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끗함과 더러움 - 청결과 위생의 문화사
조르주 비가렐로 지음, 정재곤 옮김 / 돌베개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청결과 더러움에 대한 편견을 불식시켜주는 책

깨끗함과 더러움/ 조르주 비가렐로/돌베개/2007


침은 더럽다는 것이 일반인의 상식이다. 어떤 문화권에서건 침을 흘리는 행위는 결코 환영 받지 못한다. 식사 도중에 식탁에 기침을 하여 침을 튀는 것은 무례한 행위에 속한다. 의도적으로 남의 얼굴에 침을 뱉는 행위는 상대방에 대한 치욕으로 맹렬한 감정적 저항을 불러올 수 있다. 그러나 침이 과연 더러운 것일까. 만약에 침이 더럽다면 사람들은 왜 침이 고일 때마다 외부로 배출하지 않는 것일까. 맛있는 음식을 보았을 때 침이 괸다면 뱉어내야 하지 않겠는가. 침이 불결한 것이라면 키스는 매우 위험한 행위에 속할 것이다. 그러나 침의 불결함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과의 입맞춤을 주저하는 이는 없다. 그렇다면 입 밖으로 나와 타인의 얼굴에 튀거나 음식물에 묻은 침을 불결하게 생각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순수와 위험』의 저자, 메리 더글러스의 설명은 이렇다. “신발은 그 자체가 더러운 것이 아니고 식탁 위에 올려놓는 것이 더럽다. 음식은 그 자체가 더러운 것이 아니라 침식에 식사 용기를 놓는 것이 더럽거나 옷 위에 흘린 음식이 더럽다. 마찬가지로 응접실의 화장실 도구나 의자 위에 놓인 옷, 실내에 있는 실외 도구, 아래층에 놓인 위층 물건, 겉옷 위에 드러난 속옷 등등, 요컨대 우리들의 오염에 관한 행동은 일반적으로 존중되어 온 분류를 혼란시키는 관념이나, 이것과 모순되는 일체의 대상에 대한 관념을 그른 것이라고 하는 반응이다.”



신발이 신발장에 있고, 침이 입 속에 있을 때, 그것은 우리들의 분류 체계를 위협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발이 식탁 위에 놓이고, 침이 타인의 얼굴 위로 튈 때, 그것은 ‘장소에 맞지 않는 사물’이 된다. 특정의 물건은 특정의 장소에 놓여져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요 분류체계다. 가령 두루마리 화장지는 화장실에 걸려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고급 레스토랑에 있을 때 사람들은 불결하다는 듯 인상을 찡그린다. 이때 두루마리 화장지는 ‘장소에 맞지 않는 사물’이다. 이렇듯 사물의 더러움은 상황에 의해 규정되는 상대적인 개념일 뿐이다.


원효대사는 일찍이 ‘해골바가지 물’을 마신 뒤 깨달음을 얻고 나서 “진(眞)과 속(俗)이 별개의 것이 아니며, 더러움과 깨끗함이 둘이 아니다(眞俗一如 染淨不二).”라고 한 바 있다. 더러움과 깨끗함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일 뿐이라는 말이다. 『채근담(菜根譚)』의 저자, 홍자성(洪自誠)도 “깨끗함은 항상 더러움 속에서 나오고 밝음은 언제나 어둠 속에서 생겨난다(潔常自汚出 明每從晦生也).”라고 말한 바 있다. 깨끗함과 더러움의 개념을 무쪽 가르듯 구분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순수함과 더러움은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인류가 만들어낸 최고의 직물이라는 비단은 고작해야 누에의 배설물에 지나지 않음을 생각해보라. 우리가 더럽다고 피하는 똥도 쇠똥구리에게는 더없이 아늑한 일터요 쉼터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의 썩어가는 환부도 쉬파리에게는 알을 낳을 수 있는 더없이 아름다운 곳일 수 있다. 더러움은 상황과 문맥이 만들어내는 것일 뿐, 그 자체로 규정지을 수 없는 것이다.


