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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개념을 찾아서 - 10대를 위한 SF 단편집 ㅣ 창비청소년문학 5
송경아 외 지음, 박상준 엮음 / 창비 / 2007년 11월
평점 :
잃어버린 개념을 찾아서
잃어버린 재미를 찾아서
창비에서 한국 SF소설집이 나왔다. 창비청소년문학 다섯 번째 시리즈로 나온 것이긴 하지만, SF 단편집이라니! 그것도 한국 SF 작가들의 단편집. 참으로 나오기 힘든 물건이 나온 것이다. 물론 최근에 황금가지에서 이영도를 비롯한 듀나, 복거일, 김보영, 고장원 등이 참여한 『얼터너티브 드림』이 출간 됐었다. 하지만 두 작품집을 읽고 만족도를 말한다면 개인적으로 『잃어버린 개념을 찾아서』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그만큼 더 적은 분량과 가격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만족스럽게 읽은 것이다.
또한 여기에 실린 작가들도 『얼터너티브 드림』에는 아마츄어라고 볼 수 있는 작가들의 단편이 실려 있어서 퀄리티가 들쭉날쭉 했다면, 이 작품집은 철저한 기획 하에 나온 작품집이라 오히려 전체적으로 읽는 재미가 균일한 작품집이 되었다.
SF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한 번쯤 구입해서 읽어봐야 할 책이다. 10대를 위한 청소년 책이라서 주저할 필요는 없다. 신경 쓴 작가도 있지만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고 쓴 작가들도 있고 그런 것을 감안하고 봐도 충분히 매력적인 이야기로 가득 찬 소설집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한국 SF 단편 역량이 결집된 멋진 작품집 중 하나이다.
마지막 늑대
첫 번째 작가는 바로 김보영이다. 2004년 「촉각의 경험」으로 과학기술 창작문예 중편 부문에 당선되었고 공동 단편집인 『누군가를 만났어』(행복한 책읽기)에 「종의 기원」 외에 4편의 단편을 실었다. 황금가지에서 나온 『얼터너티브 드림』에도 단편 「땅 밑에」를 실었고, 『한국환상문학단편선』(황금가지)에서도 단편 「몽중몽」을 실었다.( 그 외에도 HAPPY SF 2호에 단편 「진화신화」를 실었으며 현재 웹진 거울에서 활동 중이다.)
현재 한국 SF 작가 중 가장 주목받는 작가 중 한 명으로 최근에 환상문학 웹진 거울에서 개인중단편집인 『멀리 가는 이야기』를 출간하기도 했다.
「마지막 늑대」는 설정부터가 독특하고 흥미로운 소설이다. 지구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용족에게 지배를 받게 된 것이다. 인간들은 드래곤의 애완동물로 전락한다. 인간들과 드래곤 모두 지성을 갖고 있겠으나, 드래곤은 인간들의 지성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들은 서로 공유하는 감각이 달랐기 때문이다. 드래곤이 지구를 지배한다는 설정은 극도로 비과학적이나, 여기서 파생되는 감각에 대한 고찰은 발상의 전환에 따른 경이로움을 느끼게 만든다.
이 작품의 제목에서 말하는 ‘늑대’는 실제 늑대가 아니라 드래곤에게 사육당하지 않고 오히려 반기를 드는 인간을 지칭하는 말이다.
어떻게 보면 이 작품은 작가 김보영이 예전에 발표한 「종의 기원」과 그 외전, 또 「다섯 번째 감각」 등이 혼합된 작품으로 보이기도 한다. 인간이 아닌 다른 종이 지구를 지배하고 있는 환경과 감각의 문제를 꺼내놓은 점 등이 말이다.
이 작품집의 처음을 장식하는 단편으로 훌륭했고, 전체를 통틀어서도 인상에 남는 작품 중 하나였다. 감수성 어린 문장들과 놀라운 발상의 전환 그리고 글을 읽는 재미를 모두 갖고 있는 단편이다.
