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은 권력이다
박정자 지음 / 기파랑(기파랑에크리) / 200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권력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시선은 권력이다/박정자/기파랑/2008년


확실히 현대는 이미지의 시대입니다. TV의 광고는 현란하기 그지없고, 인터넷에는 동영상과 그림 파일들이 넘쳐납니다. 거리의 쇼윈도를 가득 장식하고 있는 것들, 영화, 디자인과 건축 등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들은 대체로 시각적인 것들입니다. 음악을 듣는 MP3 재생기의 조그만 액정 화면으로도 동영상을 감상하고, 움직이는 차량에서도 TV 겸용 네비게이션 액정화면으로 스포츠 게임을 감상하기도 합니다. 자율학습 시간에 PMP로 동영상 강좌를 듣는 모습은 이제 낯선 풍경이 아닙니다. 이쯤 되면 우리는 확실히 현대를 ‘눈이 호사를 누리는 시대’라고 정의할 만하겠습니다.

그런데 눈이 무엇인가를 본다는 시각적 경험은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한 경험이 아닙니다. 똑같은 대상을 보여주고 당신은 무엇을 보았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그 대답이 각양각색이란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대상을 보는 사람의 취미와 성향과 세계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나무 한 그루를 보여준다고 하더라도 식물분류학자는 그 나무만이 가지는 독특한 결과 무늬에 주목하여 나무를 볼 것이고, 기술자는 그 쓰임새에 주목하여 나무를 볼 테지요. 화가는 나무가 가지는 순수한 형상 그 자체에 관심을 갖겠지요. 이렇게 동일한 시각적 대상을 보여주더라도 시각적 경험은 보는 사람에 따라 판이할 수가 있습니다.

시각적 경험은 시대에 따라 변해가기도 합니다. 그것은 각 시대가 가지고 있는 시대의 정신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하늘의 아버지와 땅의 어머니에서 비롯되었다는 믿음을 가졌던 신화의 시대에 한 그루 나무를 바라보는 방식과 생명이 유전자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하는 과학의 시대에 한 그루 나무를 바라보는 방식은 결코 같은 것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시각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문화현상이라고.

박정자의 『시선은 권력이다』는 시대에 따라 본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가를 탐구한 책입니다.

저자는 시선은 하나의 권력이라고 말합니다. 사회적 지위에 따라 볼 수 있는 정보가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보십시오. 최고의 권력자들만 볼 수 있는 일급정보도 있고, 모든 국민들이 열람해볼 수 있는 정보도 있을 테지요. 우리는 대체로 일등병에게는 일등병이 알아야 할 정보가 있고, 사단장에게는 사단장으로서 알아야할 정보가 있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입니다. 정보를 열람할 수 있는 기회가 그가 가지고 있는 권력에 따라 불평등하게 배분된다는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나는 볼 수 없는데, 너는 볼 수 있다,라는 사실에 매우 불공평하게 생각도 하게 됩니다.


중세 봉건 시대에 권력은 신체에 대한 잔인한 폭력이나 고문과 같은 공포의 행위로 자신의 존재를 과시했습니다. 권력에 고분고분하게 굴지 않으면 삼족을 멸하기도 했고, 무덤에서 시신을 꺼내어 훼손시키까지 했습니다. 한마디로 중세의 권력은 자신의 존재를 아주 떠들썩하게 과시했지요. 그러나 근대의 권력은 은밀하고 조용한 방식으로 자신의 권력을 드러냅니다.

