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cal revolt"...?

 

 

 



 

 

아래는 서동진의 글의 일부

 

(...)정치란 사회의 가능성 혹은 불가능성의 조건을 규정하는 행위이고, 정치적 주체화란 바로 사회를 존재의 질서로서 수용하고 인정하길 거부하고 그것의 객관적이고 경험적인 보편성을 폭로하고 중지시키는 행위를 가리킨다. 그것이 주체가 아니라 주체화라고 굳이 불려야하는 이유는 사회적 주체란 특정한 집단의 속성이나 자질, 성향으로부터 나올 수 있는 것인 반면 정치적 주체란 그런 경험적 사실들로부터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디우같은 이가 즐겨 쓰는 랭보의 표현처럼 “논리적 반란(logical revolt)”이다. 그것이 논리적인 이유는 목적론적인 주장에서 말하는 것처럼 어떤 숨겨진 역사적 논리의 필연적인 자기전개로서 정치적 변화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실체화될 수 없고, 어떤 특정한 주체의 자리에 뿌리를 내릴 수 없는 형식적인 지위를 가지기 때문일 것이다.(...)


 

(...)운동권이 되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 자살해야했던 내 대학 시절 또래의 여대생을 덮쳐누른 것은 그 무엇으로도 물리칠 수 없는 비열하고 타락한 세계를 두고 모두를 감염시키고 있던 윤리적 자명함이었을 것이다. 그것을 만들어내는 것은 당연히 투쟁이고 운동이다. 랭보의 시구에서 따온 말을 자신들의 투쟁의 좌표로 삼고 나아가 조직의 이름으로 내건 프랑스의 전직 알튀세르주의자들이 주동이 된 정치 그룹의 이름이 “논리적 반란(logical revolt)”이었다 한다. 언젠가 읽은 그의 가장 아름다운 글이라 할 어느 글에서 바디우는 프랑스의 레지스탕스에 가담했던 이들 가운데 그리고 끝까지 투쟁했던 이들이 과학자들이었음을 이야기하며 왜 그들이 그랬는지 치밀하게 설명한다. 그것은 랭보의 말처럼 지극히 논리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것은 현실주의가 왜 논리적인 것의 절차를 따르는 일이지 모든 개연적인 변이를 핑계대며 비논리적인 헛소리와 망상에 빠지는 것이 아닌지를 역설하는 그의 오랜 주장을 반향한다. 그러나 아마 우리는 여기에 한 명의 반파쇼 낙천주의자로, 혹은 어떤 연민의 투사와도 거리가 먼 외로운 논리적인 투사로서 프리모 레비를 추가하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자비와 긍휼, 혹은 연민으로부터 운동을 개시하고 연장할 수 있다는 말은 헛것이다. 광우병과 관련한 촛불집회를 보면서 그것을 예찬하는 수많은 얼빠진 신문기사와 칼럼 따위를 읽으면서 나는 운동을 좀 먹는 운동으로서의 그것에 대한 환멸을 되돌리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그러나 반대 혹은 저항을 어떻게 형식화할 것인가가 말 그대로 위기에 몰린 지금, 우리가 가진 유일한 무기가 연민이라면 우리는 그저 구호기구와 자선단체 그리고 선량한 사회사업가를 가지면 충분하다. 그러나 그것으로 역사가 한 치도 바뀐 적 없으며 오히려 그것을 가로막았음을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 미얀마에서, 케냐에서, 아니 사하라사막 이남의 모든 곳에서, 미디어의 눈길이 닿지 않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세계를 향해 우리가 얻는 것은 비참함의 소식과 그를 위한 구호와 사랑의 부탁이다. 역사가 멎어버린 것 같은 느낌은 그래서 더욱 생소하고 더욱 잔인하게 분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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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8-10-17 2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담아갈게요

바라 2008-10-18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저도 담아온 것인데요 뭘.. 원래 '니체인가 바울인가'(http://www.homopop.org/log/index.php?pl=160&stext=%EB%8B%88%EC%B2%B4)와 '무엇을 할 것인가 또는 정치적 주체화란 무엇인가'(http://www.homopop.org/log/index.php?pl=258&stext=%EC%B4%9B%EB%B6%88)에서 퍼왔습니다.
 

발마스님 서재에서 펌

스피노자와 알튀세르에서 이데올로기의 문제-상상계라는 쟁점




읽기라는 문제, 따라서 글쓰기/기록하기라는 문제를 처음으로 제기했던 인물인 스피노자는 또한 역사이론과 동시에 직접적인 것의 불투명성에 관한 철학을 처음으로 제시했던 사람이다.
루이 알튀세르, {“자본”을 읽자}

스피노자주의 또는 후기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
슬라보예 지젝,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I 이데올로기의 유령들



지난 40여 년 동안 서양의 인문사회과학계에서 단일한 논문으로서 과연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들」[이하에서는 편의상 AIE 논문이라고 줄여 부르겠다.]보다 더 지속적이고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한 논문이 있을까? 지난 1980년대 말 이후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하고 마르크스주의가 퇴조하면서 알튀세르의 저작들은 점점 더 인문사회과학 논의에서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지만[여기에는 물론 주지하다시피 지난 1980년에 발생한 알튀세르의 개인적 비극도 영향을 미쳤다.], 이 논문만큼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한 토론과 응용 및 변용의 대상이 되고 있다. 어쩌면 이 논문은 바로 알튀세르의 저작들이 퇴조하기 시작한 바로 그 무렵부터 본격적인(또는 적어도 그 이전보다 더 역동적인) 이론적 생명력을 얻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슬라보예 지젝이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1989)을 필두로 여러 저작에서 알튀세르에 대한 비판적인 고찰을 통해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다시 한 번 인문사회과학의 핵심 쟁점으로 부각시킨 것이 바로 1990년대이며, 그 뒤에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가 젠더 이론 및 주체의 예속화/주체화subjection 이론을 전개하면서 AIE 논문을 주요한 이론적 지주로 활용하기 시작한 것(특히 Butler 1997 「서론」 및 4장 참조) 역시 1990년대의 일이다. 또 그의 제자였던 에티엔 발리바르가 호명 이론을 변용하여 “국민 형태forme nation”에 관한 독창적인 문제설정을 전개하기 시작한 것 역시 90년대 이후의 일이다(특히 Balibar 1988; 2001 1장 참조). 한 가지 놀라운 점은 이처럼 다양한 비판적 논의의 대상이 되고 또 광범위한 영향력을 미쳤음에도 이 논문은 아직도 여전히 많은 이론적 잠재력과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들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우리가 고전이라고 부르는 텍스트들에 공통적인 특징으로, 아마도 바로 이점이야말로 알튀세르의 저작, 특히 AIE 논문을 현대의 고전이라고 부를 수 있게 해주는 것일 듯하다.


알튀세르의 이론적 작업 전체를 고려해봤을 때 AIE 논문에 관한 다양한 논의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이 논문에 미친 스피노자 철학의 영향이 거의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알튀세르는 여러 차례에 걸쳐 스피노자에 대해 예외적인 찬사를 보내고 있으며, 1960년대의 자신의 이론적 작업에 대해 자기비판적으로 고찰하고 있는 소책자에서는 자신이 “스피노자주의자”였음을 명시적으로 고백하고 있지만(Althusser 1997, pp. 181-189), 정작 알튀세르의 가장 중요한 글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는 AIE 논문의 스피노자주의적인 성격에 대해서는 거의 논의가 이루어지지 못했다[알튀세르의 이론 작업과 스피노자 철학의 관계 일반에 대해서는 Moreau 1997, Tosel 2005 등을 참조하고, 국내의 논의로는 진태원 2001; 2002; 2005 등을 보라. 외국의 주석가들 중 알튀세르 이데올로기론의 스피노자주의적 성격에 주목하고 있는 글로는 Montag 1995; 1996, Pfaller 1998 정도에 불과하다. Montag은 AIE 논문이 알튀세르의 저작 중에서도 “매우 스피노자주의적인 글”(1995, p. 65)이라고 지적하고 있지만 간략한 논의에 그치고 있다. Montag 1996은 알튀세르 이데올로기론을, 특히 홉스의 정치학과 대비되는 스피노자의 정치학과 연결시켜 흥미 있는 논의를 제시하고 있다. Pfaller 1998은 지젝의 알튀세르 비판이 지닌 관념론적인 측면을 지적하면서 스피노자 상상계의 무한성을 강조하고 있다. Locke 1996은 스피노자와의 연관성에 주목하고 있지는 않지만, 알튀세르 이데올로기론의 비(非)라캉주의적인 성격을 강조하고 있다.]. 반대로 많은 주석가들은 AIE 논문 및 그의 이데올로기론 전체를 라캉주의적인 이데올로기론으로 특징짓고 있다[너무 많은 주석가들이 이런 견해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일일이 전거를 밝히는 것은 불필요할 것 같다. 대표적인 몇몇 경우를 지적해본다면, Barrett 1993; Eagleton 1991; Macey 1994. 국내에서는 양석원이나 홍준기 등을 들 수 있다. 이 주석가들의 특징은 구체적인 문헌학적 논거를 제시하지 않고 있을뿐더러, 지난 1993년 이래 발표된 알튀세르의 유고들을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특히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해명하는 데 이 유고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또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라캉주의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불식시키는 데도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진태원 2002 참조.]. 이들에 따르면 알튀세르는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수용하거나 그것을 준거로 삼아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론을 개조하려고 했지만, 라캉의 이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기능주의에 빠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AIE 논문이나 알튀세르의 몇몇 글들(특히 「프로이트와 라캉」 같은 글)에 나타난 라캉에 대한 단편적인 언급에 의지하여 AIE 논문 전체, 특히 그 논문의 후반부를 이루는 「이데올로기에 관하여」라는 절을 라캉주의적 이데올로기론으로 특징짓고 있다.


이들의 견해를 하나하나 논박하는 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는 일일뿐더러 지면의 한계상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그들 중 한 사람, 아마도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꼽힐 만한 지젝의 논의를 살펴보고 싶다. 이는 이 글 전체의 구도와 관련해서도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에 대한 지젝의 비판은, 우리가 서두에 인용한 제사(題詞)가 시사하듯이,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비판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젝의 논의는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과 스피노자 철학 사이의 관련성을 검토해보려는 이 글의 반면교사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II 지젝의 알튀세르 비판



슬라보예 지젝은 그의 출세작인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Zizek 1989)에서부터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Zizek 1993/2007b), 「이데올로기의 유령」(Zizek 1994), 󰡔나누어질 수 없는 잔여󰡕(Zizek 1996)나 󰡔까다로운 주체󰡕(Zizek 1999/2005) 등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비판하고 라캉주의적인 관점에서 이를 개조하거나 변형하려고 시도해왔다. 이처럼 그가 여러 저작에서 알튀세르를 비판하고 있음에도 그의 논점은 매우 간략하게 요약될 수 있으며, 그의 다양한 논의들은 이러한 논점의 변주에 불과하다.


1) 그가 보기에 알튀세르 이데올로기론의 핵심은 호명 이론에 있다. 곧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을 주체들로 호명하며, 이를 통해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재생산 또는 좀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지배 체계의 재생산에 기여한다는 것이 그의 이데올로기론의 근본적인 전언이다.(Zizek 1989; 1993)


2) 하지만 호명 이론은 그의 이데올로기론의 가장 독창적인 부분이면서 또한 그의 이론의 근본적인 한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호명 이론은 어떻게 지배에 대한 저항이나 지배 체계를 넘어서는 것이 가능한지 보여주지 못하며, 모든 주체는 결국 지배 체계의 재생산 메커니즘에 예속될 수밖에 없다는 숙명론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Zizek 1989; 1993; Dolar 1993)


3) 알튀세르가 이런 한계에 부딪치는 이유는, 라캉의 욕망의 그래프 상에서 본다면 그가 첫 번째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의 이데올로기론, 그가 제시하는 호명 이론은 부유하는 기표들의 의미를 고정시켜 주는 이데올로기적 누빔점에 관한 이론에 그치고 있다. 이러한 도식 속에서는 모든 호명은 항상 성공하기 마련이며, 모든 주체는 항상 주인기표를 통해 호명된다.[“누빔점은 주체가 기표에 ‘꿰매어지는’ 지점이다. 그리고 동시에 어떤 주인기표(‘공산주의’ㆍ ‘신’ㆍ ‘자유’ ㆍ‘미국’)의 호출과 함께 개인에게 말을 걸면서 개인을 주체로서 호명하는 지점이다. 한 마디로 그것은 기표 연쇄를 주체화하는 지점이다.”(Zizek 1989, 179쪽)]


4) 반면 라캉의 이론은 알튀세르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길을 제공해주는데, 그것의 핵심은 “환상을 가로지르기”라는 개념에서 찾을 수 있다.(Zizek 1989 2부 3장; 1993 1부 1장; 1996 pp. 165 이하; 2003 중 「재판 서문」 등 참조) 욕망의 그래프 상에서 보면 세 번째 그래프(“케보이Che vuoi?”)는 상징적 질서인 타자Autre에 의해 부여된 자신의 역할에 대해 회의하는 주체, 곧 히스테리에 걸린 주체를 나타낸다. 이처럼 자신의 동일성 내지 정체성에 대해 회의한다는 것은 바로 주체에게 전달된 호명이 실패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네 번째 그래프는 그 이전까지 일관된 것, 아무런 공백이나 균열도 없는 충만하고 전능한 것으로 간주되었던 타자 자체 내에 공백이 존재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이러한 의미에서 욕망의 그래프의 두 번째 수준 전체(3번째와 4번째 그래프)는 “호명 너머의 차원을 지칭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Zizek 1989, 216쪽)[이하 인용문의 번역은 국역본이 있는 경우에도 대개 필자가 다소 수정했지만 일일이 밝히지는 않았다. 그리고 별도의 지적이 없는 한 인용문에 나오는 강조 표시는 모두 원문의 것이다.]


그러나 타자 속에 존재하는 이러한 공백 내지 균열이 그보다 아래 수준의 그래프에 위치한 주체들에게 은폐되어 있는 것은 바로 “환상phantasy” 때문이다. 곧 환상은 “케보이?”,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며, 정상적인 주체들은 이러한 환상을 통해 욕망하는 법을 배운다. 환상의 차원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일관된 의미의 질서, 상징적 질서는 불가능하며, 주체들 각자가 이러한 상징적 질서 속에서 자신들의 동일성을 획득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욕망의 그래프 상에서 환상의 도식이 빗금 쳐진 주체와 대상 a의 조우로 표시되는 것($◇a)은 이를 가리킨다). 따라서 환상이 수행하는 기능은 이중적이다. 그것은 한 편으로 주체가 향락을 경험하고 자신의 일관성을 유지하게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대타자의 공백을 메우면서 상징적 질서를 유지시켜준다.


라캉에 따르면 정신분석적인 치료는 피분석자 또는 분석 주체가 분석가(타자)와의 동일시를 넘어서 분석가의 수수께끼 같은 욕망(“x로 남아 있는 분석가의 욕망”(Lacan 1973, p. 246))을 대면하고 이로써 자신의 욕망을 발견할 경우에 종결된다. 이는 다른 식으로 말하면 주체가 타자로부터 배제된 대상 a가 주체 자신의 “결핍destitution”, 공백을 메우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러한 대상 a와 분리되어 자신의 결핍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주체는 자신이 충만한 주체, 아무런 공백을 지니지 않은 자율적 주체가 아니라 자기 내부에 공백을 지닌 주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정신분석 임상의 차원에서 환상을 가로지르기가 뜻하는 바다.


지젝은 이러한 임상적인 차원의 개념을 사회적 차원, 이데올로기론의 차원에 적용하려고 시도한다. 이 경우 환상을 가로지르기가 의미하는 것은 상징적 질서에 의해 부여된 동일성을 거부하는 것, 다시 말해 그가 “행위act” 또는 “본래적 행위”(Zizek 1999, p. 266; Zizek 2007b, 428쪽)라고 부르는 것이다. 요컨대 알튀세르는 호명 이론을 통해 어떻게 각각의 주체가 이데올로기 장치들 내지 (라캉 식으로 표현하면) 상징적 질서를 통해 상징적 동일성을 부여받고 있는지 해명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상징적 동일화를 넘어 그것을 가능케 하는 환상의 차원, 곧 타자 자체의 공백을 메우는 차원에 대해서는 간과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어떻게 주체가 상징적 동일화, 호명을 넘어설 수 있는지 설명하는 데 실패했다. 라캉 정신분석학의 중요성은 이데올로기적인 상징적 동일화 배후에서 작동하는 이러한 환상의 차원을 밝힐 수 있게 해주고, 더 나아가 환상을 가로지르는 길을 보여주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일체의 상징적 동일화를 거부하는 “본래적 행위”에서 찾아야 한다.


흥미로운 것은 알튀세르에 대한 지젝의 이러한 비판은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비판과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스피노자주의가 후기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라는 점을 입증함으로써 제시되는데, 우리가 제사로 인용한 책(Zizek 1993; 2007b)에서 지젝은 두 단계의 논의를 통해 이를 시도한다. 우선 그는 라캉의 11번째 세미나인 󰡔정신분석학의 네 가지 기본 개념󰡕에 나오는 언급에서 출발하여 스피노자 철학의 기본 성격을 개괄한다.

라캉의 용어로 말하면 스피노자는 기표 사슬의 평준화와 같은 것을 성취한다. 그는 지식의 사슬인 S2를 명령의 기표, 금지의 기표, “아니오!”의 기표인 S1과 분리시키는 간극을 제거한다. 스피노자의 실체는 주인 기표 속에서 아무런 지주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으로서, 곧 아버지의 은유의 부정화하는 절단의 개입 이전에 존재하는 “순수 실정성”의 환유적 우주로서의 보편적 지식을 가리킨다. 따라서 스피노자적인 “지혜”의 태도는 의무론을 존재론으로, 명령을 합리적 지식으로 환원하는 것에 의해, 언어행위론의 관점에서 말하면 수행문을 서술문으로 환원하는 것에 의해 정의된다.”(Zizek 1993, p. 217; 2007b; 417쪽)

곧 지젝에 따르면 스피노자는 “유한성의 간극béance”은 소거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순수 실정성”의 보편적 우주에 대한 관조적 인식을 추구한 셈이다. 그 결과 스피노자는 존재와 당위, 존재론과 의무론, 사실과 가치, 서술문과 수행문 사이의 차이를 인지하지 못한 채 후자의 항들을 각각 전자의 항들로 환원시켰다. “그렇다면 영원의 관점에서 현상들을 관찰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된다. 우리의 유한성의 간극을 극복하는 것을 통해 우리는 현상들을 보편적인 상징적 네트워크의 요소들로 인식한다. ... 세계에 자신의 목적을 부과하는 초월적 주권자로 이해된 “신”은 내재적인 필연성 속에서 신을 파악하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력을 입증한다. 반대로 칸트는 이론 이성에 대한 실천 이성의 우위를 긍정하는데,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령의 사실은 환원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유한한 주체들로서 우리는 우리로 하여금 명령을 서술문으로 환원시킬 수 있게 해줄 만한 관조적 위치에 이를 수 없다.”(같은 곳)


지젝의 두 번째 논의는 이러한 범신론적인 스피노자 철학이 어떻게 후기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적인 환상 속에서 재현되는지, 또는 그것의 철학적 모체를 나타내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스피노자주의에서는 주체의 책임이라는 것을 사고할 수 없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스피노자는 명령이나 의무의 요소를 자신의 철학 속에서 완전히 배제해버리고 세계를 인과적 사슬의 연쇄로 환원해버렸기 때문에, 세계에서 발생하는 사건에 대해 주체는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 주체에 책임이 있다면 그것은 인과 연쇄에 대한 주체의 무지에 있을 뿐이다. ““죄”는 나를 파괴적 행동으로 내몬 원인들에 대한 나의 무지를 가리키는 낡은 용어에 불과하다.”(같은 책, p. 218; 419쪽) 그런데 이러한 책임의 부재는 곧바로 타자들에게 악에 대한 책임이 모두 전가되는 것으로 변모된다. 왜냐하면 “[스피노자주의에서는] 주체가 이러한 과정의 자율적인 담지자가 되기는커녕 부분적-측면적 연계의 연결망을 위한 하나의 자리, 수동적 근거이기 때문이다. 소통은 주체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정서들 사이에서 발생한다. “나”는 정확히 말하면, 나를 규정하면서 나의 자기 동일성의 경계들을 가로지르는 이러한 부분적인 객체적 동일화-모방의 연결망을 간과하는 한에서만 나 자신을 자율적이고 자족적인 주체Subject로 인지한다.”(같은 책, p. 218; 420쪽) 이러한 메커니즘은 우리가 “탈산업적인 소비사회”라고 부르는 것에서 발생하는 바로 그것이다. 곧 “이른바 “탈근대적 주체”는 이 메커니즘에 대한 통제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자신의 “정념들”을 규제하는 이미지들에 반응하면서 부분적인 정서들의 연결고리들에 의해 횡단되는 수동적 기반이 아닌가?”(같은 곳)


정리하자면 지젝에 따를 경우 알튀세르에게 주체들은 상징적 기표들의 연결망 속에서 부과된 동일성들에 수동적으로 호명되는 개인들인 것처럼, 스피노자주의에서도 주체들은 정서적 모방-동일시의 연결망 속에서 자신들에게 전달되는 이미지들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정념적인 주체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스피노자주의는 후기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로 기능한다고 할 수 있다. 지젝 자신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과 스피노자 철학 사이의 긴밀한 상호연관성이라는 명확한 테제를 제시하고 있는데, 그의 논변이 과연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 것인지, 그가 과연 “독서의 마스터”라고 불릴 만한 자격이 있는지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뒤에서 보겠지만, 스피노자주의에 대한 지젝의 언급은 지극히 상투적이며, 우리가 보기에 프랑스의 현대 철학자들(푸코, 데리다, 들뢰즈, 발리바르 등)에 대한 그의 비판들 역시 대개 상투적이고 피상적이다. 좀 특이한 것은 지젝의 여러 저서들을 번역한 이성민 씨는 지젝을 “‘독서의 마스터’”라고 부르면서 지젝은 “무엇보다도 먼저 정교한 독서를 통해 대결한다”(Zizek 2005, 642쪽)고 찬양하고 있다는 점이다.]



III 알튀세르와 스피노자에서 이데올로기―상상계라는 쟁점



그렇다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과 스피노자 철학 사이에는 그처럼 긴밀한 연관성이 존재하는가? 분명 양자 사이에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존재한다. 하지만 이러한 연관성은 지젝이 생각하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우리가 보기에 이데올로기론에 관한 문제에서 알튀세르와 스피노자 사이의 연관성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상상imagination” 또는 “상상계imaginaire”라는 개념에 주목해야 한다.[스피노자의 저작에서 “상상imaginatio”이나 “상상하다imaginari” 또는 “이미지imago” 같은 용어들은 매우 체계적이고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지만, 불어의 “imaginaire”에 해당하는 “imaginarius”라는 용어는 매우 적게 나타난다. 이 용어는 {윤리학}에서는 단 3 번, {신학정치론}에서는 6번 등장할 뿐이다. 더욱이 그 용법 자체도 현대적인 의미의 “상상계”라는 뜻을 담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스피노자의 상상 이론은 주 12)의 인용문에서 알튀세르가 주장하듯이, 근본적으로 “상상계”에 관한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어떤 의미에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은 스피노자의 상상이론을 현대적인 용어들로 다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아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 좀더 정확할 것이다. 곧 우리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의 관점에서 스피노자의 상상이론을 살펴보면, 그동안 거의 주목받지 못했던 스피노자의 상상이론이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체계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 분명히 드러나며[스피노자의 상상이론에 관한 논의는 특히 영미권 주석가들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Bertrand 1983은 스피노자의 상상이론을 체계적으로 재구성하고 있는데, 알튀세르의 관점과는 약간 상이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특히 그녀는 󰡔윤리학󰡕 1부 「부록」과 󰡔신학정치론󰡕 「서문」 및 17장에서 볼 수 있는 스피노자의 상상계 이론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는 그녀가 좀더 전문적인 주석가의 관점에서 스피노자의 상상계 이론을 체계적으로 재구성하는 데 관심을 갖고 있는 데 반해, 알튀세르는 상상계 이론과 정치 이론 사이의 연관성에 주목하는 데서 생겨나는 차이로 볼 수 있다.], 반대로 스피노자의 상상이론의 관점에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조명하게 되면 라캉주의의 선입견에 가려 있던 알튀세르의 논의들이 새로운 면모를 드러내게 된다.


우선 알튀세르 자신이 스피노자 철학, 특히 그의 이데올로기론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에서 출발해보자. 알튀세르는 1974년에 출간된 {자기비판의 요소들}에서 60년대 수행된 자신의 이론적 작업이 스피노자 철학에 준거하고 있었음을 고백하면서 자신이 스피노자의 철학을 어떻게 활용했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몇 가지 사례를 들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윤리학} 1부 「부록」이다.[나머지는 스피노자의 철학 전략으로서 “신으로부터의 출발”이라는 사례, 스피노자의 반변증법적 입장, 인식의 문제에서 반초월론적 문제설정을 보여주는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참된 관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habemus enim veram ideam”라는 {지성개선론}의 명제 등이다. 좀더 자세한 논의는 Althusser 1974 참조.] 특히 그가 AIE 논문에서 전개한 이데올로기론은 {윤리학} 1부 「부록」 및 {신학정치론}에서 소묘된 상상이론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는 스피노자의 상상이론의 요점을 세 가지로 제시한다. “{윤리학} 1부 「부록」 및 {신학정치론}에서 우리는 분명 지금까지 사고된 최초의 이데올로기론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의 세 가지 특징을 담고 있다. 1) 이데올로기의 상상적 “실재성” 2) 이데올로기의 내적 전도 3) 이데올로기의 “중심”, 곧 주체라는 가상”(Althusser 1974, p. 184) [그 이외에 {윤리학} 1부 「부록」에 관한 상세한 연구는 Macherey I; Sévérac 1997 등을 참조. 이 두 사람은 {윤리학} 1부 「부록」 텍스트를 매우 꼼꼼하게 분석하고 있어서, 텍스트의 논의를 파악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우리와 분석방식이 약간 상이하고 관점에도 다소 차이가 있긴 하지만, {윤리학} 1부 「부록」을 정확하게 읽기 위해서는 반드시 참조해야 할 연구들이다.] 매우 간략하기는 하지만 이 세 가지 논점은 {윤리학} 1부 「부록」과 {신학정치론}을 분석하기 위한 좋은 지침을 제시해주며, 더 나아가 AIE 논문이 스피노자의 상상이론과 어떻게 이론적으로 연관되어 있는지 좀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알튀세르가 지적한 세 가지 논점은 다음과 같은 점을 의미한다.

