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322 #시라는별 81
참 우습다
- 최승자
작년 어느 날
길거리에 버려진 신문지에서
내 나이가 56세라는 것을 알고
나는 깜짝 놀랐다
나는 아파서
그냥 병(病)과 놀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내 나이만 세고 있었나 보다
그동안은 나는 늘 사십대였다
참 우습다
내가 57세라니
나는 아직 아이처럼 팔랑거릴 수 있고
소녀처럼 포르르포르르 할 수 있는데
진짜 할머니 맹키로 흐르르흐르르 해야 한다니
최승자 시인의 여섯 번째 시집 『쓸쓸해서 머나먼』은 2009년 출간된『연인들』이후 시인이 11년 만에 발표한 시집이다. 그 침묵의 11년간, 시인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오랜만에 詩集을 펴낸다.
오랫동안 아팠다.
이제 비로소 깨어나는 기분이다.
- 시인의 말(2010년 1월)
˝아파서 / 그냥 병(病)과˝ 노는 사이 사십대였던 시인은 오십대가 되었다. 담배 한 대 피우는 사이 십 년이 흘렀다고 시인은 털어놓는다.
담대 한 대 피우며
한 십 년이 흘렀다
그동안 흐른 것은
대서양도 아니었고
태평양도 아니었다
다만 십 년이라는 시간 속을
담배 한 대 길이의 시간 속을
새 한 마리가 폴짝
건너뛰었을 뿐이었다
- <담배 한 대 길이의 시간 속을> 중
˝쓸쓸해서 머나먼˝ 그 길고도 짧은 시간 동안 시인은 이사를 준비했던가 보다. 절망의 나락으로 치닫던 선언적 시구들이 조금 순해졌고, 자기 속으로만 파고들던 응시를 세상 밖으로 조금 돌렸다.
내 詩는 지금 이사 가고 있는 중이다
오랫동안 내 詩밭은 황폐했었다
너무 짙은 어둠, 너무 굳어버린 어둠
이젠 좀 느리고 하늘거리는
포오란 집으로 이사 가고 싶다
그러나 이사 갈 집이
어떤 집일런지는 나도 잘 모르다
너무 시장 거리도 아니고
너무 산기슭도 아니었으면 좋겠다
아예는, 다른, 다른, 다, 다른,
꽃밭이 아닌 어떤 풀밭으로
이사 가고 싶다
- <내 詩는 지금 이사 가고 있는 중> 전문
˝꽃밭이 아닌 어떤 풀밭으로˝ 이사를 가기 위해 시인이 한 작은 행동은 어떻게든 시를 쓰는 것이었다.
더더욱 못 쓰겠다 하기 전에
더더욱 써보자
무엇을 위하여
아무래도 좋다
- <더더욱 못 쓰겠다 하기 전에> 중
˝어둠만이 들끓고˝ ˝길 끊어진 시간 속에서˝(<나는 기억하고 있다> 중) 시인은 오래 침잠해 있다 간간이 시를 쓰다 깨달았다.
중요한 것은 죽음도 삶도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삶 뒤에 또 삶이 있다는 것이었다
죽음 뒤에 또 죽음이 있다는 것이었다
- <중요한 것은> 중
삶과 죽음이, 순간과 영원이 순환하는 세상에서 우리 인간은 사막 한가운데서 ˝별빛 아래 홀로 가는 낙타˝이다.
누구나 별 아래서 잠든다
길을 묻다 지쳐서
길 위에서 잠든다
누구나 별 아래서 잠든다
죽음을 죽음으로 일깨우면서
- <홀로 가는 낙타 하나> 중
결국 별 아래서 잠들고 말 찰나의 인생이지만, 어떤 순간은 우리가 영원을 산다는 느낌을 준다. 바로 이렇게.
병원 앞 컴퓨터실
고요한 실내
책상 앞에서가 내 인생의
가장 큰 천국이었음을 깨닫는다
- <책상 앞에서> 중
그가 읽는 詩의 행간들 속에서
고요가 피어오릅니다
그 속에 담겨 있는
時間의 무상함
- <어떤 풍경> 중
황홀합니다
내가 시집을 쓰고 있다는
꿈을 꾸고 있는 중입니다
- <바가지 이야기> 중
코로나19 양성자가 되었다. 오미크론은 차례를 기다리면 번호표를 준다더니, 딸과 아들이 번호표를 받더니 나까지 얼결에 받게 되었다. 번호표는 계시처럼 온다. 나의 계시는 약간의 목 따가움과 수상한 기운이었다. 사흘을 앓았다. 끙끙. 고열은 없었으나 미간이 기분 나쁘게 지끈거렸고 침을 삼키기 힘들 만큼 목이 따가웠으며 뭐라 말할 수 없이 온몸이 아팠다. 경험자들의 말이 늘 옳은 건 아니지만 이번에는 적중했다. ˝한 사흘 아프고 나면 좋아져.˝ 진짜로 그랬다.
˝내 인생의 가장 큰 천국˝은 바로 책 앞. 내 삶의 ˝고요가 피어오˝르는 때는 책을 읽는 순간. 나흘째 되는 날, 나는 최승자의 『쓸쓸해서 머나먼』을 다시 펼쳐 읽었다. 아프면 사람들이 멀어진다. 쓸쓸해진다. 쓸쓸해서 더 멀어지고, 더 멀어져 더 쓸쓸해진다. 나도 너도 누구도 오래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시집은 최승자 시인이 오래고도 지긋지긋한 아픔에서 깨어나려는 꿈틀거림으로 읽혔다. 마지막 시 마지막 연의 ˝황홀합니디˝라는 고백에 숙연한 울컥함이 올라왔다.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시인이 아이처럼 팔랑거리고, 소녀처럼 포르르포르르 날아다니면 좋겠다. 시집을 읽는 동안 나는 ‘황홀‘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고요‘에 빠져들 수는 있었다.
<사라진 시간>은 작년에 본 최고의 영화였는데, 이 시집을 읽는 동안 머리 위로 둥실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