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314 #시라는별 80
진짜 이야기 True Stories
- 마거릿 애트우트 Margaret Atwood
1
진짜 이야기를 청하지 마라.
왜 그게 필요한가?
그것은 내가 펼치는 것이거나
내가 지니고 다니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항해하며 지니는 것,
칼, 푸른 불,
행운, 여전히 통하는
몇 마디의 선한 말, 그리고 물결.
2.
진짜 이야기는 해변으로
내려가는 도중에 잃어버렸다, 그것은 내가 결코
가진 적 없는 어떤 것, 이동하는 빛
속에서 검은 나뭇가지들이 엉킨 것,
소금물로
채워진 흐릿한
내 발자국, 한 움큼의
조그마한 뼈들, 이 부엉이의 죽음.
달, 구겨진 종이, 동전,
옛 소풍의 반짝임,
연인들이 모래 속에
백 년
전 만든 구멍들, 단서는 없다.
3
진짜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들 속에 있다.
어지러한 색깔들, 폐기되거나 버려진
옷더미 같은,
대리석 위의 마음 같은, 음절 같은,
도살업자가 버린 것과 같은.
진짜 이야기는 악랄하고
다층적이며 결국
진실하지 않다. 왜 너는
그것이 필요한가? 진짜 이야기를
한 번이라도 청하지 마라.
마거릿 애트우드의 『진짜 이야기』를 두 달 전 구매한 뒤 고이 모셔 놓았다가 2주 전부터 뒤적거리기 시작하다 며칠 전 다 보았다. ‘읽었다‘가 아닌 ‘보았다‘고 말하는 것은 내가 이 시집에 수록된 시들을 거의 읽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난 해 하 다. 꺼이~~~
2020년 12월에『도덕적 혼란』을 읽고 나는 애투우드의 문체에 반해 버렸었다. 당시 100자평에도 썼지만, 글을 읽는 내내 물 위를 거니는 느낌이었다. 찰랑찰랑. 남실남실. 거문고 줄을 타는 느낌, 튕튕튕튕.(그래본 적은 없지만 ^^;;;). 물결 치는 리듬감. 음악 같은 시적 문체. 거리 두기 화법. 무심한 섬세함. 묘한 긴장감. 일상 속 익살까지. 뭐 하나 나무랄 데가 없는 연작 소설이었다. 어떻게 이런 글쓰기가 가능할까 신기해서 애트우드의 삶을 엿보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애트우드의 창작 활동의 시작은 ‘시‘였다.
1939년 캐나다에서 태어난 애트우드는 곤충학자인 아버지를 둔 덕에 학교라는 공간의 짜여진 수업보다 캐나다 북부의 산림 지대를 돌아다니며 자연과 책을 벗하며 지냈다. 관찰과 읽기를 바탕으로 여섯 살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애트우드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영어 선생님이 이런 말로 제자의 시작 활동을 격려해 주었다고 한다. ˝너의 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정말 훌륭한 작품이야. 앞으로도 계속
글을 쓰렴.˝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 126쪽)
애트우드의 시를 처음 읽어본 외국 독자로서 말하자면, 나는 제대로 이해한 시가 거의 없다. ˝정말 훌륭한 작품˝ 이라고는 아예 못 느꼈다. 내가 느낀 것은 역부족이었다. 번역의 문제는 아닌 것 같고,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의 배경 지식이 모자란 탓인 듯하다.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진짜 이야기>는 61편의 시들 중 가장 읽기 편했다. 시인은 이런 질문을 던진다. 진짜 이야기란 무엇인가. 진짜라고 믿었던 이야기는 과연 진짜일까. 진짜 이야기가 있기는 한 것일까. 화자가 달라지면 이야기도 달라진다. 이것은 리베카 솔닛도 주목한 지점이다.
˝누가 이야기의 주인공 자리를 차지하는지는 대단히 정치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페미니즘은 유명한 고전의 서사를 전복하고 주인공이 아닌 주변 인물에 초점을 맞추어 새로 쓴 여러권의 문학 작품을 선물하기도 했다.˝ (『이것은 누구의 이야기인가』 35쪽)
애트우드는 이 시집에서 그런 전복적 이야기를 시화했다. ˝폐기되거나 버려진 옷더미˝ 나 ˝도살업자가 버린 것과 같은˝ 이야기를 찾아내 그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한다. 그들은 돼지, 쥐, 올빼미, 까마귀 같은 짐승들이거나 사이렌, 키르케, 에우리디케, 뱀 여자, 오르페우스,
페르세포네, 트로이의 헬렌 같은 신화 속 인물들이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말한 사람들은
모든 것을 원한다.
나를 화나게 했던 것은 이런 탐욕이
아니라, 거짓말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당신에게
당신이 계획한 여행을 위해
요구한 음식을 주었다. 그러나 당신은 여행을 계획하지 않았고
우리 둘 다 알고 있었다.]
(<키르케 / 진흙 시> 중)
키르케를 마녀로 규정한 것은 누구인가. 그녀가 목소리를 낸다면 뭐라고 항변할까. 이런 의문과 이런 시도는 정말 멋지지 않은가. 애트우드의 시들을 태반 이해하지 못했지만, 시인의 의도만큼은 대충 헤아릴 수 있었다. 그래서 나희덕의 『가능주의자』와 함께 재독, 삼독을 할 예정이다. 물론, 지켜질지는 미지수지만. ㅋ
˝역사상 인간이 어딘가에서 이미 한 일만을 이야기 속에 넣는다.˝
이것은 애트우드의 창작 원칙이다. 내가 『도덕적 혼란』을 비롯한 여러 외서에서 느끼는 인간 삶의 어떤 보편성, 그 느낌이 저 원칙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그러니까 사람 사는 거, 다 거기서 거기, 도찐개찐이라는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