시선의 관점에서 권력의 작동방식을 탐구한 이는 『감시와 처벌』의 저자 미셀 푸코입니다. 푸코는 고대 희랍 이래 서양 문명은 ‘다수가 한 사람을 보는 사회’였다고 말합니다. 사열식에서 수만 명의 병사가 왕 한 사람만을 바라보는 장면을 떠올려 보세요. 공개로 진행되는 신체형은 어떨까요. 이 역시 다수(군중)가 한 사람(권력자)의 권력의 행사방식을 지켜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근대에 오면 상황이 역전이 됩니다.(이를 저자는 ‘가시성의 역전’이라고 표현합니다.) ‘한 사람이 만인을 보는 것’, 이것이 근대 이후의 권력 행사의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만인은 한 사람을 볼 수 없지만, 한 사람은 만인을 볼 수 있는 이런 ‘시선의 비대칭성’이 근대의 권력을 설명해준다는 것이 시선과 권력의 관계에 대한 푸코의 매우 독창적인 해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선의 비대칭성을 가장 잘 구현한 것은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자 제레미 벤담의 판옵티콘입니다. 판옵티콘은 간수 한 사람이 죄수 전체를 다 볼 수 있는 원형감옥으로, 벤담이 1791년에 설계했다고 합니다. 중앙 감시탑에 있는 간수는 자신의 모습을 죄수들에게 보여주지 않으면서 죄수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수 있습니다. 판옵티콘의 중앙 감시탑에 감시자가 있는지 없는지 죄수들로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만약 감시자가 없다는 사실을 안다면 죄수들은 감옥 내에서 불법을 저지를 수도 있겠지만 판옵티콘의 구조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보는데 나는 볼 수 없다. 바로 이것이 시선의 불균형, 시선의 비대칭입니다. 이런 시선의 비대칭성은 또 다른 효과를 야기합니다. 감시자가 없어도 죄수들이 함부로 행동을 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를 통제하고 감시하는 상황 말입니다. 그것을 푸코는 감시하는 ‘시선의 내면화’라고 말합니다. 감시의 시선의 내면화되면 감시자는 중앙탑의 감시자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 되는 거지요.

감시당하는 자가 스스로를 감시하게 되면 감시의 비용은 훨씬 줄어들겠지요. 그러나 감시의 효과는 정점에 달할 것입니다. 근대의 권력은 이렇게 효율적이고 세련된 방식입니다. 제레미 벤담은 이 판옵티콘의 원리가 적용되면 도덕이 개혁되고, 건강이 보존되며, 산업이 활성화되며, 대중의 부담이 덜어지고, 경제가 반석에 오른다는 공리주의자다운 발언을 한 바도 있습니다.

감시의 내면화가 일어나는 사례를 더 열거해볼까요. 우리는 국기에 대해 경례를 소홀히 했을 때, 혹시 나는 애국자가 아닐까, 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스포츠에 관심이 없어 TV를 보지 않는데 우리나라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두고 겨루는 게임을 두고는 망설이게 됩니다. 결승전만은 봐줘야 하지 않을까. 북한의 주민들은 김일성의 사진이 실린 신문을 깔고 앉았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죄의식을 느낀다고 합니다. 이런 식의 죄의식을 누가 심어놓았을까요. 푸코의 답은 바로 ‘권력’입니다. 그러나 근대의 권력은 총과 칼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머리를 짧게 깎아라, 교복을 단정하게 입어라, 자주 손을 씻어라, 좌측으로 통행하라,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라, 국기에 대해 경계하라 등등, 스스로 감시를 내면화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규율을 우리에게 가르침으로써 권력의 시선을 내면화하게 만든 것입니다.

근대의 권력은 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공포를 주지 않으면서 인간의 몸을 통제할 방법을 찾습니다. 신체를 복종시키는 기술, 그것이 바로 규율입니다. 규율은 어떤 행동과 실천을 강요하는 지령의 성격을 지닌다는 점에서 일종의 권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푸코는 이를 ‘규율 권력’이리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규율을 가르치는 곳이 어디일까요. 바로 학교와 군대입니다. 학교와 군대처럼 이래라 저래라 하는 간섭이 많은 곳도 없습니다. 18세기에 확립된 군대행진의 규정에는 “좁은 걸음의 보폭에는 1피트 되는 것과, 보통걸음, 속보, 한쪽 발뒤꿈치에서 다른 쪽 발뒤꿈치 사이의 간격을 2피트로 하는 것 등이 있다. 또한 속도는 좁은 걸음과 보통 걸음일 경우 한 걸음에 1초로 하고 속보에서는 그 사이에 두 걸음을 걷는 것으로 하며, 행군보조의 속도는 한 걸음 당 1초를 약간 넘도록 한다.”라고 씌어 있다고 합니다. 또 ‘세워총’은 6박자, ‘옆에총’은 4박자, ‘거꾸로메어총’은 13박자 등으로 신체의 동작을 세밀화시켜 놓았다더군요. 왜 이토록 복잡한 규정을 두었을까요. 왜 몸짓과 동작의 정확도를 시간단위로 통제하려 했던 것일까요. 바로 인체의 미세한 분할동작들은 신체운동에서 최대한의 효율성을 끌어내기 위해서였습니다. 동일한 시간에 유용한 노동력을 좀 더 많이 끌어내려는 위한 것이었죠.

