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 이분법으로 동료 학자들을 비난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진보평론>가을호 알튀세르·들뢰즈 국내 수용 비판 논문을 읽고
 
 2008년 10월 13일 (월) 15:06:19 진태원 고려대·철학  editor@kyosu.net 
 
 
<진보평론> 2008년 가을호에 발표된 홍준기 서울시립대 교수(철학)의 「알튀세르 맑시즘에 관한 새로운 정치· 윤리적 독해의 시도:라깡/들뢰즈, 헤겔/스피노자 논쟁 구도의 맥락에서」는 국내의 알튀세르· 들뢰즈 수용에 이의를 제기한 논쟁적인 글이다. 홍 교수의 논문에 대해 진태원 고려대 교수(철학)가 반박문과 함께 홍 교수의 논문을 간략히 요약했다.

    
  진태원 고려대·철학  
 

홍준기 교수가 이 글에서 보여주려는 바는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자기비판의 요소들』(1974) 이후에 알튀세르는 스피노자주의자라기보다는 오히려 헤겔주의자가 됐으며, 라캉의 정신분석학적 관점과 『일맥상통』(<진보평론> 37호, 288쪽―앞으로 이 글에서 인용할 경우 쪽수만 기입하겠다)하게 주체 개념을 재도입한다. 둘째는 알튀세르에 비해 들뢰즈는 “‘하나의 존재의 모습’, 즉 빈 공간 없는 ‘충만한’ 세계만을 허용하는 세계관을 기준으로 정치적 판단을 내리”고 있으며, 이 때문에 “정치적 오류는 물론 생산적인 학문적 토론을 방해하는 장애물로 기능할 수 있다”(291쪽)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홍 교수의 알튀세르 논의에 관해 몇 가지만 검토해보겠다. 


우선 지적할 수 있는 점은 알튀세르가 “점차적으로 스피노자로부터 멀어지고 헤겔 철학에 다가서고 있다”(278쪽)는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홍 교수가 의거하는 텍스트 상의 논거는 두 가지뿐이며, 설득력도 부족하다는 점이다. 하나는 『자기비판의 요소들』에서 “스피노자에게는 헤겔이 마르크스에게 준 것, 곧 모순이 항상 결여돼 있다”(Solitude de Machiavel et autres textes, PUF, 1998, p. 188)고 말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다. “나는 『신학정치론』에서 ‘세 번째 유형의 인식’, 즉 개별적인 동시에 보편적인 대상을 파악하게 하는 가장 높은 형태의 인식에 대한 가장 명백한, 그러나 가장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해석의 예를 발견했다(나도 인정해야 했듯이 그것은 스피노자에 대한 헤겔적인 해석이었다).”(홍 교수의 글 279쪽에서 재인용)


첫 번째 논거의 경우 홍 교수의 생각과 달리 알튀세르가 스피노자를 포기하고 헤겔의 입장을 대신 택했다는 뜻으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1) 알튀세르는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스피노자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 기원도 종말도 없는 이 사상보다 더 유물론적인 것은 없다. 나는 훗날 바로 이 사상에서, 역사와 진리를 목적도 없고 (……) 주체도 없는 (……) 과정이라고 한 나의 명제를 끌어내게 됐다. 왜냐하면 목적을 근원적 원인으로(근원과 목적이 거울에 의해 반사되는 것으로) 파악하기를 거부하는 것, 그것이 바로 유물론적으로 사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247쪽) 알튀세르에게 스피노자가 중요하다면 그것은 그가 엄밀한 의미의 유물론적 사상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2) 어떤 유물론일까? 알튀세르는 홍 교수가 준거하는 『자기비판의 요소들』 다음 해에 발표된 「철학에서 유물론자가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인가?」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나는 사실 맑스주의 변증법의 문제는 유물론의 우위에 대한 변증법의 종속이라는 조건 하에서만 (……) 제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그[헤겔]는 (……) “변증법을 신비화했다.” 그런데 사실 헤겔의 신비화는 그 자체 에피쿠로스 이후 또는 아마도 그 이전부터 항상 나타났던 유물론(존재가 됐든 주체 또는 의미가 됐든 간에 일체의 기원의 철학과 거리를 둠으로써만 정립될 수 있는) 과 변증법 간의 항상적인 관계를 입증하고 있다.”(『아미엥에서의 주장』, 147쪽―번역은 수정) 알튀세르에게 유물론은 기원(과 목적)의 철학에 대한 거부를 통해서만 정립되며, 이것이 바로 그가 스피노자에게서 발견한 것이다.


알튀세르는 이른바 유고들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유고들의 핵심 주제 중 하나는 이른바 ‘우발적 유물론’ 또는 ‘마주침의 유물론’에 관한 사고다. 그리고 알튀세르에게 이러한 유물론은 “주체(……)의 유물론이 아니라, 지정할 수 없는 목적이 없이 자기 발전의 질서를 지배하는 (주체 없는) 과정의 유물론”(『철학에 대하여』 동문선, 1996, 40쪽)이다. 심지어 그는 한 대목에서는 마르크스의 최종 심급 개념을 재해석하면서 변증법과 우발성을 대립시키고 있다.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 비판 서설』에서, 논리적으로 선행하는 형태들이 역사적으로 선행하는가 여부를 검토하면서, “경우에 따라 다르다 a d e、-pend”고 썼어요. 경우에 따라 다르다, 이것은 우발적인 말이지 변증법적인 말이 아닙니다.”(같은 책, 45쪽―번역은 수정) 따라서 「유물론의 유일한 전통」(1993)이 스피노자와 마키아벨리 두 사람에게 절반씩 할애돼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런데 홍 교수는 어떤 근거로 알튀세르가 “점차적으로 스피노자로부터 멀어지고 헤겔 철학에 다가서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두 번째 논거의 경우에 대해서는 여유가 없으므로 한 마디만 지적해두자. 제 3종의 인식의 문제에서 알튀세르가 보편적 개별성이라는 범주를 가지고 사고하고 있으며, 이 점에서 그는 헤겔의 관점을 채택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이 그가 스피노자로부터 멀어지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는 근거는 되지 못한다. 그것은 알튀세르가 줄곧 강조해왔던 것처럼 인식의 문제에서 스피노자와 헤겔은 데카르트와 칸트의 초월론적 문제설정에 맞서 공통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입증해주는 사례일 뿐이다. 


논증의 빈곤함도 문제이긴 하지만 이 글의 더 큰 문제점은 단순한 이분법적 논리와 자의적인 재단이 다수 엿보인다는 점이다. 가령 홍 교수는 “교조적인 맑스주의자들이”(251쪽) 자신과 다른 입장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비판했던 오류를 범했던 것”을 준엄하게 꾸짖으면서 “생산적인 학문적 토론”(291쪽)을 위해서는 선/악이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 좀 더 공정하고 관대한 태도를 가질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 대목을 읽고 있노라면 홍 교수는 관대하고 공정한 학자가 아닐까 기대하게 된다.


하지만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바로 다음 대목에서 홍 교수는 “알튀세르와 정신분석을 무관한 것으로 간주하려는 이러한 입장은 알튀세르 이론을 ‘정치편의주의’로 축소시킬 뿐만 아니라, 알튀세르와 같은 기품 있는 철학자를 ‘정치꾼’으로 만드는 오류를 범하고 있”(253쪽)다고 신랄하게 비난하고 있다. 요컨대 “알튀세르와 정신분석을 무관한 것으로 간주하려는 이러한 입장”은 학문보다는 정치편의주의에 몰두하는 정치꾼과 다르지 않다는 것, 다시 말해 생산적인 학문적 토론의 적이라는 것이다. 참으로 관대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도대체 누가 “알튀세르와 정신분석을 무관한 것으로 간주”하려 했을까. 홍 교수는 그 당사자로 필자를 지목하면서 각주에서 필자의 논문 368쪽을 참조하라고 해놓았다. 문제의 페이지를 참조해보면 독자들은 이러한 전가가 얼마나 엉뚱한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홍 교수가 제시한 「라캉과 알튀세르」(김상환ㆍ홍준기 엮음, 『라깡의 재탄생』, 창작과비평, 2002)라는 글에서 필자의 논점 중 하나는 라캉과 알튀세르 사이의 관계를 일방적인 적용이나 차용의 문제로 보아서는 안되며 “알튀세르의 이니셔티브”를 존중해야 하고 “라캉과 알튀세르의 관계는 일차적으로 알튀세르의 이론작업의 맥락 내에서 평가돼야”(앞의 책, 358쪽)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필자는 알튀세르의 ‘과잉결정(surd’etermination)’ 개념은 프로이트의 ‘다중결정(Uberdeterminierung)’을 “직접 적용한 것이 아니라, 이 개념[다중결정]에 새로운 개념 규정들을 보태서 이 개념을 대체하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같은 책, 370쪽)낸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고, 또한 “알튀세르는 상상적 왜곡의 측면에서 라캉의 문제설정, 라캉의 개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지만 이러한 “활용을 지휘하고 있는 것은 역시 스피노자-마르크스적인 문제설정”(같은 책, 385쪽)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어떤 식으로 이해하든 이는 알튀세르가 라캉과 무관하다거나 정신분석과 무관하다는 뜻으로 읽을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그는 마슈레와 들뢰즈에 대해 “다만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은 헤겔 철학의 대안으로서 특히 초기에 스피노자 철학을 원용한 알튀세르에 의해 영향 받은 알튀세르의 제자들(특히 마슈레) 그리고 들뢰즈의 영향으로 ‘모순’이라는 범주를 불필요하거나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국내의 프랑스 철학 연구자들 사이에 생겨나는 경향이 있다”(257쪽)고 일갈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과연 스피노자 철학은 ‘무조건 좋은’ 철학이고 헤겔 철학은 ‘무조건’ 나쁜 철학인가?”(같은 곳) 필자로서는 이런 식의 발상이 어떻게 가능한지 잘 알 수가 없다. 마슈레의 『헤겔 또는 스피노자』는 어떤 의미에서도 “무조건 좋은” 스피노자와 “무조건 나쁜” 헤겔을 구별하려는 책으로 읽을 수는 없다. 제목에서 쓰이는 “또는”이라는 단어(불어로는 ou 영어로 하면 or)는 마슈레 자신이 설명하듯이 일차적으로는 양자택일이 아니라 동일성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곧 스피노자와 헤겔은 특히 인식에 대한 법적ㆍ초월론적 문제설정을 비판하는 데서 공통적이며, 유한과 무한 사이의 단순한 대립을 넘어서려고 한다는 점에서도 공통적이다. 두 사람 사이의 차이 및 상이한 입장은 이러한 공통성 위에서 비로소 식별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단순한 양자택일을 좋아하는 홍 교수의 눈에는 이것이 “무조건 좋은” 스피노자와 “무조건 나쁜” 헤겔을 선택해야 하는 문제로 보이는 것 같다.
그러니 도대체 선/악 이분법에 사로잡혀 동료 학자들을 정치꾼과 다를 바 없는 사람으로 만드는 이는 누구인가.

 

진태원 고려대·철학

필자는 서울대에서 스피노자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했다. 주요 논문으로는 「스피노자 정치학에서 사회계약론의 해체」등이 있다. 
 


 

 


알튀세르 맑시즘에 관한 새로운 정치․윤리적 독해의 시도:

라깡/들뢰즈, 헤겔/스피노자 논쟁 구도의 맥락에서


홍준기 (한국정신분석상담연구소)




I. 문제 상황: 정신분석과 들뢰즈, 그리고 알튀세르


   필자는 들뢰즈의 글 혹은 들뢰즈에 관한 특히 국내 저자들의 글을 읽을 때 종종 당혹감을 느끼게 되는데 그 이유는 들뢰즈 철학이 갖는 엄청난 매력과 혁명성, 다수성에 대한 열정적 옹호에도 불구하고 많은 경우에 그의 이론은 선/악이라는 이중적 구도를 전술적으로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지배자 담론’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필자가 보기에 이러한 선/악 구도에 입각한 들뢰즈 이론은 ‘혁명적 외관’을 띠고 있지만 자신과 다른 존재론적 입장에서 출발하는 ‘민주주의’의 동지들을 과도하게 폄하 혹은 비판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결국은 사실상 그러한 동지들을 ‘주적’으로 만들 수 있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과거에 사회주의가 융성하던 시절에 교조적인 맑스주의자들이 자신의 존재론적, 철학적 입장과 다른 이론 혹은 실천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갖지 못하고 무조건적으로 비판했던 오류를 범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필자의 이러한 생각은 들뢰즈에 대한 무지와 오해에서 비롯된다는 반론을 즉각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보다 설득력 있는 들뢰즈 비판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알랭 바디우의 『질 들뢰즈―존재의 함성』 정도의 깊이와 통찰력을 가진 논증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들뢰즈 철학과 같은 방대한 철학을 다루기 위해서는 이렇듯 폭넓은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제한된 지면에서 이러한 방대한 작업을 할 여유가 없으며, 이러한 작업은 이 글의 직접적 목표가 아니므로 여기에서 필자는 이 글의 주제인 정신분석과 맑시즘, 알튀세르의 정신분석 이해, 그리고 스피노자와 헤겔 이해를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하고자 하며, 이러한 논의를 진행해 나가면서 위에 언급된 문제들에 대해 부수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을 취하고자 한다. 들뢰즈가 철저하게 비판하고자 했던 정신분석은 사실 역사적으로 본다면, 임상 실천이라는 좁은 틀을 넘어, 다양한 진보적인 이론과 결합해 사회변혁적인 패러다임 중 하나로 자신의 학문적 의의를 입증해왔다. 정신분석을 자신의 중요한 학문적 기초로 수용해 맑시즘을 혁신하는 데에 일생의 노력을 기울여 왔던 알튀세르가 대표적인 예 중의 하나로 꼽힐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국내외의 맑스주의자 혹은 스피노자주의자 중 상당수는 여전히 알튀세르 철학은 라깡 이론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입장을 취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필자는 이들이 결국 라깡 이론을 배제한 채 맑스주의 혹은 철학을 건설하려고 노력하고 있을 뿐이라는 인상을 피할 수 없다. 굳이 이러한 배타적인 입장을 취하고자 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어쨌듯 알튀세르와 라깡의 결합을 부인하고자 하는 논자들은 알튀세르가 라깡을 원용하고자 했던 경우가 있을지라도 이는 내적인 본질적 이유에서가 아니라, 오직 정치적으로 ‘이용’했을 뿐이라는 지극히 정치적인 결론을 내린다. 사실 이러한 입장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고 국내에서 80년대 때부터 제시되던 전형적인 입장이다.1) 하지만 알튀세르와 정신분석을 무관한 것으로 간주하려는 이러한 입장은 알튀세르 이론을 ‘정치편의주의’로 축소시킬 뿐만 아니라, 알튀세르와 같은 기품있는 철학자를 ‘정치꾼’으로 만드는 오류를 범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알튀세르 철학을 체계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가 있다.2) 필자는 이러한 맥락에서 필자는 알튀세르에 대한 ‘비정신분석적’ 해석은 물론 방금 언급했듯이 정신분석을 보수주의적인 이론의 전형으로 간주하는 들뢰즈의 욕망이론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된다. 왜 들뢰즈는 민주주의의 동지일 수 있는 인접 이론들을 굳이 ‘주적’ 중의 하나로 간주해야 하는가? 들뢰즈가 특히『반오이디푸스』, 『천개의 고원』등 에서 정신분석 비판에 그렇게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사실은 우리를 놀라게 한다.3)  들뢰즈는 정신분석을 자본주의적 영토화의 ‘결정적인’ 매개로 간주한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은 과연 타당한가? 왜 들뢰즈는 마치 정신분석이 인간의 욕망과 자유, 해방을 가로막는 ‘진정한 주적’이라는 듯이 정신분석을 비판하는 것에 그렇게 많은 에너지를 소비했는가? 잘 알려져 있듯이 들뢰즈에 따르면 라깡 이론은 ‘결여’와 ‘환상’을 먹고 사는 패배적이고 보수적인 이론이며, 오이디푸스라는 가족 삼각형에 모든 것을 가두어 놓는 폐쇄적인 이론이다. 하지만 ‘적어도’ 정신분석의 라깡적 버전에서 정신분석은 곧 사회, 정치이론이며, 라깡에 따르면 오이디푸스의 너머, 즉 분석의 끝, 혹은 ‘오이디푸스 너머’라는 개념이 확고하고 분명한 형태로 존재함에도 불구하고4) 왜 들뢰즈 및 들뢰즈 수용자들은 이에 대해 침묵하는가? 왜 들뢰즈 연구자들은 라깡의 욕망과 향유 이론, 환상 이론, 사회이론을 ‘선의’를 갖고 연구하지 않은 채 정신분석의 ‘해악성’에 대해 그토록 강하게 비판하는가? 예컨대 우리는 들뢰즈가 집중적으로 비판한 바 있는 라깡의 개념인 ‘결여’라는 개념이 들뢰즈의 주장과는 달리 인간은 ‘결여’ 속에서 만족하며 고통 속에 살아야 한다는 것을 함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결여란 라깡에게 다양한 의미를 갖는 개념이다. 라깡적 관점에서 본다면 예컨대 억압이란 타자가 주체에게 ‘자유의 공간’을 허용하지 않고 너무 많은 향유를 획득하고자 하는 것에 있다. 예를 들면 망상증적 정신병자는 타자와의 이자관계 속에 머물러 있는 주체이며, 이러한 병리적 이자관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주체와 타자 사이에 결여가 도입되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알튀세르의 유고인 「마주침의 유물론이라는 은밀한 흐름」, 「독특한 유물론적 전통」5)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그리고 필자의 이 글 역시 알튀세르의 이 유고들을 출발점으로 삼아, 알튀세르와 정신분석의 관계, 그리고 들뢰즈, 스피노자, 헤겔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에 있다. 이 유고에서의 알튀세르의 은유적 표현을 빌려 말한다면 라깡이 말하는 결여란 ‘자유의 빈공간’을 의미하며, 따라서 주체는 오히려 이 결여―자유의 빈공간―속에서 ‘기쁜’ 마음(스피노자)으로 삶과 자유를 향유(라깡)할 수 있다. 이렇듯 라깡에게 결여란 흔히들 비판하듯이 단순히 만족의 결핍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와 타자 사이에, 그리고 주체 속에 주체를 억압하는 타자로부터 거리를 제공하는, 주체의 자유의 공간을 의미한다. 알튀세르는 이러한 ‘빈곳’이라는 은유를 이데올로기와의 ‘단절’, 인식론적 ‘단절’과 같은 개념과 결부시켜 활용한 바 있다. 반면 ‘충만함’이란 은유는 경우에 따라서 알튀세르에게 이데올로기라는 연속적 공간(즉 ‘상상적’ 충만함)을 의미한다. 물론 “충만한 말(parole pleine)”이라는 라깡의 용어에서 볼 수 있듯이 ‘충만함’이라는 단어가 알튀세르에게 무조건 ‘나쁜’ 의미만을 갖는 것은 아니다. 알튀세르 역시 라깡의 ‘충만한 말’이라는 용어를 이데올로기적인 “공허한 말(parole vide)”와 대비시켜 긍정적 의미를 부여해 사용한 바 있다.6) 

   반면 들뢰즈는 『반오이디푸스』에서 결여와 충만함을 대립시키며 후자를 지지하는 존재론의 관점에서 정신분석을 비판한다. 들뢰즈가 원용하는 철학자들의 존재론, 예컨대 스피노자의 존재론에는 ‘빈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들뢰즈는 이러한 ‘특정한’ 존재론적 입장을 절대화해, 이제 ‘빈곳’을 말하는 모든 이론은 결여 속에서 만족하고자 하는 패배적 이론이라는 논지로 ‘확대 해석’하는 듯한 논의 방식을 취한다. 여기에서 우리가 제기할 수 있는 비판은 들뢰즈는 어떤 ‘특정한 존재론’을 절대화시켜 다른 존재론적 입장을 무조건 잘못된 이론으로 몰아간다는 것이다. 필자는 존재론 혹은 자연철학 혹은 형이상학적 담론을 ‘직접적으로’ 정치, 사회철학에 적용하는 이론은 ‘특정한 세계관’을 직접적으로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성급한 정치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라깡은 ‘특정한’ 세계관을 특권화하는 이론이야말로 가장 이데올로기적일 수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다시 알튀세르에 대해 언급하자. 알튀세르는 유고에서 철학에 ‘공백’, 즉 빈공간‘을 도입한 사람들을 “철학에서의 진정한 유물론 전통”7)을 도입한 사람으로 간주하며 이러한 유물론을 도입한 사상가들을 다수 인용한다. 데모크리토스, 에피쿠로스, 마키아벨리, 홉스, 파스칼, 클라우제브츠, 칸트, 스피노자, 헤겔, 맑스, 레닌, 그람시, 데리다, 들뢰즈, 하이데거, 비트겐슈타인, 그리고 프로이트 등. 알튀세르는 유고의 여기저기에서 이들 모두를 유물론의 사상가로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비판을 가하기도 하면서) 스스럼없이 언급한다. 하지만  보통의 경우 사람들은 이들을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사상가로 간주하지 않는가? 어떻게 들뢰즈가 빈공간을 말하는 철학자일 수 있으며, 헤겔과 들뢰즈가 서로 양립할 수 있는가? 알튀세르의 이러한 논의 방식이 그의 철학적 무능력 혹은 혼합주의에서 기인한다고 섣불리 판단하지 말자. 관념론자이든 유물론자이든, 공산주의자이든 그렇지 않든지 상관없이 “자유”라는 “빈공간, 장애가 없는 공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개개의 코나투스의 전개”를, 그리고 “극단에서, 한계적 상황에서” 운[우연]과 공백을, “운의 공백 자체”를 “사고한 인물”8)은 알튀세르에게 모두 유물론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알튀세르의 ‘정치적 윤리학’이, ‘하나의 존재의 모습’, 즉 빈공간 없는 ‘충만한‘ 세계만을 허용하는 세계관을 기준으로 정치적 판단을 내리는 들뢰즈 철학과 달리 열린 태도를 취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제 여기에서 스피노자 철학과 정신분석(혹은 헤겔 철학)에 대한 알튀세르의 입장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다. 알튀세르의 입장은 현대 프랑스 철학의 흐름과 관련해 일종의 분수령을 이룬다. 잘 알려져 있듯이 알튀세르는 스피노자의 존재론과 헤겔 철학(혹은 정신분석) 사이에서 동요한 바 있다. 이러한 동요는 알튀세르가 맑스주의를 재정립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겪어야 했던 동요로서, 과연 맑스 철학이 스피노자를 경유해 완성될 수 있을 것인지 아니면 라깡(혹은 헤겔)을 통해 완성될 수 있을 것인지라는 질문에서 정점에 달한다. 알튀세르는 『맑스를 위하여』, 『자본론 읽기』등에서는 헤겔 철학이 단 하나의 모순만을 허용하는 목적론적 철학이므로 헤겔 철학의 관점에서는 ‘복잡한 전체’를 사고할 수 없다고 비판한 바 있다. 하지만 헤겔에 대한 알튀세르의 입장은『자기비판의 요소들』에서 변하기 시작하며 이와 더불어 스피노자 철학에 대해서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또한 『레닌과 철학』에서 알튀세르는 헤겔 논리학 서두에서 존재가 무로 이행하는 것에서 ‘기원이 스스로를 무화하는’ 비목적론적 철학을 읽어내며 이로써 헤겔 철학을 ’비목적론적으로‘ 해석해야 할 것을 촉구한다. 『자기비판의 요소들』에서 알튀세르는 스피노자 철학의 관점에서는 “모순”을 사유할 수 없으므로 “모순”을 사유할 수 있는 헤겔 철학은 맑스주의의 혁신을 위해 필요불가결한 철학임을 주장한다. 더 나아가 유고에서 알튀세르는 ’유물론적 전통‘ 속에 헤겔을 포함시킬 뿐만 아니라 맑스주의 창조적 재구성을 위해서 과거에 자신이 원용했던 정신분석의 타당성을 다시 한번 확인하며, (들뢰즈의) 스피노자로부터 거리를 둔다.9) 그러므로 자신의 이론적 작업을 다시 한번 총결산하는 ‘유고’에서 알튀세르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공산주의란 소비에트 더하기 전력화 더하기 정신분석이다’라고 한 우리 친구 자크 마르탱의 날카로운 말과 곧바로 만난다.”10)

   맑스주의의 재정립을 위해서는 모순 범주가 필요하다는 알튀세르의 언급은 사실 너무 당연한 말이어서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헤겔 철학에 대한 알튀세르의 재해석은 내용적으로 그다지 풍부하지 않으므로 과연 헤겔이 말하는 모순이 무엇이며 어떤 철학적, 실천적 의미를 갖는지 별개의 상세한 연구가 필요하며 이러한 작업은 현실에 대한 철학적 개입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은 헤겔 철학의 대안으로서 특히 초기에 스피노자 철학을 원용한 알튀세르에 의해 영향받은 알튀세르의 제자들(특히 마슈레) 그리고 들뢰즈의 영향으로 ‘모순’이라는 범주를 불필요하거나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국내의 프랑스 철학 연구자들 사이에 생겨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특히 헤겔 논리학에 대한 철저한 내재적 연구 없이 헤겔은 목적론을 주창한 형이상학자다라는 주장을 반복할 뿐이다(아마도 프랑스에 헤겔 연구자들의 수가 적다는 사실도 이러한 상황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들이 말하듯이 과연 스피노자 철학은 ‘무조건 좋은’ 철학이고 헤겔 철학은 ‘무조건 나쁜’ 철학인가? 하지만 알튀세르가 문제를 제기했듯이 스피노자의 철학은 ‘모순’을 사유할 수 없지 않은가? 사실 스피노자 철학에 따르면 ‘모순’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으며 반면 헤겔은 ‘모순’ 혹은 ‘부정성’을 본질적 범주로 간주한다. 이러한 입장의 차이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앞에서 언급했듯이 알튀세르는 ‘모순’ 범주에 우선성을 부여함으로써 다시 헤겔을 복원하려고 시도한다. 그렇다면 알튀세르에게 헤겔 철학은 보다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며, 스피노자 철학과 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알튀세르에게 헤겔과 스피노자 철학이 갖는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 본 논문은 알튀세르 맑시즘에서 스피노자와 헤겔 철학이 갖는 의미를 설명하고, 더나아가 모순 개념이 프랑스 현대철학에서 왜 중요한 쟁점이 되는지를 밝히고자 하며, 이를 바탕으로 정신분석이 알튀세르에서 갖는 의미를 재조명함으로써 단순한 정치철학으로서 알튀세르 맑시즘이 아니라 정치윤리학으로서의 알튀세르 철학의 의의를 재조명고자 하는 목표를 갖는다.


II. 알튀세르의 스피노자와 헤겔


1. 알튀세르의 ‘자기비판’의 의미


   특히 스피노자와 헤겔과 관련해 알튀세르의 맑시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1974년에 출간된『자기비판의 요소들』의 논의를 명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필자의 관점에 따르면 알튀세르는 『자기비판의 요소들』의 한 장인 「스피노자에 관하여」에서 자신의 과거의 오류를 스스로 지적하는 가운데 자신을 스피노자주의자였다고 선언한다. “우리는 스피노자주의자였다.”11) 이러한 선언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많은 논자들은 알튀세르의 이러한 선언을 알튀세르의 정신분석학과 헤겔 철학으로의 단절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국내외의 다수의 알튀세르주의자들은 ‘우리는 스피노자주의자였다’는 알튀세르의 이 언급을 과도하게 배타적으로 확대해석해, 알튀세르 이론은 스피노자주의적으로 설명되어야지 결코 정신분석, 그리고 헤겔 철학의 관점과 연결시켜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취하고자 하는 것이다.12) 뿐만 아니라 들뢰즈를 포함한 스피노자를 연구자들 역시 스피노자 철학의 우위를 주장하는 가운데 헤겔 철학이나 정신분석학을 보수적이고 무의미한 이론으로 ‘손쉽게’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알튀세르를 오직 스피노자의 관점에 의존해 해석하기 전에 알튀세르의 『자기비판의 요소들』에서의 “우리는 스피노자주의자였다”는 선언의 의미가 무엇인지 명확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알튀세르의 ‘자기비판’은 『자본론 읽기』, 『맑스를 위하여』 등 초기의 저작들에서 자신이 범한 과도한 이론주의, 합리주의를 비판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진리/오류라는 대립 속에서 사유한다는 것은 사실 합리주의적이다. 하지만 과학 자체(der Wissenschaft)와 이데올로기 자체(der Ideologie), 그리고 그것들의 차이에 관한 보편적 이론 속에서 받아들여진 진리/거부된 오류라는 대립을 사유하고자 하는 것은 사변(Spekulation)이다.”13) 그렇다면 보다 구체적으로 알튀세르가 과거에 범했다고 고백하는 합리주의, 그리고 사변주의의 내용은 보다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인식론적 단절(바슐라르)이라는 개념을 통해 과학적 맑스주의를 재구성하는 가운데 알튀세르가 범한 오류(더 정확히 말하면 편향)이다. 쉽게 말하면 맑스 철학의 ‘과학성’을 과도하게 강조한 나머지 과학과 이데올로기, 진리와 오류라는 이분법적 사고 속에서 맑스 철학을 재해석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합리주의적 편향을 범하던 시기에 알튀세르는 마치 맑스 철학은 ‘학문의 여왕’이며, 따라서 맑스주의 철학은 과학으로서의 맑스주의와 이데올로기로서의 부르주아 이론을 구분해주는 어떤 확고하고 영원한 준거점을 갖고 있다는 듯이 맑스주의 철학을 정의하는 편향을 범했다는 것이다. 알튀세르 스스로가 인정하고 있듯이 이는, 그가 거부하고자 했던 부르조아적 관념론 혹은 경험론의 관점에서 맑스철학을 재해석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이러한 관점은 『자기비판의 요소들』에서 수정된다. 과거에 알튀세르는 철학, 즉 유물론적 변증법을 “이론적 실천들의 이론”14)으로 정의했으나 이제 알튀세르는 자신의 새로운 관점에 따라 맑스주의 철학을 “실천에 관한 (새로운) 철학이 아니라 철학의 (새로운) 실천”15) 혹은 “이론에서의 계급투쟁”16), 이론에서의 정치”으로 정의한다. 물론 여전히 『자기비판의 요소들』에서 알튀세르는 자신이 스피노자에 철학에서 자신이 빌려온 내용 혹은 영감 받은 부분이 무엇인지 언급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목적론의 거부17), 둘째, 주체 이데올로기 비판(스피노자의 반데카르트주의)18), 셋째, 진리의 기준 제시라는 거짓 문제의식의 거부19), 넷째, 유명론자(Nominalist)로서의 스피노자20). 다섯째, 헤겔에게 알려지지 않은 변증법을 스피노자에게서 발견함.21)

   이 시기에 알튀세르가 헤겔에 대해 비판한 내용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하자. 사실 『자기비판의 요소들』에서의 알튀세르의 헤겔 비판은 그가 이전에 헤겔에 대해 비판했던 내용과 대동소이하다. 즉 당시의 알튀세르의 헤겔 비판은 사실 헤겔에 대한 엄밀한 연구에 근거한 것이라기보다는 당시 프랑스나 혹은 현재 혹은 과거 헤겔 철학에 대해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갖고 있는 의견(혹은 편견)과 일치하는 견해를 보여줄 뿐이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헤겔은 예컨대 목적론의 철학자이며, 헤겔 변증법은 “자기 자신의 질료를 생산하는 변증법”으로서 그것이 제시하는 논제는 “정확히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상응하는 논제이다. 헤겔 변증법은 “자본은 (자본가의) 노동에 의해 생산된다”22)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지지하는 이론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요컨대 헤겔 철학은 타자를 일자로 흡수하는 ‘동일성의 철학’이라는 것인데, 여기에서 우리는 정말 헤겔 철학을 반드시 그렇게 해석해야하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어쨌든 알튀세르에 따르면 반면 맑스주의의 변증법은 모든 것을 하나의 축으로 환원시키는 헤겔 변증법과 달리 “실재적 구분”을 가진 여러 영역들의 존재를 허용하며, 이를 사고하기 위해 토픽(Topik) 모델을 제시하는 반면 헤겔에게는 이러한 토픽 모델이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위의 토픽(심급)은 그것의 “진리”인 상위의 토픽(심급)으로 “지양”되기 때문이다. 알튀세르가 맑스주의의 혁신을 위해 스피노자에게서 발견한 내용들이 다름 아닌 헤겔에게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따라서 알튀세르는 이러한 스피노자의 입장에 따라 헤겔 철학을 비판했던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렇게 간단하지 않다. 헤겔을 비판하는 알튀세르가 경제결정론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독단적 관점에 빠진 것은 아닌지? 실제로 알튀세르는 경제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개념틀을 제공하는 맑스주의 변증법의 핵심적 내용으로 간주했던 중층결정과 관련해 “최종 심급의 고독한 순간은 오지 않는다”23)고 선언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항상 최종 심급에서는 경제가 결정한다는 경제결정론적 논제24)를 제시한다. 알튀세르의 이러한 모순적 언급은 알튀세르의 이론 전체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심각한 문제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최종 심급의 고독한 순간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경제 결정론에 대한 비판을 의미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튀세르는 또한 최종 심급에서는 경제가 결정한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각 심급의 상대적 자율성’을 인정하면서도 ‘최종심급에서의 경제에 의한 결정’을 어떻게 근거지울 수 있는가? 바로 여기에서 알튀세르는 스피노자 철학을 원용하며 “구조적 인과성”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이러한 인과성 개념은 라깡에 따르면 헤겔에게서 발견되지 않는 개념이기도 하다. 이제 이에 대해 살펴보자.

   우선 『자본론 읽기』에서의 알튀세르의 논의에 대해 언급해보자. 여기에서 알튀세르는 인과성에 대한 세 가지 모델에 대해 언급한다. 첫째 모델은 “이행적 인과성(transitive causality)”이고 두 번째는 표현적 인과성(exprsseve causality), 세 번 째 모델은 “구조적 인과성(structural causality)”25)이다. 이행적 인과성 모델은 갈릴레이와 데카르트에서 연원하는 것으로 이행적 인과성은 직선적 인과성을 의미한다. 쉽게 말하면 이는 당구공이 다른 당구공에 영향을 미치듯이 한 물체가 다른 물체에 대해 직선적 혹은 이행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인과성 개념을 의미한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기계적 체계는 이렇듯 인과성을 이행적 효과에 국한시키므로 전체가 그것(전체)의 요소에 미치는 효과를 사유할 수 없다.26) 반면 표현적 인과성은 전체의 요소들에 미치는 전체의 효과를 사유할 수 있도록 해준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표현적 인과성 개념은 라이프니츠에서 유래했으며 헤겔에 의해 차용되었고 헤겔 사유를 지배하는 사유체계이다. 표현적 인과성 개념은, 전체는 내적 본질로 환원되며, 부분의 요소들은 이 내적 본질의 현상적 형태들에 지나지 않는다고 가정한다. 그러므로 본질의 내적 원리는 전체의 각 지점(계기) 속에 현존한다. 즉 표현적 인과성 원리에 따르면 경제, 정치, 법, 문학, 종교 등 각 요소는 전체의 본질의 내적 원리와 동일하다. 전체는 전체의 부분으로서 각 요소들이 전체를 표현한다는 ‘정신적’ 특성을 갖는다. 요컨대 “라이프니츠와 헤겔은 요소들 혹은 부분들에 대한 전체의 효과(영향)이라는 범주를 사용했지만 이는 이 전체가 구조가 아니라는 조건 하에서였다.”27)

   그러므로 알튀세르는 표현적 인과성이 가정하는 통일성과는 다른 유형의 통일성을 가진 전체, 즉 구조지어진 전체를 사유할 수 있는 구조적 인과성 개념을 제시한다.  표현적 인과성 개념은 ‘구조에 의한 요소들의 결정’을 사유할 수 없으며, 따라서 그는 스피노자를 원용해 맑스의 인과성 개념을 설명할 것을 제안한다. 구조적 인과성이란 “그것[구조]의 효과 속에 구조가 존재함”, 달리 말하면 “효과는 구조의 외부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즉 “구조는 효과들 속에 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여기에서 알튀세르는 스피노자를 인용하며 “구조의 전체적 존재는 그것의 효과로 구성되어 있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구조적 인과성과 표현적 인과성의 차이는 무엇인가? 구조적 인과성에 대한 알튀세르의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표현적 인과성(그리고 이행적 인과성) 개념은 원인과 그것의 효과들이 서로 외재 적이라는 것을 함축하며, “현상과 본질 사이의 고전적 대립”에 근거하고 있다.28)

   하지만 스피노자로부터 원용한 구조적 인과성 개념으로써 알튀세르는 ‘각 심급들의 상대적 자율성’과 ‘최종 심급에서의 경제에 의한 결정’을 설명할 수 있는가? 사실 알튀세르는 단지 “구조는 경제적 현상 외부의 본질이 아니다”라는 말로써 경제적 심급에 대해서 언급할 뿐, ‘상대적 자율성’과 ‘최종 심급에서의 경제에 의한 결정’이라는 문제를 스피노자와 연관시켜 명확히 해결할 수 없었다. 이러한 문제를 스피노자의 존재론과 관련해 보다 명확히 언급한 곳은 「담론이론에 관한 세 메모」29)이다. 여기에서 알튀세르는 라캉이 단 하나의 보편이론(기표의 보편이론)만을 받아들이고 사적 유물론의 보편이론을 수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라캉을 환원주의적이라고 비판한다.30) 그리고  알튀세르는 라캉과 반대로 사적 유물론의 보편이론이 기표의 보편이론을 결정한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주장이 환원주의적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 자신의 주장은 결코 기표의 보편이론을 사적 유물론의 보편이론으로 포섭, 혹은 흡수하는 것은 아니라고 덧붙여 말한다.31) 여기에서 알튀세르는 자신의 주장이 환원주의적이지 않음을 설명하기 위해 스피노자의 존재론을 원용한다. “다양한 속성들은 단지 하나의 같은 실체의 속성들이다”32) 이러한 스피노자의 존재론에 근거해 알튀세르는 “정신분석학적 대상의 국지이론은 사적 유물론의 보편이론이 기표의 보편이론으로 특수하게 접합된다는 것을 보편이론으로 갖는다는 사실 속에서, 기표라는 속성과 역사라는 속성 사이의 변별적 접합의 존재의 사례 중 하나를 우리는 확증한다”33)고 말한다. 쉽게 말하면, 알튀세르에 따르면 라깡 정신분석의 핵심인 기표이론이라는 보편이론34)은 사적유물론이라는 보편이론에 접합(흡수)되는 것이 보편이론이라는 것인데, 이러한 주장은 물론 (경제결정론적 함의를 갖는) 사적 유물론이 모든 것을 다 설명하는 보편이론의 가치를 갖는다는 사실을 함축하는 주장이며 여기에서 우리는 알튀세르가 경제환원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35) 

   요컨대 우리는 여기에서 알튀세르가 말하는 기표라는 속성과 역사라는 속성 사이의 변별적 접합은 스피노자의 존재론에서의 속성들의 결합 방식과는 다르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스피노자에서 속성들은 서로 대등하지만, 알튀세르의 스피노자주의적 해석에서는 역사라는 속성이 기표라는 속성에 대해 우위를 갖는다. 알튀세르는 기표의 보편이론에로 사적 유물론의 보편이론이 특수하게 접합된다는 사실을 보편이론으로 간주하고 있지 않은가? 여기에서 알튀세르는 역사라는 속성을 기표라는 속성보다 우위에 놓고 있다. 이 점에서 그는 자신이 방금 인용한 스피노자 존재론을 잘못 적용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즉 알튀세르는 한 특정한 속성을 다른 속성의 우위에 둠으로써, 속성들간의 비환원적인 변별적 접합을 말하는 스피노자의 철학을 환원주의적 맑스주의의 관점으로 해석하고 있다다.

