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우리 영혼은
켄트 하루프 지음, 김재성 옮김 / 뮤진트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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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밤은 견딜 만한가요? 

켄트 하루프의 <<밤에 우리 영혼은>>은 잔상이 오래 남는 책이다. 어떤 책은 그 속을 채운 내용보다 그 책을 둘러싼 에피소드가 더 기억에 남기도 하는데, 이 책은 내용도 에피소드도 오래 남을 것 같다. 나는 켄트 하루프라는 작가를 전혀 몰랐다. 내게 이 저자를 알려준 이는 얼마 전 완독한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의 어슐러 K. 르 귄이었다. 켄트 하루프는 학생들을 가르치며 틈틈히 글을 쓰다 불혹을 넘긴 마흔한 살의 나이에 처음으로 소설을 발표했다고 한다. 생의 대부분을 콜로라도 주의 한 소도시에서 살았고, '홀트'라는 가상의 마을을 만들어 소설을 썼다고 했다. 이 소설은 저자의 마지막 작품이자 유작이다. 저자가 죽어가면서 썼다는 이 작품에 대해 르 귄은 감동과 경외감을 느꼈다며 버릴 것이 없는 말들로 가득한 귀한 인생 "보고서"라고 평했다. 사실 이런 리뷰에도 나는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문장을 읽어 내려가는 순간부터 내 몸과 마음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그게 옳긴 한 건지조차 잘 모르면서도 옳다고 여기는 일을 계속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에 대해서, 우리가 서로에게나 스스로에게 얼마나 가혹한지에 대해서, 우리들 대부분이 얼마나 힘들게 일하는지에 대해서, 우리가 얼마나 많이 갈망하고 얼마나 조금에 만족하는지에 대해서 계속 쓸 수 있었다. / . . . 수많은 소설이 행복 추구에 대해 썼지만, 이 소설은 실제 행복의 빛을 발한다."(<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 403쪽) 

나이가 들면, 세상 경험이 많아지면, 세상에 좀 익숙해지면, 사는 것이 수월해지고 편안해질 줄 알았다. 그렇게 느껴지는 날들, 그렇게 느껴지는 순간이 언뜻언뜻 있기는 하다. 그런데 어느 날 에피파니(epiphany. 깨달음)가 찾아들었다. 아, 아무리 살아도 삶은 늘 낯설고 힘겹겠구나. 낯섬과 힘듬을 받아들이고 살아야 하는 거구나. 모두가 그렇게 사는 거구나. 이 깨달음은 세상 모든 사람에 대한 연민의 싹을 틔웠다. 저기, 저 책에, 아주 많은 것을 갈망하지만 아주 조금밖에 만족하지 못하는 삶을 사는 이들이, 이러고 사는 것이 옳은지 아닌지 잘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그 삶을 계속 영위해 가는 이들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고 하니 읽지 않고는 배겨날 수가 없었다. 나는 내 집 식탁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나는 서점으로 달려가는 대신 자전거 페달을 밟고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나와 달리 <<밤에 우리 영혼이>>의 에디 무어는 두 발로 천천히 걸어 한 이웃을 찾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애디 무어는 루이스 워터스를 만나러 갔다. 오월, 아직 완전히 어두워지기 바로 전의 저녁이었다."(7쪽)

이 책의 첫 문장은 이채롭다. 그냥 '어느 날'이 아니고, "그러던 어느 날"이다. "그러던"이라는 이 짧은 한 마디에는 많은 것이 함축돼 있다. 에디 무어가 루이스 워터스라는 인물에게 향하기까지 있었을 무수한 일들과 무수한 감정이 내포되어 있는 은유이다. 에디 무어는 환한 대낮도 아니고 야심한 밤도 아닌 어둑어둑해지는 저녁에 루이스 워터스의 문을 두드렸다. 황혼의 시각. 그들이 맞이한 인생의 시각. 숱한 망설임 끝에 당도한 시각이다. 찾아올 까닭이 없는 이의 영문 모를 방문에 어리둥절해하는 루이스에게 에디가 어렵사리 입을 뗀다. 르 귄도 지적했지만 켄트 하루프는 말을 아낀다. 입을 열기까지 에디의 감정이 어떠했을지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을 수 있었겠지만 하루프는 사양한다. 그는 모든 행간을 독자의 상상력에 맡겨 버린다. 이것이 하루프 문체의 매력이자 허점이겠다. 나는 대화체로 이루어진 이 건조하고 담담한 문체가 정말 마음에 들지만 어떤 독자에게는 빈 공간이 많은 헐렁한 문체로도 읽힐 수 있을 테니까. 무튼, 하루프는 직진형이다. 시시콜콜 개입하는 전지적 작가 시점을 뒤로 하고 오로지 등장인물들의 대화로 이야기를 끌어가는데, 독자들도 같이 끌고 간다. 

