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트로피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창희 옮김 / 세종연구원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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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엔트로피 사회를 향하여 삶의 틀을 바꾸자

엔트로피/제레미 리프킨/세종연구원



1600년대 초에 프란시스 베이컨이 썼다는 『뉴 아틀란티스』는 과학이 유토피아를 건설해 줄 것이라는 낙관주의적 신념으로 가득 차 있다. 책은 페루에서 닻을 올려 중국으로 항해하던 배가 폭풍우를 맞이하여 항로를 잃어버리고 헤매다 마침내 지도에 나오지 않는 땅을 발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바로 그곳이 인간의 과학이 만들어낸 유토피아 벤살렘 왕국이다. 벤살렘은 둘레가 5600마일로, 토양이 비옥한 섬이다. 벤살렘의 실력자는 학술원 회원인 과학자들이다. 그들은 건강을 증진시켜주고 생명을 연장시켜주는 물을 만들고, 유성의 체계와 운동을 모방한 거대한 건물을 만들고, 다양한 생물체를 번식시키고, 동물의 손상된 부위를 재생하는 방법도 연구한다. 과학자들의 손에서 섬은 유토피아의 모습으로 태어난다.

과학이 유토피아를 건설해줄 것이라는 당시의 이런 낙관론은 비단 프란시스 베이컨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과학혁명과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많은 사람들이 과학과 지식의 진보가 인간의 삶의 조건을 획기적으로 개선해 줄 것이라는 낙관주의적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근대의 과학문명을 비판하는 목소리 또한 만만치 않았다. 『엔트로피』의 저자 제레미 리프킨도 과학문명이 장밋빛 미래를 건설할 것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엔트로피』는 문명의 종말을 경고하는 책이다. 베이컨이 생각했던 대로 과학문명이 유토피아를 건설해주기는커녕 오히려 종말을 앞당길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현대의 과학문명에 대한 섬뜩한 경고인 셈이다.


제레미 리프킨이 현대 문명에 대한 비극적 전망을 말하기 위해 끌어들인 개념은 열역학 법칙이다. 열역학 제1법칙에 따르면 이 우주의 총 에너지는 불변이다. 즉 어떤 변화가 일어나더라도 우주 전체의 에너지는 보존된다. 에너지의 총량은 일정해서 새롭게 생성되거나 소멸될 수 없다. 에너지를 계속 사용하더라도 고갈되지 않는다. 단지 그 형태만 변할 뿐이다. 그러나 이는 에너지를 무한정 사용해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예를 들어 석탄을 태우면 에너지 총량에는 변화가 없을지 모르지만 일의 에너지원이 되는 석탄은 다시 얻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물질세계의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 열역학 제2법칙, 즉 ‘엔트로피’의 법칙이다. 이에 따르면 에너지와 물질의 형태 변화는 오직 한 방향으로만 이루어진다. 사용할 수 있는 형태로부터 사용할 수 없는 형태로, 질서가 있는 상태에서 무질서가 증가하는 상태로만 변할 수 있으며, 그 되돌림은 불가능하다. 이 때 사용 불가능한 형태로 바뀌어 있는 에너지의 총량을 ‘엔트로피’라고 한다. 곧 엔트로피란 더 이상 일로 바꿀 수 없는 에너지의 양에 대한 척도이며, 엔트로피의 증가는 사용 가능한 에너지의 감소를 뜻한다.

엔트로피는 ‘무질서의 정도’로도 표현된다. 가령 물과 잉크가 따로 있을 때는 물은 물대로 존재하고 잉크는 잉크대로 존재하므로 ‘무질서’하지 않다. 즉 엔트로피가 낮은 상태이다. 그러나 잉크가 점점 퍼져가면서 물속의 ‘무질서도’ 즉, 엔트로피가 증가하고 종국에는 잉크의 확산 현상은 멈춘다. 마찬가지로 빨갛게 단 부지깽이를 난로에서 꺼내어 공기 중에 방치하면, 부지깽이가 식어감에 따라 주위의 공기가 뜨거워진다. 열은 언제나 뜨거운 물체에서 찬 물체로 흐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마지막에는 부지깽이와 주위의 공기는 같은 온도를 유지하게 된다. 이와 같이 에너지 수준에서 차이가 없어진 상태를 평형 상태라고 부른다. 이 상태는 정지되어 있는 잉크병 속의 물과 비슷한 상태다. 이 상태는 운동이 정지된 상태로서 이미 유용한 일을 할 수가 없는 상태다. 바로 이 상태가 엔트로피가 최대로 된 상태요, 이는 곧 인류의 종말을 의미한다.


리프킨은 “궁극적으로 정치경제의 흥망, 국가의 성쇠, 상공업의 변화, 부와 빈곤의 원천 그리고 인간 모두의 물질적 복지 등을 좌우한다.”라는, 노벨상을 수상한 화학자 소디의 발언을 인용하며 인간이 행하는 모든 물리적 활동은 열역학 제1법칙 및 제2법칙의 형태로 표현된다고 한다. 저자는 “카드 한 장을 한 장을 숫자와 그림에 맞추어 질서 있게 쌓아놓았다고 하자. 이 카드 뭉치는 질서의 최대값, 또는 엔트로피의 최소값에 있다. 이 카드 뭉치를 방바닥에 던지면 무질서한 상태로 흩어질 것이다. 카드 한 장 한 장을 집어 처음처럼 질서 있는 상태로 쌓아올리려면 카드를 뿌릴 때보다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라고 말하며 카드의 예를 든다. 이 비유가 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카드 뭉치를 던진다는 것은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일, 곧 무질서도를 증가시키는 일이다. 이는 곧 인간의 에너지 사용 행위를 의미한다.

리프킨은 무엇이 엔트로피를 증가하는 데 일조했는가를 책을 통해 조목조목 살핀다.

먼저 기술이다. 기술의 규모가 크고 복잡할수록 에너지의 소비량이 많아진다. 기술이 발달하면 할수록 에너지의 소비는 많아지고 결과적으로 쓸 수 없는 에너지, 곧 엔트로피는 증가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기술이 환경에 대한 의존에서 그들을 해방시켜줄 것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 프란시스 베이컨이 꿈꾸었던 유토피아도 여기에서 멀지 않다.

제도의 발달 역시 엔트로피를 증가시킨다. 리프킨은 정치 및 경제기구들은 기계와 마찬가지로 에너지의 변환자들이고, 그들이 하는 일은 문화전체를 통과하는 에너지 흐름을 더욱 원활히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에너지의 흐름이 원활하게 되어 결국 에너지의 부족사태를 맞을 때 국가는 유용한 에너지원을 찾아 영토확장을 꾀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제국주의라고 리프킨은 설명한다.

전문화는 증가하는 복잡성 및 집중화와 나란히 진행되는데 이 역시 엔트로피를 증가시킨다. 이 전문화로 인해 각 개인의 기능은 더욱 세분화되고 한정되지만 지나친 전문화로 인해서 융통성을 잃어버리고 환경변화에 적응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리프킨은 경고한다.


