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29 #시라는별 23

봄길
- 정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정호승 시인은 정현종 시인과 더불어 내 이십대의 어두운 터널을 같이 걸어주었던 시인이다. 1997년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라는 시집 후기에 시인은 이렇게 쓴다.

˝이번 시집을 정리하면서 한 가지 깨달은 게 있다면 ‘희망 없이도 열심히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이 시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시가 나를 구원해주지는 않았으나, 나를 늘 위무해주었다. 혹시 이 시집을 통해 단 한 사람이라도 나처럼 위무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만큼 더 좋은 일은 없겠다.˝

이십대의 나는 희망을 찾아 헤매다 ‘희망 없이도 살 수 있다는 희망‘이란 말에 기대어 하루하루 열심히는 아니지만 꾸역꾸역 살았고, 그러는 사이 잘 웃고 잘 떠들고 잘 덤비는 명랑한 나로 돌아와 있었다. 그러는 사이 시에서는 점점 멀어져 갔다.

97년으로부터 무려 24년이 흐른 2021년 3월. 지인이 단톡방에 봄날의 풍경과 함께 정호승 시인의 ‘봄길‘을 올렸다. 어느 카페에 적혀 있던 시라면서. 얼마나 반갑던지. 내가 그의 시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동안, 그의 시들은 ˝단 한 사람이라도˝라던 시인의 바람을 보기 좋게 배반하고 무수한 사람들을 위무해왔고 교과서에도 실려 학생들을 위로, 아니 어쩌면 괴롭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2021년 3월 1일. 가수 안치환이 정 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 디지컬 싱글 ‘봄길‘을 발표했다. 안치환은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응원하고 싶어 이 곡을 지었다며 앨범 발매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길고 지루한 코로나시대를 견디고 있는 모두에게 힘이 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어려운 시기일수록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묵묵히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이 ‘봄길’의 주인공입니다​추운 겨울의 한파와 눈보라를 이겨내고 새로운 생명을 꽃피워 내는 언제나 반가운 봄. ​그 봄의 기운을 받아 하루 빨리 마스크를 벗고 활짝 웃으며 반가운 인사와 따뜻한 손을 맞잡을 수 있는 평범한 인간의 날들이 오길 기원합니다. ​​​함께 걸을 수 있는 ‘봄길’을 기다립니다.˝
https://youtu.be/8G9ILXSfVi4

남쪽 지방에는 봄꽃들이 벌써 만개했다지. 봄길은 꽃길이기만 할까. 아니아니. 오늘 내가 본 봄길 중 하나는 보도블럭 바닥을 뚫고 올라온 민들레와 이름 모를 풀의 길, 보도블럭 아래 헐거워진 흙들을 부서뜨리며 조금씩 조금씩 길을 내 기어이 햇빛 세례를 받고야 만 의지의 길이었다. 희고 붉고 노란 봄꽃들 뒤에서 아기 속살 같은 연두빛 잎들을 장착하기 시작하는 가지들의 길이었다. 봄길이 아름다운 것은 이런 생명력 때문이다.

정호승 시인은 1950년생이다.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는 90년 가을 <<별들이 따뜻하다>> 이후 시인이 7년 만에 펴낸 다섯 번째 시집이다. 시인의 나이 47세 때였다. 시를 쓰지 않은 6년 동안 시인은 소설을 썼다. 1993년 10·26과 김재규를 다룬 3권 짜리
장편소설 <<서울에는 바다가 없다>>를 발표했다. 그러나 6년간 소설 작업에 매진하던 시인은 1996년 가을쯤 이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사람마다 자신의 문학적 기질에 맞는 장르가 있다. 나는 소설에 대한 문학적 기질을 갖고 태어난 사람이 아니다. 시적 기질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다.’ 정 시인은 그 해 10월부터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해 이듬해 봄 한 권의 시집을 낼 분량을 다 썼다. 그렇게 탄생한 시집이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이다. 이 시집은 출판사 추산 15만부 이상이 팔린 것으로 집계된다.

