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개체성, 기술적 활동, 물상화 ―질베르 시몽동을 읽다
* 출 처 : 情況, 2004년 12월호, pp. 94~113. * 원 제 : 超個体性, 技術的活動, 物象化―ジルベール․シモンドンを読む * 글쓴이 : 빠올로 비르노와 히로세 쥰(廣瀨 純) * 이탈리아어판 : http://multitudes.samizdat.net/article.php3?id_article=1563 * 옮긴이 : 김상운(sanggels@freechal.com) * 교정자 : 양창렬(nomade02@hotmail.com)
히로세 : 오랫동안 거의 잊혀져 왔던 프랑스 철학자, 질베르 시몽동Gilbert Simondon(1924~89)의 사상이 80년대 말부터 프랑스 철학 무대 위에 다시 부활했습니다. 우선 그가 사망한 1989년에 박사학위 부논문인 기술적 대상들의 존재양태에 관하여1)가 재간행되었고(초판은 1958년), 또 1958년에 제출했던 박사학위 주논문2)의 후반부가 심적 및 집단적 개체화3)라는 제목을 달고 같은 해[1989년]에 출판되었습니다. 박사학위 주논문의 전반부는 1964년에 개체와 그 물리적․생물적 발생4)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가 1995년에 같은 제목으로 재간행되었습니다. 1992년에는 파리의 ‘국제철학학교’Collège international de philosophie에서 시몽동의 작업에 관한 대규모 콜로키움이 개최되었고, 이 콜로키움에서는 시몽동의 작업의 풍요로움을 결정적인 방식으로 재발견해냈습니다.5) 그리고 1993년에는 질베르 오트와에 의해 시몽동의 사유에 관한 최초의 전문서적6)이 출판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1999년에 이르면 이번에는 뮤리엘 콩브가 PUF 출판사의 유명한 총서인 ‘Philosophies’의 한 권으로 시몽동 입문서7)를 출판하게 되었습니다. 시몽동의 사유에 관한 가장 최신의 저작으로는 자크 루Jacques Roux가 편저하여 2002년에 간행된 논집8)이 있습니다.
시몽동의 사상을 부활시키려는 듯한 현재의 흐름은 현대 철학의 대안적 흐름과 다소 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즉 프랑스에서 질 들뢰즈에 대한 독해의 심화라고 하는 흐름이 바로 그것입니다. 적어도 시몽동에 대한 재평가의 흐름에 있는 모든 논자들은 당신이 시몽동의 이름을 몇 번이나 언급하면서 쓰고 있듯이, 시몽동이 ‘질 들뢰즈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특히 중요했다’고 하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들뢰즈는 1966년에 개체와 그 물리적․생물적 발생에 대한 서평9)을 발표했습니다만, 이 서평은 단순한 서평이 아니라 들뢰즈가 이로부터 3년 후에 쓴 차이와 반복에서 발전시켰던 ‘différent/ciation’이라는 개념―차이와 반복에서 특히 중심적인 개념―에 지극히 밀도 높은 형태로 완전히 스며든 텍스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1969년 이후, 즉 차이와 반복, 의미의 논리가 간행되었던 해 이후에, 시몽동의 사유는 직간접적인 형태로 들뢰즈의 작업에 항상 끊임없이 반영되어 왔습니다. 중요하게는 시몽동의 사유의 재발견이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들뢰즈의 작업에 있어서 시몽동의 중요성을 재발견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것은 들뢰즈에게―따라서 펠릭스 가타리에게도―시몽동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중요했던 프랑스인 사회학자 가브리엘 타르드의 사유에 대한 최근의 재발견의 사례와 완전히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시몽동의 사유에 대한 이러한 재발견에 관해 당신 자신이 기여한 것은 크게 나누어 다음과 같은, 상호보완적인 두 가지 지점에 놓여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흔히 ‘기술의 사상가’로 간주되곤 하는 이 철학자 시몽동의 저작 중에서도 당신은, 지금까지도 그다지 읽히지 않고 있는 심적 및 집단적 개체화의 중요성―그 중에서도 특히 그 정치적인 중요성―을 명확하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주로 이 책에서 인용된 시몽동의 사유를 맑스의 사유와 연관지우면서 당신 자신의 개념인 ‘포스트-포드주의적 다중’moltitudine postfordista 개념을 보다 엄밀하게 만들고자 한다는 점입니다. 확실히 예를 들어 뮤리엘 콩브는 앞에서 언급한 그녀의 입문서에서 심적 및 집단적 개체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고 있긴 합니다만, 이것은 그 중에서도 특히 시몽동의 ‘초개체성’transindividualité이라는 개념 속에서 들뢰즈의 ‘주름’개념의 청사진을 찾아내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또한 콩브가―그녀 역시 가지고 있던 노동의 포스트-포드주의적인 조직화라는 현대적 물음을 놓쳐 버리는 것이 아니라―시몽동의 정치적 잠재력을 찾아내고, 이것을 특히 맑스의 사유에 접근시키고 있긴 합니다만, 그녀는 특히 기술적 대상들의 존재양태에 관하여라는 책에서 바로 이 잠재력을 찾아내고 있기 때문에, ‘기술적 대상’objets techniques이라는 맥락에만 완전히 머물러 있는 꼴이 되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당신은 시몽동의 사유를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문장을 모두 세 번 정도 쓰고 있습니다. 우선 다중10)이 있고, 다음으로는 심적 및 집단적 개체화의 이탈리아어판(2001년 발행) 후기11)가 있으며, 그리고 가장 최신의 것으로는 프랑스의 「뮐티튀드」Multitudes의 최신호에 쓴 텍스트 「천사들과 ‘일반지성’―둔스 스코투스와 질베르 시몽동에게 있어서 개체화」12)가 있습니다. 실제로 지금 거론한 출판물과 관련된 한에 있어서는, 어떤 경우든 간에 심적 및 집단적 개체화를 집중적으로 논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선 첫 번째 질문입니다만, 당신은 처음에 어떻게 시몽동의 사유와 마주치게 되었습니까? 또, 시몽동을 거론할 때 당신이 심적 및 집단적 개체화를 집중적으로 논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비르노 : 제게는 개체화 원리principe d’individuation가 항상 계속적으로 근본적인 테마였습니다. 개체를 특이한singolare 것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물음이 제게 결정적인 문제인 까닭은, 이 물음을 제기함으로써 개체individuo/individu가 이미 주어진 출발점이 아니라 하나의 복잡한 과정의 도착점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개체화 원리’라는 관념은 유일하고 반복 불가능한 것(특이성)을 공통적인 것comune―즉 모두에게 분유되어 있는 것―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사고하는 것입니다. 수년 전에 발표했던 졸저 관습과 유물론13)에는 특히 ‘Principium individuationis’라는 제목이 달린 한 장(章)이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저와 시몽동의 마주침의 계기를 설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제가 (물리적, 심적, 집단적) 개체화를 그 중심축으로 삼았던 사상가를 외면할 수 있었겠습니까?
