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기획] 특별기획/ 알뛰세르와 해후의 미스테리
진보평론 제11호
다니엘 벤사이드 Daniel Bensaid (파리 제8대학교 철학과 교수)
* 홍태영(서울대강사, 정치학)역
이론적인 면과 마찬가지로 개인적인 면에서 루이 알뛰세르의 비장한 궤적은 한 시대의 격랑을 잘 보여준다. 구조주의의 압제에 굴복했다는 의심을 받는 그는 사후의 텍스트들 속에서 “해후의 내밀한 유물론”의 사상가로 나타난다. 갱도의 막장까지 깊숙이 파헤친 천재적인 후기의 알뛰세르는 봉쇄된 미래와 희망의 소멸에 단호하게 맞서고 있다.
1985년, 그의 죽음은 빈번히 당혹감과 경외심이 혼재되어 표출되는 계기였다. 공산당은 「22차 당대회」와 「공산당 내에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는 것」*주)이란 글과 더불어 단절로 마감된 갈등의 세월을 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제자들 가운데 일부는 변절로 굴절되었으며 일부는 차별화 내지 흔히 정반대 노선을 추구해갔다. “알뛰세르주의자였던” 사람들에게는 분파적 이기주의에 대한 의심과 “알뛰세르주의자가 아니었던” 사람들에게는 폄하하는 조롱으로 과거에 일컬어졌던 “알뛰세르주의자”는 솔직히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주){{ Louis Althusser, Le 22ème Congrès, Paris, Maspero, 1977. Ce qui ne peut plus durer dans le Parti communiste, Paris, Maspero, 1979.}}
1965년과 1966년 『맑스를 위하여』와 『자본 읽기』의 출간 당시 이 글에 쏟아졌던 우호적이거나 적대적인 양극적 반향을 오늘날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자끄 데리다의 증언은 당시의 지적 분위기와 그의 검열 및 장악력을 잘 설명한다*주). 60년대에 공산당의 무게와 알뛰세르의 개성은 데리다와 공산주의 사이에 막을 형성케 했을 것이다. 비당원으로서, “나의 문제제기가 반공산주의 담론에 의해 이용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나는 마비되고 말았다.” 당시에는 의미심장했던, “늑대의 장단에 맞춘 맞장구”로 이용되는데 대한 우려와 반대자에게 침묵을 강요하고 “진영의 선택”을 독촉하는데 활용되었던 이러한 우려에 이론적 위협의 효과가 첨가되었다. “나는 일종의 이론주의와 흡사한 어떤 것 앞에서 마비되었다.”
*주){{ Jacques Derrida, "Friendship and politics", in Althusserian Legacy, Verso, Londres, 1989}}
정치적 마비와 지적 마비, 즉 이중의 마비인 것이다.
오늘날 데리다는 이러한 마비를 부재로서 의미를 창출했던 정치적 제스처로 설명한다. “옳건 그르건, 정치적 확신에 의해, 또한 아마도 위협에 의해서도, 나는 맑스주의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것을 포기했다.” 배신의 유령이 기관과 논쟁에 출몰하는 “헤게모니를 위한 그러한 전쟁, 엄청난 위협의 공작과 투쟁이 있었다.” 약간은 테러적인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나는 위협을 느꼈고, 편안하지 못하였다.”. “나는 반스탈린주의자였다. 내가 지니고 있는 공산당과 소련의 이미지는 내가 항상 충실하고자 했던 민주적 좌파와 양립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보수주의적 망설임과 혼동될 수 있는 정치적 이견을 표현하고 싶지 않았다.”
이러한 망설임은 루이 알뛰세르의 가부장적 위상과 그리고 윌름(Ulm) 가의 지적 성역을 장악한 공산당의 영향력 근저를 맴돌았다. 오늘날에는 상상하기 힘든 현상이지만 공산당에 가입하지 않는 것이 실제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데리다는 회고한다. 소련의 헝거리 개입 이후, 몇몇 분명 적지 않은 수가 공산당을 떠났다. 그러나 “알뛰세르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그는 결코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주) 만약 그가 결코 할 수 없는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당을 떠나는 것이리라. 비록 그가 당기구에 의해 이단자로 의심을 받았었지만, 알뛰세르의 담론은 맑스주의 지식인 집단 내에서 여전히 권위를 행사하였다. 1968년까지, “나는 이러한 담론은 축출된 것이 아니라 당 내에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다고 인식하였다”고 데리다는 밝히고 있다.
*주){{ Ibid, p. 199}}
『『『맑스의 유령들(「꺽쇠기호가 삽입되어야 함)』』의 저자의 소리 없는 망설임은 맑스주의 이전의 이념적 맑스와 맑스가 된 과학적 맑스 사이의 경계를 형성한 것으로 주장되는 “인식론적 단절”이라는 개념과 관련된다. 데리다는 이러한 두 맑스의 테제를 결코 납득할 수 없었다. 그에게 과학의 개념은 맑스의 이질성과 맑스 사상의 다의성을 벗어날 수 있는 결정적 힘이 되지 못하였다. 정교함에도 불구하고 알뛰세르와 그 추종자들의 담론들은 그에게 하나의 “새로운 과학주의” 혹은 “새로운 실증주의”로 비춰졌다. 이들의 담론에는 “객체란 무엇인가?”와 같은 결정적인 문제들은 가차없이 삭제되어 있었다.
데리다는, 그를 공산주의 활동으로부터 거리를 두게 했던, 알뛰세르 사상에 대해 공감하지 못한 것들 속에서, 많은 문제들 “특히 역사의 역사성 혹은 역사 개념에 관한 문제들”이 회피되는 듯 했다고 강조한다. “나는 알뛰세르가, 예를 들어 이데올로기는 역사가 없다고 단정하면서, 너무 빨리 몇 가지를 역사에서 배제시켰음을 발견하였다. 나는 역사를 포기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역사에 대한 형이상학적 개념의 파괴는 나에게 역사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주) 오히려 데리다는 이데올로기의 개념과 용어 - 결과적으로 과학과 이데올로기 사이의 분할 - 가 역사를 갖는다는 것을 확신한다.
*주){{ Ibid, p. 193}}
마비와 위협으로 이러한 이견들이 침묵에 묻힌 것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명성이 높아가던 철학자에 의한 공개적인 이견의 제시는 적당히 지나가는 모호한 논의의 구도를 변화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데리다가 당과 거리를 두었던 저항이 단순하게 논증적이거나 이론적이 아니었던 것인 만큼. “이러한 저항들 역시 정치적이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는 30년 후 “나는 그들보다 더 맑스주의자임을 느낀다”라고 희화화한다. 그가 확신하는 것처럼, 60년대부터 예견된 당의 붕괴를 그가 본 것은 이유가 없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미 당이 자멸 논리에 빠져들고 있음을 보았다.” 그리고 “알뛰세르주의의 패러독스는 당을 무감각하게 만드는 동시에 당을 개조하려 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알뛰세르 현상은 “지극히 프랑스적인” 특이한 이론적 산물이며, 그 이론의 기초자는 자신의 당보다 더 자멸적이었음이 드러났다. 결국 둘 모두는 68운동의 최대 패배자가 되었다."*주)
*주){{ Ibid, p. 120}}
맑스주의에 과학성 개념을 부여하려 노력하고 인식론적 단절에 각성제를 투여하면서, 알뛰세르는 당의 편협한 후견으로부터 이론을 해방시킬 것을 주장했다. 그럼으로써, 그는 맑스주의 지식인들 - “보장된 철학자”, “저서는 없지만 모든 작업을 정치로 아는 철학자들”*주) - 을 시간, 특히 가깝게는 냉전으로부터 해방시켰다. 스탈린주의의 본격적인 위기사태와 거리를 둔 “이론적 실천”은 “그 스스로 자신의 기준이 되었다.” 이론적 실천은 “그 스스로 자기 산물의 질을 평가하는 규정, 즉 과학적 실천물의 과학성의 기준들을 내포하게 되었다.” 당의 후견적 틀에 알력을 보였던 공산주의자 학생들은 이러한 이론의 해방을 다시 찾은 사상의 자유의 징표로 이해하는 듯했다.
*주){{ Louis Althusser, Pour Marx, Paris, Maspero, 1965, p. 12}}
동시에 알뛰세르는 맑스주의에 새로운 과학적 위상을 부여한 것처럼 보였다. 신생대학의 강단에 봉쇄된 채, 전통적 대학들이 기피하는 투쟁적 지식인의 시대가 끝난 것이었다. 『맑스를 위하여』(꺽쇠기호) 서론에서 알뛰세르는 그 시기 공산주의자 지식인의 이 같은 오랜 욕구불만을 설명하고 있다. “철학자에게 이런 지식인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었다. 지식인이 당의 의도에 따라 철학을 말하고 썼다하더라도, 유명한 인용구에 대해 내부용으로 미미한 재해석과 논평이 고작이었다. 우리는 동료들에게 지지를 받지 못했다.” 이데올로기적 백병전으로부터 과학적 법칙의 고매함으로 넘어가면서 전투적 맑스주의는 학술원의 고결한 승인을 기대할 수 있었다.
대학 붐으로 배출되고, 막연하게 정치참여와 경력의 양립을 고심하던 미래 세대에게 이것은 뜻밖의 횡재였다. “진리”이기 때문에 전능한 과학의 봉사자로서, 현장 활동가와 “노동자계급 당”에 대해 죄의식을 벗어버린 지식인들은 스스로 생산자가 된 것이었다. 왜냐면 스승의 말처럼, 이제부터 “지식을 세계관이 아닌 생산”으로 인식해야 했기 때문이다. 지식인들은 이러한 과학의 실천적인 힘과 명분의 떳떳함을 동시에 누리게 된 것이다.