1. 이데올로기의 상상적 “실재성”

이 테제는 스피노자에서 상상은 감각 및 이성이나 지성과 구별되는 하나의 인식 “능력facultas”이 아니라 세계 그 자체임을 뜻한다. 여기서 세계라는 것은 인간의 삶의 공간 그 자체를 의미한다. 알튀세르는 이미 1963년 고등사범학교에서 했던 강의에서 스피노자의 상상 개념에 대해 이런 식의 해석을 제시한 바 있고[“[스피노자에서] 상상계는 데카르트에서처럼 심리학적 범주로 인식되지 않고, 세계가 그것을 통해 사고되는 범주로 인식된다. 스피노자에게 상상계는 더 이상 심리학적 기능이 아니며, 헤겔 식의 의미에서 한 요소, 곧 심리학적 기능들이 삽입되어 있는, 이 범주들이 그로부터 구성되는 하나의 전체다. ... 상상은 마음의 능력, 심리학적 주체의 한 능력이 아니며, 하나의 세계다.”(Althusser 1996c, p. 114)], 1964년에 발표되고 1년 뒤인 1965년에 {마르크스를 위하여}에 수록된 「마르크스주의와 인간주의」에서는 이러한 관점을 좀더 상세하게 제시하고 있다. “데카르트주의자가 2백 걸음 떨어져 있는 달을 “보았”듯이 또는―그들이 이에 집중하지 않았다면―보지 못했듯이, 사람들은 결코 의식의 한 형태로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세계”의 한 대상처럼, 자신들의 “세계” 자체처럼, 그렇게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살아간다.””(Althusser 1996a, 280쪽/240쪽) 매우 도발적인 이 테제는 스피노자의 철학, 특히 {윤리학}이나 {신학정치론}의 원문을 통해 정확히 입증될 수 있으며, 여기서 언급된 “2백 걸음 떨어져 있는 달을 “보았”듯이”라는 표현 자체가 이미 {윤리학} 2부 정리 35의 주석에 나오는 사례를 가리킨다.

태양을 볼 때 우리는 이것이 우리로부터 200 걸음 정도 떨어져 있다고 상상한다. [하지만] 오류는 단순히 이런 상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식으로 상상하는 중에 우리가 태양의 진정한 거리 및 이러한 상상의 원인에 대해 무지하다는 사실에 있다. 왜냐하면 나중에 태양이 지구 지름의 600배 이상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이를 가까이 있는 것으로 상상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태양을 이처럼 가까이 있는 것으로 상상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의 진짜 거리를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신체의 변용은 우리의 신체가 태양에 의해 변용되는 한에서 태양의 본질을 함축하기 때문이다.(Spinoza 1999a, 158~159쪽―강조는 인용자) [이 사례에 대한 좀더 상세한 분석은 진태원 2006 5장 참조]

이데올로기가 상상적 실재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 또 스피노자에서 상상은 인식의 한 가지 “능력”이 아니라 인간의 삶의 조건 자체, 인간학적 장 그 자체라는 것은 2절에서 살펴본 스피노자주의에 대한 지젝의 언급이 얼마나 허술한 주장인지 잘 보여준다. 지젝은 멘델스존과 야코비의 논쟁 이래 독일 관념론의 기본 신조처럼 전승되어온 스피노자주의=범신론이라는 도식을 그대로 되풀이하면서 스피노자가 “유한성의 간극”은 소거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순수 실정성의 보편적 우주의 인과연쇄에 대한 관조적 인식을 추구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스피노자 철학에 관해 이보다 더 상투적인 비난도 없을 것이다. 󰡔윤리학󰡕 1부 「부록」이나 󰡔신학정치론󰡕이 보여주듯이 스피노자가 제시하는 인간의 삶, 인간 사회의 삶은 상상으로 가득 차 있으며, 더욱이 지젝이 주장하듯이 이러한 상상은 단순히 무지의 표현이자 인식의 진전에 따라 소멸해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위의 인용문이 보여주듯이 우리가 인간이라는 종에 고유한 변용에 따라 세계를 체험하고 살아가는 한에서 우리가 자연에 대해 얼마나 진전된 인식을 얻든 간에 우리는 여전히 세계를 “인간 신체의 변용의 질서와 연관ordinem & concatenationem affectionum corporis humani”(E II P18s)”에 따라 체험하고 상상하기 때문이다. 곧 스피노자에서 자연이 “사물들의 질서와 연관ordo & concatenatio rerum”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자연의 일부”로서 인간은 이를 “변용의 질서와 연관”에 따라 경험하고 인식하는 것이다. 이는 지젝 식의 표현을 따른다면 바로 “유한성의 간극”에 대한 스피노자적인 표현과 다르지 않다.

2. 이데올로기의 내적 전도

이것은 목적론이 어떻게 자연을 전도시키는가에 관한 스피노자의 분석을 가리킨다. 스피노자는 󰡔윤리학󰡕 1부 「부록」에서 목적론이 모든 편견의 뿌리를 이루고 있음을 지적한다.

내가 여기서 지적하려고 하는 모든 편견은 오직 다음과 같은 점에 의거하고 있다. 곧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모든 자연 실재들은 자신들이 그러듯이 어떤 목적을 위해 행위한다고 가정하며, 더 나아가 신 자신이 모든 것을 어떤 특정한 목적에 따라 인도한다고 확신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이 인간을 위해 모든 것을 만들었고, 자신을 숭배하게 하기 위해 인간을 만들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deum omnia propter hominem fecisse, hominem autem, ut ipsum coleret.(E I App.; G II 78―강조는 인용자)

여기서 목적론은 정신분석학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상상적 투사(投射)projection의 형태를 띠고 있다. 스피노자는 사람들이 어떤 목적을 위해 행위한다는 것을 본성적인 사실로, 그 자체로는 해로울 것이 없는 자연적 사실로 간주한다. 문제는 사람들이 인간에 고유한(또는 특정한 생물들에게 고유한) 목적 지향적 행위방식을 다른 모든 자연 실재들에게도 그대로 적용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자연 실재들은 어떤 목적에 따라 운동하지 않으며 관성 원리에 따라 작용하고 반작용할 뿐이다. 스피노자의 관점에서는 자연에는 작용인(물론 동역학적 관점에서 파악된)만이 작용하고 있을 뿐 목적인이란 존재할 수 없으며, 자연 실재들에 대해 이를 가정하는 것은 인간의 행위 방식을 자연에 투사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러한 투사가 신에게 적용될 때, 목적론은 완결된 형태를 띠게 된다. 왜냐하면 모든 자연 실재들이 어떤 목적에 따라 행위한다면, 자연 전체를 목적론적 관점에 따라 계획하고 질서지은 어떤 존재자, 초월적이고 인격적인 존재자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연에 대한 목적론은 필연적으로 목적론적 질서의 주재자인 어떤 신을 가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는 스피노자 자신이 말하듯이 “자연을 완전히 전도하는 것”이다.


이 점은 우리가 위에서 제시한 “변용의 질서와 연관”이라는 관점에 따라 달리 표현해볼 수 있다. 변용의 질서와 연관, 곧 상상계가 인간의 경험과 인식의 원초적인 인간학적 조건을 이룬다면, 이러한 상상계가 낳는 가상성은 무엇보다도 이러한 변용의 질서와 연관을 사물 그 자체의 질서와 연관으로 착각하는 데 있다. 곧 어떤 실재들의 변용 내지 이미지와 그 실재들 자체를 혼동하는 것, 다시 말해 실재들의 변용이나 이미지, 실재들의 변용의 질서와 연관을 그 실재들 자체의 질서와 연관이라고 착각하는 것에 바로 가상의 근본적인 뿌리가 존재한다. 스피노자의 고유한 용어법대로 하면, 결과를 원인으로 착각하는 것, 또는 결과만을 사고할 뿐, 그러한 결과를 낳은 원인에 대해서는 무지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배제하는 것, 바로 여기에 가상이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상상의 고유한 효과 중 하나는 자신을 산출한 원인을 배제하는 데 있다.


알튀세르의 경우는 어떨까? 이 점에 관해서도 양자 사이에는 놀랄 만한 유사성, 아니 동일성이라고 할 만한 것이 존재한다. AIE 논문의 이론적인 의의는 마르크스주의적인 이데올로기론에서 하나의 단절을 이룩하고 있다는 점에 있는데, 그것은 그 논문이 정확히 이데올로기를 기만이나 조작, 허위의식으로 간주하는 관점, 또는 포이어바흐 식으로 이데올로기의 발생 원인을 인간의 존재조건 자체의 소외 속에서 찾는 관점과 단절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그것을 “이데올로기에 관한 이데올로기적 관점”으로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모든 해석들은, 그것들이 전제하고 의존하는 테제, 곧 이데올로기에서 세계에 대한 상상적 표상 속에 반영되는 것은 인간들의 존재조건, 따라서 실재 세계라는 테제를 글자 그대로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Althusser 1995, p. 296; 1991, 109쪽―강조는 인용자)

더욱이 이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제시된 이데올로기에 대한 관점, 곧 “완전히 실증주의적인 맥락”에서 이데올로기를 “순수한 환상으로, 순수한 꿈으로, 다시 말하면 무로 이해”(같은 책, p. 294; 104쪽)하는 관점과도 정확히 단절하는 것이다. 그 대신 알튀세르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인간들”이 이데올로기 안에서 “서로 표상/재현/상연하는se représentent” 것[이 표현의 의미에 대한 좀더 상세한 논평은 진태원 2002, 379쪽 참조]은 인간들의 현실적인 실존조건들, 그들의 현실 세계가 아니며, 이데올로기에서 그들에게 표상/재현/상연되는représenté 것은 그들이 이 실존조건들과 맺고 있는 [상상적] 관계다. 실재 세계에 대한 모든 이데올로기적, 따라서 상상적 표상/재현/상연의 중심에 잇는 것은 바로 이 관계다(같은 책, p. 297; 109쪽)” “représenter”라는 단어의 독창적인 용법은 논외로 한다면, 스피노자의 상상에 대한 논의와 알튀세르의 주장 사이의 이론적 연관성은 더할 나위 없이 명백하다.

3. 이데올로기의 “중심”: 주체라는 가상

이 테제는 목적론적 가상의 중심에는 자기 자신을 세계의 중심, 자연의 중심으로 간주하는 인간들의 착각이 놓여 있음을 가리킨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윤리학󰡕 1부 「부록」에서 스피노자의 분석은 크게 두 가지 논점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스피노자는 신이 목적론적으로 행위한다는 가정의 밑바탕에는 좀더 근본적인 상상적 투사가 존재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것은 바로 신과 인간의 특별한 상호 의존 관계에 관한 투사다. 앞에서 인용한 󰡔윤리학󰡕 1부 「부록」 인용문에서 강조한 부분에서 드러나듯이 이러한 상호 의존 관계는 이중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첫째는 “신이 인간을 위해 모든 것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신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 인간을 특별히 총애하며, 인간을 위해 모든 것, 모든 자연 실재들을 창조했다. 이는 곧 신이 인간에게 자연 만물을 자신의 수단으로, 자신을 보존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음을 의미한다. “이로부터 그들은 자연 만물을 자신들의 이익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만 간주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이 수단들을 발견하기는 했지만 스스로 이 수단들을 공급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기 때문에, 여기에서 이러한 수단을 자기들이 사용할 수 있게 마련해준 다른 누군가가 있다고 믿을 만한 이유를 발견하게 되었다.”(E I App.; G II 78)


그러나 그렇다면 왜 신은 이처럼 인간을 총애하는가? 무엇 때문에 인간에게 이러한 특권, 인간이 모든 것을 자신의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했는가? 그 이유는 두 번째 의존 관계를 통해 해명된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을 숭배하게 하기 위해서”다. 다시 말해 신은 인간으로부터 숭배를 받기 위해, 공경을 받기 위해, 인간을 위해 자연 만물을 창조했으며, 또 인간에게 그것들을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 여기서 당연히 다음과 같은 의문이 들게 된다. 그러나 왜 신이 인간의 숭배, 인간의 공경을 필요로 하는 것일까? 왜 무한한 신, 지고하게 완전한 신이 유한하고 불완전한 인간의 숭배, 인간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일까? 스피노자는 󰡔윤리학󰡕 1부 「부록」에서 이 질문에 답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예 질문 자체를 제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스피노자는 그 이전에 목적론 자체를 가상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 목적론을 타당한 것으로 전제했을 때에만 의미 있게 주고받을 수 있는 이러한 질문과 답변을 불필요한 것으로, 신학자들의 가상, 심지어 “착란delirare”에 불과한 것으로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이는 물론 스피노자가 이러한 목적론적 가상이 지니는 실제적인 효력을 무시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여기서 스피노자의 목표는 이러한 가상의 효력을 부각시키는 게 아니라, 가상을 낳는 인간학적 원인을 분석하는 데 있을 뿐이다. 사실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 5장과 17장, 특히 17장에서 히브리 백성들이 모세의 중개를 통해 야훼와 맺는 계약, 다시 말해 우리가 방금 말한 신과 인간의 특별한 상호 의존 관계의 원형을 이루는 신과의 계약에 대한 분석을 제시하고 있다. 이 점에 관해서는 뒤에서 다시 다루겠다.]


둘째, 그 대신 그는 관점을 바꿔서 목적론적 가상을 낳게 만든 원인이 무엇인지 질문하고 있으며, 이런 관점에서 신과 인간의 특별한 상호 의존 관계를 설명하려 하고 있다. 이를 위해 먼저 스피노자는 목적론을 낳는 본질적인 인간학적 특성을 지적하고 있다.

여기서는 모든 사람이 인정해야 하는 것, 곧 모든 인간은 실재의 원인에 대해 모르고서 태어난다는 것, 그리고 모든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충동을 지니고 있으며 이러한 충동을 의식한다는 것을 기초로 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E I App.; G II 78) [“satis hic erit, si pro fundamento id capiam, quod apud omnes debet esse in confesso; nempe hoc, quod omnes homines rerum causarum ignari nascuntur, & quod omnes appetitum habent suum utile quaerendi, cujus rei sunt conscii.”]

스피노자는 이 문장에서 두 가지 본질적인 점을 대비시키고 있다. 하나는 인간은 실재의 원인에 대해 모르고 태어난다는 것, 따라서 인간에게는 본유 관념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충동을 지니고 있고, 또 이러한 충동을 의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첫 번째 논점은 상상 개념 자체에서 따라 나온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스피노자에게 모든 인식은 항상 신체의 변용의 질서와 연관을 통해서 이루어지며, 단지 외부 실재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인간 자신의 신체 및 인간 자신의 정신에 대한 인식까지도 이러한 변용의 질서와 연관에 의해 가능하기 때문이다(2부 정리 19와 정리 23 참조). 그런데 이러한 신체의 변용의 질서와 연관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신체의 역량의 정도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으며(2부 정리 14), 신체의 변용들을 인식하는 정신의 소질, 능력도 그에 따라 변화한다. 하지만 스피노자에게 아이 또는 유년 시절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매우 취약한 상태를 가리키기 때문에[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아마도 󰡔윤리학󰡕 5부 정리 39의 주석일 것이다. 스피노자의 인식론 및 윤리학을 이해하는 데서 매우 중요한 문제임에도 스피노자에서 아이/유년시절의 문제에 대해 다루고 있는 연구는 매우 드물다. 정리 39의 주석에 대한 논평은 Macherey V, pp. 184-85를 참조하고, 아이/유년시절의 문제에 관한 최근의 좋은 논의는 Zourabichvili 2002 2부 참조.], 인간이 탄생의 시점에 가까이 있으면 있을수록 인간의 신체적, 정신적 능력은 취약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본유관념 같은 것은 생각할 수 없으며, 인간은 “실재의 원인에 대해 모르고서 태어난다”고 할 수 있다.[이 점에서 스피노자는 경험론자들, 특히 홉스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스피노자에게 인간의 본질은 충동 또는 욕망이기 때문에, 인간은 무지한 채로 태어나지만 본성적으로 어떤 충동을 지니고 있으며, 또 이 충동을 의식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인간학적 조건에서 비롯한 이 양자의 괴리가 좁혀지지 않는 상태에서는(이는 인간이 신체적, 정신적 능력을 향상시킴으로써만 가능하다) 인간은 목적론적 가상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고, 이를 자연 현상들에 대해 투사할 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목적론적 가상을 비롯한 인간의 모든 가상은 한편으로 원인에 대한 무지와 다른 한편으로 결과(충동)에 대한 의식 사이의 괴리에서 유래한다고 할 수 있다.


알튀세르에서 이데올로기의 중심, 곧 주체라는 가상은 주지하다시피 “호명” 테제를 통해 제시된다. 지젝을 비롯한 많은 라캉주의 주석가들은 적어도 호명 테제에서만큼은 알튀세르가 라캉에게 분명한 이론적 빚을 지고 있으며, 더 나아가 라캉의 이론을 잘못 해석해서 활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점에서는 그들의 이야기도 일리가 있는데, 왜냐하면 호명 테제에 나오는 몇몇 표현들, 특히 대문자 주체와 작은 주체들 사이의 “거울 관계” 내지 “거울 구조”라는 표현은 라캉의 용어법에서 기원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가령 알튀세르의 표현법은 라캉의 11번째 세미나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차용했다고 볼 수도 있다. “주체는 타자Autre의 장에 예속됨으로써만 주체일 뿐이다.”(Lacan 1973, p. 172) 단 라캉은 대문자 주체 대신 대문자 타자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하지만 용어법 자체는 라캉에서 유래했다고 하더라도 그 내용 자체는 라캉적이라기보다는 스피노자적이라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이는 우선 알튀세르가 호명 테제를 예시하기 위해 들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모세가 신과의 계약을 맺고 이를 바탕으로 히브리 국가를 구성하는 사례라는 점에서 알 수 있다. “따라서 신은 “주체Subject”이고 모세 및 신의 백성인 수많은 주체들은 신의 대화자-피호명자, 곧 그의 거울들이고 반영들이다. 인간들은 신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지 않았던가? 모든 신학적인 성찰이 증명하듯이 신이 인간들 없이 완벽하게 지낼 “수 있다”고 하더라도 ... 인간들이 신을 필요로 하고 주체들이 “주체Subject”를 필요로 하듯이 신은 인간들을 필요로 하고 “주체”는 주체들을 필요로 한다.”(Althusser 1995, p. 317; 1991, 124쪽) 그런데 이는 스피노자가 󰡔신학정치론󰡕 17장에서 히브리 신정국가의 형성을 설명하기 위해 제시하고 있는 이중적 계약의 사례 바로 그것이다.


이 점을 이론적ㆍ정치적 측면에서 좀더 부연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우회를 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제사로 인용한 󰡔“자본”을 읽자󰡕의 한 구절에서 알튀세르는 스피노자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이하 3절의 내용은 발리바르의 󰡔스피노자와 정치󰡕 「역자 해제」 중에서 270-276쪽의 내용을 다소의 수정을 거쳐 전재한 것이다.]

읽기라는 문제, 따라서 글쓰기/기록하기라는 문제를 처음으로 제기했던 인물인 스피노자는 또한 역사이론과 동시에 직접적인 것의 불투명성에 관한 철학을 처음으로 제시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Althusser 1996b, p. 8. 강조는 알튀세르)

스피노자에 대한 알튀세르의 논의 중에서 제일 덜 주목받고 있지만, 또한 제일 놀라운 사례 중 하나로 꼽힐 만한 이 주장은 겉보기에는 매우 당혹스러운 주장이다. 사실 스피노자의 저작에서 역사에 관한 언급을 거의 찾아볼 수 없고, 또 역사에 대한 고찰이 전혀 스피노자 철학의 중심 주제가 아니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는 엉뚱한 소리로 들릴 수 있다. 더 나아가 역사철학이 18세기 말 계몽주의 이후, 특히 독일 관념론에서 하나의 철학적 주제로 등장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알튀세르의 지적은 시대착오적인 주장이라는 비난까지 받을 만하다.


그런데 여기서 알튀세르는 스피노자의 역사이론은 그것 혼자서만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동시에” “직접적인 것의 불투명성에 관한 철학”과 결부되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마치 후자가 없이 전자는 존재할 수 없다는 듯이, 그리고 이 양자를 결부시켰다는 점이야말로 스피노자의 고유한 철학적 업적이었다는 듯이 말이다. 그리고 또한 그는 “읽기”라는 문제, “글쓰기/기록하기”라는 문제와도 결부시키고 있다.


왜 알튀세르는 스피노자가 거의 언급하지도 않은 그의 “역사이론”에 주목하고 있을까? 그리고 이 역사이론이 “직접적인 것의 불투명성”과 어떤 관계에 있을까? 더 나아가 이는 “읽기”나 “글쓰기/기록하기”의 문제와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 이처럼 의문들은 끊임없이 생겨나지만, 알튀세르는 스피노자에 관한 그의 다른 언급들과 마찬가지로, 대담한 주장을 한 마디 던져놓은 다음, 마치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는 듯이 다른 논의로 성큼 건너뛰고 있다.


바로 이 문제들과 관련하여 발리바르는 󰡔스피노자와 정치󰡕에서 흥미 있는 통찰을 제공해주는데, 왜냐하면 그는 󰡔신학정치론󰡕에서 하나의 역사이론(“역사철학”이 아니라)을 발견하고 있기 때문이다. 곧 그는 성서에 나타나 있는 히브리 신정국가의 구성 및 전개과정을 분석하고 있는 󰡔신학정치론󰡕 17장만이 아니라 성서에 대한 역사적 비평을 시도하고 있는 전반부(곧 1장-15장)의 분석 역시 하나의 역사이론을 함축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먼저 그는 스피노자의 성서 비평은 “이차 수준의 역사”(또는 스피노자의 표현대로 하면 “비판적 역사”)를 구성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성서는 히브리 백성들의 상상에 기초를 둔 하나의 역사적 담론이며, 스피노자의 성서 비평은 이러한 역사적 담론에 대한 이차적 담론, 곧 비판적 역사라는 것을 뜻한다. 더 나아가 그는 성서는 바로 서사敍事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서사는 히브리 민족의 고유한 역사적 기록/글쓰기의 관행에 기초를 두고 있음을 지적한다. 따라서 스피노자는 알튀세르의 표현대로 “글쓰기/기록”이라는 문제, 그리고 이에 대한 “읽기/독해”의 문제를 역사의 문제이자 철학의 문제로 제기한 최초의 인물인 셈이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스피노자의 역사이론을, 알튀세르 식으로 말하자면 “직접적인 것의 불투명성”, 곧 대중들의 상상이라는 문제와 결부시킨다. 발리바르의 분석에서 직접적인 것의 불투명성/상상계는 두 가지 측면에서 제시되고 있다.


우선 자신들의 역사에 대한 대중들의 무지가 있다. “이러한 이차 수준의 서사는 재구성될 수 있는 한에서의 사건들의 필연적인 연쇄과정 및, 자신들을 움직이는 원인들 대부분에 대해 알지 못하는 역사적 행위자들이 자신들의 역사의 “의미”를 상상하는 방식을 자신의 대상으로 한다.”(Balibar 2005, 152쪽) 대중들의 상상은 비판적 역사의 필연적인 구성 요소인데, 왜냐하면 이러한 비판적 역사의 소재를 이루는 성서 내지 히브리 인민의 삶 자체가 상상의 요소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대중들의 삶이 상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대부분의 인간들이 자신들의 삶의 조건을 구성하는 실제 원인에 대해 알지 못하고, 이를 상상에 따라 재구성하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앞서 논의한 대로 스피노자의 일반적인 인간학적 테제, “인간들은 자신들의 의욕과 욕구는 의식하고 있지만, 그들이 무지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야기시킨 원인들에 대해서는 꿈에서조차 생각하지 않는다"(󰡔윤리학󰡕 1부 「부록」)는 테제에서 따라 나온다.


그 다음 히브리 신정국가의 구성의 기초가 되었던 정치적 상상의 요소가 있다.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 17장에서 성경에 나오는 히브리 신정국가의 구성을 분석하고 있는데, 그가 주목하는 것은 히브리 국가의 구성이 일종의 계약에 따라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 계약은 단순한 계약이 아니라 이중적인 계약의 형식을 띠고 있다. 곧 이는 주권자와 신민들 사이에 맺어지는 정치적 계약이면서 동시에 야훼라는 신에 대한 개개의 신자들(곧 개개의 히브리인들) 사이에 맺어진 종교적 계약이기도 하다.[이 점에 관한 좀더 상세한 논의는 Balibar 1985; 진태원 2004 참조] 따라서 히브리 백성들에게 신은 종교적인 경배의 대상이면서 또한 정치적 주권자이며, 신의 계율에 대한 위반은 동시에 국법의 위반을 의미했다. “요컨대 시민법과 종교는 서로 엄격하게 구별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이 국가는 신정 국가라 불릴 수 있었다.(Spinoza 1999b 17장 7-8절, p. 546)”


스피노자 자신이 말하고(“이 모든 것은 사실이라기보다는 의견opinione magis quam re에 속하는 것이다.” Spinoza 1999b 17장 8절, 모로판, 546) 발리바르가 지적하듯이 이러한 이중적 계약이라는 것은 물론 하나의 허구다. 하지만 이러한 허구는 매우 실제적인 효과를 낳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허구를 통해 하나의 국가가 구성될 수 있었고, 적어도 모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놀랄 만한 안정과 번영을 이룩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허구가 이처럼 중요한 결과를 낳을 수 있었던 이유는 신을 각 개인의 신으로서만이 아니라 또한 히브리 민족 전체의 신으로, 따라서 히브리 국가의 유일한 주권자로 만듦으로써, 각자가 신에게 바치는 절대적 헌신과 복종이 동시에 국가에 대한 헌신과 복종으로 되게 만들었다는 점에 있다.


여기서 이런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다. 왜 이러한 이중적 계약이 필요한가? 스피노자에 따르면 이는 무엇보다도 오랜 노예 생활 때문에 스스로 국가를 구성할 만한 역량을 갖추지 못한 히브리 인민들의 “미개인 같은rudis”(Spinoza 1999b 5장 10절, p. 222) 심성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의 허구에 기초한 히브리 신정국가는 역사적으로 유일한 국가인 것처럼, 일반적인 설명적 가치를 갖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는 발리바르가 보여준 것처럼 좀더 일반적인 함의를 갖고 있다. 곧 히브리 신정국가에 대한 스피노자의 분석은 민주주의(또는 국가 일반)에 대한 법적 관점의 한계를 보여준다.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정의 이중적 측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정은 한편으로 민주정과 등가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신과의 계약을 통해 신에게 모든 권력을 부여하고 자신들을 신의 백성으로 재인지함으로써, 히브리인들 모두는 신 앞에서 동등한 신의 백성들, 신의 시민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상상적 민주정”은 민주정의 핵심인 집합적 권리, 집합적 주권을 “다른 무대”로 옮겨놓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 곧 신정에서 인민들 스스로가 동등하게 집합적 주권을 행사할 수 있다면, 이는 신이라는 진정한 주권자가 초월적인 자리를 차지하는 한에서다(곧 신의 거주지로서 신전이 특별한 경배와 존경의 대상이 되는 한에서). 따라서 신정은 집합적인 주권이 초월적인 신의 자리, 비어 있는 상징적 자리의 매개를 통해서만 실행될 수 있는 국가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발리바르의 질문이 나온다.