   다시 『자본론 읽기』의 논의로 되돌아가자. 여기에서 알튀세르의 스피노자주의적 맑스 해석은 인식대상과 실재대상의 구분 및 전자의 후자에 대한 우위이라는 논제로 등장한다. 알튀세르는 스피노자 철학을 원용해, 관념과 대상의 일치로서의 진리라는 “데카르트적 관념론의 독단적 경험론” 혹은 “헤겔의 혼동”을 극복하고자 한다. 이에 대해 다양한 인식론적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우리의 문맥에서 중요한 점만을 언급하면, 알튀세르는 스피노자 철학을 ‘실재 혹은 대상의 질서에 대한 관념의 질서의 우위’라는 논제로 재해석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알튀세르가 말하고 있듯이 맑스의 대상은 실재적 대상이 아니라 ‘사유 속에서 구성된 총체’라는 점에는 물론 필자도 동의하지만 문제는 알튀세르는 이렇게 구성된 관념들을 궁극적으로 맑스주의를 오류로부터 구분해주는 ‘진리의 기준’으로 작동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즉 “과학적 지식―즉 대상에 관한 개념인, 적합한 관념들의 체계―은 그 자체의 기준일 뿐만 아니라 또한 비과학적이거나 이데올로기적인 지식(즉 부적합한 관념들)의 기준이기도 하다.”36)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알튀세르는 스피노자 이론을 상상적인 것과 진리를 구분해주는 ‘기준’이 되는 이론으로 받아들인다.37) 이렇게 본다면, 알튀세르가 비록 『자기비판의 요소들』에서 스피노자 철학을 원용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진리의 기준 제시라는 거짓 문제의식의 거부”라고 말했지만, 사실 ‘본의 아니게’ 알튀세르에게 스피노자 철학은 ‘진리와 거짓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아이러니를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앞으로 다시 간략히 논의하겠지만 스피노자의 2종과 3종의 인식은 각각 이성과 직관을 통해 ‘필연적으로 진리인 지식’을 산출한다. 지금까지 논의에서 드러났듯이 초기 알튀세르에게 스피노자는 진리와 오류를 구분하는 기준을 제시하는 철학(혹은 최종심급에서의 경제결정론을 근거지워주는 철학)으로서 받아들여졌으며, 앞에서 언급했듯이 알튀세르는 『자기비판의 요소들』에서 자신의 이러한 합리주의적 혹은 사변주의적 편향을 스스로 비판했던 것이다.


2. 알튀세르의 새로운 헤겔과 스피노자


   이제 현대의 알튀세르 해석에서 논자들이 거의 주목하지 않는 ‘새로운 모습의 헤겔’에 대해 살펴보자. 필자가 아는 한 유고에서 비로소 등장한 새로운 헤겔 해석은 알튀세르 맑시즘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시해줄 수 있는 단초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자기비판의 요소들』에서 알튀세르는 자신이 스피노자주의자였음을 천명했다. 이러한 천명이 갖는 변별적 의미를 너무 축소(혹은 확대)해석해 알튀세르가 스스로를 헤겔 철학 혹은 정신분석에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오로지’ 스피노자 철학에만 영향 받았다는 ‘고백’으로 이것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우선 『자기비판의 요소들』에서 알튀세르는 자신의 기존의 헤겔 비판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내용을 다시 언급을 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알튀세르가 스피노자주의자였음을 선언하면서도 실제로는 스피노자와 거리를 두기 시작하며, 역으로 그가 오랫동안 비판해왔던 헤겔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서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러한 방향전환을 가능케 한 것이 다름 아닌 모순 범주이다. 알튀세르는 말한다. “맑스주의자는 물론 아무런 대가를 치루지 않고서는 스피노자를 통해 우회할 수 없다. 왜냐하면 모험은 위험하고, (....) 스피노자에게는 헤겔이 맑스에게 전달해준 어떤 것, 즉 모순[개념]이 항상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38) 이러한 작은 차이는 사소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알튀세르에게 헤겔이 사유하고자 했던 모순 범주는 ‘갈등의 학문’인 맑시즘의 재구성을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범주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알튀세르는 모순 범주를 강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비판’ 이전에는 ‘이데올로기 속에서의 계급투쟁’에 대해 논의하지 못하고 과학(학문)/이데올로기라는 대립항으로 사유하는 이론주의의 오류(편향)을 범했다고 스스로 비판했던 것이다.39)

   이제 여기에서 우리는 흥미로운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왜 모순범주를 무시한 것이 ‘이데올로기 에서의 계급투쟁’을 간과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알튀세르는 말하는가? 모순이 아니라 ‘차이’ 혹은 ‘긍정’만을 말하는 철학, 혹은 모순범주를 배척하는 철학은 자신도 모르게 진리를 완전히 알고 있다는 오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과학(학문)은 과학이고 이데올로기는 이데올로기라는 대립항으로만 사유하기 때문에 과학이 곧 이데올로기일 수 있다는 ‘모순적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알튀세르가 명확히 말하지는 않았지만 여기에서 우리는 알튀세르가, 스스로를 진리를 보증하는 과학이라고 자처하는 맑스주의는 이미 그 자체로 이데올로기이며, 진정한 맑스주의적 투쟁은 부르주와 이데올로기에 대한 투쟁에서뿐만 아니라 맑스주의 자체의 (상상적) 이데올로기와 투쟁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고 우리는 해석할 수 있다.

   알튀세르에 대한 이러한 필자의 해석은, 들뢰즈의 영향으로 ‘모순’이라는 범주를 불필요한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국내의 프랑스 철학 연구자들 사이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현대 프랑스 철학, 특히 들뢰즈 철학과 관련해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해준다. 여기에서 상세히 논의할 여유가 없으므로, 헤겔을 비판하는 입장을 취하는 현대 프랑스철학자의 논의 방식이 과연 적절한가라는 문제만을 제기하고자 한다. 이들은 특히 헤겔 논리학에 대한 철저한 내재적 연구 없이 헤겔은 목적론을 주창한 형이상학자다라는 주장을 반복할 뿐이다(아마도 프랑스에 헤겔 연구자들의 수가 적다는 사실도 이러한 상황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들이 말하듯이 과연 스피노자 철학은 ‘무조건 좋은’ 철학이고 헤겔 철학은 ‘무조건 나쁜’ 철학인가? 하지만 알튀세르가 문제를 제기했듯이 스피노자의 철학은 ‘모순’을 사유할 수 없지 않은가? 사실 스피노자와 들뢰즈에 따르면 ‘모순’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으며 반면 헤겔은 ‘모순’ 혹은 ‘부정성’을 본질적 범주로 간주한다. 이러한 입장의 차이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스피노자는 (절대적) 실체의 본질에 대한 해명을 시도하며, 헤겔 역시 절대자에 관한 변증법 철학이라는 점에서 모두 절대적 실체에 대한 철학적 설명에 관심을 갖는다. 그렇다면 이 두 사상가의 입장이 달라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필자는 (들뢰즈적) 스피노자의 철학은 ‘신의 관점’에서 사유하는 철학이며, 헤겔 철학은 비록 역시 절대적 실체에 관해 사고한다는 점에서 스피노자와 동일하지만 헤겔은 절대적 실체를 ‘인간의 관점’에서 사유하기 때문에 이러한 입장의 차이가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알기 쉽게 말하면, 스피노자 혹은 들뢰즈에게 ‘모순’ 범주가 존재할 수 없는 이유는 ‘신의 관점’, 즉 “영원의 관점”(스피노자)에서 사유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신이 보기에 인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양태나 개별적 존재 간의 관계는 연속적이거나 기껏해야 ‘차이’만이 있을 뿐이지 결코 모순일 수 없다. 신의 눈에 인간사의 대립이란 하찮은 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반면 ‘인간적 관점’에서 철학적 사유를 전개하는 사람에게는 모순은 본질적 범주일 수밖에 없다. 알기 쉬운 예를 들어보자. 포스트모더니스트들도 모순이 아니라 ‘차이’의 관점에서 사고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타자의 ‘다름’을 강조하는 입장을 취한다. 하지만 사실 이러한 입장은 집단 혹은 개체들간에 존재하는 진정한 (대립 혹은 억압의) 문제를 ‘은폐하는’ 이데올로기적 역할을 한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국내의 외국인 노동자들은 우리와는 ‘다른’ 사람들이다, 혹은 여자는 남자와 다르다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단순히 다르다고만 말할 때 생기는 문제는 이러한 사회적 약자들이 사회적 강자들에 의해 배척되고 억압당하고 있다는 것, 즉 사회적 강자와 대립 혹은 모순 관계에 있다는 것을 은폐할 수 있다는 위험이 있다. 하지만 반대로 헤겔은 『대논리학』에서 차이라는 범주가 어떻게 대립 범주, 그리고 더 나아가 모순 범주로 전개되는지를 서술한다. 단순히 차이라고 간주되는 것이 헤겔에 따르면 모순으로 규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가장 형이상학적이고 종교적인 철학이라고 비판받는 헤겔 철학에서 맑스가 요청했듯이 ‘형이상학적 외관’을 벗기고 나면 진정으로 유물론적이며 인간적인 철학의 모습이 들어날 수 있으며, 외관상 유물론적으로 보이는 스피노자 철학이 사실은 가장 ‘신학적’ 혹은 ‘전체주의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40)


III. 알튀세르와 헤겔, 그리고 들뢰즈


   사실 헤겔에게 모순이란 유한자에게만 귀속되며, 절대자는 모순적이지 않다. 왜 그러한가? 절대적 실체에게 모순이 귀속될 수 없다는 것은 어떻게 본다면 ‘동어반복적인’, 당연한 말이다. 어떻게 신이 모순을 가질 수 있겠는가? 이 점에서 스피노자와 헤겔 철학은 입장을 같이 한다. 헤겔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모순 그 자체가 인간 혹은 신이 추구하는 ‘목표’라는 ‘부정적인’ 논제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헤겔 철학은 이러한 모순을 극복한 긍정의 상태, 즉 절대자의 상태에 도달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스피노자와 마찬가지로 헤겔 역시 소외된 상태에서 소외를 극복한 상태41)로 진전해야 하는 인간의 윤리적, 정신적 과제에 대해 말한다. 헤겔에 따르면 이러한 소외를 극복하고 자기완성에 도달한 실체가 곧 주체이다. 헤겔이 말하는 실체는 자신의 내부에 부정성(즉 부정성은 들뢰즈가 말하듯이 초월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부정성(모순, 대립)을 이데올로기적으로 부인하고 ‘충만함’만을 강조하는 들뢰즈 철학의 실체와 달리 부정성과 더불어만 혹은 부정성을 ‘통과함으로써만’ 자신을 ‘긍정’할 수 있는 실체이며, 이러한 존재론적 속성을 갖는 실체가 다름 아닌 주체라는 것이다.

   헤겔의 모순 개념과 관련해 이 맥락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에 대해 좀더 언급해보자. 헤겔은  ‘모순적인 것은 존재할 수 없다고 비판한 올레르트(Ohlert)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저자[올레르트]에게 세계, 자연, 그리고 행위와 충동(Treiben) 속에, 그리고 인간 사유 속에 아직 모순이 제시되지 않을 때, 자신 스스로와 모순되는 존재자들이 제시되지 않을 때 그는 행복하게도 칭송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모순은 스스로를 지양한다고 옳게 말한다. 하지만 이로부터, ‘모순이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결론이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오류와 마찬가지로 모든 범죄, 아니 모든 유한한 존재와 사유는 모순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렇게 말해야 한다. 모순―하지만 스스로를 지양하는 모순―이 그 속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42)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헤겔은 모든 유한한 존재는 모순을 갖고 있으며, 이 모순은 모순이기 때문에 해소되고, 스스로를 지양해야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헤겔이 모순에 대해 말할 때 비합리적으로, ‘이것은 연필이며 연필이 아니다’라는 비합리적인 모순적 언표를 무조건 옳은 명제라고 주장하고자 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한 한에서 헤겔 역시 모순률을 인정하는 철학자이다. 하지만 형식논리학적 관점만을 취하는 철학자와 달리 헤겔은 모든 유한한 존재 혹은 범주는 그 자체가 모순적이라는 사실을 지적한다는 점에서 형식논리학을 넘어선다. 헤겔이 오성적 사유라고 비판하는 형식 논리적 사유에 따르면 어떤 주어진 사태 혹은 범주 혹은 존재는 결코 모순적일 수 없다. 하지만 헤겔은 오성적 사유가 불변의 것으로 간주하는 범주 혹은 이 범주에 의해 규정된 존재자는 범주 자체의 불완전성으로 인해 그 반대의 것으로 규정될 수 있다. 예컨대 A=A라는 언표는 형식논리적으로 본다면 긍정 명제이지만, 사실 동어반복적 언표에 지나지 않으므로 A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해주는 것이 없다는 의미에서 A=-A이라는 부정적 명제를 내포하고 있다. 다른 예를 들면, (순수)존재는 어떤 규정성도 갖고 있지 않으므로 (순수)무라고 말해도 역시 마찬가지로 옳은 말이다. 헤겔이 『대논리학』의 서두에서 “순수존재순수무는 동일한 것이다”43)라고 말할 수 있던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헤겔의 모순 개념은 어떤 특정한, 미리 주어진 범주를 영원불변의 것으로 간주하는, 혹은 어떤 주어진 범주의 의미가 처음부터 완전히 고정된 확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오성적 사유, 혹은 이데올로기적 사유를 비판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무한한 절대자에서는 모순이 해소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글의 논지와 관련해 중요한 점 몇 가지를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유한자는 어떤 모순적인 규정과 대립하고 이러한 모순적 규정을 견딜 수 없으므로 이를 배제하고자 한다. 하지만 헤겔이 말하듯이 어떤 규정은 그 반대의 것과 무조건적으로 일치하므로 사실 그 모순적인 규정은 유한한 존재 자신의 규정이기도 하다. 예컨대 인간과 비인간은 서로 모순되는 규정이지만, 사실 인간은 동시에 비인간적인 존재이기도 하므로 그러한 의미에서 인간과 비인간이라는 규정은 일치한다(같은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또한 자신 속의 비인간을 배제하고자 한다. 헤겔이 말하는 모순이란 이렇듯 궁극적으로 동일한 것이지만 이 동일한 양규정이 서로를 배제한다는 것, 혹은 역으로 모순되는 규정은 서로를 배제하지만 사실은 동일한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하지만 무한한 절대자는 ‘정의상’ 모든 것을 자신 속에 포함하고 있다. 이 무한한 절대자는 모순과 배타성, 갈등으로 얼룩진 유한성을 극복해 자기완성에 도달한 실체이어야 하므로 이 절대자는 서로 모순적인 규정들이 빠져 있는 모순의 상태에서 벗어나도록 함으로써 ‘화해’에 도달한다. 그렇다면 서로 모순적인 규정들이 어떻게 ‘화해’할 수 있는가? 무한한 실체, 즉 절대 이념 혹은 신은 자신과 대립 혹은 모순 관계에 놓여 있는 타자성을 자신이 스스로 산출해낸 타자로 인식함으로써 타자와 대립(모순) 없는 화해에 도달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타자조차 자신이 산출한 것이라는 인식에 도달함으로써 유한한 주체는 절대적 주체, 즉 개념(Begriff)이 된다는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헤겔의 『대논리학』은 존재론, 본질론, 개념론으로 구분된다. 대논리학의 마지막 부분인 개념은 다름 아닌 모순과 대립, 유한성을 극복한 존재, 절대적 실체(즉 주체)를 의미한다. “이러한 완성은 더 이상 실체 자체로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좀더 고차원적인 것, 다시 말해서 개념이며, 주관, 주체인 것이다.”44) 완성된 주체(실체로서의 주체)는 앞에서 말했듯이 자신의 타자(다른 주체 혹은 실체)를 스스로 산출한 것으로 인식하는 절대자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서로 대립하고 있는 두 실체가 서로를 자신 스스로가 산출한 타자로 인식할 때 모순이 극복되어 개념의 단계에 도달한다. 헤겔은 말한다. “그리하여 개념 속에서는 자유의 왕국이 열리게 된 것이다. 여기서 개념이 곧 자유의 왕국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실체의 필연성을 이루는 즉자대자적 동일성이 동시에 지양된 것이면서 또 피정립성, 피정립태로서 있는가하면 다시금 이 피정립성마저도 어느덧 자기자신과 관계한다는 점에서 바로 이 동일성과 다름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럼으로써 인과관계 속에 놓여 있던 두 실체 상호간의 애매하고 복잡한 성격은 사라지게 되는 바, 왜냐하면 각기 독자적으로 존립해 있던 두 실체의 근원성은 이제 다같이 피정립태로 이행함으로써 그 불투명했던 근원성이 자기자신을 투명하게 드러내주는 명료함을 지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제 근원적 사상(事象)은 오직 이것이 다름아닌 자기자신의 원인, 자기원인이라는 점에서만 근원적 사상일 수가 있으니, 또한 이것이야말로가 스스로가 개념으로 해방된 실체이기도 한 것이다.”45)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대립하는 실체 각각이 자신을 단순히 무조건적 일자(동일성)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즉자대자적 동일성이 지양된 것”으로 파악하며, 동시에 자신을 피정립성―타자에 의해 정립되어 있음―으로 파악할 때 개념으로의 이행이 시작된다. 달리 말하면 각 실체가 자신의 피정립성―타자에 의해 정립되어 있음―을 자기자신의 정립으로 파악할 때, 즉 “피정립성마저도 자기자신과 관계한다는 점”을 파악할 때 각 실체는 자신이 ‘결여’하고 있는 “동일성”을 다시 획득하고 자기원인으로서의 개념, 즉 절대적 실체가 됨으로써 자신을 긍정한다. 달리 말하면 두 개의 실체가 있다고 할 때 각 실체가 자신의 타자를 독립적인 것으로 간주하면서도 자신이 정립한 것으로 상호 승인함으로써 자신의 타자와 더 이상 대립하지 않을 때, 즉 이렇게 모순을 극복하고 ‘화해’함으로써 각 실체는 자신의 타자와 더불어 절대적 실체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왜 「본질론」의 말미에서 논의된 바 있는 상호작용이라는 범주에서 개념으로의 이행이 일어나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상호작용하는 두 실체 각각이 서로의 원인이며 결과라는 것이라는 사실을 함축하는 상호작용이라는 범주는 두 실체의 독립성을 인정하면서도 서로가 서로의 원인이며 결과라는 관계성을 동시에 사유할 수 있게 한다. 이렇듯 개념은 일자와 타자와의 모순을 해소하고 타자를 자신의 산출물이며 동시에 독립적인 실체로 인정하는 새로운 관계성을 형성한 실체이다. 달리 말하면 개별적 실체는 독자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했으나 궁극적으로 각 개별적 실체들은 타자(다른 실체)와 절대적 관계성 속에 있다는 새로운 인식을 통해 개념, 즉 절대적 실체(주체)으로의 이행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헤겔에서 절대적 실체, 신이란 초월적으로 피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논의한 바 있는 새로운 관계성에 도달하고 이를 인식하고 실천하는 개별적 실체(주체)이며, 이러한 개별적 실체(주체)가 곧 절대적 실체(개념)이다. 이제 여기에서 우리는 비로소 개별자는 곧 보편자라는 헤겔의 논제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헤겔 철학은 개별자를 보편자로 흡수한다고 말하지만 사실 지금까지 논의했듯이 헤겔은 『대논리학』에서 어떻게 개별적 실체가 보편자로서의 위치를 취할 수 있는가를 설명하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유한한 인간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전지전능한 신이 된다는 의미, 혹은 보편적인 신이 개별적 인간을 자신에게로 흡수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타자와의 새로운 관계 설정과 이에 대한 인식,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러한 인식에서 유래하는, 아니 이러한 인식을 발생시키는 (타자에 대한) 윤리적 태도를 통해 개별자는 보편자(신)가 된다는 의미에서 헤겔 철학은 개별자를 중시하는 철학으로 해석해야 한다. 

   셋째,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들뢰즈의 헤겔 비판이 정당하지 못함을 볼 수 있다. 들뢰즈는 헤겔 변증법은 두 개의 규정을 ‘배타적’ 관계로 파악하는 이접적 종합(disjuctive synthese)만을 알고 있다고 비판하지만46), 들뢰즈의 이러한 비판은 헤겔의 논의를 전적으로 오해하고 있는 잘못된 비판이다. 왜냐하면 앞에서 언급했듯이 헤겔은 서로 동일하면서도 배타적인 두 규정이 배타적, 모순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공존하는 상태인 개념으로 이행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접적 종합’의 배타적 사용을 넘어서서 “포함적인‘ 관계로서의 이접적 종합으로 나아가야 할 것을 먼저 주장했던 사람은 들뢰즈가 아니라 헤겔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여기에서 오히려 모순 범주를 부정하는 들뢰즈 철학의 한계가 드러난다. 모순 범주는 각 규정들이 동일하면서도 서로 배타적일 것을 요구하는데, 들뢰즈는 모순 범주를 인정하지 않으므로 그에게는 현대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갈등과 투쟁, 모순적 상황을 분석할 수 있는 개념적 도구가 존재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들뢰즈는 모순이 아니라 차이 범주만을 인정하므로 서로 대립하는 현실적 갈등 상황을 무시한 채 ’막연한 공존‘을 이야기하는 현실순응적, 관념론적 견해와 일맥상통할 수 있다. 반면 헤겔은 모순들이 존재하는 상황과 이것들이 극복된 상황을 모두 이야기한다. 헤겔은 모순과 대립이 존재하는 상황, 그리고 서로 대립할 수도 있는 규정들을 공존, 화해시키는 절대자 개념 양자 모두를 제시함으로써 들뢰즈 철학의 은폐된 관념론을 능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넷째, 앞에서 말했듯이 유한자에서 무한한 실체(주체), 즉 절대이념으로의 이행은 따라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전지전능한 신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무한한 절대적 주체(실체)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타자를 독립된 주체이며 동시에 자기의 산출물로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헤겔 철학이 타자를 일자로 흡수하는 동일성의 철학이 아니다. 주체와 타자 사이의 상호승인이 발생함으로써 개념으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어떤 새로운 특별한 ‘지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개념으로의 이행은 어떤 실정적인 내용을 덧붙여 절대적 지식을 소유한 주체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실체가 자신의 타자와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의 획득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면 자기원인으로서의 개념은 ‘독립적인’ 타자의 타자성을 능동적으로 긍정한다는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절대적 주체는 자신의 진정한 타자를 스스로 산출하는 무한한 자기운동성 그 자체에 다름 아니며, 이러한 무한한 운동을 통해 자신을 긍정하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헤겔에 따르면 “타자 속에서의 자기 자신과의 이러한 동일성이야 말로 유한성의 실제적 부정, 즉 무한성이다.”47) 또한 언급해야 할 중요한 것으로서, 들뢰즈는 헤겔은 부정과 결여만을 알고 있는 부정 신학에 불과한 것으로 끊임없이 묘사하고 있지만, 사실 헤겔은 부정만을 말하는 철학자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유한자는 모순과 대립 때문에 자신은 물론 타자도 긍정하지 못하는 부정의 상태에 처해있다고 할 수 있지만 이 대립과 모순을 극복한 무한자의 상태에서 실체(주체)는 자신과 타자를 긍정하는 긍정의 상태로 이행한다는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모순은 유한자에게만 적용되고 따라서 모순 상태를 벗어난 무한자는 모순 개념이 함축하고 있는 규정들의 ‘상호배척’ 상태를 벗어나므로 절대자에게서는 각 규정들이 서로를 승인하는 긍정의 상태에 도달하며, 이를 통해 절대자 자신도 자신을 긍정한다. 헤겔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어떤 것(Etwas)의 타자로의 이행에서 그것[어떤 것]은 단지 자기 자신과 일치하며, 이행과 타자 속에서의 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진정한 무한성(wahrharfte Unendlichkeit)이다.”48) 진정한 무한자의 내부에 존재하는 어떤 것은 물론 자기 자신[어떤 것]과 일치한다(A=A). 그리고 그것[어떤 것]이 타자로 이행해도 자기 자신[어떤 것]과 관계한다(A=B. 하지만 A=B는 곧 A=A이기도 하다). 어떻게 이러한 논리가 가능한가? 어떤 것이 진정한 무한자가 될 때 이것이 가능해진다. 무한자는 외부를 갖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한 계기(어떤 것]이 타자가 되어도 그것은 곧 자기 자신과의 관계인 것이다. 어떤 것과 타자의 관계는 곧 진정한 무한자의 자기 관계이며, 이러한 자기 관계에 도달함으로써 절대자는 (그리고 절대자 내부의 각 계기는) 이제 자기 자신을 긍정한다. “무한자는 긍정적인 것이며, 단지 유한자만이 지양된 것이다.”49)

   다섯째. 그러나 여기에서 지적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점이 있다. 헤겔이 말하는 긍정은 들뢰즈가 말하는 긍정과 달리 결여를 인정하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긍정이라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절대자란, 타자와의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그 타자를 자신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는 절대자의 상태이다. 헤겔 철학이 말하는 긍정의 상태는 차이, 즉 결여를 함축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들뢰즈는 헤겔이 부정성, 차이 혹은 결여라는 개념을 사용한다는 이유만으로 헤겔 철학을 목적론적 철학, 부정신학의 변종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과연 헤겔 철학이 그런 철학에 불과한가? 소위 부정신학에서는 모든 존재가 지향하는 완벽한 실체(신)가 있고, 모든 불완전한(결여를 가진) 존재자는 이 완벽한 존재자를 지향한다고 말한다. 이에 따르면 또한 이 완벽한 존재자는 유한한 존재자의 인식 범위를 벗어나 있으므로 완벽한 존재자는 부정적으로만 정의된다. 그리고 유한한 존재자는 불완전하므로 결여를 가지고 있다. 결여를 가진 이 불완전한 존재는 완벽한, 하지만 부정적으로만 정의된 이 완벽한 존재(신)을 추구한다. 따라서 부정신학에 따르면 신은 영원이 도달될 수 없으므로 인간의 결여는 영원히 만족될 수 없으며, 이러한 인간은 패배주의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부정신학에 대한 들뢰즈의 이러한 비판은 물론 타당한 것이고 이러한 비판은 비단 들뢰즈가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행하는 비판이기도 하다. 문제는 헤겔 철학이 부정신학의 일종으로 간주할 수 있는가라는 점이다.

   우선 헤겔의 절대자는 유한자 외부에 있어 유한자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피안에 있는 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무한자를 헤겔은 악무한(惡無限, Schlechte Unendlichkeit)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헤겔은 유한자가 절대자 내부에 포함되어 있는 무한자를 진정한 무한자(진무한)로 간주한다. 이러한 헤겔의 논의는 이미 부정신학에 대한 비판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는 절대적 실체는 무조건적으로 자신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결여, 즉 타자와의 차이긍정함으로써 자신긍정한다. 바로 이것이 헤겔 철학이 갖고 있는 장점이다. 절대적 실체는 차이, 부정성 없이 ‘모든 암소들이 검게 보이는 밤’이 아니다. 하지만 들뢰즈 역시 차이를 말하는 철학자가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뢰즈가 말하는 차이가 과연 헤겔이 말하는 의미의 차이와 같은 것인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여기에서 들뢰즈가 말하는 차이가 무엇인지 문헌학적으로 모두 정리하기란 불가능하며, 이 맥락에서는 그러한 작업이 그다지 필요해 보이지도 않는다. 우리는 들뢰즈의 헤겔 비판 그리고 라깡 비판에서 그가 말하는 차이가 무엇인지 ‘증상적으로’ 추론해볼 수 있다. 결국 들뢰즈가 말하는 차이란 연속성 속에서의 차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왜 들뢰즈가 진정한 단절 혹은 차이를 도입하는 상징계를 거부하고 실재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했겠는가? 하지만 들뢰즈와 달리 진정한 단절, 차이를 강조하는 라깡에게 상징계는 없어서는 안 될 본질적 범주이다. 이를 헤겔식으로 표현하면 실체(즉 실재)는 자신의 완성에 도달하기 위해 스스로 자신의 ‘내부’에서 내적 분화와 단절을 경유해야 한다(상징화). 실재(실체)는 이러한 내적 분화와 단절을 경유하고, 모순과 대립을 극복한 후 자신을 절대적 실체로 긍정하고 진정한 주체가 된다. 이렇듯 헤겔 철학은 실체의 주체화 과정에 대한 서술에 다름 아니다. “긍극적 진리는 실체로서뿐만이 아니라 이에 못지않게 주체로 파악되어야만 하며 또한 그와같이 표현되어야 하리라는 것이다.”50) 이렇게 본다면 헤겔이 말하는 부정성, 혹은 결여는 주체가 불만족과 결핍의 상태에서 자족해야 한다는 보수적이거나 패배주의적 견해를 함축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가 진정한 주체가 되기 위해 가져야 할 ‘초연’의 상태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알튀세르는 이를 은유적으로 ‘자유의 빈 공간’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그렇다면 주체를 진정한 주체로 만드는 결여를 병리적 주체의 결여와 구분해야 할 것이다. 예컨대 라깡에 따르면 불만족으로서의 결핍 자체를 향유하는 주체가 다름 아닌 신경증자로서 우리는 이러한 결여는 분석의 끝에서 주체가 발견하는 결여(결여의 기표)51), 혹은 모순을 극복한 절대자가 포함하고 있는 차이(헤겔), 혹은 자유의 빈공간(알튀세르) 등과는 구분해야 한다. 들뢰즈는 주체의 ‘자유의 빈 공간으로서의 결여’ 개념을 주체를 소외시키는 결여와 구분하지 않은 채 헤겔 철학 혹은 라깡 정신분석 해석하는 오류를 범했던 것이다.


IV. 알튀세르와 정신분석, 그리고 스피노자


   이제 마지막으로 스피노자의 3종의 인식에 대한 알튀세르의 해석을 살펴보자. 필자는 앞에서 알튀세르는 점차적으로 스피노자로부터 멀어지고 헤겔 철학에 다가서고 있다는 알튀세르 해석론을 제시한 바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알튀세르가 스피노자를 배제한 채 헤겔만을 중시했다는 의미가 아님은 물론이다. 중요한 점은 알튀세르는 스피노자 철학의 근본 사상을 계속 받아들이면서도 스피노자 철학에서 가장 논란의 여지가 많은 ‘3종의 인식’ 개념을 해석함에 있어 헤겔 철학으로부터 영감을 얻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서전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에서 알튀세르는 이렇게 말한다. “특히 나는 『신학정치론』에서 ‘세 번째 유형의 인식, 즉 개별적인 동시에 보편적인 대상을 파악하게 하는 가장 높은 형태의 인식에 대한 가장 명백한, 그러나 가장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해석의 예를 발견했다(나도 인정해야 했듯이 그것은 스피노자에 대한 헤겔적인 해석이었다).”52)

   스피노자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과 달리 알튀세르가 스피노자에게서 발견한 것은 다름 아닌 “공백”이었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스피노자가 말하는 신(절대적 실체)에 대한 최고의 인식(3종의 인식)은 신에 대한 ‘충만한’, ‘완벽한’ 인식이 아니다. 신은 “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는 그것 (....) 실존하면서 그 자체가 아무것도 아닌 것53)이다. 알튀세르는 또 이렇게 말한다. “‘나는 신에서 시작한다’고 또는 전체(le Tout)에서 또는 유일독특한(unique) 실체에서 시작한다고 말하는 것과 ‘나는 그 어느 것에서도 시작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것은 결국 동일한 것이다. 전체와 아무것도 아닌 것(rien)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전체 외부에는 아무것도 실존하지 않는 것이니 말이다.”54) 여기에서 우리는 신에 대한 최고의 인식에 대한 해석이 헤겔적 해석이라는 알튀세르의 언급이 적확한 표현임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헤겔에서 (존재) 전체란 곧 무에 지나지 않으며, 외부가 없는 신은 헤겔의 진무한을 연상시키지 않는가? 알튀세르의 흥미로운 스피노자 해석은 계속된다. “우리는 연장과 사유라는 두 속성만을 인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사유에 대하여 욕망에 의해 사유되지 않은 그 역능을 인식하지 못하듯이 신체에 대하여 그 모든 역능들을 인식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알튀세르는 이러한 언급을 통해 스피노자에 대한 ‘독단주의적 해석’, 즉 실체를 ‘완전하게’ 알수 있다는 ‘합리주의적 해석’으로부터 거리를 취하며, 오히려 ‘인식의 한계’에 관한 이론을 스피노자에게서 발견한다. 그러므로 “이 자연[신]은 이제 더 이상 신에 대해 말할 일이 없도록 만들 뿐만 아니다.” 물론 이러한 알튀세르의 언급이 단순한 ‘회의주의적 혹은 불가지론적 태도’가 아님은 분명하다. 알튀세르가 스피노자 철학과 실체에서 ‘무’와 ‘공백’을 발견함으로써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진리를 보증하는 인식론 혹은 목적론에 대한 비판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알튀세르는 이 점에서 스피노자와 헤겔 철학을 연결시킨다. “스피노자에게는 ‘코기토’가 없고 (....) 헤겔에게는 선험적 주체가 아니라 과정으로서의 주체가 있다(나는 그의 (내재적 목적론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스피노자에게는 인식 이론(즉 진리와 그 과학적, 사회적, 도덕적, 정치적 효과에 대한 선험적 보증)이 없었고, 헤겔에게도 인식 이론은 없었다. (...) 스피노자와 헤겔은 가능한 진리의 모든 지각 또는 모든 경험의 보증 또는 기반으로서의 초험적 또는 선험적 주체성이라는 환상의 정신을 제거하기에 이르렀다.”55)

   그렇다면 “신에 대한 직관적 인식‘을 의미하는, 스피노자가 말하는 제3종의 인식을 알튀세르는 어떻게 해석하는가? 우선 스피노자가 말하는 1종의 인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감각을 통하여 손상되고 혼란스럽고 무질서하게 지성에 나타나는“56) 상상, 즉 ”의견 또는 표상“이다. 알튀세르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제1종의 인식은 “1)(인간) 주체를 모든 지각과 행동, 목표, 그리고 의미의 중심과 기원에 두지만, 2) 바로 그렇게 함으로써 사물의 실제 질서를 전도시킨다. (...) 즉 원인을 목적으로 전도시키는 하나의 장치”에 지나지 않는다. “상상의 세계는 원인들을 목적들로 전도시키는 장치 속에서 체험된 생활세계이다. 그것은 주체성의 환상의 원인들을 목적으로 전도시키는 장치이다.”57)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알튀세르는 혼란스러운 억견, 직접적으로 체험된 세계에 대한 인식(즉 상상)인 제1종의 인식에서 기원과 목적을 말하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핵심 개념인 주체 개념을 발견한다. 2종의 인식은 “사물의 성질에 대하여 공통 관념과 타당한 관념을 소유하는 것으로부터” 나온다. “그리고 나는 이것을 이성 그리고 제2종의 인식이라고 부를 것이다.”58) “이 두 가지 종류의 인식 이외에 내가 다음에 제시하게 될 또 다른 세 번째의 것이 있는데, 이것을 우리는 직관지라고 부르게 될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인식은 신의 한두 가지 속성인 형상적 본질의 타당한 관념에서 사물의 본질의 타당한 인식으로 나아간다.”59) 바로 이것이 제3종의 인식이다.

   이제 여기에서 알튀세르는 통상적인 스피노자와 상이한, 헤겔주의적 해석을 제시한다. “‘3종의 인식’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결코 새로운 대상이 아니라 단순히 제1종의 인식 이후 항상-이미 거기에 있는 대상의 영유관계의 새로운 형태”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두 번째와 세 번째 종류의 인식은 필연적으로 참이다.”60) 하지만 알튀세르는 제3종의 인식이 의미하는 것이 스피노자 철학에서 분명하지 않다고 반론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제3종의 인식을 소유함으로써 우리는 신의 본질에 대한 타당한 관념에서 사물의 본질의 타당한 인식으로 나아간다고 말하고 있지만 과연 유한한 인간이 신의 본질에 대한 타당한 관념을 소유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라는 반론인 것이다. 이러한 ‘독단주의적’ 혹은 ‘합리주의적’ 해석을 거부하고 알튀세르는 제3종의 인식이란 “보편적 개별성”61)에 대한 직관으로 이르는 이행으로 설명한다. 왜냐하면 알튀세르에 따르면 “이해하기 힘든, 유명하지만 모호한 ‘제3종의 인식”, 이 직관적 인식에 대해서는 어떤 구체적 예도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62) 그러므로 알튀세르는 제3종의 인식을 개별적이면서 동시에 보편적인 것의 존재에 대한 직관, 즉 “상상이라는 생활세계 속에서 보편적이고 개별적인 개체성”63)에 대한 인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러한 알튀세르의 해석은 상상이라는 생활세계, 즉 주체와 목적, 기원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총체성으로서의 상상계에 균열을 야기하는 상징계, 혹은 실재 개념(라깡)을 연상시키지 않는가? 알튀세르가 위 인용문에서 말하고 있듯이 제3종의 인식이란 “상상이라는 생활세계 속에” 있는 진정한 존재자, 즉 상상계적 일관성에 균열을 가하는 보편적인 개별성에 대한 인식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에서 알튀세르의 스피노자 해석은 들뢰즈의 스피노자 해석과 달라진다. 들뢰즈 역시 3종의 인식을 신에 대한 ‘총체적 인식’, ‘합리주의적’ 인식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64) 그러므로 들뢰즈는 신에 대한 3종의 인식을 윤리적 관점에서 해석할 것을 촉구하지만 들뢰즈의 스피노자 해석은 ‘궁극적으로’ 신에 대한 총체적 인식의 관점을 취한다. 들뢰즈에 따르면 “2종의 인식은 [공통 개념에 근거하므로] 특징적 관계들의 합성에까지 상승한다.” 하지만 “3종 인식만이 영원한 본질들에 관련된다. 신의 본질에 대한 인식과 신 안에 존재하는 신에 의해 사고되는 특수한 본질에 대한 인식 (...) 말이다.”65) 3종 인식에 의존하는 “3종의 기쁨들은 우리 자신의 본질에 의해 설명되며, 언제나 그 본질에 대한 적실한 관념을 ‘수반한다’. 다른 모든 사물들의 본질과 신의 본질을 포함하여 3종으로 우리가 이해하는 모든 것을, 우리는 우리가 우리의 본질을 영원성의 형태로 사고한다는 사실로부터 이해한다.”66) 들뢰즈에 따르면 우리가 우리의 본질에 대한 적실한 관념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본질을 “영원성의 형태로” 사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들뢰즈는 스피노자 철학을 통해 인간으로 하여금 영원의 관점, 즉 신의 관점을 취하도록 이끌어간다. 유고에서의 알튀세르는 이러한 ‘합리주의적’ 스피노자 해석과 거리를 취하기 위해 헤겔을 다시 원용하는데, 알튀세르가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러한 알튀세르의 해석은 라깡이 말하는 분석의 끝, 즉 대타자의 비존재, 또는 대타자 속의 결여의 기표에 대한 인식과 일맥상통하는 개념이다. 제3종의 인식을 말했던 알튀세르가, “원인도 없고 호소할 수도 없는 상실들”67)과 같은 표현을 사용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비록 알튀세르는 이러한 표현을 말브랑슈를 읽을 때 생각해냈다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 그것은 라깡이 즐겨 사용하던 개념 아닌가? 물론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알튀세르가 스피노자를 완전히 떠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알튀세르가 “나는 스피노자와 결별하지 않았다”68)말하고 있듯이 말이다. 하지만 또한 알튀세르는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나는 내 환상을 거치고, 스피노자와 마키아벨리를 거쳐서 내 첫째가는 관심사가 아니었던 적이 없던 프로이트와 맑스에게로 힘들게 나아갔다.”69)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맑스주의와 정신분석을 결합하고자 하는 것이 자신의 오랜 학문적, 실천적 과제였음을 최종적으로 밝힌다. 스피노자와 헤겔, 혹은 스피노자와 정신분석을 대립시켜 사유하고자 하는 현대 프랑스 철학의 어떤 경향과는 철저히 다른 사유 방식을 취하고 있음을 우리는 여기에서 다시 한번 확인한다.70)   

   여기에서 언급할 만한 또 하나의 흥미로운 것은 알튀세르는 제3종의 인식에 대해서 “‘3종의 인식’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결코 새로운 대상이 아니라 단순히 제1종의 인식 이후 항상-이미 거기에 있는 대상의 영유관계의 새로운 형태”라고 말하고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언급 역시 신에 대한 지적 직관에 신의 본질에 대한 총체적 지식을 제공해주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미 이데올로기적으로 파악되던 세계와 신에 대한 관점의 전환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관점의 전환이란 정신분석치료의 핵심으로 알튀세르는 이렇게 말한다. “스피노자의 경우에 감정들의 제어는 감정들의 부정적 효능의 ‘지적’ 해방으로 해석될 수 없다. 반대로 감정들의 제어란 ‘슬픈 감정’으로부터 ‘즐거운 감정’으로의 내적인 전위를 통하여 감정들이 서로 결합하여 하늘에 오르기라도 하는 것과 같은 좋은 감정으로 됨으로써 이루어진다. 나중에 프로이트의 경우에 어떤 환상도 결코 사라지지는 않지만 지배적 지위에서 종속적 지위로 전위되는 것―이것이 치료의 효과이다― 처럼, 마찬가지로 스피노자의 경우에도 어떤 감정도 결코 사라지지는 않지만 ‘슬픈’ 지위에서 ‘즐거운’ 지위로 전위된다.”71) 여기에서 상세히 논할 수는 없지만, 그리고 라깡이 말하는 정신분석의 끝에 대해 보다 상세한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여기에서 우리는 적어도 스피노자가 말하는 제3종의 인식이 정신분석이 말하는 분석의 끝과 상통한다는 것을 알튀세르가 긍정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알튀세르가 말하듯이 ‘공산주의란 소비에트 더하기 전력화 더하기 정신분석인 것이다.’