따라서 알뛰세르의 행동은 해방자의 그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러한 자유는 대가를 치렀다. 정치로부터 해방된 이론? 자기 자신의 “이론적 실천”이라는 밀실 속에 갇혀 실천적 실천과는 거리를 유지했다는 점에서 그럴 것이다. 그러면 이론적 개혁의 혁명적 주장과 1968년 당의 실질적인 정치 사이에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이론과 실천 사이의 이러한 보장된 평화 속에서, 정치는 당과 당의 관료주의적 기구의 권위주의적 손에 맡겨져 있었다.
동료들의 인정 속에서 학문적 위상을 가진 맑시즘을 꿈꾸며 알뛰세르는 새로운 통로를 열어 교조적 “디아마(diamat)”에 식상한 학생들의 열기를 불러일으켰다. 그는 화두에 정신분석학, 소쉬르의 언어학, 구조주의 인류학을 도입하였다. 그는 학문간 열정적 호기심을 자극하였다. 동시에 (그람시가 자신의 『옥중수고』에서 혹평하고, 스탈린이 개인적으로 자신의 불멸의 팜플렛*주1)에서 신성화한) 부하린의 『맑스주의 사회학의 대중 교과서』*주2)에 의해 유명해진 저주받은 한 쌍의 역사유물론과 변증법적 유물론은 과학의 이름으로 점점 더 악화되던 과거를 계속 정당화하였다.
*주1){{ Staline, Matérialisme historique et matérialisme dialectique.}}
*주2){{ Nicolas Boukharine, Manuel populaire de sociologie marxiste, Paris, EDI, 1967}}
한편에 역사과학, 또 한편에는 “진리와 오류를 구분하는 분별의 과학” (메타논리와 메타과학)인가? 정치에 관한 한, 결정적 판단은 당과 그 지도자들의 혜안에 맡겨졌다.
지식인들의 죄의식 탈피는 공산주의자 학생 연맹의 위기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면서 제시된 「학생 문제」*주)에 대한 1964년 1월의 텍스트에 드러난다. 다시 읽어보면, 이 글은 등골을 오싹하게 한다. “공산주의자들 사이의 모든 토론은 항상 과학적 토론이다. 비판과 자아비판의 맑스-레닌주의적 개념들은 이러한 과학적 토대에 기반한다; 비판의 권리와 자아비판의 의무는 맑스-레닌주의 과학과 그 결과에 대한 현실적 인정이라는 하나의 동일한 원칙을 갖는다.” 노동의 기술적 분업과 사회적 분업에 대한 구별은 교육관계를 넘어서 특정한 대학적 관료 질서를 정당화한다. 교육의 내용 속에서 “노동의 기술적 분업과 사회적 분업 사이의 영구적인 분할의 선”, “진정한 과학”과 “순수한 이데올로기” 사이의 “가장 지속적이고 가장 깊숙한 계급 분할의 선”을 명확히 해야 한다. 이러한 접근방식은 진정한 과학의 평결 앞에서 속죄하는 복종으로, 또한 위선적 부르주아 과학에 맞서는 순수한 이데올로기적 저항에 이를 수 있는 것이었다.
*주){{ Louis Althusser, “Problèmes étudiants,” in "a novelle critique, janvier 1964}}
자그 랑시에르는 1975년, “우리가 알뛰세르 학파로부터 익힌 맑스주의는 그 모든 원칙들이 우리들을 부르주아 질서를 뒤흔드는 저항운동으로부터 격리시킨 질서의 철학이었다”고 기술했다. “(....) 1964년, 알뛰세르는 대학의 질서를 정당화하기 위해 ‘노동의 기술적 분업’이라는 ‘맑스주의적’ 개념을 찾아냈다. 이로써 공장에서의 모든 위계질서,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분리, 교수의 권위가 ‘이론적으로’ 보장되었다. .... 맑스는 잘못할 수도 있고, 알뛰세르가 그것을 정정하는 것은 옳을 수 있다. 다만, 진정으로 맑스와 맞서지 않고는 그것을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는 맑스를 조용하게 놔두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것을 역사에서 배웠다; 맑스와 맞선다면, 그것이 초래할 결과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 결과 그는 오도된 길로 빠져들었다. 맑스보다는 그람시를, 그람시보다는 루카치를, 루카치보다는 가로디를, 가로디보다는 존 루이스를 말하는 것이 더 나은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오도된 길로 더욱 나아갔고 문제로부터 더 멀어져갔다. 맑스는 어찌되었는가? 다시 말해 종국에는. 혁명은 어찌되어 가는가?”*주)
*주){{ Jacques Rancière, La Leçon d'Althusser, Paris, Gallimard, coll. Idées, 1974}}
1980년 알뛰세르는 침묵을 지켰다. 과학이라는 가공할 메스로 무장한 그는 역사를 제거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역사를 철저히 배제했다. 그는 “사상의 역사관은 붕괴되었다”고 비장하게 선언했다.
역설적으로, 그의 초기 이론활동은 오늘날 그의 사후에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더 이상 그가 이해했던 방식으로 『자본』을 읽지 않는다. 지난 세기의 참담한 결말은 또 다른 시각을 요구한다. 그러나 알뛰세르 식으로 또 반 알뛰세르 식으로 『자본』을 다시 읽는 것은 우리의 논리적 저항의 강제된 통과의례인 것이다.
1972-1974년의 「자아비판」 이전의 텍스트들은 “알뛰세르주의”를 하나의 사상적 학파로 만드는 것인 동시에 낡은 세계에 맞서 일어선 전후 지식인 세대에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정치적 근거로 만드는 것이다.*주) 알뛰세르의 정치는 자신의 이론적 작업들보다 더 낡은 병폐를 가지고 있지만, 정치와 이론 사이의 관계는 밝혀져야 할 문제로 남아 있다.
*주){{ Louis Althusser, Eléments d'autocritique, Paris, Hachette, 1974}}
알뛰세르의 정치사상은 채집된 곤충처럼 스탈린주의의 벽에 부딪혔다. 그의 관심사는 숙청과 수용소와 같은 비개념적 무게에 눌린 가공할 관료주의적 반혁명이 아니라 “이론적 일탈”이라는 곤혹스런 결과에 있었다. 「존 루이스에의 답변」에서, 변증법적 유물론의 관점에서 판단할 때 (전체적으로) 긍정이 부정을 압도한다. “명백하고 강력한 이유들 때문에 스탈린은 우리가 그의 이름에 연결시키는 편향으로 환원될 수 있을 뿐이다. .... 그는 역사 앞에 보일 다른 치적들을 갖고 있다. 그는 세계혁명이라는 즉각적인 기적을 포기해야 함을, 그리고 일국 사회주의를 건설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았고, 그로부터 모든 결론들을 이끌어 냈다. 세계 사회주의의 배후와 토대로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일국 사회주의를 수호하고, 이를 제국주의의 포위공략에 맞서는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목표로 일국 사회주의는 나찌즘으로부터 세계를 해방시킨 전쟁에서 소비에트 인민의 영웅주의에 기여했던 스탈린그라드의 탱크를 생산한 중공업에 우선순위를 두었다. 역사는 이렇게 흘러갔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의 비극과 굴절을 통하여 수백만의 공산주의자들은 비록 스탈린이 교조적으로 교육했다 하더라도 레닌주의 원칙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주)
*주){{ Louis Althusser, Réponse à J. Lewis, Paris, Maspero, 1973. 이 텍스트는 1972년 자아비판 이후에 쓴 글이다.}}
스탈린의 전차들이 프라하, 부다페스트를 짓밟은 것, 독-소 조약, 루비앙카의 지하 매장지, 콜리마의 수용소, 이 모든 것들이 단지 도그마에 의해 굳어버린 원칙의 압제에 약간 삐꺽거린 사소한 일들인가? 알뛰세르는 - 뒤늦게 - 역사에 대한 이론적 숙정과 그의 유감스런 오류의 대가로 얻은 “전리품들”을 보존하기 위해 “스탈린적 일탈”을 공격한다. 그에게 이러한 일탈에 대한 “좌파의 유일한 비판”은 “조용한 그러나 중국혁명에 의해 완결된 행위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비판”이다. 사실 1949년 중국혁명은 스탈린의 의지와 지침에 반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1973년 문화혁명과 수백만의 죽음 이후 대체 어떻게 중국에서 사회주의의 조국과 마오에게서 수정된 스탈린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미리 대비했던 알뛰세르는 이러한 집요한 맹목성의 정당성을 사전에 표명했었다. 그는 프롤레타리아의 역사적 대실패로 귀결된 “이론적 일탈”들을 경제주의, 경험주의, 교조주의 등으로 불렀다. “심층에 있어서 이러한 일탈은 철학적이며, 엥겔스와 레닌을 필두로 초기 노동운동의 위대한 지도자들은 이미 이러한 일탈을 비난했었다. 우리는 왜 이러한 일탈들이 그것을 비난했던 초기의 노동운동 지도자들을 함몰시켰는지 아주 잘 이해하게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이러한 일탈들은 맑스주의 철학의 당연한 지체를 고려해보면 불가피한 것이 아니었을까. 한심한 정치, 보잘 것 없는 실천을 온종일 선혈이 낭자한 진흙탕에 나뒹굴게 방치한 후, 황폐해진 들판에 퇴행적 시선을 보내는 것을 가능케 해주는 행복한 철학!
