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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세계에 첫 발을 내딛다 ㅣ 여성이 세상을 바꾸다 1
박현주.신명철 지음 / 낮은산 / 2007년 1월
평점 :
네 명의 여성과학자가 보여준 남성적 냉철함과 여성적 따스함
미지의 세계에 첫발을 내딛다/박원주, 신명철/낮은산/2007
낮에만 활동하는 주행성 동물과 밤에만 활동하는 야행성 동물, 그리고 밤낮 가리지 않고 활동하는 동물이 있다고 하자. 누가 생존에 유리할까. 당연히 밤낮 가리지 않고 활동하는 동물이다. 이야기를 달리해서 여성적 성격을 가진 사람과 남성적 성격을 가진 사람, 그리고 남성과 여성의 성격을 모두 가진 사람이 있다고 하자. 누가 생존에 유리할까. 바로 남성성과 여성성을 모두 가진 사람이다. 심리학자 산드라 벰(Sandra Bem)은 남성성과 여성성은 서로 상반되거나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이 두 특성이 한 사람 안에서 얼마든지 공존할 수 있으며, 그 둘 사이의 균형의 정도는, 각 개인의 성격이 다양한 것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질 수 있음을 밝혀낸 바 있다. 남성적 특성만 혹은 여성적 특성만 지니고 있는 사람에 비하여 남성적 특성과 여성적 특성을 모두 지니고 있는 사람은 훨씬 더 다양한 자극에 대하여 다양한 반응을 보일 수 있다. 굳세게 대처해야 할 때는 굳세게, 부드럽게 대처해야 할 때는 부드럽게, 그때그때의 상황의 요구에 따라 적합한 반응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이 소위 ‘양성성’을 겸비한 사람의 장점이다.
『미지의 세계에 첫발을 내딛다』가 소개하는 네 명의 여성 과학자 마리아 라이헤, 비루테 갈디카스, 실비아 얼, 마거릿 로우먼은 남성적 의지의 담대함과 모성의 따스함을 보여분다. 책의 저자(박현주, 신명철)가 말하고 있듯 “누구도 알아주지 않지만 자신의 일에 온몸을 바친 사람. 그 일을 하면서 세상의 진실과 삶의 의미를 깨달은 사람. 열정과 끈기로 뚜벅뚜벅 내딛다보니 어느새 세상의 중심에서 외치고 있는 사람.”이 바로 책이 소개하는 네 명의 여성과학자다. 그들은 모두 새로운 미지의 세계를 개척함으로써 ‘개척’이라는 어휘가 여성을 위한 수식어가 될 수도 있음을 보여주었다. 마리아 라이헤는 불모의 땅 나스카 사막을 연구하였고, 비루테 갈디카스는 보르네오 정글에서 오랑우탄을 연구했고, 실비아 얼은 남성학자들도 도전하기 어려운 바다 생태계를 연구 대상으로 삼았으며, 마거릿 로우먼은 로프를 타고 올라가 나무의 꼭대기인 우듬지를 연구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 그들은 여성의 몸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열었고, 결국 세상의 중심에 우뚝 서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을 미개척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것은 성공에 대한 야망이 아니었다. 자신의 영역을 넓혀보겠다는 식민주의적 야심도 아니었다. 불모의 사막에서 50년 넘게 나스카 문양 연구를 하며 일생을 보낸 마리아 라이헤는 그녀의 학문적 출발이 어디에 있는가를 분명히 말해준다. “어리석게도 우리 인간은 눈에 보이지 않고, 쉽게 알 수 없는 것들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지요. 그것이 바로 사막의 문양들이 그토록 오랜 세월 인간의 관심 밖에 머물 수 있었던 까닭입니다. 하지만 나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아직은 숨겨져 있지만 앞으로 그 진가를 드러낼 무엇인가를 찾고 발견하는 과정 그 자체에서 무한한 희열을 느낄 수 있었어요.” 발견의 과정, 그 자체가 그녀에게는 희열이었다.
남아메리카 페루 남부의 태평양 연안과 안데스 산맥의 기슭 사이에 있는 나스카 평원에는 기이한 선들과 마치 거인의 손으로 그린 듯한 도형들과 거대한 새들과 짐승 등 약 100여 개의 그림들이 펼쳐져 있다. 어떤 사람들은 아주 먼 옛날 지구를 찾아 온 외계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과 만나서 이 그림을 그렸을 것이라고 아무런 근거도 없이 상상했다. 독일의 여류 수학자이며 천문학자인 마리아 라이헤 박사는 이곳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했다. 마리아 박사는 나스카 평원을 샅샅이 훑으며 여러 가지 모양을 이루는 직선 하나하나에 대해 세밀히 조사하고 그것을 '세계 최대의 천문력'이라고 주장했다. 그녀의 주장은 여성적 끈질김과 섬세함의 결과였다.
