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의 소수정치와 네그리의 삶정치
조정환
어떤 탈근대적 저자들은 출현하고 있는 모델의 주변부에서 구멍이 난 곳을 찾는다. 그러나 그 주변부는 초월의 문턱 즉 거의 초월에 해당하는 내재성이며, 유물론적 리얼리즘이 신비주의에 고개를 숙이게 마련인 모호한 장소이다. 어떤 이들은 끊임없이 이 주변부를 읽는다(데리다). 다른 이들은 마치 그것이 마침내 포착된 부정적인 것의 힘을 모으는 곳인 양 그것을 응시한다(아감벤). 공통적인 것에 대한 이러한 사유는 (레비나스에게서처럼) 타자를 기다리는 갈망 속에서 신비주의로 귀결한다[네그리, 2004, 126].
1. 서론
네그리(Antonio Negri)는 오랫동안 정치적 활동에 종사했으며 정치를 자신의 사유의 중심에 놓아 왔다. 그에게는 어느 정도 분명한 윤곽을 갖는 정치학이 있다. ‘코뮤니즘(communism)’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자본주의세계 질서의 주권적 배치를 규명하고 그것을 변형시켜 나갈 새로운 주체성의 형성을 규명하는 혁명적 정치학이 그것이다. 최근에 그것은 ‘제국’, ‘비물질노동’, ‘다중’ 등의 개념적 요소들을 축으로 하는 ‘삶정치(학)’으로 다시 짜이고 있다. 그는 맑스주의 전통에서 설명되어온 ‘공산주의=경제적 코뮤니즘’과의 구분을 위해 자신의 ‘삶정치적 코뮤니즘’을 ‘내재적’인 것이자 ‘자율주의적’인 것으로 설명해 왔다.
그렇다면 들뢰즈(Gilles Deleuze)에게도 정치학이 있는가? 있다면 그것은 어떤 내용, 어떤 특징을 갖는 것인가? 들뢰즈에게는 정치학이 없다는 생각이 터무니없는 것임은 들뢰즈의 직접적인 발언들을 통해 반박될 수 있다. 그는 인간적 삶의 모든 수준에서 정치를 느끼면서 정치를 사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정치적 사유의 분명한 윤곽이나 방향을 특징짓기는 쉽지 않다. 많은 연구자들이 그의 정치학을 서로 다르게 특징짓는 것은 아마도 그의 사유의 복잡성 때문일 것이다. 예컨대 들뢰즈의 존재론적 정향에 주목한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는 그에게서 ‘내재성의 정치학’을 읽어내며(하트 참조), 다양성 및 욕망 개념에서 출발한 폴 패튼(Paul Patton)은 ‘탈영토화의 정치학’을(패튼 참조), 차이의 철학과 외부의 사유에서 시작한 이진경은 ‘노마디즘의 정치학’을(이진경 참조) 읽어내고 있다. 니콜래스 쏘번(Nicholas Thoburn)은 들뢰즈의 정치학을 맑스의 정치학과 좀더 분명히 대면시키면서 들뢰즈의 정치학을 ‘소수정치학’으로 독해하려는 주목할 만한 시도를 보여주었다(쏘번 참조).
들뢰즈의 정치학을 읽어내는 이 독해들 사이의 미세한 차이를 드러내는 것은 이 글의 관심사가 아니다. 이 글의 관심사는 오히려 들뢰즈의 정치학1.과 네그리의 정치학의 차이 및 공명의 관계에 두어진다. 이 차이와 공명의 관계가 발생하는 곳은 존재론적 수준에서이다. 들뢰즈는 베르그송(Bergson)을 따라, 가능성-실재성의 관계쌍을 기각하고 잠재성-현실성의 관계쌍 속에서 존재를 사유한다. 반면 네그리는 잠재성-가능성-현실성의 이행을 통해 존재를 사유한다. 나는 존재의 잠재성, 가능성, 현실성에 대한 두 사람의 이러한 이해의 차이로부터 어떻게 서로 다르면서도 깊게 공명하는 정치학이 발전하는지를 살펴보는 한편, 이것이 맑스주의의 혁신에 어떤 가능성을 제시하는지를 검토해 볼 것이다.
2. 정통에 대한 거부와 가능성의 존재론으로서의 맑스주의
이미 밝힌 것처럼 우리의 문제는 맑스주의 혁신의 지평에서 들뢰즈와 네그리를 비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 사람의 존재론과 정치학에 대한 비교로 나아가기 전에 이 글에서 내가 ‘맑스주의’라는 용어를 어떤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지를 미리 밝혀두기로 하자. 나는 ‘맑스주의’라는 용어를 하나의 특정한 경향성에 붙이는 이름으로 사용한다. 요컨대 맑스주의는 코뮤니즘의 잠재력을 확인하고 그것의 실제적 가능성을 규명함으로써 그때그때의 코뮤니즘적 주체성의 구성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참여하는 이론적 및 정치적 실천들이다. 그것은 결코 맑스에 의해 이미 표명된 말들에 대한 충실성으로 환원될 수 없다. 또 그것은 맑스의 담론에서 파생된 특정한 철학이나 정치경제학 혹은 정치학으로 환원될 수도 없다. 맑스주의가 기억의 정치학이 아니라 미래에서 영감을 얻는 혁명적 실천인 한에서 맑스주의에 ‘정통’(orthodox)이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정통’은 우리를 과거의 기억에 묶어 놓음으로써 새롭게 사유할 수 없도록 만드는 밧줄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맑스주의를 일체의 정통에 대한 거부로, 다시 말해 과거의 혁명적 기억들까지도 도래할 가능성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재조명하여 현재의 ‘때’ 속에 합류시키는 방식으로 과거와 관계 맺는 태도로 이해한다.2. 요컨대 맑스주의는 잠재성과 현실성의 이중운동 혹은 잠재성에서 현실성으로의 이행을 ‘가능성’을 중심으로 사유하고 실천하는 운동이다.
맑스주의에 대한 이러한 재정의는 다음 두 가지 해석 경향에 대한 비판을 함축한다. 첫째로 이것은 맑스주의를 현실성을 중심으로 해석해온 현실주의적 객관주의적 경향에 대한 비판이다. 현실주의적 해석은 코뮤니즘을 존재의 잠재성과 접목시킬 수 없다. 그 무능력으로 인하여 그것은 자본주의 붕괴론에 기초한 혁명적 기회주의에서 자본주의 안정론에 기초한 구조개혁주의로 이동했다. 둘째로 이것은, 맑스주의를 잠재성 쪽으로 구부려 마침내 현실성에서 유리된 ‘아름다운 영혼’3.에 의지하게 된 경향에 대한 비판이다. 이 경향은 잠재성의 발견을 통해 현실(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수행했으나 그 잠재성을 현실성과 연결하지 못함으로써 결국 코뮤니즘을 부정하는 반맑스주의로 흐르거나 코뮤니즘을 신비한 것으로 만들었다. 이럴 때 잠재성은 현실의 주변이나 구멍 혹은 초월적 영역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잠재성과 현실성이 서로 대립적으로 이해되곤 하기 때문에 가능성에 대한 맑스주의의 강조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4. 가능성은 현실적 잠재성이자 잠재적 현실성이며 잠재성에서 현실성으로의 이행의 장이기도 하다. 가능성은 두 수준 사이의 발생공간이자 생성의 표면이다. 따라서 가능성의 존재론으로서의 맑스주의는 잠재력(potentiality)이 현실의 구성력(constituent power)으로 나타나는 가능조건에 대한 탐구이다.