가말록의 탈출
SF 작가이자 영화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는 듀나의 작품이다. 공교롭게도 앞에 작품인 「마지막 늑대」와 비슷한 느낌을 받게 되는데 이는 인간 외에 다른 종에 관한 문제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늑대」에서 인간은 용족의 애완동물로 전락해 버렸다면 「가말록의 탈출」은 라두라는 외계의 괴물들이 본능적으로 공을 보면 쫓는 ‘가녹’이라는 공놀이에 얽힌 단편이다. 즉 인간의 애완동물이 된 외계 생명체인 것이다.(게다가 생김새는 역시 용과 흡사하다.) 녀석들은 원래 가축이었고, 몇 천 년 전에 다른 누군가가 녀석들을 공놀이 하는 광대로 키운 거라고 한다. 원래 주인들은 멸망했거나 달아났고 지구에서 온 고고학자들이 가녹을 부활시킨 것이다.
이야기는 가말록이라는 이름을 가진 라두가 갑작스런 사고로 탈출하게 되면서 진행된다. 흥미롭게 읽었고 마지막에는 씁쓸한 느낌도 받게 되는 단편이었다. 이런 식으로 외계 생명체를 놀이의 대상으로 본 글은 처음 읽어서인지 신선하기도 하고 재미있었다.
잃어버린 개념을 찾아서
작가 박성환은 2004년 「레디메이드 보살」로 과학기술 창작문예 단편 부문에 당선되었다. 현재 고등학교 국어 교사로 재직 중이다.
제1회 과학기술 창작문예 단편 부문을 수상하면서 처음 알게 된 작가이다. 종교와 과학을 접목시킨 단편 소설을 많이 써냈으며 현재 환상문학웹진 거울 등에서 읽을 수 있다. 최근에는 웹진 크로스로드에 단편 「꿈의 해석」을 실었다.
신선하고 독특한 발상과 부드럽게 읽히는 문장, 유쾌한 문체를 잘 구사하는 작가이며 전반적으로 대부분의 작품들이 만족스럽다. 아직 접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일단 웹진 거울에 올라온 단편들부터 찾아 읽어도 좋을 것이다.
표제작인 「잃어버린 개념을 찾아서」는 제목에서부터 깊은 인상을 받게 된다. 요즘 아이들이 개념이 없다고 하는데 그것을 비꼰 것 같기도 하지 않은가. 내용 역시 사회 풍자적이면서도 SF적인 내용을 잘 담아냈다. 청소년들이 주인공인 단편인데, 외계인과 머리가 좋아지는 기계 등이 결합되면서 독특한 재미를 선사한다.
외계인들의 지구 정복 계획. 그것은 일단 학생들의 머릿속에 ‘어으’들을 내려 보내는 것으로 계획된다. ‘아론’들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아이’와 ‘어른’을 변용한 외계 종족의 명칭에서부터 우스꽝스러운 풍자의 느낌이 확연히 드는 작품이다.
마무리도 제목을 다시금 생각하게 하면서 근사하게 맺고 있다. 유쾌하게 한 번에 읽어 내린 작품 중 하나였다.
엄마의 설명력
SF작가 배명훈은 2005년 「스마트D」로 과학기술 창작문예 단편 부문에 당선되었고 공동 단편집 『누군가를 만났어』에 표제작 외 4편을 실었다. 최근 한국환상문학단편선(황금가지)에도 단편 「초록연필」을 실었고 그 외에도 장르월간지 판타스틱에 단편을 발표했다. 역시 주목받는 SF 작가 중 한명으로 참신한 발상과 흡인력 있는 글을 쓰는 작가이다. 2004년 「테러리스트」로 제46회 서울대학교 대학문학상 단편 부문에서 우수상을 수상했으며, 《Happy SF》 제2호에 「스윙 바이」, 『2006 과학소설 창작문예 수상작품집』에 「모」, 웹진 ≪크로스로드≫에 「조개를 읽어요」를 발표했다.