"가끔 나하고 자러 우리 집에 올 생각이 있는지 궁금해요. / 우리 둘 다 혼자잖아요. 혼자 된 지도 너무 오래됐어요. 벌써 몇 년째예요. 난 외로워요. 당신도 그러지 않을까 싶고요. 그래서 밤에 나를 찾아와 함께 자줄 수 있을까 하는 거죠. 이야기도 하고요. / 아니, 섹스는 아니고요. 나야 성욕을 잃은지도 한참일 텐데요. 밤을 견뎌내는 걸, 누군가와 함께 따뜻한 침대에 누워 있는 걸 말하는 거예요. 나란히 누워 밤을 보내는 걸요. 밤이 가장 힘들잖아요. 그렇죠?" (9쪽) ​

"밤이 가장 힘들잖아요." 이 문장은 이 책을 읽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강력한 문장이다. 배우자를 잃은 지, 자식들이 세상 밖으로 나간 지, 삶의 흥미를 잃은 지 오래 된 70대의 두 노인이 앞으로 어떤 밤을 보내게 될지 궁금증을 던지게 하는 문장이다. 그러나 이 문장의 가장 큰 강력함은 등장인물을 향해 울컥 하게 만드는 연민이다. 나는 이 문장을 읽고 잠시 숙연해졌다. 마흔 하나에 남편을 잃고 홀로 긴 세월 살아낸 내 어미가 생각나서, 그 언젠가는 나도 겪을 일일지 모른다고(어쩌면 십중팔구) 느껴져서 말이다. 

그리하여 오로지 밤을 견디기 위한 두 사람의 동거 아닌 동침이 시작된다. 그들은 밤에만 만난다. 커다란 킹사이즈 침대에 나란히 누워 이야기를 나눈다. 어쩌다 바람을 피웠는지, 어쩌다 결혼하고 어쩌다 아이를 잃었는지, 무엇이 되고 싶었는지, 무엇을 하고 싶었는지 등등등. 그 이야기들은 인생의 회한으로 가득하다. 그랬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럴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라는 이야기들로. 대개가 그렇듯 이 소설 속 등장인물들도 남자보다 여자 쪽이 더 현명해 보인다. 루이스가 후회 어린 어조로 토로한다.

"삶이, 결혼이 어때야 한다는 관념 같은 걸 갖고 있었는데 우리의 삶과 결혼은 거기서 멀었어요. 그런 점에서 나는 그녀를 실망시킨 셈이죠. 다른 남자였어야 했어요."(143)

스스로에게 가혹하게 구는 루이스에 비해 에디는 인간의 불완전함을 이해하기에 스스로에게 관대한 편이다. "눈먼 사람들처럼"(143쪽) 이리 부딪치고 저리 부딪치며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이 인생임을 먼저 터득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런 에디조차 어떻게 해도 태연자약해지지 않는 인생의 단면이 있다. 바로 자식 문제다. 한 아이를 잃고 남은 아이에게 충분히 눈 맞추고 귀 기울이지 못했다는 뉘우침, 분노와 억울함이 켜켜이 쌓여가는 그 마음을 어루만져 주지 못했다는 자책이 에디의 가슴을 짓누른다. 그런 에디에게 이번에는 루이스가 심장을 마사지해주듯 위로의 말을 건넨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고쳐줄 수는 없잖아요. / 늘 고쳐주고 싶어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죠." (155-6쪽)

그렇다. 자식도 품 안의 자식이고, 품을 벗어나면 다른 사람이다. 더 정확하게는 나와는 다른, 또 하나의 인격체이다. 부모의 손을 놓고 부모의 품을 떠나 사는 자식의 삶은 부모의 눈에 대개는 불안하고 미덥지 못하다. 할 수만 있다면 어긋나 있는 그 삶을 고쳐주고만 싶다. 자식은 나를 그렇게 바라보는 부모의 눈길이 못 마땅하다. 내가 어때서요, 뭘 해줬다고 그래요, 라고 쏘아 붙이고는 부모로부터 멀리 달아난다. 내 딴에는 애를 쓴다고 썼지만 자식의 삶을 어찌해볼 도리가 없을 때, 무언가를 했는데도 손에 쥔 것이 없다고 느껴질 때, 그렇다고 무언가를 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 때. 그럴 때 찾아드는 무력감, 낭패감, 허무함, 그리고 쓸 쓸 함. 당신 인생에 그런 시기가 왔을 때, 그런 감정이 들이닥칠 때, 밤이면 이불 속을 뒤척거려야 할 때, 당신은 남은 나날을 어떻게 보내고 싶은가요? 라고 이 소설은 묻고 있다. 

에디와 루이스는 인생 70에 모험을 감행했다. 남들에게 손가락질 당한 만한 모험이었다. 하지만 그들을 들뜨게 한 오랜 만의 설렘은 손가락질 따위 가뿐히 뛰어넘게 해주었다. 그들이 나눈 이불 속 동침과 대화는 별거 아닌 듯하지만 아주 별거인 것들이다. '나'라는 존재를 숨 쉬는 존재로 실감하게 해주는 것들이므로. 그들은 서로 나누고 공감하고 어루만졌다. 그거면 충분하지 않은가. 