3. 들뢰즈의 ‘잠재성의 존재론’
그렇다면 현실사회주의의 붕괴 및 정통 맑스주의의 퇴조 속에서 혁명적 사유의 재구축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해온 들뢰즈는 맑스주의와 어떤 관계에 있을까? 들뢰즈 자신은 ‘정통적 맑스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하면서도 자신을 ‘맑스주의자’로 자처하는 양면적 태도를 취했다. 『맑스의 위대함』에 대한 구상은 아마도 후자의 입장에 기초한 맑스주의 혁신의 플랜이었을 것이다.(쏘번 참조) 들뢰즈는 ‘존재론적 선회’를 통해 ‘객관적 현실의 인식’에 정향되어 있는 기존의 인식론적 맑스주의에 대한 근본적 비판을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존재는 일의적이다’; ‘사유와 연장은 평행하는 존재의 속성이다’; ‘실재는 현실적인 것인 동시에 잠재적인 것이다’; ‘잠재적인 것은 반복해서 주사위를 던지는 제곱능력의 차이들이다’; ‘현실적인 것은 잠재적 차이들의 분화이자 배치이다’.5. 이러한 생각을 맑스의 생각과 비교해 보자. 우리는 맑스가 『자본론』(Das Kapital)에서 ‘자본주의의 현실’을 묘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자연법칙들로부터 발생하는 사회적 적대관계의 발전정도가 높은가 낮은가 하는 것은 여기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맑스, 1990, 5)는 진술에서 우리는 현실성에 대한 경험적 묘사가 그의 탐구과제가 아님을 추론할 수 있다. 그는 ‘문제는 이 법칙들 자체에 있으며 움직일 수 없는 필연성을 가지고 작용하며 또 관철되는 이 경향들 자체에 있다’(5)고 말하면서 자신의 연구대상이 ‘자본주의적 생산방식 및 그것에 대응하는 생산관계와 교환관계이다’(5)라고 단언한다. 그것은 경험적 자본주의를 그 값으로 갖는 상대적 규정관계들, 자본주의의 가능조건에 대한 탐구이다. 반면 들뢰즈는 ‘현실의 운동이 그렇게 나타나도록 만드는 잠재적 이념이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탐구했다.
맑스적인 의미의 사회적 이념들은 존재하는가? 맑스가 “추상적 노동”이라고 부르는 것이 있다. 여기서 추상되는 것은 노동생산물들의 특정한 질들, 그리고 노동자들의 질이다. 하지만 생산성의 조건들, 사회의 노동력과 노동수단들은 추상되지 않는다. 사회적 이념은 사회들의 양화가능성, 질화가능성, 잠재력의 요소이다. 이 이념을 통해 표현되는 것은 이념적인 다양체적 연관들의 체계, 또는 미분적 요소들 사이에서 성립하는 미분비들의 체계이다. (…) 그런 비율적 관계들의 변이성에는 특정한 특이점들이 상응한다. 이 변이성과 특이점들은 규정된 한 사회를 특징짓는 구체적이고 분화된 노동들 속에서 구현되고, 이 사회의 실재적 결합관계들(법률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관계들) 속에서 구현되며 이 결합관계들의 현실적 항들(가령 자본가-임금노동자) 속에서 구현된다.(들뢰즈, 2004, 405)
이 인용문의 후반에서 드러나듯이 들뢰즈는 잠재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의 관계, 잠재적인 것에서 현실적인 것으로의 이행에 대해 관심을 가지며 그것에 대해 철학적으로 언명한다. 사회적 이념에서 미분비들의 체계로, 미분비들에 상응하는 특이점들에서 사회의 실재적 결합관계들과 이 결합관계의 현실적 항들로의 존재론적 이행에 대한 위의 서술은 잠재성에서 가능성으로, 다시 가능성에서 현실성으로 이행하는 존재의 운동에 대한 언명이다.6. 하지만 그의 주요한 관심은 이 운동과 이행에 두어져 있기보다 현실적인 것에서 잠재적인 것의 독립성을 밝히고 현실적인 것을 잠재적인 것으로 미분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혁명적 잠재력은 물론이고 혁명적 가능성마저 현실성 혹은 실현가능성의 척도로 재단되어 억압되고 있던 당대 서구운동의 개혁주의적 추세에 비추어 보면 이것은 유의미하고 유효한 전략적 구부림이었다. 순수회상, 지속, 에레혼, 아이온, (비)-존재 등의 ‘비가능한’ 이름들을 통해서만 환기할 수 있었던 존재의 잠재성에 대한 호소는 실용과 실리에 깊게 물든 운동에 충격을 추었고 1968년에 온갖 현실주의적 환상을 깨고 일어난 다중의 목소리와 겹쳐졌는데, 이로 인하여 들뢰즈는 누구도 결코 건너뛸 수 없는 잠재성의 철학자로 되었다.
잠재성의 복원7.을 통해 존재를 일의적인 것으로 사유하기 시작한 것은 현실주의적 객관주의적 맑스주의를 파열시키고 새로운 단절선을 출발시키는 획기적 성과임이 분명하다. 들뢰즈는 맑스주의적 유물론이 ‘의식에서 독립된 객관현실의 승인과 인식’을 넘어 사유와 연장, 잠재와 현실을 포괄하는 존재의 이중운동에 대한 물음과 배움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틀을 제공한다. 그러나 들뢰즈의 철학적 사유의 대부분은 잠재성의 실재성을 입증하는 데 할애된다는 점이 다시 한 번 환기되어야 한다. 잠재성은 직접 경험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잠재성의 실재는 주로 철학적 개념으로만, 그리고 예술적 형상을 통해서만 설명된다. 잠재성에서 현실성으로의 이행이 분석되지 않고 잠재성이 그 자체로, 즉 이념으로서의 차이 자체로 분석될 때 여기에 수반되는 가장 큰 위험은 ‘아름다운 영혼의 표상’들로 전락하는 것이다.8. 들뢰즈는 과연 이 위험을 피하는 데 성공했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을 통해 가능했는가?
들뢰즈는 베르그송(Bergson)을 따라 가능성을 현실성의 전사(傳寫)로, ‘해(解)를 받아들일 논리적 가능성’(들뢰즈, 2004, 353)으로 파악한다. 이러한 의미의 가능성은 실재성을 갖지 않는다. 그가 가능성-현실성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쌍을 잠재성-현실성이라는 베르그송적 쌍으로 대체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가능성에 대한 다른 이해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능력들을 실현할 새로운 배치를 가능성으로 이해할 수는 없는 것일까? 말년의 들뢰즈는 가능함, 가능태에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어떤 한 순간에 조용하고 아늑한 한 세계가 있다. 갑자기 그 장 너머로 무언가를 바라보는 겁에 질린 한 표정이 떠오른다. 여기서 타자는 주체도 객체도 아닌 매우 다른 어떤 것, 가능한 세계 혹은 두려운 어떤 세계의 가능태로서 나타난다. 이 가능성의 세계는 현실 아닌, 혹은 아직은 현실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 표현 속에서만 존재하는 어떤 표현된 것, 표정 혹은 표정에 상당하는 것이다. 타자란 우선 이러한 가능한 세계의 실존이다. 그리고 이 가능한 세계 역시, 그 자체 내에 고유한 하나의 현실을 가능성으로서 지닌다. 즉 표현자가 “나는 두렵다”고 말하고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표현된 그대로의(설사 그의 말이 거짓일지라도) 현실을 가능함(le possible)에 부여하기에 충분하다.(…) 타자 개념에 있어 가능한 세계와 표정은 표현된 것과 표현으로 각기 구별될지라도, 가능성의 세계는 그것을 표현하는 표정을 벗어나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개념의 접점은 구성요소들을 끊임없이 가로지르며, 그 안에서 오르내린다. 이런 의미에서 각 구성요소는 강도적 특질, 일종의 강도적 세로좌표이다. 이는 일반적이거나 특수한 것으로서가 아니라, 거기에 다양한 의미값들이 주어지거나 하나의 일관된 기능으로 지시됨에 따라서 일반화되거나 특수화될 수 있는 순수 단순한 어떤 특이성―‘하나의’ 가능한 세계, ‘어떤’ 표정, 단어‘들’―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들뢰즈․가타리, 1995, 29~34, 강조는 인용자).
여기서 가능성은 결코 현실성의 단순한 전사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강도적 특질, 특이성, 표정 등으로 실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가 가능태를 미적 범주로 확정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잠재적인 것을 현실화하기보다 구현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기념비란 잠재적 사건을 현실화함이 아니라 그것을 구현시킴, 즉 거기에 실체를 부여함이다. 다시 말해 사건에다가 하나의 육체를, 삶을, 우주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래서 프루스트는 예술-기념비를 체험보다 우위의 어떤 삶으로, 그 ‘질적인 차이들’로, 또한 우주 렘브란트나 우주-드뷔시와 같이 그 자체 고유의 한계들, 자체들 간의 거리들과 근접함들, 자신의 고유의 성좌들, 그러한 것들이 운행시키는 감각의 집적들을 구축하는 ‘우주들’로 정의한다. 이 우주들은 잠재적이지도 현실적이지도 않다. 그것들은 가능태들, 즉 미적 범주로서의 가능태(가능함, 그것이 없었다면, 나는 질식해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가능함의 실존이다. 반면 사건들은 잠재태의 현실, 모든 가능한 우주들을 조감하는 사유-본질의 형식들이다. 그렇다고 감각보다 개념이 원칙적으로 우선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감각에 대한 개념 하나라도 그 자체의 고유한 방법들에 의해 창조되어야 하며, 또 개념이 그 절대 형태 내에 필연적으로 존재해 있지 않다 해도, 감각은 가능한 자기의 우주 안에 존재한다는 의미이다.(들뢰즈․가타리, 1995, 256, 강조는 인용자)
잠재태로서의 개념과 가능태로서의 감각을 대비시키는 이상의 인용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들뢰즈가 강도, 특이성, 표현, 분화, 극화의 개념을 통해 가능성, 가능태, 가능한 것을 사고하고자 했다는 점이다. ‘가능성-현실성’의 쌍을 대체하는 ‘잠재성-현실성’의 쌍을 통해서 우리는 분리된 두 범주를 확인하는 것에 머문다. 이 양자가 서로의 반쪽이라고 말해도 사태는 마찬가지이다. 문제는 강도, 특이성, 구성으로 나타나는 가능성의 장을 통해 잠재성과 현실성의 교차와 이행을 확인하는 것이다. 가능성의 장이야말로 들뢰즈의 초험적 경험론의 대상이며 네그리의 맑스주의적 유물론의 대상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사람 사이의 깊은 공명을 확인한다.
