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이동 - 앨빈 토플러
앨빈 토플러 지음 / 한국경제신문 / 199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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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시대 권력은 어떻게 이동하는가




요즘 영화 ‘디워’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직업적 평론가들은 대개 이 영화의 빈약한 서사구조와 출연자들의 연기력의 미흡함을 들어 박한 평가를 내린 반면 대중들은 할리우드에 맞먹는 컴퓨터그래픽이 연출하는 웅장한 스텍터클‘을 운운하며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여기서 나아가 대중들은 인터넷을 통해 직업적 평론가들마저 공격하고 있다. 과거에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대중들은 수동적 감상자에 불과했고 영화에 대한 평가는 직업적 평론가의 몫이었다. 그러나 인터넷의 등장으로 이런 권력관계엔 변화가 일어났다.

이런 변화는 사회 곳곳에서 발견된다. 과거에 고객은 수동적인 구매자에 불과했지만 이제 소비자들은 적극적으로 제품의 기획단계에서 마케팅에 이르기까지 깊숙이 개입하고 있다. 생산자의 프로듀서(Producer)와 소비자의 컨슈머(Consumer)의 합성어인 이른바 ‘프로슈머(Prosumer)’의 등장이 그것이다. 프로슈머는 권력의 흐름이 소수 엘리트에서 집단 대중으로 옮겨가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이제 소비자는 일방적 소비자가 아니다. 그들은 인터넷을 통해 제품에 대한 정보를 적극적으로 구하고 세계의 누구와도 공유하게 되었다. 또한, 자신의 창조활동을 통해 수익을 거두는 적극적인 경제 주체로 부상하고 있다. 한 전자회사는 이 프로슈머들이 제안한 8천여 건의 아이디어를 반영한 핸드폰으로 ‘대박’신화를 창조했다고도 한다. 단순소비자에서 기획자로의 이동, 바로 이것이 앨빈 토플러가 그의 저서 『권력의 이동』을 통해서 말하는 힘의 이동이다.


엘빈 토플러는 세계를 가장 크게 변화시킨 혁명으로 농업 혁명, 산업혁명, 정보혁명을 꼽는다. 이 중에서 현재진행형인 혁명은 바로 정보혁명이다. 이 정보혁명은 권력의 양상을 사뭇 다르게 변모시켰다. 과거에는 물리력 또는 토지나 자본과 같은 물질적 요소를 장악한 이들이 권력의 중심을 차지하였다. 하지만 이제는 지식과 정보를 가장 많이 차지한 자가 권력을 가지게 된다. 오늘날 신지식권력층이라고 불리는 이른바 ‘골드칼라’들을 보라.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컨설턴트와 같은 골드칼라들의 권력은 무형의 지식과 정보에서 온다. 자신의 지식과 창의력을 부와 권력의 창출로 연결시킨 빌 게이츠가 대표적인 경우다.

앨빈 토플러는 『권력 이동』에서 권력의 세 가지 원천을 폭력(暴力), 부(富), 지식(知識)으로 규정하고, 폭력을 저품질 권력, 부를 중품질 권력, 지식을 고품질 권력으로 자리매김하였다. 21세기의 전세계적 권력투쟁에서의 핵심문제는 지식의 장악이며, 이 지식이야말로 진정한 권력의 수단이 될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모택동은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라고 하였지만 정보화시대의 권력은 지식과 정보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법조인, CEO, 이들은 모두 이 고품질의 권력, 즉 지식을 기반으로 사회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다. 부동산 중개업을 하더라도 양질의 부동산 정보를 가진 업자들이 그 방면에서 최고의 권력을 누릴 것은 자명한 이치다. 정보가 곧 자본이요, 자본이 곧 권력인 시대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정보 사회로의 이행은 기술적 발전을 넘어 정치, 경제, 사회의 전 부문에 걸쳐 심대한 변화를 가져오리라고 예상된다. 산업혁명으로 시작된 산업 사회가 경제적으로는 기계에 의한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라는 특징을 지니고, 정치적으로는 대중 정당과 의회를 골자로 하는 대의민주주의라는 특징을 지닌다면, 정보 사회에서는 정보의 생산, 소비, 유통이 경제 활동의 중심이 된다. 물론 정보의 생산, 수집, 저장, 유통은 역사상 언제나 이루어져 온 것이지만, 정보 저장 기술과 전송 기술의 발전으로 오늘날에는 거의 무제한의 정보를 순식간에 유통시킬 수 있게 되었으며, 정보를 수동적으로 받아 보기만 하던 기존의 대중 매체와는 달리 다양한 형태의 정보들을 쌍방향적으로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정보의 쌍방향성이 대중들에게는 과거에 생각지도 못했던 권력을 부여한다. 과거에는 단순한 소비자들이었던 대중들은 인터넷을 통해 특정제품의 안티사이를 개설하여 제품의 문제점을 비판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집단소송을 제기하기도 하고, 인터넷을 통하여 조직된 단체의 활동을 통해 대중적 영향력과 정치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2002년의 ‘붉은 악마’의 활동이나 ‘노사모’의 활동이 그 대표적 예이다. 지금까지의 권력은 여론을 주도하는 사람 또한 소위 사회지도급 인사로 인정되어 온 정치인, 학자, 언론인, 관료, 종교인 등이었고, 이들과 함께 여론을 이끌어온 기관은 주요 신문사와 방송사를 중심으로 한 전통적 언론 매체였다. 그러나 ‘붉은 악마’와 ‘노사모’의 성공적 사례들은 기존의 권력관계를 흔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앨빈 토플러는 대의제 민주주의는 근본적으로는 전문 지식과 능력을 갖춘 엘리트에 의한 지배 체제였으며, 그 경직성으로 말미암아 급변하고 다원화하는 사회에 대처하지 못함에 따라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토플러는 정보 통신 기술을 통해 시민이 정책 결정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림으로써, 대의 민주주의의 기술적 불가피성에 대한 주장이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사회적 경직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소수파의 의견을 존중하여 그 결합을 유도해야 하며, 반(半)직접 민주주의(semi-democracy), 결정권의 분산 등을 그 해법으로 제안한다.