사실 나는 한 명의 독자로서 에디 무어가 자신의 발품을 들여 그런 과감한 제안을 하는 이가  꼭 남자여야 했을까 하는 대목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소설의 결말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나 많은 인생이 그렇게 마음에 차지 않게 흐르지 않던가. 그러니 나는 내 늙은 날의 밤들을 어찌 견딜 것인지, 그것만 더 고민해 보겠다. 

하루프의 문체가 마음에 들어 <<플레인송>>도 대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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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3-30 16:2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모험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셀레이네요
행복한 책읽기님 리뷰를 읽으면서 나의 삶의 에피파니는 무엇인가? 떠올려봅니다.

하루키옹은 자신의 묘비명에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러너)
1949~20**
적어도 끝까지 걷지 않았다.
이렇게 적어 놓는다고 하는데,,,,

아마도 전,,,

적어도 끝까지 읽다 간다 ㅎㅎㅎㅎ
라고 적어 놓을까요 ^ㅎ^

행복한책읽기 2021-03-30 17:35   좋아요 3 | URL
scott님 묘비명 간지납니다. 끝까지 읽다 간다. 저는 한 지인에게 말했어요. 나는 책장(책과 함께 화장)할 거야 라고. ㅋㅋ scott님은 지금 모험 중이십니다. 1일 1클래식 페이퍼라는 엄청난 모험을요. 완전 대항해입지요.^^

청아 2021-03-30 16:50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르귄님 이번 책 속에 있는 책 중에 번역이 안되어 있거나 절판되어 있는 책들 넘 아쉬워요! 책읽기님 리뷰 구구절절 와닿네요. 이페이지도 저장~♡

행복한책읽기 2021-03-30 17:37   좋아요 4 | URL
그죠그죠. 저는 번역 안 된 책들 중 가장 읽고 싶은 것이 애트우드 단편이었어요. 르 귄 책 읽은 출판사 관계자나 번역자들이 손을 대줄 것 같아요.^^

새파랑 2021-03-30 17:1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으려고 오늘 책상에 올려놓은 책인데 이렇게 리뷰까지^^ 밤에 읽어야 할거 같습니다 ㅎㅎ

행복한책읽기 2021-03-30 17:38   좋아요 4 | URL
ㅎㅎ 새파랑님 리뷰도 기대돼요. 저는 이 책 잔잔하니 좋았어요. 여운이 길어요. 흠. 근데 새파랑님은 좀 젊으신 것 같은디 ㅋ

새파랑 2021-03-30 17:47   좋아요 2 | URL
이렇게 멋진 리뷰가 있어서 부담되네요... 잔잔한거 좋아합니다^^ (기준은 모르겠지만 그렇게 막 젊지는 않습니다 ㅎㅎ)

붕붕툐툐 2021-03-30 17:44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제목 넘나 좋아요~ 파아란 표지도 좋구요~ 저도 늙어 혼자인 밤에 뭘 해야할지~ 그땐 명상 고수가 되어 혼자가 두렵지 않으면 좋겠네요~ㅎㅎ

행복한책읽기 2021-03-31 09:56   좋아요 0 | URL
그죠. 제목도 표지도 참 맘에 들어요. 네. 명상하기 좋아하고 실천하는 붕붕툐툐님은 명상 고수가 되실 것 같아요. 알라딘 친구들에게도 그 비법을 조금씩 흘려 주세요. 주워 먹게요. ^^

2021-03-31 0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행복한책읽기 2021-03-31 10:04   좋아요 1 | URL
북사랑님. 저두 문을 닫고 산 시절이 있었어요. 태양이 아니었구나, 샘물이 아니었구나, 공감이란 불가능하구나 라면서 문을 꼭꼭 닫고 산 때가요. 지금도 그 생각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어요. 그런데도 문을 조금 열어 둘 수 있게 된 건, 리뷰에 쓴 현실을 받아들였기 때문이에요. 몇 퍼센트의, 어쩌면 0. 00001 퍼센트의 공감에 기대어 사는 게 인생이라는 것을요. 북사랑님, 건조한 삶에 이 글이 잠시 단비가 되어 주었나요. 그랬으면 좋겠네요. 우리 같이 으샤으샤해요!^^

2021-03-31 14: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21-04-01 01: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이 마지막이고 유작이라니... 자신보다 더 윗세대 이야기를 썼군요 나중에 저는 어떻게 지낼까 잠시 생각해 봤지만, 떠오르지 않네요 그때는 이렇게 컴퓨터 쓰기 어려울지... 조용히 책을 볼지도 모르겠네요 이 소설에 나온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어서 좋았을 듯합니다


희선

행복한책읽기 2021-04-01 11:37   좋아요 0 | URL
나이 든 나를 그리기가 쉽지 않죠. 한 가지 좀 확실한건 희선님도 저도 조용히 책을 보고 있을 거라는 거죠. 돋보기 쓴 모습으로 말이죠 ㅋ

scott 2021-04-09 15: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행복한 책읽기님의 하루프
이달의 당선작을 ~*
축하 합니다.
요책 제가 끌고 가여 ~장바구니속으로~@@@

새파랑 2021-04-09 16: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책읽기님 추천으로 읽은 책이라 더 기쁘네요~! 축하드려요^^
 

20210329 #시라는별 23

봄길
- 정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정호승 시인은 정현종 시인과 더불어 내 이십대의 어두운 터널을 같이 걸어주었던 시인이다. 1997년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라는 시집 후기에 시인은 이렇게 쓴다.

