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없는 세상
앨런 와이즈먼 지음, 이한중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지구의 행복을 위한다면 지구에서 손을 떼라

인간없는 세상/앨런 와이즈먼/랜덤하우스/2007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모든 것 중에 오직 사람이 가장 귀한데, 사람이 귀한 까닭은 오륜이 있기 때문이다.”라는 것이 유학의 가르침이었다. 유학은 인간의 고귀성을 인간의 윤리성에서 찾고 있다. 충효와 같은 윤리, 즉 인륜이 없기 때문에 금수는 인간처럼 고귀할 수 없으며, 오직 윤리적 분별력을 가진 인간만이 고귀할 수 있다는 논리다. 그러나 다석(多夕) 유영모(柳永模, 1890~1981) 선생은 어떤 책에선가 인류가 멸망한다고 해서 호들갑을 떨 필요가 없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인간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인본주의자들로서는 펄쩍 뛸 말씀이시다. 그러나 지구의 장구한 역사에 견주어 볼 때 인류의 역사란 아주 미미한 부분에 불과한 것이므로 인류의 멸망은 본래의 지구 질서로의 복귀일 뿐이라고 태연히 말하는 철학자들도 있지 않은가.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지구를 학대해온 인류의 소행으로 본다면 다석 유영모 선생의 말씀에도 나름대로의 진정성이 있다고 하겠다.


영국의 대기과학자 러브록(1919~ )은 그의 저서 『가이아』에서 지구를 자기 조절의 기능을 갖춘 하나의 생명체로 보면서 지구생명체에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대지의 여신 '가이아'의 이름을 붙여주고 있다. 러브록은 지난 30억 년 동안 대기권의 원소 조성과 해양의 염분 농도가 거의 일정하게 유지돼 왔다는 사실에 주목해 그 항상성의 비밀을 생물의 존재에서 찾았다. 그는 탄소, 질소, 인, 황, 규소 등 지구를 구성하는 주요 원소들이 대륙과 해양을 오가며 순환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는데, 그 메커니즘이 전적으로 생물에 의해 통제된다는 것이다. 바닷물의 염분을 일정하게 유지시키는 것은 그 속에 사는 생물들의 작용이라는 얘기다. 이런 실례들을 들어 저자는 지구 차원에서 균형 조절 시스템의 존재를 확신해 이를 '가이아'라고 이름 붙인다


가이아의 세계에서 인간은 지구의 주인도 관리인도 아니다. 비유하자면 인간은 지구라는 하나의 유기체를 구성하는 세포에 불과하다. 그러나 하루에도 수많은 생물 종이 멸종하는 상황에서 인류의 숫자가 60억을 넘는다면 인류는 분명 정상 세포가 아니다. 비유컨대 인간은 비정상정으로 불어나면서 건강한 세포들을 희생시키는 암세포다. 이 인간이라는 암세포는 건물을 짓고, 도로와 공장을 건설하고 엄청난 탄소를 공중에 내뿜는다. 인간이라는 암세포의 활동의 결과가 곧 환경오염인 셈이다. 그렇다면 문명의 주역인 인간이 당장 지구상에서 퇴장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애리조나 대학의 언론학 부교수이자 과학저술가인 앨런 와이즈먼(Alan Weisman)의『인간 없는 세상』바로 이런 발칙한 상상을 구체화한 책이다. 이 책은 지구의 주인이라는 교만에 빠져 끊임없이 ‘가이아’를 괴롭혀 온 인간에 대한 경고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 책은 뉴스위크로부터 ‘21세기 인류에게 계시록으로 남을 책’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사는 이 책을 영화화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인간이 사라진 바로 다음날 자연은 인간의 흔적들을 청소하기 시작한다. 자연의 청소 수단은 물이다. 물은 단순한 것 같지만 엄청난 괴력(?)을 가진 청소 수단이다. 저자는 말한다. “인간이 사라진 뒤, 기계를 믿고 더욱 오만해진 인간의 우월성에 대한 자연의 복수는 물을 타고 온다. 그것은 선진국에서 가장 널리 이용되는 목조 건축에서부터 시작된다. 빗물은 먼저 아스팔트나 슬레이트로 만든 지붕 외피를 타고 든다.(중략) 지붕 이음매나 모서리 부분에 방수용 철판을 대준다고 하지만 하염없이 내리는 빗물은 어느새 외피 아래로 스며들기 시작한다.” 결국 지붕에서는 나무가 계속 썩으면서 지붕틀이 서로 떨어져 나가기 시작하고, 결국 벽이 한쪽으로 기울면서 지붕이 무너져 내리고 만다. 겨울철엔 배관이 얼어터지고, 다람쥐와 너구리 같은 야생동물들이 벽에 구멍을 낸다. 나무는 썩고, 시멘트는 조금씩 부스러져 가루가 된다. 수영장이 있는 집은 거대한 화분이 되고, 지하실은 흙과 식물로 가득 차게 된다.


