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오이디푸스사회의 군중

“월드컵문화” 담론의 자유주의와 그 한계

월드컵 문화와 군중

월드컵이 끝났다. 한국 대표팀의 16강 진출이 좌절된 후에 사실 한국 사회에서 월드컵은 끝난 것이었다. 최종 승자를 찾기 위한 주요 경기가 남았음에도 금새 월드컵 열기는 썰렁해졌고 모두들 월드컵은 끝난 것처럼 데면데면한 낯으로 티비를 쳐다볼 뿐이었다. 진짜 축구팬임을 자처하는 이들을 제외하면 월드컵은 이미 종료된 셈이었다. 그리고 4년 뒤에 열릴 남아공 월드컵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 것인가 따위의 이야기가 무심하게 세상을 떠돌아 다녔다. 지난 4년 전의 불가사의하기까지 했던 신화를 다시 재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아무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2002년 월드컵을 둘러싼 향수까지 잊지는 않았고, 우리는 다시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붉은악마”와 거리응원전에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 월드컵 응원에 대한 이야기도 시들해졌다.
less.. 월드컵 문화라고 불리는 글로벌 스포츠 게임을 둘러싼 문화현상은 더 이상 이야기할 것이 남아있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만치 많은 이들이 분석하고 논쟁했던 이야깃거리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토론과 대화가 언제나 무력하고 싱거운 것이라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다. 모든 것을 망라하는 듯한 이야기가 사실은 무언가 결정적인 것을 회피하기 위한 어떤 겉꾸밈이 아닐까 하는 의구 역시 떨치기 쉽지 않았다. 이런 미심쩍은 나의 눈길에 가장 흥미롭게 다가선 대상은 월드컵 응원에 참여했던 냉소적인 관중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알다시피 월드컵 거리응원에서 우리가 놀랐던 이유는 엄청난 규모의 군중이 운집했다는 것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소요와 혼란이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알다시피 근대 사회에서 군중의 존재는 언제나 반란, 폭동, 분규 등과 연결되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그런 군중은 언제나 보이지 않는 사회적 구조가 객관화되는 증거로서 즉 고요하고 평범한 일상적 삶의 세계가 감추고 있던 사회적 적대를 표출하는 것처럼 여겨지기 마련이었다. 물론 반대의 경우로 해석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 때의 군중이란 사회적 적대가 초래하는 불안과 공포를 제거하며 완전히 통합된 공동체라는 환상 속에 모두를 끌어들이는 전체주의적 동원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군중이다. 어쨌든 어떤 형태의 군중이든 그것은 사회를 가능하게 하는 근본적인 적대 혹은 데리다 식의 표현을 빌자면 “구성적인 적대”와 불가분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표시한다. 다시 말해 완벽히 통합된 공동체를 상연하는 것이든 아니면 환상을 통해 지탱되는 사회가 더 이상 불가능해지는 순간 그것을 분열된 사회적 집단의 대결로 표출하는 것이든 군중은 언제나 주어진 사회의 적대를 참조하지 않으면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적어도 1987년의 6월 항쟁이후 거의 처음으로 적어도 규모의 면에서 그에 육박하리만치 대단한 기세로 등장한 이 새로운 군중은 무엇인가. 그 사이에 탄핵반대집회니 하는 도심의 “촛불 집회”같은 형태로 간헐적으로 출현했던 군중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는 2002년 월드컵 거리 응원전에 운집했던 군중을 선구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그것을 예상케 하는 전조로서 볼 수 있는 것임에 분명하다. 그렇지만 역시 우리를 놀라게 했던 것은 거의 백만 명에 달하는 군중이 운집하였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놀랍게도 사회적 적대와의 참조 관계를 상실한 것처럼 보였다는 놀라운 사실에 있었다. 따라서 “월드컵 문화”를 둘러싼 흥분되고 격정적인 반응의 이면에는 새로운 군중에 대한 놀라움과 충격이 배어있다고 볼 수 있다. “사회의 불가능성”을 통지하는 균열의 표현도 아니고 그렇다고 하여 사회의 이상이 위기에 몰렸을 때 공포와 불안에 휩싸인 성원들을 상상의 공동체로 묶어주는 열광적인 동원도 아닌 군중이란 과연 무엇인가. 이 수수께끼에 답하기 위하여 우리는 가능한 모든 주장들을 내놓았고(혹은 그것과 상대하기를 회피하였고), 그것은 이른바 “월드컵 문화”를 둘러싼 한국 사회의 주된 담론적 공간이 만들어졌을지 모른다고 가정할 수 있을지 모른다.

... [중략] ...

군중의 욕망, 자유의 욕망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오이디푸스의 위기를 겪고 있다고 할 때, 상징적 권위가 무너지고 모두가 자유로운 의사결정의 주체가 되어 적극적으로 자유롭게 선택하는 개인이 되었다고 주장할 때의 문제 역시 새롭게 조명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 “포스트-오이디푸스” 사회의 군중이 더 이상 상징적 권위의 금지에 시달리지 않는다고 할 때, 아버지-신-국가-남성 등의 어떤 초월적이고 보편적인 권위를 자유롭게 협상하고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는 다문화주의적 사회가 되었다고 할 때, 우리가 직면하는 것은 놀랍게도 자유가 놀라울 정도로 위축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그 금지가 부과하는 자신의 상징적 정체성과 거리를 유지하며 행사할 수 있었던 자유를 대신하여 자신이 모든 것을 떠맡고 결정하여야 한다는 중압감으로 우리를 내모는 불안이 들어선다는 것이다. 이는 근면, 성실하여야하는 노동자 대신에 자기경영을 수행하는 인적 자본, 평생직장 대신에 평생직업을 택한 직장인, 모범학생 대신에 자기주도적 학습자, 질서와 전통을 지키는 시민 대신에 라이프스타일의 개척자가 공식적인 정책과 제도, 경영의 담론이 제시하는 주체의 모습이 된 현실로 다시 복제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이 더할 나위 없는 불안 속에 허덕인다는 것 역시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와 포스트-오이디푸스 사회의 군중과의 관계는 무엇인가. 사회적 적대 혹은 다른 말로 사회의 불가능성을 중단시키고 사회라는 환상을 수립하여왔던 상징적 권위가 위기에 빠졌다면 그것과 상관적이며 또한 필연적인 부산물이라고 할 군중 역시 위기에 빠져든 것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더 이상 군중을 통해 보편적 권위에 도전하는 인민이나 대중의 형상으로 자신을 제시할 이유를 잃게 된 것 아닐까. 차라리 “자기성찰적 주체”가 되어 자신의 삶을 둘러싼 다양한 문제들과 관련한 쟁점들을 다루는 전문적 지식의 소비자가 되어버리는 것이 맞는 것 아닐까. 물론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것은 포스트-오디디푸스 사회의 군중에 대하여 서둘러 결론을 내리기를 피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붉은악마는 스타일의 정체성을 실현하는 나르시시즘적인 개인들의 군집도 아니고 또한 자유롭게 자신의 선택과 의지를 표현하며 새로운 시민성이나 공적인 덕을 조직하는 집합적인 행위자도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가 주장해야 하는 것은 그 군중이 상징적 권위에 의존하지 않지만 바로 그 상징적 권위를 유효한 것으로 만들어주던 힘, 즉 어떤 상징적 허구의 문자적 메시지를 초과하는 힘으로서의 말의 물질성(이를테면 그냥 평범한 말과 “말씀”의 차이), 어떤 상징적 언표를 단순히 지식으로서가 아니라 복종해야 하는 명령으로 만들어주는 차원에 여전히 이끌려 다닌다는 것이다. 그것은 상징적 권위의 호출에 응답하기 위하여 고개를 돌릴 때 내가 고개를 돌리게 되는 것은 나를 부르는 그 목소리 때문만은 아니라 내가 선험적으로 유죄이기 때문이라는 정신분석학의 주장과 다르지 않다. 결국 우리는 상징적 권위를 손쉽게 부정하고 그것을 조롱하며 자유로운 협상을 통해 우리가 따라야 할 행위의 규칙을 작성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권위로부터의 해방을 초래하지 않는다는 것 역시 분명하다. 그것은 상징적 권위가 소멸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지탱하고 있던 힘은 전연 손대지 않은 채 남아있을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상징적 권위가 실추되었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 상징적 권위의 기저에 존재하는 맹목적인 힘에 더욱 견인당하고 조정될 수 있다.
끊임없이 새로운 상징적 질서가 만들어지고 수정되며 그것이 숱한 협상과 토론을 통해 변경될 수 있다. 우리는 그런 점에서 거대 서사의 위기, 보편적인 준거가 될 지식의 몰락, 상징적 권위의 침몰 등을 겪고 있음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이 적대와 지배의 소멸로 이어지는 것이 아님에 분명하다. 근대의 계몽적 지식의 굴레에서 해방되었지만 우리가 동시에 지배로부터 혹은 적대로부터 해방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포스트-오이디푸스사회의 군중에 대하여 우리가 물어보아야 할 것은 바로 상징적 권위에 의존하지 않는 군중을 이끄는 그 힘에 대하여 물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분명 “붉은악마”는 보수적 자유주의자들이 상상하는 애국주의나 민족주의, 국가주의를 통해 동원된 군중이 아닐 것이다. 그들은 이미 자신을 계몽한 냉소적인 대중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새로운 군중을 불러 모으는 것은 무엇인가. 상징적 권위가 존재하고 그것의 목소리를 통해 사회라는 환상 속에 대중을 묶어내는 것이 아니라면 어떤 들리지 않는 소리가 있어 군중이 등장하게 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우리가 내릴 수 있는 답변은 바로 그 전상징적 명령의 차원과 상징적 권위의 차원 사이의 거리를 의식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상징적 권위의 붕괴에도 불구하고 전상징적인 명령의 차원이 작동한다는 것은 곧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비판의 실패를 가리키는 결정적 증거이다. 조직인간을 넘어 자기실현의 노동주체로, 획일적인 보상을 넘어 능력과 자질에 대한 평가로, 평생직장이 아닌 직업의 유목민으로 되기를 원한다며 “포드주의적 자본주의” 혹은 “개발독재”를 공격하였던 수많은 시도들을 상상해보자. 물론 그들의 이상은 완벽하게 실현되었으며, 유연화, 자기실현, 자기주도성, 평생직업, 고용가능성(employablitiy)같은 용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그것은 새로운 자본주의의 이상이 되었다. 그리고 강요된 자유 자체가 자본주의를 작동시키는 유력한 윤리적 이상이 되어있음을 확인하고 있다.
결국 자유주의적 비판이 결정적으로 간과하고 있는 것은 가족-국가-법으로 상징되는 상징적 권위를 비판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점이다. 마르크스가 지적했듯이 자본의 한계는 자본 그 자체이며, 자신을 끊임없이 파괴함으로써만 자신을 재생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역사적 조건을 구성하는 어떤 형태의 상징적 권위를 변경하는 것만으로도 자본주의는 극복될 수 없다. 이는 상징적 권위의 비판에도 고스란히 적용할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상징적 권위에 대한 비판 이후에 우리는 여전히 얼굴 없는 명령에 시달리고 이는 전보다 더 심각하게 자유를 위축시킨다. 바로 그러한 명령은 더 이상 초월적 권위를 갖지 않은 다양한 전문적 지식들의 세계가 들어선다 해도 사라지지 않는 구성적 배제에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질서정연하게 자신의 주어진 상징적 위치를 담지하고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사회적 위치를 수행하는 주민과 그러한 구성적 배제를 표출하는 무질서한 군중 사이의 거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초월적 보편적 권위를 가진 지식의 세계에서 수많은 작은 상대적 지식의 세계로 전환하였지만 모두를 규제하는 보편적 명령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났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아마 그것을 역설적으로 웅변하는 것이 바로 불가사의하기까지 한 “붉은악마”의 등장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의 해법을 통해 포스트-오이디푸스사회의 군중을 해석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그 해석은 그 군중을 이끌어냈던 보이지 않는 명령을 반성적 주체가 되어버린 개인의 선택의 결과일 뿐이라는 해석에 머무른 채, 그 명령을 부인하거나 무시했을 뿐이다. 결국 바로 그 보편적 명령이 무엇인지 분석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살아갈 세계는 훨씬 위험하고 섬뜩한 세계로 돌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붉은악마” 이후의 군중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에 대하여 물어야 하고 또한 답해야 한다. ■

- <문학과사회> 2006년 가을호에 기고한 글

[고백컨대, 몇년전부터 군중에 관한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카네티나 르봉, 리즈먼같은 이들이 써놓은 군중에 관한 글도 있고, 또한 다중이나 대중이란 이름으로 계급을 초과하는 군중의 현실적 존재를 탐구한 이들도 있다. 나는 그것을 함께 묶어 생각해보고 싶었다. 제법 많은 글을 읽고 생각을 다듬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런데 쉽게 덤벼들지 못했다. 군중에 대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은 주체화에 관한 많은 이야기들이 반사회적 주장을 한다는데 대한 나의 반동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청탁을 받고 그런 생각의 한꼭지를 정리해보렸는데 아주 멍청하고 싱거운 글이 되어버렸다. 그간 무조건 책을 멀리하고 글을 읽지 않으려는 습성 때문인지 생각을 머리 속에 모으기가 쉽지 않다. 왜 이토록 무력하고 짜증스러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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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ts 2006-09-15 0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사 남겨주신 후에 가끔 구경 오는데 카테고리 이름들이 인상적이예요.
중략은 아쉽지만 서동진 선생님 글이 반가와서 댓글 남깁니다. ^^

바라 2006-09-15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반갑습니다 나어릴때님, 서동진님 블로그에서 퍼왔는데 중략은 저도 뭔지 잘 모르겠네요; 카테고리 이름들은.... 지난달 처음 서재 만들 때 그냥 생각나는대로
쓴 건데, 지금 보니 우습기도 하네요.
 
 전출처 : 로쟈 > 지젝과 고진의 가상대담

동국대 대학원신문에서 흥미로운 글 하나를 옮겨놓는다(교수신문에 링크돼 있다). '슬라보예 지젝과 가라타니 고진의 가상대담: 문제는 정치경제학이다!'란 제목이며 필자는 문학평론가 복도훈씨이다.

코기토(Cogito)……: 정신분석과 맑스주의

슬라보예 지젝: 안녕하십니까. 93년이었던가요, 제가 가라타니 고진 씨가 관여하던 ‘비평공간’에 초대되어 선생의 후배인 아사다 아키라 씨와 대담을 나눈 지가. 그 잡지에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1989)을 연재번역한 때로부터 참으로 많은 시간이 지났군요. 상이한 조건 속에서도 비슷한 작업을 하는 지식인들을 만나는 일은 제겐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특히 맑스주의적 정치경제학비판에 대한 선생의 끈질긴 열정은 감동적입니다.

가라타니 고진: 벌써 그렇게 됐나요. 최근에 선생께서 제 책인 <트랜스크리틱: 칸트와 맑스>(2003; 영문판)에 대해 쓰신 서평 ‘시차視差적 관점The Parallax View’(2004)은 잘 읽어보았습니다. 저 역시 선생님의 역작인 <까다로운 주체>(2005; 일역판)에 대해 짧게나마 서평을 썼습니다. 거기서 해체론을 포함하는 탈근대주의 이론에 맞서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옹호하는 선생의 제스처는 제게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일찍이 저도 포스트모더니즘이 유행하던 일본에서 <탐구>1·2(1986; 89)와 같은 이론적 저작을 통해 데카르트적 코기토를 옹호한 바 있지요. 그래서 선생의 책을 읽고 깜짝 놀랐습니다. 선생 말마따나 상이한 공간에서 작업을 하는 데도 ‘섬뜩하게’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말 그대로 시차(時差, 視差)죠(웃음). 그 전에 독자들을 위해 간단히 자기 경력을 이야기하면 어떨까요?

지젝: 좋습니다. 저는 49년에 지금은 해체된 유고슬라비아의 연방 국가였던 슬로베니아에서 태어났습니다. 공산국가였기 때문에 저는 맑스주의와 친숙한 환경에서 태어났지만 맑스주의, 특히 프랑크푸르트학파가 당과 체제의 공식이론이었고 저는 거기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별도로 프랑스의 (탈)구조주의에 적극 관심을 가졌습니다. 제가 친구들과 함께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1967)를 대학 1학년 때 번역했는데, 68년의 일이었으니 아마 세계 최초의 번역이 될 겁니다(웃음). 이후에 저는 라캉정신분석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졌습니다. 80년대 초반, 저와 친구인 믈라덴 돌라르와 함께 이론정신분석학회를 창립하고 라캉의 사위이자 수제자인 자크-알랭 밀레를 초청했습니다. 그때 밀레가 저와 돌라르에게 유학을 권해서 함께 파리 8대학에 갔습니다. 저는 88년에 <가장 숭고한 히스테리증자: 헤겔이 지나간다>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이듬해 영어로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을 펴냈습니다. 동구사회주의가 무너질 즈음이고 자유주의 만세의 합창이 울려 퍼지던 분위기였죠. 그 무렵 유고슬라비아도 해체되었고 저는 슬로베니아 대통령후보로 출마했다가 다행히 떨어졌지요(웃음).

그로부터 약 20여 년 동안 저는 주로 영어권에서 활동하여 30권 가량의 책을 펴냈는데, 최근에 당신 책에 대한 서평을 토대로 <시차적 관점>을 냈죠. 저는 슬로베니아 라캉학파의 좌장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 그런 학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웃음). 그냥 저와 돌라르가 이론정신분석학회를 창립해 각각 회장, 부회장을 맡은 격이지요. 그렇지만 돌라르를 비롯한 제 동료들인 알렌카 주판치치, 레나타 살레츨, 미란 보조비치 등은 매우 독창적인 저작을 펴내고 있지요. 저는 현재 라캉정신분석과 헤겔철학, 맑스주의적 정치경제학비판을 결합하여 전지구적 자본주의에 맞설 보편성이라는 문제에 대해 고심하고 있습니다.

고진: 저는 41년생입니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는 한편 당시의 좌익운동이었던 전공투에 몸담았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좌익운동이 테러리즘으로 귀결되고 난 후 저는 문학비평을 하는 동시에 <맑스, 그 가능성의 중심>(1974)과 같은 저작을 썼습니다. 맑스주의를 죽은 개 취급할 그 당시에 맑스에 관한 책을 써서 욕 좀 먹었지요(웃음). 한편으로 저는 <일본근대문학의 기원>(1980)과 같은 문학비평적 저작을 통해 근대문학이 제국주의적 국민국가의 이데올로기와 공모하고 그것을 은폐한 흔적을 쫓으면서 일종의 해체론적 비평을 감행했습니다. 물론 그것은 푸코의 구성주의나 데리다의 해체주의와 연관성이 있지만, 이른바 그것들의 속류판인 포스트모더니즘과는 다릅니다. 나쓰메 소세키라는 일본근대 초창기의 대작가에서 저는 문학의 다른 가능성을 엿보았지요.

<트랜스크리틱>을 쓴 최근까지 제 관심사는 자본=국민=국가라는 보로메오 매듭을 해체하는 신연합운동(New Association Movement)의 구체적인 형태를 구성하는 데에 있습니다. 실패로 끝났지만 지역통화(LETS)에 기반을 둔 NAM운동을 했던 것도 그런 연유였지요. 돌이켜보면, ‘맑스, 그 가능성의 중심’의 자본주의 비판,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에서의 국민국가비판이 <트랜스크리틱>에서 종합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트랜스크리틱>까지 저는 맑스주의 정치경제학비판과 문학비평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느라 부심했지요. 최근에 <근대문학의 종언>(2005)을 통해 저는 문학을 떠난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습니다. 문학의 사회적 역할이 그 소임을 다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무튼 저는 혼자서 1인 2역을 담당하느라고 거의 분열될 지경이었지요. 라캉학파 정신분석가에게 정신분석치료를 받다가 그만두었을 정도니까요(웃음). 아시다시피 일본은 라캉학파 시장(市場)입니다.

……에르고(Ergo)……: 이데올로기와 자본주의 비판

지젝: 저 역시 밀레로부터 정신분석임상훈련을 받다가 그만두었지요. 지금 생각하면 둘이서 교활한 분석가 대 음험한 히스테리증자로 지적 곡예를 벌였다는 느낌이지요. 그나저나 그때부터 저는 라캉정신분석의 임상치료에 대해 거리를 두기 시작했습니다. 밀레와도 사이가 소원해 졌죠. 물론 라캉에 대한 그의 정교화작업은 여전히 찬탄을 불러일으키지만요. 저는 정신분석의 사회적·문화적 활용을 더 중요시 합니다. 저는 선생이 문학에 대해 비평작업을 수행한 것에 상응해서 대중문화에 대한 일종의 ‘증상적 독해’를 해왔지요. 그러나 저는 <삐딱하게 보기>(1991)나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1992) 등을 통해 할리우드 영화와 고급이론을 접목시키고 거기서 사람들이 대중문화를 ‘즐기는’ 방식을 관찰했습니다. 거기서 저는 온갖 정치적·사회적 이데올로기적 꿈, 말실수, 소망충족, 특히 죽음충동과 향유(jouissance)의 뒤틀린 형태를 발견했죠.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서 저는 포스트이데올로기 시대의 인간은 이데올로기로부터 거리를 둔 냉소적(풍자적) 형태로 이데올로기에 붙들려있다는 공식을 내놓았습니다. 단순히 이데올로기에 대한 거리를 둔, 맑스로부터 알튀세에 이르는 비판적 독해로는 만족할 수 없었죠. 왜냐하면 사람들은 이데올로기에서 바로 자신들이 ‘즐길만한’ 뭔가를 발견하기 때문이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그릇된 것인 줄 알면서도 (거리를 두면서도) 그것을 행하는 (그것에 참여하는) 이상한 역설이 생겨납니다. 예컨대 90년대 이후의 인종주의, 특히 제 조국이 속해있던 발칸반도에서 벌어진 인종적 증오와 폭력의 향유는 사실 그에 대해 경악한 서구의 냉소주의와 구조적으로 상동관계입니다. 돌라르는 발칸반도는 서구유럽의 무의식이라고 했죠. 저는 라캉, 특히 후기라캉의 정신분석을 이데올로기비판의 강력한 형태로 재가공했습니다. 실재(The Real)와 향유, 증환(sinthome) 등과 같은 개념이 제게 중요하죠.

고진: 저는 선생과는 조금 다르게 맑스, 특히 <자본론>을 제 비판적 사유의 준거점으로 삼고 출발했습니다. 제가 하부구조만 선생이 상부구조만 문제시했다는 건 오해가 되겠죠. 저와 선생 모두 상품형식에 대한 맑스의 비판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정치경제라는 매트릭스를 문제 삼고 있죠. 저도 '일본정신분석’이라는 글에서 정신증적 폐제(foreclosure)라는 라캉의 개념을 통해 안으로는 포스트모던적이지만 밖으로는 자폐적인 일본의 담론공간을 분석한 바 있습니다. 뭐, 일본의 어떤 포스트모던 역사학자들은 일본의 남경대학살(1938)은 구성된 담론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말하니까요(웃음). 지나가면서 언급했지만 <트랜스크리틱>에서 자본=국민(nation)=국가(state)라는 삼항조는 실재=상상계=상징계라는 라캉적 보로메오 매듭과 연결됩니다. 이건 단순한 유비는 아닙니다. 저는 오랫동안 <자본론>을 읽으면서 생산과정과 유통과정의 숨 막힐 듯한 영구적 순환이 자본주의경제를 지탱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과정과 유통과정의 기묘한 틈새, 예컨대 공황(위기)을 통해 자본주의가 더욱 가속화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젝: 상처는 상처를 낸 창만이 치유한다!

고진: 그렇죠. 예컨대 물건은 팔리지 않으면, 다시 말해 유통과정에 참여하지 않으면 상품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특유의 ‘목숨을 건 비약’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공황 때에 생산된 물건을 바다에 내다 버리는 것이지요. 그건 상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유통과정, 즉 화폐(M)-상품(C)-화폐(M) 사이에 틈새, 생산자인 노동자들이 동시에 소비자가 되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까지의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은 생산과정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파업, 스트라이크와 같은 폭력적 형태로 자본주의에 저항해왔지만, 거기엔 한계가 있습니다. 오히려 유통과정에 주목하면 문제가 풀리죠. 생산자는 곧 소비자이기도 합니다. 맑스가 2천년 동안 지속해온 수수께끼라고 말했던 잉여가치는 노동자가 물건을 생산해서 상품이 될 때 넘겨지는 차액이지만, 이것은 또한 노동자=소비자가 상품을 구매할 때도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역통화나 NAM을 통해 잉여가치가 0(zero)인 교환형태를 구상했던 것입니다. ‘당신의 노동력 상품을 팔지 마라’는 안토니오 네그리의 이론과 함께 ‘자본가의 상품을 사지 마라’는 간디의 노력은 소중합니다. 지금까지 자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 듯하지만, 그것은 오늘날 비판만으로는 사라지지 않는 국민=국가를 재조명하는 측면도 있습니다. 국민에 대해 소비자연합을, 국가에 대해 소비자 연합단체나 기구를 상상해보면 됩니다. 그것은 국민=국가 ‘사이에 존재하는’(in between) 새로운 코뮌의 기반이 될 것입니다.