시몽동의 논의에서 제가 크게 감명을 받았던 것은 다음 두 가지입니다. 그 중 하나는, 어떤 주체에 있어서도 개체화된 부분의 옆에는 항상 얼마간의 전개체적인 실재réalité pré-individuelle가 계속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논의가 의미하는 바는 ‘주체’soggetto/sujet라는 관념 자체가 ‘공통적인 것’il Comune과 ‘특이한 것’il Singolare의 항상적인 상호연결로서 이해된다는 점입니다. 시몽동에게 두 번째로 중요한 논의는 집단il collettivo/le collectif에 관한 것입니다. 즉 집단은 개체를 억압하는 것도 개체보다 열등한 것도 아니며, 오히려 개체화를 세련되게 만들고 강화시키는 환경이라고 하는 논점입니다. 시몽동에 따르면, 모든 주체가 자기 자신 속에 포함하고 있는 전개체적인 실재의 부분 자체를 개체화한다는 것은, [개체를] 다수의 특이적 존재 사이의 관계 속에서 놓고 보는 것이자, 집단 속에 놓고 보는 것이며, 정치사회적인 협동 속에 놓고 보는 것입니다. 전개체적인 것은 바로 집단적 실천 속에서 초개체적인transindividuel 것으로 변형됩니다. 그러므로 또한 이 초개체적인 것이라는 범주는, 포스트-포드주의적인 지구화라는 수준에서 볼 때, 이미 더 이상 국가적이지 않은 어떤 공적 영역, 비대의제적인 어떤 민주주의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시몽동의] 이러한 두 가지 논점이 진정 새롭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 속에서입니다. 시몽동의 논의는 널리 만연해 있는 다수의 견해, 정치적․철학적인 다수의 미신을 전복시킵니다.
제가 심적 및 집단적 개체화를 제외한 시몽동의 저작을 무시하고 있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저는 그의 기술에 관한 저작(기술적 대상들의 존재양태에 관하여)을 주의 깊게 읽었습니다. 1년 정도 전이던가요, 이 저작을 거론하면서 대학에서 세미나를 진행했던 적이 있습니다만, 그 텍스트는 아직 출판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계속 출판되지 않은 상태로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술에 관한 시몽동의 사유는 기술을 재앙catastrophe이라고 간주하는 사고방식과 기술을 해방이라고 간주하는 사고방식 사이에서 진동하고 있는 20세기적인 사유의 대부분이 제 자리를 찾아가게 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시몽동은 인간과 세계의 관계 속에, 미적 경험과 종교적 경험, 정치적 경험 등에 필적하는 것으로서의 위치를 기술에 다시 부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점은 틀림없이 지금 말하고 있는 것과는 별개의 것이라고,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시몽동에 따르면 이것은, 기술이 초개체적인 것이라고 하는 것, 바꿔 말하면 기술이 개개인의 정신 속에서 개체화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을 표현합니다. 기계는 인간의 사고 속에 존재하는 집단적인 것에, 즉 인간이라는 종에 특유한 어떤 것에 외재적인 면모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전개체적인 실재는 개체화된 의식의 표상들 안에서는 그에 적합한 대응물을 찾을 수 없기에, 보편적으로 사용가능한 기호, 객관화된 논리적 도식으로 이루어진 복합체로서 바깥에 투영되는 것입니다. 시몽동에 따르면 기술을 단순히 노동의 상관물로 간주하는 것은 지극히 중대한 잘못입니다. ‘기술’과 ‘노동’이라는 두 가지 항term은 서로 비대칭적이고 이질적인 것입니다. 기술은 초개체적인 것인 반면, 노동은 간개체적인interindividuel 것입니다. 즉 노동이 개체화된 개체들을 묶는 것인 반면, 기술은 모든 주체 속에 존재하는 공통적인 것, 또는 확실히 전개체적인 것에 소리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기술과 노동 사이에 이렇게 감추어져 있는 대조contrast가 맑스에 의해 완전히 명확하게 된 것은 아닙니다. 고용노동, 비숙련노동, 임금노동을 ‘초라한 잔재’로 환원해 버리는 이런 위대한 공적이야말로 ‘general intellect’(일반지성), 즉 공적인 (또는 초개체적인) 자원으로서의 사유에 속한다는 맑스의 유명한 서술을 다시 떠올려 보기만 하더라도 이는 충분할 것입니다.
1) Simondon, Du mode d’existence des objets technique, Aubier, 1989.
2) Simondon, L’Individuation à la lumière des notions de forme et d’information.
3) Simondon, L’Individuation psychique et collective, Aubier, 1989.
4) Simondon, L’Individu et sa genèse physico-biologique, PUF, 1964.
5) 이 콜로키움의 논문집은 Gilbert Simondon, Une pensée de L’Individuation et de la technique, Albin Michel, 1994로 출판되었다.
6) Gilbert Hottois, Simondon et la philosophie de la culture technique, Deboeck, 1993.
7) Muriel Combes, Gilbert Simondon. Individu et collectivité, PUF, 1999.
8) Gilbert Simondon, Une pensée opérative, Publications de Université de Saint-Etienne, 2002.
9) Gilles Deleuze, “Gilbert Simondon, L’Individu et sa genèse physico-biologique,” Revue philosophique de la France et de l’étranger, vol. CLVI, no 1-3, janvier-mars 1966, p. 115-8, repris dans Deleuze, L’Ille dèserte et autres textes, Textes et entretiens 1953-1974. Éditions préarée par David Lapoujade, Les Éditions de Minuit, 2002, p. 120-4. [옮긴이―이번 자율평론 14호에 같은 섹션으로 실려 있다.]
10) 원제는 다중의 문법.
11) 이 서문은 「다중과 개체화 원리」Moltitudine é principio di individuazione라는 제목으로 비르노의 최근 저작인 Quando il verbo si fa courne. Linguaggio e natura umana, Billat Boringhier, 2003에 재수록됨. [이 글은 빠올로 비르노, 다중, 김상운 옮김, 갈무리, 2004의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다.]
12) Virno, “Les Anges et le general intellect. L’Individuation chez Duns Scot et Gilbert Simondon,” Multitudes, n. 18. [옮긴이―이 글은 자율평론 14호의 같은 섹션에 양창렬의 번역으로 실려 있다.
13) Virno, Convenzione e materialismo, Theoria, Roma, 1986.