그렇다면 이제 고유한 의미의 민주정으로 되돌아가 보자. 개인들이 신과의 동맹이라는 허구(곧 주권의 상상적인 자리 이동) 없이도 명시적인 “사회계약”에 따라 직접 집합적 주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판명되면, 문제는 완전히 사라진다고 말할 수 있는가? 대중들의 미신은 차치한다 해도, 이는 분명히 그렇지 않다. 권리의 동등성과 의무의 상호성 위에 구성된 민주 국가는 개인적 의견들의 결과인 다수결 법칙에 따라 통치된다. 그러나 다수결 법칙이 효과적으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주권자가 공적인 이익과 관련된 활동을 명령할 수 있고 또한 그것이 존중받을 수 있게 만드는 절대적 권리를 지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이것 외에도 또한 야심들보다는 이웃에 대한 사랑을 선호하는 것, 곧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의 필요성에 대한 합의가 지배하고 있어야 한다.(Balibar 2005, 77쪽)

따라서 얼핏 보기에는 일회적인 것에 불과한 히브리 신정국가는 사실은 정치에 대해, 민주주의에 대해 중요한 보편적 교훈을 제공해준다.


그것은 첫째, 법적 제도만으로는 민주주의(또는 국가 일반)는 충분한 안정성을 확보할 수 없으며, 대중들의 정념적 삶을 조절할 수 있는 별도의 메커니즘 내지는 장치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둘째, 하지만 정념적 삶을 조절하는 메커니즘으로서 종교는 근본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 히브리 신정국가가 개인들의 종교적 삶과 정치적 삶을 일체화함으로써 상당한 기간 동안 정치적 통합을 이뤄내긴 했지만, 이러한 국가의 통합, 일체화는 그 자체가 정념적인 양가성에 지배받고 있다. 왜냐하면 신자들끼리의, 국민들끼리의 놀라운 유대는 신과의 동일시/정체화를 매개로 한 서로에 대한 정념적 사랑에 기초하고 있는데, 이러한 사랑의 이면은 초월적인 신의 감시와 처벌에 대한 공포와 잠재적인 적으로서 이웃에 대한 일반화된 증오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예수는 이처럼 종교적 삶과 정치적 삶을 일체화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삶을 정치적, 교권적 권위로부터 분리하여 이를 각자의 믿음과 판단에 따른 윤리적 실천으로 전환시켰다는 점에서 하나의 문화혁명을 이룩했다. 하지만 이는 신자로서의 개인들을 정치적 권위만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 자체로부터 분리시켰으며, 또 그에 비례하여 이웃에 대한 사랑을 핵심으로 하는 신의 말씀을 내면화된 도덕법으로 전환시켰다는 점에서 또 다른 한계를 지니고 있다.


셋째, 상상계가 개인의 삶 및 사회적 삶에서 구성적인 요소로 존재하는 한에서 대중들은 ‘자기 자신’(이렇게 말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과 합치할 수 없다는 것, 곧 대중들은 온전한 자율적 주체로 성립할 수 없다는 점이다. 다른 식으로 말하면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다. 상상계가 인간의 삶의 장소 그 자체인 한에서, 다시 말해 환원 불가능한 인간의 유한성의 조건 그 자체인 한에서, 민주주의의 근본 원리 또는 민주주의의 성립 가능성의 조건으로서 전제되어 있는 대중들의 자기 통치는 존재할 수 없다. 이것은 전적으로 부정적인 것인가? 겉보기와는 달리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대중들의 자기 통치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민주주의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민주주의는 항상 경향적으로만, 갈등적인 운동으로서만 존재할 뿐이라는 점을 뜻하기 때문이다. 곧 이는 유토피아로서의 민주주의 대신 현실적인 운동으로서 민주주의에 대한 사고의 가능성을 마련해준다.


이제 우리가 위에서 출발했던 알튀세르의 호명이론의 문제로 되돌아가보자. 지금까지의 분석은 알튀세르가 AIE 논문에서 제시한 호명이론이 외양에도 불구하고 또는 그것이 채택하고 있는 몇몇 용어법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스피노자가 󰡔신학정치론󰡕에서 전개한 이론적 분석과 놀랄 만한 이론적 연관성을 지니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1) 이는 우선 스피노자의 상상계 이론 및 그것을 원용한 히브리 신정국가에 대한 분석은 알튀세르의 AIE 논문과 마찬가지로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분석, 국가의 형성과 재생산에 대한 분석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2) 더 나아가 알튀세르가 대주체와 작은 주체들(및 그 매개자로서 정치 지도자) 사이에 존재하는 호명 관계라고 부른 것은 스피노자가 히브리 신정국가의 구성 및 그것이 보여준 놀랄 만한 지속성을 설명하기 위해 제시한 이중적인 계약관계와 정확히 합치하는 것이다.


3) 히브리 신정국가에 대한 스피노자의 분석은 알튀세르의 호명 이론이 수많은 오해와 달리 상상계 내부의 관점을 표현하는 것임을 시사해준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 특히 그의 호명 이론은 기능주의적인 관점을 대변하는 것으로 널리 비판받아왔다. 다시 말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은 각각의 “개인들”이 “주체들”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항상 이미 이데올로기에 의해 호명되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지배 체계에 대한 저항의 가능성을 사고할 수 없게 만든다고 비판받아왔다(이런 측면에서 보면 지젝의 비판은 종래에 제기되던 비판을 라캉 정신분석학의 관점에서 좀더 세련되게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가 AIE 논문이 불러일으킨 논쟁(및 오해)에 대해 해명하고 있는 「AIE에 대한 노트」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이데올로기 내부에는 항상 계급투쟁이 존재하고 있다.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들의 기능이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것이라면 그 이유는 저항이 있고, 저항이 있는 것은 투쟁이 있기 때문이며, 이 투쟁은 결국 계급 투쟁에, 때로는 가까이에서, 그러나 대개는 멀리서 응답하는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인 반응이다.”(Althusser 2007, 332쪽) 그런데 계급투쟁에 대해 말하는 것은 항상 집단에 대해, 또는 더 나아가 대중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반면 호명 이론에서는 집단이나 대중들이 아니라 항상 개인이나 주체(또는 복수로 개인들이나 주체들)가 문제가 되고 있다. 이는 알튀세르가 말하는 호명의 메커니즘은 항상 사회적 투쟁의 현실적 장이 추상된 가운데, 집단이나 대중들이 이미 개인들이나 주체들로 해체된 가운데 사고되는(또는 “상연되는représenté”) 것임을 말해준다. 물론 이는 이러한 추상이나 해체가 전혀 허구적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과의 계약에 대한 상상계가 히브리인들에게 지극히 실재적이었듯이, 이데올로기의 상상계 내부에서는 이는 지극히 실재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알튀세르에게 주체는 상상계에 속하는 것이지 결코 라캉적인 의미에서 상징적인 차원이나 실재적인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지젝은 알튀세르를 비판하면서 지속적으로 “상징적 동일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만, 알튀세르에게 이는 용어모순과 같은 표현이다. 그에게 주체가 지니고 있는 동일성은 상상적인 차원에 있는 것이며, “동일시identification” 역시 상상적인 것이다.[이 점에 관해서는 특히 󰡔마르크스를 위하여󰡕에 수록된 「“피콜로 극단”. 베르톨라치와 브레히트(유물론적 연극에 대한 노트)」 참조. 이 글은 아마도 이 책에 수록된 글 중 가장 주목받지 못한 글이라고 할 수 있지만,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글이다. 발리바르는 󰡔마르크스를 위하여󰡕 「1996년 서문」에서 의미심장하게도 이 글이 일종의 “도둑맞은 편지”일 것이라고 쓰고 있다. Balibar 1996 참조.] 하지만 여기서 주의할 점은 알튀세르에게 상상계란 라캉적인 의미의 상상계, 또는 좀더 그릇된 것이기는 하지만, 지젝의 의미에서의 상상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따라서 알튀세르에게 무의식의 주체라는 차원이 없다고, 호명 이전에 존재하는 주체를 사고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의 이데올로기론의 논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라캉적인 도식이나 최근에는 지젝 식의 해석을 그것에 덧씌우는 것에 불과하다. 그에게 주체는 상상적인 주체, 하지만 삶의 기반으로서 상상계 속에서 자신에게 부여된 동일성을 갖고 살아가는 주체를 가리킨다.


스피노자와 관련하여 알튀세르가 차이를 보이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전자에게는 역사적으로 특수한 형식(히브리 신정)으로 나타났던 것이 후자에게는 보편적인, 초역사적인 메커니즘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발리바르가 보여주듯이 히브리 신정이 보편적인 함의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알튀세르가 이를 호명 이론으로 발전시킨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이 경우 제기되는 또 다른 문제는 알튀세르가 호명의 메커니즘을 부정적인 것으로만, 곧 지배 계급의 예속의 메커니즘으로만 사고했다는 점이다. 히브리 신정의 경우 호명은 대중들의 무능력을 전제한 가운데 이루어졌다는 점을 감안하면 가상적이고 부정적인 측면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그것이 히브리 인민들의 집단적인 생존의 전략(무의식적인?)이었으며, 또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반드시 부정적인 것으로만 치부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발리바르 식으로 표현하면(Balibar 1991), 히브리 신정국가에 고유한 이데올로기적 호명은 대중들의 해방에 대한 열망의 (얼마간 가상적인) 표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 스피노자 식으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그 나름대로 민주주의적인 경향의 표현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알튀세르가 스피노자의 상상계 이론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과 응용의 능력을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간파하지 못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 점일 것이다.


물론 이는 지젝(및 다른 비판가들)이 주장하듯이 알튀세르에게 호명의 메커니즘이 “기능주의적인” 관점에서만 사고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알튀세르는 이미 AIE 논문 말미의 “보론”에서 이데올로기 내부에서는 항상 계급투쟁이 진행된다는 것, 곧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대중적인 저항이 항상 이미 존재한다는 것을 지적한 바 있고, AIE 논문이 불러일으킨 논란에 대해 답변하는 글(Althusser 1976)에서는 이 점을 좀더 명시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 특히 그의 호명 이론이 기능주의적이라거나 저항의 가능성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비판은 적절한 것이 못된다. 다만 알튀세르는 호명은 개인들 및 대중들의 실존과 행동의 상징적 지주이면서 동시에 장애물을 이룬다는 것, 따라서 호명 그 자체가 계급투쟁 및 지배와 저항의 쟁점이 된다는 것을 충분히 해명하지는 못했다고 할 수 있다.



IV. 지젝의 난점들



지젝의 작업은 라캉의 정신분석학, 특히 그의 후기 작업의 요소들을 도입함으로써 현대 이데올로기론의 새로운 장을 열어놓았다. 지젝 이전까지 이데올로기론에서 라캉의 정신분석학은 주로 상상계-상징계라는 쌍을 통해 논의되었는데, 이는 라캉의 작업이 (옳든 그르든 간에) 대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 특히 그의 호명이론을 매개로 도입되고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반면 지젝은 이전까지는 거의 주목받지 못했던 “실재계”의 차원을 과감하게 이데올로기론으로 이끌어들이면서 이데올로기론 및 알튀세르와 라캉의 관계에 대해 전혀 새로운 해석을 제시했다. 사실 라캉의 후기 작업이 RSI론[이는 각각 “le Réel”, “le Symbolique”, “l'Imaginaire”, 곧 “실재계”, “상징계”, “상상계”의 약자표시다]으로 통칭되는 삼원성(특히 실재계를 중심으로 한)에 따라 구조화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영미권에서 지젝 이전의 라캉 수용은 불완전하고 다소 왜곡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지젝의 진정한 독창성은 라캉의 이론(및 독일 관념론 철학)을 이데올로기론 및 사회이론으로 번역하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드문 몇몇 예외를 제외한다면[드문 예외들 중 특히 장 클로드 밀네의 작업을 들 수 있다. Milner 1983.], 그 이전까지는 누구도 실재계를 포함한 라캉의 RSI론 전체를 이데올로기론과 사회이론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또 그것이 현대 사회의 여러 현상들을 설득력 있게 설명해줄 수 있다고 기대하지도 않았다. 반면 지젝은 다수의 저작들을 통해 라캉의 정신분석학 이론이 이데올로기론 및 문화분석론으로서도 기능할 수 있다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젝의 이론적 작업에 난점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는 특히 그가 시도하고 있는 이데올로기론에 대한 개조에서 잘 나타난다. 가령 그는 우리가 위에서 제시했듯이 알튀세르의 이론에 대해 라캉의 정신분석학이 우월한 이유를 이 후자가 호명을 넘어서는 길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찾는다. 왜냐하면 알튀세르는 특히 AIE 논문에서 호명은 반드시 성공한다는 것을 이론화함으로써, 그의 의도와 달리 자본주의적인 재생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제시하지 못한 채 오히려 기능주의에 빠져든 반면, 라캉은 욕망의 그래프나 “무의식의 주체”라는 개념을 통해 상징적 질서의 공백을 드러내고 호명을 넘어설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문제는 지젝이 주장하듯이 라캉의 이론이 이러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환상을 가로지르기”가 단지 정신분석학의 임상적인 차원이 아니라 사회적인 차원에서 가능해야 한다는 점이다. 지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환상을 가로지르’면서 동시에 증상과의 동일시를 완수해야 한다. 우리는 ‘유대인’에게 전가된 속성들 속에서 우리의 사회체계 자체의 필연적인 산물을 확인해야 한다. 우리는 유대인에게 귀속된 ‘과잉분’ 속에서 우리 자신에 대한 진실을 확인해야 한다.”(Zizek 1989, 223쪽) 반복되는 “해야 한다”의 명령형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지젝에게 “환상을 가로지르기”는 궁극적으로 윤리적 문제라는 점이 드러난다. 윤리는 물론 비판적인 지식인들이나 대중이 갖추어야 할 중요한 덕목이며, 올바른 정치적 행위를 위한 규범적 조건이기도 하다. 하지만 사회이론 또는 사회적 분석의 차원에서 윤리적 명령이 어떤 의의를 지닐 수 있을까? 특히 이데올로기론의 차원에서는 윤리적 명령이 어떤 의미에서 중요할까? 이는 “우리는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야 한다” 내지 “우리는 호명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식의 명령과 다른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하지만 “환상을 가로지르기”라는 해결책이 제기하는 좀더 중대한 문제는 다른 데 있다. 이런 질문을 던져보자. 환상을 가로지르기는 어떻게 가능한가? 우리가 “‘환상을 가로지르’면서 동시에 증상과의 동일시를 완수”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지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회엔 항상 상징적 질서로 통합될 수 없는 어떤 적대적인 갈등이 가로지르고 있다. 사회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환상의 목적은 바로 진정으로 존재하는 사회에 대한 하나의 비전을 구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적대관계에 의해 분할되지 않으며, 각 부분들 사이의 관계가 유기적이고 상보적인 사회에 대한 하나의 비전을 구축하는 것이다.”(Zizek 1989, 220쪽) 우선 이데올로기적인 환상의 핵심이 “유기적이고 상보적인 사회에 대한 하나의 비전을 구축하는 것”이라는 주장은 실소를 자아내는데, 과연 오늘날 누가 이처럼 아름다운 “통합주의적 관점”, “사회를 하나의 유기체적 통일체”(같은 곳)로 바라보는 관점을 믿을지, 또 과연 지배 계급이 자신들의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이런 식의 관점을 설파할 것인지 믿기 어렵기 때문이다.


좀더 심각한 것은 이데올로기적 환상에 대한 지젝의 관점 자체다. 그에 따르면 이데올로기적 환상은 “하나의 비전을 구축하는 것”이다. 그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반유대주의 이데올로기에서 유대인을 하나의 물신으로 제시하는 방식을 예로 든다. 곧 유대인은 “이 통합주의적인 비전과 적대적인 갈등에 의해 분열된 실제 사회 간의 거리”를 메우기 위한 물신, “건전한 사회조직을 부패시키는 이질적인 신체, 외부적인 요소”다. 따라서 “사회적인 환상이라는 개념은 적대라는 개념에 대한 필수적인 대응물이다. 환상은 정확히 적대적인 균열을 은폐하는 방식이다. 바꿔 말해서 환상은 이데올로기가 자기 자신의 균열을 미리 고려해 넣는 방식이다.”(같은 책, 221쪽)


두 가지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첫째, 지젝이 말하는 사회적인 환상 또는 이데올로기적 환상이 비전을 구축하는 것이라면, 결국 환상이란 기만적인 조작 및 그것이 산출하는 허위의식과 같은 것이 아닌가? 하지만 아마도 지젝이나 지젝주의자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답변할 것이다. 왜냐하면 환상이 작동하는 것은 의식 내지 담론의 수준이 아니며, 이데올로기적 효과의 최종적인 버팀목으로서 향락의 수준이기 때문이다. 곧 이데올로기적 환상은 우리의 향락 자체를 구조화하는 방식이다. 유대인의 예를 든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유대인을 증오하고 혐오하고 배척하는 것은 이런저런 구체적이고 합리적인 근거들 때문이 아니라, 그가 바로 유대인이기 때문이다.


둘째, 그렇다면, 우리가 앞서 제기한 질문이 다시 제시된다. 이러한 사회적 환상을 가로지르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사회적 환상이 기만이나 허위의식의 문제라면 환상을 가로지르는 것은 원칙적으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사실상으로는 매우 힘들지 몰라도). 비판적인 분석과 대중적인 계몽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적 환상이 의식이나 담론의 차원이 아니라 향락의 수준에 위치하고 있다면, 곧 우리 욕망의 가장 집요하게 내밀한 차원의 문제라면, 이것을 어떻게 가로지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심각한 것이 된다. 어떻게 어제까지 그토록 증오했던 유대인들을 더 이상 증오하지 않는 일이 가능하게 될까? 유대인(또는 오늘날이라면 이주 노동자들)은 우리 사회의 타락의 원인이 아니라 사실은 가장 큰 피해자라고 일깨우면 될까? 유대인(이주 노동자들)이 실제로 우리 사회가 직면한 문제들과 무관하다는 경험적인 자료들을 축적해서 입증하면 될까? 하지만 스피노자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볼 수 있듯이 정서와 인식, 욕망과 지식을 철저하게 분리하는 지젝의 관점에서 과연 이것이 가능할지 의문이다.


지젝의 작업에서 핵심적인 문제가 바로 이것일 텐데, 지젝은 이 문제에 대해 줄곧 윤리적 태도, 사회의 근본적인 변혁의 가능성을 믿고 또 그것을 추구하려는 윤리적 태도(그의 표현대로 하면 “행위”)가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가령 다음과 같은 구절이 그렇다. “버틀러와 대조하여, 라캉이 내기에 걸고 있는 것은, 심지어/또한 정치에서도, 바로 그 근본적인 환상을 ‘횡단’하는 좀더 근본적인 제스처를 성취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환상적 중핵을 교란시키는 그와 같은 제스처만이 본래적 행위인 것이다.”(Zizek 1999, p. 266; Zizek 2005, 428쪽; Zizek 2007a). 좋은 이야기다. 그런데 대중들의 저항 없이 어떻게 사회의 근본적인 변혁의 가능성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리고 환상을 가로지르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보여주지 않고서 어떻게 대중들의 윤리적 각성 및 저항을 기대할 수 있을까?[지젝에 대한 좌파 이론가들, 특히 숀 호머의 비판을 반비판하면서 토니 마이어스는 다음과 같이 대꾸한다. “다른 한편으로, 호머는 지젝이 강조한 ‘행위’를 ‘세계를 바꾸기 위한 진실한 방법’으로 확대 해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행위가 우리의 인식 지평을 바꾼다고 할 때, 행위의 출현 이후 어떤 세계가 나타날지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지젝은 진술 불가능한 것을 말하기보다는 행위의 가능성 자체를 지속시키는 데 관심을 가진다. 지젝이 지적하듯이 “오늘날 정치적 공간이 구조화되는 방식은 점점 더 행위의 출현을 힘들게 한다.” 그래서 지젝은 자본주의적 삶의 지평을 끊임없이 이론화함으로써 행위를 위한 장소를 규명하는 데 자신의 에너지를 집중한다.”(마이어스 2004, 225쪽) 마이어스는 몇 가지 측면에서 기본적인 혼동을 보여준다. 우선 문제가 되는 것은 행위의 출현 이후 어떤 세계가 나타날지 아는 것이라기보다는 행위 자체가 어떻게 가능한지 아는 것이다. 지젝 혼자만의 행위가 아니라 대중의 행위가. 둘째, 혁명 이후, 그날 이후의 세계가 어떻게 될지는 누구도 모른다는 말과 혁명의 가능성, 변혁의 가능성을 위해 현재 존재하는 세계의 구조들을 분석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마이어스는 지젝이 “자본주의적 삶의 지평을 끊임없이 이론화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 지젝이 하고 있는 것은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대중문화적인 현상 및 부시의 이라크 침공과 같은 정치적 현상들에 적용하여 그 현상들을 해석하는 것이 아닐까? 라캉의 정신분석학의 진리를 입증하기 위해 현상들을 예시하는 것 또는 좀더 후하게 말하면 라캉을 원용해서 현상들을 분석하는 것(이때의 분석은 아마도 정신분석학적인 의미의 분석에 더 가까울 것이다)은 세계의 구조에 대한 분석과는 전혀 다르다. 그러나 구조적인 분석이 없이 어떻게 자본주의적 세계의 근본적인 변혁을 감히 꿈꿔볼 수 있을까? 셋째, 마이어스는 지젝이 행위를 위한 장소를 규명하는 데 에너지를 집중한다고 말하고 있고, 지젝 자신은 진보 정치를 위해 수동성으로 물러날 필요성을 강조한다. 이것도 근본적인 변혁을 위한 윤리적 행위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좀 냉소적으로 말하자면, 오늘날 지배 계급 중 누가 지젝의 근본적인 변혁을 위한 윤리적 행위를 두려워하겠는가? 오히려 그들은 사람들이 “지젝이 강조한 ‘행위’를 ‘세계를 바꾸기 위한 진실한 방법’으로 확대 해석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지 않을까?] 아니 지젝에게는 수동적인 대중과 다른 대중들multitudo에 대한 관점이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 더욱이 환상의 물질적인 지주로 기능하는 각종 물질적 장치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지젝의 이데올로기론의 관념론적 성격에 대한 비판으로는 Sato 2007 5장을 참조할 수 있다.]


지젝이 최근의 작업(특히 Zizek 2003 「재판 서문」; 2005 및 여러 저작)에서 집요하게 근본적인 변혁에 대한 전망, “본래적인 행위”의 필요성에 대해 주장하면서도, 정작 실천적인 측면에서는 윤리적 명령을 반복하는 데 그치고 있는 것은 사실상 이데올로기론에서의 퇴보를 나타내는 징표가 아닐까? 이를 좀더 부연하자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 지젝에게 상상계 또는 그가 좀더 강조하는 용어대로 하자면 환상은 스피노자나 알튀세르와 달리 그것이 지닌 가상성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상상적인 것은 사회적 적대를 봉합하고 왜곡하고 기만적으로 쟁점을 전위시키는 것일 뿐, 개인들의 삶의 기반, 장소 그 자체로 나타나지 않는다. 더욱이 스피노자나 알튀세르에서 이데올로기적 상상은 정치적 행위의 바탕을 이루는 데 반해, 지젝에게는 지배 계급의 조작의 소재가 될 뿐이다.


2) 이데올로기론에서 알튀세르적인 단절의 지표 중 하나는 이데올로기적인 물질성에 대한 주장이었다. 이러한 테제를 통해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제시한 고전적인 테제, 곧 이데올로기는 사회적 의식의 문제이며 물질적인 역사와 달리 아무런 독자적인 실재성도, 역사성도 갖지 않는다는 테제와 단절을 이룩할 수 있었다. 또한 이 테제는 이데올로기 국가장치 개념으로 이어져, 어떻게 이데올로기가 사람들의 의식에 직접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물질적인 장치를 통해, 관습적인 의례와 규율 장치를 통해 작동하는지 보여줄 수 있었다. 따라서 이데올로기의 물질성에 관한 테제는 이데올로기가 역사적으로 규정된 물질적 장치들을 통해 제도화되고 변화하는 과정을 설명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해주며, 이는 정치적 투쟁의 쟁점을 구체적으로 명시할 수 있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스피노자에서도, 적어도 󰡔신학정치론󰡕에서 상상계는 항상 물질적인 장치들이나 제도 및 의례들과 관련해서 사고되고 있다. 반면 지젝에게는 물질적인 장치들이나 제도들에 대한 분석이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으며, 사회적ㆍ문화적 현상들에 대한 분석들이 라캉의 정신분석학의 유효성을 입증하는 사례들로 제시될 뿐이다.[주목할 만한 예외가 있다면, 그것은 지젝이 처음 제시하고(Zizek 1989) 지젝 자신(Zizek 1997 3장) 및 로베르트 팔러(Pfaller 2002)가 좀더 정교하게 발전시킨 “상호수동성interpassivity”이라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이데올로기적 장치 및 제도들을 분석하는 데 매우 효과적으로 활용될 수 있다.]