˝이번 시집을 정리하면서 한 가지 깨달은 게 있다면 ‘희망 없이도 열심히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이 시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시가 나를 구원해주지는 않았으나, 나를 늘 위무해주었다. 혹시 이 시집을 통해 단 한 사람이라도 나처럼 위무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만큼 더 좋은 일은 없겠다.˝

이십대의 나는 희망을 찾아 헤매다 ‘희망 없이도 살 수 있다는 희망‘이란 말에 기대어 하루하루 열심히는 아니지만 꾸역꾸역 살았고, 그러는 사이 잘 웃고 잘 떠들고 잘 덤비는 명랑한 나로 돌아와 있었다. 그러는 사이 시에서는 점점 멀어져 갔다.

97년으로부터 무려 24년이 흐른 2021년 3월. 지인이 단톡방에 봄날의 풍경과 함께 정호승 시인의 ‘봄길‘을 올렸다. 어느 카페에 적혀 있던 시라면서. 얼마나 반갑던지. 내가 그의 시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동안, 그의 시들은 ˝단 한 사람이라도˝라던 시인의 바람을 보기 좋게 배반하고 무수한 사람들을 위무해왔고 교과서에도 실려 학생들을 위로, 아니 어쩌면 괴롭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2021년 3월 1일. 가수 안치환이 정 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 디지컬 싱글 ‘봄길‘을 발표했다. 안치환은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응원하고 싶어 이 곡을 지었다며 앨범 발매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길고 지루한 코로나시대를 견디고 있는 모두에게 힘이 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어려운 시기일수록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묵묵히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이 ‘봄길’의 주인공입니다​추운 겨울의 한파와 눈보라를 이겨내고 새로운 생명을 꽃피워 내는 언제나 반가운 봄. ​그 봄의 기운을 받아 하루 빨리 마스크를 벗고 활짝 웃으며 반가운 인사와 따뜻한 손을 맞잡을 수 있는 평범한 인간의 날들이 오길 기원합니다. ​​​함께 걸을 수 있는 ‘봄길’을 기다립니다.˝
https://youtu.be/8G9ILXSfVi4

남쪽 지방에는 봄꽃들이 벌써 만개했다지. 봄길은 꽃길이기만 할까. 아니아니. 오늘 내가 본 봄길 중 하나는 보도블럭 바닥을 뚫고 올라온 민들레와 이름 모를 풀의 길, 보도블럭 아래 헐거워진 흙들을 부서뜨리며 조금씩 조금씩 길을 내 기어이 햇빛 세례를 받고야 만 의지의 길이었다. 희고 붉고 노란 봄꽃들 뒤에서 아기 속살 같은 연두빛 잎들을 장착하기 시작하는 가지들의 길이었다. 봄길이 아름다운 것은 이런 생명력 때문이다.

정호승 시인은 1950년생이다.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는 90년 가을 <<별들이 따뜻하다>> 이후 시인이 7년 만에 펴낸 다섯 번째 시집이다. 시인의 나이 47세 때였다. 시를 쓰지 않은 6년 동안 시인은 소설을 썼다. 1993년 10·26과 김재규를 다룬 3권 짜리
장편소설 <<서울에는 바다가 없다>>를 발표했다. 그러나 6년간 소설 작업에 매진하던 시인은 1996년 가을쯤 이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사람마다 자신의 문학적 기질에 맞는 장르가 있다. 나는 소설에 대한 문학적 기질을 갖고 태어난 사람이 아니다. 시적 기질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다.’ 정 시인은 그 해 10월부터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해 이듬해 봄 한 권의 시집을 낼 분량을 다 썼다. 그렇게 탄생한 시집이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이다. 이 시집은 출판사 추산 15만부 이상이 팔린 것으로 집계된다.

보라, 정 시인은 길이 끝났다 싶은 곳에서 또 하나의 길을 발견했다. 다음에는 스스로 길이 되었고, 그 길을 지금도 ˝한없이˝ 걷고 있다. 그 ‘봄길‘을 나도 같이 걸어가고 있는 사람이어서 흐릿한 봄날인데도 마음만은 화사한 봄날이었다.