청결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리기 위해서는 조르주 비가렐로의 『깨끗함과 더러움』을 읽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 책은 인간이 처음부터 오늘날과 같은 위생관념을 가졌던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가령 16세기 이전에만 해도 목욕탕은 청결을 위한 곳이 아니었다. 그 당시의 목욕탕은 매춘의 장소, 즉 쾌락을 위한 장소였다. 목욕탕은 놀이와 일탈의 장소였다. 그곳에 가서 병이라도 얻을 수 있었으니 오히려 청결과는 거리가 먼 곳이었다. 그런데 16세기에 들어 페스트가 유행하면서 사람들은 몸에 뚫린 구멍으로 물과 공기가 침투해 들어온다고 생각했다. 이때부터 목욕탕은 ‘즐거움’의 공간이 아니라 ‘두려움’의 공간으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그 당시의 유럽인들은 마른수건으로 건조한 세수를 하고 화려한 옷에 향수를 뿌려댔다. 이때 목욕탕은 차츰 자취를 감추게 된다.


16세기에는 정기적으로 셔츠를 갈아입는 게 청결의 요건이었다. 셔츠가 더러워지는 것은 몸의 더러움을 빨아들이는 스폰지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고 사람들은 인식했다. 이러한 대중들의 인식을 반영한 것이 흰 속옷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속옷마저 깨끗이 해야 한다는 의무감은 곧 ‘보이지 않는 신체부위까지 사회화하려는 노력’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대중들은 이제 자신의 몸을 자신의 눈으로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사회화된 시선’으로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사회화된 시선’이란 쉽게 말해 나의 몸을 남들이 들여다보면 나를 더럽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데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내면에 만들어진 타인들의 ‘가상의 시선’, 바로 그것이 사회화된 시선이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귀족층들을 중심으로 더운 물 목욕이 섬세한 감각과 관능과 여유를 의미하게 되었다. 반면 부르주와들은 신체에 활력을 가져다주고 신체를 단련시킨다는 이유로 냉욕을 선호했다. 이후 19세기로 넘어와 물을 대규모로 공급하는 기술이 개발되고 도시환경이 정비되면서 물로 피부를 깨끗이 하는 습관이 자리 잡게 된다. 미생물학의 발달로 청결과 건강은 더욱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된다. 욕실은 남에게 보이지 않도록 배려된 사적인 공간으로 바뀐다.


일반대중들에게 청결관념을 퍼뜨린 것은 당시 정부가 위생과 질서를 강제화한 덕분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종찬의 『동아시아 의학의 전통과 근대』라는 책은 동사시아에서의 근대의 국가권력이 위생관념을 어떻게 이용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일본에서 메이지 유신이 단행되고, 최초의 비정부기구로서 1883년 5월에 일본사립위생회가 조직되어 위생개혁운동을 조직한다. 이 단체의 목표는 “일본 국민의 건강과 삶을 보존하고 향상시키기 위한 방법을 토론하고 연구하며, 위생지식을 대중화하고, 위생행정을 지원하는 데”있었다. 당시의 지식인들은 개인의 몸을 국가를 구성하는 개별적인 요소로 파악하면서, 국가의 부를 증강하기 이해선 개인의 건강을 향상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위생은 개인의 안녕과 복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제국의 부국과 안전보장을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당시의 통치자들은 제국의 국민들에게 “질병은 더 이상 개인적인 불행이 아니라, 공공의 질서에 대한 도전”이라고 강요하였다. 그래서 세균을 가진 환자들은 제국의 질서를 문란하게 할 위험인자이므로, 제국의 몸을 건강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검역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당시 조선 사람들은 세균이 많은 비위생적인 집단으로 분류되었다. 자신은 중심이고 주변은 들러리에 불과하다는 제국주의적 사고방식이 위생적인 것과 비위생적인 것의 경계를 만들어낸 것이다.