리프킨은 미국에서 농업장관을 지낸 클리포드 하딘이 “한 사람의 인력으로 현대적이고 기계화된 사육시스템을 통해 7만 5,000마리의 닭을 키우고, 자동 사료 공급 장치를 써서 5,000 마리의 소를 키울 수 있는 나라가 미국 이외에 어디 있단 말인가?”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현대적 농업이 얼마나 고엔트로피 산업인지를 설득력이 있게 말해준다.

이동의 효율을 현저히 증가시켜주는 수송수단과 도시화 역시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요인이라고 리프킨은 지적한다. 도시의 팽창으로 무질서가 축적됨에 따라 도시의 통치기구는 더욱 비대해진다는 것도 도시화의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도시에서 쏟아져 나오는 쓰레기 역시 골치다.

리프킨은 전쟁준비는 인간 활동 중 가장 많은 엔트로피를 증대시키는 활동이라고 하면서 미사일을 만드는 것은 “후손들이 쓸 쟁기를 빼앗아 칼을 만들고 있는 꼴”이라고 비판한다. 교육제도의 중앙집중화 또한 문제다. 교육제도의 중앙집중화로 새로운 정보기술이나 전문화된 프로그램 등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지만, 정보가 대량으로 늘어나면서 에너지 소비도 크게 늘어났으며, 그 결과 쓰레기 정보와 같은 무질서가 축적되고, 엔트로피 과정이 더욱 빨라졌다는 것 또한 문제다.

리프킨은 세계인구의 6%를 차지하는 미국이 전세계 에너지 총소비량의 1/3을 차지한다고 비판하면서 에너지 문제의 대안으로서 내놓은 자구책들이 얼마나 타당성이 있는지를 검토한다. 먼저 석탄을 원료로 휘발유를 얻는 합성연료는 화석연료와 같은 재생불가능한 에너지원에서 파생된 것일 뿐이고, 합성연료의 에너지를 변환시키기 위해서는 별도의 에너지를 투입해야 하기 때문에 합성연료의 효율성은 형편없으며, 그 안정성이 문제가 되는 핵연료도 에너지 문제의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리프킨은 지적한다.


리프킨은 고엔트로피 사회에서 저엔트로피 사회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핵심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먼저 제3세계가 발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근본적인 부의 분배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지구의 생물학적 한계를 지키자는 주장은 가난한 사람을 영원한 노예상태로 묶어두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으리으리한 욕실이 달린 저택에 살면서 유명 디자이너의 옷을 입고 벤츠를 모는 상류사호의 생태론자들이 깨끗한 공기를 요구하려면 우선 자신들의 경제적 풍요를 이루는 부를 좀더 균등하게 재분배해야 한다고 리프킨은 지적한다.

둘째, 현재의 중앙집권적인 전력시스템을 분산적인 태양에너지 시스템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의 전력시스템을 태양발전시스템으로 대체하면 고도의 에너지가 필요한 중화학공업과 첨단기술과 같은 고엔트로피 산업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태양에너지에만 의존하는 체제로 전환하려면 기술과 경제에 큰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리프킨은 현재의 고엔트로피 문화에서 태양과 같은 재상가능에너지를 사용하는 저엔트로피 문화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생각의 틀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고엔트로피 시대에는 성장이 삶의 목표였지만 저엔트로피 시대에는 검약이 삶의 중요한 덕목이 되어야 하고, 무절제한 소비와 물질적 집착 등에서 벗어나 내적인 성장을 중시하는 태도, 생태적인 관심 등에 기초를 두는 사고방식으로 인식의 대전환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를 쓴 경제학자 슈마허는 “태양에너지로 집 한 채를 따뜻하게 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록펠러 센터에 난방을 공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태양에너지와 풍력을 합친다 해도 엘리베이터조차 가동하지 못할 것이다.” 라고 말한다. 대량생산과 대도시의 삶이 태양에너지 시대의 모델과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태양에너지 시대에 맞는 모델은 어떤 것일까.

리프킨은『작은 것이 아름답다』에서 슈마허가 제시한 이른바 ‘중간기술’을 그 모델로 든다. 중간기술은 인간의 노동력을 최대로 활용하여 이루어지는 작은 규모의 기술이다. 호미로 농사를 짓고 있는 제3세계의 농촌을 개발하기 위해서 트랙터와 콤바인을 들여오게 되면, 농촌인구 과잉에 일자리 부족으로 시달리고 있는 대다수의 제3세계에 더 많은 실업과 혼란을 야기하여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뿐 아니라 복잡한 기계에 무지한 농민들은 기계와 그 기계를 다룰 수 있는 사람에게 매여 버리게 된다. 그래서 슈마허 박사는 호미와 트랙터의 중간에 해당하는 그 지역의 상황에 적합한 기술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그것을 중간기술이라 이름붙이고, 그러한 기술을 연구, 개발하기 위하여 '중간기술 개발 그룹'이라는 국제적인 단체를 조직하게 된다.

중간기술의 개념은 순전히 슈마허 박사의 창안은 나이다. 슈마허 스스로가 인정하듯 그것은 본래 간디의 아이디어였다. 영국의 지배하에 들면서부터 영국의 섬유 공업이 인도 가내 공업을 파괴하면서 영국은 섬유 산업을 통해서 인도로 인해 많은 이윤을 가져가고 있을 때 간디는 서양의 거대한 생산체계가 제3세계의 민중을 소외시키고 자연을 약탈한다고 생각했다. 영국의 지배하에서 벗어나는 길은 비천한 사람들에 대한 차별을 없애고 그리고 인도의 지방 산업을 다시 활성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도의 섬유시장을 점령하고 있는 영국의 섬유공업을 약화시키기 위해서는 인도인들 스스로가 물레를 돌려 옷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레 역시 인간의 편리를 증진시키는 기술이다. 그러나 그것은 영국의 대규모 섬유공업처럼 인도인들을 소외시키지 않으며 인간성과 환경을 파괴하지 않는다는 것이 간디의 생각이었다. 슈마허의 ‘중간기술’은 바로 이런 간디의 생각을 구체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무한경쟁의 시대, 경제 성장을 최고의 미덕으로 아는 시대, 기술만이 최고의 부가가치를 창출해낼 것이라는 기대로 기술과 인력개발에 총력을 기울이는 시대에 어떤 정부가 중간기술과 같은 저엔트로피 기술을 도입하겠는가. 인류의 세계관 자체가 근본적으로 변화지 않는 이상 요원한 일이다. 지구는 현세의 인류만을 위한 곳이 아니고 미래의 후손들과 같이 공유하는 곳이며, 인류는 홀로 독불장군처럼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태계를 이루는 한 구성원일 뿐이라는 세계관의 대전환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리프킨의 책『엔트로피』는 독자들에게 통렬한 각성과 실천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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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세계에 첫 발을 내딛다 여성이 세상을 바꾸다 1
박현주.신명철 지음 / 낮은산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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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명의 여성과학자가 보여준 남성적 냉철함과 여성적 따스함