한 시대는 동시대인들에게 결코 즉각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손쉬운 철학적 변명을 갖고 있다. 실현된 역사가 유일한 가능성이 아니었다는 것 - 결코 아니라는 것 - 을 주장하며 제거된 수많은 이설자와 반대파들 역시 존재한다. 스탈린은 강제된 조물주가 아니었으며, 더욱이 알뛰세르가 찬양한 바대로 “변증법 법칙”*주)들로부터 부정의 부정을 제거하는 위대한 업적을 이룩한 “탁월한 통찰력을 지닌 철학자”는 아니었다. 사실 스탈린은 반복도 미사여구도 없는 간단명료한 부정을 선호하였다.
*주){{ Louis Althusser, "La querelle de l'humanisme"(1967), in Ecrits philosophiques et politiques, tome II, Paris, Stock, 1997, p. 453.}}
1978년, 「「공산당 내에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는 것」(꺽쇠기호)이라는 글은 약간 뒤늦게 나왔다. 2년 전, 알뛰세르는 22차 당대회를 “공산당과 프랑스 노동운동 역사에서 결정적 사건이자 결정적 전환점”이라고 경의를 표했었다.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었던 것들이 이미 너무 오랫동안 지속되어 버렸다.
너무 늦었다! 한번 더 부엉이는 황혼에 눈을 크게 떴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소비에트가 해체되기 10년 전에, 알뛰세르는 고르바초프의 기적을 끝까지 기대하면서 자신의 “파괴된 우주”와 함께 무너져갔다.
관료주의적 위계질서에의 복종과 수도자적 신중함으로 완화된 고집스런 이단 사이를 갈팡질팡하였으나 그는 개탄스런 구조를 뒤흔드는데 기여하였다. 한편으로는 배회하는 당원들을 당의 품안으로 끌어 들였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진정한 마오주의적 좌파주의를 활성화시켰다. “1968년 5월 이후 알뛰세르의 이중 진리는 두 축으로 분할되었다. 전능한 이데올로기 기구의 사변적 좌파주의와 자신의 계급을 고백하도록 요구하는 이론에서의 계급투쟁이라는 사변적 주다노프주의 ..... 바로 이것이 역설적 정통의 미로가 몰고 간 것이다. 마오를 맑스로 되돌리기 위해서는 철학의 중재가 있어야 했다.”*주)
*주){{ Jacques Rancière, op. cit.}}
68 이전에 알뛰세르는 전술적 탈정치주의라는 정치적 선택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68 이후 그의 진리는 마오주의적 (미시) 기구들의 좌파주의와 이론 속에서의 계급투쟁이라는 주다노프주의로 갈라져 나갔다. 1973년 그의 「존 루이스에 대한 답변」은 “좌파주의의 상속재산이었던 테제들의 공산주의 정통성에의 부착”*주)이었다. 적어도 어떤 좌파주의는, 마오주의에서 갑자기 로타리 클럽으로, 나아가 반전체주의의 신 철학, 신자유주의의 십자군, 그리고 재탕된 영생신학의 부활로 이행하기 위해, 머지않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스탈린주의를 부정하게 될 것이다.
*주){{ Ibid., p. 183}}
이러한 서글픈 평가에 비추어, 라자뤼스(S. Lazarus)의 글에서 알뛰세르가 처음으로 “정치의 사고가능성을 열었다”고 읽는 것은 놀랍다. 사실, 에꼴 노르말의 엘리트 주변에서 거둔 알뛰세르의 성공은 알튀세르가 이들에게 기회주의적 처신의 길을 열어주었다는 사실에 있다. 맑스주의에 관한 권위를 내세워 당의 숨막히는 후견으로부터 해방시키면서, 미래의, 사민주의의 우직한 학자들인, 대사상가 후보들은 지식의 권위가 약간의 권력을 향유할 수 있다고 확신하며 계급투쟁에서 과학적 전문가를 자처했다. 이렇게 당과 에꼴 노르말의 이중의 무대에서 이론의 명성과 정치의 빈곤이 결합했던 것이다.
60년대 말 알뛰세르주의의 자산이었던 문제설정은 세 가지 문제에 걸쳐 있다. 인식론적 단절, 역사주의 비판 그리고 이론적 반인간주의.
알뛰세르는 전과학적 이데올로기로부터 과학을 분리시키면서 맑스에 적용하기 위해 바슐라르의 “인식론적 단절”이라는 개념을 차용한다. 자아비판과 수정의 맥락에서, 그는 결코 이 테제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는 단절은 발명도 환상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나는 이 점에 대해서는 양보하지 않을 것이다.”*주1) 그는 또한 “나의 초기 글들의 중심적 범주들을 그로부터 만들었음”을 주장한다. “이러한 설명은 나를 상대로 (...) 자신들이 지배하는 역사의 연속성에 목숨을 건 부르주아들에서부터 전치된 몇몇 과학적 개념 때문에 정치적 동맹을 상실할 것을 우려하는 공산주의자들, 그리고 부르주아적 개념들(과학과 단절)을 도입했다고 격렬하게 비난하는 무정부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완전한 신성동맹을 결성하게 했다.”*주2)
*주1){{ Louis Althusser, Eléments d'autocritique, Paris, Hachette, 1974, p. 18}}
*주2){{ Ibid., p. 32.}}
그에게, 단절의 상처는 봉합될 수 없었다. 그 상처는 진리와 오류, 지식과 무지가 아닌 과학과 이데올로기 사이의 분할을 정당화하였다. “이러한 단절은 나의 모든 예비적 조치들에도 불구하고, 과학과 비과학의 합리주의적 개념 속에서 구상되었고 정의되었다.” 프롤레타리아 과학과 이데올로기의 지옥에 떨어진 부르주아 과학 사이의 투쟁으로부터 만들어진 용법을 생각해 볼 때, 관료주의적 이성은 이러한 냉혹한 합리주의로부터 추출될 수 있다는 가공할 만한 논거를 엿볼 수 있다.
따라서 알뛰세르의 맑스 읽기는 찾을 수 없는 단절을 탐색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그는 사변적 유산에 대한 이론적 단절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시작하였다. “나는 경솔하게 맑스와 엥겔스의 의식 속에서 자신들의 대학교육으로부터 받은 이론적 원칙들을 부정하고 지형을 변화시킬 필요성이 발생하는 그 순간을 단절이라고 불렀다.”*주1) 그에 따르면 이 순간은 「1844년 수고」이후에 발생한다. 날짜 역시 명시된다. 1845년. 다음해 『독일 이데올로기』는 철학의 종말과 동일한 것들로의 회귀를 호소한다. 그러나 그것은 “한마디로 끝이 없는 장기지속 사건의 시작에 불과하였다.”*주2)
*주1){{ Louis Althusser, "Marx dans ses limites", Ecrits philosophiques et politiques, I, Paris, Stock, 1994, p. 381.}}
*주2){{ Louis Althusser, "La Querelle de l'humanisme", op. cit., p. 488}}
맑스는 도착했다고 믿었다. 그것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여기로부터 그 개념을 지키기 위해 “과정으로서의 단절” 혹은 지속된 단절 등으로 재검토되고 정정된 개념이 나타난다. “모든 과학이 장차 내적 단절들(coupures)에 정확히 맞추어진 지속된 단절(Coupure)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연속과 불연속의 변증법이 문제되는 것이라면, 단절(Coupure)과 단절들(coupures) 사이의 문제는 쓸데없이 혼란스럽게 된 것 같다. 정치에서는 단절과 연속성, 사건과 역사, 행위와 과정을 모순적 통일 속에서 총체적으로 사고하도록 되어 있다. 만약 알뛰세르가 단절이 야기하는 연대기적인 시련에도 불구하고 단절을 고집했다면, 그것은 단절이 자신의 개념적 장치 속에서 결정적인 기능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절은 맑스의 독해를 막다른 길목으로 몰아넣는 대가를 치르게 한다. 형성 중인 모든 사상들처럼 그의 사상 역시 전환을 겪고 도약을 맞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굴곡을 알고 강조한다는 것이 유용하다는 것은 명백하다. 연속성과 비연속성의 얽혀진 실타래를 따라간다는 조건에서 말이다. 그러한 것 없이는 항상 불완전하고 불확실한 단절은 끊임없이 작업의 극단적인 한계에 몰리게 된다.
알뛰세르가 잘못된 신념을 지키며 끊임없이 주장했던 것이 무엇이든, 소외와 부정의 부정 개념들은 『그룬트리쎄』와 『자본』에서 재출현하면서 1845년의 단절에서 살아 남았다. 물러서기보다는 오히려 이러한 잘못된 싸움에 말려들어 그는 “과학적” 맑스주의의 단절을 1880년 바그너에 대한 죽음직전의 노트에까지 몰고 가 웃음거리가 될 뻔했다. 하마터면 그랬다. 겨우 몇 달 후, 신성 맑스는 이데올로기의 암흑상태를 우리에게 남겨둔 채 떠났다.
이러한 집요함의 요체는 명백하다. 맑스의 저작들을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로부터 정화시키기 위해 그리고 그를 떠나지 않는 수많은 악마들(인간주의, 역사주의, 진화론)로부터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이데올로기는 그의 저작 속에서 들러리가 아니다. 문화 개념에 의한 그의 은밀한 대체(분명 아라공Aragon이 표적이었다)는 더 이상 계급투쟁의 여지가 없는 엘리트주의적 통합운동으로 즉각 이르게 된다. 이러한 타협 없는 경계획정은 과학적 기술적 이성의 물신적 실체에 기반하고 있다. 따라서, “노동의 기술적, 사회적 분업의 영원한 분리선, 가장 지속적이고 깊은 이 분할선이 용인되는 곳은 바로 대학에서 교육되는 지식 속에서이다. 배분된 지식은 진정한 과학인가? 그래서 이러한 분배는 기술적 필요성에 진정으로 조응하는 것이다. 분배된 지식은 순수한 이데올로기인가? 비록 교육의 형태가 매우 근대적일지라도, 교육적 기능이 이데올로기 그리고 계급 정치에 봉사하고 있는 것이다.”*주)
*주){{ Louis Althusser, Problèmes étudiants, op. cit..}}
그러므로 교육학은 “지식을 소유하지 못한 주체들에게 여과된 지식을 전달하는 기능을 지니며” 교육적 관계는 “지식과 비지식 사이의 불평등”을 반영한다. 결국 “스승과 제자, 교수와 학생의 관계는 이러한 기본적인 교육적 관계의 기술적 표현이다.” 서기장의 권위와 같이 스승의 권위 등 모든 이러한 형태의 권위는 부분적 지식이 아닌 비지식의 절대적 무지와 대립되는 절대지식의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마오주의의 대중주의적 “인민 봉사”와 그것에 대한 대중들의 선동적인 우상화는 이러한 통제 담론의 전도된 형상이자 지적 속죄로 나타난다.
