마치고 이 집에 가려는 사람들이 나오면 그들의 입에서 장전이라도 되어있던 듯 음식 냄새가 쏘아진다.
그래도 제법 풍요로운 오늘날 음식은 넘쳐나고 썩어난다.
옛날 옛적엔 먹을 것이 없었다고 어른들은 종종 이야기한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나라의 그로테스크 장르(라기보단 희극에서도 많이 발견되는데)에서는 유독 사람을 먹을 것에 비유한다.
춘향전에선 정절을 지키려다 시기질투를 받아 팔다리가 잘린 어느 중국의 여성을 만두로 표현한다.
콩쥐팥쥐에서는 심술궂은 팥쥐를 젓갈에 담가 먹는다.
배고프다 보니 사람이 고깃덩이로 보일 수도 있겠으나, 어찌보면 비이성적인 탐욕의 비참한 말로로 볼 수도 있겠다. 일단 탐욕이라 할 때 우리가 1차원적으로 가장 먼저 연상할 수 있는 증상은 비만이다. 그렇지만 과연 그 비만은 우리가 사는 동안 잔뜩 먹고 죽겠다고 우리들 스스로가 선택해서 생긴 것일까. 비만은 시스템이 되었다.

 

 

 

웰빙 시스템도 비만 시스템과 오십보백보로 다르지 않다. 

 

육체적인 건강만 챙기면 뭐하는가. 머릿속에 지식만 채우면 뭐하는가. 약자에게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고 인격이 파탄되고 영혼이 병든 어른들 때문에 아이들은 안 그래도 힘든데 더욱더 힘들어진다. 어른들의 말에 상처받는 것이다. 오히려 지금은 아이들에게 정신적인 건강까지 챙기라 추구하는 시대가 아닌가 생각이 든다. 딸이 남자 어른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나서야 뒤늦게 분노하여 죽이겠네 마네 설치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아버지들이 그러는 경우가 많은데, 미안하지만 그런 사람들을 딸들은 더 싫어한다. 되려 역효과가 나는 경우도 많고, 무엇보다 피해자의 의사를 전혀 존중해주지 않는 기색이다. 보통 사람들은 정의의 기사 행색을 하고 싶게 마련이다. 문인이나 교수들일수록 더욱 그런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시집에서 시인은 되려 자신을 가해자의 입장에 세운다. 가해자의 생각으로 현실을 파헤치고 있다. 가식을 떨지 않는 그 점이 마음에 든다. 현대 사회 특유의 오버액션과 과잉의 행패는 이 메시지는 본인은 죽었으므로 우편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에서도 사회의 병폐는 명백히 드러난다. 이것도 요즘 실감하기 시작한 건데, 진짜 살면서 우리나라는 공부하라는 거 무지 많다; 이게 나중엔 학원기업으로 나아가면서 광고와 홍보물로 전락하지 않을까 싶다. 엄청난 분량의 프린트물들을 다 출력해 놓으면서도 '이거 다 풀었는데도 시험에서 떨어진 사람 있겠지' 이렇게 생각하면 오싹 소름이 돋는다.

 

 

 

버클리에서 2라는 시를 보고 문득 JTBC의 스포트라이트 중 한 프로그램이 생각났다. 

 

일가족을 살해했다는 사람이 있다는 주제에는 별로 흥미가 없었지만 장소가 용인이었다. 좋은 사람들 2명 허세부리던 사람 1명 거짓말을 밥먹듯 했다 마지막에 진심이 담긴 말을 했던 사람 1명과 같이 그 프로그램에 나왔던 어느 한 건물을 걷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를 사랑하면서도 유달리 미워해서 카톡방마저 따로 팠던 이상한 사람. 아마도 첫 만남이었다. 상당히 충격적인 사건이던데, 그 분은 휘말려들지 않고 잘 지내고 계실까. 솔직히 그 분은 걱정되지 않더라도 허언을 했던 마지막 한명이 마음에 걸린다. 허언하는 사람들 살면서 꼭 있더라. 대학에 합격했다고 하면서 MT만 참석한다던가. 자신이 얼마의 유산을 받을 거라던가. 새 삶을 살겠다는 엄마를 죽이겠다고 밥먹듯 욕한 걸 보면 엄연히 정신병인데 이런 사람들이 있음 꼭 정신병원에 들렀음 좋겠다. 돈 빼낸 액수보면 그냥 감방에서 썩기 전에 호화는 다 부려보자 생각했던 것 같은데 망상이 있던 게 아니었을까. 밖에 있던 의붓아버지를 굳이 찾아내서 죽인 걸 보면 원한도 엿보인다. 남자들은 자신의 여동생도 어머니도 부하직원도 그냥 주변에 있는 모든 여자들을 제 소유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 그냥 소유욕에서 그치면 괜찮았는데 거짓말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켜서 사기 재판까지 가니 그게 견딜 수 없었으리라 생각된다. 허언이나 독한 말을 하는 사람은 피하는 게 상책이더라. 솔직히 남자들은 다 그렇다던데, 제대로 신고해서 제대로 심판받고 벌금형 받거나 감방에서 썩으면 그럴 생각을 할까? 물론 여자들이 그렇게 허언하는 경우도 있고.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 중에서

취한 시간에만 보이는 그곳
취한 시간에만 나오는 그 말을
그러나 술이 깬 그는 결코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보지는 않았지만 유명한 영화제목이라고 한다.
나는 솔직히 이 글 읽으면서 성석제 단편소설 생각이 들더라. 그것도 이 영화 참고하고 쓴 거라면 한 번 보고 싶단 생각은 드네. 이것 말고도 영화를 참고한 시가 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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