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balmas >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관계론적 해석 - 철학논구

이 글은 서울대학교 철학과에서 내는 [철학논구]라는 학술지에 실린 글입니다.

[철학논구]는 사실 뭐 엄밀한 의미로 보면 학술지라고 하기는 좀 어렵고,

대개 석박사 학위 논문의 요약문을 많이 싣는 간행물이죠.

실질적인 학술지는 [철학사상]이라는 다른 학술지구요.

이 글은 제 학위논문의 서론과 결론 내용을 대충 요약해서 만든 글입니다.

원고 마감일을 깜빡 했다가 하룻 저녁에 부랴부랴 만들었으니,

사실 독립적인 논문으로 볼 수 없는 글입니다.

그런데 왜 이걸 올리냐구요? 어떤 학생이 이 글을 돈 주고 인터넷에서 다운받았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검색해보니까 KSI라는 국내 학술 데이터베이스에서

3천원 넘는 가격으로 팔고 있더군요. 다른 사람들도 혹시 비싼 돈 주고 다운 받을까봐

겁나서 여기 올립니다.

돈 주고 다운받지 마세요. ^^;

 

 

철학논구, 33권, 단일호, 시작쪽수 83p, 전체쪽수 26p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관계론적 해석


Ⅰ.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전통적 해석: 범신론


다른 모든 철학들과 마찬가지로 스피노자의 철학 역시 해석의 역사, 그 영향의 역사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어떤 의미에서 스피노자의 철학은 그 해석의 역사, 영향사 안에서만 식별되고 존립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연구, 더욱이 그의 체계를 포괄적으로 재구성해보려고 시도하는 연구는 반드시 그 해석의 역사에 대한 재해석과 평가를 포함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 연구가 주장하는 관점의 독자성은 사실은 주관적인 오해와 착각에 머무르거나 아니면 이전에 제시되었던 이러저러한 해석을 진부하게 되풀이하는 함정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가 이 논문에서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관계론적 해석을 제안하면서, 범신론적 해석과 역량론적 해석이라는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두 가지 주요한 해석의 흐름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우리 논문의 본질적인 일부로 삼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전통적으로 스피노자의 철학은 범신론 철학으로 알려져 왔다. 곧 스피노자는 유대-기독교 전통에서 볼 수 있는 인격적인 초월신 개념을 거부하고 그 대신 자연 중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과 신을 동일시하는 철학 체계를 구축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범신론pantheism”이라는 용어를 고안하고 스피노자 철학을 범신론 철학으로 규정한 것은 18세기 초 영국의 종교개혁가였던 존 톨랜드John Toland였지만1), 이러한 규정은 레싱이 스피노자주의자인지 아닌지를 둘러싸고 전개된 프리트리히 하인리히 야코비Friedrich Heinrich Jacobi와 모제스 멘델스존Moses Mendelssohn의 논쟁을 통해 철학사적 영향력을 획득하게 된다.2) 야코비는 스피노자의 철학을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철학 일반과 동일시하고 다시 이를 기계론적 숙명론/허무주의/무신론과 동일시함으로써, 구원을 위해서는 철학이 아닌 신앙에 의지해야 한다는 점을 역설하기 위해 스피노자의 철학을 활용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야코비의 저서는 스피노자의 철학을 독일 철학의 중심부로 도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으며, 야코비가 규정한 스피노자의 범신론과의 대결은 이후 독일 관념론의 중심 화두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형성된 범신론으로서의 스피노자 철학이라는 관점은 독일 관념론의 영향력에 편승하여 19세기 이래 서양 철학사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다.3)

범신론적 해석은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스피노자 연구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지만,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는 그 이론적 영향을 상당히 상실했다. 범신론적 해석은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내재적이고 엄밀한 연구에 기반을 두고 있다기보다는 헤겔을 비롯한 몇몇 대가들의 (얼마간 편파적인) 독해에서 발원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러한 영향력의 쇠퇴는 어떻게 보면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이 여전히 대중적인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 데다가 우리가 뒤에서 살펴볼 역량론적 관점은 전체적으로 볼 때 범신론적 해석과의 대결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형성해왔기 때문에, 역량론적 해석의 이론적 입장을 좀더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범신론적 해석의 주요 특징을 검토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범신론적 해석은 세 가지의 이론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1. 실체의 부동성

범신론적 해석은 스피노자의 실체를 철학사에서 보기 드문 절대자에 대한 사변적 표현으로 간주한다. 곧 자신과 다른 타자들을 갖고 있지 않으며 다른 어떤 것으로부터 생산되지 않고 자기 자신에 의해 산출되는 자기원인으로서 스피노자의 실체는 순수한 실정성positivity의 개념 그 자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처럼 실체를 절대적으로 실정적인 존재자로 제시함으로써 동시에 그 대가로, 실체를 아무런 운동도 인과작용도 수행하지 않는 정태적 존재자로 간주하게 된다. 운동은 변화를 상정하며 변화는 타자성과 부정성을 전제하고 있는 데 반해, 이러한 실체는 절대적으로 실정적이라는 그 이유 때문에 아무런 타자성과 부정성도 지니고 있지 않으며, 이는 결국 실체를 정태적인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체는 절대적으로 실정적이면서도 아무런 운동, 아무런 변화도 수행할 수 없는 부동적이고 불활성적인 존재자라는 자기모순에 빠져 있다.4)


2. 유출론적 체계인 스피노자 철학

범신론적 해석은 이처럼 실체가 태초에 정립된 부동적인 절대자이기 때문에 스피노자 철학은 또한 유출론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간주한다. 이미 절대적으로 완성되고 충만한 실체가 존재하므로 남은 것은 이러한 실체로부터 내려오는 존재론적 하강의 운동뿐이라는 것이다. 가령 헤겔은 󰡔윤리학󰡕 서두에 나오는 실체(자기원인), 속성, 양태들에 대한 정의는 이러한 하강의 운동이 이루어지는 순서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곧 자기원인인 실체가 절대적으로 충만한 존재자를 가리킨다면, 속성들은 실체의 본질을 표현하는 주관적 관점(따라서 이미 실체에 대해 외재적이고 부차적인 관점)을 지칭하고, 양태들은 다시 이것들보다 훨씬 더 존재론적인 실재성을 결여한, 사실은 거의 아무런 실재성도 지니지 않는 존재자들을 나타낸다.


3. 양태의 비실재성과 주체성의 부재

이처럼 양태들이 존재론적 실재성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에 스피노자 철학에는 아무런 주체성의 여지도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을 비롯한 개별 존재자들은 자유는커녕 실재성을 박탈당하고 만다. 스피노자 철학에는 이중적인 측면에서 주체성이 부재한다. 우선 실체는 내적 부정성의 계기를 결여한 부동적인 존재자이기 때문에 주체로 간주될 수 없다. 또한 인간들은 자연의 필연적 질서의 일부에 불과하므로 자유의 가능성을 부정당하고 주체성도 결여하게 된다. 따라서 스피노자 철학은 데카르트의 사유와 연장, 정신과 신체의 이원론을 실체의 일원론을 통해 극복하려는 이론적 시도의 산물이지만, 데카르트가 확립해 놓은 주관성의 철학을 거부한 대가로 능동성과 자유의 여지를 전혀 남겨놓지 못한 것으로 간주된다.5)



Ⅱ. 범신론에서 역량론으로: 현대 스피노자 연구의 한 경향


스피노자 연구의 역사에서 20세기 후반은 매우 뜻깊은 시기로 평가할 만하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스피노자 저작의 고증본 전집들이 출간되면서6) 왕성하게 전개되었다가 2차 대전을 거치면서 거의 고사 직전에 이르렀던 스피노자 연구는 1960년대 이후 양적인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질적인 측면에서도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이는 일차적으로 마르샬 게루Martial Gueroult나 질 들뢰즈, 알렉상드르 마트롱Alexandre Matheron 같은 스피노자 연구의 대가들이 1968년-69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잇달아 스피노자 연구에서 한 획을 긋는 대작들을 출간하면서 가능해진 일이다. 이들은 각자 상이한 이론적 스타일을 지니고 있고 연구 주제에서도 차이를 지니고 있긴 하지만7), 󰡔윤리학󰡕을 비롯한 󰡔신학정치론󰡕과 󰡔정치론󰡕같은 성숙기의 대표작들을 중심으로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엄밀한 학문적 독해의 전통을 확립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이들의 선구적인 작업은 1980년대 이래 좀더 심화된 문헌학적ㆍ분석적 연구들로 계승되었고 더 나아가 새로운 스피노자 고증본 전집의 출간8)의 이론적 촉매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에서 현대 스피노자 연구의 기념비적 업적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범신론과 대비해 볼 때 이들의 이론적 특징은 다음과 같이 집약될 수 있다.


1. 역동적 원인인 실체

우선 이 관점은 스피노자의 신 또는 실체를 부동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범신론과 달리, 실체는 본질적으로 역동적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에 따르면 이는 󰡔윤리학󰡕이 “자기원인”에 대한 정의에서 시작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잘 드러난다. 더욱이 신은 무한하게 많은 실재들을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생산한다는 점을 증명하고 있는 1부 정리 16이나 신의 본질과 신의 역량을 동일시하는 1부 정리 34에서 신 또는 실체의 동역학적 본성은 좀더 뚜렷하게 나타난다. 따라서 범신론적 해석은 관념론과 어깨를 겨룰 수 있는 역동적인 실체의 철학인 스피노자 철학의 잠재력에 대한 (무의식적인) 두려움의 발로이자 체계적인 왜곡이라는 것이 이들의 평가다.9)


2. 유한 양태들의 존재론적 근거인 실체의 역량

그러나 이러한 신의 절대적 역량 때문에 양태들, 특히 독특한 실재들로서의 유한 양태들은 아무런 내재적 역량이나 능동성을 지닐 수 없는 것 아닌가? 범신론적 해석은 이런 이유로 스피노자의 철학을 유출론 철학으로 해석했다. 하지만 들뢰즈, 마트롱, 마슈레 등과 같은 새로운 스피노자 연구의 대표자들은 이러한 해석을 정면으로 거부한다. 왜냐하면 스피노자를 유출론의 철학자로 간주하기 위해서는 실체와 속성, 양태 사이에 상호 외재적인 관계가 성립해야 하지만, 스피노자 철학에서 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곧 속성들은 실체의 본질을 (객관적으로) 표현하며, 그런 한에서 실체와 외재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양태들은 실체 안에 존재하며, 바로 그런 이유로 실체에 대해 외재적이지 않다.

그리고 이들은 실체가 절대적인 인과역량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유한 양태들의 능동성이나 인과적 역량을 배제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의 존재론적 기초를 제공해준다고 주장한다. 가령 우리가 이 논문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다루게 될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철학을 “표현주의”로 규정하면서 이러한 해석의 가능성을 옹호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실체는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것”, 원초적이고 절대적인 역량을 아무런 제약 없이 표현하는 것이며, 각각의 양태들은 이러한 실체의 본질을 양태의 수준에서 이어받아 다시 표현한다. 곧 양태들은 각자 원인으로서 어떤 결과들을 생산해낸다(E I, p.36). 양태들이 지닌 이러한 능동성, 원인으로서의 역량은 그것들이 실체의 절대적인 역량을 표현한다는 사실에 존재론적으로 의거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실체의 절대적 역량, 원초적인 자기 표현은 양태들의 능동성을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가능하게 해준다는 것이 들뢰즈를 비롯한 역량론적 주석가들의 관점이다.


3. 윤리적ㆍ정치적 실천의 기초로서 역량

유한 양태에 속하는 인간의 윤리적ㆍ정치적 실천 역시 이러한 실체의 절대적 역량에 근거를 두고 있다. 범신론적 해석가들이 지적하듯이 스피노자에서 인간을 비롯한 모든 개별 실재들은 유한한 양태라는 지위를 부여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유한) 양태는 다른 것 안에 존재하고 다른 것에 의해 인식된다는 점에서(E I D5) 존재론적으로 비자립적이다. 하지만 범신론적 해석에서 생각하듯이 존재론적 비자립성이 실존과 행위의 차원에서 양태들의 자율성과 능동성의 여지를 박탈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존재론적 비자립성, 의존성은 양태들의 역량의 원천 자체가 된다.

들뢰즈와 마트롱을 비롯한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연구자들은 스피노자의 저작, 특히 󰡔윤리학󰡕 3, 4, 5부 및 󰡔신학정치론󰡕과 󰡔정치론󰡕 등에 대한 세심한 분석을 통해 이 문제에 체계적으로 답변하려고 시도했다. 이들의 논의의 요점은 인간은 자연적인 실존 조건 속에서는 수동적이고 예속적인 삶을 살아가지만, 원초적으로 부여받은 본질, 곧 자기 보존의 역량(스피노자의 “평행론” 또는 심신 동일성론에 따를 경우 이는 신체의 행위역량이면서 동시에 정신의 인식역량이다)에 의거하여 이러한 조건을 개선해나갈 수 있다는 점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이 주석가들은 우리의 행위 역량을 증대시키는 기쁨이라는 정서와 이러한 역량을 능동적인 역량으로 구성할 수 있게 해주는 “공통 통념notio communis”이라는 개념에 큰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다.

요약하자면 1960년대 말 이후 새롭게 전개된 스피노자 연구는 이전의 범신론적 해석에 맞서 스피노자는 범신론 철학자가 아니라 “역량의 철학자philosophe de la puissance”10)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하여 우리는 이들의 입장을 “역량론puissantialisme”으로 부르고자 한다. 역량론이라는 명칭은 우리가 고안해낸 것이 아니라 프랑스의 스피노자 연구자인 앙드레 토젤André Tosel이 최근 한 논문에서 사용한 것이다. 그는 근대 초기 신학-정치론의 구도를 소묘하고 이러한 구도에서 스피노자의 입장이 지닌 독창성을 해명하는 과정에서 스피노자 철학의 입장을 역량론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에 따르면 스피노자의 역량론은 신인동형론에 기초를 둔 인격신 개념을 해체하면서 무한하게 많은 무한한 속성들로 구성된 자기원인으로서의 실체 개념을 이론적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11) 토젤은 역량론을 스피노자 자신의 철학적 입장으로 간주하고 있지만, 이는 사실은 1960년대 말 이후 전개된 새로운 스피노자 연구의 관점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역량론적 해석은 지난 30여년 동안 스피노자 철학 전반에 걸쳐 매우 탁월한 이론적 성과를 배출했다. 게루와 들뢰즈, 마트롱 같은 역량론적 해석의 창시자들 이외에도 피에르 마슈레, 에티엔 발리바르, 모로, 안토니오 네그리12) 같은 후배 연구자들이 80년대와 90년대에 걸쳐 이들의 작업을 좀더 정교하게 가다듬고 확장해왔으며13), 90년대 이후에도 재능 있는 신세대 연구자들이 계속 이들의 연구를 이어받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역량론적 해석은 스피노자주의의 역사에서 새로운 단계를 열어놓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14)


Ⅲ. 역량론적 해석의 난점들


하지만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역량론적 해석은 몇 가지 중요한 이론적 난점들을 지니고 있으며, 바로 이 때문에 자신이 공언하고 있는 것과 달리 스피노자 철학의 고유성을 충분히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여기서는 세 가지 측면에서 간략하게 지적해두겠다.


1. 초월성의 위험

역량론의 첫 번째 문제점은 스피노자의 실체 개념에 대한 해석에서 볼 수 있다. 역량론은 범신론에 맞서 실체의 역동성을 강조한다. 여기서 실체는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무한하게 많은 실재들을 생산하는 절대적인 역량을 지닌 것으로 나타난다(정리 16). 따라서 역량론이 󰡔윤리학󰡕 1부에서 자기원인(정의 1), 무한하게 많은 무한한 속성들로 구성된 실체(정의 6과 정리 11), 실체의 역량(정리 16과 정리 34) 등에 주목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하지만 여기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 보자. 자기원인에서 자기란 무엇인가? 자기 스스로 자신의 원인이 된다고 할 때, 이 자기는 어떻게 성립하는가? 이러한 자기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자신의 행위를 제어하는 존재자인가? 그러나 그렇다면 자기원인인 실체의 행위가 자의적이지 않게 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스피노자가 강조하는 실체의 행위의 필연성은 어떻게 성립하는가? 이러한 질문은 실체의 본질을 절대적 역량에서 찾을수록 더욱더 심각하게 제기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실체가 절대적인 역량이라면, 따라서 실체가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는 것이라면, 실체의 행위는 그만큼 자의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실체는 역량론적 해석가들의 주장과는 달리 일종의 초월적 존재자가 아닌가? 스피노자의 실체, 스피노자의 신은 외양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초월적인 신이 아닌가? 이러한 신은 유대-기독교 전통의 신 또는 데카르트의 신과 어떻게 다른가?

이러한 질문에 정확히 답변하기 위해서는 우선 스피노자에서 자기원인 개념의 의미와 기능이 무엇인지, 그것의 용법이 스콜라철학과 데카르트의 자기원인 개념의 용법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해명되어야 한다. 하지만 역량론적 해석가들은 실체의 역동성, 실체의 절대적 역량에 너무 주목한 나머지 이러한 문제에 대해 제대로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고 있다.

이는 실체와 속성들 사이의 관계라는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다. 역량론자들은 속성에 대한 주관적 해석가들과 달리 속성의 객관적 실재성을 긍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경우 표현과 구성의 관계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스피노자는 한편으로 속성들은 실체의 본질을 표현한다고 말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실체를 구성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표현과 구성의 관계는 무엇인가? 속성은 어떻게 실체를 구성하면서 또한 실체의 본질을 표현하는가? 들뢰즈나 마트롱 같은 역량론적 해석가들은 실체의 표현성, 곧 실체의 역동성을 구성적 측면보다 더 중시한다. 그러나 이 경우 실체의 자의성, 실체의 초월성이라는 문제가 다시 제기될 수밖에 없다.


2. 스피노자에게 인과관계는 이중적인가?

실체 개념에 대해 제기되는 이러한 의문은 실체와 양태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도 유사하게 제기될 수 있다. 역량론자들은 실체에 대한 양태들의 존재론적 의존성이야말로 양태들이 지닌 능동성, 원인으로서의 역량의 근거를 이룬다고 강조한다. 1부 정리 18(“신은 만물의 내재적 원인이지 타동적 원인이 아니다”)이나 정리 25의 따름정리(“신은 자기원인이라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또한 만물의 원인이라고 말해야 한다”) 또는 정리 36(“그 본성으로부터 어떤 결과가 따라 나오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등에서 이를 잘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양태들이 실체에 의존하는 존재론적 양상은 어떤 것인가? 어떤 관계, 어떤 메커니즘에 의해서 양태들의 존재론적 의존성이 양태들의 실천적 역량을 낳는 근거가 되는가? 이 문제에 대해 역량론자들은 상당히 모호한 태도를 보여준다. 그들은 1부 정리 18에 나오는 두 가지 원인 개념, 곧 내재적 원인과 타동적 원인 개념에 의지하여 스피노자의 인과성 개념을 이중적인 것으로 해석한다. 먼저 신과 양태의 본질 사이에 존재하는 내재적 인과성이 존재하며, 다른 한편 양태들 사이에, 양태들의 실존 사이에서 성립하는 타동적 인과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후자가 양태들 사이에 존재하는 수동적, 갈등적, 예속적 관계의 존재론적 뿌리를 이룬다면, 전자는 이러한 수동성에서 벗어나 능동성을 얻을 수 있게 해주는 존재론적 기초가 된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한편으로 너무 편의적인 해석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우선 이 경우 스피노자의 내재적 인과성과 데카르트의 인과성 사이의 차이점이 정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데카르트 역시 피조물들의 행위의 제일 원인은 신이며 피조물들은 신의 역량에 의해서만 운동을 수행할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스피노자와 달리 물체들의 내재적인 인과 역량을 부정하고, 이를 오직 신에게만 돌리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스피노자의 양태들, 특히 연장에 속하는 물체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인과 역량을 지닐 수 있는가? 신과 양태적 본질들 사이에는 내적 인과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답변은 순환논법 그 이상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재적 인과성과 타동적 인과성(곧 양태들 사이의 작용 인과성)을 구분하고 양태들의 본질과 실존을 분리하는 역량론적 관점에서는 이러한 답변을 넘어설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러한 해석은 스피노자의 철학과 갈릴레이-뉴턴이 확립한 근대 물리학과의 이론적 관계를 제대로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에 따르면 운동의 상대성은 순전히 타동적인 인과성을 구현하기 때문에, 이러한 이론에 기초를 둘 경우 운동의 동역학적 원인을 사고하는 게 불가능해진다. 하지만 󰡔데카르트의 철학원리󰡕나 󰡔윤리학󰡕 2부 정리 13 이하에 나오는 자연학에 관한 논의를 꼼꼼히 검토해보면, 스피노자는 정확히 운동의 상대성 개념에 기초를 둔 동역학적 인과성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내재적 인과성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 자연학과 단절하는 운동의 상대성 또는 외재적 인과성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전제할 경우에만 가능한 것임에도, 역량론적 관점은 이 두 가지 개념 사이의 내적 연관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난점은 개체의 개체성에 대한 관점에서도 나타난다. 가령 들뢰즈는 개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운동과 정지의 관계” 이외에 또다른 본질인 “역량의 정도”(신의 본질의 양태적 표현)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곧 전자가 본질의 양적 측면을 나타낸다면 후자는 질적 측면을 (또는 전자와 후자는 각각 외연량과 내포량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양자 사이에는 정확히 어떤 관계가 성립하는가? 들뢰즈는 “양태의 본질은 하나의 관계 속에서 영원하게 표현된다” (Deleuze 1969, p.191)고 말하고 있을 뿐, 어떻게 본질과 관계 사이에 서로 상응이 이루어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3. 예속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실체 개념에 대해, 또한 실체와 양태 사이의 관계에 대해 역량론이 보여주는 모호성은 인간학과 윤리학의 영역에서도 나타난다. 여기서는 두 가지 점만 지적해두자.

첫째, 역량론적 해석은 수동성에서 능동성으로의 이행이라는 문제를 충분히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 역량론은 이러한 이행을 설명하기 위해 존재 역량의 증대를 나타내는 기쁨이라는 정서와 적합한 인식의 일종인 “공통 통념”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충분히 동의할 수 있는 점이다. 문제는 그보다 좀더 기초적인 데서 생겨난다. 우선 역량론적 해석가들은 스피노자가 말하는 능동과 수동 개념의 특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스피노자에서 능동과 수동은 각각 적합한/전체적 원인과 부적합한/부분적 원인으로 정의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원인의 두 양상 내지 두 측면을 가리키며, 유한 양태들은 외부 물체와 맺고 있는 변용하기/변용되기의 관계를 통해 역량을 획득한다. 따라서 스피노자에게는 수동=변용되기, 능동=변용하기가 아니며, 능동과 수동은 변용을 조직하는 두 가지 관계의 양상들이다.

하지만 역량론자들의 가정에 따르면 양태들은 수동력과 능동력이라는 별개의 힘을 갖고 있는데, 이는 그들이 인과성을 내재적 인과성과 타동적 인과성으로 분리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귀결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수동력은 우리의 능동적 힘 자체의 유한성이나 제한에 불과하며,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긍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곧 그들이 변용=수동은 아닐지 몰라도 적어도 변용되기=수동이라는 생각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그렇다면 능동은 외부 실재들과 아무런 변용의 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것, 또는 외부 실재들로부터는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고 다만 우리만이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외부의 규정 없이 자기 스스로 원인이 되어 모든 것을 결정하고 실행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그러나 이 경우 능동성은 자연적 인과관계에서 벗어남 또는 그것을 초월함을 의미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능동성은 스피노자가 가상 중의 가상으로 간주하는 “자유의 가상”과 어떻게 다른가? 이처럼 능동과 수동 개념에 대한 정확한 해명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수동에서 능동으로의 이행이라는 문제에서도 불명료함과 애매성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둘째, 또한 이 때문에 역량론은 왜 스피노자에게 자유는 본질적으로 관계적인 형태를 띨 수밖에 없는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역량론적 해석에 따르면 각각의 개인들은 관계와 독립적인 본질을 지니고 있으므로, 원칙적으로 개인들의 자유 역시 타인들과의 관계에서 독립적으로 얻어질 수 있다. 물론 각 개인의 자유가 다른 사람들의 자유와 양립할 수 있고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의 자유를 촉진할 수 있다면 더 좋은 일이겠지만, 다른 사람들의 자유가 각 개인의 자유의 본질적인 구성 요소가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윤리학󰡕 3부 정리 59의 주석에서 “굳건함animositas”과 “관대함generositas”을 정신의 힘, 곧 정신의 능동성의 본질적인 요소로 제기한 이래, 각 개인의 자유와 지복은 항상 다른 사람들의 자유와 지복을 수반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역량론적 관점에서는 왜 자유와 지복이 이러한 관계적 형태를 띨 수밖에 없는지 충분히 해명하기 어렵다.



