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308 #시라는별 79 

곰의 내장 속에서만 
- 나희덕 

괴혈병에 걸리면 더이상 고기를 씹을 수 없게 되고 
북극에서 그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 

북극에서는 죽어도 썩을 수가 없어서 
유빙들 사이로 떠다니며 영원히 잠들 수 없다지 

죽으러 갈 수 있는 곳은 
북극곰의 내장, 
따뜻한 내장 속에서만 천천히 사라질 수 있을 뿐 

아들은 병든 어머니를 업고 가서 얼음 벌판에 내려놓고 
어머니를 곰에게 먹이로 바치고 
어머니는 어서 가라, 아들에게 손을 흔들고 
아들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고 
언젠가 자신이 묻힐 곰의 캄캄한 내장 속을 생각하고 

이글루 속에서 
이글루 속에서 

아이들은 자라고 
아이들의 이도 자라고 
물개나 바다표범을 사냥하는 법을 배우고 
곰을 잡아 곰고기도 먹지만 
이누이트족이 곰의 내장을 먹지 않는 건 그래서일까 

더운 그것이 어머니의 무덤인 것만 같아서 
아직 그 속에 남아 있는 것만 같아서 


* 실제로는 곰의 내장에 치사량의 고농도 비타민A가 들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문학동네시인선 167번째 시집이자 나희덕 시인의 아홉 번째 시집 『가능주의자』에서 나희덕이 전하는 ‘시인의 말‘은 묵직하고 뜨끈하다.

어떤 핏기와 허기와 한기가 삶을 둘러싸고 있다.
그것은 일종의 벌거벗음에서 왔다.

피. 땀. 눈물.
이 세 가지 체액은 늘 인간을 드나든다.

마음이 기우는 대로
피와 땀과 눈물이 흐르는 대로 가보면
통증과 배고픔과 추위를 느끼는 영혼들 곁이었다.

시는 영원히 그런 존재들의 편이다.

피. 땀. 눈물. 인간을 드나드는 세 가지 체액. 이 시집에 실린 대부분의 시가 이 세 가지 체액의 넘나듦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곰의 내장 속에서>라는 시가 내게는 가장 큰 일렁임으로 다가왔다.

자식은 부모의 피로 태어나고 땀으로 길러지고 눈물로 삼켜진다. 시신이 썩을 수 없는 차디찬 북극. 아들은 괴혈병에 걸린 어미를 업고 곰이 드나드는 얼음 길목에 어미를 내려놓는다. 그래야 어미의 육신이 ˝유빙들 사이로 떠다니˝지 않고 곰의 ˝따뜻한 내장 속에서˝ 서서히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어미의 피와 땀과 눈물을 먹고 자란 아들은 어서 가라 손짓하는 어미를, 제 젖줄의 존재를, 돌아보고 돌아보고 또 돌아본다. 아들은 눈물과 한숨과 회한을 삼키며 발길을 돌렸으리라. 그에게는 기다리는 처자식들이 있고, 살아남은 이들은 이들대로 무시로 찾아드는 ˝통증과 배고픔과 추위˝를 견디며 살아가야 하므로.

곰의 내장에 들어 있는 치사량의 고농도 비타민A. 이누이트족이 곰의 내장을 먹지 않는 건 그것 때문이지만 시인은 그곳이 ˝어머니의 무덤인 것만 같아서, 어미가 ˝아직 그 속에 남아 있는 것만 같아서˝일지 모른다고 해석한다. 슬프고도 아름다운 시적 풀이.

˝피와 땀과 눈물이 흐르는 대로˝ 가서 ˝통증과 배고픔과 추위를 느끼는 영혼들˝의 편에 서려는 자가 비단 시인만은 아닐 것이다. 나는 정치인도 그런 이들의 편에 서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국민의 피와 땀과 눈물을 닦아 줄 수 있는 자여야 한다고. 그러니 투표는 ˝불가능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일종의 진단 키트가 되어줄 것이다.