미지의 세계에 첫발을 내딛다/박원주, 신명철/낮은산/2007



낮에만 활동하는 주행성 동물과 밤에만 활동하는 야행성 동물, 그리고 밤낮 가리지 않고 활동하는 동물이 있다고 하자. 누가 생존에 유리할까. 당연히 밤낮 가리지 않고 활동하는 동물이다. 이야기를 달리해서 여성적 성격을 가진 사람과 남성적 성격을 가진 사람, 그리고 남성과 여성의 성격을 모두 가진 사람이 있다고 하자. 누가 생존에 유리할까. 바로 남성성과 여성성을 모두 가진 사람이다. 심리학자 산드라 벰(Sandra Bem)은 남성성과 여성성은 서로 상반되거나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이 두 특성이 한 사람 안에서 얼마든지 공존할 수 있으며, 그 둘 사이의 균형의 정도는, 각 개인의 성격이 다양한 것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질 수 있음을 밝혀낸 바 있다. 남성적 특성만 혹은 여성적 특성만 지니고 있는 사람에 비하여 남성적 특성과 여성적 특성을 모두 지니고 있는 사람은 훨씬 더 다양한 자극에 대하여 다양한 반응을 보일 수 있다. 굳세게 대처해야 할 때는 굳세게, 부드럽게 대처해야 할 때는 부드럽게, 그때그때의 상황의 요구에 따라 적합한 반응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이 소위 ‘양성성’을 겸비한 사람의 장점이다.


『미지의 세계에 첫발을 내딛다』가 소개하는 네 명의 여성 과학자 마리아 라이헤, 비루테 갈디카스, 실비아 얼, 마거릿 로우먼은 남성적 의지의 담대함과 모성의 따스함을 보여분다. 책의 저자(박현주, 신명철)가 말하고 있듯 “누구도 알아주지 않지만 자신의 일에 온몸을 바친 사람. 그 일을 하면서 세상의 진실과 삶의 의미를 깨달은 사람. 열정과 끈기로 뚜벅뚜벅 내딛다보니 어느새 세상의 중심에서 외치고 있는 사람.”이 바로 책이 소개하는 네 명의 여성과학자다. 그들은 모두 새로운 미지의 세계를 개척함으로써 ‘개척’이라는 어휘가 여성을 위한 수식어가 될 수도 있음을 보여주었다. 마리아 라이헤는 불모의 땅 나스카 사막을 연구하였고, 비루테 갈디카스는 보르네오 정글에서 오랑우탄을 연구했고, 실비아 얼은 남성학자들도 도전하기 어려운 바다 생태계를 연구 대상으로 삼았으며, 마거릿 로우먼은 로프를 타고 올라가 나무의 꼭대기인 우듬지를 연구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 그들은 여성의 몸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열었고, 결국 세상의 중심에 우뚝 서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을 미개척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것은 성공에 대한 야망이 아니었다. 자신의 영역을 넓혀보겠다는 식민주의적 야심도 아니었다. 불모의 사막에서 50년 넘게 나스카 문양 연구를 하며 일생을 보낸 마리아 라이헤는 그녀의 학문적 출발이 어디에 있는가를 분명히 말해준다. “어리석게도 우리 인간은 눈에 보이지 않고, 쉽게 알 수 없는 것들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지요. 그것이 바로 사막의 문양들이 그토록 오랜 세월 인간의 관심 밖에 머물 수 있었던 까닭입니다. 하지만 나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아직은 숨겨져 있지만 앞으로 그 진가를 드러낼 무엇인가를 찾고 발견하는 과정 그 자체에서 무한한 희열을 느낄 수 있었어요.” 발견의 과정, 그 자체가 그녀에게는 희열이었다.


남아메리카 페루 남부의 태평양 연안과 안데스 산맥의 기슭 사이에 있는 나스카 평원에는 기이한 선들과 마치 거인의 손으로 그린 듯한 도형들과 거대한 새들과 짐승 등 약 100여 개의 그림들이 펼쳐져 있다. 어떤 사람들은 아주 먼 옛날 지구를 찾아 온 외계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과 만나서 이 그림을 그렸을 것이라고 아무런 근거도 없이 상상했다. 독일의 여류 수학자이며 천문학자인 마리아 라이헤 박사는 이곳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했다. 마리아 박사는 나스카 평원을 샅샅이 훑으며 여러 가지 모양을 이루는 직선 하나하나에 대해 세밀히 조사하고 그것을 '세계 최대의 천문력'이라고 주장했다. 그녀의 주장은 여성적 끈질김과 섬세함의 결과였다.

마리아 라이헤는 95년이라는 긴 삶 중 3분의 2 이상을 페루에 있는 나스카 대평원을 지키고 연구하는데 바쳤으며, 바로 그곳에서 삶을 마쳤다. 그녀는 나스카에서 26년간 거의 극빈층에 가까운 생활을 하면서도, 나스카 대평원의 그 거대한 문양과 상징들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측량하고 도면에 옮겼다. 그녀는 나스카 대평원의 문양을 촬영하기 위해, 헬기 아랫부분의 착륙대에 널빤지를 놓고서 그곳에 올라서서 몸을 헬기에 묶은 채 수직 방향으로 나스카 대평원을 촬영하기도 했다. 그런 강철 같은 의지로 그녀는 나스카 문양을 지키려는 데에도 모성적 헌신을 다했다. 1955년 당시 페루 정부는 안데스 산맥 동쪽의 아마존 강의 물을 끌어와 나스카 대평원에 관개하려는 계획을 세웠는데, 그녀는 그녀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그 계획을 실행 직전에 무산시켰다.


비루테 갈디카스, 그녀는 25살이라는 나이에 보르네오 열대우림 속에 들어가 지금까지 30년 이상을 야생 오랑우탄 연구에 힘쓰고 있다. 집단별로 무리를 지어 다니는 침팬지나 고릴라와 달리 오랑우탄은 다른 오랑우탄과 한 번도 만나지 않고 한 달 이상을 지내기도 한다. 그러한 오랑우탄의 특성 때문에 그녀의 연구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특히 수오랑우탄은 일단 어미로부터 독립하면 철저히 혼자 생활하기 때문에 오랑우탄을 찾아나서는 일은 쉽지 않았다. 오랑우탄이 도구를 사용하는 모습을 8년 만에 처음으로 발견한 것도 그런 오랑우탄의 습성 때문이었다. 오랑우탄을 찾기 위해서 갈디카스는 어깨 밑까지 닿는 밀림을 헤치며 다녀야 했다. 어떤 날은 양말과 속옷에서 피를 빨아먹고 몸이 퉁퉁 불은 거머리가 떨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독사와 독충이 우글거리는 밀림의 어떤 시련도 그녀를 막지 못했다. 첫 번째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문명사회로 돌려보내면서까지 그녀는 밀림에 남는다. 그러나 사랑하는 아들과의 이별에 따르는 슬픔과 고독도 그녀를 막지 못했다. 오히려 그녀는 생명의 기운이 넘치는 열대우림 속으로 더욱 깊이 들어간다.