Ⅳ. 관계론적 해석의 요소들


이처럼 역량론적 해석은 그것이 이룩한 업적과 여러 가지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또한 여러 가지 해석상의 난점들을 지니고 있다. 더 나아가 이러한 난점들은 단지 이런저런 이론적 보충이나 정정을 통해 해소할 수 있는 것들이라기보다는 스피노자 철학 전체를 해석하는 관점으로서 역량론이 지닌 내적 한계와 결부되어 있다. 따라서 역량론이 이룩한 이론적 성과를 보존하면서 그것이 지닌 난점들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역량론과 또다른 해석의 관점이 필요하다. 우리는 이 논문에서 이러한 관점을 관계론이라는 명칭 아래 제시해보려고 시도했다. 우리가 제시한 논점들은 다음과 같이 집약될 수 있다.


1. 스피노자의 존재론에 대한 관계론적 해석

우선 관계론적 해석은 스피노자의 철학, 특히 그의 존재론은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듯이 실체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우리는 자기원인과 실체, 속성, 양태 및 인과성과 개체성 같은 스피노자 존재론의 주요 개념들이 어떻게 관계론적으로 해석될 수 있고, 또 해석되어야 하는지 보여주려고 했다.


(1) 스피노자 존재론의 탈실체론적 성격: 자기원인, 실체, 속성

스피노자에서 존재하는 것은 신이라는 유일한 실체일 뿐이며 나머지 모든 것은 이 유일한 실체의 양태들에 불과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이유로 스피노자를 실체론의 철학자로 간주하는 것은 잘못이다. 정반대로 이는 근본적인 탈실체론적 (반실체론이라고 할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테제로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오직 신만이 유일한 실체이며, 오직 실체만이 존재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실체는 하나의 존재자로 간주될 수 없으며,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데카르트 또는 라이프니츠에 이르는 실체론의 공통적인 논점, 곧 존재하는 모든 것(그것이 개체이든, 유한한 실재이든)은 실체들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을 성립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자기원인은 스피노자 철학의 이러한 탈실체론적 성격을 잘 보여주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전통적으로 스피노자 철학의 실체론적 성격을 대표하는 상징처럼 간주되어 왔다. 범신론적 해석은 이 개념이야말로 스피노자의 실체가 부동적이고 실정적인 절대적 일자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고 간주한 반면, 역량론적 해석은 여기에서 스피노자 철학의 역동성의 근거를 발견한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입장은 자기원인을 궁극적인 근거로 간주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러나 󰡔윤리학󰡕의 텍스트를 꼼꼼히 검토해보면 이 개념은 스콜라철학이나 데카르트의 경우와는 달리 비신학적인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자연의 인과 작용을 “자기”의 재귀적 구조와 분리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기원인은 초월적이거나 외재적인 근거를 요구하지 않는 자연의 자립성을 넘어 있음 그 자체로서의 자연의 익명적인 인과성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스피노자의 실체 개념 역시 탈실체론적이며 비재귀적인 성격을 보여준다. 실체에 대한 해석의 근본 쟁점은 실체와 속성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의 문제다. 속성의 주관성과 실체의 단순성을 주장하는 범신론과 달리 역량론은 속성들의 실재성을 긍정하며, 속성들을 실체의 본질을 객관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역량론(특히 게루와 들뢰즈)은 속성들과 실체 사이에 존재론적 위계 관계를 설정함으로써, 여전히 실체를 속성들을 통합하는 일종의 기체로 간주하고 있다.

하지만 스피노자의 실체가 초월적인 것이 아니라 내재적인 것이라면, 이러한 실체의 내재성은 실체가 무한하게 많은 무한한 속성들로 구성된다는 사실에서 성립한다. 곧 신 또는 실체는 속성들의 집합, 속성들의 관계 전체와 다르지 않으며, 속성들보다 존재론적으로 상위의 실재가 아니다. 신 또는 실체는 속성들 전체와 다르지 않다는 스피노자의 주장은 바로 이런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스피노자의 실체가 함축하는 이러한 구성적 성격 또는 관계론적 특성을 간과할 경우, 역량론이 강조하는 실체의 절대적인 역량, 실체의 자기원인적 특성은 실체의 초월성 또는 적어도 실체의 재귀성(再歸性)(따라서 실체의 주체성)의 이론적 알리바이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스피노자의 존재론이 내재론적이라면, 이는 그것이 관계론적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2) 실체와 양태의 관계: 변용과 연관의 인과이론

실체와 양태들 사이의 관계에서도 이러한 관계론적 특성은 관철된다. 스피노자에서 실체-양태 관계는 일의적으로 인과관계로 표현되며, 따라서 이 관계에 대한 해석의 쟁점은 인과성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다. 내재적 인과성과 타동적 인과성을 분리하는 역량론적 해석과 달리 관계론적 해석은 내재적 인과성과 타동적 인과성을 대립시키거나 분리해서는 안되며, 양자 사이에는 이론적 연속성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스피노자의 인과이론은 갈릴레이가 정초한 운동의 상대성 개념을 전제하고 있으며, 이를 양태들의 인과 역량과 결합시킴으로써 새로운 동역학을 위한 형이상학적 토대를 제공해준다.

스피노자의 인과이론을 떠받치고 있는 두 가지 핵심 개념은 “연관”(connexio 또는 concatenatio)과 “변용affectio”이라는 개념이다. “연관”은 스피노자 저작에서 널리 사용되지 않기 때문에 그동안 연구자들에게 별로 주목받지 못한 개념이지만, 스피노자 인과이론의 관계론적 특성을 해명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개념이다. “연관”은 스피노자의 인과성은 고립된 개체들 사이의 관계에 기초를 둔 인과성이 아니라, 처음부터 다른 실재들과의 관계를 함축하고 있는 개체들 사이에서 작용하는 인과성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곧 인과계열의 최초의 항을 전제하고 있는 목적론이나 기계론과 달리 스피노자의 인과성은 항상 이미 다수의 항들을 전제하고 있다.

“변용” 개념은 (유한) 양태들 일반을 가리키는 존재론적 명칭이면서 (유한) 양태들이 실존하고 작용하는 방식들을 가리키는 행위론적 개념이기도 하다. “변용”은 유한 양태들이 지닌 인과 역량은 “변용하기afficere”의 역량의 표현이며, 변용하기의 역량은 “변용되기affici”의 능력을 전제한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인과이론에서 변용 개념의 중요성은 역량론적 관점이 주장하는 것과 달리 유한 양태들의 인과 역량은 관계와 독립적인 개체들의 내적 본질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양태들이 다른 양태들과 맺고 있는 관계들로부터 비로소 형성된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연관과 변용 또는 변용의 연관이라는 개념은 역량론적 해석에 비해 스피노자의 인과성 개념이 지닌 일의성을 좀더 정확히 보여준다.


(3) 관계로서의 개체

스피노자의 개체론 역시 관계론적 해석이 지닌 이론적 우월성을 잘 보여준다. 스피노자의 개체 개념 및 개체화 이론의 가장 큰 특징은 (“개체”의 어원의 함축과 달리) 개체를 분할될 수 없는 원초적인 실재로 간주하지 않고 관계를 통해 성립하는 합성체로 간주한다는 점에 있다.

역량론적 주석가들은 스피노자의 개체 개념의 이러한 특성을 비교적 충실하게 이해하고 있으나, 인과이론에서 볼 수 있는 것과 유사한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게루나 마트롱, 들뢰즈 또는 마슈레 같은 역량론의 대표자들은 한편으로 스피노자에서 개체는 운동과 정지의 관계를 통해 구성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가장 단순한 물체들”을 일종의 원자와 같은 실재의 가장 기초적인 단위로 이해하거나 아니면 개체의 본질은 양적 측면(곧 “관계”)만이 아니라 또한 질적 측면(“역량의 정도”)을 지니고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역량론적 주석가들은 인과성만이 아니라 개체에 대한 해석에서도 개념의 일의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

스피노자에서 개체들은 부분들 사이에서 작용하는 운동과 정지의 관계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개체들은 이러한 운동과 정지의 관계 이외의 다른 본질을 갖고 있지 않다. 코나투스 내지 욕망으로 표현되는 인간 개인들의 본질 역시 관계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인간을 비롯한 유한 양태들은 다른 양태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비로소 자신의 개별성, 자신의 본질을 얻으며, 이러한 관계를 통해서 실존한다.

개체들을 구성하는 부분들 사이의 관계 및 개체들이 다른 개체들과 맺는 관계 이외에 별도의 개체의 본질을 설정하게 되면, 스피노자의 인과론과 개체론 사이의 내적 연관성이 제대로 해명되지 않을뿐더러 개체들이 지닌 실존과 행위 역량의 원천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수동성에서 능동성으로 이행하는 데서 실천적 동력으로 작용하는지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존재론과 인간학, 윤리학 사이의 이론적 일관성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개체를 관계론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2. 스피노자의 인간학에 대한 관계론적 해석

1부에서 전개된 이러한 논의는 자기원인과 실체에서 개체에 이르는 스피노자의 존재론이 일관되게 관계론적 관점에 입각해 있음을 잘 보여준다. 2부에서 우리는 어떻게 관계론이 인간학의 영역에서도 관철되고 있는지 해명하려고 했다.


(1) 상상적 관계: 스피노자 인간학의 모체

상상적 관계라는 개념은 2부 전체의 논의에 대해 이론적 모체를 제공해준다. 스피노자의 인간학은 상상적 관계 또는 (라캉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상상계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그의 윤리적 기획의 핵심을 이루는 수동성에서 능동성으로의 이행은 상상적 관계의 양면성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인간학의 가능성에 주목하지 못한 범신론적 해석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인간학에 관한 논의에서 역량론적 해석의 맹점 중 하나는 스피노자에서 상상 개념이 지닌 중요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스피노자의 상상 개념은 동시대의 철학자들과 비교해볼 때, 인간의 삶 전체의 외연을 설정해주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그 특징과 독창성을 찾을 수 있다. 곧 스피노자에게 상상은 단순히 인식론적인 기능(그것도 부정적인 기능)만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자연 안에서 인간의 고유한 세계를 형성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스피노자에게 상상은 특정한 인지적 능력facultas을 형성하기 이전에 집합적인 관계의 의미, 곧 상상계의 의미를 가진다.

집합적인 관계로서 상상계는 이중적인 특징을 지닌다. 이는 한편으로 인간의 삶의 자연적 조건을 구성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목적론적 편견과 미신의 인간학적 뿌리를 이룬다. 상상의 자연성은 그것이 우리의 신체의 변용의 질서와 연관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가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한 벗어날 수 없는 삶의 조건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 근거를 두고 있다. 반면 상상의 가상성은 자신의 욕구는 의식하되 그러한 욕구를 산출한 원인들에는 알지 못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인간의 무지에서 유래한다. 하지만 상상이 인간의 자연적 조건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가상성은 단순히 오류로 치부할 수는 없으며,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인간의 삶의 조건 및 정서적 구조를 개조해야 한다. 그리고 이는 스피노자의 윤리적 실천의 핵심 목표가 된다.


(2) 인식과 정서: 수동에서 능동으로

이러한 상상의 양면성 위에서 스피노자의 인간학과 윤리학에 대한 논의가 진행된다. 스피노자에게 관념과 정서는 인간의 심리적인 활동의 두 축을 구성하며, 이는 수동성에서 능동성으로의 이행이라는 윤리적 기획에 따라 진행된다. 이 때문에 스피노자에서 독립적인 인식론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그릇된 시도다. 스피노자에서 인식의 문제는 부적합한 인식에서 적합한 인식으로의 이행이라는 과제, 곧 능동화라는 윤리적 기획의 일부로서만 존재한다.

이러한 이행의 핵심 계기를 공통 통념들의 형성에서 발견한다는 점에 들뢰즈를 비롯한 역량론 주석가들의 공적이 있다. 하지만 들뢰즈의 논의는 이중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 우선 그는 상상과 이성의 관계, 또는 1종의 인식에서 2종의 인식으로의 이행을 정확히 설명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공통 통념들은 상상적인 지각 능력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통 통념들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여러 실재들을 동시에 지각할 수 있는 상상의 능력에 기반하여 자연의 통상적 질서에서 벗어나 실재들 사이의 일치와 대립, 차이를 인식해야 한다.

둘째, 들뢰즈는 수동에서 능동으로의 이행에 대한 설명에서도 난점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그가 기쁜 정념의 역할을 강조할 뿐, 사람들을 수동적인 상태 속에 고착되게 만드는 정념적 구조에 주목하지 않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놀람이라는 데카르트의 개념을 변형시켜 이러한 고착이 일어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들뢰즈 해석의 한계는 궁극적으로 그가 스피노자의 수동과 능동 개념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다. 스피노자에서 수동은 변용 그 자체와 동일시될 수 없으며, 또한 능동은 외부 물체들에 의한 변용으로부터의 탈출로 간주될 수도 없다. 수동과 능동은 모두 일종의 원인이며, 문제는 부분적이고 단편적인 원인인 수동의 상태에서 전체적이고 유기적인 원인인 능동으로 이행하는 데 있다.


(3) 자유 개념에 대한 관계론적 해석: 신을 향한 사랑과 신의 지적 사랑

이렇게 해서 우리는 스피노자 철학의 궁극적인 주제인 윤리적 문제에 도달한다. 자신의 필생의 저작에 󰡔윤리학󰡕이라는 제목을 붙인 데서 알 수 있듯이 스피노자에서 윤리의 문제는 부차적인 주제가 아니라 철학적 기획 전체의 방향을 규정하는 쟁점이다. 특히 자유는   󰡔윤리학󰡕 5부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윤리적 실천의 중핵을 이룬다는 점에서,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관계론적 해석이 해명해야 할 주요 개념 중 하나로 간주될 수 있다.

스피노자 철학의 근본적인 윤리적 지향을 강조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해명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역량론적 해석의 중요성과 강점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들뢰즈나 마슈레 같은 역량론 해석가들은 스피노자의 자유 개념을 정확히 해석하지 못하고 있으며, 2종의 인식과 3종의 인식의 관계, 신을 향한 사랑과 신의 지적 사랑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도 충분한 설명을 제공해주지 못하고 있다.

스피노자의 자유 개념은 개인의 주체적인 행위라는 관점으로는 충실히 설명될 수 없다. 각각의 개인의 자유는 다른 사람의 자유를 조건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는 모든 개체는 자신의 부분들 사이의 운동과 정지의 관계 및 다른 개체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비로소 성립한다는 그의 존재론적 원리에서 일관되게 따라 나오는 결과이자, 자유를 저해하고 인간을 수동적이고 예속적인 조건에 묶어두는 가상적 조건들이 상호 개인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인간학적 조건의 귀결이기도 하다.

자유를 향한 스피노자의 윤리적 기획은 이중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우선 2종의 인식을 통해 각각의 개인들의 실존과 행위를 제약하는 상상적인 조건들을 해체하고 이를 신을 향한 사랑으로 대체하려는 운동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는 원인으로서의 신과 인간 사이의 분리를 전제한다는 점에서 충분치 못한 활동이다. 윤리적 기획이 온전히 완수되기 위해서는 각각의 개인의 윤리적 주체화의 활동을 다른 개인들과의 관계 맺음의 활동과 내적으로 연결시켜 주는 3종의 인식 및 신의 지적 사랑이 필수적이다. 신의 지적 사랑은 전통적인 신비주의 신학으로의 회귀가 아니라, 이러한 개인화와 사회화, 또는 주체화와 탈주체화의 이중적인 운동이다.



Ⅴ. 논문의 실천적 함의


마지막으로 우리 논문의 실천적 함의에 대해 몇 가지 지적해두기로 하자. 범신론적 해석과 역량론적 해석의 차이점은 단순히 이러저러한 주제들에 대한 해석상의 차이로 환원되지 않으며, 스피노자 철학의 전체적인 성격 및 지향에 대한 관점의 차이를 함축하고 있다. 범신론적 스피노자 해석이 윤리적 실천이나 사회적 문제들에 무관심한 사변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스피노자 상을 만들어냈다면, 반대로 역량론적 해석은 스피노자를 (마르크스 또는 그 이외의 다른 몇몇 이단적인 철학자들과 더불어) 가장 전복적이고 혁명적인 철학자들 중 하나로 제시한다. 이 점에서는 특히 안토니오 네그리가 가장 일관적이고 철저한 입장을 보여주고 있지만,15) 사실 그 이전에 이미 알튀세르나 들뢰즈 또는 알렉상드르 마트롱 등과 같은 철학자들 역시 스피노자 철학을 혁명적인 철학으로 제시했다. 곧 스피노자는 철학사에서 보기드문 이론적 혁명을 수행한 철학자일 뿐만 아니라 혁명적 실천에 영감과 동력을 제공해준다는 점에서도 혁명적이라는 것이다.16)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마슈레가 스피노자 사후 3세기에 걸친 스피노자주의의 역사를 개괄하면서 20세기의 스피노자주의를 “정치적 스피노자주의”라고 부른 것은 일리가 있는 평가라고 할 수 있다.17)

우리가 이 논문에서 제시한 관계론적 해석 역시 그 나름대로의 실천적 함의를 지니고 있다. 물론 관계론은 역량론이 제시하는 비판적이고 실천적인 스피노자의 상을 거부하지 않으며, 그것을 온전히 긍정하고 수용한다. 다만 관계론은 역량론적 해석이 함축하는 막연한 낙관주의와 그것이 자칫 빠져들기 쉬운 이론적 인간주의의 위험성을 경계할 뿐이다. 스피노자의 철학이 현재의 이론적 작업에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다면, 이는 스피노자가 자율적인 지적ㆍ정치적 역량을 갖춘 혁명적인 주체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든가 욕망과 기쁨의 무조건적 긍정성을 주장했다든가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실체나 주체, 인과성, 개체, 상상, 합리성과 비합리성, 능동과 수동, 자유 등과 같은 근대 철학의 주요 범주들과 더불어 이러한 범주들에 기초를 두고 있는 국가, 사회계약, 주권, 대표, 복종, 지배와 예속, 시민, 민주주의 등과 같은 정치학의 개념들을 쇄신할 수 있는 이론적 기초, 곧 관계론적 관점을 제공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스피노자 철학의 독창성과 현재성을 찾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소묘해본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관계론적 해석은 지난 1960년대 이래 좌파의 이론적 작업과 정치적 방향설정에 많은 영향을 끼쳐온 역량론적 해석에 대한 자기비판과 자기쇄신을 위한 이론적 모색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관계론이 함축하는 실천적 의미들 중 몇 가지 주요 측면만을 지적해두기로 하겠다.


(1) 관계론적 해석은 스피노자 철학에서 사회적 관계에 대한 설명을 위한 한 가지 이론적 모델을 발견한다. 지난 1960년대 이래 알튀세르나 들뢰즈, 또는 네그리 같은 철학자들은 이미 스피노자 철학을 원용하여 현대 사회를 분석하는 독창적인 이론적 작업을 수행한 바 있다. 이러한 작업은 많은 이론적 성과를 배출했고 현재에도 사회과학 분야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관계론적 해석은 이들의 작업을 계승하되, 이를 좀더 일관된 관계론의 기초 위에서 정정하고 확장할 수 있는 길을 제공해줄 수 있다. 가령 알튀세르의 구조 인과성 개념은 스피노자의 철학, 특히 그의 존재론의 범주들에 직접 의지하고 있는 개념이며, 󰡔자본론󰡕에 대한 이해나 자본주의의 구조에 대한 분석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다(Althusser et al. 1996 참조). 하지만 이 개념은 전체와 부분 또는 구조와 요소들 또는 구조와 정세 같은 구조주의적인 통념들에 많이 의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과성 자체에 대한 이해에서도 상당한 모호성을 보여주고 있다. 관계론적 관점에서 이 개념을 다시 해석하고 정련한다면, 구조인과성 개념이 지닌 이론적 잠재력을 좀더 풍부하게 드러내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구조주의 철학의 이론적 핵심을 새롭게 사고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다.


(2) 현대 스피노자주의의 주요 경향 중 하나는 욕망을 결핍으로 간주하는 관점에 맞서 스피노자를 긍정적인 욕망의 옹호자로 동원하는 데 있다. 특히 들뢰즈(ㆍ가타리)나 네그리 계열의 이론가들에서 볼 수 있는 이런 경향은 스피노자 철학을 역량론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에 기초를 두고 있다. 하지만 이는 이론적으로 충분치 못하며 생산적이지도 못하다. 무엇보다도 이는 스피노자의 철학을 또다른 주체의 철학, 관념론적 전통이나 라캉 계열의 정신분석학적 전통에 맞설 수 있는 유물론적 주체의 철학으로 간주하게 될 위험을 안고 있다. 그러나 이는 결국 스피노자 철학을 일종의 프로이트-마르크스주의를 위한 이론적 전거로 활용하려는 시도를 낳을 뿐이다.

스피노자가 욕망의 긍정성을 옹호했다면, 이는 원리나 전제로서가 아니라 과정이나 결과로서 그런 것이다. 곧 스피노자가 옹호하는 욕망의 긍정성이나 능동 정서는 인간, 더욱이 “개인”으로서의 인간(이는 실제 개인 주체일 수도 있고 집단적인 개인 주체일 수도 있다)이 선험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본질이 아니라, 개인적인 실천과 집합적인 투쟁의 상호 관계 속에서 형성하고 획득해야 할 목표를 의미한다.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스피노자의 윤리적 실천에 고유한 특징인 개성화와 사회화의 이중운동이 지닌 한 가지 형태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욕망이나 정서의 긍정성 또는 능동 정서의 가능성에 대한 옹호는 욕망이나 정서 일반에 대한 관계론적 인식과 분리되어서는 안된다. 관계론적 관점에서 욕망과 정서 개념을 이해할 경우에만, 심리적인 범주들을 개인의 차원에 한정하지 않고 구체적인 제도적 관행이나 상호개인적(또는 “관개체적(貫個體的)transindividual”) 행위의 차원과 결합하여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도 역량론은 관계론으로 대체되거나 적어도 보충되어야 한다.


(3) 정치철학적인 관점에서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관계론적 해석의 의미는 반계약론적 정치철학의 가능성에 대한 모색으로 표현될 수 있다. 스피노자는 사회계약론을 국가를 사고하기 위한 이론적 모델로 받아들이지 않은, 서양 근현대 정치철학 전통에서 매우 드문 철학자 중 한 사람이었으며, 이는 그의 철학의 관계론적 특성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는 󰡔신학정치론󰡕이나 󰡔정치론󰡕에서 모두 나타나는 경향이지만, 특히 󰡔윤리학󰡕의 이론적 성과를 반영하고 있는 󰡔정치론󰡕에서 좀더 원숙하게 표현되어 있다.18)

네그리는 이런 점에 주목하여 스피노자를 (마키아벨리와 더불어) 반자유주의적인 정치이론을 위한 이론적 지주로 삼고자 했으며, 이를 대표하는 것이 유명한 “다중multitudo”이라는 개념이다. 그의 관점에 따르면 다중 개념은 독특하고 자율적인 개인들의 연합 또는 공통의 연관망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제국에 맞서 해방의 정치, 혁명의 정치를 사고하기 위한 이론적 기초를 제공해준다. 그러나 󰡔신학정치론󰡕의 정치적 분석이 잘 보여주듯이 스피노자는 혁명적 정치가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정치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주체(개인적 주체이든 집단적 주체이든)라는 범주를 알지 못했다. “다중” 또는 “대중들”19)이라는 개념 역시 집합적 주체를 가리킨다기보다는 국가의 법적 구성의 존재론적 한계를 가리키거나 또는 정치적으로 양가성을 지닌 국가의 자연적인 기초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관계론적 관점에서 볼 때 스피노자 정치학의 의미는 그가 새로운 정치적 주체를 제시했다거나 국가 바깥에 존재하는 혁명적인 정치적 실천의 공간을 보여주었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스피노자 정치학의 중요성은 계약론에 의거하고 있는 자유주의적인 정치나 반계약론적이되 혁명적인 주체의 가능성에 의지하고 있는 (고전) 마르크스주의적인 정치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이론적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찾아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법적 이데올로기에 근거를 두고 있는 계약론적 모델에 맞서 관계론적 문제설정을 제안하고 있는 미셸 푸코의 몇몇 저작20)이나 알튀세르의 몇 가지 지적들은 스피노자 철학의 반계약론적 성격을 현대 사회에 대한 분석에 원용할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들을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좀더 보완하고 발전시킬 만한 가치가 있는 작업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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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____(2004a), 「역자 해제: 피에르 마슈레의 스피노자론에 대하여」, Macherey 2004.