마리아 라이헤는 95년이라는 긴 삶 중 3분의 2 이상을 페루에 있는 나스카 대평원을 지키고 연구하는데 바쳤으며, 바로 그곳에서 삶을 마쳤다. 그녀는 나스카에서 26년간 거의 극빈층에 가까운 생활을 하면서도, 나스카 대평원의 그 거대한 문양과 상징들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측량하고 도면에 옮겼다. 그녀는 나스카 대평원의 문양을 촬영하기 위해, 헬기 아랫부분의 착륙대에 널빤지를 놓고서 그곳에 올라서서 몸을 헬기에 묶은 채 수직 방향으로 나스카 대평원을 촬영하기도 했다. 그런 강철 같은 의지로 그녀는 나스카 문양을 지키려는 데에도 모성적 헌신을 다했다. 1955년 당시 페루 정부는 안데스 산맥 동쪽의 아마존 강의 물을 끌어와 나스카 대평원에 관개하려는 계획을 세웠는데, 그녀는 그녀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그 계획을 실행 직전에 무산시켰다.
비루테 갈디카스, 그녀는 25살이라는 나이에 보르네오 열대우림 속에 들어가 지금까지 30년 이상을 야생 오랑우탄 연구에 힘쓰고 있다. 집단별로 무리를 지어 다니는 침팬지나 고릴라와 달리 오랑우탄은 다른 오랑우탄과 한 번도 만나지 않고 한 달 이상을 지내기도 한다. 그러한 오랑우탄의 특성 때문에 그녀의 연구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특히 수오랑우탄은 일단 어미로부터 독립하면 철저히 혼자 생활하기 때문에 오랑우탄을 찾아나서는 일은 쉽지 않았다. 오랑우탄이 도구를 사용하는 모습을 8년 만에 처음으로 발견한 것도 그런 오랑우탄의 습성 때문이었다. 오랑우탄을 찾기 위해서 갈디카스는 어깨 밑까지 닿는 밀림을 헤치며 다녀야 했다. 어떤 날은 양말과 속옷에서 피를 빨아먹고 몸이 퉁퉁 불은 거머리가 떨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독사와 독충이 우글거리는 밀림의 어떤 시련도 그녀를 막지 못했다. 첫 번째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문명사회로 돌려보내면서까지 그녀는 밀림에 남는다. 그러나 사랑하는 아들과의 이별에 따르는 슬픔과 고독도 그녀를 막지 못했다. 오히려 그녀는 생명의 기운이 넘치는 열대우림 속으로 더욱 깊이 들어간다.
사막을 지키려고 했던 마리아 라이헤가 그랬듯이 그녀도 오랑우탄 보호에 앞장선다. 당시에 오랑우탄은 애완용으로 포획되어 점점 그 수가 줄어들고 있었고, 밀림의 개발은 오랑우탄의 서식지를 더욱 좁게 만들었다. 비루테 갈디카스는 오랑우탄의 불법거래를 막는 활동을 펼쳐보지만 그녀는 곧 그것이 오랑우탄을 지키는 최선의 방법이 아님을 깨닫는다. 열대우림을 지키는 것이 곧 오랑우탄을 지키는 근본적인 대책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녀는 보르네오 현지인과 재혼해 인도네시아인으로 귀화해 지금도 오랑우탄과 오랑우탄의 서식지인 열대우림을 보호하는 데 힘쓰고 있다.
“대양을 위협하는 그 어떤 문제점들보다 우리가 ‘모른다’는 것이 가장 커다란 위험일 수 있습니다. 알게 되면 돌보게 되고, 돌보게 되면 희망이 생깁니다. 우리 자신과 우리 아이들, 그리고 바다를 위한 지속가능한 미래를 보장할 대양의 도덕이라는 희망이 생길 겁니다.”라고 말하는 실비아 얼은 바다 생태계 연구의 선구자다. 그녀는 1968년 ‘딥다이버’라는 잠수정을 타고 세계 최초로 바다 속 18미터에서 14시간을 지내는 실험을 성공하기도 한다. 그녀는 해양학자로도 명성을 얻었지만 여러 잠수정 등 다양한 탐사장비를 이용하여 해저에 도달하는 기술에도 높은 명성을 얻었다. 그녀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바다 바닥을 걸어 다니면서 다양한 생물을 연구하고 해저에서 6천 시간을 넘게 지내기도 했다.
