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자 - SF/환상문학 테마 단편선 Miracle 5
이영수(듀나) 외 지음 / 뿔(웅진) / 2010년 11월
평점 :
품절


환상문학웹진 거울이 막 생길 즈음인 2003년도만 해도 한국 작가의 SF나 판타지 단편집은 두 세권에 불과했다. 책이 나오기 힘든 환경이었기 때문에 SF나 판타지 단편을 창작하는 작가도 찾기 힘들었다. 그때 환상문학웹진 거울은 당시 장편 위주의 분위기에서 벗어나 단편 위주의 공간을 형성했다. 그리고 매년 꾸준히 직접 단편집을 인쇄했다. 지금 한국에서 한국 작가의 SF, 판타지 단편집이 나올 수 있는 것은 분명 환상문학웹진 거울의 기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작가들이 모였고, 작품들이 쌓였기 때문에.
환상문학웹진 거울은 단순히 한 해 동안 웹진에 발표한 단편들 중 엄선한 [대표 중단편선] 말고도 작가별로 작품을 모은 [개인 중단편선]을 냈다. 그리고 흡혈귀를 소재로한 단편만을 모은 [혈중환상농도 13%]나, 외계인을 소재로 한 [제15종 근접조우], 고양이를 소재로 한 단편집 [달과 아홉 냥] 등의 [소재별 중단편선]을 출간했다. 외국에서는 포스트 아포칼립스나 종교와 과학의 대립, 유니콘을 소재로 한 단편집처럼 하나의 소재로 묶은 앤솔러지가 많이 출간되었으나, 국내에서는 거의 출간되지 않은 형식이었다. 한국 작가들의 장르소설, 소재별 앤솔러지는 환상문학웹진 거울에서만 볼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리고 환상문학웹진 거울에서는 흡혈귀, 외계인, 고양이에 이어 또 다른 소재별 앤솔러지를 기획했다. 바로 ‘독재자’. 이 기획은 단순히 거울 안에서 기획되고 진행되어, 인쇄소에서 찍는 동인 형식으로 나오지 않았다. 몇 년 전과 다르게 이제는 몇몇 출판사에서 한국 작가의 SF, 판타지 단편집을 출간한 상황이었다. 충분히 소재별 앤솔러지 기획도 출간할 가능성이 있었다.
마침내 웅진의 문학에디션 ‘뿔’에서 ‘독재자’ 앤솔러지가 환상문학웹진 거울과 함께 진행되었다. 처음 기획이 시작된 지 일 년여가 지나 한국 최초의 ‘독재자’ 앤솔러지는 환상문학웹진 거울과 SF작가 듀나의 글을 수록하여 세상에 실물을 드러냈다.

파수/김창규
개화/정소연
신문이 말하기를/김보영
평형추/듀나
낙하산/곽재식
목소리를 드릴게요/정세랑
오라데아의 마지막 군주/정보라
황제를 암살하는 101번째 방법/임태운
입이 있다 그러나 비명을 지를 수 없다/박성환


‘SF/환상문학 테마 단편집’ [독재자]에는 이렇게 총 아홉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이중에는 이미 웹상에 공개되어 읽어본 것도 있고, 이번에 처음 접하는 작품도 있다. 아쉬운 점은 신작이 몇 편 더 있어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그럼 각 작품별로 간단한 리뷰를 적어보고자 한다.

파수/김창규

우리가 사는 세계에 먼 미래일지도 모르는 이 세계는 에너지가 얼마 남지 않은 곳이다. 파수는 태양과 3광년 떨어진 블랙홀에 각각 하나씩 자리를 잡고 에너지를 끌어다 쓰는 기계다. 그러나 주인공이 사는 세계와 그 옆의 우주는 이미 나이를 많이 먹어 잔존 에너지가 별로 없는 것이다. 다른 우주로 이주할 여력도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인류는 최대한 에너지를 아껴서 하루라도 더 살아남는 길을 택한다.
소설의 시작 시점에서 인류는 2458명이고 세계는 반경 187킬로미터의 원이다. 파수는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 우주에 남은 에너지의 찌꺼기들을 끌어오고 있다. 파수꾼들이 하는 일이란 파멸과 세계 사이에서 에너지의 순환을 제어하는 것이다.
SF에서 멸망에 다다른 세계는 그리 특별한 배경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국내 창작 SF에서 이렇게 무기력한 인류와 철저하게 수치적으로 에너지를 조정하고 생존하는 인류의 모습은 새롭고 흥미로웠다. 이렇게 세계관은 매력적이고 초반의 긴장을 제시하지만, 후반부는 약간 급하게 진행되고, 독재자와 연결되는 요소는 약간 헐거운 느낌도 들었다. 그러나 쇠퇴하고 있는 인류, 그야말로 잔존하고 있는 인류가 철저한 수치로 세계를 조정하고, 또 사람을 투표로 희생시켜나가는 설정은 인상적이며,(톰 고드윈의 SF단편 {차가운 방정식}도 연상되었다.) 오히려 이런 설정에 국회의원이 등장하지 않았으면 더 재미있게 흘러갔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세계와 파멸의 경계면은 순전히 파수의 힘으로 지탱되고 있어요. 하지만 양쪽의 차이는 단순히 에너지 준위만이 아니에요, 우주가 나이를 먹으면 입자들이 붕괴하죠, 우리 세계는 인공적으로 그걸 막고 있고요. 즉 이 바깥의 물질들은 구조가 다른 거예요. 확실히 밝혀진 건 아니지만 그 가운데 일부는 가까이 다가간 사람들의 뇌파에 영향을 받는 것 같아요. 그래서…….” ― {파수}, 20쪽.

파멸에 다다른 세계 속에 보이는 독재자의 모습. 독재자의 말로보다 세계의 설정에 더 눈길이 가는 작품이었다. 이 세계 속에서 좀 더 다른 이야기도 보고 싶은 생각이 든 것이다.


개화/정소연


나중에 들으니까 그때 언니는 의주에서 땅 파고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언니는 평생 그 짓밖에 안 한 것 같아요. 파헤치기. 어려서는 책 파더니 나이 들어서는 땅 파고, 삽 들고 인터넷 유선망 자르고 다닌다는 얘길 집에 온 수사관에게 처음 들었을 때는 진짜 기절하는 줄 알았어요. 외국까지 가서 기껏 배워온 게 다른 나라에서는 인터넷에 마음대로 접속해서 검색할 수 있고 성분증명 일일이 안 해도 된다는 얘기라니, 컴퓨터 공학 전공도 아닌 사람이 대체 뭘 공부하고 온 거래요? ― {개화}, 42쪽

한 소녀가 자신의 언니에 대해서 인터뷰하는 형식으로 서술된 단편이다. 일단 그러한 서술 방식이 재미있게 읽히는 작품이었다. 누군가 바로 앞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적혀 있기 때문에 몰입을 하기가 쉬웠다. 특이한 점은 중간 중간 사람들의 인터뷰가 삽입되어 있는데, 거기서 설명하는 화분이다. 사람들은 그냥 꽃이었다고 생각했지만, 물 먹고 햇빛 받아 작동하는 기계. 꽃으로 착각할 수 있는 공유기라는 설정은 신선했다.
소설 속 세계는 정부가 성분인증제를 실시하고 있으며, 인터넷 접속을 제한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중국이나 북한 사회의 인터넷 제도와 인터넷 실명제 등을 떠올리게 하는 설정이다.
사건은 복잡하지 않다. 동생의 일방적인 목소리만 적혀 있는 소설이지만, 사건이 복잡하지 않기 때문에 읽으면서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앞의 소설과 마찬가지로 마지막 문단에서 여운이 남는 단편이었다.
독재자보다는 독재자에 의해 만들어진 폐쇄된 시스템 속 인간의 저항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었다. 그것을 다른 사람도 아닌, 여동생의 시점에서 그리고 있기 때문에 그 간극에서 더 느껴지는 것들이 있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단순한 사건이다. 그럼에도 울림을 주는 것이다. 동생의 말 속에서는 원망만이 아니라 가족이 가지는 필연적이 정이 느껴지고, 그 속에서 읽을 수 있는 언니의 캐릭터와 행동은 독자가 자연스럽게 응원하게 만든다. 자유를 위해, 신념을 위해 무언가 계속 노력하는 이야기는 인물에게 생동감을 부여한다. 그리고 마침내 개화가 되는 순간, 가족 간의 불화, 이해할 수 없는 언니, 와닿지 않는 자유의 세상, 모든 게 한데 뒤섞여 수 만 송이의 꽃으로 수렴된다. 따뜻한 이야기다. 그래서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신문이 말하기를/김보영