______(2004b), 「󰡔신학정치론󰡕에서 홉스 사회계약론의 수용과 변용: 스피노자 정치학에서 사회계약론의 해체 I」, 󰡔철학사상󰡕 제19집.

______(2005), 「대중들의 역량이란 무엇인가: 스피노자 정치학에서 사회계약론의 해체 II」, 󰡔트랜스토리아󰡕 제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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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ac, Sylvain(1989), Spinoza en Allemagne, Klincksieck.


1) 톨랜드의 생애와 사상에 대해서는 Champion 2003 참조.

2) “범신론 논쟁Pantheismusstreit”이라고 불리는 이 논쟁의 주요 텍스트들을 묶은 선집으로는 Scholz & Müller 2004(초판은 1916)를 참조. 이에 관한 주석으로는 Zac 1989를 참조할 수 있다.

3) 헤겔을 비롯한 독일 관념론 철학에서 스피노자 수용에 대한 상세한 연구로는 Vaysse 1994; Macherey 2004 등을 참조할 수 있다.

4) 독일 관념론에서 스피노자 수용이 물론 이러한 범신론적 해석으로 모두 환원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셸링은 다른 철학자들에 비해 스피노자 철학, 특히 실체 개념을 중심으로 한 그의 존재론에 대해 훨씬 호의적이었고, 또한 훨씬 세심한 독해자였다. 이러한 경향은 초기 저작인 󰡔철학의 원리로서 자아󰡕에서부터 말년의 저작인 󰡔계시의 철학󰡕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관철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셸링의 스피노자 해석은 우리가 뒤에서 말할 역량론적 해석의 이론적 원천 중 하나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셸링과 역량론적 해석 사이의 이론적 연관성에 대한 검토는 매우 흥미있는 주제이지만, 이는 별도의 논의에서 다루어볼 생각이다. 셸링의 스피노자 해석에 대해서는 특히 Vaysse 1994를 참조할 수 있다.

5) 한편 관념론적인 입장과 달리 유물론의 노선에서 스피노자의 범신론은 “은폐된 유물론” 내지 무신론의 한 형태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유물론자들은 스피노자의 정치철학에서 나타나는 민주주의적인 경향을 높이 평가했다. 유물론의 역사에서 스피노자에 대한 평가에 대한 고찰로는 Tosel 2005 참조.

6) Van Vloten & Land. ed., Benedict de Spinoza Opera quotquot reperta sunt. La Haye, 1883-1884; Carl Gebhardt ed., Spinoza Opera. Heidelberg, 1925.

7) 게루는 󰡔윤리학󰡕 1부와 2부에 대한 매우 정밀하고 풍부한 주석서 두 권을 남겼으며, 철학사 연구의 학문적 규범에 가장 충실한 사람으로 평가할 수 있다. 반면 들뢰즈는 스피노자 철학의 문자에 충실하면서도 매우 독창적인 입장(“표현주의”로서 스피노자 철학)에 따라 체계 전체를 재구성하고 있다. 마트롱은 두 사람과 달리 스피노자의 정치학에 대한 “구조주의적” 독해를 통해 스피노자의 정치학과 철학 체계 전체의 관계를 엄밀하게 연역해내고 있다.

8) Pierre-François Moreau의 감수 아래 간행되고 있는 새로운 스피노자 전집은 8권으로 기획되었으며, 2005년 현재 󰡔신학정치론󰡕과 󰡔정치론󰡕 2권이 출간되었다(PUF 출판사).

9) 이 점에 대해서는 특히 Macherey 2004 참조.

10) 이 표현은 피에르-프랑수아 모로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지만(Moreau 1975), 이들의 공통적인 지향을 표현하는 데 적절한 용어라고 볼 수 있다.

11) Tosel 2001 참조.

12) 네그리는 이탈리아 출신의 이론가지만, 프랑스 주석가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또한 그 자신이 프랑스에서 활동하면서 역으로 프랑스 연구자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감안하면, 다른 프랑스 주석가들과 한데 묶어도 무방할 것이다.

13) 물론 이들의 작업을 “역량론”이라는 명칭으로 모두 포괄하는 것은 무리다. 이들이 매우 다양한 관심과 입장을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들 중 일부 주석가들은 역량론적 관점을 비판하고 이를 넘어서기 위한 이론적 노력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역량론적 관점과 관계론적 관점이 갈등 상태에서 혼재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14) 20세기 후반 프랑스 스피노자 연구의 동향에 대해서는 진태원 2001; 2004a를 참조하기 바란다.

15) 이는 네그리의 주요 스피노자 연구서의 제목들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유럽의 스피노자 연구에 큰 영향을 끼친 그의 주저의 제목은 󰡔야생의 별종L'Anomalia selvaggia󰡕(1981)이었으며, 그 이후에 출간된 또다른 스피노자 연구서의 제목은 󰡔전복적 스피노자Spinoza sovversivo󰡕(1992)였다.

16) 알튀세르는 󰡔“자본”을 읽자󰡕(1965)에서 스피노자를 “철학사에서 전례없는 이론적 혁명”을 이룩한 철학자이며, “마르크스의 직접적인 선조”로 간주될 수 있는 유일한 철학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마르크스를 위하여󰡕와 󰡔“자본”을 읽자󰡕는 이러한 주장을 증명하기 위한 시도로 간주될 수 있다. 또한 들뢰즈는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뒷면 소개글에서 스피노자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철학에 대한 통상적인 정의들은 스피노자에게 제대로 적용되지 못한다. 그는 루크레티우스나 그 이후의 니체 말고는 견줄 만한 사람이 없을 정도로 철학을 근본적인 해방과 탈신비화의 기획으로 인식했으며, 파문과 증오를 불러일으킨 고독한 사상가였다.” 마트롱은 󰡔스피노자에서 개인과 공동체󰡕에서 제 3종의 인식에 의해 가능해진 지적ㆍ윤리적 공동체를 “현자들의 공산주의”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17) Macherey 1992 참조.

18) 스피노자 정치학의 반계약론적 입장에 대해서는 진태원 2004b; 2005 참조.

19) 이는 “multitudo” 개념에 대한 두 가지 가능한 번역어들이다. 네그리의 입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multitudo” 개념을 “다중”이라고 번역해서 사용하는 반면, 발리바르는 이 개념의 가장 좋은 불어번역어로 “masses,” 곧 “대중들”이라는 용어를 제시한 바 있다.

20)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특히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가 중요한 작업이다. 또한 󰡔감시와 처벌󰡕이나 󰡔성의 역사 1권󰡕의 몇몇 언급들도 시사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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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탄 돌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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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태섭 | 진보교육연구소 사무국장
우리 사회엔 누구나 다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명문대학 진학을 보장하는 '특별한' 학교의 배제성이다. 즉 그런 학교의 존재 자체보다, 누구에게나 입학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데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 초등학교 6학년을 대상으로 영어면접과 에세이로 신입생을 선발하는 청심국제중학교 학생들은 부모의 직업부터 남다르다. 우리 사회의 경제활동인구 가운데 의사의 비율은 약 0.7% 가량인데 비해, 청심국제중학교 학생의 학부모 가운데 의사의 비율은 15%에 가깝다. 민족사관고를 비롯한 자립형사립고의 경우엔 학부모 중 의사의 비율은 10%로, 평균적으로 봐도 이 특별한 학교 학생들은 보통 이상의 집단임을 알 수 있다. 서울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신입생 아버지의 직업분포를 조사한 결과, 관리·전문직의 비율이 50%에 육박하여, 우리 사회 전체 관리·전문직 비율의 3배에 가깝다. 이 불온하기 짝이 없는 조사결과를 놓고 저마다 이러쿵저러쿵 입방아를 찧어댔으니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처럼 누구나 쉬쉬하는 비밀 아닌 비밀이 되어버렸다.
그 덕분인지 아니면 나름의 위기감의 발로였던지, 지난 한 해 정부 개혁정책의 모토는 '양극화 해소'였다. 그 실체조차 불분명한 양극화를 잡겠다고 빈곤대중들에겐 독 묻은 사탕을, 고소득층에겐 각종 혜택을 베풀던 꼴사나운 모양을 보아왔던 마당에, 대선을 앞두고 있는 올해 역시 양극화가 인기 있는 이슈로 각광받을 생각을 하니 심사가 여간 뒤틀리는 게 아니다. 양극화가 통상 중간층의 해체와 빈곤층의 확대를 의미한다면, 중간층 기대심리를 활용한 표심(票心) 잡기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사회 불안요소를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대선주자로선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을 게다.
그 양극화 호들갑이 교육분야에서도 예외 없이 나타나고 있는 바, 지난 한 해 몇몇 언론들이 교육양극화 현상을 다루면서 사회적 문제로 부각되기도 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 몇 년 동안 학계에서 교육양극화나 불평등의 실태를 보여주는 실증적 연구물이 많이 생산되었고, 덕분에 항간에 나돌던 '개천의 용'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그야말로 까발려졌기 때문이다.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라야 이것도 능력이라면 할 말 없지만 성공한 인생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대중들 스스로 잘 알고 있다. 부모의 학력이 높고 전문직에 종사하며, 거주 지역 내에서 질 좋은 교육정보망과 인맥을 가꾸며 아이들과 상시적으로 상담과 대화를 하며, 아이들로 하여금 높은 포부수준을 꿈꾸게 할 때 '명문대'에 들어갈 확률이 높다는 것은 이제 상식에 속한다. 대중들은 '능력에 따른 기회의 평등'이란 교과서적인 문구를 이제 더 이상 믿고 따르지 않는다. 못난 부모 탓을 하며 그토록 혐오해왔던 (육체)노동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아이들이 있는 반면, 잘난 부모 덕에 남들보다 앞서 출발하여 먼저 결승점에 다다르는 아이들도 있다.
왕자가 왕자가 되고 거지가 거지가 되는 이유는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부모를 비롯한 환경 때문이라는 사실을 <왕자와 거지>는 이미 19세기에 풍자하고 있다. 중세시대를 지탱해온 순수 혈통 이데올로기가 치기 어린 소년들의 장난 앞에서 깡그리 무너져 버리지만 역설적으로 타고난 핏줄이란 관념이 인생의 향방을 결정한다는 의미심장한 통찰을 던져준다. 한번 상상해보라. 만일 왕자와 거지가 서로 역할을 뒤바꾸지 않았다면, 그들은 자신의 미래가 온전히 자신의 능력 여하에 달린 것이 아니라 부모 탓이라고 생각이나 했겠는가.
왕자가 왕자가 되고 거지가 거지가 되던 당시에는 가족과 교회가 그랬겠지만, 근대 이후 개인을 사회적 존재로 호명하는 역할을 담당한 기구는 단연 학교다. 누구나 신분, 인종, 성(性)에 관계없이 교육기회가 주어지고 능력에 맞게 사회적 역할을 부여한다는 믿음은 적어도 100년 동안은 큰 흔들림 없이 유지되어왔다. 하지만 그 믿음이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는 지금은 분명히 이데올로기 국가기구가 위기에 처해있는 상황이다. 경제적 불안과 더불어 국가기구의 위기는 대중들을 상당한 불안과 고통으로 내몰지만, 이는 오로지 사적(私的)인 문제로 환원되어 대중들이 더욱 격한 경쟁에 뛰어들게 만든다. 분노의 화살은 교사와 학교의 실패로 돌려지며, 모순의 폭발은 봉합·지연된다. 지배계급의 입장에서야 이 시한폭탄과 같은 문제를 최대한 지연시키며 다른 사람에게 넘기거나 아예 기폭장치를 해체하고 싶을 터. 저쪽에서 폭발을 최소화하거나 무장해제하기를 기다릴지, 대중들이 능동적으로 폭파 스위치를 누르게 될지, 문제는 이미 던져진 셈이다.
월간 사회운동(http://www.movements.or.kr/main/index.p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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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호모 사케르' 미등록 이주노동자 /고병권

 

이탈리아 미학자 조르지오 아감벤은 주권의 본성을 잘 드러내는 존재로 '호모 사케르(Homo Sacer)'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호모 사케르란 말 그대로는 신성한 인간을 뜻하지만, 실제로는 범죄를 저질렀거나 어떤 불결함을 지녔기에 신성한 제단에 바칠 수 없는 존재였다. 로마 시대의 기록에 따르면 '호모 사케르를 희생물로 삼는 것은 합법적이지 않지만 그를 죽이는 자가 살인죄로 처벌받는 건 아니다'라고 되어 있다. 호모 사케르를 죽이는 건 종교적으로든 정치적으로든 권장되지 않지만, 그들을 죽였다고 처벌받는 건 아니다. 그래서 호모 사케르는 그 사회가 시민에게 부여하는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한 채 단지 숨 쉬는 생명체로, 날것의 인간으로 살아간다.

불행히도 우리 사회에 이런 호모 사케르들이 존재한다. 대표적인 예가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다. 현재 전체 이주노동자의 반인 20만 명 정도가 불법체류자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어떤 범법 행동을 해서가 아니라 합법적으로 부여된 시간(3년)이 넘었거나, 지정된 공간(작업장)을 이탈했기 때문에 불법 신분이 된 사람들이다.

사실 산업체에서는 이들 노동력을 필요로 한다. 게다가 오래된 이주노동자일수록 한국어가 능하고 숙련도도 높기 때문에, 불법인 줄 알면서도 이들을 고용하고 있다. 그런데 산업적 신분으로는 엄연히 존재하는 이들이 정치적 사회적 신분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 자체가 불법이기 때문에, 이들은 어떤 시민권도 보장받지 못한다. 임금 체불을 당해도, 작업장에서 폭력을 당해도, 이들은 경찰서나 노동부를 찾아갈 수 없다. 그랬다가는 출입국관리사무소로 넘겨져 강제 추방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작년 여름에 만난 어느 미등록 이주노동자는 내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가구공장에서 일하던 동료가 사장에게 심한 폭행을 당한 뒤, 살겠다며 경찰서로 뛰어들었다. 경찰은 그와 함께 사장을 찾아갔다. 그런데 사장은 그가 불법 체류자임을 폭로했고, 결국 경찰은 그를 출입국관리사무소에 넘겨 버렸다. 임금체불과 폭행을 일삼은 사장은 별 처벌도 받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게 호모 사케르다. 이들에게 폭력을 행사해선 안 되지만 행사해도 큰 처벌을 받지 않는 것이다.

지난 11일 여수의 외국인보호소에서 끔찍한 참사가 일어났다. 화재로 이주노동자 9명이 숨졌고 18명이 부상당했다. TV 화면에 공개된 보호소는 그곳이 이름과 달리 쇠창살로 된 감옥임을 말해준다. 강원도에서는 실제로 '불법체류자'들을 감옥에 수용해왔다. 하지만 이들은 재판을 받고 복역하는 그런 범죄자들이 아니다.

이들의 불법성은 대부분 법과 제도가 정한 시간과 공간을 지키지 않은 데서 기인한다. 그래서 이들의 불법성은 이들의 행위보다는 법과 제도에 더 크게 좌우된다. 실제로 산업연수생제를 운영했던 2002년의 경우 불법체류자의 비율은 80%에 육박했다. 그러나 2003년에 35%로 감소했다. 그것은 이들 행동에 어떤 변화가 있어서가 아니라, 고용허가제로 제도가 바뀌면서 이들의 신분이 합법 체류자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용허가제에서도 불법체류자 비율은 계속 늘어 현재 50%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고용허가제 자체도 재검토할 시간이 된 것이다. 엄연히 존재하는 고용 현실을 손바닥으로 가리고, 이런저런 법과 제도로 '불법'이라는 낙인을 찍는 일은 이제 무의미해지고 있다. 사실 세상 어디에도 그 자체로 불법인 존재는 없다. 존재의 어떤 행위를 불법으로 볼 수는 있으나 존재 자체를 그렇게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 사회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은 행위가 아닌 존재 자체가 불법 취급을 받고 있다.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라는 예외적 존재가 권력의 정상적인 작동을 폭로한다고 생각했다. '예외가 정상이다'. 우리 사회의 예외적 존재인 미등록 이주노동자들 역시 우리 사회의 정상성이 무엇인지를 폭로한다. 그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이 바로 우리 얼굴, 우리의 야만이다.

수유&너머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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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7-03-08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한 사회가 기초한 '법'이라는 것의 맨얼굴을 폭로하는 군요. 퍼갑니다.
 
 전출처 : balmas > 갈등주의적 페미니즘을 향하여-한나 아렌트와 동일성의 정치

[월간 사회운동] 12월호에서 퍼옵니다.

아래 주소로 가시면 다른 기사들도 읽을 수 있습니다. :-)

http://www.movements.or.kr/bbs/view.php?board=journal&id=1653

 

갈등주의적 페미니즘을 향하여

한나 아렌트와 동일성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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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니 호니히 | 노스웨스턴 대학
역주: 한나 아렌트는 20세기 이후 정치 철학에서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아렌트는 그리 편치 않은 사이였다. 그 이유로는,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나치즘과 스탈린주의를 한 데 묶어 ‘전체주의’로 평가했다는 점, 『인간의 조건』에서 노동을 체계적으로 평가절하했다는 점, 그리고 『혁명론』에서 사회 혁명이자 민중 혁명이라는 이유로 프랑스 혁명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사실 우리로서는 아렌트가 제기한 쟁점 중 많은 부분을 여전히 받아들일 수 없다. [이 중 아렌트의 ‘전체주의’ 개념에 대한 체계적 비판은, Domenico Losurdo, Towards a Critique of the Category of Totalitarianism, Historical Materialism, volume 12:2, 2004를 참고하라.] 게다가 아렌트적 문제설정, 발리바르 식의 구분법을 사용하자면 ‘해방의 정치’를 주목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변혁의 정치’로서의 사회주의에 대한 대체물로 여긴다는 점도 우리가 볼 때 문제가 많은 접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렌트가 정치 및 해방에 관해 매우 많은 시사점을 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아렌트와 함께 아렌트에 맞서’ 그녀를 읽는 호니히의 작업은, 아렌트의 탁월한 통찰을 남김없이 취하면서도, 그 통찰에 따라 아렌트를 내부에서 ‘해체’함으로써 변혁의 정치와 양립가능하게끔 아렌트를 개조하는 비판적 독해의 전범을 보여 준다. 특히 이 논문에서 호니히는 (어떤) 페미니즘에 입각해서 아렌트를, (어떤) 아렌트에 따라 페미니즘을 각각 개조하는데, 우리는 특히 전자와 같은 접근이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고 생각한다. 이는 페미니즘이 보편적 이념 아래 종속된 특수한 분야가 아니라, 보편적 이념의 난점을 극복하고 그것을 한층 보편화하는 데 필수적일뿐더러 대체불가능한 지적․정치적 자원이라는 점을 실천적으로 입증하기 때문이다.
이 논문은 본래 Feminists Theorize the Political, ed. Judith Butler and Joan Scott (New York: Routledge, 1992)에 수록되었다가, 갈등주의에 대한 페미니즘적 비판에 대응하기 위한 새로운 후기를 포함하기 위해 상당히 개정되고 확장되어, Feminist interpretations of Hannah Arendt(Re-Reading the Canon), ed. Bonnie Honig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Press, 1995)에 재수록되었다. 이 번역본은 재수록본을 옮긴 것이다.


페미니즘 정치의 자원을 넓히려고 애쓰는 사람이 한나 아렌트라는 인물을 주목하는 것은 뜻밖이거나 심지어 거북스런 일이다. 엄격한 공/사 구별로 악명 높은 아렌트는, 그녀 식 정치의 독특한(sui generis) 성격과 공적 영역의 순수성을 보호하기 위해 사회 정의와 성별 쟁점들의 정치화를 금지한다. 이 같은 종류의 업무는 정치가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론화한 것처럼 전통적인 가사 영역에 속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아렌트는 자신이 “여성 문제”라고 부른 것들을 정치적으로 제기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했다.1)
그렇다면 왜 아렌트를 주목한단 말인가? 내가 아렌트를 주목하는 것은 그녀가 성별 이론가라거나 여성이어서가 아니라, 페미니즘 정치에 크게 이로울 수 있을 갈등주의적(agonistic)[역주: 'agon'은 본래 고대 그리스에서 운동․음악․극 따위의 각종 경연이 벌어지는 장소를 가리키는 말로서, ‘갈등’이나 ‘분투’, ‘논쟁’, ‘고뇌’ 등의 의미를 갖고 있다. 또 고희극(古喜劇)에서 주요 인물들이 서로 대립되는 주장으로 갈등하고 언쟁하는 부분을 의미하기도 한다.]이고 수행적인 정치의 이론가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렌트를 주목하는 것은 그녀가 정치에 대한 자신의 관점에 포함시키는 것 때문일 뿐더러, 그녀가 정치에서 배제시키는 것(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때문이기도 하다. 이 같은 배제에서 활용되는 용어들은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견고한 구별을 다루는 페미니즘 정치에게 유익하다. 아렌트가 공/사 구별에 집요하게 기대기는 하나, 그것을 정치화할 수 있는 자원들은 정치와 행위(action)에 관한 그녀의 설명 안에 제시되어 있다. 아렌트 정치의 갈등주의적이고 수행적인 충동에 기반하여 아렌트를 읽으려면, 바로 그 정치를 위해, 증대(augmentation)와 수정(amendment)이 미치지 않는 공/사 구별의 선험적 결정에 저항해야만 한다. (증대와 수정의 가능성을 영속시키려는) 이 저항 자체가 아렌트가 설명하는 정치 및 정치적 행위의 중요한 구성 요소다.
나는 (반드시 저항이라고 할 수는 없는) 저항력(resistibility)이 아렌트 정치의 필수불가결한 조건(sine qua non)이라는 점을 논하는 것으로 시작하고자 한다. 그런 다음, 정치 영역에서 신체를 배제할 때 아렌트가 사용하는 용어들을 간략히 검토할 것인데, 우선 아렌트가 이론화하는 바와 같은 신체의 일의적․전제적․불가항력적(irresistible) 성격에 초점을 맞춘 다음, 수행적 화행(話行, speech-acts)을 통해 정치적으로 쟁취된 동일성(identity)―아렌트는 이를 [높이] 평가한다―을 획득하는 행위하는 자아(acting self)의 다중성(multiplicity)을 조명할 것이다. 아렌트의 설명에서 동일성은 수행적 산물이지 행위의 본질이나 표현적 조건이 아니다. 아렌트 작업의 이 같은 특성이 작업 배치의 토대가 되는 공/사 구별과 결합되면서, 아렌트에 대한 페미니스트 비판자들이 그녀가 여성 및 여성들의 쟁점에 호의적이지 않은 정치를 이론화했다고 비난할 여지를 주었다.2) 하지만 내가 볼 때 페미니즘 정치에 대한 아렌트의 가치는 그녀가 표현적이고 동일성에 기반을 둔 정치를 기각한다는 바로 그 점에 있다. 문제는 아렌트의 이러한 기각이, 성별과 같은 사적 영역의 동일성들을 잠재적인 정치화의 장소들로 대하는 것에 대한 거부에 입각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나는 아렌트가 그녀의 유대(Jewish) 동일성과 그 동일성에 동반되는 책임의 문제를 놓고 게르숌 숄렘(Gershom Scholem)과 벌인 유명한 논쟁에 주목하는데, 이는 그녀가 (이른바) 사적 동일성들을 “전(前)정치적” 영역에 가두는 데 실천적으로 실패했음을 예증하며, 동일성의 정치와 보다 직접적으로 연루되기 때문에 더욱 고무적인 저항과 재의미화(resignification)의 대안 전략이 필요하다는 점을 가리킨다.
나의 결론은, 성과 성별을 이원적이고 구속적인 동일성의 범주로 구축하고 정치 공간을 공적․사적 영역으로 이원적으로 분할하려는 지배적 흐름에 (수행적이고 갈등주의적으로) 대항하려는 페미니즘에게 아렌트의 정치가 유망한 모형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아렌트 자신은 이처럼 그녀의 작업을 급진화하려는 것에 틀림없이 반대했을 테지만, 나는 이 같은 시도가 그녀의 (정초적) 문헌들을 증대시키는 것인 만큼, 그녀의 정치를 매우 잘 따르는 것이라고 믿는다.