사막을 지키려고 했던 마리아 라이헤가 그랬듯이 그녀도 오랑우탄 보호에 앞장선다. 당시에 오랑우탄은 애완용으로 포획되어 점점 그 수가 줄어들고 있었고, 밀림의 개발은 오랑우탄의 서식지를 더욱 좁게 만들었다. 비루테 갈디카스는 오랑우탄의 불법거래를 막는 활동을 펼쳐보지만 그녀는 곧 그것이 오랑우탄을 지키는 최선의 방법이 아님을 깨닫는다. 열대우림을 지키는 것이 곧 오랑우탄을 지키는 근본적인 대책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녀는 보르네오 현지인과 재혼해 인도네시아인으로 귀화해 지금도 오랑우탄과 오랑우탄의 서식지인 열대우림을 보호하는 데 힘쓰고 있다.


“대양을 위협하는 그 어떤 문제점들보다 우리가 ‘모른다’는 것이 가장 커다란 위험일 수 있습니다. 알게 되면 돌보게 되고, 돌보게 되면 희망이 생깁니다. 우리 자신과 우리 아이들, 그리고 바다를 위한 지속가능한 미래를 보장할 대양의 도덕이라는 희망이 생길 겁니다.”라고 말하는 실비아 얼은 바다 생태계 연구의 선구자다. 그녀는 1968년 ‘딥다이버’라는 잠수정을 타고 세계 최초로 바다 속 18미터에서 14시간을 지내는 실험을 성공하기도 한다. 그녀는 해양학자로도 명성을 얻었지만 여러 잠수정 등 다양한 탐사장비를 이용하여 해저에 도달하는 기술에도 높은 명성을 얻었다. 그녀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바다 바닥을 걸어 다니면서 다양한 생물을 연구하고 해저에서 6천 시간을 넘게 지내기도 했다.

그녀의 전문분야는 조류였지만 그녀는 한 분야의 전문가에 그치지 않았다. 그녀의 관심은 바다 생태계 전체로 넓어졌다. 그녀는 1990년 미국의 국립해양대기국의 책임과학자로 임명되자, 해저 연구에 투자하도록 미국정부를 설득하면서 미국 정부가 해저 연구보다 우주선의 화장실에 더 많은 지출을 한다고 꼬집는다. 그러나 정부 관료들에게 변화가 없자 그녀는 단호하게 국립해양대기국을 그만둔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출세가 아니라 바다였던 것이다.


마거릿 로우먼은 호주 동부 해안과 아프리카 등지의 우듬지를 집중적으로 관찰한 학자다. 1978년 호주로 간 그녀는 숲 바닥보다는 우듬지에 생물의 다양성이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판단하여 우듬지를 연구 대상으로 삼는다. 문제는 수 십 미터에 이르는 우듬지에 어떻게 오르느냐였다. 원숭이를 훈련시키거나, 망원렌즈가 달린 카메라를 도르래에 장착하는 방법도 생각했지만, 그녀는 직접 로프를 타기로 한다. 그러나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짐피짐피나무’의 가시는 사람의 피부를 찢어놓을 뿐만 아니라 상처 위에 독소까지 뿜어댔다. 때로는 독사를 만나기도 했다.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며 우듬지에서 잠을 자면서까지 관찰한 결과, 그녀는 자기 몸의 수천 배나 되는 생명체를 겁 없이 공격하는 아프리카산 군대개미, 죽기 전 딱 한번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태치갈리아 등의 생태를 발견한다.

그녀의 자서전이라 할 수 있는 『나무 위 나의 인생』에서 로우먼은 가정주부로서의 삶과 학자로서의 삶을 병행하기가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고백하고 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호주 변방에서는 여성의 일차적 의무가 집안을 돌보는 것이었다. 식물학에 대한 애착 때문에 나는 도저히 그에 적응할 수가 없었다. 나는 과학을 집안 살림에 적응시키려 애썼다. 설거지를 하면서 머릿속으로 탐사 장비를 설계할 수는 없을까? 낮잠 시간을 이용해 과학 기사를 작성하면 어떨까? 아이를 유모차에 태워 밀고 다니면서 실험지에 새싹이 돋아났는지를 살펴볼 수는 없을까?” 그러나 사회의 통념도 그녀의 발길을 돌리지 못했다. 그녀는 “당신의 연구가 가족보다 우선할 수는 없으므로 가족용 차를 몰고 대학 도서관으로 가는 일은 하지 말라”고 충고하는 남편과 이혼을 하는 어려운 선택을 하기도 했다. 그녀는 두 아들 에디와 제임스와 함께 탐험을 계속한다. 두 아들과 함께 열대우림을 탐사하며 아나콘다와 피라냐를 만나고, 귀뚜라미를 먹기도 한다. 정글을 돌아다니느라 두 아이들은 학교 수업을 종종 빠질 수밖에 없었겠지만 아마존에서 손에 진흙을 묻히고 새를 관찰하며 그녀의 두 아들은 자연을 직접 몸으로 느끼면서 배운다.

숲이야말로 지구 생태계 보전을 위한 심장부라고 생각한 로우먼은 열대림 보존 활동가, 등반가, 생태학자들과 우듬지건설협회라는 회사를 설립해 숲 보존에 대한 공감대를 세계적으로 확산하려는 노력을 기울인다. 그녀는 사모아, 페루, 플로리다 등의 열대우림에 숲 꼭대기를 볼 수 있는 산책로를 만들어 생태관광을 촉진하고, 카메룬 열대우림의 마을 속으로 직접 뛰어 들어가 지역 주민들이 스스로 숲을 지킬 수 있도록 교육한다.


마리아 라이헤, 비루테 갈디카스, 실비아 얼, 마거릿 로우먼은 여성이라는 제약을 벗고 사회적 통념과 맞서 싸운 남성적 투사였을 뿐만 아니라, 생태계를 보호하려는 위대한 모성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그들의 과학은 분석과 환원만을 과학의 모든 것으로 아는 남성적 과학과는 판이한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연구 대상을 가슴으로 껴안으려 했던 따스한 감성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이성은 감성의 부축을 받으며 세상을 더욱 깊이 껴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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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문화의 수수께끼 오늘의 사상신서 157
마빈 해리스 지음 / 한길사 / 199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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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문화의 수수께끼/마빈 해리스/한길사/2000년


문화는 일종의 습관이다. 김치문화는 우리의 먹는 습관이고, 한복은 우리의 옷 입는 습관이고, 장례문화는 우리의 죽음을 처리하는 습관이다. 영남에는 영남의 김치 문화가 있고 호남에는 호남의 김치문화가 있듯이 한 나라 안에서도 이 습관은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 사람들은 이 차이와 다름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문화에 대한 몰이해는 일차적으로 자신이 속한 문화를 기준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생긴다. 마빈 해리스의 『문화의 수수께끼』는 이 독선적 자기중심주의에서 벗어나는 데 큰 도움을 주는 책이다.