물론 들뢰즈는 가능성의 장을 주로 예술에서 확인한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의 삶에서도 확인될 수는 것이 아닌가? 사실상 ‘살적 구현’은 삶의 일상이다. 맑스는 자본주의 운동의 객관법칙을 규명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자본주의의 운동 속에서 그것에 대항하여 움직이며 구현되는 코뮤니즘의 살을 규명했다. 그것이 프롤레타리아트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코뮤니즘의 가능성의 장이며 가능태이다. 물론 우리가 읽고 있는 현실의 『자본론』은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살의 형성을 간헐적으로, 그리고 난외적으로만 다룬다. 그렇지만 자본론의 초고인 『요강』(Grundrisse)은 ‘사회적 노동’의 형성과 구현의 과정을 보여주고 또 전망함으로써 삶 속에 실재하는 코뮤니즘의 가능성을 밝힌다. 이처럼 가능태는 결코 예술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점차 예술로 전화하는 삶 전체에 해당되는 문제이다. 맑스주의는 삶의 이 가능성의 탐구와 코뮤니즘적 가능성의 장에의 참여를 통해 세계와 자신을 혁신하는 정치학이다.
이제 예술 영역을 넘어 좀더 직접적으로 들뢰즈의 정치 개념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전통적 정치학에서 정치는 권력의 점이자 절편으로 흔히 이해되어 왔다. 이것은 정치가 오직 현실성의 수준에서만 탐구되어 왔음을 의미한다. 우파는 물론이고 좌파 역시도 권력에 대한 이 현실주의적 이해를 계승했다. 혁명정치는 현실의 권력을 장악하는 문제로 파악되었다. 이것은 지배적인 것이 되고자 하는 욕망 속에서 지배/피지배 관계를 부단히 재생산하는 정치 개념, 즉 다수주의적 정치 개념이다. 들뢰즈는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 해체하는 소수적 정치 개념을 제시한다. 그는 현실 권력의 문제를 잠재력의 관점에서 다시 사고하고 권력이 잠재성의 삶을 절단하는 체제임을 밝혀낸다. 이러한 인식에서 현존하는 다수주의적 정치 개념으로부터의 단절선이 출현한다. 그것은 소수정치의 선, 즉 현존하는 체제가 삶에 새겨놓은 절단선들을 드러내고 그것을 파열하는 특이성의 선들을 발견-접속하여 공통적 탈주의 선을 창조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잠시 들뢰즈의 정치학에 대한 쏘번과 하트의 해석을 비교해 봄으로써 들뢰즈 정치학의 한 특징을 살펴보도록 하자. 니콜래스 쏘번은 들뢰즈의 사유에서 두 가지 삶의 과정, 태도를 확인한다. 다수적인 것과 소수적인 것이 그것인데, 다수적인 것이 동일성, 표준, 상수를 추구하는 가수적(可數的)인 과정을 지칭하는 것임에 반해 소수적인 것은 삶의 일탈 혹은 탈영토화의 과정을, 몰적 표준에 대항하여 세계의 잠재성을 불러내는 과정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본다.(쏘번, 56) 다수적인 과정이 다수주의적 형태를 가짐에 반해 소수적 과정과 경향 속에는 두 가지의 형태가 있다. 하나는 하위체계를 구성하는 소수성이며 또 하나는 잠재적이고 창조된 생성으로서의 소수주의적인 것이다.(56) 이 세 가지 형태들이 과정, 태도, 경향을 함축하는 한에서 이것들은 정치적이다. 쏘번이 ‘소수정치’라는 개념을 제안하는 곳은 여기에서이다. 소수정치는 ‘동일성을 강화하는 과정이 아니라 삶의 혁신, 실험, 그리고 뒤섞임의 과정’이며 그 속에서 ‘공통체의 형식들, 실천의 기술들, 윤리적 태도들, 스타일들, 지식들, 그리고 문화적 형식들’이 구성되는 과정이다. 쏘번은 이 과정이 ‘갇힌’ 상황에서, 즉 어떤 자율적 공간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운동을 동일성으로 가두는 사회적 힘들이 가득찬’ 공간에서 수행하는 정치이며 민중이 없는 상황에서 전개하는 발명의 정치라고 해석한다.(58) 그 결과 프롤레타리아트는 사회적 집단이 아님은 물론이고 코뮤니즘의 가능성이나 정치적 살도 아닌 일종의 정치적 구성의 양식으로 이해된다.(153) 그것은 활력, 논쟁, 지속적 심문, 계략, 발명의 활기찬 과정이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는 반동일성주의적이라는 의미에서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맑스주의가 가능성의 정치(학)인 한에서 그것은 체제에 의해 주어지는 동일성에 대한 거부이며 잠재성을 불러내는 과정임이 분명하다. 이것은 분명히 활력, 논쟁, 계략, 심문, 발명 등에 의해 추동된다. 하지만 쏘번은 들뢰즈가 이 발명의 정치의 공통적 행위자를 이름 부르기를 거부했다고 말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정치적 구성의 양식’으로 이해될 뿐 구성의 정치적 주체성으로 파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래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지만 이러한 설명은, 들뢰즈가 새로운 민중의 생성에 대해 거듭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들뢰즈 정치학에 대한 적실한 설명으로는 보기 어렵다. 마이클 하트는 쏘번과는 다른 해석을 제시한다. 들뢰즈에게서 실체(표현자)가 양태들(표현되어지는 것)의 세계에 절대적으로 내재하게 되는 것은 속성들(표현들)을 통해서이며 속성들 속에 포함된 형식들의 공통성(commonality)을 통해서라는 것이다. 요컨대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Spinoza and the Problem of Expressionism)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들뢰즈에게서도 속성들의 표현은 존재의 공통 형식들을 통해서만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트는 이것을 다음처럼 분석한다.
우리는 이러한 개념화를 두 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다. 한편으로 속성들에 의해 신은 양태들의 세계 안에서 절대적으로 내재적이다(완전히 표현된다). 다른 한편 속성들의 공통 형식들을 통해 양태들은 신적인 실체에 완전히 분유한다. 내재성과 분유는 속성들의 표현이 갖는 두 가지 측면이다. 표현적 속성들에 의해 주어지는 이해와 유비적 고유성들에 의해 부과되어지는 복종을 구별해주는 것은 이러한 분유이다. 기호들의 체계는 우리에게 존재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침묵하는 기호들과 기호학의 계명들은 존재론을 폐장(閉場)시킨다. 오직 표현만이 존재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열어 놓을 수 있다.(하트, 195)
그렇지만 절대적 내재성은 일의성에 대한 필요조건이긴 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속성들은 (내재성으로부터 뒤따르는) 내부적인 공통 형식에 의해 특성화될 뿐 아니라 외부적 복수성에 의해서도 성격이 규정된다. 다시 말해서 표현적인 긍정 신학이라는 이러한 이론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무한한 속성 속에 구현된 형식적[형상적] 공통성을 상이한 속성들 사이의 형상적 구별에 의해 보충할 필요가 있다. 신의 본질은 하나의 속성 안에서 표현될 뿐 아니라 무한한 수의 형상적으로 구별되는 속성들 안에서도 표현된다.(198)
속성들은 형상적으로는 구별되고 존재론적으로는 동일하다. (…) 속성들은 각각 상이한 형상으로, 그러나 동일한 의미로 존재를 표현한다. 일의성은 속성들 사이의 형상적 차이를, 그러나 속성들 사이의 실재적이고 절대적인 존재론적 공통성을 함축한다.(198)
따라서 속성들은 우리에게 조직화의 문제를 제기한다. 하지만 하트는 들뢰즈가 이 속성들의 조직화에 부정적이거나 그것에 무관심했다고 분석한다.(232)9. 쏘번이 소수정치를 동일성에의 참여이자 그것과의 교전이며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창조로 이해하지만 그의 소수정치학은 존재론적 일의성에 적극적 관심을 기울이지 않음으로써 민중의 생성의 문제에 무관심하게 (혹은 부정적으로) 되었는데 이것이 들뢰즈의 이 취약점이 투영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 결과 정치(학)이 다양한 속성들의 공통성을 조직화하는 과정으로 파악되기보다 동일성과의 교전이라는 수준에서 이해되는 것이 아닐까? 이럴 때 민중의 부재 속에서 전개되는 그 교전은 동일성에 대한 반작용에 지나지 않으며 잠재력의 우선성은 부정된다. 이러한 이해에서 존재론적 자율에 대한 부정이라는 관념이 발생한다. 자율은 존재론적 일의성, 다양한 특이성들의 공통성, 그리고 공통성의 조직화에 기초한 내재적 코뮤니즘의 이념이다. 자율에 대한 거부는 존재론적 일의성에 대한 철학적 탐구의 부재(이것은 쏘번에게서만 나타난다)와 속성들의 공통형식에 대한 회의(이것은 쏘번과 들뢰즈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난다)가 남겨놓은 정치학적 흔적이다.
