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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우리 영혼은
켄트 하루프 지음, 김재성 옮김 / 뮤진트리 / 2016년 10월
평점 :
당신들의 밤은 견딜 만한가요?
켄트 하루프의 <<밤에 우리 영혼은>>은 잔상이 오래 남는 책이다. 어떤 책은 그 속을 채운 내용보다 그 책을 둘러싼 에피소드가 더 기억에 남기도 하는데, 이 책은 내용도 에피소드도 오래 남을 것 같다. 나는 켄트 하루프라는 작가를 전혀 몰랐다. 내게 이 저자를 알려준 이는 얼마 전 완독한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의 어슐러 K. 르 귄이었다. 켄트 하루프는 학생들을 가르치며 틈틈히 글을 쓰다 불혹을 넘긴 마흔한 살의 나이에 처음으로 소설을 발표했다고 한다. 생의 대부분을 콜로라도 주의 한 소도시에서 살았고, '홀트'라는 가상의 마을을 만들어 소설을 썼다고 했다. 이 소설은 저자의 마지막 작품이자 유작이다. 저자가 죽어가면서 썼다는 이 작품에 대해 르 귄은 감동과 경외감을 느꼈다며 버릴 것이 없는 말들로 가득한 귀한 인생 "보고서"라고 평했다. 사실 이런 리뷰에도 나는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문장을 읽어 내려가는 순간부터 내 몸과 마음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그게 옳긴 한 건지조차 잘 모르면서도 옳다고 여기는 일을 계속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에 대해서, 우리가 서로에게나 스스로에게 얼마나 가혹한지에 대해서, 우리들 대부분이 얼마나 힘들게 일하는지에 대해서, 우리가 얼마나 많이 갈망하고 얼마나 조금에 만족하는지에 대해서 계속 쓸 수 있었다. / . . . 수많은 소설이 행복 추구에 대해 썼지만, 이 소설은 실제 행복의 빛을 발한다."(<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 403쪽)
나이가 들면, 세상 경험이 많아지면, 세상에 좀 익숙해지면, 사는 것이 수월해지고 편안해질 줄 알았다. 그렇게 느껴지는 날들, 그렇게 느껴지는 순간이 언뜻언뜻 있기는 하다. 그런데 어느 날 에피파니(epiphany. 깨달음)가 찾아들었다. 아, 아무리 살아도 삶은 늘 낯설고 힘겹겠구나. 낯섬과 힘듬을 받아들이고 살아야 하는 거구나. 모두가 그렇게 사는 거구나. 이 깨달음은 세상 모든 사람에 대한 연민의 싹을 틔웠다. 저기, 저 책에, 아주 많은 것을 갈망하지만 아주 조금밖에 만족하지 못하는 삶을 사는 이들이, 이러고 사는 것이 옳은지 아닌지 잘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그 삶을 계속 영위해 가는 이들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고 하니 읽지 않고는 배겨날 수가 없었다. 나는 내 집 식탁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나는 서점으로 달려가는 대신 자전거 페달을 밟고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나와 달리 <<밤에 우리 영혼이>>의 에디 무어는 두 발로 천천히 걸어 한 이웃을 찾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애디 무어는 루이스 워터스를 만나러 갔다. 오월, 아직 완전히 어두워지기 바로 전의 저녁이었다."(7쪽)
이 책의 첫 문장은 이채롭다. 그냥 '어느 날'이 아니고, "그러던 어느 날"이다. "그러던"이라는 이 짧은 한 마디에는 많은 것이 함축돼 있다. 에디 무어가 루이스 워터스라는 인물에게 향하기까지 있었을 무수한 일들과 무수한 감정이 내포되어 있는 은유이다. 에디 무어는 환한 대낮도 아니고 야심한 밤도 아닌 어둑어둑해지는 저녁에 루이스 워터스의 문을 두드렸다. 황혼의 시각. 그들이 맞이한 인생의 시각. 숱한 망설임 끝에 당도한 시각이다. 찾아올 까닭이 없는 이의 영문 모를 방문에 어리둥절해하는 루이스에게 에디가 어렵사리 입을 뗀다. 르 귄도 지적했지만 켄트 하루프는 말을 아낀다. 입을 열기까지 에디의 감정이 어떠했을지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을 수 있었겠지만 하루프는 사양한다. 그는 모든 행간을 독자의 상상력에 맡겨 버린다. 이것이 하루프 문체의 매력이자 허점이겠다. 나는 대화체로 이루어진 이 건조하고 담담한 문체가 정말 마음에 들지만 어떤 독자에게는 빈 공간이 많은 헐렁한 문체로도 읽힐 수 있을 테니까. 무튼, 하루프는 직진형이다. 시시콜콜 개입하는 전지적 작가 시점을 뒤로 하고 오로지 등장인물들의 대화로 이야기를 끌어가는데, 독자들도 같이 끌고 간다.