학교에서는 귀밑머리를 3 센티로 깎으라는 규정이 있습니다. 감옥에서는 기상 시간이 6시입니다. 푸코에 의하면 귀밑머리를 3센티로 깎아야 할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감옥의 기상시간이 굳이 6시가 되어야만 한다는 이유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왜 이런 규율을 만든 것일까요. 다만 그것을 지키도록 만드는 과정이 사람들을 통제하는 효과적인 수단이기 때문에 규율을 강제한다는 것입니다. 『시선은 권력이다』의 저자는 말합니다. “미세한 규칙들은 권력이 스며들어가는 모세혈관이다. 이것이 다름 아닌 근대의 규율권력이다.”라고.


오늘날의 전자 감시 체제는 판옵티콘을 발명한 벤담이 상상도 못할 정도입니다. 곳곳에 설치된 폐쇄회로(CC) TV는 우리를 24시간 감시합니다. 2006년 한 신문은 강남의 삼성동에서 명동까지 출근하는 직장인의 경우, 폐쇄회로 TV에 평균 39번 찍힌다는 보고를 한 바 있죠. 폐쇄회로 카메라 렌즈의 시선을 피한다 해도 우리는 여전히 감시의 시선 속에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무심코 주고받은 e-메일의 내용, 휴대폰의 통화 내역과, 은행거래 내역, 카드 결재 내역도 언젠가 나를 옭아맬 수 있다. 신용카드 기능이 있는 회사의 ID카드는 사원들을 감시하는 족쇄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카드를 사용하게 되면 상사들은 사원들이 음식점에서 밥을 먹는지, 신문 판매대에서 책이나 잡지를 사는지, 피트니스센터에서 운동을 하는지, 회사원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회사원의 음식취향과 독서취향까지도 훤히 알 수 있게 되죠. ID카드를 몸에 지니고 다니기만 해도 상사들은 맘만 먹으면 사원들이 일을 하는지, 화장실에 갔는지를 언제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원들이 몸에 부착하고 다니는 ID 카드가 중앙의 컨트롤 타워에 연결돼 있어 사원의 움직임을 중앙의 컴퓨터가 인식하기 때문이죠.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사면 운영자의 컴퓨터는 구매자의 독서취향을 분석하고, 인터넷쇼핑몰에서 음반을 사면 운영자의 컴퓨터는 구매자의 음악취향을 즉시 분석합니다. 인터넷의 시대, 클릭 하나로 지구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과 채팅을 하고 이메일을 주고받는 자유로운 시대라고 하지만 실은 전방위에서 24시간 내내 감시당하며 살고 있는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개인들은 기업의 멤버십 카드 혜택을 얻기 위해 자발적으로 신상 정보를 제공하죠. 강제가 아니라 협력으로 이뤄지는 통제의 네트워크가 바로 현대사회의 특징이니까요.

저자는 ‘가시성의 역전 현상’이란 개념으로 이를 설명합니다. 푸코의 시대에는 ‘바라볼 수 있다는 것’ 곧 가시성이 권력이었다면 요즘에는 ‘바라봄’과 ‘바라보여짐’이 서로 거부감 없이 상호작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현대사회에서는 정치인이나 연예인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무대 위 혹은 TV 화면에서 많은 사람의 시선을 받는 사람이 권력이고, 무대 밑 혹은 TV 옆에서 시선을 보내는 다수는 힘없는 보통 사람들이다. 언론에 노출이 많이 되는 사람, 다수에게 바라보여지는 사람이 힘있는 사람이다.”라고. 푸코의 권력이론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오늘날의 상황이라는 말입니다. 저자는 현대사회는 감시사회라고 할 수도 없고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정신분열적 상황이라고 말하면서 감시의 권력이 더욱 교묘해지고 있는 전자시대에 개인이 감시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감시당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때 권력도 감시를 함부로 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타인의 시선 앞에 내 알몸을 송두리째 맡기는 것이나 내 정보를 누군가에게 전적으로 제공하는 것이나 내 존엄성을 스스로 포기하는 행위가 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프라이버시는 내 존엄성의 근거가 될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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