‘봄길‘은 2016년 열림원에서 출간된 <<외로우니까 사람이다>>에도 수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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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3-29 08:2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시집 제목이 너무 강렬하네요^^ 정호승 정현종님 시들 가끔씩 읽으면 정말 좋더라구요. 항상 좋은 시를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행복한책읽기 2021-03-29 11:04   좋아요 4 | URL
그죠. 두 시인의 시는 참 편안해요. 같이 시를 읽어줘 저야말로 감솨감솨^^

청아 2021-03-29 10:2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왜 이렇게 강렬한가 했어요. 책읽기님 후기를 읽고보니 그럴 수 밖에 없네요.
이런 사랑에 눈에 띄지 않는 길 바닥의 민들레나 이른 바 잡초를 연결지으시다니 놀랍고 놀랍습니다. 저도 때때로 어떤 꽃 못지않게 피워내는 그 모습들에 시선을 빼앗기거든요. 한 사람을 살리는 것은 온 생명을 살리는 것이란 말도 떠올랐어요. 시인의 지향점은 그런 점에서 더 빛나는 듯해요. 너무 좋네요~오늘 글 특히 더요.
책읽기님 책을 쓰셔야겠습니다♡

행복한책읽기 2021-03-29 11:06   좋아요 3 | URL
그니까. 사랑하다 죽을 것 같았는데 저 시집이 저를 살렸네요. 역설적이게도. ㅋㅋ 미미님 속에도 시인이 살던데요. 올리는 글과 사진으로 보아^^

scott 2021-03-29 10:4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비온뒤 더욱 초록빛 향기를 품고 있는 민들레, 누군가 강제로 흔들어 뽑지 않은 이상 저자리에서 몇일후 노란색 희망의 꽃이 피겠죠. 행복한 책읽기님은 시인의 시선으로 사진을 찍으쉼 ^0^

행복한책읽기 2021-03-29 11:08   좋아요 4 | URL
그 노란 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비 온 뒤라 색들이 더 선명했어요. scott님은 보는 눈이 정말 밝으심^^

희선 2021-03-30 02:3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만난 어른이 읽는 동화로 나온 책이 생각납니다 제목이 《항아리》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희망이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이라니, 거기에서 이어진 게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봄에는 꽃만 피지 않지요 봄에 만날 수 있는 연푸른잎이나 풀도 좋아요


희선

행복한책읽기 2021-03-30 16:10   좋아요 1 | URL
우와. 희선님 머릿속에는 책들이 정말 많이 들어 있네요. 누르면 나오는 책 자판기 같아요. <<항아리>>는 검색이 안 되고,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 찾았어요. 정호승님 책이었다니. 감사합니다. 희선님 리뷰도 찾아 보았음요.^^

붕붕툐툐 2021-03-30 12: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행책님의 20대를 함께 걸었다니 시인이 들으면 넘 행복할 거 같아요! 다 만날 때가 있고 헤어질 때가 있는 거겠죠~ 시 다시 읽어도 진짜 좋아요~👍

행복한책읽기 2021-03-30 16:13   좋아요 1 | URL
그죠. 정호승 시인을 직접 뵌 적이 있는데, 그때 이 얘길 못해 드렸어요. 여 또 만나게 되면 꼬옥 알려드려야겠어요. 과연??? ㅋ 시는, 맞아요. 다시 읽으니 진짜 좋네요. 나이 들어 읽으니 더 좋네요. 붕붕툐툐님 행차 해 댓글 남겨주셔 감솨해요 ^^
 

능선을 타고 앉은 구름

20210325 #시라는별 22

독거 
- 안도현 

나는 능선을 타고 앉은 저 구름의 독거(獨居)를 사랑하련다 

염소떼처럼 풀 뜯는 시늉을 하는 것과 흰 수염을 길렀다는 것이 구름의 흠이긴 하지만, 

잠시 전투기를 과자처럼 깨물어먹다가 뱉으며, 너무 딱딱하다고, 투덜거리는 것도 썩 좋아하고 

그가 저수지의 빈 술잔을 채워주는 데 인색하지 않은 것도 좋아한다. 떠나고 싶을 때 능선의 옆구리를 발로 툭 차버리고 떠나는 것도 좋아한다

이 세상의 방명록에 이름 석 자 적는 것을 한사코 싫어하는, 

무엇보다 위로 치솟지 아니하며 옆으로 다리를 쭉 펴고 앉아, 대통령도 수도승도 아니어서 통장의 잔고를 확인하지 않아도 되는 저 구름, 

보아라, 백로 한 마리가 천천히 허공이 될 때까지 허공이 더 천천히 저녁 어스름에게 자리를 내어줄 때까지 우두커니 앉아 바라보기만 하는

저 구름은, 바라보는 일이 직업이다 

혼자 울어보지도 못하고 혼자 밤을 새보지도 못하고 혼자 죽어보지도 못한 나는 그래서 끝끝내, 

저 구름의 독거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안도현 시인의 아홉 번째 시집 <<간절하게 참 철없이>>를 계속 읽는다. 시인의 최근작인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는 읽기가 약간 버거웠는데, 이 시집은 편안하게 읽힌다. 삼분의 일을 읽은 지금까지는 그렇다.

위의 시 <독거>는 지난 주 금요일 열두 살 아들이 내게 보여준 하늘을 떠올리게 했다. 오후 다섯 시. 검도를 마치고 돌아온 아들이 식탁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내게 부탁조로 말했다.

ㅡ 엄마, 잠시 나랑 같이 나가요. 엄마한테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요. 