결국 앨빈 토플러는 정보 사회에서는 대의제 민주주의가 붕괴하고 정보 통신 기술을 매개로 한 직접 민주주의가 도래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인터넷과 같은 기술이 사회의 근본적 성격을 결정짓는다는 기술결정론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앨빈 토플러와 같은 미래학자들이 민주주의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사회적ㆍ경제적ㆍ문화적 요인들을 소홀히 하고 있다는 비판이 그것이다.

정보화는 경제적 측면에서도 기존의 권력 관계를 변화시킨다. 산업혁명에 기초한 산업사회에서는 일국적 단위에서 토지와 창공에 대한 제한이 존재했지만 디지털 혁명에 기초한 디지털 경제 시대에는 사이버 공간에 의해 국가를 초월하여 지리적 공간적 제약이 없다. 산업사회에서는 생산과 소비과정에서 낮과 밤이 존재했지만 디지털 경제 하에서는 네트워크를 통해 1일 24시간이 항상 낮과 같이 활동할 수 있어 시간적 제약을 극복할 수 있다. 산업사회에서는 교통수단의 발달 정도에 의존하여 물체의 이동 속도가 제약을 받았지만 디지털 경제 하에서는 네트워크를 통해 지구촌 어느 곳에서도 실시간 광속으로 문화 상품이 소비자에게로 전달될 수 있다. 그 결과 중간 유통업자의 몰락 및 택배산업의 발전이라는 형태로 유통체제가 급속하게 재편되고 있다. 또한 쌍방향 의사소통 구조로 말미암아 거래비용과 시간이 획기적으로 단축된다.

디지털 경제하에서는 범세계적 경쟁이 가속화되고 있다. 특히 정보통신기술이나 생명공학기술, 나노기술 등 신기술이 급속히 발전하면서 더 이상 개별기업이 보유하고 있는 자체 역량만으로는 이러한 경쟁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에 경쟁이 아닌 협력과 공생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이런 관점에서 제휴나 네트워크를 통해 기업 간 관계를 재조직화함으로써 새로운 시대적 변화에 부응하려는 산업계의 움직임이 가시화되고 있다. 네트워크를 통해 대규모 개발프로젝트에 따른 투자 재원을 분담하고 위험을 공유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네트워크를 통해 조직 간 학습이 촉진되고 효과적으로 지식 이전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정보화 혁명의 주도세력은 산업혁명을 초래한 시민혁명의 주도세력을 시민 혹은 부르주아와는 확연하게 구분된다. 디지털 혁명의 주도세력은 컴퓨터 네트워크의 가상공간에서 적극적 의사소통구조를 만드는 이른바 ‘네티즌(Netizen)’으로 표현될 수 있다. 붉은 악마, 노사모 등의 바로 이런 네티즌들의 활동을 대변해준다. 특히 이들은 산업혁명을 주도한 계층이 경제적 힘을 토대로 시민사회라는 정치적 공간을 형성하였다면, 네티즌들은 사이버스페이스라는 가상적인 문화공간을 만들었다. 이들이 만든 가상 시민사회는 국가권력의 직접적인 지배에서 벗어나 있다. 이들은 가상공간 내에서 의사소통을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는 하지만, 구체적인 권력관계의 변화를 직접 도모하여 정치혁명을 주도하는 세력은 아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 저지에도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는 이 네티즌들이 큰 몫을 해 낸 바 있다.