지식과 비지식의 상호배제는 언어와 유사하다. 배제는 들리지만 표현되지 않는다. “이데올로기의 인식이 이데올로기로서 내재적이라는 단정”이 곧 무의식이라고 알뛰세르는 강조하면서도 이를 전파한다. 유명한 뫼비우스의 띠에서, 표면의 위상학적인 중첩은 이러한 얽힘을 형상화한다. 따라서 “과학과 이데올로기의 대립은 항상 회고 혹은 회귀에 근거하고 있다. 자신의 선사(prehistoire)가 이데올로기적이라는 선언을 가능하게 하는 이러한 단절을 이론들의 역사 속에 세우는 것은 바로 과학 자체의 존재이다."*주)
*주){{ Louis Althusser, "Sur Feuerbach"(1967), in Ecrits phlosophiques et politiques, II, op. cit., P. 225 et p. 487.}}
이러한 미해결의 난점들은 뿌리 깊은 모순을 증명한다. 때론 필요로 하고 때론 반박되면서 그를 떠나지 않는 과학적 이상과 실증주의적 시도에도 불구하고, 알뛰세르는 정치경제학에 대한 맑스의 비판과 무의식에 대한 프로이드 이론에 의해 제기된 문제들에 묶여 있다. 포퍼의 인식론에 따르면, 그것들은 허풍을 떠는 “비과학”의 두 가지 예이다. 하나는 고전 심리학(폴리쩌가 20년대에 그것을 훌륭하게 만들어 냈다)을 “우리 시대의 이데올로기적 타락과 최악의 혼동” 현장으로서 비난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것에 적극적으로 정신분석학을 진정한 과학으로 대립시키는 것이다. “형식적으로 프로이드가 우리에게 준 것은 하나의 과학 구조이다.”; 그러나 “아직은 비과학인 것의 과학으로 이행”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그 대상의 단일성에 적합한 합리성과 인과성이라는 다른 개념들이 요구된다.
알뛰세르는 그것을 명확히 느끼고 있었다. 그는 표현적 인과성이라는 라이프니쯔의 개념이나 헤겔의 목적론적 인과성에 빠지지 않고, 스피노자에게서 기계적 인과성과 그의 이행적 효율성에 대한 대안을 끊임없이 추구했다. 그것으로부터 “환유적 인과성”과 “과잉결정된 모순”이라는 제안이 나온다. 이러한 모색은 당의 자기방어적 담론에서 통용되는 헤겔 변증법의 옹호론적 해석을 피하려는 당연한 고민을 나타낸다.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꺽쇠기호)』에서 알뛰세르는 맑스로부터 “유물론적 원칙과 양립할 수 없는 것뿐만 아니라, 이데올로기의 맑스로 지속시키는 것, 무엇보다도 변증법의 옹호론적 범주들, 더욱이 그 유명한 ‘법칙들’ 속에서 당 지도부의 결정을 위해 역사의 변화무쌍한 진전을 완수한 사실에 대한 옹호(정당화)에만 이용되는 것 같은 변증법 그 자체”를 제거했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했다.”*주) 변증법이 만능이라는 스탈린의 전통을 겪었던 사람은 누구나 이러한 알뛰세르의 집착을 아주 잘 이해할 수 있다.
*주){{ Louis Althusser, L'avenir dur longtemps, Paris, Stock, 1992, p. 214}}
공산주의 운동 내부에 다른 전복적인 난제를 제기했던 이러한 피곤한 논쟁을 심화시키기보다는 알뛰세르는 생물학과 정신분석학 속에서 다른 양식의 합리성들을 추구하면서 비껴나간다. 그는 프로이드가 라깡처럼 항상 수학자나 논리학자에 비교되기보다는 자연과학자에 비교되었다고 주장한다. “그가 전적으로 옳았다.” 다만 자연과학을, 물리학이나 정밀과학으로서가 아니라 생명과학으로 이해한다는 조건에서이다. 사실 맑스에게 자본논리는 기계적 논리가 아니라 유기체적 논리였다. 자본 자체가 죽은 노동을 삼키는 흡혈귀인 것이다.
과학적 이상이 더 이상 고전적 물리학의 배타적 이상이 아니라 역사와 정치에 대한 지식이라는 의미에서 우리는 라자뤼스처럼 알뛰세르가 그것을 위협하는 과학주의에 저항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 그의 모순들은 맑스가 이미 표현했던 것처럼 다르게 과학을 할 필요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사상과 당으로부터”와 “과학과 이데올로기의 사상 자체 속에서”라는 “이중의 틈새”*주)를 통해 과학과 이데올로기의 스탈린적 합성을 피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순환적으로 이중의 어려움에 부딪친다. 한편으로 자신의 대상(역사 혹은 무의식)에 고유한 서술적 논리. 다른 한편으로 “단절” 이후에 역사가 있다는 역설.
*주){{ Sylvain Lazarus, Politique et philosophie dans l'oeuvre de Louis Althusser, Paris, PUF, 1993, p. 10}}
결론적으로 진리는 역사를 만든다!
과학이 “멈추지 않는다면”, “모든 과학이 시작한다”고 단정하는 교묘한 해결책이 여기서 나온다. 하나의 해결책 이상으로 이 답변은 알뛰세르가 의식하고 있었던 어려움의 지표이다. 그는 과학과 혁명적인 것의 개념을 하나의 동일한 표현으로 결합하려는 것이 터무니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프롤레타리아는 증명된 그리고 증명할 수 있는 “간단히 말해 과학적인”*주) 객관적 지식을 필요로 한다고 덧붙인다. 물리학과 수학은 계급의 결정을 초월함에 따라 보편적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의 생산과 적용의 조건은 사회적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주){{ Louis Althusser, Eléments d'autocritique, op. cit., p. 27}}
모순은 현실적이나 적대적이지 않다.
이러한 모순은 맑스주의에 기존 과학성 모델의 적용과 과학 개념의 근본적인 재정립 사이의 망설임, 즉 『맑스를 위하여(꺽쇠기호)』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망설임을 초래했다고 발리바르는 1996년의 서문에서 서술하고 있다. 과학만능주의적 의도를 의식한 우리는 알뛰세르의 사상이 기초한 스피노자적 근거에 내재하는 비경험적 진리의 개념에 대해 그다지 공감하지 못했다. 고전과학에서 결정적인 실험은 진실의 유효성을 보장하는 판단 기능을 수행한다. 반대로 스피노자는 “스스로 나타내는” 진실에 대해 말한다. 왜냐면 “지식이 드러나는 것은 그것의 생산과정 내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오류에 대한 인식이 진실의 반복인 것”*주)은 이러한 이유이다. 또한 「레닌과 철학(꺽쇠)」에서 알뛰세르가 회의적 상대주의와 과학만능적 교조주의라는 이중의 장애물에 대항하여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의 쟁점을 자신의 관점에서 다시 수용한 것도 이 때문이다. “상대적 진리”와 “절대적 진리” 사이의 구별은 모호하지만 레닌에 따르면 이러한 구분은 “과학이 가장 나쁜 의미의 도그마가 되는 것을 막기에” 충분하고, 신념론, 불가지론, 궤변론에 대해 “결정적이고 지울 수 없는 선을 긋기에는 충분히 명확하며”, “모든 형식의 관념론에 대항하는 집요한 투쟁을 가능하게 할만큼 아주 확고하다.”
*주){{ Ibid., p. 47 et 75}}
따라서 알뛰세르가 자신에게 퍼붓는 실증주의라는 비난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는 것은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1978년 1월 16일 므랍(Merab)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프랑스 대학에서 배태된 꽁트적 유산에 대한 실질적인 경도를 인정한다. “15년 전에 내가 했던 것은, 몇 가지 근거(까바이에스Cavaillès, 바슐라르, 깡귈렘 그리고 그들 이전에 스피노자-헤겔의 전통)로부터 영향을 받은 명백한 합리주의 전통 속에서 과학으로 정립하려는 맑스주의 (역사적 유물론) 주장에 대한 아주 프랑스적인 평범한 정당성을 만드는 것이었다. 나는 절반 정도 그것을 믿었고, 이러한 절반의 불신은 나머지 반의 글쓰기를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주1) 그러나 「철학적 정세」에 대한 1966년의 텍스트 속에서 그는 여전히 꽁트를 “격렬한 유심론적 반동”으로부터 “프랑스 철학의 명예를 구한” “19세기 유일의 위대한 철학자”로 묘사하고 있다. 그는 베르그송, 페귀, 메를로-뽕티가 포함된 유심론적 계보와 전쟁을 선언하였다. 그에게는 심리주의 전통의 희생자들을 부활시킬 시점이 온 것으로 보였다. 생시몽, 푸리에, 꽁트, 쿠르노, 뒤르껭. 유심론과 유물론 사이의 이러한 명확한 경계선은 아주 이상한 동맹과 위험한 혼선을 가져왔다. 우리는 메를로-뽕티에게 뒤늦게 경의를 표한 그의 자전적 고백 속에서 적절히 시인한 가책을 알아차릴 수 있다. “철학자적 소설가”였던 사르트르와 달리, 그는 “진정 위대한 철학자”였고 “데리다 이전에 프랑스의 마지막 거인”이었다.*주2)
*주1){{ Lettre à Merap, Ecrits philosophiques et politiques, I, op. cit., p. 527.}}
*주2){{ Louis Althusser, L'avnir dure longtemps, op. cit., p. 170}}
알뛰세르는 맑스가 “우리의 위대한 철학자” 꽁트에게 보인 경멸을 오랫동안 고집스레 무시했다! 앞서 인용한 꽁트적 신념을 고백한 지 겨우 일년만에 「철학의 편에 서서」에서 그는 실증주의를 “경험주의의 현실적 대표자”로 비난한다. “지배적 경험론과 피지배적 형식주의 사이의 타협”으로서 실증주의에서 그는 “최대의 적”을 발견한 것이다.