아버지, ‘그들’은 없어요. 아들은 그렇게 말하곤 했다. 어디서 어떻게 세뇌되었는지 그렇게 말했다. 정말로 ‘그들’은 없어요. 뇌를 빼앗긴 사람도 없고 외계인도 침략자도 없어요. 정신 바이러스도 인공혈액도 없어요. 남자는 왜 요즘 세대들은 이렇게 현실감이 없는지 궁금했다. ― {신문이 말하기를}, 67쪽.

올해 개인 단편집 [멀리 가는 이야기]와 [진화신화]를 출간한 김보영 작가의 단편이다. 이 단편은 두 단편집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다. 이미 환상문학웹진 거울 웹상에서 공개한 적이 있는 글이지만, 인쇄된 책으로 읽으려면 이 책을 보는 수밖에 없다.
첫 장에 바로 ‘경고/ 이 작품은 무단 도용, 표절, 저작권침해로 점철되어 있습니다.’라고 시작하는 문구가 보인다.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문구인데, 그만큼 이 소설이 독특한 형식을 갖고 있다는 것을 미리 알려준다. 이 소설은 가상의 신문 기사를 그대로 삽입하는 형식으로 쓰였다. 일반적인 서술 중간마다 신문 기사가 삽입되어 있다. 이 신문 기사의 내용은 현실을 왜곡시키는 것이다. 실제로 벌어진 사건이 있지만, 신문은 뻔뻔하게 홀로그램 등 여러 과학 기술로 나타난 환상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 말도 안 되는 신문의 주장이 사실은 우리 세상에서 사서 보는 신문과 아무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 이 소설이 얼마나 풍자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판타지나 SF의 미덕 중 하나는 바로 이 풍자성일 것이다. 일반적인 SF의 재미보다는 풍자에 치중을 한 작품으로 앤솔러지에 부합되는 글이라고 할 수 있다.(다만, 소설이 지나치게 정직한 자세로 풍자적인 면에 집중하고 있어서 일반적으로 SF 작품에서 얻는 성질의 재미와는 좀 다르다.) 독재자와 통제된 시스템이 모두 신문상에서 소문으로 처리된다. 사람들은 신문만을 믿는다. 광기도 아니다. 사람들이 악인이기 때문도 아니다. 사람들은 통제받고 있을 뿐이다. 여론이 통제된 사회의 무서움을, 과학기술 비유를 통해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서글프게 그려내고 있다. 현실과 맞닿아 있는 지점은 웃기기도 하지만 슬프기도 한 것이다. 소설이 우리의 현실을 그려내고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될까. 우리의 현실은 때론 소설보다 암울하다.

평형추/듀나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웜을 이식해준다는 스팸 메일이 날아들었다. 루머를 믿지 않았던 그는 메일을 지우고 잊어버리려 했다. 하지만 그것이 LK에 입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생각이 든 그는 메일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놀랍게도 그들은 진짜였고 병원이나 장의사에서 불법으로 거둬들인 웜들을 몇 개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지금까지 이식 성공률은 82퍼센트였다. 그들이 그 통계를 어떻게 냈는지 알고 싶었지만 묻지는 않았다. 단지 그들이 제시한 비교적 저렴한 비용이, 그를 실험용 마루타로 삼는 대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에게 빌린 돈으로 비용을 지불했다. 그들은 낡은 모텔 방에서 그의 두개골에 구멍을 뚫고 웜을 삽입했다. ― {평형추}, 87쪽

우선 소재들이 눈에 띄는 작품이었다. 국가처럼 모든 것을 갖추고 있는 다국적 기업 LK의 첩보부. 우주 엘리베이터. 뇌에 연결하여 인간의 기억, 정신 등을 강화하는 ‘웜’이라는 기계. 이런 소재들이 적당한 위치에 자리잡고 이야기가 흘러가면서 긴밀하게 연결된다. 플롯이 잘 짜인 작품 중 하나로 독자가 정신없이 이야기를 따라가기에는 약간 숨이 차는 느낌도 든다.
신입사원 최강우에게는 의심쩍은 점이 있다. 주인공이 ‘나’는 최강우에게 접근하고 그에게 죽은 회장의 흔적들을 발견한다. 그것은 초자연적인 빙의가 아니라 ‘웜’에 의해서 일어난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주인공은 이걸 이용하려고 하지만, 사실은 더 복잡한 음모가 깔려 있었고, 순식간에 그 음모의 물결에 휩쓸리고 만다. 전개가 빨라서 초반부터 흡인력이 있는 작품이다. 그만큼 압축된 듯한 서사가 급박한 느낌을 주는 것은 아쉽다.(다만, 나중에 이 작품이 장편으로 개작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렇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이 서사는 분량이 늘어나면 더 흥미로울 듯하다.)
장치들이 흥미롭기 때문에 이 배경 하에서 다른 이야기들이 탄생해도 재미있을 것 같다. 물론 이 단편만으로도 충분히 완결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 단편집에 수록된 단편들과 다른 방식으로 ‘독재자’라는 소재와 접속한 단편이다.

낙하산/곽재식


비행기가 폭파되었다. 나는 B747-400 여객기 40C 좌석에 앉아 있다가, 단숨에 1만 5천 피트 상공에 내동댕이쳐졌다.
불과 몇 초 전에 앉아 있던 자리가 갑자기 굉장한 기세로 뒤흔들리고 뭔가 번쩍했던 것이 기억난다. 그리고 사정없이 강력한 폭풍이 온몸을 휘감았던 것도 기억난다. 그래서 뭔가 싶어 두리번거리고 나니, 나는 튕겨 나오듯 비행기에서 멀어지며 날아가고 있었다. ― {낙하산}, 119쪽


환상문학웹진 거울에서 예전에 발표되었던 단편이다. 이미 읽었던 작품이지만, 오랜만에 읽으니 기억이 새롭다. 낙하산에 관련된 환상적인 요소만 기억해서 어째서 ‘독재자’ 앤솔러지에 수록되었는지 의아했으나, 연구실에 새로 부임한 부소장에 의해서 부조리한 상황들이 펼쳐지는 것을 보고 납득하게 되었다. 온갖 불합리한 조치들, 그러나 저항할 수 없는 사회의 일면. 일상에서 독재자, 권력에 관한 소재를 강하게 느끼게 되는 점은 정말 실감났다.(거창한 독재자가 아니더라도, 혹은 거대한 억압이 아니더라도 사회의 불합리한 불변의 제도 등은 그 어떤 것보다도 단단한 벽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일상에 밀착한 단편이었다. 여기에 덧붙여진 환상은 약간의 재미를 더해준다. 주인공은 매일 같은 꿈을 반복하는 것이다. 비행기에서 추락하는 꿈. 어째서 그런 꿈이 반복되는 것일까? 그것은 예지몽일까? 어떤 암시일까? 아니면 단순히 부소장에 의한 스트레스일까? 부소장에 의해 자행되는 헛짓들. 일상의 독재자와 불합리한 시스템을 절묘하게 그렸다. 거기에 반복되는 꿈이라는 소재는 이야기에 또 다른 방향을 제시한다. 독자는 계속 불안감을 안고 추리를 해나가게 된다.