히로세 : 당신의 시몽동 독해 중에서 제가 특히 흥미 있다고 느끼는 것은[제가 특히 흥미롭게 여기는 것은], 우선 ‘기술’의 물음에서 ‘일반지성’의 물음으로, 많든 적든 마치 돌연변이처럼 이행하는 것입니다. ([사실] 시몽동 자신은 일반지성에 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기술적 대상들의 존재양태에 관하여의 결론에서, 확실히 시몽동은 그가 ‘기술적 활동’activité technique이라고 부르는 것과 ‘노동’을 근본적으로 구별하고 있으며 (“기술적 활동을 단순한 노동과 구별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 기술적 활동에는 기계의 사용만이 아니라 기술적 작업에 대해 어느 정도의 주의가 포함되어 있다고 하는 점이다. 즉 기술적 활동에는 개발․구축 활동의 연장 등과 같은 기계의 유지․조종․개량 등도 포함되어 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시몽동은] ‘소외의 첫 번째 원인’을 ‘노동’ 속에서 찾고 있습니다. (시몽동에 따르면 ‘생산수단의 소유’라는 맑스적인 물음은 부차적인 것이며, 시몽동은 이 ‘생산수단의 소유’에서 ‘소외에 속해 있는 여러 양태들 중의 하나’, 즉 ‘경제적 소외’만을 찾아내고 있습니다.) 시몽동이 ‘소외의 첫 번째 원인’을 ‘노동’ 속에서 찾아내는 까닭은, ‘노동’―또는 오히려 ‘분업/노동의 분할’divisione del lavoro―이 묶는 노동자들은 어디까지나 ‘구성된 개체’individus constitués 또는 ‘개체화된 개체’로서의 노동자이며, 노동이 이처럼 간개체적인 관계이므로 ‘노동’에서 노동자들은 ‘하나의 ... 초개체적인 관계의 구성’, 즉 ‘전개체적인 실재라는 짐burden14)에 토대를 둔 집단적 개체화’로부터 소외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모든 노동자가 가지고 있는―또는 모든 노동자들에게 분유되어 있는―이 ‘전개체적인 실재라고 하는 짐’ 또는 ‘아페이론’에 따라서만, 각각의 노동자들은 이제 ‘구성된 개체’로서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주체’(‘개체보다 큰 존재’)로서, ‘기술적 대상 속에서 자기를 표현할 수 있으며’, 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기술적 대상의 계속적인 발생’ 속에서 자기를 표현할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이런 의미에서 시몽동은 ‘소외를 줄이기 위해서는 노동이 기술적 활동으로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기술적 대상들의 존재양태에 관하여에서는 ‘기계’ 또는 ‘기술적 대상’을 수단으로 한 물질적 생산만이 문제로 되고 있기 때문에, 모든 주체=노동자가 자기 속에 포함하고 있는 ‘전개체적인 실재의 짐’(‘아페이론’, ‘자연’ 등)을 논할 때에도, 주체=노동자들이 지니고 있는 ‘기술적 대상에 관한 지식’ 등에 관한 것만으로 문제가 한정된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시몽동은 다음과 같이 서술하면서 기술적 대상들의 존재양태에 관하여의 결론을 맺고 있는 것입니다. “기술적 대상과 인간의 총체인 기업은 그 본질적인 기능, 즉 그 기술적인 작업에 토대를 두고 조직되어야만 한다”고 말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당신의 경우, 당신이 ‘일반지성’ 개념―맑스의 그륀트리세의 한 절(「기계에 관한 단장」)에서 당신이 도출해 내고 있는 개념―과 연관시키면서 ‘전개체적인 실재의 짐’을 논할 때에는, 시몽동처럼 기계에 관한 지식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말하고 사고하는 존재’로서의 ‘Gattungswesen’(‘유적 존재’) 전체에 분유되어 있는 ‘지성일반’intelletto in generale이라는 문제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것에 따르면, 당신의 경우에는 주요한 생산수단으로서의 물질적 기계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비물질적인 생산(이른바 ‘비물질적 노동’ 또는 ‘인지적 노동’) 문제를 다루는 것이 가능하게 될 것이고, 따라서 또한 ‘초개체성’이라는 개념을 당신 자신의 ‘현대의 삶 형태에 관한 분석’을 위한 하나의 무기로 삼는 것이 가능하게 되겠죠.
여하튼 당신은 다중에서, 특히 ‘일반지성’이라는 개념에 관한 맑스의 정식화가 지닌 불충분함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즉 당신은 맑스가 ‘일반지성’이라는 것을 대상화된 과학적 능력으로, 즉 기계 시스템으로 상정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죠. 시몽동의 표현을 사용하자면 맑스 역시 ‘일반지성’을 ‘기술적 대상’으로서만 구상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지금 언급했던 기술적 대상들의 존재양태에 관하여의 ‘결론’에서 시몽동이 전제했던 논의들에 관해서 어떻게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신지요? 확실히 그륀트리세의 맑스와 기술적 대상들의 존재양태에 관하여의 시몽동 사이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이 ‘불충분함’이야말로 맑스의 자본(특히 ‘인간의 신체 속에 존재하고 있는 육체적․정신적 모든 성향들의 총체’로서의 ‘노동력’ 개념을 논하고 있는 곳곳)에 대한 재독해, 그리고 이와 동시에 시몽동의 심적 및 집단적 개체화」에 대한 재독해로 당신을 이끌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요?
비르노 : 당신이 말한 그대로입니다. 우리는 시몽동을 [우리가 가고자 하는] 길의 윤곽을 그리기 위해서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어떤 지점에 도달하게 되면, 다른 많은 (우리의) ‘친구’ 사상가들과 마찬가지로 시몽동 역시 쉬어야 하고, 그때부터는 우리 혼자 나아가야 하죠. 우리가 받았던 도움에 관해서는 감사의 마음을 잊어서는 안 되지만, 향수든 애석해하는 마음이든 간에 이런 것들에 빠져들지는 말아야겠죠. 확실히 시몽동은 기술의 초개체적인 성질과 집단의 초개체적인 성질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시몽동이] 위의 두 가지 상이한 초개체성의 형식이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지점, 아니 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이러한 두 가지 형식이 서로 융합되는 (각각의 형식은 이 융합에 의해서 따로따로 흩어져 있을 때와는 다른 무엇인가로 변화합니다) 지점을 이끌어 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과연 시몽동이 이것을 해 낼 수 있었을까요?) 그 융합의 지점은 현대적인 산 노동, 즉 ‘대중지력’intellettualità di assa 또는 ‘인지적 노동’lavoro cognitivo입니다. 현대적인 산 노동이란 정치사회적인 집단인 동시에 ‘일반지성’이기도 합니다. 노동력은 개발력으로 됩니다만, 이것은 기계의 작동에 관한 노하우를 가지고서 노동하는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사유와 언어활동이나 상상력 등을 토대로 하는 산 주체들 사이의 협동을 통해 기계를 넘어서서 기술을 발전시키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어려워하고 있는 것은 ‘일반지성’이 지닌 이중의 측면을 적합하게 파악하는 것입니다. ‘일반지성’은 한편에서는 임금노동의 암흑시대를 넘어섰을 때 파악될 수 있는 사회적 협동의 기초이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국가나 그 중앙집권적인 행정장치나 복종의무 등을 과거의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다양한 정치적 제도의 기초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러한 이중의 측면 속에서야말로 ‘기술로서의 초개체적인 것’il transindividuale-tecnica과 ‘집단으로서의 초개체적인 것’il transindividuale-collettivo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덧붙여서 지금은 세 번째 것이 문제로 되고 있습니다. 이 세 번째 것은 위의 두 가지에서 파생되는 것입니다만, 그래도 어쨌든 이러한 두 가지와는 다른 것입니다. 이 세 번째의 초개체적인 것, ‘기술적’이며 동시에 ‘정치적’이기도 한 이 세 번째의 것을 우리는 지금까지 여러 차례 코뮤니즘이라고 불러왔습니다. 하지만 혼란을 불러일으키지 않기 위해서, 여기에서는 이것이 인간적 실천의 공통의 장소luogo comune15)이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그치고 싶습니다.