"가끔 나하고 자러 우리 집에 올 생각이 있는지 궁금해요. / 우리 둘 다 혼자잖아요. 혼자 된 지도 너무 오래됐어요. 벌써 몇 년째예요. 난 외로워요. 당신도 그러지 않을까 싶고요. 그래서 밤에 나를 찾아와 함께 자줄 수 있을까 하는 거죠. 이야기도 하고요. / 아니, 섹스는 아니고요. 나야 성욕을 잃은지도 한참일 텐데요. 밤을 견뎌내는 걸, 누군가와 함께 따뜻한 침대에 누워 있는 걸 말하는 거예요. 나란히 누워 밤을 보내는 걸요. 밤이 가장 힘들잖아요. 그렇죠?" (9쪽)
"밤이 가장 힘들잖아요." 이 문장은 이 책을 읽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강력한 문장이다. 배우자를 잃은 지, 자식들이 세상 밖으로 나간 지, 삶의 흥미를 잃은 지 오래 된 70대의 두 노인이 앞으로 어떤 밤을 보내게 될지 궁금증을 던지게 하는 문장이다. 그러나 이 문장의 가장 큰 강력함은 등장인물을 향해 울컥 하게 만드는 연민이다. 나는 이 문장을 읽고 잠시 숙연해졌다. 마흔 하나에 남편을 잃고 홀로 긴 세월 살아낸 내 어미가 생각나서, 그 언젠가는 나도 겪을 일일지 모른다고(어쩌면 십중팔구) 느껴져서 말이다.
그리하여 오로지 밤을 견디기 위한 두 사람의 동거 아닌 동침이 시작된다. 그들은 밤에만 만난다. 커다란 킹사이즈 침대에 나란히 누워 이야기를 나눈다. 어쩌다 바람을 피웠는지, 어쩌다 결혼하고 어쩌다 아이를 잃었는지, 무엇이 되고 싶었는지, 무엇을 하고 싶었는지 등등등. 그 이야기들은 인생의 회한으로 가득하다. 그랬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럴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라는 이야기들로. 대개가 그렇듯 이 소설 속 등장인물들도 남자보다 여자 쪽이 더 현명해 보인다. 루이스가 후회 어린 어조로 토로한다.
"삶이, 결혼이 어때야 한다는 관념 같은 걸 갖고 있었는데 우리의 삶과 결혼은 거기서 멀었어요. 그런 점에서 나는 그녀를 실망시킨 셈이죠. 다른 남자였어야 했어요."(143)
스스로에게 가혹하게 구는 루이스에 비해 에디는 인간의 불완전함을 이해하기에 스스로에게 관대한 편이다. "눈먼 사람들처럼"(143쪽) 이리 부딪치고 저리 부딪치며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이 인생임을 먼저 터득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런 에디조차 어떻게 해도 태연자약해지지 않는 인생의 단면이 있다. 바로 자식 문제다. 한 아이를 잃고 남은 아이에게 충분히 눈 맞추고 귀 기울이지 못했다는 뉘우침, 분노와 억울함이 켜켜이 쌓여가는 그 마음을 어루만져 주지 못했다는 자책이 에디의 가슴을 짓누른다. 그런 에디에게 이번에는 루이스가 심장을 마사지해주듯 위로의 말을 건넨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고쳐줄 수는 없잖아요. / 늘 고쳐주고 싶어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죠." (155-6쪽)
그렇다. 자식도 품 안의 자식이고, 품을 벗어나면 다른 사람이다. 더 정확하게는 나와는 다른, 또 하나의 인격체이다. 부모의 손을 놓고 부모의 품을 떠나 사는 자식의 삶은 부모의 눈에 대개는 불안하고 미덥지 못하다. 할 수만 있다면 어긋나 있는 그 삶을 고쳐주고만 싶다. 자식은 나를 그렇게 바라보는 부모의 눈길이 못 마땅하다. 내가 어때서요, 뭘 해줬다고 그래요, 라고 쏘아 붙이고는 부모로부터 멀리 달아난다. 내 딴에는 애를 쓴다고 썼지만 자식의 삶을 어찌해볼 도리가 없을 때, 무언가를 했는데도 손에 쥔 것이 없다고 느껴질 때, 그렇다고 무언가를 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 때. 그럴 때 찾아드는 무력감, 낭패감, 허무함, 그리고 쓸 쓸 함. 당신 인생에 그런 시기가 왔을 때, 그런 감정이 들이닥칠 때, 밤이면 이불 속을 뒤척거려야 할 때, 당신은 남은 나날을 어떻게 보내고 싶은가요? 라고 이 소설은 묻고 있다.
에디와 루이스는 인생 70에 모험을 감행했다. 남들에게 손가락질 당한 만한 모험이었다. 하지만 그들을 들뜨게 한 오랜 만의 설렘은 손가락질 따위 가뿐히 뛰어넘게 해주었다. 그들이 나눈 이불 속 동침과 대화는 별거 아닌 듯하지만 아주 별거인 것들이다. '나'라는 존재를 숨 쉬는 존재로 실감하게 해주는 것들이므로. 그들은 서로 나누고 공감하고 어루만졌다. 그거면 충분하지 않은가.
사실 나는 한 명의 독자로서 에디 무어가 자신의 발품을 들여 그런 과감한 제안을 하는 이가 꼭 남자여야 했을까 하는 대목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소설의 결말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나 많은 인생이 그렇게 마음에 차지 않게 흐르지 않던가. 그러니 나는 내 늙은 날의 밤들을 어찌 견딜 것인지, 그것만 더 고민해 보겠다.
하루프의 문체가 마음에 들어 <<플레인송>>도 대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