4. 네그리의 ‘가능성의 존재론'
이미 말한 바처럼 들뢰즈는 속성들의 공통성의 조직화 가능성에 대해 소극적이었다. 그는 칸트(I. Kant)적 공통감(권리상 자연적인 공통감)을 본성상 올바른 사유, 초험적 모델로서의 재인과 결부된 사유의 이미지로 비판할 뿐만 아니라,(들뢰즈, 2004, 300~301) 나아가, 소통과 창조를 대립시키면서 특이성들 사이의 소통불가능성을 역설했다.10. 그렇다면 일의성을 강조하는 들뢰즈의 존재론과 공통성을 부정하는 그의 정치학 사이에는 깊은 균열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공통성의 조직화 가능성을 강조하는 네그리와 들뢰즈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물이 흐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들뢰즈가 소통과 공통성에 대해 부정적 태도를 취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내가 보기에 그것은 공통성과 소통의 실존양식들(재인의 공통감과 부당한 종합들, 그리고 합의적 여론들)에 대한 비판으로 읽히는 것이 옳다. 그는 구성되고 생산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이미 전제되어 있는 공통감을 비판하며(들뢰즈, 2004, 301) 지층화된 기호체제에 입각한 소통의 양식을 비판하는 것이다. 그에게서 소통불가능성은 실제로는 재현불가능성을 의미한다.11. 이것은 소통의 실존양식에 대한 비판이지 그 이상은 아니다. 나아가 그는 도주선들이 서로 연결됨으로써만 블랙홀로 빠져들지 않는다고 강조한다.(들뢰즈, 2001, 555) 이것은 그가, 다른 한편에서, 특이성들의 공통적 조직화의 가능성과 그 필요성을 긍정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들뢰즈는 특이성들의 공통적 조직화를 원리적으로 승인하고 있지만 그가 그것을 풍부하게 전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논의는 도주적 생성에 집중되며 이 점에서 생산적 구성에 집중되는 네그리의 논의와는 분명한 차이를 드러낸다. 네그리는 부정적 종합들에 긍정적 종합들을 대치시키고 후자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발견하고 또 발전시키려 시도하는 점에서 들뢰즈와 구별된다. 이런 의미에서 들뢰즈의 존재론이 ‘잠재성의 존재론’(鈴木 泉, 190~208)이라면 네그리의 존재론은 가능성의 존재론이다.
물론 네그리는 존재의 일의성의 관점을 들뢰즈와 공유한다. 하지만 그는 잠재성의 실재성의 규명에 철학적 노력을 기울이는 들뢰즈와는 달리, 잠재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의 이중운동 속에서 ‘가능적인 것의 구성’에 관심을 집중하며 가능성의 장을 경유하는 잠재적인 것에서 현실적인 것으로의 이행을 규명하는 일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인다. 잠재성(차이 자체 혹은 차이의 이념)은 직접적인 탐구의 대상으로 설정되기보다 그것의 가능적 조직화 속에 내재하는 것으로서 탐구되며 현실성도 가능성(경향)에 비추어서 해석되고 비판된다. 잠재성으로서의 행위할 힘(power to act)과 그것의 자본주의적 현실태인 노동이 산 노동의 가능성의 계보적 형태들(전문적 노동자, 대중 노동자, 사회적 노동자) 속에서 설명되는 것이다.
우리는 잠재적인 것을 다중 속에 있는 (존재하고, 사랑하고, 변형하고, 창조하는) 행위할 힘(powers to act)이라고 이해한다. 우리는 이미 다중의 잠재적 역능이 어떻게 투쟁에 의해 구축되고 욕망 속에 공고화되는지를 보았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잠재적인 것이 가능한 것의 경계선에 압력을 가할 수 있는지, 그래서 현실적인 것에 닿을 수 있는지 연구해야만 한다. 잠재적인 것으로부터 가능한 것을 통과하여 현실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이행은 근본적인 창조행위이다. 산 노동은 잠재적인 것에서 현실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통로를 구축하는 것이다. 산 노동은 가능성의 전달수단이다.(네그리․하트, 2001, 456~7, 강조는 인용자)
네그리는 ‘잠재성의 창조적 역능’을, ‘존재가 언제나 창조와 예측할 수 없는 새로움의 행위임을 강조할 필요에 대해 인정한다’.(457) 하지만 그는, 가능성을 실재성의 재현으로만 간주하는 베르그송주의의 존재론은 ‘창조된 존재의 현실성, 그것의 존재론적 무게, 세계를 구조화하고 우연성에서 필연성을 창조해 내는 제도들을 강조할 필요가 있는 한 불충분하다’(457)고 본다. 그래서 그는, ‘우리의 관심이 처음에는 다중을 구성하는 잠재성의 요소들이 지닌 강렬도에 있었다면, 이제는 그러한 잠재성들이 축적되어 스스로의 힘에 적합한 실현의 문턱에 도달한다는 가설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470)고 말하게 된다. 네그리에게서 문제는 잠재성에서 현실성으로 던져지고(분화와 극화, 밖주름운동) 다시 현실성에서 잠재성으로 떨어지는(미분화, 안주름운동)의 주사위 놀이, 영원회귀의 운동이 아니다. 그가 파악하는 존재에게 영원회귀의 원환적 운동은 없다. 실재하는 것은 잠재성에서 가능성으로, 가능성에서 현실성으로의 부단한 이행운동이다. 생산된 현실성은 이 운동의 종착점이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이행의 잠재성과 가능성을 구성하므로 이 운동은 직선으로 진행되는 회귀하지 않는 시간이다.12. 이것은 날아가는 화살촉의 시간, 즉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불려진다.(네그리, 2004, 16~17) 들뢰즈가 크로노스의 시간에서 아이온의 시간을 구별하고 아이온의 선차성을 강조하는 데 역점을 둔다면 네그리는 아이온의 시간의 선차성에 대한 인정 위에서 아이온이 크로노스를 향해 이행하는 카이로스의 시간을 관심의 중심에 놓는다. 그래서 그는 ‘가능한 것의 존재론이 분석의 중심지형이다’(네그리․하트, 2001, 470)라고 단언한다.