우리는 인도 농부들이 굶주리면서도 왜 암소를 잡아먹지 않는지 힌두교도들의 맹목적 신앙을 비난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비난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근시안적 태도다. 암소에게 어떤 신성한 종교적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럴 것이라는 판단도 섣부르다. 육식을 금하는 동양의 정신주의니 생명존중이니 하는 말들을 운운하는 사람들이 들으면 머쓱해질 정도로 마빈 해리스는 철저하게 그 원인을·물질적인 데서 찾는다. 먼저 트랙터와 같은 현대식 농기구를 살 여유가 없는 가난한 농민들에게 소는 유일한 농경 수단이다. 또한 암소에서 나오는 젖은 각종 유제품의 원료가 되고, 쇠똥은 비료와 연료로 사용된다. 이렇게 유용한 소를 당장의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잡아먹는다면 장기적으로 생계가 막연해진다. 마빈 해리스는 바로 여기에서 금기가 생겨난다고 말한다.

해리스는 이슬람교도나 유대인들, 그리고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지역 사람들이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이유도 설명한다. 돼지는 소처럼 풀만 먹고 살 수는 없고, 곡식을 주로 먹기 때문에 인간과 먹이를 두고 직접 경쟁한다. 또 돼지는 보호막 역할을 하는 털도 없고, 땀을 흘려 체온조절도 할 수 없기에, 깨끗한 진흙 속에 뒹굴어 체온을 조절해야 한다. 바로 이런 특성 때문에 건조한 중동의 기후에서는 먼 거리를 몰고 다니기가 힘들다. 이런 이유들로 해서 중동지방은 식용에 충족될 만큼의 돼지를 사육하기에는 생태학적으로 적절하지 않다. 소규모의 사육은 돼지고기에 대한 유혹만 크게 하므로 아예 돼지고기의 식용을 금지하고 양이나 염소 등을 치는 데 전력을 다했다는 것이다.

수렵과 채집에 의존하는 집단에게는 생태계가 지탱해줄 수 있는 적정한 인구수를 유지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생산 활동에 열중하다 보면 생태계가 황폐해져 결국에는 생산량이 줄어들게 된다. 이럴 경우 해결책은 영양공급을 줄이거나 인구를 줄이는 장치를 마련할 수밖에 없다. 이때 피임이나 낙태와 같은 안전장치가 없었던 원시인들의 제도화된 인구축소 수단이 금기와 규제와 전쟁, 유아살해 등이었다는 것이 마빈 해리스의 설명이다.

물론 유아살해가 옳은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을 야만적이라고 보지 말라고 저자는 주문하면서 효과적인 피임법과 낙태법이 개발되기 전에 얼마나 많은 아동살해가 자행되었는지, 18세기의 영국사를 들여다보라고 충고한다. 서구는 선이요, 비서구는 악이라는 등식이 고루한 편견임을 깨달으라는 석학의 매서운 질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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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은 권력이다
박정자 지음 / 기파랑(기파랑에크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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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시선은 권력이다/박정자/기파랑/2008년


확실히 현대는 이미지의 시대입니다. TV의 광고는 현란하기 그지없고, 인터넷에는 동영상과 그림 파일들이 넘쳐납니다. 거리의 쇼윈도를 가득 장식하고 있는 것들, 영화, 디자인과 건축 등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들은 대체로 시각적인 것들입니다. 음악을 듣는 MP3 재생기의 조그만 액정 화면으로도 동영상을 감상하고, 움직이는 차량에서도 TV 겸용 네비게이션 액정화면으로 스포츠 게임을 감상하기도 합니다. 자율학습 시간에 PMP로 동영상 강좌를 듣는 모습은 이제 낯선 풍경이 아닙니다. 이쯤 되면 우리는 확실히 현대를 ‘눈이 호사를 누리는 시대’라고 정의할 만하겠습니다.

그런데 눈이 무엇인가를 본다는 시각적 경험은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한 경험이 아닙니다. 똑같은 대상을 보여주고 당신은 무엇을 보았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그 대답이 각양각색이란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대상을 보는 사람의 취미와 성향과 세계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나무 한 그루를 보여준다고 하더라도 식물분류학자는 그 나무만이 가지는 독특한 결과 무늬에 주목하여 나무를 볼 것이고, 기술자는 그 쓰임새에 주목하여 나무를 볼 테지요. 화가는 나무가 가지는 순수한 형상 그 자체에 관심을 갖겠지요. 이렇게 동일한 시각적 대상을 보여주더라도 시각적 경험은 보는 사람에 따라 판이할 수가 있습니다.

시각적 경험은 시대에 따라 변해가기도 합니다. 그것은 각 시대가 가지고 있는 시대의 정신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하늘의 아버지와 땅의 어머니에서 비롯되었다는 믿음을 가졌던 신화의 시대에 한 그루 나무를 바라보는 방식과 생명이 유전자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하는 과학의 시대에 한 그루 나무를 바라보는 방식은 결코 같은 것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시각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문화현상이라고.

박정자의 『시선은 권력이다』는 시대에 따라 본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가를 탐구한 책입니다.

저자는 시선은 하나의 권력이라고 말합니다. 사회적 지위에 따라 볼 수 있는 정보가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보십시오. 최고의 권력자들만 볼 수 있는 일급정보도 있고, 모든 국민들이 열람해볼 수 있는 정보도 있을 테지요. 우리는 대체로 일등병에게는 일등병이 알아야 할 정보가 있고, 사단장에게는 사단장으로서 알아야할 정보가 있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입니다. 정보를 열람할 수 있는 기회가 그가 가지고 있는 권력에 따라 불평등하게 배분된다는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나는 볼 수 없는데, 너는 볼 수 있다,라는 사실에 매우 불공평하게 생각도 하게 됩니다.


중세 봉건 시대에 권력은 신체에 대한 잔인한 폭력이나 고문과 같은 공포의 행위로 자신의 존재를 과시했습니다. 권력에 고분고분하게 굴지 않으면 삼족을 멸하기도 했고, 무덤에서 시신을 꺼내어 훼손시키까지 했습니다. 한마디로 중세의 권력은 자신의 존재를 아주 떠들썩하게 과시했지요. 그러나 근대의 권력은 은밀하고 조용한 방식으로 자신의 권력을 드러냅니다.

시선의 관점에서 권력의 작동방식을 탐구한 이는 『감시와 처벌』의 저자 미셀 푸코입니다. 푸코는 고대 희랍 이래 서양 문명은 ‘다수가 한 사람을 보는 사회’였다고 말합니다. 사열식에서 수만 명의 병사가 왕 한 사람만을 바라보는 장면을 떠올려 보세요. 공개로 진행되는 신체형은 어떨까요. 이 역시 다수(군중)가 한 사람(권력자)의 권력의 행사방식을 지켜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근대에 오면 상황이 역전이 됩니다.(이를 저자는 ‘가시성의 역전’이라고 표현합니다.) ‘한 사람이 만인을 보는 것’, 이것이 근대 이후의 권력 행사의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만인은 한 사람을 볼 수 없지만, 한 사람은 만인을 볼 수 있는 이런 ‘시선의 비대칭성’이 근대의 권력을 설명해준다는 것이 시선과 권력의 관계에 대한 푸코의 매우 독창적인 해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선의 비대칭성을 가장 잘 구현한 것은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자 제레미 벤담의 판옵티콘입니다. 판옵티콘은 간수 한 사람이 죄수 전체를 다 볼 수 있는 원형감옥으로, 벤담이 1791년에 설계했다고 합니다. 중앙 감시탑에 있는 간수는 자신의 모습을 죄수들에게 보여주지 않으면서 죄수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수 있습니다. 판옵티콘의 중앙 감시탑에 감시자가 있는지 없는지 죄수들로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만약 감시자가 없다는 사실을 안다면 죄수들은 감옥 내에서 불법을 저지를 수도 있겠지만 판옵티콘의 구조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보는데 나는 볼 수 없다. 바로 이것이 시선의 불균형, 시선의 비대칭입니다. 이런 시선의 비대칭성은 또 다른 효과를 야기합니다. 감시자가 없어도 죄수들이 함부로 행동을 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를 통제하고 감시하는 상황 말입니다. 그것을 푸코는 감시하는 ‘시선의 내면화’라고 말합니다. 감시의 시선의 내면화되면 감시자는 중앙탑의 감시자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 되는 거지요.