목소리를 드릴게요/정세랑


“그게…… 사실이라 해도, 제가 의도한 건 결코 아닙니다. 저는 이런 곳에 갇힐 수 없어요. 대체 여긴 어딥니까?”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선생님을 가둘 생각이 없어요. 하나만 제대로 이행해주시면 바로 내보내드리겠습니다.”
“뭔가요?”
“성대 제거술입니다.”
승균은 충격을 받았다. 합리적인 제안이었으나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목소리를 드릴게요}, 148쪽


매우 유쾌한 느낌을 주는 글이었다. 전체적으로 자연스럽고 위트 있는 주인공 화자의 서술이 인상적이었다. 긴장하고 볼 필요가 없이 마음 편하게 즐거운 마음으로 읽어 내려가는 단편이었다. 단편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저마다 개성이 있고 살아있어서 다들 인상적이었다. 한 명, 한 명 다 정이 가는 캐릭터였고, 이야기 구조도 잘 짜여 있어서 재미있었다. 또한, 이야기가 끝난 느낌이 아니라 다양한 방향으로 상상을 하게 되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일종의 능력자물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특수한 능력을 갖고 태어난 사람들의 설정도 재미있었다. 성년의 날이 지나면 특별한 능력이 발현되는 사람들이 있다. 주인공은 살인을 불러일으키는 목소리를 가졌고, 하민은 머리카락으로 사람들을 선동하는 능력을 가졌다. 주인공은 목소리를 잃어야만 나갈 수 있고, 하민은 머리카락과 모든 체모를 레이저로 제거해야만 갇힌 곳에서 나갈 수 있다. 김경모는 슈퍼 보균자로 각종 바이러스나 세균의 숙주가 되어 타인에게 증세를 증폭시킨다. 이런 다양한 능력들이 재미있었고, 이런 능력자들끼리는 옮지 않는다는 설정도 재미있었다. 또 이들을 관리하는 사람들은 더욱 특이했는데, 바로 하나만 바라보는 일목인들이다. 특별한 능력은 없지만 원하는 것 하나만 충족하면 뭐든 가리지 않고 한다고 한다. 이런 능력들과 이들이 펼치는 이야기가 재미있게 엮여 있는 단편이었다.

오라데아의 마지막 군주/정보라

잘 쓰인 환상소설이다. 액자 형식으로 처음과 끝에는 발견된 원고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고 소설 본문은 가상의 원고를 보여주고 있다. 이 가상의 원고의 문체는 독특해서 읽는 재미를 준다. 환상적인 요소가 독재자와 잘 결합된 형식의 글이었다. 이야기가 어떤 전개를 보일지 궁금해서 계속 빠르게 읽어나갔다. 이 소설이 기록물의 형식을 띠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럴 것이다.


기억을 지배하는 자가 시간 또한 지배한다. 시간은 기억 속에 영원히 살아남는다. 기억을 잃어서는 안 된다. 시간이 어둠 속에 잠기면 그 어둠 속으로부터 그들이 솟아오른다, 그들이 다가온다. 그들이 다가온다. 그들 [원문 일부 해독 불가] 베푸소서, 자비를 베푸소서, 자비를 배푸소서. ― {오라데아의 마지막 군주}, 196쪽

이렇게 글 중간에 ‘원문 해독 불가’라는 문구 등을 삽입하여 이 글이 발견된 원고임을 보여주기도 하고, 같은 문구가 반복되며 마치 서사시처럼 읽히기도 한다. 시간의 구슬이라는 설정이나, 진행되는 이야기들도 글의 몰입도를 높여주는 요소였다. 배경이나 문체를 통해 ‘독재자’를 환상소설이라는 장르로 잘 소화한 느낌이 들었다. 진실인지 알 수 없는 전능한 힘을 주는 물건과 오래 전 군주의 이야기. 다른 소설들과 다르게 환상성이 강하고, 독재자가 남긴 독백 형식의 기록물이라 색다른 느낌을 주는 단편이었다.

황제를 암살하는 101번째 방법/임태운


볼스테고 헬브라이드.
그를 수식하는 말은 지나치게 많았다. 그에 대한 셀 수 없는 호칭들은 돌멩이라 가정하고 나누어보자. 형이상학적인 쪽으로 따져보면 태양의 주인, 강철의 파수꾼, 율법의 지배자 등의 이름들이 자갈처럼 쏟아져 나올 것이다. 반대로 형이하학적인 경우에는 제국 제일의 무사, 옥쇄의 소유자, 나르팅그 성의 황제 등의 이름들이 모래사장을 이룰 것이다.
하지만 헬브라이드에 대한 호칭은 니손의 머릿속에 오직 하나만이 커다란 바위처럼 박혀 있을 뿐이었다.
“당신은 폭군입니다. 폐하.” ― {황제를 암살하는 101번째 방법}, 219쪽


인용한 첫 문단의 이름들이나 명칭들을 보면 느껴지듯이, 일반적인 장르 판타지의 느낌이 나는 판타지 단편이다. 이 단편 역시 개인적으로는 웹상에서 읽었던 글이다. 이 소설 속 세계는 일반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판타지 세계관에서 ‘볼스테고 헬브라이드’라는 폭군이 존재한다. 이 폭군은 락스팽가투 제국의 황제다. 이 황제와 단독으로 마주한 주인공은 황당하게도 ‘금붕어’ 한 마리를 보여준다. 게다가 주인공 ‘니손’은 금붕어가 황제의 목숨을 앗을 거라고 말한다. 이렇게 되면 독자는 빠르게 페이지를 넘길 수밖에 없다. 도대체 어떻게 금붕어 한 마리가 최강의 무력을 가진 황제를 암살할 수 있단 말인가. 입담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솜씨가 훌륭한 작품이다. 전체적으로 유쾌하게 잘 읽힌다는 장점을 가진 것이다. 다만, 이야기나 형식이 일반적으로 예상할 수 있는 범위 내라서 다 읽고 나서도 조금 심심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중세를 배경으로 한 하이 판타지 세계관 안에서 주인공은 폭군에 맞서 어떤 행동을 하게 될 것인가.

입이 있다 그러나 비명을 지를 수 없다/박성환

소설은 초반의 김창규 작가의 {유가폐점} 등을 인용하며 이 소설 속 배경이 인류가 네트워크에 접속된 세계임을 암시한다. 그곳은 ‘도시’가 있다. 그리고 노예들이 사막의 끝없는 모래를 구워 성벽을 올리고 있다.(이런 배경 때문에 글은 실체가 불분명한 느낌으로 싸여 있다.)


이 사막의 모래들은 ‘접속’된 모든 인류의 식역 이하, 무의식에 파묻힌 뉴런들의 가용 연산 자원 전체의 표상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한때는 정말로 있었더랬다. 모래를 구워 벽돌을 만들어 쌓아 올리는 과정은, 그러므로 우리 모두의 기억과 생각, 추억― 그러니까 존재 기반 자체의 고의적 망실 과정이라고…… 그러나 그렇게 주장하던 사람들 혹은 그런 주장에 귀 기울이던 사람들은 대개 원인을 알 수 없는 장애로 접속이 종료되곤 해서, 이제 남은 사람들은 이유도 목적도 묻지 않고 묵묵히, 벽돌을 굽고, 나르고, 쌓아 올린 다음 낡은 동전 몇 푼을 손에 넣을 뿐이다. ― {입이 있다 그러나 비명을 지를 수 없다}, 257~258쪽.

