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젝: 좋습니다. 저는 49년에 지금은 해체된 유고슬라비아의 연방 국가였던 슬로베니아에서 태어났습니다. 공산국가였기 때문에 저는 맑스주의와 친숙한 환경에서 태어났지만 맑스주의, 특히 프랑크푸르트학파가 당과 체제의 공식이론이었고 저는 거기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별도로 프랑스의 (탈)구조주의에 적극 관심을 가졌습니다. 제가 친구들과 함께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1967)를 대학 1학년 때 번역했는데, 68년의 일이었으니 아마 세계 최초의 번역이 될 겁니다(웃음). 이후에 저는 라캉정신분석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졌습니다. 80년대 초반, 저와 친구인 믈라덴 돌라르와 함께 이론정신분석학회를 창립하고 라캉의 사위이자 수제자인 자크-알랭 밀레를 초청했습니다. 그때 밀레가 저와 돌라르에게 유학을 권해서 함께 파리 8대학에 갔습니다. 저는 88년에 <가장 숭고한 히스테리증자: 헤겔이 지나간다>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이듬해 영어로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을 펴냈습니다. 동구사회주의가 무너질 즈음이고 자유주의 만세의 합창이 울려 퍼지던 분위기였죠. 그 무렵 유고슬라비아도 해체되었고 저는 슬로베니아 대통령후보로 출마했다가 다행히 떨어졌지요(웃음).
그로부터 약 20여 년 동안 저는 주로 영어권에서 활동하여 30권 가량의 책을 펴냈는데, 최근에 당신 책에 대한 서평을 토대로 <시차적 관점>을 냈죠. 저는 슬로베니아 라캉학파의 좌장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 그런 학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웃음). 그냥 저와 돌라르가 이론정신분석학회를 창립해 각각 회장, 부회장을 맡은 격이지요. 그렇지만 돌라르를 비롯한 제 동료들인 알렌카 주판치치, 레나타 살레츨, 미란 보조비치 등은 매우 독창적인 저작을 펴내고 있지요. 저는 현재 라캉정신분석과 헤겔철학, 맑스주의적 정치경제학비판을 결합하여 전지구적 자본주의에 맞설 보편성이라는 문제에 대해 고심하고 있습니다.
고진: 저는 41년생입니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는 한편 당시의 좌익운동이었던 전공투에 몸담았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좌익운동이 테러리즘으로 귀결되고 난 후 저는 문학비평을 하는 동시에 <맑스, 그 가능성의 중심>(1974)과 같은 저작을 썼습니다. 맑스주의를 죽은 개 취급할 그 당시에 맑스에 관한 책을 써서 욕 좀 먹었지요(웃음). 한편으로 저는 <일본근대문학의 기원>(1980)과 같은 문학비평적 저작을 통해 근대문학이 제국주의적 국민국가의 이데올로기와 공모하고 그것을 은폐한 흔적을 쫓으면서 일종의 해체론적 비평을 감행했습니다. 물론 그것은 푸코의 구성주의나 데리다의 해체주의와 연관성이 있지만, 이른바 그것들의 속류판인 포스트모더니즘과는 다릅니다. 나쓰메 소세키라는 일본근대 초창기의 대작가에서 저는 문학의 다른 가능성을 엿보았지요.
<트랜스크리틱>을 쓴 최근까지 제 관심사는 자본=국민=국가라는 보로메오 매듭을 해체하는 신연합운동(New Association Movement)의 구체적인 형태를 구성하는 데에 있습니다. 실패로 끝났지만 지역통화(LETS)에 기반을 둔 NAM운동을 했던 것도 그런 연유였지요. 돌이켜보면, ‘맑스, 그 가능성의 중심’의 자본주의 비판,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에서의 국민국가비판이 <트랜스크리틱>에서 종합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트랜스크리틱>까지 저는 맑스주의 정치경제학비판과 문학비평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느라 부심했지요. 최근에 <근대문학의 종언>(2005)을 통해 저는 문학을 떠난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습니다. 문학의 사회적 역할이 그 소임을 다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무튼 저는 혼자서 1인 2역을 담당하느라고 거의 분열될 지경이었지요. 라캉학파 정신분석가에게 정신분석치료를 받다가 그만두었을 정도니까요(웃음). 아시다시피 일본은 라캉학파 시장(市場)입니다.