V. 결론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해보자. 지젝은 자신의 여러 저작에서 라캉의 정신분석학에 기반하여 알튀세르의 호명 이론의 한계를 비판해왔다. 또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에서는 이러한 한계가 스피노자주의의 한계 또는 후기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로서 스피노자주의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이 스피노자 철학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판단하는 점에서는 지젝이 전적으로 옳다고 할 수 있으며, 이 점에서 그는 대부분의 라캉주의자들의 맹목적인 비판보다 훨씬 뛰어난 통찰력을 지니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스피노자주의=범신론이라는 상투적인 도식에 입각한 그의 비판은 지극히 초보적인 수준의 비판일 뿐만 아니라 스피노자의 상상이론이 지니는 중요성과 독창성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심각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이는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지젝의 생각과 달리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은 라캉의 정신분석학과는 다른 기반, 특히 스피노자의 상상계 이론에 기초하여 구성되고 발전되었으며, 라캉의 이론이 얼마간 알튀세르에게 영향을 미쳤다면 그것은 오히려 전자의 토대 위에서 변형되고 재구성된 상태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 점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는 한 알튀세르 이데올로기론의 특성 및 그것의 정확한 강점과 난점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이 글은 2008년 3월 15일 서양근대철학회 창립 1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처음 발표했으며, 3월 31일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월요모임에서 다시 발표한 바 있다. 첫 번째 발표회에서 귀중한 논평을 해주신 홍기숙 선생님께 깊이 감사드리고, 두 차례의 발표회에서 좋은 지적을 해주신 여러 선생님들께도 감사를 드린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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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요약

이 연구는 루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이 어떤 의미에서 스피노자주의적 이데올로기론이라고 할 수 있는지 해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은 대개 라캉주의적 이데올로기론으로 알려져왔으며, 더욱이 실패한 라캉주의 이론으로 비판받아 왔다. 슬라보예 지젝은 최근 저작들에서 이러한 실패의 이유를 알튀세르와 스피노자주의의 연관성에서 찾고 있으며, 라캉 정신분석학의 관점에서 양자의 공통적인 한계를 비판하고 있다. 필자의 주장은, 스피노자와 알튀세르의 본질적인 이론적 연관성을 지적하고 있는 점에서는 지젝이 옳지만, 그 연관성의 실제 내용과 의미를 이해하는 데는 완전히 실패했다는 것이다. 필자는 문제의 핵심이 스피노자 철학에서 '상상계' 개념의 의미를 밝히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상상계 개념은 스피노자의 인간학을 정확히 이해하는 데 중요할 뿐만 아니라,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새롭게 해명하는 데에도 근본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더 나아가 지젝의 이데올로기론의 난점들은 스피노자와 알튀세르가 공유하고 있는 유물론적 상상계 개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생겨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핵심 주제어
슬라보예 지젝, 이데올로기, 상상계, 호명, 환상, 변용의 질서와 연관, 신정국가


Abstract

This study aims to elucidate in what sense the Althusserian theory of ideology is a spinozistic one. It has been generally considered as a Lacanian theory, and even criticized by some commentators as a failed one. Slavoy Zizek found the reasons of its failure in the theoretical connections between the Althusserian theory and the Spinozism, and criticized their common limitations from the viewpoint of Lacanian psychoanalysis. In my thought, he was surely right to find the essential theoretical relation between Althusser and Spinoza, but he totally failed to understand its meaning and significance. I think the point is to clarify the meaning of "the imaginary" in the philosophy of Spinoza. "The imaginary" is important not only to understand Spinoza's anthropology, but also to bring a new light on the Althusserian theory of ideology. Then, I hope, one can explain the difficulties of Zizek's own theory of ideology in the light of the materialist concept of the imaginary which is shared by Spinoza and Althusser.

key words: Slavoy Zizek, ideology, the imaginary, interpellation, fantasy, order & connection of affections, state of theocra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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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빈의 인권이야기]

 

소유권과 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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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빈

‘인권’이라는 개념은 복잡한 여러 사상적 기원을 가지고 있지만, 그 빼놓을 수 없는 것 하나로 운위되는 것이 ‘인신의 자유’(habeas corpus)라는 것이다. 이 라틴어의 원 뜻은 “내 몸은 내 것이다”(I have my body)라는 말이라 하는데, 13세기 영국에서 생겨난 소위 대헌장(Magna Carta)에서 처음으로 하나의 헌법적 위치를 가진 구절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말이 생겨난 구체적 맥락은 ‘인신의 자유와 영혼의 자율성’과 같은 고상하고 형이상학적이었다기보다 아주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형이하학적인 것에 가까웠다. 당시 인신의 자유가 요구되었던 것은 ‘소유권’의 확립을 위한 한 장치로서 제기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당시 영국의 존 왕(King John)은 전쟁 등을 명분으로 하여 무척 무거운 세금을 물렸고 여기에 대해 반발한 귀족들과 부유한 상인들이 뭉쳐서 왕이 함부로 신민들의 재산을 침탈하지 못하도록 왕권을 제한하는 것이 그 대헌장이라는 것의 역사적 맥락이었다. 어째서 인신의 자유가 여기에서 관련이 되는가? 서구에서나 동양에서나 권력자가 인민에게서 재물을 뜯어내는 방법이 가렴주구(苛斂誅求) 혹은 글자 그대로 끌어다놓고 주리를 틀어버리는 것이었다. 따라서 재물을 지키기 위해서는 가렴주구와 같은 잔혹 행위를 원천적으로 방지해야 했고, 여기에서 ‘인신의 자유’라는 생각이 나왔다는 이야기가 되겠다.

인권과 소유권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경우는, 바로 이러한 대헌장의 정신을 고도의 정치 철학으로 발전 승화시켰던 존 로크(John Locke)의 자유(liberty) 개념에서 보인다. 그는 자유란 다시 세 가지 즉 ‘자유, 생명, 재산’(liberty, life, property)의 권리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다. 여기에서 우리는 소유권이 ‘인신의 자유’와 동일한 정도로 인간 권리의 핵심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보게 된다. 즉 나의 인신의 안전이 확보된 상태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다고 해도 나의 생명을 부지할 수 있는 소유가 없다면 그것이 아무 의미도 없게 된다는 생각이다. 반대 방향으로 생각해보는 것도 재미있다. 산속에서 노상 강도를 만날 경우의 상황이란 나의 인신의 자유의 위협과 나의 소유의 위협이라는 것은 두 개로 분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까. 결국 내 인신을 건드리는 것은 내 소유를 건드리기 위함이요 내 소유를 건드리는 것은 곧 내 인신을 건드리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영미권 국가들에서는 다른 이의 사유지에 무단으로 침입할 경우 엄벌을 받을 수 있으며 때때로 그 땅주인의 총알 세례(!)를 감수해야 할 경우까지 있다.

이렇게 소유권을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하늘로 부여받는 가장 중요한 천부 인권으로 보는 관념은 영미 세계의 정치 사회 사상에서 지배적 전통으로 남아 있다. 그런데 여기에 뭔가 논리적 맹점이 있다. 대헌장이나 존 로크의 저작이 상정하고 있는 사회 상태는 군주가 신민을, 또 인민들 각자가 서로서로 인신과 재산을 마구 노리는 늑대와 같은 상태이다. 이렇게 정글과 같은 사회 상황에서는 소유권이 인간 생존에 필수적인 하나의 ‘인권’의 차원으로 올라오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다. 그런데 질서가 정돈되고 고도로 발전된 법과 제도가 지배하는 사회에서도 과연 소유권은 ‘인권’인 것일까?

실제로 루소나 칸트와 같은 대륙의 사상가들은 소유권이란 공동체 전체의 권위에 의해 개인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법적 인정을 받을 때 완결되는 권리라고 보고 있다. 즉 개인이 아기로 태어날 때 옥황상제에게서 받아오는 ‘천부 인권’이라기보다 이 땅 위에 존재하는 사회 그리고 국가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원칙적으로나마 공공의 이익과 권리가 우선할 경우 그 개인에게 주어졌던 소유권은 사회로 회수될 수도 있는 것으로 이들은 보고 있다.

더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소유의 가장 중요한 형태가 토지였던 농경 사회와 달리 고도로 발전한 산업 사회에서는 어떤 것이 누구에게 귀속되는지가 그다지 투명하게 보일 때가 많지 않다. 예를 들어 어느 기업이 올해에 예상을 뛰어넘는 순이익을 올렸다고 해보자. 이것이 주식 배당금으로 주주에게 돌아가야 하는가 아니면 직원들의 임금 상승이나 상여금으로 나가야 하는가 아니면 새로운 장비에 투자하는 쪽으로 써야 하는가 아니면 회사의 금고에 그대로 쟁여 두어야 하는가. 그리고 그 각각의 경우에 따라 국가는 어느 만큼씩 세금을 거두어야 하는가 등의 문제는 결코 “모든 이들은 인신의 자유를 갖는다”와 같은 간단명료한 문장의 원칙 하나로 풀어내기에는 턱없이 복잡한 것들이다.

만약 소유권이 ‘천부 인권’이 아니라 사회와 공동체의 법적 제도적 질서에서 만들어지는 인공의(artificial) 권리라는 것이 분명하게 된다면 이는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엄청난 논쟁과 논의의 장으로 들어가는 판도라의 상자 열기와 같은 일이 된다. 개인은 어떤 근거에서 또 어느 정도까지 또 어떤 방식으로 소유권을 보유하게 되는가. 그가 사회에 지는 책임은 무엇인가. 프루동이 갈파했던 것처럼 어느 개인의 소유권이 타인의 ‘인권’까지 침해하는 정도로 확장되는 것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등등. 실제 20세기 선진 자본주의 각국의 역사적 경험을 보면 이러한 복잡한 문제들을 다루는 법적 제도적 장치의 발전사가 파란만장하게 펼쳐져왔고 그 결과 나타났던 20세기 자본주의의 모습도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21세기 들어와 이러한 추세가 역전되고 영미의 소위 ‘헌정주의’(constitutionalism)가 다시 기승을 부리며 소유권을 초법적인 위치의 ‘인권’의 차원으로 강조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소유권을 놓고 복잡하게 발전했던 각종 제도와 규제 장치들이 모두 사라지고 단일의 주권으로서 그것이 되살아나고 있다. 판도라의 상자 맨 밑의 ‘희망’까지 튀어나와 모든 민중들의 머리를 사로잡기 전에 재빨리 상자를 닫아야만 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홍기빈의 인권이야기]

 

 

소유권은 권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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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빈

어린 왕자는 어느 별에서 재미난 아저씨를 만난다. 그는 온종일 책상에 앉아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오억 일백 육십 이만 이천 칠백 삼십 개’의 별을 세고 또 세고 있다. 어린 왕자는 그에게 묻는다. 이 별로 무얼 하느냐고. 그는 대답한다. 조그만 문서에 별의 숫자를 적어서 서랍에 넣고 잠근다고. 그러자 어린 왕자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말이야 꽃을 한 송이 소유하고 있는데 매일 물을 줘. 세 개의 화산도 소유하고 있어서 주일마다 그을음을 청소해 주고는 하지… 내가 그들을 소유하는 건 내 화산들에게나 꽃들에게 유익한 일이야. 하지만 아저씨는 별들에게 하나도 유익하지 않잖아.”

이 짧은 우화는 소유권 개념을 둘러싼 역사적 논의의 중심 가운데 하나인 ‘사용’과 ‘타인의 접근 배제’라는 문제의 핵심을 보여주고 있다. 내가 어떤 것을 소유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어린 왕자는 내가 그것과 구체적으로 관계를 맺어 나를 위해 그것을 사용하고 또 그 와중에서 그것도 변화를 겪게 되는 ‘사용’이 소유의 의미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아저씨는 ‘자기 것’이라고 선언된 별들을 숫자로 바꾸어서 서랍에 넣고 잠가버린다. 왜 그럴까. 그런 이상한 숫자 놀음보다는 훨씬 더 중요한 사명을 띠고 우주를 헤매야 했던 어린 왕자에게는 그것을 캐물을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지구라는 별의 땅위에 붙들린 채 몇 천 년을 살아온 우리는 그 의미를 몸으로 알고 있다. 그렇게 되면 그 종이에 숫자로서 적힌 별들에는 그 아저씨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접근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결국 소유권을 적어 놓은 종이를 서랍에 넣고 잠그게 되면 우리에게는 사실상 그 모든 별들이 그 잠긴 서랍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이것은 우리가 소유권이라는 말을 놓고 이야기를 풀 때에 숱한 혼동을 낳는 지점이다. 소유권이란 그 소유자가 소유 대상을 실제로 사용할 권리를 말하는가. 아니면 자신의 허락 없이 타인들이 그 대상에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하는 권리를 말하는가. 만약 전자라면 전혀 ‘배제’없이 ‘사용’만 하는 소유자 즉 자기가 그것을 마음대로 사용할 가능성만 보장된다면 다른 사람이 얼마든지 그것을 또한 사용하도록 내버려 두는 소유자를 상정할 수 있다. 또 후자라면 전혀 ‘사용’없이 ‘배제’만 하는 소유자 즉 실제로는 그 소유 대상을 전혀 사용하지 않으면서 누구 다른 이가 혹시라도 그것에 접근하려 들면 그 즉시 발포하는 소유자를 상정할 수 있다.

전자에서는 그래서 상당히 다양한 성격의 여러 소유 형태가 나올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근대 이전 영국 농촌의 공유지(commons)와 같은 것이 있다. 그 마을에 정착하고 사는 이라면 원칙적으로 누구나 그 땅을 ‘사용’할 수 있고 아무도 다른 이가 그것을 사용하는 것을 ‘배제’할 수 없는 그 마을 전체의 소유인 것이다. 또 공유지가 아닌 경우에도 토지의 소유권이란 주로 누가 어떤 땅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 권리로서 정의되어 왔다. 이는 마을마다 또 땅뙈기마다 거기에 얽힌 관습과 특성 등등으로 복잡하게 정의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잘 알려져 있듯이, 16세기 영국에서는 중대한 변화가 일어난다. 힘을 가진 영주나 대토지 소유자들이 공유지이건 또 누가 경작하기로 되어 있는 땅이건 그 땅을 실제로 사용하던 사람들을 싹 다 몰아내어 버리고 다시는 아무도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게 ‘울타리’를 처 버린 것이다. 마르크스가 공들여 설명하고 있는 대로, 이러한 ‘종획 운동’(enclosures)이야말로 자본주의적 소유권이 탄생한 순간인지도 모른다. 이제 소유란 ‘내가 그 땅을 경작할 권리’라는 뜻이 아니라 ‘아무도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할 권리’로 즉 ‘사용’에서 ‘배제’로 뜻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이것이 우리가 오늘날 살고 있는 바의 자본주의적 소유권의 본질이다. 즉 그것은 ‘사용’의 권리가 아니라 ‘배제’의 권리이다. 그래서 오늘날은 그나마 여기저기 남아 있는 ‘공유물’(commons)의 영역은 계속 더 줄어들고 있으며, 대신 전혀 ‘사용’을 하지 않고 ‘배제’의 권리만을 행사하는 이들-부재 지주, 기업 경영에 관심 없이 주식만 소유하는 주주들 즉 베블린이 말한 ‘부재 소유자’(absentee owners)들, 선물 옵션 시장의 거래자들 등등-은 도처에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다. 즉,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바의 소유권이란 어린 왕자나 우리들이 생각하는 그런 소박한 의미가 아니다. 자기가 사용을 하건 말건 남이 사용하는 것을 배제할 수 있는 권리일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의 소유권 개념은 결코 흔히 믿어지듯이 인류 문명의 시작부터 존재했던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장구한 인류 역사 속에서 기껏해야 500년을 넘지 못하는 비교적 대단히 새로운 현상에 불과하다.

20세기 초 미국 철학자 모리스 코헨(Morris Cohen)은 이점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구별을 행하였다. 세상에는 자기가 직접 어떤 대상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 관계를 빌어서 생겨나는 소유권도 물론 있다. 하지만 이는 보통 ‘점유’(possession)라고 하는 것으로서 법적 사실로서 인정되는 ‘소유’(property)와는 다른 것이다. 그리고 점유가 ‘점유자와 점유 대상과의 관계’임에 반해 ‘소유’란 소유자와 소유 대상과의 관계 즉 사람과 물건과의 관계를 밝힌 것이 아니다. 그것이 사실상 정의하고 있는 것은 ‘소유자와 비소유자의 관계’ 즉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밝혀 놓은 것 뿐이라고.

여기에서 심각한 문제가 나오게 된다. 우리는 흔히 소유란 경제적 사실과 개념에 불과하므로 정치적인 것과 거리가 멀고 특히 인권 문제와는 더욱 무관한 영역이라고 생각하기에 쉽다. 그리고 우리는 지난번 칼럼에서 오히려 소유야말로 가장 기본적인 인권이라고까지 주장하는 논리와 그 모순점에 대해서 본 바 있다. 하지만 이글에서 본 것처럼 소유란 소유자와 소유 대상과의 관계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사실상 ‘타인을 배제’하는 권리에 불과한 것이라면? 이는 바로 적나라한 사회적 ‘권력’에 불과한 것임이 드러난다. 아니나 다를까 그래서 코헨은 이렇게 사회적 권력으로 변해버린 자본주의에서의 소유 개념은 정치권력의 주권(sovereignty)과 다를 바가 없다고 주장한다.

인권이 추상적인 권리 선언에 그치지 않고 실질적인 내용을 가지려면 인간 존재에 필수적인 타인과 자연에 대한 접근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인간 사회에는 분명 그러한 ‘타인들의 접근권’을 배제하는 소유권이라는 지뢰밭이 도처에 깔려 있다. 이로써 인권과 소유권은 정면으로 모순될 가능성을 배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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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 2008-01-22 0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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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들: 마키아벨리에 대한 알튀세르의 우발론적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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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코 라흐티넨


 
  역주  
 
정세(政勢). 모든 정치적 행위자와 활동가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정세를 분석하고 그 판단에 입각하여 행동한다. 그러나 정작 정세가 무엇인지,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세라는 문제설정을 받아들이는 것이 정치적 사고와 행동에 어떤 변화를 초래하는 것인지에 관한 문제는 충분히 숙고되지 않는다는 느낌이다.
예컨대 스스로를 활동가로 자처하는 많은 이들은 이론과 구조를 폄하하면서 실천과 주체가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이들은 실천과 주체의 '철학', 심지어 '형이상학'이나 '종교'로 미끄러진다. 실천과 주체라는 '유물론적' 외피를 쓰고 있지만, 절대적으로 근원적이고 기본적인 원리(原理)를 정립하려 한다는 점에서 자신이 비판하는 문제설정과 정확히 동일한, 아니 '이론주의'와 '구조주의'에 대한 비판에 기초한다는 점에서 스스로는 이런 편향에서 절대적으로 자유로우며 자신에 대한 비판은 이 같은 편향을 충분히 '숙정'하지 못한 탓이라는 식의 논리를 내세우는 더욱 폐쇄적이고 독단적인 결과에 이르는 것이다. 마치 현재의 국가를 '전인민의 국가'라고 규정함으로써 그에 대한 비판을 '인민의 적'으로 간주한 스탈린주의처럼.
이론과 실천, 구조와 주체라는 이 허구적 대립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주는 가장 유효한 문제설정이 바로 정세다. 즉 문제는 정세와 무관하게 정립되는 실천과 주체가 아니라, 정세에 부합하는 실천 그리고 정세를 변화시키기에 적합한 형태로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론과 구조 역시 정세의 심문 앞에서, 정세에 대한 구체적 분석으로서 이론, 정세를 규정하는 물질적 역관계에 대한 가늠으로서 구조로 재규정된다. 이렇게 각각의 범주들을 근원적으로 변화·재배치하면서, 정세의 문제설정은 이론과 실천, 구조와 주체의 통일이라는 저 오랜 난문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이와 함께 정세는 정치(적 사고와 행동)의 고유성을 사고할 수 있게 해 준다. 정치는 모든 사태가 종결된 후 그 원인과 구조를 사후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황혼녘에 날개를 펴는 '미네르바의 올빼미'가 아니다. 정치는 사태가 한창 진행 중이고 그 원인이 완전히 파악되지 않은 '정오의 칠흑' 속에서 벌어지는 '결단'일 수밖에 없고, 그런 한에서 용기와 대담함을 필요로 한다. 한 편 이 같은 결단은 그 불완전성으로 말미암아 잘못된 판단과 전혀 의도치 않은 역효과 등 많은 위험부담을 필연적으로 동반하게 된다. 이처럼 결단에 구조적으로 따라붙는 위험부담 때문에, 정세와 무관한 주체를 중심에 놓는 윤리 곧 (정세적 변화와 무관하게 진행되는 주체적 역량의 선형적 확대·축적에 대응하는) '일관성'의 요청과 전혀 다른 '책임'(responsibility) 윤리 곧 의도와 판단과 예상을 벗어나는 효과에 '응답'(response)하는 능력(ability)이 정치의 관건이 된다. 결단과 책임, 대담함과 (변)덕이라는 외견상 대립된 태도의 통일. 이것이 정세라는 문제설정이 초래하는 또 다른 효과다.
지난 『사회운동』 69호부터 시작한 정치 이념 기획을 일단락하면서 정세를 다룬 글을 선택한 것은, 이처럼 정세라는 문제설정의 채택이 정치적 사고와 행동을 쇄신하는 데 핵심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소 난해한 논의였는 데다, 생소한 '최신'의 이론들을 다룬 까닭에 어려움이 커졌지 않았나 싶다. 변명을 덧붙이자면,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라는 대사건 이후 동시대인들이 어떤 식으로 기존의 이념을 반성하고 이 문제를 재정식화하며 나아가 나름의 좌표를 제시하는지 함께 사고하고 토론하고 싶었다. 마르크스주의로 대표되는 전통을 폐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다시 현재화하기 위해서, 동시대 결국 현 정세 안에서 벌어지는 사고와 쟁점을 파악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부족한 역자들 때문에 본래의 취지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을까 두렵다. 이 점에 관해서 어떻게 '책임'을 질지 더 깊이 고민하겠다는 말로 변명을 마칠까 한다. 그 동안 많은 관심을 보내 준 독자들께 감사드린다. 또 이번 기획에 음으로 양으로 도움을 주신, 이 자리에서 다 이름을 밝히지 못하는 많은 분들께도 감사드린다. 다음 호부터는 마르크스에 관한 학습을 도울 수 있는 기획을 시작할 예정이니,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
'이론과 실천의 통일'이라는 위대한 이상이 실현되는 듯 했던 87년, 그러나 20년이 지난 지금 신자유주의 하에서 이론과 실천의 분할은 더욱 심각해지고 지적 위계는 한층 강화되고 있으며 그만큼 대중의 자기해방은 억압당하고 있다. 이에 맞서 이론과 실천의 통일이라는 깃발을 다시 치켜들되, 실천과 활동가의 편에서 그렇게 하기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 정세와 정치를 우위에 둔 사고와 행동을 전진시키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끊임없이 되물어야 할 이 질문에 실마리를 주는 한 마르크스주의자에게 귀 기울이는 것으로 우리의 답변을 대신하고자 한다.

"여기에 16세기 초 이탈리아의 정세를 분석하는 텍스트가 있다. 그 정세는 이탈리아의 국민 통일의 문제를 분명한 역사적 과제로 제기한다. 또한 그것은 군주와 그의 정치적 실천을 그러한 주요 목표를 성취하는 수단과 동일시한다. 나는 이렇게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 그 정치적 문제설정의 본질적인 결과가 이론 속에서 작동하도록 하는 이론의 배치와 전형적인 양상을 근원적으로 재편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 그러한 정치적 문제설정과 새로운 배치를 동원하고 전개시키는 텍스트는 어떻게 자신이 전개시킨 정치적 실천의 문제설정의 공간 속에 자기 자신을 배치하는가?
최초의 유혹은 정확히 그 텍스트를 어떤 공간이든 그에 외재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계몽주의의 테제이다. 빛처럼, 진리는 어디에도 정주하지 않는다. 그것은 진실의 유효성을 통해 발생하고 작동하며, 진실의 본질은 계몽을 통해 효과를 발휘한다. (…) [그러나 마키아벨리가] '진리'의 유효성의 이론으로 타락한 것은 결코 아니다. 마키아벨리는 현실적인 것 이외에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 즉 진리는 진리 효과에 의해 나타나고, 그 효과 밖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진리의 효과는 언제나 사람들의 활동에 녹아들어 있다는 것, 또한 정치적으로 말해서, 세력들간의 대결, 당파들간의 투쟁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 [마키아벨리의 텍스트는] 이데올로기적이고 정치적인 문헌의 세계에 속하는 텍스트이며, 그 세계 속에서 편을 들거나 입장을 취하는 텍스트이다. (…) 그것은 규격을 맞춘 담론의 배치만이 아니라, 그 작성법까지도 재편하기에 충분하다. 『선언』은 새로운 저술 형태로 쓰일 것을 요구한다. 이것은 그람시가 『군주론』의 구성과 문체에 감탄한 이유를 설명해 준다. 새로운 군주에게 호소하기 위한, 겨우 80쪽에 달하는 새로운 구성과 명쾌하며 간결하고, 활기차고 열정적인 새로운 문체.
왜 열정적인가? 자신이 해법을 제시하는 정치적 문제의 이론-정치적 배치의 구성에서 부단히 한쪽 편을 들었으며, 언제나 여러 세력들의 갈등에 입각하여 정세를 사고했던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저작들 속에서 스스로의 당파성을 공개적으로 언명해야 하고, 자신의 대의에 여러 일파를 설득하는 데 필요한 온갖 수사법과 열정의 자원들을 갖고 그렇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첫 번째 의미에서 그의 텍스트는 선언이다. (…) 이탈리아를 구원할 군주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수단들에 관한 이론을 텍스트를 통해 정교화시켰던 마키아벨리는, 자신이 공표하고 참여하는 투쟁에서 자신의 텍스트가 하나의 수단으로서 보탬이 되도록 하여, 자신의 텍스트를 차례차례 그리고 동시에 그 수단들 가운데 하나로 취급한다. 텍스트를 통해 새로운 군주를 널리 알리기 위해서, 그는 자신이 방송하는 뉴스에 적합한 방식, 아주 새로운 방식으로 글을 쓴다. 그의 글쓰기는 새롭다. 그것은 정치적 행위이다."