   또한 역시 상세히 논할 여유는 없지만 알튀세르는 정치적 지도자, 혹은 혁명가가 취해야 할 위치를 분석가의 위치와 같은 것으로 본다는 사실이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군주’는 “자신으로부터의 거리, 자신의 욕망들과 욕동들과 충동들로부터의, 따라서 그 시대의 언어를 쓰자면, 감정들로부터의 거리72)를 취해야 한다. 달리 말하면 지도자는 자신의 “역전이”73)를 잘 통제해야 한다는 것인데 바로 이것이 분석가가 취해야 할 태도 혹은 위치가 아닌가? 알튀세르가 스스로 “우스꽝스러운 논문”이라고 불렀던, 「전이와 역전이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쓴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알튀세르는 스피노자가 말하는 제3종의 인식이란 보편적이며 동시에 개별적인 개별성에 대한 인식이며, 알튀세르는 이러한 해석을 헤겔에게서 발견한다고 말함으로써 헤겔 철학을 다시 복권시킨다. 그렇다면 알튀세르가 말하는 이 개별적인 보편성 혹은 보편적인 개별성은 헤겔 철학의 어디에서 나타나는가?

   그것은 앞에서 말했듯이 개념(Begriff), 혹은 더 정확히 말하면 (절대적) 이념(Idee)이다. 이념이란 “객관적 세계 속에서 자기자신을 통하여 스스로에게 객관성을 부여함으로써 자기를 완수시키고자 하는 목적”74)이다. 헤겔에서 개념이란 피안에 존재하는 초월적 원리가 아니라 사물과 현실 자체 속에 내재하는 내재적 원리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헤겔 『대논리학』의 방법론에 대해 간략히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헤겔의 『대논리학』은 존재로부터 출발해 개념에 도달하는데, 이는 인식론적 관점에 따른 절차이다. 하지만 인식론적 관점에서 볼 때 나중에 도출된 개념이 사실 존재와 현실의 질서를 구조짓는다는 점에서 개념은 존재론적 관점에서 본다면 우위성을 갖는다. 또한 개념이 자신을 완전히 실현한 것이 절대 이념, 혹은 신, 실체라는 점에서, 이러한 헤겔의 존재론적 관점은 자기원인으로서의 신으로부터 출발하는 스피노자 철학의 방법론과 일치한다. 이제 여기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점은 사람들이 흔히들 말하듯이 헤겔은 개별자를 보편자로 흡수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철학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정반대로 헤겔은 보편자는 오직 개별자로서만 존재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개별자를 보편자로 흡수하는 것을 비판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추상은 (...) 개별성, 즉 개체성과 인격성의 원리를 떨쳐내 버림으로써 아무런 생명이나 정신도 없는, 그리고 색깔이나 내용도 없는 보편성에 다다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념의 통일은 도저히 불가분적인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이상과 같은 추상의 소산이 개별성을 배제해야만 한다고 할지라도 그 자체로는 오히려 개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75)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헤겔은 개별적 사물들로부터의 추상이라는 경험주의적, 상식적 보편성 개념을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헤겔이 말하는 개념(혹은 이념)이란 주어진 직관을 통일시키는 주관적 개념(칸트)이 아니라 객관성, 혹은 현실을 구조짓는 내적 원리이다. 칸트에 따르면 ‘객관이란 그의 개념 속에 어떤 주어진 직관의 다양한 것들이 통합되어 있는 것’이다. 헤겔은 이원론적 함정에 빠져 물자체에 대한 불가지론적 인식론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이러한 칸트의 견해를 극복한다. 개념은 사물 외부에서 사물에 형식을 부여하는 주관적 개념이 아니라 항상-이미 사물과 현실을 구조짓는 객관적 개념이므로 개념 속에서 우리는 사물에 대한 적합한 인식에 도달한다.76) 하지만 이러한 헤겔의 인식론이 독단적 합리주의가 아닌 까닭은 개념의 실현, 그리고 개념의 실현체인 사물은 필연적으로 개념의 형식을 벗어나는 우연성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이 우연성은 실체의 규정들의 필연적 인과관계로부터 도출되었다는 점에서, 달리 말하면 필연성이 우연성을 정립했다77)는 점에서 우연성과 필연성은 일치한다.

   왜 개념은 필연적으로 우연적인 것을 포함하는가? 추상화된 보편성이 아닌 헤겔적 의미의 보편적 개념은 단순히 개념의 형식적 통일성이 아니라 ‘진리’를 문제 삼기 때문이다. 오성적 의미의 개념(칸트) 혹은 공허한 추상으로서의 개념은 형식적 동일성에 지나지 않지만 헤겔은 이러한 ‘주관적 개념’―개별자들로부터의 추상으로서의 보편적 개념―의 개념을 넘어서 주관과 객관의 통일, 혹은 개념과 객관성과의 통일로서의 개념78)의 개념을 설명하고자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개념의 형식뿐만 아니라 개념의 내용도 논의에 포함된다는 사실이다.79) 예컨대 ‘나무’라는 개념의 실현(설명)을 위해서는 나무의 개념을 설명하는 혹은 나무의 개념이 전개되는 술어들(즉 다른 개념들)이 요구되며 따라서 ‘나무’라는 개념의 형식적 동일성은 나무라는 개념의 구체적 내용과 불일치할 수밖에 없다.80) 이렇듯 개념의 형식과 내용의 불일치하므로 개념이 그 운동원리를 이루는 현실 자체도 자기 자신과의 불일치하며, 이로부터 개념의 실현인 사물에서 개념에 외재적인 우연성이 도출된다. 우연성과 필연성의 일치라는 헤겔의 논제는 따라서 개념은 우연성을 자신의 필연적 규정으로 갖는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개념은 자신의 내용의 완전한 실현 불가능을 자신의 실현조건으로 갖는다는 것이다. 개념이 형식과 내용의 불일치를 개념의 속성으로 갖는 까닭은 개념 스스로가 부정성을 경유함으로써만 자신의 완성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념은 이제 자신의 객관성과 일치하는 것으로서, 자기 자신 속에 결여를 가지며 따라서 자신을 더욱 이끌어 나가야 하는 충동을 갖고 있다.”81) 하지만 여기에서 헤겔이 결여라는 개념을 사용한다고 해서 이것이 개별적 사물이 도달해야 할 어떤 초월적 원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개념은 구체적 개별자의 내적 원리라는 점에서 헤겔 철학에서 보편자는 개별자로서만 존재하며, 따라서 개별자가 추구해야 할 초월적 원리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완성된 개념은 이제 자신의 실현을 방해하는 우연적인 것들, 즉 자신에 대립되는 것들을 자신의 규정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극복함으로써―우연성이라는 타자성을 개념의 내적 규정으로 승인함으로써―개념으로서 자신을 완성하며 긍정한다. “실로 이념은 개념이 그 속에서 획득하는 자유로 인해서 그 자체내에 가장 극심한 대립을 잉태하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결국 평온한 상태에 다다른 이념이 참다운 의미의 안정과 확신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오직 이 이념이 영원토록 그와같은 대립을 산출하면서 동시에 이를 영원히 극복해나가는 가운데 바로 그 대립 속에서 자기 자신과 일체가 되는데서만 가능한 것이다.”82) 개념이란 “자기의 타재성 속에서 자기자신을 회복시킨 개념으로서의 존재”83)인 것이다. 그러므로 “변증법은 한갓 부정적, 소극적인 결과를 초래한다고 보는” “근본적 편견”84)을 불식시킬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알튀세르의 스피노자, 특히 3종의 인식과 관련해 이것은 보편적 개별성에 대한 인식을 의미하며, 어떤 의미에서 이것이 헤겔적 해석이라는 알튀세르의 언급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 수 있는지 추적해보았다. 이제 정신분석, 특히 라깡 정신분석과 관련해 보편적 개별성이라는 논제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알튀세르가 과거에 이데올로기적 개념으로 거부했던 주체 개념을 다시 도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점에서 알튀세르는 주체 범주를 재해석해 새롭게 도입한 라깡과 일맥상통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새로운 주체 개념은 라깡이 말하듯이 탈중화된 주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이러한 주체는 정확히 어떤 주체인가? 그것은 필자가 다른 곳에서 제안한 바 있듯이 ‘과정으로서의 주체’이다.85) 앞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개념으로서의 실체는 현실을 구조짓는 운동원리로서 주체에 다름 아니다. 알튀세르가 말하는 3종의 인식처럼 흥미롭게도 헤겔은 바로 이러한 주체를 정확히 보편적 개별자로 규정한다. “나는 지금까지 전개된 개념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며 동시에 그에 대한 이해를 좀더 용이하게 할 수 있는 한 가지 사실만을 지적해두는 것으로 그치고자 한다. 말하자면 개념이 이제 그 자체에 있어서 자유로운 실존의 상태에 까지 다다른 이상 오직 이것은 자아이거나 또는 순수한 자기의식 이외에 그 어떤 것일 수도 없다.”86) 헤겔에 따르면 이러한 “자아는 곧 보편성”이며 동시에 “개별성87)이다. 헤겔이 말하는 자아, 즉 주체는 “개별성”이며, “개체적 인격성”88)이지만, 아직 절대적 주체가 되지 않은 한에서, 즉 자아(주체)란 유한한 정신인 한에서 “타자를 배척하는 절대적 피규정자이다.”89) 이러한 유한한 주체가 이제 절대적 주체(실체)로 변화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더 필요한가? “자신의 타자 속에서 자기 자신의 객관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유한한 주체에서 절대적 주체로의 이행은 알튀세르가 말하듯이 어떤 ‘새로운 인식’을 첨가하는 것이 아니라 ‘관점의 전환’이다. 자신의 본질을 제한하는 자신의 타자 속에서, 타자의 타자성을 폐기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을 발견하는 것, 즉 “모든 것 속에서 자기자신만을 발견하며 또 인식하고자 하는 이성의 가장 고귀하도도 유일한 충동”이야 말로 이성이 가진 “최고의 90)인 것이다. 이러한 전환을 통해 주체는 자신을 대타자에 의존하는 소외된 주체에서 ‘자기원인’으로 전환된다. 정신분석의 끝과 관련한 논의에서 라깡은 타자인 대상 a를 주체와 동일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행위’를 정신분석적 행위로 간주한다. 라깡에 따르면 분석의 끝에서 주체는 “대상 a의 즉자성”으로 “환원된다.”91) 라깡의 분석의 끝을 ‘주체적 궁핍’으로 설명하지만, 분석의 끝으로서의 주체적 궁핍은 존재의 상실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의 획득이다. 주체적 궁핍이란 상징계에 의한 소외 속에서 누리던 주체의 극복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분석의 끝에서 주체는 상징계 속에서 상실되었던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다시 획득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체적 궁핍은 탈존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 존재를 만든다는 것을 이해시키는 일이다.”92) 여기에서 우리의 논제와 관련해 흥미로운 것은 헤겔 또한 라깡과 마찬가지로 이념의 완성을 인식과 행위의 융화로 설명한다는 것이다. 분석에 끝에 관한 라깡의 설명이 헤겔과 접목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신은 마침내 이 이념을 자기의 절대적 진리로서 즉자대자적으로 있는 진리로서 인식하기에 이른다. 즉 이것은 ‘무한’의 이념으로서, 이 속에서는 인식과 ‘행위’가 융화를 이루는 가운데 마침내 이념이 자기자신의 절대지에 다다르게 된다.”93) 절대지란 자신의 타자와의 대립의 극복에 다름 아니며, 따라서 헤겔의 절대지는 단순히 인식론적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윤리적, 실천적 차원, 즉 “자유로운 실존으로의 고양”94)과 타자성의 긍정과 화해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V. 맺음말


   만족과 결여의 변증법을 보지 못하고 만족만을 강조하는 들뢰즈의 존재론은 정신분열증, 망상증, 도착증, 신경증 등 인간 주체가 처할 수 있는 다양한 실존 방식 중에서 ‘오직’ 정신분열증만을 특권화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사실 라깡 정신분석에 따르면 정신분열증은 주체와 타자의 분화가 일어나지 않은 상태를 의미하며 따라서 ‘결여 없는 만족’만이 존재하는 주체의 특징이라는 점에서 정신분열증에 대한 라깡의 견해는 사실 들뢰즈와 다르지 않다. 그런데 왜 그리고 어떻게 들뢰즈는 이러한 병리적 정신분열증 상태를 ‘특권화’할 수 있었는가? 이제 여기에서 흥미로운 점은 들뢰즈는 자신이 말하는 정신분열증이란 임상적 의미에서의 정신분열증이 아니라고 말한다는 사실이다. 정신분열증자가 누리는 결여 없는 만족이란 사실 ‘치명적인 향유’이며, 따라서 들뢰즈가 이렇듯 파멸과 죽음의 불안을 체험하는 임상적 의미의 정신분열증자를 우리가 본받아야 할 ‘최고의 모델’로 간주할 수 없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들뢰즈가 말하는 해방된 분열증자는 임상적 의미가 아닌 다른 의미에서의 분열증자이다. 바로 이러한 들뢰즈의 논의는 난점에 부딪치며 독자를 혼란에 빠뜨린다. 한편으로는 임상적 의미의 분열증자를 소외로부터 벗어난 해방된 주체로 간주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말하는 진정한 자유인은 임상적 의미의 분열증자가 아니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들뢰즈는 『반오이디푸스』에서 슈레버를 정신분열증자로 해석하면서 그를 자신의 영웅으로 묘사한다. 하지만 슈레버는 사실 임상적 의미의 정신분열증자95) 아닌가? 왜 한때의 영웅이 다시 소외된 인물로 폄하되어야 하는가? 사실 들뢰즈가 말하는 ‘비임상적’ 분열증자는 라깡이 철저히 탐구한 바 있는 오이디푸스의 너머에 도달한 사람, 즉 소외로부터 벗어난 진정한 자유인, 즉 분석의 끝에 도달한 사람이 아닌가? 물론 들뢰즈는 이러한 라깡적 결론에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라깡의 견해에 동조할 수도 있을 들뢰즈 이론이 외관상으로 완전히 다른 입장을 취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개인적, 정치적 상황 등 여러 가지를 고려할 수 있겠지만 앞에서 언급했듯이 어떤 특정한 존재론적 입장을 특권화한 것에 그 원인이 있지 않을까 한다. 어떤 특정한 철학적 존재론을 직접적으로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독단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으며, 이는 민주주의의 동지를 ‘주적’으로 간주하는 정치적 오류는 물론 생산적인 학문적 토론을 방해하는 장애물로 기능할 수 있다. ‘신에 대한 지적 사랑’은 그러한 사랑의 불가능성에 대한 깊은 통찰이 함께 할 때에만 우리에게 진정한 해방과 기쁨의 원천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바로 이것이 알튀세르가 ‘죽음보다 더 깊은 잠’에서 깨어난 후 맑스로 되돌아가는 설레이는 귀향길(Heimweg)에서, 정신분석과 헤겔을 경유하는 우회로(Umweg)을 거치며 다시 발견한 자신의 ‘새로운 맑시즘’의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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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알튀세르와 정신분석의 ‘무관성’이라는 이러한 옛 입장을 다시 한번 반복한 예로서는 예컨대, 진태원, 2002, 특히 368면 참조.


2) 이에 대한 필자의 반론을 포함한, 알튀세르와 정신분석학에 관한 새로운 논의로는 홍준기, 2003, 121면 이하를 참조하라.


3) 여기에서 상세히 논의할 수는 없지만 정신분석 혹은 라깡에 대한 들뢰즈의 극단적인 비판적 입장은 『반오이디푸스』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이 저서 이전에는 라깡 이론이 들뢰즈 철학의 비판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들뢰즈가 참조했던 결정적인 준거점 중의 하나였다. 반면 헤겔 철학에 대한 비판적 입장은 들뢰즈 철학 초기부터 후기까지 일관되게 유지된다. 따라서 보다 상세한 논의를 위해서는 시기별로 들뢰즈 입장을 면밀히 검토해야 할 것이나 이러한 상세한 검토는 이 글의 범위를 넘어서므로 여기에서 집중적으로 다룰 수 없었다.


4) 지면의 제약 때문에 이 글에서 필자는 정신분석의 끝에 관한 라깡의 논의에 대해 상세히 설명할 수 없었다. 이에 대해서는 홍준기, 2002, 26면 이하를 참조하기 바란다.


5) 루이 알튀세르, 1996, 25면 이하, 그리고 145면 이하 참조.


6)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문헌적 고찰로는 또한 F. Matheron, 1997, p. 23ff. 그리고 만족결여변증법을 중시하는 라깡 관점에서의 들뢰즈의 욕망이론에 대한 비판으로는 홍준기, 2005a, 20이하를 참조하라.


7) 알튀세르, 1996, 182면.


8) 같은 책, 182면. 강조는 원문.


9) 이에 대해서는 이하에서 보다 상세히 논의하기로 한다.


10) 알튀세르, 1996, 193면. 강조는 원문.


11) L. Althusser, 1975, 70면.


12) 예컨대 알튀세르의 제자였던 피에르 마슈레, 에티엔느 발리바르 등이 이러한 입장을 취하는 대표적인 저자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쓰여진 스피노자 해설 중 국내에 소개된 것으로는 피에르 마슈레, 『헤겔 또는 스피노자』, EJB, 2001(진태원 번역) 등이 있다. 물론 마슈레는 헤겔을 스피노자에 이어서 부차적으로나마 필요한 철학자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부차적으로 모순 개념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지만, 앞으로 살펴보겠듯이 주로 스피노자에 의존하는 마슈레 이론은 적어도 알튀세르 자신의 입장과 큰 차이를 보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알튀세르가 중시하는 모순 범주를 진지하게 사유하기 힘들다는 문제가 있다.


13) L. Althusser, 1975, 61면, 각주 19. 강조는 원문.


14) L. Althusser, 1986, 169면 참조.


15) L. Althusser, 1993, 75면.


16) L. Althusser, 1975, 96면.


17) L. Althusser, 1975, 73면 이하 참조.


18) 같은 책, 76면.


19) 같은 책, 77면.


20) 같은 곳.


21) 같은 책 79면 이하.


22) 같은 책, 81면.


23) L. Althusser, 113면.


24) 예컨대, L. Althusser, 1975, 79면.


25) L. Althusser, 1970, 186면.


26) 같은 책, 180면 참조.


27) 같은 책, 181면.


28) 같은 책, 190면.


29) L. Althusser, 1993c, 111면 이하.


30) L. Althusser 1993, 149-150, 151면 참조.


31) 같은 글, 149면 참조. 하지만 알튀세르는 사실상 기표이론을 사적 유물론에 포섭, 흡수시키고 있다.


32) 같은 글, 150면. 강조는 원문.


33) 같은 곳.


34) 물론 기표이론이 라깡 이론의 전부가 아니라는 점에서 알튀세르가 라깡 이론을 기표의 보편이론으로 규정한 것 자체가 이미 오류이다.


35) 이에 대해 상세한 논의로는 홍준기, 2003, 133면 이하 참조.


36) 엘리어트, 1992, p. 149.


37) L. Althusser, 1970, 16-17면 참조.


38) L. Althusser, 1975, 82면. 강조는 원문.


39) 같은 책, 82-83면 참조.


40) 물론 필자가 스피노자의 철학을 진리와 오류를 구분해주는 근거를 제시하는 독단적이고 ‘사변적인’ 철학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은 물론 아니다. 헤겔 철학의 ‘신비적 외피’를 벗기고 나면 합리적인 변증법의 ‘핵’이 드러나듯이, 우리는 스피노자의 철학을 알튀세르가 요청했듯이 ‘사변주의적’, ‘형이상학적’ 방식 혹은 들뢰즈적 방식이 아니라 달리 해석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41)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이 예속을 극복하고 자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신에 대한 지적인 사랑’, 즉 3종의 인식을 가져야 하듯이, 헤겔 철학에서 인간 자유의 실현이란 곧 절대적 이념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듯 스피노자에서 신에 대한 지적인 사랑이 단순히 인식론적 문제가 아니었듯이 헤겔에게 절대적 이념의 문제역시 단순히 형이상학이나 인식론의 문제가 아니라 윤리적인 문제이다.


42) Hegel, 1818-1931, 472면(V. Hösle, 1988, 163면에서 재인용, 강조는 원문).


43) 헤겔, 1997a, 76면. 강조는 원문.


44) 헤겔, 1997b, 24면. 강조는 원문.


45) 같은 책, 27-28면.


46) 예컨대 G. Deleuze, 1977, 75면 이하 참조.


47) Hegel, 1969, 148면.


48) Hegel, 1970, ζ 95, 201면. 강조는 원문.


49) 같은 책, ζ 95, 202면.


50) 헤겔, 1983, 72면,


51) 물론 라깡이 분석의 끝을 결여로서만 정의한다는 것은 아니다. 라깡은 궁극적으로 헤겔과 마찬가지로 분석의 끝을 존재의 획득, 즉 긍정성의 획득으로 정의한다. 이에 대해서는 이 글의 말미에서 다시 논하기로 한다.


52) 알튀세르,  1993a, 245면.


53) 알튀세르, 1996, 51면.


54) 같은 책, 50-51면. 강조는 원문.


55) 같은 책, 152-3면.


56) 스피노자, 1990, 특히 108면.


57) 같은 책, 155 면.


58) 같은 책, 108면. 강조는 원문.


59) 같은 책, 108-109면.


60) 같은 책, 109 면.


61) 알튀세르, 1996, 164면.


62) 스피노자, 앞의 책. 156 면 참조.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예를 『에티카』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그 예는 지극히 평범하므로 신에 대한 직관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는 데 사실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스피노자가 드는 예는 비례수의 예로서 1과 2, 그리고 3이라는 수가 주어졌을 때 제4의 비례수는 6이라는 것이다.


63) 알튀세르, 1996, 156 면. 강조는 원문.


64) 들뢰즈, 2003, 408면 참조.


65) 같은 책, 409면.


66) 같은 책, 401-2면.


67) Althusser, 1992, 210면.


68) 알튀세르, 1996, 163면.


69) 같은 책, 178면. 강조는 필자.


70) 보다 상세한 논의로는 홍준기, 2003, 특히148면 이하 참조.


71) 알튀세르, 1996,, 177면. 강조는 원문.


72) 같은 책, 174. 강조는 원문.


73) 같은 책, 176면.


74) 헤겔, 1997b, 393면. 강조는 원문. 물론 여기에서 목적이라는 단어가 나왔다고 해서 헤겔 철학을 단순히 목적론이라고 비판해서는 안 될 것이다. 스피노자 역시 형상적 원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 때문에 스피노자를 단순히 아리스토텔레스적 목적론에 매여 있는 철학자라고 말할 수 없듯이 말이다.


75) 같은 책, 87면.


76) 같은 책, 31-32면 참조.


77) C. Taylor, 1975, 294면 참조.


78) Hegel, 1970, ζ 162.


79) 헤겔, 『대논리학 III』, 71면. “개념이 지니는 추상적 제규정은 다면 형식면에서만 영원한 진리일 뿐, 결코 그의 내용마저도 그러한 형식에 합치되는 것은 아니다.”


80) 이에 대한 예로서는 홍준기, 2002, p. 참조.


81) H. F. Fulda, 1989, p.  139. 강조는 원문.


82) 헤겔, 1997b, 306면.


83) 같은 책, 218면. 강조는 원문. 여기에서 개념의 ‘객관성’으로의 이행이 일어난다.,


84) 같은 책, 423면.


85) 이에 대해서는 홍준기, 2003, 148면 이하 참조.


86) 헤겔, 1997b, 29-30면. 강조는 원문.


87) 헤겔, 1997b, 30면. 강조는 원문.


88) 같은 책, 30면.


89) 같은 곳.


90) 같은 책, 414면. 강조는 필자.


91) J. Lacan, 1984, 18면.


92) J. Lacan, 1970, 21면.


93) 헤겔, 1997b. 307면. 작은 따옴표에 의한 강조는 필자. 이글에서는 지면의 제약상 분석의 끝으로서의 ‘정신분석적 행위’에 관해 상세하게 논의할 수 없었다. 이에 대해서는 홍준기, 2004를 참조하기 바란다.


94) 헤겔, 1997b, 442면.


95) 프로이트와 라깡에 따르면 사실 슈레버는 분열증자가 아니라 망상증자이다. 여기에서 역시 자세히 논의할 여유는 없지만 슈레버의 자서전을 면밀히 검토해보면 슈레버는 다름 아닌 스피노자적 세계관을 갖고 있었음이 분명히 드러나며, 바로 그 때문에 들뢰즈는 슈레버를 정신분열증자로 해석하고자 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 개인이 망상 속에서 스피노자의 세계관을 옹호했다고 해서 그가 정신분열증자가 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님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임상적으로’ 본다면 슈레버는 체계화된 망상을 발전시킨 망상증자였으며,  ‘망상적 은유’(라깡)을 통해 자신을 구원한 ‘해방된 망상증자’였다. 이 점에서도 필자는 분열증과 망상증을 대립해 후자를 폄하하는 들뢰즈의 입장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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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타자, 정치

Several Circles (Einige Kreise)
1926. Oil on canvas, Vasily Kandinsky
민주화 이후의 문화 그리고 문화와 진보를 생각하며

“인간이란 말의 힘을 통해 스스로를 자연적 목적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문학적 동물이기에 정치적 동물이다”
- 자크 랑시에르



민주화 이후의 문화

87년으로부터 우리는 20년의 시간적 간격을 가지게 되었다. 그 간격에 놓인 번다한 역사적 사태를 어떻게 정의하고 분별할 것인가를 두고 분주한 이야기들이 있었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입장은 대개 이렇게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먼저 우리는 한편에서 “근대화의 완성”으로서 “민주화 이후”를 정의하고 또한 세례하는 목소리를 듣는다. 나는 그것이 민주화 이후를 규정하는 자유주의적 담론이라 생각한다. 이런 주장은 “민주화 이후”를 어떻게 규정하고 판별할 것인가를 둘러한 담론 투쟁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주장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런 것이지 않을까.

less..
우리는 적어도 “성공적인, 압축적인, 기적적인, 토건국가적인, 개발지상주의적인” 등등의 자본주의적 경제체제를 이룩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에 조응하는 민주주의를 결여하고 있었다. 그러나 87년 이후 우리는 민주화를 이룩하였고, 그것은 불완전한 근대화를 완성하였다. 경제적 근대화에 뒤지는 후진적 민주주의, 그리고 민주화를 통한 근대화의 보충과 완성. 따라서 우리는 충분하고 온전한 근대화에 도달하였다, 운운. 이런 논리는 나아가 “민주화”란 “정상화”이며 “성숙”이라는 결론을 내놓는다. 이것이 전후 냉전 체제에 형성된 “근대화” 담론을 되풀이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최신의 “동아시아 민주화 담론”을 쫓는 것이든, 아니면 “민주화 이후”를 이끌었던 “시민사회” 담론이 내걸었던 정치적 프로그램, 즉 “민주주의의 (재)민주화”, “민주주의 공고화”, “민주주의의 사회화” 등등에서 나타나는 것이든, 그 입장들 사이에 놓인 차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조금 놀라운 일은 이른바 한국 사회에서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는 입장들이 바로 이 “근대화의 완성”으로서의 민주화 이후라는 담론에 동의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최근 성업 중인 “뉴 라이트”이든 아니면 민중운동 이후 시민운동으로 변신한 “뉴 레프트”이든, 대개의 정치적 주장들은 민주화 이후를 민주주의의 성취라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이견이 없다. 따라서 구태의 보수주의로는 변화된 민주주의 체제에 적응할 수 없기에 변신을 꾀하여야 한다는 뉴 라이트나, 민주주의가 현실화된 이후 민주주의적 절차와 제도, 법률을 보다 확장하고 견고히 하기 위하여 시민의 협치(governance)를 제도화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쫓아온 뉴 레프트나, 결국은 87년 이후의 역사적 현실을 민주주의의 현실화라고 간주한다는 점에서 다를 바 없다.

물론 그것은 거의 이견이 있을 수 없는 주장처럼 들린다. 87년 이후를 민주화 이후라고 부른다는 것은 거의 흔들림 없는 자명한 결론 아닌가. 여기에서 민주화 이후를 둘러싼 두 번째 입장을 상기할 수 있다. 사회주의적 경향이라고 할 그런 입장은 민주화 이후를 “신자유주의화”란 틀 속에 묶고 분석한다. 여전히 존속하고 있는 국가보안법으로 상징되는 분단체제, 신경제 체제로의 이행과 더불어 현실화된 노동 없는 축적 체제의 등장, 이른바 신국제질서라는 이름의 세계체제로의 통합 등, 우리는 “민주화 이후” 민주화란 이름에 값하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민주화는 기만이며 그것은 오직 신자유주의화라는 새로운 정치적 프로그램으로 이행하는 것에 불과하다. 결국 민주화 이후는 곧 신자유주의화의 다른 이름이며, 민주화는 절대 이루어진 바 없으며 여전히 중단 없이 추구되어야 하는 기획이다. 최근 이런 입장은 민주화 이후를 둘러싼 반성 속에서 사뭇 설득력을 얻어왔고 나는 그 주장을 액면대로 받아들일 때 전적으로 옳다고 생각한다.

사회와 정치의 거리

그러나 나는 후자의 입장이 민주화 이후를 성찰하는 데 있어 “민주화” 혹은 “민주주의”를 사고하는 데 있어 충분히 생각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민주화 혹은 민주주의라는 “정치”를 그것의 사회적 내용으로 환원한다. 따라서 민주주의란 최악의 경우 사회적 불평등을 위장하는 기만적인 허울이거나 아니면 그것은 단순히 부가적이고 외재적인 형식이어서 그것의 실정적인 내용, 즉 그것이 “사회적” 삶의 현실을 분석함으로써 분별하고 평가하여야 한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신자유주의화”로 민주화 이후를 평가하려는 주장은 안타깝게도 민주화 혹은 민주주의 자체를 질문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화라는 틀 속에서 민주화와 민주주의란 정치는 사회적 삶을 관리하고 규제하는 통치(government) 혹은 행정관리(police)로 환원되고 만다. 그러나 정치는 통치와 구분되어야 옳다. 물론 사회적 삶의 관리와 규제로서의 정치, 흔히 통용되는 “민생정치”란 용어가 상기시켜주듯이, 국민 혹은 인구(population)의 삶을 돌보고 향상시키는 정치가 근대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이데올로기였다는 점을 무시할 수는 없다. 이런 생각의 귀결은 한마디로 줄여 말하자면 “정치의 사회로의 흡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주장은 사회를 규제하는 초월적인 항으로서의 정치를 거부하라는 주장이며 사회의 다양한 실제적인 삶, 즉 인민 혹은 시민의 실제적인 욕구와 이해, 삶의 질 혹은 안녕을 살피고 관리하는 행위로서의 정치만이 존재할 수 있을 뿐이라는 입장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많은 좌파들이 이에 동의하였으며 이의 가장 세련된 형태는 이른바 “제3의 길” 혹은 “참여정부” 따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적 삶”과 “사회적 삶”(다시 푸코의 말을 빌자면 행복, 건강, 장수, 안전, 부를 추구하는 생물학적인 삶) 사이에 놓인 근본적인 차이를 지운다는 것은 곧 사회적 삶의 문제를 규정하는 체계를 선택하고 결정하는 행위가 있을 수 있음-우리는 이것을 민주주의의 본질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을 배제하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하여 “어떤 체제에 살 것인가”를 규정하는 것, 즉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사는 지금 여기의 사회가 전부이다, 역사는 끝났다, 그러므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효율과 계산뿐이다”가 아니라 “여기의 바깥이 존재한다, 지금 여기에서 자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사회적 규칙은 보편적 섭리가 아니다, 그러므로 단절적인 변화가 가능하다”라고 주장하는 것, 그리고 그런 주장을 물질화하는 것이 정치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이 현재의 사회적 삶의 내용으로부터 연역될 수 없는 행위란 점에서 비사회적이지만 또한 동시에 그것이 사회적 삶의 내용을 규정하는 좌표 전체를 바꿈으로서 사회적 삶을 재구성한다는 점에서 사회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민주화 이후”에 대한 두 가지 대조적인 입장을 뛰어넘을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를 실체화함으로써, 혹은 근대성의 규범적인 이상을 이루는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민주주의를 형식적인 제도와 절차로 축소하는 것(즉 착취의 사회적 삶을 고려하지 않는 실체화된 대상으로서의 정치)과 반면 민주주의를 사회적 삶의 내용을 은폐하는 외재적인 허울이나 사회적 삶 자체의 파생물로 축소하는 것(즉 착취를 정치의 본질로 환원하면서 정치의 자율성을 부정하는 정치) 말이다. 정치는 자율적이지만, 또한 동시에 언제나 계급적대에 의해 규정된다는 점에서 타율적이다. 나아가 이는 “민주화 이후”의 문화를 반성하는데 있어서도 결정적인 의의를 가지고 있다. “민주화 이후”의 정치에 대한 물음을 문화에 해당시키면 어떻게 될까. 굳이 줄여 말하자면 “민주화 이후”의 문화는 무엇이었을까. 그런데 “민주화 이후”를 규정하는 문화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묻는 일은 거의 희박한 것 같다. 90년대 이후 “문화의 시대”란 유행어가 범람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시류에 대한 캐리커처를 넘어서지 못한 듯 보인다. 그것은 “민주화 이후”의 문화를 반성하는 물음이 “민주화 이후”의 정치를 반성하는 물음과 언제나 외적인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 중략 -


예술의 타자, 정치

그러므로 고진이 <트랜스크리틱> 이후 생산의 입장, 노동자계급의 입장에서 벗어나 유통의 입장, 소비자/시민의 입장에서 자본주의를 개조하자고 주장하며 그것이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가장 유효한 입장이라 역설할 때, 우리가 그를 미심쩍게 여기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결국 그는 유통의 입장에서 가능한 정치, 즉 경제의 입장에서 도출된 정치를 생각하자고 강변한다. 그런 입장에 대하여 마르크스주의

가 오랜 동안 사용해 온 정당한 개념이 있다. 물론 그것은 경제주의이다. 나는 그의 주장과 달리 생산의 입장에 선 정치, 그러나 이번에는 경제로서의 생산이 아니라 경제와 정치를 단락시키는 계기로서의 생산이라는 입장에 선 정치를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말하는 생산이란 물리적 행위로서의, 경제적 재생산의 계기로서의 생산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 생산이란 당연한 말이지만 생산-유통-생산의 순환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계기로서의 생산이 아니라 바로 그 순환 자체를 가능케 하는 조건 자체를 생산하는 것으로서의 생산일 것이다. 전체 순환의 흐름 속(이를테면 생산-유통-생산의 사슬)에서는 그저 하나의 부분인 것처럼 보이지만 조금만 엄밀하게 생각해보자면 그것의 실현을 위해 가능한 계기, 즉 생산 자체의 조건으로서의 생산이 있다. 그리고 사실 모든 생산은 바로 그 생산의 조건 자체의 생산과 경제적 계기로서의 생산 자체와 동시적이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착취의 조건을 끊임없이 생산함으로써만 생산이 가능하며, 그것을 가리키는 이름이 정치라는 마르크스의 주장에서의 핵심일 것이다. 물론 그것은 문화와 예술에도 어김없이 연관된다. 문화와 예술이 진보한다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의미에서일 뿐일 것이다. 즉 그것은 예술이 정치화되는 것, 예술이 가용한 원천인 상상력 자체를 생산하는 것이다. 이는 유행과 추세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을 인정하고 현존하는 감성의 생산과 분배를 유일한 질서로 수긍하며, 기호학적 저항, 전복적 재전유 혹은 수행적(performative) 반복 따위를 통해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에 만족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만약 이 같은 문화예술에 해당하는 정치가 있다면 그것은 앞에서 말한 통치로서의 정치, 사회적 관리로서의 정치일 것이다. 반면 상상력 자체를 생산한다는 것이 그로부터 벗어난 정치, 본연의 정치와 대응할 것이다. 문화예술과 정치 사이에서 어떤 외재적 관계를 수립하고 둘 사이에서 재현과 반영의 규범을 외삽하여 이를 규제하는 것은 기실 상상력과 상관없다. 그것은 상상력 혹은 근대적인 민주주의가 만들어낸 감성 혁명 이전에 존재하던 것에 불과하다.

상상력이란 지성화된 감성이고 또한 감성화된 지성일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자신에게 외적인 지성의 감독을 받으며 재현적 진실을 추궁 받을 이유가 없다. 이것이 아마 랭보와 말라르메 그리고 러시아 혁명기의 예술가 등등을 지배했던 시점이었을 것이다. 결국 문화예술을 정치화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들을 진보라는 이상과 결합하는 것은 새로운 상상력을 생산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또한 그것은 근대 문화예술의 진보를 규정하는 논리, 문화예술은 정치와 무관함 속에서 그것과 관계한다는 논리를 확인하는 것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해 문화예술과 정치가 각각 자율적인 실체로서 독립적으로 추구하지만 그런 비관계 속에서 언제나 함께 관계하는 것, 문화예술은 지금 여기에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의 한계에 있는 부정성을, 정치는 지금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의 한계에 있는 부정성을 상대한다. 결국 요점은 양자가 모두 부정성과 관계한다는 점에서 같은 것이라는 점이다. 그것이 예술의 정치화이고 또한 정치의 예술화일 것이며, 또한 문화예술의 진보에 상당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부정성을 답파하는 것은 어떻게 나타날까.

정치라면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사회가 전부가 아니며 그것을 관리하는 일이 정치가 아니라는 것을 확언하고, 그리고 그것이 존재하기 위해 억압되어야 하는 부정성을 조명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문화예술 쪽에서도 그런 부정성과의 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것이 문화와 진보의 관계를 사유하는 길이자, 또한 지금 “민주화 이후”의 문화에서 민주주의와 문화의 관계가 무엇이었는지를 해석하는 논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 역시 물론이다.