……숨(Sum): 레닌주의와 신연합운동

지젝: 칸트 식으로 말하면 국민=국가=자본은 초월적 가상과 같은 것이라서 계몽주의적 비판만으로는 절대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늘날 유행하는 다문화주의적 탈식민주의와 국민국가비판에 대해 제가 마뜩해하지 않는 이유도 거기에 있죠. 선생도 이에 대해 언급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칸트철학에서 초월적 가상은 보통 신·세계·영혼 같은 것인데, 이것은 이성 자체에서 연유하는 형이상학적 가상이라는 점에서 문제적입니다. 비판의 탄환으로 쏘아 죽였다싶더라도 흡혈귀처럼 살아남죠. 억압된 것의 회귀입니다. 그러고 보면 선생이나 저나 오늘날에 벌어지는 ‘칸트로의 회귀’에 일조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의견차가 있을 듯 합니다. 저는 독일관념론에서 헤겔을 가장 중요한 철학자로 생각하는데, 선생은 좀 다른 듯 합니다. 선생의 헤겔 비판은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의 전형적인 헤겔 비판, 즉 절대지에 가보지도 않고 의식과 절대지의 순환을 처음부터 닫힌 체계로 파악하는 듯…

고진: 이제 서로의 차이를 확인하는 일만 남은 건가요(웃음). 선생의 책을 읽다보면 참조하는 철학자의 계열이 다르다는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선생은 데카르트-칸트-셸링-헤겔과 함께 기독교철학자인 말브랑슈-파스칼-키르케고르를 중요시하지요. 현대철학자 중에서는 플라톤주의자인 알랭 바디우가 선생의 이론적 동지이고요. 저는 데카르트-스피노자-칸트-니체와 함께 데리다-푸코-들뢰즈의 사유노선에 아무래도 가까운 듯 합니다. 참, <신체 없는 기관: 들뢰즈와 결과들>(2004)을 읽어보니 선생은 모두가 사랑하는 스피노자를 홀로 싫어하고 계시더군요. 상징계를 고려하지 않은 상상계의 철학자라고(웃음).

지젝: 들뢰즈의 표현을 비틀어 저는 그것을 스피노자 뒤에서 하는 헤겔의 비역질이라고 했죠(웃음). 사실 헤겔의 절대지는 의식의 완성된 형태가 아니라 그것이 끊임없이 실패하는 구조적 불가능성이라고 보고 싶습니다. 저는 그것을 실재라고 부릅니다. 사드 소설에는 자신의 성기를 자신의 항문에 삽입하는 기괴한 장면이 나오는데, 그런 점에서 의식을 절대지 뒤에 삽입시켜 닫힌 원환 고리를 완성하는 도착증적 꿈을 꾸는 자들은 바로 헤겔에 대한 비판자들인 거죠.

고진: 글쎄요. 정신분석적인 사후(事後)의 시점에서 헤겔을 전유한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공평을 기하자면, 헤겔의 ‘법철학’과 같은 저서는 중요합니다. 헤겔은 다양한 욕망의 형태를 긍정하는 시민사회(자유)를 인정하면서 그것이 초래할 수 있는 불평등을 제어할 수 있는 국가(평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 둘의 불일치는 국민(형제애)이라는 상상력으로 보완되지요. 이것은 나중에 맑스가 각각 <루이보나파르트 브뤼메르 18일>(1852)과 <자본론>(1867)에서 행했던 근대국민국가비판과 정치경제학비판으로 이어집니다. 공교롭게도 맑스는 헤겔에 대한 긍정적 언급으로 두 책을 시작하고 있죠. 헤겔에겐 확실히 이러한 잠재력이 있습니다. 그래도 저는 ‘타인을 수단뿐만 아니라 목적으로도 대하라’라고 말하는 칸트에서 코뮤니즘의 시작을 보고 싶습니다. 그는 계몽에 내재하는 ‘적대’(antagonism)에 대해 누구보다도 민감했습니다. 칸트는 계몽이 먼 미래에는 완성될 것이라고 보았지만, 스탈린주의자처럼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라는 식으로 말하지 않았죠. 우리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후손을 상상하고 투쟁해도 좋습니다. 환경문제나 석유전쟁, 기아, 치명적 전염병 등이 일어나는 오늘날의 자본주의체제에서 칸트의 정언명법은 훌륭한 21세기 윤리입니다.

지젝: 그렇군요.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전지구적 자본주의 쪽으로 옮겨가고 있는데요. 오늘날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는 자본에 대한 대항운동에 대해 의견을 나누면서 짧은 대담을 끝낼까 합니다. 네그리·하트의 <다중multitude>(2005)에 대해 말해보죠.

고진: 점점 더 가혹해지고 있는 후기자본주의체제에서 다중은 분명 긍정할 만한 요소가 있는 대항운동의 우세한 작인이지만, 뭐랄까, 지나치게 낭만적(문학적)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체제가 허용하는 한에서의 일시적 축제라고나 할까요. 다중은 맑스·엥겔스의 <공산당 선언>(1848)에서 말한 프롤레타리아트의 21세기 판본이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요점은 ‘만국의 노동자여, 일하지 말자’입니다. 하지만 아까 말한 것처럼 이것 역시 생산력의 측면에서 자본에 대한 대항운동을 구상하는 전통적 발상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국가개념에 대한 성찰이 없습니다. 신자유주의적 제국주의에 대항한다면 알 카에다도 다중이 아닙니까. 다중은 애매모호합니다.

지젝: 다중은 이렇게 말하죠. ‘나는 동성애자이고 전업주부이며, 비정규직 노동자이고 팔레스타인인이다…’ 이것은 은유, 시(詩)라면 문제가 없지만, 분명 정치는 아닙니다. 연대는 필요합니다만, 저는 다른 관점에서 다중이 성, 인종 등의 범주를 들여오면서 계급문제를 흘려버리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그들도 계급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성, 인종과 같은 종(鍾)으로 격하됩니다. 계급은 종이되 종이면서 유(類)입니다. 유일무이한 적대죠. 역시 문제는 정치경제학입니다(웃음)! 다중이론가들은 스피노자의 정동(affect)개념을 근간으로 삼지만, 이 정동이야말로 파시즘의 구성요소이기도 하죠. 그들은 ‘권력 없는 권력’을 원한다 말하지만, 이건 손안대고 코풀자는 거 아닙니까. 만일 그들이 권력을 잡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오히려 당파적 레닌주의나 바디우식의 마오이즘이 역으로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고진: 다중에 대한 선생의 비판에는 동의합니다만, 레닌주의, 마오이즘의 정치적 폭력과 테러리즘은?

지젝: 저는 세계를 비난하되 자신은 거기에 빠져있는 좌파적 ‘아름다운 영혼’의 자기기만을 선택하느니보다 보수주의자처럼 손에 피를 묻히더라도 단두대를 선택하는 행위(act)가 낫다 생각하는 편입니다.

고진: 쉽지 않은 문제군요. 선생 식대로라면 자코뱅적 테러와 알 카에다의 테러를 어떻게 식별하죠? 저는 오히려 자본의 적대를 인식하는 새로운 소비자운동이야말로 대안이 아닐까 싶은데. 그렇지만 저나 선생이나 자본에 내재한 적대로부터 코뮨적 유토피아를 구상한다는 점에서는 동지입니다.(웃음)

지젝: 네(웃음). 아마도 그러한 노력이야말로 유토피아적인 순간에서 영원을 창출하는 행위일 겁니다. 자, 이것으로 짧은 대담을 아쉽게 정리해야할 것 같군요. 감사합니다.(복도훈 문학평론가)

06. 0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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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xceptional Political Theology of Saint Paul

 

PHILIP GOODCHILD

 

 

The recent reception of Paul’s thought in European philosophy concurs with a contemporary strand of historical-critical scholarship (Elliott 1994; Horsley 1997; Wright 2000): Paul’s gospel is believed to announce a radical politics.  At the opening of Romans we read this gospel as a heraldic announcement of Jesus as king or Davidic messiah, demanding the ‘obedience of faith’ (Rom. 1.1-6).  Caesar has been superseded by a crucified, Jewish messiah.  This announcement is both scandalous and incredible.  Indeed, such a political reading has remained scandalous and incredible for the much of the history of theological and critical scholarship.  How can Paul’s gospel have a directly political import, when the main focus of his epistles seems to lie elsewhere – on the death of Christ, on communal relations, on the place of Jews and Gentiles, on the practice of circumcision, on the body of Christ, on justification by faith, on life in the Spirit?  If Paul’s gospel is political, then Paul must hold an exceptional understanding of ‘politics’.  This will indeed be our argument: Paul holds an exceptional, indeed, eschatological understanding of politics.  Paul summarises it thus:

 

Then comes the end when he hands over the kingdom to God the Father, after he has destroyed every ruler and every authority and every power.  For he must reign until he has put all his enemies under his feet.  (1 Cor. 15.24-5)

 

Eschatology involves the displacement of every other principle of authority.  The exceptional character of Paul’s political theology is therefore denatured when it is interpreted simply in relation to its context of Jewish piety, Roman politics, or Hellenistic wisdom, for each of these appeals to a subsidiary power or principle.  The messianic innovation announced by Paul offers a new principle for the reconstitution of religion, politics and reason alike.  Then neither historical-critical scholarship nor philosophical commentary will be able to disclose the full radicality and exceptionality of the political theology of Paul.

 

 

Eschatology

Eschatology is not universality.  Eschatology must be distinguished from universality in several ways.  Any confusion between them is regrettable.  Of course, when judged from the perspective of a universal reason, the eschatological will seem to hold a universal significance.  Nevertheless, the universal is only established in eschatology as an enemy, in subjection.  For the universal establishes a single form or principle to comprehend all things, but Pauline eschatology subjects all forms or principles to Christ.  There is little hope of a reconciliation of principles here.  For every authority and every ruler and every power that claims universality sets itself up as a supreme power; yet insofar as it falls short of Christ, it does not know Christ, and its universal claim excludes all that is of Christ that it cannot comprehend.  In addition to the universal, there is always an eschatological remnant who are too exceptional to be included under the universal.  This is the first problem of political theology: who are those ‘in Christ’, the righteous remnant, the community or kingdom founded on Christ himself?

             Universality expresses a point of view according to which all things may be comprehended under a single form.  In relation to the universal, the particulars do not matter; individuals may be freely substituted for each other.  Only the form that comprehends them all in a synchronic moment of understanding is glorified.  Universality belongs to the order of law, whether a law of nature or a moral law.  Law has a universal application; yet law remains abstract and transcendent until it is applied in an actual act of judgement, in accordance with the truth of the case.  Law, truth, and sovereign power exist in reciprocal presupposition in the order of universality.  In eschatology, by contrast, the individual is glorified; the individual becomes a ‘judge of angels’ (1 Cor. 6.2-3).    No doubt there is also judgement at work here.  Yet such a judgement finds in favour of the individual and against the law.  In the final judgement, the law and its judgements of death are suspended.  All sovereign powers are suspended and subjected to Christ.  Eschatology replaces subjection to the sovereign with adoption as an heir.  Eschatology remains a judgement, but a judgement in relation to someone unique and singular.  It dissolves the order of universality and law in favour of a unique order for every heir.

             Universality is synchronic and atemporal.  Eschatology is diachronic and suspended.  Eschatology proceeds by promise and fulfilment, by announcement and arrival, by downpayment and full inheritance, by calling and justification, by suffering and the revelation of glory.  The end approaches.  It is eagerly awaited.  This is the second problem of political theology: what is the messianic temporality, given that glorification is still awaited, yet the messianic era has already arrived?  When will the messianic politics be accomplished?

             Universality expresses a sovereign power enacted through judgements.  Sovereign power is exercised through the threat or execution of exclusion from the sphere of the universal.  Sovereign power is exercised through death.  Eschatology, by contrast, expresses the arrival in power of a crucified messiah.  Such a messiah expresses the power to die, to be executed by sovereign power.  The death of Jesus discloses God’s power and righteousness.  This is the third problem of political theology: what is the divine power, where strength is made perfect in weakness?  How can the messiah triumph over those who execute him?

Eschatology, then, involves the overthrow of the world, including its present authorities, by the authority of a new creation.  It announces a new faith, a new politics, and a new reason.  It will no longer be possible to judge the eschatological by the universal; the universe will be judged by the eschatological.  In short, eschatology involves a difference in principle or authority – a new people, a new temporality, a new truth, a new power.  Formal categories are replaced by personal relations.  Transcendental principles are replaced by lived experiences.  For eschatology, truth is a faith, hope and love that exceed knowledge.  For the world, faith falls short of knowledge, hope falls short of power, and love falls short of governance.  Knowledge, power and governance give guarantees that they are suited to their ends – that knowledge will be correct, that power will accomplish the means, and that governance will direct the end.  Faith, hope and love may lack the guarantee of the end, lack the sign that announces the end, lack the end as already achieved, but faith, hope and love exceed all guarantees in one respect – they endure in a time before the end.  They endure in an experience.  It is a time of an ordeal or a proof.  It is a time the world wishes to avoid.  It is a time that the world wishes to save.  It is a time outside of the universal.  It is a time of contingency, and perhaps of chaos. It is a time of life, and a time of thought.  For living and thinking take time.

What, in the meantime, does Paul teach us of a new religion, politics and ontology?

 

 

Universal reason

The merit of recent readings of Paul by Jacob Taubes, Alain Badiou, Slavoj Žižek, and Giorgio Agamben is to have brought out the contemporary relevance of Paul’s thought.  Paul’s thought holds a significance which exceeds that of his immediate political context of the Roman Empire as well as exceeding his historical influence over the development of Christianity.  Paul, while not regarded as a philosopher, makes a unique contribution to understanding philosophical concepts such as law, subjectivity, truth, temporality and community.  Paul, regarded by Badiou as the founder of universalism, contributes to concepts that are philosophical because of their universality, whether formal or transcendental.  In order to contribute to such a philosophical discussion, Paul’s thought must be abstracted from its specific theological content.  One attains to the universal by means of formalism; yet formalism leaves a nostalgia for the concrete, and Paul’s thought is invoked to concretise the universal.

The context for such a surprising rapprochement between Paul and a purely secular philosophy is the contemporary ‘return of the religious’: if the foundation of a modern state has been an attempt to separate politics from theology by deploying a universal reason, the actual effect of a multitude of critiques of pure reason, from Schelling, through Nietzsche and Derrida, to contemporary critical thought, has been to demonstrate that such a universality never completes itself.  Universal reason is displaced by an undecidable yet particular element that substitutes for it in order to establish it, as an exception establishes a rule.  Exceeding the mastery of reason, one relates to this undecidable element in the way that one relates to a god.  The central problem of contemporary political philosophy is the nature of this element.  Is it excess or lack, subject or signifier, fiction or real, concealment or disclosure, exception or concrete universal, event or thing, difference or repetition, affirmation or void?  Can one substitute whatever particularism one chooses for an empty and dominating universal?  The central difficulty in identifying such an element is that one deploys an immanent, universal reason to track down the undecidable exception that substitutes for it, reproducing the very effect of undecidability that one wished to explain.  Where one hopes to encounter the fullness of life, one merely finds a symptom of its absence in a concept devoid of determinate content.  Žižek explains this logic according to which universality acquires actual existence in a particular element that is unable to achieve its full identity:

 

the point is, rather, that the singular agent of radical universality is the Remainder itself, that which has no proper place in the “official” universality grounded in exception.  Radical universality “covers all its particular content” precisely insofar as it is linked through a kind of umbilical cord to the Remainder – its logic is: “it is those who are excluded, with no proper place within the global order, who directly embody true universality, who represent the Whole in contrast to all others who stand only for their particular interests.” (Žižek 2003: 109)

 

             Paul is invoked by Agamben as a theorist of the remainder; he is invoked by Badiou as the true founder of universalism.  In practice, Badiou, Žižek and Agamben utilise Paul as a singularity, exception or remainder who confirms their philosophical systems: he guarantees a passage from abstraction to the truth of singularity.  Agamben explains this explicitly: the law is suspended in a state of exception in order to capture all that is outside the law (Agamben 2004: 178).  Then the recent turn to religion – or rather, ‘religion without religion’ – in contemporary critical philosophy does not affirm religion as such; instead, it is an attempt to recapture the obstinate and persistent cult for the sake of a resurrected, universal, secular reason.  The cult of universal reason is re-established by including its exception; at the same time, religion is de-fused of its cultic potential.  The turn to Paul as the founder of universalism is thus an attempt to maintain an immanent piety – a religion of the Son without the Father, of the event without the Resurrection, of the messianic without the messiah, of religion without religion – so as to contain an obstinately inescapable political theology once more within the limits of reason alone, that is, within the sphere of the universal.

Philosophical universalism is necessarily hostile to the essence of Paul’s message: far from monotheism deriving from universality, as Badiou maintains in saying that the ‘One is only insofar as it is for all’ (Badiou 2003a: 76), universality derives from monotheism: the all only is insofar as it is subjected to the One.  This is manifest in the stubborn persistence of political theology in the secularised cult of the universal.  Or as Paul puts it, ‘yet for us there is one God, the Father, from whom are all things and for whom we exist, and one Lord, Jesus Christ, through whom are all things and through whom we exist’ (1 Cor. 8.6).  Moreover, such universality is eschatological: ‘When all things are subjected to him, then the Son himself will also be subjected to the one who put all things in subjection under him, so that God may be all in all’ (1 Cor. 15.28).  Paul has no need of universality because he worships God.  Paul has no need to understand all things because he still hopes to be transformed by God who has the power to subject all things to himself (Phil. 3.21).  There is no evidence for Agamben’s unargued assertion that eschatology is a ‘dangerous misunderstanding’ of Paul’s messianic announcement (Agamben 2002: 5).  Paul never ceases to proclaim a final judgement and coming end.

For a political theology, the nature of divine power explains the nature of messianic temporality and the nature of the messianic community. For the fundamental question of political ontology, or what constitutes a political subject, and the fundamental question of political agency, or how to bring about an event, can only be resolved in political theology by a solution to the fundamental question of piety: what is true worship?  Beyond the legal power of the constitution of a people, and beyond the sovereign power of agency, there remains a power that is made perfect in weakness, apart from law and dominion: piety.  The messiah brings neither law nor power but piety.  The revelation of this impotent power is the true contemporary significance of Paul’s political theology.

 

Secular piety

Paul’s announcement contradicts the guiding assumption of our secular age that the religious qua religious has been superseded in the political constitution of our world.  In secular thought, religion can only return to undermine the pretensions of a purely secular, universal reason in a form stripped of its authority and essence.  Yet if the secular universal can never be fully constituted, then neither can the secular world.  The political constitution of our world must also still be built on religious foundations – there remains an obstinate and persistent cult at the source of power even in capitalist democracy.  Just as it is the temporality of truth that has called modern notions of reason into question, it is also temporal existence as such that demonstrates the persistence of piety.  For the singular nature of temporal existence escapes comprehension by the universal.  Worship is inevitable for any thinking that takes time – that receives the gift of its time by passing it on – for one shows value, respect, concern or interest by spending time.  In practice, we determine ourselves by the ways in which we distribute our attention and order our action.  Yet here there is no necessity linking cause to consequence – we do not know precisely what effects our attention will have.  Since the pivot linking our attention to its result is invisible, any act of attention is an act of faith – we trust that we will be granted a suitable future.  We appeal to an invisible causality.  Radical contingency implies transcendence.  The persistence of piety may be discerned in our temporal conduct itself.

             Such piety is manifest in both theoretical abstraction, the substitution of symbols for actual entities, and economic abstraction, the substitution of symbols of value for use-values. Saving time forms the essence of the Enlightenment project of emancipation: if we are liberated from the constraints of natural necessity that may foreshorten our lifespans, and if we are liberated from the constraints of social obligation that occupy our time, then we have true freedom to become what we wish to be.  Economic rationality depends on a symbolization of time, so that a calculation can be performed that minimises our relative expenditure, while maximising our control over nature through technology, and maximising control over social obligation through money.  The certainty that attaches to economic rationality derives from its proofs in practice – technological invention and acquisition of wealth.  Yet the knowledge, power and wealth acquired are always local and partial – projecting a future when liberation will be complete, economic rationality is faith seeking understanding.  In this total future, abstract symbols of time will effectively represent a time that has become open, empty, and undetermined, in a glorious, heavenly future where the passage of time is no longer constrained by natural necessity or social obligation.  Only as such will the ‘secular’ sphere be constituted, the sphere of the present age untrammelled by obligation to repeat the past, or anxious expectation of the judgements of the future.

             Failing the arrival of this universal, we substitute a particular representation of a universal value: money substitutes for the universal equivalent it does not have time to become.  The particular price of things represents what their universal value might be.  Yet this substitution of the particular for the universal – a key issue for contemporary philosophy – has significant effects.  In the first place, the value of money is transcendent: it is a promise, taken on faith, and only realised to the extent that this faith is acted out in practice in exchange.  In the second place, since money is both a means of acquiring value as a particular commodity and a measure of value as a universal equivalent, then it posits itself as the supreme value, the precondition of access to all other values that involve social interchange beyond bonds of reciprocity or communities of shared faith.  Whatever our own individual or collective values, we must value money first as the means of access to all other values.  In the third place, money is only ‘value in motion’: one cannot achieve profitability without investing that money.  Here, again, the value of assets is deterritorialised from their intrinsic worth since it is determined by their expected yield, their anticipated rate of return.  The value of assets is determined by speculative projections.  In the fourth place, capital is essentially a speculative value – it is a promise of future wealth.  It is credit: an offer of value in advance.  It cannot be understood according to an eternal ontology as accumulated wealth; it cannot be understood according to a temporal ontology as ‘value in motion’. Both appeal to the promise of a future return. Being transcendent to material and social reality, yet the pivot around which material and social reality is continually reconstructed, financial value is essentially religious.  A new political ontology will be required to explain how our contemporary world order is founded upon an idolatrous and unrealistic eschatology.

             The essence of contemporary money – created by fiat in the form of credit or loans by being entered by banks onto records of accounts – is debt.  Credit offers an ambivalent eschatology: on the one hand, credit may promise a means to realise future wealth; on the other hand, credit incurs a liability to produce future wealth in order to repay the loan.  On the one hand, capital offers to the faithful the promise of future prosperity; on the other hand, capital offers to the unsuccessful a future of expanding debt, of endless labour as debt-bondage, or of exclusion from the means of production and subsistence.  Credit leads to the ultimate form of judgement by works: one is judged upon economic performance.  In contemporary capitalism the saved or elect are those who prosper, can gain access to credit, and so can render their demands effective.  Capitalism selects a prosperous remnant.  Moreover, for this remnant, final judgement is perpetually deferred: for if the value of all assets is essentially a speculative value then at every stage the value of assets is determined by the next wave of anticipations about the future.  Thus this future never comes: it is purely ideal.  Financial value is essentially a degree of hope, expectation, trust, or credibility.  It holds no reality.  It offers no proof.  It is a spectral power, invulnerable to law and force alike.  It is the power of piety.  The critical discourse on such a power is political theology.

 

 

Paul’s gospel

Paul’s concern is political theology as such – in the sense explained two centuries earlier by Varro, and later cited by Augustine: deum colere kata ta nomina, the correct and public interaction with the gods (City of God 6.5, cited in Terpstra and de Wit 322).  The sphere of the political is not confined to law and right on the one hand, and sovereignty, agency, force and subjectivity on the other.  It also consists in piety: the polis constituted itself in public through cult, sacrificial rituals, ceremonies and festivals.  At the heart of Paul’s discussions are circumcision, the observation of special days, the eating of meat offered to idols, and ‘works of the law’ – primarily the temple cult as prescribed in the Torah.

             Such an assertion may seem all the more paradoxical, given that the Pauline churches practised what must have appeared to the ancient world as a form of atheism.  For ancient religion centred around sacrifice, around rites relating to home and family, and around agricultural and commercial productivity, all overlaid by a thin veneer of piety relating to the state.  All this, the heart of ancient religion and society (whether Jewish, Greek or Roman), was missing from the Pauline churches (Stowers 2001: 87).  Paul’s astonishing assertion that there is no longer Jew or Greek, slave or free, male or female amounts to an abolition of the ancient social order.  In contrast, Paul attempted to establish a new order, the ecclesia, based on Christ.

For Paul’s political thought we must turn to his announcement of the gospel at the opening of his epistle to the Romans:

 

Paul, a slave of king (christos) Jesus, called to be a herald (apostolos), appointed to the task of the proclamation of the kingdom of God (euangelion theou), which God had promised beforehand through his proclaimers in the sacred writings, the proclamation of the God’s Son, the successor to king David, who was revealed as God’s king (huios theou) in power and holiness by resurrection of the dead, king Jesus our master, through whom I have received the commission and power to bring about the loyalty of all the Gentiles to honour him, including yourselves who are called to his service. (Rom. 1:1-6 – my translation[1]).

 

The lengthy argument of Romans is bracketed by this and a concluding quotation from Isaiah: ‘The root of Jesse shall come, the one who rises to rule the Gentiles; in him the Gentiles shall hope.’ (Rom. 15.12) To write this to Rome is to announce that Caesar has been superseded by the Jewish messiah.  Paul’s ‘gospel’ or euangelion recalls the good news of Isaiah that God is returning to Zion to judge and redeem the nations (Is. 40.9, 52.7 – cited in Rom. 10.15); it also echoes the imperial announcement of a great victory or the accession of an emperor (Wright 2000:165).  The phrase ‘son of God’ has Davidic messiahship as its primary meaning (as in Ps. 2.7, 2 Sam. 7:14; see Wright 2000: 167); it also parodies the divine pretensions of the Roman imperial dynasty (Elliott 2000: 23).  If Jesus has been crucified under Roman authority but vindicated by God – as in Paul’s vision of the risen Christ at the right hand of God – then God is already at work bringing about his kingdom (Elliott 2000: 23).  Paul’s eschatological message could hardly be more political: ‘Then comes the end when he hands over the kingdom to God the Father, after he has destroyed every ruler and every authority and power.  For he must reign until he has put all his enemies under his feet.’  (1 Cor. 15. 24-5)  Such is Paul’s gospel announcement: not justification by faith, not peaceful coexistence between Jewish and Gentile Christians, but an eschatological victory.  It is hardly surprising that Paul was so frequently silenced and persecuted by the authorities; it is hardly surprising that Paul was persecuted by other Jews, since open dissemination of the messianic gospel could put the entire Jewish community at risk (Horsley and Silberman 2002: 143-9).  It is hardly surprising that Paul’s scandalous gospel has rarely been heard in the history of interpretation.