- 루이 알튀세르, 오덕근·김정한 옮김, 『마키아벨리의 가면』, 이후, 2001, pp. 50~52

 
 


정세를 다시 사고한다

에티엔 발리바르(Etienne Balibar)는 과잉결정과 과소결정 각각의 시각들에 관해 흥미로운 논평을 한다. 그에 따르면 여기서 "문제는 더 이상 정세를 구조의 생애에서의 짧은 순간이나 혹은 구조의 연속적 단계들 사이의 이행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구조라는 현실은 정세들의 예측할 수 없는 연속일 뿐이며, 역으로 정세란 구조의 일정한 배치로 결정될 따름이기 때문이다."1)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발리바르가 가리키는 것은 경제적 토대와 그 주요 모순이 동질적이고 총체적인 구조가 아닌 방식인데, 여기서 부차 모순들이나 국내적 정황들은 엄격한 의미에서의 정치 정세들의 일종으로 고정된다. 이와는 반대로 토대와 상부구조, 또는 국제적·국내적 요소들은 결합하여 복합적인 정세를 이루며 이는 시간에 따라 변화한다. 이런 식으로 '정세' 개념은 경제적 심급의 효과가 나타나는 영역을 가리킨다.
발리바르는 정세와 구조가 하나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구조들은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주어진 정세를, 고유한 경향과 모순적인 생산관계 등을 갖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방식으로 특징짓는 배치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구조들은 독자적인 실존을 갖지 않으며, 그들이 실존하거나 존속하고 역사적 형상을 얻는 것은 순전히 정세적이다.2) 발리바르는 구조와 정세라는 대립항의 이 같은 폐기를 지나치듯이 언급한다. 그의 말을 빌자면 "이 변화는 잠재적 결과를 갖는다. 곧 역사적 '이행'(그리고 더욱 심원하게는, 더 이상 단일한 지속을 갖는 연속적 질서로 표현할 수 없는, 역사적 시간)이라는 전통적 문제에서 완전한 전환으로 이어지는 것이다."3)여기서 우리는 새로운 입각점의 출현을 얻게 된다. 우리는 더 이상 총체적이고 선형적으로 진보하는 구조나 사회구성체를 목격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모순들이 관통·심화되며 구조가 역사적 형상을 얻는 과잉결정과 과소결정의 정세적 과정들을 감지한다.
이 맥락에서 발리바르는 알튀세르의 학생들 발리바르 자신을 포함하여 이 하나의 구조에서 다른 구조로의 이행이라는 변혁을 연구하는 데 과잉결정과 과소결정이라는 알튀세르적 개념들을 적용하기 위해 기울인 '필사적' 노력들을 언급한다. 그렇게 하면서 사실은 시기구분의 고전적 모형을 따랐으며 구조와 정세의 분할을 포기한다는 "이 모든 것의 진정한 의미를 거의 깨닫지 못했다."4) 이 자기비판의 노선은 알튀세르의 추종자들이 헤겔적 총체성에 입각한 사고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을 함축한다. 그들은 헤겔의 표현적 총체성과 마르크스의 지배소를 갖는 구조(structure in dominance) 사이의 차이점에서 파생되는 이론적 문제들을 완전하게 깨닫지는 못했던 것이다.
발리바르가 정확히 지적한 것처럼, 알튀세르 자신이 추구했던 역사적 시간에 관한 구상은, 심지어 당시에도, '역사적 이행'에 대한 측정법과 다른 것이었을 수 있다.5) 나라면, 여기서 [대문자] '보편사'(Universal History)와 '다양한 역사들'의 관점들을 구별할 것이다. 정세들은 역사의 어떤 '일반 시간'과도 어울리지 않는데, 왜냐하면 역사에는 그런 것이 없기 때문이다. 각각의 정세는 고유한 시간표에 따라 전개되고 지속한다. 이는 과잉결정과 과소결정의 특징을 갖는 과정들에서 분명해지는데, 여기서는 모순들이 전위되고 응축되거나, 정세들이 특정한 방향으로 절합된다.
이하에서는 알튀세르의 '정세적 역사'라는 구상을 간략히 설명함으로써, 이 구상이 정치적 실천을 '정세적 실천'으로 이해하는 길을 열어줄 것이라는 기대를 납득시킬 것이다. 여기서 마키아벨리의 역할은 결정적이다. 알튀세르에게 있어, '피렌체의 서기장'은 탁월한 정치적 실천의 이론가였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발본적인 방식으로" 마키아벨리가 주목했던 것은 '모든 정세의 우발적 사실성(factuality)'이다. 역사를 정세적으로, 정세를 우발적 현실들로 보는 것은 정치적 행위나 개입의 가능성을 이론적으로 논할 수 있게 해 준다. 또는 알튀세르가 「아미엥에서의 주장」(1975, 「철학에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인가?」로 일부 영역된)7)에 적어 넣었듯이, 역사에 대한 헤겔적 구상은 이론적 궁지에 도달한다. "내가 지나가면서 언급했던 것처럼, 헤겔에서 영감을 받은 정치란 아직껏 세상에 나타난 적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원 안에 사로잡혀 있는데 어디서 원을 움켜쥘 수 있겠는가?"8)


정세적 역사

발리바르의 용어법에서, 정세는 더 이상 '구조들의 세계사'에서 '지방적'이거나 사소할 뿐인 문제가 아니다.9)역사 자체가 이제 '정세적'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자본주의 세계경제는 전제적이고 전능한 중심을 갖지 않는다. 대신 지구적인 자본주의 체계는 국내적·국제적 정세들에 따라 형성된 '복합적 전체'나 '지배소를 가진 구조'의 일반적 틀 또는 '배치'다.
중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 과잉결정하는 매우 강력한 요소들과 지배적인 경향들의 결여는 아니다. 그것은, 정세적 시각에서 볼 때, 진화하는 자본주의가 단순히 '세계 질서'의 '총체사'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뜻일 뿐이다. 그것은 특정한 추상과 일반성의 수준에서, 자본주의 세계 경제 또는 자본주의의 제국주의 단계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을 형성하는 데 기여하는 서로 다른 국내적·국제적 정세들에 관한 것이다. 즉 우리는 자본주의가 거기 존재하는지 여부를 묻지 않는다. 우리가 묻는 것은, 이른바 자본주의 곧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생산관계, 그리고 모순들 의 서로 다른 시간들과 장소들에서 어떤 종류의 역사적 형상들이나 유형들이 출현하는가 이다.
만일 과잉결정과 과소결정이 유일하고 반복할 수 없는 특성들을 가진 사건들이나 사례들의 복합적 계열들로 이루어진다면, 즉각 절대적 역사의 지평을 떠나 사뭇 정반대의 무대로 떠나려는 유혹이 생겨난다. 현실은 불가해한 혼돈, 헤아릴 수 없는 이유들과 모순들과 연속들이 원인이 되는 순전한 '연접'(連接, conjunctions)들에 불과한 것으로 판명될 것이다. 현실화되는 모순들은 본성상 사건들의 개별적이고 우연적인 계열들로 판명될 것이며, 여기서는 언급할 만한 지속성을 가진 어떤 구조적 요소들이나 경향들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고, 따라서 이 모순들을 유형화하고 식별할 수 있는 토대를 발견할 수 있는 방법도 없을 것이다.
알튀세르가 1980년대 초반에 시작되어 사후에 출판된 그의 후기 작업에서 대답하려고 했던 것이 바로 이 필연성과 우연성(contingency)이라는 질문들이다. 그러나 이 고찰들 역시 나름의 역사가 있다. 이들은 예컨대 알튀세르가 1969년에 쓴 「모순과 과잉결정」 영역본 보론에서 그 전조를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엥겔스가 '최종심급'이라는 관념을 활용한 방식에 관해 말하자면 비판적으로 논평했고, 이 논평은 우연(chance)과 필연이라는 쟁점을 다루는 길을 열었다.10) 많은 점에서 알튀세르의 엥겔스 비판은 자세하게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11) 특히 중요한 점은, '최종심급'라는 관념뿐만 아니라 토대와 상부구조라는 개념이, 무엇보다도 우선 이론적 수단이라는 관점이 등장한다. 이를 갖춘다면 어떤 주어진 시간에 놓인 토대와 상부구조의 당면한 역사적 형태들에 대처할 수 있게 되고, 과잉결정과 과소결정이라는 특징을 갖는 역사적 과정들을 파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역사적 형태들이나 사건들은 '불가사의'나 미시적 원인들의 위태로운(hazardous) 혼돈으로 보이지 않게 된다. 이른바 혼돈을 모순의 역사적 전개라는 시각에서 이해하고 명확히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난다.
'이해'는 역사 철학들에서처럼, 세계에 대한 사변적 설명(관념론 체계의 설계자가 말하는 '이야기')을 가리키지 않는다. 반대로 이해는 사회 형태들에 대한 구체적이지만 이론적인 기초가 있는 분석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분석은 과잉결정과 과소결정의 과정들에 집중하고, 여기서 경제적 요소들('경제적 심급')은 중심적 역할을 하는데 단 이미 다른 요소들로 전위되거나 응축되어 '불순'해지고,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 묶여 있는 상태로 그렇게 한다. 이로부터 '최종심급'이란 사회 형태들의 역사적 전개 배후에 있는 보증자가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대신 그것은 하나의 이론적 출발점, 곧 변화하는 사회 형태들 및 관련된 토대-상부구조의 특정한 형태들을, 적어도 일정한 정도까지,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게 해 주는 지점으로 나타난다. 이런 식으로 '최종심급'은 상부구조의 정치 형태들과 그 '미세한 사건들'을 넘어서는 경로를 개방한다.
여기서 마주치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한 편으로, 경제적 모순들이 정치 제도 및 실천의 구성체에 미치는 과잉결정적이고 과소결정적인 효과들이다. 다른 한 편으로, 이 제도와 실천이 생산양식과 생산관계의 역사적 형태에 역으로 미치는 영향이 있다. 현실은 항상 복합적 정세이지만,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그 결론이 인식론적 공백이고/거나 '경제'가 궁극적 관리자/보증자라는 주장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과잉결정과 과소결정의 문제는 복합성을 감출 필요 없이 사회에 대한 이론적 분석에 활용될 수 있다. 이들은 복합적인 것을 이론적으로 포착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렇지만 알튀세르가 복합적 과정들에서 작동하는 각각의 모든 모순들(그리고 다른 구성적 요소들)을 추적할 수 있고 그 효과들을 예상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은 전혀 아니라는 점을 반드시 덧붙여야 한다. (마찬가지로 프로이트 역시 꿈에 관하여 이런 류의 주장을 전혀 하지 않았다.) 또 알튀세르는 역사적 사건들을 확실하게 예측할 수 있다고 가정하지 않았다. 모순에 대한 분석은 불가피하게 불완전한 상태에 머물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분석의 대상이 되는 어떤 모순도 항상 알려지지 않은 '결여된 원인들'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현실은 주체들에게, 분석가와 행위자들에게 투명하지 않고 불분명하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이 과정들이 모든 분석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꿈은 신비한 밤의 현상이라거나 "그것은 꿈일 뿐이었어"라는 대사로 족한 낮의 잔여물에 불과한 것으로 다뤄져서는 안 된다.) 한 편으로, 예컨대 경제의 주요 모순이 주어진 모순에 대해, 과잉결정적인 방식으로, 어떻게 영향력을 행사하는가라는, 만성적으로 설명되지 않거나 예견되지 않은 본성의 문제 앞에서 완벽함과 확실성을 포기하는 것과, 다른 한 편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종심급'이라는 테제가 이 모순 자체에 삽입된 경제적 요소들을 분석가가 조사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점을 깨닫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따라서 '복합성'은 미시적 원인들의 '혼돈'으로 번역되지 않는다. 복합성은 '미시적 원인들'이 나타나는 역사적 형태들의 전개라는 복합적 과정에 속한다. 그러나 이제, 이 과정들이 제공하는 맥락들을 통해, 표현적 총체성 및 그 추상적 도식의 사고에 묶여 있지 않은 이론적 포착을 얻을 수 있다.


헤겔적 유형의 필연과 헤겔적 본질의 발전이 기각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우리가 주관성의, '다원주의'의, 우연성의 이론적 공백 속에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정반대로, 헤겔적 전제들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조건하에서만 우리는 진정으로 이 공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된다. 과정의 전개와 이 전개의 모든 전형적 측면들을 실제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그 과정이 복합적이고 하나의 지배소를 갖는 구조를 갖기 때문이다.12)



정세적 정치(마키아벨리)

알튀세르의 엥겔스 비판은 그가 1980년대에 우발성에 관해 쓴 작업을 보다 쉽게 평가할 수 있게 해 준다. 이 작업들에서 그는 무엇보다 연접들, 사건들과 정세들의 문제를 논한다. 이 (예비적) 연구들에서, 정세의 '예기치 않음'과 '응고'가 나온다. 비록 정세들이 항상 어느 정도 응고되거나 고정되거나 정돈되어 있더라도, 아주 발본적인 종류의 놀라움들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갑작스런 전환들과 함께, 지배적 '상수들'은 의문에 부쳐지거나 부쳐질 수 있다.
두 종류의 필연성. 알튀세르가 그 밖에 무엇을 해 왔든 간에, 그는 또한 변화하는 정세라는 문제에 대처하려 노력했다. 그는 마키아벨리의 도움으로 이를 해 냈다. 행동의 기준과 조건을 설정하는 정세 안에서 살아가고 행동하는 이들의 시각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마키아벨리는 여기서 '실천의 이론가' 또는 '실천의 철학자'로 그려지는데, 이는 실천의 일반 이론(또는 '실천 철학')을 제시한다기보다는, 그 자신과 그의 작업을 특정한 정세 안에 위치지운다는 의미다. 더욱이 마키아벨리는 행위자의 정치적 기획이라는 목표에서 시작함으로써 정치적 실천의 문제를 정치적 행위자에게 제시할 수 있게 해 주는 방식으로 이를 해 냈다.
여기서 혹자는, 이로부터 과거나 현재의 역사적 사건들이 법칙 없는(no law-like) 상수들의 지배를 받아 자의적으로 발생할 수 있다는 결론이 따라 나오지 않느냐고 물을 것이다. 즉, '우발적'과 '자의적'(또는 우연(chance)이나 운(hazard))은 동일한 의미인가? 알튀세르에게서 직접적인 부인이나 긍정을 기대하지 않아야 한다. 그는 필연적/자의적(그리고 확정적/불확정적)이라는 대립항을 가지고 작업하지 않는다. 그는 필연성을 해석하는 두 가지 종류를 구별한다.
첫 번째 해석은 우연이나 운, 우연성이나 예외가 필연성의 양상들로 나타나게 하는 것이라고 묘사할 수 있다. 이들은 헤겔주의자들이 주관적인 '중재'일 뿐이라고 쉽사리 비난하는 '규칙에 대한 예외', 또는 안개와 아지랑이와 광택일 수 있다. 알튀세르는 이 노선에 따른 필연성 해석을 호되게 비판한다.
두 번째 해석은 우발적 필연성을 그려낸다. 이 관점에 따르면, 필연성들은 우연성의 양상들이다. 주요한 것은 우연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 우연성을 필연성의 양상 또는 필연성의 예외로서 사고할 것이 아니라 필연성을 우연적인 것들의 마주침의 필연적 생성으로 사고해야 한다."13)


필연성에 대한 첫 번째 구상은 현실이 취할 수 있는 모든 형태들 에피쿠로스의 응고된 세계 같은 것 은 목적론적이거나 인과적인 법칙의 귀결들임을 함축한다. 두 번째 구상은 사전에 존재하는 이 법칙들, 그리고 그것에 의존하는 모든 인과적이거나 목적론적 설명들과 모형들을 의문에 부친다.
그러나 이 같은 수를 둔다고 해서 반드시 역사의 과정이 자의적이며 영원히 신비적이라고 결론내리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 발전이 인과적이거나 목적론적인 발전 법칙으로 환원될 수 없다- 그것들이 이 같은 법칙을 표현하지 않는다- 는 것은, 역사적 사건들이 이해불가능하고 인간 행위자가 예상치 못한 사건·사고와 관련될 뿐이라는 주장이 아니다. 상황들에 대한 설명이나 분석들은 완전함에 미달한다. 그것들은 불완전한 채 머물지 않을 수 없다. 사건(coincidence)들은 복합적 과정이다. 사건을 완전하게 설명한다는 것은 둘 또는 그 이상의 사물들의 연접에 대해 모든 원인들의 계열들을 설명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마주침은 원인들의 여러 계열들의 결과로 나오는 존재들의 계열들 사이에서만 존재한다."14)


우발성이라는 쟁점은 정치적 행위에 결정적이다. 자신의 날개로 날아오르는 미네르바의 올빼미에게 허락된 철학적 기다림과 주의란 존재하지 않는다. 정치적 행위자들은 정의상 무엇이 됐든 해야 하며, 모든 입수할 수 있는 정보에 기초한 최선의 가능한 방식으로 행동해야 한다. 활동가(man of action)- 또는 활동가 집단- 이 행동하는 방식과 그들이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규칙들에 관한 (아무런 위험부담(risk)도 없는) 절대적으로 확고한 지침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알튀세르는 활동가가 캘러미티 제인(Calamity Jane) 같은 여성, 서부영화에 나오는 외로운 '우발적' 주인공일 수도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어지는 장에서 '활동가'라는 주제에 관해 논할 때 이 점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우발성은 행위자들이 오늘을 움켜쥐고 나름의 수를 쓰는 데 성공하거나 실패하는 개방된 기회들과 호기(그리스어의 카이로스(Kairos))를 의미한다. 분명 기회들은 위험부담을 수반한다. 그것을 통제하기 위해 사람들은 무언가를 해야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에 기준과 조건을 부과하는 하나의 동일한 우발적 상황을 바꾸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
활동가는 그/녀가 하는 것 또는 그/녀의 행동이 '선언하는' 것을 완전히 깨달을 수 없는 상황에 사로잡혀 있다. 그의 현재 상태에서, 그는 미래가 무엇을 가져다 줄 것이며, 그 자신의 행위가 어떻게 차이를 만들어낼지 또는 그렇지 않을지를 알 수 없다. 또 그는 지나간 일에 기초하여 다가올 일을 예측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어제의 법칙이 내일도 계속 적절하리라는 점을 보장하는 것은 아무 데도 없기 때문이다. 그에게 미래란, 주어진 팀이나 선수의 이름이 없고, 사전에 그어진 규정된 공간이나 선이 없으며, 단번에 선포된 정당하거나 부당한 수에 대한 기성(旣成)의 의미가 없이, 각각의 방향에 열려 있는 경기장이다.
군주적 실천 - 우발적 현실. 마키아벨리의 군주 같은 활동가는 자기 사례의 특수성들을 고려해야 하며, 행동할 때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 같은 정치적 판단의 학(學)과 기예는 유효한 정치적 행동에 사활적이 된다. 마키아벨리는 정치적 행동의 우발적 논리를 이해하는 시각을 그의 작업에 도입함으로써, 스스로를 여느 활동가와 구별해 냈다. 비록 마키아벨리가 젊은 외교관으로서뿐만 아니라 책의 저자로서 활동가이긴 했지만, 우리는 그의 작업이 여전히 '충분히 이론적'이라고 말하는 알튀세르에 동의할 수 있다. 어떤 특정한 정세와 그 개별성들 안에서 성공하기 위한 투쟁과 유기적으로 연관되는 앎과 조사의 종류를 예시하는 충분한 이론이 있다.


"파편들(따라서 마찬가지로 모순들)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해 두자. 하지만 무엇보다도, 여기서 이론적 배치는 보편적인 것이 개별적인 것을 지배하는 고전적 수사학의 습관과 단절한다는 것을 드러내 준다.
그러나 이러한 개작(改作)도 여전히 '이론적인' 것이다. 아마도 사물의 질서는 '변화'해 왔을 것이고, 특수한 정치적 문제의 정식화와 고찰이 대상의 일반적 지식을 대체해 왔을 것이다."15)


알튀세르는 "거의 주목받지 않은 채 지나갔으며 장차 발전시켜야 할"16) 종별적 논리에 관해 썼다. 그의 마키아벨리 해석, 특수한 것이 일반적인 것 앞에 놓이는 이 '우발적 논리'에 따르자면 이는 어떤 종류의 것인가?
여기서 '우발적'이라는 형용사는 사건/사례 및 그 과정이 어떤 하나의 일반 법칙이나 이론으로 환원될 수 없고, 그것이 이들로부터 도출될 수 없다는 점을 가리킨다. 사건/사례는 어떤 일반 법칙이나 이론 하에 포섭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활동가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는 사건/사례의 과정을 일반 법칙이나 이론, 또는 정적인 사회적 유토피아로 예측하거나 통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키아벨리의('마초벨리적'(machoveiilan)) 개념들을 빌어 말하자면 각각의 사건은, 느닷없이, '운명의 꼬임으로' '심지어 가장 신중한 사람'에게도 등을 돌릴 수 있는 변화무쌍한 운(Fortuna, 포르투나) 또는 변덕스러운 운명의 여신의 영향을 받는다. 알튀세르는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이렇듯 모든 것은 계속해서 불안정하게 운동하고 있으며, 예측불가능한 필연성에 종속되어 있다. 이런 필연성은 운명의 여신이라는 신화적 개념의 형상에 의해 표상된다."17)


변덕스럽거나 예기치 않은 운[명]은 각각의 사건에서 일어나는 것에 뜻밖이고 위태로우며 우연적이고 예측할 수 없는 요소들, 이유들, 사건들의 낙인이 찍혀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예비적 방식으로 말하자면, 이 요소들이 독특하고 예기치 않은 '사건들'을 설명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각각의 사건은 유일한 특성을 갖는데, 왜냐하면 사물들은 둘이나 그 이상의 사례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조직되거나 결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록 인간들이 통상 어떤 식으로 행위하고 행동하는 경향이 있는지 말할 수 있을지라도, 각각의 종별적 사례에서 그들의 행동들은 다른 사례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벌어진다. 사건들이 복합적 정세들인 것은 이 때문이다. 사건들은 원인들의 수많은 계열들의 연접들이다. 사건들은 접합 또는 마주침들이다.


"정세(conjoncture)는 그 자체가 접합(jonction), 연-접(con-jonction)이요, 항상 변화하긴 하지만 응고된 이미 일어난 마주침, 스스로 자신의 무한한 선행원인들을 가리키는, 즉 선행원인들의 무한한 연속에 이 선행원인들의 결과, 예컨대 보르지아(Cesare Borgia)와 같은 어떤 특정한 개인인 이 결과를 돌려보내는 마주침이다."18)


원인-결과의 추론에 기초한 논리는 사건들을 분석하는 데 적절치 않은데, 왜냐하면 이런 종류의 논리를 사용하게 되면 분석 과정에서 원인들에서 결과들로 움직이는 선택지나 그 반대 방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는 다음으로 함축을 통한 추론을 요구하며, 이 같은 추론의 가능성은 인과 관계 및 관련 법칙에 대한 실재적이거나 상상된 지식에 있기 때문이다. 인과적 추론이 정확하려면 추론이 완전하고 체계적이어야 할 것이다. 이는 사건을 다룰 때 가능하지 않다. 그러므로 사건에 관한 추론은 위험하고 불완전하며 가설적이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이런 류의 '약한 논리'(weak logic)는 마키아벨리에게서 만날 수 있다.


"모든 플라톤적, 아리스토텔레스적 전통과 반대로 마키아벨리는 원인-결과의 귀결 속에서 사고하지 않고, '만약'(if)과 '그렇다면'(then) 사이의 사실적 계기(繼起, consecution) 속에서 사고한다. (…) 이 경우에 문제는 더 이상 원인(또는 원리, 또는 본질)의 결과로의 귀결이나 논리적 도출이나 논리적 함축이 아니고, 단지 조건들의 계기이다. 여기서 '만약'은, 실제의 조건들이 주어졌다면, 기원적 원인이 없는 이 사실적 정세를 뜻하고, '그렇다면'은 그 결과 정세의 조건들 속에서 관찰할 수 있고 그 조건들에 연결할 수 있는 것을 지시한다."19)


게다가


"『로마사 논고』는 다름 아니라 실제 정세의, 즉 (변)덕(virt )과 운의, 이 매우 특별한 '논리'가 이미 작동하고 있던 역사적 사례들에 대한 조사이다."20)


알튀세르에 따르면 플라톤적이고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사고방식 모두에서, 각각의 사건에 대한 원인, 본질이나 원리를 제시하는 것은 항상 가능하다. 사건들은 이것들로부터 파생되고 이것들을 표현하거나 이것들의 지도 아래 발전하는 것으로 사고된다.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목적인(目的因, telos)는 물론 근대적인 논리적·인과적 사고의 의미에서라면 원인이 아니다. 그러나 알튀세르는 그것이 여전히 '일반적'이거나 '보편적'인 것의 일종이고, 그에 따라 정세의 사건들을 설명하고 이해하거나 정당화할 수 있는 것, 사건들이 그것으로 환원될 수 있는 류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 기초를 모든 본질(Ousia, Essentia, Wesen)의 철학, 즉 이성(Logos, Ratio, Vernunft)의 철학, 따라서 기원 및 목적의 철학(여기서 기원은 이성 또는 최초 질서 속에서의 목적의 예상, 따라서 합리적 질서이든 도덕적, 종교적 또는 미학적 질서이든, 질서의 예상일 뿐이다.)을 근본적으로 기각하는 것 (…), 전체와 모든 질서(Ordre)를 거부하고 분산(데리다라면 자신의 용어로 '산포'(散布, diss mination)라고 할 것이다.)과 무질서의 편을 드는 철학을 위한 이 기각 (…)."21)


마키아벨리적인 방식으로 행위와 행동의 가능성을 판단하는 것은 정세에서 감지된 기준과 조건에 따라 사고하는 것에 기초한다. 이것들은 정세를 변화시키기 위한 기회들과 대안적 행위들의 가능성의 종류를 평가할 수 있게 해 주는 기초를 이룬다. 그들 자신의 행위를 분석하는 인간들은 항상적인 불안정성과 불확실성의 상태 안에 있다. 그들 행위의 성공을 보장해 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들의 사건 분석과 행동 전략이 불안정한 기초 위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어떤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었고 포함되어 있으며 포함될 것인지를 확실히 알 수는 없다. 불안한 분석은 사건 속에서 예견되고 할 수 있는 것에 기초해야 한다.22)