위의 인용은 이 작품의 배경을 잘 서명해준다. 이곳은 먼 미래에 네트워크에 접속된 인류와 독재자의 이야기로 읽을 수 있고, 한편으로는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의 일면이기도 하다. 이렇게 미래를 그리면서 동시에 현재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인류 통합 프로젝트’에 관한 설정들 역시 흥미롭고 이야기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복잡한 면이 있는 작품이지만 그만큼 무게감이 있으며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작품이다. 먼 미래, 인류가 만들어낸 혹은 지금 우리가 이미 만들어낸 독재자의 모습이 섬뜩하게 다가온다.


또 다른 소재별 앤솔러지를 기대하며

처음에는 의아한 생각도 들었다. ‘독재자’라는 소재가 과연 다채로운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까. 대부분 비슷한 패턴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SF와 판타지 또 그 안에서도 각각 다른 느낌을 주는 소설들이 가득 차 있었다. 현실을 배경으로 한 환상, 중세를 배경으로 한 환상, 먼 미래,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 소설. 독재자의 모습도 각기 달랐다. 스스로 무너지는 독재자, 또는 독재자의 탄생, 독재자의 말로, 독재자의 의미 등. 자칫 지루하고 딱딱한, 혹은 뻔한 이야기가 될 것 같았던 ‘독재자’라는 소재는 전혀 다른 개성을 가진 작가들이 만나 우리에게 아홉 가지의 차별화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런 점이 바로 소재별 앤솔러지의 장점일 것이다.
흡혈귀, 외계인, 고양이 그리고 독재자. 환상문학웹진 거울이 지나온 발자취는 그 하나하나가 한국 SF/판타지의 역사가 되었다. 최초로 단편 중심의 환상소설 웹진이 되었고, 많은 독자가 보는 정식 출판은 아니더라도, 매년 [대표 중단편선]을 출간하며 꿋꿋이 작품을 발표하고 최근에는 웹진 거울 필진들이 정식으로 출판사에서 그 동안 보기 힘들었던 SF나 판타지 단편집을 출간했다. 그리고 이제는 [소재별 중단편선] 역시 거울에서 자체 기획 후, 정식으로 출판사에 출간되었다. 이렇게 그 동안 국내에서 찾아보기 힘든 기획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예를 들면 2009년 세계 천문의 해를 맞아 소백산천문대에서 열린 국내 최초의 과학자, 작가 창작워크숍 등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워크숍을 통해 오멜라스에서 출간된 [백만 광년의 고독] 역시 우주와 외계라는 동일한 테마를 가지고 일곱 명의 작가들이 각기 다른 상상력을 펼쳐보였다. 앞으로 또 어떤 새로운 기획과 새로운 작가, 새로운 작품이 우리들의 눈을 즐겁게 해줄지 기대된다. 이런 단편집들의 출간이 모여서 마치 [독재자]에 수록된 단편 {개화}처럼 언젠가 수많은 사람들이 읽고 감상을 쓰며 책들이 하나 둘 개화를 하는 날이 올 수 있기를.
이런 시도가 늘어날수록 더 멋진 작품을 접할 기회가 생길 것이다.
다음에 어떤 기획으로 새로운 장르 단편집이 출간될지 기대하며 이만 글을 마친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스피 2011-01-11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보니 읽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이 드네요^^
 
드림 마스터 행복한책읽기 작가선집 3
로저 젤라즈니 지음, 김상훈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10년 1월
평점 :
절판


  로저 젤라즈니는 국내에서 많은 책이 소개된 인기가 많은 SF작가이다. 대표작으로 『신들의 사회』와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등이 있다. SF를 읽으려는 독자에게 자주 추천되는 책들이기도 하다. 하나는 장편이고 다른 하나는 단편집이다.

  열린책들에서 출간된 로저 젤라즈니의 초기 단편집인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는 SF 소설로는 이례적으로 9쇄를 넘게 찍을 정도로 오랜 기간 꾸준히 팔린 책이다. 현재도 열린책들 세계문학 전집에 속해서 팔리고 있다.(세 번째 판본이다.) 이 책은 로저 젤라즈니의 첫 번째 출간된 작품집이었다. 현란한 문체와 SF의 경이감을 확고히 가진 근사한 단편들로 채워져 있다. 완성도가 높은 SF 단편집을 찾는다면 당연히 읽어야 할 책이기도 하다. 그리고 1980년에 나온 로저 젤라즈니의 두 번째 작품집인 『드림 마스터』가 드디어 행복한책읽기 작가 선집으로 출간되었다. 『드림 마스터』는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에 비해 초기작들과 함께 더 많은 작품들이 실려 있다. 그야 말로 로저 젤라즈니라는 작가가 가지고 있는 중단편의 매력을 모두 맛볼 수 있는 작품집이다.

  특히 이 작품집이 다른 작품집과 차별화되는 것은 작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점이다. 서문을 비롯해서, 각 단편마다 작가가 왜 이 단편을 쓰게 되었는지에 대한 간략한 코멘트가 붙어 있다. 재미있는 일화도 있고, 쓴 계기를 알게 되면서 작가와 더 친근해지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초판 3000부만 한정 양장본으로 출간된 책이다. 나중에 후회하기보다는 로저 젤라즈니를 좋아하는 독자거나 혹은 접할 생각이 있는 독자라면 지금 구입해두어도 전혀 돈이 아깝지 않다. 비싼 책이지만 그 가치는 충분하다.




  수난극




  첫 번째 실린 이 작품은 분량이 짧은 소품이라고 할 수 있다. 한 번에 읽었을 때는 무슨 내용인지 파악이 잘 가지 않아 몇 번 다시 읽어본 글이다. 인간들이 모두 사라진 지구. 기계들이 고대의 기계인 ‘차’를 숭배하며 의식을 ‘재현’한다.




  기사가 왔다!




  그 사내가 아직 산속의 천둥소리였을 때 마을 사람들은 덧문 뒤에서 수확을 꿈꾸며 자고 있었다. 그 사내가 강철의 산사태처럼 쇄도하자 가축들은 슬픈 소리로 울었고, 어린애들은 잠든 채로 울부짖었다. ― 『드림 마스터』, 로저 젤라즈니, 행복한 책읽기, 28쪽




  시적인 글이다. 문장이 유려하고 신화적인 분위기를 전달한다. 앞의 글과 마찬가지로 짧은 분량의 소품. 종말적인 분위기를 자아내지만, 어떤 이야기가 있거나 메시지가 있지는 않다. 성서에 나오는 묵시록의 네 기사를 등장시킨 글이라고 한다.




  스테인리스 스틸 흡혈귀




  코믹한 글이다. 인류가 사라지고 기계들이 지구를 지배한 세계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흡혈귀와 다른 로봇의 에너지를 빼앗는 괴물 로봇의 유쾌한 이야기. 편하게 읽었고 충분히 재미있었다. 재미있는 발상의 작품이었다.




  끔찍한 아름다운




  육체를 빌리는 외계 존재와의 대화를 그린 단편. 별다른 행동이 없이 대화와 사념으로만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지루하지 않고 금세 읽게 되는 재미있는 글이다. 이렇게 외계 존재가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지구에 이미 존재하는 식의 이야기는 언제나 흥미롭다.