인터넷의 힘이 기존의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와 같은 전통적인 신문과 방송이 가지고 있던 영향력의 지도를 바꿀 수도 있다. 인터넷 매체로서 여론형성을 주도해 온 ‘오마이뉴스’ ‘프레시안’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런 언론매체는 무시할 수 없는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주요매체로 자리매김하였다.

디지털 시대에는 개인의 힘 또한 커진다. 블로그라고 하는 1인 미디어의 힘을 눈여겨보라. 직업적 평론가 못지않은 영화 지식을 뽐내는 블로그, 전자제품의 사용후기를 인터넷상에 올려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블로그, 웹서비스 전반에 대한 날카로운 글들을 올리는 블로그 등, 개인 미디어의 힘은 날로 커지고 있다. 기존의 언론 권력이 가졌던 위상에 커다란 변화가 일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1인 미디어의 힘입어 중앙집권적이고 폐쇄적·일방적인 뉴스 전달에서 “모두 말하고 모두 듣는다.”는 집단적인 뉴스 전달 체제로 바뀌고 있는 상황에서 정치적 이해관계로부터 초연한 블로거들의 성장은 또 다른 언론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시사해준다.

이렇게 인터넷에서 개인의 힘이 커지는 것과 함께, 기존의 조직문화도 큰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과거와 같은 수직적인 위계구조가 더 이상 힘을 유지하기 어려워지고 있으며, 보다 개개인에 대한 배려나 개인적 가치를 높일 수 있는 조직문화가 제기되고 있다. 이전 세대들이 개인을 보호하고 성장하게 만드는 시스템으로 조직을 생각했다면 디지털 세대는 조직보다는 개인을 더 중시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시대에는 개인은 자신을 믿을 수밖에 없고 자신의 부가가치를 극대화해야 한다. 자기계발에 게을리 할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재테크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증폭되는 것도, 직장인들의 자기계발 열풍이 대학생들에게까지 확대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지식노동은 개인의 창의력을 극대화시켜주는 것에서 생산성이 더 높아질 수 있으므로 지식정보산업의 성장은 조직형 인간을 개인형 인간으로 전화시키는 데 일조한다.


우리나라는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인터넷 보급률을 자랑하지만 정보의 활용도면에서 엄청난 격차가 존재한다. 상위 5%가 전체 인터넷 데이타의 50%를 차지하고, 하위 50%의 인터넷 데이터 사용량은 전체의 5%가 채 안 되는 극심한 정보격차를 보여주고 있다. 정보격차란 새로운 정보기술에 접근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사이에 경제적 ·사회적 격차가 심화되는 현상을 이른다. 정보통신기술은 일반적으로 시간의 한계, 공간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기술로 인식되고 있다. 이에 따라 정보기술이 지닌 공간극복의 속성을 강조하여 정보기술이 그동안 지역 간의 경제적, 사회 문화적 격차를 완화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어 왔었다. 그러나 정보통신기술이 기존의 지역 간 격차를 완화해 줄 것이란 기대와는 달리 오히려 기존의 중앙과 대도시 중심의 집중화를 가속화시키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편 국가 간의 정보격차는 서구선진국과 제3세계 국가 간의 경제적 불균형을 심화시킴은 물론 정치적 주권과 문화적 정체성마저 위협하고 있다. 현재 컴퓨터를 비롯한 정보통신 자원의 3/4 이상이 선진국에 집중되어있다. 정보화사회를 축복으로 맞아들이기 위해서는 저소득층, 농어촌민, 장애인과 노인 등 정보소외계층이 인터넷 이용도를 높이기 위한 적극적인 대책을 정부나 민간기구에서 강구해야 할 것이다.



2002년 대선이 인터넷 선거였다면 2007년 대선은 UCC 선거가 될 것이라는 전망을 하는 이들도 있다. 네티즌들은 올 대선이 UCC의 영향을 받을 것으로 예측했다. 문제는 검증도 되지 않은 불법게시물이 건전한 토론 문화를 잠식할 우려가 있다는 점이다. 인터넷이 시민들에게 준 권력을 새로운 참여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한 에너지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인터넷 상의 게시판, 토론광장, 커뮤니티 등에서 성숙한 토론문화를 활성화시키는 시민적 지혜가 더 절실히 요구된다고 하겠다. 권력은 물리적인 도구에서도 나오는 것이지만 성숙한 인격에서도 나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 시대의 네티즌들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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