가능성은 존재가 힘으로 나타나는 평면, 즉 역사적 경향의 평면이다. 이 평면에서 힘들의 적대가 움직인다. 맑스의 추상 개념은 가능성의 평면에서의 이 적대를 드러내 보여준다. 첫 번째의 추상, 즉 추상노동은 자본 측에서의 추상이다. 그것은 인간의 산 노동을 양화하여 그것의 잠재력으로부터 그것을 분리시킨다. 임금노동은 자본이 산 노동으로부터 잠재력(행위할 힘, 창조력)을 분리하여 통제하는 추상의 형식이며 일종의 형식적 추상이다.(457)13. 그것의 결실은 이윤이다. 두 번째의 추상은 노동 측에서의 추상이다. 산 노동의 이 추상에서 드러나는 것은 행위할 힘의 전반적 틀이며 잠재적인 것 자체이다.(457) 이 실질적인 추상에서 산 노동은 행위할 힘의 적극적 표현으로 드러나며 자본주의에 예속된 임금노동으로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규제를 넘어설 수 있는 사회적 노동으로서, 가능성의 형식으로서 드러난다. 이 사회적 노동은 현존질서와 질서 재생산의 규칙들을 넘어서는 생산적 힘 혹은 ‘생산적 과잉’이다. 그리고 ‘이 생산적 과잉은 해방의 집합적 힘의 결과인 동시에 노동의 생산적이고 자유로운 역량들의 새로운 사회적 잠재성의 실체이다.’(457~8) 즉 실질적 추상의 결실은 ‘내재적 코뮤니즘’이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것은 사회적 잠재성의 실체이자 실질적 가능성의 장인 사회적 노동이 갖는 두 가지 특질에 대한 네그리의 분석이다. 첫째로 그것은 특이하며 보편적인 활동력이다. 둘째로 그것은 확장력, 존재론적 구축의 힘, 가치변환의 힘이다. 첫 번째 특질 때문에 업(業, res gestae)의 장 전체는 ‘척도 바깥에서’ 잠재성에 의해 물들여진다. 잠재성이 전진하면서, 기록과 업적(業績)으로서의 역사(historia rerum gestarum)는 실효된다. 역사(history)가 끝나면서 유일한 역사적 능력은 역사성(historicity), 업의 시간에 주어진다. 이것은 가능한 것과 현실적인 것을 접속시키는 특이한 잠재성들이며 특이성으로부터 공통성을 생산하는 행위의 시간이다. 두 번째 특질 때문에 잠재성들은 ‘척도를 넘어서는’ 혁신기계들로 표현된다.(471) 특이한 잠재성들은 낡은 가치체계 및 착취체계에 지배당하는 것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그 고유의 환원불가능한 가능성들을 창조한다.(471) 첫 번째 특질에서 업은 파괴력으로 나타나며 두 번째 특질에서 업은 구성력으로 나타난다. 이로써 잠재성에서 현실성으로의 이행은 파괴와 구성의 함수를 갖는 가능성의 기계의 기능이 된다. 이것을 통해 우연성에서 필연성이 구성되는 것이다.
5. 소수정치 대 삶정치
그러면 이 구성의 이념은 들뢰즈의 사유와 대립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들뢰즈 역시도 ‘우리는 카오스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질서를 필요로 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들뢰즈․가타리, 1995, 289) 그에 따르면 카오스를 물리치는 세 가지 승자가 있다. 철학자, 과학자, 예술가가 그것이다. 이들은 카오스에 침잠하여 그것과 투쟁하는 것을 통해 얼마만큼의 질서를 가져온다. 철학의 변주들(variations), 과학의 변수들(variables), 예술의 변종들(variétés)이 그것이다. 변주들은 분리된 관념들의 연상이 아니라 한 개념 내의 불분명한 지대들을 통과하는 재연결들이고, 변수들은 사물들 내에 있는 특성들의 연결이 아니라 국부적 확률들로부터 총체적 우주론으로 전개되는 지시관계의 분할구도상에서의 유한좌표들이며, 변종들은 기관 내에서 감각의 재생을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을 되돌릴 수 있는 비유기체적 구성의 구도상에서 지각의 존재, 감각의 존재를 세운다.(294) 들뢰즈는 『베르그송주의』, 『니체와 철학』, 『주름』, 『차이와 반복』, 『의미의 논리』, 『천개의 고원』 등을 통해 철학의 변주들을 제시했고 『프루스트와 기호들』, 『감각의 논리』, 『카프카』 『시네마』를 통해 예술의 변종들을 제시했다. 또 곳곳에서 그는 과학이 생산한 변수들에 대해 서술했다. 그렇다면 네그리가 우연성에서 필연성을 건져내는 활동으로 평가했고, 실제로 자신의 작업들 전체에서 힘들여 가공한 업(res gestae), 즉 산 노동에 대해서 들뢰즈는 어떻게 평가했는가? 분명히 『앙띠 오이디푸스』와 『천개의 고원』에서 그는 이 문제를 다룬다. 『앙띠 오이디푸스』에서의 ‘욕망하는 생산’, 그리고 『천개의 고원』에서의 ‘생성’이 그것이다. 그러나 들뢰즈에게서 맑스와 네그리가 분석의 중심에 놓은 노동은 점차 배제되는 경향이 있다. 『앙띠 오이디푸스』의 욕망하는 생산에서 노동은 욕망하는 생산의 일부로 사고되지만 욕망하는 생산을 부당하게 종합하는14. 사회체들에 포섭된 형태로 등장한다. 『천개의 고원』에서 들뢰즈는 생성(되기)을 생산으로부터 구별짓기 시작하는데 이 과정에서 노동의 배제는 더욱 뚜렷해진다.
되기는 결코 모방하기도 동일화하기도 아니다. 그것은 또한 퇴행하기-진보하기도 아니다. 또한 그것은 대응하기도 아니고 대응관계를 설립하기도 아니다. 또한 그것은 생산하기, 즉 계통을 생산하기 계통을 통해 생산하기도 아니다. 되기는 자기 나름의 고름을 갖고 있는 하나의 동사이다. 그것은 “…처럼 보이다”, “…이다”, “…와 마찬가지이다”, “생산하다” 등으로 귀착되지 않으며 우리를 그리고 귀착시키지도 않는다.(들뢰즈․가타리, 2001, 454)
계통관계나 유전적 생산이 없는 서식, 전파, 생성을 어떻게 상상해 볼 수 있을까? (…) 우리들은 계통관계와 전염병을, 유전과 전염을, 유성생식이나 성적 생산과 전염을 통한 서식을 대립시킨다. 인간 패거리이건, 동물 패거리이건 하여간 패거리들은 모두 전염, 전염병, 전쟁터, 파국과 더불어 증식한다. 이들은 스스로를 재생산하지 않지만 그러나 매번 다시 시작하면서 영토를 얻어가는 성적 결합에서 태어난 그 자체로는 생식능력이 없는 잡종들과 같다. 반자연적 관여들, 반자연적 결혼들은 모든 왕국을 가로지르는 참된 <자연>이다. 전염병이나 전염에 의한 전파는 유전에 의한 계통관계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이 두 주제가 서로 섞이고 서로 상대를 필요로 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흡혈귀는 계통적으로 자식을 낳는 것이 아니라 전염되어 가는 것이다. 전염이나 전염병은 예컨대 인간, 동물, 박테리아, 바이러스, 분자, 미생물 등 완전히 이질적인 항들을 작동시킨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자연>은 이런 식으로만, 자기자신에 반해서만 진행한다. 우리는 계통적 생산이나 유전적 생산과는 멀리 떨어져 있다. 이것들에서는 동일한 종 내에서의 성의 단순한 이원성과 여러 세대에 걸친 작은 변화들만이 차이로서 유지될 뿐이다. 이와 반대로 우리들의 입장에서는 공생하고 있는 항들만큼이나 많은 성들이 있으며 전염과정에 개입하는 요소들만큼이나 많은 차이들이 존재한다. 우리는 수많은 것들이 남성과 여성 사이를 지나간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들은 바람을 타고 다른 세계에서 오며, 뿌리들 주변에서 리좀을 형성하고 생산이 아닌 오직 생성의 견지에서만 자신을 이해하게 된다.(460)
생성개념이 이처럼 유전적 ‘재생산’에서 분리-대립되는 한에서 그것이 사회적 생산에서 분리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로 보인다.
소수자가 혁명적인 것은 세계적 규모의 공리계를 의문시하는 이보다 훨씬 더 심층적인 운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수자의 역량, 즉 독자성은 프롤레타리아 속에서 형상과 보편적 의식을 발견한다. 그러나 노동계급이 기왕에 획득한 사회적 지위나 심이어 이미 이론적으로 극복한 국가에 의해 규정되는 한 그것은 오직 “자본” 또는 자본의 일부(가변자본)로서 나타날 뿐 자본의 판(=계획)에서 벗어날 수 없다. 기껏해야 그러한 계획은 관료적인 것이 될 뿐이다. 반대로 자본의 판에서 벗어나고 항상 그렇게 하고 있을 때에야 비로소 대중은 끊임없이 혁명적으로 되고 가산 집합들 간에 성립되는 지배적 균형을 파괴할 수 있다. 아마존-국가, 여성들의 국가, 임시적 노동자들의 국가, (노동 “거부” 국가가 어떨지는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 소수자가 문화적․정치적․경제적으로 지속가능한 국가를 구성하지 않는 것은 국가-형식도 또 자본의 공리계 또는 이에 대응하는 문화라는 것이 소수자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901~2)
이 대목에서 우리는 들뢰즈가 사회적 생산과 노동을 생성에서 배제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노동이 자본의 판에 포섭된 가변자본이라는 인식이 그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국가 속에서 노동을 종합할 가능성을 찾는 사회민주주의적 노동관을 비판함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여기서 오뻬라이스모가 들뢰즈와 (그리고 오뻬라이스모 당시의 네그리 자신도) 공유했던 ‘노동력=가변자본’이라는 등식에 대한 네그리의 문제제기를 서둘러 살펴보도록 하자.