정치적 행위와 저항력

아렌트가 정치와 행위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가장 간명하면서도 예리하게 논하는 것은 『미국 독립 선언』 독해에서다. 아렌트 설명의 모든 기본 요소들이 여기 다 나와 있다. 독립 선언은 정치적 행위이자 권력 행위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새로운 일련의 제도를 정초하고 새로운 정치 공동체를 구성/입헌(constitute)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이전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어떤 것을 낳”고, “새로운 관계를 확립하며 새로운 현실을 창출한다.”3) 그것이 정치적 행위의 “완벽한” 사례인 까닭은 그 본질이 “‘행위를 옹호하는 논증’에 있다기보다는” 말 속에서 출현하는 행위(an action that appears in words)에 있기 때문이다.4) 이는 수행적 언표이자 화행으로서, 공적 영역의 대등한 이들(equals) 사이에서 그리고 그들 앞에서 수행된다.
“우리는 이 같은 진리가 자명하다고 생각한다”(We hold these truths to be self-evident)는 유명한 문구에 초점을 맞추면서 아렌트는, 새로운 정체(政體)의 권력과 권위가 자명한 진리에 대한 진술적/확인적(constative) 지시 관계(reference)가 아니라 “우리는 생각한다”는 수행문에서 나온다고 주장한다.5) 극적인 동시에 비지시적인 수행문은 새로운 정치 공동체를 낳는다. 그것은 “우리”를 구성한다. 이 화행은 모든 행위와 마찬가지로 그것이 언표(되고 반복)되는 순간(들)에 행위자들을, 말하자면 탄생시킨다.
“우리는 생각한다”는 수행문과는 대조적으로, 자명한 진리에 대한 진술적 지시 관계는 자유로운 합류가 아니라 강박과 필연에 대한 고립된 묵종(黙從)을 표현한다. 자명한 진리에는 “동의가 필요치 않다.” 그것은 “논쟁적 증명이나 정치적 설득 없이 강제한다.” 그것은 “어떤 점에서 ‘전제 권력’만큼 강제적이다.” 진술문은 “불가항력적”이다. 그것들이 “우리에 의해 견지(held)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들에 의해 견지된다.”(OR 192~93). 자유로운 정치적 행위를 위해 아렌트가 독립 선언과 그 정초에서 숙정하는 것은 그 폭력적이고 진술적인 순간들, 신과 자명한 진리, 그리고 자연법이라는 불가항력적인 정박점이다. 이 같은 함(doing) 배후에는 어떤 “~임”(being)도 존재하지 않는다. 함, 수행이 전부다.6)
아렌트의 설명에 따르면 새롭게 정초된 공화국 권위의 진정한 원천은 진술적 순간이 아니라 수행적 순간이고, 고립된 묵종이 아니라 공동 행위(action in concert)이며, 자명한 진리가 아니라 “우리는 생각한다”이다.7) 그리고 공화국 권위의 진정한 원천은 이제부터 그 유지 방식, 재정초와 재구성/입헌에 대한 개방성이 될 것이다. “따라서 헌법의 수정은 미국 공화국의 기원적 정초를 증대하고 확장한다. 물론 미국 헌법의 권위 자체는 수정되고 증대될 수 있는 그 본래적 역량에 있다.”(OR 202, 강조는 필자) 헌법적 수정과 증대, 재정초에 이처럼 우호적인 성향을 지닌 정체는 신과 자연법, 그리고 자명한 진리라는 정초적 정박점을 반드시 기각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알다시피 신은 증대를 허용하지 않고, 또는 신은 증대될 필요가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신, 자연법, 자명한 진리 이 세 가지 모두는 불가항력적이고 완전하다. 이 문장(紋章)들은 권력을 굳게 만든다. 이들이 수행문을 진술문으로 사물화(事物化, reification)하면 재정초와 증대가능성이 감소함으로써 정치의 공간이 폐쇄되고 정체의 권위가 박탈된다. 저항력, 개방성, 창조성, 그리고 미완성성은 이 정치의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아렌트가 공적 영역에 신체를 허용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고 고집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단순하고 일의적인 신체

인간 신체는 한나 아렌트에게 있어 순수 과정의 결정과 필연성, 불가항력, 모방성의 주문(主文)이다. 아렌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 볼 때 깨닫게 되는 가장 강력한 필연은 생명 과정으로, 이는 우리의 신체에 고루 미치고 신체를 항상적 변화 상태로 유지하거니와, 그 운동은 우리 자신의 활동과 독립하여 자동으로 진행되고 불가항력적이다 ― 즉 압도적으로 집요하다. 우리 자신이 하는 것이 적어지고 우리의 능동성이 낮아질수록 이 생물학적 과정이 더욱 강력하게 나서면서 그 본래적 필연을 우리에게 강제하게 되고, 모든 인간 역사의 기저에 깔린 단순한 발생의 운명적인 자동 운동으로 우리를 위압한다. (OR 59; 강조는 필자)

그렇다면 공적 영역의 행위가 [필요한] 이유 중 하나는 사적 영역에서 노동하고 일하며 (무엇보다) 궁핍화된 존재들을 괴롭히는 순수 과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다. 적어도 『혁명론』에서 아렌트가 말하는 것은 이런 식인데, 여기서 그녀는 프랑스 혁명의 막대한 실패를 기록하면서 그 책임을 “신체의 필요에 떠밀린 빈민들이 무대로 난입하여” “사회 문제”를 정치적 고려의 중심으로 만듦으로써 정치 공간을 실질적으로 폐쇄한 사실에 돌렸다(OR 59). 굶주리거나 가난한 신체를 대변하는 요구가 공적으로 만들어지면, 인간이 소유한 개성화하고(individuating) 능동화하는 능력은 침묵하게 된다. 난폭할 정도로 절박할 뿐더러 불가항력적이기까지 한 신체의 필요가 만족되기 전까지는 어떤 발화도, 어떤 행위도 있을 수 없다.
다른 저서인 『인간의 조건』에서 아렌트의 강조점은 달라진다. 여기서도 “사회적”인 것을 정치적으로 고려하는 것에 대한 그녀의 적의는 약해지지 않지만, “사회적인 것의 부상”은 행동주의(behaviorism)나 대중 사회, “가사적인”(housekeeping) 용무의 관리가 정치 영역을 찬탈한다는 견지에서 이론화되는데, 이런 것들은 신체의 집요함보다 그 압박이 덜하진 않지만, 불가항력 면에서 보자면 덜 집요해 보인다. 여기서 사회적인 것은 무대에 부상하긴 해도, 난입하진 않는다.
『혁명론』과 대조적으로 『인간의 조건』은 신체를 직접 논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신체의 문제가 다뤄질 경우 그 강조점은 신체의 불가항력보다는 그 모방성(imitability) 쪽에 놓인다.8) 아렌트의 말을 예로 들자면, 인간을 구별 짓는 정치적 발언과 행위에서 인간이 “전달(communicate)하는 것은 스스로이지, 단순한 무언가―목마름이나 굶주림, 애정이나 적의나 공포 따위―가 아니다.”(HC 176) 목마름이나 굶주림이 “단순한 무언가”인 까닭은 그것이 우리의 생물학적 실존의 공통적이고 공유된 특성이며, 그 자체로는 우리와 다른 이들을 어떤 의미 있는 방식으로도 구별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같은 공통성(commonality, 평범함)은 근대에 들어 과대해지는데, 사회적인 것이 극히 순응적인 일련의 배치로 발전하여 “셀 수 없이 다양한 규칙들을 부과함으로써 … 경향적으로 그 구성원들을 ‘정상화/표준화’(normalize)하고 그 행실을 바로잡으며 자발적 행위나 걸출한 성취를 배제”(HC 40)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행위해야 하는 이유는 신체를 벗어나 그 집요함에서, 일시적으로, 자유로워지려는 필요성에 있지 않다. 대신 아렌트가 초점을 두는 것은 정치와 행위의 해독성 있고 독특한 소용(sui generis goods)을 통해 사회적인 것의 정상화/표준화하려는 충동에서 벗어나거나 그를 억누르려는 필요성이다. 행위해야 하는 이유는 행위만이 특유하게 갖는 개성화의 역량, 그리고 구별 및 개성화, 걸출한 성취를 향한 자아의 갈등적인(agonal) 열정에 있다.
그들이 행위할 때, 아렌트의 행위자는 다시 태어난다(HC 176). 혁신적인 행위와 발언을 통해 그들은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보여주고, 자신들의 특유한 개인적 동일성들을 능동적으로 드러내며, 이로써 자신들을 인간 세계에 출현시킨다.”(HC 179) 그들이 공적 영역에서의 행위에 순간적으로 참여할 때 동일성들이 생겨나는데, 이는 그들을 목격한 목격자(spectator, 관객)들이 그들의 영웅적 수행에 관해 말하는 이야기 속에 영원히 새겨진다. 행위 이전에 또는 행위와 떨어져서는 이 자아는 동일성을 갖지 않는다. 그것은 파편적이고 불연속적이며 불분명할뿐더러 무엇보다도 전혀 흥미롭지 않다. 생명을 떠받치고 심리적으로 결정되어 있으며, 시시하고 모방가능한 사적 영역의 생물학적 피조물인 이 자아가 동일성을 얻는 것은 ― “누구”(who)가 되는 것은 ― 행위를 통해서다. 그것이 될 수도 있는 “누구”를 위하여, 자아는 근본적으로 우연적인 공적 영역의 위험을 무릅쓰는데, 여기서는 무엇이든 일어날 수 있고, 행위의 결과가 “무한하고” 예견할 수 없으며, “생명이 아니라 세계가 쟁점이 된다.”9) 이렇게 함으로써 그것이 내버리는 것은 “무엇임”(what it is, 현재의 본질)이라는 안락한 안전함, 사적 영역에서 그것을 정의(하고 심지어 결정)하는 역할과 특성들, “그것이 내보이거나 감추는 특징들, 재능들, 솜씨들과 단점들,” 그리고 그 작인(作人)을 특징짓는 의도와 동기, 목표다.10) 그렇기에 아렌트의 행위자들은 결코 자기-주권적이지 않다. 사적 영역에서 신체들(과 심리들)의 전제주의에 추동되는 그들은, 마찬가지로 공적 영역에서도 자신들이 하는 것을 결코 실질적으로 통제하지 못한다. 행위자로서 그들이 용감해야만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행위는 자발적이고, 무에서 솟아나거니와, 가장 혼란스러운 점은 그것이 스스로를 놀라게 한다(self-surprising)는 점이다. “타인들에게는 그렇게 뚜렷하고 틀림없이 나타나는 ‘누구’는 그 개인 스스로에게는 숨겨진 상태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11)
우리가 “무엇”인가("what" we are)에는 흥미롭거나 별다른 것이라고는 없으며, 심리적이고 생물학적인 자아에도 주목할 만한 것이 없다. 사적 자아의 특성은, 우리의 장기와 마찬가지로 “전혀 특유하지 않다”(HC 206). 아렌트는 생물학적 자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만일 이 내부가 드러난다면, 우리는 모두 비슷하게 보일 것이다.”12) 여기서 아렌트가 가치를 두는 수행적 화행과 대비되는 침묵은 난폭할 정도로 집요한 신체적 필요가 유발하는 묵언(muteness)보다는 차라리 엄격하게 (의사)전달적이고 극히 지시적인 ― 발화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지시적인 ― 일종의 진술적 말하기이자 말없는 (의사)전달이다. 여기서 “발화는 부차적인 역할을 노는데, 그 역할이란 (의사)전달 수단이거나 말없이도 성취될 수 있는 무언가에 대한 부산물이다”(HC 179). 사적 영역에서 언어의 초점은 (신체의) “즉각적이고 동일한 필요와 부족을 전달”하는 것이므로, 이는 의태적으로 수행될 수 있다. 이 단순하고 일의적인 신체는 발언의 도움 없이 이 일을 처리할 수 있다. 아렌트는 “기호와 소리면 충분할 것”(HC 176)이라고 말한다.

다중적인, 행위하는 자아

유일하고 일의적인 신체와는 대조적으로, 행위하는 자아는 다중적이다. 이 갈라진 자아는 진술적인 면과 수행적인 면으로 갈라진 독립 선언의 구조 위에 겹쳐진다. 진술문과 신체는 모두 전제적이고 불가항력적이며 일의적이고 창조성이 없다. 양자 모두 분란을 일으키며(disruptive), 무대에 부상하거나 난입하여 정치 공간을 폐쇄시키겠다고 늘상 으르렁댄다. 이 항존하는 위협 때문에 우리는 신체적이거나 진술적인 강박의 침입에 맞서 공적 영역, 수행성의 공간을 방심하지 않고 경계(警戒)해야 한다.
행위하는 자아는 선언의 수행적 순간과 유사하다. 그것은 자유롭고 (자기)창조적이며 변혁적이고 모방할 수 없다. 아렌트의 수행문들은 복수성(plurality, 다원성)을, 그 행위자들은 다중성을 상정한다. “우리는 생각한다”는 수행문의 힘은 구별되고 다양한 개인들에 의해 현행화되는데, 이들은 행위 이전까지는 세계에 대한 관심과 구별을 향한 갈등적(agonal) 열정을 제외한다면 별 다른 공통점을 갖지 않는다(OR 118 곳곳). 마찬가지로 아렌트의 행위자들이 행위하는 것은 그들의 이전 본질(what they already are) 때문이 아니며, 그들의 행위는 사전적인 안정된 동일성을 표현하지 않는다. 그들은 불안정하고 다중적인 자아를 전제하는데, 이 자아가 추구하는 것은 기껏 해 봤자 행위에서의, 그리고 행위의 대가인 동일성에서의 일시적인 자기실현이다.
아렌트는 이 다중적인 자아를 투쟁의 장소로 특징짓는데, 이 투쟁은 자아가 행위하는, 그리고 수행적 산물인 동일성을 쟁취하는 각각의 순간에 일시적으로 진정된다. 투쟁은 사적인 자아와 공적인 자아 사이에서 벌어지는데, 전자가 위험을 기피하는 폐인(stay-at-home)이라면 후자는 우연적인 공적 영역에서 활동하는 용감한 심지어 경솔한 행위자다. 이 같은 사적․공적 충동의 갈라짐이 자아에 새겨지지만, 자아의 파편성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사적 영역에 홀로 있을 때에도 이 자아는 세 가지 구별되고 경합하며 양립불가능한 정신 능력들―사고, 의지, 판단―에 고취되어 서로 갈등하는데, 이 각각의 능력 또한 내적으로 쪼개지고 “반사되며” “스스로에게 다시” 되튕겨진다. 아렌트는 항상 “이 같은 내적 저항이 남아 있다”13)고 말한다. 자율성이 부과된 구축물이라고 아렌트가 주장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것은 파편적이고 다중적인 자아에게 일의성을 부과한다. 그것은 “스스로의 자아에 대한 지배와 타인들에 대한 통치에 의존하는 정복”을 포함한다. 그것은 아렌트가 설명하는 자아가 그것에 대해 저항하는 구성체(formation)다(HC 244). 이 자아는 결코 하나가 아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아렌트가 (때때로) 정치라 부르는 갈등주의적인 투쟁의 장소다.14) 그리고 아렌트는 이를 찬성하는데, 왜냐하면 니체와 마찬가지로 그녀는 이 같은 자아의 내적 다중성이 그 힘과 활력의 원천이자, 창조적인 수행적 행위의 조건 중 하나라고 보기 때문이다.15)
일의적 신체와 다중적 자아 간의 이 같은 갈라짐은 개별적 자아들의 속성으로 제시되지만, 그러나 그것들은 아렌트가 친애하는 모형인 고대 그리스에서 일부 자아들을 타인들과 구별 짓기 위해 실제로 작동한다. 여기서 행위의 경험은 극히 소수에게만 허용된다. 신체의 판에 박힌 일상과 집요함은 『인간의 조건』에서 암묵적으로 ― 고대 그리스에서 명시적으로 그랬던 것처럼 ― 여성과 노예(그리고 또한 아이들, 노동자들, 그리고 폴리스의 모든 비-그리스인 거주자), 곧 “신체적 기능과 물질적 용무들이 숨어 있어야 하는”16) 사적 영역에서 신체와 그 필요에 전념하는 노동하는 신민들(subjects, 주체들)과 동일화된다. 이들 사적 영역의 주민들은 신체와 본성이 그들에게 강요하는 요구, 그리고 그들을 재산으로 소유하는 가구(household)의 주인이 그들에게 지시하는 명령에 수동적으로 종속(subject)된다. 지루할 정도로 뻔하고 반복적이며 순환적인 본성의 과정 및 가구의 전제주의 양 쪽에 희생당하는 그들은, 아렌트가 공적 영역에서의 행위와 동일시하는 자유를 행할 수 없게끔 결정되어 있다. 반면 자유로운 시민은 사적 영역에서의 자신들의 사적 필요를 돌볼 수 있지만(그보다는 신민들이 돌보게 만들 수 있지만), 그런 다음 이 숙명적이고 생명을 떠받치는 용무를 뒤로 하고 자유와 발언과 행위의 공적 영역에 입장할 수 있다. 사실 이 용무를 뒤로 할 수 있는 그들의 능력이야말로 그들이 행위할 능력이 있다는 표지다. 정치에서는 어쨌거나 “생명이 아니라 세계가 쟁점인 것이다.”
자유로운 시민들이 이처럼 사적 영역에서 공적 영역으로 주기적으로 통행하는 것을 보면, 이 두 영역의 간극이 협상 불가능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HC 24). 그러나 이는 오직 시민들에게만, 그러니까 자신들의 신체화(embodiment) 조건과 본질적으로 동일화되지 않는 이들에게만 적용된다. 이는 실질적으로 그들의 시민권을 측정하는 기준이다. [반면] “타자들”, 그러니까 그들의 동일성이 그들의 신체화와 동일하다(이것이 그들의 야만을 측정하는 기준이다)는 본성 자체 때문에 결코 시민이 될 수 없는 이들의 경우 공/사의 불통(不通)을 협상할 여지가 없다.
이처럼 문제점이 많은 정치적 행위를 아렌트가 폴리스에 귀속시키는 것은 틀림없지만, 이를 아렌트 자신에게 귀속시키는 것이 옳을까?17) 분명 아렌트는 그녀 식의 사적 영역과 거기서 일어나는 노동 및 작업 활동들이 특정 계급의 인민이나 신체, 또는 특히 여성과 동일화될 수 있는 것처럼 말하곤 한다. 그러나 한나 피트킨이 지적하듯, 경우에 따라 사적 영역과 노동 및 작업 활동들은 특정한 계급이나 집단보다는 “공적 영역이 반드시 경계해야 하는 특정한 태도(들)”을 표상한다.18) 예를 들어 노동, 곧 “인간 신체의 생물학적 과정에 조응하는 활동”이라는 하나의 양태 안에서는, 생명의 숙명론적 본질과 특정한 종류의 합리성의 도구적 성격이 우리를 너무나 철저하게 지배하는 나머지 정치의 자유 및 특유의 생성적인 수행성이 떠오를 수 없다(HC 7). 노동 및 작업에 관해 아렌트가 정말로 근심한 것은 그것들이 행위를 방해하거나 파괴하는 특수한 감성들(sensibilities)을 요구하고 일으킨다는 것이기 때문에, 피트킨은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아마도 ‘노동자’는 그의 생산 방식이나 빈곤이 아니라 그의 ‘공정’(工程, process) 지향적인 관점에 따라 식별되어야 할 것이다. 아마도 그가 필연에 떠밀리는 것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고, 그가 스스로를 행위할 능력이 없이 떠밀리는 존재라고 간주하기 때문일 것이다.”19)
또는 차라리 정치적 행위에서 배제되는 것은 아마도 노동하는 감성일 텐데, 이 감성은 활동으로서의 노동에 특징적인 것으로 간주되지만, 어떤 특정 노동자의 사고를 특징지을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거니와, 이 감성은 노동자가 노동할 때 표현되는 노동하는 본성이나 본질을 신호하는 것으로 간주돼서는 안 된다. 이 함 배후에는 어떤 “~임”도 없다. 동일한 분석이 작업에도 적용된다. 이 설명에서는 정치적 행위에서 배제되는 개인들의 명확한 계급이란 없다. 대신 정치는 다양한 감성들, 태도들, 성향들, 그리고 접근들로부터 보호되는데, 이 모두는 모든 자아들과 주체들을 일정한 정도로 구성하고, 자아를 지배하기 위한 투쟁에 참여하며, 아렌트가 가치를 두는 행위의 이해(들)과 양립할 수 없다. 요컨대 노동, 작업, 행위를 감성들로 해석함으로써 그것들을 탈본질화하거나 탈자연화(denaturalize, 변성(變性))할 수 있다. 각각은 스스로를 수행적 산물로, 즉 어떤 계급이나 성별의 진정한 본질의 표현이 아니라 개인들과 사회들, 그리고 정치적 문화들의 행위와 행실, 규준, 그리고 제도적 구조들의 항상 (침전된) 산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20)
노동과 작업과 행위를 이처럼 (경합하는) 감수성들로 읽는 것은 자아를 다중성으로 보는 아렌트의 관점과 양립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신체를 진술의 폐쇄와 모방성, 불가항력의 주문으로 취급하는 아렌트의 견해를 부드럽게 전복하는 길을 가리킬 것이다. 아렌트의 설명에서 노동은 결국 신체적 기능일뿐더러 신체에 전념하는 양태, “생명 과정 자체에 필요한” 사물들에 몰두한 양태가 되는 것이다. 만일 노동(모든 것을 때때로 떠미는 결정적 감성)이 수행적 산물일 수 있다면, 신체 자체는 왜 안 되겠는가? 노동, 작업, 행위를 감성으로 보는 이 같은 독해는 신체를 탈본질화하고 탈자연화하고, 아마도 복수화하며, 어쩌면 심지어 그것을 아렌트적인 의미에서 수행적 산물, 행위가 가능한 장소로 보게 하는 방향으로 우리를 밀고 가지 않겠는가?