시몽동에 대한 이야기로 되돌아가 봅시다. 정치에 관해 말할 때의 시몽동에게는 일종의 순진무구함이 있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정치를 논할 때 시몽동은 그가 가지고 있는 자질보다도 낮은 곳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시몽동에게 보다 많은 정치적 암시가 엿보이게 되는 것은 오히려 그가 정치를 논하지 않을 때입니다. 가장 좋은 예는 ‘집단적 개체화’나 기술 개발에 관한 그의 서술입니다.
히로세 : 이러한 ‘기계 너머의 기술’로서의 ‘일반지성’이야말로, 바로 당신이 맑스와 시몽동의 제반 논의 속에서, 하지만 동시에 이 두 사람의 사상가―맑스와 시몽동이 말했던 ‘노동’ 모델은, 채플린이 정확히 이 말에 부여했던 의미에서의 ‘근대적인’moderno 채로 존속하고 있습니다만―를 넘어서도록 이끌어냈던 결정적인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여하튼 당신이 말한 의미로 이해하게 되면, ‘일반지성’에는 기술적인 측면과 정치적인 측면이라는 ‘이중의 측면’만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거듭 되풀이해서 말하고 있듯이 어떤 ‘양의성’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에 관해 당신은 예를 들어 다중 일본어판에 첨부되어 있는, 즉 ‘Colectivo Situaciones’와 행한 인터뷰인 「양의적인 조건」에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16) ‘현대적인 산 노동’은 ‘일반지성’에 토대를 둔 것이지만, 그래도 어쨌든 바로 ‘노동’, 즉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것입니다. (‘현대적인 산 노동’은, 순전한 ‘창의력’이 여기에서 동원된다고 하는 의미에서 ‘근대적’ 노동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 ‘생산적’ 노동이기도 하다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현대적인 산 노동’을 바로 이런 의미에서 논할 때는 ‘기술’과 ‘노동’이라는 시몽동식 구별을 유지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는 ‘기술’에 특유한 것인 ‘초개체성’이 바로 ‘노동’의 중심에 놓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실제로 이러한 의미에서 당신은 다중 제4장의 ‘테제 7’에서, ‘노동’을 ‘도구적 행위’라고 규정하면서 이것이 ‘소통적 행위’와 대립된 형태를 띤다고 하는 위르겐 하버마스의 입장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저는, 기술적 대상들의 존재양태에 관하여의 결론에서 시몽동이 제기하고 있는 물음, 즉 ‘소외’에 관한 물음에 관한 이야기로 되돌아가고 싶습니다. ‘근대적’ 생산에서는 노동의 ‘간개체성’이 ‘소외의 첫 번째 원인’이었다고 한다면, 그러므로 포스트-포드주의적 생산에서는 ‘초개체성’―하버마스의 표현을 차용하자면 ‘소통적 행위’―이 ‘노동의 밑바탕에 놓여 있다’고 한다면, 포스트-포드주의의 맥락에서 ‘소외’를 논할 수 있을까요? 저는 시몽동식의 관점, 즉 노동의 분할(분업)에 따른 ‘간개체성’이라는 관점이 아니라 맑스적인 관점, 즉 ‘생산수단의 소유’라는 관점에서도 포스트-포드주의적 생산에 관한 ‘소외’를 논하는 것은 어렵거나 불가능하지는 않은가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포스트-포드주의적 생산에서 생산수단은 ‘일반지성’에 다름 아니며, 이 ‘일반지성’은 모든 노동자들에게 항상 이미 분유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당신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합니다만, ‘소외’에 관한 물음을 제기하는 것은 포스트-포드주의적인 맥락에서도 유효한 것입니까? 만일 유효하다고 한다면 어떻게 유효한 것일까요? 만일 유효하지 않다면 왜 유효하지 않는 것일까요?