이 비물질노동의 형식들에서 협력은 노동 자체에 완전히 내재적이다. 비물질노동은 즉각적으로 사회적 상호행위와 협력을 포함한다. 달리 말해 비물질노동의 협력적 측면은, 이전의 노동형식들에서처럼, 외부에서 부과되거나 조직되지 않는다. 오히려 협력은 노동활동 그 자체에 완전히 내재적이다. 이 사실은 노동력이 ‘가변자본’으로, 즉 자본에 의해서만 활성화되고 응집되는 힘으로 생각되는 (고전적 정치경제학과 맑스주의적 정치경제학에 공통적인) 낡은 관념을 의문에 붙인다. 왜냐하면 노동능력의 협력적 힘들(특히 비물질적 노동능력)은 노동에게 그 자신을 가치화할 가능성을 제공하기 때문이다.(Hardt and Negri, 2000, 294, 번역은 인용자).
네그리에게서 노동은 (특히 비물질노동은) 협력을 내재화하는 생성의 활동으로 평가됨에 반해 들뢰즈에게서 노동은 자본의 판에 예속된 인간 활동으로, 체제 재생산의 활동으로 인식된다. 그러므로 생성은 직접적 노동거부를 통해, 노동으로부터의 탈주를 통해, 생성의 활동들인 예술, 과학, 철학을 통해 비로소 가능해지게 된다. 이것이 소수정치(학)이라면 네그리의 삶정치학은 예술, 과학, 철학 등까지 모두 노동으로 포섭되어진 삶정치적 상황에서, 그것들을 비물질노동의 양상들로 파악한다. 그는 산 노동을 포섭하며 그것의 공통성을 착취하는 체제로부터 탈출할 출구를, 노동에 내재하는 협력적 자기가치화 능력에서 찾는다.15.
이 분명한 차이를 다시 우리가 설정한 애초의 문제틀 속으로 가져가 보기로 하자. 소수정치에서 잠재적인 것에서 현실적인 것으로의 이행(분화와 극화)은 다수적인 것의 합성과정이며 지층과 체제의 구축과정으로 파악된다. 현실적인 것은 하나의 결과, 산물로 이해될 뿐 새로운 이행과 구성의 평면을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따라서 소수정치는 현실적인 것에서 잠재적인 것을 미분하는 정치로 나타난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잠재적인 것에서 잠재적인 것으로 운동하는 잠재화의 정치학이다. 그것은 ‘기관 없는 몸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의 문제의식에 의해 이끌린다. 역행(involution). 이것은 소통되고 전염되기 위해 유전적인 계통적 진화(evolutioon)이기를 그치는 리좀권 속에서의 사건이다. 소수정치적 역행은 현실적인 것에서의, 갇힌 상황으로부터의, 지층들로부터의, 체제로부터의 도주이다. 소수정치에서 민중은 없다. 오히려 민중은 창조되어야 할 것으로 남아 있다. 그것은 ‘자신의 고유한 선을 따라, 주어진 여러 항들 “사이에서”, 할당 가능한 관계를 맺으면서 전개되는 하나의 블럭을 형성하는 일’(들뢰즈․가타리, 2001, 454)이다.
그렇다면 소수정치가 창조해야 할 이 민중과 삶정치가 말하는 다중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들뢰즈와 네그리는 공통적으로 근대적 혹은 고전적 민중의 부재를 말한다. 네그리에게서 민중은 근대적 주권들의 초석으로서 ‘사회적 차이들을 하나의 정체성으로 종합하고 환원하는 하나’이다.(Hardt & Negri, 2004, 99) 탈근대로의 이행 속에서 민중을 생산하는 메커니즘은 크게 와해되었다. 들뢰즈도 주체로서의 민중의 해체를 현대의 특징으로 보는 점에서 네그리와 공명하는 견해를 제시한다. 그는 에이젠슈테인, 푸도프킨, 도브첸코, 베르토프 등의 고전영화와 2차대전 전후의 미국영화에서 민중은 ‘비록 억압되고 배반되고 종속되고 맹목적이거나 무의식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존재하며’, ‘현실화 과정 속에 있는 잠재적 실존성을 갖고 있다’고 본다.(들뢰즈, 2005, 419~20) 그것은 현실화되기 전에 이미 현실적인 것으로서, 추상적이지 않은 이상적인 것으로서 이미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대중예술로서의 영화가 민중이 진정한 주체가 되는 탁월한 혁명예술 혹은 민주적 예술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 나왔다는 것이다.(420) 이 믿음은 ‘노예적 대중을 영화의 대상으로 삼은 히틀러의 도래, 민중의 일체성을 당의 전제적 단일성으로 대체한 스탈린주의, 더 이상 스스로를 과거의 민중들이 응집하는 도가니나 장차 올 민중의 어린 배아로서 믿을 수 없게 된 미국 민중의 해체’(420)를 통해 와해된다. 그 결과 현대적 정치영화는 ‘민중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혹은 아직 없다 …. 민중이 결여되어 있다.’(420)는 기저위에서만 가능할 것이라고 들뢰즈는 진단한다. 카프카, 클레, 제3세계의 시네아스트 등은 제3세계 및 소수집단들의 삶과 관련하여 민중의 부재를 보고하고 있다. 하지만 들뢰즈는 ‘부재하는 민중에 대한 이 보고서는 정치적 영화의 포기가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제3세계와 소수집단들이 이제부터 정초해 나가야 할 새로운 기초를 이룬다. 예술, 그리고 특히 영화는 이러한 과업에 무엇보다도 참여해야 한다. 이미 존재한다고 전제된 민중에 말을 거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민중의 창조에 기여할 것. 주인, 식민 지배자들이 “여기에는 결코 민중이란 없었다”라고 주장하는 순간에, 결여된 민중은 이미 하나의 생성이 되고, 이 민중은 판자촌과 수용소, 혹은 게토, 즉 당연히 정치적인 예술이 헌신해야 할 새로운 투쟁의 조건 속에서 스스로를 창조하게 되는 것이다.’(421~2, 강조는 인용자)라고 말함으로서 민중의 부재가 아니라 민중의 새로운 창조에 방점을 찍는다.
이 생성으로서의 민중이 네그리의 다중과 겹치는 것일까? 이렇게 묻는 순간, 다중이 생산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구축된 개념임에 반해 (민중의) 생성은 생산과는 다른 과정이라는 앞에서의 논의를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시네마』(Cinema)에서 생성으로서의 민중에 대한 서술이 역사적임에 반해,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그것은 논리적이다. 그러므로 후자에서 민중의 생성 논리가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그 논리의 첫 번째 근거는 카오스로부터 카오이드들(Chaoïdes=카오스를 재단하는 평면들 상에서 산출된 현실들)을 재단해 내는 세 가지 사유 혹은 창조의 형식이 예술, 과학, 철학이라는 명제에서 찾아진다. 둘째로 들뢰즈는 ‘이 세 가지 평면들의 접합(단일성이 아닌), 그것이 곧 두뇌’(300)이며 두뇌가 주체가 되는 자리에서 일대전환이 나타난다고 본다. 이제 사유하는 것은 두뇌이지 인간이 아니다. 인간은 단지 두뇌의 결정체일 뿐이다. 이 곳에서 철학, 예술, 과학은 객체화된 두뇌의 정신적 대상들이 아니라 두뇌가 ‘주체로 즉 사유-두뇌로 되는 세 가지 양상들이며, 두뇌가 카오스에 잠겨 카오스와 대적하기 위해 타고 가는 세 개의 뗏목들, 세 개의 평면들이다’. 사유-두뇌는 정신 그 자체이며 주체이고 자기초월체(superjet)이다. 개념적 사유-두뇌(철학)는 개념들이 창조되는 내재성의 평면 위에서 개념적 인물들을 이끌어 내고 감각적 사유-두뇌(예술)는 구성의 평면에서 변종이 된 진동으로서 영혼 혹은 힘으로 되어 미학적 형상들을 창조하며, 인식적 사유-두뇌는 지시관계 혹은 좌표화의 평면에서 기능들과 부분적 관찰자들을 창출한다.(304~312) 민중이 창조되는 세 번째 과정은 철학, 예술, 과학 사이의 내재적 간섭이다. 간섭은 예술이 비-예술을, 과학이 비-과학을, 철학이 비-철학을 필요로 하는 한에서 필연적이다. 이 세 평면들은 실현되는 동시에 사라져 줄 것이 요청되는 시작이나 끝으로서의 부정이 아니라, 자신들의 생성이나 발전의 매순간 부정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민중은 어디에서 창조되는가?