공과 사를 구별하기

이렇게 아렌트의 설명을 급진화하는 데 방해되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수행문과 진술문이라는 표제 아래 함께 모아 둔 일련의 구별들에 아렌트가 의존한다는 점이다. 아렌트는 이 구별들을 협상할 수 없고 겹치지 않는 이원적인 대당으로 다루며, 그것들을 그녀 작업의 (움직이는) 중심에 놓여 있는 (역사적으로 매우 불평등한) 공/사 구별 위에 배치한다. 물론 앞으로 밝혀질 것처럼 방해가 되는 것은 하나 이상인데, 왜냐하면 아렌트가 다층적인 체계로써 자신의 공/사 구별을 확고히 하기 때문이다. 이 구별은 수많은 이원성을 낳는데, 각각은 그 이전 것에 덧붙여진 새로운 층의 보호막이며, 이들은 아렌트가 그것에 할당한 존재론화하는(ontologizing) 기능에 저항하는 구별을 더 견고하게 지키려는 의도를 갖는다. 수행문 대(對) 진술문, “우리는 생각한다” 대 “자명한 진리”, 다중적 자아 대 일의적 신체, 남성 대 여성, 저항가능한 대 불가항력적인, 용감한 대 위험회피적인, 발언 대 묵언적 침묵, 능동적 대 수동적, 비범한 대 평범한, 개방적 대 폐쇄적, 권력 대 폭력, 자유 대 필연, 행위 대 행실, 비범한 대 평범한, 모방불가능한 대 모방가능한, 분란 대 반복, 빛 대 어둠, 요컨대 공 대 사.
왜 이렇게 많은가? (선)긋기가 아렌트적 의미에서 비범한 행위긴 하지만(그것은 새로운 관계들과 새로운 현실들을 창조할 수 있는 힘을 갖는다), 이 구별을 긋는 것 자체에서 아렌트는 불안한 반복의 순환에 사로잡힌다. 이 모두를 필요로 할 정도로 희박한 구별이 침식당하는 것에 저항하려는 영웅적 노력 안에서, 이원적 구별과 형용사적 쌍들은 서로의 위에 덧쌓인다. 참으로 희박하지 않은가. 아렌트의 설명에서 이 같은 구별들이 서로 침투하는 수많은 사례들이 있다. 아렌트는 공적 영역이 사적 영역에 너무나도 쉽사리 식민화되고 사회적인 것으로 전환된다는 사실에 관해 아주 솔직하다.(그녀가 『인간의 조건』과 『혁명론』에서 대답하는 것이 바로 이 문제다.) 그녀의 솔직함 때문에 우리는 이 구별들을 긋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 사적 영역의 제국주의에서 공적인 것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 역도 성립한다. 아렌트에게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사적 영역의 신뢰성, 일의성, 그리고 평범함을 행위와 정치의 분란에서 보호하는 것이다.21) 요컨대 아렌트는 행실뿐만 아니라 행위 자체도 길들인다. 그녀는 행위에게 근거지라 부를 만한 장소를 부여하고, 행위에게 그것이 속해야 하는 이곳에 머무르라고 말한다. 그러나 물론 행위는 이를 거부한다.
행위의 진정한 위험은 바로 여기, 이 거부에 있다. 스스로를 놀라게 하는(self-surprising) 행위의 특성은, 행위가 항상 그것에 대한 우리의 의도대로 되어 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제한되지 않는다. 또한 행위자로서의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 된 것이 “누구”인지에 대해 완전히 확신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제한되는 것도 아니다. 행위가 스스로를 놀라게 하는 것은 또 다른 의미, 곧 그것이 우리에게 일어난다(it happen to us)는 의미에서다. 우리는 수행할 것을 결정하고 난 후에 공적 영역에 입장하여 그 영역을 특징짓는 우연성에 우리의 수행을 종속시키는 것이 아니다. 종종, 정치적 행위는 우리에게 도래하며, 신중하다거나 계획적이라거나 의도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우리를 휘말리게 한다. 행위는 그 행위자들을 생산한다. 우연적이고 일시적으로(episodically, temporarily) 우리는 행위의 갈등주의적 성취다. 아렌트의 설명에서 미국 혁명은 미국 혁명가들에게 일어난 것이었다. “그러나 혁명으로 이끈 운동은 부주의(inadvertence)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혁명적이지 않았다”(OR 44). 그리고 때때로, 특히 그녀가 의지를 설명할 때, 행위는 원래 사적 영역에서, 사적인 자아에게 일어난다.
아렌트는 의지를 행위의 선행항로 간주하지만, 그것이 실은 행위를 지연시킨다는 점에서 기묘한 종류의 선행항이다. 반사적이고, 내적이며, 원함과 원치 않음(willing and nilling)의 잠재적으로 영원한 동역학에 사로잡혀 있고, 이 동역학을 저지할 능력이 없는 의지는 구원을 기다린다. 그리고 구원이 도래할 때, 그것은 행위라는 형태 자체로 온다. 행위는 의지의 강박적인 반복에 분란을 일으킴으로써, 의지의 마비적 “우려와 근심”에서 자아를 해방한다. 행위는 사적 영역에, 말하자면 진입한다(come in). 그것은 아직 채비를 갖추지 못하고 완전히 의지를 굳히지 않은(왜냐하면 또한 여전히 원치 않기 때문에) 사적 영역의 주체에게 일어난다. 쿠데타처럼 행위는 “벨레(velle, ‘원한다’는 뜻의 라틴어)와 놀레(nolle, ‘원치 않는다’는 뜻의 라틴어) 간의 갈등을 중단”시키고 의지를 구원한다. “즉 의지(Will)가 구원받는 것은 의지하기를 그치고 행위하기 시작함으로써이며, 중지가 의지하지 않을 의지(will-not-to-will)의 행위에서 비롯할 수 없는 것은 이것이 또 다른 의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22)
공/사 영역의 이종교배 사례들은 넘쳐 난다. 그것들은 이종교배의 불가능성, 도착(倒錯), 기괴함을 설명하게 되어 있는 구별들만큼이나 다양하다. 그렇다면 성/성별 수행성을 다룬 한 페미니스트 이론가처럼 “신체 자체에 수행성을” 적용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23) 무엇이 공/사 구별의 희석을 금지하는가? 사적 영역의 진술적 동일성들이 실제로는 개인들, 사회들, 그리고 정치적 문화들의 규준들과 제도적 구조들, 행실들, 행위들의 (침전된) 산물이라는 것을 폭로하는 것에 대한 벌이 무엇인가? 내기에 걸린 것은 무엇인가?
아렌트에게서 내기에 걸린 것은 행위 자체의 상실, 행위가능한 것(actionable, 기소할 수 있는)이 허용되는 영역의 상실이다. 이것이 근심의 진정한 원인이며, 특히 사회적인 것의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규칙들”이 정상적이고 행실 바른 주체들을 생산하는 데서 거둔 놀랍고 불편한 성공을 감안한다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그것을 허용하기 위해 아렌트는 공적 영역에서 거의 모든 내용을 비워 버린다. 내용을 가진 것들은 어쨌거나 진술문이고, 아렌트의 이론화에서 폐쇄의 장소이며, 수행문에 대한 불가항력적인 장애물이다. 한나 피트킨이, 저 시민들은 “저 광장(agora)에서의 끝없는 회의(palaver)에서 [무엇에] 관해서 함께 얘기하는가”라고 어리둥절하게 여기는 것은 이 때문이다.24) 아렌트가 행위를 사실상 형식화하는 것, 협상불가능한 공/사 구별로써 행위를 보호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사회적인 것의 그 어떤 부상보다, 표면적으로는 불가항력적인 신체들의 그 어떤 난입보다 더 행위를 상실하고 폐색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
공/사 구별의 침투성, 부정확성, 모호성은 그것을 포기할 이유가 되지 못한다. 그보다는 희석의 가능성을 시사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불가항력적으로 새겨진 아렌트 자신의 공/사 구별을, 모래 위에 그어진 선, 그 자체로 부당한(illicit) 진술문, 구성적인 표식이나 문헌, 반박․증대․수정되기를 갈등주의적으로 호소하는 것으로 여긴다면 어떻겠는가? 그리고 우리가 공과 사의 지리적이고 독점적인 은유를 없애는 것으로 시작한다면 어떻겠는가? 아렌트의 공적 영역을 고대 그리스의 아곤과 같은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행위를 일으킬 법한 ― 지형(학)적인(topographical) 동시에 개념적인 ― 다양한 (갈등주의적) 공간들의 은유로 대한다면 어떻겠는가? 우리에게 남는 것은 사건으로서의 행위, 평범한 사물의 질서에서 새로움과 구별로의 길을 여는 갈등주의적 분란, 불가항력적인 것에 대한 저항의 장소, 다양한 행실을 구성하고 통치하며 통제하려는 정상화/표준화하는 규칙에 대한 도전이다. 그리고 우리는 훨씬 더 광범위한 진술/확인의 정렬 안에서 정치적 행위의 장소들을 식별할 수 있는 위치에 설 것인데, 이 정렬의 범위는 신이나 자연, 기술, 자본 등의 자명한 진리에서부터 동일성, 성별, 인종, 종족성 등에 이를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행위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될 것이다 ― 사적 영역에서 말이다.
아렌트는 물론 그녀의 설명을 이처럼 수정하는 것이 지나친 정치화라고, (낸시 프레이저가 아렌트를 대변해서 쓰듯) “모든 것이 정치적일 때, 정치적인 것의 의미와 종별성은 희미해진다.”25)고 염려할 것이다. 프레이저가 볼 때 정치에 대한 아렌트의 이론화는 하나의 역설에 빛을 비춘다. 만일 정치가 모든 곳에 있다면, 그것은 아무 데도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수정된) 설명에서 모든 것이 정치적이지는 않다. 그것은 단지 정치화로부터 존재론적으로 보호받는 것은, 필연적으로나 자연적으로나 존재론적으로 정치적이지 않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뿐이다. 공과 사의 구별은 정치 투쟁의 수행적 산물로서, 어렵사리 획득되고 항상 일시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물론 이 역설은 역전될 수 있다. 정치적인 것과 비정치적인 것의 분할을 정초적으로 보존하려는 충동은 정치적인 것의 보존을 염려하는 것이라고 표명되지만, 그 자체는 반정치적인 충동이다. 아렌트는 이를 알았다. 독립 선언의 진술적이고 정초적인 토대를 그녀가 비판할 때 기초로 삼은 것이 바로 이것이다. 선언의 자명성에 수행성을 적용하도록 그녀를 자극한 것도 이것이다. 그리고 동일한 충동이 아렌트의 공/사 구별 자체에 수행성을 적용하도록 자극할 수 있다.
이 같은 갈등의 분산은 아렌트가 이론화한 정치의 또 다른, 사뭇 상이한 계기에 의해 정당화될 수도 있다. 아렌트는 상황의 긴급함 때문에 정치가 지하에서 움직이도록 강제되는 시간이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녀는 점령 프랑스의 지하 정치에 유의하면서, 저항의 장소, 전복적인 정치 행위의 네트워크가 증식하는 것에 가치를 부여했다.26) 아렌트가 “사회적인 것의 부상”과, 틀에 박히고 관료적이며 관리적인/행정적인(administration) 정체(政體)에 의한 정치의 전위라고 묘사한 것을 점령이라는 용어로 불러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제도적 장소가 부재할 때 페미니즘 정치는 지하에 숨어들면서, 개인적이면서도 제도적인 동일성들의 틈과 균열에서 조심스럽게 스스로의 거처를 정하고, 새로운 관계들과 현실들을 확립한다는 희망을 품고 수행적이고 갈등주의적이며 창조적으로 그렇게 할 수 있다.

사적 영역에서 행위하기

사적 영역의 자명성 안에 위치한 갈등주의적인 수행성의 정치라는 이상의 개념을 탐색한 것은 주디스 버틀러인데, 그녀는 특히 성과 성별의 구축 및 구성에 초점을 둔다. 버틀러는 사적 영역의 진술―아렌트가 자연 순환의 무심하고 지루하며 완벽하고 억압적인 반복이라고 서술한 것―의 가면을 벗기고, 일상적으로 성/성별 동일성을 (재)생산하는 수행성으로 이들을 재서술한다. 이 같은 수행들은 “이성애적 계약”에 의한, 그리고 그것에 중심을 둔 이원적인 성별 구성의 규제적 실천의 강제적 산물이라는 것이 버틀러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 행위들은 “내적으로 불연속적이다.” 그것들이 생산하는 동일성들은 “이음매가 없지”(seamless) 않다. “지시대상[자아]의 다중성과 불연속성은 기호[성/성별]의 일의성을 조롱하고 이반한다.” 이 조롱(mockery)과 반란의 공간들, “이런 행위들 간의 자의적 관계 안에, 다른 식으로 반복할 가능성 안에” “성별 변혁의 가능성들”이 있다.27) 전복적인 반복은 대안적인 성/성별 동일성들을 수행적으로 생산할 것인데, 이 동일성들은 증식할 것이고 이 같은 증식(과 전략적 전개) 속에서 지금 성/성별 동일성들을 규제하고 남김없이 구성하려 드는 사물화된 이원성들에 대항하여 저항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전략은 동일화주의적인(identitarian) 관리, 규제, 표현에 저항하거나 거기에서 벗어나는 공간들을 식별함으로써 동일성들을 수행적 산물로 탈권위화․재서술하고, 성공적인 진술문을 열망하는 동일성들의 가면을 벗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렌트의 용어를 빌자면 이 전략은 “우리가 생각하는” 성/성별 동일성들이 행위를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수정되고 증대될 수 있다는 믿음에 의지한다. 정치 이론의 과제는 새로운 시작들을 환대하는 (긴장과 결정불가능성, 그리고 자의성의) 공간들을 넓힘으로써 (재)정초의 실천을 돕고 북돋는 것이다.28) 이들은 정치의 공간, 수행적 자유의 (잠재력 있는) 공간들이다. 여기서는 사적 영역에서 행위가 가능해지는데, 왜냐하면 사회적인 것과 그 정상화/표준화의 장치들은 아렌트가 지나치게 속단한 것과 달리 완벽한 폐쇄를 획득하는 데 시종일관 실패하기 때문이다. 사회적인 것의 야망이 이처럼 실현되지 못한다는 것은 정치를 마비시키는 응고되고 딱딱하며 사물화되고 자연화된 동일성들과 정초들을 전복할 수 있다는 것, 행위가능한 것의 영역을 넓힐 수 있다는 것, 수행적 행위들을 진술적 진리들로 침전시키는 것에 저항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정치와 동일성의 문제에서는 그것을 바로 잡는다거나(get it right) 완전히 끝장내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신념을 견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불가능성은 아렌트의 공적․사적 영역의 필요와 억압을 구조화한다. 그리고 이는 어떤 동일성의 정치라도 문제시하고 저항할 수 있는 훌륭한 이유를 제공해 준다.
한나 피트킨은 이익, 그리고 공유된 물질적 필요 및 용무의 재현/대의(representation)의 재판정이나 실천으로 정치를 이론화할 것을 거부하는 아렌트를 열렬히 비판한다.29) 아렌트의 정치가 아무런 함의나 내용도 없을 만큼 형식적일 수 있다는 것을 근심한다는 점에서는 그녀가 옳다. 그러나 피트킨은 아렌트가 제시한 전망의 유망함(promise, 약속)을 헤아리는 데는 실패한다. 정치적 행위가 우리가 “무엇”인지를 ― 즉 우리의 사물화된 사적 영역의 동일성들을 ― 재현/대의하는 장소가 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아렌트의 태도에 유망함이 있다. 아렌트의 관점에서 재현/대의의 정치는 부과적이고 어긋나는(ill-fitting) 이익들과 동일성들의 그릇된 공통성을 투사한다. 더욱이 그것은 중요한 대안을 차단한다. 그 대안이란, 우리가 “무엇”인지를 재생산하고 재-현(re-present)하는 대신, 우연적으로(episodically) 새로운 동일성들을 생산함으로써 우리가 “누구”인지를 갈등주의적으로 낳는 수행적 정치인데, 이 동일성들의 “새로움”은 “행위하는 인간들/여성들([wo]men)에 의해 ― 비록 의식한 것은 아니더라도 ― 시작되고, 그들의 후손에 의해 널리 상연되고 증대되며 오래 간직되는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이 될 것이다.30)

동일성의 정치

아렌트의 행위 이론에서 수행성이 중심성을 차지하는 것은, 성별이나 인종, 종족성 또는 국적(nationality, 민족성) 같은 공유된 (공동체) 동일성들을 표현하는 것으로 정치를 바라보려는 시도에 아렌트가 반대하는 데서 비롯한다. 수행성과 갈등주의는 아렌트의 설명에서 우연의 일치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다. 아렌트의 정치가 항상 갈등주의적인 것은 그것이 표현주의의 매력에 저항하기 때문인데, 이는 자아를 그 동일성들이 항상 수행적으로 생산되는 복잡한 다중성의 장소로 보는 그녀의 관점을 위한 것이다. 이 갈등주의는 주체성의 무엇-임(what-ness)의 자기만족적 친숙함을 삼가고, 행위와 새로운 관계 및 현실들을 발생시킬 수 있는 상쾌한 역량을 위해 사회적인 것의 유혹적인 안락을 거절한다.
아렌트의 시각에서 볼 때, 선재적(先在的)이고 공유되며 안정된 동일성의 기초 위에 스스로를 구성/입헌하는 정치 공동체는, 정치의 공간을 폐쇄하고 정치적 행위가 상정하는 복수성과 다중성을 동질화하거나 억압할 위험이 있다. 아렌트는 복수성이나 다중성을 극복하려는 시도가 반드시 “공적 영역 자체의 폐지”와 “모든 타인들에 대한 자의적 지배,” 또는 “실재적 세계를 이 타인들이 아예 존재하지 않을 상상적 세계로 교체”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한다(HC 220, 234). 이 같은 교체를 방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정치 공동체들의 비동일성과 이질성들로써, 그리고 또한 정상화/표준화적 주체성의 구축과 자율성의 부과에 대한(또한 성/성별 동일성들을 남성과 여성,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의 이원적 범주로 형성하려는 것에 대한) 자아의 저항으로써 정치 공간들을 보호하는 것이다. 자아를 정의하려 드는 사회적, 심리적, 사법적 범주들에 대한 자아의 갈등주의적 어긋남은 권력 발생의 원천이자, (대안적) 수행성(들)을 발생시키는 장소가 있다는 신호다.
아렌트가 민족 국가에 적의를 품었던 것은 이처럼 정치와 행위의 조건으로 차이와 복수성을 염려하기 때문인데, 민족 국가의 혐오스러운 “결정적 원칙”은 그것의 “과거와 기원에 대한 동질성”이다(OR 174). 그리고 이것은 또한 그녀가 페미니즘 정치라는 주제에 침묵한 이유를 설명해 줄 것이다. 아렌트는 “여성의 경험”이나 “여성의 앎의 방식” 안에서 동질성을 선포하려는 어떤 시도에 대해서도 굉장히 경계했었을 것이다. 그녀는 저 (이른바) 동일성의 경계 내부의 중요한 차이와 복수성들―또는 심지어 [동일성의 경계]에 대한 저항―을 숨기(거나 금지하거나 처벌하거나 침묵시키)는 보편성을 함축한다거나 그것을 열망하는 여성 범주에 의지하는 어떤 페미니즘 정치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을 것이다.
이 같은 의견은 추리한 것인데, 왜냐하면 아렌트가 자신의 이론 작업에서 페미니즘이나 페미니즘 정치라는 쟁점을 다루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 자신은 그동안 아렌트에게 직접적으로 성별 문제를 제기하길 꺼려했는데, 왜냐하면 아렌트에 대한 페미니즘적 비판자들이 이 문제를 도덕주의적인 방식으로 제기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아렌트가, 여성으로서, “여성 문제”를 제기하거나, 적어도 여성을 염두에 두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정치를 이론화할 책임이 있다고 가정했다. 그녀가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에 그녀는 부역자(collaborator)로 규정된다. 이 같은 고발을 가장 쌀쌀맞고 강력하게 제기한 것은 아드리엔느 리치인데, 그녀는 『인간의 조건』이 “거만하고 불구적인 책”이고 “남성 이데올로기로 길러진 여성 정신의 비극”을 보여 준다고 묘사한다.31) 나는 여기서 가정하는 책임에 대해 별로 확신하지 않기에, 이 질문들을 제기하되 이런 방식으로는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즉 이런 책임을 할당하거나 함축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나는 아렌트가 한 패(joiner)가 되기를 거부한 것에 대해, 동일성 정치와 동일성 공동체에 소속되는 것을 그녀가 경계한 것에 대해, 로자 룩셈부르크에 대해(뿐만 아니라, 내 생각에, 그녀 자신에 대해) “그녀 세대의 모든 다른 여성들과 정치적 신념들이 불가항력적으로 이끌린 여성해방운동에 대해 그녀가 보인 혐오는 중요한 것이었다. 여성 참정권론자(suffragette) 식 평등의 면전에서 그녀는 ‘작은 차이 만세’(Vive la petite différence)라고 대답하고 싶었을 것 같다.”32)라고 말하게 한 놀라운 외고집에 대해 얼마간 존경심을 느낀다.
괴짜스런 논평이다. 그 정치적 헌신을 정치가 아닌 “운동”과의 “불가항력적인” 동일화의 산물로 기각당한 여성 참정권론자들에게는 확실히 부당할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흥미로운 논평이긴 하다. 이 룩셈부르크가 찬사를 보냈다고 아렌트가 상상하는 이 작은 차이란 무엇인가? 이는 성적 차이가 아니다 ― 이는 차이이며, 전혀 작지 않다. 작은 차이란 (비록 아렌트의 의미심장한 어법 선택으로 그 자체 성별화되긴 했지만) 성/성별-내적인 차이다. 그것은 룩셈부르크와 여타 여성들을 구별하는 차이다. 아렌트가 룩셈부르크에게서 존경한 것은, 아렌트 자신이 얻으려고 분투한 자질이다. 소속의 거부, 특정한 종류의 평등보다 차이나 구별의 선택이 그것이다.33) 그녀가 이 절에서 얘기하는 “여성 참정권 평등”은 이 여성들이 여전히 얻으려고 분투하는 남성 유권자들과의 공민적 평등이 아니다. 그것은 여성 참정권론자들 사이의 평등, 공동의 대의에 대한 그들의 헌신인데, 이 대의의 명목 하에 그들 간의 차이가 말소된다(고 아렌트는 주장한다). 아렌트가 구성하고 찬사를 보내는 로자 룩셈부르크는, “외부자”이자, “그녀가 혐오했던 나라의 폴란드계 유대인”이며, “그녀가 곧 경멸하게 되는 [정]당”의 구성원이자, “여성,” 곧 여성운동의 “불가항력적” 꾐에 저항하고, 다른 투쟁들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며, 이로써 동질성이 아닌 구별의 동일성을 혼자 힘으로 쟁취한 탁월한 유형의 여성이다.
동일성의 정치에 대한 동일한 감정들, 동일한 거리두기의 기술과 혐오가 게르숌 숄렘과 아렌트의 서신교환에서 분명하게 나타나는데, 이 서신교환은 아이히만(Eichmann)에 관한 아렌트의 논쟁적 책을 대상으로 삼는다는 명목을 내세웠지만, 실은 또는 마찬가지로 아렌트의 (자칭 사적 영역의) 유대인으로서의 동일성이라는 용어에 관한 논쟁이었다.34) 이 짧은 서신교환은 동일성의 정치에서 계발적이고 도발적인 연구다. 아렌트에게 보낸 숄렘의 편지는 동일화와 정치화를 행사한다. 그는 아렌트에게 그녀의 책이 “신자의 확신”을 거의 담고 있지 않고, “허약함”과 “비열함, 그리고 권력욕(power-lust)”을 표출하며, “독자(one)에게 … 편집자에 대한 … 신랄함과 치욕의 느낌을 남긴다”고, 그는 그녀에게 “깊은 존경심”을 갖고 있으며, 그녀의 책에 흐르는 “냉혹하고” “거의 냉소적이고 악의가 느껴지기까지 하는 어조”에 그녀의 주의를 환기시켜야만 하는 것은 이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그녀(“친애하는 한나”)에게서 어떤 “아하바트 이스라엘(Ababath Israel, 이스라엘을 사랑하라는 히브리어), ‘유대 민족을 사랑하라’”의 “흔적을 거의” 찾을 수 없고, 이 같은 부재는 “독일 좌파 출신의 수많은 지식인들에게” 전형적이다[고 말한다]. 무엇이 숄렘에게 이 모든 것들을 말할 수 있게, 그리고 그것들을 도덕적 결점으로 낙인찍을 수 있게 허가하는가? 그것은 그가 아렌트를 “전적으로 우리 민족의 딸로만 [여길 뿐], 다른 식으로는 전혀”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이다.35)
아렌트는 두 가지 전략적 거부로 대응한다. 첫째, 그녀는 그녀가 “전적으로” 유대적일 뿐, 차이들이나 다른 동일성들에 의해 갈라지거나 구성되지 않는다는 그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한다. 둘째, 그녀는 유대적 동일성이 표현적이며, 공적 효과를 갖고 특정하고 분명한 책임들을 동반한다는 숄렘의 가정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녀는 특정한 종류의 행위, 언표, 그리고 감정이 그녀가 유대인이라는 사실로부터 필연적으로 따라 나와야 마땅하다는 주장에 저항한다. 그러나 시종일관 그녀는 숄렘과 마찬가지로 유대적 동일성이 (그녀의 다중적이지만 사적인 동일성의 다른 사실들처럼) “논의의 여지가 없고” 일의적이며 진술적인 “사실”이며 “논의”나 “논쟁에 열려 있지 않다”고 가정한다. 그렇기에 그녀는 그녀에 관한 숄렘의 많은 진술들이 “단순히 틀렸으며” 그녀가 그것을 교정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녀는 “‘독일 좌파 출신 지식인들’ 중 한 명이 아니다.” 만일 아렌트가 “‘어딘가에서 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독일 철학의 전통에서다.”
숄렘이 “나는 당신을 전적으로 우리 민족의 딸로만 [여길 뿐], 다른 식으로는 전혀 여기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 아렌트는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진실은, 내가 나 자신인 것 이외에 어떤 다른 식이라거나 다른 무언가인 척 해 본 적이 결코 없으며, 그런 방향으로는 유혹조차 느껴본 적 없다는 것이다.” 요점은 그녀가 유대 민족의 “딸”과 다른 무언가인 척 해 본 적 없다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단지 그녀임(what she is)과 다른 무언가인 척 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아렌트는 그녀가 무엇인지(what she is)에 관해 결코 말하지 않으며, 스스로를 긍정적으로 식별하지 않는다. 그녀가 말하는 전부는 “나 자신과 다른 … 무언가[인 척 하는 것은] … 내가 여자가 아니라 남자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을 것이다 ― 말하자면 약간 제정신이 아닌 것이다.” 다시, 그녀 자신에 대한, 이 경우에는 여성으로서의 긍정적 식별이 없고, 단지 그 역을 주장하는 것은 “제정신이 아니”라는 주장이 있을 뿐이다.(그것을 긍정적으로 주장하면 어떻게 될까?)36)
숄렘이 그녀를 “전적으로 우리 민족의 딸로만 [여길 뿐], 다른 식으로는 전혀” 여기지 않는 곳에서, 아렌트는 그녀 자신의 “유대성(Jewishness)을 내 삶의 논의의 여지가 없는 사실적 소여(所與, data) 중 하나”로 “항상 여겨 왔다.” 그녀는 자신의 유대성이 숄렘이 투사하는 것처럼 [스스로를] “전적으로” 구성하는 동일성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아렌트는 다른 “사실들”에 의해서도 구성되는데, 그녀가 여기서 언급하는 것은 그 중 두 가지다 ― 성/성별, 그리고 독일 철학을 수업한 것이 그것이다.37) 그렇기에 아렌트는, 그녀가 “전적으로” “우리 민족의 딸”이라는 숄렘의 묘사는 그가 그녀에게 “붙이고 싶어 하는” “꼬리표”이지만, 그것은 “과거에 들어맞아 본 적이 없고, 현재에도 들어맞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38) 이는 어긋난 채 들러붙어 있는 꼬리표인데, 왜냐하면 아렌트의 유대성은 복잡하고 갈등적인 동일성의 파편이기 때문이다.
아렌트가 볼 때, 그녀가 이해하는 식의 유대성이라는 사실에서는 아무 것도 따라나오지 않는다. 그녀의 유대성은 사적 문제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사실이며, 전혀 행위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점, 그 사실성에 아렌트는 감사함을 느낀다. “있는 그대로의 모든 것에 대한 기본적 감사 같은 것이 있다. 주어졌던 것이지 만들어지지 않았고 만들어질 수 없는 것에 대한, 퓌세이(physei, ‘자연적’이라는 뜻의 희랍어)이지 노모이(nomoi, ‘인위적’이라는 뜻의 희랍어)이지 않은 것에 대한,” “토론이나 논쟁 너머의” 것들에 대한 [감사]. 그녀의 종족적, 종교적, 문화적 동일성이 주어진 것이자 사적 사실, 만들어지거나 행위할 수 없는 것이라는 이 같은 단언은 숄렘에게 보내는 아렌트의 편지에 구조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아렌트는 그녀의 사적 동일성이라는 사실들에 대한 토론으로 편지를 시작하는데, [이 토론은] 그녀가 사실적 오류라고 간주하는 것들을 겨냥한 일련의 정정으로 제시된다. 이 같은 사실에 관한 문제는 흥미롭지 않으며, “논쟁에 열려 있지 않다.” 아렌트는 편지를 전(前)정치적인 전문(前文)으로, 뒤따르는 정치적 논쟁과 분리된 것으로 제시한다. 오직 후반부만이 발언과 “토론할 가치가 있는 문제들”을 다룬다. 그녀는 이 구별을 강조하기 위해, 동일성에 중심을 둔 예비 단계가 끝나고 정치적 논쟁이 개시된다는 점을 표시하는 다음 문구로 문단을 시작한다. “요점으로 들어가자면.”
그러나 이 편지에서 아렌트가 감사해 한 바로 그것이야말로, 이 대립에서 숄렘이 그녀에게 용인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숄렘은 그녀의 유대적 동일성을 사적 사안으로 대하지 않으려 한다. 숄렘이 볼 때, 식별가능하고 논란의 여지가 없는 특정한 공적 책임들과 함의들이 아렌트의 유대성이라는 논의의 여지가 없고 일의적인 사실에서 따라 나온다. 이것이 아렌트가 숄렘의 포함에 저항하는 이유고, 그가 유대 민족의 “전적으로 딸로만” 그녀를 기록하는 것에 저항하는 까닭이다. 그녀는 숄렘이 유대인에게 귀속시키고 요구하는 평등이나 동일성보다, 차이 심지어 작은 차이를 소중히 여긴다. 그녀는 그의 동일성의 정치에서, 행실이 동질화되게끔 통제하고 독립적 비판을 침묵시키는 음험한 자원을 본다.
유대적 동일성의 사적 자유, 곧 숄렘의 고발 및 매우 공적이고 극히 정치화된 이 동일성 논쟁에 의해 이미 문제화된 사적 자유를 고집하는 대신, 아렌트는 유대성을 동일성으로 구성하는 숄렘의 용어에 더 잘 대항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전략은 아렌트가 쓸 수 없는 것이었는데, 왜냐하면 그녀는 가장 중요한 지점에서 숄렘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녀와 숄렘 모두 유대 동일성을 일의적이고 진술적인 사실로 간주한다. 그들이 의견을 달리 하는 것은 그것이 공적인 사실이냐 사적인 사실이냐 여부,39) 그것에서 행위를 위한 요구나 지침이 따라 나오느냐 여부일 뿐, 양쪽 모두 유대성이 “만들어질 수 없고”, 더욱이 말소(unmade)될 수 없는 사실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그것은 행위자가 하는 일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숄렘이 아렌트를, 그녀가 쓴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외양상의 어떤 “아하바트 이스라엘”의 완전한 결여에도 불구하고, “전적으로” “우리 민족의 딸”이라고 간주할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아렌트는 그녀가 무엇을 하든 유대인으로서의 그녀의 진정한(authentic) 동일성을 부인하거나 전복할 수 없었다. 이 점에 관해서 아렌트는 완벽하게 일치한다. 그녀의 방어 전략은 숄렘의 비난의 기본적 전제를 흉내 낸다. 그녀가 행한 그 무엇도 그녀의 유대성이라는 논의의 여지가 없고 진술적 사실을 의문시하거나 전복할 수 없다.
유대적 동일성을 진술성으로 간주함으로써, 아렌트는 유대 동일성에 수행적으로 개입하거나 심지어 전복할 기회, 그 역사성과 이질성을 탐색할 기회, 일의성에 대한 그것의 열망을 몰아내거나 좌절시킬 기회, 그 분화된 가능성들을 증식시킬 기회들을 포기한다. 이 때문에 아렌트에게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특정한 책임들을 함축하고 충성을 요구하는 동질적이고 알의적인 동일성으로 유대성을 묘사하는 숄렘에게 비판적으로 응답할 수 있는 어떤 자원도 남지 않게 된다. 좋은 유대인과 나쁜 유대인을 구별하는 숄렘의 진술적 기준은 본래대로 남아 있다. 건강한 여성과 불구화된 여성을, 충성스러운 여성과 배신한 여성을 구별하는 아드리엔느 리치의 전략에도 동일한 논리가 적용될 것이다. 그녀가 아렌트를 “전적으로 (여성으로) [여길 뿐], 다른 식으로는 전혀” 여기지 않기 때문에, 그녀는 (독일 철학의 수업 같은) 아렌트의 다른 구성적 동일성들이 아렌트의 ― 여성으로서의 ― 진정하고 일의적인 동일성에 대한 배신이라고 간주할 수 있는 것이다.
숄렘이나 리치, 나아가 모든 동일성의 정치에 맞선 보다 강력하고 고무적인 방어책은 불가항력적인 것에 저항하는 것인데, 그 수단은 그것을 사유화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되는 자칭 불가항력적이고 동질적이며 진술적이고 일의적인 동일성의 가면을 벗겨, 그것이 수행적으로 생산된 것이고, 다중적인 수행과 행실의 균열되고 파편적이며 어긋나고 미완성적이며 침전되어 있고 이음매로 가득한 산물이며, 헤아릴 수 없는 반복과 강제의 자연화된 산물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이 독립 선언의 “자명한 진리”의 강제적 폭력에 맞서 그 문헌의 “우리는 생각한다”에 힘을 불어 넣은 아렌트의 전략이다. 이 고무(鼓舞)의 전략을 전유하여, 어떤 유대적이고 페미니즘적인 동일성의 정치가 가정하는 일의성과 자명성의 폭력적 폐쇄를 폭로하고 개입하며 전복하거나 저항한다면 어떻겠는가?
여기서의 전략은 기성의 동일성들을 중단시키는 것, 그리고 동일자(sameness)의 평등을 위해 차이를 말소하지 않는 페미니즘과 동질화하지 않는 유대성을 이론화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여기서의 전략은 차이들을 사물화하기보다 그것들을 증식시키고 탐색하는 것이며, 그 결과는 자신의 유대성을 (행)하는(do one's Jewishness) 수많은 길, 자신의 성별을 (행)하는 수많은 길이 있다는 고무적인 발견이나 강조가 될 것이다.40) 어떤 (이른바) 사적 영역 동일성이 갖는 동질화하는 효과는 약화될 것이고, 이는 “동일성들” 자체의 틀 부에서 더 많은 분화와 대항가능성을 허용할 것이다.
이 중단의 전략은 아렌트가 찬사해 마지않았던 국외자(局外者, pariah, 최하층민)이라는 개념 및 국외자의 관점에 대한 중요한 대안을 구성한다.41) 아렌트는 (로자 룩셈부르크를 비롯하여 아렌트가 존경했던 다른 이들로 상징되는) 의식적 국외자의 외부자(outsider)적 위치를, 그 곳에 있는 이가 독립적인 비판과 행위 그리고 판단에 필수적인 거리를 확보할 수 있는 특권적인 장소로 간주한다. 그러나 아렌트가 국외자 위치를 입지(location)하는 것은, 형성된 동일성들 내부에서는 어떤 비판적 지렛대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녀의 문제적인 가정에 힘입는다. 아렌트가 국외자의 외부자적 지위에 찬사를 보내는 것은, 동일성들이 성공한다고, 그들이 분명 이음매 없음(seamlessness)과 폐쇄를 획득한다고, 그들은 필연적으로 동질화적이라고 그녀가 믿기 때문이다. 내가 여기서 전개하고 탐색한 갈등주의적인 수행성의 정치는 그 대신에 동일성들이 결코 이음매가 없지 않다는 것, 기존 동일성들의 단절, 부적합성, 그리고 어긋남들 내부에 비판적인 지렛대의 장소가 있다는 것을 가정한다. 그것은 따라서 국외자의 위치는 그 자체로 불안정하다는 것, 국외자는 결코 실제로 외부자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것의 장소들은 다중적이라는 것을 가정한다. 이 다중적인 장소들은 아렌트적 정치의 특권화된 공적 공간을 탈중심화하고 행위의 장소들을 단일한 공적 영역 너머로 증식시킴으로써 잠재적 권력과 저항의 보다 광범위한 공간들을 탐색한다.42)
이 갈등주의적 페미니즘은 또한 갈등주의를 일종의 공동 행위(action in concert)로 가정함으로써 아렌트의 국외자에 함축된 개인주의에서 벗어난다.43) 갈등주의적 페미니스트들이 개입하는 동일성들은 공유되며, 공적 실천들은 그저 개인적 개성들의 표지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어떤 특정한 갈등주의적 행위가 한 명이나 여러 명의 행위자들에 의해 수행될 수도 있겠지만, 행위의 요점은 다른 이들이 자신의 차례에 각각 탐색하고 증대하며 수정할 수 있는 개성화와 정치의 새로운 공간들을 개방하고 정초함으로써 사회적인 것의 정상화/표준화하는 효과를 상쇄하는 것이다. 이 페미니즘 정치가 전제하는 것은 “여성”이라는 이미 알려지고 통일적인 동일성이 아니라, 갈등주의적이고 차별적이며 다중적인 비동일화된/식별되지 않은(nonidentified) 존재들로서, 이들은 항상 생성 중이며 항상 증대와 수정을 요청한다. (어떤 동일성의 표현적인 열망에 저항하지만 마찬가지로 항상 감응하는) 갈등주의적이고 수행적인 이 정치는, 새로운 관계들과 새로운 현실들을 창조할뿐더러 낡은 것들을 수정하고 증대하고자 한다 … 심지어 사적 영역 안에서도 말이다.