후기의 저술에서까지 알뛰세르는 그가 대상으로 했던 60년대의 구조주의와의 아말감을 단호하게 옹호했다. “처음부터 우리는 모든 문제를 발생시키는 (추상적인) 결합관계(combinatoire)과 (구체적인) 결합(combinaison) 사이의 구조적 차이에 대해 주장하였다. 아무도 이러한 차이를 주목하지 않았다. 도처에서 구조주의를 통해 기존질서 속에서 구조의 부동성과 혁명적 실천의 불가능성을 정당화한다고 나를 비난했다. 그러나 나는 레닌에 대하여 정세이론이 묘사하는 것 이상을 그려냈다.”*주) 생산양식에 대한 서투른 구조적 해석이 실질적으로 그것의 혁명적 전복을 생각할 수 없게 한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한편 1972년 자아비판에서 알뛰세르는 “구조적 인과성”이라는 개념이 어설프게 유사 구조주의에 근접했음을 인정하였다. “결여된 원인” 혹은 부분에 대한 전체의 특수한 효능을 생각하기 위한 이러한 노력들 속에서 모든 것이 헛된 것은 아니었다.
*주){{ Ibid., p. 177}}
“사람들이 우리를 구조주의자라고 비난하는 것이 뭐 그리 중요한가”라고 알뛰세르는 항변한다.
의심의 여지없이, 논쟁의 단순화이다. 그러나 결합은 결합관계가 아니다. 발리바르가 역사의 냉혹한 의미를 사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우연의 필연성”*주)을 사고하기 위해 헤겔의 표현적 총체성에 대립하는 절합된 구조를 이용하는 것으로 이해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반면에 그는 어떻게 반인간주의적, 반역사주의적 관심이 논리적으로 그 시기의 구조주의적 지배 이데올로기와 교차하고 타협해야 했는지를 설명하지 않는다.
*주){{ Etienne Balibar, Préface à la réédition de Pour Marx, Paris, La Découverte, 1996}}
“모든 값싼 인간주의적 요소”를 맑스주의 철학에서 제거하겠다고 선언한 과제는 1967년 정통 맑스주의 진영을 동요시키고 약간의 타격을 입혔다. 이러한 과제는 알뛰세르가 맑스의 “인간주의의 결여”로 명명한 것을 사변적인 인류학의 유혹과 대립시키는 것임에 따라 명백한 정당성의 몫을 지니고 있다. 『신성가족』(1845)과 『독일이데올로기』(1846)는 사실상 고전적 역사철학에 대한 명백한 단절을 의미했다. 이러한 단절이 일관성을 갖기 위해서는 사변적인 인류학의 유산과 명백한 정리를 해야 했다. 그 때까지 모든 것은 잘 되었다.
따라서 알뛰세르는 철학적 프로그램의 거대한 획을 그었다. 소외, 주체, 인간은 이러한 장치의 포로가 된 유일한 긍정적 개념, 즉 “(주체와 인간으로부터 해방된 주체 없는 과정이 되는) 과정의 개념에 길을 열어주기 위해 제거되어야 할”*주1) 세 가지 인류학적 개념이었다. 그러나 그는 인식론적 단절에 걸맞게 시술적인 방법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독일이데올로기』 속에서 이루어진 단절은 그에게 이미 더 이상 명료하지 않은 듯했다. 칼날이 미끄러졌다. 우리는 맑스처럼 “장황한 헤겔주의” 속에서 함정에 빠질 위험이 있었다. 공개적으로 야유 섞인 비판을 받은 인간(Homme)은 “이론의 뒤곁에” 잠복한 채로 남아 있었고, 여전히 역사화된 개인을 철저하게 짓누르고 있었다.*주2)
*주1){{ "La querelle de l'Humanisme", op. cit., p. 468}}
*주2){{ Ibid., p. 481.}}
칼(Karl), 맑스(Marx)가 되기 위해 또 한번의 노력을!
알뛰세르는 오점도 재발도 없는 완벽한 단절을 추구하며 저작의 흐름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인류학적 개념들과 『자본』의 기나긴 생성과정 속에서 정립된 새로운 개념적 장치에 따른 이들의 변화에 대한 정밀한 비판 대신에 그는 이러한 개념들을 깨끗하게 제거해 버리고자 했다. 간단히 그렇게 단정하고 싶었으리라.*주1) 무시해도 좋을 정도의 남아있는 “잔재”를 증거로 내세우며 이론적 인간주의의 구성적 범주들이 정치경제학 비판으로부터 사라졌음을 주장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외개념이 물신주의와 사물화에 결합되어 있는) 『그륀트리쎄』와 『자본』에서 소외개념의 재출현은 의미심장하다.*주2) 문제설정의 변화가 인류학적 개념에서 비판적 개념으로 전환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주체 및 인간 개념들은 인류학적 인간주의와 구별되는 역사적 인간주의의 의미 속에서 재정립된다. 이러한 결정적 전환을 포착하지 못하면, 떳떳하게 내세운 “이론적 반인간주의”는 스탈린적인 냉정한 관료적 이성뿐만 아니라 마오주의적 근본주의의 뒤늦은 폭발과도 양립할 수 있는 아주 실천적인 반인간주의로 환원될 위험이 있을 것이다.
*주1){{ 참조. Voir Roman Rosdolsxy, Genèse du Capital, Edition de la Passion에서 출간 예정.}}
*주2){{ 1968년부터 『자본』 뿐 아니라 『그룬드리쎄』와 로드돌스키를 읽었던 만델(E. Mandel)은 그 중요성을 『맑스의 경제사상 형성』(Paris, Maspero, 1968) 속에 잘 표현했다. 세브(L. Sève)는 알뛰세르가 소외나 부정의 부정 개념들이 맑스의 후기 저작에서는 사라졌다고 판단한 잘못된 신념을 상기시킨다.(in "Althusser et la dialectique", Althusser philosophe, Paris, PUF, coll. Actuel Marx, 1997) }}
하지만, 이러한 우려되는 일방성에도 불구하고, 인류학적 반인간주의에 대한 비판은 맑스를 넘어 “맑스주의”를 떠나지 않았던 사변적 역사철학의 비판에 풍부한 전망을 열어 주었다. 『자본읽기(꺽쇠)』의 서론에서, 알뛰세르는 “이성에 대한 모든 목적론을 포기하고 조건들에 대한 결과의 역사적 관계를 표현관계가 아닌 생산관계로서 인식하는 책무를 정의한다. 즉 고전적 범주 체계와 어울리지 않으며 이러한 범주들의 대체를 요구하는 경구, 우연의 필연성을 따르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주) 이 프로그램은 매개작용과 시간성의 차이를 수용하는 “지배적인 것에 절합된 총체성”을 위해 헤겔의 표현적 총체성을 거부하는 것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 왜냐면, 변증법적 과정으로서 헤겔의 역사개념을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손상시킨 것은 바로 “기원에서부터 이미 목적을 추구하기 때문에 목적론인, 구조 자체 내에 존재하는 변증법에 대한 그의 목적론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주){{ Louis Althusser, Lire le Capital, I, Paris, Maspéro, 1965, p. 55}}
이미 『신성가족』에서부터 묘사된 역사에 대한 세속적인 개념화는 반대로 이러한 사전에 세워진 목적성의 거부를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개념화는 더 이상 경험적이지 않은 “즉 평범한 의미에서 역사적”이지 않은 역사에 대한 개념을 요구한다. 따라서 경험적 시간성 및 “시간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개념”과의 모든 타협으로부터 역사이론을 해방시키는 것이 문제가 된다. 왜냐면, 거기에 바로 “우리로 하여금 현실적 대상과 인식대상의 혼동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현대 역사주의의 기저”가 있기 때문이다. 역사는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역사이론은 “우연을 통하여 길을 여는 필연성”과 같은 경구의 공허함을 극복하기 위해 할 일이 남아있다.