We therefore propose that Paul was attempting to found a new social order based on rational worship of the one true God. It will be objected that Paul rarely discusses politics, and even when he does so, he counsels submission to the governing authorities.  This objection belies the biographical evidence.  In spite of Paul’s boldness, we learn of necessary precautions in his biography, and can infer their existence in the epistles.  We may note that the famous passage on submitting to the governing authorities is framed by an exhortation to ‘overcome evil with good’ (Rom. 12.21) implying that submission may be a part of non-violent resistance, and a clear allusion to Jesus’ saying on taxes, ‘paying honour to whom honour is due’ (Rom. 13.7) implying that the authorities need to earn honour.  Indeed, to demote the emperor to the status of a temporary servant appointed by God to administer justice leads one to infer how poorly such a role is currently being fulfilled (O’Donovan 1996; Stubbs 2004).

Yet the obedience of faith does not require direct political revolt.  Paul’s supreme political and revolutionary gesture was to proclaim a rational worship (logiken latreian):

 

to present your bodies as a living sacrifice, holy and acceptable to God, which is your spiritual worship.  Do not be conformed to this world, but be transformed by the renewing of your minds, so that you may discern what is the will of God – what is good and acceptable and perfect. (Rom. 12.1-2)

 

Paul’s principal aim was the renewal of worship of the one true God in spirit and in truth.  In the Christian communities, love was to fulfil the law (Rom. 13.10), superseding the constitution of governing authorities; Christ was to be the new Lord, superseding all principalities and powers (Rom. 8.38-9); and spiritual worship in Christ was to replace sacrificial ritual.  If Paul’s political programme now seems invisible, this is simply because it consisted of a renewal of worship, rather than a direct renewal of social structure or sovereign agency. If this is interpreted merely as a Hellenizing call to reason (Boyarin 1994) then such a political theology would appear to have little contemporary relevance; we have despaired of people ever becoming reasonable.  Yet divine wisdom, for Paul, remains entirely different from human logic: it is demonstrated ‘not with plausible words of wisdom’ but with Spirit and power (1 Cor. 2.4).  At the heart of Paul’s gospel, his call to worship, was a defence of God’s honour by proclaiming his power and justice: he aimed to convert worship from one code of honour to another.

For Paul, the gospel was a public demonstration of the righteousness of God.  A different conception of ‘proof’ is offered here.  For to proclaim God’s honour among the Jews and Gentiles of Rome was to meet with hostile accusation; God’s honour had not been directly demonstrated, as had the rule of Caesar.  For the imperial cult was justified by works, both in terms of victories won and benefits established for the people: the benefits accrued by works were regarded as due reward for righteousness (Rom. 4.4).  This is precisely the ideology of empire: that power is evidence of righteousness, and weakness the evidence of failure.   Paul’s strategy is not only to cast shame on the achievements of pagan morality under the justice of the Caesars (Rom. 1.18-32), but also to name as sin and idolatry the very principle of judgement and accusation.  For it is this principle that formed the basis of pax Romana: the rhetoric of power attributes imperial success to a combination of force, fortune and virtue; it imposes judgement upon all those who question the peace and prosperity achieved by force.  Jacob Taubes has suggested that ‘the concept of law  . . . is a compromise formula for the Imperium Romanum’ (Taubes 2004: 23).   The paradox of passing judgement is that you condemn yourself (Rom. 2.2, echoing the Jesus tradition in Matt. 7.1-5).  The very act of moral condemnation exercises a symbolic violence to justify actual violence; the condemnation of imagined enemies is the essence of imperialism.  Paul takes issue with both Hellenistic and Jewish notions of nomos expressed in the formula, ‘We know that God’s judgement on those who do such things is in accordance with the truth.’ (Rom. 2.2). This is the imperial pretension: the universalisation of law.  Paul discloses how law can become an autonomous power opposed to God.  For there must be a temporal separation between law and the divine will: if God acted instantaneously to repay each according to their deeds, then there would be no distinction between moral and natural law, and both sin and grace would be unworkable in practice.  Instead, God allows an interval of kindness and forbearance before the day of wrath when God’s righteous judgement will be revealed in order to allow for repentance (Rom. 2.4-5).  Indeed, an eschatological suspension of judgement is essential to allow for divine transcendence and freedom, as well as to allow for true human repentance and worship.  Temporal delay is essential for piety.

             Paul’s gospel is that God will judge the secret thoughts of all through Jesus Christ on a future day (Rom. 2.16).  It is the futurity of such judgement that undermines any pretension to embody a divine order within the world.  Although such a future judgement may be in accordance with the law for those under the law, and in accordance with deeds for those apart from the law, Paul’s main point is that the law does not make righteous.  Indeed, judging by the law leads to sin.  Paul therefore explores a temporal lapse in the law that belongs to the law as such.  This is not to overthrow the law but to uphold it (Rom. 3:31) – for judgement will come in the end.  Although the law is holy and just and good, there is another law at work in the body, the law of sin (Rom. 7:23).  It seizes an opportunity in the commandment: Paul’s strange condemnations of Jews for breaking the very laws that they teach – including accusations of stealing, adultery, and robbing temples (Rom. 2.21-2) – make little sense according to the standard interpretation, that prohibition arouses an uncontrollable desire.  The famous passage in Romans 7 should not be interpreted anachronistically in subjective or psychoanalytic terms: only the prohibition against coveting could lead to temptation.  Instead, it should be understood in public and political terms: law leads to boasting, judging, condemning and death.  Law is supplemented by dominion – the dominion of sin, the passion to dominate (Rom. 6.14).  Only by submitting oneself as an instrument of righteousness can one escape the dominion of death (Rom. 6.13).

Paul replaces a public judgement on the basis of present evidence according to a universal law with a future judgement on the basis of secret thoughts according to the Spirit.  This is not a rejection of judgement nor an indifference towards deeds.  Paul could hardly be more explicit that even Christians will be judged by works, ‘so that each may receive recompense for what has been done in the body, whether good or evil’ (2 Cor. 5.10; see also Rom. 14.10; Phil. 1.10, 2.12-13, 3.13-14; 1 Cor. 6.9-10).  The Christian innovation (Matt. 6.1-24) that Paul shares is that the basis on which people will be judged will be their secret thoughts, not their public works, for justification by public works leads to boasting – and, by implication, to the condemnation of others.  The central point is as follows: ‘Now to one who works, wages are not reckoned as a gift but as something due’ (Rom. 4.4).  To justify oneself by one’s works is to attempt to make a claim upon the divine; it is to exercise impiety.  It is an attempt to establish a contractual relation to the divine, to equalise what is unequal.  It is an abuse of sacrifice.  Moreover, the benefits accrued by works are regarded as due reward for righteousness.  This is precisely the ideology of empire: that power is evidence of righteousness, and weakness the evidence of failure.  There is no reason to read justification by works as a particularly Jewish phenomenon: the rhetoric of empire justified imperial power by the works performed for the people.  Paul will consistently invert such self-justifications in his epistles: if one is to boast in one’s hope of sharing the glory of God, one may also boast in suffering (Rom. 5.3).

In place of the axis combining law, public evidence, and imperial force, one finds an axis combining temporal delay, secret thoughts, and divine righteousness.  Paul inhabits the interval between law and final judgement, between the vindication of the messiah and his return in power, between temporal worship and ultimate glory.  As such, universality is not yet possible.  Truth is conceived rigorously as that which is to come.  Nevertheless, in the meantime, Paul neither laments nor celebrates such incompletion, he neither negates nor affirms all things, but ‘forgetting what lies behind and straining forward to what lies ahead,’ he presses ‘on toward the goal for the prize of the heavenly call of God is Christ Jesus’ (Phil. 3.4).  If the interval of eschatological suspension is a test or ordeal, if it is filled for Paul with sufferings, if he is to be judged as having the righteousness of God based on faith, if he is to be found in Christ, then it is only by his spiritual worship, his orientation towards God in Christ, his abiding in faith, hope and love, that he may be saved.  It is piety itself that is the missing, undecidable element.  Piety is the ‘secret thought’ attaching to the deed.  For piety is an endurance in time.

 

 

The Righteousness of God

Worship is offering glory and honour to God.  In the context of a dominant imperial cult, worship of the true God must be vindicated – it is a vindication of Judaism that Paul is called to proclaim: Christ confirms the promises given to the patriarchs (Rom. 15.8).  For true piety to be possible, God’s righteousness must be revealed.  God’s faithfulness to his covenants is called into question if the promises of God to the patriarchs are not fulfilled – if his people are not faithful, or if they do not dwell in peace but under Roman law and domination.  To vindicate God, the messiah must first renew worship, before returning to renew a political order.  If worship by conducting ‘works of the law’ leads to self-justification or boasting, then the messiah must demonstrate how worship can be vindicated even without such evidence of its piety.  The work of the messiah is an ordeal or a proof – a public test of the righteousness of piety. 

             Paul’s gospel also offered its own proof in ‘Spirit and power’ – a proof quite unlike any abstract or empirical proof one might offer today.  It is closer to Duns Scotus’ proof of contingency, cited by Arendt and Agamben (Agamben, 2004: 69-70): anyone who denies contingency should be tortured until they admit the possibility that they might not be tortured.  Such an ordeal concentrates the mind; it enables the perception of that which matters supremely, but may be concealed under normal conditions of thinking.  Apart from the law, prior to circumcision, Abraham’s faith was similarly tested in order that it be reckoned as righteousness (Rom. 4.5).  The heart of worship is located in faith in God’s eschatological promise rather than the sacrificial cult prescribed by the law.  The ordeal undergone by the messiah was a proof of the glory of God, showing the possibility of righteousness when all dominion, all external evidence or ‘works’, and all public respect is stripped away.  Moreover, piety before such righteousness is the true divine power.  The paradox of honour is that to be truly honourable one remains loyal to one’s calling in weakness and shame.  The true glory of God can only be shown in weakness and by means of weakness:

 

But we have this treasure in clay jars, so that it may be made clear that this extraordinary power belongs to God and does not come from us.  We are afflicted in every way, but not crushed; perplexed, but not driven to despair; persecuted, but not forsaken; struck down, but not destroyed; always carrying in the body the death of Jesus, so that the life of Jesus may also be made visible in our bodies.  For while we live, we are always being given up to death for Jesus’ sake, so that the life of Jesus may be made visible in our mortal flesh.  So death is at work in us, but life in you. (2 Cor. 4.7-12; emphasis added)

 

Paul reveals the power of Christ by recounting the matters that show his own weakness and shame.  Escaping from Damascus in a basket let out of a window epitomises Paul’s encounter with imperial authority (2 Cor. 11.30-2).  The heart of Paul’s honour is as follows: ‘We are treated as impostors, and yet are true; as unknown, and yet are known; as dying, and see – we are alive; as punished, and yet not killed; as sorrowful, yet always rejoicing; as poor, yet making many rich; as having nothing, and yet possessing everything.’ (2 Cor. 6.8-10)

             It is precisely such an ordeal that is undergone by the messiah.  The eschatological suspension is not merely of nomos – a cosmic and social law – but also of power, of honour, and, at the limit, a suspension of life itself.  What is at stake, here, is the fundamental question of ontology: what is the remainder?  The messianic experiment is a ‘purificatory’ approach to the Real, stripping away layers to reveal the kernel within (Žižek 2003: 64 borrows the terminology from Badiou).  If Being is nomos, then nothing exists but a set of particular judgements.  The identity of the remainder fails to coincide with itself as a thing differs from the judgement or truth about it.  According to this conception, the transcendence of the divine is maintained in the gap between accusation and punishment, between a thing and its truth.  This ontotheological conception of truth is maintained, in the Western tradition, whenever truth is ‘presented, after Plato, as localizable in the proposition’ (Badiou 2003b: 59).  The Nietzschean charge of ressentiment against life may be applied here.  If truth is submitted to thought, by contrast, not as a judgement but as a process in the real (Badiou 2003b: 61), then it admits a universal affirmation.  For Badiou, Paul preaches not a cult of death as Nietzsche maintained, but the killing of death, the foundation of a universal ‘yes’ (Badiou 2003a: 71): in Christ ‘every one of God’s promises is a “Yes”.’ (2 Cor. 1.20)  Badiou contrasts a traditional, transcendent ontology of judgement with a modern, immanent ontology of pure affirmation.

             Paul’s own ontology goes beyond law and power: it is neither a transcendent judgement nor an immanent affirmation.  It cannot be consistently maintained that Paul has no path of the cross, and attributes no redemptive significance to the apostle’s tribulations (Badiou 2003a: 67): Paul’s ministry of reconciliation, as an ambassador for Christ, makes the life of Christ visible through being given up to death (2 Cor. 4.11, 5.19-20); Paul wishes to know the power of Christ’s resurrection through the sharing of his sufferings (Phil. 3.10).  Paul maintains a purely theological ontology:

 

For I am convinced that neither death, nor life, nor angels, nor rulers, nor things present, nor things to come, nor powers, nor height, nor depth, nor anything else in all creation, will be able to separate us from the love of God in Christ Jesus our Lord.  (Rom. 8.38-9)

 

For Paul, the Real is neither Event, nor Void, nor displacement of the Void, but the ‘love of God in Christ Jesus’. 

             Divine affirmation replaces both transcendent judgement and immanent affirmation.  There is no necessity for such a love, no argument for its existence.  There is only the evidence of testimony – the testimony of the messiah, the apostolic testimony to the resurrection of the messiah, and the testimony of the Spirit.  Testimony itself does not constitute proof.  The true proof, the true reasoning, is the ordeal.  Only through an ordeal do secret thoughts become public.

 

 

The Time of Salvation

If Paul’s preaching aims to convert his listeners from one code of honour to another, one cultic practice to another, it is through the renunciation of all spiritual benefits (Phil. 3.7-10).  Insofar as one no longer claims a ‘righteousness of one’s own’, an ontological independence, one can be considered to have become like Christ in his death (Phil. 3.10), to have been ‘crucified with Christ’ (Gal. 2.20), to have been ‘united with him in a death like his’ (Rom. 6.5).  Paul’s gospel, however, announces that one still has a truth beyond death, beyond all powers and events, a free gift of righteousness, the righteousness from God, consisting of the love of God in Christ Jesus.  Then just as one is united in Christ’s death, one may also be united in his resurrection.  ‘The death he died, he died to sin, once for all; but the life he lives, he lives to God.’ (Rom. 6.10)  The modern belief that it is rigorously impossible to believe in the resurrection of the crucified (Badiou 2003a: 5) is irrelevant: Paul affirms that all people are mortal.  We are concerned with an eschatological ontology of piety, not a universal ontology of human mortality.  We are concerned with the end, the limit of human existence.  Is the believer included under a universal law of nature, the law of death, or is there any remainder when the flesh is stripped away?  Can temporal existence be delimited as being-towards-death (as in Heidegger)?  This is to assume that the person constitutes itself in its temporal orientation.  Is the believer constituted by an immanent self-affirmation (as in Nietzsche)?  This is again to assume that the person constitutes itself in its temporal orientation.  It is to assume that time is constituted by the person as a project, rather than time happening to the person.  Both the law of mortality and the affirmation of power are temporal orientations, modes of piety.  They offer no universal proof, for time has not yet come to an end; the possibilities for modes of orientation to time are not yet circumscribed.  To determine our true ontological constitution it is necessary to put the matter to the test.

             Life itself consists in the delay between deed and judgement.  It is in the time that remains, between and beyond synchronic universals, that one may be saved.  It is a time of pure contingency, beyond reason.  Sin, as idolatry, is an attempt to anticipate the end, to enclose all possibilities within a universal limit, whether a limit of judgement or a limit of power. It is an attempt to bring death forward, so that life may be judged from the perspective of its anticipated completion, from the perspective of death.  This very life of sin is a life of death; it is a life that leads to death, as well as anticipating death in its every moment.  In short, the ‘secret thought’ of sin is a worship of death.  By contrast, the ‘secret thought’ of the resurrection is that ‘the sufferings of this present time are not worth comparing with the glory about to be revealed to us’ (Rom. 8.18; cf. 2 Cor. 4.17).  As in Adam all die, so in Christ shall all be made alive:

 

So it is with the resurrection of the dead.  What is sown is perishable, what is raised is imperishable.  It is sown in dishonour, it is raised in glory.  It is sown in weakness, it is raised in power.  It is sown a physical body, it is raised a spiritual body.  (1 Cor. 15.42-4)

 

The eschatological message is that ‘the perishable body must put on imperishability, and this mortal body must put on immortality’ (1 Cor. 15.53).  Alternatively, ‘if the earthly tent we live in is destroyed, we have a building from God, a house not made with hands, eternal in the heavens’ (2 Cor. 5.1).  At any rate, ‘if anyone is in Christ, there is a new creation: everything old has passed away; see, everything has become new!  All this is from God’ (2 Cor. 5.17-18).

             The proof in power of this coming glory is therefore already available to those who are willing to undertake the ordeal of baptism into the death of Christ.  It is not a proof based on evidence or plausibility; indeed, the very suggestion is incredible.  Yet the work of universal reason, which consists in the substitution of atemporal symbols for temporal experiences, eliminates in advance the possibility of such a proof.  Disavowing the temporal thinking that makes it possible, universal reason attempts to save time by aspiring to a knowledge that is potentially universal, based on evidence that is repeatable, public and exchangeable.  Such a truth is for anyone or about anything, it does not matter which; it is independent of value – it does not matter.  Such a truth projects a time when thinking will be complete, when reason will follow of necessity; it projects the end of time – it is thoughtless.  Such a truth assumes the objectivity of objective truth, an objectivity that can never be demonstrated since no truths are demonstrated independently of thinking – it rests on a faith.

             Paul, by contrast, bears witness to an ordeal that is against reason.  It is an ordeal that matters, a duration that is thought-provoking, a faith oriented around a singular awareness.  The notion of a crucified messiah is scandalous to Jew and Gentile alike: what kind of God puts forward his servant as a sacrifice of atonement (Rom. 3.25)?  It is difficult to know which reception betrays love the more: on a sceptical reading, God’s sending of his son to die is a betrayal of love; to hold out self-sacrifice as a paradigm of love is destructive, nihilistic and oppressive.  Life as a whole is not affirmed and loved.  Yet such a law of affirmation allows of no exception; it admits no true demonstration of love.  On a pious reading, one enters into a costly exchange of self-sacrifice: if Christ dies for us, then bought by him, we become slaves of righteousness (Rom. 6.18).  If Christ dies for all, it is so that those who live might live no longer for themselves but for Christ (2 Cor. 5.15).  In short, the pious reading submits us to a costly exchange once more, where an infinite obligation is owed to God.  Moreover, God is submitted to a new law of love, whereby those he hoped to redeem become enslaved.  This is the reading that Paul appears to adopt, although he does qualify that he is speaking in human terms because ‘of the weakness of your flesh’ (Rom. 6.19).  Now in both these readings, what is obscured is the voice of Christ himself.  If Christ is merely objectified in a transaction between God and humanity then it is hardly surprising that God and humanity will become objectified too.  Paul maintains the rigorous transcendence of divine wisdom over and above any manifestation in law or in gift-exchange (Rom. 11.33-5):

 

O the depth of the riches and wisdom and knowledge of God!  How unsearchable are his judgements and how inscrutable his ways!

“For who has known the mind of the Lord?

     Or who has been his counsellor?” [Is. 40.13-14; cf. Job 15.8]

“Or who has given a gift to him,

     to receive a gift in return?” [Job 35.7]

 

Paul refuses to objectify Christ: at the centre of Paul’s thought is the ‘mind of Christ’ (Phil. 2.5): Christ is vindicated and exalted because ‘he humbled himself and became obedient to the point of death – even death on a cross’ (Phil. 2.8).  Christ is the supreme exemplar of true piety: Christ’s death cannot deal with sin – essentially idolatry (Rom. 1.23) – unless his ‘secret thoughts’, his mind, his righteousness is revealed.  If Jesus is to be regarded as ‘Lord’ in anything but name, his own words – echoed at many points in the epistle to the Romans (largely from the ‘Q’ material, a common source for Matthew and Luke) – should be regarded as the key to the interpretation of the whole. As Paul writes, ‘So faith comes from what is heard, and what is heard comes from the word of Christ’ (Rom. 10.17).[2]

             A key allusion qualifies Paul’s rhetoric of ‘slavery’ to God:[3]

 

For you did not receive a spirit of slavery to fall back into fear, but you have received a spirit of adoption.  When we cry, “Abba! Father!” it is that very Spirit bearing witness with our spirit that we are children of God, and if children, then heirs, heirs of God and joint heirs with Christ – if, in fact, we suffer with him so that we may also be glorified with him. (Rom. 8.17; cf. Gal. 4.6)

 

This echoes Jesus’ desperate prayer of ‘Abba, Father’ in the garden of Gethsemane (Mark 14.36).[4]  If Paul aims to found a community on a renewed worship based on having the mind and Spirit of Christ, then such worship is explained as the attitude of one who receives adoption as a child of God.  One is redeemed from slavery to the elemental spirits of the world by adoption as a child of God (Gal. 4.3-6; Rom. 8.18-39).  It is thus Christ’s Gethsemane protest, like Job’s lament, that accomplishes redemption.  One only has the opportunity of becoming a joint heir with Christ by suffering with him (Rom. 8.17), by ‘being united with him in a death like his’ (Rom. 6.5), by being ‘crucified with Christ’ (Gal. 2.20), and ‘sharing in his sufferings by becoming like him in his death’ (Phil. 3.10).  It is by having the mind of Christ that one works out one’s salvation (Phil. 2.12).

             The eschatological condition of the believer in Christ is that of having already died to sin (Rom. 6.2).  If death comes through sin (Rom. 5.12), and Christ died to sin, then ‘the life he now lives, he lives to God’ (Rom. 6.10).  Instead of relying on a mythological or magical effect of baptism, Paul urges his unknown Roman addressees to die to sin so as to live to God (Rom. 6.11-12).  It is here that eschatological suspension gains a new dimension.  Instead of referring only to the judgement that is to come, as though one’s true being was not one’s mortal body but the divine judgement on one’s deeds, and instead of referring only to the event of resurrection, as though one’s true being was not one’s mortal body but one’s eternal body in heaven, one’s true being is the Spirit as a guarantee or downpayment (arrab­­on) of salvation (2 Cor. 5.5).  One dies to the flesh by setting one’s mind on God through Christ: instead of setting one’s mind on earthly things, one’s citizenship is in heaven (Phil. 3.19-20).  Thus the only possible demonstration of the truth of Paul’s scandalous gospel is its proclamation in Spirit and in power (1 Cor. 2.4).  For no one understands God’s secret wisdom, or what is truly God’s except the Spirit of God (1 Cor. 2.11).  One only understands by having the mind of Christ (1 Cor. 2.16).  In short, it is only by encountering the glory of God shining in the hearts and minds of Christ’s ambassadors that Paul’s gospel makes its appeal.

 

 

 

 

Conclusion

Paul’s political theology is truly exceptional.  It lacks plausibility; it lacks universality; it lacks a law or sovereign power.  It cannot be reasonably recommended; it can only be proclaimed.  What, then, are we to make of its contemporary significance?  Does it hold any significance beyond the secret thoughts of the believer or the eschatological resolution of time?  Paul’s gospel proclaims Christ as the final end of reason, power and worship.  In the interval before the end, in default of a final demonstration or parousia of truth, power and glory, can anything be learned of a new ontology, politics, and religion?

             For the philosopher, Paul’s thought raises a number of problems.  Reasoning itself is a temporal activity, suspended between the significance of the problems it divines and the truth towards which it aspires.  The predicament of philosophy is itself eschatological.  Between the formal universal of thinking and the concrete universal of being there lies a remnant, a time of thinking.  This time of thinking is to be saved or spent, disavowed or given.  Yet whether saved or given, the experiential ordeal of the test of time may be concealed or objectified.  Eschatology draws attention to the dimension of piety that is present in all thinking.  It exposes the illusion of a universal reason capable of judging religion, and replaces it with a typology of determinate modes of thinking. Formal categories are replaced by personal relations.  Transcendental principles are replaced by lived experiences.   Whatever the truth of Paul’s gospel, it creates a new reason, a new era for philosophy.

             For the political thinker, Paul’s thought revives the question of the public cult in politics.  Whereas in Paul’s time the public cult revolved around worship of the state or emperor, in our own day the public cult revolves around the worship of money.  For the principal political determination is not the legal constitution of a people nor the power of sovereign agents or democratic subjects, but the social ordering of time in work, in leisure, and in worship.  Whatever the truth of Paul’s gospel, it creates the possibility of a new kind of political action consisting in the social re-ordering of time.