- [문학과 사회] 2007년 여름호에 기고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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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외로서의 신자유주의, 신자유주의의 예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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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와 옹 | UC 버클리 인류학과
이번 호 <책속의 책>에서는 아이와 옹(Aihwa Ong)의 『예외로서의 신자유주의: 시민권과 주권의 변이들』(Aihwa Ong, Neoliberalism as Exception: mutations in citizenship and sovereignty, Duke University Press, 2006)의 서문인 「예외로서의 신자유주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예외」(Neoliberalism as Exception, Exception to Neoliberalism)를 싣는다.
신자유주의는 대개 국가 권력의 통치 범위를 제한하는 경제 학설, 시장 이데올로기로 간주된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에 대한 이런 한정된 이해에는 한계가 많다. 이런 식으로 따지자면 예컨대 최근 제시되고 있는 사회적 투자, 사회 자본에 대한 강조나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 포스트 워싱턴 컨센서스 등은 신자유주의가 아니라는 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이들은 어쨌든 ‘시장지상주의’를 나름대로 비판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위와 같은 사례를 들어 자본가 계급이 신자유주의를 버렸고 따라서 반신자유주의가 아닌 다른 전선을 고민해야 한다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는 애초부터 (이른바 ‘시카고 학파’로 대표되는) 신보수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했으며, 양자의 핵심 쟁점은 처음부터 ‘통치성’이었다. 즉 신자유주의는 ‘정책 무용론’이 아니라 ‘정책 개혁론’이며, 위기와 인민의 관리라는 화두로 국가를 개조함으로써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게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의 다양한 사회투자, 사회 자본의 흐름들은 신자유주의의 논리를 벗어나는 것이기는커녕, 신자유주의의 본래 정신을 가장 충실하게 계승해 자신의 통치성을 강화하려는 기도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글에서 옹은 신자유주의는 단순한 경제 학설에 그치는 것이 아니며, ‘최적화’를 위해 통치와 자기 통치를 합리화하는 능동적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따라 통치와 피통치, 권력과 지식, 주권과 영토성 사이의 관계가 재형성된다. 즉 각각 다른 체제를 가진 공간들에 적용되면서 신자유주의는 상이한 노동․생활의 환경을 구성한다. 이 과정에서 신자유주의의 통치성을 유지하는 포섭과 배제의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기존의 시민권, 주권의 개념들은 이 속에서 시장 가치라는 기준에 의해 변화한다. 예를 들어 중국에서는 사회주의 경제 내부에 경제특구가 창설되며, 곳곳에서 NGO, 기업들의 간접적 영향력이 기존에 국가가 행했던 권리의 보호를 담당한다. 시민들에게는 자기 관리, 자기 경영, 자기 통치에 이르는 일련의 경제적 효율성과 더불어 자기 책임이라는 윤리적 주장이 제기되면서 기존의 시민권의 틀이 변화한다. 시장에 대한 계속된 강조 속에서 정부와 제도들은 신자유주의의 통치성 유지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적 가치의 내면화를 강조하는 이런 주체화 기술의 변화는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주체의 형성이라는 문제에 있어서도 중요한 쟁점을 형성한다. 또 푸코(주의)에 고유한 ‘실증주의’는 신자유주의를 둘러싼 문제에 관해 많은 생각꺼리를 제공할 것이다.
하지만 물론 옹의 주장이나 논증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녀가 인도주의적 개입이나 NGO식 사회 정책을 비판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때때로 이를 옹호하는 듯한 느낌의 논리를 전개한다. 이는 궁극적으로 그가 보편주의적 정치 이념, 그리고 이를 매개로 한 집단적인 정치적 주체화의 가능성에 다소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기 때문일 것이다. 이론적으로 보자면 이는 그녀가 중요한 이론적 준거로 삼는 푸코를 다소 우경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일 것이다(물론 이는 단순한 ‘편향’이 아니고 푸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순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푸코의 작업에 관한 최근의 비판적 소개로는 『문학과 사회 75호』(2006. 가을)에 실린 ‘생명정치’ 특집을 보라.).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하고 아마도 더 뼈아픈 문제는, 과거 사회주의 운동에 비할 정도의 보편주의적 정치 이념과 집단적 주체화가 재개되지 못하고 있다는 정세와 관련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기의 비판’을 진전시키려는 우리의 노력이 아닐 수 없다.

* 지면 관계상 서문에서 책의 각 장에 대한 설명 부분은 생략했으며, 내용 주가 많지 않아 지면에는 싣지 않고 『사회운동』 홈페이지, www.movements.or.kr에 올리는 것으로 한다.

 

서문


예외로서 신자유주의, 신자유주의의 예외


신자유주의는 관점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지는 것처럼 보인다. 세계 대부분 지역에서 신자유주의는 미국의 도가 지나친 권력의 약호가 되었다. 아시아의 정치인들과 전문가들은 “미국의 신자유주의”를 국제통화기금(IMF)과 같은 매개를 이용하여 소규모 경제를 억지로 열어젖히고 이 국가들의 현재와 미래의 경제 복지를 파괴하는 무역정책에 노출시키는 시장 지배 전략으로 본다. 예를 들어 아시아 경제가 부상한 10년 간 (1980년대~1990년대), 아시아의 지도자들은 미국의 신자유주의에 대해 “아시아는 노(No)라고 말할 수 있다.”고 공언했다. 이런 수사들은 1997~98년의 “아시아 금융위기” 이후에 더 요란스러워졌다.1) 또한 대중적 담론에서 신자유주의는 국가 통화와 생활 조건을 위협하는 탈규제된 금융 흐름을 의미했다. 강요된 경제 구조조정 때문에 일자리를 잃은 한국의 반신자유주의 시위대는 “IMF는 나는 해고됐다는 뜻이다!”(IMF means I'M Fired!)고 쓰인 티셔츠를 입었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미국의 시장개방과 사유화 압력은 “야만적 신자유주의”라고 불렸다. 이라크 침략 이후, 미국은 대기업들이 석유자원을 확보하도록 정복전쟁을 할 만큼 비열하다는 인식이 신자유주의 비판에 포함되었다. 이와 같이 전 세계 대중들의 상상 속에서 미국식 신자유주의는 점차 무법성과 군사행동에 의존하는 발본화된 자본주의적 제국주의로 여겨진다. 아래에서 볼 것처럼, 이런 광범위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아시아 정부들은 경제 구역을 창설하고 시민권에 시장 기준을 강요하는 신자유주의적 형태들을 선별적으로 채택해 왔다.


넓은 의미의 신자유주의


이와는 대조적으로, 미국에서 신자유주의가 학계 밖 대중적 담론의 일부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오히려 시장 중심 정책들과 신보수주의가 사회복지 폐지와 대자본의 이익 증진을 추구하는 사고와 전략 전체를 약호화하는 토착적 범주다. 자유는 정치적 자유주의보다는 “자유로운 경제 활동”을 가리키는 더러운 단어가 되었다. 다소 넓게 말하자면, 민주당이 족쇄가 풀린 시장 주도 정신의 과잉에 반대하는 개인의 권리와 시민적 자유의 옹호자라고 스스로를 공언하는 반면, 공화당은 무수한 사회적 문제에 대한 개인적 해법이라는 신자유주의(신보수주의로 읽히는) 담론에 의존한다 할 수 있다. 두 종류의 자유주의 모두 정부의 기본 원리와 목표로 자유로운 주체에 초점을 맞추지만, 민주당원이 개인과 시민의 자유를 강조한다면, 공화당원은 자립과 자기관리라는 개인적 의무를 강조한다. 예를 들어, 보수적 칼럼니스트 윌리엄 새파이어(William Safire)는 “공화당원의 두뇌는 공동체 의존보다는 자립을, 고립보다는 개입을, 사회 규제보다는 자기 규율을, 즐거움을 찾기 위해 일하는 것보다는 일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을 포함하는” 가치들을 선택한다고 쓴다.2) 정치 생활에서 두 종류의 자유주의의 합리성들은 자주 겹쳐지고 융합되지만, 공화당은 (정치적) “자유주의”를 “비(非)미국적인” 것으로 만듦으로써 미국에서 신자유주의의 지속을 강화했다. 사실 이런 당파적 논쟁들은 민주주의라는 정치적 자유주의의 이상과 개인의 책임과 운명이라는 신자유주의의 원리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균열을 강조했다.

재선에 성공하면서 조지 부시(George W. Bush) 대통령은 미국에서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정치적 “지침”을 주장했다. 다수의 새롭게 제안된 “시장 중심 정책들”에서 그는 뉴딜 이래로 제도화된 미국 자유민주주의의 근본적 측면들을 해체할 것을 제안했는데, 이는 사회보장과 보건의료의 사유화에서 진보적 세법 폐지에 이른다.3) 부시는 자신의 새로운 전망을 “소유권 사회”라고 불렀는데, 이는 자신의 감시 하에 미국의 시민권이 자산의 소유자만을 포함하는 시민권에 대한 초기의, 좁은 전망으로 바뀔 것임을 명시적으로 주장하는 것으로, 여기서 특권화되는 것은 경제적 자기 이익을 고립적으로 추구하는 “독립적이고 이기적인 개인”이다.4) 두 번째 취임연설에서 부시 대통령은 “모든 시민들을 그 혹은 그녀의 운명의 행위자로 만듦으로써… 국민들이 자유 사회에서 삶의 도전을 준비할 것”이라고 명백하게 말했다.5) 또한 시민권에 대한 이런 신자유주의적 관점은 기독교 복음주의 집단의 도덕적 지지를 받았다.6)

그러나 정치를 시장화하고 시민권을 재설계하려는 대통령의 시도들이 반대 없이 진행되지는 않았다. 절반에 가까운 시민들이 이런 사유화 정책들에 반대했다. 십여 년간 수없는 저항운동들이, 몇 개만 언급하자면 죄수, 노동자, 여성, 동성애자, 소수자, 외국인의 시민적 권리에 대한 끊임없는 침식을 방어해 왔다. 그들은 개인의 자유와 민족의 유산을 보호하기 위해 계속 싸울 것이라고 약속한다. 그러나 부시 정부는 신자유주의적 이성을 내세우지는 않더라도 그 정신에 따라 다른 정책들 중에서도 빈곤퇴치 계획, 의료보험 혜택, 환경 보호, 식품 안전을 계속해서 역전시키려 한다. 이 같은 신자유주의적 논리, 종교, 권리, 윤리 다발은 미국 시민권의 문제 공간이 되었는데, 그 결과가 무엇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1970년대 이래로 “미국식 신자유주의”는 해외에서 다양하게 수용되고 비판받은 세계적 현상이 되었다.


신자유주의와 예외들


이 책의 주장은 정치적 최적화의 새로운 양식인 신자유주의가 통치와 피통치, 권력과 지식, 그리고 주권과 영토권 사이의 관계를 재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종종 국가 권력과 부정적 관계에 있는 경제 학설로, 통치의 범위와 활동을 제한하려고 하는 시장 이데올로기로 논의된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는 그것을 통해 통치 활동들이 기술적 해법이 필요한 비정치적․비이데올로기적 문제로 개작되는 통치와 지식 사이의 새로운 관계로 개념화될 수도 있다.7) 실제로 통치 기술로 간주되는 신자유주의는 “최적화”를 위해 통치와 자기 통치를 합리화하는 매우 능동적인 방식이다. 따라서 통치 기술로서 신자유주의 계산의 확산은 상황적인 정치적 구도를 불균등하게 절합하는 역사적 과정이다. 민족지적 관점은 막 출현하려고 하는 노동과 삶의 구별되는 환경을 상호적으로 구성하는 시장 합리성, 주권, 그리고 시민권의 특정한 정렬을 드러낸다.

나는 예외로서의 신자유주의가 주권적 지배와 시민권 체제를 절합하는 비서구의 맥락에서 신자유주의의 능동적이고, 개입주의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춘다. 물론 예외로서의 신자유주의신자유주의에 대한 예외들 사이의 차이는 특정한 조사 환경에서 “규범적 질서”가 무엇인가에 따라 정해진다. 이 책은 신흥 국가들에서 예외들의 상호작용에 초점을 맞추는데, 이곳에서 신자유주의 자체는 통치 기술의 일반적 특징이 아니다. 우리는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자유민주주의에서뿐만 아니라, 탈식민주의, 권위주의, 탈사회주의적 상황에서도 신자유주의 개입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예외로서의 신자유주의는 시장 주도 계산이 특정 공간의 주민들과 행정의 관리에 도입되는 변화의 장소에 도입된다. 신자유주의적 예외, 시민권, 그리고 주권의 절합은 일련의 가능한 인류학적 문제들과 결과들을 낳는다.8)

동시에 신자유주의에 대한 예외들이 정치적 결정들 속에서 발동되어 신자유주의적 계산과 선택에서 주민들과 장소들을 배제한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예외들은 사회안전망을 보호하는 양식일 수도 있고 모든 형태의 정치적 보호들을 없애는 양식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러시아에서 도시예산 집행에 신자유주의적 기술들이 도입될 때에도 주택보조금과 사회적 권리들은 보존되었다.9) 동시에 동남아시아에서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예외들이 이주노동자들을 시장주도 정책들이 창출한 생활기준에서 배제했다. 다시 말해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예외들은 시민들을 위한 복지 혜택을 보존하는 동시에 자본주의 발전의 혜택에서 비시민들을 배제할 수 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적 예외들과 시장 계산에 대한 예외들의 작동에는 중복되는 것이 있다. 신자유주의적 기술들의 통치를 받는 주민들은 신자유주의적 고려에서 배제된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한다. 신자유주의적 규범에 종속된 주민과 공간을 이런 규범의 시연(試演) 외부의 것들과 절합하게 되면 윤리적 딜레마가 구체화되고, 사회적 평등과 공동의 운명이라는 기본적 가치들이 뒤바뀔 것이라는 위협이 생겨난다. 이어지는 장들은 예외들, 정치들, 윤리들의 상호작용이 진동하는 관계의 장을 구성하는 다양한 민족지적 환경들을 제시할 것이다. 통치와 피통치의 새로운 형태들, 그리고 인간이 된다는 것의 의미에 관한 새로운 관념들이 곧 출현하게 된다.

이런 접근법에서 나는 다른 사람들이 따로따로 다룬 ― 신자유주의와 예외라는 ― 두 개념을 합할 것이다. 통치기술로서의 신자유주의는 시민권과 통치 영역에서의 계산적 선택과 기술들에 의지한다. 푸코(Michel Foucault)에 따르면 “통치성”은 일상적 행실의 체계적․실용적 지도와 규제에 관한 지식 및 기술의 배열을 가리킨다.10) 푸코가 말하듯, 통치성은 “개인들이 서로를 상대할 때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전략들을 구성하고, 정의하고, 조직하고, 도구화하는” 일련의 실천을 포함한다.11)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은 시장 주도의 진리들과 계산들이 정치의 영역으로 침투하는 데서 비롯한다.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합리성은 많은 체제의 행동을 고취하고, 규율, 효율성, 그리고 경쟁력이라는 시장 원리에 따라 자기 관리를 유도당한 자유로운 개인들의 통치를 고취하는 개념을 제공한다.12)

정치적 예외란 칼 슈미트(Carl Schmitt)의 정식화에서 사법 질서와 일반적 규칙 외부에서 내려진 정치적 결정이다. 슈미트는 “주권자가 총체적인 상황을 만들고 보증한다. 그는 이 최종 결정에 대한 독점권을 갖는다. 여기에 국가 주권의 본질이 있고, 이는 강제나 지배의 독점권이 아니라 결정의 독점권으로 사법적으로 정확히 정의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13) 따라서 예외의 조건은 정치적 경계성, 일반화된 정치적 규범성에서 벗어나는, 지배와 피지배의 논리에 개입하는 비상(非常)한 결정이다. 슈미트적인 예외는 전쟁 상황에서 적과 친구를 그리기 위해 발동된다. 지오르지오 아감벤(Giorgio Agamben)은 예외를 사법 질서 내의 시민과 사법적-정치적 보호를 박탈당한 외부자 사이의 분할에 입각한 주권적 지배의 근본 원리로 사용한다.14)

대조적으로 나는 예외를 더 폭넓게, 즉 배제로도 포함으로도 전개될 수 있는 정책의 비상한 출발로 개념화한다. 통상적 이해에 따르면 주권의 예외는 보호를 거부당한 배제할 수 있는 주체들을 구획한다. 그러나 예외는 신자유주의 개혁과 관련된 “계산적 선택과 가치 지향”15)의 대상으로 선택된 주민들과 공간들을 포함하는 실정적 결정일 수도 있다. 나의 정식화에서는, 예외로서의 신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예외들 사이의 이음매를, 통치와 규율, 포함과 배제, 인간 행실에 가치를 부여하거나 부인하는 기술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탐색할 필요가 있다. 세계화 시대 예외의 정치는 통치와 경계설정의 변화된 기술에서 포함된 자들과 배제된 자들 모두에게 우려스러운 윤리정치적 함의가 있다. 이 책은 어떻게 예외의 시장 주도적 논리가 다양한 민족지적 맥락과 윤리적 위험, 가동된 질문들 속에서 전개되면서 시민권과 주권의 확립된 실천들을 뒤흔드는지를 탐구할 것이다.

예외들, 정치들, 그리고 시민권 사이의 상호관계는 현대 생활의 문제를 결정하며, 이들은 또한 오늘날 인간이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에 대한 윤리적 논쟁들을 틀짓는다. 예를 들어, 신자유주의적 예외들은 아시아적 배경에서 다양하게 발동되어, 시장 주도 선택과의 관계에서 공간들을 재정의하고, 경제 활동을 다시 도덕적으로 설명하며, 시민권의 사회적 기준을 다시 계산했다. 이런 절합들은 사전에 예측할 수 없는 우연적이고 모호한 일련의 결과들을 낳았다. 신자유주의적 결정들은 새로운 형태의 포함을 창출하여, 몇몇 시민 주체들을 떼어 놓고 비상한 정치적 혜택과 경제적 이득을 향유할 수 있는 새로운 공간들을 창출했다. 슈미트적 예외는 특정한 주민들을 버리고 그들을 정치적 규범성의 외부에 둔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적 예외들과 신자유주의에 대한 예외들 사이의 절합은 다양한 인간 범주에 배정된 도덕적 요구들과 가치들의 가능성을 증가시킴으로써 정치적으로 배제된 자들을 위해 다양한 정도의 보호가 협상될 수 있게 한다.

내 생각에 신자유주의와 예외의 결합은, 신자유주의적 이성과 메커니즘의 절합 및 탈구 속에서 시민권과 주권이 어떻게 변이되는지를 이해하는 데 다음과 같은 함의를 갖는다. 먼저, 신자유주의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통치와 시민권 사이의 연관에 대한 우리의 사고를 엄격한 사법적․법률적 관계로 바꿔 놓을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기술에서 생명정치적 통치 양식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중요한데, 이는 개인과 주민―통치 체제가 이용하거나 관리할 수 있는 살아 있는 자원으로서―의 역량과 잠재력에 중심을 둔다. 여기서 사용된 신자유주의는 두 종류의 최적화 기술에 적용된다. 주체성(subjectivity)의 기술들은 혼란스러운 시장 조건에서 시민들이 선택들, 효율성, 경쟁력을 최적화할 수 있도록 자기 고취와 자기 통치를 유도하는 전문가 체계와 지식의 배열에 의지한다. 이런 최적화 기술들에는 보건 체제 엄수, 기술 습득, 기업가 정신의 개발, 그리고 다른 자기 공학과 자본 축적 기술들이 포함된다. 종속(subjection)의 기술들은 점차 시장의 힘에 관여하는 공간적 실천들을 통해 최적의 생산성을 위해 주민들을 다르게 규제하려는 정치 전략들을 지시한다. 이런 규제들은 도시 공간의 요새화, 여행 통제, 그리고 성장의 중추(hub)에 특정 종류의 행위자들을 채용하는 것을 포함한다.

최적화의 개입으로서 신자유주의는 행정 전략들과 시민권의 실천을 바꾸는 조건들을 만들기 위해 지배 체제와 시민권의 체제에 상호작용한다. 이는 시장 논리가 정치에 침투하면서 민족 국가에 뿌리내린 법적 지위이자 무국적의 조건에 대한 뚜렷한 반대로서의 시민권의 관념을 개념적으로 뒤흔들린 결과다.16) 게다가 신자유주의적 예외는 경우에 따라 민족 영토 이하의 또는 반대로 민족 경계를 넘어서는 정치적 공간들에서 시민권의 요소들을 절합한다.

시민권을 창출하는 데 동반된다고 우리가 생각하는 요소들―권리들, 자격들, 영토권, 민족―은 시장의 힘들이 가동시키는 힘들에서 탈구되고 재절합된다. 한편으로 자격, 혜택과 같은 시민권의 요소들이 점차 신자유주의적 기준들에 연관됨으로써 인적 자본이나 전문 지식을 소유하고 있는 기동적 개인들의 가치가 더 높이 평가되고, 다양한 장소에서 유사시민적(citizen-like) 요구를 할 수 있다. 동시에 이처럼 매매할 수 있는 능력이나 잠재력을 갖고 있지 않다고 판단된 시민들은 평가 절하되고 따라서 배제의 실행에 공격받기 쉬워진다. 다른 한편, 시민권의 영토권, 즉 모국의 민족적 공간은 부분적으로 세계 자본주의의 영토권에 그리고 비정부기구(NGO)의 개입으로 지도에 나타나는 공간들에 배태된다. 이런 예외의 중복된 공간들은 시민권의, 혹은 인권의 보편적 체제의 관습적 통념에 깔끔하게 들어맞지 않는 인간 가치의 다양한 요구를 위한 조건들을 창출한다. 요컨대 시민권의 구성요소들은 새로운 공간과 개별적 연계들을 발전시켰고, 이로써 다양한 장소 및 윤리적 상황과의 연관 속에서 재절합되고, 재정의되고, 재상상되었다. 시민권의 구성요소들, 행위자들, 그리고 공간들의 이 같은 탈궤(脫軌)와 재접궤(再接軌)는 시장 전략들, 자원들, 행위자들의 분산과 재편성 때문이었다.

둘째로, 예외로서의 신자유주의는 정치적 개별성으로 오랜 기간 개념화되었던 국가 주권에 대한 연구를 세련되게 한다. 하나의 관점은 국가를 민족의 지형 전체를 평평하게 만들거나, 결국 하나의 단일한 국가 관료제를 강요하려 드는 기계로 본다.17) 실제에 있어서 주권은 다양한 요구들 및 논쟁과 마주치고, 다양하고 우발적인 결과들을 낳는 다중적이고 때로 모순적인 전략들로 나타난다. 나의 주장은 세계 시장과 규제 제도들의 상호작용 과정에서 주권적 지배가 새로운 경제적 가능성들, 공간들, 그리고 인민을 통치하는 기술들을 창출하는 예외들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예외는 민족 국가의 공간을 쪼개고 확장하는 방식으로 일정한 주권의 유연성을 가능케 한다. 예를 들어, 동남아시아와 동아시아에서, 구역화(區域化, zoning) 기술들은 시장의 힘과 연관된 집단들을 규제하는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특별한 공간들을 만들었다. 전략적인 정치․경제․사회 조건의 공간적 집중은 해외 투자, 기술 이전, 그리고 국제적 전문 지식을 특정한 고성장 구역에 끌어들인다. 시장 주도적인 공간 분단 전략은 다양한 범주의 인적자본에 대한 세계 자본의 수요에 대응함으로써, 이에 따라 인접하지 않은, 별도로 관리되는 “단계적” 혹은 “다채로운 주권”의 공간 유형을 낳는다. 게다가 기업들과 NGO들이 서로 다른 정치적 규모의 다양한 주민들에게 간접적 영향력을 행사함에 따라, 우리는 중복된 주권들이 출현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예를 들어, 최적화 기술들은 대도시들을 자원과 행위자 네트워크를 등록하는 중추에 재입지(立地)시켜, 대도시들을 별도의 생태계의 중추로 만든다. 사스키아 사센(Saskia Sassen)은 세계적 순회(巡廻)를 떠받치는 핵심 기능과 서비스를 통제하는 몇몇 “세계 도시들”―뉴욕, 런던 그리고 도쿄―라는 영향력 있는 모형을 제안한다. 이 초민족적 도시 체계는 “세계적 위계에서 주로 중간 범위에 속하는 남반구의 도시들”을 지배한다.18) 상하이, 홍콩, 그리고 싱가포르의 폭발적 성장은 신자유주의적 예외가 유발하는 다른 종류의 시공간적 상승 작용이 높아짐을 시사한다. 시장 주도 계산은 내외적 요소를 결합․재결합하는 새로운 가능성을 창출하여 이 도시들을 출현과 새로운 순환의 장소로서 재입지시킨다.

전략적 지식, 자원, 그리고 행위자의 상황적 동원은 진동하는 상호작용의 망을, 즉 초고속성장 지역의 범위를 확대하는 시공간적 “생태계”를 형성한다. 이 생태학으로서의 통치성(govermentality-as-ecology) 전략은 신흥 아시아 중심들을 기존 초민족적 도시 체계에 맞추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논리는 집(hometown, oikos)을 특정한 물질과 사회적 가치의 전략적 생산을 위해 다양한 요소들 사이에서 자체적으로 자아낸 공생관계 망에 재입지하는 것이다.19) 이 마이크로소프트 식 접근은 생태계의 다른 성원들이 각자의 성과를 높이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플랫폼”―“서비스들, 도구들, 혹은 기술들”20)―을 창출한다. 이것은 관습적인 도시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장소의 미래와 얽히게 되는 국제 기업, 연구 기관들과의 혁신적 협력을 위해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자본을 사용하는 중추 전략이다.

셋째로, 개방된 시장의 계산된 메커니즘은 민족적 경계를 가로지르는 자본, 지식, 그리고 노동의 새로운 배열과 영토화를 절합한다.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와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의 영향력 있는 저서인 『제국』은 경제적 세계화가 단일한 세계 노동 체제를 만들었다고 주장한다.21) 그러나 다양한 구역들과 특정한 네트워크들 사이의 복잡한 상호작용은 노동 규제의 통일된 전망에 대한 강력한 주장에 도전한다. 오히려 나는 자본의 다른 방향들이 노동 규제와 노동 규율이라는 서로 다른 축들을 조정하는 예외의 공간들―“씨줄”―을 만든다고 주장한다. 횡방향 생산 체계는 통치성의 늘임뿐만 아니라 다수의 장소를 가로지르는 강제적 노동 체제를 가능케 한다. 따라서 위도의 공간들은 광범위한 지역들에 걸쳐 노동권을 거의 고려하지 않고 작용할 수 있는 규제적․감금적 노동 체제의 혼성 혼합물에 의해 형성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씨줄적 통제는 다양한 장소들 사이로 노동이 이동하는 것에서 간헐적으로 생기는 뜻밖의, 자발적인 도전의 영향을 받는다.

넷째로, 자기 통치의 정신으로서 신자유주의는 특정한 맥락에서 다른 윤리 체제와 마주치고 절합한다. 개인주의와 기업가주의를 장려하는 시장 합리성은 시민권의 규범과 인간 삶의 가치에 대한 논쟁을 낳는다. 예를 들어, 동남아시아의 이슬람 공적 영역에서 신자유주의적 예외는 여성적 미덕에 대한 논쟁을 촉진한다. 울라마들(Ulamas)은 일하는 여성들의 새로운 자율성을 반대하는 반면 페미니스트들은 이슬람의 한계 내에서 일종의 성 평등을 요구한다. 초민족적 인도주의가 상황적 윤리들을 대체했다는 견해와 달리, 신분과 도덕의 문제들은 경제적 합리성, 종교적 규범, 그리고 시민권의 가치에 의해 형성된 특정한 환경에서 문제화되고, 해결되었다.

실제로, 정치적으로 주변화된 사람들의 서로 다른 정도의 정치적․도덕적 요구들은 논리와 힘이 변화하는 연결점에서 협상될 수 있다. 정상화된 시민권과 헐벗은 삶을 단순히 대립시키는 모형들에는 개념적 한계가 있다. 지오르지오 아감벤은 사법법률적 권리를 향유하는 시민들과 “구별불가능성의 지역”에 거주하는 배제된 집단들 사이의 현저한 대조를 묘사한다.22) 그러나 특정 상황들에 대한 민족지적 연구는 정치적으로 배제된 자들을 위한 협상들이 불명확하거나 모호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실제로 이것이 특정 환경의 도덕적 문제들과 요구들을 확인하고 절합하기 위해 모든 곳에서 NGO들이 하고 있는 복잡한 작업이다. 때때로 시민권 혹은 유사시민권적 보호를 빼앗긴 사람들의 단순한 생존을 추구하면서 심지어 기업 합리성이 발동될지도 모른다. 인도주의적 개입들은 일률적 방식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종횡하는 관계의 변하는 장을 협상해야만 한다.

예외로서의 신자유주의는 서로 환원되지 않는 구성적 관계의 배열을 절합한다. 오히려 민족지적 탐구는 이를 통해 문제들이 해결되는 시공간적 상호관계의 상황적 실천들과 시장 주도 메커니즘 사이의 새로운 상호작용을 드러내 준다. 자기 통치의 기술들은 시민권의 요소들을 절합하고, 자기 경영적 가치들은 이동가능한 사회적 자격으로 번역되고, 기동적인 기업가 주체들은 다양한 장소들에서 유사시민권적 혜택들을 요구할 수 있다. 동시에 통치의 신자유주의적 예외는 다르게 규제되고 세계적 순회에 연계되는 정치적 공간들을 구성한다. 이런 사회 공학(engineering)과 자기 쇄신(reengineering) 같은 반영적 기술들은 다양한 윤리 체제와 상호작용하면서, 시민권과 윤리적 생활에 대한 현대의 문제들을 결정한다.

이 서문의 나머지 부분은 다음과 같은 절로 나뉜다. 첫째로 나는 신자유주의의 이론들을 개관하고 왜 통치 기술로서의 신자유주의가 시민권과 주권의 현대적 변이에 대한 민족지적 연구에 유용한 개념인지를 논의할 것이다. 둘째로, 나는 시장 중심 합리성과 탈궤 및 재접궤할 수 있는 요소들의 집합이라는 시민권 개념을 제안한다. 셋째로, 신자유주의적 예외는 규범성과 예외의 단순한 대립이나 개별성이 아니라 안전, 삶, 그리고 윤리를 구성하는 이질적인 계산들, 선택들, 예외들의 변하기 쉽고 유연한 집합으로서 주권을 다시 생각하는 데 결정적 분석이다, 마지막 절은 어떻게 신자유주의 기획들과 도덕 경제들의 절합이 인간에게서 시민권을 빼앗을 뿐만 아니라 헐벗은 삶을 보호한다는 이익을 위해 재편성되는지를 논의할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양상들


개념으로서 신자유주의의 계보를 짧게 개관해 보자. 신자유주의에 대한 분석적 논의는 20세기 초 자유 시장 메커니즘이 인간과 지구의 운명의 유일한 지도자가 되도록 내버려 두는 것에 대한 칼 폴라니(Karl Polanyi)의 경고로 시작해야 한다. 폴라니의 유명한 주장은 근대사회의 특징이 “이중 운동”이라는 것인데, 여기서 자본의 자유로운 순환은 대항력을 만난다. 현대의 삶에 자유 시장이 미친 파괴적이고 분열적인 효과에 맞서는 자기 보호의 정치적 요구가 그것이다.23) 폴라니는 국가의 입법이 시장을 규제하고 이로써 사회를 보호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폴라니의 적수들은 법과 사회적 규범들이 사회에서 자원이 최선으로 사용되도록 보장한다는 것에 회의적이었다. 오스트리아 철학자인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Friedrich von Hayek)는 대안적 경제 이론을 주관적 수준에서 제안했는데, 이 이론은 자기 이익의 극대화를 목적으로 하는 개인적 행동들을 공적 자원들이 효율적으로 배분될 수 있게 보장하는 핵심 메커니즘으로 간주한다. 하이에크의 자유주의의 핵심은 경제적 인간(Homo economicus)으로, 이는 시장 경쟁의 활기찬 조건에서 만들어진 도구주의적 형상이다.24) 하이에크의 관념은 1960년대 신자유주의 시카고 학파의 선도적 제안자였던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25)과 게리 베커(Gary Becker)26)에게 영향을 끼쳤다. 이 학설은 1980년대 신자유주의의 첫 번째 물결인 대처리즘과 레이거노믹스와 연관되게 된다. 국내에서 신자유주의 학설은 “큰 정부”와 관료적 복지 국가를 공격하는 데 이용되었다. 기업화와 사유화를 늘리고 “효율성”을 도입하기 위해 국가의 공적 부문을 개혁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해외에서는 해외 시장 접근을 개방하기 위해 경제 자유화가 증진되었다. 이런 정책들은 동구권에 수출되었을 때 “워싱턴 컨센서스”라고 불리었는데, 이는 사회주의 경제들을 경제 경쟁으로 끌어들이도록 개혁하는 일련의 “조정” 전략이었다.27) 해외에서 이런 사유화와 개방경제 정책들은 “미국식 신자유주의”, 혹은 경제적 세계화라 불리었는데, 즉 무역 블록의 형성을 통해 민족에서 지역 수준으로 경제 계획의 국제적 변화를 지지하는 정책이다. 

1990년대에 신자유주의는 프란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와 제프리 삭스(Jeffey Sachs)와 같은 새로운 세대의 경제학자들에 의해 시장 경제의 진화에서 불가피한 종점으로서 이해되었다. 조지프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와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 같은 유명 인사들은 경제 세계화의 사회적 결과들을 비탄했고 자유롭게 배회하는 시장의 파괴에 반대하는 정치적 방어를 역설했다. 그러나 논쟁들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찬반을 심사숙고하는 동안, 대부분이 신자유주의가 “특정한 종류의 진보적 근대화의 표현”이라는 데 동의했다.28) 이 신자유주의의 두 번째 물결에서는 신자유주의적 특성들의 개인적 내면화가 강조되었는데, 이는 새로운 방식의 주체화 기술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클린턴 정부 하에서 “개인에게 책임지우기”는 보건과 교육처럼 이전에 보조금이 지급되던 영역의 새로운 규범이 되었으며, “근로연계복지” 사업의 원리로서 이용되었다.29) 요컨대 정치철학으로서 신자유주의의 주요 요소들은 (1) 공적 자원의 분배에 있어서 국가보다는 시장이 낫다는 주장과 (2) “‘경쟁적’․‘소유적’인, 그리고 종종 ‘소비자 주권’의 학설에 의해 해석되는 개인주의의 초기적 형태”로의 회귀다.30) 신자유주의의 추론이 경제적(효율성)이고 윤리적(자기 책임)인 주장 양자에 기반을 둔다는 것이 중요하다.

인문과학에서는 신자유주의가 현대 생활의 다른 측면들을 평가하는 최고의 힘이 되었다는 것에 대한 광범위한 동의가 있다. 그러나 여전히 시장 합리성의 범위, 조직 그리고 지식-권력의 차원에 대한 불일치가 있다. 사회 현상으로서 신자유주의는 민족적․세계적 수준에서의 구조 변화와 계급 이데올로기라는 마르크스주의적 개념들의 재구성을 통해 주로 연구되었다. 신좌파의 비판은 신자유주의를 영국과 같은 선진 자유주의 국가에서 복지 국가를 공격하는 계급에 기반을 둔 이데올로기로 본다.31) 더 넓은 수준에서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의 구조적․헤게모니적 세계 지배의 최종 단계로 개념화된다. 예를 들어 스티븐 길(Stephen Gill)은 신자유주의가 민족 국가와 초민족적 기관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준법률적 재구조화에 의지하는 획기적인 질서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 국제 규율 체제가 “시장 문명”과 관련된 사회적 위계와 불가피한 진보라는 헤게모니적 개념을 동반한다고 주장한다.32)

이런 양상들은 신자유주의적인 북반구 대 포위당한 남반구라는 구조를 만드는 인류학의 두 학파를 낳은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는 북반구의 “신자유주의 문화”가 초자연적 경제, 메시아주의 운동, 그리고 다른 사회적 격변을 포함하는 남반구의 대응을 낳았다고 본다.33) 두 번째 관점은 “신자유주의 국가들”이 “세계적 수준에서” 자본을 집중하고 권력을 독점한다고 본다. 데이비드 하비(David Harvey)는 “신자유주의 국가”를 이상적 유형으로 내세우고 이에 따라 의식하지 못한 채 국가를 개별적인 실체로 제시한다. 이런 접근은 세계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역동적인 지역인 동아시아와 대면할 때 개념적 문제에 마주친다. 하비는 “중국의 이상한 경우”를 언급하는데, 이는 명백히 중국의 사회주의적 구성체와 열광적인 자본주의 활동의 공존을 조정하는 분석적 어려움 때문이다.34) 앞으로 볼 것처럼 신자유주의적 개입들과 아시아 정치 문화의 역동적이고 새로운 결합은 단순한 지정학적 남-북 축, 혹은 민족 국가의 유형학에 기반을 둔 유형학적 접근에 도전한다. 우리는 지배적 국가들에서 시작해 소규모 국가들에 이르는 맹렬한 시장 주도 현상의 조류로 신자유주의를 다루는 것보다는, 다양한 기술들로 쪼개 보는 것이 더 유익할 수 있다. 주권적 실천을 허용하는 정치적 예외나 기존의 규범에서 벗어난 주체화 기술 같은 종류로 말이다. 동아시아 환경을 절합하는 신자유주의적 형태들은 대개 지방 문화적 감수성 및 민족적 동일성과 긴장 관계에 있다. 기술관료들이 기업 의제들을 채택하고 인간 재능과 자기 경영의 이상을 정당화하는 동안, 많은 일반인들은 시장 기준 및 그것이 집단적 가치와 공동체의 이익에 가하는 공격에 대해 계속 양면적․회의적이다. 민족지적 연구가 마주한 도전은 “적절한” 행동 규모―민족이나 세계 또는 지방―를 찾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예외가 낳는 변이의 변동선을 조사할 수 있게 해 주는 분석적 각도를 식별해 내는 것이다.


통치기술로서 신자유주의


인류학자로서, 우리들은 거대 이론에 회의적이다. 우리는 현대 생활의 이질적 상황들에 대한 상황적 민족지 연구의 프리즘을 통해 커다란 문제들을 제기한다. 몇 년 전, 클리포드 기어츠(Clifford Geertz)는 해석적 접근에는 “지반에 좀 더 가까이 머무르는 이론이 필요하다. … 오직 짧게 번뜩이는 추론만이 인류학에서는 효과적인 경향이 있다. 더 긴 것은 형식적 대칭 속에서 학술적 멍함과 논리적 꿈에 빠져드는 경향이 있다.”고 썼다. 오늘날 우리의 질문은 “우리의 주제들이 살고 있는 개념적 세계”를 넘어서지만,35) 우리 접근은 여전히 저공비행이라는 특징, 담론적․비담론적 실천들에 가까이 머무르는 분석적 관점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우리의 목표는 다양한 인간 상황의 변이에서 관찰할 수 있는 현대 인간 현상을 중간범위에서 이론화하는 것이다. 우리는 조사의 장소나 대상을 구성하는 구도들 안에서, 요소들을 탈구하고 재절합하는 변동선을 포착하려고 한다. 따라서 신자유주의를 “문화”나 “구조”가 아니라 원래의 자원에서 탈맥락화할 수 있고, 상호 구성적이며 우연적인 관계들의 구도들 안에서 재맥락화할 수 있는 기동적인 계산적 통치 기술로 연구하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이 환경은 문제와 그 해결의 장소인 중간적 공간이다.36)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은 “생명권력”이라는 푸코의 개념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데, 이는 근대적 통치 양식으로 “생명과 생명의 메커니즘을 정확한 계산의 영역으로 만들고 지식/권력을 인간 생활을 변형하는 행위자로 만든다.” 생명의 관리에 집중하는 이 정치적 기술은 발전의 양 극 사이에서 동요한다. 한 극이 집중하는 것은 “기계로서의 신체다. 곧 신체의 규율, 신체 능력의 최적화, 그리고 그 힘의 강탈”이다. 다른 극이 초점을 맞추는 것은, 생물학적 기계장치이자 집단적 복리와 재생산의 기초인 종(種)으로서의 신체다.37) 따라서 생명정치는 생명력을 이용하고 추출하기 위해 주민들과 개인들에게 행해지는 일련의 규제적 통제들을 가리킨다. 신자유주의는 인간의 삶을 통치하는 이런 기술들의 가장 최근의 발전에 지나지 않는다, 즉 근대 인간의 정치적 실존을 끊임없이 문제삼는 종속과 주체 형성의 정치를 위해 시장 지식과 계획에 의지하는 통치성일 따름이다.