이 세 개의 부정이 두뇌 평면과의 관계에서는 여전히 서로 구별된다 하더라도, 두뇌가 침잠하는 카오스와의 관계에서는 더 이상 서로 구별되지 않는다. 이러한 침잠 속에서 ‘다가올 민중’의 그림자가 카오스로부터 간신히 빠져나오는 것 같다. 그것은 예술이, 뿐만 아니라 철학과 과학이 부르는 그대로, 대중적-민중, 세계적-민중, 두뇌적-민중, 카오스-민중이다. 그것은 클레의 비-개념적 개념이나 칸딘스키의 내적 침묵처럼, 세 개의 학문 속에 누워있는 비-사유적 사유이다. 바로 거기에서 개념들, 감각들, 기능들은 결정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고, 그와 동시에 철학, 예술, 과학은 구별 불가능한 것이 된다. 마치 철학, 예술, 과학은 서로 다른 본질을 통해 연장되면서 끊임없이 그들을 따라다니는 동일한 한 그림자를 함께 나눠 갖고 있는 듯하다.(314)
민중이 창조되는 곳은 두뇌가 카오스와 관계하는 지점이다. 그것은 철학, 예술, 과학에 자신의 힘을 나눠주는 카오스-민중이자 두뇌적-민중이다. 그것은 결정할 수 없고 구별할 수 없는 영역에서 일종의 그림자 존재로서, 잠재력으로서 생성된다. 철학, 예술, 과학은 이 잠재력을 분유하며 수행하는 평면들이다. 카오스-민중이자 두뇌적-민중인 이 생성의 민중은 개념상에서 척도 바깥의 것이자 척도 너머의 것인 네그리의 다중과 많은 점에서 겹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이가 나타난다. 들뢰즈의 두뇌적-민중은 사유하는 정신적 주체성으로 나타남에 반해 네그리의 다중은 노동하는 사회적 주체성으로 나타난다. 네그리에게서 철학, 예술, 과학은 탈근대적 다중지성의 조건 하에서 작용하는 비물질노동의 형태들임에 반해 들뢰즈에게서 이것들은 결코 노동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네그리에게서 다중이 현실성으로 이행하는 힘들의 연결로서, 즉 가능성의 수준에서 정의되고 있음에 반해 들뢰즈의 생성하는 민중은 예술, 철학, 과학에 자신의 힘들을 나눠주는 잠재성의 수준에서 정의된다. 네그리에게서 다중의 공통성은 산 노동 속에서 발생하고 발전하는 협력임에 반해 들뢰즈에게서 그것은 두뇌적-민중들(과학, 예술, 철학) 속에서의 내재적 간섭으로 나타난다. 들뢰즈에게서 새로운 민중은 정신적이다. 그에게서 ‘사유하는 것은 바로 두뇌이지 인간이 아니다. 인간은 단지 두뇌의 결정체일 뿐이다’.(302~3) 이러한 생각은 맑스의 시험을 이겨내는가?
두뇌 속에서 사유의 총체로 현상하는 바와 같은 전체는 세계를 유일하게 가능한 방식으로 점취하는 사유하는 두뇌의 산물인데, 이 방식은 세계의 예술적 종교적 실천적이고 정신적인 점취와는 상이하다. 즉 두뇌가 사변적 이론적 상태에만 있는 한에 있어서, 현실적 주체는 여전히 두뇌 밖에서 자립적으로 현존한다. 따라서 이론적인 방법에 있어서도 주체, 즉 사회는 전체로서 항상 표상에 어른거리고 있어야 한다.(맑스, 2000, 72)
맑스에게서 사유는 두뇌를 통해 세계를 점취하지만 실제적으로 사유하는 것은 사회이다. 사유가 주체적이려면 그것은 현실적 주체와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사유와 몸의 결합의 이론, 즉 혁명의 두뇌인 철학이 혁명의 심장인 프롤레타리아트를 사로잡아야 한다는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의 강한 주장이 여기에 근거를 두고 있다. 두뇌가 그것으로부터 분리된 몸-주체를 갖지 않은 두뇌-주체의 시대. 들뢰즈는 이 현실적 주체로서의 사회가 두뇌-주체로 전환한 시대로서 현대를 파악한다. 여기서 우리는 맑스의 일반지성 개념의 분명한 반향을 발견한다. 두뇌-사회의 시대. 여기서 우리는 들뢰즈의 생성하는 민중이 네그리의 다중 개념의 핵심적 특징들(지성, 감각, 정동, 소통)을 이미 예견하고 있음을 목격한다. 이런 의미에서 들뢰즈의 새로운 민중은 발생하고 있는 다중의 징후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양자 사이의 간극에서 사유해야 한다. 새로운 민중은 다중에게 ‘당신이 현실성으로 추락할 위험을, 그래서 주권존재로 전화할 위험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 것인가?’라고 묻고 있다.16. 이에 대한 네그리의 응답은 다중은 현실성이 아니라 가능성이라는 것이었다. 이제 다중이 새로운 민중에게 묻는다. 왜 두뇌적-민중은 철학, 과학, 예술이라는 ‘세 딸’(들뢰즈․가타리, 300)만을 거느려야 하는 것인가? 더 많은 딸들과 아들들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무수한 활동들이 오늘날 두뇌적-민중의 사회적 자식들이 아닌가? 만약 두뇌적-민중이 이 세 딸만을 자신의 딸로서 인정하고 노동의 이름 하에 수행되는 다른 활동들을 배제한다면, 플라톤이 모방을 통한 분유만을 인정했던 것과 유사한 위계를 새로운 민중 내부에 도입하는 것은 아닌가? 현실성으로부터 잠재성의 독립성(‘잠재성은 현실성의 반쪽이다’17.)과 그것의 정신적 본질(‘두뇌는 정신 자체이다’)18.을 강조함으로써 사유에 부당한 특권을 부여하게 되지 않겠는가? 이것은 정신과 물질, 사유와 연장을 가로지르는 다중의 특이성들이 공통적인 것을 구축하는 것을 저해하지는 않겠는가? 탈근대가 비물질성의 헤게모니에 의해 감싸여 있는 것이 사실이라 해도, 물질적인 것을 비물질적인 것의, 현실적인 것을 잠재적인 것의 결정체로 파악하여 전자를 후자에 종속시키는 것은 잠재성에서 현실적인 것으로 이행하는 카이로스의 시간에 대한 부정을, 이 세계에 대한 감각적이고 주체적이며 실천적인 태도의 약화를 가져오지 않겠는가?
이제 글을 맺자. 들뢰즈와 네그리는 맑스의 실제적 포섭을 극단적으로 사유하면서 그 속에서 새로운 주체성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이들은 실제적 포섭의 심화시대를 제2인터내셔널적인 붕괴론과 정치적 기회주의에 따라 대응하지도 않고 프롤레타리아트를 혁명적 동일성으로 파악한 제3인터내셔널의 방법에 따라 사유하지도 않는다. 또 이들은 실제적 포섭의 시대를 비관적으로 전망했던 비판이론들과는 다른 혁신의 정치학을 제시한다. 소수정치와 삶정치는 이런 점에서 실제적 포섭의 심화 시대에 ‘무엇을 할 것인가?’를 사유할 수 있는 이론적 틀을 제시하려는 노력이다. 앞에서의 분석에 따를 때, 소수정치는 삶정치의 적극적 구성 요소로 이해된다. 소수정치는 지배적 현실의 해체와 파열, 그리고 그것으로부터의 도주를 함축하며 좀더 적극적인 경우에는 그 파열선과 도주선의 블럭화(즉 네트워킹과 공통화)를 의미하는데, 이것들은 삶 속에서 발생, 형성, 구성되는 협력적 공통되기의 일환이기 때문이다. 이런 전제 위에서 노동거부는 새로운 삶의 공통적 생산의 한 계기이며, 프롤레타리아트와 다중은 삶의 공통적 구성능력에 붙여진 이름이고 코뮤니즘은 삶의 공통되기의 과정 자체이다. 자율은 갇힌 공간으로부터 독립된 어떤 공간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특이성들이 어떤 초월적 매개도 없이, 아니 그러한 매개의 거부 위에서 구축하는 공통체적 주체성 그 자체의 이름이다. <미주>
1. 여기서는 주로 니콜래스 쏘번의 ‘소수정치(학)’적 독해를 논의의 중심에 놓을 것이다.