저는 가능주의자가 되려 합니다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믿어보려 합니다 
.
.
(중략)
나의 시대, 나의 짐승이여, 
이 이빨과 발톱을 어찌하면 좋을까요
찢긴 살과 혈관 속에 남아 있는 
이 핏기를 언제까지 견뎌야 하는 것일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무언가 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어떤 어둠에 기대어 가능한 일일까요 
어떤 어둠의 빛에 눈멀어야 가능한 일일까요 

세상에, 가능주의자라니, 대체 얼마나 가당찮은 꿈인가요 (<가능주의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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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셀통통 2022-03-08 15: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시집은 기존에 내가 읽었던 시집과 다르다.

충격이다.



어둡고, 슬프고

우울하고, 고통스럽다.

핏물이 진하고 흥건하게

‘가능주의자’라는 책을 덮는다.

그래서 표지도 시뻘건 피의 색인가???
시인은 현실의 무게를 끝까지 응시하고 기록하는 것을 자신의 역할로 인식하는 것 같다.



점점 나빠지는 세상을 향해 문을 닫는 것
여섯째 날의 어둠을 받아들이는 것


어둠을 끝까지 응시하는 것

토리노의 말 중 일부


큰 빛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반딧불이처럼 깜박이며

우리가 닿지 못한 빛과 어둠에 대해

그 어긋남에 대해

말라가는 잉크로나마 써나가려 합니다

가능주의자 중 일부


어둠속에 선명하고

차가움속에 날카롭다.

‘백운에서 다산 생각’ 다만 서정적이다.



머뭇거리는 발등에 동백꽃이

말을 걸듯 투욱, 투욱, 떨어져내리고

그 꽃을 누군가의 마음처럼 받아들고 내려갔다.


벌써 흙이 스며드는 꽃도 있다

흩어진 동백꽃은 밟지 않고 지나기가 쉽지 않았다


행복한책읽기 2022-03-10 23:59   좋아요 2 | URL
몽셀통통님. 이 시집이 님에게 충격을 주었군요. 붉은 표지는 통통님 해석이 맞을 거예요. 피. 땀. 눈물이 섞여도 결국 붉은 색이잖아요. 저는 나희덕 시인을 좋아하는데, 이 시집 읽고 더더 좋아졌어요. 시사성 짙은 내용에 어떻게 이토록 슬프면서 아름다운 서정성을 입힐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매일 한편씩 또 읽고픈 시집이에요.^^ 몽셀통통님이 느낀 충격은 값진 충격일 것 같아요. 왜냐하면 머리를 둔중히, 혹은 강렬히 얻어맞는 경험은 아무때나 할 수 있지 않잖아요. 그 충격은 아마도 책이 선사한 희열! 의 다른 버전일 것 같아요. 책으로 종종 뵈어요~~~^^

mini74 2022-03-08 17: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곰의 내장이 내 어머니의 무덤이라니 ㅠㅠ 자연에 따라 장례풍습은 다르지만 애끓는 마음은 다 같죠. 시인은 역시 시인이군요. 넘 슬퍼요 ㅠㅠ

행복한책읽기 2022-03-11 00:02   좋아요 2 | URL
그죠. 시인은 정말 다르죠. 이 시집에는 애끓는 이야기들이 제법 많아요. 근데 흘려보거나 들으면 안될 이야기들이에요. 정말 강추하고픈 시집이랍니다.^^

희선 2022-03-09 01:4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북극에서는 그렇게 하는군요 마음이 아프겠습니다 괴혈병은 비타민 C가 모자라서 생기는 병이었군요 오래전에 바다에 나간 사람이 걸린 병... 북극 사람은 사냥한 동물 콩팥과 그 위에 붙은 부신까지 먹어서 괜찮다는 말이 있네요 국민이 흘리는 피와 땀과 눈물을 닦아주는 정치인이 많기를 바랍니다


희선

행복한책읽기 2022-03-11 00:05   좋아요 2 | URL
세상 어디에나 슬픈 이야기들이 있네요. 북극 이누이트족의 고려장 같은 이야기는 참 충격이었어요. 당선된 새 대통령이 국민의 피땀눈물을 닦아주길 간절히 바라나, 물음표가 자꾸 생겨 좀 암담하답니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