영국의 통치성 학파는 신자유주의를 개인의 능동적 자유의 조건을 논리로 갖는 통치 기예로 보는 이론을 제안한다.38) 이들의 관점에서 볼 때 신자유주의는 일반 경제 학설이 아니라 “자유로운 인간, 시민, 주체의 자활적인 능력을” 근대 통치의 정언명령의 근거로 삼는 기술이다.39)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경험적 기획에서 어떻게 신자유주의―자유로운 정치 질서의 기초로서 경제적 인간이라는 하이에크의 처방40)―가 다양한, 현대적 상황들에서 번역되고, 기술혁신되고, 작동되는지에 대해 조사하려고 한다.

니콜라스 로즈(Nikolas Rose)는 “자유를 통한 통치” 양식으로서 신자유주의가 영국과 다른 선진 자유민주주의에서 지배적 통치 양식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국가를 “축소시키는” 신자유주의 정책들은 사회적인 것과 시민 주체들을 개조하는 기술의 확산을 동반한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적 논리는 주민들이 일상생활의 서로 다른 영역에서 ― 보건, 교육, 관료제, 직업 등 ― 자유롭고, 자기 관리적이며, 자기 경영적인 개인들이 될 것을 요구한다.41) 따라서 신자유주의적 주체들은 국가에게 요구하는 시민이 아니라 “그/녀 자신의 기업가”가 되도록 강요받는 자기 경영적인 시민 주체다.42) 예를 들어, “제 3의 길”이라는 깃발 아래에는 공동체 수준의 책임, 그리고 개인적 주체들이 스스로를 책임져야 한다는 새로운 요구들에 대한 새로운 강조가 있다.43) 신자유주의적 기술은 통치, 자기 통치, 그리고 정치적 공간들 사이의 연관을 재조직하여, 세계화된 불확실성과 위협에 기술적․윤리적으로 응답하는 조건을 최적화한다.

정치적 합리성으로서의 신자유주의가 선진 자유민주주의의 환경에 국한되지 않는 것이 분명하지만, 북대서양의 상황 외부에서는 거의 조사되지 않았다. 실제로 “경제적 세계화”는 복수의 세계적 장소들을 가로지르는 신자유주의의 합리성이 이렇게 탈배태되고 재배태되는 것을 가리킨다.

예외로서의 신자유주의는 탈식민주의, 권위주의, 그리고 탈사회주의처럼 다양한 정치적 환경에서 전개된다.44) 신자유주의적 계산과 선택의 확산을 부추긴 것은 신흥 국가들에게 “정치적 기업가주의” 따위를 처방한 세계은행 같은 국제 기관들이었는데, 이 나라들에서는 평생 학습과 전문지식 담론들이 시민들이 국제지식시장에서 자기 관리하고 경쟁할 것을 권장했다.45) 삶을 최적화하는 데 집중하는 기술들의 배열로서의 신자유주의는 곳곳으로 이동하며, 이 과정에서 대대적인 “신자유주의”의 단일한 국제적 조건들의 사례로 분석적으로 환원할 수 없는 다양한 배치들과 상호작용한다. 그렇다면 시민권의 윤리와 변화하는 형태를 우리가 사고하는 데 ― 예외로서의, 그리고 이에 대한 예외인 ― 신자유주의 통치 양식들의 개념적 함의는 무엇인가?


시민권의 절합과 탈구((Dis)Articulation of Citizenship)


일상 생활 위를 맴도는 분석의 관점은 계속되는 사회적 힘들과의 관계에서 윤리의 끊임없는 조정․재조정을 찾아낸다. 특히 시장 주도의 강요는 서로 다른 방식들로 시민권의 요소들을 재편성하면서, 한편으로 시민권의 통일된 모형을, 다른 한편으로 시민권 요구의 민족적 틀에 도전한다. 시민권의 시간적 차원이 우리가 이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덜 고정적이라는 것이 점차 명확해지고 있으며, 관념들과 사람들의 흐름이 시민권 보호를 감소시키며, 요구들의 새로운 절합이 새로운 정치 공간들에서 출현한다.

지금까지 시민권의 유력한 개념들은 민족 영토에 뿌리내린 시민권의 권리들과 민족 국가 외부의 무국적 조건 사이의 이항대립에 근거하고 있었다. 이 정치적-사법적 개념은 오직 민족 국가만이 인정된 정치적 소속을 통해 요구된 보호와 시민권의 자격을 부여할 수 있다는 실제 현실에 근거하는 것이다.46) 실제로 정치적 지위로서의 시민권은 망명자와 난민들에게 계속해서 대단히 중요한 것이 되었는데, 이들에게 망명하는 국가에서 시민권을 얻는 것은 근대적 인간으로 인정받는 가장 기본적인 조치다.47)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과 이주자의 현대적 흐름은 한때 단일한, 영토화된 전체 속에서 얽혀 있던 시민권 요구를 풀기 위해 복잡한 방식으로 주권과 권리 담론에 상호작용해 왔다.

많은 사람들이 썼던 것처럼 형식적 시민권만으로는, 투표를 하고 정치 생활에 참여할 수 있다거나(정치적 권리들), 혹은 법 아래서 평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시민적 권리들) 것이 좀처럼 보장되지 않는다. 따라서 마샬(T. H. Marshall)은 평등한 시민들로서의 지위를 하락시키는 여성, 빈민, 소수자, 그리고 성적․계급적․인종적 차별 때문에 공격받기 쉬운 여타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보장의 필요성을 묘사하기 위해 사회적 권리라는 단어를 새로 만들어냈다.48) 이 20세기 초의 시민권 개념은 ― 상상된 정치적 동일성으로서, 평등한 권리에 대한 권리로서 ― 민족 국가가 상대적으로 안정적이고, 민족 영토에 고정된 일반시민을 통제한다는 가정에 근거하고 있다.

최근 권리 담론은 세계화의 흐름과 분란을 통합함으로써, 민족 국가의 범위를 넘어 시민권이 공유되는 공간을 개방하는 전략을 도입했다. 이 개방은 유럽연합(EU) 내의 지방적․지역적 수준에서 다양한 시민권 요구에 대한 논쟁을 가능케 했다. 권리옹호 운동들은 권리들과 혜택들의 다른 묶음으로 시민권이 “해체”되고, 이에 따라 유럽 국가들이 다양한 비(非)유럽 이주자들과 비(非)시민들을 다르게 통합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49) 혹자는 제한된 혜택들과 시민의 권리들이 부분적 시민권의 형태, 혹은 이주 노동자들을 위한 “탈민족적” 정치 소속을 구성한다고 주장해 왔다.50) 이런 탈민족적 시민권 주장들은 형식적 시민권 없이 이주자들이 얻은 이득들을 과장했을 수 있다.51) 또한 지배적 권리 담론에도 불구하고, 부정적인 해체 과정 역시 진행 중이라고 덧붙일 수도 있을 것이다. 세계 시장에 대응하면서 (특히 독일에서) 복지 국가가 축소된 것처럼 마샬적인 사회적 권리는 파괴되었다. 유럽에서는 이주자에게 유리한, 또 노동자들의 이익에는 반하는 권리와 혜택의 해체 과정이 진행 중이다.

나는 시민권의 탈구와 재절합을 다르게 생각한다. 시민권 요소들의 새로운 정렬이 근본적으로 기동적인 신자유주의적 통치와 자기 통치의 기술들이 낳은 역동적이고 다양한 조건들에 연계되어 있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족쇄가 풀린 자본주의의 기술들과 시민권의 요소들 사이의 분리와 재연결에는 시․공간적 차원이 있다. 첫째로, 이전에 시민권에 묶여 있던 구성요소들―권리들이나 자격들, 또 민족과 영토―은 서로 탈구되고 있으며, 타자들이 아니라 주체들의 특정 범주를 정의․평가․보호함에 있어 경제적 논리를 조장하는 통치 전략에 재절합되고 있다. 일부 환경에서, 신자유주의적 예외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계산적 실천들 그리고 우선적 시민으로서 자기 통치적 주체들이다. 동시에 주민의 다른 부분들은 신자유주의적 기준에서 제외되고 이에 따라 시민과 주체에서 배제할 수 있게 된다. 개인적 능력 혹은 시장 기술 수행의 차이는 기존의 사회적․도덕적 불평등을 강화하는 한편 민족과 외국 주민들 사이의 정치적 차별을 흐리게 한다.

세계적 순회에서, 교육받고 자기 추진적인 개인들은, 심지어 영토화된 시민들을 희생하면서까지, 유사시민권적 자격과 혜택들을 요구한다. 국외로 이주한 인재들은 형식적 시민권 없이 움직일 수 있는 자격의 형태를 구성한다. 심하게 자기만족적이거나 혹은 신자유주의적 잠재력이 부족한 것으로 간주되는 시민들은 가치가 떨어지는 주체들로 다루어질 수도 있다. 저숙련 시민들과 이주자들은 신자유주의 메커니즘에 대한 예외가 되고, 수송 중인 배제가능한 인민들로 구성되어, 성장 지역의 내외를 왕복한다. 우리는 특정한 권리들과 혜택들이 시장성이 높은 재능 보유자들에게 분배되고, 이런 능력이나 잠재력이 부족한 것으로 판단되는 사람들에게는 부인되면서, 정치적 소속과 민족 영토에서 자격들이 분리되는 것을 볼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예외는 법률적 시민 신분에서 분리할 수 있는 분배적 정의의 도덕화된 체계와 동맹을 맺고 있다. 시민권의 요소들, 기업가적 특성, 그리고 세계적 순환 사이의 절합은 우리가 오랫동안 시민권의 통일된 공간들과 동질적 집단성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쪼갠다. 신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예외의 기술들, 그리고 시민권 요소들의 탈구와 재절합에 개념적 초점을 맞추면 시민권과 가치부여적인 기준에서의 변이들을 조사하는 문제 공간을 식별할 수 있게 된다.

둘째로, 절합들은 담론적 실천들을 전위의 조건 안에서 계속되는 시민권의 협상으로서 지시하기도 한다. 개념적 시간성으로서의 절합은 시장 합리성, 정치, 그리고 윤리의 특수한 배치 안에서의 우연적인 출현으로서 요구들을 탐구할 수 있게 해 준다. 정세적 공간 내의 모순적 요소들의 번역이나 담론적 협상에 대한 강조는 요소들 사이의 예정된 반대나 적대적 입장을 슬쩍 비껴나지만, 예상치 못한 가능성들과 해법들에 대한 개념적 개방성을 유지한다. 호미 바바(Homi Bhabha) 역시 권력의 역류에서 새롭게 전유되고 재해석되면서 문화적 의미의 불안정성을 유지하는 “언표행위의 모순적이고 모호한 공간”에 대해 언급한다.52) 맥락 특수적인 질문들은 어떻게 대립하는 해석들과 요구들이 신자유주의적 논리들과 주도권들을 방해하고, 늦추며, 빗나가게 하고, 협상할 수 있게 하는지를 포착하게 해 준다. 이 변동하는 공간의 전달, 번역, 그리고 협상의 시간성은 정치적 정교화, 우연성, 모호성으로 가득 차 있다.

이질적 사건들과 힘들의 교차지점에서 있는 언표행위의 시간성은 세계시민적 시민권의 전면적인 요구들에 신중해야 하는 이유가 된다. 예를 들어, 위르겐 하버마스는 탈규제된 시장의 맹공격과 그것이 공적 생활에서 “민주주의의 결핍”을 만드는 것을 탄식했다.53) 그는 사회 보장, 공적 사회 서비스, 성적․계급적 규범, 사형제도 폐지 등과 같은 소중한 이상들을 방어할 수 있는 유럽 전체 수준의 공적 영역과 헌법의 창설을 요청했다. 유럽 문명과 공유된 정치적 민주주의 문화에 대한 이런 요구들은 증가하는 세계시민주의 사고와 감정들, 세계시민주의 시민권 담론의 출현을 반영한다. 유럽의 논평자들은 국제연합(UN)과 인권기구들과 같은 다자적 기관들의 활동에서 새로운 세계적 공적 영역을 지목해 왔다.54) 그러나 더 큰 포괄성과 연대의 감정은 세계시민주의 제도들의 실질적 창설과 융합할 수 없다. 실제로 일부 관찰자들은 칸트의 세계시민주의에서 영감을 얻은 다원화된 세계 공동체들은 여전히 현실보다 훨씬 이상적이라고 주장한다.55) UN은 자신의 많은 인권적 수단들을 집행할 힘이 부족하며, 인도주의적 개입들을 주창하는 ― 혹은 군사적 침략을 개시하는 ― 선도국들의 영향력에 매우 크게 좌우된다. 실제로 미국의 이라크 선제공격은 세계시민적 권리라는 이상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으며, 어떻게 UN이 모든 인류를 위해 이야기한다는 잃어버린 권한을 회복할 것인지는 불투명하다. 게다가 세계시민주의의 가치들―개인주의, 보편성, 그리고 일반성―은 역사적으로 비-유럽 사회들의 정복과 변형에 연관되기도 했다.56) 세계시민주의의 담론들은 제국주의의 문명화 사명의 결정적 일부였고, 따라서 이전에 식민지 경험을 겪은 나라의 인민들은 이를 회의적으로 대했다.57) 따라서 우리의 시민권 분석에서 중요한 것은, 예정된 불가피성의 목적인에 의지하지 않고 시․공간적 상호관계의 장 안에 있는 언표행위의 상황적 본성을 특정하는 것이다. 지정학, 시장 논리, 예외들, 그리고 윤리 담론의 상황적 얽힘은 우연성, 양가성, 불확실한 결과들에 대해 개념적으로 열려 있을 필요가 있다.


주권과 예외


최근 몇 년 동안 주권의 공간성은 근대 권력의 본질에 대한 질문에서 핵심 쟁점이 되었다. 한 입장은 “신 국제 관계” 학파다. 존 러기(John Ruggie)는 세계화가 국가 권력을 약화시킨다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주권이 “영토적으로 정의되고, 고정되며, 적법한 지배의 상호 배제적 비지(飛地)”의 속성이라고 단언한다.58) 이 단일한 공간성과 대조적으로, 포스트식민주의적 관점은 도시-농촌 분할에 기반을 둔 “이원적 국가”의 식민지 유산이 아프리카의 주권 지배를 계속 구조화한다고 주장한다.59) 아프리카의 주권에 대해 더 미묘한 관점은 수도에 고립된 국가 장치들, 요새-창고, 법인 비지, NGO가 관리하는 공간들에 대한 묘사를 포함시킨다.60) 나의 관심은 이것들과 중복되지만, 나의 개념화는 이전의 식민지 분할 통치, 군국주의적 축적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약탈자들, 혹은 “세계 자본”과 NGO들의 침략 안에서 공간적 동역학을 찾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르다.

그보다 내가 초점을 맞추는 것은 한편으로 신자유주의적 예외의 선택적 배치이며, 다른 한편으로 주권의 공간화하는 실천에서 도구화되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예외다. 신자유주의와 그 예외들에 의해 절합되는 이 공간화의 동역학은 동아시아의 환경에서는 다른데, 여기서는 아프리카의 약하고 분산된 정치 구성체와 비교할 때, 국가가 더 강건하고 집중화하는 경향이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국가 주권에 대한 슈미트의 관점은 정치적 규범성에 대한 예외에서 야기되는 위기 및 도전에 대응하는 전략적․상황적 권력 행사에 기반을 둔다. 그는 “모든 법은 ‘상황의 법’”이라고 주장한다.61) 예외의 우발적인 이용―신자유주의적 기술이나 신자유주의의 배제처럼―은 몇몇 아시아적 맥락에서 능숙하게 적용된다.

예를 들어 중국이 세계 무대에 재등장할 때의 특징은 “경제특별구역”(SEZS, 경제특구)과 “행정특별구역”(SARS, 행정특구)의 창설이었다. 이 새로운 공간들은 노동시장의 특별한 공간들, 투자 기회, 그리고 상대적인 행정적 자유를 구획하는 메커니즘과 절차에서 제도화된 계산적 선택의 기술에 의해 출현했다. 이 공간들을 구역으로 약호화하는 계산적 메커니즘은 특별과세와 투자 계획, 도시 예산, 기간산업 개발, 그리고 어느 정도의 자율적 통치를 포함한다. 이 경우 예외의 논리는 집중화된 사회주의 생산의 위기에 대응하고, 국가의 나머지 지역들과 근본적으로 맞지 않는 공간과 조건들을 만들어 낸 시장 개혁을 시작하기 위한 것이다.(4장)

아시아의 환경에서 예외의 선택지는 국가가 그들의 영토를 분할해서 세계 시장에서 더 잘 종사하고 경쟁할 수 있도록 한다. 신자유주의적 계산들은 인간 영토권의 실천, 혹은 지정학 공간의 재기입을 통한 주민의 통제에 적용된다.62) 중국의 사례가 예증하는 것처럼, 구역화 기술은 경제적 자유와 기업가 활동의 실험을 위한 대안적 영토성을 부호화한다. 예외의 논리는 세계적 순회의 특정하고 다양하며 우연적인 관계의 형성을 위해 인간 영토권을 분할한다. 이에 따른 단계적 혹은 다채로운 주권의 유형은 국가가 세계적 도전에 맞서는 동시에 질서와 성장을 확보하는 양자를 할 수 있도록 보장한다. 예외의 논리를 통해 산출된 이런 전략들이 자유 시장 이데올로기, 근대 정치적 자유주의, 그리고 참여적 시민 주체들의 “계몽”에서 일괄적으로 벗어나 있다는 것에 주목하는 점 역시 중요하다. 국가가 형식적 주권을 계속 유지하는 동안, 기업들과 다자적 기관들은 특별 구역에서 주민들의 생활․노동․이주 조건에 대해 사실상의 통제를 빈번하게 행사한다. 주권 국가에서 융합되었던 행정적 통제, 시민권, 영토성이 따로 떨어져 작동하는 것에서 우리는 사실상 중복하는 주권들을 보게 될 것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적 예외는 주권과 시민권 사이의 솔기를 억지로 열고, 이 과정에서 자신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국가 너머를 보아야만 하는 저숙련 시민들과 이주자들의 연속적 수준의 불안전을 낳는다.63)

따라서 예외는, 서로 구별되는 경제 활동이 복수의 단계를 지닌 구성체 안에서 뒤섞인다는 정도의 관점에서 제시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는 혁신적 공간 행정을 제도화할 수 있게 해 준다. 어떤 사람들은 경제적 세계화의 공간을 조사하는 적절한 규모가 지방, 도시, 주, 국가, “지역 경제”와 같은 기존의 행정 단위라고 본다.64) 다른 관점은 국제적 힘들의 효과가 개인, 도시, 민족, 그리고 지역적 규모에 따라 동요한다고 생각한다.65) 그러나 규모의 언어는, 그 자신을 너무 곧이곧대로 믿을 위험이 있는 개념적 구조물을 투영한다.66) 이 규모의 이미지는 우리가 공간을 “끊임없이 변하는 것으로” 보고, “물질성을 끊임없이 출현하는 과정으로 재묘사”해야 할 때, 시장적 계산은 정치적 전망의 경제학적 구조화에 관심을 갖는다는 점을 시사한다.67) 예외 공간의 논리는 공간들이 항상 이전의 정치적 경계들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자원과 흐름의 신중한 동원이 제공하는 기회들과 관련지어 인간 영토권을 분리하는 신자유주의 계획들에 의해 출현한다.

예를 들어, 주권의 예외는 “외부” 공간들과 주민들 모두에 대해서 더욱 유연해졌다. 아시아의 어떤 맥락에서는 유동적 “생태계”라는 용어로 외부 환경의 탄력적 가능성을 기술정치적으로 재개념화한다. 민족 국가는 고정된 영토권이라는 식의 개념에서 벗어나서, 기업가적 통치성은 광범위한 자원들에서 전문가, 지식, 그리고 기술들을 입수해 온다. 최적화의 논리와 상호작용의 밀도에서 오는 공생적 상호의존 및 상승작용이라는 생태적 원리 사이에는 흥미로운 수렴점이 있다. 기술관료들이 아시아의 도시들과 도시의 외부 환경을 재설계함에 따라, 민족적 영역은 특화된 마디들로 분할되고, 세계 자본주의의 “활발한 생태계”에 배태된 집(oikos)으로 확장된다. 예를 들어, 싱가포르의 기술관료들은 생명기술 연구의 미개척분야를 활기 있게 개발하기 위해 지식 자본, 연구 기관, 그리고 과학자들을 모으고 있다. 생명 형태의 임계질량 사이에서 벌어지는 상승 작용, 공생, 적소 형태, 양성 등 생태적 원리는 생명정치적 상호관계로 탈구, 재절합되는 초민족적 공간에 모국을 재입지하려는 정치적 전략을 고취시킨다.

우연적 공간화는 예외의 논리가 초민족적 생산 네트워크의 규율적․규제적 체제를 혁신적으로 결합할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을 드러낸다. 한편으로 경제적 세계화의 지도제작법은 국제적․민족적․거대도시적․지방적 수준의 위계적 도식이라거나, 규제적 서구 사회 대 규율적 아시아 사회로 분할되지 않는다. 다른 한편, 하트와 네그리는 질 들뢰즈(Gille Deleuze)를 통해서 우리가 규율 사회에서 통제 사회로 이행하고 있다는 획기적인 주장을 했는데, 후자에서 통제의 “메커니즘”은 특정한 규율 기술의 작동을 통하기보다는, 더 “민주적”이 되고 “시민들의 두뇌와 신체를 통해 분배된다.” 통제 체계는 “부유적”(浮游的)이고 본성상 조절적이며, “탈약호화되고 탈영토화된 흐름들의 고른 공간”을 산출한다. 노동 체제가 세계적으로 단일하다는 가정에 힘입어 하트와 네그리는, 생산력의 “탈지역화”가 노동 착취를 탈맥락화하고 “비배치가능하게”(non-placeable) 만든다고 주장한다.68) 설사 이 정식화를 성급하게 받아들인다 해도, 유연한 초민족적 네트워크를 비규율적 노동과 연관시키는 것은 잘못인데, 왜냐하면 민족지적 연구가 보여 주듯 초민족적 생산체계는 노동 통제의 감금적 양식을 계속해서 활용하기 때문이다.

세계 자본주의의 예외의 논리는, 통치성의 체계와 노동 감금 체제의 조정에 의해 형성되는 홈이 파인 공간들―혹은 “씨줄들”―을 새겨 넣는 초민족적 네트워크 안에서 노동과 관리 체제가 결합할 수 있게 해 준다. 게다가 연구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노동 전술과 반란들은 몹시 맥락 특정적인 경향이 있으며, 이들은 세계적 시민권이라는 약속을 가지고는, 세계적 대중운동 혹은 다중들과 쉽게 합체되지 않는다. 요컨대 기업 경영의 실행이 매우 기동적일지라도, 다양한 구역들에서 이를 전달․번역․실행하는 것은 항상 상황적이며, 정치적 가능성 면에서 다양하고 우연적인 제도화된 노동 실천들의 배열에 의존한다.(5장)

예외로서의 신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예외 사이의 동요는 또한 윤리적 지리학과 자칭 NGO가 행정을 담당하는 공간을 출현시킨다. 예를 들어, 포함과 배제의 정치가 교차하면서 국외로 이주한 인재들이 전형적인 이상적 시민으로 통합되는 반면, 노동력 착출을 위해 들여온 저숙련 이주자들은 정치적으로 배제되는 상황들이 창출된다. 이런 비시민들이 이주 노동자나 외부인자로서의 자신들의 권리를 보호해 달라고 흔히 호소하는 대상은 국가가 아니라, 비정부 기관들이다. 여기서 이주 노동자, 밀입국한 개인들, 그리고 망명자들을 위한 요구를 NGO가 절합하는 것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예외의 공간들을 그려낼 수 있는 규범적 메커니즘에 점점 더 많이 의존하게 된다. 이 공간들은 이주 노동의 순환과 이들의 착취의 분배에 의해 암시된다. 정치적으로 배제된 자들의 생명지도학을 그려냄으로써 NGO들은 이주 노동자와 밀입국한 개인들에 대한 도덕적 책임이라는 초민족적 의미를 놓고 다양한 정부들 및 문화적 권위와 협상한다. 요컨대 출현하는 요구들의 지리학은 시장도 국가도 아닌, 이 양자와 절합하는 새로운 정치 체계들에 의해 그려진다.(9장) 따라서 시민권과 윤리의 문제는 공간들, 노동, 그리고 삶을 관리하는 다양한 제도의 교차 속에서 뒤얽힌다.


헐벗은 삶: 윤리의 예외들?


경제적 세계화의 기술들은 다소간 가치 있는 주체들, 실천들, 생활양식, 그리고 좋은 것의 시각에 대한 도덕적 계산을 지니게 된다. 여기서 사용되는 윤리는 특정한 존재 양식을 얻기 위한 자기 돌봄의 규범적 기술, 혹은 자기의 실천이라는 고대 그리스-로마의 의미다.69) 따라서 윤리 체제는 특정한 윤리적 목표에 일치하는 자신을 구성하기 위해 주어진 가치들을 따르는 생활양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 종교들은 ― 내 생각에 페미니즘, 인도주의 혹은 다른 덕의 체계들도 마찬가지다. ― 특정한 형태의 자기 행실과 좋은 생활의 전망을 촉진하는 윤리적 체제들이다. 시민권의 윤리적 개념들은 특정한 민족의 핵심 가치들을 표현하는 주체들의 존재 양식, 민족 정신의 표현을 포함한다. 민족 국가의 형성에서, 민족 문화, 인문학, 그리고 종교들은 “상상의 공동체”, 곧 공공선의 공유된 전망을 형성하는 데 상호작용해왔다.70)

시민권에 관한 더 넓은 개념들은 공유된 인간성이라는 계몽주의의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난민과 무국적의 사람들로 가득 찬 유럽의 한 가운데서 우리의 “인간의 조건”이라는 질문을 제기했다. 우리의 인간의 조건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우리가 종사하는 세 종류의 근본적 인간 활동을 통해서라고 그녀는 주장했다. 생물학적 생명 형태, 노동하는 존재, 정치적 행위자가 바로 그것이다.71) 이 통일된 인간의 조건 개념은 무국적자들이 시민권에 대한 권리를 국제적으로 요구하는 근거가 되었다. 다시 한 번 이주자들이 넘쳐나는 유럽에서 아감벤은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이라는 관념을 개작한다. 민족적 시민권으로부터 배제되었기 때문에, 미등록 노동자, 망명자, 그리고 전쟁 피난민들은 “헐벗은 삶”이라는 비인간적 조건으로 떨어진다고 그는 주장한다. 따라서 주권 국가는 시민들에게 보호를 제공함으로써 근대적 인간성을 생산함과 동시에, 비시민들에게 이를 부인함으로써 헐벗은 삶을 생산한다. 오직 (정치체로서) 인민/국민(People)과 (배제된 신체들로서) 인민/민중(people) 사이의 분할을 삭제하는 것만이 시민권을 거부당해 온 세계적으로 배제된 이들에게 인간성을 회복시켜 줄 수 있다고 그는 단언한다.72) 따라서 민족 국가가 부여하는 단순한 권리로서 시민권을 논의하는 것으로부터, 비시민들과의 보다 넓은 연대로 전환하게 되는데, 자신들이 인류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그들의 요구는 세계화된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우리 자신의 윤리적 질문의 일부분이다.

따라서 아감벤은 인간성의 보편적 규범을 생활 조건에 관한 유일한 분석적이고 윤리적인 척도로서 제시한다. 또한 예외의 논리는 정치적으로 배제된 사람들에 맞서서만 발동된다는 지각도 있다. 주민들이 법적이고 단순하게 둘로 나뉜다는 것에만 배타적으로 초점을 맞추게 되면 두 가지 개념적 문제가 발생한다. 먼저 이 축은 대안적인 인간성의 윤리 규범을 제기하는 다른 보편화적 도덕 담론―특히 위대한 종교들―의 유효성을 평가절하한다.73) 예를 들어 이슬람교에는 초민족적 덕목에 대한 고유한 시각이 있으며, 여기에는 인권의 견지에서만 배타적으로 표현되지 않는 윤리들에 관한 고유한 내적 투쟁들이 동반된다. 1장에서 나는 이슬람 공동체―움마(umma)―가 어떻게 윤리적 주체 형성과 영적 소속의 절합을 보편화하는 도식인지를 논의할 것이다. 세계화된 초고속 성장의 장소들 역시 인권 담론과 상호작용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상황적인 윤리 체제들을 절합한다. 권리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으로 인류를 보편적으로 분할하는 아감벤식 도식을 엄격히 고집하게 되면, 작용하고 있는 다수의 윤리 체계의 풍부한 가능성들과 복잡함을 놓칠 수 있다.

인권 이외에도, 좋은 삶에 대한 다른 비전들 역시 주어진 생활 영역 내에서 덕의 수행에 대한 윤리적 요구와 규범적 지침을 제공한다. 생명정치와 기술적 이성의 상호작용은 현대 생활의 윤리적 문제들에 형태를 부여하며, 인간의 삶이라는 문제에 대한 다양한 해법들이 이 변화하는 모체 내부에 제기된다. 스티븐 콜리어(Stephen Collier)와 앤드류 레이코프(Andrew Lakoff)는 “생활 체제”라는 용어를 만들어냈고, 이를 “문제적 상황에서 가능한 행동 지침을 제공하기 위해 발동되고 재작동되는 도덕적 이성의 상황적 형태”라고 정의한다.74) 만약 현대 생활 체제들이 신자유주의적 논리와 점점 더 많이 상호작용하게 된다면, 윤리적 주체 형성은 보편화된 인간 관념에 연동되기보다는, 요소들의 특정한 구도에서 만들어질 것이다.

따라서 영속적인 예외 상태의 헐벗은 삶이라는 아감벤의 근본적 준거점은 영토화된 시민권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요구의 복잡한 협상 가능성을 무시한다. 시민권 외부에 있는, 모든 비시민들은 “내부와 외부, 예외와 지배, 합법과 불법이 구별되지 않는 구역으로 떨어지는데, 여기서 주관적 권리와 사법적 보호의 개념들 자체는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으며 … 권력은 아무런 매개도 없이 순수한 삶에 지나지 않는 것을 대면하게 된다.”75)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 엄격한 이항대립에서 아감벤은 도덕적 보호와 적법성의 요구를 지지할 수 있는 복합적 구별이나 비-권리적 매개의 가능성을 제외해 버리는 것 같다. 포로수용소를 근대 주권의 규범으로 표현하는 것은 정치적으로나 민족지적으로 부정확할 뿐더러 위험하기까지 하다. 변화하는 인간성의 법률적․도덕적 영역은 무한히 더 복잡해진 것이다.

경제적 세계화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세계적으로 배제된 이들과 연관되어 있다. 일부 국가의 법률적 시민권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생존의 끈만을 붙잡고 있는 수백 만 명의 이주 노동자, 난민, 밀입국자들은 훨씬 더 위태롭고 포착하기 어렵다. 법률적 시민권이 인간 보호의 다만 한 가지 형태일 뿐이라는 점은 명확하다. 주변화된 사람들이 권리의 환경에서 배제되는 이유는 그들이 자주 숨겨져 있거나 “실패한 국가들”에 살거나, 실향유민인 까닭에 일단 이동하면 사실상 권리들을 빼앗기기 때문이다. 이런 인도주의적 위기 상황에서, 법률적 시민권은 단지 인간성을 (재)정리하고 (재)평가하는 다수의 도식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점차 다양한 다자적 체계들 ― 다국적 기업들, 종교 조직들, UN 기관들, 그리고 다른 NGO들 ― 이 학대받고, 헐벗으며, 그리고 금이 간 신체들의 특정하고 상황적이며 실천적인 문제들을 다루기 위해 개입한다. 배제된 인간성의 비국가적 행정은, 불연속적이고, 어긋나 있으며, 우연적인 특성을 띠기는 하지만, 새로운 초민족적 현상이다. 콜리어와 레이코프는 이런 상황들을 “헐벗은 삶의 대항 정치”로 묘사한다. ― “살아 있는 존재로서의 요구라는 견지에서” 주장할 수 있도록 헐벗은 삶을 다양한 방식으로 모으는 상황적인 도덕적 추론의 형태로서 말이다.76) 실제로 헐벗은 삶은 자체로 고유한 도덕적 정당성이 있으며, 윤리와 노동에 대한 헐벗은 삶의 관계는 항상 예외로서의 신자유주의에 열려 있다. 인간의 비참에 대한 해법은 항상 까다롭고, 불만족스러우며, 힘겹지만, 정치적으로 배제된 사람들의 문제는 우리의 세계적 양심을 짓누르며, 현실적으로 국가와 도덕 경제, 시장 제도들의 논리와 결합되어 왔다.77)

예를 들어, 아프리카 지역에서 가난한 시민들은 질병과 기아, 전쟁 때문에 더욱 정치적으로 배제되었다. 그러나 건강은 국가가 아니라, 제약 회사들에게 대해 요구를 제기하는 “치료받을 수 있는 시민권” 담론과 절합되면서, 인간 지위의 필요조건이 되었다.78) 생물학적 생존에 기초를 둔 집단적 요구의 또 다른 사례가 동남아시아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여기서 노동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수많은 여성 이주자 주민들은 해외에서 심한 학대에 노출되어 있다. 이런 경우 외부자의 지위와 인종에 기초를 둔 생물학적 타자성은 국가가 아니라 인력을 도입한 사회의 도덕 경제를 대상으로 하는 생물학적 복지의 요구들에 의해 역전될 수도 있다.(9장)

요컨대 헐벗은 삶은 구별불가능한 구역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방 공동체, NGO들, 그리고 심지어 기업들의 개입을 통해, 도덕적으로 바람직한 인간성이라는 다양한 범주들로 전환되고 재조직된다. 이런 기술윤리적 상황들은 힘을 가진 자들과의 잠재적 제휴, 우선적인 이익, 특수한 요구 등과의 연관 속에서 인간성의 등급을 매기는 인도주의-기업 복합체의 권력이 증가했음을 가리키는 지표다. (치료받을 수 있는 시민권, 생물학적 복지, 그리고 도덕 경제 등) 도덕적 요구의 절합은, 아마 인권에 호소하는 것보다 더 빈번하게, 위압당한 인간적 문제에 대한 임시변통적이거나 일시적인 해결책을 틀지울 것이다. 상황적인 NGO의 개입들은 그들이 현장에서 마주치는 정치적․윤리적 힘들의 연결망에 의해 자주 결정된다. 요컨대 생존의 대항정치들은 생명정치, 노동시장, 그리고 덕의 체계의 상호작용을 통해 현실화된다. 이런 윤리적 문제화는 인권이나 시민권을 우회하여, 우연적이고 모호한 인간의 윤리적 지평을 반영하는 해법들에 의지하게 될는지도 모른다.


이 책이 예외로서의 신자유주의 및 신자유주의에 대한 예외들과의 관련 속에서 변모하는 시민권의 모든 측면들을 다룰 수는 없다. 아시아 태평양은 극적인 변화를 겪고 있으며, 빠르게 변화하는 환경들은 서로 융합되었던 것들 ― 동일성, 자격, 영토권, 그리고 민족성 ― 이 어떻게 신자유주의적 기술들과 주권의 예외들에 의해 혁신적인 관계와 공간들로 갈라지고 재편성되는지를 탐색할 수 있는 장소들을 제공한다. 신자유주의 형태들, 주권의 실험, 그리고 시민권 체제들의 새로운 절합은 현실화되는 것들과 인간이 되는 것의 정치적․공간적 가능성들을 발본적으로 변화시켰다. 특정한 통치와 자기 통치 기술들은 책략, 협상, 그리고 윤리적 의심의 다양한 의미와 공간들을 산출한다. 명확해 보이는 것은 예외로서의 신자유주의가, 신흥 경제에 대한 특공대식 습격이건, 통치 이성에 대한 비밀스러운 잠식이건, 자기 혁신과 자기 경영의 기술이건 간에, 통치와 시민권에 대한 전통적 사고에 도전하고 있다는 점이다. 권리들, 자격들, 그리고 요구들은 이제 NGO의 개입과 지식 흐름, 통치의 시장 주도적 양식에 의해 배열되는 역류와 힘의 장에 쉽게 순응하고 종속된다. 예외의 논리에 의해 생겨나는 무수한 탈구와 재절합은 우리가 통일된 시민권 개념과 연관시키곤 했던 요소들을, 점차 다양해지고, 파편적이며, 우연적이고, 모호하지만, 그러나 윤리정치적 비판에 영속적으로 종속된 인간성에 놓인 가치들로 변형시킨다.


1) Ong, Flexible Citizenship, chap. 7


2) Safire, "Inside a Republican Brain."


3) "Bush Pledge Broad Push."


4) 자산을 소유한 부르주아에게 독점적으로 주어진 시민권의 초기 개념에 대한 계급에 기초한 비판은 Marx, "Jewish Question," 33~34를 보라.


5) Bush, "Inaugural Address."


6) 어빙 크리스톨 같은 몇몇 보수주의자들은 극단적인 시장 합리성이 미국 민주주의의 도덕을 파괴한다고 주장한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신보주의의 이런 주장이 페미니스트 웬디 브라운에게 어떻게 반향을 가져왔는지에 대한 논의는 Cruikshank, "Neopolitics."를 보라.


7) Rose and Miller, "Political Power beyond the State."


8) Collier and Ong, "Global Assemblages, Anthropological Problems."


9) Collier, "Spatial Forms and Social Norms."


10) Foucault, "Governmentality."


11) Foucault, "Ethics of the Concern for Self," 300.


12) Barry, Osborne, and Rose, Foucault and Political Reason.


13) Schmitt, Political Theology, 13.


14) Agamben, Homo Sacer, 26~28.


15) Collier, "Spatial Forms and Social Norms."


16) Arendt, Human Condition.


17) 예를 들어 Scott, Setting Like a State; and Ferguson, Anti-Politics Machine.를 보라.


18) Sassen, Global City, and "Local Cities," 2.


19) 이 생태학의 정식화는 “국제 도시-지역”모델과는 개념적으로 다르다. A.J. Scott, "Globalization and the Rise of City-Regions," Research Bulletin 26, July 19, 2000.을 보라. www.lboro.ac.uk/gawc/.


20) Insiti and Levien, "Strategy as Ecology," 69.


21) Hardt and Negri, Empire.


22) Agamben, Homo Sacer, 170.


23) Polanyi, Great Transformation.


24) Nishiyama and Leube, Essence of Hayek.


25) Friedman, Capitalism and Freedom.


26) Becker, Human Capital.


27) 신자유주의 정책들에 대한 위의 요약은 Peters, "Neoliberalism."에 의거한 것이다.


28) Pabst, "Immanence, Region, and Neo-liberalism."


29) 1996년에 민주당 대통령 빌 클린턴은 “Personal Responsibility and Work Opportunity Reconciliation Act."를 승인했다. 이는 복지 수급자들이 “노동복지” 프로그램에 참가할 것을 요구함으로써 “우리가 알고 있는 복지”를 끝냈다.


30) Peters, "Neoliberalism."


31) Hall, Hard Road to Renewal.


32) 이 관점은 Gill, "Globalization, Civilization, Neoliberalism."에서 잘 제시되어 있다.


33) Comaroff and Comaroff, "Millennial Capitalism."


34) Harvey, "Neoliberalism," Ⅱ; 강조는 인용자.


35) Geertz, Interpretation of Culture, 24.


36) Paul Rainbow (Anthropos Today, 16~17)는 “문제와 그 해결의 장소는 문제적 상황이다.”라고 쓴다.