배명훈 작가를 처음 접할 때 느낌은, 이 작가 어쩌면 이렇게도 능청스럽게 입담이 강할까, 였다. 그만큼 구렁이 담 너머 가듯 황당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솜씨가 뛰어났다. 특히 그 점이 강력히 부각된 작품이 바로 이 책에 실린 「엄마의 설명력」일 것이다.
이 소설은 지동설이 아니라 천동설을 주장하는 엄마와 그 말에 긴가민가하는 딸을 다루고 있는데, 거기에 딸의 가정사부터 정부의 음모까지 얽혀 들어가면서 그야말로 독자의 혼을 빼놓는다. 독자마저 도저히 이 작가가 무엇을 진실로 말하고 있는지 헷갈릴 무렵에는 근사한 끝마무리까지 맺어서 멋진 감동까지 선사한다. 이 작가 정말 대단하다, 라고 느낀달까. 현재 가장 성실하게 웹진 ≪거울≫에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고 있기도 하다. 앞으로 이 작가의 작품에 계속 눈길이 가지 않을 수가 없을 것 같다.
소용돌이
작가 송경아는 1994년 『상상』에 「청소년 가출협회」를 발표하며 등단한 작가이다. 지은 책으로 소설집 『성교가 두 인간의 관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문학적 고찰 중 사례 연구 부분인용』, 『책』, 『엘리베이터』, 장편소설 『아기 찾기』, 『테러리스트』등이 있다. 웹진 ≪크로스로드≫에 SF단편 「우리 사랑 이야기」를 발표했고 『제인 에어 납치사건』, 『무게 - 아틀라스와 헤라클레스』, 『철학자의 돌』, 『카르데니오 납치사건』, 『우주를 떠도는 집 라크라이트』, 『원더월드 레드북』, 『아내가 마법을 쓴다』, 『당신도 해리 포터를 쓸 수 있다』, 『사이버리아드』 등을 번역했다.
「소용돌이」는 이 단편집에서 특이한 단편인데, 그 이유는 장르가 SF라기 보다는 환상문학이기 때문이다. 낡은 소재일 수 있는 ‘왕따’를 가지고 특이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주인공과 유령인 고모가 펼치는 이야기다. 한 편의 성장물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꽤 몰입감 있게 잘 읽었다. 주인공과 고모가 이야기를 나누는 부분은 따뜻하게 읽히고 유쾌하기도 했다. 작품의 구성상 안정적이고 잘 끝났지만 왠지 이어지는 뒷이야기가 있다면 읽고 싶은 소설이었다.
개인적 동기
작가 이지문은 2007년 『판타스틱』에 「내일의 꽃」을 연재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생명공학 계열을 전공하고 현재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개인적 동기」는 설정이나 소재가 전형적이어서 약간은 아쉬웠던 작품이다. 인간의 감정을 고스란히 기록하고 다시 타인에게 재생할 수 있는 장치라는 아이디어이기 때문이다. 제목에서부터 이 작품이 어떤 식으로 진행될 것인지 예상할 수 있다는 게 아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솜씨가 좋아서 흡인력이 뛰어나고 작가가 진부한 소재를 새롭게 변주하는 부분들은 인상적이었다. 또한 어떻게 보면 처음 SF를 접하는 독자들에게는 이런 작품이 더 부담없이 잘 읽힐 수도 있을 것이다. 무난하지만 아쉬움이 남는 그런 작품이었다.
로스웰 주의보
작가 이현은 2004년 「기차, 언제나 빛을 향해 경적을 울리다」로 전태일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지은 책으로 동화집 『짜장면 불어요!』, 청소년 소설 『우리들의 스캔들』, 장편동화 『장수 만세!』 등이 있다.