……에르고(Ergo)……: 이데올로기와 자본주의 비판
지젝: 저 역시 밀레로부터 정신분석임상훈련을 받다가 그만두었지요. 지금 생각하면 둘이서 교활한 분석가 대 음험한 히스테리증자로 지적 곡예를 벌였다는 느낌이지요. 그나저나 그때부터 저는 라캉정신분석의 임상치료에 대해 거리를 두기 시작했습니다. 밀레와도 사이가 소원해 졌죠. 물론 라캉에 대한 그의 정교화작업은 여전히 찬탄을 불러일으키지만요. 저는 정신분석의 사회적·문화적 활용을 더 중요시 합니다. 저는 선생이 문학에 대해 비평작업을 수행한 것에 상응해서 대중문화에 대한 일종의 ‘증상적 독해’를 해왔지요. 그러나 저는 <삐딱하게 보기>(1991)나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1992) 등을 통해 할리우드 영화와 고급이론을 접목시키고 거기서 사람들이 대중문화를 ‘즐기는’ 방식을 관찰했습니다. 거기서 저는 온갖 정치적·사회적 이데올로기적 꿈, 말실수, 소망충족, 특히 죽음충동과 향유(jouissance)의 뒤틀린 형태를 발견했죠.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서 저는 포스트이데올로기 시대의 인간은 이데올로기로부터 거리를 둔 냉소적(풍자적) 형태로 이데올로기에 붙들려있다는 공식을 내놓았습니다. 단순히 이데올로기에 대한 거리를 둔, 맑스로부터 알튀세에 이르는 비판적 독해로는 만족할 수 없었죠. 왜냐하면 사람들은 이데올로기에서 바로 자신들이 ‘즐길만한’ 뭔가를 발견하기 때문이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그릇된 것인 줄 알면서도 (거리를 두면서도) 그것을 행하는 (그것에 참여하는) 이상한 역설이 생겨납니다. 예컨대 90년대 이후의 인종주의, 특히 제 조국이 속해있던 발칸반도에서 벌어진 인종적 증오와 폭력의 향유는 사실 그에 대해 경악한 서구의 냉소주의와 구조적으로 상동관계입니다. 돌라르는 발칸반도는 서구유럽의 무의식이라고 했죠. 저는 라캉, 특히 후기라캉의 정신분석을 이데올로기비판의 강력한 형태로 재가공했습니다. 실재(The Real)와 향유, 증환(sinthome) 등과 같은 개념이 제게 중요하죠.
고진: 저는 선생과는 조금 다르게 맑스, 특히 <자본론>을 제 비판적 사유의 준거점으로 삼고 출발했습니다. 제가 하부구조만 선생이 상부구조만 문제시했다는 건 오해가 되겠죠. 저와 선생 모두 상품형식에 대한 맑스의 비판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정치경제라는 매트릭스를 문제 삼고 있죠. 저도 '일본정신분석’이라는 글에서 정신증적 폐제(foreclosure)라는 라캉의 개념을 통해 안으로는 포스트모던적이지만 밖으로는 자폐적인 일본의 담론공간을 분석한 바 있습니다. 뭐, 일본의 어떤 포스트모던 역사학자들은 일본의 남경대학살(1938)은 구성된 담론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말하니까요(웃음). 지나가면서 언급했지만 <트랜스크리틱>에서 자본=국민(nation)=국가(state)라는 삼항조는 실재=상상계=상징계라는 라캉적 보로메오 매듭과 연결됩니다. 이건 단순한 유비는 아닙니다. 저는 오랫동안 <자본론>을 읽으면서 생산과정과 유통과정의 숨 막힐 듯한 영구적 순환이 자본주의경제를 지탱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과정과 유통과정의 기묘한 틈새, 예컨대 공황(위기)을 통해 자본주의가 더욱 가속화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젝: 상처는 상처를 낸 창만이 치유한다!