37) Foucault, Introduction, 143, 139.


38) Barry, Osborne, and Rose, Foucault and Political Reason; and Rose, Powers of Freedom.을 보라.


39) Barry, Osborne, and Rose, introduction to Foucault and Political Reason, 64.


40) Von Hayek, Political Order.


41) Rose, Powers of Freedom, 27~28.


42) Gordon, "Governmental Rationality," 43~44.


43) Rose, "Governing 'Advanced' Liberal Democracies," 56.


44) 신자유주의 계획들이 리시아에서 어떻게 탈사회주의적 관리 시행을 절합하는지에 대한 분석으로는 Collier, "Spatial Forms and Social Norms."블 보라.


45) World Bank, World Development Report.를 보라.


46) Arendt, Human Condition.


47) 예를 들어 Bhabha and Coll, Asylum Law.를 보라.


48) Marshall, Class, Citizenship, and Social Class.


49) 예를 들어 Benhab, Claims of Culture.를 보라.


50) Soysal, Limits of Citizenship.


51) Castles and Davidson, Citizenship and Migrant, 18~19.


52) Bhabha, Location of Citizenship, 37.


53) Habermas, "Why Europe Needs a Constitution"; Delanty, Citizenship in a Global Age.


54) 이것은 Held 외, Global Transformation에서 제시된 세계시민주의 질서 출현의 증거다.


55) 예를 들어, Delanty, Citizenship in a Global Age.를 보라.


56) 세계시민주의의 한계와 위험에 대한 논의로는 Bowden, "Perils of Global Citizenship."을 보라.


57) Ong, introduction to Flexible Citizenship.


58) Ruggie, Constructing the World Polity, 180.


59) Mamdani, Citizen and Subject, 16~18.


60) Roitman, "Garrison-Entrepot"; Ferguson, "Seeking Like an Oil Company."


61) Schmitt, Political Theology, 13.


62) Sack, Human Territoriality.


63) Linklater, "Idea of Citizenship."을 보라.


64) 몇몇 이론가들은 세계화의 분석 공간이 지역이라고 주장한다. Ohmae, End of Nation State.를 보라.


65) Kelly and Olds, "Question in a Crisis“


66) 개념적 경고의 필요성은 Brenner, "Limits to Scale?"에서 볼 수 있다.


67) Harrison, Pile, and Thrift, Patterned Ground, 36, 40.


68) Hardt and Negri, Empire, 23, 328~29, 332, 210.


69) Foucault, "Ethics of the Concern for Self," 282.를 보라.


70) Anderson, Imagined Communities.를 보라.


71) Arendt, Human condition, 7~9


72) Agamben, Homo Sacer, 177, 180.


73) Rainbow, "Midst Anthropology's Problems," 47~48을 보라.


74) Collier and Lakoff, "Regime of Living," 23.


75) Agamben, Homo Sacer, 170~171.


76) Collier and Lakoff, "Regime of Living," 29.


77) Cohen, "Operability, Bioavailability, Exception."


78) Nguyen Vinh-kim, "Antiretroviral Glob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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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이론과 새로운 자본주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현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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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라르 뒤메닐, 도미니크 레비
번역: 윤종희·박상현 (과천연구실)

서론

그렇다,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변형된다. 장기적인 대위기에 빠지고 나서도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본주의의 능력은 무한한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파동은 자본주의의 구조 및 동역학의 어떤 측면들을 혁신함으로써 발생한다. 자본주의의 연속성과 단절, 이 두 측면 중에서 어떤 것이 더 놀라운 것인가? 오늘의 자본주의는 자본주의가 존재한 이래 그것을 규정해온 기본적인 성격들을 이전의 어떤 국면보다도 훨씬 더 분명하게 보여준다. 즉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 소득과 자산의 집중, 민족적·국제적 착취, 소수자의 특권을 영속화하는 방향으로 전개되는 동역학 등과 같은 성격들 말이다. 그러나 또 다른 관찰은 대규모의 변화를 강조한다. 즉 새로운 생산기술과 금융제도, 소유형태 및 관리양식의 변모,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노동자계급의 쇠퇴, 새로운 중간계층의 형성과 오래된 계급간 경계의 해체 등이 발생한다. 우리가 이미 자본주의 너머에 도달한 것은 아닌가?
자본주의의 연속성과 변화의 역설적인 공존을 지양하고 이러한 진화의 핵심에 도달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분석 도구들을 활용할 수 있는가? 여기서는 19세기 중반에 마르크스―자본주의에 대한 [과학적] 이론가로서 마르크스―가 규정한 도구들이 낡기는커녕 아직 그 모든 잠재력을 소진하지도 발현하지도 않았다는 테제를 지지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 글의 목적은 회고적인 방식으로 [마르크스에 대한] 경탄을 불러일으키려는 것이 아니라 [그의] 분석틀의 혁신에 기여하려는 것이다.
오래된 것에 근거하여 새로운 것을 사고하려는 온고지신을 위해서는 두 가지 규칙이 요구된다. 첫째, 역사적 관점에서 최근의 사건들을 이해하라. 둘째, 일석이조라는 말처럼 하나의 동일한 과정 속에서 도구의 활용과 완성을 통합하라. 마르크스가 우리에게 물려준 분석적 개념과 메커니즘이 오늘의 세계를 해명할 열쇠를 제공하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또한 그것들의 공백과 불완전성―그리고 보충과 재구성의 필요성―을 인정할 줄도 알아야 한다.
이러한 프로그램은 1894년에 󰡔자본󰡕의 마지막 권이 출판된 이래 아주 부분적으로만 수행되었을 뿐이다.1) 여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다.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은 [신고전파 경제학이나 케인즈파 경제학에 대해서] 항상 종속적인 위치에 있어 왔고 또 오늘도 전에 없이 더욱 그렇기 때문에 그것의 발전 수단이 박탈되었다. 반면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이 지배적인 곳[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사회주의 나라들]에서는 그것이 도구화되어 정당이 혁명과정을 지도하거나 권력을 장악할 수 있도록 봉사했다. 게다가 명심할 것은 [히포크라테스의 말처럼] 기술(art)이란 어려운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성격 중 하나는 사회적 과정들을 매우 일반적인 방식으로 파악한다는 것인데, 이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고유한 것이다. 경제이론이 자신의 개념들(상품·가치·자본·잉여가치·가격 등)에 의해 분명히 정의되는 것이라고 해도, 사실적 분석 속에서 그 개념들을 작동시키는 것은 전통적으로 사회학 또는 정치학의 영역으로 정의되어온 것[계급과 계급투쟁]으로 우리를 반드시 인도하게 된다.
아래의 두 장은 다음과 같은 주제를 전개시킨다. 첫째, 지난 10-20년 동안 세계자본주의에서 나타난 경향과 메커니즘은 주요한 분석적 도전을 제기한다. 둘째, 19세기에 마르크스가 창안한 개념들이 이러한 분석을 위한 열쇠를 제공하는데, 그 개념들의 활용은 분석의 심화를 요구하고 또 지휘한다.


자본주의의 새로운 국면

자본주의의 현재적 과정의 성격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그 주요 특징들을 통해 그 본질로 곧장 접근해야 한다면, 다음 두 가지를 명심해야 한다. 첫째는 기술진보 및 분배의 새로운 경향과 관련된다. 둘째는 민족적인 성격(피지배계급에 대한 엄격한 규율과 지배계급에 대한 봉사)과 동시에 국제적인 성격(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국면과 그것의 금융적 무질서)에서 드러나는 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적 과정과 관련된다. 우리는 이것들을 차례로 검토할 것인데, 이 분석에서는 종종 암묵적으로 미국과 프랑스의 사례를 특권화할 것이다.

기술진보와 자본수익성

1970-80년대의 구조적 위기는 자본수익성[이윤율]의 하락에 따른 것인데, 자본수익성의 하락 그 자체는 기술진보의 조건들의 점진적 악화를 표현하는 것이다. 이러한 악화를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은 노동생산성 상승의 점진적인 감속이다. 그렇지만 자본에 대한 생산물의 비율, 즉 자본생산성(그러나 이 개념이 자본의 생산 능력을 함의하는 것은 아니다)이 [노동생산성보다] 훨씬 더 분명한 지표인데, 자본생산성은 절대적으로 하락했다. 동일한 생산물을 위해 점점 더 많은 자본이 필요해졌던 것이다. 이처럼 [기술진보에] 불리한 경향이 처음 나타났을 때부터 그리고 실업의 파고가 높아지기 시작하면서, 곧바로 임금의 운동이 다시 문제시되었다(또 분명한 제도적 이유로 인해 사회보장 급여금의 증가에 따른 분담금의 증가와 관련된 더욱 곤란한 문제도 제기되었다). 노동비용[임금률]의 상승이 감속함에도 불구하고, 자본수익성은 1980년대 중반까지 계속 하락했다.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경향이 이제는 역전되었다는 것이다. 이윤이 절대적 크기[이윤량]에서 증가할 뿐만 아니라 투하된 자본에 대한 상대적 크기(이윤율)에서도 상승한다.2)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조건은 자본에게 유리하다. 한편으로 노동생산성이 아직 느리게 상승함에도 불구하고 이제 자본생산성은 상승한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비용의 상승은 계속 억제된다. 그러한 운동이 지난 15년 동안 계속되었기 때문에, 그것이 자본주의의 새로운 국면의 윤곽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이 발생한 것은 처음이 아니다. [미국 자본주의에서] 시계열 자료가 허용하는 시점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는 이윤율이 하락하는 두 개의 국면(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그리고 전후의 시기[더 정확히 말하자면 196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과 이윤율이 상승하는 두 개의 국면(20세기 전반기[더 정확히 말하자면 1960년대 중반까지의 시기], 그리고 1980년대 중반 이후)을 식별할 수 있다. 각각의 국면은 수십 년 동안 지속된다. 많은 점에서 유사한 첫 번째와 세 번째 국면은 마찬가지로 유사한 구조적 위기, 즉 19세기 말의 위기와 1970년대에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위기로 귀결된다. 이러한 위기는 주로 자본축적의 감속과 그에 따른 경제성장의 감속, 실업의 증가, 그리고 불안정성의 증가(즉 경기침체의 심화)로 발현된다. 1929년의 위기는 [이윤율이 상승하는] 두 번째 국면을 [일시적으로] 중단시키는 것으로 본성상 [구조적 위기와] 다른 것이다.3)
19세기 말의 위기는 자본주의의 거대한 변형을 촉진했다. 경쟁의 위기(이로 인한 독점의 시기)라는 맥락에서, 현대적 [법인]자본주의의 제도들, 즉 현대 금융에 의해 지지되는 거대주식회사―소유와 경영[페욜에 따르면 넓은 의미에서의 관리]의 분리라는 제도적 형태―가 나타났다. 대기업은 [직위와 그에 따른 업무, 즉 직무에서] 매우 위계적인 관리직과 사무직으로 구성된 수많은 직원에 의해 경영[관리]되었다. 경영자혁명―넓은 의미에서의 관리자혁명4)―이 자본의 가동에서 대규모의 효율성 상승의 기원이 되었다. 또한 공공부문의 관리직과 사무직[즉 기술관료]도 증가함으로써, 이러한 진화는 20세기 자본주의를 특징짓는 새로운 사회의 모습을 만들어냈다. 격렬한 계급투쟁의 맥락에서, 이러한 진화는 노동자의 구매력의 현저한 상승으로 귀결되었다.
지난 15년 동안 나타난 기술진보의 새로운 경로의 기원을 분석할 때, 19세기 말의 구조적 위기로부터의 탈출과 비교하는 것이 아주 유용하다. 기술과 조직의 새로운 경향, 특히 정보혁명 또는 신경제로 종종 지칭되는 것은 세기 전환기의 변형과의 연상을 강화한다. 지난 20년 동안의 변화도 매우 넓은 의미에서의 관리자혁명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 정보·통신기술이 바로 관리자혁명에 적합한 기술인 것이다.5) 약간 도식화하면, 20세기 초에는 관리가 생산과 상업·금융을 변형시켰고, 오늘에는 자기 자신을 변형시켜 그 자신의 효율성을 증대시키고 비용을 감소시킨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이러한 자본수익성의 회복과 함께 경제성장이 재개된다. 신자유주의적 정책에 의해 미국보다 더 많은 페널티를 받은 (즉 과거의 실천으로부터 더 많이 이탈한) 유럽은 경제성장의 경로에서 약간 뒤쳐지는데, 이 때문에 실업의 흡수가 지연된다. [그러나 실업의 지속으로 인한 임금률 상승의 감속 때문에 이미 지적한 것처럼 미국보다 유럽에서 자본수익성의 회복은 약간 빠르다.] 지구상의 방대한 지역이 여전히 [경제성장의 경로로부터] 멀리 뒤떨어져 있다는 것이 이러한 비교표의 주요한 특징이지만, 이 표는 물론 더욱 부연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새로운 국면이 가져온 이익의 세계적 분배는 별로 평등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신자유주의·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미국의 헤게모니

신자유주의는 금융의 권력, 즉 (소유와 관리가 분리된 자본주의에서) 자본가적 소유자의 권력을 다시 긍정하는 것에 해당된다. 이는 주주가 노동자 및 국가와 거의 마찬가지로 관리자의 파트너가 되었던 케인즈주의 시대와 뚜렷이 대조된다. 1929년의 위기 이후 국가장치만큼이나 기업 내에서도 자율성을 크게 증대시켜 온 관리자는 소유자[주인]에 의해 이윤율 또는 주가를 최대화하는 대리인의 기능으로 복귀했다. 이것이 이른바 기업의 지배구조에서 발생한 중요한 전환이다.
금융의 권력은 미국계 금융의 지휘 아래 이루어진 지속적 행동과 결연한 투쟁의 결과로 복귀했다. 게다가 미국계 금융은 이 기회를 이용해서 자신의 우위를 강화했다. 대중투쟁은 소련 및 세계공산주의의 위협이 퇴조하는 상황에서 패퇴되었다.6)
소득과 자산의 측면에서 이러한 대격변의 결과를 측정하기 위해서는 통계적 시계열의 미궁을 진정으로 해명해야 한다(Duménil et Lévy, 1999b). 지배계급의 금융소득은 1970년대 동안 크게 감소했다(마이너스의 실질 이자율, 빈약한 배당금, 침체된 주식시장). 상황은 급격하게 역전되었다. 위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고 노동자의 구매력이 침체되었음(심지어 어떤 범주의 경우는 감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는 지배계급의 거대한 부의 축적을 초래했다. 과거의 불평등이 다시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더욱 증가했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성격은 금융활동의 거대한 발전, 요컨대 금융화다. 이는 금융거래와 금융부문, 심지어 기업의 금융활동 등의 폭발적 증가를 의미한다. 우리는 이것이 1980년대 초부터 동반 성장한 여러 선진국 주식시장에 미친 효과를 알고 있다. 이러한 구조가 자본주의 경제에 1929년의 붕괴를 야기했던 그러한 위험을 초래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사건의 진행 속에서 자본의 국제화가 지속된다. 신자유주의는 2차 세계전쟁 말에 브레튼우즈에서 형성된 질서를 파괴하고 당시에 설립된 국제기구들(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을 자신의 이익에 맞게 변형시킴으로써 이러한 국제화에 금융적 차원을 부여하는데, 그것의 주요 특징은 자본의 자유로운 순환([주식]시장의 세계화)이다. 이러한 자본운동의 자유가 우리가 알고 있는 금융적 불안정성의 씨앗을 뿌린다. 이러한 진화를 심도 깊게 조사한 어떤 연구는 미국계 금융의 헤게모니적 지위와 주도적 역할을 드러낸다. 금융·상업·외환·산업의 메커니즘이 문제가 되는 만큼, 우리는 새로운 형태의 제국주의, 새로운 [금융의] 헤게모니에 대해 말할 수 있다.7)
이러한 금융의 헤게모니는 처음이 아니다. 20세기 초 현대적 금융의 출현은 지금과 비견될 만한 과정을 동반했고, 1929년의 위기에 의해 중단되었다. 그러므로 역사는 아주 거대한 규모에서 반복된다. 기술진보에 유리한 새로운 경로(이는 넓은 의미에서의 관리자혁명에 의해 주도된다)와 금융활동의 폭발적 증가 및 금융적 불안정성으로 말이다. 현재의 시기가 두 가지 특징을 결합하고 있기 때문에, 경제성장의 재개와 위험스러운 금융적 불안정성은 서로 모순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완적인 것으로 판단해야 한다. [아리기의 벨 에포크 개념은 특히 이 점을 강조한다.]
신자유주의가 금융 헤게모니의 복귀를 분명히 표현하고, 그래서 자본주의의 주요 성격들(소유자의 권리와 이윤)을 다시 긍정한다고 해도, 그러나 역시 현재의 변형은 모호함으로 가득 차 있다. 관리자혁명은 관리직과 사무직의 발전을 또다시 촉진하면서 자본가와 노동자의 분리의 경계를 다시금 혼란시킨다. 20세기 초에 나타난 새로운 소유형태는 주주와 기업 사이에 간격을 형성하면서 생산수단의 소유라는 관념을 비틀었다. [챈들러를 따라] 어떤 사람들이 제도(institutionnel)자본주의라고 규정하는 오늘의 자본주의는 전문가들에 의해 관리되는 거대한 연·기금[이른바 기관(institutionnel)투자가]에 자본이 집중되는 것을 목격한다. 자본가적 소유자의 지위는 계속 유지되고 또 자신의 우위를 다시 주장하지만, 이는 다양한 위임기구를 증대시킴으로써 그것의 유지와 우위를 일정한 방식으로 해체하는 제도적 변모를 통해서일 따름이다.


분석 도구들

이러한 관찰에 대한 설명과 관련하여, 우리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도구들의 적합성을 다양한 관점에서 증명할 수 있다. 물론 여기서 완벽한 증명을 주장할 수는 없을 것인데, 그러한 시도는 다른 많은 곤란들에 부딪히게 된다. 주요한 곤란은 상이한 분석들 사이의 관계와 연관되어 왔다. 예를 들어 가치론과 같은 이론의 의미는 다른 이론적 영역들을 관통하는 기나긴 우회로를 거친 후에야 비로소 이해될 수 있다. 다음과 같은 10개의 주제가 검토되어 왔다. ① 가치론, ② 경쟁과 집중, ③ 역사적 경향, 특히 이윤율의 하락 경향, ④ 구조적 위기와 자본주의의 국면들, ⑤ 경기순환(과열과 침체의 교체), ⑥ 자본주의적 축적의 법칙과 실업, ⑦ 자본주의적 무정부성, ⑧ 금융, 그리고 실물경제와의 관계, ⑨ 계급과 계급투쟁, ⑩ 전통적 개념의 설명적 가치를 지양할 수도 있는 생산관계의 변모가 그것들이다. 이 모든 주제는 앞 장에서 언급했던 오늘의 자본주의의 변형 및 경향에 대한 분석과 관계가 있다. 주제에 따라 그 관계는 직접적일 수도 간접적일 수도 있고, 긴밀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서, 우리는 이 주제들을 불균등하게 다룰 수밖에 없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의 세계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개념들의 설명적 가치를 해명하는 데 만족할 것이므로, 지배적인 신고전파 경제학을 비롯해서 다른 이론들에 대한 비판과 관련되는 설명은 최소한으로 제한할 것이다. 그밖에 사회주의에 대한 분석도 차치할 것이다[각주 25 참조].

가치론

마르크스의 노동가치론은 그 시대의 지배적인 사상, 즉 자신의 고전파적 선배들(스미스와 리카도)의 사상에서 직접 유래한 것으로, 우리 시대의 관점에서 보면 매우 특이한 것으로 보인다. 끝없는 역사적 논쟁 후에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가치[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화폐적 형태로서 단순가격]의 생산가격으로의 전형과 관련된 논쟁을 폐기했는데,8) 그들은 그 논쟁과 관련된 생산적 노동이라는 협소한 관념(이는 오늘의 자본주의에서 착취에 대한 더 넓은 시각과 대립된다)에 의해서도 곤란을 겪어왔다. 즉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당면한 장애는 이론적이고 정치적인 이중의 장애다.
사실 이 문제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아주 특수한 논점이다. 즉 가격론과 구별되는 가치론은 생산적 노동의 착취(잉여가치의 착출)에 대한 이론으로 인도된다. 마르크스는 두 유형의 노동, 즉 잉여가치가 착출되는 가치의 창조자로서 생산적 노동과―자본(자기증식하는 운동 속에 포섭된 가치)의 운동에 의해 똑같이 정당화되는―다른 성격의 노동, 말하자면 비생산적 노동을 매우 엄격하게 구별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의 유통비용(예를 들어, 상업노동에 종사하는 사무직의 임금)과 같은 비생산적 노동에 대해 중요한 설명을 할애한다. 그러나 우리는 마르크스가 그러한 설명을 주변적 위치, 즉 자신의 이론체계에서 핵심을 차지하는 생산적 노동보다 훨씬 멀리 떨어진 위치에 제한시킨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비생산적 노동의 기능은 이윤율의 최대화다.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생산적) 노동과정을 구상·조직·감독하는 것[노동관리와 생산관리], 그리고 자본을 회전시키는 것(생산수단의 구매[생산관리]·생산물의 판매[마케팅관리] 및 재고관리[생산관리]·재무관리[및 회계관리])이 문제다.9) 기능자본가의 업무일 수도 있고 임금노동자에게 위임될 수도 있는 비생산적 업무는 우리가 오늘 관리―넓은 의미에서의 관리, 마르크스적 의미에서의 관리―라고 부르는 것에 해당한다.
생산노동과 관리노동을 이렇게 구별하는 것이 오늘의 자본주의의 분석과 관련하여 과연 적절한가? 관리업무의 양적 발전과 질적 변형(지속적으로 혁신되는 관리업무의 형태와 그 효과들...)을 고려하는 한, 매우 적절하다. 마르크스가 19세기적 상황에서 관리업무를 주변적인 위치에 제한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태도는 20세기 말에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해체하고 혼합시킨다거나 이론체계를 너무 성급하게 폐기하는 것이 문제는 아니다. 전혀 의심할 바 없이 자본주의적 착취에 대한 이론은 생산적 노동자의 잉여노동의 영유(더욱이 이제 세계적 차원에서 수행되는 착취)에 준거한다. 그러나 새로운 사회적 범주가 나타나서 마치 마르크스가 그것의 분석과 관련하여 우리에게 제공한 이미 상당한 정도의 요소들을 부각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 중요한가?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새로운 착취형태, 생산관계의 변모, 경향과 반경향, 오늘의 자본주의에서 소득의 형성, 특히 금융 소득의 형성 등을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는 곧 이것들에 대해서 검토할 것이다.

경쟁과 집중

마르크스는 경쟁과정에 대한 분석, 즉 경쟁을 통한 생산가격의 형성에 대한 이론 역시 고전파로부터 원용한다. 이러한 분석을 자본의 집중에 대한 마르크스의 테제와 결합해야 한다. 의심할 여지없이 마르크스는 누구보다도 자본주의의 집중 경향을 잘 알고 있었는데, 이것이 오늘의 자본주의 및 자본의 세계화와 맺는 관계는 아주 분명하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자본의 집중 경향을 인정하면서도 결코 경쟁과정에 대한―매우 고전파적인―자신의 분석을 문제삼지 않았다.10) 규모와 성과 면에서 이질적인 기업들은 그 생산물이―재화든 서비스든―대체재로 사용될 수 있는 한(기업의 생산물들 사이의 대체관계 때문에 산업의 부문들이 구별된다), 경쟁에 참여함으로써 시장에서 대결한다. 자본가들은 다양한 정도로 이러한 기업들(따라서 부문들)에 자본을 투자하고 획득된 이윤율을 비교한다(사람들은 자본의 부문간 이동에 대해 말한다). 이러한 최대의 수익성 추구가 [부문 내에서 초과이윤의 존재로 인한] 기업간 이윤율의 격차를 유지하면서도 부문간 이윤율의 균등화 경향을 초래하고, 또한 구매력 있는 수요에 대한 공급의 비례를 조정한다. 경쟁적 투쟁은 집중과정을 촉진하고 성과가 나쁜 기업의 퇴출을 촉진한다.
19세기 말 경쟁의 위기 이후 이 이론의 설명적 가치가 소멸했다는 부당한 주장이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열광시켰고, 이것은 [미국식 수직통합이 아니라 독일식 수평통합을 특권화하는] 독점자본주의 테제로 귀결되었다. 힐퍼딩과 레닌 이래 이 테제의 다양한 변종들이 존재한다. 이 테제는 오늘의 자본주의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우리가 볼 때는 기업들의 규모가 확대됨에도 불구하고 이윤율의 균등화 경향이 항상 작동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중요하다(Duménil et Lévy, 1999c). 금융 제도와 메커니즘도 기업과 마찬가지로 그 규모와 효율성이 증가하여 자본의 부문간 이동을 촉진하고, 그래서 자본은 이윤의 기회를 가장 빠른 속도로 포착한다. 그러므로 20세기 말의 자본주의의 운동에 대한 설명은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하며, 경쟁의 격화보다는 완화에 초점을 맞추는 독점자본주의 테제는 신중하게 재검토되어야 한다. 바란과 스위지(Baran and Sweezy, 1966)의 테제와는 달리 독점적 경향은 결코 이윤율의 하락 경향을 잉여가치율의 상승 경향으로 변형시키지 않았다. 또 브레너(Brenner, 1998)의 테제와는 달리 경쟁의 격화가 이윤율의 하락을 설명하는 것도 아니다.

이윤율의 하락, 다른 경향들, 그리고 반경향들

어떤 경제 이론가도 마르크스가 그랬던 것처럼 자본수익성, 즉 이윤율을 자본주의의 동역학에 대한 해석의 중심에 놓은 적이 없었다. [이윤율을 이자율과 혼동한] 신고전파 이론도 [이윤율을 이자율과 구별하면서도 이윤율 대신 투자의 한계효율을 특권화한] 케인즈파 이론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특히 경험적 분석에서 이 변수를 고려할 때조차도 부차적인 지위만 부여한다. 그렇지만 이윤율은 자본주의의 장기적 운동과 구조적 위기를 이해할 때, 특히 1970-80년대 동안 [현대적 법인자본주의의] 경향의 역전을 이해할 때 핵심적 논점이다. 두 가지 유형의 문제가 쟁점이 된다. 이 절에서 검토하는 경향들과 반경향들 및 다음 절에서 검토할 이윤율 운동의 결과들이 바로 그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 3권에서 자신이 자본주의의 역사적 경향들(기술진보·분배·자본축적·생산·고용의 경향들)이라고 부른 것에 대한 아주 정교한 분석을 우리에게 남겨주었다. 우리가 아는 한에서, 그는 자본과 노동 또는 생산물의 비율의 상승(이는 강력한 기계화의 표현이다)과 연관된 생산과 고용의 성장의 궤도들(여기서 기술진보의 성과의 감소는 이윤율의 하락으로 표현된다)을 인식한 유일한 사람이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그러한 궤도들을 마르크스적 궤도들이라고 부른다. 자본주의가 그러한 궤도들 위에 놓인다는 성향은 대체로 이미 정형화된 사실(stylized fact)이다. 특히 2차 세계전쟁 이후 이윤율의 하락 국면은 수많은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11) 마르크스는 그러한 매우 복잡한 분석을 완성하지 않았고,12) 게다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경험적 자료도 갖고 있지 않았다.
우리는 자본주의가 그러한 궤도들 위에 놓이게 되는 경향을 기술진보과정의 어떤 결함과 연결한다. 이러한 곤란은 의심할 바 없이 (고비용의 활동으로서) 연구와 혁신의 사적 성격, 그 결과의 사적 영유의 한계를 입증한다. 기업간 협력, 그리고 무엇보다도 국가가 연구프로그램과 과학교육에 관여한다는 사실은 부분적으로―그렇지만 단지 부분적으로만―이 한계를 극복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메커니즘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분석해야 할 것이 아직 많다.13)
마르크스는 이윤율 하락 경향에 대해 반작용하는 반경향에 중요한 설명을 할애했다. 반경향은 성격이 다양하다. 주식회사의 발전과 같은 반경향은 더 낮은 이윤율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체계가 계속 유지될 수 있는 능력을 설명하는데, 이는 고유한 의미에서의 반경향보다는 적응과정과 관련된다. 잉여가치율의 상승이나 자본의 상대가격의 하락과 같은 반경향은 이윤율 하락 경향의 단순한 완화나 역전에 해당한다. 20세기 전반기에 자본주의가 새로운 유형의 궤도에 진입한 것은 다음 두 가지 진화와 관련된다. 첫 번째는 법인혁명(주식회사의 발전)이고, 두 번째는 관리자혁명이다.
경향과 반경향에 대한 분석은―기술진보의 마르크스적 성격에 대한 긍정과 부정이라는 의미에서―동일한 이론적 영역에 속한다. 두 유형의 국면이 교체되는 것에 대한 우리의 해석은―처음에는 아마 의외라고 생각될지도 모를 방식으로―앞 절에서 검토한 가치론과 생산적·비생산적 노동의 구별에 준거한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이윤율을 최대화하는 업무(비생산적 노동)의 발전이 역사적으로 이윤율 하락에 대한 주요한 반경향으로 부각된다.14) 그리고 이는 우리가 이미 지적한 것처럼 관리에 의한 혁명과 관리 내부에서의 혁명이라는 이윤율 회복의 두 국면 각자를 표현하는 성격들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가치론과 경향론이라는 두 가지 기본 이론의 접합이 중요한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접합이 이론의 확장의 필요성을 느끼게 하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논점 중 하나다.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노동과 이윤율을 최대화하는 노동이라는 두 유형의 노동이 공존한다. 관리자혁명은 20세기 전반기에 두 번째 유형의 노동의 상대적으로 경이로운 발전을 표현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 외연과 효율성에서 모두 완료되었다. 그 결과로 발생한 이윤율 하락의 새로운 국면은 그때까지는 관심 밖이었던 다른 영역(예를 들어 연·기금의 재무관리)으로의 관리자혁명의 새로운 확장과 ([시장 거래비용의 절약을 초과하는 기업 조직비용의 증가로 나타나는] 관료제화 경향에 반대되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조직형태의 혁신과 정보·통신기술에 의한) 효율성의 새로운 향상으로 서서히 이어졌다.

구조적 위기, 반경향의 발생, 그리고 자본주의의 국면들

경향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또 다른 측면은 이윤율의 실제적 하락의 효과들과 관련된다. 마르크스는 이 점과 관련하여 간략하지만 단호한 입장을 취한다. 이윤율의 하락은 자본축적을 감속시키고 경제위기[공황] 및 금융적 곤란(금융활동의 과도한 팽창, 투기 등)을 심화시킨다.

반면, (자본의 가치증식이 자본주의적 생산의 유일한 목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자본의 가치증식률, 즉 이윤율이 자본주의적 생산의 자극제인 한, 이윤율의 하락은 독립적인 신규자본의 형성을 감속시킬 것이므로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의 발전에 대한 위협처럼 보인다. 또 이윤율의 하락은 과잉생산, 투기, 경제위기, 그리고 과잉인구와 동시에 과잉자본의 형성을 조장한다(Marx, 1965, 15장, 254-5쪽).

우리는 그러한 곤란[경제위기와 금융위기] 전체를 구조적 위기라고 부른다. 앞 절에서 묘사한 이윤율의 실제적 하락의 두 국면은 결과적으로 구조적 위기의 시기로 귀결된다. [참고로,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경제위기 및 금융위기에 외환위기가 추가된다.]
사실 󰡔자본󰡕 3권에는 그 관계가 결코 명시적이지 않은 두 가지 관념이 공존한다. 하나는 이윤율의 실제적 하락의 시기가 구조적 위기로 이어진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윤율의 하락이 반경향의 발전에 의해 반작용된다는 것이다. 구조적 위기가 반경향들―적어도 어떤 반경향들 또는 그것들의 확립의 강세―의 출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마르크스의 분석을 넘어서는 것이 별로 아니다. 그러한 주장에서 우리는 역사의 산파로서 폭력이라는 마르크스주의의 거대한 주제로 되돌아온다. 마르크스는 종종 자본주의에서의 생산력의 강력한 발전을 ‘역사적 사명’이라고 언급하면서 (반복되는 대위기를 대가로 획득되는) 변화의 격동적 성격을 강조한다.
일정한 통계적 측정이 가능한 100년 이상의 시기에 걸친 [미국] 자본주의에 대한 관찰과 경제사에 대한 수많은 연구는 [마르크스의] 이러한 직관이 구체화되는 형태를 보여준다. 자본주의의 역사에 대한 우리의 해석의 핵심에는 [마르크스의] 이러한 분석틀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콘드라티에프와 슘페터에게서 비롯되는] 장기파동 개념을 특권화하는 문제설정과 다시 만난다.15) 이러한 해석은 너무도 빈번하게 기계적인 입장을 채택한다. 확실히 자본주의의 역사에는 불안정성이 반복적으로 기입된다. 그러나 강력한 교란의 국면과 이 국면이 촉진하는 변화는 본성상 매우 다양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여기서 자본주의적 관계에 내재적인 순환성을 발견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 원인과 결과에서 1929년의 위기는 특히 19세기 말 또는 20세기 말의 위기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또한 아리기 식으로 말하자면, 45-60년 주기의 장기파동이 아니라 100년 이상(‘장기세기’) 주기의 축적체계와 세계헤게모니가 문제가 된다.]
이러한 방법론적 신중함을 유지한다면, 경향, 구조적 위기, 반경향, 국면 등에 대한 분석틀은 자본주의의 역사적 동역학과 그 시기구분을 설명하는 데 매우 적합한 것으로 보인다.16) 1980년대 중반 이후 우리가 진입한 국면은 역사적 동역학과 시기구분의 새로운 표현이다.

경기순환

이윤율 하락과 경제위기[공황]의 관계는 결국 상대적으로 장기적인 불황기라는 개념으로 인도하는데, 우리는 그러한 시기를 구조적 위기라고 불렀다. 구조적 위기는 경기순환 상의 침체[또는 순환적 위기]와 구별되어야 한다. 한편 마르크스도 역시 경기침체를 이윤율 하락과 독립적으로 검토하는데, 이윤율 하락은 구조적 위기의 과정에서 경기침체를 심화시키는 요인일 따름인 것이다.
19세기 초부터 자본주의 나라들의 경제활동은 확장과 수축, 과열과 침체에서 기인하는 반복적인 교란에 종속되었다. 당시에는 산업순환이라고 불렀고, 20세기 이후에는 경기순환이라고 부른다. 그렇지만 그러한 운동은 정확히 말하자면 순환적[주기적]이라기보다는 반복적[비주기적]이다. 물론 경기순환의 진폭 그 자체는 19세기 이후 점차 축소되었지만, 거시적 경제활동 수준의 불안정성은 최근 수십 년 동안의 자본주의에서도 언제나 중요한 사실이다. [이른바 신경제 이후] 이에 대한 설명이 다시 한번 논쟁되고 있지만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마르크스가 결코 분명하고 일관된 하나의 해석을 제시하지 않았다고 비난하는데, 그들의 비난에도 일리는 있다. 이 점과 관련하여 마르크스가 전개한 풍부한 논의들에 대해 다음과 같은 논평을 제시할 수 있다.
첫째, 마르크스(Marx, 1975)의 용어법에 따르자면, 부분적[미시적] 위기들도 존재할 수 있지만,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일반적[거시적] 위기다. 그러한 위기는 다양한 부문들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모든 부문들 내에서 생산의 동시적 감소). 마르크스의 관점은 케인즈의 관점과 마찬가지로 거시경제적이다.
둘째, 그는 거시적 경제활동 수준의 불안정화에 대한 단일한 이론만을 제시한 것이 아니다. 실물적 메커니즘(경제활동의 정점에서 임금률의 상승)과 화폐적 메커니즘(이자율의 상승 또는 금융의 총체적 취약성)이 문제가 된다. 케인즈가 불완전고용 균형[특히 그 존재]을 묘사하는 데 몰두한다면, 마르크스는 균형의 안정성과 불안정성에 주목하는 현대적 분석에 훨씬 더 가깝다.
셋째, 우리는 구조적 위기에 대해 검토하면서 그 위기의 빈도와 규모가 자본주의의 대경향(이윤율 하락)과 관계된 더 심층적인 진화에 의해 강화된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논평의 불충분성에도 불구하고, 어떤 현대적 이론도 최근 몇 십 년까지의 경제활동의 변동을 마르크스보다 더 잘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해야 한다.
마르크스가 다음 두 가지를 결합한다는 점을 확인해두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첫째는 자본의 이동 및 다양한 부문들 사이의 이윤율 균등화 경향의 메커니즘의 효율성에 관한, 그리고 수요가 있는 상품의 시장에 대한 공급에 관한 이론이고, 둘째는 경제활동의 거시적 수준의 불안정성에 관한 이론(또는 그 단편들)이다. 바로 이것이 마르크스의 분석의 강점이며, 그 분석의 현실 적합성 및 현대성은 이것을 기초로 한다. 그의 과제를 완수하는 것은 마르크스를 원용하는 경제학자들의 몫이다. 우리는 마르크스가 남겨 놓은 지시들에 충분히 부합하는 방식으로 모형을 구성하고, (자본의 배분, 상대가격의 형성, 상대적 생산량의 결정 등과 관련된) 자본주의의 비례적[미시적] 안정성이 (경제활동의 거시적 수준의 반복적 변동으로의 경향과 관련된) 그 규모적[거시적] 불안정성과 현저한 대조를 이룬다는 것을 보여준 바 있다(Duménil et Lévy, 1996). 또한 우리는 이러한 이중적 성격이 기업 행동 및 신용창조 메커니즘(19세기 미국에서처럼 거대민간은행에 의해 통제되든 또는 현대적 통화정책에서처럼 중앙은행에 의해 공적으로 통제되든)의 성격 그 자체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보여준 바 있다.
불비례성에 대한 이론은 리카도의 이론이었고, [힐퍼딩과 레닌 이래] 수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 즉 부분적 위기(앞에서의 논의 참조)에 대한 마르크스의 특정 구절들을 구실로 해서 재생산표식에서 자본주의적 위기론을 발견하려고 했던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이론이었다.17) 우리는 그러한 문제에 대해 아주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다. 1970-80년대의 대규모 경기침체는 경제활동의 불비례성, 즉 필요한 방향으로 생산을 조정하지 못한 무능력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마르크스(Marx, 1967, 145쪽)가 “대중의 궁핍과 소비의 제한”을 “위기의 궁극적 원인(der letzte Grund)”으로 규정한 유명한 공식으로 인해, [카우츠키와 로자 이래] 수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의 위기―구조적인 것이든 순환적인 것이든―를 과소소비 또는 더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시장의 불충분성이라는 관점에서 파악하는 아주 광범위한 해석으로 나아갔다.18) 그러나 [조절이론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1929년의 위기 또는] 1970년대의 위기는 임금의 부족으로 인해 야기된 것이 아니며, 거의 마찬가지지만 이윤의 과잉으로 인해 야기된 것도 아니다. [1920년대 동안 이윤은 작았고 또] 1970-80년대의 위기는 기술진보의 성과가 장기적으로 악화되는 운동에 의해 예정된 이윤율의 하락에서 기인했다. [따라서 사회적 축적구조론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1970-80년대의 위기가 이윤압박으로 인해 야기된 것도 아니다.]