감시당하는 자가 스스로를 감시하게 되면 감시의 비용은 훨씬 줄어들겠지요. 그러나 감시의 효과는 정점에 달할 것입니다. 근대의 권력은 이렇게 효율적이고 세련된 방식입니다. 제레미 벤담은 이 판옵티콘의 원리가 적용되면 도덕이 개혁되고, 건강이 보존되며, 산업이 활성화되며, 대중의 부담이 덜어지고, 경제가 반석에 오른다는 공리주의자다운 발언을 한 바도 있습니다.

감시의 내면화가 일어나는 사례를 더 열거해볼까요. 우리는 국기에 대해 경례를 소홀히 했을 때, 혹시 나는 애국자가 아닐까, 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스포츠에 관심이 없어 TV를 보지 않는데 우리나라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두고 겨루는 게임을 두고는 망설이게 됩니다. 결승전만은 봐줘야 하지 않을까. 북한의 주민들은 김일성의 사진이 실린 신문을 깔고 앉았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죄의식을 느낀다고 합니다. 이런 식의 죄의식을 누가 심어놓았을까요. 푸코의 답은 바로 ‘권력’입니다. 그러나 근대의 권력은 총과 칼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머리를 짧게 깎아라, 교복을 단정하게 입어라, 자주 손을 씻어라, 좌측으로 통행하라,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라, 국기에 대해 경계하라 등등, 스스로 감시를 내면화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규율을 우리에게 가르침으로써 권력의 시선을 내면화하게 만든 것입니다.

근대의 권력은 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공포를 주지 않으면서 인간의 몸을 통제할 방법을 찾습니다. 신체를 복종시키는 기술, 그것이 바로 규율입니다. 규율은 어떤 행동과 실천을 강요하는 지령의 성격을 지닌다는 점에서 일종의 권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푸코는 이를 ‘규율 권력’이리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규율을 가르치는 곳이 어디일까요. 바로 학교와 군대입니다. 학교와 군대처럼 이래라 저래라 하는 간섭이 많은 곳도 없습니다. 18세기에 확립된 군대행진의 규정에는 “좁은 걸음의 보폭에는 1피트 되는 것과, 보통걸음, 속보, 한쪽 발뒤꿈치에서 다른 쪽 발뒤꿈치 사이의 간격을 2피트로 하는 것 등이 있다. 또한 속도는 좁은 걸음과 보통 걸음일 경우 한 걸음에 1초로 하고 속보에서는 그 사이에 두 걸음을 걷는 것으로 하며, 행군보조의 속도는 한 걸음 당 1초를 약간 넘도록 한다.”라고 씌어 있다고 합니다. 또 ‘세워총’은 6박자, ‘옆에총’은 4박자, ‘거꾸로메어총’은 13박자 등으로 신체의 동작을 세밀화시켜 놓았다더군요. 왜 이토록 복잡한 규정을 두었을까요. 왜 몸짓과 동작의 정확도를 시간단위로 통제하려 했던 것일까요. 바로 인체의 미세한 분할동작들은 신체운동에서 최대한의 효율성을 끌어내기 위해서였습니다. 동일한 시간에 유용한 노동력을 좀 더 많이 끌어내려는 위한 것이었죠.

학교에서는 귀밑머리를 3 센티로 깎으라는 규정이 있습니다. 감옥에서는 기상 시간이 6시입니다. 푸코에 의하면 귀밑머리를 3센티로 깎아야 할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감옥의 기상시간이 굳이 6시가 되어야만 한다는 이유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왜 이런 규율을 만든 것일까요. 다만 그것을 지키도록 만드는 과정이 사람들을 통제하는 효과적인 수단이기 때문에 규율을 강제한다는 것입니다. 『시선은 권력이다』의 저자는 말합니다. “미세한 규칙들은 권력이 스며들어가는 모세혈관이다. 이것이 다름 아닌 근대의 규율권력이다.”라고.


오늘날의 전자 감시 체제는 판옵티콘을 발명한 벤담이 상상도 못할 정도입니다. 곳곳에 설치된 폐쇄회로(CC) TV는 우리를 24시간 감시합니다. 2006년 한 신문은 강남의 삼성동에서 명동까지 출근하는 직장인의 경우, 폐쇄회로 TV에 평균 39번 찍힌다는 보고를 한 바 있죠. 폐쇄회로 카메라 렌즈의 시선을 피한다 해도 우리는 여전히 감시의 시선 속에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무심코 주고받은 e-메일의 내용, 휴대폰의 통화 내역과, 은행거래 내역, 카드 결재 내역도 언젠가 나를 옭아맬 수 있다. 신용카드 기능이 있는 회사의 ID카드는 사원들을 감시하는 족쇄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카드를 사용하게 되면 상사들은 사원들이 음식점에서 밥을 먹는지, 신문 판매대에서 책이나 잡지를 사는지, 피트니스센터에서 운동을 하는지, 회사원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회사원의 음식취향과 독서취향까지도 훤히 알 수 있게 되죠. ID카드를 몸에 지니고 다니기만 해도 상사들은 맘만 먹으면 사원들이 일을 하는지, 화장실에 갔는지를 언제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원들이 몸에 부착하고 다니는 ID 카드가 중앙의 컨트롤 타워에 연결돼 있어 사원의 움직임을 중앙의 컴퓨터가 인식하기 때문이죠.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사면 운영자의 컴퓨터는 구매자의 독서취향을 분석하고, 인터넷쇼핑몰에서 음반을 사면 운영자의 컴퓨터는 구매자의 음악취향을 즉시 분석합니다. 인터넷의 시대, 클릭 하나로 지구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과 채팅을 하고 이메일을 주고받는 자유로운 시대라고 하지만 실은 전방위에서 24시간 내내 감시당하며 살고 있는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개인들은 기업의 멤버십 카드 혜택을 얻기 위해 자발적으로 신상 정보를 제공하죠. 강제가 아니라 협력으로 이뤄지는 통제의 네트워크가 바로 현대사회의 특징이니까요.