후기: 갈등주의 대 연합주의?44)

정치 이론가들과 페미니스트들은 특히 아렌트 정치의 갈등주의적 차원을 들어 아렌트를 오랫동안 비판해 왔는데, 그 죄목은 갈등주의가 남성주의적이고, 영웅주의적이며, 폭력적이고, 경쟁적이고, (단순히) 심미적이며, 또는 필연적으로 개인주의적 실천이라는 것이다.45) 이 이론가들에게 갈등주의적 페미니즘이라는 통념은 기껏 해야 형용모순이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혼잡하든지 아마 위험한 관념일 것이다. 실라 벤하비브는 그들의 시각을 사실상 승인하는데, 그녀는 최근 일련의 유력한 논문들에서, 페미니즘에 적합한 아렌트를 구출하려는 시도의 수단으로써 그녀의 사고에서 갈등주의를 도려내려 한다.46) 벤하비브는 갈등주의를 “연합주의”(associationism)와 병렬하면서 이들이 두 가지 양자택일적인 “공적 영역의 모형”47)라고, 그리고 이들 중에서 연합적 모형이 우위를 점하는데 이는 그것이 “더 근대적인 정치 인식”일 뿐더러 페미니즘에게도 더 나은 모형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벤하비브는 페미니즘에 대한 갈등주의의 의미와 가능성들을 재평가하기보다, 갈등주의를 남성 행위의 기원으로 [보는] 앞선 페미니스트의 성별화를 받아들이고 심지어 상술한다. 그녀는 개인들이 각자와 공동으로 행위하는 연합적 모형을 특권화하면서, 모든 공동 행위의 필연적으로 갈등주의적인 차원에 대한 절실한 평가를 페미니즘에게서 박탈하는데, 이 차원에서 정치적으로 연루된 개인들은 서로서로 함께 그리고 맞서서(both with and against) 행위하고 투쟁한다.
“페미니즘 이론과 한나 아렌트의 공적 공간 개념”에서 벤하비브는 갈등주의와 연합주의를 완벽한 거울상으로 구축한다. “도덕적으로 동질적이고 정치적으로 평등주의적인, 그러나 배타적인 공동체”를 전제하는 아곤과 달리, 근대 공적 공간은 이질적이다. “그것에 대한 접근이나 토론의 의제는,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동질성의 기준에 따라 미리 정의될 수 없다.” 아곤이 안정적인 공적 공간에 자유를 위치 짓는 반면, 연합적 모형은 공간이 아닌 실천으로 자유를 다룬다. 그것은 그것이 발생하는 모든 장소와 모든 시간에 “공동 행위에서 출현”한다. “아곤적인 공간은 협력보다는 경쟁에 기초”하며, 이는 공동 행위가 아니라 “위대함, 영웅주의, 그리고 탁월함”에 초점을 둔다. 그것은 그들을 함께 묶기보다는 “그것에 참여하는 이들을 개별화(individuate)하며 그들을 서로서로 분리시킨다.”48)
[갈등주의의] 반대항으로 가정된 연합주의 편에서 이처럼 갈등주의를 기각하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일련의 문제적인 정의와 생략에 기초한다. 첫째, 갈등주의는 엄격하게 고전적인 용어로 정의되는 반면, 연합주의는 근대성에 맞게 개정되고 갱신된다. 이처럼 아렌트적 아곤을 본질적이고 필연적으로 고전적인 영웅적 개인주의의 장소로 그리는 것은, 갈등주의를 공동 행위의 실천으로의 아렌트 자신의 재의미화 앞에서 비산(飛散)한다.(아렌트는 자신이 설명하는 행위는 ― 그것의 가장 아곤적인 형태에서조차 ― 항상, 항상 공동적(in concert)이라는 점을 아주 분명히 한다.)49) 그런 다음 벤하비브는 아렌트적 연합주의를 개정하고 갱신하는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는데, 이는 그녀가 승인하고 싶어 하는 공적 영역의 보다 근대적인 인식을 생산하기 위해서다. 벤하비브는 아렌트가 “그녀 자신의 연합적 모형과 양립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녀의 공적 영역 개념을 제한한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아렌트의 연합주의를 수정하여 아렌트가 반정치적인 것으로 기각한 용무들을 포함하도록 하고(갈등주의의 경우에는 이 같은 수정이 진척되지 않는다.), 다시 한 번 아렌트 자신의 설명에 반하여, 연합주의를 공적 담론의 “실체적이지 않고 절차적인” 모형과 동일화함으로써 이 양립불가능성을 완화한다.50)
문제는 벤하비브가 아렌트의 설명을 수정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아렌트와 함께 아렌트에 맞서(with Arendt against Arendt) 사고”51)함으로써 진행되는 것이 자신의 기획이라는 입장을 아주 분명하게 취한다. 문제는 그녀가 아렌트의 다중적인 정치 행위의 전망을 두 개의 구별되고 분리되며 상호 배타적인 공적 공간 유형으로 가른다는 점, 우리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그녀가 역설한다는 점, 그 쌍을 비대칭적으로 간주함으로써 특정한 선택을 유도한다는 점, 그리고 (이 시점에서는 별로 놀라울 것도 없지만) 연합주의가 두 가지 통념 중 더 근대적이기 때문에 더 좋은 것이라고 그녀가 결론을 내린다는 점에 있다.
다른 논문인 “한나 아렌트와 서사의 구원적 힘”에서 아곤은 다시 한 번 평가절하되는데, 이번에는 담론적인(연합적인) 공적 공간과의 대조를 통해서다. 벤하비브는 다시 한 번 비대칭적으로 나아가면서 아렌트적 행위의 담론적인 계기를 은유화하지만 그 갈등주의적 이면은 내버려 두는데, 이 때 갈등주의적인 공적 공간은 “위상학적이거나 제도적인” 장소라고 주장하는 한편, 아렌트의 보다 “근대적인” 통념인 담론적인 공적 공간은 “사람들이 함께 공동 행위하는 경우라면 언제 어디서든 출현한다”고 역설한다.52) 이 같은 은유화의 한계는 그러나 자의적이다. 다양한 다소 갈등주의적이면서 연합주의적인 공적 공간에 대한 아렌트의 설명 중에서, 후자가 전자보다 벤하비브가 추구하는 분산에 더 호의적(amenable)이라고 시사하는 것은 없다. 만일 우리가, “아렌트와 함께 아렌트에 맞서,” 인민들이 함께 공동 행위할 땐 언제나 연합적인 공적 공간이 출현한다고 말한다면, 인민들이 공동으로 각자와 함께 그리고 [각자에] 맞서(with and against each other) 행위하고 투쟁할 땐 언제나 갈등주의적인 공적 공간이 출현한다고 말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벤하비브는 최근 논문 “국외자와 그녀의 그림자: 한나 아렌트의 라헬 파른하겐(Rahel Varnhagen) 전기”에서 갈등주의/연합주의 이항을 한층 성별화하여, 남성적인 갈등주의적 공간과 이제 명시적으로 여성화된 연합주의를 병렬하는데, 여기서 후자는 살롱으로 모형화된다. 벤하비브는 낭만주의 시대 유대계 독일 살롱 여주인(hostess)에 대한 아렌트의 초창기 전기(傳記) 『라헬 파른하겐』을 과감하게 끌어들이면서, 연합과 친교, 대화와 우정, 그리고 여성 작인(作人, agency)을 북돋는 연합적이고 여성 지배적인 준(準)공적 공간으로 살롱을 옹호한다. 반면 아곤적인 공간은 여성을 배제하고 투쟁과 경쟁을 일으키는 곳으로 언급된다.53)
그러나 살롱이 지지하는 것은 벤하비브의 여성화된 연합주의보다는, 벤하비브가 보존하려는 대당들 예컨대 갈등주의와 연합주의 간의 대당이랄지, 공적 공간의 남성친화적 모형과 여성친화적인 모형 간의 대당들을 약화시키려는 (나 자신과 같은) 시도들이다. 여성들은 분명 다른 공적 영역들에서보다 살롱에서 더 많은 권력을 가졌지만, 그 권력은 공적이고 사적인 가부장 권력에 의존했다. 여성들이 주인 노릇을 한 살롱은 일시적으로 부재한 아버지들과 남편들의 소유였다. 라헬의 살롱이 거둔 짧은 성공은 부분적으로, 대학이나 의회, 궁정 따위의 경쟁하는 남성적 문화 중심지가 우연적․일시적으로 부재한 데서 비롯됐다.54) 더욱이 살롱은 우정과 교통, 친교뿐만 아니라 험담, 음모, 경쟁, 투쟁 등을 낳은 것으로도 유명했다. 사람들은 거의 … 갈등주의라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벤하비브는 이 모두를 인정하지만, 그녀의 연합적 이상에 대한 살롱의 표상이 갖는 이 같은 결점은 문제될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데, 왜냐하면 그녀의 관심은 살롱 그 자체를 복원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연합주의의 “전조(前兆)”로, “그 미래 잠재력의 일부를 과거에 보유한 존재”로 다루는 데 있기 때문이다.55) 꽤 공평한 평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화된 연합주의의 모형으로서 살롱이 갖는 결점은, 살롱을 갈등주의/연합주의 이원항을 성별화하려는 수단적 형상으로 활용하는 벤하비브의 견해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가?56) 갈등주의적 차원과 연합주의적 차원을 복잡하게 결합하는 살롱은 아마 벤하비브가 살롱의 사례를 근거 삼아 제시하는 상호 배타적인 대당을 (지지하기보다는) 동요시킬 것이다.
이 논문에서 탐색한 유형의 갈등주의는 벤하비브가 기각한 갈등주의와 같지 않다. 이는 그녀의 이원항에 저항하거나 그것을 초과하는 공동 행위의 일종이다. 영웅적 개인주의라거나 합의에 기초를 둔 연합주의가 아닌 이 갈등주의는, 항상 투쟁의 장소이기도 한 공동 행위, 차이와 복수성이 새겨지고 갈라진 세계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항상 동료들과 함께 그리고 맞서 있는 공동의(concerted) 페미니즘적 노력의 모형을 만든다. 이 갈등주의가 출발점으로 삼는 것은 아렌트의 재의미화된 갈등주의지, 고전적인 폴리스 경험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남-녀 대당에도 깔끔하게 들어맞지 않는다. 그것은 이 관습적인 대당을 적으로 삼는다. 그리고 그것은 수월성(秀越性, excellence)이나 극적 자기과시가 아니라, 동질화와 정상화/표준화를 배경으로 하는 개성화 및 구별을 향한 탐험에 중심을 둔다. 벤하비브가 볼 때 갈등주의란, 행위자들이 “구별과 수월성을” 다투는 실천이다.57)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갈등주의의 구별-수여적(distinction-awarding) 효과를 명성이나 수월성에 대한 갈망과 즉각적으로 동일시하는 그녀의 견해는, 고전적 갈등주의에도 적용될 뿐더러 보다 (탈)근대적인 차원을 가질 수 있는 “구별”에 대한 대안적 독해를 박탈한다. 아렌트의 이론적 설명을 움직였던 구별에 대한 갈등적(agonal) 열정은 또한, 개성화 및 구별된 자아로서의 출현을 향한 투쟁으로 읽힐 수도 있다. 아렌트의 용어를 빌자면, “무엇”이라기보다는 “누구”, 명성 그 자체가 아니라 개성을 소유한 자아, 그것을 정의하고 고정하려 드는 (사회학적, 심리학적, 사법적) 범주들에 의해 결코 소진되지 않는 자아 말이다.
고전적인 아곤만이 수여할 수 있었던 명성과 수월성에 더 이상 속박되지 않을 때, 이 열정을 갈등적(agonal) 열정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서 승인된 페미니즘 실천들이 갈등주의적인 까닭은 그것들이 투쟁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특히 성/성별을 지배하는 실천들을 (재)정초하고 증대하고 수정하려는 정치적 투쟁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아곤의 전투원들이 공적으로 지지되는 타자(Other)와 함께 그리고 맞서 투쟁하는 관계 안에서 스스로를 개성화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갈등주의적 페미니스트들은 동료들과의 투쟁을 지지하여 다양한 페미니즘들, 성/성별의 지배적 실천들과 동일성들, 그리고 그것들을 실천하고 강제하는 타인들과 함께 그리고 맞서 스스로를 개성화하고 위치 짓고자 한다.58) 갈등주의적 페미니스트들은 관습적인 성/성별 실천을 중단시키고 관습적인 성/성별 이원항들의 자칭 우선성을 탈중심화함으로써 개성화와 구별을 획득하고 북돋는다.59) 이 개성화 과정은, 비록 일련의 행위들과 수행들을 누군가가 목격할 수도 있겠지만, 청중(audience, 관객)을 위해서 수행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녀와 같은 타인들과 제휴하여 개성화를 얻는 자아, 그리고 비록 항상 갈등적일 테지만, 이 공유된 지지와 투쟁의 실천들을 통해 동일한 것을 할 수 있게 되는 타인들을 위한 것이다. 갈등주의적 개성화는 정치적인 또는 페미니즘적인 행위의 목표가 될 필요는 없다. 아렌트가 잘 알았던 것처럼, 개성화는 차라리 정치적 참여의 부산물 중 하나로 얻어지는 경향이 있다. 정치적인 공동 행위의 신고(辛苦)한 시험을 통해 아렌트적 행위자들은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발견한다. 이 같은 자기발견이나 변혁을 단순히 유치한(boyish) 태도로 회피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또한 현세적인 장치 안에서 특성과 개성의 발전을 신호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갈등주의적 페미니즘이 공동의 정치 행위에 참여하는 효과로 얻어지는 개성의 발전을 강조하는 것은, 갈등주의와 연합주의를 한 동아리로 묶는 아렌트의 본래 시도를 복원한다.60) 이 복원은 현 시점의 동시대 페미니즘들에게 중요한데, 왜냐하면 “여성”이라는 동질화적이고 규율적인 범주를 일부 페미니즘들이 활용하는 것에 대응하기 위해 근래 우리가 차이와 복수성에 초점을 두다 보니, 일부 사람들이 통일적 동일성, 대의 또는 토대가 부재하는 가운데 어떻게 미래의 페미니즘이 공동의 행위를 추동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해 왔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동일성이 아니라 차이와 복수성을 토대로 놓는 갈등주의적인 공동 행위를 이론화함으로써 (특별히 페미니즘을 위해서는 아니겠지만) 우리가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게 돕는다. 그녀는, 주체성의 무엇-임(what-ness)을 행위의 출발점으로 삼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함으로써, [여성의] 형상이 항상 이미 알려진 동일성을 의미하게 만들기보다는 “여성”을 의문시하려고 노력하는 페미니즘들을 위한 (의식하진 않았겠지만 귀중한) 모형을 제공한다. 아렌트는 (행위의 동작주(動作主, agents) 내부 그리고 사이에서) 차이들로 갈라진 공동 행위를 이론화함으로써, 공동 행위를 타인들과 “함께”일 뿐만 아니라 항상 동시에 “맞서는” 관계들에 우리를 연루시키는 (재)정초, 증대, 수정의 실천으로 생각하게 해 준다. 요컨대, 일단 우리가 갈등주의와 연합주의를 상호 배타적인 양자택일로 생각하기를 그만둔다면, 우리는 “아렌트와 함께 아렌트에 맞서” ― 페미니스트들이 항상 탈중심화하고 저항하며 초월하고자 노력했던 ― 지배적인 성/성별 이원항을 단순히 재활용하기보다는 그것에 개입하기에 좋은 위치를 점하는 갈등주의적이고 페미니즘적인 정치 행위의 (증대되고 수정된) 전망을 전개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될 것이다.61)