‘일반지성’의 ‘양의성’은 그러한 기술적인 측면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다른 하나의 측면, 즉 그 정치적인 측면과도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확실히 ‘일반지성’에 근거를 둔 ‘집단으로서의 초개체적인 것’은 국가의 의회정치 시스템을 위기에 빠뜨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만, 이로부터 생겨나는 것은, ‘비대의제적 민주주의’만이 아니라 당신이 다중 제2장 마지막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행정 기관들의 비대한 성장’ 역시 생겨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실제로, 오늘날의 국제정세에서, 무엇보다 특히 이라크 문제를 둘러싸고서 미합중국 정부의 경우만이 아니라 일본 정부, 이탈리아 정부 등의 경우에서도, ‘법률에 대한 시행령decree의 우위’라는 상황이 전례 없이 두드러지게 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오늘날 그러한 시행령decree에 [과연] 합법성이 있는가, 아니면 그러한 시행령을 연발하는 그러한 주권에 정당성이 있는가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제게는 특히 흥미롭습니다. 말하자면 시몽동에 따르면 ‘간개체적인’ 관계가 ‘계약’을 필요로 하고 있을 때와는 반대로, 어떠한 ‘계약’에도 근거를 두고 있지 않는 ‘집단으로서의 초개체적인 것’의 경우에는 주권의 정당성이 아예 문제 자체가 되지 않으며, 또한 자기정당화의 이러한 불가능성 자체가 역설적으로는 정부들에게 (자기를 정당화하는 것이 아닌) 시행령을 연발하게 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비르노 : 당신이 제기한 중요하고 복잡한 문제는 정말 많지만, 여기에서는 그 중에서도 몇 가지에 한정하여 대답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포스트-포드주의적 노동에 관해 당신이 지적하고 있는 양의성은 명확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면에서 포스트-포드주의적 노동은 기술의 초개체성을 자기 안에 흡수해 버렸습니다. 즉 개개인의 노동이 타인의 노동에 덧붙여짐으로써 간개체적인 협동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개개인의 노동은 완전히 선험적으로 부여되어 있는 초개체적인 협동의 한 가지 특수한 모습으로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포스트-포드주의적 노동은 집단의 초개체성마저도 자신 속에 흡수해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생산 작업은 정치적 행위와 유사한 것으로 되며, 타인의 현전presence을 필요로 하며, 가능적인 것이나 예측 불가능한 것을 통해 측정됩니다. 이 모든 점에서 생각해 볼 때, 노동은 정치경제학의 관점에서 봤을 때에는 노동이 아니었던 것(정념, 정서, 언어 게임 등)을 포함할 때까지 무한하게 확대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될 수 있습니다. 하버마스에 대한 비판, 즉 ‘도구적 행위’와 ‘소통적 행위’라고 하는 그의 대립에 대한 비판은 바로 이것에서 유래합니다. 다만 여기에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합니다. 즉 모든 것이 노동이 된다고 한다면, 더 이상 어떤 것도 노동이 아니게 된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제가 여기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노동이 [과거의] 그러한 특성을 상실하고, 노동을 다른 경험과 분리시켜 왔던 경계선이 [오늘날에는] 아무런 효과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오늘날 노동이 진정으로 잉여가치나 이윤의 측면에서 생산적인 것이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비노동 속에서 전개되어 왔던 인간의 제반 능력에 대해 노동이 합치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양의성이 있습니다. 모든 것은 노동입니다만, 바로 이것에 의해서 ‘노동’이라는 개념 자체가 계속 파열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노동이라는 용어와 대립하는 형태로 초개체적 활동attività transindividuale이라는 것을 논해야만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따라서 또한 당연한 것이지만, 다음의 것을 확실히 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즉 오늘날 자본주의가 강력한 것은 바로 자본주의가 이 초개체적 활동을 노동이라고 하는 속박 속에 완전히 가둬버리는 것에서 성공을 거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양의성 혹은 판단의 동요는 이러한 압박 속에 그 물질적 기초가 있기 때문입니다..
소외에 관해서는 보다 좁은 의미에서의 철학적 고찰을 해 보고 싶습니다. 저는 ‘물상화’reificazione를 ‘소외’에 대한 해독제가 되는 한에서 유일하게 참된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것을 ‘소외’와 구별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개체적인 실재가 최종적으로 하나의 외재적인 ‘사물’cosa, 눈에 보이는 하나의 ‘res’, 하나의 명시적인 현상, 또는 다양한 공적 제도로부터 생겨난 총체로 되기 위한 매개적인 과정precoess을 ‘물상화’라고 불러봅시다. 반대로 전개체적인 것이 여전히 주체의 내적인 요소로 남아 있으며, 여전히 이 주체가 그것의 고용자로 될 수 없는 듯한 상태를 ‘소외’라고 불러 봅시다. 즉 소외당한다는 것은 우리들을 조건지우면서도 우리들이 파악할 수 없는 듯한 전제조건으로서, 암시적인 것으로 남아 있는 전개체적인 실재인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포스트-포드주의적 ‘소외’란, 전개체적인 것이 사회적 생산의 실질적인 기초이면서도 ‘res publica’, 정치적 조직, 대의제적 민주주의로 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소외 개념과 물상화 개념은 상호간에 서로를 함축하고 있기는커녕, 오히려 완전히 서로 대립하는 것입니다. 물상화는 소외를 발생시키는 수탈에 대한 유일한 대책입니다. 그러므로 반대로 또한 완전히 물상화되지 않는 존재, 사고, 존재양태라고 하는 것은 소외된 것인 셈입니다.
14) [옮긴이] 원래 이 대담집에는 burden이라는 영어가 없고 대신 ‘負荷’로 표기되어 있다. 이는 일본어에서 ‘짊어짐, 떠맡음’, ‘책임감’, ‘하중’, ‘부하’, ‘부담’ 등의 의미를 지닌다.
15) [옮긴이] 일본어판에는 '인간적 실천의 공유의 토포스'로 되어 있다.
16) [옮긴이] 이 인터뷰는 자율평론 제10호(http://jayul.net/view_article.php?a_no=642&p_no=1)에 「일반지성, 엑소더스, 다중」이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font>
히로세 : 전개체적인 실재의 초개체적인 ‘res’로의 변화로 재정의된 ‘물상화’reificazione/Verdinglichung. ‘물상화’ 개념에 대한 지극히 근본적인 재정의야말로, 실제로는 말이 살이 될 때Quando il verbo si tàcarne라는 제목이 달린 당신의 최신 저작에서 중심적인 테마가 되고 있습니다. 무릇 이 저작의 제목 자체가 바로 당신이 지금 말해 주었던 ‘물상화’ 그 자체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즉 말이 ‘살’로 되는 것, 또는 모든 주체에 분유되어 있는 전개체적인 자연이 ‘res’로 되는 것입니다.
게다가 말이 살이 될 때에는 ‘물상화의 찬가’Elogio della reificazione라는 제목이 달린 장이 있습니다만, 그 장에서 당신은 ‘소외’에서만이 아니라 ‘사물화’fetishism으로부터도 ‘물상화’를 구별하자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말에 따르면 ‘물상화’는 ‘소외’뿐만 아니라 ‘사물화’에 대해서도 ‘해독제’로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상화’와 ‘사물화’에 대한 이러한 구별을 설명하기 위해서 당신은 다시 아주 흥미로운 개념 하나를 도입하고 있습니다. 즉 맑스가 말한 ‘사물들 사이의 관계’rapporto tra cose와 대립하고 있는 것으로서의 ‘관계의 사물’cose del rapporto라고 하는 개념이 바로 그것입니다. ‘물상화’의 경우, 바로 이 ‘물상화’에 의해서 ‘인간들 사이의 관계가 관계의 사물 속으로 체화’되는 반면, ‘사물화’의 경우 맑스가 자본에서 논했던 대로, 인간들 사이의 관계가 ‘사물들 사이의 관계로’ 변화하는 것이라고 당신은 주장하고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물상화는 관계 자체를 부여하는 것인 반면 사물화는 그[관계의] 상관항들에 작용한다’, 즉 모든 구성된 개체들에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물상화’는 초개체적인 것인 반면, ‘사물화’는 간개체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로부터 당신이 끌어 들이고 있는 개념에 두 개의 커다란 선들이 그어지게 됩니다. 즉 ‘초개체성-기술적 활동-물상화’라고 하는 선과 ‘간개체성-노동-사물화’라고 하는 선입니다.