무언가 물컹한 것을 밟았다면 우리는 놀라고 불쾌하게 생각한다. 가래침처럼 끈적끈적한 것은 더럽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끈적끈적한 성질, 즉 점착성을 왜 사람들은 ‘불결함’에 연결시키는지를 고민한 사람은 프랑스의 철학자 사르트르였다. 물은 우리의 손에서 흘러가버린다. 그러나 끈적끈적한 것은 만지는 순간, 즉 우리가 그것을 소유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의 몸에서 잘 떨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그 순간 사물이 오히려 우리를 꽉 쥐고 있는 것처럼 느낀다. 즉 사물에 의해 오히려 우리가 소유되었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끈적끈적한 것들에게는, 소유되는 것들이 소유하는 것들을 오히려 소유하려는 음험한 계책이 있다고 숨어있다고 사르트르는 말한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자. 내가 누군가를 소유했다고 생각해보자. 나는 그를 내 의지대로 조종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오히려 내가 소유한 것이 끈끈이주걱처럼 끈적하게 나에게 달라붙으면, 그래서 아무리 떨어내려 해도 떨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왈칵 겁이 나기 시작한다. 아, 이것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존재로구나, 내가 소유하려고 했던 대상에게도 나를 소유하려고 하는 욕망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람은 물건을 마음대로 소유할 수도 있고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사물이 아닌 사람은 자신의 욕망대로 소유할 수 없다. 바로 점착성 때문이다. 점착성은 곧 우리가 소유하려는 대상이 욕망을 가진, 끈적끈적하게 달라붙는 존재임을 암시한다. 끈적끈적한 점착성은 더럽고 불쾌하다는 느낌을 갖게 하지만 바로 그런 불쾌한 감정을 경험함으로써 사람들은 내가 소유하려고 하는 대상도 나를 소유하려고 하는 끈적끈적한 욕망을 지닌 존재임을 인식하게 된다. 끈적끈적함의 불쾌한 경험은 곧 타인의 존재와 욕망을 깨닫게 되는 성숙의 과정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어떤 존재를 마음대로 가볍게 소유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상대방에게 욕망, 즉 점착성이 없을 때만 가능하다. 우리가 마음대로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사물이지 사람이 아니다. 끈적끈적한 점착성고 접했을 때의 불유쾌한 경험을 바로 그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과학자’ 하면 혹시 흰 실험복 가운을 입은 학자를 떠올리지 않는가. 우리는 과학적인 것은 새롭고 진보적이고 깨끗한 것이지만 토속적인 것은 불결한 것, 검증되지 않은 믿지 못할 것, 뒤떨어진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과학적인 것은 서구세계에 연결시키고 토속적인 것은 제3세계에 무의식적으로 연결시키기도 한다. 화학비료는 실험실에서 고안되고, 공장에서 생산되는 과학의 산물이지만 퇴비는 재래적이고 토속적인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는가. 그러나 화학비료로 인해 대한민국의 땅은 몸살을 앓고 있다. 곡식은 땅에서 자란다. 땅이 죽으면 곡식도 죽고, 그 곡식을 먹고 자라는 몸도 죽는다. 그러므로 몸을 살리는 길은 땅을 살리는 길이고, 땅을 살리는 길은 그 땅 위에 사는 모든 생명체를 살리는 일이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지렁이의 예를 들어보자. 지렁이 배설물에는 식물의 성장에 필요한 영양분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또 지렁이는 겨울철에 지하 3m 60cm까지 내려가 동면을 하고, 배설할 때는 지표 위에 배설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렁이가 움직이는 자리에는 작은 터널이 형성되는데, 이 터널은 공기와 수분의 통로가 될 뿐만 아니라 여러 미생물 등과 식물에 영양분을 공급해주는 통로가 된다고 한다. 지렁이는 더럽고 미천한 동물이라고 알고 있지만 지렁이가 인간에게 주는 이익은 실로 막대하다.


똥은 어떤가. 조셉 젠킨스는 그의 저서 『똥 살리기 땅 살리기』에서 톱밥을 활용하여 인분을 위생적으로 퇴비화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생태적으로 건강한 방법을 제시한다고 해도 똥이 더럽다는 인식, 지렁이가 불결하다는 인식에 우리들이 매달려 있는 한 생태계는 건강할 수 없다.『조화로운 삶』의 저자, 스코트 니어링은 화학비료의 해로움과 유기농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떨어진 잎사귀를 지렁이가 먹고, 지렁이의 똥을 다시 곡물이 먹고, 그 곡물을 다시 인간이 먹는다. 똥과 인간이 섞이는 이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만 인간은 건강할 수 있다. 청결과 더러움에 대한 배타적인 이분법이 결국은 우리의 살림을 훼손한다. 청결과 더러움에 대한 우리의 유연한 사고방식이 필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