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선을 타고 앉은 구름
20210325 #시라는별 22
독거
- 안도현
나는 능선을 타고 앉은 저 구름의 독거(獨居)를 사랑하련다
염소떼처럼 풀 뜯는 시늉을 하는 것과 흰 수염을 길렀다는 것이 구름의 흠이긴 하지만,
잠시 전투기를 과자처럼 깨물어먹다가 뱉으며, 너무 딱딱하다고, 투덜거리는 것도 썩 좋아하고
그가 저수지의 빈 술잔을 채워주는 데 인색하지 않은 것도 좋아한다. 떠나고 싶을 때 능선의 옆구리를 발로 툭 차버리고 떠나는 것도 좋아한다
이 세상의 방명록에 이름 석 자 적는 것을 한사코 싫어하는,
무엇보다 위로 치솟지 아니하며 옆으로 다리를 쭉 펴고 앉아, 대통령도 수도승도 아니어서 통장의 잔고를 확인하지 않아도 되는 저 구름,
보아라, 백로 한 마리가 천천히 허공이 될 때까지 허공이 더 천천히 저녁 어스름에게 자리를 내어줄 때까지 우두커니 앉아 바라보기만 하는
저 구름은, 바라보는 일이 직업이다
혼자 울어보지도 못하고 혼자 밤을 새보지도 못하고 혼자 죽어보지도 못한 나는 그래서 끝끝내,
저 구름의 독거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안도현 시인의 아홉 번째 시집 <<간절하게 참 철없이>>를 계속 읽는다. 시인의 최근작인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는 읽기가 약간 버거웠는데, 이 시집은 편안하게 읽힌다. 삼분의 일을 읽은 지금까지는 그렇다.
위의 시 <독거>는 지난 주 금요일 열두 살 아들이 내게 보여준 하늘을 떠올리게 했다. 오후 다섯 시. 검도를 마치고 돌아온 아들이 식탁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내게 부탁조로 말했다.
ㅡ 엄마, 잠시 나랑 같이 나가요. 엄마한테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요.
나는 아들이 이런 말을 할 때의 마음을 안다. 어여쁜 풍경을 발견해 그 풍경을 엄마와 나누고픈 마음, 그 마음은 이 시집의 제목처럼, 참 철없이 간절하다. 아들의 손에 이끌려 밖으로 나서, 아들의 손이 가리키는 하늘을 올려다보니, 아니나 다를까 하늘 바다에 구름 물결이 부드럽게 너울거리고 있었다. 아들이 말했다.
ㅡ 엄마, 솜사탕을 뿌려 놓은 것 같지 않아요? 포근포근하고 달콤할 것 같아요.
ㅡ 정말 그렇구나. 이런 멋진 풍경 엄마한테 보여줘서 고마워. 우리 아들은 낭만 아들일세.
‘낭만‘의 정의를 이 시에서 찾자면, 바로 ˝바라보는 일˝일 것이다. ˝바라보는 일˝은 구름의 ˝직업˝이고, ˝능선을 타고 앉은 저 구름˝은 시인의 변형일 것이다. ˝빈 술잔˝ 넘치도록 채워주고, 길 ˝떠나고 싶을 때˝ 언제든 떠나고, ˝이 세상의 방명록에 이름 석 자˝ 남기는 것에 연연하지 않고, ˝통장 잔고˝ 바닥나는 것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구름, 시인은 그런 구름이 부럽다. 무엇보다 부러운 것은 이것이다.
˝보아라, 백로 한 마리가 천천히 허공이 될 때까지 허공이 더 천천히 저녁 어스름에게 자리를 내어줄 때까지 우두커니 앉아 바라보기만 하는˝
바라보기만 한다고 시인이 되랴만, 우두커니, 멍하니, 가만히, 찬찬히, 골똘히 바라보지 않고서는 ˝구름의 독거를˝ 어찌 사랑할 수 있으랴. 어찌 시를 읊을 수 있으랴. 세상 바쁠 것이 없는 아이들의 마음에는 ˝능선을 타고 앉은 구름˝이 산다. 그러니 그저, 같이 바라보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