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오이디푸스사회의 군중

“월드컵문화” 담론의 자유주의와 그 한계

월드컵 문화와 군중

월드컵이 끝났다. 한국 대표팀의 16강 진출이 좌절된 후에 사실 한국 사회에서 월드컵은 끝난 것이었다. 최종 승자를 찾기 위한 주요 경기가 남았음에도 금새 월드컵 열기는 썰렁해졌고 모두들 월드컵은 끝난 것처럼 데면데면한 낯으로 티비를 쳐다볼 뿐이었다. 진짜 축구팬임을 자처하는 이들을 제외하면 월드컵은 이미 종료된 셈이었다. 그리고 4년 뒤에 열릴 남아공 월드컵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 것인가 따위의 이야기가 무심하게 세상을 떠돌아 다녔다. 지난 4년 전의 불가사의하기까지 했던 신화를 다시 재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아무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2002년 월드컵을 둘러싼 향수까지 잊지는 않았고, 우리는 다시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붉은악마”와 거리응원전에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 월드컵 응원에 대한 이야기도 시들해졌다.
less.. 월드컵 문화라고 불리는 글로벌 스포츠 게임을 둘러싼 문화현상은 더 이상 이야기할 것이 남아있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만치 많은 이들이 분석하고 논쟁했던 이야깃거리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토론과 대화가 언제나 무력하고 싱거운 것이라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다. 모든 것을 망라하는 듯한 이야기가 사실은 무언가 결정적인 것을 회피하기 위한 어떤 겉꾸밈이 아닐까 하는 의구 역시 떨치기 쉽지 않았다. 이런 미심쩍은 나의 눈길에 가장 흥미롭게 다가선 대상은 월드컵 응원에 참여했던 냉소적인 관중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알다시피 월드컵 거리응원에서 우리가 놀랐던 이유는 엄청난 규모의 군중이 운집했다는 것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소요와 혼란이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알다시피 근대 사회에서 군중의 존재는 언제나 반란, 폭동, 분규 등과 연결되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그런 군중은 언제나 보이지 않는 사회적 구조가 객관화되는 증거로서 즉 고요하고 평범한 일상적 삶의 세계가 감추고 있던 사회적 적대를 표출하는 것처럼 여겨지기 마련이었다. 물론 반대의 경우로 해석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 때의 군중이란 사회적 적대가 초래하는 불안과 공포를 제거하며 완전히 통합된 공동체라는 환상 속에 모두를 끌어들이는 전체주의적 동원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군중이다. 어쨌든 어떤 형태의 군중이든 그것은 사회를 가능하게 하는 근본적인 적대 혹은 데리다 식의 표현을 빌자면 “구성적인 적대”와 불가분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표시한다. 다시 말해 완벽히 통합된 공동체를 상연하는 것이든 아니면 환상을 통해 지탱되는 사회가 더 이상 불가능해지는 순간 그것을 분열된 사회적 집단의 대결로 표출하는 것이든 군중은 언제나 주어진 사회의 적대를 참조하지 않으면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적어도 1987년의 6월 항쟁이후 거의 처음으로 적어도 규모의 면에서 그에 육박하리만치 대단한 기세로 등장한 이 새로운 군중은 무엇인가. 그 사이에 탄핵반대집회니 하는 도심의 “촛불 집회”같은 형태로 간헐적으로 출현했던 군중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는 2002년 월드컵 거리 응원전에 운집했던 군중을 선구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그것을 예상케 하는 전조로서 볼 수 있는 것임에 분명하다. 그렇지만 역시 우리를 놀라게 했던 것은 거의 백만 명에 달하는 군중이 운집하였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놀랍게도 사회적 적대와의 참조 관계를 상실한 것처럼 보였다는 놀라운 사실에 있었다. 따라서 “월드컵 문화”를 둘러싼 흥분되고 격정적인 반응의 이면에는 새로운 군중에 대한 놀라움과 충격이 배어있다고 볼 수 있다. “사회의 불가능성”을 통지하는 균열의 표현도 아니고 그렇다고 하여 사회의 이상이 위기에 몰렸을 때 공포와 불안에 휩싸인 성원들을 상상의 공동체로 묶어주는 열광적인 동원도 아닌 군중이란 과연 무엇인가. 이 수수께끼에 답하기 위하여 우리는 가능한 모든 주장들을 내놓았고(혹은 그것과 상대하기를 회피하였고), 그것은 이른바 “월드컵 문화”를 둘러싼 한국 사회의 주된 담론적 공간이 만들어졌을지 모른다고 가정할 수 있을지 모른다.

... [중략] ...