'주관적'이고 '객관적'인 우발성

활동가가 보유한 지식에 관한 알튀세르의 관점은 우발성과 우연의 해석에 관한 일련의 질문들을 내놓는다. 사건들은 그 자체로 '객관적으로' 우발적인가, 아니면 다만 행위자의 무지, '주관적' 우발성의 사례일 뿐인가? 누구의 또는 어떤 시각에서 사건들이 우발적으로 보이는 것인가, 아니면 모든 시각에서 그런 것인가? 만일 사건이 모든 관점에서 우발적이라면, 그렇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발성은 사건의 '객관적'인 속성인가, 아니면 아는 주체 혼자서는, 우발적 요소들과 사건의 과정이 단지 지식의 결여에서 유래할 뿐임을 보여줄 만한 포괄적 이론이나 지식을 증명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나오는 것일 뿐인가?
말할 필요도 없이, 이 같은 '객관적'이고 '주관적'인 통념들은 너무 일반적이다. 마키아벨리와 그의 해석자들이 지적하는 방식대로 이 속성들을 더 자세히 살펴보면, 제3의 대안이 출현한다. 우발성은 현실의 주관적 특성일 수도, 객관적 특성일 수도 있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계속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이렇게 하면 우발성의 '존재론적'이고 '인식론적'인 지위가 변화하고 동요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제3의 선택지의 도움으로 마키아벨리의 우발성이 주관적/객관적이라는 대립항(또는 주체와 대상의 분할)을 적용하기에 상당히 부적합한 관념이라고 간주할 수 있게 된다.
어떤 일반 이론도 다가오는 연접들을 예견할 수 없다. 이 같은 발견은, 그 자체만으로는 종종 주체들에게 있어 사뭇 분명하게 '놀라움들'이거나 '사건들'인 뜻밖의 우연적 요소들이 주체의 관점에서 그럴 뿐이라는 가정을 논박할 수 없다. 만일 주체가 더 잘 알았다면, 즉 만일 주체가 우연한 사건 안에 포함된 모든 요소들을 알게 되었다면, 사건들은 주체 편에서의 믿음에 불과한 것으로 판명될 수 있을 것이다. 사건들이 우발적이라는 알튀세르의 주장은 주관적 시각에서만 옳다고 할 수 있다. 반면, 보편적 원리들과 필연성들이라는 관념에 기초한 플라톤적이고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전통은 자신의 편에 객관적 진리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최종 분석에서, 사건들과 그것들이 취하는 과정이 어떤 본질이나 기원적 전제 또는 목적인 이 사건들이 환원될 수 있는 에 의해 예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알튀세르는 기원적인 원인, 역사 법칙이나 본질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역전될 수 있다. 어떻게 기원적 원인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가? 주체를 놀라게 하는 것들이 실은 기원적 원인이나 발전 법칙 또는 본질에 의해 초래된 것임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는가? 이런 주장은, 주장하는 사람이 '우연에 의해' 일어났다고 하는 사건이 실은 특정한 판별적인 인과 관계의 논리적이고 필연적인 결과로 산출되었음을 어떻게 설명할지 알 것을 요구하지 않는가?
앞서 인용한 구절에서,23) 알튀세르는 사건에 관한 지식이 원인과 결과에 따른 설명에 기초할 수 없다는 관점을 분명히 한다. 대신 이 같은 지식은 항상 우발적 논리와 구별되는 '약한' 추론의 결과다. 분명 어떤 활동가에게 있어서도, 적어도 그가 사건 안에 위치해 있다면, 그의 사건의 과거와 현재와 특히 미래는 (그가 이 점을 부인한다 하더라도) 불분명하다. 만일 그가 그의 사건과 역사의 현재 상태를 깨닫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 미래를 예견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다시, 만일 그가 그 사례의 역사와 그 현재 조건을 완벽하게 안다면 어쩔 것인가? 그렇다면 아무 것도 그를 놀래키거나 '사건'처럼 느껴지지 않고, 사건이 더 이상 본성적으로 우발적 사건이지 않도록 미래를 예견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알튀세르의 답변은 어느 정도 긍정적이다. 그는 사건을 아는 것이란 원인들 사건은- 이것의 연접이다- 의 모든 계열들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24) 적어도 여기서 알튀세르는 '심지어 원인이 되는 것도 다른 원인의 결과이다'라는 페트로니우스적 진술을 부인하는 데 힘쓰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류의 재구성은 인간에게 불가능하고, 사건이나 정세 안에 있는 활동가에게는 더더욱 불가능하다. 사건의 과거, 현재, 미래를, 한 번에 또는 지적인 통찰로써 알고 이를 철저히 해석하는 데까지 나아가기 위해서는 분명히 전능한 신이 될(또는 신의 계획을 완전히 알)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 주체의 입각점에서 우발적인 것은 신적 입각점에서는 비(非)우발적이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적 전통의 대표자들이 이런 류의 신적 지식을 더 많이 갖고 있는지는 의문인데, 그들 역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방어하기 위해서 헤겔의 미네르바의 올빼미를 언급하고, 만일 이 같은 역사 철학들이 가능하다면, 그들의 시간은 오직 사후(事後)에, 사후적으로(post festum)에 올 것이다 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발성의 문제는 마키아벨리적 부류의 활동가에 국한될 것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주어진 순간에 그가 입수할 수 있는 불충분하고 결여된 지식에 기초해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 활동가일 뿐이다. 그는 땅거미가 지는 것을 기다릴 수 없다. 그는 '정오의 칠흑' 안에서 행동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발성을 현실의 객관적 특성으로 다룰 필요가 없다. 이는 주체의 상황과 그것이 일으키는 믿음에 관한 것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우발적 추론을 가지고 위험부담들과 유쾌하지 않은 놀라움들에 대비할 수 있지만 그것을 제거할 수는 없다. 신의 눈에는 우연이 아닌 것이 활동가의 관점에서는 대부분 사건이 된다.
그러나 알튀세르가 이 '주관주의적' 관념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만족할까? 우발성을 혼란스러운 인간들과 결코 당황하지 않는 신의 구별로 이끄는 방식에 만족할까? 여기서 다시 알튀세르의 답변은 예와 아니오 모두이다. 우연은 '정세 안에서의' 앎이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는 어떤 것이다.25)직분을 다하는 철학자나 전능한 신과는 달리 활동가는 위험부담을 감수해야 하며 유쾌하거나 유쾌하지 않은 놀라움들에 직면해야 한다. 마키아벨리의 저작이 이 문제적 영역을 가로지르는 길을 가리키는 까닭은, 다름 아닌 마키아벨리가 특정한 종별적 사건 안에서 행위하는 데 주로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적 철학자 역시, 현실과 그 법칙을 아는 문제에 이르면, 확실성을 결여한다.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우연에 좌우되는 상태에 머문다. 그들이 헤겔의 충고에 유의하여 황혼을 기다린다손 치더라도, 그들은 이 늦은 시간에조차, 왜 사건의 과정이 그런 식이었는지를 분명하고 논란의 여지 없이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플라톤적이고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전통은 우선 사회의 본성이나 사물의 본성적 질서와 발전을 정의하는 것에 따라 구축되는 철학 체계를 제공한다. 알튀세르에게 있어 이 체계들은 인간들이 '사물 안에서 작동하는 진리'에 기초하여 말할 만한 것에서 멈출 수 있을 만큼 겸손하지 않다. 이 체계들은 비록 존재론적이거나 도덕적인 공준(公準)으로 제시된다 할지라도, 상상의 산물에 불과한 것으로 밝혀진다.26)
『마키아벨리의 고독』에서 알튀세르는 마키아벨리가 궁극적으로 격리된 것은 바로 이 상상들을 폐지했기 때문이었다고 쓴다. 그에 따라 그는 그 귀결을 견디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아마도 마키아벨리의 고독에 있어서 궁극적인 지점일 것이다. 그가 정치사상의 역사에서, 한 편으로 그가 발본적으로 기각한 도덕적, 종교적, 관념론적인 정치사상의 오랜 전통, 다른 한 편으로 모든 것을 침잠시켰으며 신흥 부르주아지가 자아상을 발견했던 자연법이라는 정치철학의 새로운 전통 사이에 있는 유일하고 불안정한 장소를 점유했다는 사실 말이다."27)


마키아벨리는 현실을 증명하는 다양한 존재론적, 도덕적, 또는 여타 본질주의적 방식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 '발본적 기각'을 대표한다.28) 그가 자신의 시대가 아닌 사례를 살펴볼 때조차, 그의 분석은 그 자신이 '사물 안에서 작동하는 진리'라 부른 것에 기초한다. 이것이 등장하는 것은 유명한 『군주론』 15장의 이름난 문단에서다.


"그러나 나는 이 문제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유용한 것을 쓰고자 하기 때문에, 이론이나 사변보다는 사물의 실제 진리에 관심을 경주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현실 속에 결코 존재한 것으로 알려지거나 목격된 적이 없는 공화국이나 군주국을 상상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어떻게 사는가'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는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바를 행하지 않고 마땅히 해야 하는 바를 고집하는 군주는 권력을 유지하기보다는 잃기가 십상이다. 어떤 상황에서나 선하게 행동할 것을 고집하는 자는 많은 무자비한 자들에게 둘러싸여 몰락을 자초할 것이 불가피하다. 따라서 권력을 유지하고자 하는 군주는 필요하다면 부도덕하게 행동할 태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29)


아주 명시적으로 알튀세르는 우발적 유물론의 관점에서 사실이나 기성 사실(faits accomplies), 그리고 결과들은 원인을 갖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원인 없는 결과, (변)덕과 운의 (에피쿠로스적인) 우발적 마주침으로부터, 즉 우연한 기회로부터 태어나는, 우발적이기 때문에 원인이 없는 결과 말이다. 결과의 철학은 결코 선행원인이나 선행본질의 기성사실로서의 효과의 철학이 아니라, 전혀 반대로 우발적인 것[우발성]의, 즉 그 결과가 사실적 표현인, 그리고 달라질 수도 있었던 주어진 조건들의 주어진 결과인, 그러한 우발적인 것의 철학이다."30)


이는 원인없음이 알튀세르 생각에 순전한 환상이라는 관념을 가리키지 않는가?(그리고 그는 환상들에 찬성하지 않는다!) 그보다 알튀세르에게 있어 원인없음은 현실의 객관적 특성이 아닌가?
알튀세르는 우발성이, 기성 사실의 결과란 '우연히' 또는 '순전히 뜻밖에' 즉 자의적인 방식으로 그런 것임을 의미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마키아벨리를 언급하면서 그는 '우발적 연접'은 (변)덕과 운세의 호기이거나 연-접(con-join)을 포함한다고 말한다.31) 사건의 조건들, 그 정황들, 그 모든 복합성을 지닌 기준과 요구들은 해야 할 일과 정세가 형성되는 방식의 한 원인이 된다. 결정적인 속성은 '사실적'인 것이다. 라틴어 팍툼(factum, 사실)의 본래 의미는 행위와 사건, 사실과 결과다. 사실적 사건은 수많은 행위들과 사실들의 결과이며, 이로부터 뒤따르는 사건들과 행위들, 사실들의 조건들이 형성된다.
실존하는 사건들과 그 계기에 관해서, 어떤 단일하고 종별적인 본질을 정의할 수 없다. 이는 다양한 방식으로 서로 절합되어 있는 사실들과 행위들의 헤아릴 수 없는 합의 문제다. 사건의 유효한 요소들은 원인과 결과(그리고 이를 서술하는 일반 법칙)의 동일하고 (선형적인) 인과 연쇄의 일부가 아니다. 그보다 사건은 행동의 조건과 정황들이 뒤얽힌 구조물의 일종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이 안에서 서로서로 다르게 들러붙는 무수한 원인들과 결과들이 뒤섞인다. 그 결과는 그 탄생을 둘러싼 정황들의 '사실적 표현'이며, 이 정황들의 본성은 사실적이다.32)
알튀세르는 '중심의 부재'를 말한다. 이 관념은 그의 헤겔적 총체성 비판에서 그려지는 '복합적 전체', 그리고 원소들을 관통하는(inter-elementary) 과잉결정들과 과소결정들로 특징지어지는 복합적인 상호관계를 떠오르게 한다. 사례들의 높은 수준의 복합성 때문에, 행복한 사건들이 발생한다. 행운은 일반 법칙을 통한 예감이나 설명을 넘어서는데, 왜냐하면 유일한 연접들은 이전이나 다른 곳에서는 결코 발생한 적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서로 다른 사례들(이나 사건들) 또는 한 사례의 서로 다른 순간들 사이에서 상수들을 감지할 수 있다. 이는 주관적 우발성의 수준을 감축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어떤 일반 이론을 가지고 '상수들'이나 '일반적 경향들'이 결합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방식들을 포괄하는 것은 어떤 주어진 사례나 사건에서도 불가능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즉 상수들, 규칙들, 지배적이고 비(非)지배적 경향들을 발견함으로써 사례들에 대한 이해를 촉진하고, 따라서 애초에 '사례'(나 '사건')에 관해 말하기 시작하는 것이 가능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연접들이 독특하기 때문에, 어떤 사건도 일반적인 것을 예시하지는 않는다. 이는 사례들이 일반 이론을 (반증하거나 확증하는 식으로) 시험하는 역할을 하는 포퍼(Karl Popper)적인 반증 관념이 사건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구상을 이해하는 데 맞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스피노자와 그의 '3종의 지식'에 관해서도 동일하게 말할 수 있다.


"나는 여기서 다만, 내가 스피노자에게서 배운 가장 귀중한 것이 '3종의 인식', 개별적인 동시에 보편적인 사례의 지식의 본성이라는 점을 말하고 싶다. 이에 관해 스피노자는 탁월하지만 종종 오해받은 예시를 제시하는데, (그의 『신학정치론』에 실린) 개별 인민의 역사, 개별 유대 역사가 그것이다. 나의 '사례'는 이 질서 중 하나로서, 그 개별성 안에서 인정되고 다뤄진 의학적·역사적·분석적인 모든 '사례들'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 개별적 사례가 보편적이라는 점 이는 각 사례에서 반복되는 상수들(따라서 포퍼의 확증가능하거나 반증가능한 법칙들이 아니라)을 제시하며, 개별적 사례들에 대한 이론적·실천적 취급의 도입을 허용할 것이다. 마키아벨리와 마르크스는 거의 주목받지 못한 채 지나갔으며 장차 발전시켜야 할 이 논리와 다르게 사고하지 않는다."33)

포퍼적인 반증의 시각은 역사적, 의학적, 또는 (정신)분석적 사례들(알튀세르 자신의!)에 맞지 않는데, 왜냐하면 이들은 이론에서 제시된 어떤 이상적 사례의 예시가 아니기 때문이다. 관련된 일반 이론에 포함되지 않는 사건이 발생하거나, 사건들이 이론에서 지시된 법칙들에 따르지 않는 사례가 발생하면, 이는 포퍼적 의미에서라면 이 일반 이론의 반증이거나 예외적 사례를 의미할 것이다. 이는 옳지 않다. 알튀세르가 「모순과 과잉결정」에서 이미 말한 것처럼, 모든 사례들은 '예외들'이다.34)예시적 사례들이나 여기서 벗어나는 사례들이란 존재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각각의 사례는 특별한 사례이고 어떤 사례도 표준적 사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알튀세르는 인용된 구절에서 보편적인 것이 개별적인 것을 이론적이고 실천적으로 연구할 수 있게 해 준다고 쓴다. 비슷하게, 그는 이미 자기비판적인 언급에서, 구체적 대상에 대한 구체적 연구는 '보편성의 최소치'를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35)
그러나 '보편적'인 것은 보편 이론을 가리키지 않는다. 이는 다만 특정한 상수들이 한 사례에서 다른 사례로 되풀이된다는 의미일 뿐이다. 만일 사례가 본성적으로 완전히 유일하다면, 그것은 다른 사례들과 아무런 관계도 갖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그것을 사례로 인식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질 것이다. (사실 상, '사례'라는 관념 자체가 공허한 수다가 될 것이다. 사례라고 한다면 적어도 어떤 측면에서 다른 (이전의) 사례들과 유사해야 한다는 점, 특정한 상수들이 한 사례에서 다음 사례로 되풀이되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비록 각각의 사례가, 유대민족의 역사나, 10월 혁명에서 무르익은 러시아 역사에서처럼, 다른 사례들에서 발생하지 않는 우연적이고 개별적인 특성들을 포함하긴 하지만 말이다.)

사례들을 다루기

위에서 다룬 사고의 흐름을 명료히 하려면, 활동가의 사례를 재평가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건 안에서의 활동가의 행동을 규정하는 본질적 기준과 조건 중에는 행위자에 고유한 (변)덕이 있다.
마키아벨리의 사례에 관해 논평하면서, 알튀세르는 (변)덕과 운의 마주침을 말한다.36) (변)덕을 가진 행위자는 행위자에게 영향력을 발휘하는 정황들 안에서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다. 마키아벨리에게 있어 운은 행위자들의 삶에 아무튼 외적으로 작용하는 신비한 힘(forza del destino)이 아니다. 행위자의 (변)덕은 적어도 일정한 수준까지는 행위자의 운을 틀지우는 데 일정한 결정권을 가질 수 있다. 점성술에서와는 달리, 인간 세계의 정세는, 마키아벨리의 설명을 따르자면, 내재적이고 현세적이며 세속적이다. 아주 확실하게, 인간 정세는 별도의 체계로서 현세적 삶의 질서에 외적 효과를 행사할지도 모르는 천체(天體)의 '천상적' 성좌(conjuncture, 정세)가 아니다.
이로부터 행동을 취함으로써 행위자가 행동의 정세적 기준과 조건의 한 원인이 되고 이를 틀지울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비록 이 시도가 바로 그 기준과 조건이라는 토대 이외에 아무런 다른 토대 위에서도 발생할 수 없지만 말이다. 따라서 알튀세르는 여기에서 산출된 정세와 운이 신비한 설명력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가 보듯이, 마키아벨리의 기획은 오히려 '실제로 작동하는 진리'를 가지고 정세와 운을 합리적으로 설명함으로써 그것들의 신비로움을 벗겨내는 것이다.37)
사태를 조금 연장하면, 원인과 결과가 뒤얽힌 직물 전체가 어떤 보이지 않거나 숨겨진 기원적 원인 또는 원리의 표현이라고 말하는 것이 여전히 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입증 너머에 있는 이 같은 믿음은 행동해야 하는 이에게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 즉, 임박한 사건에 대해 우주론적-형이상학적-신학적 시각을 취하는 것은 여기에서 무익하다. 더 나쁜 것은, 그 숙명론적 교리가 수동성을 유도할 수도 있다는 점인데, 왜냐하면 이 교리는 정황들을 분석하고 적절한 수단들을 취할 것을 북돋는 대신 행동의 가능성들을 축소하기 때문이다.
분명, 각각의 사건마다 활동가들이 있다. 누구는 성공하고, 다른 누구는 실패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마키아벨리는 그 누구의("당신은 영원히 지속하는 공화국을 세울 수 없다") 성공도 보장되거나 영속적이지 않다는 의견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활동가는 그것(국가의 지속, cf. 『마키아벨리와 우리』, p. 40)에 관해 무언가를 할 수 있다. 성공은 '신의 손'에 있거나 '별자리에 쓰여 있거나' '타고난 능력'에만 있지 않다. 그것은 인간이 이용하거나 이용하지 못하거나 하는 사실적 가능성과 기회다.
인간의 행복이나 불행이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다고 또는 디드로의 숙명론자 자크가 생각했던 것처럼 위대한 책들에 쓰여 있다고 가정해 보라. 활동가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사물들의 의미를 박탈할 것이다. 어쨌든, 그것은 행위할 수 있는 그/녀의 능력이나 힘을 망칠 것이다. 여기서 다시, 철학자는, 우주론적이고 형이상학적이며 신학적인 근거에서, 행동을 방해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어떤 본원적인 원인이나 법칙, 또는 원리의 표현이라고 생각할는지 모른다. 다음으로 점성술사는 현세적 정세들이 단지 천체적 성좌의 결과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류의 주장은 결코 원리들의 숨겨진 법칙들을 적합하게 서술해 내지 못한다. 그것이 틀림없이 어려운 까닭은, 이 같은 법칙이 사건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가장 미세한 사건들조차 망라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활동가의 시각에서, 우주론적-형이상학적-신학적 관점은 무용할 뿐만 아니라 해롭기까지 하다. 이는 자신의 시대의 종교에 관해 마키아벨리가 가졌던 견해였다. 철학자들의 주장은 아마 사실이 아니라고 증명할 수 없겠지만, 이는 그것들이 정의상 입증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일찍이 데이비드 흄(David Hume)이 말한 것처럼, 그들은 아무런 실천적 소용에도 쓰이지 않을 것이다.38) 이 모두는,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의 이원론에 기초한 관점에서 우발성을 보는 것에서 벗어나야만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우연의 '객관성'이나 '주관성'에 관해 다투는 것은 악순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와 같은 비생산적인 논쟁에서 벗어나려면 마키아벨리에 대한 알튀세르의 우발론적 해석이 가지고 있는 더 큰 명료함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 이를 더욱 발전시키는 것은 주관적이고 객관적인 우발성 너머로 감히 나아가는 것이다.
이는 활동가의 위치와 시각에 집중할 것을 요청한다. 적어도 마키아벨리의 문헌에서는 이 불완전한 위치는 (무지 따위를 의미하는) 부정적 범주만이 아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행위를 도울 수 있는 인지적이고 동적인 입장이나 시각을 가리킨다. 1) 상상과 유토피아를 비판하고 2) 철학적이거나 우주론적인 체계를 극복하며 3) 행동을 취하기 위한 사실적 기준과 조건, 가능성을 판단하고 활용하는 것이 그것이다.

주관적/객관적 이분법을 넘어서

마키아벨리에게 있어, 운이나 정세는 인간 삶에 외적으로 영향을 행사하는 초월적인 것이 전혀 아니다.39)그것은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 사이의 해석적 분할을 기각하도록 강력하게 촉구하는 것이다. 그들 자신의 '주관적' 관점에서 우연을 볼 때 인간들은 어떤 외부적 체계를 보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자신들의 행동으로써 참여하거나 결합하는 사건 또는 정세를 보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두 가지 차이점이 분명해진다. 첫째, 한 편으로 자연과학자들이 우연을 분석하는 전통적인 방식과, 다른 한 편으로 마키아벨리의 우발적 운 사이의 차이가 있다. 둘째, 한 편으로 과거에 일어난 일(또는 기성 사실)을 설명하는 역사가와, 다른 한 편으로 자신을 미래로 내던지는 활동가 사이의 차이가 있다.
자연과학에서의 운. 자연과학자가 가스 분자들의 운동을 관찰하고 있다고 가정하자. 그는 이 운동에 참여하지 않으며, 적어도 연구 대상에 자신의 측정 수단이나 그녀 자신이 미치는 어떤 영향도 제거하려고 노력한다. 그가 무언가를 변경하더라도, 분자들을 지배하는 법칙이나 가능한 편차의 원인은 여전히 연구자 가 아닐 것이다. 자연과학자들은, 비록 완전하게 작동하지 않을지라도, 실험의 타당성과 신뢰성을 최고 수준으로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마찬가지로, 우연에 관심을 가진 자연과학자들이 관찰하는 가스 화합물은 그녀에게 있어 유일하고 역사적인 '가스 화합물의 사례'로서 의미를 갖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특정한 가스 분자가 어떤 화합물에서 임의로 움직이는 방식에 관한 비역사적이거나 역사외적인 사례로 나타난다. 연구의 대상이 되는 바로 그 화합물에서 어떤 종류의 무작위성이 나타나느냐는 연구의 목적에 있어 전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다. (물론 동일한 화합물의 서로 다른 표본과 각각의 분자 운동을 비교하여 관찰된 무작위성을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법칙을 찾기 위한 것이 요점이 아니라면 말이다.)
활동가의 경우에는 사정이 달라진다. 활동가는 자신이 조사하고 있는 사건의 일부이고 일부가 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의 사건은 그에게 있어 유일한 역사적 사례다. 그것은 자신의 삶과 미래의 도가니다. 반면, 과학적 실험은 반복가능해야만 한다 즉 다른 과학자들이 다른 시간에 다른 곳에서 그것을 수행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들과 달리 활동가는 사건의 과정에 대한 그의 영향력을 최소화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화, 적어도 증진시키려고 노력한다. 따라서 그는 그의 사례의 '주체'이자 '대상'이며, '원인'이자 '결과'이다. 그가 사건의 과정을 판단하고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많을수록, 그는 그의 정세 안에서 더 잘 행동할 수 있다(비록 이를 위해 가끔 수동적으로 기다리고 사태를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말이다.).
이는 활동가가 자신의 정황을 분석할 때 우발성을 기각해야 한다는 것을, 자신의 정치적 재치와 기예 안에서 놀라움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힘을 다해 '주체적'인 동시에 '객관적'으로 개입하려 노력함으로써 우발성이나 놀라움들을 가장 명확하게 고려한다. 그가 제기하는 핵심 질문은 과거형인 "무엇을 했는가?"도, 보편적 시간인 "무엇을 할 것인가?"도, 심지어 미래학적인 "무엇을, 일반적으로, 할 것인가?"도 아니다. 그것은 "무엇을 지금 여기에서 할 것인가?"라는 개인적이고 날카로운 질문이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이 '정치적' 질문은 마키아벨리에게 중추적이었고, 심지어 그가 과거 사건들의 과정과 당시 내려진 결정들(마찬가지로 많은 모의실험을 포함했던)을 분석(하고 모의실험)할 때조차 그랬다.40)
이제, 우발성을 주관적인 방식으로 바라보는 것은, 활동가가 자신의 상황을 분석하면서, 가능한 한 최대한으로, 그의 사례와 활동의 사실적 기준과 조건, 정황들을 정하려고 노력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서 그는 일정한 형태로 한 사례에서 다른 사례로 되풀이되는 상수들을 아는 것에서 이익을 얻는다. 이로써 그는 그의 무지를 감축하거나 주관적 임의성의 요소를 줄일 것이다. 그러나 활동가는, 자신이 무지, 알려지지 않은 이유들과 예견할 수 없는 결과들을 완전히 제거할 수 없다는 점을 안다. 인간이 사건 안에서 작동하거나 그것에 기여하는 요소들 전체를 도표로 그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즉 모든 놀라움들을 그 위험부담과 함께 제거하고 사례를 주권적인 방식으로 통달하는 것, 그러니까 지상의 신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 사건의 원인들은 현세적일 것이지만, 현세성은 복합성의 부재나 통달의 약속을 가리키지 않는다. 활동가는 그 자신의 행동이 사건들의 과정에서 일정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안다. 더욱이 그는 그의 행동이 다른 행위자들의 행위, 그리고 또 사건의 다른 기준과 조건들과 연접하면서 의도치 않은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활동가는 사건 속에 개입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또한 그 과정에 개입하여 성가신 놀라움들을 피할 수 있고 위험부담들을 제거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
활동가가 이를 달성하는 데 완벽함이란 없다. 그렇다고 해서 활동가가 인간적으로 가능한 수준의 우발성에 영향력을 가질 수 없는 것은 아닌데, 이는 ⅰ) 특히 그 자신의 사례와 ⅱ) 더 일반적으로 그 수준의 변화의 한 원인이 되는 것 양 쪽에 걸쳐 있다.
ⅰ) 활동가는 사건과 정세를 틀지어 '유쾌하지 않은 놀라움'들이 그 자신에게보다는 그의 적수에게 벌어지게 하는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는 사건에 연관된 다른 행위자들보다 더 우수하고 더 능숙하게 우발성을 이용하고 통제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마키아벨리에게서 가장 흥미로운 구절들 중 하나는 자신의 적수들에게 불운한 걸림돌을 배치하고 그것을 최대한 이용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ⅱ) 활동가가 자신의 정세를 틀지을 수 있기 때문에, 그는 또한 사건의 우발성의 수준에 개입할 수 있다. 그는 정세의 기준과 조건을 틀지어 그 사건들이 다른 경우에 그랬을 것처럼 위태롭지 않게 할 수도 있다. 사실상 우발성의 수준에 관해 할 수 있는 일이 있기 때문에, 우발성은 이 점에서 분명 주관적 무지와 다른 것이 아니면 안 된다. 우발성은 이런 의미에서 '인간적으로 객관적'이다. 비록 상상된 신의 관점에서 볼 때는 사건과 그 안의 활동가가 '객관적으로 비-우발적'일지라도.
알튀세르의 마키아벨리 해석에서 우발성이라는 쟁점을 이해하려면, 주관적 이해와 객관적 이해의 분할이 말하자면 상상된 신의 시점에서의 일반적 이분법이나 절대적 용어로 제시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우발성은 인간의 입각점에서 보아야 한다. 그럴 때에만 인간적인 객관적 우발성들과 주관적 우발성들을 구별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인간적으로 객관적인 우발성은 어떤 인간 이론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복합적인 사건들에 관련된 것이다(왜냐하면 각각의 이론이, 관련 법칙과 함께, 속이거나 부서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비록 주어진 보장이 없고 잘못된 순서들이 많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복합성들에 대한 스스로의 자각을 높이(고 우발성의 주관적 수준을 감축하)는 동시에 사건들이 그들에게 더 적은 놀라움을 초래하게 틀지음으로써(즉 우발성의 인간적으로 객관적인 수준을 감축함으로써)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다. 전능한 신은 이 같은 연구와 변경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완전한 존재는 가장 복합적인 상황에서조차 지배적인 법칙들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는데, 비록 이것들이 인간적 입각점에서 판단할 때 우발성에 대한 통제를 넘어선다 할지라도 그렇다.
역사에서의 운. 역사가들과 달리 활동가의 과거 분석의 특징은 이미 발생했거나 완결된 것(기성 사실)을 설명하거나 이해하는 노력에 있지 않다. 혁명적 지도자 레닌처럼 활동가가 상황을 분석하는 것은 행동 전략을 계획하기 위해서다. 이들은 반드시 현재에서 미래로 기투(企投)된 자신들의 기획의 필요에 봉사해야 한다.
어떤 역사가들은, 역사의 특징이 필연성이 아니라 우발성의 우위라는 알튀세르적 관점에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연구하는 역사는 여전히 돌이킬 수 없이 있는 그대로의 기성 사실의 일종이다. 게다가 역사가들은 더 이상 예컨대 민족의 탄생을 사건들의 필연적인 목적론적 계열들의 결과로 신비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연구하는 사건은 (비록 다양한 해석을 허락하긴 하지만) '응고된' 과거의 일부다. 반면 활동가들에게 있어 우발성이 갖는 의미는 피해야 하는 과거와 현재의 위협이자 이용해야 하는 약속이다. 그들 자신의 사건은 모두 미래에 열려 있는 수많은 좋고 나쁜 현재적 가능성들의 경기장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활동가가 (변)덕을 갖는 것은 그가 이미 발생한 일에 대해 탁월한 설명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변)덕스러운 것은 자신의 앎과 수단을 가지고 우발성을 통제할 수 있으며, 다른 이들보다 더 그것을 잘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놀라움들을 예견하고 심지어 다른 보다 덜 (변)덕스러운 행위자들에게 손해를 입히기 위해 그것을 조작함으로써 우발적 상황들을 다룰 수 있다.
활동가가 점하는 위치는, 역사가의 위치와 비교할 때, 유혹적인 동시에 두렵다. 역사가들이 부러움을 느끼곤 하는 것은, 활동가의 위치가 사건들의 과정에서 자기발명의 가능성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이는 알튀세르의 우발적 유물론에서 근본적인데, 예컨대 혁명적 지도자로서 레닌의 모습처럼 정치적 행동의 진정한 가능성들을 분석하는 데서 그렇다. 1917년 러시아에서 벌어진 사건의 과정에서, 레닌은 분명하게 이야기했지만, 정세의 어떤 것도 볼셰비키가 수행한 혁명적 행동이 효과를 거둘 것이라고 보장하지 않았다. 반면, 그들의 성공에 절대적인 장애물도 없었다. 볼셰비키의 성공은 우발적인 가능성, 기회였으며, 이를 이용하려면 상황에 대한 적절한 분석뿐만 아니라 적기(適期)에 이루어지는 행동 역시 필요했다.
활동가의 위치 안에 있는 위협적 측면이란, 그의 운이 영리한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못 쓰게 변할 수 있다는 점이다. 만일 그의 행동이 그의 계획을 부수고 자신을 망치는 의도치 않은 결과를 초래하는 식으로 결합된다면. 이는 체자레 보르지아(Cesare Borgia)에게 생겼던 일인데, 그는 가능한 최대 수준의 (변)덕스러운 활동가였지만, 결정적 순간에 병에 걸렸고, 마키아벨리에 따르면 로마냐의 주도권 하에 북부 이탈리아를 통일하는 기회를 잃었다. 알튀세르의 논평은 다음과 같다.