1) Rahel Varnhagen: The Life of a Jewish Woman, rev. ed., trans. Richard and Clara Winston (New York: Harcourt Brace Jovanovich, 1974), ⅹⅷ. 본문으로
2) 가장 적대적인 비난은 Adrienne Rich의 On Lies, Secretes and Silences: Selected Prose, 1966~1978 (New York: Norton, 1979)과 Mary O'Brien의 The Politics of Reproduction (Boston: Routledge and Kegan Paul, 1981). 나는 리치의 비난을 아래에서 간략히 논하고 이 논문의 마지막 절에서 갈등주의에 대한 페미니즘적 기각을 둘러싼 쟁점들을 취급할 것이다. 본문으로
3) The Human Condition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8), 155, 200[국역: 한길사, 1996]; 이하 HC로 인용. 본문으로
4) On Revolution (New York: Penguin Books, 1963), 130[국역: 한길사, 2004]; 이하 OR로 인용. [역주] 아래에서 필자는 아렌트의 정치 이론을 설명하기 위해 몇 가지 언어학적 개념을 사용한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간략한 설명을 덧붙인다.
우선 기표(記表, signifier), 기의(記意, signified), 지시대상(referent)에 대해 알아보자. 기표란 우리가 말하거나 기록하는 시각적․음성적 물질성이고, 기의는 기표가 의미하는 개념이며, 지시대상은 기표나 기의가 지시하는 현실 속의 대상이다. 예를 들어 ‘집’이라는 글자, 그리고 우리가 ‘집’이라고 발음할 때의 음성적인 물질성이 기표고, 이 기표가 의미하는 내용인 ‘사람이 들어서 살 수 있게 만든 것’이 기의이며, 현실에 존재하는 건물이 지시대상이다. 한 편 기표와 기의가 결합된 것이 기호(記號, sign)이고, 이 결합 과정을 ‘의미작용’(signification)이라고 부른다.
또한 필자는 영국의 언어철학자인 존 오스틴에서 유래한 진술문과 수행문의 구별을 체계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진술문이란 예를 들어 “당신은 나의 아내다.”처럼 참과 거짓을 따질 수 있는 문장이며, 수행문이란 “이 쪽으로 와라.”와 같은 명령, “당신은 누구인가?”와 같은 질문, “이 달 말까지 재산을 양도하겠다.”와 같은 약속, 그리고 “이로써 폐회를 선포한다.”와 같은 선언 등, 발화 자체가 하나의 행위인 문장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진술문과 수행문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점이다. 위에서 예로 든 “당신은 나의 아내다.”의 경우 참/거짓을 가릴 수 있다는 점에서 틀림없는 진술문이지만, 이 언표를 발화함으로써 부부 사이의 위계 관계를 (재)확립하고 아내로서의 의무를 암묵적으로 강제하는 효과가 수반된다는 점에서 수행문이기도 하다. 요컨대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진술문과 수행문을 엄격하게 나누고 그 중 어느 한 쪽을 특권화하는 것이 아니라, 진술문 안에 내재한 수행적 계기, 수행문 안에 내재한 진술적 계기(또는 차라리 수행문이 진술적 계기를 요청할 수밖에 없는 까닭)를 추적하고 폭로하여 다른 가능성을 개방하는 것이 된다. 본문으로
5) 이하에서 나는 J. L. 오스틴(John Langshaw Austin)의 용어인 수행문과 진술문이 나의 아렌트 독해에서 필수적 역할을 놀게 할 것이다. 내가 다른 곳에서 논증했듯, 오스틴의 구별은 정초적 문헌의 두 계기 ― “우리는 생각한다” 대 “자명한 진리” ― 간의 부당한(illicit) 긴장에 관해 아렌트 자신이 만들어 낸 논증들을 유용하고 적절하게 예시한다. 이 긴장은 (“우리는 생각한다”는 수행문에 유리하게 그것을 해결하려는 아렌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제거할 수 없는 것인데, 제도들이 스스로를 “앞으로 내내”(all the way down) 정당화하려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아렌트는 그것에 응답하기 위해 권위를 비정초적이고 정치적인 증대와 수정의 실천으로 훌륭하게 이론화할 때, 그 불가능성을 사실상 긍정한다. 나는 여기서 이 실천은 또한 내가 갈등주의적 페미니즘과 동일시하는 동일성의 개입과 중단들을 망라한다고 주장한다.
내가 오스틴의 구별을 활용하는 것은, 실라 벤하비브(Seyla Benhabib)가 주장하듯, “언어적” 구별을 사용하여 정당성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도 아니고, “모든 권력의 궁극적인 자의성이라는 데리다의 테제”(그런데 이는 전혀 그의 테제가 아니다.)를 방어하는 것으로 귀결되지도 않는다. 만일 그것이 벤하비브에게 그런 식으로 보인다면, 이는 그녀가 정치적 정당성의 문제가 반드시 이론의 영역 내부에서 해결되어야 한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그런 시각에서 볼 때, 나 자신의 기획이 정당성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실패한 시도로 나타나거나 정당성의 문제는 해결불가능하다(혹은 이 경우에서처럼 어쨌든 둘 다 일 것이다)는 이론적 주장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벤하비브의 시각이나 기획은 나와 다르다. 내가 오스틴과 데리다에게 도움을 받아 아렌트의 독립 선언 독해에서 끌어낸 교훈이란, 정당성 문제의 해결 자체는 진행 중이고, 끝없는 정치적 작업의 기획이자, 민주적 증대와 수정의 영속적 실천이지, 해결되어야 할 철학적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철학적 수준에서 정당성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또는 그것이 철학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믿음)는 그 정신 면에서 분명히 비(非)아렌트적이며, 정치를 전위시키려는 정치 이론이 갖는 일반적으로 문제적인 경향의 징후다. 더 요점으로 들어가 보자면, 정당성이 정치적이라기보다는 철학적 문제라는 벤하비브의 가정은 자신의 진단적 선택지를 별 도움이 되지 않는 단 두 가지로 제한한다. 완전한 정당성과 완전한 자의성이 그것이다. 내가 볼 때 권위를 정치적 증대의 실천으로 이론화하는 아렌트의 주된 매력은, 그것이 이 이원항을 벗어나고 동요시킨다는 데 있다. Seyla Benhabib, "Democracy and Difference: Reflections on the Metapolitics of Lyotard and Derrida," Journal of Political Philosophy 2 (1994): 11 n. 24를 보라; 그리고 Bonnie Honig, "Declarations of Independence: Arendt and Derrida on the Problem of Founding a Republic," American Political Science Review 85 (1991): 97~113. 정치를 전위하려는 정치 이론의 경향에 관해서는, 나의 Political Theory and the Displacement of Politics (Ithaca: Cornell University Press, 1993)를 보라. 본문으로
6) 나는 니체를 빌어 말하고 있는데, 아렌트는 그에게, 비록 양가적이기는 하지만, 이 점에 관해 크게 빚지고 있다. Friedrich Nietzsche, On the Genealogy of Morals, ed. Walter Kaufmann, trans. Walter Kaufmann and R. J. Hollingdale (1887; New York: Vintage Books, 1969), 1, ⅹⅲ[국역: 책세상, 2002]. 본문으로
7) 나는 나의 글 "Declarations of Independence"에서 아렌트의 독립 선언 독해에 나타나는 이 같은 본질주의적 구성 요소를 비판하고 수정하면서, 자크 데리다를 따라, 독립 선언의 성공은 사실 그것의 실제적인 수행적 성격보다는 그것의 구조적 결정불가능성, 이 정초적 화행이 수행적 언표인지 진술적 언표인지 여부를 우리가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는 사실에 의존한다고 논증한다. 여기서 나의 주장, 즉 갈등주의적 페미니즘이 자칭 진술적 동일성들을 수행문으로 재서술함으로써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이 겨냥하는 바는, 모든 동일성들이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라거나 손쉽게 재(再)제정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그게 아니라 요점은, 모든 정체(政體)들과 동일성들, 정초들에 개입하지만, (자연과 신체, 또는 신의) 순수한 진술로 은폐되고 가장된 (진술문과 수행문 사이의) 결정불가능성을 되찾는 것이다. 이 구조적 결정불가능성은 증대와 수정의 공간이다. 그것은 자유롭게 부유하는 수행의 집합이 아니라, 진술과 자연화의 상당한 힘에 대한 일련의 정치적 개입과 투쟁을 가능케 한다. 본문으로
8) 한나 피트킨(Hanna Pitkin) 역시 이 차이에 유의한다. 그녀의 "Justice: On Relating Public and Private," Political Theory 9 (1981): 303~26을 보라. 그렇기는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다르게 읽는데, 그녀는 『혁명론』이 “더 솔직하”고, 신체와 사회적인 것에 대한 아렌트의 진정한 관점을 아마 보다 진정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334). 그러나 이 같은 결론은 부당한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조건』이 얘기를 삼간다는 것을 함축하는데, 이는 전혀 아렌트답지 않은 것이다. 더욱이 피트킨이 신체에 대한 아렌트의 설명 중 하나를 다른 것들에 대한 얇은 베일로 간주하는 것은, 아렌트가 다른 것 위에 다른 하나를, 신체의 구별되는 특징화를 층층이 쌓는다는 점을 모호하게 만든다. 더 최근 논문인 "Conformism, Housekeeping, and the Attack of the Blob: The Origins of Hannah Arendt's Concept of the Social"(이 책의 3장)에서 피트킨은 덜 본질주의적인 접근을 택하는데, 여기서 그녀는 아렌트의 몇몇 문헌들을 가로지르는 그 복잡한 전환을 추적하면서 아렌트의 사회적인 것 개념을 탈자연화하려고 한다. 본문으로
9) Hannah Arendt, "What is Freedom?" in Between Past and Future, enl. ed. (New York: Penguin, 1977), 156[국역: 푸른숲, 2005]. 본문으로
10) Arendt, HC 179; 그리고 "What is Freedom?" 151~52. 아렌트는 이 같은 작인(作人, agency)의 속성들을 행동적으로(behaviorally), 그 자유를 타협하는 행위의 원인들로 읽는다. 본문으로
11) Arendt, HC, 179. 나는 “스스로를 놀랍게 하는”(self-surprising)이라는 용어를 조지 카텝(George Kateb)가 아렌트를 다룬 Hannah Arendt: Politics, Conscience, Evil (Totowa, N.J.: Rowman and Allanheld, 1984)에서 빌려 왔다. 본문으로
12) Hannah Arendt, Thinking, vol. 1. of The Life of the Mind, ed. Mary McCarthy (New York: Harcourt Brace Jovanovich, 1978), 29[국역: 푸른숲, 2004]. 이 주장은 분명히 잘못되었다. 아렌트가 의미했던 것은 모든 “내부들”이 동일하게 보인다는 것이 아니라 생물학적 차이들은 흥미롭거나 중요치 않다는 것, 신체로서 우리 모두는 비슷하다는 것이었으리라. 본문으로
13) Hannah Arendt, Willing, vol. 2. of The Life of the Mind, 69. 아렌트는 이 주장을 특히 의지하기와 관련지어 제기하지만, 이는 정신 능력 세 가지 모두에 영향을 미치는 되튐에 특징적인 것이다. 본문으로
14) 내가 말하려는 것은 아렌트가 갈등주의적인 투쟁의 현상을 “정치적”이라고 이름붙였다는 것이지, 아렌트 자신이 이 내적 투쟁들을 묘사하는 데 “정치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려 했을 것이라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그러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본문으로
15) 엘리자베스 영-브루엘(Elisabeth Young-Bruehl)은 아렌트적 자아의 다중성에 유의한 유일한 아렌트 독자이지만, 그녀는 자아를 다중성으로 본 이 같은 관념과, 행위를 표현적인 것이 아닌 수행적인 것으로 본 아렌트의 접근을 연관시키려 하지는 않는다. 또 영-브루엘은 이 다중적 자아를 갈등주의적 투쟁의 장소로 보지도 않는다. 반대로 그녀는 “개인 내부에 존재하는 견제와 균형”에 준거하는데, 이는 이 맥락에서는 적절하지 않은 모든 것에 우선하는(overarching) 통일성을 함축한다. Elisabeth Young-Bruehl, Mind and the Body Politics (New York: Routledge, 1989), 23을 보라. 본문으로
16) Arendt, HC 73. 『인간의 조건』에서 아렌트는 “‘그들의 신체로 삶의 신체적인 필요를 보살피는’[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론』 1254b25[국역: 박영사, 2006]를 인용하고 있다] 노동자들과, 자신들의 신체로 종의 물리적 생존을 보장하는 여성들”(72)을 묘사한다. 본문으로
17) 아렌트는 종종 그녀의 폴리스의 아곤(agon)적인 정치의 실천에 대한 (탄복스럽기 그지없는) 묘사와 그녀 자신의 정치 전망을 분명하게 구별짓는 데 실패한다. 그리고 그녀의 비판자들은 종종 전자를 후자로 오해한다. 예를 들어 피트킨은 행위에 대한 아렌트의 설명이 “개인주의적”이라고 적는데, 그러나 피트킨의 인용구는(HC 41) 아렌트가 폴리스의 갈등을 묘사한 것이다. 아렌트가 자신의 정치 관점을 묘사하는 곳에서, 심지어 『인간의 조건』같은 초기 저작―혹자는 이 역시 너무 갈등적이라고 말한다―에서조차 그녀는 그것이 항상, 항상 “공동적”(in concert)이라고 말한다. 본문으로
18) Pitkin, "Justice," 342. 본문으로
19) Pitkin, "Justice," 342. 나는 “감성들”이라는 용어를 쉬라 도사(Shiraz Dossa)에게서 빌려오는데, 그는 피트킨과 아주 유사한 경우다. 그와 피트킨 모두, 노동, 작업, 행위가, 감성으로서 모든 자아들을 특징짓는다고 주장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한다. The Pubilc Realm and the Public Self: The Political Theory of Hannah Arendt (Waterloo: Wilfred Laurier University Press, 1989), 3장; 그리고 도사에 대한 나의 서평은 Political Theory 18 (1990): 322를 보라. 본문으로
20) 노동과 작업과 행위를 탈자연화함으로써 그것들의 효과를 우리 자신의 하기(doing)의 산물로 보라는 이 같은 요청은, 이 책에 실린 한나 피트킨의 논문에 담긴 입장과 유사하다. 피트킨은 아렌트가 사회적인 것에 할당한 믿을 수 없는 힘에 어리둥절해한다. “우리에게 우리의 힘을 가르치는 것―우리는 우리의 곤란의 원천이고 우리가 현재 하는 것을 멈춰야 한다―에 주되게 노력한 사상가에게서, 사회적인 것을 블롭(Blob, 유명한 SF 공포영화에 나오는 우주생명체)이라 보는 공상과학적인 전망[“우리를 장악하려는 목적으로, 우리의 자유와 정치에 달려든다.”]이 나오는 것은 참으로 당혹스러운 일이다”(53). 본문으로
21) 아렌트는 정치“의 모든 영역"이 “제한”되어야 하고, 그것은 “인간과 세계 실존 전체를 포괄”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Arendt, "What is Freedom?" 264). 본문으로
22) Arendt, Willing, 37~38, 101~2; 강조는 필자. 나는 다른 곳에서 아렌트의 설명에서 의지는 자기산출적이면서 동시에 그 고유한 활동을 멈추게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Arendt, Identity, and Difference," Political Theory 16 (February 1988): 81. 그러나 이 글에서 강조한 문구 때문에 나는 아렌트가 후자의 특성을 의지에 부여한 것이 아니라 행위에 부여했다는 점을 납득하게 됐다. 본문으로
23) Judith Butler, "Performative Acts and Gender Constitution: An Essay in Phenomenology and Feminist Theory," in Performing Feminism, ed. Sue-Ellen Case (Baltimor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90), 273. 본문으로
24) Pitkin, "Justice," 336. 본문으로
25) Nancy Fraser, Unruly Practices: Power, Discourse, and Gender in Contemporary Social Theory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9), 76. 본문으로
26) Arendt, "Preface," in Between Past and Future, 3~4. 본문으로
27) Butler, "Performative Acts," 276, 271, 280, 그리고 271. 본문으로
28) 이론의 고유한 사명은 정치 제도들의 포괄적인 정당화를 제공하는 데 있다는 관점에 맞서, 위와 같이 정치 이론의 과제를 바라보는 관점을 옹호하는 나의 견해는 각주 5를 보라. 본문으로
29) Pitkin, "Justice," 336. 본문으로
30) Arendt, OR 47. Cf. Judith Butler, "Performative Acts," 274. 본문으로
31) Adrienne Rich, On Lies, Secrets and Silence, 211~12. 아렌트의 독자들은 한 동안 이 인용문을 재유통시켰다. 리치의 논문 "On the Coditions of Work" 역시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 어쨌거나 “불구적”인 책까지는 아니더라도 “거만한” 책에서 인용한 문구로 시작한다는 사실은 자주 언급되지 않았다. 본문으로
32) Hannah Arendt, Men in Dark Times (New York: Harcourt Brace Jovanovich, 1968), 44[국역: 문학과지성사, 1983]; 이하 MDT로 인용. 아렌트는 정치적으로 능동적인 여성들이 여성 참정권 활동에 이끌린 이유가, 그 운동이 당시 여성에게 개방된 몇 안 되는 활용가능한 정치적 행위의 기회였기 때문이라는 가능성은 결코 고려하지 않는다. 본문으로
33) 이 얘기는 출처가 상당히 의심스럽지만, 아렌트는 미국 정치 과학 협회 여성 간부 회의에 출석하기를 거부하면서, “나는 스스로를 여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알려져 있다. 본문으로
34) 아렌트의 Eichmann in Jerusalem[국역: 한길사, 2006]의 출판을 둘러싼 논쟁은 Dagmar Barnouw의 Visible Spaces: Hannah Arendt and the German-Jewish Experience (Baltimor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90)에 잘 기록되어 있다. 본문으로
35) Gershom Scholem, "'Eichmann in Jerusalem:' An Exchange of Letters between Gershom Scholem and Hannah Arendt," Encounter (January 1964): 51~52(강조는 필자). 이하 숄렘에서의 모든 인용문은 51~52에서다. 이 절에서 아렌트의 모든 인용문은 53~54에서다. [역주] 번역하기 아주 까다로운 이 문장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The fact that he regards Arendt "wholly as a daugher of our people and in no other way." 본문으로
36) 그녀가 스스로를 “독일 철학의 전통”과 동일화할 때조차, 이는 조건부다. “만일 내가 어딘가에서 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독일 철학 전통에서다.” 더 넓게 보자면, 이 같은 어법은 아렌트가 그녀의 기원이라는 문제가 단순히 발언의 주제가 아니기를 선호했으리라는 점을 시사한다. 즉, 그녀는 “어딘가에서 온 것이라고 말해지길”(강조는 필자) 원치 않은 것이다. 본문으로
37) 그리고 숄렘 또한 마찬가지로 그의 유대주의와 시오니즘 이외의 차이들과 동일성들에 의해 구성된다. 아렌트는 그에게 이 사실을 상기시키는데 ― 그리고 그녀의 동일성을 그가 투사한 것에 대해 같은 방식으로 보복한다 ― 그 방법으로 그녀는 숄렘이 그녀에게 보내는 편지에 서명할 때 그의 히브리 이름 “게르숌 숄렘”을 사용하는데도 “친애하는 게하르트(Gehard)”라는 호칭을 쓴다. 본문으로
38) 나는 숄렘이 이 맥락에서 “딸”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아렌트가 성/성별 차이에 의해 구별되게 구성되어 있다는 것에 대한 인정이라기보다는, 가부장적 형상, “우리 민족”에 대한 의무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수단이라고 간주한다. 요컨대 숄렘의 문구에서 “딸”이라는 용어는 아렌트의 성/성별을 그녀의 유대 동일성 안으로 문제 없이(unproblematically) 동화시키려 든다. 본문으로
39) 동일성이 하나의 사실이라는 아렌트의 주장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이 사적 사실이라는 주장은 그러나 맥락에 따라 분명히 달라진다. 그녀는 누군가가 “공격당하는 동일성의 견지에서” 스스로를 방어해야만 하는 시간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다른 경우에는 스스로를 자신의 동일성의 견지에서 위치 짓는 것은 겉치레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이 책에 실린 Dietz, 48 n. 106을 보라). 이 전략의 맥락의존성 때문에, 누군가는 항상 상황을 진단하고 행위의 공간에서 동일성의 (아렌트에게는 불운한) 적절성에 동의할 것인지 아니면 그 사적 자유나 부적절성을 고집할 것인지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이 진단에 관한 토론은 페미니즘이 주기적으로 대면하는 것이다.) 나의 주장은, 숄렘과 서신을 교환했던 이 경우에는, 아렌트가 상황을 잘못 진단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공격당하는 동일성, 유대인이 되는 그녀의 고유한 방식의 견지에서 대응했어야 했다. 나는 그녀가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 부분적으로는, 그녀와 숄렘이 둘 다 유대인이기 때문에 그녀의 유대 동일성은 공격당하는 것일 수 없고 마찬가지로 대응을 기초 짓는 근거가 되는 것도 아니라는 그녀의 동일화주의적 가정에서 기인한 것이 아닌가 의심한다. 본문으로
40) 나는 “자신의 성별을 (행)한다”라는 통념을 Judith Butler, "Performative Acts," 276에서 빌려 왔다. 본문으로
41) Hannah Arendt, The Jew as Pariah, ed. Ron H. Feldman (New York: Grove, 1978). 본문으로
42) 나는 아렌트의 설명에서 정치적 공간의 다중적인 장소들을 Political Theory and the Displacement of Politics, 116~17에서 추적한다. 본문으로
43) 사실, 아렌트의 국외자 관점에 함축된 개인주의는 숄렘과의 관계에서 그녀의 지위를 약화시키는 데 기여한다. 숄렘은 자신이 배신자라고 간주하는 아렌트에게 회복시키고자 하는 유대 민족의 공동체적 형상을 되풀이해서 호소한다. 아렌트는 이 용어들을 받아들이고 그 틀 내부에서 대응한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그녀의 견해에 동감했을 만한 (과거나 현재의) 타인들과 동맹을 맺을 수도 있었고, 유대 공동체에 대해 그녀 자신을 유대 내적 비판이라는 대안적인 유대 역사의 일부로 위치 지을 수도 있었다. 아렌트는 이 마지막 전략을 그녀의 레싱 연설에서 활용하는데 ― 리사 디쉬(Lisa Disch)가 주장하듯(이 책 12장) ― 이 때 아렌트는 독일 계몽주의 전통에서 레싱을 재생시켜 그녀 자신이 그 상속자인 대안적인 지적 계보의 일부로 그를 위치 짓는다. 본문으로
44) 이 절의 초안에 논평해 준 것에 대해 린다 제릴리(Linda Zerilli)와 모리스 캐플런(Morris Kaplan)에게 감사를 전한다. 본문으로
45) 예를 들어 한나 피트킨은 아렌트의 정치적 행위자들이 “유치하게 젠체하며” “낭만주의적”이고 “갈등주의적인 남성 전사”의 동호회에 소속되어 있다고 비난한다("Justice"). 또한 Patricia Springborg, "Hannah Arendt and the Classical Republican Tradition," in Thinking, Judging, Freedom, ed. G. T. Kaplan and C. S. Kessler (Sydney: Allen and Unwin, 1989)를 보라; 그리고 Wendy Brown, Manhood and Politics (Totowa, N.J.: Rowman and Littlefield, 1988). 본문으로
46) 요컨대 벤하비브는 1970년대와 1980년대 초반 논쟁들을 사실상 되풀이하는데, 이들은 아렌트가 팔로스중심주의적(갈등주의적)이거나 여성중심적(연합주의적)인 사상가라고 비난했다. 벤하비브의 혁신은 아렌트 사상의 이 같은 차원들의 한 쪽 면으로 그녀를 배타적으로 동일화하는 것을 거부하고, 아렌트적 도식 안에 양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그녀가 인정한다는 데 있다. 그러나 앞선 페미니스트들처럼 그녀는 이 두 가지 차원들을 대립적이고 위계적으로 위치 지으면서, 우리가 그것들 중에서 하나를 택해야만 한다고 고집하는 식으로 나아간다. (아렌트에 대한 앞선 페미니즘적 수용에 관한 보다 상세한 논의는 나의 "The Arendt Question in Feminism,"과 Mary Dietz의 "Feminist Receptions of Hannah Arendt," 이 책의 1장과 2장을 보라.) 본문으로
47) Seyla Benhabib, "Feminist Theory and Hannah Arendt's Concept of Public Space," HIstory of the Human Sciences 6 (1993); 97~114. 본문으로
48) 위의 책, 103~4, 102. 본문으로
49) 각주 18을 보라. 벤하비브가 아렌트에 의한 갈등주의의 재의미화를 무시한 것은 이 맥락에서만이다. 다른 곳에서 그녀는 그것의 한 차원에 분명히 주목하면서, 아렌트는 “호메로스적 전사-영웅을 진압하고, 그렇다, ‘길들여’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신중한 시민을 낳는다.”(위의 책, 103; 강조는 원문)고 주장한다. 본문으로
50) 위의 책, 104, 105. 본문으로
51) 위의 책, 100. 본문으로
52) Seyla Benhabib, "Hannah Arendt, and the Redemptive Power of Narrative," Social Research 57 (1990): 193~94. 본문으로
53) "The Pariah and Her Shadow," 이 책, 94~95, 97~100. 본문으로
54) 위의 책, 87~88, 93, 97. 파른하겐의 살롱이 거둔 매우 일시적인 성공, 그리고 그것이 가부장적 제도 권력이 겪은 이 같은 우연하고 일시적인 공백에 의존했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이 사례의 진정한 교훈은, 연합주의를 옹호하려는 이들은 이 같은 귀중한 대안적인 행위의 공간을 국가와/나 가부장적 공적 영역의 헤게모니적 열망에 맞서 보존하기 위해서라도 갈등주의를 배우고 긍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본문으로
55) 위의 책, 104 n. 23. 본문으로
56) 요컨대 여기서 나의 목표는 연합적이거나 페미니즘적인 공적 공간의 모형으로서 살롱의 장점을 토론하는 것이 아니라 갈등주의와 연합주의를 이원적 대당으로 위치 짓고 ― 성별화하여 ― 합의적인 정치 모형과 담론의 공통 기반에 합치할 수 있는 아렌트와 페미니즘을 발전시키려는 벤하비브의 더 큰 노력 안에서 살롱의 역할을 간략하게 기록해 두는 것이다. 본문으로
57) "Feminist Theory and Hannah Arendt's Concept of Public Space," 103. 본문으로
58) 아곤을 공동 행위와 동시에 투쟁의 장소로 설명하는 것에 관해서는, 나의 "The Politics of Agonism," Political Theory 21 (August 1993): 528~33을 보라. 본문으로
59) 이 같은 (변모하는 동맹적) 실천의 몇몇 사례에 관해서는, 이 책 14장에 있는 멜리사 올리(Melissa Orlie)의 논문을 보라. 올리는 성/성별의 정치가 또한 항상 인종, 계급, 성욕의 정치와 겹쳐 있는 방식을 소중하게 부각한다. 본문으로
60) 이 갈등주의가 아렌트의 그것과 갈라지려는 목적이, 그녀의 행위가능한 영역을 넓히고 이른바 사회적인 용무들과 이른바 진술적 사실들을 포함하는 데 있는 한에서, 갈등주의는 (이 책 36의 매리 디에츠와 반대로) 동일성을 그것의 필수적으로 중심적인 용무로 간주하는 것으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 그것은 다만 이 논문에서만 그럴 뿐이다. 만일 이 갈등주의가 항상 얼마간 동일성의 정치에 관심을 갖는다면, 이는 동일성―특히 (사법적이거나 사회적) 법 아래서 주체성의 형성과 생산―이 항상 사회-정치-사법적인 질서의 하나의 효과나 수단이며, 따라서 정치적 개입의 필수불가결한 하나의 장소라는 점을 갈등주의가 알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61) 특히 이 문구 “함께 그리고 맞서”는 벤하비브가 독자로서 아렌트에 대한 자기 자신의 관계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Feminist Theory and Hannah Arendt's Concept of Public Space," 100). 그렇게 하면서 그녀가 갈등주의적 관계를 묘사하는 것은 적절하다. 그녀의 아렌트 독해는 벤하비브 자신의 입장을 동시에 개성화하는 공동 행위다. 또한 벤하비브 자신이 일시적으로나마 갈등주의와 그녀의 연합주의의 변종이 실제로 상호 배타적이지 않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도 유의해야만 할 것이다. “구별과 수월성을 겨룬다는 의미에서 모든 진정한 정치와 권력 관계들이 갈등주의적 차원을 포함하는 한편, 갈등적 정치는 또한 설득과 함의의 힘에 기초한 연합적 차원을 포함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들 두 모형 간의 날카로운 분화는 완화될 필요가 있다”(103). 이렇게 말했으면서도 벤하비브는 계속 이 대당의 용법을 상술하고 그것을 완화시키기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식으로 계속한다. 본문으로
2006년12월12일 19: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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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Ritournelle > * 후기 알뛰세 사상의 진화에 관한 노트