그렇다면 인간들이 만든 도시는 어떻게 될까. 저자는 미국의 맨해튼을 예로 들고 있다. 맨해튼 청소 작업의 최고의 주역 역시 물이다. 매일 5,000만 리터의 물을 퍼내는 뉴욕의 지하철역과 통로에는 인간이 사라진 이틀 후에 물이 들어찬다. 비가 오지 않아도 지하철 펌프만 가동을 멈추면 며칠 안에 도시는 물바다가 된다. 도로는 갈라지고 터지기 시작한다. 도로 포장에 틈이 벌어지면 여러 식물들이 그 틈을 비집고 자라난다. 수십 년 안에 인간이 만든 아스팔트 도로와 철근 고가도로 등 도시건조물 대부분이 무너지고 그 자리를 풀과 숲이 뒤덮는다. 도시에 줄지어 서 있는 건물들은 화재로 무너질 확률이 크다. 20년이면 피뢰침이 삭아 꺾이기 때문에, 벼락이라도 한번 치면 화재 가능성이 그만큼 커지기 때문이다.


자동차가 운행을 멈추면 중금속의 폐해로부터 식물들은 점점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 미국의 경우, 1인당 매연 한 개 이상의 타이어를 버린다고 하니, 세계적으로 버려지는 폐타이어의 양은 어마어마할 것이다. 자동차의 운행정지로 중금속을 함유한 배기가스가 현저히 줄어들고, 폐타이어가 사라짐으로써 폐타이어에서 나오는 엄청난 오염물질도 사라지게 된다. 이로 인해 지구는 훨씬 더 건강하게 숨쉴 수 있다.


인간이 사리지고 1년 뒤. 무전 송수신탑의 경고등이 꺼지고 고압전선에 전류가 차단되면 고압전선에 부딪혀 매년 10억 마리씩 희생되던 새들에게는 살맛나는 세상이 온다 새들만 살맛나는 세상이 아니다. 인간이 사라짐으로써 상아를 뺏길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되는 코끼리의 개체수는 20배로 늘어나게 된다. 모기도 살맛나는 세상과 만난다. 여러 생물이 나타나 다양한 동물의 피를 시식할 수 있다. 살충제도 사라졌고, 습지가 복구되니 모기뿐 아니라 여러 곤충들도 살맛나는 세상이다. 꽃이 만발해 꿀도 넉넉해지니 벌도 즐거워질 수밖에 없다. 양봉업자에게 꿀을 약탈당할 염려도 없다. 물론 인간의 도움을 받던 애완동물들의 처지는 막막해진다. 인간의 원조가 끊기니 인간이 개량한 동식물들은 도태된다. 살기 위해서는 야생상태로 돌아가 야생성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멸종 위기에 처한 동물들의 개체가 늘어나고 생물의 멸종이 중지되느니만큼 지구 전체의 생명들이 누리는 혜택에 비하면 애완동물이나 가축들이 입는 피해는 실로 미미하다.


저자는 책의 한국판 서문에서 비무장지대(DMZ)를 방문한 경험을 소개하고 있다. 5천 년 간 논이었던 비무장지대 일대는 50여 년이 지나면서 예전의 습지로 돌아갔다. 50여 년 동안 인적이 없었던 이곳은 반달가슴곰, 스라소니, 고라니 등 야생동물들의 천국이 되었다. ‘인간이 사라지면’이라는 저자의 시나리오가 현실로서 나타난 곳이 비무장지대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야생의 천국으로 바뀐 것이다.