저자는 ‘가시성의 역전 현상’이란 개념으로 이를 설명합니다. 푸코의 시대에는 ‘바라볼 수 있다는 것’ 곧 가시성이 권력이었다면 요즘에는 ‘바라봄’과 ‘바라보여짐’이 서로 거부감 없이 상호작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현대사회에서는 정치인이나 연예인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무대 위 혹은 TV 화면에서 많은 사람의 시선을 받는 사람이 권력이고, 무대 밑 혹은 TV 옆에서 시선을 보내는 다수는 힘없는 보통 사람들이다. 언론에 노출이 많이 되는 사람, 다수에게 바라보여지는 사람이 힘있는 사람이다.”라고. 푸코의 권력이론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오늘날의 상황이라는 말입니다. 저자는 현대사회는 감시사회라고 할 수도 없고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정신분열적 상황이라고 말하면서 감시의 권력이 더욱 교묘해지고 있는 전자시대에 개인이 감시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감시당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때 권력도 감시를 함부로 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타인의 시선 앞에 내 알몸을 송두리째 맡기는 것이나 내 정보를 누군가에게 전적으로 제공하는 것이나 내 존엄성을 스스로 포기하는 행위가 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프라이버시는 내 존엄성의 근거가 될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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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식 예찬
에비사와 야스히사 지음, 김석중 옮김 / 서커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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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것이 인간의 품위를 말해준다


왜 인간은 달고 기름진 것을 좋아할까?

“좋은 약은 입에는 쓰나 병에 이롭고, 바르게 타이르는 말은 귀에는 거슬리나 행실에는 이 롭다.(良藥苦於口 忠言逆於耳)”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단 것을 좋아하고 쓴 것을 싫어합니다. 어렸을 때를 떠올려 보세요. 쓴 약을 단맛이 나는 시럽에 타서 먹지는 않았던가요. 쓴 맛이 나는 커피는 대게 설탕을 타서 마시는 것을 보게 되죠.

자 왜 이렇게 사람들은 단 것을 좋아하고 쓴 것을 싫어하게 되었을까요? 왜 인간이 단 것에 긍정적으로 반응하게 되었느냐는 말이죠?

생물학자들은 인간이 단 것을 좋아하고 기름진 것을 좋아하도록 설계되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먹은 음식을 위와 장에서 소화하여 흡수합니다. 그 중에 포도당은 열이나 에너지를 만드는 데 꼭 필요하지요. 특히 우리의 뇌는 포도당을 에너지원으로 사용합니다. 몸 전체에서 쓰는 포도당의 1/4을 뇌가 혼자 사용한다고 합니다. 포도당은 생명의 중추인 뇌의 에너지원입니다. 따라서 우리 몸에서 꼭 필요한 포도당을 좋아하는 성질을 가지고 태어나도록 인간은 진화되었던 것이지요. 아직 맛을 모르는 갓난아기도 단맛이 나는 분유를 모유보다 잘 먹는다고 합니다.

단맛을 구성하는 포도당은 우리 몸에 들어와 쓰이고 나서 그냥 버려지지 않습니다. 쓰이고 난 포도당은 모아져 지방으로 바뀌어 몸에 저장이 되지요. 환경이 바뀌어 음식물을 구할 수 없을 때 지방을 분해해서 임시에너지로 사용할 수 있으니 지방은 참으로 고마운 존재가 아닐 수 없었겠죠. 그러니 지금으로부터 수 십만 년 전 달고 기름진 것을 좋아하는 유전자를 가진 원시인은 그것을 가지지 못한 원시인보다 훨씬 더 생존에 유리했겠지요. 자연은 바로 이런 존재를 선택했을 것이구요.

유전자가 지방을 에너지 저장원으로 택한 이유도, 지방은 1g당 9kcal 의 에너지를 저장할 수 있어서 1g당 4kcal 밖에 내지 못하는 탄수화물이나 단백질에 비해 에너지 효율이 훨씬 높기 때문이기도 하죠. 한정된 육체 속에 더 많은 에너지를 저장하려면 당연히 에너지효율이 높은 방식을 선택해야 했고, 생존을 위해 이 지방을 몸 속 저장하는 것이 진화적으로 유리한 전략이었을 테지요.

이렇게 달고 기름진 것을 좋아하도록 설계된 인간은 먹을거리가 부족했던 원시시대에는 살아남기 유리했겠지만 먹을거리가 풍족해진 오늘날에는 뚱보의 운명을 껴안을 수밖에 없을거예요.

그러면 인간이 일반적으로 쓴 것을 피하는 것은 왜일까요.

식물들은 초식동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전략으로 화학물질을 분비합니다. 식물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분비하는 화학물질, 즉 일종의 ‘독소’의 맛이 어떤 맛일까요. 바로 쓴맛입니다. 초식동물들이 식물을 뜯어먹으려고 할 때 식물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동물들에게 ‘쓴맛’을 보여주면 동물들은 더 이상 먹지를 않겠죠. 식물의 쓴맛은 그 식물이 독성을 가지고 있다는 신호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구역질이 썩은 고기로부터 우리의 몸을 보호하듯 쓴맛을 거부하는 미각시스템은 식물의 독성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자는 남자보다 미각이 발달해 있고 특히 쓴맛에 민감하다는 연구결과도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여성은 배 속에 있는 태아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쓴맛에 민감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연구결과에 의하면 여성들은 임신할 수 있는 시기, 즉 사춘기에 접어들면 쓴맛을 더 잘 느끼게 되고 특히 임신 중에 민감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결국 쓴맛을 거부하는 것은 독성을 피하려는 진화적 전략이라고 할 수 있겠죠.

담백하지 않은 맛이 왜 건강을 망칠까?

홍자성의 책, 『채근담』에는 이런 구절이 등장합니다. “진한 술, 기름진 고기 맵고 단 것은 참맛이 아니요, 참맛은 오직 담백하다. (농비신감 비진미, 진미 지시담 膿肥辛甘 非眞味, 眞味 只是淡)”라는 구절이 그것이죠.” 왜 담백한 맛이 참맛이냐고 묻는다면 답이 궁합니다. 담백한 맛이 진화적으로 인간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특별히 담백한 맛을 참맛이라고 결론을 내리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담백하지 않은 맛, 가령 기름진 맛, 단맛, 짠맛은 확실히 몸에 나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달고 짜고, 기름진 음식이 심장병을 유발한다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일이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장에는 달고 기름진 것들이 넘쳐납니다. 건강에 좋지 않은 음식들이 왜 이렇게 넘쳐날까요? 헬렌 니어링과 스코트 니어링의 책 『조화로운 삶』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먹을거리의 어떤 부분을 없애고, 어떤 부분은 남길지 결정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은 이윤을 남길 가능성이다. 이윤을 얻으려면 사람들의 눈에 띄어야 하고 사람들의 입맛을 당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먹을거리를 많이 팔 수 없다. 또한 팔려는 제품은 좋은 품질을 간직한 채로 시장에 나가야 되고, 시장에서 손님이 고를 때까지 가장 보기 좋은 모양으로 무한정 대기하고 있어야 한다. 요리된 음식이 소비자들의 밥상에 오르기까지는 단순히 몇 시간이나 며칠이 아니라, 몇 주, 몇 달이 걸려야 한다. 농산물이 이리저리 돌다가 생산자로부터 소비자에게 가는 동안, 이 농산물을 보존하려면 엄청나게 높거나 낮은 온도가 필요하다. 특히 썩거나 상하기 쉬운, 그래서 상품성을 떨어뜨릴 수 있는 성분은 마땅히 제거된다. 비록 그 성분이 건강에 중요하더라도 말이다. 식료품을 만드는 기준은 시장에서 갖는 상품성이지, 소비자의 건강이 아니다.”