  형성하는 자




  네뷸러 상을 수상한 중편. 이 중편을 토대로 작가는 훗날 『드림 마스터』라는 장편을 출간했다. 읽고 나니 장편을 보진 못했지만, 작가가 앞에 붙여놓은 말처럼 원래 처음에 쓴 이 중편이 깔끔하고 가장 나을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비장미가 흐르는 근사한 중편이었다. 괜히 이 중단편집의 제목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었다. 물론 시대가 많이 지난 만큼, 소재나 발상에서 새로운 것을 느낄 수는 없었지만,(가상의 꿈을 들여다보고 경험하고 조작하는 기계 자체의 고리타분함) 이 작품은 그보다는 파국으로 치닫는 인간의 비극에 초점을 맞춘 글이었다. 다양한 정신분석학 내용들과 여러 신화들이 차용되어 글을 정교하게 구성했다.




  지금 힘이 오느니




  작가가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쓴 단편이라고 한다. 그만큼 내용은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고 있다. 이 작품집에서 가장 마음에 감동이 남는 글이기도 했다. 책을 다 읽은 뒤에서 내용이 선명하게 기억나는 단편 중에 하나였다.




  이단차




  앞에 실린 「수난극」과 마찬가지로 인류가 사라지고 자동차들만이 남은 세계를 그리고 있다. 「수난극」과 세트인 작품이라고 할까. 투우를 하는 자동차들. 이 작품집에는 이렇게 ‘자동차’를 소재로 한 글들이 꽤 많이 있다. 확실히 ‘트랜스포머’도 그렇고 미국에서 ‘자동차’가 상징하는 부분은 상당히 크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옥의 질주




  가장 호평을 많이 받은 중편 중 하나다. 아직 안 읽은 독자들도 이 작품집에서 이 중편을 재미있게 읽을 것이다. 핵전쟁 이후의 세계를 다룬 작품으로, 주인공이 자동차를 몰고 대륙을 횡단하는 모험을 그리고 있다.(또, 자동차다.) 특이한 점은 주인공이 선한 인물이라기보다는 범죄자이고 사면을 조건으로 일을 맡게 된다는 점이다. 마초적이고 강렬한 주인공이 시원한 액션을 벌인다. 핵전쟁 이후의 세계의 모습이 상세하게 그려지지 않아서 긴장감이 좀 덜한 면이 있다. 그러나 이 작품집에서 가장 흡인력이 있고 재미있는 작품이다. 마지막은 예상된 결말이라 조금 허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 작품 또한 앞의 「형성하는 자」처럼 장편으로 개작되었지만, 작가는 이번에도 중편이 더 마음에 든다고 밝히고 있다. 그대신 장편은 1977년에 영화 「Damnation Alley」로 나왔다고 한다. 중편을 재미있게 읽어서인지 영화에 관심이 생겼다. 언제 구할 수 있으면 한 번 봐야겠다고 생각이 든다.

  

  보르크를 사랑한 여자




  짧은 소품이다. 불사의 존재가 나오는 작품으로 「내 이름은 콘라드」와 유사한 느낌을 받기도 했다. 이 작품은 쓴 계기가 재미있는데, 작가가 2년 넘게 단편을 쓰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 받고 공백이 더 길어지지 않기 위해 썼다는 것이다. 새로운 이야기가 있지는 않지만, ‘보르크’라는 불사의 존재가 특이하다. 원래는 인간이었으나 다른 물질과 합쳐져 불사의 존재가 된 이. 그래픽노블 『와치맨』의 ‘닥터 맨하튼’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죽고 싶은 사람들이 오는 <센터>라는 곳에서 아이러니하게 죽지 않는 존재인 보르크가 계속 존재한다.




  복수의 여신




  재미있게 읽은 중편 중 하나다. 특이한 능력을 가진 인물들이 차례대로 소개되고, 그 인물들이 힘을 합쳐 하나의 사건을 해결한다. 그러나 그 사건이 그들에게 당연히 해야 할 임무였을지 몰라도, 상대편 입장에서 보면 또다른 비극이다. 이런 역설적인 구성이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작품으로, 끝에는 필연적으로 씁쓸한 느낌을 받게 된다. 소설 내에서 악으로 보이는 인물의 내면과 사정을 자주 비쳐줌으로써 독자가 계속 안타까운 느낌을 가진다.

  초능력이 등장하고, 우주선들의 전투가 벌어지는 스페이스 오페라 장르로 볼 수 있는 SF 중편이다. 긴박감이 있고, 인물이나 배경 등이 적절하게 잘 조화되어 있다. 구성이 뛰어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피와 흙의 게임




  신 같은 존재들이 각자 ‘피’와 ‘흙’을(바둑알 색 같은) 맡아서 인류 역사에 개입하는 대체역사물 같은 SF 판타지 단편이다. 역사와 허구를 뒤섞고 있는데, 역사에 대해서 잘 안다면 특히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실제 역사와의 차이점들을 살펴보는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발상의 작품이었고 이를 확대한 글이 나와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은 없다




  상당히 재미있게 읽은 단편이다. 일반 잡지에 실려서 호평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만큼 SF를 많이 안 읽은 독자라도 누구나 쉽게 빠져들 만한 소재와 재미를 가지고 있다. 암살, 최면 등의 소재를 가지고 이토록 자연스럽게 빠져드는 이야기를 만드는 솜씨가 훌륭하다.




  혹시 악마를 사랑하시는 분?

  작가가 무드 있는 글을 쓰고 싶다고 한 소품. 해설에서 연쇄살인마 잭을 다룬 이야기라는 것을 보지 않았다면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분량도 짧고 별다른 스토리 없이 연쇄살인마 잭과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마음은 차가운 무덤




  제목이 시적인데, 중편 안에 등장하는 시에서 딴 제목이기 때문이다. 원래 시를 썼던 젤라즈니의 색깔이 잘 드러난 중편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 내에서 등장하는 시들은 실제로 젤라즈니의 미발표 시집에 실린 것들의 일부라고 한다.

  냉동 상태로 지내면서 1년을 하루 같이 보내는 <세트>의 인간들. 그리고 그 <세트>의 한 여자를 사랑한 남자가 입회를 하고 일부가 되면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삼각관계를 다루고 있으며, 마치 신들의 유희를 보는 듯한 묘한 분위기가 흐르는 작품이다. 어려운 어휘와 뜻모를 이야기 전개로 인해 흡인력은 조금 떨어지는 글이다. 따라서 워낙 책이 두껍기 때문에 이 소설에서 읽기에 약간 버거움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제목이 주는 분위기를 소설이 내용으로 살리는 한편, 결말까지 읽고 나면 진한 여운이 남는 글이기도 하다. 마지막의 이미지가 책을 덮고 나서도 머릿속에 깊게 박히는 글이다.

  

  가만히 있어, 루비 스톤




  처음에는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지만, 곧 등장인물들이 외계인이고 인간이 사는 집을 지나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인간과 다른 외계인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펼쳐지기 때문에 새롭다. 긴 이야기는 아니고, 아이디어를 보여주기 위한 소품이다. 재미있으면서도 잠깐 충격을 주기도 하는 독특한 단편이다. 처음에 읽을 때는 설정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상태였기에 다시 한 번 읽어보면서 전후관계를 살펴보게 만드는 글이기도 했다.




  하프잭




  몸의 절반이 사이보그인 남자를 다룬 단편. 이 작품 역시 분량이 그리 길지 않은 소품이다. 별다른 이야기가 없어 설정만 인상에 남는 글. 사고로 사이보그가 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원했다는 점이 독특하지만, 그런 점에 대해서도 길게 이야기를 하는 글은 아니다. 한 여자와 만나고 다시 우주 비행으로 돌아가는 이야기.