군중의 욕망, 자유의 욕망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오이디푸스의 위기를 겪고 있다고 할 때, 상징적 권위가 무너지고 모두가 자유로운 의사결정의 주체가 되어 적극적으로 자유롭게 선택하는 개인이 되었다고 주장할 때의 문제 역시 새롭게 조명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 “포스트-오이디푸스” 사회의 군중이 더 이상 상징적 권위의 금지에 시달리지 않는다고 할 때, 아버지-신-국가-남성 등의 어떤 초월적이고 보편적인 권위를 자유롭게 협상하고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는 다문화주의적 사회가 되었다고 할 때, 우리가 직면하는 것은 놀랍게도 자유가 놀라울 정도로 위축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그 금지가 부과하는 자신의 상징적 정체성과 거리를 유지하며 행사할 수 있었던 자유를 대신하여 자신이 모든 것을 떠맡고 결정하여야 한다는 중압감으로 우리를 내모는 불안이 들어선다는 것이다. 이는 근면, 성실하여야하는 노동자 대신에 자기경영을 수행하는 인적 자본, 평생직장 대신에 평생직업을 택한 직장인, 모범학생 대신에 자기주도적 학습자, 질서와 전통을 지키는 시민 대신에 라이프스타일의 개척자가 공식적인 정책과 제도, 경영의 담론이 제시하는 주체의 모습이 된 현실로 다시 복제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이 더할 나위 없는 불안 속에 허덕인다는 것 역시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와 포스트-오이디푸스 사회의 군중과의 관계는 무엇인가. 사회적 적대 혹은 다른 말로 사회의 불가능성을 중단시키고 사회라는 환상을 수립하여왔던 상징적 권위가 위기에 빠졌다면 그것과 상관적이며 또한 필연적인 부산물이라고 할 군중 역시 위기에 빠져든 것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더 이상 군중을 통해 보편적 권위에 도전하는 인민이나 대중의 형상으로 자신을 제시할 이유를 잃게 된 것 아닐까. 차라리 “자기성찰적 주체”가 되어 자신의 삶을 둘러싼 다양한 문제들과 관련한 쟁점들을 다루는 전문적 지식의 소비자가 되어버리는 것이 맞는 것 아닐까. 물론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것은 포스트-오디디푸스 사회의 군중에 대하여 서둘러 결론을 내리기를 피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붉은악마는 스타일의 정체성을 실현하는 나르시시즘적인 개인들의 군집도 아니고 또한 자유롭게 자신의 선택과 의지를 표현하며 새로운 시민성이나 공적인 덕을 조직하는 집합적인 행위자도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가 주장해야 하는 것은 그 군중이 상징적 권위에 의존하지 않지만 바로 그 상징적 권위를 유효한 것으로 만들어주던 힘, 즉 어떤 상징적 허구의 문자적 메시지를 초과하는 힘으로서의 말의 물질성(이를테면 그냥 평범한 말과 “말씀”의 차이), 어떤 상징적 언표를 단순히 지식으로서가 아니라 복종해야 하는 명령으로 만들어주는 차원에 여전히 이끌려 다닌다는 것이다. 그것은 상징적 권위의 호출에 응답하기 위하여 고개를 돌릴 때 내가 고개를 돌리게 되는 것은 나를 부르는 그 목소리 때문만은 아니라 내가 선험적으로 유죄이기 때문이라는 정신분석학의 주장과 다르지 않다. 결국 우리는 상징적 권위를 손쉽게 부정하고 그것을 조롱하며 자유로운 협상을 통해 우리가 따라야 할 행위의 규칙을 작성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권위로부터의 해방을 초래하지 않는다는 것 역시 분명하다. 그것은 상징적 권위가 소멸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지탱하고 있던 힘은 전연 손대지 않은 채 남아있을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상징적 권위가 실추되었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 상징적 권위의 기저에 존재하는 맹목적인 힘에 더욱 견인당하고 조정될 수 있다.
끊임없이 새로운 상징적 질서가 만들어지고 수정되며 그것이 숱한 협상과 토론을 통해 변경될 수 있다. 우리는 그런 점에서 거대 서사의 위기, 보편적인 준거가 될 지식의 몰락, 상징적 권위의 침몰 등을 겪고 있음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이 적대와 지배의 소멸로 이어지는 것이 아님에 분명하다. 근대의 계몽적 지식의 굴레에서 해방되었지만 우리가 동시에 지배로부터 혹은 적대로부터 해방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포스트-오이디푸스사회의 군중에 대하여 우리가 물어보아야 할 것은 바로 상징적 권위에 의존하지 않는 군중을 이끄는 그 힘에 대하여 물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분명 “붉은악마”는 보수적 자유주의자들이 상상하는 애국주의나 민족주의, 국가주의를 통해 동원된 군중이 아닐 것이다. 그들은 이미 자신을 계몽한 냉소적인 대중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새로운 군중을 불러 모으는 것은 무엇인가. 상징적 권위가 존재하고 그것의 목소리를 통해 사회라는 환상 속에 대중을 묶어내는 것이 아니라면 어떤 들리지 않는 소리가 있어 군중이 등장하게 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우리가 내릴 수 있는 답변은 바로 그 전상징적 명령의 차원과 상징적 권위의 차원 사이의 거리를 의식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상징적 권위의 붕괴에도 불구하고 전상징적인 명령의 차원이 작동한다는 것은 곧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비판의 실패를 가리키는 결정적 증거이다. 조직인간을 넘어 자기실현의 노동주체로, 획일적인 보상을 넘어 능력과 자질에 대한 평가로, 평생직장이 아닌 직업의 유목민으로 되기를 원한다며 “포드주의적 자본주의” 혹은 “개발독재”를 공격하였던 수많은 시도들을 상상해보자. 물론 그들의 이상은 완벽하게 실현되었으며, 유연화, 자기실현, 자기주도성, 평생직업, 고용가능성(employablitiy)같은 용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그것은 새로운 자본주의의 이상이 되었다. 그리고 강요된 자유 자체가 자본주의를 작동시키는 유력한 윤리적 이상이 되어있음을 확인하고 있다.
결국 자유주의적 비판이 결정적으로 간과하고 있는 것은 가족-국가-법으로 상징되는 상징적 권위를 비판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점이다. 마르크스가 지적했듯이 자본의 한계는 자본 그 자체이며, 자신을 끊임없이 파괴함으로써만 자신을 재생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역사적 조건을 구성하는 어떤 형태의 상징적 권위를 변경하는 것만으로도 자본주의는 극복될 수 없다. 이는 상징적 권위의 비판에도 고스란히 적용할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상징적 권위에 대한 비판 이후에 우리는 여전히 얼굴 없는 명령에 시달리고 이는 전보다 더 심각하게 자유를 위축시킨다. 바로 그러한 명령은 더 이상 초월적 권위를 갖지 않은 다양한 전문적 지식들의 세계가 들어선다 해도 사라지지 않는 구성적 배제에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질서정연하게 자신의 주어진 상징적 위치를 담지하고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사회적 위치를 수행하는 주민과 그러한 구성적 배제를 표출하는 무질서한 군중 사이의 거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초월적 보편적 권위를 가진 지식의 세계에서 수많은 작은 상대적 지식의 세계로 전환하였지만 모두를 규제하는 보편적 명령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났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아마 그것을 역설적으로 웅변하는 것이 바로 불가사의하기까지 한 “붉은악마”의 등장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의 해법을 통해 포스트-오이디푸스사회의 군중을 해석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그 해석은 그 군중을 이끌어냈던 보이지 않는 명령을 반성적 주체가 되어버린 개인의 선택의 결과일 뿐이라는 해석에 머무른 채, 그 명령을 부인하거나 무시했을 뿐이다. 결국 바로 그 보편적 명령이 무엇인지 분석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살아갈 세계는 훨씬 위험하고 섬뜩한 세계로 돌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붉은악마” 이후의 군중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에 대하여 물어야 하고 또한 답해야 한다. ■

