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31 낯설다
보름 전부터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를 읽고 있다. 흐음. 낯설다. 아주 낯설다. 그래서 당혹스럽다. 작년에 읽은 <도덕적 혼란>이 정말 좋아서 애트우드 소설을 올해 모조리까지는 아니고 몇 권 읽어 보겠노라 야무지게 약속했건만(나 자신과, 그리고 라로님과 ㅋ), <도덕적 혼란>라는 많이 달라 약속 이행에 빨간불이 켜졌다.
<시녀 이야기>는 책 뒤편에 수록돼 있는 '역사적 주해'를 먼저 읽으면 낯설음이 상쇄될 것 같지만, 나는 아무런 정보 없이 뛰어들었을 때 얻어맞게 되는 이 감각을 즐기는 편이다.
디스토피아 소설이라고 했던가. 절반을 넘어서자 좀 적응되었다. 문체는 여전히 아름답다. 애트우드만의 리드미컬할 시적 문체. 그리고 깊은 사유에서 길어낸 아름다운 문장들이 있다.
우리는 한때 체육관으로 쓰던 곳에서 잠을 잤다. - P11
우리는 소리를 거의 내지 않고 서로 속삭이는 법을 배웠다. 흐릿한 어둠 속에서 아주머니의 눈을 피해 팔을 뻗어 허공을 가로질러 서로의 손을 만질 수 있었다. 머리를 바짝 붙인 채로 옆으로 돌아누워 서로의 입을 지켜보며 입술을 읽는 법을 터득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침대에서 침대로 이름을 교환했다. 알마. 재닌. 돌로레스. 모이라. 준. - P13
이게 내가 꾸며내는 이야기라고 믿고 싶다. 그렇게 믿을 필요가 있다. 반드시 믿어야만 한다. 이런 것들이 꾸며낸 이야기일 뿐이라고 믿을 수 있어야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 이게 만일 내가 꾸며낸 이야기라면, 결말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언젠가 끝이 나고, 진짜 삶은 그 후에 이어질 것이다. 끝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면 된다. - P73
우리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무시하며 살았다. 무시한다는 건 무지와 달리, 노력해야 하는 일이다. - P101
한심스러울 정도로 행복하다. / 행복은 참 사소한 데서 온다. - P131
하지만 이 글을 읽는 당신이 혹시 남자라면, 그리고 여기까지 포기하지 않고 읽어왔다면, 제발 명심해 달라. 당신은 여자로서, 남자를 용서해야만 한다는 유혹이나 기분에 절대 시달리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잊지 마라. 정말이지 그런 충동은 참으로 거역하기가 힘들다. 하지만 용서 역시 일종의 권력이다. 용서를 구하는 일 역시 권력이며, 용서를 유보하거나 베푸는 일 또한 일종의 권력이다. 아마 그만큼 커다란 권력도 없을 것이다. - P235
이 세레나의 정원에는 어딘지 전복적인 분위기가 있다. 묻혀 있던 것들이 한마디 말도 없이 찌르듯 위로 솟아나 햇볕을 받으며 말을 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침묵을 강요당한 것은 자기 소리를 들어달라고 쾅쾅거리기 마련이다. 물론 조용하게. - P264
내 손가락 사이에 쥐어진 펜은 육감적이고 생명체처럼 살아 움직인다. 펜의 권력이, 펜이 내포하고 있는 글의 권력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펜은 질투를 불러일으켜. - P323
밤이 내린다. 아니 이미 내린 지 오래다. 어째서 밤은 여명처럼 솟아오르는게 아니라 떨어져 내리고 저문다고 말하는 걸까? 하지만 일몰 시각에 동편을 보면, 밤이 내리는 게 아니라 솟아오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구름의 장막 너머 검은 태양처럼 어둠이 지평선에서부터 몸을 일으켜 뭉게뭉게 하늘로 솟아오른다. 눈에 보이지 않는 불길로부터 솟아오르는 연기처럼, 산불이나 도시가 불탈 때 지평선 바로 아래 죽 늘어서 타오르는 불길에서 올라오는 것처럼. 아마 밤은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떨어져 내리는지 모른다. - P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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