이러한 이론적 프로그램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 낡은 철학적 의식들을 정리한 후 맑스는 “역사에 대한 새로운 글쓰기”의 기초를 세우는 정치경제학 비판에 집중하기 위해 더 이상 역사 개념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러나 명백한 체계적 개념화의 결여로 최후의 심판의 대리인처럼 참혹한 기억의 심판과 함께 불순한 역사적 이데올로기가 세속화 과정에서 스며들었다.*주)
*주){{ Daniel Bensaid, Qui est le Juge ? Pour en finir avec le Tribunal de l'Histoire, Fayard, 1999 }}
그러나 알뛰세르는 역사이성의 비판을 위한 귀중한 지표들을 제공하였다. “나는 기원과 발생의 쌍에 의해 형성된 엄밀한 의미를 수용한 기원과 발생의 개념들은 그 근본이 종교적이라고 생각한다.”*주) 모든 발생이 발육된 개인은 생성과정의 기원부터 프로그램화되었다는 것을 전제할 때, 그것은 더 이상 발생의 변증법이 아니라, 새로운 어떤 것이 자율적인 방식으로 기능하기 시작하는 출현의 변증법이라는 특수한 변증법을 설명하는 것이다. 교조적 구조주의라는 비난과 명백한 모순을 이루는 이러한 비판은 역사에서처럼 정신분석학에서 사실사건적 돌출을 온전히 인정하는 것이다. “극단적인 경우에, 발생의 사상은 우리가 사전에 확인한 동일인의 발전 속에서 변동과 불연속성으로서 변동과 불연속성을 적시할 수 있다는 절대적 조건하에서 변동과 불연속성의 사고를 아주 잘 지탱한다.”
*주){{ Louis Althusser, "Lettre à D..."(1966), in Ecrit sur la Psychanalyse, Paris, Stock, 1993, p. 65}}
일반적으로 맑스에게 부여하던 발생적 이데올로기와는 반대로 그리고 “인식의 발전 과정을 현실적 발전과정”*주1)으로 착각하는 회고적 환상과는 반대로, 알뛰세르는 “봉건적 생산양식이 자신의 친자로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발생시킨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그것은 “아주 정확한 특정 요소들의 만남과 결합으로부터 발생한다.” 여기서 “역사적 출현의 (혹은 사건의) 비발생론적 이론”*주2)을 정립해야할 필요성이 나온다. 특히 그것의 종교적 함의가 창조를 연상시키는 기원이라는 개념을 거부하는 것이다. (여성억압처럼 자본주의의) 기원의 문제들은 천박한 유물론이 발생의 범주에서 역사를 사고하는 것에 집착하였기 때문에 더욱 더 중요하다. 이 개념은 “가장 커다란 인식론적 장애물 중의 하나”로 나타난다. 그것은 역사학에서처럼 심리학에서도 커다란 폐해를 가져왔다.
*주1){{ Ibid., p. 87}}
*주2){{ Louis Althusser, "Sur Feuerbach", op. cit., p. 217}}
따라서 구조주의적 유희는 무엇보다도 생성에 대한 이러한 강박관념을 어설프게 제거하고자 했을 것이다. “물론 나는 구조에서 생성을 제거했다; 나는 이 끊임없는 비판을 감수할 것이다. 나는 그것에 대해 답변하지 않을 것이다.”*주1) 진화론적 혹은 발생론적 환상에 반하여, “생산양식은 그 자체에 잠재적으로 그를 계승할 생산양식을 배아로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는 “발생의 형태를 갖지 않은 과정의 결과”이다. 발생은 구약성서의 “genuit”를 연상시킨다. 계승은 계보(filiation)가 아니다. 이러한 결정적인 구별을 행하면서 우리는 역사를 잃는 것이 아니라 “분명 생성을 잃는 것이며 그것은 바람직한 상실이다.”*주2)
*주1){{ "La querelle de l'Humanisme", op. cit., p. 517}}
*주2){{ Ibid., p. 519}}
이러한 근본적인 비판은 기원과 종말에 대한 모든 의존을 봉쇄한다. 반대로 헤겔에게 있어 내재성 속에서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종말은 숨겨진 초월성으로 존재한다. 자기자신의 급진성이 그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신학적 경험론을 거부하는 알뛰세르는 “관념의 발전과정의 변증법적 연속성이 드러나는 연속”*주1)으로 인식된 시간과의 단절로서 역사적 시간성을 묘사한다. 그는 현재성과 역사적 현재라는 또 다른 견해를 내놓는다. 헤겔철학에서, “전체의 모든 요소들은 동일한 현재에 항상 공존하며 따라서 동일한 현재 속에서 각각은 동시대적이다.” 그의 역사에 대한 이러한 접근은 “본질의 단층들”에 의해 작동된다. 이러한 현재는 모든 지식의 절대적 지평을 구성한다. 현재는 현재적 현상들의 미래효과에 관련된 모든 전략적 지식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알뛰세르에게 “가능한 헤겔적인 정치”*주2)가 없는 이유이다.
*주1){{ Louis Althusser, Lire le Capital, tome II, Paris, Maspéro, 1965, p. 39}}
*주2){{ 베르나 부르좌(Bernard Bourgeois)가 알뛰세르와 헤겔(in Althuser philosophe, op. cit.)이란 글에서 반박하는 것.}}
그는 역사 속에 작동중인 시간성의 중복과 교차를 확인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구조화된 전체의 개념으로서 역사의 개념을 구성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역사적 동시대 속에서 전체의 상이한 수준의 발전과정을 사고”하는 것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각각의 수준에는 “특정한 방식으로 분할된 고유한 시간”이 조응하며, 이러한 시간과 역사의 특수성은 차이가 있다. 따라서 『자본』을 “상이한 시간들의 얽힘”으로 읽을 수 있으며, 위기들을 그것들의 부조화의 효과라고 해석할 수 있다.*주)
*주){{ Lire le Capital, II, op. cit., p. 47 }}
『독일 이데올로기』가 주체의 범주를 유지하고 “주체의 역사주의” (역사에는 하나 또는 여러 주체들이 있다)에 의존하고 있는데, 인류학적 철학적 역사비판은 결정적인 개념적 정복으로 귀결된다. 이 점이 알뛰세르가 헤겔에 대한 맑스의 부채를 인정한 유일한 것이다. 맑스는 헤겔에게 “과정에 대한 결정적인 철학적 범주”를 빚지고 있다. 그리고 “그는 그 이상의 빚이 있다”. “주체 없는 과정”이라는 개념.*주)
*주){{ "La querelle de l'Humanisme", op. cit., p. 453 et 474.}}
기원에 대한 “출현”의 대립처럼, 주권적 주체의 고전적 표상에 대한 비판은 정신분석학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나에게 주체 개념은 점점 그것이 구성하는 유일한 이데올로기적 담론에 속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말장난이나 심각한 이론적 동어반복 없이는 과학의 주체나 무의식의 주체라는 말을 할 수 없으리라 믿는다.”*주) 이데올로기적 의미에서 역사를 “만드는” 개인과 마찬가지로 과학의 주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알뛰세르는 「존 루이스에 대한 답변」에서 이 점을 강조한다. 역사를 만드는 것은 인간들이 아니라 대중들이다.
*주){{ "Trois notes sur la théorie des discours", in Ecrits sur la psychanalyse, op. cit., p. 165}}
우리가 여전히 말할 수 있는 주체는 더 이상 역사의 주체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의 주체이다. 따라서 그 단어를 포기하고 그보다는 심리학적 의미를 덜 내포한 행위자(agent) 혹은 담지자(support, Träger)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1968년 (「맑스와 헤겔의 관계에 대하여」)과 1973년(「헤겔 이전의 레닌」)의 텍스트에서 형성된 “주체도 종말도 없는 과정”이라는 개념은 기원도 최후의 심판도 없는 역사의 세속적 개념과 맥이 통한다. 반면에 “과정”은 “동력”과 비의도적인 역학, 즉 계급투쟁의 역학을 지닌다.
따라서 “주체 없는 과정”이라는 범주는 중심이 된다. 알뛰세르에게 이 범주는 아주 단순하게 변증법적 유물론을 규정한다. 이 범주는 “과학의 원리를 제공”할 수 있는 개념의 철학을 위해 의식의 철학과 단절한다. “발생론적인 필연성은 활동의 필연성이 아닌 변증법의 필연성이다.”*주)
*주){{ Louis Althusser, Sur la logique et la théorie de la science}}
작업은 훌륭하지만 갑자기 끝난다. 그 벽은 헤겔적 정치의 불가능성 못지 않게 알뛰세르 정치의 불가능성과도 무관하지 아니다. 역사주의와 인간주의에 대항하여 자신의 논쟁의 도약에 의해 승리한 알뛰세르는 마침내 “설탕의 인식이 달지 않은 것처럼 역사에 대한 인식은 결코 역사적이지 않다”*주)는 기이한 실증주의적 정리에 도달한다. 만약 그것이 짖는 개와 짖지 않는 개라는 개념의 스피노자적 구별을 문제삼는 것이라면 그것은 진부한 것이다. 만약 역사인식에 정밀과학의 객관성이라는 이상을 적용시키는 문제라면 그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역사인식은 모든 “인문과학”들처럼 분명 역사적이다. 주체와 객체의 통일성에 기반한 이러한 비판적 사고는 역사인식에 아주 본질적이다.
*주){{ Louis Althusser, "Machiavel et nous"(1972-1986), in Ecrits phlosophiques et politiques, II, p. 55}}
우리는 쉽게 주체 문제를 떠날 수 없다. 알뛰세르는 이 점에 관해 프로이드의 발견을 참조한다. “프로이드는 단일한 본질 속에서 개인인 현실적 주체는 자신과 의식 또는 존재에 집중된 에고(ego)의 형상을 갖지 않으며, 인간적 주체는 자신의 상상적 인식, 즉 그가 인정하는 이데올로기적 조직 속에서만 중심을 가질 뿐인 구조에 의해 구성되고 분산된다는 것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주1) 만약 주체 개념이 분석을 견디지 못한다면, “모든 담론은 주체성의 효과를 발생시킨다.” 모든 담론이 필연적인 파생물로서 “효과들 중의 하나 아니면 그 기능의 주요한 효과인 주체”*주2)를 갖는 것이다. 만약 담론이 주권적 주체의 언표가 아니라 주체화의 장소라면, 왜 그것은 동일한 역사를 갖지 않는가? 그리고 왜 개인들은 이 “과정” 속에서, 모로(P.-F. Moreau)의 표현에 따른다면*주3), “주체가 될 것을 요청받지” 않는가?