- <문학과사회> 2006년 가을호에 기고한 글

[고백컨대, 몇년전부터 군중에 관한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카네티나 르봉, 리즈먼같은 이들이 써놓은 군중에 관한 글도 있고, 또한 다중이나 대중이란 이름으로 계급을 초과하는 군중의 현실적 존재를 탐구한 이들도 있다. 나는 그것을 함께 묶어 생각해보고 싶었다. 제법 많은 글을 읽고 생각을 다듬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런데 쉽게 덤벼들지 못했다. 군중에 대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은 주체화에 관한 많은 이야기들이 반사회적 주장을 한다는데 대한 나의 반동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청탁을 받고 그런 생각의 한꼭지를 정리해보렸는데 아주 멍청하고 싱거운 글이 되어버렸다. 그간 무조건 책을 멀리하고 글을 읽지 않으려는 습성 때문인지 생각을 머리 속에 모으기가 쉽지 않다. 왜 이토록 무력하고 짜증스러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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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ts 2006-09-15 0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사 남겨주신 후에 가끔 구경 오는데 카테고리 이름들이 인상적이예요.
중략은 아쉽지만 서동진 선생님 글이 반가와서 댓글 남깁니다. ^^

바라 2006-09-15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반갑습니다 나어릴때님, 서동진님 블로그에서 퍼왔는데 중략은 저도 뭔지 잘 모르겠네요; 카테고리 이름들은.... 지난달 처음 서재 만들 때 그냥 생각나는대로
쓴 건데, 지금 보니 우습기도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