여기에서 ‘포스트-포드주의적 소외’라는 물음으로 돌아가 보고 싶습니다. 당신은 지금 ‘포스트-포드주의적 소외’를 ‘전개체적인 실재가 res publica로 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에 있다’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런데 포스트-포드주의적 자본주의가 ‘기술적 활동’을 자신 속에 포섭하고 있다면, 즉 전개체적인 실재의 초개체적인 ‘res’로의 변용을 포섭하고 있다면, 포스트-포드주의적 자본주의에서는 모든 것이 물상화된 초개체적인 ‘res’로 된다고 하는 의미에서 이것은 소외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식으로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포스트-포드주의적 소외’라는 당신의 표현은 형용모순이 아닌가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만일 이 표현에 어떠한 모순도 없다고 한다면, 그 경우에는 ‘초개체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개념적 차이를 명확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당신은 ‘초개체적인 것’과의 관계에 있어서 ‘공적인 것’이 어떻게 정의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게다가 또한 이러한 저의 질문은 ‘다중 즉, 포스트-포드주의적 다중의 경험에 있어서 부정적인 측면’으로서의 ‘인격적 의존관계’dipendenza personale라는 당신의 논의와도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인간들 사이의 관계가 여기에서는 ‘사물에 의해 매개되지 않기 때문에 투명’하다고 하는 의미에서, 바로 이러한 ‘인격적 의존관계’ 속에서 ‘가장 큰 소외’를 발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인격적 의존관계’가 ‘res publica’(공적인 ‘res’)로는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렇더라도 여전히 초개체적인 ‘res’로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고 말입니다. 당신은 ‘인격적 의존관계’에 관한 물음과 관련된 형태에서 ‘공적인 영역이 아닌 공공성’pubblicità senza sfera pubblica이라는 것을 논하고 있습니다. 시몽동의 표현을 따르자면 이것을 ‘공적 영역이 아닌 초개체성’이라고 바꿔 부를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비르노 : 우선 가장 먼저, ‘사물화’에 관해서, 또는 오히려 이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기 위해서, ‘물상화’, ‘소외’, 그리고 ‘사물화’라는 (유명하면서도 완전히 동의어로 보일 정도로까지 모든 것이 애매한) 세 가지 개념 사이의 관계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해 두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한 다음에 당신의 질문 중 가장 중요한 것(솔직히 말해서 당신의 질문에는 ‘하찮은 것’이 하나도 없기는 하지만...), 즉 ‘포스트-포드주의적 소외’를 논하는 것이 정당한 것인지 아닌지에 관한 물음에 대답하고 싶습니다.
소외란 우선 이미 말했던 대로, 우리들의 삶, 사유, 실천의 한 측면이 다른 모습을 취하며, 자유롭게 사용될 수 없게 되며, 우리들에 대해 불명확한 권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된다는 걸 의미합니다. 철학적인 예를 한 가지 들어 보겠습니다. 자아의식, 즉 데카르트의 ‘나는 사유한다’는 모든 종류의 표상을 가능하게 하지만, 그 자체에 관해서는 어떠한 표상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자아의식적인 ‘나’에 관한 어떠한 성찰도, 그 자체가 그것과 동일한 ‘나’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항상 뒤를 향해 계속 역행해 나가도록 운명지어져 있으며, 결코 그 대상에 각도angle를 고정시킬 수 없습니다. 소외되어 있는 것은 ‘나’ 이전의 ‘나’Io prima dell’Io라는 이미지이며, 그 자신의 전제로 되어 있는 파악불가능한 ‘나’라는 이미지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정치적인 예를 한 가지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전개체적인 실재―우리들 속에 존재하는 호모 사피엔스라고 하는 종 또는 인간 본성에 속하는 모든 것―는 이것이 외재적이고 집단적이며 정치사회적인 표현을 찾아내는 한에서는 소외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물화란 내면생활, 즉 개체들 각각의 고립에서 생겨난 소외에 대응하기 위한 어떤―거짓된, 혹은 잘못되었던―경향입니다. 사물화는 인간 정신에 특유한 자질(사회성, 추상능력, 소통 능력 등)을 어떤 사물에―예를 들어 화폐에―적용하는 것에서 존재합니다. 이것과는 반대로 물상화란 소외를 배제하기 때문에 올바르고 유효한 방법입니다. 물상화는 사물화와는 달리 이미 부여되어 있는 사물을 뽑아 들고 이것에 물활론animism적인 가치를 싣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잘못되고 내면적이며 파악불가능한 것으로 될 수 있는 것을 사물, 즉 ‘res’로 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물상화는 소외된 ‘나’ 이전의 ‘나’에 대해서, ‘나’ 바깥의 ‘나’Io fuori dell’Io라고도 말할 수 있는 대립시킵니다. 자아의식, 그 형성, 따라서 그 구조가 눈에 보이는 실천 속에, 언어활동적인 사건 속에, 외재적인 사실 속에 놓여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전개체적인 것의 소외에 대해서, 물상화는 개개인의 정신들을 결합하는 것, 즉 ‘인간들 사이의 관계’rapporto tra uomini라고 말할 때의 ‘사이’tra는, 틀림없이 공적인 제도로 되며, 눈에 보이는 사물성cosalità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대립시켜 놓습니다. 사물화와 물상화는 소외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두 가지 대안적인 수단, 좀 더 확실히 말하자면, 두 개의 상반되는 수단인 것입니다. 진정한 대조contrast는 내면생활의 빈곤을 극복하기 위한 이러한 두 개의 상반되는 수단들 사이에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포스트-포드주의적 소외’에 관한 질문으로 옮겨가 봅시다. 당신의 논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현행 자본주의는 인간존재의 전개체적인 제반 특징들을 이용하고 있으며, 이것을 이용함으로써 여기에 ‘res’라는 실질, 즉 외재적인 사실의 실질을 부여하고 있으면서도, 현행 자본주의는 이미 소외를 초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경제적인 수준에서도 정치적인 수준에서도 물상화의 은혜를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제 생각으론 당신이 말한 것은 반은 맞지만 반은 잘못되었습니다. 당신은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의 맑스의 한 구절을 떠올리게 하지 않습니까? ‘주식회사는 사유재산제 자체의 제반 규칙들에 기초한 사유재산제의 지양이다’라고 말한 구절 말입니다. 맑스가 여기에서 말했던 것은 주식회사가 현행 자본주의를 지양하는 생산력의 발전과 대립하고 있기 때문에, [주식회사는] 자본주의 특유의 방법으로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맑스의 한 구절을 우리들의 논의에 그대로 적용해 봅시다. 그렇게 하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포스트-포드주의란 소외에 기반을 두고, 소외의 특징들을 유효한 것으로 삼은 채로 소외를 지양하는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참된vero 것과 효력이 있는vigente 것을 구별해야만 합니다. 참된 것은 생산관계들의 초개체적인 성질입니다. 그렇지만 효력이 있는 것은 이것을 지배하고 있는 간개체적인 (따라서 독재적인!) 제반 규칙들입니다. 하지만 현대적인 생산에 필요하게 된 것, 즉 정신적인 자원의 공통적이고 분유적이며 공적인 성질은 횡포이면서 정밀한 위계질서의 확대 속에서, 또는 당신이 말한 것처럼 인격적 의존관계의 역설적인 재번영 속에서 전복되게 됩니다. 당신이 마지막 질문에서 제안한 정식, 즉 공적 영역이 아닌 초개체성은 참된 것(초개체성)과 효력이 있는 것(소외와 사물화) 사이의 대조를 보여주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공적 영역 속에서 물상화되지 않는 초개체성은, 아주 많은 측면에 있어서 전개체성에 다름 아니게 됩니다. 한 번 더 반복하자면 이것은 참된 것이기는 하지만, 효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두 개의 형용사―‘vero’(참된)와 ‘vigente’(효력이 있는)―사이에서야 말로 정치적인 투쟁의 대양(大洋)이 열리게 됩니다.