             For the theologian, Paul’s eschatological thought continues to offer a distinctive challenge: instead of explaining divine power in terms of law or subjectivity, divine power itself becomes the principle upon which all else must be explained.  The task of theology is to subordinate reason to God rather than God to reason.  Far from this limiting the power of reason, it is an enriching of reason with new powers that it would not otherwise possess.  If the work of God is manifest in temporal experience, then it will no longer be possible to understand divine power in terms of anthropomorphic analogies drawn from a universal human nature.[5]  The righteousness of God may only be revealed in the determinate character of the piety of God’s servants.  Whatever the truth of Paul’s gospel of Jesus as the Christ, its very proclamation produces a new creation of philosophy, politics and religion.  No doubt, such a new creation has not yet come to fruition.  It can, nevertheless, be regarded as nothing less than a downpayment of the Spirit of God.

             In each of these respects, the political theology of Paul remains truly exceptional.


References:

 

Agamben, Giorgio (2002)  ‘The Time that is Left’, Epoché 7(1): 1-14.

 

Agamben, Giorgio (2004)  Le temps qui reste, trad. Judith Revel (Paris: Editions Payot et Rivages)

 

Badiou, Alain (2003a)        Saint Paul: The Foundation of Universalism.  Trans. Ray Brassier.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Badiou, Alain (2003b)  Infinite Thought.  Trans. and ed. Oliver Feltham & Justin Clemens.  London: Continuum.

 

Boyarin, Daniel (1994)  A Radical Jew: Paul and the Politics of Identity.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Breton, Stanislas (1988)  Saint Paul.  Pari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Elliott, Neil (1994)            Liberating Paul: The Justice of God and the Politics of the Apostle.  Maryknoll: Orbis.

 

Elliott, Neil (2000)           ‘Paul and the Politics of Empire’, in Richard A. Horsley (ed.), Paul and Politics.  Harrisburg: Trinity Press Internatio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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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This translation is inspired by the discussion in Wright 1997.  Wright cannot be held responsible, however, for any deficiencies.

[2] Indeed, if Jesus is only present as a name, event or fable, then the entirety of Christian theology collapses into a nominalism, docetism or gnostic redeemer myth – as the majority of readings of Paul tend to do (an exception being that of E. J. Tinsley (1960) who placed the imitation of Christ at the centre of Pauline thought).

 

[3] The other key allusions for this reading of Romans are as follows: ‘for in passing judgement on another you condemn yourself’ (Rom. 2.1, echoing Matt. 7.2, Luke 6.37, John 8.7) has already been discussed.  Paul later repeats this allusion as a fundamental principle for life in the Christian community (Rom. 14.4, 10, 13): it is his reason for tolerating both particular observances and none.  Secondly, ‘For those who live according to the flesh set their minds on the things of the flesh, but those who live according to the Spirit set their minds on the things of the Spirit’ (Rom. 8.5) – it echoes the meaning of the sayings on storing treasure in earth or in heaven and of the eye as the lamp of the body (Matt. 6.19-23).  Jesus enjoined his followers not to worry about food, but to ‘strive first for the kingdom of God and his righteousness, and all these things shall be given to you as well’ (Matt. 6.33).  Conduct will be judged on whether it is undertaken ‘in honour of the Lord’ (Rom. 14.6).  It is by having the mind or Spirit of Christ that God will give life to those in Christ; indeed, life comes through such a Spirit (Rom. 8.11).  Thirdly, there is a set of allusions concerning the foundation of a messianic community: one should ‘outdo one another in showing honour’ (Rom. 12.10, echoing Mark 10.42-5; Luke 14.7-11); one should ‘bless those who persecute you’ (Rom. 12.14, echoing Luke 6.28); one should not repay evil for evil (Rom. 12.17, echoing Matt. 5.39); one should pay taxes to whom taxes are due, but honour to whom honour is due (Rom. 13.7, echoing Matt. 22.21, Mark 12.17, Luke 20.25); and, most significantly, love is the fulfilling of the law (Rom. 13.10, echoing Matt. 22.40, Luke 10.25-8).  If Christ is the fulfilment, goal or end (telos) of the law (Rom. 10.4), then the mind of Christ is the eschatological instantiation of the righteousness aimed at by the law.  The righteousness aimed at by the law is based on faith (Rom. 9.32).  If Paul sums up such righteousness in terms of ‘love’, it is a love that essentially consists in showing honour rather than judging.  Other allusions to the Jesus tradition recorded in the synoptics are also highly significant: the image of missionary work as a harvest (Rom. 1.13), judgement by deeds (Rom. 2.6), the justification of doers rather than hearers (Rom. 2.13), that God will judge secret thoughts (Rom. 2.16), teachers of the law as a guide to the blind (Rom. 2.19) who should teach themselves (Rom. 2.21), that one should await the unexpected arrival of the kingdom in sobriety (Rom. 13.13), that all will stand before the judgement seat of God (Rom. 14.10), that one should be wise (as serpents) in what is good yet innocent (as doves) in what is evil (Rom. 16.19, cf. Matt. 10.16).

 

[4] There is considerable doubt about the historicity of Jesus’ usage, given that Peter, James and John are portrayed as having fallen asleep immediately afterwards – nevertheless, the context of suffering with Christ in Paul’s passage in Romans alludes to the Gethsemane experience, and it is possible that the use of this Aramaic word entered the Jesus tradition because Peter remained awake long enough to hear it, on this or another occasion.

[5] This point is frequently noted, for example by Breton (1988), but rarely acted up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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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의 소수정치와 네그리의 삶정치


조정환





어떤 탈근대적 저자들은 출현하고 있는 모델의 주변부에서 구멍이 난 곳을 찾는다. 그러나 그 주변부는 초월의 문턱 즉 거의 초월에 해당하는 내재성이며, 유물론적 리얼리즘이 신비주의에 고개를 숙이게 마련인 모호한 장소이다. 어떤 이들은 끊임없이 이 주변부를 읽는다(데리다). 다른 이들은 마치 그것이 마침내 포착된 부정적인 것의 힘을 모으는 곳인 양 그것을 응시한다(아감벤). 공통적인 것에 대한 이러한 사유는 (레비나스에게서처럼) 타자를 기다리는 갈망 속에서 신비주의로 귀결한다[네그리, 2004, 126].





1. 서론

네그리(Antonio Negri)는 오랫동안 정치적 활동에 종사했으며 정치를 자신의 사유의 중심에 놓아 왔다. 그에게는 어느 정도 분명한 윤곽을 갖는 정치학이 있다. ‘코뮤니즘(communism)’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자본주의세계 질서의 주권적 배치를 규명하고 그것을 변형시켜 나갈 새로운 주체성의 형성을 규명하는 혁명적 정치학이 그것이다. 최근에 그것은 ‘제국’, ‘비물질노동’, ‘다중’ 등의 개념적 요소들을 축으로 하는 ‘삶정치(학)’으로 다시 짜이고 있다. 그는 맑스주의 전통에서 설명되어온 ‘공산주의=경제적 코뮤니즘’과의 구분을 위해 자신의 ‘삶정치적 코뮤니즘’을 ‘내재적’인 것이자 ‘자율주의적’인 것으로 설명해 왔다.

그렇다면 들뢰즈(Gilles Deleuze)에게도 정치학이 있는가? 있다면 그것은 어떤 내용, 어떤 특징을 갖는 것인가? 들뢰즈에게는 정치학이 없다는 생각이 터무니없는 것임은 들뢰즈의 직접적인 발언들을 통해 반박될 수 있다. 그는 인간적 삶의 모든 수준에서 정치를 느끼면서 정치를 사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정치적 사유의 분명한 윤곽이나 방향을 특징짓기는 쉽지 않다. 많은 연구자들이 그의 정치학을 서로 다르게 특징짓는 것은 아마도 그의 사유의 복잡성 때문일 것이다. 예컨대 들뢰즈의 존재론적 정향에 주목한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는 그에게서 ‘내재성의 정치학’을 읽어내며(하트 참조), 다양성 및 욕망 개념에서 출발한 폴 패튼(Paul Patton)은 ‘탈영토화의 정치학’을(패튼 참조), 차이의 철학과 외부의 사유에서 시작한 이진경은 ‘노마디즘의 정치학’을(이진경 참조) 읽어내고 있다. 니콜래스 쏘번(Nicholas Thoburn)은 들뢰즈의 정치학을 맑스의 정치학과 좀더 분명히 대면시키면서 들뢰즈의 정치학을 ‘소수정치학’으로 독해하려는 주목할 만한 시도를 보여주었다(쏘번 참조).

들뢰즈의 정치학을 읽어내는 이 독해들 사이의 미세한 차이를 드러내는 것은 이 글의 관심사가 아니다. 이 글의 관심사는 오히려 들뢰즈의 정치학1.과 네그리의 정치학의 차이 및 공명의 관계에 두어진다. 이 차이와 공명의 관계가 발생하는 곳은 존재론적 수준에서이다. 들뢰즈는 베르그송(Bergson)을 따라, 가능성-실재성의 관계쌍을 기각하고 잠재성-현실성의 관계쌍 속에서 존재를 사유한다. 반면 네그리는 잠재성-가능성-현실성의 이행을 통해 존재를 사유한다. 나는 존재의 잠재성, 가능성, 현실성에 대한 두 사람의 이러한 이해의 차이로부터 어떻게 서로 다르면서도 깊게 공명하는 정치학이 발전하는지를 살펴보는 한편, 이것이 맑스주의의 혁신에 어떤 가능성을 제시하는지를 검토해 볼 것이다.

2. 정통에 대한 거부와 가능성의 존재론으로서의 맑스주의

이미 밝힌 것처럼 우리의 문제는 맑스주의 혁신의 지평에서 들뢰즈와 네그리를 비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 사람의 존재론과 정치학에 대한 비교로 나아가기 전에 이 글에서 내가 ‘맑스주의’라는 용어를 어떤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지를 미리 밝혀두기로 하자. 나는 ‘맑스주의’라는 용어를 하나의 특정한 경향성에 붙이는 이름으로 사용한다. 요컨대 맑스주의는 코뮤니즘의 잠재력을 확인하고 그것의 실제적 가능성을 규명함으로써 그때그때의 코뮤니즘적 주체성의 구성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참여하는 이론적 및 정치적 실천들이다. 그것은 결코 맑스에 의해 이미 표명된 말들에 대한 충실성으로 환원될 수 없다. 또 그것은 맑스의 담론에서 파생된 특정한 철학이나 정치경제학 혹은 정치학으로 환원될 수도 없다. 맑스주의가 기억의 정치학이 아니라 미래에서 영감을 얻는 혁명적 실천인 한에서 맑스주의에 ‘정통’(orthodox)이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정통’은 우리를 과거의 기억에 묶어 놓음으로써 새롭게 사유할 수 없도록 만드는 밧줄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맑스주의를 일체의 정통에 대한 거부로, 다시 말해 과거의 혁명적 기억들까지도 도래할 가능성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재조명하여 현재의 ‘때’ 속에 합류시키는 방식으로 과거와 관계 맺는 태도로 이해한다.2. 요컨대 맑스주의는 잠재성과 현실성의 이중운동 혹은 잠재성에서 현실성으로의 이행을 ‘가능성’을 중심으로 사유하고 실천하는 운동이다.

맑스주의에 대한 이러한 재정의는 다음 두 가지 해석 경향에 대한 비판을 함축한다. 첫째로 이것은 맑스주의를 현실성을 중심으로 해석해온 현실주의적 객관주의적 경향에 대한 비판이다. 현실주의적 해석은 코뮤니즘을 존재의 잠재성과 접목시킬 수 없다. 그 무능력으로 인하여 그것은 자본주의 붕괴론에 기초한 혁명적 기회주의에서 자본주의 안정론에 기초한 구조개혁주의로 이동했다. 둘째로 이것은, 맑스주의를 잠재성 쪽으로 구부려 마침내 현실성에서 유리된 ‘아름다운 영혼’3.에 의지하게 된 경향에 대한 비판이다. 이 경향은 잠재성의 발견을 통해 현실(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수행했으나 그 잠재성을 현실성과 연결하지 못함으로써 결국 코뮤니즘을 부정하는 반맑스주의로 흐르거나 코뮤니즘을 신비한 것으로 만들었다. 이럴 때 잠재성은 현실의 주변이나 구멍 혹은 초월적 영역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잠재성과 현실성이 서로 대립적으로 이해되곤 하기 때문에 가능성에 대한 맑스주의의 강조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4. 가능성은 현실적 잠재성이자 잠재적 현실성이며 잠재성에서 현실성으로의 이행의 장이기도 하다. 가능성은 두 수준 사이의 발생공간이자 생성의 표면이다. 따라서 가능성의 존재론으로서의 맑스주의는 잠재력(potentiality)이 현실의 구성력(constituent power)으로 나타나는 가능조건에 대한 탐구이다.

3. 들뢰즈의 ‘잠재성의 존재론’

그렇다면 현실사회주의의 붕괴 및 정통 맑스주의의 퇴조 속에서 혁명적 사유의 재구축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해온 들뢰즈는 맑스주의와 어떤 관계에 있을까? 들뢰즈 자신은 ‘정통적 맑스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하면서도 자신을 ‘맑스주의자’로 자처하는 양면적 태도를 취했다. 『맑스의 위대함』에 대한 구상은 아마도 후자의 입장에 기초한 맑스주의 혁신의 플랜이었을 것이다.(쏘번 참조) 들뢰즈는 ‘존재론적 선회’를 통해 ‘객관적 현실의 인식’에 정향되어 있는 기존의 인식론적 맑스주의에 대한 근본적 비판을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존재는 일의적이다’; ‘사유와 연장은 평행하는 존재의 속성이다’; ‘실재는 현실적인 것인 동시에 잠재적인 것이다’; ‘잠재적인 것은 반복해서 주사위를 던지는 제곱능력의 차이들이다’; ‘현실적인 것은 잠재적 차이들의 분화이자 배치이다’.5. 이러한 생각을 맑스의 생각과 비교해 보자. 우리는 맑스가 『자본론』(Das Kapital)에서 ‘자본주의의 현실’을 묘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자연법칙들로부터 발생하는 사회적 적대관계의 발전정도가 높은가 낮은가 하는 것은 여기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맑스, 1990, 5)는 진술에서 우리는 현실성에 대한 경험적 묘사가 그의 탐구과제가 아님을 추론할 수 있다. 그는 ‘문제는 이 법칙들 자체에 있으며 움직일 수 없는 필연성을 가지고 작용하며 또 관철되는 이 경향들 자체에 있다’(5)고 말하면서 자신의 연구대상이 ‘자본주의적 생산방식 및 그것에 대응하는 생산관계와 교환관계이다’(5)라고 단언한다. 그것은 경험적 자본주의를 그 값으로 갖는 상대적 규정관계들, 자본주의의 가능조건에 대한 탐구이다. 반면 들뢰즈는 ‘현실의 운동이 그렇게 나타나도록 만드는 잠재적 이념이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탐구했다.


맑스적인 의미의 사회적 이념들은 존재하는가? 맑스가 “추상적 노동”이라고 부르는 것이 있다. 여기서 추상되는 것은 노동생산물들의 특정한 질들, 그리고 노동자들의 질이다. 하지만 생산성의 조건들, 사회의 노동력과 노동수단들은 추상되지 않는다. 사회적 이념은 사회들의 양화가능성, 질화가능성, 잠재력의 요소이다. 이 이념을 통해 표현되는 것은 이념적인 다양체적 연관들의 체계, 또는 미분적 요소들 사이에서 성립하는 미분비들의 체계이다. (…) 그런 비율적 관계들의 변이성에는 특정한 특이점들이 상응한다. 이 변이성과 특이점들은 규정된 한 사회를 특징짓는 구체적이고 분화된 노동들 속에서 구현되고, 이 사회의 실재적 결합관계들(법률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관계들) 속에서 구현되며 이 결합관계들의 현실적 항들(가령 자본가-임금노동자) 속에서 구현된다.(들뢰즈, 2004, 405)


이 인용문의 후반에서 드러나듯이 들뢰즈는 잠재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의 관계, 잠재적인 것에서 현실적인 것으로의 이행에 대해 관심을 가지며 그것에 대해 철학적으로 언명한다. 사회적 이념에서 미분비들의 체계로, 미분비들에 상응하는 특이점들에서 사회의 실재적 결합관계들과 이 결합관계의 현실적 항들로의 존재론적 이행에 대한 위의 서술은 잠재성에서 가능성으로, 다시 가능성에서 현실성으로 이행하는 존재의 운동에 대한 언명이다.6. 하지만 그의 주요한 관심은 이 운동과 이행에 두어져 있기보다 현실적인 것에서 잠재적인 것의 독립성을 밝히고 현실적인 것을 잠재적인 것으로 미분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혁명적 잠재력은 물론이고 혁명적 가능성마저 현실성 혹은 실현가능성의 척도로 재단되어 억압되고 있던 당대 서구운동의 개혁주의적 추세에 비추어 보면 이것은 유의미하고 유효한 전략적 구부림이었다. 순수회상, 지속, 에레혼, 아이온, (비)-존재 등의 ‘비가능한’ 이름들을 통해서만 환기할 수 있었던 존재의 잠재성에 대한 호소는 실용과 실리에 깊게 물든 운동에 충격을 추었고 1968년에 온갖 현실주의적 환상을 깨고 일어난 다중의 목소리와 겹쳐졌는데, 이로 인하여 들뢰즈는 누구도 결코 건너뛸 수 없는 잠재성의 철학자로 되었다.

잠재성의 복원7.을 통해 존재를 일의적인 것으로 사유하기 시작한 것은 현실주의적 객관주의적 맑스주의를 파열시키고 새로운 단절선을 출발시키는 획기적 성과임이 분명하다. 들뢰즈는 맑스주의적 유물론이 ‘의식에서 독립된 객관현실의 승인과 인식’을 넘어 사유와 연장, 잠재와 현실을 포괄하는 존재의 이중운동에 대한 물음과 배움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틀을 제공한다. 그러나 들뢰즈의 철학적 사유의 대부분은 잠재성의 실재성을 입증하는 데 할애된다는 점이 다시 한 번 환기되어야 한다. 잠재성은 직접 경험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잠재성의 실재는 주로 철학적 개념으로만, 그리고 예술적 형상을 통해서만 설명된다. 잠재성에서 현실성으로의 이행이 분석되지 않고 잠재성이 그 자체로, 즉 이념으로서의 차이 자체로 분석될 때 여기에 수반되는 가장 큰 위험은 ‘아름다운 영혼의 표상’들로 전락하는 것이다.8. 들뢰즈는 과연 이 위험을 피하는 데 성공했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을 통해 가능했는가?

들뢰즈는 베르그송(Bergson)을 따라 가능성을 현실성의 전사(傳寫)로, ‘해(解)를 받아들일 논리적 가능성’(들뢰즈, 2004, 353)으로 파악한다. 이러한 의미의 가능성은 실재성을 갖지 않는다. 그가 가능성-현실성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쌍을 잠재성-현실성이라는 베르그송적 쌍으로 대체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가능성에 대한 다른 이해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능력들을 실현할 새로운 배치를 가능성으로 이해할 수는 없는 것일까? 말년의 들뢰즈는 가능함, 가능태에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어떤 한 순간에 조용하고 아늑한 한 세계가 있다. 갑자기 그 장 너머로 무언가를 바라보는 겁에 질린 한 표정이 떠오른다. 여기서 타자는 주체도 객체도 아닌 매우 다른 어떤 것, 가능한 세계 혹은 두려운 어떤 세계의 가능태로서 나타난다. 이 가능성의 세계는 현실 아닌, 혹은 아직은 현실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 표현 속에서만 존재하는 어떤 표현된 것, 표정 혹은 표정에 상당하는 것이다. 타자란 우선 이러한 가능한 세계의 실존이다. 그리고 이 가능한 세계 역시, 그 자체 내에 고유한 하나의 현실을 가능성으로서 지닌다. 즉 표현자가 “나는 두렵다”고 말하고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표현된 그대로의(설사 그의 말이 거짓일지라도) 현실을 가능함(le possible)에 부여하기에 충분하다.(…) 타자 개념에 있어 가능한 세계와 표정은 표현된 것과 표현으로 각기 구별될지라도, 가능성의 세계는 그것을 표현하는 표정을 벗어나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개념의 접점은 구성요소들을 끊임없이 가로지르며, 그 안에서 오르내린다. 이런 의미에서 각 구성요소는 강도적 특질, 일종의 강도적 세로좌표이다. 이는 일반적이거나 특수한 것으로서가 아니라, 거기에 다양한 의미값들이 주어지거나 하나의 일관된 기능으로 지시됨에 따라서 일반화되거나 특수화될 수 있는 순수 단순한 어떤 특이성―‘하나의’ 가능한 세계, ‘어떤’ 표정, 단어‘들’―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들뢰즈․가타리, 1995, 29~34, 강조는 인용자).


여기서 가능성은 결코 현실성의 단순한 전사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강도적 특질, 특이성, 표정 등으로 실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가 가능태를 미적 범주로 확정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잠재적인 것을 현실화하기보다 구현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기념비란 잠재적 사건을 현실화함이 아니라 그것을 구현시킴, 즉 거기에 실체를 부여함이다. 다시 말해 사건에다가 하나의 육체를, 삶을, 우주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래서 프루스트는 예술-기념비를 체험보다 우위의 어떤 삶으로, 그 ‘질적인 차이들’로, 또한 우주 렘브란트나 우주-드뷔시와 같이 그 자체 고유의 한계들, 자체들 간의 거리들과 근접함들, 자신의 고유의 성좌들, 그러한 것들이 운행시키는 감각의 집적들을 구축하는 ‘우주들’로 정의한다. 이 우주들은 잠재적이지도 현실적이지도 않다. 그것들은 가능태들, 즉 미적 범주로서의 가능태(가능함, 그것이 없었다면, 나는 질식해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가능함의 실존이다. 반면 사건들은 잠재태의 현실, 모든 가능한 우주들을 조감하는 사유-본질의 형식들이다. 그렇다고 감각보다 개념이 원칙적으로 우선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감각에 대한 개념 하나라도 그 자체의 고유한 방법들에 의해 창조되어야 하며, 또 개념이 그 절대 형태 내에 필연적으로 존재해 있지 않다 해도, 감각은 가능한 자기의 우주 안에 존재한다는 의미이다.(들뢰즈․가타리, 1995, 256, 강조는 인용자)


잠재태로서의 개념과 가능태로서의 감각을 대비시키는 이상의 인용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들뢰즈가 강도, 특이성, 표현, 분화, 극화의 개념을 통해 가능성, 가능태, 가능한 것을 사고하고자 했다는 점이다. ‘가능성-현실성’의 쌍을 대체하는 ‘잠재성-현실성’의 쌍을 통해서 우리는 분리된 두 범주를 확인하는 것에 머문다. 이 양자가 서로의 반쪽이라고 말해도 사태는 마찬가지이다. 문제는 강도, 특이성, 구성으로 나타나는 가능성의 장을 통해 잠재성과 현실성의 교차와 이행을 확인하는 것이다. 가능성의 장이야말로 들뢰즈의 초험적 경험론의 대상이며 네그리의 맑스주의적 유물론의 대상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사람 사이의 깊은 공명을 확인한다.

물론 들뢰즈는 가능성의 장을 주로 예술에서 확인한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의 삶에서도 확인될 수는 것이 아닌가? 사실상 ‘살적 구현’은 삶의 일상이다. 맑스는 자본주의 운동의 객관법칙을 규명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자본주의의 운동 속에서 그것에 대항하여 움직이며 구현되는 코뮤니즘의 살을 규명했다. 그것이 프롤레타리아트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코뮤니즘의 가능성의 장이며 가능태이다. 물론 우리가 읽고 있는 현실의 『자본론』은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살의 형성을 간헐적으로, 그리고 난외적으로만 다룬다. 그렇지만 자본론의 초고인 『요강』(Grundrisse)은 ‘사회적 노동’의 형성과 구현의 과정을 보여주고 또 전망함으로써 삶 속에 실재하는 코뮤니즘의 가능성을 밝힌다. 이처럼 가능태는 결코 예술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점차 예술로 전화하는 삶 전체에 해당되는 문제이다. 맑스주의는 삶의 이 가능성의 탐구와 코뮤니즘적 가능성의 장에의 참여를 통해 세계와 자신을 혁신하는 정치학이다.