자본주의적 축적의 법칙, 자본의 과잉축적, 그리고 실업

마르크스는 케인즈보다 훨씬 앞서서 실업의 원인을 어떤 가격(임금률)조정의 봉쇄가 아니라 경제활동의 거시적 수준의 변동에서 찾는 실업에 대한 분석을 발전시켰다. 케인즈가 유효수요의 수준이라는 관점에서 자신의 분석을 전개하는 데 반해 마르크스는 자본축적의 부침을 강조하지만, 두 사람의 아이디어는 동일한 것이다.
마르크스의 분석 장치의 핵심에는 그가 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적 법칙이라고 부르는 것이 존재한다(Marx, 1967, 25장). 역사적 경향들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도입되는 자본의 과잉축적에 대한 연구는 그것을 완성한다(Marx, 1965, 15장). 우리는 자본주의적 축적의 법칙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자본축적은 단기적으로 노동에 활용할 수 있는 인구의 부족이라는 한계에 부딪힐 때까지 고용을 증가시키며, 따라서 임금률의 반복적 상승 압력을 발생시킨다. 그러한 긴장을 극복할 수 있게 해주는 다양한 유형의 메커니즘들, 즉 더욱 자본주의적인 기술의 사용(자본구성의 상승), 경기침체의 효과 등은 자본가치를 부분적으로 파괴하고 실업자들을 재창조한다. 이것이 산업예비군에 대한 이론인데, 산업 예비군은 고용으로부터의 (일시적인 또는 거의 최종적인) 배제의 정도에 따라 다양한 분파로 나뉘고, 확대와 축소의 계기들을 겪게 된다. 이 이론은 실업이 자본주의의 우연한 사건도 아니고 개인의 부적합한 행동의 결과도 아니라, 자본주의의 영속화를 보증하는 장치의 주요 부품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실업이 임금률의 통제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틀은 오늘의 자본주의에서 실업의 순환적 요소(이는 경기순환의 변동에 상응한다)에 대한 분석에 여전히 완벽하게 부합하는 것으로서 결코 낡지 않았다. 그렇지만 실업의 또 다른 요소, 즉 구조적 요소에 대한 명시적 분석이 추가되어야 한다. 중심부 나라들에서 확대되고 있는 실업의 물결은 그 자체 이윤율의 하락에 의해 야기된 자본축적의 감속에 기인한다. 구조적 실업의 증가는 순환적 실업과 동일한 메커니즘(단지 규모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을 통해 임금비용을 통제하는 본질적 요인인 것이다.

자본주의적 무정부성

마르크스주의와 사회주의운동의 역사에서 자본주의의 필연적 지양이라는 관념은 언제나 자본주의 체계에 고유한 무정부성에 대한 비판에 근거한다. 그러한 사고방식은 이미 󰡔공산주의자 선언󰡕의 핵심에 위치했다. 즉 자본주의는 생산력의 전례 없는 발전을 야기하지만, 자신이 그 족쇄를 풀어놓았던 생산력을 통제할 수 없음이 드러나는데, 이 때문에 경제위기[공황]가 증폭되고 격화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종종 그 책임을 시장에서 찾고 또 계획화(사회적 수준에서의 의식적 조직화)만이 시장을 극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19)
자칭 사회주의 나라들의 붕괴 이후에는 그러한 유형의 분석이 상당히 퇴조한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최근 실업의 지속과 국제적 금융위기로 인해 그러한 담론이 현재성을 갖는 주제로 주기적으로 부활한다. 우리는 여기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분석의 핵심 요소에 접근한다.
시장경제로서 자본주의라는 성격 규정이 종종 협소한 인식 또는 명백한 오류의 징후라고 할지라도, 그러나 그러한 논쟁은 자본주의의 기본 성격에 준거하여 제기되는 것이다. 자본주의에 고유한 분권화와 의사결정의 사적 성격은 자본주의의 주요한 성격들 중 하나를 규정한다. 자본주의에서는 여러 문제들이 상당한 정도 사후적으로 해결되며, 이러한 조정은 폭력적일 수도 있다. 이 점과 관련해서 우리는 사후주의(ex-postisme)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실 확인이 타당하더라도 즉각 정정이 요구되는데, 자본주의가 (발생 가능한 [시장의] 실패와 퇴행을 고려하는) 사전적인 집합적 조정의 새로운 과정들을 촉진하면서 역사적으로 진화하기 때문이다.20)
사전적 결정과 사후적 결정의 관계는 복잡하다. 사전적 조직화는 자본주의가 먼저 기업 내에서 달성하고 이어서 사회 전체 수준에서 달성하는 더 높은 수준의 생산력의 사회화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집권화되든 또는 분권화되든 자본주의 이후의 경제에서 사후적 조정을 파괴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서든 오류일 것이다. 문제는 대규모 기능장애와 그 결과를 제한하는 것이다. 모든 [사전적] 조정의 결여는 가장 정교하게 조직된 사회에서조차 반드시 [사후적] 수정을 요구한다. 자본주의에서는 그러한 수정이 장기적인 구조적 위기를 통해서 과잉 작동하며, 그 비용은 대체로 피지배계급들과 종속국들에 의해 부담된다. 비판되는 것은 사후적 수정의 필연성이 아니라 바로 자본주의에 고유한 폭력과 불평등성이다.
우리가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이 문제들과 관련하여 단지 시장에만 준거하는 것은 매우 제한된 인식인데, 그것은 󰡔자본󰡕 1권 1부로 제한된 특정한 마르크스주의적 인식이다. 다음과 같은 또 다른 과정들이 고려되어야 한다.
첫째, 자본주의가 자본의 배분(투자의 부문간 비례)과 시장에서 상품의 공급(생산[의 부문간 비례])을 조절하는 분권화된 [미시적] 메커니즘은 대체로 불균형에 대한 반작용을 통해, 즉 사후적으로 작동한다. 만약 너무 많은 상품이 공급된다면, 생산[따라서 투자]은 축소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자본주의는 효율적이며, 사후주의는 무정부성과 동일한 것이 아니다.
둘째, 경제활동의 거시적 수준에 대한 통제도 마찬가지로 사후적으로 작동한다. 충분하지만 그러나 과잉은 아닌 수요의 수준을 보증하는 것이 바로 거시경제적 정책들의 기능이다.21) 불안정화의 위험은 과열과 침체의 교체 속에서 대규모로 드러난다. 마르크스가 경제위기[공황]라고 부른 것은 잘못 통제된 경기침체에 다름 아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말의 역사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특히 [기관투자가의 안락사(금융 억압)와 투자의 사회화(적자 재정)를 목적으로 하는] 케인즈주의혁명 이후에 달성된 진보를 입증한다. 그러나 그러한 진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무질서에 대해 말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경제활동의 거시적 수준의 안정성이 완전히 통제되지는 않기 때문이다.22) 신자유주의[반혁명]는 안정화의 사회적 과정을 강화하여 지배계급에게 봉사하게 만드는―완전고용보다는 물가안정[탈인플레이션]―동시에 새로운 수준의 세계적 무정부성을 부활시킨다.
셋째, 거대한 역사적 경향들과 축적의 리듬은 오늘의 세계에서 그러한 자본주의적 무정부성의 원리적 요소다. 자본주의는 기술진보의 성과를 유지하는 데 내재적 곤란을 드러낸다. 게다가 특권, 특히 소유자의 특권의 보존과 연관된 주저와 침묵(소유관계, 더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생산관계의 변형에 대한 주저와 침묵)이 여기에 추가된다. 따라서 거대한 변화도 구조적 위기의 뒤를 이어서 사후적으로 발생한다. 이윤율의 하락과 회복이라는 계기적 국면들 속에서 바로 그러한 매우 복잡한 동역학이 드러나는데, 자본주의의 최근의 과정은 그것의 새로운 표현이다. 축적이 그러한 운동의 희생자가 된다. 그것은 복잡한 금융적 순환과 그 행동들(자본 소유자의 행동과 주식시장에서 기업가치를 최대화하려는 기업의 행동)에 의해 점점 더 지배되기 때문이다.
생태론은 자본주의에 고유한 그러한 동역학이 극적인 결과를 낳고, 나아가 훨씬 더 많이 낳을 수 있는 주요 영역인데, 이에 대한 예측이 시급히 필요하다. 그러나 그러한 연구 영역은 우리의 분석을 넘어서는 것이다.23)

금융과 실물경제의 관계

화폐―상품화폐에서 가치표장까지, 가치척도에서 화폐 그 자체, 즉 구매력의 저장수단까지―에 대한 마르크스의 분석은 매우 뛰어난 것이다(Brunhoff, 1973 [윤소영, 「브뤼노프의 신자유주의 비판」, 󰡔알튀세르를 위한 강의: ‘마르크스주의의 일반화’를 위하여󰡕, 공감, 1996 참조]). 그 분석은 오늘의 자본주의에 고유한 메커니즘들을 분명히 이해할 수 있게 해주지만, 정확하게 식별할 수 있는 종별적 지표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게다가 현대적 의미에서의 신용창조에 대한 분석의 필요성이 절실하게 제기된다.
금융과 실물경제의 관계는 필연적으로 신자유주의에 대한 분석의 핵심에 위치하게 된다. 가치와 자본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그러한 주제들에 대해 엄밀한 함의를 갖는다. 생산적 노동과 잉여가치 개념은 금융활동의 성격을 비생산적인 것으로 규정하도록 만든다. 상업과 마찬가지로, 은행과 같은 금융기관에서 실현된 이윤은 실물부문에서 영유된 총잉여가치의 일부가 실현된 것으로 간주된다. 마르크스는 마치 ‘배나무에서 배가 열리는 것처럼’ 이자를 낳을 수 있다는 화폐의 능력에 대해서 야유한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금융활동과 부의 창조를 아주 직접적으로 연결하려는 유혹에 대해서 특히 잘 저항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 확인이 금융활동이 무용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금융활동은 일반적 맥락에서는 아니지만 분명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와 관련되는 [특수한] 유용성을 갖는다). 마르크스가 󰡔자본󰡕 3권에서 금융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한 것에 대해 여기서 간략하게 논평해두자.
첫째, 그러한 분석들 중 일부는 화폐자본, 생산자본, 상품자본이라는 세 가지 형태들을 통한 자본의 변형에 준거한다. 은행은 상업자본과 마찬가지로 자본의 순환이 요구하는 일정한 업무에 전문화된 것으로 나타난다. [상업자본 및 상품취급자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화폐취급자본이 문제인 것이다. 그것의 유용성은 자본의 일반적 순환에, 따라서 궁극적으로는 (자본주의적인) 사회적 생산에 기여하는 것이다.
둘째, 금융은 또한 애초부터 다른 경제활동으로부터 분리된 채 비금융부문에 자본,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금을 공급하는 활동이다. 마찬가지로 이것은 생산관계와 관련되는 체계의 일반적 기능에 대한 또 다른 기여다. 이러한 자본이 대부자본인데, 여기에는 고유한 의미에서의 신용[회사채 포함] 외에도 주식이 포함된다. 이렇게 신용과 주식에 투자된 자본은 [화폐자본·생산자본·상품자본이라는] 세 가지 형태로 기업에 투자된 자본[경제학의 용어로는 현실자본, 회계관리의 용어로는 자산]의 대응물 또는 이차적 표현이다. 이러한 이중화로 인해 [현실자본과 대조되는] 가공자본이라는 관념이 출현한다. 그 자본[가공자본]을 기업의 실물자산[생산자본 및 상품자본]·화폐자산[화폐자본]으로 기입해서는 안 된다. [생산자본 및 상품자본과 화폐자본은 대차대조표 왼쪽인 차변에 자산으로 기입해야 하고, 신용과 주식은 대차대조표 오른쪽인 대변에 각각 부채와 지분자본(또는 자기자본)으로 기입해야 한다.] 또 종속기업[자회사]의 지분자본은 지배기업[모회사]에 의한 그것의 소유를 표현하므로 회계관리의 관점에서는 기업간 대차대조표를 연결·통합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기업의 자산을 대표하지 않는 국채와 같은 [주식 이외의 또 다른] 증권의 존재로 인해 가공자본이라는 관념은 더욱 강화된다.
마르크스는 또한 화폐적·금융적 메커니즘들과 제도들의 증식에 대해 묘사하면서 그것들이 기생적이고 투기적인 성격을 띤다고 낙인찍고 또 그러한 성격에서 체계의 안정성에 대한 위협을 발견한다.
화폐와 금융에 대한 마르크스의 이론적 구성물에서 우리에게 신자유주의적 형세[세력관계]를 기적적으로 이해시켜줄 수 있는 어떤 계시도 출현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분석틀은 여전히 매우 적합하고 특히 그 일반성이라는 측면에서 가장 큰 적합성을 가지기 때문에, 수많은 표류의 가능성을 막아준다. 여기서 보완의 필요성이 감지된다.
이자율에 대한 이론은 특히 신자유주의에 대한 시의적절한 분석에서 마르크스의 분석의 타당성과 현대성의 훌륭한 사례를 제공한다. 우리는 그 중에서 다음과 같은 측면들을 강조할 수 있다.
첫째, 마르크스는 이윤율과 이자율을 엄격하게 구별한다. 양자를 균등화하는 어떤 메커니즘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윤율과 이자율의 괴리는 생산관계의 징후이다. 기업과 자본가적 대부자는 분명하게 구별되는 (그렇지만 특정한[신자유주의적] 형세 속에서는 서로 결합되는) 두 행위자다.
둘째, 이에 상응하여 마르크스는 이자율을 결정하는 ‘경제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신고전파 이론은 이자율을 다른 가격과 동일한 하나의 가격으로 취급하고 케인즈주의 이론은 그것을 유동성에 대한 수요와 연결하는 반면, 마르크스는 이자율에서 (비록 경기순환에 의한 유동성의 조건에 따라 변동하기는 하지만) 사회적 관계, 말하자면 세력관계를 발견한다. 그러한 분석은 비록 모호한 점이 있기는 하지만 오늘의 자본주의에서의 이자율 운동에 완벽하게 부합한다. 1979년에 실질 이자율의 갑작스러운 상승은 신자유주의로 귀결되는 정부 및 중앙은행의 의도적 선택으로서 그러한 세력관계의 아주 확실한 표현인 것이다.24)

계급투쟁

마르크스의 모든 분석은 계급투쟁에 대한 함의를 내포하고 있다. 자본가와 프롤레타리아의 대결은 󰡔자본󰡕을 관통하고 있으며, 그것은 그러한 대결에 대한 많은 열쇠들을 제공한다. 마르크스의 경제학적 저작들과 정치적 저작들을 결합함으로써 우리는 자본가와 토지소유자, 산업자본가와 금융자본가, 소생산자, (임금노동자로서) 관리자 등으로 분석틀이 확대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국가는 사람들이 종종 묘사해온 그러한 자율적 행위자는 결코 아니고 지배계급들의 권력 행사 및 타협과 직접적으로 관련된다.
그러한 권력과 투쟁을 추상할 수 있는 역사에 대한 진정한 독해는 없다. 20세기 초의 현대적 [법인]자본주의의 제도들의 출현이든, 20세기 전반기의 사적·공적 관리자주의 및 그와 동시에 진행된 사회적 타협[완전고용 및 실업보험을 비롯해서 대중교육 및 사회보험(특히 의료보험)]의 발전이든, 또는 신자유주의에 고유한 새로운 형세든, 체계의 모든 변모는 노동자운동의 강력함 또는 취약함과 소유자들(금융)의 전투성 등을 포함하는 투쟁 속에서 이루어진다. 특히 케인즈주의에서 신자유주의까지의 정책들은 그러한 투쟁의 직접적 표현이다.
우리가 제안한 바 있는 자본주의 시기구분에서 기술진보와 분배의 경향 및 구조적 위기에 부여된 역할에서 결코 경제주의라는 인상을 받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두 가지 관점, 즉 경향을 특권화하는 관점과 투쟁을 특권화하는 관점 사이의 악무한적 딜레마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20세기 초 자본주의의 변형은 투쟁에 의해 야기되었고, 그 투쟁에서 노동자운동의 세력은 지배계급들 내부의 모순들(예들 들어, 한편으로는 금융자본가와 새로운 관리자사회의 책임자, 다른 한편으로는 낡은 [산업]자본가 사이의 관계)과 접합됨으로써 상당한 역할을 수행했다.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에서 소유자 권력의 재긍정은 장기적 대결의 결과 또는 소수자의 특권을 유지하는 경향이 있는 영속적 투쟁의 단계일 것이다. 오직 그러한 다양한 요소들의 결합을 통해서만 그러한 거대한 역사적 운동들을 인식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는 그러한 사고방식에 가장 적합한 분석틀이다(또는 그러한 분석틀이 될 것이다).

자본주의를 넘어서 변혁을 사고하자

우리는 앞의 절들에서 일군의 개념, 법칙, 또는 메커니즘의 설명적 가치를 강조했다. 그러나 그러한 설명적 가치의 궁극적 지양을 인식하려는 사람들도 많이 존재한다. 우리가 몇 가지 사례를 제시한 어떤 경우에 문제는 분석의 특정한 한계를 넘어서 그 분석을 연장하는 것이다. 다른 경우에는 분석 도구의 불완전성이 아니라 현상 그 자체의 질적 변화에서 곤란이 발생한다. 이 점에 대해서 약간 부연해둘 필요가 있다.
예들 들어, 우리는 첫 번째 절에서 마르크스가 제시한 가치와 착취에 대한 분석이 특정한 유형의 노동, 즉 생산적 노동을 특권화하면서 이윤율의 최대화와 관련되는 또 다른 노동, 즉 우리가 관리라는 이름으로 재발견한 노동을 이차적 지위로 추방한다고 지적했다. 우리 시대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이 노동에게 정당한 지위를 부여하는 것과 생산적 노동 및 비생산적 노동의 구별의 경향적 해체를 탐구하는 것(이것은 결국 마르크스주의의 위대한 개념들로부터 상당한 거리를 두는 것이다)은 전혀 별개의 일이다. 산업노동자[생산직]의 생산 업무와 예를 들어 상업노동자[판매를 담당하는 사무직]의 판매 및 현금출납 업무를 융합해야 하는가? 만약 그러한 선택을 한다면, 고위 관리직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 이론화의 관점에서 가장 손쉬운 해법은 우리 경제와 사회의 그러한 새로운 복잡성들을 낡고 옹색한 방으로, 즉 자본주의의 전통적 범주로 집어넣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가장 적합한 선택인가? 사실 마르크스는 주요한 사회적 관계, 즉 특수한 규정들을 따르는 자본가와 프롤레타리아의 대결을 중심으로 자신의 전체계를 확립하고자 결심했다. 어떤 사람은 그러한 개념들을 폭파시키고 체계의 엄격성을 해체하지만, 그러나 용어법은 보존함으로써, 그의 사고방식을 따를 수 있다. 따라서 그 사람은 새로운 노동자나 프롤레타리아, 새로운 자본가, 아니면 새로운 프티 부르주아지(Poulantzas, 1974)에 대해 말하면서도, 마르크스가 생산적 노동과 잉여가치에 부여한 정의를 망각하거나 그것을 포기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한다. 가장 힘든 사고방식은 그 분석틀을 쇄신하는 데 있다. 그것은 생산적 노동이라는 개념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설명적 가치의 점진적 지양을 승인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변화하는 세계에서는 그러한 것이 정상적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새로운 것을 사고해야 하는 것에는 변함이 없으며, 새로운 것과 오래된 것의 공존을 승인해야 하는 것에도 변함이 없다. 오늘의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에서 우리는 그러한 도전에 대면하게 된다.
우리는 결국 어디에 이르게 되는가? 우리가 볼 때, 이러한 변형 과정은 하위 범주의 노동(생산직과 사무직의 노동)의 단지 부분적인 융합보다 훨씬 거대하다. 임금노동자로서 직원에게 위임된 관리업무는 양극화의 대상이 되는데, 그 양극화의 정확한 윤곽은 실행 업무(사무직 부분)와 구상·조직·감독 업무(관리직 부분) 사이에서 아직도 정의되고 있는 중이다. [마찬가지로 기술직의 업무도 엔지니어와 테크니션 사이에서 양극화되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계급적 모순―왜냐하면 이러한 모순은 새로운 생산관계에 뿌리를 내리기 때문이다―은 자본가와 프롤레타리아의 전통적 모순에 변증법적으로 중첩된다(Duménil, 1975; Duménil et Lévy, 1993). [즉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분석하는 계급모순의 양극화를 󰡔공산주의자 선언󰡕이 부당 전제하는 계급모순의 단순화와 구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운동이 지속되어 사무직의 업무와 생산직의 업무의 일정한 융합으로 귀결된다. 신자유주의 이전까지, 관리직을 포함하는 이러한 임금노동자 집단들의 통일성은―비록 계급적 통일성은 아니라고 할지라도―대체로 보존되어 왔다. 반대로 신자유주의는 소유자의 특권을 영속화하기 위해 임금노동자의 고위 분파와 자본의 특정한 형태의 연합[이른바 ‘20:80 사회’에서 1%의 자본가 및 임원과 19%의 관리직의 연합]을 지향한다.
자본주의적 소유도 노동의 변형에 비견될 수 있는 변형의 대상이 되고, 신자유주의는 그것에 대한 분석을 아주 복잡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신자유주의는 오늘의 경제와 사회에 기본적인 몇몇 자본주의적 성격들, 적어도 자본 소유자의 권력에 대한 재긍정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언급했던 자본주의적 소유(생산수단의 소유)의 최초의 거대한 변화는 19세기에서 20세기로의 전환기에 소유와 관리의 분리, 나아가 금융으로 소유의 집중 및 기업으로 관리의 집중과 함께 발생했다. 소유관계는 이완되었다. 임금노동자의 특정 분파[관리직]와 그러한 자본주의적 권력의 연합을 고려하면, 신자유주의는 이전의 사례를 연장하는 발전, 즉 연·기금으로의 자본의 집중의 기원을 형성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러한 변형의 이면에서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의 지양을 막연하게 예감하면서 그것을 제도자본주의[챈들러], 또는 포스트자본주의(Drucker, 1993), 또는 심지어 사회주의(Blackburn, 1999)라고 부른다.
우리의 해석은 관리 업무의 위임 속에서 관리직과 사무직 및 생산직 사이의 양극화에 대한 강조로 나아간다. 우리는 여기서 새로운 생산관계와 새로운 계급관계를 발견한다. 이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자본가적인 동시에 관리자적인 사회라고 부르는 잡종적 사회에 대해 말하게 된다. 신자유주의는 권력과 소득의 관점에서 전통적인 자본가적 분파의 우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지만, 그러나 생산관계의 변형을 중단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아마도 신자유주의는 그러한 변형을 지연시킬 수 있을 것이며, 분명 그것을 왜곡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변혁을 사고하는 것, 그리고 세력관계를 사고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대면하게 되는 분석적 도전이다.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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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oward and King (1989; 1992)의 훌륭한 종합을 참조하시오. [또는 김석진 엮음, 󰡔자본주의의 위기와 역사적 마르크스주의󰡕, 공감, 2001에 실린 박상현·윤종희·김숙경의 글과 윤소영,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 공감, 2001(개정판, 2005)을 참조하시오.] 본문으로
2) 이윤율의 상승 경향은 지난 15년 동안 적어도 미국과 유럽 주요국들에서 나타났다. 이 경향은 미국보다 유럽에서 더욱 현저하다(Duménil et Lévy, 2000). 본문으로
3) [1929년의 위기가 구조적 위기가 아니라는 이러한 해석은 미국의 사례를 특권화하는 뒤메닐에게 고유한 것이다. 반면 영국에서 미국으로의 축적체계 및 세계헤게모니의 이행에 주목하는 아리기는 1929년의 위기가 1873년 이후의 ‘징후적 위기’에 뒤이어 발생한 1896년 이후의 ‘벨 에포크’를 종결짓는 ‘최종적 위기’라고 해석한다. Giovanni Arrighi and Jason Moore, "Capitalist Development in World Historical Perspective", in Albritton et al. (2001) 또는 윤소영,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와 역사적 자본주의 분석󰡕, 공감, 1998; 󰡔신자유주의적 ‘금융 세계화’와 ‘워싱턴 콘센서스’: 마르크스적 비판의 쟁점들󰡕, 1999를 참조하시오.] 본문으로
4) 이러한 변화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기술을 조직과 결합한다. 이동조립공정[즉 컨베이어 벨트를 이용한 일관작업공정]이 그것의 전형을 제공하지만, 사실 상업적 관리[마케팅관리]와 금융적 관리[재무관리 및 회계관리] 전체가 변형된다. [참고로, 고정자본을 절약하여 이윤율 하락에 반작용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테일러주의(‘과학적’ 노동관리)를 구체화한 포드주의(노동관리뿐만 아니라 생산관리를 포함하는 이동조립공정)이고, 둘째는 슬론주의(규모의 경제와 범위의 경제를 결합함으로써 생산비용으로서 고정자본뿐만 아니라 유통비용으로서 거래비용을 절약하는 수직통합 및 다사업부제)다. 이 중에서 미국의 법인자본을 특징짓는 것은 포드주의가 아니라 슬론주의인데, 포드주의는 기계제대공업을 특징짓는 자본에 의한 노동의 실질적 포섭의 발전이고, 또 일본의 재벌(그룹)을 특징짓는 도요타주의도 포드주의의 변형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또한 법인자본의 초민족화와 재벌의 국제적 하청계열화를 구별짓는 것도 포드주의가 아니라 슬론주의다.] 본문으로
5) 이는 생산관리뿐만 아니라 전자상거래 및 새로운 기술에 의해 지배되는 금융거래를 포함한다. 새로운 기술은 특히 초민족기업, [세계]시장, 그리고 연·기금[연금기금 및 투자기금]의 성격을 규정한다. 이제 이 모든 제도들은 지구적 차원을 갖고 있다. 본문으로
6) 예를 들어, 제3세계에 마이너스의 실질 이자율로 외채를 제공한 1970년대의 정책은 반공투쟁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었고, 마찬가지로 이 나라들로서는 견딜 수 없는 수준으로 이자율을 인상시킨 1979년의 결정 역시 공산주의의 위협의 퇴조에 의해 가능해진 것이었다(Toussaint, 1998). 본문으로
7) Duménil et Lévy, éds. (1999a)에 실린 셰네(F. Chesnais), 카스텔(O. Castel), 제르비에(B. Gerbier)[또 세르파티(C. Serfati), 브뤼노프(S. de Brunhoff)]의 글과 Actuel Marx (2000)에 실린 아슈카르(G. Achcar), 촘스키(N. Chomsky), 포르티스(L. Portis), 아리기(G. Arrighi), 고완(P. Gowan), 제임슨(F. Jameson), 코언(J. Cohen), 비데(J. Bidet)의 글을 참조하시오. 또 Amin (1996)과 Chesnais (1997)도 참조하시오. [참고로, 뒤메닐의 제국주의 개념은 힐퍼딩이나 레닌이 아니라 로자에게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아리기의 그것과 친화성을 갖는다. 그러나 뒤메닐은 아리기에게 고유한 축적체계 및 세계헤게모니의 위기로서 금융화라는 개념은 인정하지 않는다.] 본문으로
8) Duménil (1980), Foley (1982), Lipietz (1982), Dostaler (1985), Ehrbar and Glick (1986), Freeman (1996). 또 Jorland (1995)[또는 덩컨 폴리, 「노동가치이론의 최근동향」(1997), 김석진 엮음, 앞의 책에 실림]가 작성한 논쟁의 비교표도 참조하시오. 본문으로
9)우리는 여기서 기존의 기술과 조직이 주어진 상태에서 이윤율을 최대화하는 업무와 새로운 생산물의 획득과 효율성의 제고(이것의 판단 기준은 항상 자본수익성이다)를 목적으로 하는 혁신적 업무(이것을 위해서는 지식의 습득이 우선적이다)를 구별할 수 있다. [참고로, 노동과정에 직접 또는 간접으로 참여하는 기술직으로서 엔지니어와 테크니션은 생산적 노동자로서 집합노동자의 일부를 구성한다. 경영학의 용어로 말하자면, 엔지니어와 테크니션은 생산직과 함께 종적 조직으로서 라인을 구성하고 관리직과 사무직은 횡적 조직으로서 스탭을 구성하여 그것을 지원한다.] 본문으로
10) Marx (1965, 10장). 경쟁과정의 메커니즘의 현재적 재정식화와 관련해서는 Political Economy (1990)과 Bidard (1984)를 참조하시오. [참고로, 뒤메닐은 집적(concentration)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문맥상으로는 집중(centralisation)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다.] 본문으로
11) 특히 Moseley (1992; 1997), Wolff (1992), 그리고 우리의 최근 작업인 Duménil et Lévy (1996; 1999d)를 참조하시오. 또 Shaikh (1992)와 Husson (1999)도 참조하시오. [남한의 경우는 윤소영, 󰡔이윤율의 경제학과 신자유주의 비판󰡕, 공감, 2001을 참조하시오.] 본문으로
12) [부문내 경쟁을 통해] 초과이윤의 획득을 가능케 하는 새로운 기술의 도입과 평균이윤율에 대한 효과, 그리고 이러한 기술이 생산자 전체로 일반화되는 과정 등에 대한 마르크스의 묘사는 중요한 논쟁을 촉발했다(Okishio, 1961). [이른바 오키시오 정리에 대한 소개와 비판은 󰡔자본주의의 위기와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에 실린 김숙경의 글을 참조하시오.] 본문으로
13) [예를 들어, Duménil et Lévy, "The Three Dynamics of the Third Volume of Marx's Capital", Contribution to the Conference 'Karl Marx's Third Volume of Capital: 1894-1994', http://www.jourdan.ens. fr/~levy/, 1994; "Technology and Distribution: Historical Trajectories à la Marx", http://www.jourdan.ens.fr/~levy/, 2000 & Journal of Economic Behavior and Organization, Vol. 52, 2003 또는 윤소영,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 앞의 책; 「이윤율의 경제학: 헨릭 그로스만(1881-1950)을 위하여」, 󰡔이윤율의 경제학과 신자유주의 비판󰡕, 앞의 책을 참조하시오.] 본문으로
14) 이윤율을 최대화하는 것은 자본의 생산비용 및 유통비용을 최소화하는 것, 그리고 자본의 다양한 구성 요소에 투하된 자본의 총계를 최소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각주 4에 추가된 역주 참조.] 반대로 모즐리(Moseley, 1992)는 관리비용의 증가 속에서 이윤율 하락의 주요한 요인을 발견한다. 본문으로
15) 만델(Mandel, 1999)은 마르크스주의적 분석틀에서 이윤율 하락과 관련하여 장기파동을 특권화한다. 또 Kleinknecht, Mandel, and Wallerstein (1992)도 참조하시오. 본문으로
16) 자본주의의 시기구분에서 우리는 역사적 경향, 구조적 위기, 제도적 변화, 생산관계 등 다양한 기준을 특권화할 수 있다. 사실 중요한 것은 이 기준들을 일정한 방식으로 결합하는 것이다(Duménil et Lévy, 2001). [또 Duménil et Lévy, "Neoliberal Dynamics - Imperial Dynamics", http://www.jourdan.ens.fr/~levy/, 2003도 참조하시오.] 예를 들어 조절이론은 우리와 다른 방식으로 이 기준들을 결합한다(Aglietta, 1976; Lipietz, 1979; Boyer, 1986). [그람시에게 영감을 받아 조절이론이 특권화하는 포드주의 개념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각주 4에 추가된 역주를 참조하시오. 참고로, 과소소비설을 계승하는 조절이론과 달리 보울즈(S. Bowles), 고든(D. Gordon), 웨이스코프(T. Weisskopf)의 사회적 축적구조론은 이윤율 하락에도 주목한다. 다만 울프(Wolff, 1992)처럼 이윤압박을 그 원인으로 제시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웨이스코프는 이윤압박을 자본생산성 하락과 절충하고 고든은 이윤압박을 장기파동과 절충한다. T. Weisskopf, "A Comparative Analysis of Profitability Trends in the Advanced Capitalist Economies", in Moseley and Wolff, eds. (1992); D. Gordon, "Inside and Outside the Long Swing: The Endogeneity/Exogeneity Debate and the Social Structures of Accumulation Approach", Review, Spring 1991 참조.] 본문으로
17) [󰡔자본󰡕 2권 3부의 대상인] 재생산표식은 국민계정의 핵심을 이루는 생산, 소비, 투자와 같은 거시적 집계변수들 사이의 몇몇 관계를 해명한다. 그러나 재생산표식은 공급과 수요의 부문간 비율을 조정하는 [경쟁] 메커니즘을 고려하지 않는다(이는 󰡔자본󰡕 3권 10장의 대상이다). 본문으로
18) 그러나 마르크스 스스로 [시스몽디에게서 유래하는] 이 테제를 반박한다. “구매력 있는 소비 또는 지불능력 있는 소비자가 부족하기 때문에 위기가 발생한다고 말하는 것은 순수한 동어반복에 불과하다....”(Marx, 1960, 63쪽). 본문으로
19) 공장[또는 오히려 기업] 내부의 조직화와 시장의 무정부성을 대립시키면서 엥겔스가 제시한 것[그리고 카우츠키와 (신경제정책 이전의) 레닌이 계승한 것]은 바로 자본주의적 무정부성에 대한 그러한 시장적 분석이다(Engles, 1955, 3장). 본문으로
20) 개인적[사적] 계약과 중앙집중적[공적] 계약 사이의 관계 및 (그것과 다양한 측면에서 상호 연루되는) 조직과 시장 사이의 관계는 비데(Bidet, 1999)의 저작에서 핵심을 이룬다. 본문으로
21) 중앙은행은 통화정책을 통해 경제 내에서 화폐와 신용, 따라서 수요(가계·기업·국가의 수요)의 양을 얼마간 효율적으로 통제한다. 화폐와 신용의 공급이 이자율의 하락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차입자를 발견하지 못하게 되면, 국가가 그것을 차입해서 지출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경제활동이 크게 위축되는 국면에서의 재정정책의 기능이다. 본문으로
22) 사실상 사적 관리와 금융 메커니즘의 진보는 새로운 불안정성의 맹아를 담지하므로 경제정책은 역사적으로 더 효율적인 것이 되어야 하는데, 이는 중요한 제도적 변형을 함축한다. [미시경제적 안정성을 추구하는] 기업 및 금융부문의 사적 행위자들이 거시경제적 안정성에 대해 가하는 항상적 압력을 우리는 경향적 불안정성이라고 부른다(Duménil et Lévy, 1996, 12장). [또 케인즈파에 대한 ‘신고전파적 종합’이 아니라 ‘고전파적 종합’에 대해서는 Duménil et Lévy, "Being Keynesian in the Short Term and Classical in the Long Term: The Traverse to Classical Long-Term Equilibrium", The Manchester School, Vol. 67, 1999 & http://www.jourdan.ens.fr/~levy/를 참조하시오.] 본문으로
23) 이 절에서 우리는 자본주의가 야기한 손해들에 대한 일반적 목록을 작성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한 손해들은 [생태뿐만 아니라 인간 자체에 대한 손해를 포함하므로] 훨씬 더 막대하다. [생태위기·보건위기·교육위기·가족위기에 대해서는 제이슨 무어 외, 󰡔역사적 자본주의 분석과 생태론󰡕, 공감, 2005(예정); 비센테 나바로 외, 󰡔보건의료: 사회·생태적 분석을 위하여󰡕, 공감, 2005(예정); 윤종희·박상현 외, 󰡔대중교육: 역사·이론·쟁점󰡕, 공감, 2005; 권현정,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의 현재성󰡕, 공감, 2002; 이미경, 󰡔신자유주의적 ‘반격’ 하에서 핵가족과 ‘가족의 위기’: 페미니즘적 비판의 쟁점들󰡕, 공감, 1999를 참조하시오.] 본문으로
24) 예를 들어 그러한 세력관계의 표현은 (사실과 반대로) 이자율의 상승이 재정적자의 결과라고 주장하는 변호론적인 담론들을 반박한다(Duménil et Lévy, 2000, 10장). 본문으로
25) [자본가적-관리자적 사회 개념의 원천에 있는 (자본주의나 공산주의와 구별되는 종별적 계급사회로서) 관료제적 집산주의라는 리치의 개념은 마르크스가 말하는 부정적 통과점으로서 법인자본(또는 국가자본)에 대한 특권화 또는 오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말하는 긍정적 통과점으로서 평의회의 관점에서 제시되는 관료제적 집산주의에 대한 비판은 Paresh Chattopadhyay, "Bureaucracy and Class in Marxism", in Garston, ed. (1993); 윤소영, 󰡔역사적 마르크스주의: 이념과 운동󰡕, 공감, 2004를 참조하시오. 뒤메닐이 제2의 관리자혁명과 동시에 (신자유주의에 의해 해방된 금융을 또다시 억압할 수 있는) 제2의 케인즈주의혁명을 통해 미국의 축적체계와 세계헤게모니가 부활할 수 있다고 부당 전제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이러한 문제와 관련되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점을 제외한다면 자본가적-관리자적 사회 개념은 생각처럼 특이한 것만은 아닌데, 관리직과 사무직 또는 엔지니어와 테크니션의 양극화는 결국 지식노동자와 육체노동자의 분할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발리바르 식으로 말하자면, 자본가적-관리자적 사회는 자본가와 프롤레타리아 사이의 모던한 계급적 모순(적대)과 지식노동자와 육체노동자 사이의 포스트모던한 비계급적 모순(마찬가지로 적대)에 의해 비동시대적으로 과잉결정된다. 다만 발리바르의 지식노동자는 관리자 및 엔지니어보다는 오히려 이데올로그(이른바 인문학적 지식인)를 더욱 강조하는 개념이다. 에티엔 발리바르,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 평등과 자유의 현대적 변증법」, 󰡔‘인권의 정치’와 성적 차이󰡕, 공감, 2003; 윤소영,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 개론󰡕, 공감, 2005(예정) 참조.] 본문으로
[역주]Gérard Duménil et Dominique Lévy, "Vieilles théories et nouveau capitalisme: Actualité d'une économie marxiste", in Jacques Bidet et d'Eustache Kouvélakis, éds., Dictionnaire Marx contemporain, PUF, 2001 (본문과 각주의 [ ]는 독자의 편의를 위해 역자가 삽입한 것임). 마르크스적 관점에서 제기되는 신자유주의 비판의 쟁점들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G. Duménil et D. Lévy, Economie marxiste du capitalisme, La Découverte, 2003을 참조하고, 전후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에서 뒤메닐과 레비에 대한 평가는 Thierry Pouch, Les économistes français et le marxisme: Apogée et déclin d'un discours critique (1950-2000), Presses Universitaires de Rennes, 2001을 참조하시오. 남한에서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최초로 소개한 것은 지난 9월 24일에 작고한 정운영 교수의 󰡔노동가치이론 연구󰡕(까치, 1993)인데, 이 책에는 특히 1970년대까지 전개된 이윤율 하락 논쟁을 총괄하는 박사논문(벨기에 루뱅대학교, 1981)이 실려 있다. 정 교수에 대한 평가는 R. Miller, "Book Review", Review of Radical Political Economics, Summer & Fall 1984; 이우진, 󰡔잉여가치율‧이윤율 추계를 통한 한국의 자본축적과정 분석 시론: 1970-1986󰡕, 서울대학교 국제경제학과 석사논문, 1989; 김숙경, 「마르크스주의 위기이론과 이윤율의 경제학」(서울대학교 경제학과 박사논문), 󰡔자본주의의 위기와 역사적 마르크스주의󰡕, 공감, 2001을 참조하시오. 정 교수를 추모‧추도하는 윤소영의 「정운영 선생을 추억하며」는 사회진보연대 게시판의 삶의 소리 2692번과 대자보 7232번으로 실려 있다.
2005년10월14일 14:3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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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 2007-04-25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연들을 묶은 이 책에도 부록으로 실려있는 글...