히로세 : 실제로 다중 제4장의 ‘테제3’에서 당신은 ‘참된 것’과 ‘효력이 있는 것’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말한 바에 따르면, 현대의 노동사회의 위기에서, 즉 포스트-포드주의 시대에서 ‘노동시간은 효력이 있는 측정단위이지만, 참된 측정단위는 아니’게 됩니다. 이 ‘테제’는 같은 장의 ‘테제 5’에서의 당신의 논의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잉여가치는 포스트-포드주의 시대에서, 특히 노동시간으로는 정산되지 않는 하나의 생산시간과 이른바 노동시간 사이의 간극에 의해서 결정된다.’17) 이 두 개의 테제를 함께 사고해 보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노동시간이 이제는 참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참된 것은 지금은 생산시간의 쪽이라고 말입니다. 따라서 반대로 생산시간이 아직 효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효력이 있는 것은 항상 노동시간의 쪽이라고 말입니다. 여기에서는 당신이 지금 말했던 ‘정치적 투쟁’의 한 가지 영역이 있는 셈입니다. 즉 어떻게 하여 생산시간을 효력이 있는 것으로 할 수 있는가, 또는 다르게 말하자면 어떻게 하여 생산시간을 하나의 ‘res publica’ 속에서 물상화시킬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 어떤 사람들은 ‘측정단위’로서의 생산시간에 효력을 부여할 수 있는 한 가지 공적인 제도로서 ‘basic income’(시민소득)이라는 기획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또한 다른 사람들은 이 제안이 많든 적든 간에 케인즈주의적인, 단순한 부의 재분배제도일 뿐이며, 본질적으로는 사회민주주의적인 기획일 뿐이라면서 이것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적어도 확실한 형태로서는, 이러한 ‘basic income’이라고 하는 제안을 논하고 있지 않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만, 당신 자신의 ‘물상화’에 관한 논의와의 관계에서, 이러한 제안에 대해 어떻게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참된 것과 효력이 있는 것 사이의 간극은 또한 ‘다중’과 국가(또는 ‘인민’) 사이의, 보다 엄밀하게는, 다중의 초개체성과 국가적인 (또는 인민적인) 간개체성 사이의 정치적 선택 속에서도 엿보이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시몽동은 국가를, 이러한 국가를 구성했던 개체들 사이의 계약적인 그룹들이라고 하는 이유에서 간개체적인 것이라고 간주하고 있습니다. 이 말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참된 것은 다중의 초개체성이며 효력이 있는 것은 국가적인 간개체성이라고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이’가 ‘res’로 되는 것을 차단하는 것, 즉 소외시키는 것은 임금노동의 간개체성만이 아니라 국가의 간개체성도 있다는 듯이 생각됩니다. 그런데 다중 제2장에서 당신은 실제로는 소외의 과정process이 지닌 이러한 두 가지 상호보완적인 측면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일반지성’이 자율적이고 공적인 영역으로서 그러한 모습을 부여받고 있지만, 여기에는 ‘일반지성’을 상품생산이나 임금노동과 결부시켰던 연계가 절단되어야만 한다. 다른 한편으로 자본주의적인 생산관계들의 전복이 모습을 드러낼 가능성도 있지만, 그것을 위해서는 비국가적인 공적인 영역이, 즉 ‘일반지성’을 자신의 중심으로 삼는 듯한 정치적 공동체가 창설되지 않으면 안 된다”18)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당신에게 두 개 정도의 질문을 던지고 싶은데요, 우선 첫째로 오늘날 임금노동과 국가의 사이에는 어떠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를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또한 ‘비국가적인 공적 영역’으로서의 ‘비대의제적인 민주주의’를 논할 때, 당신은 이것을 어떤 의미로 이해하고 있는지를 조금 더 구체적인 형태로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만일 가능하다면 전개체적인 것의 ‘물상화’라고 하는 물음과 관련지어, 의회 시스템과 국가행정 사이의 관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비르노 : 오늘날 정치 투쟁의 환경에 관한 당신의 정리는 확실히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노동시간은 이제 사회적인 부의 참된 단위가 아니지만, 그래도 여전히 계속적으로 효력이 있는 단위입니다. 반대로 복합적인 생산시간(이 생산시간은 ‘삶’vita 자체―언어활동, 정서 등―와 일치합니다)이 참된 단위로 되고 있지만, 이것은 아직까지는 효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정치적 투쟁, 조직화 과정, 전술, 투쟁형식(파업, 사보타주, 불복종 등)과 같은 모든 것은, 이미 참으로 되고 있는 것을 어떻게 효력이 있는 것(사회적으로 인정되는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라는 문제와 대치시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의 정치적 행위는 다음과 같은 평가기준에 의해서 그 가치가 측정되어야만 합니다. 즉 어떤 정치적 행위는 그 자체로 올바르거나 틀린 것이 아니며, 국가와 임금노동의 시대를 넘어선 결과 찾아내게 된 어떤 시민성civilità을 구성하는데 도움이 되는가, 아니면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것인가 하는 것, 바로 이것이 그것을 평가하는 기준입니다. 제가 ‘basic income’을 옹호하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입니다. 노동의 바깥에서 소득을 분배하는 것은 오늘날 사람들이 노동하고 있지 않을 때에도 생산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하나의 통로입니다. 말하자면 ‘basic income’은 초개체적인 협동에 대한 소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초개체적인 협동에 [돈을] 지불하는 것은 이 협동을 (참된 것이면서도) 효력이 있는 것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또한 저는 (당연하지만 개념적인 측면에 있어서) ‘basic income’을 도달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고 오히려 하나의 출발점으로 보고 있습니다. 설명을 해 보겠습니다. 보장소득은 본질적으로 타인의 명령이 아니라 자유롭게, 타인의 협박이 아니라 자유롭게, 즉 좀 더 능동적으로 되는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basic income’은 사회적인 개발력의 기폭제로서, 결국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황당한 짓거리가 아니라 ‘자기기업가정신’autoimprenditorialità을 위한 기초로 사고되어야만 합니다. 이탈리아에서는 60년대에 대공장의 포드주의적인 노동자들이 ‘생산성으로부터 분리된 임금상승’을 요구했습니다. 우리들은 이러한 전대미문의 목표야말로 ‘basic income’의 직접적인 선구자였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그 시대에서도, 어떤 경우든 문제로 되고 있는 것은, 노동력 상품이라는 존재에 종지부를 찍는 것입니다. 