이제 예술 영역을 넘어 좀더 직접적으로 들뢰즈의 정치 개념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전통적 정치학에서 정치는 권력의 점이자 절편으로 흔히 이해되어 왔다. 이것은 정치가 오직 현실성의 수준에서만 탐구되어 왔음을 의미한다. 우파는 물론이고 좌파 역시도 권력에 대한 이 현실주의적 이해를 계승했다. 혁명정치는 현실의 권력을 장악하는 문제로 파악되었다. 이것은 지배적인 것이 되고자 하는 욕망 속에서 지배/피지배 관계를 부단히 재생산하는 정치 개념, 즉 다수주의적 정치 개념이다. 들뢰즈는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 해체하는 소수적 정치 개념을 제시한다. 그는 현실 권력의 문제를 잠재력의 관점에서 다시 사고하고 권력이 잠재성의 삶을 절단하는 체제임을 밝혀낸다. 이러한 인식에서 현존하는 다수주의적 정치 개념으로부터의 단절선이 출현한다. 그것은 소수정치의 선, 즉 현존하는 체제가 삶에 새겨놓은 절단선들을 드러내고 그것을 파열하는 특이성의 선들을 발견-접속하여 공통적 탈주의 선을 창조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잠시 들뢰즈의 정치학에 대한 쏘번과 하트의 해석을 비교해 봄으로써 들뢰즈 정치학의 한 특징을 살펴보도록 하자. 니콜래스 쏘번은 들뢰즈의 사유에서 두 가지 삶의 과정, 태도를 확인한다. 다수적인 것과 소수적인 것이 그것인데, 다수적인 것이 동일성, 표준, 상수를 추구하는 가수적(可數的)인 과정을 지칭하는 것임에 반해 소수적인 것은 삶의 일탈 혹은 탈영토화의 과정을, 몰적 표준에 대항하여 세계의 잠재성을 불러내는 과정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본다.(쏘번, 56) 다수적인 과정이 다수주의적 형태를 가짐에 반해 소수적 과정과 경향 속에는 두 가지의 형태가 있다. 하나는 하위체계를 구성하는 소수성이며 또 하나는 잠재적이고 창조된 생성으로서의 소수주의적인 것이다.(56) 이 세 가지 형태들이 과정, 태도, 경향을 함축하는 한에서 이것들은 정치적이다. 쏘번이 ‘소수정치’라는 개념을 제안하는 곳은 여기에서이다. 소수정치는 ‘동일성을 강화하는 과정이 아니라 삶의 혁신, 실험, 그리고 뒤섞임의 과정’이며 그 속에서 ‘공통체의 형식들, 실천의 기술들, 윤리적 태도들, 스타일들, 지식들, 그리고 문화적 형식들’이 구성되는 과정이다. 쏘번은 이 과정이 ‘갇힌’ 상황에서, 즉 어떤 자율적 공간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운동을 동일성으로 가두는 사회적 힘들이 가득찬’ 공간에서 수행하는 정치이며 민중이 없는 상황에서 전개하는 발명의 정치라고 해석한다.(58) 그 결과 프롤레타리아트는 사회적 집단이 아님은 물론이고 코뮤니즘의 가능성이나 정치적 살도 아닌 일종의 정치적 구성의 양식으로 이해된다.(153) 그것은 활력, 논쟁, 지속적 심문, 계략, 발명의 활기찬 과정이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는 반동일성주의적이라는 의미에서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맑스주의가 가능성의 정치(학)인 한에서 그것은 체제에 의해 주어지는 동일성에 대한 거부이며 잠재성을 불러내는 과정임이 분명하다. 이것은 분명히 활력, 논쟁, 계략, 심문, 발명 등에 의해 추동된다. 하지만 쏘번은 들뢰즈가 이 발명의 정치의 공통적 행위자를 이름 부르기를 거부했다고 말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정치적 구성의 양식’으로 이해될 뿐 구성의 정치적 주체성으로 파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래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지만 이러한 설명은, 들뢰즈가 새로운 민중의 생성에 대해 거듭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들뢰즈 정치학에 대한 적실한 설명으로는 보기 어렵다. 마이클 하트는 쏘번과는 다른 해석을 제시한다. 들뢰즈에게서 실체(표현자)가 양태들(표현되어지는 것)의 세계에 절대적으로 내재하게 되는 것은 속성들(표현들)을 통해서이며 속성들 속에 포함된 형식들의 공통성(commonality)을 통해서라는 것이다. 요컨대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Spinoza and the Problem of Expressionism)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들뢰즈에게서도 속성들의 표현은 존재의 공통 형식들을 통해서만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트는 이것을 다음처럼 분석한다.


우리는 이러한 개념화를 두 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다. 한편으로 속성들에 의해 신은 양태들의 세계 안에서 절대적으로 내재적이다(완전히 표현된다). 다른 한편 속성들의 공통 형식들을 통해 양태들은 신적인 실체에 완전히 분유한다. 내재성과 분유는 속성들의 표현이 갖는 두 가지 측면이다. 표현적 속성들에 의해 주어지는 이해와 유비적 고유성들에 의해 부과되어지는 복종을 구별해주는 것은 이러한 분유이다. 기호들의 체계는 우리에게 존재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침묵하는 기호들과 기호학의 계명들은 존재론을 폐장(閉場)시킨다. 오직 표현만이 존재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열어 놓을 수 있다.(하트, 195)


그렇지만 절대적 내재성은 일의성에 대한 필요조건이긴 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속성들은 (내재성으로부터 뒤따르는) 내부적인 공통 형식에 의해 특성화될 뿐 아니라 외부적 복수성에 의해서도 성격이 규정된다. 다시 말해서 표현적인 긍정 신학이라는 이러한 이론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무한한 속성 속에 구현된 형식적[형상적] 공통성을 상이한 속성들 사이의 형상적 구별에 의해 보충할 필요가 있다. 신의 본질은 하나의 속성 안에서 표현될 뿐 아니라 무한한 수의 형상적으로 구별되는 속성들 안에서도 표현된다.(198)


속성들은 형상적으로는 구별되고 존재론적으로는 동일하다. (…) 속성들은 각각 상이한 형상으로, 그러나 동일한 의미로 존재를 표현한다. 일의성은 속성들 사이의 형상적 차이를, 그러나 속성들 사이의 실재적이고 절대적인 존재론적 공통성을 함축한다.(198)


따라서 속성들은 우리에게 조직화의 문제를 제기한다. 하지만 하트는 들뢰즈가 이 속성들의 조직화에 부정적이거나 그것에 무관심했다고 분석한다.(232)9. 쏘번이 소수정치를 동일성에의 참여이자 그것과의 교전이며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창조로 이해하지만 그의 소수정치학은 존재론적 일의성에 적극적 관심을 기울이지 않음으로써 민중의 생성의 문제에 무관심하게 (혹은 부정적으로) 되었는데 이것이 들뢰즈의 이 취약점이 투영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 결과 정치(학)이 다양한 속성들의 공통성을 조직화하는 과정으로 파악되기보다 동일성과의 교전이라는 수준에서 이해되는 것이 아닐까? 이럴 때 민중의 부재 속에서 전개되는 그 교전은 동일성에 대한 반작용에 지나지 않으며 잠재력의 우선성은 부정된다. 이러한 이해에서 존재론적 자율에 대한 부정이라는 관념이 발생한다. 자율은 존재론적 일의성, 다양한 특이성들의 공통성, 그리고 공통성의 조직화에 기초한 내재적 코뮤니즘의 이념이다. 자율에 대한 거부는 존재론적 일의성에 대한 철학적 탐구의 부재(이것은 쏘번에게서만 나타난다)와 속성들의 공통형식에 대한 회의(이것은 쏘번과 들뢰즈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난다)가 남겨놓은 정치학적 흔적이다.

4. 네그리의 ‘가능성의 존재론'

이미 말한 바처럼 들뢰즈는 속성들의 공통성의 조직화 가능성에 대해 소극적이었다. 그는 칸트(I. Kant)적 공통감(권리상 자연적인 공통감)을 본성상 올바른 사유, 초험적 모델로서의 재인과 결부된 사유의 이미지로 비판할 뿐만 아니라,(들뢰즈, 2004, 300~301) 나아가, 소통과 창조를 대립시키면서 특이성들 사이의 소통불가능성을 역설했다.10. 그렇다면 일의성을 강조하는 들뢰즈의 존재론과 공통성을 부정하는 그의 정치학 사이에는 깊은 균열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공통성의 조직화 가능성을 강조하는 네그리와 들뢰즈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물이 흐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들뢰즈가 소통과 공통성에 대해 부정적 태도를 취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내가 보기에 그것은 공통성과 소통의 실존양식들(재인의 공통감과 부당한 종합들, 그리고 합의적 여론들)에 대한 비판으로 읽히는 것이 옳다. 그는 구성되고 생산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이미 전제되어 있는 공통감을 비판하며(들뢰즈, 2004, 301) 지층화된 기호체제에 입각한 소통의 양식을 비판하는 것이다. 그에게서 소통불가능성은 실제로는 재현불가능성을 의미한다.11. 이것은 소통의 실존양식에 대한 비판이지 그 이상은 아니다. 나아가 그는 도주선들이 서로 연결됨으로써만 블랙홀로 빠져들지 않는다고 강조한다.(들뢰즈, 2001, 555) 이것은 그가, 다른 한편에서, 특이성들의 공통적 조직화의 가능성과 그 필요성을 긍정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들뢰즈는 특이성들의 공통적 조직화를 원리적으로 승인하고 있지만 그가 그것을 풍부하게 전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논의는 도주적 생성에 집중되며 이 점에서 생산적 구성에 집중되는 네그리의 논의와는 분명한 차이를 드러낸다. 네그리는 부정적 종합들에 긍정적 종합들을 대치시키고 후자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발견하고 또 발전시키려 시도하는 점에서 들뢰즈와 구별된다. 이런 의미에서 들뢰즈의 존재론이 ‘잠재성의 존재론’(鈴木 泉, 190~208)이라면 네그리의 존재론은 가능성의 존재론이다.

물론 네그리는 존재의 일의성의 관점을 들뢰즈와 공유한다. 하지만 그는 잠재성의 실재성의 규명에 철학적 노력을 기울이는 들뢰즈와는 달리, 잠재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의 이중운동 속에서 ‘가능적인 것의 구성’에 관심을 집중하며 가능성의 장을 경유하는 잠재적인 것에서 현실적인 것으로의 이행을 규명하는 일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인다. 잠재성(차이 자체 혹은 차이의 이념)은 직접적인 탐구의 대상으로 설정되기보다 그것의 가능적 조직화 속에 내재하는 것으로서 탐구되며 현실성도 가능성(경향)에 비추어서 해석되고 비판된다. 잠재성으로서의 행위할 힘(power to act)과 그것의 자본주의적 현실태인 노동이 산 노동의 가능성의 계보적 형태들(전문적 노동자, 대중 노동자, 사회적 노동자) 속에서 설명되는 것이다.


우리는 잠재적인 것을 다중 속에 있는 (존재하고, 사랑하고, 변형하고, 창조하는) 행위할 힘(powers to act)이라고 이해한다. 우리는 이미 다중의 잠재적 역능이 어떻게 투쟁에 의해 구축되고 욕망 속에 공고화되는지를 보았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잠재적인 것이 가능한 것의 경계선에 압력을 가할 수 있는지, 그래서 현실적인 것에 닿을 수 있는지 연구해야만 한다. 잠재적인 것으로부터 가능한 것을 통과하여 현실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이행은 근본적인 창조행위이다. 산 노동은 잠재적인 것에서 현실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통로를 구축하는 것이다. 산 노동은 가능성의 전달수단이다.(네그리․하트, 2001, 456~7, 강조는 인용자)


네그리는 ‘잠재성의 창조적 역능’을, ‘존재가 언제나 창조와 예측할 수 없는 새로움의 행위임을 강조할 필요에 대해 인정한다’.(457) 하지만 그는, 가능성을 실재성의 재현으로만 간주하는 베르그송주의의 존재론은 ‘창조된 존재의 현실성, 그것의 존재론적 무게, 세계를 구조화하고 우연성에서 필연성을 창조해 내는 제도들을 강조할 필요가 있는 한 불충분하다’(457)고 본다. 그래서 그는, ‘우리의 관심이 처음에는 다중을 구성하는 잠재성의 요소들이 지닌 강렬도에 있었다면, 이제는 그러한 잠재성들이 축적되어 스스로의 힘에 적합한 실현의 문턱에 도달한다는 가설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470)고 말하게 된다. 네그리에게서 문제는 잠재성에서 현실성으로 던져지고(분화와 극화, 밖주름운동) 다시 현실성에서 잠재성으로 떨어지는(미분화, 안주름운동)의 주사위 놀이, 영원회귀의 운동이 아니다. 그가 파악하는 존재에게 영원회귀의 원환적 운동은 없다. 실재하는 것은 잠재성에서 가능성으로, 가능성에서 현실성으로의 부단한 이행운동이다. 생산된 현실성은 이 운동의 종착점이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이행의 잠재성과 가능성을 구성하므로 이 운동은 직선으로 진행되는 회귀하지 않는 시간이다.12. 이것은 날아가는 화살촉의 시간, 즉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불려진다.(네그리, 2004, 16~17) 들뢰즈가 크로노스의 시간에서 아이온의 시간을 구별하고 아이온의 선차성을 강조하는 데 역점을 둔다면 네그리는 아이온의 시간의 선차성에 대한 인정 위에서 아이온이 크로노스를 향해 이행하는 카이로스의 시간을 관심의 중심에 놓는다. 그래서 그는 ‘가능한 것의 존재론이 분석의 중심지형이다’(네그리․하트, 2001, 470)라고 단언한다.

가능성은 존재가 힘으로 나타나는 평면, 즉 역사적 경향의 평면이다. 이 평면에서 힘들의 적대가 움직인다. 맑스의 추상 개념은 가능성의 평면에서의 이 적대를 드러내 보여준다. 첫 번째의 추상, 즉 추상노동은 자본 측에서의 추상이다. 그것은 인간의 산 노동을 양화하여 그것의 잠재력으로부터 그것을 분리시킨다. 임금노동은 자본이 산 노동으로부터 잠재력(행위할 힘, 창조력)을 분리하여 통제하는 추상의 형식이며 일종의 형식적 추상이다.(457)13. 그것의 결실은 이윤이다. 두 번째의 추상은 노동 측에서의 추상이다. 산 노동의 이 추상에서 드러나는 것은 행위할 힘의 전반적 틀이며 잠재적인 것 자체이다.(457) 이 실질적인 추상에서 산 노동은 행위할 힘의 적극적 표현으로 드러나며 자본주의에 예속된 임금노동으로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규제를 넘어설 수 있는 사회적 노동으로서, 가능성의 형식으로서 드러난다. 이 사회적 노동은 현존질서와 질서 재생산의 규칙들을 넘어서는 생산적 힘 혹은 ‘생산적 과잉’이다. 그리고 ‘이 생산적 과잉은 해방의 집합적 힘의 결과인 동시에 노동의 생산적이고 자유로운 역량들의 새로운 사회적 잠재성의 실체이다.’(457~8) 즉 실질적 추상의 결실은 ‘내재적 코뮤니즘’이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것은 사회적 잠재성의 실체이자 실질적 가능성의 장인 사회적 노동이 갖는 두 가지 특질에 대한 네그리의 분석이다. 첫째로 그것은 특이하며 보편적인 활동력이다. 둘째로 그것은 확장력, 존재론적 구축의 힘, 가치변환의 힘이다. 첫 번째 특질 때문에 업(業, res gestae)의 장 전체는 ‘척도 바깥에서’ 잠재성에 의해 물들여진다. 잠재성이 전진하면서, 기록과 업적(業績)으로서의 역사(historia rerum gestarum)는 실효된다. 역사(history)가 끝나면서 유일한 역사적 능력은 역사성(historicity), 업의 시간에 주어진다. 이것은 가능한 것과 현실적인 것을 접속시키는 특이한 잠재성들이며 특이성으로부터 공통성을 생산하는 행위의 시간이다. 두 번째 특질 때문에 잠재성들은 ‘척도를 넘어서는’ 혁신기계들로 표현된다.(471) 특이한 잠재성들은 낡은 가치체계 및 착취체계에 지배당하는 것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그 고유의 환원불가능한 가능성들을 창조한다.(471) 첫 번째 특질에서 업은 파괴력으로 나타나며 두 번째 특질에서 업은 구성력으로 나타난다. 이로써 잠재성에서 현실성으로의 이행은 파괴와 구성의 함수를 갖는 가능성의 기계의 기능이 된다. 이것을 통해 우연성에서 필연성이 구성되는 것이다.

5. 소수정치 대 삶정치

그러면 이 구성의 이념은 들뢰즈의 사유와 대립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들뢰즈 역시도 ‘우리는 카오스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질서를 필요로 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들뢰즈․가타리, 1995, 289) 그에 따르면 카오스를 물리치는 세 가지 승자가 있다. 철학자, 과학자, 예술가가 그것이다. 이들은 카오스에 침잠하여 그것과 투쟁하는 것을 통해 얼마만큼의 질서를 가져온다. 철학의 변주들(variations), 과학의 변수들(variables), 예술의 변종들(variétés)이 그것이다. 변주들은 분리된 관념들의 연상이 아니라 한 개념 내의 불분명한 지대들을 통과하는 재연결들이고, 변수들은 사물들 내에 있는 특성들의 연결이 아니라 국부적 확률들로부터 총체적 우주론으로 전개되는 지시관계의 분할구도상에서의 유한좌표들이며, 변종들은 기관 내에서 감각의 재생을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을 되돌릴 수 있는 비유기체적 구성의 구도상에서 지각의 존재, 감각의 존재를 세운다.(294) 들뢰즈는 『베르그송주의』, 『니체와 철학』, 『주름』, 『차이와 반복』, 『의미의 논리』, 『천개의 고원』 등을 통해 철학의 변주들을 제시했고 『프루스트와 기호들』, 『감각의 논리』, 『카프카』 『시네마』를 통해 예술의 변종들을 제시했다. 또 곳곳에서 그는 과학이 생산한 변수들에 대해 서술했다. 그렇다면 네그리가 우연성에서 필연성을 건져내는 활동으로 평가했고, 실제로 자신의 작업들 전체에서 힘들여 가공한 업(res gestae), 즉 산 노동에 대해서 들뢰즈는 어떻게 평가했는가? 분명히 『앙띠 오이디푸스』와 『천개의 고원』에서 그는 이 문제를 다룬다. 『앙띠 오이디푸스』에서의 ‘욕망하는 생산’, 그리고 『천개의 고원』에서의 ‘생성’이 그것이다. 그러나 들뢰즈에게서 맑스와 네그리가 분석의 중심에 놓은 노동은 점차 배제되는 경향이 있다. 『앙띠 오이디푸스』의 욕망하는 생산에서 노동은 욕망하는 생산의 일부로 사고되지만 욕망하는 생산을 부당하게 종합하는14. 사회체들에 포섭된 형태로 등장한다. 『천개의 고원』에서 들뢰즈는 생성(되기)을 생산으로부터 구별짓기 시작하는데 이 과정에서 노동의 배제는 더욱 뚜렷해진다.


되기는 결코 모방하기도 동일화하기도 아니다. 그것은 또한 퇴행하기-진보하기도 아니다. 또한 그것은 대응하기도 아니고 대응관계를 설립하기도 아니다. 또한 그것은 생산하기, 즉 계통을 생산하기 계통을 통해 생산하기도 아니다. 되기는 자기 나름의 고름을 갖고 있는 하나의 동사이다. 그것은 “…처럼 보이다”, “…이다”, “…와 마찬가지이다”, “생산하다” 등으로 귀착되지 않으며 우리를 그리고 귀착시키지도 않는다.(들뢰즈․가타리, 2001, 454)


계통관계나 유전적 생산이 없는 서식, 전파, 생성을 어떻게 상상해 볼 수 있을까? (…) 우리들은 계통관계와 전염병을, 유전과 전염을, 유성생식이나 성적 생산과 전염을 통한 서식을 대립시킨다. 인간 패거리이건, 동물 패거리이건 하여간 패거리들은 모두 전염, 전염병, 전쟁터, 파국과 더불어 증식한다. 이들은 스스로를 재생산하지 않지만 그러나 매번 다시 시작하면서 영토를 얻어가는 성적 결합에서 태어난 그 자체로는 생식능력이 없는 잡종들과 같다. 반자연적 관여들, 반자연적 결혼들은 모든 왕국을 가로지르는 참된 <자연>이다. 전염병이나 전염에 의한 전파는 유전에 의한 계통관계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이 두 주제가 서로 섞이고 서로 상대를 필요로 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흡혈귀는 계통적으로 자식을 낳는 것이 아니라 전염되어 가는 것이다. 전염이나 전염병은 예컨대 인간, 동물, 박테리아, 바이러스, 분자, 미생물 등 완전히 이질적인 항들을 작동시킨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자연>은 이런 식으로만, 자기자신에 반해서만 진행한다. 우리는 계통적 생산이나 유전적 생산과는 멀리 떨어져 있다. 이것들에서는 동일한 종 내에서의 성의 단순한 이원성과 여러 세대에 걸친 작은 변화들만이 차이로서 유지될 뿐이다. 이와 반대로 우리들의 입장에서는 공생하고 있는 항들만큼이나 많은 성들이 있으며 전염과정에 개입하는 요소들만큼이나 많은 차이들이 존재한다. 우리는 수많은 것들이 남성과 여성 사이를 지나간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들은 바람을 타고 다른 세계에서 오며, 뿌리들 주변에서 리좀을 형성하고 생산이 아닌 오직 생성의 견지에서만 자신을 이해하게 된다.(460)


생성개념이 이처럼 유전적 ‘재생산’에서 분리-대립되는 한에서 그것이 사회적 생산에서 분리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로 보인다.


소수자가 혁명적인 것은 세계적 규모의 공리계를 의문시하는 이보다 훨씬 더 심층적인 운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수자의 역량, 즉 독자성은 프롤레타리아 속에서 형상과 보편적 의식을 발견한다. 그러나 노동계급이 기왕에 획득한 사회적 지위나 심이어 이미 이론적으로 극복한 국가에 의해 규정되는 한 그것은 오직 “자본” 또는 자본의 일부(가변자본)로서 나타날 뿐 자본의 판(=계획)에서 벗어날 수 없다. 기껏해야 그러한 계획은 관료적인 것이 될 뿐이다. 반대로 자본의 판에서 벗어나고 항상 그렇게 하고 있을 때에야 비로소 대중은 끊임없이 혁명적으로 되고 가산 집합들 간에 성립되는 지배적 균형을 파괴할 수 있다. 아마존-국가, 여성들의 국가, 임시적 노동자들의 국가, (노동 “거부” 국가가 어떨지는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 소수자가 문화적․정치적․경제적으로 지속가능한 국가를 구성하지 않는 것은 국가-형식도 또 자본의 공리계 또는 이에 대응하는 문화라는 것이 소수자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901~2)


이 대목에서 우리는 들뢰즈가 사회적 생산과 노동을 생성에서 배제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노동이 자본의 판에 포섭된 가변자본이라는 인식이 그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국가 속에서 노동을 종합할 가능성을 찾는 사회민주주의적 노동관을 비판함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여기서 오뻬라이스모가 들뢰즈와 (그리고 오뻬라이스모 당시의 네그리 자신도) 공유했던 ‘노동력=가변자본’이라는 등식에 대한 네그리의 문제제기를 서둘러 살펴보도록 하자.


이 비물질노동의 형식들에서 협력은 노동 자체에 완전히 내재적이다. 비물질노동은 즉각적으로 사회적 상호행위와 협력을 포함한다. 달리 말해 비물질노동의 협력적 측면은, 이전의 노동형식들에서처럼, 외부에서 부과되거나 조직되지 않는다. 오히려 협력은 노동활동 그 자체에 완전히 내재적이다. 이 사실은 노동력이 ‘가변자본’으로, 즉 자본에 의해서만 활성화되고 응집되는 힘으로 생각되는 (고전적 정치경제학과 맑스주의적 정치경제학에 공통적인) 낡은 관념을 의문에 붙인다. 왜냐하면 노동능력의 협력적 힘들(특히 비물질적 노동능력)은 노동에게 그 자신을 가치화할 가능성을 제공하기 때문이다.(Hardt and Negri, 2000, 294, 번역은 인용자).


네그리에게서 노동은 (특히 비물질노동은) 협력을 내재화하는 생성의 활동으로 평가됨에 반해 들뢰즈에게서 노동은 자본의 판에 예속된 인간 활동으로, 체제 재생산의 활동으로 인식된다. 그러므로 생성은 직접적 노동거부를 통해, 노동으로부터의 탈주를 통해, 생성의 활동들인 예술, 과학, 철학을 통해 비로소 가능해지게 된다. 이것이 소수정치(학)이라면 네그리의 삶정치학은 예술, 과학, 철학 등까지 모두 노동으로 포섭되어진 삶정치적 상황에서, 그것들을 비물질노동의 양상들로 파악한다. 그는 산 노동을 포섭하며 그것의 공통성을 착취하는 체제로부터 탈출할 출구를, 노동에 내재하는 협력적 자기가치화 능력에서 찾는다.15.

이 분명한 차이를 다시 우리가 설정한 애초의 문제틀 속으로 가져가 보기로 하자. 소수정치에서 잠재적인 것에서 현실적인 것으로의 이행(분화와 극화)은 다수적인 것의 합성과정이며 지층과 체제의 구축과정으로 파악된다. 현실적인 것은 하나의 결과, 산물로 이해될 뿐 새로운 이행과 구성의 평면을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따라서 소수정치는 현실적인 것에서 잠재적인 것을 미분하는 정치로 나타난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잠재적인 것에서 잠재적인 것으로 운동하는 잠재화의 정치학이다. 그것은 ‘기관 없는 몸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의 문제의식에 의해 이끌린다. 역행(involution). 이것은 소통되고 전염되기 위해 유전적인 계통적 진화(evolutioon)이기를 그치는 리좀권 속에서의 사건이다. 소수정치적 역행은 현실적인 것에서의, 갇힌 상황으로부터의, 지층들로부터의, 체제로부터의 도주이다. 소수정치에서 민중은 없다. 오히려 민중은 창조되어야 할 것으로 남아 있다. 그것은 ‘자신의 고유한 선을 따라, 주어진 여러 항들 “사이에서”, 할당 가능한 관계를 맺으면서 전개되는 하나의 블럭을 형성하는 일’(들뢰즈․가타리, 2001, 454)이다.