  캐멀롯의 마지막 수호자




  2002년에 열린책들에서 출간 된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에 실렸던 단편. 따라서 이미 이 단편을 읽은 독자들은 많을 것이다. 나 역시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에서 읽었었는데, 시간이 많이 지나고 나서 다시 읽어보니 예전보다 더 재미있게 읽었다. 그 사이 아더왕의 전설에 대해서 『판타스틱』 기사 등을 읽은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상당히 많은 독자들이 좋아한 단편이고, 원래 이 단편집의 표제작이기도 하다. 그만큼 언제 읽어도 뛰어난 점수를 줄 수 있는 흥미진진하게 쓴 판타지 단편.




  그림자 잭




  장르잡지 『판타스틱』에 연재되어 페이퍼하우스에서 2009년에 출간된 동명의 장편 『그림자 잭』의 앞 시절 이야기를 다룬 프리퀄 단편이다. 『그림자 잭』은 과학을 사용하는 영원히 낮인 데이사이드와 마법을 사용하는 영원히 밤인 다크사이드로 나뉜 세상에서, 황혼에서 태어나 그림자의 권능을 가진 도둑 ‘그림자 잭’을 다룬 소설이다. 빠른 전개와 과학과 마법이 섞인 세계 등이 매력적인 소설로, 얼마 전에 장편을 읽은 터라 여기서 단편을 읽어서 반가웠다. 다시 ‘그림자 잭’을 만나고 또 그의 모험을 체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프리퀄에서도 역시 위기에 처하고 벗어나면서 숨가쁜 이야기가 펼쳐진다. 프리퀄이기 때문에 이 단편만으로도 충분히 완결성이 있고 재미있지만, 먼저 장편 『그림자 잭』(페이퍼하우스)을 읽고 보면 더 흥미로운 글이었다.




  영구동토




  대망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중편이다. 이런 단편집에서 마지막에 실린 작품의 중요성은 크다. 마지막에 실린 글이 소설집 전체의 인상을 좌우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제목이 그리 끌리지 않아 조금 우려스러웠기도 했지만 막상 읽어보니 충분히 매력있고 재미있는 작품이었다. 한 마디로 마지막을 장식하기에 충분했다. 1987년 휴고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젤라즈니가 알래스카 여행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중에 문득 떠올라서 쓴 글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남자, 조상, 여자, 도시 등으로 영화처럼 장면이나 인물들을 조명한다. 그리고 이야기가 진행될 수록 이곳이 어떤 행성이며, 각자 무슨 일을 맡고 있고, 또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슬슬 예상이 가기 시작한다.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전개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재미있게 읽었고, 마지막 결말은 유머스럽기까지 하다. 근사한 구성과 결말 처리로 인해 전체적으로 매력적인 글이며 계속 인상에 남기까지 했다.




  로저 젤라즈니 걸작선




  이 단편집은 그야말로 로저 젤라즈니 걸작선이라는 이름이 붙는 것에 손색이 없다. 젤라즈니가 처음 데뷔를 한 소설부터 네뷸러 상이나 휴고 상을 받은 중편까지 초기 중단편집이 전부 망라되어 있는 단편집이기 때문에 젤라즈니의 작품을 즐겨 읽은 독자라면 결코 이 작품집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동안 몰랐던 젤라즈니를 알 수 있다. 마초적인 캐릭터가 나와서 모험을 펼치는 전형적인 젤라즈니 소설도 있지만, 색다른 분위기의 소설들도 꽤 있다.

  자잘한 소품들은 독특한 발상이 인상적이거나 문장이 아름답지만 별다른 재미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젤라즈니가 초기에 어떤 단편들을 발표해 왔는지, 또 어떤 연유로 쓰게 되었는지 등등을 탐색해 볼 수 있다는 것은 또다른 즐거움을 주기도 한다.

  흥미가 적은 소품들을 제외하고 볼 때, 몇 개의 묵직한 중편들은 큰 재미를 주며 비싸다고 느낄 수 있는 책값이 아깝지 않게 만들어 준다.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중편은 「지옥의 질주」였고, 「영구동토」, 「캐멀롯의 마지막 수호자」, 「형성하는 자」, 「복수의 여신」 등도 재미있게 읽었다. 단편으로는 「상은 없다」, 「그림자 잭」, 「지금 힘이 오느니」, 「스테인리스 스틸 흡혈귀」, 「피와 흙의 게임」 등을 재미있게 읽었다.

  SF를 처음 접하는 독자에게는 안 맞을지 모르지만, 젤라즈니의 소설을 이미 접한 독자들이나 SF를 어느 정도 읽은 독자에게는 꽤 만족스러운 독서 경험을 줄 것이다. 이미 스테디셀러가 된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와 함께 추천할 만한 SF 단편집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화성 연대기 샘터 외국소설선 5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김영선 옮김 / 샘터사 / 2010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양말 줍는 소년』, 『절망의 구』 등을 쓴 김이환 작가는 처음에 글을 쓰게 된 계기로 레이 브래드버리의 『화성 연대기』를 꼽았다. 그런 책이 있다. 누군가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는 책이.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책들. 삶의 새로운 길로 나아가게 한다거나, 나도 이런 책을 쓰고 싶다라는 마음이 들게 하는 책들. 물론 나에게도 처음 한글 프로그램을 켜고 글을 적게 한 책이 있다. 만약, 내가 그때 『화성 연대기』를 만났다면, 나에게 키보드를 두들기게 만든 책이 바뀌게 되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이번에 샘터사에서 새로 출간 된 『화성 연대기』를 읽으면서 어렸을 때 이 책을 읽었다면 그 경이와 감동은 측정하기 힘들 만큼 컸을 테고, 어떤 식으로든 큰 영향을 끼쳤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화성 연대기』가 갖고 있는 매력은 컸다.
『화성 연대기』는 1940년대부터 레이 브래드버리가 발표한 화성에 관한 단편들을 모은 책이다. 즉, 처음부터 장편소설로 기획된 작품집이 아니라, 여러 잡지에 개제한 단편들을 모아 연작소설의 형태로 출간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화성 연대기』에 실린 단편들은 연대기 순으로 집필된 것이 아니라 제각각 집필된 시기가 다르다.
레이 브래드버리는 아이작 아시모프, 아서 C. 클라크, 로버트 하인라인 등의 소위 말하는 빅3에 필적하는 명성을 가진 작가다. 국내에는 그의 대표작 『화씨 451』이 번역되어 있으며 이 외에, 반자전적 성장 소설 『민들레 와인』, 단편집 『일러스트레이티드 맨』 등이 황금가지 환상문학전집으로 출간되었다. 『화성 연대기』는 1979년 동서문화사에서 동서추리문고 일어중역본으로 처음 국내에 소개되었고, 이후 모음사에서 다시 재간되었다. 그러나 마지막에 나온 1990년도판은 마지막 챕터의 마지막 페이지가 누락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샘터사에서 나온 『화성 연대기』는 중역이 아닌 최초의 완역본으로 의미있는 책이다.
『화성 연대기』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문체였다. 레이 브래드버리의 특징인 시적인 아름다운 문체가 소설 전체를 장악하고 있었다. 소설을 읽으면서 내용보다 먼저 문체에 홀려서 페이지를 넘기게 되는 것이다. 내용보다도 문장 하나하나의 아름다움이 소설에 매력을 한껏 부여하고 있었다.


