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15 #시라는별 67
읽다 만 책
- 오은
핑계는 언제든지 댈 수 있다
책 속에만 사연이 있는 것이 아니다
어려워요
재미가 없어요
취향에 안 맞아요
유행이 지났어요
제목과 달랐어요
시기를 놓쳐버렸어요
결말을 알아버렸어요
영화로도 나왔더라고요
최근에 야근이 많았어요
좀 한가해지니 앞부분이 기억나지 않았어요
급하게 읽은 다른 책이 생겼어요
더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이 나왔어요
끄집어내고 갖다 붙일 사연이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인가
책 속의 주인공은 할 말이 있는데
우리는 입을 다물린다
책 밖에서는 우리가 주인공
할 말이 많아서
대사는 쉴 새 없이 쏟아진다
책 밖의 세계에서는 실시간으로 페이지가 넘어가는데
책 속의 주인공은 머뭇거리고 있다
한동안 그럴 것이다, 혹은 영영
다문 입으로
다 읽은 책은 말이 없다
닫힌 입으로
읽다 만 책은 말이 없다
사다 만 책은 없다
빌리다 만 책이나 버리다 만 책은 없다
읽다 만 책만 있다
다 읽은 책에는 먼지가 쌓인다
읽다 만 책에도 먼지가 쌓인다
하루하루의 더께 속에서
기억과 망각이 동시에 일어난다
당분간 책갈피는 움직이지 않기로 한다
반쯤 열리거나 반쯤 닫힌 입으로
산 입에 거미줄을 치는 표정으로
제자리를 집요하게 더듬는 걸음으로
무수히 접한 처음들
무수히 남은 마지막들
마음이 한번 마음먹고 얼면 봄이 돼도 녹지 않는다
scott님 덕에 알게 된 오은 시인. 이력이 독특하다. 문학과 다소 거리가 먼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한 후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생업은 빅데이터 분석 기업의 사원이고, 본업은 시인이다. 시인지 뭔지 모를 글들을 끄적여놓은 것을 친형이 몰래 투고해 버려 얼떨결에 시인이 되었고, 시를 써아겠다는 순간이 와서 계속 쓰게 되었다. 오은의 시인 명함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고. ˝이따금 쓰지만 항상
쓴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살지만 이따금 살아 있다고 느낍니다.˝
이따금, 항상 쓰는 오은 시인의 『유에서 유』를 대충 훑어 읽다 ‘오호 통재라‘를 연발했다. 이런 유쾌함, 발랄함, 흥겨움을 보았나. 언어를 가지고 제대로 놀 줄 아는 시인이다. 묵직함을 가벼움으로 승화하는 재치와 유머가 음표처럼 날린다. 아이 재밌어, 라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시집의 제목 ‘유에서 유‘의 의미를 오은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당신(YOU), 있음(有), 말미암다(由), 놀다(遊), 흐르다(流)를 포괄하는 단어˝라고. 당신이 있어 같이 놀고 인생을 흘려보내리. 이것은 나의 해석이다.
55편의 시들 중 내 눈에 단연 띈 것은 <읽다 만 책>이다. 왜? 북플 내 프로필에 기록된 ‘읽고 있는 책‘ 수는 81권! 그 중 95퍼센트가 읽다 만 책! 으메 우쩔겨. 우쩌긴 우쩌, 시인의 말따나 ˝접한 처음들˝과 ˝남은 마지막들˝이 무수하나 봄이 여러 번 왔는데도 ˝마음먹고˝ 언 마음이 녹지 않으니 그저 또또 봄을 기다릴 밖에. 언 마음 녹기를 기다릴 밖에. 언젠가 녹아 글자들이 꿀처럼 내 속으로 흘러들 미래를 꿈꾸며.
꿀맛이 왜 달콤한 줄 아니?
꾼 맛도 아니고 꾸는 맛도 아니어서 그래.
미래니까, 아직 오지 않았으니까.
몰라서 달콤한 말들이 주머니 속에 많았다.(<시인의 말>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