 스크롤의 압박 때문에 책으로 읽어야 겠다;;; 


푸하 2007-04-25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정보 감사해요. 우리 동네 도서관에 있는 책이라 다행이에요.^^;
 
 전출처 : balmas > 프로메테우스의 모험: 현대 과학기술의 철학적 의미

 

  월간 [사회운동] 3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혹시 공적으로 인용하거나 논의하시고 싶다면,

[사회운동] 3월호를 기준으로 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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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11월부터 3개월 가까이 나라 전체를 뒤흔든 황우석 스캔들은 이제 검찰의 수사결과 발표를 앞두고 진정 국면에 접어든 것으로 보인다. 이 사건을 굴절시키고 증폭ㆍ확대하는 데 큰 역할을 수행한 인터넷 여론이나 신문 방송이 더 이상 이를 비중 있게 다루지 않고 있다는 점이 이를 잘 말해준다. 하지만 법적인 처리가 이 사건의 종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사건이 제기하는 문제들에 대한 인식과 해결책의 모색은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황우석 팀의 논문 조작과 언론 플레이, 그리고 노무현 정권의 천박한 과학기술 정책에 대한 엄정한 책임 추궁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지만,1) 황우석 스캔들은 그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다양하고 복잡한 쟁점들을 품고 있다. 우리가 소개하려는 르쿠르의 책은 이 사건이 제기하는 문제들 전체를 정확히 해명하고 해결할 수 있게 해주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생명공학의 철학적ㆍ윤리적 함의들을 좀더 깊이 있게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매우 시의성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도미니크 르쿠르(Dominique Lecourt, 1944-)라는 이름은 알튀세르의 사상에 친숙한 사람들에게는 낯설지 않은 이름이다. 그는 국내에 잘 알려진 에티엔 발리바르나 피에르 마슈레와 함께 알튀세르의 주요 제자이자 공동 연구자였던 사람이다. 발리바르가 역사유물론과 정치철학 분야를 담당하고 마슈레가 문예이론과 철학사 연구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면, 르쿠르는 과학철학과 과학사 또는 현대 인식론 분야에서 많은 공헌을 했다.2)

 

  특히 그는 약관 20대에 바슐라르에서 시작하여 캉귈렘을 거쳐, 푸코와 알튀세르로 이어진 프랑스의 인식론 전통에 관한 고전적인 연구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3) 이 작업이 알튀세르의 초기 문제설정에 따라 역사유물론의 한 분과로서 인식론을 체계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바로 뒤에 출간된 󰡔하나의 위기와 그 쟁점: 철학에서 레닌의 입장에 대한 시론󰡕4)이나 󰡔뤼센코. “프롤레타리아 과학”의 실제 역사󰡕5) 같은 저작들은 “이론 안의 계급투쟁”이라는 알튀세르의 철학에 대한 새로운 정의에 따라 과학사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적ㆍ정치적 쟁점을 분석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리고 국가박사학위논문인 󰡔질서와 유희L'ordre et les jeux󰡕6)에서는 논리실증주의와 칼 포퍼,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통해 “과잉유물론Surmatérialisme”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낸다.7) 이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에서 볼 수 있는 철학에 관한 이중의 테제, 곧 변증법(방법)에 대한 유물론(존재론)의 우위, 역사유물론에 대한 변증법적 유물론의 우위라는 테제 대신,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핵심을 (이론에 대한 실천의 우위에 근거를 둔) 철학의 새로운 실천에서 찾으려는 알튀세리엥들의 시도를 집약적으로 표현해주는 개념이다.8)  

 

  알튀세르가 공적인 이론 무대에서 퇴장한 1980년대 이후에도 르쿠르는 이러한 관점에 입각하여 과학철학과 윤리학 분야에서 빼어난 저작들을 산출했다9). 90년대 이후 그는 주로 생명과학 분야의 비약적인 발전이 제기하는 이론적ㆍ윤리적ㆍ정치적 쟁점들을 다루는 데 몰두하고 있다. 󰡔공포에 반대하여󰡕나 󰡔다윈과 성경 사이에 있는 미국󰡕 또는 󰡔생명윤리와 자유󰡕 등은 이러한 경향을 잘 보여주는 책들이다. 이러한 저작들 이외에도 그는 󰡔과학철학과 과학사 사전󰡕이나 󰡔의학사상사전󰡕 같은 집단 저작을 감수했는데10), 이 책들은 2000년대 프랑스 철학계가 배출한 주요한 성과 중 하나로 꼽을 만한 것들이다.11)

 

  20여권에 이르는 르쿠르의 저작 중에서 국내에 소개된 것은 󰡔프랑스 인식론의 계보󰡕와 󰡔유물론, 반영론, 리얼리즘󰡕(백의, 1996), 󰡔진보의 미래󰡕(동문선, 2001) 정도니까, 충분히 소개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12) 이런 상황에서 르쿠르의 최근의 이론적 관심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는 󰡔인간복제논쟁󰡕은 독자들의 아쉬움을 얼마간 덜어줄 수 있을 것 같다. 

  󰡔인간복제논쟁󰡕은 2003년 프랑스에서 출간된 책으로13), 국내에서는 매스컴에 널리 소개되지 못했지만 르쿠르의 이론적 역량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책이다. 원서로는 불과 150쪽 정도이고, 여백이 여유 있게 편집된 번역본으로도 180쪽 남짓한 이 책은 분량으로 평가할 수 없는 중요한 통찰을 여럿 제시해주고 있다. 특히 1990년대 이후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생명공학과 관련된 과학철학적ㆍ윤리학적 성찰을 담고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국역본 제목이 시사하듯이(책의 제목을 이렇게 붙인 이유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이 ‘인간 복제’라는 한정된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생명체 복제”, “인간 복제”라는 과학적인 현상을 소재로 삼되, 이러한 현상이 함축하는 철학적ㆍ정치적ㆍ윤리적 쟁점들을 포괄적으로 검토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이 책에서 르쿠르가 제시하는 논점은 세 가지로 집약될 수 있다. 첫째, 생명공학을 비롯한 현대의 첨단과학과 연루되어 있는 이데올로기의 정체를 드러내는 것이다. 르쿠르는 첨단과학에 대한 과도한 공포나 열광은 사실 기독교 신학의 오래된 두 극단의 표현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둘째,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이론적 기초로서 기술과 인간 본성이라는 개념을 해명하는 일이다. 기술에 대한 도구적 관점과 규범의 절대적 기초로서 인간 본성이라는 관점은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입장에 따라 형성된 관념들을 자명한 사실로, 또는 초역사적인 개념으로 오인하게 만듦으로써, 과학 및 기술의 역할과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게 만든다. 셋째, 현대 과학에 대한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왜곡과 오용이 낳는 윤리적ㆍ정치적 폐해를 막기 위해 적절한 윤리적 관점을 제시하는 일이다. 르쿠르는 관개체론(貫個體論)에 입각하여 규범의 발명이라는 해결책을 제시한다. 


1. 현대의 기술신학: 생명 파멸론과 기술 낙관론


  서론격인 「프롤로그」와 유나바머에 관한 부록 이외에 4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이중의 비판적인 목표, 이중의 투쟁 전선을 설정하고 있다.(하지만 이것들은 실제로는 하나의 동일한 대상이라는 점이 곧 드러난다.) 

 

  한편으로는 저자가 “생명 파멸론자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묵시록적인 관점에서 현대 생명공학은 결국 인간 본성을 파괴할 파멸의 길로 인도할 것이라고 고발한다. 이들은 심지어 생명공학 연구에 대해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생겨난 “반인륜적 범죄”라는 개념을 동원하여 극단적인 비판을 제기하기까지 한다. 이들이 생명공학, 특히 인간 복제 연구를 두려워하고 그것에 분노하는 이유는 이러한 연구가 자연적인 생명의 질서를 파괴할 뿐만 아니라, 인간을 마음대로 조작하고 복제할 수 있는 사물의 수준으로 타락시킨다고 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어떤 이들은 인간 복제는 한 개인과 동일한 사본, 동일한 클론들을 만들어냄으로써, 인간의 정체성과 인격의 동일성 자체를 혼란에 빠뜨리게 될 것이라고 우려한다. 가톨릭 교회나 다양한 분파의 생태론자들, 프랜시스 후쿠야마 같은 보수적인 정치학자만이 아니라 심지어 하버마스 같은 비판 철학자들까지도 공유하고 있는 이러한 관점은 생명공학이 낳을 수 있는 여러 가지 파멸적인 결과들에 관한 공포의 담론을 조장하면서, 절대적인 윤리적 가치를 통해 이를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대쪽에는 “기술 낙관론자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인공 지능 연구자들이나 로봇 공학자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이들은 생명 파멸론과는 정반대로 정보통신기술과 생명공학의 발전에서 인류 구원의 희망을 발견한다. 컴퓨터와 로봇 공학의 발전은 “인간에게 내재한 동물성과 우리 육신에서 비롯되는 죽음”(78쪽)의 한계를 극복하고 인간의 진정한 본질인 지능에 영생을 부여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수학적으로 정의된 가상적인 생명체가 등장할 수 있는 인공적 조건을 창조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인공 생명 연구자들은 멀지 않은 장래에 자기 자신을 조직화하고 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주위 환경에 다양하게 반응하는 “포스트 휴먼”으로서 로봇 종(種)을 만들어내리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다. “결국 2099년에 이르면 ‘인간의 사유는 인간이 만들어낸 지능을 가진 기계의 세계와 융합될 것이다. 인간이라는 개념조차 심각하게 변화할 것이다.’”(82쪽)    

 

  이 두 가지 관점은 인간의 장래에 대해 정면으로 대립하는 전망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전혀 상이한 뿌리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르쿠르에 따르면 이 두 가지 관점은 실제로는 동일한 한 가지 경향을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기독교 신학 전통, 더욱이 천년 왕국설에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뿌리를 두고 있는 기술-신학적 운동이다. 생명 파멸론이 생명공학에서 신의 고유한 권능에 도전하는 인간의 무모하고 어리석은 “오만”(hybris)를 발견한다면14), 기술 낙관론은 오히려 신의 영광의 표현 및 원초적인 낙원으로 회귀하는 길을 본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전통 종교와 무관해 보이는 첨단 과학들이 실은 그 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천년왕국설의 이데올로기와 내밀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인식은 이 책이 제시해주는 중요한 통찰 중 하나다. 


2. 두 가지 쟁점: 기술과 인간 본성


  이 두 가지 관점이 생명공학을 비롯한 첨단 과학을 적합하게 인식하고 활용하는 데 큰 장애물이 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러한 극단적인 기술신학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는 그리 만만한 과제가 아닌데, 왜냐하면 이는 이 두 가지 관점의 이데올로기적인 지주를 이루는 두 가지 통념, 곧 기술과 인간 본성이라는 통념에 대한 근본적인 쇄신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1) 도구로서의 기술 대 구성적 조건으로서의 기술


  르쿠르는 이러한 기술 신학은 기술에 대한 특정한 관점, 곧 도구로서의 기술이라는 관점에 의거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19세기의 실증주의 이래 오늘날 과학-기술에 대한 지배적인 관점을 형성하고 있는 이러한 입장은 인간과 기술의 관계가 외재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고 본다. 여기서 기술은 인간이 지닌 목적을 실현하는 수단이거나 과학적인 지식을 응용하기 위한 도구로 파악된다. 수단 내지 도구로서의 기술은 온전하게 통제할 수 있다면 아무런 문젯거리가 되지 않지만, 생명공학(및 정보공학과 로봇공학)의 발전은 기술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인간 자신의 본성을 변형하고 파괴할 지경에까지 이르도록 만들었다.15)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러한 기술의 반란, 도구의 반역을 저지하기 위한 반테크놀로지 혁명을 수행하는 길이다. “유나바머”로 더 잘 알려진 시어도어 카진스키가 실행한 일이 바로 이것이다.(「부록」) 르쿠르는 유나바머 사건은 증상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고 평가한다. 이는 두 가지 극단적인 기술 신학의 충돌이 어떤 결과를 빚을 수 있는지 잘 웅변해주기 때문이다. 더욱이 기독교 종말론에 근거를 둔 이러한 기술 신학이 또다른 종교적 극단, 예컨대 이슬람 근본주의와 충돌한다면, 그것은 훨씬 더 치명적인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이는 실제로 진행되고 있는 일이다).    

 

  르쿠르는 도구로서의 기술이라는 관점에 맞서 구성으로서의 기술이라는 관점, 곧 기술은 인간과 외재적인 관계를 맺지 않고 인간이 인간으로 성립하기 위한 조건 자체를 구성한다고 보는 관점을 옹호하고 있다(3장). 사실 구성으로서의 기술이라는 관점은 앙드레 르루아-구랑(André Leroi-Gourhan)이나 질베르 시몽동(Gilbert Simondon) 같은 기술철학의 대가들이 제창한 이래 장 클로드 본(Jean-Claude Beaune)이나 베르나르 스티글러(Bernard Stiegler) 등과 같은 기술철학자들이 발전시켜온 프랑스 철학의 독특한(그리고 강력한) 전통 중 하나다.16)

 

  르쿠르가 본론에서 자세히 논의하고 있지 않지만, 이러한 관점은 인류의 발생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 및 인간과 기술의 공진화 과정에 대한 분석과 더불어 인간의 개체화에 대한 존재론적 고찰에 의해 뒷받침된다. 르루아-구랑이 체계화한 고고학적 논의에 따르면 호미니드(hominid)가 유인원에서 분화하고 다시 호미니드에서 현생인류(homo sapiens)가 분화되는 과정에서 기술이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이는 이후 인류의 문화가 진화하는 과정에서도 지속적으로 반복되었다.17) 다른 한편으로 질베르 시몽동은 개체화 이론을 통해 인간과 기술의 구성적 관계를 보여준다. 곧 인간은 주변 환경과 무관하게 미리 형성된 존재론적 단위가 아니라 다른 생물체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환경과의 끊임없는 교섭 작용에 의해 분화되고 개체화된다. 이러한 교섭에서 기술은 인간적인 환경을 구축하는 데 본질적인 수단이 될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그러한 환경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기술적인 대상 역시 인간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 독자적인 개체화 양식을 지니게 된다.18) 요컨대 구성으로서의 기술이라는 관점에 따르면 인간은 항상 이미 기술적 환경 속에서 실존해왔고 또한 앞으로도 계속 기술과 더불어 공진화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입장이 인간과 기술의 외재성을 상정하는 도구적 관점만이 아니라 그것에 함축되어 있는 인간 본성에 대한 관점 역시 거부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2) 인간 본성론인가 관개체론인가


  또한 기술 신학은 인간 본성에 대한 특정한 관점 또는 인간 본성이라는 개념의 자명성을 전제하고 있다. 생명 파멸론이든 기술 낙관론이든 간에, 기술신학은 기술의 발전을 인간 본성의 문제와 결부시킨다. 전자는 과학기술의 발전이 (그대로 방치될 경우에는) 인간 본성을 파괴할 것이라고 믿는 반면, 후자는 인간 본성의 해방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믿는다는 점이 다를 뿐, 양자는 과학기술을 평가하기 위한 본질적인 척도로 인간 본성이라는 개념을 전제하고 있다.

 

  사실 인간 복제 기술에 대한 비판가들, 특히 생명 파멸론자들의 역설은 극단적인 유전자 결정론에 입각하여 생명공학 및 인간 복제 연구를 비판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이 생명공학 및 인간 복제에 대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이러한 기술적 발전이 인간의 자연적 본성을 훼손할 뿐만 아니라 한 개인과 동일한 복제 인간을 만들어냄으로써, 결국 인간의 동일성을 치명적으로 파괴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는 복제 기술로 생겨난 사본이 원래의 인간과 정말로 동일하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으며, 이는 다시 유전적인 정보로 식별되는 한 개인의 유전적인 동일성이 그의 인간적인 동일성 전체를 규정한다는 점(또는 양자가 동일하다는 점)을 전제한다. 돌리의 탄생 이후 미디어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는 아인슈타인을 복제한다거나 죽은 가족의 성원을 그대로 복제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역시 이러한 환상에 기초를 두고 있다.19)

 

  기술 낙관론자들 역시 인간 본성이라는 관념, 따라서 인간에 대한 본질주의적이고 환원주의적인 관념을 가정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인간은 동물과 하등 다를 바가 없으며 동물과 마찬가지로 유전자의 작용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흔히 이야기되듯이 “침팬지의 유전자와 인간의 유전자는 99%가 똑같다”. 좀더 세련된 형태의 환원론은 사유를 컴퓨터의 모델에 따라 이해하기도 한다. 이는 두뇌의 모든 기능을 수학적 모델에 따라 원하는 정도의 과학적 정확성으로 설명하고, 이를 인공적으로 대체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려는 인공 지능 이론가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인간과 침팬지가 유전적으로 거의 동일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처럼 유전적으로 유사함에도 불구하고 왜 인간과 침팬지는 그토록 다른 것인지를 설명하는 일이다. 인간 본성이라는 개념은 이러한 차이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제를 극단적인 두 가지 방식으로 해소시켜 버린다는 점에서 생명공학 및 첨단과학이 제기하는 쟁점들을 정확히 다루는 데 장애를 이룰 뿐이다. 다시 말해 이 개념에 의거할 경우 한편으로 인간 본성을 인간 종에게 부여된 선험적 자질로 간주하든가 아니면 이를 유전적 동일성으로 환원시켜 버리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러나 르쿠르가 잘 지적하고 있듯이 인간 본성이란 자연적인 사실이 아니며 초역사적인 보편성을 지닌 자명한 개념도 아니다. 오히려 이 개념은 전형적인 근대적 개념으로서, 중세의 신학적 기초를 대신하여 인간 행위의 규범적 기준을 제공해준다. 문제는 이 개념이 인간의 특성에 대한 과학적 인식과 부합하지 않을 뿐 아니라20) 가치나 규범에 대한 절대주의적 태도를 조장한다는 데 있다. 르쿠르는 생명윤리에 관한 담론들이 부정적이고 규제적인 방향 일변도로 진행되는 근본 이유를 바로 여기에서 찾고 있다.21) 

 

  이러한 관점에 맞서 르쿠르는 인간에 대한 관개체론적 관점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22) 사실 기술에 대한 구성적 관점은 개인 또는 개체 일반에 관한 관개체론적 관점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 관개체론의 요점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1) 개체는 개체화 과정 이전에 독립적으로 성립하지 않으며 항상 개체화 과정의 (잠정적인) 결과로서 실존할 뿐이다. 따라서 선험적인 인간 본성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자연적인 본성을 인공적인 또다른 본성으로 대체하는 것이 문제일 수도 없다.

 

  (2) 개체는 그의 환경을 이루는 다른 개체들과의 관계를 통해 비로소 하나의 동일성을 갖춘 개체로 성립하며, 바로 이 때문에 타자들을 자신의 동일성의 본질적인 구성 요소로 지니고 있다. 이러한 타자들은 반드시 인간 타자들로 국한되지 않으며, 자연적인 타자들이나 심지어 인공적인 타자들, 곧 기술적인 존재자들도 포함된다.

 

  (3) 가치 규범들은 환경과 교섭하는 인간의 생물학적 규준/규범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생물학적 규준은 선험적이거나 불변적인 것이 아니라 환경과의 교섭 과정에 따라 변화하며, 따라서 절대적인 가치 규범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에 대한 관개체론적 이해는 과학적인 연구를 통해 밝혀진 인간의 가변성과 역동성을 인간에 대한 정의 속에 포함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불변적인 인간 본성을 가정하고 있는 기술 신학적인 관점보다 더 정확하게 인간의 위치를 개념화할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선험적이거나 절대적인 가치 규범(예컨대 선의지라든가 타인에 대한 존중 같은)을 가정하지 않고서도 첨단 과학이 제기하는 윤리적 문제들에 대해 적절한 규범적 대응을 가능하게 해준다는 점도 관개체론적인 관점의 강점 중 하나다.


3. 생명공학 시대의 윤리


  관개체론에서 인간은 욕망하는 존재로 나타난다. 하지만 이 때의 욕망은 선험적인 인간 본성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고발하듯이 탐욕이나 이기주의적인 본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환경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 실존하고 진화해가는 인간의 특성을 가리킨다. 르쿠르는 드니 디드로 대학(파리 7대학) 교수답게 18세기 프랑스 유물론의 대표자 중 한 사람이었던 디드로(Denis Diderot)의 사상에서 이러한 형태의 인간관을 발견하지만, 사실 이는 스피노자의 철학에도 완벽하게 부합하는 관점이다.

 

  스피노자가 모든 자연 실재의 본질을 “코나투스”(conatus)로, 그리고 특히 인간의 본질은 “욕망”(cupiditas)로 정의한 것은 아도르노나 호르크하이머 등이 주장하듯이 일종의 소유적 개인주의를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또한 이는 들뢰즈/가타리가 1970년대에 제안한 프로이트 마르크스주의 모델이나 네그리의 스피노자 해석의 영향 아래 일부 이론가들이 주장하듯이 인간이 지닌 능동적 역량을 부각시키기 위해 제안된 것으로 보기도 어렵다. 이러한 두 가지 관점은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욕망으로서의 인간의 본질을 환경과 분리하여, 개인이 다른 개인들과 맺고 있는 구성적인 관계와 분리하여 사고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곧 이기주의적인 탐욕으로 간주되든 능동적인 역량의 표현으로 해석되든 간에 두 가지 관점에서 욕망은 정의상 개인의 욕망으로 이해되고 있다.

 

  하지만 발리바르를 비롯한 최근의 스피노자 연구가 잘 보여주듯이23), 스피노자의 욕망에 대한 정의는 그의 철학의 관계론적 관점과 분리되어 이해될 수 없다. 다시 말해 인간의 본질이 욕망으로 정의된다면, 이는 우선 본질 개념에 대한, 그리고 개체의 개념에 대한 본질주의적 이해에서 탈피할 것을 전제하고 있다. 이 경우 욕망은 인간이 환경과 주고받는 영향의 인간학적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스피노자 철학의 어휘로 말한다면, 인간을 비롯한 모든 실재, 모든 생명체는 자신의 환경으로부터 “변용되며affici”(영향받고), 또한 이러한 변용되기를 바탕으로 환경을 “변용한다afficere”(영향을 미친다)고 말할 수 있으며, 인간의 욕망은 일차적으로 이러한 변용되기/변용하기의 관계망의 표현이다. 그리고 이러한 변용(affectio)의 관계는 욕망과 기쁨, 슬픔, 사랑과 증오, 희망과 공포 등과 같은 정서들(affectus)로 변이되며, 이를 통해 각각의 개인은 자신의 동일성, 자신의 개성을 얻게 된다.

 

  따라서 모든 개인은 존재론적 개체로 성립하는 과정에서 타자와의 변용 관계를 필연적으로 함축한다는 점에서 관계론적 또는 관개체적인 본성을 지니게 되며, 더 나아가 항상 이미 타인들과의 관계를 전제하고 있는 정서적 관계망(누구도 혼자서 기뻐하고 혼자서 슬퍼할 수 없으며, 더욱이 혼자서 사랑하고 증오하고 희망하거나 공포를 느낄 수는 없다)을 통해 자신의 동일성 내지 개성을 얻는다는 점에서, 가장 개인적이고 가장 내면적인 모습에서도 타인의 흔적을 포함하게 된다. 그렇다면 불변적이고 자연적인 인간 본성이라는 관념에 의거하여 생명 공학의 발전에 공포와 불안을 느끼거나 그것이 기존의 본성을 전혀 새로운 인공적 본성으로 대체시켜 줄 것이라고 환호하는 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인가 쉽게 알 수 있다.

 

  따라서 르쿠르는 인간 본성이라는 관념에 기초를 두고 있는 기존의 생명윤리 대신 관개체론에 입각하여 “규범의 발명”이라는 새로운 윤리적 관점을 제안한다. 이러한 관점은 인간의 고유한 능력, 곧 “자신이 고유한 인간으로 존재하는 방법을 끊임없이 재발견하는 능력”(64쪽)에 기초를 두고 있다. 물론 그가 제안하는 규범의 발명이라는 주장은 자의적으로 이런저런 윤리적 규범들을 만들어내자는 뜻은 아니다. 그보다 이는 윤리적, 사회적 규범들이란 어떤 초월적이거나 절대적인 기초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체로서 인간이 지니고 있는 생물학적 규준에 의거하고 있으며, 이러한 규준의 변화에 맞춰 변화될 수밖에 없고 또 변화되어야 한다는 점을 가리킨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관점이 생명 공학에 대한 낙관적 전망에 기초를 둔 일방적인 윤리적 승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관개체론적인 관점에 따를 경우 인간 개인은 항상 이미 자기 안에 타자성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것은 정의상 양가성을 띠고 있다. 곧 이것은 인간에게 해롭고 악한 것일 수도 있고 유용하고 선한 것일 수도 있다. 따라서 윤리적 규범과 가치 판단의 문제는 외부 대상에 대한 규제나 금지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내부에, 각각의 개인 내부에 존재하는 비인간적인 요소, 악의 요소를 어떻게 규제하고, 또 유용하고 긍정적인 요소들을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의 문제가 된다. 선과 악, 좋음과 나쁨은 그것들이 인간의 존재 자체와 동연적이라는 점에서 절대적인 관점에서는 제대로 해명되거나 해결될 수 없다. 악은 선과 마찬가지로(또는 폭력은 정의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존재 조건 자체의 일부인 것이다.

 

  따라서 규범의 발명이라는 테제는 생명공학이 불러올 수 있는 치명적인 문제점들을 경계하고 대비하도록 요구하지만, 그에 앞서 인간의 특성 및 규범의 문제를 좀더 자연적이고, 좀더 적극적인 관점에서 파악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인간 복제 및 인공 지능 또는 인공 생명의 과학적 전망이 제시되는 시기에 이러한 관점은 과학기술과 윤리의 내재적 관계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한 이론적 지주로 삼을 만하다.  


4. 이론적 과제와 전망


  내가 볼 때 이 책의 첫 번째 장점은, 생명공학 기술의 발전을 17세기 과학혁명 이래 서양의 기술ㆍ과학적 발전의 과정 속에 위치시켜 고찰하고 있으며, 왜 그러한 고찰이 이 문제를

정확히 파악하는 데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국내에 소개된 생명 복제나 인간 복제에 관한 대부분의 저술들은 현재의 맥락에서 전개되는 쟁점들을 다루고 있으며, 이에 따라 피상적인 현상 기술에 그치든가 아니면 맹목적인 편들기(가령 생명공학은 과학기술 발전의 신기원인가 인류의 재앙인가, 인간은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는가 아니면 환경적 요인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는가, 또는 본래적인 자유의지를 갖는가, 배아는 인격체인가 아닌가,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본능적인 존재일 뿐인가 인격의 존엄성을 가진 존재인가 등)를 부추기는 경향이 있다. 반면 이 책은 넓은 역사적 시야와 신선하고 깊이 있는 철학적 성찰로 문제를 조망하면서 현재의 문제가 어떻게 오래된 신학적ㆍ철학적 쟁점들과 결부되어 있는지 보여준다.  

 

  더 나아가 이 책은 이 문제를 적절한 방향에서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기술이나 인간 본성에 대해 지니고 있는 익숙한 관념들이 개조되어야 하고 특히  윤리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바뀌어야 한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물론 내가 볼 때) 보여주고 있다. 생명윤리에 대한 대개의 논의가 이러한 존재론적ㆍ인간학적 기초에 대한 검토 없이 특정한 윤리적 관점에 의거하여 규제적이거나 금지하는 대안들을 내놓는 데 그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르쿠르의 제안이 얼마나 대담하고 파격적인 것인지 잘 알 수 있다. 이는 과학철학과 과학사 분야에서 오랫동안 연구하고 이를 윤리적ㆍ정치적 문제와 결부시켜 사고해온 저자와 같은 사람이 아니라면 쉽게 제기할 수 없는 주장이다.   

 

  그동안 국내에는 소개되지 못했던 프랑스 과학철학 및 기술철학의 한 가지 관점을 엿보게 해준다는 점도 이 책이 지닌 또다른 미덕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 연구자들에게 기술의 문제는 그동안 이론적 공백으로 남아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기계에 관한 마르크스의 언급에 주목하는 연구자들이 있었지만, 대개의 경우는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중심으로 전개된 소외론 또는 도구적 합리성의 관점에서 (부정적으로) 취급되거나 아니면 경제사회학이나 경제사 분야의 부차적인 논의 주제로 간주되어 왔다.24) 가령 과학기술혁명(이른바 “극소전자혁명”)이 생산구조와 노동자 계급의 지위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가를 둘러싼 논쟁 같은 것이 한 가지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이 책은 구성적 기술론에 입각하여25) 기술이 사회구조 및 인간의 진화에서 차지하는 역할을 좀더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있는데, 첨단 과학기술에 대한 좀더 정확한 논의를 위해서는 꼭 필요한 태도라고 평가하고 싶다.  

 

  하지만 르쿠르 책은 (적은 분량의 저작에서는 불가피한 일이기는 하지만) 몇 가지 공백을 남겨놓고 있다. 우선 󰡔인간 복제 논쟁󰡕에는, 한 논평자가 지적하듯이, 현대 과학의 본질적인 특징 중 하나인 사회 경제적 조건에 관한 논의가 빠져 있다.26) 특히 생명공학과 관련된 핵심 쟁점 중 하나가 특허권을 둘러싼 국가들 사이의, 거대 기업들 사이의 경쟁이며, 이에 따른 자본에 대한 과학연구의 예속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간과해서는 안될 공백이다.

 

  하지만 이러한 공백은 단순한 부주의로 보기는 어려우며, 좀더 내재적이고 심층적인 또다른 공백과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는 근대 과학기술에 고유한 발전(또는 “진화”)의 동역학과 자본주의의 경제적 동역학 사이의 연관성은 무엇인가라는 문제다.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과학기술은 대개 생산력의 일부로 간주되었을 뿐, 자신의 고유한 발전 내지 진화의 메커니즘을 갖춘 체계로 인식되지 않았다. 하지만 기술이 존재론적 차원에서 인간의 존재 자체의 구성적인 조건을 이루고 있고 인간의 진화 과정과 긴밀한 상호연관 속에서 함께 진화되어 왔다면, 기술은 단순히 도구나 수단으로 간주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경제의 종속 변수 내지 생산력의 일부로 치부되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기술의 메커니즘과 자본주의 경제의 동역학이 맺고 있는 관계는 어떤 것인가? 이는 분명 쉽게 답변하기 어려운 질문이지만 또한 과학과 기술, 경제가 맺고 있는 상호연관성을 이론적으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우회할 수 없는 쟁점이라는 것은 분명하다.27) 

 

  또한 르쿠르의 작업은 생체정치(biopolitique)의 문제설정으로 보충될 필요가 있다. 르쿠르는 이 책을 명시적으로 생체정치 또는 생체권력의 문제설정과 연결시키고 있지만(26쪽), 이를 구체적으로 이론화하지는 않고 있다. 푸코가 자신의 후기 작업, 특히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들에서 발전시킨 생체권력28) 개념은 규율권력이 개인의 신체를 대상으로 하는 데 비해 대중으로서의 인구 또는 “종(種)으로서의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권력을 의미한다. 따라서 생체권력 또는 생체정치는 미시적인 차원에서 수행되는 규율권력의 실행공간을 마련해주는 (일종의) 거시권력으로 볼 수도 있다. 생체정치는 생명체로서의 인간들의 생명을 규제하는 것을 자신의 고유한 과제로 삼는다. 건강과 질병의 문제나 공중위생 같은 보건복지 및 의료정책에 관한 일만이 아니라 인구조사 및 출산율과 사망률, 평균 수명 등과 같은 인구정책 전반이 생체정치의 주요 과제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생명공학의 문제가 함축하는 윤리적ㆍ정치적 쟁점들은 생체정치의 문제설정에서 다룰 필요가 있다.      

 

  우리가 지적한 이러한 공백들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쟁점들이며, 생명공학을 비롯한 첨단과학들의 문제를 좀더 포괄적이면서 구체적으로 다루기 위해서는 상호 연관성 속에서 취급되어야 할 문제들이다.29) 이렇게 볼 때 르쿠르의 책은 좀더 진전된 연구를 위한 일종의 “서론”으로 읽는 게 마땅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이 책이 지니는 가치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좀더 폭넓은 역사적ㆍ철학적 관점에서 생명공학을 비롯한 첨단과학이 제기하는 문제들을 인식하고 싶어 하는 독자들에게 󰡔인간 복제 논쟁󰡕은 귀중한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다. 조만간 좀더 많은 르쿠르의 저서들이 번역되고 그의 연구가 앞으로 좀더 체계화되길 기대하는 것이 필자 혼자만은 아닐 것이다.      




1) 󰡔진보평론󰡕 26호(2005년 겨울)는 황우석 스캔들의 초기 쟁점이었던 난자제공의 윤리적 문제와 연구 윤리 문제를 중심으로 “생명공학과 민중운동의 새로운 과제”를 특집으로 다루고 있고, 󰡔인물과 사상󰡕은 “한국 사회를 발가벗긴 황우석 신화”라는 제목 아래 PD수첩 보도를 통해 드러난 한국 언론의 과학보도 관행의 문제점을 조명하고 있다. 

2) 1983년 사망한 미셸 페쇠는 담론 분석과 이데올로기의 관계를 해명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La vérité de la Palice, Maspero, 1975; (avec François Gadet), La langue introuvable, Maspero, 1983. 

3) 이 연구는 국내에도 번역되어 있다. 󰡔프랑스 인식론의 계보󰡕 박기순 옮김, 새길, 1995 참조. 그 외에도 그는 바슐라르의 과학철학과 시학 사이의 이론적 모순을 해명하고 있는 󰡔바슐라르, 낮과 밤Bachelard, le jour et la nuit󰡕, Grasset, 1974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4) Une crise et son enjeu: Essai sur la position de Lenine en philosophie, Maspero, 1973; 국역본은 󰡔유물론ㆍ반영론ㆍ리얼리즘󰡕 이성훈 편역, 백의, 1996의 1부에 수록되어 있다.

5) Lyssenko: Histoire réelle d'une “science prolétarienne”, Maspero, 1976.

6) Grasset, 1980. 

7) 여기서 “과잉sur-”은 교의나 이론으로 고착화된 종래의 철학적 실천에 맞서 이론(으로서의 유물론)에 대한 실천의 우위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 일종의 대체보충이다. 이 개념은 또한 바슐라르의 “surrationalisme”, 곧 “과잉합리주의”에 준거하면서 동시에 그것이 함축하는 관념론적 한계를 정정하려는 시도로 간주될 수도 있다.

8) D. Lecourt, “Pour une philosophie sans feinte(Vers le sur-matérialisme)”, in L'ordre et les jeux; P. Macherey, “Sur l'histoire de la philosophie considerée comme lutte des tendances”, in Histoires de dinosaure: Faire de la philosophie 1965-1997, PUF, 1997; E. Balibar, Lieux et noms de la vérité, Aube, 1994 참조. 

9) 르쿠르는 󰡔인간 복제 논쟁󰡕에서도 여전히 이러한 철학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137쪽 참조.

10) Dictionnaire d'histoire et philosophie des sciences, PUF, 1999; Dictionnaire de la pensée médicale, PUF, 2004.  

11) 그 외에 르쿠르는 “디드로 포럼Forum Diderot”이라는 대중교양강좌를 주재하면서, 다른 전문가들과 함께 생명과학 분야의 쟁점들을 대중에게 소개하는 작업도 진행하고 있다. 특히 Faut-il vraiment cloner l'homme?, PUF, 1998; La bioéthique est-elle de mauvaise foi?, PUF, 1999; Les médecins doivent-ils prescrire des drogues?, PUF 2000 등 참조. 

12) 하지만 󰡔진보의 미래󰡕는 최악의 번역본 중 하나로 꼽을 수 있을 만큼 번역이 엉망인 책이므로 주의하기 바란다.  

13) 이 책의 원제는 “Humain, posthumain: La technique et la vie”이고, 르쿠르 자신이 감수하는 “과학, 역사, 사회Science, Histoire et Société”라는 총서의 한 권으로 프랑스대학출판부(PUF)에서 출간되었다.

14) 이는 17세기 이래 또는 19세기 말이래 과학-기술 복합체를 형성해온 근대 과학에 대해 지속적으로 제기되어온 비판이다. 르쿠르는 이전 저작에서 파우스트(악마와의 계약)와 프랑켄슈타인(괴물의 발명)이라는 문학적 형상을 통해 과학에 대한 공포의 상상적인 기초를 검토한 바 있다. D. Lecourt, Prométhée, Faust, Frankenstein, Synthélabo, 1996 참조.      

15) 기술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도구적 이성” 개념을 발전시킨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전통에서도 볼 수 있다.

16) 이들의 저작은 국내는 물론이거니와 프랑스 바깥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데, 데리다와 스티글러의 대담집에서 이러한 기술철학 전통의 면모를 약간이나마 살펴볼 수 있다. 자크 데리다ㆍ베르나르 스티글러, 󰡔에코그라피󰡕 김재희ㆍ진태원 옮김, 민음사, 2002 참조. 르루아-구랑의 연구는 초기 데리다의 작업, 특히 󰡔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7) André Leroi-Gourhan, Le Geste et la Parole, tome 1-2, Albin Michel, 1964-65; B. Stiegler, La technique et le temps, tome 1, Galilée, 1994 참조.

18) Gilbert Simondon, Du mode d'existence des objets techniques, Aubier, 2001 참조.   

19) 이러한 오류에 대한 비판으로는 르원틴의 글에 필적할 만한 것이 없다. 리처드 르원틴, 「복제에 관한 혼동」, 그레고리 펜스 엮음, 󰡔인간 복제, 무엇이 문제인가󰡕 류지한 외 옮김, 울력, 2002. 

20) 생명공학을 비롯한 현대의 첨단 과학들이 사람들에게 불러일으키는 두려움이나 당혹감은 이러한 괴리의 한 가지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21) 󰡔인간 복제 논쟁󰡕에서는 “규제하고 금지하는 규율”로 이해된 생명 윤리의 불모성을 지적하는 데 그치고 있으나, 2004년에 출간된 악셀 칸과의 대담집에서는 이 문제에 관해 좀더 부연하고 있다. Axel Kahn & Dominique Lecourt, Bioéthique et liberté, PUF, 2004 참조.

22) 시몽동에서 유래한 “관개체론”(transindividualisme)에 대해서는 에티엔 발리바르, 「스피노자에서 개체성과 관개체성」, 󰡔스피노자와 정치󰡕 진태원 옮김, 이제이북스, 2005 참조.  

23) 발리바르, 앞의 글 참조. 우리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현대 스피노자 연구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관계론적인 관점에서 스피노자 철학을 해석하려고 시도한 바 있다. 진태원,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관계론적 해석󰡕(서울대학교 철학과 박사학위 논문, 2006) 참조. 

24) 그러나 미국의 기술철학자인 앤드류 펜버그는 서구 마르크스주의 전통과 프랑스 기술철학의 전통(특히 시몽동의 작업)을 접목시키려는 흥미있는 시도를 전개하고 있다. Andrew Feenberg, Critical Theory of Technology, Oxford University Press, 1991; Alternative Modernity: the Technical Turn in Philosophy and Social Theor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5 등 참조.  

25) 이는 80년대 이후 프랑스 출신의 브뤼노 라투르나 미셸 칼롱 및 영미의 과학/기술 사회학자들을 중심으로 제시된 이른바 과학과 기술의 “사회적 구성론”(social constructionism)과는 약간 다른 입장(양자가 대립한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이다.

26) Axel Kahn & Dominique Lecourt, Bioéthique et liberté, op. cit., p. 51.   

27) 이 점과 관련하여 가장 앞서 있는 사람은 베르나르 스티글러다. 특히 B. Stiegler, De la misère symbolique, tome 1-2, Galilée, 2004; Mécréance et discrédit: tome 1, La décadence des démocraties industrielles, Galilée, 2005 참조.   

28)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박정자 옮김, 동문선, 1998; Sécurité, territoire, population: 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77-1978), Seuil, 2004; Naissance de la biopolitique: 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78-1979), Seuil, 2004 참조. 이에 관한 평주로는 특히 Jean-Claude Zancarini ed., Lectures de Michel Foucault, ENS Editions, 2000 참조.

29) 또는 역으로 이러한 고찰을 통해서만 생체정치의 문제설정 내에 존재하는 이단점들에 대한 좀더 정확한 인식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가령 기술(적 진화)에 대한 관점의 부재에서 생체정치와 관련된 아감벤 작업의 이론적 한계 내지 공백 중 하나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그가 하이데거를 철학적 준거로 삼고 있다는 점과도 무관하지 않다. G. Agamben, Homo Sacer,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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