* 자율평론 19호 / 후기 알뛰세 사상의 진화에 관한 노트


- 안또니오 네그리 -

■ 오래 전에 발췌된 것이긴 하지만 이미숙 님이 요약한 네그리의 글(http://myhome.naver.com/skreds/sourcekor/althusser_hm91_negri.htm)이 있어 참고할 자료로서 여기에 옮겨 놓았다. 아직 요약자의 허락을 구하지 못했다.원문출처가 밝혀져 있지 않지만 아마도 Postmodern Materialism일 것으로 짐작한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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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또니오 네그리

"Somthing Has Snapped"

노동운동의 위기는 스탈린주의의 해악으로만 돌릴 수 없다. 노동운동의 위기, 투쟁, 모순을 만드는 것은 운동 그 자체의 성격과 관계가 있다. 문제는 위기가 건설적 영향을 산출하지 못하고 오직 파괴적 영향만을 산출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스탈린주의를 탄핵하는 것 외에, 공산주의적 사고의 형성과정, 그 사고 내에서 위기의 창조적, 건설적 기능에 대해 이론적 분석이 행해져야 한다.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맑스의 담화의 중심점들-특히, ①잉여가치론과 착취론, ②국가론과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변증법적 관계를 살펴본다. ①의 경우, 알뛰세는 맑스가 "양적quantitative" 잉여가치론을 수립, 착취와 이데올로기의 기능, 사회에 대한 복잡한 자본주의적 포섭을 이해하고 비판하기에 불충분한 정치적 결론을 도출했다고 말한다. ②의 경우, 맑스이론은 심각하게 결핍되어있다.- 물론 유로코뮤니스트들과 보비오자들이 말하듯, 부르조아국가에 대한 비판의 요소들을 사회적 민주주의 국가의 건설로 돌릴 수 없다는 의미에서는 아니다. 알뛰세의 주장은 국가에 대한 맑스의 비판과 레닌의 가르침이 부르조아 국가에 대한 급진적 비판이 대중의 실천 속에서 권력의 재구성의 관점,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일탈에 대한 방어적 비판, 국가의 파괴와 새로운 사회질서의 건설 사이에 놓여있는 대중적 정체구성에 대한 창조적 전제를 수반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이 외에도 철학적 개념에도 위기가 발생. 철학 외부, 위에서 "무언가 기대하지 않은 것", "우연적인 aleatory" 요소가 대규모로 개입했다. 이 새로운 요소는 우연적이지만 절대적으로 현실적인 것으로 철학적 실천의 연속성을 깨트렸다. 위기의 방향이 변하였다. 우연적 요소가 노동운동의 파괴를 가져왔다. 이것에 대한 알뛰세의 사고는 징후적 사고, 시기상조의 분석, 질적 도약을 통한 발전으로 특징지워진다. 위기가 현실의 발전의 열쇠이듯이, 불연속과 시기상조는 이론적 실천의 영혼이다.

The Solitude of Machiavelli

-마키아벨리에 대한 알뛰세의 사고

처음에는 정치가로 간주했으나, 나중의 분석에서 철학적 측면이 부각(1978,"The Solitude of Machiavelli"). 이런 분석을 뒷받침해주는 원리는 역설의 발견이다: "조건의 완전한 부재 속에서 새로운 것을 사고하는 것." 마키아벨리의 정치적 선택은 영역의 선택이다: 지금까지 불가해한 것은, 국가의 정치적 삶에 참여할 때 제기된 문제를 실천 속에서 풀 수 없는 데도 시기상조적 특성인 권력을 사고했다는 것이다. 봉건적 장애를 제거한 새로운 통일된 국가, 오래 지속되고 팽창할 수 있는 국가에 대한 이론가로 간주했다. De Sanctis와 Gramsci에 거슬러 올라가는 이런 전통적 해석을 복구한 후, 알뛰세는 그것을 전도시킨다. 중요한 것은 국가수립계획이 아니라, 마키아벨리의 사고로 표현되는 급진주의이다. 그 사고는 계획실현의 불가능성에 반대한다: 모든 조건, 또는 모든 가능성의 부재 속에서 새로운 것에 대한 사고이다. 통일된 국가와 새로운 군주에 대한 갈망은 존재론적으로 대중 속에서만 존재하지만, 국가구성의 혁명적 과정이 사고 속에서만 일관되게 일어남.

따라서 마키아벨리의 과학적 사고는 분리되고 고립됨. 전적으로 비목적론적 지평위에서 역사성, 우연성에 급진주의의 극대화 부여. 마키아벨리의 사고를 특징짓는 것은, 권력의 현실적 숭배인 "사자"가 아니라 "여우"- 주어진 조건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는 혁명적 진실을 언제나 상기시키는 금지되고 제한된 진리이다: 그것은 불가능성에 대한 침해이고 동시에 가능성에 대한 지속적 이론적 정의이다. 알뛰세의 이전의 이론적 분석인 구조적 틀과는 달리 이론은 분열, 역설, 공허(조건의 부재)와 위기이다.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1992)에서 알뛰세는 마키아벨리에 대한 해석에서 그람시와 단절. "suprise"와 "impossible encounter"를 성취한다. "여우"에 대한 사고는 새로운 일관성 획득. "여우가 된다는 것"-"사자"가 되는 하나의 조건-은 이제 정치적 영역의 권력 보다 신체의 권력, 대중의 권력과 관계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치권력 차원에서는 폭력에 기초하지 않는 모든 결정요소들이 부재한 것처럼 보이지만, 대중들 속, 사회 속에서는 미시적 차원의 대항권력이 존재. 알뛰세는 이런 다양성을 공산주의적 경향의 지속에 근거한 주체의 특징으로 드러내는데 관심을 가짐. 마키아벨리의 시기상조는 어제는 불가피하게 열망을 존재론적으로 정의하는 것이었지만, 오늘은 제압할 수 없는 공산주의에 대한 정의에 기초한다.

Margins, Interstices

조건의 완전 부재 속에서 새로운 것을 사고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첫째, 철학에 대한 전통적 사고의 역전, 즉 현실에 대한 추정적 사고를 의미한다. 인식론과 이상주의, 엄격하게 명목론적 관점을 취하지 않는 모든 유물론에 대한 거부. "이론적 실천"의 기초에 있는 태도의 회복과 재확인. 새롭게 요구되는 것은 "reason with body". 둘째, thinking with the body를 의미. 사색적 실천 거부. 맑스 자신이 취했던 길이다.

어떤 상황의 우연적 사실에 대한 급진적 고려하는 마키아벨리의 정치에 대한 관념에서 더 논의를 진전시키는 것은 스피노자이다. 그것은 신학에 대한 탈신비화, 명목론의 복구와 재확인, 몸과 즉각적 생활세계론에 의해서이다. 알뛰세의 이전 저작에서, 스피노자는 구조적 유물론의 기초자, 주체 없는 과정의 주요한 설명자로 나타났다. 여기에서 스피노자의 몸이론은 몸과 영혼의 통일, 조건 없는 권력, 개인성과 보편성 간의 관계가 이론적 실천 내부에서 주어지는 세계로 우리를 이끄는 긍정적 충동의 예측으로 해석된다.

스피노자에 있어서 "세번째 종류의 지식"에 대해 광범위하게 논의. 알뛰세의 "몸을 통한 사고"라는 개념에 많은 시사를 줌: 현실을 이해할 때, 경향적으로 실제적 보편성이 아닌 명목적 지평 위에서 주체의 권력의 가장 최고도를 전개시키는 사고 방식이다; 언제나 한계를 창조, 실제적 구체적 존재와 추상적 비존재가 서로 부딪치고, 가깝게 그리고 멀게 언제나 새롭게 재구축된다. 알뛰세에게 스피노자의 "사랑"은 실천이 되고, 신에 대한 지성은 유한한 희망, 실천속에서 이해되고 경향적으로 실현되는 보편성이 된다.

맑스가 기술한 생활노동의 단순성과 추상적 자본과 국가의 지배 간의 관계는 이전처럼 상호작용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없다. 이데올로기가 현실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광범위하게 확대했다. 세계는 자본에 포섭되었다. ISAs는 다양한 기구를 통해 기계적으로 단일하게 지배를 산출. 포콜트의 경우처럼 알뛰세도 ISAs 권력의 포스트모던적 팽창은 저항(몸의 저항) 없이는 진행될 수 없다. 자본에 의한 전사회의 포섭 하에서 어디에서 어떻게 실천이 가능한가? 자본주의 지배의 틈새에서 대중이 스스로를 조직하는 곳, 공동체적 관계가 살아있고 저항이 "시장관계가 지배하지 못하는" 곳, 즉각적 생활세계에서이다. 이곳에 공산주의가 존재론적으로 존재.

오늘날 공산주의는 거대한 계획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저항, 대항권력, 특이성으로 드러난다. 국가, 자본, 정당에 대항해서 대중운동, 대중운동 자체가 제시하는 창조적 방법에 의존하는 것이 필요하다. 대중운동만이 자유를 산출할 수 있고 지배의 논리에 대항한 고립된 저항과 권력적 한계성을 통합할 수 있다.

Althusser's Kehre

후기 알뛰세에 있어서 사고의 전환점 발생. 계속적 요소와 혁신적 요소가 서로 얽힘, 그러나 혁신적 요소가 헤게모니 획득. 알뛰세의 사고의 계속성은 특히 그의 방법론에서 드러나는데, 실제(텍스트와 사건들)에 대한 징후적 독해, 즉 개념과 논리를 논리적으로 구성하는 요소뿐만 아니라 그것의 질서를 해체하고 약화시키는 요소도 중요시하는 독해가 그것이다. 혁신은 매우 강력하다. 여기에서 유물론의 정의 자체가 수정된다. "생산관계"에 대한 비판에서 새로운 "생산력"의 구성적 과정으로 관심이 이동한다-몇 가지 중요한 결정적 결과를 수반: ①"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에 놓여있는 관계에 대한 열린, 더 이상 구조적이지 않고 더 이상 현상학적이지 않는 고찰; ②역사발전의 주체적 요소에 대한 강조; ③사건의 "우연성aleatory"을 주체의 구성적 개입에 대한 열린 가능성으로 고찰할 것을 강조.

방법론적 해석학적 관념인 징후적 독해에서 역사적 과정을 이해하는 열쇠로서 '위기'와 현실 변형의 동력으로서 '힘'이라는 존재론적 관념으로 관점 변화. 힘이라는 개념에 이론상 계급투쟁도 이데올로기상 이론적 실천도 더 이상 없다. 오히려 이 모든 것이 존재하는데, 함께 이론을 구축하고 투쟁을 할 수 있는 열린 주체성에 대한 탐색, 즉 실천 속의 철학이라는 개념이 있다.

알뛰세는 ISAs의 개념을 변형시킨 것을 맑스주의 이론에 대한 그의 근본적 공헌이라고 생각. ISAs개념에서 "하부구조-상부구조"관계는 결정적으로 전도된다. 알뛰세는 "포스트모던"개념을 ISAs의 전체주의적 기능totalitarian functioning의 지속적 팽창과 확대라고 정의한다. 확대에 확대를 거듭한 끝에 질적 도약이 일어난다. 현재 ISAs라는 새로운 적을 맡은 계급투쟁은 이데올로기적 힘을 강화해야 한다. 따라서 주체성에 대한 호소는 자본주의의 재구조화에 대한 필수적 투쟁영역을 규정하는 것이다. 새로운 주체성을 정의하는 것과 더불어, 생산력의 새로운 속성, 사회적 노동의 비물질적, 추상적, 협동적 특성에 담화가 덧붙여져야 한다. 여기에서 주체성이 다시 형성되고 혁명에 대한 열망이 되살아난다.

"단절된 것"은 직접적 투쟁의 가능성. 자본주의에서 국가와 사회가 동일시되어 국가는 빈 지점이 되고, 오직 사회만이 권력에 완전히 재흡수된 영역과 동시에 우연성aleatory의 폭발이 가능한 영역으로 남게 되었다. 이 지점에서 폭발은 계급노선을 넘어서 모든 사회적 행위자들의 의식적이고 주체적 차원으로 진행된다. 사회주의적 "이행"이라는 개념에 대한 비판은 알뛰세의 사고에서 전형적인 목적론적 관점에 대한 거부를 의미한다. 알뛰세의 사고에서 새로 나타난 것은 혁명과정의 "다른 것으로의 이행passage to something else", 즉 공산주의로의 우연적 이행이다. 사회주의의 마지막 가능성 상실: 오직 공산주의만이 실제이다.

Aleatory Materialism

대립하는 두 가지 철학적 전통은 "aleatory materialism"과 그 나머지 것들이다. 하나는스탈린주의가 승인한, Power를 정당화하고 State를 숭상하는 전통(권력에 대한 이상주의적 정당화)이고, 다른 하나는 power에 기초하고 power와 이데올로기를 실천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이상주의적idealistic or spiritualistic 철학사고(aleatory materialism)이다.

마키아벨리는 근대성을 위해 aleatory materialism을 기초. 스피노자에게 aleatory materialism은 자연, 즉 "인간"과 역사에 대한 전반적 관점. aleatory materialism의 근본적 특징은 모든 목적론의 파괴- 그래서 사건의 논리를 실증적으로 주장하는 것. 마키아벨리는 "if...., then..."의 구조로 사건과 역사성의 개념을 제시. 인과성은 표면의 우연적 속성에 따른다;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오직 영향effect만이 원인에 정당성을 부여한다는 단순한 이유로, 인과성은 전적으로 표면에서 실현된다.-인과성의 모든 내적 필연성은 제거되고, 모든 목적은 무시된다. 알뛰세는 보다 급진적으로 변증법과 휴머니즘과 역사주의를 비판한다. 변증법은 이상주의의 표상 이상이 아니며, 역사주의는 상대주의가 가장한 것에 불과하다; 휴머니즘은 부르조아 문화의 산물이므로 파괴되어야 한다.

aleatory materialism은 역사를 구체적 역사로서 제공하고, "인간"을 역사의 주체가 아니라 역사 속의 주체로서 제시한다. aleatory materialism은 ①"completely naked" materialism으로, 현재의 지평으로 생각할 수 있다. ②역사성에 대한 주장 ③그 틀은 전적으로 개방적, 목적이나 필연성이 존재하지 않고 모든 우연적 사건에 이용가능하며 이것에 기초해서 적절한 실천을 수립한다.

"과정에서 모든 결정은 현존하는 경향적 불변성 중에서 우연적 변수들로서 나타난다." 발생한 모든 결정이 이론적 실천으로 간주된다면 알뛰세의 이런 주장은 전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만약 우연적 변수가, 표면의 열린 자유 속에서, 확신에 찬 역사적 행위로 간주되고, 경향적 불변성이 역사 속에서 주체의 자유를 풍부하게 해주는 공산주의적 존재론적 내용으로 간된다면. 이런 이론의 뒤틀림 속에서 우리는 철학과 정치의 우선성을 재확인. 전적으로 비목적론적, 우연성 안에서, 틈새 또는 가장자리에 위치한 대중의 이데올로기적·정치적 운동의 중요성을 설명할 수 있다.

이행에 대한 신화를 제거하면, 존재의 우선성, 즉 실천으로 존재하는 공산주의의 우선성을 도출할 수 있다. 근본적 사실(경제와 정치로부터 이데올로기로 계급투쟁의 이동)이 발생했으므로 이런 이론적 실천은 가능하다.

The Power of the Negative

실제 존재의 조직에서 "가장자리margins"와 "틈새interstices"의 기능 고찰. 부정의 힘-포스트모던 전체주의적 권력은 모든 변증법의 가능성을 제거.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합리성의 유일한 근거로서 이데올로기의 실현은 완전한 무의미에 집중, 어떤 저항도 비합리성으로 밀어버린다. 이것은 이론적 실천, 저항, 힘power이 존재의 경계, 공허의 경계에서 자신을 드러낼수 있는 상황이다.

부정성에서 어떻게 저항이 가능한가? 알뛰세가 철학을 하던 상황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오직 이론적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알뛰세가 이런 질문들에 대해 실천적 해답 또한 제싱하려고 노력. 이를 위해 그는 남미의 해방신학을 연구. 해방신학에서 그는 부정의 힘에 들어맞는 많은 이론적 전제들을 발견.

해방신학에서 그는 ①직접적 유물론, "completely naked materialism" 발견. ②실천적 전제는 행동의 긴급성을 드러내는 주체로서 빈곤에 대한 정의 주위에서 규정된다. 알뛰세의 관점에서, 주체가 관여되는 한, 이것은 비형이상학적 입장. 새로운 주체는 부르조아적 합리성 바깥에서, 주체의 필요와 실천에 의해 정의된다.postmetaphysical. ③방법에 관계되는 한, 가난한 대중의 실천은 더 이상 구원의 신학 내에서 정의될 수 없고, 해방에 대한 실천적 관점-비판적, 구체적, 혁명적 실천에 의해 정의된다. 이론적 실천이, 새로운 가능성의 조건 안에서, "void of a detachment"의 위치와 발전으로서 자신을 드러낸다고 알뛰세는 강조한다.

여기에서 aleatory materialism은 이론적 대안이 아니라, 전복된 전체성의 실천적 위치로서, 강력한 행동의 유일한 원천인 거리distance와 가난의 극단적 긴장으로서 설명된다.

Machiavelli the Philosopher, or le Jet de I'Etre

알뛰세에게 새로운 철학을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단어는 alea. 결정은 우연적이고 변증법적이 아니다. 먼저 결정된 것도, 목적도 없다. 공허 속에 무한한, 현실 파괴와 지배이데올로기의 파괴 가능성이 있다. 동시에 무한한 혁명적 실천의 가능성이 있다. 철학은 언제나 순수하고 단순하게 정치였다. 철학을 Kampfplatz로서, 즉 다양한 우연적 속성들이 전개되는 기초로서 정의함으로써만, 변증법적 유물론은 극복될 수 있다. 국가, 정당 등은 이데올로기가 만드는 빈 공간으로 투쟁이 발생할 수 없다. 중심을 둘러싼 주변, 가장자리에서 ISAs의 부단한 통일이 산출하는 포스트모던 사회의 존재를 기록할 수 있다. 가장자리(사회, 재생산 영역)는 throws of Being으로 구성되었으므로 필수적 공간이다. 가장자리는 저항의 틈새와 고립된 공산주의를 통해 중심에 압력을 가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자리의 문화 재구축의 자유로운 운동은, 착취와 정치적 압력을 넘어서, 공산주주의의 계기를 연다. 철학은 사람들에게 되돌려지고 새로운 주체를 형성한다.

여기에 철학자로서의 마키아벨리의 가르침이 존재한다. 알뛰세는 마키아벨리의 철학에서 정의된대로 정치를 재구축한다. ISAs의 기능으로 빽빽한 이데올로기 사회가 된 포스트모던 사회에서는 변증법이라는 허구가 존재할 여지가 없다. 이 사회, 역사의 종말의 사회는 공허하고 무의미하고 전적으로 부정적이다. 이런 사회구조의 존재론적 특징은 우연적이다. 그 경계 넘어에서 새로운 저항과 힘이 발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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