*주1){{ Louis Althusser, "Freud et Lacan", in Positions, Paris, Editions sociales, 1982, p. 21 et 26}}
*주2){{ "Trois notes...", in Ecrits sur la psychanalyse, op. cit..}}
*주3){{ Pierre-François Moreau, "Althusser et Spinoza", in Althusser philosophe, op. cit., p. 86}}
이것은 바로 루쎄(B. Rousset)가 주장하는 것으로, 그에 따르면 이성의 주인이자 자기 역사의 창조자인 주권적 주체라는 인류학적 개념의 포기는 스피노자적 내재성으로서 주체-생성, 즉 “전적으로 상대적인 이유에서 아주 현실적인 주체의 출현인 주체 없는 과정”*주1)의 포기를 내포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론적 반인간주의가 반드시 행위를 위한 담론으로서 역사적 인간주의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류와 보편성은 더 이상 추상적 실체가 아니라 모든 것을 발생시키는 투쟁을 통한 구체적인 생성들이다.*주2)
*주1){{ Bernard Rousset, "La question de l'humanisme", ibid., p. 151}}
*주2){{ “우리는 스피노자주의자였다”는 알뛰세르의 선언에 루세(B. Rousset)는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윤리』(Ethique)의 독해에서 그가 환상으로서 신비화를 인간주의의 뿌리로 간주하는 이러한 주체-생성의 확인 또는 오히려 수용하기까지 하면서 그가 스피노자주의 그 이상이 아니었던 것이 무엇이 있는가 ... 그가 자제하지 못한 것은 주체를 다르게 사고하는, 즉 주체를 해방활동으로서 사고하는 것의 불가능성이다.” }}
1972년의 자아비판은 알뛰세르의 작업에서 전환점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그것은 연속성의 대부분을 배제하지 않은 부분적 “단절”일 뿐이다. 그 역시 이 점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따라서 신중하게 “자아비판의 요소들”에 대해 말하며 엄격한 제한으로 시작한다. “나는 나의 글들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것을 할 곳은 없다.” 그는 단지 이러한 글들이 이후 “이론주의”로 인정되고 명명된 “잘못된 경향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는 것만을 인정한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현실적 위협에 대항하여 맑스주의를 옹호하기”를 너무 바랬기 때문에, “그의 혁명적 독창성”을 너무나 보여주고 - 요컨대 용서할만한 죄 - 싶었기 때문에, 그는 “일반적으로 과학과 이데올로기의 사변적 대립 형태로 진리를 오류와 대립시키는 단절의 합리주의적 해석”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실제 계급투쟁은 없었다.”
「존 루이스에 대한 답변」은 그것들을 치유하려는 시도이다. “(그의) 이론주의적 경향의 부산물, 구조주의의 애숭이가 우리에게서 빠져나갔다”*주1)는 것은 전력을 다해 구상한 과학과 철학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1972년 알뛰세르는 “구조주의 용어와의 모호한 유희”를 인정한다. “무슨 말을 할지 몰라 맑스주의 과학이 다른 것들처럼 과학이 아니라는 것을 의심하면서, 우리는 결국 맑스주의를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이론주의의 위험에 다시 빠지며, 과학으로서 다루었다. 하지만 우리가 구조주의자는 아니었다.”*주2)
*주1){{ Eléments d'autocritique, op. cit., p. 15 et 53}}
*주2){{ Ibid., p. 64}}
그러나 이러한 자아비판의 “요소”는 즉각 부채의 인정 형식으로 고백하는 두 번째 계획으로 넘어간다. “우리는 유달리 강한 집념을 가진 죄인들이었다. 우리는 스피노자주의자, 그것도 이단적인 스피노자주의자였지만 “이단적 스피노자주의자는 거의 스피노자주의에 속하고” 스피노자주의 그 자체는 역사에서 가장 거대한 이단의 교훈 가운데 하나이다.” 이것은 아주 정확한 것이다.
알뛰세르는 스피노자로부터 특이성에 대한 인식의 문제(이로부터 “정세”라는 되풀이되는 주제가 도출된다), 원칙으로서 인간주체에 대한 문제제기, 스스로에 대한 불투명성의 문제(이로부터 이데올로기라는 주제가 도출된다)를 취한다. 스피노자에 대한 언급을 세 번이나 고쳐 쓴 자서전에서, 그는 이러한 유산의 목록을 작성한다. “종교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탁월한 이론”; 자생적 이데올로기의 장르인 첫 번째 장르의 인식; 개별적, 보편적 객체의 인식으로서 세 번째 장르의 인식; 기원도 종말도 없는 “주체 없는 사상”이 나타나는 인식 이론; 마지막으로 “프로이드의 리비도에 대한 놀라운 예견”으로서 육체의 주체. 따라서 스피노자는 지속적으로 헤겔적 초월성에 대항하는 맑스의 가장 강한 원조자로서 등장한다. 자연의 과정적, 생산적 역능 속에서 존재-주체를 제거하는 것은 바로 스피노자로부터이다!
그러나 이러한 스피노자주의는 약점들을 갖는다. 그에게는 항상 헤겔이 맑스에게 물려준 것, 바로 모순이 결여되어 있다고 알뛰세르는 인정한다. 이러한 부재는 자신의 고유한 사상 속에서 “효력을 나타냈다.” 모순의 결여는 그의 사상 속에 명백하고 또 다른 결여를 설명한다. “나의 초기의 글들에서 본질적으로 결여된 것은 계급투쟁과 이론 속에서 계급투쟁의 효과이다.” 경미한 이론적 죄가 결정적인 정치적 죄가 된 것이다. 알뛰세르는 본질적인 것, 즉 그가 지속시키고자 했던 그 유명한 단절을 보다 잘 지키기 위해 “핵심을 바꾸어”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자서전은 망설임을 털어 버린 자아비판에 새로운 견해를 가져왔다. 그리고 한 더미의 새로운 “고백”. “나는 1964-1965년의 세미나에서 『자본』을 읽었을 뿐이다.” 아롱(Aron)이 “나를 ‘상상적 맑시즘’이라고 말한 것”은 전적으로 틀린 것만은 아니다. 알뛰세르는 “예를 들어 「새로운 비판」(Nouvelle Critique)의 글에서 1964년의 학생들을 거만하게 질책하면서” 아버지의 가부장적 역할을 했던 것을 후회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곧장 당에 대한 복종보다 이론에 대한 의무가 (내밀하게) 우선된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했던, 정상을 참작할만한 환경에 공감한다. 그는 이 텍스트가 자신을 “전율케 했으며” “1965년 『맑스를 위하여(꺽쇠)』에 포함되지 않도록 조심”*주1)했음을 인정하였다. 적어도 바로 이것이 부인된 글이다. 그는 1965년의 출판 이후 “극심한 정신쇠약”에까지 이르는 극도의 불안을 보였다. “내가 정치로부터 한 일이 무엇인가? 정치에 대한 하나의 순수한 사상.”*주2)
*주1){{ L'Avenir dure longtemps, op. cit., p. 189}}
*주2){{ Ibid., p. 162}}
당시에 우리가 그를 이해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결코 알뛰세르주의자였던 적이 없었던 이유이다.
자서전의 자아비판인 두 번째 자아비판은 때때로 굴욕적인 모습을 취한다. 우리는 그의 심리적 맥락을 이해하며, 여기서 발현된 비극적인 감정에 진심으로 동정을 갖고 있다. 발리바르는 거기에서 보다 심도 있게 “스스로를 정당화하거나 해체 나아가 파괴시키기 위해, 자아로 되돌아오는 경향”을 발견한다. 후회하는 죄인의 모멸감 속에서, 자기정당화가 없는 것은 아니다. 60년대의 “이론주의”는 당내에 이론적 개입을 가능하게 했던 필요한 간지에 속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맑스로의 회귀와 단절의 추구는 정통에 정통을 대립시키는 정교한 전략인 것이다. 요컨대 마키아벨리적 술수였다! 측근중의 측근이었던 발리바르는 이러한 음모론적인 설명 앞에 자신의 당혹감을 토로한다.
알뛰세르의 이론적 여정을 실패한 하나의 작업 - 자신에게는 고통이 따르는 - 으로 읽는 것이 보다 그럴듯하고 아마도 보다 풍부할 수 있을 것이다. “해후의 유물론”에 대한 그의 후기 글들은 이러한 실패한 노력의 값진 열매처럼 보인다. 이 글들은 회고적으로 여정, 자신의 “오류들”, 자신의 미 발표문과 삭제분분들을 밝히고 있다.
거기에서 알뛰세르는 “거의 전부 알려지지 않은” 유물론적 전통을 주장하고 있다. “비, 일탈, 해후, 포착의 유물론”, 즉 아주 오랫동안 자유의 관념론으로 배척되고 왜곡된 “불확정성과 우연”의 유물론.*주) 화석이 된 구조는 태산을 침식하는 미세한 일탈, 클리나멘의 사실사건적 효과로 산산 조각난다. 바닥은 잔재들로 뒤덮였다.
*주){{ Louis Althusser, "Le courant souterrain du matérialisme"(1982), in Ecrits philosophiques et politiques, I, op. cit., p. 540}}
이 사건은 기원이 아니라 분출이다. 알뛰세르는 여기에서 기원에 대한 자신의 비판에 충실하다. “태초에 ... 있었다”가 아니라 단순하게 “.... 있다”. 그는 완강하게 우리가 나뒹구는 세계의 우연성을 수용하는 “있다”의 철학을 내세운다; 거기에서 역사는, “그 파기사건이 어디서 어떻게 일어나는지 사전에 전혀 알지 못한 채, 이행하기에 난해한 다른 사실에 의해 이미 이행된 사실의 지속적인 파기”*주)일 뿐이다.