고진: 그렇죠. 예컨대 물건은 팔리지 않으면, 다시 말해 유통과정에 참여하지 않으면 상품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특유의 ‘목숨을 건 비약’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공황 때에 생산된 물건을 바다에 내다 버리는 것이지요. 그건 상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유통과정, 즉 화폐(M)-상품(C)-화폐(M) 사이에 틈새, 생산자인 노동자들이 동시에 소비자가 되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까지의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은 생산과정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파업, 스트라이크와 같은 폭력적 형태로 자본주의에 저항해왔지만, 거기엔 한계가 있습니다. 오히려 유통과정에 주목하면 문제가 풀리죠. 생산자는 곧 소비자이기도 합니다. 맑스가 2천년 동안 지속해온 수수께끼라고 말했던 잉여가치는 노동자가 물건을 생산해서 상품이 될 때 넘겨지는 차액이지만, 이것은 또한 노동자=소비자가 상품을 구매할 때도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역통화나 NAM을 통해 잉여가치가 0(zero)인 교환형태를 구상했던 것입니다. ‘당신의 노동력 상품을 팔지 마라’는 안토니오 네그리의 이론과 함께 ‘자본가의 상품을 사지 마라’는 간디의 노력은 소중합니다. 지금까지 자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 듯하지만, 그것은 오늘날 비판만으로는 사라지지 않는 국민=국가를 재조명하는 측면도 있습니다. 국민에 대해 소비자연합을, 국가에 대해 소비자 연합단체나 기구를 상상해보면 됩니다. 그것은 국민=국가 ‘사이에 존재하는’(in between) 새로운 코뮌의 기반이 될 것입니다.
……숨(Sum): 레닌주의와 신연합운동
지젝: 칸트 식으로 말하면 국민=국가=자본은 초월적 가상과 같은 것이라서 계몽주의적 비판만으로는 절대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늘날 유행하는 다문화주의적 탈식민주의와 국민국가비판에 대해 제가 마뜩해하지 않는 이유도 거기에 있죠. 선생도 이에 대해 언급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칸트철학에서 초월적 가상은 보통 신·세계·영혼 같은 것인데, 이것은 이성 자체에서 연유하는 형이상학적 가상이라는 점에서 문제적입니다. 비판의 탄환으로 쏘아 죽였다싶더라도 흡혈귀처럼 살아남죠. 억압된 것의 회귀입니다. 그러고 보면 선생이나 저나 오늘날에 벌어지는 ‘칸트로의 회귀’에 일조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의견차가 있을 듯 합니다. 저는 독일관념론에서 헤겔을 가장 중요한 철학자로 생각하는데, 선생은 좀 다른 듯 합니다. 선생의 헤겔 비판은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의 전형적인 헤겔 비판, 즉 절대지에 가보지도 않고 의식과 절대지의 순환을 처음부터 닫힌 체계로 파악하는 듯…
고진: 이제 서로의 차이를 확인하는 일만 남은 건가요(웃음). 선생의 책을 읽다보면 참조하는 철학자의 계열이 다르다는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선생은 데카르트-칸트-셸링-헤겔과 함께 기독교철학자인 말브랑슈-파스칼-키르케고르를 중요시하지요. 현대철학자 중에서는 플라톤주의자인 알랭 바디우가 선생의 이론적 동지이고요. 저는 데카르트-스피노자-칸트-니체와 함께 데리다-푸코-들뢰즈의 사유노선에 아무래도 가까운 듯 합니다. 참, <신체 없는 기관: 들뢰즈와 결과들>(2004)을 읽어보니 선생은 모두가 사랑하는 스피노자를 홀로 싫어하고 계시더군요. 상징계를 고려하지 않은 상상계의 철학자라고(웃음).
지젝: 들뢰즈의 표현을 비틀어 저는 그것을 스피노자 뒤에서 하는 헤겔의 비역질이라고 했죠(웃음). 사실 헤겔의 절대지는 의식의 완성된 형태가 아니라 그것이 끊임없이 실패하는 구조적 불가능성이라고 보고 싶습니다. 저는 그것을 실재라고 부릅니다. 사드 소설에는 자신의 성기를 자신의 항문에 삽입하는 기괴한 장면이 나오는데, 그런 점에서 의식을 절대지 뒤에 삽입시켜 닫힌 원환 고리를 완성하는 도착증적 꿈을 꾸는 자들은 바로 헤겔에 대한 비판자들인 거죠.