그녀의 전문분야는 조류였지만 그녀는 한 분야의 전문가에 그치지 않았다. 그녀의 관심은 바다 생태계 전체로 넓어졌다. 그녀는 1990년 미국의 국립해양대기국의 책임과학자로 임명되자, 해저 연구에 투자하도록 미국정부를 설득하면서 미국 정부가 해저 연구보다 우주선의 화장실에 더 많은 지출을 한다고 꼬집는다. 그러나 정부 관료들에게 변화가 없자 그녀는 단호하게 국립해양대기국을 그만둔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출세가 아니라 바다였던 것이다.
마거릿 로우먼은 호주 동부 해안과 아프리카 등지의 우듬지를 집중적으로 관찰한 학자다. 1978년 호주로 간 그녀는 숲 바닥보다는 우듬지에 생물의 다양성이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판단하여 우듬지를 연구 대상으로 삼는다. 문제는 수 십 미터에 이르는 우듬지에 어떻게 오르느냐였다. 원숭이를 훈련시키거나, 망원렌즈가 달린 카메라를 도르래에 장착하는 방법도 생각했지만, 그녀는 직접 로프를 타기로 한다. 그러나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짐피짐피나무’의 가시는 사람의 피부를 찢어놓을 뿐만 아니라 상처 위에 독소까지 뿜어댔다. 때로는 독사를 만나기도 했다.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며 우듬지에서 잠을 자면서까지 관찰한 결과, 그녀는 자기 몸의 수천 배나 되는 생명체를 겁 없이 공격하는 아프리카산 군대개미, 죽기 전 딱 한번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태치갈리아 등의 생태를 발견한다.
그녀의 자서전이라 할 수 있는 『나무 위 나의 인생』에서 로우먼은 가정주부로서의 삶과 학자로서의 삶을 병행하기가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고백하고 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호주 변방에서는 여성의 일차적 의무가 집안을 돌보는 것이었다. 식물학에 대한 애착 때문에 나는 도저히 그에 적응할 수가 없었다. 나는 과학을 집안 살림에 적응시키려 애썼다. 설거지를 하면서 머릿속으로 탐사 장비를 설계할 수는 없을까? 낮잠 시간을 이용해 과학 기사를 작성하면 어떨까? 아이를 유모차에 태워 밀고 다니면서 실험지에 새싹이 돋아났는지를 살펴볼 수는 없을까?” 그러나 사회의 통념도 그녀의 발길을 돌리지 못했다. 그녀는 “당신의 연구가 가족보다 우선할 수는 없으므로 가족용 차를 몰고 대학 도서관으로 가는 일은 하지 말라”고 충고하는 남편과 이혼을 하는 어려운 선택을 하기도 했다. 그녀는 두 아들 에디와 제임스와 함께 탐험을 계속한다. 두 아들과 함께 열대우림을 탐사하며 아나콘다와 피라냐를 만나고, 귀뚜라미를 먹기도 한다. 정글을 돌아다니느라 두 아이들은 학교 수업을 종종 빠질 수밖에 없었겠지만 아마존에서 손에 진흙을 묻히고 새를 관찰하며 그녀의 두 아들은 자연을 직접 몸으로 느끼면서 배운다.
숲이야말로 지구 생태계 보전을 위한 심장부라고 생각한 로우먼은 열대림 보존 활동가, 등반가, 생태학자들과 우듬지건설협회라는 회사를 설립해 숲 보존에 대한 공감대를 세계적으로 확산하려는 노력을 기울인다. 그녀는 사모아, 페루, 플로리다 등의 열대우림에 숲 꼭대기를 볼 수 있는 산책로를 만들어 생태관광을 촉진하고, 카메룬 열대우림의 마을 속으로 직접 뛰어 들어가 지역 주민들이 스스로 숲을 지킬 수 있도록 교육한다.
마리아 라이헤, 비루테 갈디카스, 실비아 얼, 마거릿 로우먼은 여성이라는 제약을 벗고 사회적 통념과 맞서 싸운 남성적 투사였을 뿐만 아니라, 생태계를 보호하려는 위대한 모성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그들의 과학은 분석과 환원만을 과학의 모든 것으로 아는 남성적 과학과는 판이한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연구 대상을 가슴으로 껴안으려 했던 따스한 감성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이성은 감성의 부축을 받으며 세상을 더욱 깊이 껴안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