*주){{ Ibid., p. 547}}
“정세”라는 해후의 정치적 개념을 마키아벨리에 의존하듯이, 우리는 해후의 숨겨진 유물론의 분출을 루소에게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양한 결정들의 통일성으로서 정세이론의 묘사는 알뛰세르를 사로잡았다. 그것은 사고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사고이다. “정세 속에서 사고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정세의 범주 하에서 정치적 문제를 사고한다는 것인가? 그것은 우선 모든 결정들, 모든 구체적인 상황들을 불리한 점을 미리 참작하고 비교하여 고려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사상은 에피쿠르스, 마키아벨리, 스피노자, 루소에 공통된 것이다. 그리고 맑스에게도 물론이다! “해후의 불확정성과 혁명의 필연성 사이에 찢겨진 지평 속에서 사고하도록 강요된” 하나의 맑스(un Marx)에게 공통적이다.
따라서 후기 알뛰세르에게 해후와 정세의 개념은 역사의 현실뿐만 아니라 정치의 현실과 투쟁 속에서 이들의 절합을 사고하는데 이용되었다. 여기서는 그가 제대로 방향을 잡았다. 정치와 역사 관계의 반전의 방향. 그는 벤야민처럼 역사적 논리의 추상에 대한 정치적 계기의 우위를 확정하는 데까지는 가지 않았다. 그는 유물론자를 “기차가 어디에서 오는지 어디로 가는지 모르면서 달리는 기차를 타는 사람”으로 정의하면서 “주체 없는 과정”이라는 자신의 개념으로 다시 돌아온다. 문구가 채플린식 절망적 유머의 강조법이다. 결국 알뛰세르는 그가 맑스의 것이라고 했던 모순, 해후의 불확정과 혁명의 필연성 사이의 균열을 그들 용어 중 하나를 단순히 제거함으로써 해결하려 했던 듯하다.
이전의 몇몇 텍스트에서 그는 맑스의 이론 속에서 필연성의 개념이 내세운 독창적인 내용을 강조하였다(그렇지만 맑스가 헤겔의 논리에 의존하고 있는 것을 인정함이 없이). 『맑스를 위하여(꺽쇠)』에서, 그는 엥겔스가 쿠르노의 방식대로 무수한 우연들 사이에서 자신의 길을 여는 우연성의 외부에 존재하는 운동으로서 필연성을 표현할 때, 엥겔스가 굴복했던 우연과 필연 사이의 추상적 관계를 비판하였다. 왜냐면, “우리는 이러한 필연성이 그 우연들의 필연성인지 그리고 만약 그렇다 할지라도, 왜 그런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주1) 반면에, “맑스의 사상은 역사적 필연성의 문제에 있어 목적성이나 운명의 목적성 혹은 생산양식의 위계적 질서의 메커니즘과는 무관한 매우 독창적인 지표들을 내포하고 있다”; 그는 “필연성을 방해하는 원인들 가운데 포착된 경향의 변증법”*주2) 속에서 필연성을 사고하였다.
*주1){{ Louis Althusser, Pour Marx, op. cit., p. 119}}
*주2){{ "Marx dans ses limites", op. cit., p. 452}}
알뛰세르는 우연과 필연성의 모순적인 통일성에 독창적 답변을 가져오는 “경향적 법칙”과 『자본』의 독창적 논리를 엿보고 있다. 「자기비판의 요소들」에서 그는 맑스가 “법칙의 내적 모순들”에 관한 장에서 개진한 개념의 낯설음에 대해 말한다. “경향(경향적 법칙, 경향적 과정의 법칙 등)이라는 맑스주의 이론의 결정적 개념의 특이한 위상에 대한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주1) 이 문제는 구조주의의 피상적인 비난에 맞선 자신의 항변을 정당화한다. 실제 그의 맑시즘은 경향 속에서 모순이 과정을 압도함에 따라 이 문제를 벗어난다. “필연성의 양식 혹은 예외로서 우연성을 사고하는 대신에, 필연성을 우연의 만남의 필연적인 형성으로서 사고해야 한다.”*주2)
*주1){{ Eléments d'autocritique, op. cit., p. 63}}
*주2){{ "Le courant souterrain du matérialisme", op. cit., p. 566}}
“해후의 유물론”에 대한 텍스트들은 작업과정 내내 거의 억제된 산만한 문제설정을 체계화하는 동시에 뿌리 깊은 모순을 해결하는 것 같아 보인다. 알뛰세르는 역사와 사건의 모순적 갈등을 더 이상 잘 지탱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이제부터 불확정성은 극복되고 사실적 사건은, 알뛰세르의 본능적인 표현에 따르자면, “일탈(clinamen)의 기적”처럼 순수 우연이 돌출될 위험을 무릅쓰고 역사적 결정으로부터 분리되는 것 같다. 따라서 우리는 구조주의적 비관주의가 의지의 순수한 낙관주의, 달리 말하면 주체의 의지주의로 전환되는 극적인 반전을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의 사상에 대한 저항은 1978년 실패인 동시에 해방으로서 알뛰세르 개인적 비극의 직전에 덮친 맑스주의의 위기의 일환이다. “결국 맑스주의의 위기가 터졌다. 드디어 맑스주의의 위기를 모두가 알게 되었다! 드디어 정정과 수정의 작업이 가능하게 되었다! 거기서부터 작업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알뛰세르에게는 이미 너무 늦었다. 위기의 폭발은 이론과 정치를 뒤엉키게 했다. 『수용소 군도』 이후, 가장 완강하던 부정은 “스탈린적 일탈”이라는 사소한 테제에 더 이상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이제 맑시즘을 이론뿐만 아니라 조직과 실천으로 이해한다고 말한다. “이 모든 공포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주)
*주){{ "Marx dans ses limites", op. cit., p. 362}}
그는 “맑시즘의 위기는 오늘날 맑시즘의 해방, 재탄생 그리고 전환의 시작이 될 수 있다”고 마지막 힘을 다하여 단정한다. 그러나 이 위기는 세브(L. Sève)가 신중하게 가정으로 제시한 “하나의 특이한 패러독스”를 드러냈다. “금세기 가장 강력한 맑스주의 사상가들 중 한 사람이 아주 정확하게 맑스주의자였던 적이 없었다.”*주1) 전제사항, 암시 나아가 청산사항이 많은 이러한 “아주 정확하게 맑스주의자인 자”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을 것이다. 자신의 종교적, 지적 형성과정에 의해서 알뛰세르는 되돌아오기에는 너무 멀리 가버렸다. 이상과 희망을 상실한 채 끝나버린 그의 미완의 여정은 정치를 “가능한 효율성 없는 불확실한 정치라는 막다른 길”*주2)로 이끌었다.
*주1){{ Lucien Sève, "Althusser et la Dialectique", in Althuser philosophe, op. cit., p. 134}}
*주2){{ Pierre Raymond, "Althusser et le matérialisme", ibid., p. 175 -178}}
알뛰세르의 자발적인 고독과 동의된 칩거는 그를 레이몽(P. Raymond)이 “바깥”이라는 부른 모든 것들, 즉 계급투쟁, 사회적 실천, 현실적 프롤레타리아, “철학의 바깥일뿐만 아니라 이론의 바깥”과의 접합과 만남을 불가능하게 했다. 그가 철학의 조건하에서 정치를 접근하고 철학에 직접적으로 정치적 기능을 서로 부여하는 것을 자제할 수 없었던 것은 이러한 이유이다. 철학을 과학으로부터 구별짓는 것은 정치와 맺는 철학의 유기적 관계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철학은 정치투쟁 내부에 직접적으로 개입하기 때문에 정치적이다.
일반이론 혹은 맑스주의 철학은 “과학적 지식과 이데올로기의 구별”*주1)이라는 특수한 대상을 갖는다. 그러나 이론에 의해 내세워진 실천은 “이론적 실천”으로 남았으며, 『아미앙에서의 주장(꺽쇠)』에서 요구된 “특정한 정세 속에의” 개입은 이론적 정세 속에서의 철학적 개입으로 남았다. “만약 내가 오늘 새로운 주장을 제안한다면. 철학은 결국 이론에서의 계급투쟁이며 그것은 바로 이들의 정확한 위치, 계급투쟁(최종심급)과 다른 사회적 실천(과학적 실천)을 철학과의 관계 속에 놓는 것이다.”*주2)
*주1){{ Louis Althusser, "Notes sur la philsophie"(1967 - 1968), Ecrits philosophiques et politiques, II, op. cit., pp. 301-302}}
*주2){{ Eléments d'autocritique, op. cit.}}
따라서 철학은 최고의 우군이다.
철학은 사실상 알뛰세르의 이론적, 정치적 벽의 비밀을 보유하고 있다. “우리가 스피노자주의자였던가?” 문제는 맑스에 의해 진행된 전환들을 담보함이 없이 남겨진 존재의 문제이다. “스피노자와 또 다른 이단자들?”*주) 알뛰세르는 이러한 이단의 점화선을 포착하였다. 「프로이드와 라깡」에서부터 그는 19세기의 세 사생아들의 탄생을 반겼다. 맑스, 니이체, 프로이드. 그는 서구적 이성이 이들에게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했다고 주장했다.
*주){{ 참조. Yirmyiahou Yovel, Spinoza et autres hérétiques, Paris, Seuil, 1993. 이 이단자들 가운데 프로이드와 맑스가 포함됨은 물론이다.}}
그렇게 말하면서, 물론 그는 자신을 생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