"마키아벨리는 원자화한 이탈리아에서 이 마주침이 일어나기만을 바랐을 뿐이다. 그의 뇌리에는 분명히 체자레가 항상 떠나지 않았다. 무에서 시작하여 로마냐 지방에서 공국을 이루었고 율리우스 2세에 거역하여 그를 면직시키기 위해 로마로 진격하던 중 결정적인 시점에서 레반나의 습지에서 병에 걸려 쓰러지지 않았더라면 피렌체를 장악한 후 북이탈리아 전체를 통일했을 저 체자레 말이다."41)


비록 활동가가 사건의 과정에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지만, 그는 사물들이 진행되는 방식을 통제하는 중심이 아니다(중심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발성은 우여곡절을 일으키며, 현실의 약속들은 새로운 종류의 인간 인물과 개인, 정세와 국가의 탄생을 위한 가능성이다. 이렇게 말하면서 알튀세르는 파국의 선택지를 잊지 않는다. 공개적으로 제시된 것은 역사가 스스로를 시작도 목적도 없는 위협과 가능성의 유희로 제시하는 파노라마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것, 즉 이들 세계의 인물들, 개인들, 정세들 또는 국가들을 주어진 전제들의 필연적인 결과로서 고려하고자 하거나 어떤 목적의 잠정적 예상으로 고려하고자 하는 사람은 방황하게 되리라는 것이 아주 명백하다. 왜냐하면 그는 이 잠정적 결과들이 다음과 같은 이중의 이유에서 잠정적 결과들이라는 것, 즉 그것들은 지나가 버릴 것이라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들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으리라는, 또는 만약 그것들이 상당한 운, 이 형태가 (우연히) 주재하게 된 서로 결합한 요소들에 '지속'의 '기회를 부여하는 상당한 운의 알맞은 토대 위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면 오직 하나의 '짧은 마주침'의 효과로서만 일어나리라는 점에서 잠정적 결과들이라는 이 사실을 부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알게 된다. 즉 우리는 무 속에 있는 것, 무 속에 사는 것이 아니며, 역사의 의미(역사의 기원들에서부터 역사의 종료에 이르기까지 역사를 초월하는 목적)는 없지만 역사 속에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것, 왜냐하면 이 의미는 그 자신 역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유효한 그리고 유효하게 알맞은 마주침 또는 파국적인 마주침으로부터 태어나기 때문이라는 것 말이다."42)


그러나 역사의 의미는, 인간의 삶에서 발생하고, 인간이 살아가면서 만들거나 야기하는 이 사건들 안에서만 은폐된다. 예컨대 민족 국가의 탄생은 역사의 절대적 의미(Meaning)를 표현하는 목적론적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그 우발성 안에서, 사건들의 복합적이고 우연적인 계열들이며, 표현된 절대적 의미 따위로 사후적으로 설명해서는 안 된다. 역사란, 역사의 연속적 단계들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열려 있으며, 그들의 행동을 통해 그들에게 의미를 갖게 되는 과정으로, 그리고 미래에 열려 있고 그 개방성 때문에 불분명한 지평 안에서 벌어지는 행동들의 산물로 이해해야 한다.


1)Etienne Balibar, Structural Causality, Overdetermination, and Antagonism. In Postmodern Marxism and the Future of Marxism. Essays in the Althusserian Tradition, p. 115. Edited by Antonio Callari and David F. Ruccio. Wesleyan University Press, Hanover and London 1996.본문으로

2)
위의 책.본문으로

3)
위의 책.본문으로

4)
위의 책.본문으로

5)
위의 책.본문으로

6) Louis Althusser, L'avenir dure longtemps, p. 213. dition tablie et pr sent e par Oliver Corpet et Yann Moulier Boutang. STOCK/IMEC, Paris 1992.[국역: 돌베개, 1993]본문으로

7)Louis Althusser, Is it Simple to be a Marxist in Philosophy? In Essays in Self-Criticism, pp. 165~207. Transl. Graham Lock, New Left Books, London 1976.[국역: 루이 알튀세르, 「아미엥에서의 주장」, 『아미엥에서의 주장』, 솔, 1991]본문으로

8)위의 책, 182.본문으로

9)Balibar, 위의 책, 115.본문으로

10) Louis Althusser, Contradiction and Overdetermination. In For Marx, pp. 117~128. Transl. Ben Brewster. New Left Books, London 1977.[국역: 백의, 1997, pp. 137~151]본문으로

11)나의 책 Niccol Machiavelli ja aleatorinen materialismi. 특히 이 주제를 자세히 다루는 10장을 보라.본문으로

12)Louis Althusser, For Marx, p. 215.[국역: p. 257]본문으로

13) Louis Althusser, Le courant souterrain du mat rialisme de la rencontre. In crits philosophiques et politiques, tome 1, p. 566. Textes r unis et pr sent s par Fran ois Matheron. STOCK/IMEC, Paris 1994.[국역: 루이 알튀세르, 서관모·백승욱 편역, 「마주침의 유물론」, 『철학과 맑스주의 - 우발성의 유물론을 위하여』, 새길, 1996, p. 79]본문으로

14) 위의 책, 566.[국역: p. 78]본문으로

15) Louis Althusser, Machiavel et nous. In crits philosophiques et politiques, tome 2, p. 58. Textes r unis et pr sent s par Fran ois Matheron. STOCK/IMEC, Paris 1995. / Louis Althusser, Machiavelli and Us, p. 16. Transl. Gregory Elliott. Verso, London - New York, 1999.[국역: 루이 알튀세르, 오덕근·김정한 옮김, 『마키아벨리의 가면』, 이후, 2001, p. 59]본문으로

16)L'avenir dure longtemps, p. 234 / The Future Lasts a Long Time, p. 242. Transl. Richard Veasey. Chatto & Windus, London 1993.
본문으로

17)Machiavelli and Us, p. 80.[국역: 71]본문으로

18)Le courant souterrain du mat rialisme de la rencontre, pp. 565~566.[국역: p. 78]본문으로

19)Louis Althusser, L'unique tradition materialiste. In Lignes, 18, janvier 1993, p. 99.[국역: 루이 알튀세르, 「독특한 유물론적 전통」, 『철학과 맑스주의』, p. 179]본문으로

20)위의 책, pp. 100~101.[국역: p. 181] virt 를 '(변)덕'이라고 옮긴 이유에 관해서는, 월간 『사회운동』 71호(2007. 1/2) 「책 속의 책」 각주 33을 보라.본문으로

21)Le courant souterrain du mat rialisme de la rencontre, p. 561.[국역: p. 70]본문으로

22)L'unique tradition materialiste, p. 99본문으로

23)위의 책.본문으로

24) Le courant souterrain du mat rialisme de la rencontre, pp. 565~6.본문으로

25) 예컨대 Machiavel et nous, p. 59.본문으로

26) L'unique tradition materialiste, p. 99~101; Le courant souterrain du mat rialisme de la rencontre, p. 546.본문으로

27) Louis Althusser, Solitude de Machiavel, p. 34. Futur ant rieur, Ⅰ, 1990 / Machiavelli's Solitude, p. 124. Transl. Ben Brewster. In Machiavelli and Us [국역: 루이 알튀세르, 「부록: 마키아벨리의 고독」, 『마키아벨리의 가면』, p. 208]본문으로

28)L'unique tradition materialiste, pp. 99~100.본문으로

29)Il principe, ⅩⅤ.[국역: 니콜로 마키아벨리, 강정인 옮김, 『군주론』, 까치, 1994, pp. 106~107]본문으로

30) L'unique tradition materialiste, p. 105.[국역: pp. 186~187]본문으로

31)L'unique tradition materialiste, pp. 100~1; Le courant souterrain du mat rialisme de la rencontre, p. 545.본문으로

32)L'unique tradition materialiste, p. 105.본문으로

33)L'avenir dure longtemps, pp. 233~234; cf. Le courant souterrain du mat rialisme de la rencontre, p. 552 and Essays in Self-Criticism, p. 136.본문으로

34)For Marx, p. 104.본문으로

35)Essays in Self-Criticism, p. 112, note 8.본문으로

36)L'unique tradition materialiste, p. 100; cf. Machiavel et nous, p. 80 and p. 126.본문으로

37) Machiavel et nous, p. 80본문으로

38) David Hume, Enquiries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and concerning the Principles of Morals, p. 103. Edited L.A. Selby-Bihgge. Third edition. Clarendon Press, Oxford 1977.본문으로

39)이 쟁점은 위에서 언급한 나의 책 5.2 & 5.3절에서 다루어진다.본문으로

40)Machiavel et nous, p. 59.본문으로

41)Le courant souterrain du mat rialisme de la rencontre, pp. 544~545.[국역: p. 44]본문으로

42)Le courant souterrain du mat rialisme de la rencontre, p. 567.[국역: pp. 79~80]본문으로






핀란드 탐페레(Tampere) 대학 정치학과 조교. 이 논문은 알튀세르의 우발적 유물론과 그의 마키아벨리 해석에 관한 나의 책에 기초를 두고 있다. Mikko Lahtinen, Niccol Machiavelli ja aleatorinen materialismi. Louis Althusser ja Machiavellian konjunktuurit ["Niccol Machiavelli and Aleatory Materialism. Louis Althusser and Machiavelli's Conjunctures"]. Acta Universitatis Tamperensis, Tampere 1997. 30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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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에 있었던 소통/연대/변혁 사회운동포럼 사회운동시민강좌의 일환이었던 2강의

강연문이다. 이런 강연이 있었는지도 이제 알았는데 요새도 하고 있다. 관심있는 분들은

http://www.pssp.org/bbs/view.php?board=issue&id=462에 가보시면 될 듯.  

시민과 계급 - 87년 이후 한국 정치의 이념과 주체

: 복수의 보편적 적대들의 절합을 사고하기

                                                      서관모(충북대)







1. 시민운동 담론의 계급적 성격




한국의 사회운동에서 80년대에 번성하던 계급 담론은 90년대에 들어 쇠락하였고, 계급적대의 문제설정은 주변화하였다. 목하 시민사회 담론은 세계적으로 번성하고 있지만, 그 번성은 특히 미국에서 두드러지는 현상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현대의 시민사회 담론의 발생지로서 70, 80년대에 그 담론이 만개했던 동유럽에서는 1990년대 중반에 이르면 비판적인 시민사회 담론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90년대에 시민사회 담론이 폭발한 곳은 다름 아닌 미국이었다. 미국에서 “시민사회 개념은 지식인, 언론인, 전문가, 정치가, 종교지도자, 노동조합원 그리고 최고경영인들 모두의 관심을 끄는 부분이 되었다”(에렌버그, 2002: 23; 365).

미국에서와 달리 한국에서 ‘시민사회의 확산을 요청’한 것은 정치지도자들이 아니라 ‘시민운동’이라는 사회운동의 활동가와 지식인이며, 따라서 시민사회 담론의 성격을 주로 결정하는 것은 이 시민운동들의 성격이라 할 수 있다. 이 시민운동에서 통용되는 시민사회 담론들은 미국식의 (신)자유주의적 시민사회 담론으로 환원되지 않는 진보적인 요소들을 내장하고 있다. 그러나 시민운동들이 제도화되어 가고 국가에 포섭되어 가면서 한국의 시민사회 담론도 자연히 미국식의 자유주의적 시민사회 담론에 수렴해 왔다.




“시민의 힘이 세상을 바꿉니다”(참여연대).

그러나 세상을 바꾸는 시민은 누구인가? 한국의 시민운동은 처음부터 ‘신사회운동들’도 얼마간 포괄하고 있지만, 그 주요부분은 구미에서는 많은 경우 정당들을 비롯한 정치조직들에 의해 수행되어 온 운동들을 포함한 전통적 사회운동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이 시민운동의 주요부분은 미완의 부르주아 혁명(‘시민혁명’)의 과제를 정당정치적 운동이 아닌 방식으로 완수하고자 한 60년대 이래의 일본의 市民運動과 통하는 바가 있다. 일본의 市民運動은 본래 부르주아 민주주의 즉 자유민주주의를 제대로 달성하자는 운동이었고 이러한 이념적, 정치적 기조 위에서 여러 영역으로 확장되어 온 운동이라 할 수 있다. “‘시민[bourgeois]혁명’을 거치지 않고 하루아침에 ‘신민[subject]’에서 ‘시민[citizen]’이 되어버린 일본국민이 진정한 ‘시민’으로 거듭나는 것은 곧 서구의 ‘시민혁명’과도 같은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여겨졌다”(한영혜, 2001) 한국의 시민운동의 기조도 이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시민운동이 이렇게 정치적으로 자유민주주의를, 경제적으로 합리적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데 ‘시민사회’ 개념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다만 특정한 정세 속에서 계급운동과 구별정립하기 위하여 시민운동이 이 용어를 활용한 것이다.

시민운동은 스스로를 ‘시민들의 운동’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한국과 일본에서 ‘시민’은 다의적인 용어이다. bourgeois, civic/(of) citizen, civil이 구별되지 않고 모두 ‘시민’으로 지칭되니 혼란을 낳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이 시민들의 사회를 ‘시민사회’로 이해하니 혼란은 극에 달한다.

citizen은 ‘정치적 주체’, 즉 정치에 대한 보편적 권리의 소유자, 정치체의 구성자이다. 시민운동이 이 ‘citizen으로서의 시민’의 운동이라면, 그것은 예컨대 자유, 평등, 소유 등을 비롯한 ‘시민의 권리’(rights of citizens, civic rights/droits du citoyen)를 위한 정치적 운동, 즉 국가영역 외부의 운동이 아니라 정확히 국가영역 내부의 운동이 된다. 한국의 ‘시민운동’ 진영은 ‘시민사회’를 ‘시민들의 사회’로 파악하고, 따라서 자신을 국가 외부의 시민사회의 운동, 비정치적 운동, 초계급적인 운동인 것처럼 규정한다.

우파 시민운동을 대표하는 경실련은 “지금까지의 재야운동이 설정해 왔던 주체와 운동방식이 달라져야 한다”고 종래의 ‘민중운동’ 내지 ‘민족민주운동’을 비판하면서 “특정한 계급, 계층이나 집단의 이기주의를 떠나서 공공선을 추구하는 시민”들이 “주체”가 되는 운동을 표방하였다(신철영, 1995). 즉 운동의 성격을 그 운동의 ‘주체’의 속성을 통하여 규정한 것이다. 이렇게 민중운동을 계급 이기주의적 운동으로, 자신을 초계급적인 공공선을 추구하는 운동으로 규정하는 시민운동의 담론은 정확히 부르주아적 담론, 맑스와 엥엘스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지배적 형태로 간주하는 ‘법적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담론, 그것도 극도로 반동적이고 퇴행적인 담론이다. 법적 이데올로기의 핵심은 사회계약의 이데올로기요, 자유ㆍ평등ㆍ소유 등 인권의 이데올로기이거니와(발리바르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지배적 형태를 경제의 자동성 관념을 핵심으로 하는 ‘경제적 이데올로기’라 보지만, 이것은 일단 논외로 한다), 시민운동의 담론은 이러한 부르주아 인권 담론조차 퇴행시키고 축소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운동, 농민운동을 비롯한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이 그 운동의 이른바 “주체”(운동의 현실적 및 잠재적 참여자)의 계급ㆍ계층적 소속에 따라 계급적 성격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근본적으로, 계급은 계급성원들의 합이 아니다. 계급(의 동일성)은 계급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계급적 실천의 효과이다. 민중운동의 ‘민중’은 계급적 범주이지만 시민운동의 ‘시민’은 계급적 범주가 아니기에 두 운동의 “주체들”의 계급ㆍ계층귀속이 확연히 구분될 수도 없다. 중요한 것은 각 운동의 노선의 계급적 내용이며, 각 운동을 장악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이다.

시민운동의 주체로서의 ‘시민’, 즉 시민운동 참여자나 잠재적 참여자로서의 ‘시민’(‘시민’①)은 정치적 주체로서의 시민(시민②)과 동일한 범주가 아니다. 대한민국 국민은 모두 시민이며, 정치적 권리의 형식적 제한과 관련하여 이른바 프랑스 혁명 이후 분류되던 ‘능동적 시민’과 ‘수동적 시민’의 법적 분할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시민운동 진영의 담론에서 시민운동의 주체로서의 ‘시민’과 정치적 주체(권리 주체)로서의 시민이라는 범주적으로 전혀 다른 시민이 같은 “시민”으로 취급되며, 자신의 필요에 따라 왔다갔다하며 사용된다. 이러한 용어법 속에서 시민운동의 주체(참여자)로서의 ‘시민’(‘시민’①)이 정치적 주체로서의 시민, 시민성(citizenship[시민권])의 담지자로서의 시민(시민②)과 사실상 동일시된다. 그리하여 노동운동의 ‘주체’로서의 노동자는 시민운동의 ‘주체’가 아니라는 이유로 사실상 ‘시민’ 자체가 아닌 것으로 된다. 시민운동 참여자를 뺀 민중 일반에게서 시민권/시민성이 사실상 박탈되는 것이다. 이것은 부르주아적 한계를 벗어나는 사회운동들은 물론이고, 부르주아적 한계 내에 있지만 그 한계와 항상 충돌할 수밖에 없는 사회운동들의 ‘시민권’ 박탈, 즉 정치적 권리 박탈을 뜻한다. 적어도 이러한 면에서는, 그러한 시민운동 담론은 구자유주의의 기준에도 미달하는 퇴행적인 것이다.

이러한 시민운동 담론은 심대한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낳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한국사회에서 노동자, 민중의 시민성/시민권을 억압하는 효과, 민중운동을 억압하는 효과를 낳는다. 시민권/시민성 개념의 확장이 사회운동의 근본적인 과제의 하나가 되는 현재의 정세에서 이러한 시민 개념을 둘러싼 투쟁은 첨예한 계급투쟁의 요소이다. 그러한 ‘시민’ 개념을 구사하는 시민운동 담론은 구자유주의적 기준에도 미달하지만, 독점 부르주아지의 첨단의 신자유주의적 기획의 관철에 대단히 유효하게 복무한다. (cf. RB, LB, PtB 개념).

물론 이러한 효과의 상당부분은 언어적 제약에 의한 비의도적, 비의식적인 것일 수 있다. 부르주아적 운동을 ‘시민’의 운동과 동일화하고 민중과 민중운동의 시민권을 박탈하는 것이 적어도 시민운동 지도부의 본래의 의도에 의한 것이 아니라, bourgeois와 citizen을 함께 ‘시민’으로, bourgeois와 civic을 함께 ‘시민적’으로 표기하는 용어법에 의한 것일 수 있다는 말이다. 이 점에서 책임은 시민운동 진영에만 돌아가지 않는다. ‘시민’이라는 용어가 이렇게 터무니없이 착취되도록 허용한 민중운동의 책임과 역량의 문제를 인정해야 한다. 단, 새로운 개념을 발명하고 통용시키지 못한 책임의 주된 부분은 진보적 지식인들에게 돌아간다.




2. 시민사회 용어법의 기만과 의의




1970, 80년대 동유럽 반체제이론가들에게 시민사회는 “그 안에서 자주관리와 민주주의가 작동할 수 있고 국가로부터 자율적인 사회활동 공간”이었다. 그러나 1989년 이래 동유럽에서 부활한 것은 그러한 시민사회가 아니라 자본주의였고, 그리하여 진보적 시민사회 담론은 자연히 소실되었다. 1989년 이후 시민사회의 개념적 지위는 더 이상 국가권력에 항거하는 “민주적 참여의 본거지”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의 단순한 보조역”으로 달라졌다. 시민사회의 역할은 이제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와 자유시장경제를 구성하고 보존하는 것”으로 된 것이다(베이커, 2000: 220-221). 시민사회는 이제 주로 여러 가지 비국가기구를 묘사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1980년대 말 이래 번성해 온 미국의 시민사회 담론에서도 이와 흡사한 시민사회 개념이 사용된다. 여기서는 “국가와 시민 사이에 존재하는 중간조직(intermediate organization)”으로 이해되는 토크빌주의적 시민사회 개념이 사용된다(에렌버그, 2002: 13).

근래의 동유럽이나 미국의 경우와 유사하게, 한국의 시민운동 진영도 시민사회를 사실상 시민운동 조직들로, 시민운동 참여자나 잠재적 참여자들의 집합체로 이해한다. 시민사회(civil society)를 말하자면 특정한 시민들(시민 일반이 아니라 ‘시민운동’에 참여하는 시민들)의 집합체로 이해하는 것이다.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자율적 행위의 ‘영역’이라는 전통적인 시민사회 개념이 사용된다. 행위자로서의 시민사회 개념과 행위영역으로서의 시민사회 개념이 동시에 사용되는 것이다. 이렇게 시민사회를 행위영역으로만 이해한다면, 이 시민사회에서 시민운동들, 시민운동 참여자들이 특권적인 지위를 갖기 어렵다. 시민사회를 집합적 행위자로, 즉 일종의 ‘시민들의 사회(집합체)’와 같은 것으로 규정함으로써 시민운동 진영은 자신에게 사회의 대표자라는 특권적 지위를 부여하고, 동시에 시민사회를 비국가적이고 따라서 비계급적인 자율적인 행위 영역으로 규정함으로써 자신들에게 초계급적 보편성을 부여한다.

시민사회를 집합적 행위자로, 즉 시민운동 단체들, 시민운동 참여자들의 의미로 사용하면 시민사회에는 자연히 자율성, 공공성 등 긍정적인 ‘시민적’ 속성 내지 덕목이 지배하는 것으로 이해되게 마련이다. 다수의 시민사회론자들은 ‘시민사회’를 이렇게 긍정적인 것으로 만든 다음에 슬그머니 이 시민사회 개념을 행위영역으로서의 시민사회 개념에 결합시킨다. 그리하여 예컨대 국가영역, 경제영역과 구분되는 저 행복한 시민사회 영역, 즉 자유, 평등, 자율, 공공성이 지배하고 이해대립도, 강제도, 적대도 없는 영역이 발명된다. 자본주의 국가와 경제가 불가불 얼마간 문제가 있는 것이라 해도 이러한 시민사회가 있으니 세상은 살 만한 곳이 된다. 이러한 이중적, 양의적인 시민사회 개념은 계급대립을 가리는 효과적인 장치가 된다.

이러한 시민사회 개념에 앞서 80년대 한국의 진보학계에서는 그람시의 시민사회 개념이 소개되었다. 이어 80년대말 시민운동, 시민사회 담론이 민중운동, 민중운동 담론과 구별정립하며 등장할 때 널리 수용된 시민사회 모델이 ‘국가/시민사회/경제’의 3분법을 채택하는 코언(J. Cohen)과 아라토(A. Arato)의 모델이다. 시민사회 개념의 수요자인 시민운동 진영이 추구한 것이 쇄신된 자유주의, 자본주의였기 때문에 동유럽 시민사회 이론의 초기 유형인 ‘사회주의적 시민사회론’은 자연히 관심대상이 되지 못하였다.

시민사회에 대한 이론적 논의에서 당초에 미국식의 시민사회 개념(‘국가와 시민 사이에 존재하는 중간조직’ 내지 ‘비국가기구’)이 처음부터 자리잡지 못한 이유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시민사회 개념이 일정하게 진보적인 시민운동과의 관련 속에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민운동의 제도화, 우경화 과정에서 미국식 시민사회 개념이 지배적인 것으로 되었다.

