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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본받아 - 토마스 아 켐피스의
토마스 아 켐피스 지음, 박동순 옮김 / 두란노 / 2010년 9월
평점 :
여기서 종교가 좋고 나쁘고 하는 이야기는 가급적 삼가려고 한다. 그러나 당장 1시간 뒤에 수업을 들으러 가야하기 때문에 그 약속을 잘 지킬 수 있을지는 미지수... 이분법으로 하기 참 까다로운 이야기인 것을 알지만 가톨릭교의 부정부패 역사를 꼬집으며 분연히 일어난 루터의 용기덕분에 교회가 세워졌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흘러, 우리나라엔 현재 참으로 많은 종류의(가톨릭 교구의 수를 뛰어넘으리라 짐작되는) 교회가 있다. 그들의 의견도 천양지차라서 아마 그 모든 의견들을 통합하려면 수억년이 걸려도 해결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무신론자들은 그들을 접하면서 대체 어느 이론이 진실에 가까운지, 대체 하느님과 예수님이 누구인지 혼란스러워하리라. 그 혼란 속에서 그리스도를 본받으라는 이 저서는 많은 깨달음을 준다.
물론 시대에 맞지 않는 이론들도 있지만 매우 오래 전에 쓰여진 책이니 이해하길 바란다. 굳이 토마스 아 켐피스만 아니라 중세시대 수많은 지식인들은 대중들이 책을 읽어선 안 된다며 주장했다. 그런 시대다. 더군다나 머리를 깎고 수도 중인 수도승들의 책인데 오죽하겠는가. 그들은 몇 달 몇 년에 걸쳐 침묵훈련을 받으며, 철심이 박힌 옷을 입는 등 육체의 고통을 자발적으로 실천하는 분들이다. 그러나 이 책은 일반 사람들에게도 많은 교훈을 시사한다. 무엇보다 이 책이 인기를 끄는 이유는 예수를 본받으라는 범상치 않은 핵심주제 때문이다.
설령 그리스도가 인간이라 하더라도 그는 분명 우리 같은 인간과는 차원이 다른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죽지 않으려는 본성이 있으며 심지어 자살하는 사람들마저 그 장애물에서 벗어나려 엄청난 노력을 한다. 그러나 그 분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며 십자가에 매달리기를 택했다. 그는 유달리 체포되기 직전에 자주 하느님께 기도하고, 원망했다. 그러나 그가 구하려는 사람들이 유태인들이었던 인류였던간에, 아무튼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그는 체포되기 직전까지 스스로도 확신치 못했던 구원을 위해 자신의 몸을 던졌다. 그 사랑이 수많은 세월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준 것만은 분명하다. 첫째로, '천국에 가지 못하는' 기득권층에게 저항하는 법을 새롭게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직접 나서서 성전을 뒤엎었다. 분명 그 시대에도 극단적인 유태인 혁명 단체가 있었지만 예수님은 그 분들의 도움을 평생 받지 않았다. 어찌보면 간디보다 더 철저한 비폭력자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 사실에 대해서 더 자세히 참고하려면 김규항이 쓴 '예수전'이라는 책을 보시길 추천한다. 둘째로, 만일 그리스도가 '자신의 몸을' 바치지 않았더라면 가톨릭교는 아직도 제사를 위해 양을 바쳐야 할지도 모른다! 한국에까지 들어오지 못할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물론 순화시키긴 했지만 이 책에서도 분명히 쓰여져 있는 내용이다. 그의 영광과 리더십과 카리스마는 이 외에도 수없이 많지만 이 두가지 이유들만으로도 그를 숭배하지 않고 '본받는' 일은 대단히 어렵게 느껴진다.
이 책에서는 그리스도를 그야말로 열렬히 찬양한다. 두번째 장에서 등장하는 예수와 제자의 대담 방식에선 더욱 심화된다. 예수님도 이야기하고 있지만, 자신은 그 논리를 찬미하는 제자가 되면서도 은근슬쩍 말씀을 풀이하고 예수님을 마음 속에 받아들이는 법을 가르치는 숭배자가 되기도 한다. 또한 제일 마지막에는 성체에 대해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비록 토마스 아 캠피스는 옛날 시대의 사람이라 그 단어를 제대로 표현할 줄 몰랐겠지만, 우리는 그 성체가 맡은 역할을 오늘날 비전이라 부른다. 이 책을 읽는 많은 사람들도 그 단어를 파악할 수 있었으리라 짐작해본다. 요즘 그리스도의 리더십이라던가, 정치관에 대한 많은 책들이 출판되고 있다. 그러나 본인은 실용서를 읽기 전 고전부터 파악하는 게 순서라고 생각한다. 신자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들이 보기에도 손색없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