오늘 밤 공기에서는 시간의 냄새가 났다. 토마스는 빙긋이 웃으며 공상에 잠겼다. 마음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시간은 어떤 냄새일까? 먼지와 시계와 인간이 뒤섞인 냄새이다. 그리고 만약 시간이 어떤 소리일지 궁금하다면, 그것은 어두운 동굴을 흐르는 소리이고 울부짖는 목소리이고 텅 빈 상자뚜겅 위로 떨어지는 흙덩이 소리이고 빗소리이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시간은 어떤 모습일까? 깜깜한 방 안으로 소리 없이 내리는 눈이나 낡은 극장에서 상영하는 무성영화나, 새해를 알리는 풍선들처럼 허무하게 떨어지는 천억 개의 얼굴이다. 시간의 냄새와 모습과 소리는 그런 것이다. 토마스는 트럭 밖에서 부는 바람 속으로 손을 내밀었다. 오늘 밤에는 왠지 시간을 만질 수 있을 것 같았다.
토마스는 시간의 언덕 사이를 달리고 있었다. 목이 욱신거렸다. 토마스는 계속 앞을 보면서 허리를 똑바로 세웠다.
― 레이 브래드버리, 『화성 연대기』, 샘터사, 2010년 8월, 185쪽


로켓이 분홍빛 불꽃 구름과 가마솥 같은 열기를 내뿜으며 발진기지에 서 있었다. 추운 겨울날 아침 배출 가스를 내뿜어 여름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로켓이 기후를 만들어냈고, 짧은 한순간 여름이 땅을 뒤덮었다.

― 레이 브래드버리, 『화성 연대기』, 샘터사, 2010년 8월, 17쪽


반짝이는 별빛을 받으며 파란 화성인 배들이 소곤대는 사막 위를 미끄러지듯 달려왔다. 처음에 샘의 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샘은 문득 닻을 떠올리고는 얼른 닻을 배 위로 끌어올렸다.
“됐어!”
바람이 울부짖으며 배를 힘차게 끌고 갔다. 배는 바닥 밑바닥을, 오랫동안 묻혀 있던 수정들 위를, 꼿꼿이 서 있는 기둥들 옆을 지나, 대리석과 놋쇠로 만들어진 버림받은 부두들을 지나쳐, 하얀 체스 말 같은 죽은 도시들을 통과해, 나지막한 보라색 언덕들을 지나갔다. 화성인 배들이 뒤로 멀어졌다가 다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샘의 배를 뒤쫓기 시작했다.

― 레이 브래드버리, 『화성 연대기』, 샘터사, 2010년 8월, 305쪽

장르소설에서는 문장보다는 내용과 인물, 세계관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놀라운 문장력으로 돋보이는 작가는 그만큼 흔치 않다. 레이 브래드버리의 소설은 무엇보다도 문체에서 다른 작품들과 차별화된다. 아름다운 문체로 쓰인 과학소설, 화성의 이야기를 읽고 싶은 독자라면, 『화성 연대기』는 결코 놓칠 수 없는 소설이다. 시처럼 쓰인 문장 하나하나를 음미하면서 읽을 수 있는 책인 것이다. 물론 과도한 수사나, 시대가 변함에 따라 이제는 어울리지 않는 듯한 문장이 있을 수도 있지만, 개성적인 문체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이 소설은 과학적인 근거들을 주로 하는 과학소설과는 다르다. 즉, 흔히 하드SF라고 할 만한 과학소설들과는 다른, 우주, 화성, 화성인이 등장하는 소설일뿐, 과학적인 논리가 작품을 뒷받침하고 있지는 않다. 우화나 환상소설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일반적인 과학적 논리를 지닌 SF를 기대하지 않고 SF적 무대를 배경으로 한 판타지로 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과학이나 세계보다는 지구에 사는 인간들이다. 바로 우리들이 어떤 모습을 하고, 어떤 본질을 지니고 있는가를 살핀다. 미국이 서부개척시대에 인디언들을 학살하고, 인류가 발전을 이유로 동물들을 멸종시키는 모습을 이 소설은 작가가 만들어낸 ‘화성’이라는 세계에서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 속의 ‘화성’에는 화성인들이 살고 있다. 우리의 과학 지식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나, 소설 속은 작가가 만든 우리 우주와 유사한 평행세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마치 『화성의 공주』처럼 화성인들과 지구인의 조우를 그리고 있으나, 『화성의 공주』가 단 한명의 인간이 갔다면, 이 소설에서는 인류가 끊임없이 화성과의 접촉을 시도하면서 벌어지는 큰 단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로 인해 화성은 전면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연대기라는 제목에 걸맞게 1999년 1월부터 2026년 10월까지의 일을 다루고 있는데, 이 짧은 기간 동안 화성인은 인류에 의해 멸망한다. 짧은 단편들로 이루어진 작품집이면서도 커다란 사건들로 인해 독자는 이 연대기를 흥미롭게 계속 읽어내려 갈 수밖에 없다. 중간 중간 한 두 장의 짧은 글들도 있다. 1999년 1월 ‘로켓 여름’ 같이 그저 로켓이 가스를 내뿜는 것을 묘사하는 단 두 장의 글이 있고, 때로는 충분한 분량을 가진 복잡한 플롯을 가진 이야기가 전개되기도 한다. 이러 다양성 때문에 『화성 연대기』는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러면서도 화성을 다룬 공통점 때문에 마치 처음부터 이렇게 기획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하나의 일관성을 보이는 면도 있다. 이 책에 속하지 않은 작가가 발표한 다른 화성에 관련된 단편들도 읽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1999년 2월 ‘일라’ 같은 경우는 화성인의 입장에서 서술된 단편이다. 따라서 처음에는 화성인들이 어떠한 존재인지 모르고, 이 작가가 그려낸 화성이 어떤 모습인지 몰라 당황하면서 읽게 된다. 그러나 1999년 8월 ‘지구인’편을 읽으면서 이 작품집의 진짜 색깔을 깨닫게 된다. 지구인들을 2차 탐사대를 보내고 1차 탐사대의 행방을 찾는 한편, 지구인이 방문했다는 사실을 화성인들에게 알리려고 한다. 그런데 화성인들의 반응은 퉁명스럽다. 이 시점에서 독자는 의아한 생각을 하면서 작품에 몰입하게 된다. 이 지점이 이 작품이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되는 지점이자, 화성인에 대해서 제대로 알려주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처음에 개인적으로 생각한 것은, 화성은 인류와 전혀 다른 사고체계를 가졌기 때문에 지구인이 방문하든 말든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 점으로도 신선하게 느껴졌고, 탐사대에게 감정이입을 해서 마찬가지로 당황스러움과 경악, 답답함을 느꼈다. 그러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단지 그런 이유가 아니라는 것이 드러난다. 화성인들은 텔레파시가 가능한 존재들이며, 때로 사물에 투영을 해서 환각을 보게 할 수도 있다. 이런 설정들이 드러나자 화성인들의 반응이 이해가 가고, 지구인 탐사대가 처한 위험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즉, 이들은 화성인이나 지구인을 주장하는 정신병자로 몰리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지구에서도 화성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누구도 그를 믿지 않고 정신병원에 보낼 것이다. 이 소설도 마찬가지의 상황을 보여준다. 이 소설은 이렇게 과학적으로 로켓이 어떻게 발사되고 화성까지 갈 수 있는지, 또 화성인의 피부가 왜 갈색이고 눈은 노란빛인지, 손가락은 왜 여섯 개인지 설명하지 않는다. 배경들은 그저 제시될 뿐이고 중요한 것은 작품의 주제의식인 것이다. 정신병자로 생각하고 끝까지 지구인들을 믿지 않는 화성인 의사. 그 결과는 끝내 비극으로 치닫는다. 이때부터 『화성 연대기』의 매력에 매료되었다. 텔레파시 투영으로 인해 실제 지구인을 믿지 않는 화성인들의 모습은 많은 점을 시사한다. 인간들 역시 눈 뜬 장님처럼 많은 것들을 본 대로 믿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니까. 이후 이야기는 충격적으로 전개된다. 화성인이 지구인들의 수두 때문에 거의 멸종하다시피 사라진 것이다. 순식간에 도시들은 황폐화된다. 전혀 다른 세계의 생명체들이 조우할 때,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위험성은 실제로 역사적인 사례도 있고, 영화나 소설에서도 다른 식으로 변주한 적도 얼마든지 있다. 또한, 실제 우리 세상에서도 언젠가 외계의 생명체와 접촉한다면 가장 먼저 경계해야 할 사건 중 하나다.
화성인들이 모두 사라지고 나서는 인류의 무모한 접촉에 안타까움과 원망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지구인들은 여기서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화성을 지구화하려고 한다. 실제 인류가 우주에 진출한다면 어디든 인간이 살기 좋게 파괴하고 개발할 것이 뻔히 예상되기 때문에 당연시 보이면서도 역시 인류의 어리석음에 답답하고 안타까움을 느끼게 되는 부분이었다. 이 소설에는 이렇게 답답함을 주는 화성인이나 지구인들이 많이 등장한다. 주제의식에 치중하느라 인물들은 도구화된 경향이 보이기도 한다. 이점은 소설의 생동감에는 아쉬운 점이지만, 작가가 그만큼 쓰려고 하는 메시지를 더 중시한 탓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몇몇 개연성에서 벗어난 점이 있고, 인물들이 살아있다고 느껴지지 않고 인형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느낌을 받아서 아쉬운 면도 있었다. 그러나 이 소설이 전체적으로 우화라는 색을 띠고 있다는 점을 상기하면 납득이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화성 연대기』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들은 바로 화성인의 텔레파시 능력과 관련된 섬뜩한 에피소드들에 있었다. 서막을 알린 ‘지구인’ 같은 단편도 그렇고, ‘3차 탐험대’, ‘화성인’ 같은 단편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 「어셔가의 몰락」을 바탕으로 한 ‘어셔2’도 인상적이었다. ‘적막에 휩싸인 도시’는 화성에 둘 밖에 남지 않은 남녀의 이야기를 코믹하게 풀어냈다. 픽스업 소설인만큼 색깔이 다른 작품들이 섞여 있지만,(여러 단편들이 모인 단편집의 특성상 분명 마음에 드는 단편과 마음에 들지 않는 단편들이 혼재되어 있고, 그 중 몇몇의 단편만 마음에 드는 것은 필연적이겠지만) 전체적으로 인류와 문명을 비판하는 주제의식은 일관되게 흐르고 있다. 인류의 성질이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고, 끊임없이 자연환경을 망가트리고 있기 때문에,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이 소설은 여전히 유효한 울림을 가진다.
오래 전에 출간되었지만, 언제 읽어도 독자들에게 감동과 의미를 전달하는 작품은 고전이 되어 살아남는다. 『화성 연대기』는 지금껏 살아남아 이제야 제대로 한국에 소개되는 고전 SF다. 그렇다고 고전적인 작품이기 때문에 읽겠다고 결심할 필요는 없다. 충분히 독특한 개성을 가지고 있는 재미있는 작품이다. 작가가 그린 화성을 부드러운 문장들로 이미지를 그리고, 인간과 화성인의 조우를 통해 ‘인간’이란 존재를 돌이켜보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는 작품이다. 그렇기 때문에 읽어 볼만한 가치가 있다. 유명한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라는 의무감이 아니라, 정말 재미있는 소설, 빨리 페이지를 넘기고 싶은 소설을 보고 싶다라는 생각에서 읽을 수 있다. 읽고 나면 재미뿐만 아니라, 인류가 우주에 가져야 하는 관점, 또는 지구를 대하는 관점에 대해서 자성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책이다. 다 읽고 나면 마지막에 위치한 단편 ‘백만 년짜리 소풍’을 곱씹으면서 씁쓸한 여운을 느낄 것이다. 모든 것이 사라진 세상에 단단히 선 가족들을 보고 말이다. 냉소적인 태도로 인간들을, 문명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 속에서 우리는 또다시 인류 역사를 되짚어보고, 현재를 직시하는 한편, 다가오는 미래를 경계하게 된다. 우리는 어떤 삶의 태도를 견지해야 할 것인가. 끊임없는, 무분별한 발전만이 정답일까. 인류가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는 아무도 확신할 수 없다. 인류를 거울처럼 비쳐줄 외계인과 아직 만나지 못했으니까. 그러나 우리는 때로 과학소설을 읽으면서 다양한 시뮬레이션을 경험할 수 있다. 『화성 연대기』는 서정적인 문체로 우리의 과거이자 미래, 또 다른 우주의 현실을 광기와 비극이 서린 작가만의 색채로 보여주고 있다.
『화성 연대기』는 존 스칼지의 『노인의 전쟁』, 『유령여단』을 출간한 샘터사 외국소설선 다섯 번째로 출간되었으며 표지나 편집 모두 깔끔하고 작은 판형이라 들고 다니면서 읽기 좋은 책이다. SF를 좋아하는 독자는 물론이고, SF를 잘 모르는 독자라도 분명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화성 연대기』는 영감을 받은 인간의 손과 머리로 만들어진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아이디어와 색깔은 삶에서 왔다. 이것은 좋은 소설이다.’