그렇다면 소수정치가 창조해야 할 이 민중과 삶정치가 말하는 다중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들뢰즈와 네그리는 공통적으로 근대적 혹은 고전적 민중의 부재를 말한다. 네그리에게서 민중은 근대적 주권들의 초석으로서 ‘사회적 차이들을 하나의 정체성으로 종합하고 환원하는 하나’이다.(Hardt & Negri, 2004, 99) 탈근대로의 이행 속에서 민중을 생산하는 메커니즘은 크게 와해되었다. 들뢰즈도 주체로서의 민중의 해체를 현대의 특징으로 보는 점에서 네그리와 공명하는 견해를 제시한다. 그는 에이젠슈테인, 푸도프킨, 도브첸코, 베르토프 등의 고전영화와 2차대전 전후의 미국영화에서 민중은 ‘비록 억압되고 배반되고 종속되고 맹목적이거나 무의식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존재하며’, ‘현실화 과정 속에 있는 잠재적 실존성을 갖고 있다’고 본다.(들뢰즈, 2005, 419~20) 그것은 현실화되기 전에 이미 현실적인 것으로서, 추상적이지 않은 이상적인 것으로서 이미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대중예술로서의 영화가 민중이 진정한 주체가 되는 탁월한 혁명예술 혹은 민주적 예술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 나왔다는 것이다.(420) 이 믿음은 ‘노예적 대중을 영화의 대상으로 삼은 히틀러의 도래, 민중의 일체성을 당의 전제적 단일성으로 대체한 스탈린주의, 더 이상 스스로를 과거의 민중들이 응집하는 도가니나 장차 올 민중의 어린 배아로서 믿을 수 없게 된 미국 민중의 해체’(420)를 통해 와해된다. 그 결과 현대적 정치영화는 ‘민중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혹은 아직 없다 …. 민중이 결여되어 있다.’(420)는 기저위에서만 가능할 것이라고 들뢰즈는 진단한다. 카프카, 클레, 제3세계의 시네아스트 등은 제3세계 및 소수집단들의 삶과 관련하여 민중의 부재를 보고하고 있다. 하지만 들뢰즈는 ‘부재하는 민중에 대한 이 보고서는 정치적 영화의 포기가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제3세계와 소수집단들이 이제부터 정초해 나가야 할 새로운 기초를 이룬다. 예술, 그리고 특히 영화는 이러한 과업에 무엇보다도 참여해야 한다. 이미 존재한다고 전제된 민중에 말을 거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민중의 창조에 기여할 것. 주인, 식민 지배자들이 “여기에는 결코 민중이란 없었다”라고 주장하는 순간에, 결여된 민중은 이미 하나의 생성이 되고, 이 민중은 판자촌과 수용소, 혹은 게토, 즉 당연히 정치적인 예술이 헌신해야 할 새로운 투쟁의 조건 속에서 스스로를 창조하게 되는 것이다.’(421~2, 강조는 인용자)라고 말함으로서 민중의 부재가 아니라 민중의 새로운 창조에 방점을 찍는다.

이 생성으로서의 민중이 네그리의 다중과 겹치는 것일까? 이렇게 묻는 순간, 다중이 생산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구축된 개념임에 반해 (민중의) 생성은 생산과는 다른 과정이라는 앞에서의 논의를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시네마』(Cinema)에서 생성으로서의 민중에 대한 서술이 역사적임에 반해,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그것은 논리적이다. 그러므로 후자에서 민중의 생성 논리가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그 논리의 첫 번째 근거는 카오스로부터 카오이드들(Chaoïdes=카오스를 재단하는 평면들 상에서 산출된 현실들)을 재단해 내는 세 가지 사유 혹은 창조의 형식이 예술, 과학, 철학이라는 명제에서 찾아진다. 둘째로 들뢰즈는 ‘이 세 가지 평면들의 접합(단일성이 아닌), 그것이 곧 두뇌’(300)이며 두뇌가 주체가 되는 자리에서 일대전환이 나타난다고 본다. 이제 사유하는 것은 두뇌이지 인간이 아니다. 인간은 단지 두뇌의 결정체일 뿐이다. 이 곳에서 철학, 예술, 과학은 객체화된 두뇌의 정신적 대상들이 아니라 두뇌가 ‘주체로 즉 사유-두뇌로 되는 세 가지 양상들이며, 두뇌가 카오스에 잠겨 카오스와 대적하기 위해 타고 가는 세 개의 뗏목들, 세 개의 평면들이다’. 사유-두뇌는 정신 그 자체이며 주체이고 자기초월체(superjet)이다. 개념적 사유-두뇌(철학)는 개념들이 창조되는 내재성의 평면 위에서 개념적 인물들을 이끌어 내고 감각적 사유-두뇌(예술)는 구성의 평면에서 변종이 된 진동으로서 영혼 혹은 힘으로 되어 미학적 형상들을 창조하며, 인식적 사유-두뇌는 지시관계 혹은 좌표화의 평면에서 기능들과 부분적 관찰자들을 창출한다.(304~312) 민중이 창조되는 세 번째 과정은 철학, 예술, 과학 사이의 내재적 간섭이다. 간섭은 예술이 비-예술을, 과학이 비-과학을, 철학이 비-철학을 필요로 하는 한에서 필연적이다. 이 세 평면들은 실현되는 동시에 사라져 줄 것이 요청되는 시작이나 끝으로서의 부정이 아니라, 자신들의 생성이나 발전의 매순간 부정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민중은 어디에서 창조되는가?


이 세 개의 부정이 두뇌 평면과의 관계에서는 여전히 서로 구별된다 하더라도, 두뇌가 침잠하는 카오스와의 관계에서는 더 이상 서로 구별되지 않는다. 이러한 침잠 속에서 ‘다가올 민중’의 그림자가 카오스로부터 간신히 빠져나오는 것 같다. 그것은 예술이, 뿐만 아니라 철학과 과학이 부르는 그대로, 대중적-민중, 세계적-민중, 두뇌적-민중, 카오스-민중이다. 그것은 클레의 비-개념적 개념이나 칸딘스키의 내적 침묵처럼, 세 개의 학문 속에 누워있는 비-사유적 사유이다. 바로 거기에서 개념들, 감각들, 기능들은 결정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고, 그와 동시에 철학, 예술, 과학은 구별 불가능한 것이 된다. 마치 철학, 예술, 과학은 서로 다른 본질을 통해 연장되면서 끊임없이 그들을 따라다니는 동일한 한 그림자를 함께 나눠 갖고 있는 듯하다.(314)


민중이 창조되는 곳은 두뇌가 카오스와 관계하는 지점이다. 그것은 철학, 예술, 과학에 자신의 힘을 나눠주는 카오스-민중이자 두뇌적-민중이다. 그것은 결정할 수 없고 구별할 수 없는 영역에서 일종의 그림자 존재로서, 잠재력으로서 생성된다. 철학, 예술, 과학은 이 잠재력을 분유하며 수행하는 평면들이다. 카오스-민중이자 두뇌적-민중인 이 생성의 민중은 개념상에서 척도 바깥의 것이자 척도 너머의 것인 네그리의 다중과 많은 점에서 겹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이가 나타난다. 들뢰즈의 두뇌적-민중은 사유하는 정신적 주체성으로 나타남에 반해 네그리의 다중은 노동하는 사회적 주체성으로 나타난다. 네그리에게서 철학, 예술, 과학은 탈근대적 다중지성의 조건 하에서 작용하는 비물질노동의 형태들임에 반해 들뢰즈에게서 이것들은 결코 노동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네그리에게서 다중이 현실성으로 이행하는 힘들의 연결로서, 즉 가능성의 수준에서 정의되고 있음에 반해 들뢰즈의 생성하는 민중은 예술, 철학, 과학에 자신의 힘들을 나눠주는 잠재성의 수준에서 정의된다. 네그리에게서 다중의 공통성은 산 노동 속에서 발생하고 발전하는 협력임에 반해 들뢰즈에게서 그것은 두뇌적-민중들(과학, 예술, 철학) 속에서의 내재적 간섭으로 나타난다. 들뢰즈에게서 새로운 민중은 정신적이다. 그에게서 ‘사유하는 것은 바로 두뇌이지 인간이 아니다. 인간은 단지 두뇌의 결정체일 뿐이다’.(302~3) 이러한 생각은 맑스의 시험을 이겨내는가?


두뇌 속에서 사유의 총체로 현상하는 바와 같은 전체는 세계를 유일하게 가능한 방식으로 점취하는 사유하는 두뇌의 산물인데, 이 방식은 세계의 예술적 종교적 실천적이고 정신적인 점취와는 상이하다. 즉 두뇌가 사변적 이론적 상태에만 있는 한에 있어서, 현실적 주체는 여전히 두뇌 밖에서 자립적으로 현존한다. 따라서 이론적인 방법에 있어서도 주체, 즉 사회는 전체로서 항상 표상에 어른거리고 있어야 한다.(맑스, 2000, 72)


맑스에게서 사유는 두뇌를 통해 세계를 점취하지만 실제적으로 사유하는 것은 사회이다. 사유가 주체적이려면 그것은 현실적 주체와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사유와 몸의 결합의 이론, 즉 혁명의 두뇌인 철학이 혁명의 심장인 프롤레타리아트를 사로잡아야 한다는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의 강한 주장이 여기에 근거를 두고 있다. 두뇌가 그것으로부터 분리된 몸-주체를 갖지 않은 두뇌-주체의 시대. 들뢰즈는 이 현실적 주체로서의 사회가 두뇌-주체로 전환한 시대로서 현대를 파악한다. 여기서 우리는 맑스의 일반지성 개념의 분명한 반향을 발견한다. 두뇌-사회의 시대. 여기서 우리는 들뢰즈의 생성하는 민중이 네그리의 다중 개념의 핵심적 특징들(지성, 감각, 정동, 소통)을 이미 예견하고 있음을 목격한다. 이런 의미에서 들뢰즈의 새로운 민중은 발생하고 있는 다중의 징후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양자 사이의 간극에서 사유해야 한다. 새로운 민중은 다중에게 ‘당신이 현실성으로 추락할 위험을, 그래서 주권존재로 전화할 위험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 것인가?’라고 묻고 있다.16. 이에 대한 네그리의 응답은 다중은 현실성이 아니라 가능성이라는 것이었다. 이제 다중이 새로운 민중에게 묻는다. 왜 두뇌적-민중은 철학, 과학, 예술이라는 ‘세 딸’(들뢰즈․가타리, 300)만을 거느려야 하는 것인가? 더 많은 딸들과 아들들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무수한 활동들이 오늘날 두뇌적-민중의 사회적 자식들이 아닌가? 만약 두뇌적-민중이 이 세 딸만을 자신의 딸로서 인정하고 노동의 이름 하에 수행되는 다른 활동들을 배제한다면, 플라톤이 모방을 통한 분유만을 인정했던 것과 유사한 위계를 새로운 민중 내부에 도입하는 것은 아닌가? 현실성으로부터 잠재성의 독립성(‘잠재성은 현실성의 반쪽이다’17.)과 그것의 정신적 본질(‘두뇌는 정신 자체이다’)18.을 강조함으로써 사유에 부당한 특권을 부여하게 되지 않겠는가? 이것은 정신과 물질, 사유와 연장을 가로지르는 다중의 특이성들이 공통적인 것을 구축하는 것을 저해하지는 않겠는가? 탈근대가 비물질성의 헤게모니에 의해 감싸여 있는 것이 사실이라 해도, 물질적인 것을 비물질적인 것의, 현실적인 것을 잠재적인 것의 결정체로 파악하여 전자를 후자에 종속시키는 것은 잠재성에서 현실적인 것으로 이행하는 카이로스의 시간에 대한 부정을, 이 세계에 대한 감각적이고 주체적이며 실천적인 태도의 약화를 가져오지 않겠는가?

이제 글을 맺자. 들뢰즈와 네그리는 맑스의 실제적 포섭을 극단적으로 사유하면서 그 속에서 새로운 주체성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이들은 실제적 포섭의 심화시대를 제2인터내셔널적인 붕괴론과 정치적 기회주의에 따라 대응하지도 않고 프롤레타리아트를 혁명적 동일성으로 파악한 제3인터내셔널의 방법에 따라 사유하지도 않는다. 또 이들은 실제적 포섭의 시대를 비관적으로 전망했던 비판이론들과는 다른 혁신의 정치학을 제시한다. 소수정치와 삶정치는 이런 점에서 실제적 포섭의 심화 시대에 ‘무엇을 할 것인가?’를 사유할 수 있는 이론적 틀을 제시하려는 노력이다. 앞에서의 분석에 따를 때, 소수정치는 삶정치의 적극적 구성 요소로 이해된다. 소수정치는 지배적 현실의 해체와 파열, 그리고 그것으로부터의 도주를 함축하며 좀더 적극적인 경우에는 그 파열선과 도주선의 블럭화(즉 네트워킹과 공통화)를 의미하는데, 이것들은 삶 속에서 발생, 형성, 구성되는 협력적 공통되기의 일환이기 때문이다. 이런 전제 위에서 노동거부는 새로운 삶의 공통적 생산의 한 계기이며, 프롤레타리아트와 다중은 삶의 공통적 구성능력에 붙여진 이름이고 코뮤니즘은 삶의 공통되기의 과정 자체이다. 자율은 갇힌 공간으로부터 독립된 어떤 공간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특이성들이 어떤 초월적 매개도 없이, 아니 그러한 매개의 거부 위에서 구축하는 공통체적 주체성 그 자체의 이름이다. <미주>

1. 여기서는 주로 니콜래스 쏘번의 ‘소수정치(학)’적 독해를 논의의 중심에 놓을 것이다.

2. ‘때’에 대해서는 들뢰즈 외에 실린, 조정환의 글 「비물질노동과 시간의 재구성」 참조.

3. 들뢰즈는 ‘아름다운 영혼’에 빠질 위험을 ‘피흘리는 투쟁들과는 거리가 먼 차이, 서로 연합하고 화해할 수 있는 차이들에 그치고 마는 위험’으로 정의한다.(들뢰즈, 2004, 19)

4. 맑스의 추상적 가능성 및 구체적 가능성 개념에 대해서는 M. Hardt & A. Negri, 2004, p. 144~5 참조.

5. 이러한 생각에 대해서는 들뢰즈, 2004, 449~460 참조.

6.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Difference and Repetition)을 비롯한 철학적 저작들에서 가능성 범주를 기각하지만 내가 보기에 기각되는 것은 ‘재현적 가능성’이며 ‘실재적 가능성’의 개념은 견고하게 유지되고 발전된다. 예컨대 강도, 특이성, 각개성(heccéite) 등의 개념이 그것이다.

7. 스토아학파의 비물체성, 스피노자의 실체, 라이프니츠의 단자, 니체의 힘, 베르그송의 지속 등은 잠재성 개념의 복원에서 중요한 기여를 한다.

8. “동일자에서 벗어나 있고 부정적인 것에 의존하지 않는 순수한 차이들을 불러들이는 데에는 많은 위험이 따른다. 가장 큰 위험은 아름다운 영혼의 표상들로 전락하는 것이다. 그것은 피흘리는 투쟁들과는 거리가 먼 차이, 서로 연합하고 화해할 수 있는 차이들에 그치고 마는 위험이다.”(들뢰즈, 2004, 19) 들뢰즈는 이러한 위험을 인식하면서도 “문제들은 아름다운 영혼의 동일성을 박탈하고 그의 선한 의지를 깨뜨리는 가운데 그 영혼을 파괴하는 힘을 낳는다. 문제틀과 미분적 차이가 규정하는 어떤 투쟁과 파괴들. 이것들에 비추어 보면 부정적인 것의 투쟁과 파괴들은 외양에 불과하다. (…) 모든 사유는 침략이다.”(같은 책, 20쪽)라고 말한다.

9. 이러한 관점에 입각하여 전개된, 쏘번의 소수정치학에 대한 보충적 비판은 쏘번의 『들뢰즈 맑스주의』(Deleuze, Marx and Politics) 역자서문 중에서 17쪽~27쪽 참조.

10. “소통이란 개념이 아니라 ‘합의’를 창출하기 위한 의견들의 가능태로서만 작용할 따름이기 때문이다.”(들뢰즈, 1995, 14). “소통이란 우리에게 결여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아도는 것이며,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창조이다”(같은 책, 159). 그런데 그가 소통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정보학, 마케팅, 디자인, 광고학’ 등을 지칭한다(같은 책, 20 참조).

11. 클로소프스키로부터의 다음과 같은 인용을 통해 그는 자신의 소통불가능성을 밝히고 있다. “소통불가능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 개인의 존재가 다수의 개인들에게 귀속될 수 없도록 해주는 원리이며 이 원리는 자기동일적인 인격체를 고유하게 구성한다”(들뢰즈, 1999, 460).

12. “존재론적 관점에서 볼 때 역사의 행로는 직선으로 전개된다”(네그리, 2004 137). 이 직선 운동에 팽창 개념이 결합되면서 운동은 나선형적 형상으로 이해된다.

13. 네그리의 창조 개념은 특이성에 강조점을 둔 들뢰즈의 창조 개념에 비해 특이적인 동시에 언제나 집단적이고 공통적이다.

14. 부당한 종합들에서 연결은 외삽으로, 이접은 배제적 이중구속으로, 통접은 적용으로 나타난다.

15. 노동력 속의 자기가치화 능력에 대한 네그리의 이러한 승인을 니콜래스 쏘번은 사회민주주의적 문제의식 속으로의 회귀라고 비판한다.

16. 이러한 문제제기는 쏘번에게서 이루어졌는데, 엄밀하게 말하면 이것은 ‘민중의 부재’라는 관점에서 제기된 것이지 ‘새로운 민중의 생성’ 혹은 ‘생성하는 민중’의 관점에서 제기된 것은 아니다. 들뢰즈의 ‘민중의 부재 속에서 전개되는 새로운 민중의 생성’이라는 생각은 ‘민중의 부재’ 개념에 기초한 쏘번의 생각보다는 한층 더 ‘가능성으로서의 다중’에 접근한다.

17. 이에 대해서는 들뢰즈, 2004, 453을 참조하라.

18. 이에 대해서는 들뢰즈․가타리, 1995, 304를 참조하라.<주제어>

가능성, 잠재성, 현실성, 특이성, 공통성, 실제적 포섭, 삶정치, 삶권력, 코뮤니즘, 다중, 제국, 소수정치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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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 Hardt & A. Negri. Empire, Harvard Univsity, 2000.

鈴木 泉, “潜在性の存在論―前期ドゥルーズ哲学の射程”, 『情況』 제3기 제4권 제3호, 190-208쪽(鈴木 泉, 「잠재성의 존재론-초기 들뢰즈 철학의 사정」, 김상운 옮김, 미발표번역고, 2005).

네그리, 안또니오. 『혁명의 시간』, 정남영 옮김, 갈무리, 2004(Negri, Antonio. Time of Revolution, Continum, 2002).

네그리, 안또니오․ 하트, 마이클, 『제국』, 윤수종 옮김, 이학사, 2001(M. Hardt & A. Negri. Empire, Harvard Univsity, 2000).

들뢰즈 질. 『시네마․2 시간-이미지』, 이정하 옮김, 2005(Deleuze, Gilles, Cinema 2: The Time-Image, trans. H. Tomlinson and R. Galeta, Minneapolis: Univ. of Minnesota Press, 1989).

들뢰즈, 질. 『의미의 논리』, 이정우 옮김, 한길사, 1999(Deleuze, Gilles. The Logic of Sense, trans. M. Lester, ed. C. v. Boundas, New York: Columbia Univ. Press, 1990).

들뢰즈, 질. 『차이와 반복』, 김상환 옮김, 민음사, 2004(Deleuze, Gilles. Difference and Repetition, trans. P. Patton, New York: Columbia Univ. Press, 1994).

들뢰즈, 질․가타리, 펠릭스. 『천개의 고원』, 김재인 옮김, 새물결, 2001(Deleuze, Gilles and Guattari Felix. A Thousand Plateaus: Capitalism and Schizophrenia, trans. B. Massumi, Minneapolis: Univ. of Minnesota Press, 1987).

들뢰즈, 질․가타리, 펠릭스. 『철학이란 무엇인가』, 이정임․윤정임 옮김, 현대미학사, 1995(Deleuze, Gilles and Guattari Felix. What is Philosophy, trans. H. Tomlinson and G. Burchill, London: Verso, 1994).

들뢰즈, 질 외. 『비물질노동과 다중』, 갈무리, 2005.

맑스, 칼. 『자본론․1』,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1990(Marx, Karl. Capital. 1, Penguin, 1992).

맑스, 칼.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1』, 김호균 옮김, 백의, 2000(Marx, Karl. Grundrisse, trans. Martin Nicolaus, Vintage Books, New York, 1973)

쏘번, 니콜래스. 『들뢰즈 맑스주의』, 조정환 옮김, 갈무리, 2005(Thoburn, Nicholas, Deleuze, Marx and Politics, Routledge, London, 2003).

이진경. 『노마디즘』, 휴머니스트, 2004.

패튼, 폴. 『들뢰즈와 정치』, 백민정 옮김, 태학사, 2005(Patton Paul. Deleuze and the Political, Routledge, London, 2000)

하트, 마이클. 『들뢰즈 사상의 진화』, 김상운․양창렬 옮김, 갈무리, 2004(Hardt, Michael. Gilles Deleuze: An Apprenticeship in Philosophy,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93)



The 'minor politics' of Gilles Deleuze and the 'biopolitics' of Antonio Negri


Joe Jeong-Hwan(Sung-Kong-Hoe University)

Gilles Deleuze and Antonio Negri had developed their unique politics. We can sum up Gilles Deleuze's politics as 'minor politics' and Antonio Negri's politics as 'biopolitics'. They had groped for the possiblility of new subjectivity in the age of real subsumption of labor under capital. The politics of them are different from the auto-destruction theory and the political opportunism of 2nd International. They did not think proletariat as a revolutionary identity as the politics of Third International. They proposed a politics of innovation which is different from the critical theory of Frankfurt School that viewed the age of real subsumption pessimistically. So 'minor politics' and 'biopolitics' are considered as the important efforts which suggest the theoretical framework of 'What is to be done' in the age of real subsumption. I propose an idea which interpret the 'minor politics' as a component of 'biopolitics'. 'Minor politics' of Deleuze implies the destruction of the dominant system and the flight from it. And more positively it means the creation of blocs of lines of flight. We can consider it as a component of becoming-common of the creative powers of multitudes. 'Biopolitics' of Negri have developed more fully the potential of 'minor politics' through linking the concept of singularity in minor politics with the concept of commonality. It develops an concept of modern proletariat as the common constituent power of Geschichte. It is named by multitude. The minority in Deleuze and the multitude in Negri is the possible agency of becoming-common without any transcendent mediation.




Key Words: possibility, virtuality, reality, singularity, commonality, real subsumption, biopolitics, biopower, communism, multitude, empire, minor politics

▒▒The Autonomy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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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17 21: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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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율평론 14호 / 발행일:2005-10-11 프린트
[시몽동 읽기(1)] 초개체성, 기술적 활동, 물상화 -- 시몽동 읽기
P. 비르노 & 히로세 / 역자 : 김상운




초개체성, 기술적 활동, 물상화
―질베르 시몽동을 읽다





* 출  처 : 情況, 2004년 12월호, pp. 94~113.
* 원  제 : 超個体性, 技術的活動, 物象化―ジルベール․シモンドンを読む
* 글쓴이 : 빠올로 비르노와 히로세 쥰(廣瀨 純)
* 이탈리아어판 : http://multitudes.samizdat.net/article.php3?id_article=1563
* 옮긴이 : 김상운(sanggels@freechal.com)
* 교정자 : 양창렬(nomade02@hotmail.com)



히로세 : 오랫동안 거의 잊혀져 왔던 프랑스 철학자, 질베르 시몽동Gilbert Simondon(1924~89)의 사상이 80년대 말부터 프랑스 철학 무대 위에 다시 부활했습니다. 우선 그가 사망한 1989년에 박사학위 부논문인 󰡔기술적 대상들의 존재양태에 관하여󰡕1)가 재간행되었고(초판은 1958년), 또 1958년에 제출했던 박사학위 주논문2)의 후반부가 󰡔심적 및 집단적 개체화󰡕3)라는 제목을 달고 같은 해[1989년]에 출판되었습니다. 박사학위 주논문의 전반부는 1964년에 󰡔개체와 그 물리적․생물적 발생󰡕4)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가 1995년에 같은 제목으로 재간행되었습니다. 1992년에는 파리의 ‘국제철학학교’Collège international de philosophie에서 시몽동의 작업에 관한 대규모 콜로키움이 개최되었고, 이 콜로키움에서는 시몽동의 작업의 풍요로움을 결정적인 방식으로 재발견해냈습니다.5) 그리고 1993년에는 질베르 오트와에 의해 시몽동의 사유에 관한 최초의 전문서적6)이 출판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1999년에 이르면 이번에는 뮤리엘 콩브가 PUF 출판사의 유명한 총서인 ‘Philosophies’의 한 권으로 시몽동 입문서7)를 출판하게 되었습니다. 시몽동의 사유에 관한 가장 최신의 저작으로는 자크 루Jacques Roux가 편저하여 2002년에 간행된 논집8)이 있습니다.