보라, 정 시인은 길이 끝났다 싶은 곳에서 또 하나의 길을 발견했다. 다음에는 스스로 길이 되었고, 그 길을 지금도 ˝한없이˝ 걷고 있다. 그 ‘봄길‘을 나도 같이 걸어가고 있는 사람이어서 흐릿한 봄날인데도 마음만은 화사한 봄날이었다.

‘봄길‘은 2016년 열림원에서 출간된 <<외로우니까 사람이다>>에도 수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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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3-29 08:2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시집 제목이 너무 강렬하네요^^ 정호승 정현종님 시들 가끔씩 읽으면 정말 좋더라구요. 항상 좋은 시를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행복한책읽기 2021-03-29 11:04   좋아요 4 | URL
그죠. 두 시인의 시는 참 편안해요. 같이 시를 읽어줘 저야말로 감솨감솨^^

미미 2021-03-29 10:2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왜 이렇게 강렬한가 했어요. 책읽기님 후기를 읽고보니 그럴 수 밖에 없네요.
이런 사랑에 눈에 띄지 않는 길 바닥의 민들레나 이른 바 잡초를 연결지으시다니 놀랍고 놀랍습니다. 저도 때때로 어떤 꽃 못지않게 피워내는 그 모습들에 시선을 빼앗기거든요. 한 사람을 살리는 것은 온 생명을 살리는 것이란 말도 떠올랐어요. 시인의 지향점은 그런 점에서 더 빛나는 듯해요. 너무 좋네요~오늘 글 특히 더요.
책읽기님 책을 쓰셔야겠습니다♡

행복한책읽기 2021-03-29 11:06   좋아요 3 | URL
그니까. 사랑하다 죽을 것 같았는데 저 시집이 저를 살렸네요. 역설적이게도. ㅋㅋ 미미님 속에도 시인이 살던데요. 올리는 글과 사진으로 보아^^

scott 2021-03-29 10:4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비온뒤 더욱 초록빛 향기를 품고 있는 민들레, 누군가 강제로 흔들어 뽑지 않은 이상 저자리에서 몇일후 노란색 희망의 꽃이 피겠죠. 행복한 책읽기님은 시인의 시선으로 사진을 찍으쉼 ^0^

행복한책읽기 2021-03-29 11:08   좋아요 4 | URL
그 노란 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비 온 뒤라 색들이 더 선명했어요. scott님은 보는 눈이 정말 밝으심^^

희선 2021-03-30 02:3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만난 어른이 읽는 동화로 나온 책이 생각납니다 제목이 《항아리》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희망이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이라니, 거기에서 이어진 게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봄에는 꽃만 피지 않지요 봄에 만날 수 있는 연푸른잎이나 풀도 좋아요


희선

행복한책읽기 2021-03-30 16:10   좋아요 1 | URL
우와. 희선님 머릿속에는 책들이 정말 많이 들어 있네요. 누르면 나오는 책 자판기 같아요. <<항아리>>는 검색이 안 되고,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 찾았어요. 정호승님 책이었다니. 감사합니다. 희선님 리뷰도 찾아 보았음요.^^

붕붕툐툐 2021-03-30 12: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행책님의 20대를 함께 걸었다니 시인이 들으면 넘 행복할 거 같아요! 다 만날 때가 있고 헤어질 때가 있는 거겠죠~ 시 다시 읽어도 진짜 좋아요~👍

행복한책읽기 2021-03-30 16:13   좋아요 1 | URL
그죠. 정호승 시인을 직접 뵌 적이 있는데, 그때 이 얘길 못해 드렸어요. 여 또 만나게 되면 꼬옥 알려드려야겠어요. 과연??? ㅋ 시는, 맞아요. 다시 읽으니 진짜 좋네요. 나이 들어 읽으니 더 좋네요. 붕붕툐툐님 행차 해 댓글 남겨주셔 감솨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