이력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작가는 장르문학 쪽에서 활동하는 작가가 아니라 청소년 문학에서 활동하는 작가의 글이다. 따라서 글 역시 참신한 장르적인 글이라기보다는 약간은 진부한 글 쪽이 될 수밖에 없겠으나 예상외로 상당히 잘 쓴 글이어서 읽기에 좋았다. 이 글은 앞의 배명훈의 글처럼 남에게 이야기를 하는 듯한 글이라 흡인력이 좋다. 각박한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비정상이고 외계인을 직접 만난 자신이 정상이라고 시작하는 초반 부분은 특히 마음에 들었던 부분이다. 정석이자면 역시 매력적인 방식이랄까.
마지막 엔딩 처리도 좋았고 처음 SF를 접하는 청소년을 위한 단편으로는 훌륭했다고 본다.
비거스렁이
작가 정소연은 2004년 과학기술 창작문예에서 스토리를 담당한 「우주류」로 만화 부문 가작을 수상했다. 현재 SF소설가와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환상문학웹진 《거울》 창간호에 번역 필진으로 합류, 19호에 「입적」을 발표하고부터 시간의 잔상에 참여하고 있다.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 『어둠의 속도』, 『언더월드 : 그린북』 등을 번역했으며 인문․사회학적 주제를 다루는 SF에 관심이 많다.
제48회 서울대학교 대학문학상에서 「마산 앞바다」로 가작을 수상했고, 이 작품은 이번에 출간된 한국환상문학단편선(황금가지)에 수록되었다. ≪Happy SF≫ 제2호에 「앨리스와 티타임」을 수록했다.
「비거스렁이」라는 단편에서 제목의 뜻은 ‘비가 갠 뒤에 바람이 불고 시원해지는 일’이라고 한다. 특이한 제목만큼이나 내용이나 연출도 굉장히 섬세하고 인상적이었다. 사실 소재야 진부하기 그지없는 것일 수가 있는데 존재감이 엷은 소녀와 그것이 품고 있는 상징을 가진 글쓰기는 흔히 생각하기 쉬운 것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 단편은 섬세한 묘사로 집요하게 끝까지 글을 밀고 나가면서 개성을 획득하고 감동을 만들어낸다. SF보다는 환상문학에 더 어울릴 것 같은 세계간의 틈이나 여러 세계들의 존재도 SF적으로 느껴졌고 전체적으로 이야기의 감성에 잘 따라갈 수 있는 작품이었다. 미묘한 울림을 주는 잔잔하고도 힘이 있는 작품이라고 할까. 다만 마지막 끝맺음은 지나치게 상투적 혹은 개인적으로 좀 거부감이 드는 방식이라 아쉽기도 했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정말 기분이 좋아지는 글이었다. 전체적으로 단편집이 소설 배치가 잘 되어 있다고 느꼈다.
SF의 재미를 찾아서
SF소설을 접해보지 않았지만, 앞으로 알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은 훌륭한 안내서가 될 것이다. 또한 현재 청소년이라면 특히 더 좋은 책이 될 것은 분명하다. SF는 일단 무엇보다도 재미를 가지고 있지만, 그 외에도 다른 장르에서는 가질 수 없는 미래에 대한 통찰력이나 현재 세상을 다른 관점에서 본다는 점 등이 뛰어난 장점이다. 9,000원 밖에 안 하는 돈으로 몇 시간 온갖 우주를 경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꽤 매력적인 SF 단편집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들 역시 현재 SF에서 주목을 받고 기대를 모으고 있는 작가들이 다수 참가하여 현재 나온 웬만한 SF 소설집보다 더 만족하게 해준다. 혹시 제목 때문이나 청소년 문고라는 것 때문에 넘어갔던 독자가 있다면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반드시 구입하기를 추천해 본다. 이 책은 그렇게 넘어가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책 중에 하나이다.
여기에 실린 작가들 모두 앞으로도 좋은 작품을 써서 다음에는 더 멋진 소설집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모두 그럴 능력을 갖고 있는 뛰어난 작가들만 모인 작품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