시몽동의 사상을 부활시키려는 듯한 현재의 흐름은 현대 철학의 대안적 흐름과 다소 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즉 프랑스에서 질 들뢰즈에 대한 독해의 심화라고 하는 흐름이 바로 그것입니다. 적어도 시몽동에 대한 재평가의 흐름에 있는 모든 논자들은 당신이 시몽동의 이름을 몇 번이나 언급하면서 쓰고 있듯이, 시몽동이 ‘질 들뢰즈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특히 중요했다’고 하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들뢰즈는 1966년에 󰡔개체와 그 물리적․생물적 발생󰡕에 대한 서평9)을 발표했습니다만, 이 서평은 단순한 서평이 아니라 들뢰즈가 이로부터 3년 후에  쓴 󰡔차이와 반복󰡕에서 발전시켰던 ‘différent/ciation’이라는 개념―󰡔차이와 반복󰡕에서 특히 중심적인 개념―에 지극히 밀도 높은 형태로 완전히 스며든 텍스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1969년 이후, 즉 󰡔차이와 반복󰡕, 󰡔의미의 논리󰡕가 간행되었던 해 이후에, 시몽동의 사유는 직간접적인 형태로 들뢰즈의 작업에 항상 끊임없이 반영되어 왔습니다. 중요하게는 시몽동의 사유의 재발견이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들뢰즈의 작업에 있어서 시몽동의 중요성을 재발견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것은 들뢰즈에게―따라서 펠릭스 가타리에게도―시몽동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중요했던 프랑스인 사회학자 가브리엘 타르드의 사유에 대한 최근의 재발견의 사례와 완전히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시몽동의 사유에 대한 이러한 재발견에 관해 당신 자신이 기여한 것은 크게 나누어 다음과 같은, 상호보완적인 두 가지 지점에 놓여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흔히 ‘기술의 사상가’로 간주되곤 하는 이 철학자 시몽동의 저작 중에서도 당신은, 지금까지도 그다지 읽히지 않고 있는 󰡔심적 및 집단적 개체화󰡕의 중요성―그 중에서도 특히 그 정치적인 중요성―을 명확하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주로 이 책에서 인용된 시몽동의 사유를 맑스의 사유와 연관지우면서 당신 자신의 개념인 ‘포스트-포드주의적 다중’moltitudine postfordista 개념을 보다 엄밀하게 만들고자 한다는 점입니다. 확실히 예를 들어 뮤리엘 콩브는 앞에서 언급한 그녀의 입문서에서 󰡔심적 및 집단적 개체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고 있긴 합니다만, 이것은 그 중에서도 특히 시몽동의 ‘초개체성’transindividualité이라는 개념 속에서 들뢰즈의 ‘주름’개념의 청사진을 찾아내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또한 콩브가―그녀 역시 가지고 있던 노동의 포스트-포드주의적인 조직화라는 현대적 물음을 놓쳐 버리는 것이 아니라―시몽동의 정치적 잠재력을 찾아내고, 이것을 특히 맑스의 사유에 접근시키고 있긴 합니다만, 그녀는 특히 󰡔기술적 대상들의 존재양태에 관하여󰡕라는 책에서 바로 이 잠재력을 찾아내고 있기 때문에, ‘기술적 대상’objets techniques이라는 맥락에만 완전히 머물러 있는 꼴이 되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당신은 시몽동의 사유를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문장을 모두 세 번 정도 쓰고 있습니다. 우선 󰡔다중󰡕10)이 있고, 다음으로는 󰡔심적 및 집단적 개체화󰡕의 이탈리아어판(2001년 발행) 후기11)가 있으며, 그리고 가장 최신의 것으로는 프랑스의 「뮐티튀드」Multitudes의 최신호에 쓴 텍스트 「천사들과 ‘일반지성’―둔스 스코투스와 질베르 시몽동에게 있어서 개체화」12)가 있습니다. 실제로 지금 거론한 출판물과 관련된 한에 있어서는, 어떤 경우든 간에 󰡔심적 및 집단적 개체화󰡕를 집중적으로 논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선 첫 번째 질문입니다만, 당신은 처음에 어떻게 시몽동의 사유와 마주치게 되었습니까? 또, 시몽동을 거론할 때 당신이 󰡔심적 및 집단적 개체화󰡕를 집중적으로 논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비르노 : 제게는 개체화 원리principe d’individuation가 항상 계속적으로 근본적인 테마였습니다. 개체를 특이한singolare 것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물음이 제게 결정적인 문제인 까닭은, 이 물음을 제기함으로써 개체individuo/individu가 이미 주어진 출발점이 아니라 하나의 복잡한 과정의 도착점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개체화 원리’라는 관념은 유일하고 반복 불가능한 것(특이성)을 공통적인 것comune―즉 모두에게 분유되어 있는 것―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사고하는 것입니다. 수년 전에 발표했던 졸저 󰡔관습과 유물론󰡕13)에는 특히 ‘Principium individuationis’라는 제목이 달린 한 장(章)이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저와 시몽동의 마주침의 계기를 설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제가 (물리적, 심적, 집단적) 개체화를 그 중심축으로 삼았던 사상가를 외면할 수 있었겠습니까?



시몽동의 논의에서 제가 크게 감명을 받았던 것은 다음 두 가지입니다. 그 중 하나는, 어떤 주체에 있어서도 개체화된 부분의 옆에는 항상 얼마간의 전개체적인 실재réalité pré-individuelle가 계속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논의가 의미하는 바는 ‘주체’soggetto/sujet라는 관념 자체가 ‘공통적인 것’il Comune과 ‘특이한 것’il Singolare의 항상적인 상호연결로서 이해된다는 점입니다. 시몽동에게 두 번째로 중요한 논의는 집단il collettivo/le collectif에 관한 것입니다. 즉 집단은 개체를 억압하는 것도 개체보다 열등한 것도 아니며, 오히려 개체화를 세련되게 만들고 강화시키는 환경이라고 하는 논점입니다. 시몽동에 따르면, 모든 주체가 자기 자신 속에 포함하고 있는 전개체적인 실재의 부분 자체를 개체화한다는 것은, [개체를] 다수의 특이적 존재 사이의 관계 속에서 놓고 보는 것이자, 집단 속에 놓고 보는 것이며, 정치사회적인 협동 속에 놓고 보는 것입니다. 전개체적인 것은 바로 집단적 실천 속에서 초개체적인transindividuel 것으로 변형됩니다. 그러므로 또한 이 초개체적인 것이라는 범주는, 포스트-포드주의적인 지구화라는 수준에서 볼 때, 이미 더 이상 국가적이지 않은 어떤 공적 영역, 비대의제적인 어떤 민주주의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시몽동의] 이러한 두 가지 논점이 진정 새롭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 속에서입니다. 시몽동의 논의는 널리 만연해 있는 다수의 견해, 정치적․철학적인 다수의 미신을 전복시킵니다.


제가 󰡔심적 및 집단적 개체화󰡕를 제외한 시몽동의 저작을 무시하고 있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저는 그의 기술에 관한 저작(󰡔기술적 대상들의 존재양태에 관하여󰡕)을 주의 깊게 읽었습니다. 1년 정도 전이던가요, 이 저작을 거론하면서 대학에서 세미나를 진행했던 적이 있습니다만, 그 텍스트는 아직 출판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계속 출판되지 않은 상태로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술에 관한 시몽동의 사유는 기술을 재앙catastrophe이라고 간주하는 사고방식과 기술을 해방이라고 간주하는 사고방식 사이에서 진동하고 있는 20세기적인 사유의 대부분이 제 자리를 찾아가게 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시몽동은 인간과 세계의 관계 속에, 미적 경험과 종교적 경험, 정치적 경험 등에 필적하는 것으로서의 위치를 기술에 다시 부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점은 틀림없이 지금 말하고 있는 것과는 별개의 것이라고,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시몽동에 따르면 이것은, 기술이 초개체적인 것이라고 하는 것, 바꿔 말하면 기술이 개개인의 정신 속에서 개체화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을 표현합니다. 기계는 인간의 사고 속에 존재하는 집단적인 것에, 즉 인간이라는 종에 특유한 어떤 것에 외재적인 면모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전개체적인 실재는 개체화된 의식의 표상들 안에서는 그에 적합한 대응물을 찾을 수 없기에, 보편적으로 사용가능한 기호, 객관화된 논리적 도식으로 이루어진 복합체로서 바깥에 투영되는 것입니다. 시몽동에 따르면 기술을 단순히 노동의 상관물로 간주하는 것은 지극히 중대한 잘못입니다. ‘기술’과 ‘노동’이라는 두 가지 항term은 서로 비대칭적이고 이질적인 것입니다. 기술은 개체적인 것인 반면, 노동은 개체적인interindividuel 것입니다. 즉 노동이 개체화된 개체들을 묶는 것인 반면, 기술은 모든 주체 속에 존재하는 공통적인 것, 또는 확실히 전개체적인 것에 소리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기술과 노동 사이에 이렇게 감추어져 있는 대조contrast가 맑스에 의해 완전히 명확하게 된 것은 아닙니다. 고용노동, 비숙련노동, 임금노동을 ‘초라한 잔재’로 환원해 버리는 이런 위대한 공적이야말로 ‘general intellect’(일반지성), 즉 공적인 (또는 초개체적인) 자원으로서의 사유에 속한다는 맑스의 유명한 서술을 다시 떠올려 보기만 하더라도 이는 충분할 것입니다.






1) Simondon, Du mode d’existence des objets technique, Aubier, 1989.

2) Simondon, L’Individuation à la lumière des notions de forme et d’information.

3) Simondon, L’Individuation psychique et collective, Aubier, 1989.

4) Simondon, L’Individu et sa genèse physico-biologique, PUF, 1964.

5) 이 콜로키움의 논문집은 Gilbert Simondon, Une pensée de L’Individuation et de la technique, Albin Michel, 1994로 출판되었다.

6) Gilbert Hottois, Simondon et la philosophie de la culture technique, Deboeck, 1993.

7) Muriel Combes, Gilbert Simondon. Individu et collectivité, PUF, 1999.

8) Gilbert Simondon, Une pensée opérative, Publications de Université de Saint-Etienne, 2002.

9) Gilles Deleuze, “Gilbert Simondon, L’Individu et sa genèse physico-biologique,” Revue philosophique de la France et de l’étranger, vol. CLVI, no 1-3, janvier-mars 1966, p. 115-8, repris dans Deleuze, L’Ille dèserte et autres textes, Textes et entretiens 1953-1974. Éditions préarée par David Lapoujade, Les Éditions de Minuit, 2002, p. 120-4. [옮긴이―이번 󰡔자율평론󰡕 14호에 같은 섹션으로 실려 있다.]

10) 원제는 󰡔다중의 문법󰡕.

11) 이 서문은 「다중과 개체화 원리」Moltitudine é principio di individuazione라는 제목으로 비르노의 최근 저작인 Quando il verbo si fa courne. Linguaggio e natura umana, Billat Boringhier, 2003에 재수록됨. [이 글은 빠올로 비르노, 󰡔다중󰡕, 김상운 옮김, 갈무리, 2004의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다.]

12) Virno, “Les Anges et le general intellect. L’Individuation chez Duns Scot et Gilbert Simondon,” Multitudes, n. 18. [옮긴이―이 글은 󰡔자율평론󰡕 14호의 같은 섹션에 양창렬의 번역으로 실려 있다.

13) Virno, Convenzione e materialismo, Theoria, Roma, 1986.




히로세 : 당신의 시몽동 독해 중에서 제가 특히 흥미 있다고 느끼는 것은[제가 특히 흥미롭게 여기는 것은], 우선 ‘기술’의 물음에서 ‘일반지성’의 물음으로, 많든 적든 마치 돌연변이처럼 이행하는 것입니다. ([사실] 시몽동 자신은 일반지성에 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기술적 대상들의 존재양태에 관하여󰡕의 결론에서, 확실히 시몽동은 그가 ‘기술적 활동’activité technique이라고 부르는 것과 ‘노동’을 근본적으로 구별하고 있으며 (“기술적 활동을 단순한 노동과 구별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 기술적 활동에는 기계의 사용만이 아니라 기술적 작업에 대해 어느 정도의 주의가 포함되어 있다고 하는 점이다. 즉 기술적 활동에는 개발․구축 활동의 연장 등과 같은 기계의 유지․조종․개량 등도 포함되어 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시몽동은] ‘소외의 첫 번째 원인’을 ‘노동’ 속에서 찾고 있습니다. (시몽동에 따르면 ‘생산수단의 소유’라는 맑스적인 물음은 부차적인 것이며, 시몽동은 이 ‘생산수단의 소유’에서 ‘소외에 속해 있는 여러 양태들 중의 하나’, 즉 ‘경제적 소외’만을 찾아내고 있습니다.) 시몽동이 ‘소외의 첫 번째 원인’을 ‘노동’ 속에서 찾아내는 까닭은, ‘노동’―또는 오히려 ‘분업/노동의 분할’divisione del lavoro―이 묶는 노동자들은 어디까지나 ‘구성된 개체’individus constitués 또는 ‘개체화된 개체’로서의 노동자이며, 노동이 이처럼 간개체적인 관계이므로 ‘노동’에서 노동자들은 ‘하나의 ... 초개체적인 관계의 구성’, 즉 ‘전개체적인 실재라는 짐burden14)에 토대를 둔 집단적 개체화’로부터 소외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모든 노동자가 가지고 있는―또는 모든 노동자들에게 분유되어 있는―이 ‘전개체적인 실재라고 하는 짐’ 또는 ‘아페이론’에 따라서만, 각각의 노동자들은 이제 ‘구성된 개체’로서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주체’(‘개체보다 큰 존재’)로서, ‘기술적 대상 속에서 자기를 표현할 수 있으며’, 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기술적 대상의 계속적인 발생’ 속에서 자기를 표현할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이런 의미에서 시몽동은 ‘소외를 줄이기 위해서는 노동이 기술적 활동으로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기술적 대상들의 존재양태에 관하여󰡕에서는 ‘기계’ 또는 ‘기술적 대상’을 수단으로 한 물질적 생산만이 문제로 되고 있기 때문에, 모든 주체=노동자가 자기 속에 포함하고 있는 ‘전개체적인 실재의 짐’(‘아페이론’, ‘자연’ 등)을 논할 때에도, 주체=노동자들이 지니고 있는 ‘기술적 대상에 관한 지식’ 등에 관한 것만으로 문제가 한정된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시몽동은 다음과 같이 서술하면서 󰡔기술적 대상들의 존재양태에 관하여󰡕의 결론을 맺고 있는 것입니다. “기술적 대상과 인간의 총체인 기업은 그 본질적인 기능, 즉 그 기술적인 작업에 토대를 두고 조직되어야만 한다”고 말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당신의 경우, 당신이 ‘일반지성’ 개념―맑스의 󰡔그륀트리세󰡕의 한 절(「기계에 관한 단장」)에서 당신이 도출해 내고 있는 개념―과 연관시키면서 ‘전개체적인 실재의 짐’을 논할 때에는, 시몽동처럼 기계에 관한 지식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말하고 사고하는 존재’로서의 ‘Gattungswesen’(‘유적 존재’) 전체에 분유되어 있는 ‘지성일반’intelletto in generale이라는 문제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것에 따르면, 당신의 경우에는 주요한 생산수단으로서의 물질적 기계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비물질적인 생산(이른바 ‘비물질적 노동’ 또는 ‘인지적 노동’) 문제를 다루는 것이 가능하게 될 것이고, 따라서 또한 ‘초개체성’이라는 개념을 당신 자신의 ‘현대의 삶 형태에 관한 분석’을 위한 하나의 무기로 삼는 것이 가능하게 되겠죠.


여하튼 당신은 󰡔다중󰡕에서, 특히 ‘일반지성’이라는 개념에 관한 맑스의 정식화가 지닌 불충분함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즉 당신은 맑스가 ‘일반지성’이라는 것을 대상화된 과학적 능력으로, 즉 기계 시스템으로 상정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죠. 시몽동의 표현을 사용하자면 맑스 역시 ‘일반지성’을 ‘기술적 대상’으로서만 구상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지금 언급했던 󰡔기술적 대상들의 존재양태에 관하여󰡕의 ‘결론’에서 시몽동이 전제했던 논의들에 관해서 어떻게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신지요? 확실히 󰡔그륀트리세󰡕의 맑스와 󰡔기술적 대상들의 존재양태에 관하여󰡕의 시몽동 사이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이 ‘불충분함’이야말로 맑스의 󰡔자본󰡕(특히 ‘인간의 신체 속에 존재하고 있는 육체적․정신적 모든 성향들의 총체’로서의 ‘노동력’ 개념을 논하고 있는 곳곳)에 대한 재독해, 그리고 이와 동시에 시몽동의 󰡔심적 및 집단적 개체화」에 대한 재독해로 당신을 이끌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요?


 



비르노 : 당신이 말한 그대로입니다. 우리는 시몽동을 [우리가 가고자 하는] 길의 윤곽을 그리기 위해서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어떤 지점에 도달하게 되면, 다른 많은 (우리의) ‘친구’ 사상가들과 마찬가지로 시몽동 역시 쉬어야 하고, 그때부터는 우리 혼자 나아가야 하죠.  우리가 받았던 도움에 관해서는 감사의 마음을 잊어서는 안 되지만, 향수든 애석해하는 마음이든 간에 이런 것들에 빠져들지는 말아야겠죠. 확실히 시몽동은 기술의 초개체적인 성질과 집단의 초개체적인 성질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시몽동이] 위의 두 가지 상이한 초개체성의 형식이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지점, 아니 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이러한 두 가지 형식이 서로 융합되는 (각각의 형식은 이 융합에 의해서 따로따로 흩어져 있을 때와는 다른 무엇인가로 변화합니다) 지점을 이끌어 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과연 시몽동이 이것을 해 낼 수 있었을까요?) 그 융합의 지점은 현대적인 산 노동, 즉 ‘대중지력’intellettualità di assa 또는 ‘인지적 노동’lavoro cognitivo입니다. 현대적인 산 노동이란 정치사회적인 집단인 동시에 ‘일반지성’이기도 합니다. 노동력은 개발력으로 됩니다만, 이것은 기계의 작동에 관한 노하우를 가지고서 노동하는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사유와 언어활동이나 상상력 등을 토대로 하는 산 주체들 사이의 협동을 통해 기계를 넘어서서 기술을 발전시키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어려워하고 있는 것은 ‘일반지성’이 지닌 이중의 측면을 적합하게 파악하는 것입니다. ‘일반지성’은 한편에서는 임금노동의 암흑시대를 넘어섰을 때 파악될 수 있는 사회적 협동의 기초이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국가나 그 중앙집권적인 행정장치나 복종의무 등을 과거의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다양한 정치적 제도의 기초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러한 이중의 측면 속에서야말로 ‘기술로서의 초개체적인 것’il transindividuale-tecnica과 ‘집단으로서의 초개체적인 것’il transindividuale-collettivo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덧붙여서 지금은 세 번째 것이 문제로 되고 있습니다. 이 세 번째 것은 위의 두 가지에서 파생되는 것입니다만, 그래도 어쨌든 이러한 두 가지와는 다른 것입니다. 이 세 번째의 초개체적인 것, ‘기술적’이며 동시에 ‘정치적’이기도 한 이 세 번째의 것을 우리는 지금까지 여러 차례 코뮤니즘이라고 불러왔습니다. 하지만 혼란을 불러일으키지 않기 위해서, 여기에서는 이것이 인간적 실천의 공통의 장소luogo comune15)이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그치고 싶습니다.


시몽동에 대한 이야기로 되돌아가 봅시다. 정치에 관해 말할 때의 시몽동에게는 일종의 순진무구함이 있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정치를 논할 때 시몽동은 그가 가지고 있는 자질보다도 낮은 곳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시몽동에게 보다 많은 정치적 암시가 엿보이게 되는 것은 오히려 그가 정치를 논하지 않을 때입니다. 가장 좋은 예는 ‘집단적 개체화’나 기술 개발에 관한 그의 서술입니다.




히로세 : 이러한 ‘기계 너머의 기술’로서의 ‘일반지성’이야말로, 바로 당신이 맑스와 시몽동의 제반 논의 속에서, 하지만 동시에 이 두 사람의 사상가―맑스와 시몽동이 말했던 ‘노동’ 모델은, 채플린이 정확히 이 말에 부여했던 의미에서의 ‘근대적인’moderno 채로 존속하고 있습니다만―를 넘어서도록 이끌어냈던 결정적인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여하튼 당신이 말한 의미로 이해하게 되면, ‘일반지성’에는 기술적인 측면과 정치적인 측면이라는 ‘이중의 측면’만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거듭 되풀이해서 말하고 있듯이 어떤 ‘양의성’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에 관해 당신은 예를 들어 󰡔다중󰡕 일본어판에 첨부되어 있는, 즉 ‘Colectivo Situaciones’와 행한 인터뷰인 「양의적인 조건」에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16) ‘현대적인 산 노동’은 ‘일반지성’에 토대를 둔 것이지만, 그래도 어쨌든 바로 ‘노동’, 즉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것입니다. (‘현대적인 산 노동’은, 순전한 ‘창의력’이 여기에서 동원된다고 하는 의미에서 ‘근대적’ 노동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 ‘생산적’ 노동이기도 하다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현대적인 산 노동’을 바로 이런 의미에서 논할 때는 ‘기술’과 ‘노동’이라는 시몽동식 구별을 유지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는 ‘기술’에 특유한 것인 ‘초개체성’이 바로 ‘노동’의 중심에 놓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실제로 이러한 의미에서 당신은 󰡔다중󰡕 제4장의 ‘테제 7’에서, ‘노동’을 ‘도구적 행위’라고 규정하면서 이것이 ‘소통적 행위’와 대립된 형태를 띤다고 하는 위르겐 하버마스의 입장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저는, 󰡔기술적 대상들의 존재양태에 관하여󰡕의 결론에서 시몽동이 제기하고 있는 물음, 즉 ‘소외’에 관한 물음에 관한 이야기로 되돌아가고 싶습니다. ‘근대적’ 생산에서는 노동의 ‘간개체성’이 ‘소외의 첫 번째 원인’이었다고 한다면, 그러므로 포스트-포드주의적 생산에서는 ‘초개체성’―하버마스의 표현을 차용하자면 ‘소통적 행위’―이 ‘노동의 밑바탕에 놓여 있다’고 한다면, 포스트-포드주의의 맥락에서 ‘소외’를 논할 수 있을까요? 저는 시몽동식의 관점, 즉 노동의 분할(분업)에 따른 ‘간개체성’이라는 관점이 아니라 맑스적인 관점, 즉 ‘생산수단의 소유’라는 관점에서도 포스트-포드주의적 생산에 관한 ‘소외’를 논하는 것은 어렵거나 불가능하지는 않은가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포스트-포드주의적 생산에서 생산수단은 ‘일반지성’에 다름 아니며, 이 ‘일반지성’은 모든 노동자들에게 항상 이미 분유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당신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합니다만, ‘소외’에 관한 물음을 제기하는 것은 포스트-포드주의적인 맥락에서도 유효한 것입니까? 만일 유효하다고 한다면 어떻게 유효한 것일까요? 만일 유효하지 않다면 왜 유효하지 않는 것일까요?


‘일반지성’의 ‘양의성’은 그러한 기술적인 측면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다른 하나의 측면, 즉 그 정치적인 측면과도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확실히 ‘일반지성’에 근거를 둔 ‘집단으로서의 초개체적인 것’은 국가의 의회정치 시스템을 위기에 빠뜨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만, 이로부터 생겨나는 것은, ‘비대의제적 민주주의’만이 아니라 당신이 󰡔다중󰡕 제2장 마지막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행정 기관들의 비대한 성장’ 역시 생겨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실제로, 오늘날의 국제정세에서, 무엇보다 특히 이라크 문제를 둘러싸고서 미합중국 정부의 경우만이 아니라 일본 정부, 이탈리아 정부 등의 경우에서도, ‘법률에 대한 시행령decree의 우위’라는 상황이 전례 없이 두드러지게 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오늘날 그러한 시행령decree에 [과연] 합법성이 있는가, 아니면 그러한 시행령을 연발하는 그러한 주권에 정당성이 있는가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제게는 특히 흥미롭습니다. 말하자면 시몽동에 따르면 ‘간개체적인’ 관계가 ‘계약’을 필요로 하고 있을 때와는 반대로, 어떠한 ‘계약’에도 근거를 두고 있지 않는 ‘집단으로서의 초개체적인 것’의 경우에는 주권의 정당성이 아예 문제 자체가 되지 않으며, 또한 자기정당화의 이러한 불가능성 자체가 역설적으로는 정부들에게 (자기를 정당화하는 것이 아닌) 시행령을 연발하게 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비르노 : 당신이 제기한 중요하고 복잡한 문제는 정말 많지만, 여기에서는 그 중에서도 몇 가지에 한정하여 대답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포스트-포드주의적 노동에 관해 당신이 지적하고 있는 양의성은 명확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면에서 포스트-포드주의적 노동은 기술의 초개체성을 자기 안에 흡수해 버렸습니다. 즉 개개인의 노동이 타인의 노동에 덧붙여짐으로써 간개체적인 협동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개개인의 노동은 완전히 선험적으로 부여되어 있는 초개체적인 협동의 한 가지 특수한 모습으로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포스트-포드주의적 노동은 집단의 초개체성마저도 자신 속에 흡수해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생산 작업은 정치적 행위와 유사한 것으로 되며, 타인의 현전presence을 필요로 하며, 가능적인 것이나 예측 불가능한 것을 통해 측정됩니다. 이 모든 점에서 생각해 볼 때, 노동은 정치경제학의 관점에서 봤을 때에는 노동이 아니었던(정념, 정서, 언어 게임 등)을 포함할 때까지 무한하게 확대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될 수 있습니다. 하버마스에 대한 비판, 즉 ‘도구적 행위’와 ‘소통적 행위’라고 하는 그의 대립에 대한 비판은 바로 이것에서 유래합니다. 다만 여기에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합니다. 즉 모든 것이 노동이 된다고 한다면, 더 이상 어떤 것도 노동이 아니게 된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제가 여기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노동이 [과거의] 그러한 특성을 상실하고, 노동을 다른 경험과 분리시켜 왔던 경계선이 [오늘날에는] 아무런 효과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오늘날 노동이 진정으로 잉여가치나 이윤의 측면에서 생산적인 것이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비노동 속에서 전개되어 왔던 인간의 제반 능력에 대해 노동이 합치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양의성이 있습니다. 모든 것은 노동입니다만, 바로 이것에 의해서 ‘노동’이라는 개념 자체가 계속 파열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노동이라는 용어와 대립하는 형태로 초개체적 활동attività transindividuale이라는 것을 논해야만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따라서 또한 당연한 것이지만, 다음의 것을 확실히 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즉 오늘날 자본주의가 강력한 것은 바로 자본주의가 이 초개체적 활동노동이라고 하는 속박 속에 완전히 가둬버리는 것에서 성공을 거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양의성 혹은 판단의 동요는 이러한 압박 속에 그 물질적 기초가 있기 때문입니다..