나는 아들이 이런 말을 할 때의 마음을 안다. 어여쁜 풍경을 발견해 그 풍경을 엄마와 나누고픈 마음, 그 마음은 이 시집의 제목처럼, 참 철없이 간절하다. 아들의 손에 이끌려 밖으로 나서, 아들의 손이 가리키는 하늘을 올려다보니, 아니나 다를까 하늘 바다에 구름 물결이 부드럽게 너울거리고 있었다. 아들이 말했다.

ㅡ 엄마, 솜사탕을 뿌려 놓은 것 같지 않아요? 포근포근하고 달콤할 것 같아요. 
ㅡ 정말 그렇구나. 이런 멋진 풍경 엄마한테 보여줘서 고마워. 우리 아들은 낭만 아들일세. 

‘낭만‘의 정의를 이 시에서 찾자면, 바로 ˝바라보는 일˝일 것이다. ˝바라보는 일˝은 구름의 ˝직업˝이고, ˝능선을 타고 앉은 저 구름˝은 시인의 변형일 것이다. ˝빈 술잔˝ 넘치도록 채워주고, 길 ˝떠나고 싶을 때˝ 언제든 떠나고, ˝이 세상의 방명록에 이름 석 자˝ 남기는 것에 연연하지 않고, ˝통장 잔고˝ 바닥나는 것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구름, 시인은 그런 구름이 부럽다. 무엇보다 부러운 것은 이것이다.

˝보아라, 백로 한 마리가 천천히 허공이 될 때까지 허공이 더 천천히 저녁 어스름에게 자리를 내어줄 때까지 우두커니 앉아 바라보기만 하는˝

바라보기만 한다고 시인이 되랴만, 우두커니, 멍하니, 가만히, 찬찬히, 골똘히 바라보지 않고서는 ˝구름의 독거를˝ 어찌 사랑할 수 있으랴. 어찌 시를 읊을 수 있으랴. 세상 바쁠 것이 없는 아이들의 마음에는 ˝능선을 타고 앉은 구름˝이 산다. 그러니 그저, 같이 바라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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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1-03-25 08: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운 구름의 독거네요! 구름 아래서 하늘을 올려다 보는 모자는 얼마나 더 아름다울지 상상해 봅니다!ㅎ 덕분에 맘이 따듯한 글로 하루 시작하네요! 즐건 하루되시구요!ㅎ

행복한책읽기 2021-03-25 11:31   좋아요 2 | URL
히히. 그죠. 안도현님 시들이 따땃해요. 막시무시님 하루에 온기를 보태 덩달아 기분 좋아졌음다. 굿데이~~~^^

scott 2021-03-25 11: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마치 물고기가 용으로 승천해서 올라가면서 일으킨 물보라 같아요!!
사진을 이토록 잘찍으시는데
행복한 책읽기님
사진 재능 아끼지 마세요.
넘 잘찍으심 ^ㅎ^

행복한책읽기 2021-03-25 20:21   좋아요 1 | URL
오호. 물고기 용 승천. 꿈보다 해몽이라더니. scott님 사진 보는 눈이 더 시적입니다요. 감사해용~~~^^

희선 2021-03-26 0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름 하니 정채봉이 구름이 세상을 바라보는 식으로 쓴 동화가 생각나네요 예전에 봐서 거의 잊어버렸지만... 아이는 좋은 게 있으면 엄마하고 함께 보고 싶기도 한가 보네요 저는 어릴 때 그랬을지, 하나도 생각나지 않네요 행복한책읽기 님 아드님이 지금 마음 오래오래 가지고 있으면 좋겠네요


희선
 

20210324 포르투갈의 쉰들러, 아리스티데스 데 소사 멘데스


3월 13일부터 한달 계획으로 유발 하라리의 <<호모데우스>> 매일 인증을 하고 있다. 하라리의 작법은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글이 깔끔하다. 시원시원하다. 재미있다. 술술 읽힌다. 이렇게 박식할 수가! 뭐 이런 감탄도 매번 하게 된다. ㅋ 


이 책을 이미 읽은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나는 처음 알게 된 보르도 주재 포르투갈 영사 이야기를 올린다. 그는 포르투갈의 쉰들러였다. 그리고 하라리는 실제를 능가하는 문서의 힘을 훌륭한 예시로 보여주었다. 