그 시대, 즉 60년대에는 노동력 상품의 가격이 무한하게 상승했고 최종적으로는 이것이 ‘반경제적인 것’antieconomica으로 되는 것에 도달할 때까지, 노동력이라는 상품 가격의 상승을 목표로 삼고 이를 추구했습니다. 오늘날에는 간개체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유휴(遊休) 노동으로 보일 때에도, 노동력 상품에 보복함으로써 노동력 상품이라는 존재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basic income’이 신케인즈주의적인 처방전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반론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앞에서 제가 말했던 것처럼 이미 참된 것을 효력이 있는 것으로 만드는데 도움이 될 것인지 아닌지를 생각하지 못하고, 추상적인 수준에서 어떤 목표의 가치를 측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또한 제게는 보장소득이라는 목표가 유물론적으로도 흥미로운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프랑스 혁명의 세 가지 슬로건인 ‘자유, 평등, 박애’Liberté, Egalité, Fraternité가 머리에 떠오르는 군요. 잘 생각해 보면, 이러한 세 가지 슬로건에는 그리스도교 부르주아들의 어떤 토대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사람들은 신 앞에서 ‘평등’하며, 또한 법적인 주체로서, 또한 상품교환의 주역으로서 ‘평등’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입장은 (인격적 종속 시스템에 따른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경제적 메커니즘에 의해서만 결정될 수 있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사람들은 ‘자유’입니다. 동시에 국민nation에 속해 있다는 자격에서도 사람들은 ‘형제’입니다. 이것과는 반대로, 우리들에게 ‘basic income’에 대한 권리가 있다는 것은 우리들이 하나의 감성적 신체이기 때문이며, 이 신체는 고용자 하에서의 활동이 정당화될 수 없는 기생적인 사회적 비용으로 되었던 한 시대 속에서, 살아 있는 기쁨을 즐겁게 받아들이는 것을 갈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적인 산 노동은 유물론자의 전통 전체를 이어받은 후계자가 될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비국가적인 공적 영역’(‘비대의제적 민주주의’도 제게는 같은 것입니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라고 당신은 제게 질문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premessa’(전제)입니다. 포스트-포드주의적인 다중이 ‘인민’이라는 허울을 계속 걸치고 있는 한, 그 존재양태(생산의, 소통의, 세계에 거주하고 있는 것의 양태)의 가장 높은 것에 대응했던 정치적 형식을 개발하지 못하는 한, 우리들은 권위주의적인 정치적 실행만을 반복하게 될 것입니다. 이탈리아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해 보세요. 베를루스코니와 신우익New Right은 대의제 민주주의가 공동화(空洞化)하고 있고, 어떠한 현실적인 기초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기업정당partito-azienda로 계속 바꿔치기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주권자’가 아니라 ‘일반지성’genenral intellect에 있어서 중심화된 새로운 공적 영역이 부재하게 되면, 다중 그 자체가 모든 종류의 유독함, 모든 종류의 파괴활동, 따라서 자기파괴활동을 퍼뜨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기주의적이고 냉소주의적이며, 부패한 전쟁을 이끌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지적한 다음에, 지금 여기에서 비국가적인 공적 영역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 수 있는지를 설명해 보고 싶습니다.
사회포럼19)은 틀린 것이 아니라, 그 하나와 가장 근사치입니다. 사회포럼에는 실제로 소통 능력, 기술적 능력, 직업적 능력이라는 다양한 능력이 모여듭니다. 사회포럼은 초개체적인 생산적 협동의 일부를 보여주고 있으며, 이 생산적 협동을 정치적 행동으로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는 것도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확실히 사회포럼이 아직 비국가적인 공적 영역에는 완전히 도달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하나의 굉장한 선례라는 것은 그 무엇으로도 바뀌지 않습니다. 비국가적인 공적 영역은 오늘날 국가의 행정기구 속에 응축되어 있는 제반 앎/권력saperi/poteri을 점진적으로 흡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러한 앎/권력은 의회가 아니라 행정권력 속에 응축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앎/권력을 다시 우리의 것으로 삼기 위해서는 필시 일련의 국지적인 실험에 착수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의 도시, 하나의 지역은 새로운 정치적 형식을 개발하는데 있어서 어느 정도 진전을 이루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구적인 생산력과의 밀접한 관계를 맺은 가운데, 이러한 실험을 하나의 지점에서 중심적으로 행하는 거죠. 이러한 국지적인 실험이 완전히 진전을 이루게 되면, 이것은 정치적으로 재생산가능한 것으로 될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문제는 ‘국가권력을 탈취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가권력을 해체하는 것, 국가권력이 어떤 방식으로 주변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를 명확하게 밝히는 것입니다. 비국가적인 공적 영역의 제반 특징들을 특정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는 빈약하고 볼썽사나운 것이라고 하는 점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좋습니다. 전복적인 정치논리라는 것에는, 실천적인 이니셔티브initiative만이 메울 수 있는 는 듯한 공백의 공간space을 항상 가지고 있어야만 합니다. 이런 이름에 걸맞는 어떠한 정치이론도 예측 불가능한 것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17) [옮긴이] “포스트-포드주의 시대에서 잉여가치는 무엇보다도 노동시간으로 계산되지 않는 생산시간과 적합한 의미에서의 노동시간 사이의 간극에 의해서 결정된다.”(비르노, 다중, 179쪽).
18) [옮긴이] “한편으로 일반지성은 상품생산 및 임금노동의 생산에 결부되어 있는 연결고리를 절단했을 때에만 자율적인 공적 영역으로 확실히 드러난다. 다른 한편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전복은 바로 이 지점에서 비-국가적인 공적 영역의 제도화와 더불어, 일반지성을 중심축으로 삼는 정치적 공동체의 제도화와 더불어 표방될 수 있다.”(같은 책, 118쪽).
19) [옮긴이]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사회포럼’은 ‘세계사회포럼’과 ‘유럽사회포럼’만이 아니라 잠재적으로 건설될 수 있는 모든 ‘사회포럼들’을 지칭한다.
▒▒The Autonomy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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