고진: 글쎄요. 정신분석적인 사후(事後)의 시점에서 헤겔을 전유한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공평을 기하자면, 헤겔의 ‘법철학’과 같은 저서는 중요합니다. 헤겔은 다양한 욕망의 형태를 긍정하는 시민사회(자유)를 인정하면서 그것이 초래할 수 있는 불평등을 제어할 수 있는 국가(평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 둘의 불일치는 국민(형제애)이라는 상상력으로 보완되지요. 이것은 나중에 맑스가 각각 <루이보나파르트 브뤼메르 18일>(1852)과 <자본론>(1867)에서 행했던 근대국민국가비판과 정치경제학비판으로 이어집니다. 공교롭게도 맑스는 헤겔에 대한 긍정적 언급으로 두 책을 시작하고 있죠. 헤겔에겐 확실히 이러한 잠재력이 있습니다. 그래도 저는 ‘타인을 수단뿐만 아니라 목적으로도 대하라’라고 말하는 칸트에서 코뮤니즘의 시작을 보고 싶습니다. 그는 계몽에 내재하는 ‘적대’(antagonism)에 대해 누구보다도 민감했습니다. 칸트는 계몽이 먼 미래에는 완성될 것이라고 보았지만, 스탈린주의자처럼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라는 식으로 말하지 않았죠. 우리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후손을 상상하고 투쟁해도 좋습니다. 환경문제나 석유전쟁, 기아, 치명적 전염병 등이 일어나는 오늘날의 자본주의체제에서 칸트의 정언명법은 훌륭한 21세기 윤리입니다.
지젝: 그렇군요.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전지구적 자본주의 쪽으로 옮겨가고 있는데요. 오늘날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는 자본에 대한 대항운동에 대해 의견을 나누면서 짧은 대담을 끝낼까 합니다. 네그리·하트의 <다중multitude>(2005)에 대해 말해보죠.
고진: 점점 더 가혹해지고 있는 후기자본주의체제에서 다중은 분명 긍정할 만한 요소가 있는 대항운동의 우세한 작인이지만, 뭐랄까, 지나치게 낭만적(문학적)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체제가 허용하는 한에서의 일시적 축제라고나 할까요. 다중은 맑스·엥겔스의 <공산당 선언>(1848)에서 말한 프롤레타리아트의 21세기 판본이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요점은 ‘만국의 노동자여, 일하지 말자’입니다. 하지만 아까 말한 것처럼 이것 역시 생산력의 측면에서 자본에 대한 대항운동을 구상하는 전통적 발상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국가개념에 대한 성찰이 없습니다. 신자유주의적 제국주의에 대항한다면 알 카에다도 다중이 아닙니까. 다중은 애매모호합니다.
지젝: 다중은 이렇게 말하죠. ‘나는 동성애자이고 전업주부이며, 비정규직 노동자이고 팔레스타인인이다…’ 이것은 은유, 시(詩)라면 문제가 없지만, 분명 정치는 아닙니다. 연대는 필요합니다만, 저는 다른 관점에서 다중이 성, 인종 등의 범주를 들여오면서 계급문제를 흘려버리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그들도 계급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성, 인종과 같은 종(鍾)으로 격하됩니다. 계급은 종이되 종이면서 유(類)입니다. 유일무이한 적대죠. 역시 문제는 정치경제학입니다(웃음)! 다중이론가들은 스피노자의 정동(affect)개념을 근간으로 삼지만, 이 정동이야말로 파시즘의 구성요소이기도 하죠. 그들은 ‘권력 없는 권력’을 원한다 말하지만, 이건 손안대고 코풀자는 거 아닙니까. 만일 그들이 권력을 잡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오히려 당파적 레닌주의나 바디우식의 마오이즘이 역으로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고진: 다중에 대한 선생의 비판에는 동의합니다만, 레닌주의, 마오이즘의 정치적 폭력과 테러리즘은?
지젝: 저는 세계를 비난하되 자신은 거기에 빠져있는 좌파적 ‘아름다운 영혼’의 자기기만을 선택하느니보다 보수주의자처럼 손에 피를 묻히더라도 단두대를 선택하는 행위(act)가 낫다 생각하는 편입니다.
고진: 쉽지 않은 문제군요. 선생 식대로라면 자코뱅적 테러와 알 카에다의 테러를 어떻게 식별하죠? 저는 오히려 자본의 적대를 인식하는 새로운 소비자운동이야말로 대안이 아닐까 싶은데. 그렇지만 저나 선생이나 자본에 내재한 적대로부터 코뮨적 유토피아를 구상한다는 점에서는 동지입니다.(웃음)
지젝: 네(웃음). 아마도 그러한 노력이야말로 유토피아적인 순간에서 영원을 창출하는 행위일 겁니다. 자, 이것으로 짧은 대담을 아쉽게 정리해야할 것 같군요. 감사합니다.(복도훈 문학평론가)
06. 09. 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