1940년 봄 북쪽에서 내려온 나치가 순식간에 프랑스를 장악하자, 그곳에 살던 유대인 집단 대부분이 프랑스를 떠나 남쪽으로 도망쳤다. 국경을 넘으려면 스페인이나 포르투갈행 비자가 필요했고, 따라서 수만 명의 유대인들이 생사가 걸린 종잇조각을 얻기 위해 다른 난민들의 물결에 휩쓸려 보르도 주재 포르투갈 영사관에 몰려들었다. 포르투갈 정부는 프랑스에 있는 영사들에게 외교부의 승인 없이는 비자를 발급하지 말라고 했다. 보르도 주재 포르투갈 영사 아리스티데스 데 소사 멘데스는 그 명령을 무시했고, 그로 인해 30년 외교관 경력을 날려버렸다. 나치의 탱크가 보르도로 다가오는 가운데, 소사 멘데스와 그의 팀원들은 비자를 발급하고 종이에 도장을 찍느라 잠도 못 자며 하루 24시간씩 열흘 밤낮을 일했다. 수천 장의 비자를 발급한 뒤 소사 멘데스는 탈진해 쓰러졌다. - P231

난민들을 수용할 마음이 없던 포르투갈 정부는 요원들을 보내 명령에 불복한 멘데스를 고국으로 호송했고, 그의 외교관직을 박탈했다. 그러나 인간의 고통에 아랑곳하지 않던 관료들도 문서에는 깊은 존경심을 보였다. 그리하여 소사 멘데스가 명령을 어겨가며 발급한 비자는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관료들에게 받아들여져 나치가 친 죽음의 덫에서 3만 명의 영혼을 구했다. 겨우 고무도장 한 개로 무장한 소사 멘데스는 홀로코스트에서 개인으로서는 가장 큰 규모의 구조작전을 펼쳤다. -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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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3-24 11:1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호모데우스!!!!!!! 저도 저도 ㅎㅎㅎ읽어야하는데 :-)
파이팅입니다

행복한책읽기 2021-03-24 15:32   좋아요 1 | URL
히히. 술술 잘 읽혀요. 하라리 음성 지원도 되는 문체여서 강의 듣는 느낌이랍니다^^ 파이팅 감솨!!^^

scott 2021-03-24 11: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유발 하라리!
글쓰기 구성 작법 배우고 싶은 1人
행복한 책읽기님이 올려주신 문구 열쉼히 메모메모 ◌⑅⃝*॰ॱ✍

초딩 2021-03-24 11:54   좋아요 2 | URL
오오오 임콘 탐 나요!

행복한책읽기 2021-03-24 15:34   좋아요 2 | URL
아니. 저도 scott 님께 도움이 된건가요?? 늘 받기먹기만 해 그저 송구했건만. 기분 좋습니다요~~~~^^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 - 삶과 책에 대한 사색
어슐러 K. 르 귄 지음, 이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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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23  어떻게든 . . . 다 읽었다 ^^

2021년 3월 3일에 시작해 3월 22일에 마치다.  

​​읽는 내내 좋았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이 . . . 거의가 모르는 작품들 리뷰라 뒤로 갈수록 힘이 딸렸다. 

​​"옳든 그르든 간에 나는 따분하고 서툰 스타일은 곧 사고의 빈한함이나 불완전함을 나타낸다고 믿는다. 다윈의 정확하고 폭넓고 탁월한 지력은 그의 명료하고 강하고 활력 있는 글로 표현된다고 본다. 그 글의 아름다움이 곧 지성이다."(10쪽)

​르​ 귄이 찰스 다윈의 글에 대해 한 이 품평을 르 귄 자신에게 그대로 되돌려 줄 수 있겠다. 르 귄의 리뷰는 명료하고, 선명하고, 시원하고, 활력 있고, 무엇보다 지적이다. 나는 리뷰 읽기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르 귄의 글은 그가 말한 좋은 서평의 정의를 따르게 한다. 그러니까 서점이든 도서관이든 달려가게 만들고 디지털 세대에 맞게 온라인 매체에 터치하게 만든다.

이 책을 읽은 독자들 중에는 저자가 소개하는 책들을 모조리 읽어 주겠어! 라는 다부진 포부를 밝히는 이들도 있었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르 귄 덕에 모르는 작가들을 정말로 많이 알게 되었지만, 이 책에 등장하는 작품들을 다 읽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나란 사람이 지금껏 왜 SF 장르를 밀쳐두고 살아왔는지 이 책을 통해 더욱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나 자신이 SF를 온전히 소화할 수 있을 만큼 '지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르 귄은 똑부러지게 말했다.

"이해하지 못하면, 지루하다."(10)

그랬다. SF는 내게 지루했다. 그 지루함이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내게 그 장르를 이해할 만한 지적 토양이 없었다는 데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단지 취향의 문제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 달 았 다. 이 지점은 앞으로도 크게 달라질 것 같지 않다. 그렇다고 아쉬우냐, 하면 뭐 그렇지는 않다. 세상 모든 분야의 책을 사랑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세 아이의 엄마라는 직업과 작가라는 직업을 양립해 나가면서 어느 쪽도 희생시키지 않고 그 둘을 조화롭고 풍요롭게 일궈왔다는 작가의 내공에 감탄했다. 문학의 성차 문제를 서늘하고 날카롭고 시원하게 지적하는 저자의 문제 의식과 용기에 박수 쳤다. 상상력이 글쓰기의 도구에 그치지 않고 우리가 어떤 사람으로 남을 것인가를 결정 짓는 수단이라는 통찰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읽기는 "다른 누군가의 정신과 교감"(26쪽)하는 행위이고 문학은 "우리가 여행하는 '삶'이라는 나라에 가장 유용한 안내서"(27쪽)라는 저자의 견해에 깊이 공감했다. 돌아보면 일가친척 하나 없이 살아온 내 인생에서, 너는 어떻게 살고 싶니? 너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니? 너라면 어떻게 할 거니? 등등의 무수한 근본 질문에 소리 없는 대화를 나눠준 것이 책이었다. 책은 내게 친구이자 스승이었다. 