2. ‘때’에 대해서는 들뢰즈 외에 실린, 조정환의 글 「비물질노동과 시간의 재구성」 참조.
3. 들뢰즈는 ‘아름다운 영혼’에 빠질 위험을 ‘피흘리는 투쟁들과는 거리가 먼 차이, 서로 연합하고 화해할 수 있는 차이들에 그치고 마는 위험’으로 정의한다.(들뢰즈, 2004, 19)
4. 맑스의 추상적 가능성 및 구체적 가능성 개념에 대해서는 M. Hardt & A. Negri, 2004, p. 144~5 참조.
5. 이러한 생각에 대해서는 들뢰즈, 2004, 449~460 참조.
6.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Difference and Repetition)을 비롯한 철학적 저작들에서 가능성 범주를 기각하지만 내가 보기에 기각되는 것은 ‘재현적 가능성’이며 ‘실재적 가능성’의 개념은 견고하게 유지되고 발전된다. 예컨대 강도, 특이성, 각개성(heccéite) 등의 개념이 그것이다.
7. 스토아학파의 비물체성, 스피노자의 실체, 라이프니츠의 단자, 니체의 힘, 베르그송의 지속 등은 잠재성 개념의 복원에서 중요한 기여를 한다.
8. “동일자에서 벗어나 있고 부정적인 것에 의존하지 않는 순수한 차이들을 불러들이는 데에는 많은 위험이 따른다. 가장 큰 위험은 아름다운 영혼의 표상들로 전락하는 것이다. 그것은 피흘리는 투쟁들과는 거리가 먼 차이, 서로 연합하고 화해할 수 있는 차이들에 그치고 마는 위험이다.”(들뢰즈, 2004, 19) 들뢰즈는 이러한 위험을 인식하면서도 “문제들은 아름다운 영혼의 동일성을 박탈하고 그의 선한 의지를 깨뜨리는 가운데 그 영혼을 파괴하는 힘을 낳는다. 문제틀과 미분적 차이가 규정하는 어떤 투쟁과 파괴들. 이것들에 비추어 보면 부정적인 것의 투쟁과 파괴들은 외양에 불과하다. (…) 모든 사유는 침략이다.”(같은 책, 20쪽)라고 말한다.
9. 이러한 관점에 입각하여 전개된, 쏘번의 소수정치학에 대한 보충적 비판은 쏘번의 『들뢰즈 맑스주의』(Deleuze, Marx and Politics) 역자서문 중에서 17쪽~27쪽 참조.
10. “소통이란 개념이 아니라 ‘합의’를 창출하기 위한 의견들의 가능태로서만 작용할 따름이기 때문이다.”(들뢰즈, 1995, 14). “소통이란 우리에게 결여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아도는 것이며,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창조이다”(같은 책, 159). 그런데 그가 소통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정보학, 마케팅, 디자인, 광고학’ 등을 지칭한다(같은 책, 20 참조).
11. 클로소프스키로부터의 다음과 같은 인용을 통해 그는 자신의 소통불가능성을 밝히고 있다. “소통불가능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 개인의 존재가 다수의 개인들에게 귀속될 수 없도록 해주는 원리이며 이 원리는 자기동일적인 인격체를 고유하게 구성한다”(들뢰즈, 1999, 460).
12. “존재론적 관점에서 볼 때 역사의 행로는 직선으로 전개된다”(네그리, 2004 137). 이 직선 운동에 팽창 개념이 결합되면서 운동은 나선형적 형상으로 이해된다.
13. 네그리의 창조 개념은 특이성에 강조점을 둔 들뢰즈의 창조 개념에 비해 특이적인 동시에 언제나 집단적이고 공통적이다.
14. 부당한 종합들에서 연결은 외삽으로, 이접은 배제적 이중구속으로, 통접은 적용으로 나타난다.
15. 노동력 속의 자기가치화 능력에 대한 네그리의 이러한 승인을 니콜래스 쏘번은 사회민주주의적 문제의식 속으로의 회귀라고 비판한다.
16. 이러한 문제제기는 쏘번에게서 이루어졌는데, 엄밀하게 말하면 이것은 ‘민중의 부재’라는 관점에서 제기된 것이지 ‘새로운 민중의 생성’ 혹은 ‘생성하는 민중’의 관점에서 제기된 것은 아니다. 들뢰즈의 ‘민중의 부재 속에서 전개되는 새로운 민중의 생성’이라는 생각은 ‘민중의 부재’ 개념에 기초한 쏘번의 생각보다는 한층 더 ‘가능성으로서의 다중’에 접근한다.
17. 이에 대해서는 들뢰즈, 2004, 453을 참조하라.
18. 이에 대해서는 들뢰즈․가타리, 1995, 304를 참조하라.<주제어>
가능성, 잠재성, 현실성, 특이성, 공통성, 실제적 포섭, 삶정치, 삶권력, 코뮤니즘, 다중, 제국, 소수정치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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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 Hardt & A. Negri. Empire, Harvard Univsity,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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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그리, 안또니오. 『혁명의 시간』, 정남영 옮김, 갈무리, 2004(Negri, Antonio. Time of Revolution, Continum, 2002).
네그리, 안또니오․ 하트, 마이클, 『제국』, 윤수종 옮김, 이학사, 2001(M. Hardt & A. Negri. Empire, Harvard Univsity, 2000).
들뢰즈 질. 『시네마․2 시간-이미지』, 이정하 옮김, 2005(Deleuze, Gilles, Cinema 2: The Time-Image, trans. H. Tomlinson and R. Galeta, Minneapolis: Univ. of Minnesota Press,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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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 질․가타리, 펠릭스. 『천개의 고원』, 김재인 옮김, 새물결, 2001(Deleuze, Gilles and Guattari Felix. A Thousand Plateaus: Capitalism and Schizophrenia, trans. B. Massumi, Minneapolis: Univ. of Minnesota Press,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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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 질 외. 『비물질노동과 다중』, 갈무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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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 칼.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1』, 김호균 옮김, 백의, 2000(Marx, Karl. Grundrisse, trans. Martin Nicolaus, Vintage Books, New York, 1973)
쏘번, 니콜래스. 『들뢰즈 맑스주의』, 조정환 옮김, 갈무리, 2005(Thoburn, Nicholas, Deleuze, Marx and Politics, Routledge, London, 2003).
이진경. 『노마디즘』, 휴머니스트, 2004.
패튼, 폴. 『들뢰즈와 정치』, 백민정 옮김, 태학사, 2005(Patton Paul. Deleuze and the Political, Routledge, London, 2000)
하트, 마이클. 『들뢰즈 사상의 진화』, 김상운․양창렬 옮김, 갈무리, 2004(Hardt, Michael. Gilles Deleuze: An Apprenticeship in Philosophy,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93)
The 'minor politics' of Gilles Deleuze and the 'biopolitics' of Antonio Negri
Joe Jeong-Hwan(Sung-Kong-Hoe University)
Gilles Deleuze and Antonio Negri had developed their unique politics. We can sum up Gilles Deleuze's politics as 'minor politics' and Antonio Negri's politics as 'biopolitics'. They had groped for the possiblility of new subjectivity in the age of real subsumption of labor under capital. The politics of them are different from the auto-destruction theory and the political opportunism of 2nd International. They did not think proletariat as a revolutionary identity as the politics of Third International. They proposed a politics of innovation which is different from the critical theory of Frankfurt School that viewed the age of real subsumption pessimistically. So 'minor politics' and 'biopolitics' are considered as the important efforts which suggest the theoretical framework of 'What is to be done' in the age of real subsumption. I propose an idea which interpret the 'minor politics' as a component of 'biopolitics'. 'Minor politics' of Deleuze implies the destruction of the dominant system and the flight from it. And more positively it means the creation of blocs of lines of flight. We can consider it as a component of becoming-common of the creative powers of multitudes. 'Biopolitics' of Negri have developed more fully the potential of 'minor politics' through linking the concept of singularity in minor politics with the concept of commonality. It develops an concept of modern proletariat as the common constituent power of Geschichte. It is named by multitude. The minority in Deleuze and the multitude in Negri is the possible agency of becoming-common without any transcendent mediation.
Key Words: possibility, virtuality, reality, singularity, commonality, real subsumption, biopolitics, biopower, communism, multitude, empire, minor politics
▒▒The Autonomy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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