자본주의 시장에서 식료품업자들의 관심은 소비자의 건강이 아니라 이익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을 누가 먹느냐는 신경 쓰지 않고 그것을 통해서 얼마를 벌 수 있느냐에만 관심을 쏟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보는 하얗게 정제된 밀가루를 생각해보세요. 단백질, 무기질과 같은 영양분은 낟알의 씨눈과 껍질에 있지만 밀가루를 만드는 제분업자들은 이런 상식을 무시하죠. 조금만 씹어도 삼킬 수 있는 더 가벼운 빵과 과자를 만들게 하기 위해 제분업자들은 곡식의 낟알에서 씨눈과 껍질을 없애고.,밀가루가 희게 보일 수 있도록 몸에 좋지 않은 표백제를 사용해 밀가루를 희게 만듭니다. 그런 밀가루는 보기는 좋아서 상품가치는 높아질지 모르지만 결코 몸에 좋은 밀가루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바로 이것이 오늘날 식품산업의 냉정한 현실입니다. 사람의 몸에 좋든 말든 일단 이익부터 생각하자는 이기심이 얼마 전 ‘멜라민 사태’를 야기하지 않았습니까?

어떻든 원시시대에는 몰라도 음식물이 풍부해진 오늘날 담백하지 않은 맛, 즉 달고 기름진 맛은 인간의 건강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미국 필라델피아에 위치한 모넬 케미살 센스 센터의 조사에 따르면 유아기에 쓴맛, 신맛에 길든 아이들은 몇 년이 지난 뒤에도 다른 아이들에 비해 쓴맛과 신맛을 훨씬 즐기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의 식습관이 나이를 먹어서도 고착된다는 것이죠. 예전과는 달리 오늘날에는 아이들이 엄청난 과자를 소비합니다. 멜라민 사태로 인해서 과자 소비량이 주춤하고 있지만 대형마트에 가보면 엄청난 량의 과자가 쌓여있습니다. 바로 그 과자들을 만든 제과업자들이 진정으로 아이들의 건강을 고려하고 있을까요?

스코트 니어링과 헬렌 니어링의 책은 말합니다. “많은 밀가루와 빵에는 인, 불소, 규소, 백반, 니코틴산. 브롬산 칼슘과 그밖에도 스무 가지가 넘는 다른 독성 약품이 들어 있다. 빵집에서 만드는 빵도 다른 많은 가공 식품들과 똑같기 때문에 소비자들의 돈뿐 아니라 건강까지 희생시켜 가면서, 화학약품과 그 대체물질을 만들어서 먹고사는 사람들에게 많은 이익을 준다.” 책의 저자들이 살았던 시대에 비해 오늘날의 시대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식욕은 개체보존의 에너지고 성욕은 종족보존의 에너지입니다. 욕망은 탐욕일 때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탐욕은 남을 해치는 욕망입이지만 진정한 욕망은 개인과 인류 발전의 에너지입니다. 먹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 개인의 생명을 부지시켜줍니다. 그 욕망이 인류를 이어가게 하는 힘입니다. 그런데 자본에 대한 욕망, 이익에 대한 욕망은 개체보존에도, 종족보존에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오직 자본의 확대재생산에만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사람의 사람됨을 말해주는 음식문화

『미식 예찬』을 쓴 장 앙텔므 브리야 사바랭은 말합니다. “피로를 동반하지 않는 유일한 쾌락은 먹는 즐거움”이며, “새로운 요리의 발견은 새로운 천체의 발견보다 인류의 행복에 더 큰 기여를 한다.”라고. 먹는 즐거움은 무엇에 비할 수 없는 행복입니다. 그런데 먹는 행위는 단지 배고픔만을 채우는 행위, 영양만을 섭취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인간은 먹되 인간답게 먹습니다. 허겁지겁 빈 배를 채우기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창자만 채우면 된다고 하면 햄스터처럼 인간은 동족을 잡아먹을 수도 있겠죠. 끔찍한 일입니다.

자연은 인간에게 먹어야 할 것과 먹지 않을 것을 엄격하게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잡식동물입니다. 인간만큼 이거저거 가리지 않고 먹어대는 존재가 또 있을까요. 먹을 것에 대한 인간의 끊임없는 욕망을 통제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다양한 금기, 관습, 의식, 식택 예절과 요리문화입니다. 인간의 식욕을 통제하는 가치 있는 문화가 없다면 인간은 가장 불결하고 사악한 동물이 될 수도 있었을 거예요. 제사음식은 제사를 끝내기 전에 건드리면 안 된다. 어른이 먼저 드시고 나서 먹어라, 국물을 소리내어 먹지 마라, 먹는 것 가지고 장난치지 마라, 먹을 만큼만 먹고 음식 쓰레기를 남기지 마라, 밥상머리에서 싸우지 마라 등과 같은 것이 바로 인간의 식욕을 통제하는 문화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런데 오늘날의 음식문화를 찬찬히 살펴보세요. 과연 거기에 인간다운 품위가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국립국어원이 제공하는 표준국어대사전은 ‘음식’을 ‘사람이 먹을 수 있도록 만든, 밥이나 국 따위의 물건’이라고 정의합니다. 멜라민 과자, 기생충 김치 같이 중국에서 만들어진 제품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국내에서 만들어지고 유통되는 모든 음식은 과연 ‘사람이 먹을 수 있도록 만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요.

『차라리 아이를 굶겨라』라는 책에는 아이들의 건강을 해치는 음식 39가지가 정리되어 있습니다. 그 책의 내용이 과장이든 아니든 오늘날 상업적으로 거래되는 음식물들은 분명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농약이든 채소와 과일, 색소와 향료 등 인공적인 화학물로 범벅이 된 과자, 성장호르몬으로 키운 가축, 동물성 사료를 먹여 키운 소 등 음식의 문제점들은 이루 열거하기가 힘들 정도입니다.

밤에 벌레가 있는 복숭아를 먹어도 맛있게 먹는 법입니다. 그러나 낮에는 다릅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도 마찬가지겠죠. 음식의 실상을 알고도 과연 식탁에서 먹는 즐거움이 유지할 수 있을까요. “친구들을 초대하고서 식사준비에 아무런 정성을 기울이지 않는 사람은 친구를 사귈 자격이 없다.”라고 『미식 예찬』의 저자, 장 앙텔므 브리야 사바랭은 말합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에 정성을 기울이지 않는 사람은 장사치라고는 할 수 있어도 우리의 친구일 수는 없겠지요. 우리를 친구처럼 대해주는 사람의 음식을 먹고 싶은 것, 이것은 비단 저 하나만의 소원은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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