전부는 아니지만 듣도 보도 못한 작품들에 대한 리뷰만으로 독자에게 읽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게 하는 르 귄의 글은 훌륭하다. 나는 주제 사라마구의 글보다 그 작가의 삶, 사라마구가 걸어온 길을 사랑하는 독자였다. 이 책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르 귄의 리뷰를 통해 주제 사라마구의 삶과 글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그를 더욱 좋아하고 존경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올해는 사라마구의 작품을 모조리 읽고, 아니아니, 이제 이런 무리수 공약은 난발하지 않으리^^, 몇 권 집에 들여다 놓고 그와 좀 더 친해지고 싶어졌다. 켄터 하루프도 그런 작가들 중 한 명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이 책을 읽은 후에 든 마지막 생각은 여기 수록된 책과 상관없이 어쨌거나 나는 르 귄 언니가 말한 대로 "고집스럽게" 책을 읽는 독자로 살다 죽을 것 같다는 것이다.  

"우리 손끝에 달린 온갖 유혹에도 불구하고, 나는 책 읽기를 익힌 고집스럽고 내구력 있는 소수가 오랫동안 그러했듯 앞으로도 계속 책을 읽으리라 믿는다. 종이든 화면이든,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것이다. 그리고 책을 읽는다면 대개 그 경험을 공유하고 싶어 하기에, 그리고 아무리 막연하다 해도 그 공유가 중요하다고 느끼기에, 어떻게 해서든 책이 다음 세대에도 존재하도록 만들고야 말 것이다."(1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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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3-23 11: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는 독자로 살다 백세까지 장수를 !!
sf물은 영상부터 보시고 원작을 읽으신다면 재미 두배!

행복한책읽기 2021-03-23 16:20   좋아요 2 | URL
백세!!! 무섭슴다. 저 숫자는 ㅋ 저는 sf 영화는 나름 잘 봐요. 신기해서요. ㅋ 책은 시간이 좀 더 필요해 보이나, 르 귄과 웰스는 올해 도전해보려구요^^;;

청아 2021-03-23 12: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완독축! 저 <어둠의왼손>사놨어요! 언제 읽을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르귄 쌤 때문에 읽어보고싶은 SF늘고있음ㅋㅋ 고집스럽게, 저도요!🤚

행복한책읽기 2021-03-23 16:23   좋아요 2 | URL
축하 고마워요 미미님. 저는 단편집 <바람의 열두 방향>먼저 읽으려구요. 지인이 <어둠의 왼손> 읽다 내려놨대요. 낯선 용어들로 가득해 난독을 겪었다고 해서. ㅋ 암튼 우린 올해 르귄 언니네로 놀러갑시다요~~~^^

라로 2021-03-23 14: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무리수 공약도 가끔은 필요한 거 같아요. 암튼 저보다 늦게 읽으시고 먼저 완독 하신 거 축하드립니다. 저도 그녀가 알려준 책 다 읽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그중에 와이오밍의 카우보이가 30년 동안 말 안장 속에 넣고(넣고만 다닌 건지 읽은 건지는 모르지만,ㅎㅎ) 다녔다는 아이반호는 읽고 싶어요. 물론 우리 같이 읽기로 한 애트우드 여사의 책은 언젠가 읽어야죵??ㅋㅋ 읽을 책이 쓰나미로 몰려오니,,,이럴때일수록,, 천천히 읽어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도 책은 쌓아 놓아야 맛입니다요, 저는. ㅠㅠ

행복한책읽기 2021-03-23 16:29   좋아요 1 | URL
라로님은 교차 읽는책이 원체 많잖아요. 저는 원래 한권만 파는 스타일이었는데. 알라딘 서재가 제 독서 습관을 바꿔 놓았어요. 우왕좌왕 중입니다요. ㅋ 라로님 저 애트우드 <시녀이야기> 시작했어요. 언제 완독할진 몰겠지만. ㅋ 근데 도덕적 혼란과는 딴판이라 더디 읽힙니다. 낯설어요 ㅡㅡ

희선 2021-03-24 02: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과학소설 저도 별로 못 봤는데, 나중에 생각하니 어릴 때 본 영화 같은 게 거의 과학소설이 원작이더군요 그런 걸 나중에 알다니... 그렇다고 그걸 찾아보지는 않았지만... 과학소설은 어렵지만 재미있는 것도 있더군요 얼마 안 보고 이렇게 말하다니... 저도 앞으로도 책 읽을까 합니다 자신이 좋아하거나 관심 있는 거 보는 것도 괜찮겠지요


희선

행복한책읽기 2021-03-24 10:02   좋아요 1 | URL
희선님이랑은 겹치는 책이 없는데 같이 읽음 것도 잼나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