한국의 시민운동 진영 내에서 좌파에 속하는 논자들, 즉 좌파 시민사회론자들은 대부분 코언ㆍ아라토류의 국가/시민사회/경제의 3분법을 채택한다. 코언ㆍ아라토는 이러한 이론틀은 “경제적 자유주의냐 국가주의냐라는 양자택일을 벗어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주장은 주장일 뿐이다. 스스로를 민중운동과 구별정립하려 한 한국의 시민운동이, 다시 말해 맑스주의 이론과 사회주의 이념에 대해 선을 긋지만 단번에 신자유주의로 넘어갈 수도 없었던 시민운동의 활동가들과 이론가들이 이러한 ‘3분법적 이론틀’에 매료된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전통적인 시민사회 개념은 홉스와 로크(정치사회로서의 시민사회), 스미스(경제사회로서의 시민사회), 헤겔(욕구의 체계로서의 시민사회), 초기 맑스, 특정 시점의 그람시(헤게모니의 장소로서의 시민사회), 하버마스, 킨, 코언․아라토 등 그 누구의 경우에도 사회적 영역을 지시하는 것이지 행위자, 세력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국의 시민운동 진영의 시민사회론자들은 이러한 행위자로서의 시민사회 개념을 일반적으로 사용한다. 시민사회를 행위자로 파악할 경우 민주화의 전략으로서의 ‘시민사회의 발전, 활성화’라는 것은 ‘시민운동의 발전, 활성화’와 같은 의미가 된다. 한 걸음 나아가 ‘시민사회의 활성화’는 ‘비정부기구(NGOs)의 활성화’와 동일한 것이 된다.

state/civil society의 2분법 속에서든, state/civil society/economy의 3분법에서든 정치적 주체로서의 citizen이 속한 곳은 city(civitas), 즉 state(civitas)이다. state는 city의 다른 이름이다. 그리고 정의상 우리의 시민사회론자들은 반대로 시민, 시민세력을 시민사회(civil society)에 귀속시킨다.

시민운동 진영이 왜 집합적 행위자로서의 시민사회, 즉 ‘특별한 시민들의 단체로서의 시민사회’라는 미국식 개념을 수미일관하게 쓰지 않고, 그 개념과 전통적인 civil society 개념 사이를 편의에 따라 오가는 곡예를 부리는 이유는 자명하다. 그것은 앞에서 말한 대로 시민운동을 단지 ‘국가로부터도 자유로울’ 뿐 아니다 또한 경제로부터도 자유로운 운동’, 즉 ‘공동선’을 지향하는 초계급적 운동으로 이상화시키기 위함이다. 민중운동이 계급적, 당파적임에 비해 시민운동은 초계급적, 초당파적임을 주장하는 데 시민사회 개념의 이러한 이중적 사용은 더할 나위 없이 유용하다.

이러한 용어법 상의 기만(의도 여부와 무관한 현실적 기만)은 체제내 포섭의 진전에 따라 부분적으로 약화되어 간다. 시민사회를 국가 및 경제와는 별도의 영역으로 범주화시키는 것은 자본주의 국가 및 경제에 대하여 얼마간은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을 뜻한다. 시민운동이 점점 더 신자유주의에 포섭됨에 따라 그러한 문제제기는 약화되어 가며 따라서 국가/시민사회/경제라는 도식 자체가 점차 불필요하게 된다. 그리하여 논리상 문제가 있는 종래의 양의적인 시민사회 개념 대신에 시민사회를 ‘국가와 시민 사이에 존재하는 중간조직’으로 설정하는 미국식 시민사회 개념이 점차 지배적이게 된다. 즉 시민사회가 ‘저항적, 자율적’일 필요가 없게 됨에 따라 시민사회는 사실상 NGO와 같은 의미로 이해된다. 이 과정이 진전될수록 시민사회 담론은 더 이상 진보와 무관한 것으로, 신자유주의적 담론으로 된다. 다만 기만적 필요에 따라 영역으로서의 시민사회 개념이 계속 착취될 뿐이다.

시민사회 개념이 여전히 진보진영에서 사용될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경우 그 개념은 근본적인 의미 전화, 문제설정의 전환을 거쳐야 할 것이다. 그람시의 예가 그 중 하나이다. 맑스 자신은 초기에 ‘국가/시민사회’의 장소론(토픽)을 사용하다가 곧 ‘토대/상부구조’라는 장소론으로 이행한다. 시민사회라는 용어는 더러 사용했지만 ‘국가/시민사회’의 토픽 자체는 기각한 것이다. 그람시는 맑스의 도식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헤게모니의 문제설정을 도입하여(헤게모니=강제+동의) 국가 개념을 확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고전 맑스주의자 중에서 가장 나아간, 사실상 유일하게 나아간 그람시의 헤게모니의 문제설정 자체가 여전히 ‘의식의 철학’과 따라서 ‘주체의 철학’에 머물러 있음에 비해 알튀세르는 무의식적인 것으로서의 이데올로기의 문제설정 위에서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개념을 도입한다)1).

현재 한국에서 몇 명 남지 않은 좌파 시민사회론자들은 다른 각도에서 시민사회 개념의 비판적 의의를 찾는다. 그들은 시민사회가 계급적대로부터 자유로운 영역이 아니라고 파악한다는 점에서 출발점에서는 자유주의적 시민사회론자들과 준별된다. 그들은 맑스주의의 계급적대의 총체화(사회적 관계들의 계급관계로의 환원)를 비판하고 사회적 적대들 내지 갈등들의 복수성을 파악하기 위한 수단으로 시민사회 개념을 사용한다.

전통적 맑스주의의 맹목이었던 이러한 현실을 파악하고자 한 그들의 의도 자체에는 훌륭한 점이 있다. 문제는 그들이 이러한 갈등들의 발생의 영역을 시민사회로 국지화시키고, 따라서 시민사회를 그 해결의 영역으로 특권화시킨다는 데에 있다. 그 결과 갈등들의 해결을 위한 운동들은 시민사회 내의 운동들, 시민운동들이 된다.




“시민사회는 경제로 환원될 수 없는 다양한 사회적 관계들을 내포하고 있다. … 시민사회는 단순히 계급적대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쟁점들을 둘러싸고 다양한 세력들 간의 다양한 적대들 ― 예를 들어 지역, 환경, 성, 민족, 소수자 등 -― 이 형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계급환원론적 시각으로 포괄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영역이다.”(조희연․정태석, 2001)

“… 시민사회는 내적으로 다양한 적대와 갈등을 내포하고 있는 다원적이고 복합적인 시민적 삶의 공간이다. … 다양한 적대의 존재는 시민사회에서 다양한 사회운동을 발생시키며 민주주의 의식과 계급의식 등의 발전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사회를 변화시킨다고 할 수 있다”(조현연․조희연, 2001: 358).

 

맑스주의가 이들의 이러한 문제제기의 긍정적인 측면에 답변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여기에 답한다는 것은 계급적대를 총체화시키지 않으면서, 다시 말해 보편적인 적대의 복수성을 승인하면서 계급적대의 문제설정을 견지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의 이론구조를 단순히 비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회적 관계에 대한 이들의 이해는 고전적인 맑스주의에도 현저히 미달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주장은 경제가 계급관계만을 내포하고 따라서 계급운동만을 발생시킴에 비해 시민사회는 계급적대와 함께 여타의 다양한 사회적 적대를 내포하므로 다양한 사회운동을 발생시킨다는 것이다. 이 다양한 사회운동이란 결국 “시민사회의” 이러저러한 사회운동들, 즉 “시민운동들”을 지칭한다. 요컨대 그들은 계급적대를 부정하지 않지만, “시민사회에서 전개되고 있는” “운동정치”, 즉 “시민운동의 정치로서의 시민정치”를 특권화시키기 위하여 이러한 시민사회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렇게 시민사회에 국지화되는 운동은 결국 퇴행적인 자유주의적 시민운동 진영이 그리는 시민운동과 수렴하게 된다.

과연 다양한 적대들은 시민사회에만 ‘형성되어’ 있고 반면 경제에는 계급적대만이 형성되어 있는가? 가령 성별 적대는 국가 영역, 경제 영역에서는 작동하지 않는가? ‘지역, 환경, 민족, 소수자’와 관련된 적대들 역시 시민사회에서만 작동할 뿐 국가 영역, 경제 영역에서는 작동하지 않는가? 그리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사회를 변화시키는 다양한 사회운동은 시민사회에서 시민운동으로서만 발생하고, 국가 영역, 경제 영역은 이러한 사회운동이 발생하지 않는 영역인가? 계급관계, 성별관계, 소수자-다수자관계, 지역 및 환경과 관련이 있는 사회적 관계 등은, 따라서 계급적대를 위시한 사회적 적대들 내지 갈등적 관계들은, 사회 전영역을 가로지르며 전영역을 통하여 작동하는 것이지 국가, 시민사회, 경제와 같은 사회의 어떤 부분영역에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사회운동들은 사회 전영역에서 일어나는 것이지 예컨대 시민사회라는 사회의 특정 영역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시민운동들을 시민사회에 국지화된 운동으로 사고할 수 있는 것은 첫째, 그들이 사회적 관계는 사회의 전영역을 가로질러 형성된다는 것을 무시하거나 몰이해하기 때문이고, 둘째, 그들이 시민사회를 행위 영역으로서 파악하면서, 동시에 그것과 양립불가능하게, 행위자로서 파악하기 때문이다.

아주 쉽게 말해 보자. 국가/시민사회/경제이든, 경제/정치/이데올로기이든, 이들은 사회적 행위의 일정한 기준에 따라 구획해 놓은 영역들이다. 모든 개인은 이중 특정 영역의 행위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영역의 행위를 한다. 누구나 경제적 행위, 정치적 행위, 이데올로기적 행위를 수행한다(노동자-자본가, 여자-남자, 유식자-무식자, 동성애자-이성애자, 한국민-이주민 등등). 즉 어떤 개인은 경제영역에 속하고 어떤 개인은 정치영역에 속하고, 어떤 개인은 이데올로기적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가령 한국의 5천만 인구중 1천만명은 국가영역에, 1천만명은 시민사회 영역에, 3천만명은 경제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5천만명 모두가 이들 영역 모두에 속하다. 마찬가지로 사회적 적대 내지 갈등의 관계는 이들 구분된 특정 영역에 한정되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들 전영역을 관통하여 형성되고, 적대와 갈등은 이들 전영역에서 발생한다. 한국의 시민운동, 시민사회 담론은 행위영역과 행위자라는 기본적인 구분을 지키지 않고 자의적으로 양쪽을 오간다.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의 핵심을 이루는 사상의 하나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따라서 계급관계가, 무구별하게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관계라는 것,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서 수용되고 있는 의미에서라면 ‘경제적’이지도 ‘정치적’이지도 않다는 것이다. 계급관계가 곧 착취관계라 할 때 이른바 ‘정치적’인 지배와 교직(交織)되어 있지 않은 순수히 ‘경제적’인 착취과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계급관계는 ‘경제적’ 관계가 아니며, 계급투쟁은 ‘경제’ 영역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계급관계는 경제적이며 동시에 정치적, 이데올로기적인 관계이며, 계급투쟁은 경제투쟁이며 동시에 정치투쟁, 이데올로기투쟁이다. 시민사회 영역을 따로 설정한다 하더라도 계급관계, 계급투쟁은 마찬가지로 이 영역을 관통한다.

그리하여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간의 계급관계/계급투쟁은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부르주아 정치인들과 일반 민중 간에, 부르주아 정치세력과 좌파 정치세력 간에, 자유주의적 지식인과 사회주의적 지식인 간에, 운동권 학생과 반운동권 학생 간에, 개발업자와 급진적 환경운동가 간에, 보수적 언론과 그에 저항하는 구독자들 간에, 엘리트주의적 문인과 민중주의적 비평가 간에 형성된다.

마찬가지로 예컨대 성별관계 및 따라서 성별적대는 시민사회에서만 형성되고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영역에 걸쳐서 형성되고 작동한다. 그리하여 예컨대 여성운동은 사회 전영역에서 발생하는 것이지 시민사회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환경문제와 관련된 사회적 적대들도 사회 전영역에 걸쳐서 작동한다. 성적 소수자에 대한 억압 역시 시민사회만이 아니라 국가, 경제를 포함한 사회 전영역에 걸쳐서 이루어진다. 이렇게 시민사회를 영역으로 이해하면, 그것은 시민사회는 계급운동 이외의 사회운동들의 특권적 영역이 될 수 없다.

반대로 시민사회를 행위자(들의 조직으)로 수미일관하게 이해하고(토크빌식, 미국식 시민사회 이해), 그리고 이들의 운동을 시민운동으로 이해할 경우에도, 그러한 시민사회/시민운동은 진보진영에게 전혀 특권적 지위를 갖지 못한다. 오직 시민사회의 두 개념 사이를 자의적으로 왕복할 경우에만 그것들에 특권적 지위가 부여될 수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러한 시민사회론/시민운동론은 계급적대 이외의 사회적 적대들도 부르주아 국가와 자본주의 경제의 전화(변혁) 없이는 변혁될 수 없다는 진실을 억압하며, 사회적 관계들을 전화시키고자 하는 진보적인 사회운동들을 억압한다.

요컨대, 맑스의 독창적인 사회적 관계 개념(적대에 의해 구조화되는 사회적 관계, 사회 전영역을 관통하는 사회적 관계)에 입각할 때에 근본적으로 부르주아적인 국가/시민사회라는 도식 또는 국가/시민사회/경제의 도식에서 벗어나 계급적대와 여타의 사회적 적대들의 절합(節合)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 발리바르는 ‘국가/시민사회’의 이원론이 “프롤레타리아 정치의 무덤”이라고 말한 바 있다. 우리는, 그것은 또한 급진적인 여성운동, 환경운동, 소수자운동 등 모든 사회운동들의 무덤이라 덧붙일 수 있다. 국가/시민사회/경제의 삼원론도 본질적으로는 마찬가지이다. 이 삼원론이 곧장 나쁜 국가ㆍ경제와 좋은 시민사회의 이원론으로 환원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게 환원되지 않는 삼원론이 있는데, 그것은 부르주아 국가와 자본주의 경제를 개량하자는 자유주의적 삼원론이다. 그 자유주의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3분도식의 일정한 긍정성을 부인하면 안 된다. 반동적 자유주의와 개량적 자유주의를 같이 취급할 수 없다. 한국의 좌파 시민사회론자들이 영역으로서의 시민사회 개념을 수미일관하게 사용하면서 이러한 3분도식을 사용한다면 사회발전에 기여하는 바가 클 것이다.




3. 시민성(citizenship)의 개조와 해방




진보세력이 추구하는 것은 사회적 관계들의 근본적 전화(변혁)이다. 계급적 입장에 따라 사회적 관계를 보는 관점, 다시 말해, 사회적 존재론은 달라진다. 부르주아 진영의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프롤레타리아 진영의 맑스주의의 사회적 존재론을 다음과 같이 간단히 대비시킬 수 있다.




자유주의의 사회적 존재론: 개인주의individualism/원자론atomism

  개인이 사회를 구성. 개인들이 先在하고 이들이 맺는 것이 사회적 관계.

  주체(subject) 개념: 개인 (자유로운 인식자ㆍ행위자ㆍ소유자)

   (인간 개인의 근본적 변혁은 불가능하다.)




보수주의의 사회적 존재론: 유기체론organicism/전체론holism

  개인은 사회의 산물.

  사회가, 즉 사회적 관계가 先在하며, 개인은 이 관계 속에 들어간다. 

  주체 개념에 대립하는 유기적 전체 개념

    (사회의 본성상 근본적 변혁은 불가능하다.)




맑스의 사회적 존재론: ① 관계의 존재론, 또는 관(貫)개체성(trans-individuality)의

         존재론 - “인간의 본질이란 사회적 관계들의 앙상블”.

                     ② 적대의 존재론(사회적 관계는 적대에 의해 구조화된다)

          “계급의 동일성은 계급투쟁의 효과”(알튀세르)

     주체는 주체화(종속화)과정의 산물(cf. 맑스의 법적 이데올로기 비판)

      (역사적 변혁은 필연이다.)        




맑스는 인간사회란 일반적 이익에 토대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적대의 조절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본다(적대의 존재론). 사회적 관계를 사회적 유대로 파악하는 종래의 모든 관점에 대립하여 사회적 관계를 적대적 내지 갈등적 관계로 파악한다. 이 관점은 역사를 만드는 것은 엘리트가 아니라 대중이라는 맑스의 혁명적 입장의 논리적 근거가 된다.

문제는 왜 이러한 이론에 준거한 실천 즉 대중정치가 반대물로 전화했는가, 단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가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독재로 귀결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이론적 요인만 본다면, 대중정치를 봉쇄하고 맑스주의를 파국으로 이끈 이론의 문제는 총체화론적, 목적론적 역사관의 문제로 집약된다. 맑스는 사회적 관계, 사회적 적대를 계급관계, 계급적대로 환원시킨다. 물론 그 반대 경향이 있지만, 지배적인 것은 전자이다. 계급투쟁 내지 계급적대를 총체화시킴으로써, 그는 화해불가능한 적대라는 자신의 구조적 사상의 전개를 스스로 봉쇄한다. 그의 역사변증법 속에서 모순들 또는 적대들은 ‘부정의 부정’의 법칙에 따라 공산주의 속에서 최종적으로 화해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진리/허위의 반정립과, 그것에 토대를 둔 이른바 ‘당의 목적론’이 도출된다. 당이 계급투쟁의 정세적 조직형태가 아니라 본질적 조직형태로 간주되는 것이다.

복수의 보편적 적대의 존재와 그것들의 절합을 이론화시키지 못한 맑스주의 이론의 무능력의 귀결이 유럽에서 반맑스주의적 신사회운동론의 에피소드였다면, 한국에서는 기이한 반이론적 시민사회론/시민운동론의 에피소드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이론화를 시도한 이론가가 에티엔 발리바르이다. 그는 계급적대와 전혀 다른 유형의 보편적인 모순들 혹은 분할들로서의 성의 차이와 지적인 차이라는 근본적인 인간학적 차이를 식별하고, 이 차이들과 계급적대의 절합을 사고하고자 한다.2)

맑스로 하여금 계급적대를 총체화시키도록 한 것은 그가 고전 정치철학으로부터 물려받은 ‘노동의 인간학’이라는 철학적 인간학이다. 노동의 인간학은 노동을 인간의 본질적 실천으로 간주하는 관념이다. 맑스는 노동을 인간과 사회적 관계들의 본질로, 유일하게 적대를 결정하는 근본적 실천으로 간주하기를 멈추지 않음으로써 계급투쟁을 총체화시키기에 이른다. 前期 알튀세르는 모든 ‘철학적 인간학’ 또는 ‘이론적 인간주의’를 비판하고 거기에 ‘인식론적 단절’ 이후의 맑스의 이론적 반인간주의를 대립시킨다. 그에 의하면 이론적 인간주의는 경제주의(발리바르가 말하는 경제적 이데올로기에 근사한 것)와 짝을 이루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핵심을 이룬다. 이러한 입장에 설 경우 문제는 노동과 관련된 적대 즉 계급적대에 맑스주의가 부여하는 특권적 지위가 이론적으로 해명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발리바르는 철학적 인간학의 문제를 다시 제기한다. 노동의 인간학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 없이 맑스주의의 계급적대의 문제설정(노동본질주의+적대의 사상)은 있을 수 없다. 반대로 거기에 머무르면 계급적대의 총체화로 나아가게 된다. 발리바르는 맑스의 노동의 인간학을 기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스피노자적인 ‘교통의 인간학’(인간의 본질=교통communication)으로 보완함으로써, 맑스적 생산양식의 이론과 스피노자적 주체화양식의 이론을 결합함으로써 계급적대의 총체화를 피하면서 계급적대의 문제설정을 유효화시키는 역사이론을 구성하고자 한다. 그것은 경제적 적대와 이데올로기적 적대의 절합 위에 구성되는 새로운 역사유물론 내지 역사적 인과성의 도식이다. 여기서 경제(부르주아적 경제 개념이 아니라 정치와 통하는 것으로서의 일반화된 경제 개념)와 이데올로기(일반화된 이데올로기 개념)는 각각 상대편을 통하여 작동하는, 정치의 두 개의 토대가 된다.

맑스와 스피노자의 결합의 가능성의 토대는 양자가 공유하는, 관계의 존재론의 하나로서의 사회적 관계의 존재론과 적대 내지 갈등의 사상이다. 이것들은 ‘정치에 관한 대중의 관점’의 전제조건이다. 스피노자에게서 사고는 교통과정 안에서만 이루어지며, 진리와 개인 및 대중의 동일성은 이 교통과정 속에서 형성된다. 따라서 지적 해방(진리의 인식)과 관련된 스피노자의 분석의 대상은 사회적 관계가 된다. 그것은 “자신들의 감정들을 통한 개인들의 교통관계”이다. 스피노자에게 사회생활은 교통의 활동인데, 이 교통은 무지의 관계, 미신의 관계, 곧 이데올로기적 적대의 관계에 의해 구조화된다.

발리바르는 적대들에 대한 통합적 이론의 구성이라는 무망한 시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두 개의 보편적 적대의 절합 위에, 계급모순과 지적 차이의 절합 위에 맑스주의를 확장 내지 “일반화”시키고자 한다. 

여기에서 한국의 시민운동들의 실천 내에서 사회주의 이념과 맑스주의 이론이 본질적으로는 맹목이었던 부분들에 대해 성찰해 보자. 이들 여러 운동은 종래 제기되지 못했던 다양한 인권들의 문제를 정치의 영역으로 끌어들인다는 중요한 긍정성을 보인다. 예컨대 여성, 이주민, 성적소수자, 에이즈환자의 권리 등등. 이들의 인권을 위한 투쟁은 맑스가 말하는 ‘사회계약, 인권 등등의 이데올로기’로서의 부르주아 법적 이데올로기에의, 하물며 부르주아적 실천에의 종속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중요한 것은 인권들에 대한 추상적 선언 자체가 아니라, 인권들을 정치적 공동체 속에서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따라서 정치적 공동체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정치적 실천의 차원에서도 ‘인권의 정치’라는 것 자체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것은 부르주아지가 수세기 동안 실천해 온 것이다. 중요한 것은 혁명적인 ‘인권의 정치’이다.

정치적 공동체 속에서 실현되는 인권, 시민으로서 누릴 수 있는 인권, 그것이 citizenship이다. 그러나 그러한 시민권을 누리기 위해서는 먼저 정치적 공동체의 구성원, 시민이어야 한다. 이것 역시 citizenship이라 불린다. 시민됨 내지 시민자격과, 시민으로서의 권리라는 두 차원을 포괄하기 위해 citizenship을 ‘시민권’으로 번역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시민권’이라는 우리말은 이미 시민인 자의 권리라는 뜻을 지니기 때문이다. 가령 ‘시민성’과 같이 양자를 포괄하는 개념이 사용되어야 하고 그리하여 citizenship을 ‘시민권’으로 축소이해하도록 하는 용어법을 지양해야 한다.

이 권리 개념을 무제한 확장하는 것, 이렇게 이해된 권리를 정치적 공동체 속에서 유효하게 실현하는 것, 즉 시민성을 무한히 확장하는 것, 다시 말해 ‘민주주의의 경계의 무한한 확장’, 이것이 바로 해방(liberation)의 내용이요 공산주의의 다른 이름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실제로 사회주의 이념의 주요한 구성요소의 하나가 시민성에 대한, 즉 정치에 대한 보편적 권리에 대한 발본적으로 민주주의적인 이해이다(부르주아적 헌정들에 의해 법률적으로 혹은 사실적으로 그러한 권리로부터 배제되는 사람들에게까지 확대되는 그러한 권리).

프랑스 인권선언(「인간의 권리들과 시민의 권리들의 선언」, 1793)은, 적어도 선언적으로, 인간과 시민을 동일화시킨다. 이 동일화 속에서 모든 인간이 구별 없이 시민성(정치에 대한 보편적 권리)을 갖는다. 그러나 우선 민족국가들로 구획된 현실에서 citizenship은 nationality의 틀에 즉각 갇혔다.

근대 세계에서 계급은 무엇보다도 민족에 의해 과잉결정된다. 근대 정치의 이데올로기적 구도는 한편 추구되는 소유형태에 따라, 다른 한편 추구되는 공동체에 따라 다음과 같이 편성된다.




  부르주아     진영 : 자유주의(자본 소유)        + 민족주의(민족적 공동체)

  프롤레타리아 진영 : 사회주의(노동에 의한 노유) + 공산주의(계급적 공동체)




현실의 역사에서 사회주의는 공산주의라기보다 오히려 민족주의와 결합하였고, 민족주의에 복속하였다. 사회주의자들이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지 못한 것은 전혀 아니며, ‘국제주의인가, 야만인가’라는 슬로건은 1960년대에 새로 등장한 것이 아니다. 민족적 틀 내에 갇힌 시민성을 해방하여 권리의 영역에서 인간과 시민의 동일성을 실현하는 것, 이것은 지금도 변함없이 사회주의의 근본과제이다. 이와 관련하여 사회주의가 자유주의와 공유해 온 국가주의와 일국중심주의의 문제(월러스틴), 경제주의와 민족주의 등 이데올로기에 대한 관념론적 이해의 문제(알튀세르, 발리바르)와 같은 근본적인 이론적 쟁점이 제기된다. 이 두 가지 거대한 이론적 문제를 맑스주의는 전혀 해결하지 못하였다. 이것만으로도 맑스주의를 포함한 종래의 변혁의 이론들은 환골탈태의 개조를 요한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이 선언한 그 자체로 혁명적인 ‘평등한 자유’(인간과 시민의 동일화와 짝을 이루는 평등과 자유의 동일화)라는, 권리에 대한 근대정치적 이념만으로는 부족하다. “근대 정치를 괴롭히는 억압된 모순들”, “평등의 확립에 의해 폐지될 수 없는 차이(모순)”로서의 성적 차이, 지적 차이가 권리 개념에, 시민성 개념에 각인되어야 한다. 해방(자유화)의 내용은 이제 권리의 평등 속에서의 차이의 무화가 아니라 ‘평등 속에서의 차이의 권리’의 생산으로서 전진해야 한다고 본다. 권리 개념의 이러한 전화는 인간학적 차이를 부정하거나 형식적으로 중화시키는 시민성이 아니라 그러한 차이에 의해 과잉결정되고 그러한 차이를 전화시키는 명시적 경향을 갖는, 새로운 시민성 개념을 요구한다. 물론 시민성의 개조에서 적대들을 구성하는 성적 차이와 지적 차이만이 문제인 것은 아니다. 부차적일지라도 중요한 다른 인간학적 차이들이 권리 개념에, 시민성 개념에 각인되어야 한다.

권리 개념과 따라서 정치 개념이 이렇게 재구성될 때 계급 개념, 더 정확히 말해서 계급적대의 문제설정은 그 변치 않는 생명력을 실현할 것이다. 그럴 때에만 시민 개념, 시민성 개념 역시 부르주아 정치의 협소하고 억압적인 제약을 벗어나 해방의 정치의 유효한 무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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