인간이 하나둘 자신의 땀으로 건설한 도시가 붕괴되는 것은 인간의 눈으로 보자면 안타까운 일이겠지만 인간 이외의 생명으로 보자면 즐거운 일이다. 인간의 입장에서는 문명의 파괴가 자연의 입장에서 보자면 원초적인 자연으로의 복귀인 셈이다. 그러나 그 복귀의 과정이 순조롭기만 한 것은 아니다. 18세기부터 배출한 이산화탄소가 인류 이전 수준으로 떨어지려면 10만년이 걸린다. 태평양을 쓰레기장으로 만들고 있는 플라스틱을 분해하는 데는 몇 천 년, 몇 만 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납이 토양에서 전부 씻겨나가려면 3만 5000년, 카드뮴은 7만5000년이 걸린다. 조리기구의 플라스틱 손잡이는 500년이 지나도 멀쩡하다. 인간이 만들어낸 라디오와 TV 방송 전파는 계속해서 외계를 떠돈다. 지구인이 멸망해도 지구인이 쏘아올린 TV 전파를 수신한다면 수 천 만년 뒤에도 인간들이 공을 차고 달리는 스포츠 프로그램을 외계에서 청취할 수 있다는 슬프고도 아이러니컬한 이야기다.


핵의 위협은 자못 심각하다. 3만 여개의 핵탄두와 441개의 핵발전소가 골칫거리로 남는다. 다행하게도 와이즈먼은 “인간 없는 세상에서 핵탄두가 폭발할 위험은 없다. 대신 포탄의 외피가 부식해 내용물이 노출된다.”고 말한다. 대륙간탄도미사일 속에 들어있는 플루토늄의 양은 4∼9㎏. 그 방사능의 강도가 자연 상태로 줄어들려면 무려 35만년 쯤 걸린다. 그러나 와이즈먼은 “생명체가 방사능에 대한 내성이 강해지는 쪽으로 진화할지 모른다.”고 말한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 이후 그 지역에 사는 들쥐들이 다른 지역 들쥐들보다 수명은 훨씬 짧아졌지만 성적(性的)으로 일찍 성숙해 새끼를 빨리 낳음으로써 개체 수는 줄지 않았다는 것이다.


와이즈먼은 인간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자연이 회복될 수 있는 길은 없겠냐는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 이 책을 썼다고 한다. 그는 책의 말미에서 에너지 절약, 녹색 에너지 개발, 숲 파괴 중지, 산아제한 등을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위한 해법으로 제안한다. 숫자 부담이 줄어들면 우리의 존재를 계속해서 제어하기 위해 우리가 이룬 발전과 지혜를 유리하게 동원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는 점을 들어 와이즈먼은 “모든 가임여성이 아이를 하나만 낳는다면, 현재 65억인 세계인구가 2100년이면 16억으로 줄어들어 세상이 나날이 아름다워질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이 자연에서 최고로 귀한 존재라는 인간중심적 세계관은 자신을 주인으로서 자처하면서 자연이 자신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자연의 무제한한 정복과 자기중심적 약탈을 정당화해 왔다. 생태계의 피해가 어떠하든 인간은 자연정복의 과정을 진보로 믿어왔다. 하지만 인간중심주의는 인간 외의 모든 존재는 단순한 도구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독선적인 신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습지가 사라지고 곤충과 새들이 사라져도 인간의 문명만 발달하면 그만이라는 식의 인간의 이기주의, 즉 인간중심주의의 산물이다. 인간중심주의는 자연과의 공존을 거부한다. 그러나 자연은 단순히 인간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욕망의 대상만은 아니다. 와이즈먼의 『인간 없는 세상』은 인간 없는 세상을 꿈꾸는 책이 아니다. 저자가 경계하는 것은 인간의 욕망이다. 인간이 스스로의 욕망을 절제해야하는 이유는 거창한 도덕적 요청 때문이 아니라 생존의 요청 때문이다. 우리가 없어도 지구는 남는다. 하지만 지구가 없다면 인류의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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