소외에 관해서는 보다 좁은 의미에서의 철학적 고찰을 해 보고 싶습니다. 저는 ‘물상화’reificazione를 ‘소외’에 대한 해독제가 되는 한에서 유일하게 참된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것을 ‘소외’와 구별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개체적인 실재가 최종적으로 하나의 외재적인 ‘사물’cosa, 눈에 보이는 하나의 ‘res’, 하나의 명시적인 현상, 또는 다양한 공적 제도로부터 생겨난 총체로 되기 위한 매개적인 과정precoess을 ‘물상화’라고 불러봅시다. 반대로 전개체적인 것이 여전히 주체의 내적인 요소로 남아 있으며, 여전히 이 주체가 그것의 고용자로 될 수 없는 듯한 상태를 ‘소외’라고 불러 봅시다. 즉 소외당한다는 것은 우리들을 조건지우면서도 우리들이 파악할 수 없는 듯한 전제조건으로서, 암시적인 것으로 남아 있는 전개체적인 실재인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포스트-포드주의적 ‘소외’란, 전개체적인 것이 사회적 생산의 실질적인 기초이면서도 ‘res publica’, 정치적 조직, 대의제적 민주주의로 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소외 개념과 물상화 개념은 상호간에 서로를 함축하고 있기는커녕, 오히려 완전히 서로 대립하는 것입니다. 물상화는 소외를 발생시키는 수탈에 대한 유일한 대책입니다. 그러므로 반대로 또한 완전히 물상화되지 않는 존재, 사고, 존재양태라고 하는 것은 소외된 것인 셈입니다.


 






14) [옮긴이] 원래 이 대담집에는 burden이라는 영어가 없고 대신 ‘負荷’로 표기되어 있다. 이는 일본어에서 ‘짊어짐, 떠맡음’, ‘책임감’, ‘하중’, ‘부하’, ‘부담’ 등의 의미를 지닌다. 

15) [옮긴이] 일본어판에는 '인간적 실천의 공유의 토포스'로 되어 있다.

16) [옮긴이] 이 인터뷰는 󰡔자율평론󰡕 제10호(http://jayul.net/view_article.php?a_no=642&p_no=1)에 「일반지성, 엑소더스, 다중」이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font>



히로세 : 전개체적인 실재의 초개체적인 ‘res’로의 변화로 재정의된 ‘물상화’reificazione/Verdinglichung. ‘물상화’ 개념에 대한 지극히 근본적인 재정의야말로, 실제로는 󰡔말이 살이 될 때󰡕Quando il verbo si tàcarne라는 제목이 달린 당신의 최신 저작에서 중심적인 테마가 되고 있습니다. 무릇 이 저작의 제목 자체가 바로 당신이 지금 말해 주었던 ‘물상화’ 그 자체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즉 말이 ‘살’로 되는 것, 또는 모든 주체에 분유되어 있는 전개체적인 자연이 ‘res’로 되는 것입니다.


게다가 󰡔말이 살이 될 때󰡕에는 ‘물상화의 찬가’Elogio della reificazione라는 제목이 달린 장이 있습니다만, 그 장에서 당신은 ‘소외’에서만이 아니라 ‘사물화’fetishism으로부터도 ‘물상화’를 구별하자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말에 따르면 ‘물상화’는 ‘소외’뿐만 아니라 ‘사물화’에 대해서도 ‘해독제’로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상화’와 ‘사물화’에 대한 이러한 구별을 설명하기 위해서 당신은 다시 아주 흥미로운 개념 하나를 도입하고 있습니다. 즉 맑스가 말한 ‘사물들 사이의 관계’rapporto tra cose와 대립하고 있는 것으로서의 ‘관계의 사물’cose del rapporto라고 하는 개념이 바로 그것입니다. ‘물상화’의 경우, 바로 이 ‘물상화’에 의해서 ‘인간들 사이의 관계가 관계의 사물 속으로 체화’되는 반면, ‘사물화’의 경우 맑스가 󰡔자본󰡕에서 논했던 대로, 인간들 사이의 관계가 ‘사물들 사이의 관계로’ 변화하는 것이라고 당신은 주장하고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물상화는 관계 자체를 부여하는 것인 반면 사물화는 그[관계의] 상관항들에 작용한다’, 즉 모든 구성된 개체들에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물상화’는 초개체적인 것인 반면, ‘사물화’는 간개체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로부터 당신이 끌어 들이고 있는 개념에 두 개의 커다란 선들이 그어지게 됩니다. 즉 ‘초개체성-기술적 활동-물상화’라고 하는 선과 ‘간개체성-노동-사물화’라고 하는 선입니다.


여기에서 ‘포스트-포드주의적 소외’라는 물음으로 돌아가 보고 싶습니다. 당신은 지금 ‘포스트-포드주의적 소외’를 ‘전개체적인 실재가 res publica로 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에 있다’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런데 포스트-포드주의적 자본주의가 ‘기술적 활동’을 자신 속에 포섭하고 있다면, 즉 전개체적인 실재의 초개체적인 ‘res’로의 변용을 포섭하고 있다면, 포스트-포드주의적 자본주의에서는 모든 것이 물상화된 초개체적인 ‘res’로 된다고 하는 의미에서 이것은 소외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식으로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포스트-포드주의적 소외’라는 당신의 표현은 형용모순이 아닌가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만일 이 표현에 어떠한 모순도 없다고 한다면, 그 경우에는 ‘초개체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개념적 차이를 명확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당신은 ‘초개체적인 것’과의 관계에 있어서 ‘공적인 것’이 어떻게 정의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게다가 또한 이러한 저의 질문은 ‘다중 즉, 포스트-포드주의적 다중의 경험에 있어서 부정적인 측면’으로서의 ‘인격적 의존관계’dipendenza personale라는 당신의 논의와도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인간들 사이의 관계가 여기에서는 ‘사물에 의해 매개되지 않기 때문에 투명’하다고 하는 의미에서, 바로 이러한 ‘인격적 의존관계’ 속에서 ‘가장 큰 소외’를 발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인격적 의존관계’가 ‘res publica’(공적인 ‘res’)로는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렇더라도 여전히 초개체적인 ‘res’로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고 말입니다. 당신은 ‘인격적 의존관계’에 관한 물음과 관련된 형태에서 ‘공적인 영역이 아닌 공공성’pubblicità senza sfera pubblica이라는 것을 논하고 있습니다. 시몽동의 표현을 따르자면 이것을 ‘공적 영역이 아닌 초개체성’이라고 바꿔 부를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비르노 : 우선 가장 먼저, ‘사물화’에 관해서, 또는 오히려 이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기 위해서, ‘물상화’, ‘소외’, 그리고 ‘사물화’라는 (유명하면서도 완전히 동의어로 보일 정도로까지 모든 것이 애매한) 세 가지 개념 사이의 관계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해 두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한 다음에 당신의 질문 중 가장 중요한 것(솔직히 말해서 당신의 질문에는 ‘하찮은 것’이 하나도 없기는 하지만...), 즉 ‘포스트-포드주의적 소외’를 논하는 것이 정당한 것인지 아닌지에 관한 물음에 대답하고 싶습니다.


소외란 우선 이미 말했던 대로, 우리들의 삶, 사유, 실천의 한 측면이 다른 모습을 취하며, 자유롭게 사용될 수 없게 되며, 우리들에 대해 불명확한 권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된다는 걸 의미합니다. 철학적인 예를 한 가지 들어 보겠습니다. 자아의식, 즉 데카르트의 ‘나는 사유한다’는 모든 종류의 표상을 가능하게 하지만, 그 자체에 관해서는 어떠한 표상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자아의식적인 ‘나’에 관한 어떠한 성찰도, 그 자체가 그것과 동일한 ‘나’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항상 뒤를 향해 계속 역행해 나가도록 운명지어져 있으며, 결코 그 대상에 각도angle를 고정시킬 수 없습니다. 소외되어 있는 것은 ‘나’ 이전의 ‘나’Io prima dell’Io라는 이미지이며, 그 자신의 전제로 되어 있는 파악불가능한 ‘나’라는 이미지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정치적인 예를 한 가지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전개체적인 실재―우리들 속에 존재하는 호모 사피엔스라고 하는 종 또는 인간 본성에 속하는 모든 것―는 이것이 외재적이고 집단적이며 정치사회적인 표현을 찾아내는 한에서는 소외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물화란 내면생활, 즉 개체들 각각의 고립에서 생겨난 소외에 대응하기 위한 어떤―거짓된, 혹은 잘못되었던―경향입니다. 사물화는 인간 정신에 특유한 자질(사회성, 추상능력, 소통 능력 등)을 어떤 사물에―예를 들어 화폐에―적용하는 것에서 존재합니다. 이것과는 반대로 물상화란 소외를 배제하기 때문에 올바르고 유효한 방법입니다. 물상화는 사물화와는 달리 이미 부여되어 있는 사물을 뽑아 들고 이것에 물활론animism적인 가치를 싣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잘못되고 내면적이며 파악불가능한 것으로 될 수 있는 것을 사물, 즉 ‘res’로 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물상화는 소외된 ‘나’ 이전의 ‘나’에 대해서, ‘나’ 바깥의 ‘나’Io fuori dell’Io라고도 말할 수 있는 대립시킵니다. 자아의식, 그 형성, 따라서 그 구조가 눈에 보이는 실천 속에, 언어활동적인 사건 속에, 외재적인 사실 속에 놓여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전개체적인 것의 소외에 대해서, 물상화는 개개인의 정신들을 결합하는 것, 즉 ‘인간들 사이의 관계’rapporto tra uomini라고 말할 때의 ‘사이’tra는, 틀림없이 공적인 제도로 되며, 눈에 보이는 사물성cosalità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대립시켜 놓습니다. 사물화물상화는 소외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두 가지 대안적인 수단, 좀 더 확실히 말하자면, 두 개의 상반되는 수단인 것입니다. 진정한 대조contrast는 내면생활의 빈곤을 극복하기 위한 이러한 두 개의 상반되는 수단들 사이에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포스트-포드주의적 소외’에 관한 질문으로 옮겨가 봅시다. 당신의 논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현행 자본주의는 인간존재의 전개체적인 제반 특징들을 이용하고 있으며, 이것을 이용함으로써 여기에 ‘res’라는 실질, 즉 외재적인 사실의 실질을 부여하고 있으면서도, 현행 자본주의는 이미 소외를 초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경제적인 수준에서도 정치적인 수준에서도 물상화의 은혜를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제 생각으론 당신이 말한 것은 반은 맞지만 반은 잘못되었습니다. 당신은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의 맑스의 한 구절을 떠올리게 하지 않습니까? ‘주식회사는 사유재산제 자체의 제반 규칙들에 기초한 사유재산제의 지양이다’라고 말한 구절 말입니다. 맑스가 여기에서 말했던 것은 주식회사가 현행 자본주의를 지양하는 생산력의 발전과 대립하고 있기 때문에, [주식회사는] 자본주의 특유의 방법으로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맑스의 한 구절을 우리들의 논의에 그대로 적용해 봅시다. 그렇게 하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포스트-포드주의란 소외에 기반을 두고, 소외의 특징들을 유효한 것으로 삼은 채로 소외를 지양하는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참된vero 것과 효력이 있는vigente 것을 구별해야만 합니다. 참된 것은 생산관계들의 초개체적인 성질입니다. 그렇지만 효력이 있는 것은 이것을 지배하고 있는 간개체적인 (따라서 독재적인!) 제반 규칙들입니다. 하지만 현대적인 생산에 필요하게 된 것, 즉 정신적인 자원의 공통적이고 분유적이며 공적인 성질은 횡포이면서 정밀한 위계질서의 확대 속에서, 또는 당신이 말한 것처럼 인격적 의존관계의 역설적인 재번영 속에서 전복되게 됩니다. 당신이 마지막 질문에서 제안한 정식, 즉 공적 영역이 아닌 초개체성참된 것(초개체성)과 효력이 있는 것(소외와 사물화) 사이의 대조를 보여주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공적 영역 속에서 물상화되지 않는 초개체성은, 아주 많은 측면에 있어서 전개체성에 다름 아니게 됩니다. 한 번 더 반복하자면 이것은 참된 것이기는 하지만, 효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두 개의 형용사―‘vero’(참된)와 ‘vigente’(효력이 있는)―사이에서야 말로 정치적인 투쟁의 대양(大洋)이 열리게 됩니다.




히로세 : 실제로 󰡔다중󰡕 제4장의 ‘테제3’에서 당신은 ‘참된 것’과 ‘효력이 있는 것’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말한 바에 따르면, 현대의 노동사회의 위기에서, 즉 포스트-포드주의 시대에서 ‘노동시간은 효력이 있는 측정단위이지만, 참된 측정단위는 아니’게 됩니다. 이 ‘테제’는 같은 장의 ‘테제 5’에서의 당신의 논의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잉여가치는 포스트-포드주의 시대에서, 특히 노동시간으로는 정산되지 않는 하나의 생산시간과 이른바 노동시간 사이의 간극에 의해서 결정된다.’17) 이 두 개의 테제를 함께 사고해 보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노동시간이 이제는 참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참된 것은 지금은 생산시간의 쪽이라고 말입니다. 따라서 반대로 생산시간이 아직 효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효력이 있는 것은 항상 노동시간의 쪽이라고 말입니다. 여기에서는 당신이 지금 말했던 ‘정치적 투쟁’의 한 가지 영역이 있는 셈입니다. 즉 어떻게 하여 생산시간을 효력이 있는 것으로 할 수 있는가, 또는 다르게 말하자면 어떻게 하여 생산시간을 하나의 ‘res publica’ 속에서 물상화시킬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 어떤 사람들은 ‘측정단위’로서의 생산시간에 효력을 부여할 수 있는 한 가지 공적인 제도로서 ‘basic income’(시민소득)이라는 기획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또한 다른 사람들은 이 제안이 많든 적든 간에 케인즈주의적인, 단순한 부의 재분배제도일 뿐이며, 본질적으로는 사회민주주의적인 기획일 뿐이라면서 이것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적어도 확실한 형태로서는, 이러한 ‘basic income’이라고 하는 제안을 논하고 있지 않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만, 당신 자신의 ‘물상화’에 관한 논의와의 관계에서, 이러한 제안에 대해 어떻게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참된 것효력이 있는 것 사이의 간극은 또한 ‘다중’과 국가(또는 ‘인민’) 사이의, 보다 엄밀하게는, 다중의 초개체성과 국가적인 (또는 인민적인) 간개체성 사이의 정치적 선택 속에서도 엿보이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시몽동은 국가를, 이러한 국가를 구성했던 개체들 사이의 계약적인 그룹들이라고 하는 이유에서 간개체적인 것이라고 간주하고 있습니다. 이 말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참된 것은 다중의 초개체성이며 효력이 있는 것은 국가적인 간개체성이라고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이’가 ‘res’로 되는 것을 차단하는 것, 즉 소외시키는 것은 임금노동의 간개체성만이 아니라 국가의 간개체성도 있다는 듯이 생각됩니다. 그런데 󰡔다중󰡕 제2장에서 당신은 실제로는 소외의 과정process이 지닌 이러한 두 가지 상호보완적인 측면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일반지성’이 자율적이고 공적인 영역으로서 그러한 모습을 부여받고 있지만, 여기에는 ‘일반지성’을 상품생산이나 임금노동과 결부시켰던 연계가 절단되어야만 한다. 다른 한편으로 자본주의적인 생산관계들의 전복이 모습을 드러낼 가능성도 있지만, 그것을 위해서는 비국가적인 공적인 영역이, 즉 ‘일반지성’을 자신의 중심으로 삼는 듯한 정치적 공동체가 창설되지 않으면 안 된다”18)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당신에게 두 개 정도의 질문을 던지고 싶은데요, 우선 첫째로 오늘날 임금노동과 국가의 사이에는 어떠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를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또한 ‘비국가적인 공적 영역’으로서의 ‘비대의제적인 민주주의’를 논할 때, 당신은 이것을 어떤 의미로 이해하고 있는지를 조금 더 구체적인 형태로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만일 가능하다면 전개체적인 것의 ‘물상화’라고 하는 물음과 관련지어, 의회 시스템과 국가행정 사이의 관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비르노 : 오늘날 정치 투쟁의 환경에 관한 당신의 정리는 확실히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노동시간은 이제 사회적인 부의 참된 단위가 아니지만, 그래도 여전히 계속적으로 효력이 있는 단위입니다. 반대로 복합적인 생산시간(이 생산시간은 ‘삶’vita 자체―언어활동, 정서 등―와 일치합니다)이 참된 단위로 되고 있지만, 이것은 아직까지는 효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정치적 투쟁, 조직화 과정, 전술, 투쟁형식(파업, 사보타주, 불복종 등)과 같은 모든 것은, 이미 으로 되고 있는 것을 어떻게 효력이 있는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라는 문제와 대치시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의 정치적 행위는 다음과 같은 평가기준에 의해서 그 가치가 측정되어야만 합니다. 즉 어떤 정치적 행위는 그 자체로 올바르거나 틀린 것이 아니며, 국가와 임금노동의 시대를 넘어선 결과 찾아내게 된 어떤 시민성civilità을 구성하는데 도움이 되는가, 아니면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것인가 하는 것, 바로 이것이 그것을 평가하는 기준입니다. 제가 ‘basic income’을 옹호하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입니다. 노동의 바깥에서 소득을 분배하는 것은 오늘날 사람들이 노동하고 있지 않을 때에도 생산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하나의 통로입니다. 말하자면 ‘basic income’은 초개체적인 협동에 대한 소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초개체적인 협동에 [돈을] 지불하는 것은 이 협동을 (참된 것이면서도) 효력이 있는 것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또한 저는 (당연하지만 개념적인 측면에 있어서) ‘basic income’을 도달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고 오히려 하나의 출발점으로 보고 있습니다. 설명을 해 보겠습니다. 보장소득은 본질적으로 타인의 명령이 아니라 자유롭게, 타인의 협박이 아니라 자유롭게, 즉 좀 더 능동적으로 되는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basic income’은 사회적인 개발력의 기폭제로서, 결국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황당한 짓거리가 아니라 ‘자기기업가정신’autoimprenditorialità을 위한 기초로 사고되어야만 합니다. 이탈리아에서는 60년대에 대공장의 포드주의적인 노동자들이 ‘생산성으로부터 분리된 임금상승’을 요구했습니다. 우리들은 이러한 전대미문의 목표야말로 ‘basic income’의 직접적인 선구자였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그 시대에서도, 어떤 경우든 문제로 되고 있는 것은, 노동력 상품이라는 존재에 종지부를 찍는 것입니다. 그 시대, 즉 60년대에는 노동력 상품의 가격이 무한하게 상승했고 최종적으로는 이것이 ‘반경제적인 것’antieconomica으로 되는 것에 도달할 때까지, 노동력이라는 상품 가격의 상승을 목표로 삼고 이를 추구했습니다. 오늘날에는 간개체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유휴(遊休) 노동으로 보일 때에도, 노동력 상품에 보복함으로써 노동력 상품이라는 존재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basic income’이 신케인즈주의적인 처방전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반론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앞에서 제가 말했던 것처럼 이미 참된 것을 효력이 있는 것으로 만드는데 도움이 될 것인지 아닌지를 생각하지 못하고, 추상적인 수준에서 어떤 목표의 가치를 측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또한 제게는 보장소득이라는 목표가 유물론적으로도 흥미로운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프랑스 혁명의 세 가지 슬로건인 ‘자유, 평등, 박애’Liberté, Egalité, Fraternité가 머리에 떠오르는 군요. 잘 생각해 보면, 이러한 세 가지 슬로건에는 그리스도교 부르주아들의 어떤 토대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사람들은 신 앞에서 ‘평등’하며, 또한 법적인 주체로서, 또한 상품교환의 주역으로서 ‘평등’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입장은 (인격적 종속 시스템에 따른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경제적 메커니즘에 의해서만 결정될 수 있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사람들은 ‘자유’입니다. 동시에 국민nation에 속해 있다는 자격에서도 사람들은 ‘형제’입니다. 이것과는 반대로, 우리들에게 ‘basic income’에 대한 권리가 있다는 것은 우리들이 하나의 감성적 신체이기 때문이며, 이 신체는 고용자 하에서의 활동이 정당화될 수 없는 기생적인 사회적 비용으로 되었던 한 시대 속에서, 살아 있는 기쁨을 즐겁게 받아들이는 것을 갈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적인 산 노동은 유물론자의 전통 전체를 이어받은 후계자가 될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비국가적인 공적 영역’(‘비대의제적 민주주의’도 제게는 같은 것입니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라고 당신은 제게 질문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premessa’(전제)입니다. 포스트-포드주의적인 다중이 ‘인민’이라는 허울을 계속 걸치고 있는 한, 그 존재양태(생산의, 소통의, 세계에 거주하고 있는 것의 양태)의 가장 높은 것에 대응했던 정치적 형식을 개발하지 못하는 한, 우리들은 권위주의적인 정치적 실행만을 반복하게 될 것입니다. 이탈리아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해 보세요. 베를루스코니와 신우익New Right은 대의제 민주주의가 공동화(空洞化)하고 있고, 어떠한 현실적인 기초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기업정당partito-azienda로 계속 바꿔치기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주권자’가 아니라 ‘일반지성’genenral intellect에 있어서 중심화된 새로운 공적 영역이 부재하게 되면, 다중 그 자체가 모든 종류의 유독함, 모든 종류의 파괴활동, 따라서 자기파괴활동을 퍼뜨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기주의적이고 냉소주의적이며, 부패한 전쟁을 이끌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지적한 다음에, 지금 여기에서 비국가적인 공적 영역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 수 있는지를 설명해 보고 싶습니다.


사회포럼19)은 틀린 것이 아니라, 그 하나와 가장 근사치입니다. 사회포럼에는 실제로 소통 능력, 기술적 능력, 직업적 능력이라는 다양한 능력이 모여듭니다. 사회포럼은 초개체적인 생산적 협동의 일부를 보여주고 있으며, 이 생산적 협동을 정치적 행동으로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는 것도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확실히 사회포럼이 아직 비국가적인 공적 영역에는 완전히 도달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하나의 굉장한 선례라는 것은 그 무엇으로도 바뀌지 않습니다. 비국가적인 공적 영역은 오늘날 국가의 행정기구 속에 응축되어 있는 제반 앎/권력saperi/poteri을 점진적으로 흡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러한 앎/권력은 의회가 아니라 행정권력 속에 응축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앎/권력을 다시 우리의 것으로 삼기 위해서는 필시 일련의 국지적인 실험에 착수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의 도시, 하나의 지역은 새로운 정치적 형식을 개발하는데 있어서 어느 정도 진전을 이루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구적인 생산력과의 밀접한 관계를 맺은 가운데, 이러한 실험을 하나의 지점에서 중심적으로 행하는 거죠. 이러한 국지적인 실험이 완전히 진전을 이루게 되면, 이것은 정치적으로 재생산가능한으로 될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문제는 ‘국가권력을 탈취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가권력을 해체하는 것, 국가권력이 어떤 방식으로 주변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를 명확하게 밝히는 것입니다. 비국가적인 공적 영역의 제반 특징들을 특정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는 빈약하고 볼썽사나운 것이라고 하는 점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좋습니다. 전복적인 정치논리라는 것에는, 실천적인 이니셔티브initiative만이 메울 수 있는 는 듯한 공백의 공간space을 항상 가지고 있어야만 합니다. 이런 이름에 걸맞는 어떠한 정치이론도 예측 불가능한 것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17) [옮긴이] “포스트-포드주의 시대에서 잉여가치는 무엇보다도 노동시간으로 계산되지 않는 생산시간과 적합한 의미에서의 노동시간 사이의 간극에 의해서 결정된다.”(비르노, 󰡔다중󰡕, 179쪽).

18) [옮긴이] “한편으로 일반지성은 상품생산 및 임금노동의 생산에 결부되어 있는 연결고리를 절단했을 때에만 자율적인 공적 영역으로 확실히 드러난다. 다른 한편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전복은 바로 이 지점에서 비-국가적인 공적 영역의 제도화와 더불어, 일반지성을 중심축으로 삼는 정치적 공동체의 제도화와 더불어 표방될 수 있다.”(같은 책, 118쪽).

19) [옮긴이]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사회포럼’은 ‘세계사회포럼’과 ‘유럽사회포럼’만이 아니라 잠재적으로 건설될 수 있는 모든 ‘사회포럼들’을 지칭한다.

▒▒The Autonomy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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