“(상략) 화성인들은 과학이 미와 아름다움을 파괴하는 일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정도의 문제일 뿐이지요. 지구인이라면 이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이 그림에는 실제로 색깔이 존재하지 않는다. 과학자의 설명에 따르면, 색깔이라는 것은 어떤 물질의 분자들이 빛을 반사하도록 배치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색깔은 내가 우연히 보게 된 물건들의 본질이 아니다.’ 그러나 훨씬 더 영리한 화성인은 이렇게 말할 겁니다. ‘이것은 멋진 그림이다. 이것은 영감을 받은 인간의 손과 머리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 그림의 아이디어와 색깔은 삶에서 왔다. 이것은 좋은 그림이다. 이렇게 말입니다.”

― 레이 브래드버리, 『화성 연대기』, 샘터사, 2010년 8월, 157~158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게이트
신진우 지음 / 새파란상상(파란미디어) / 2010년 7월
평점 :
품절


  파란미디어의 중간문학 브랜드, 새파란상상의 네 번째 출간작 『게이트』. 이 작품은 어느 날, 아파트 10층에서 여자가 실종되면서 시작된다. 다음 날, 아파트 10층에 살거나 용무가 있는 사람들이 동시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10층에서 내린다. 그러나 그들이 내린 곳은 더 이상 그들이 아는 아파트 10층의 공간이 아니다. 자욱한 안개 속이 갇힌 아파트 10층에서 그들은 아래층으로도 위층으로도 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더군다나 아파트 10층에는 막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그들 말고는 더 이상의 사람을 발견할 수 없다.

  이러한 기본 설정은 마치 스티븐 킹의 중편 「미스트」나 미국 드라마 『로스트』를 연상케 한다. 부득이하게 한 공간에 갇힌 사람들이 불가사의한 현상들과 부딪치게 되면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들이 극을 이끌어가는 힘이다. 여기서 초자연적인 일 말고도, 인간 본연의 광기과 맞물리면서 흥미로운 체험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술에 취한 할아버지, 여고생 김정희, 여고생 정희의 엄마, 23살 복학준비 중인 이민호, 22살 여자인 김수정, 18살 중국집 배달원인 용식이, 윤재준 신문기자, 장인환 형사, 중년 남자, 경비원 등이 바로 10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를 탔고, 사람이 없고 안개에 휩싸인 이상한 공간에 도착한 이들이다. 평범해 보이는 이들이, 기이한 상황과 맞닥뜨리면서 변하기 시작한다. ‘지지직’ 거리는 효과음은 불길한 상황을 암시하며, 이들의 변화를 이끈다.

  아무리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도 10층에서 열리고, 계단을 타고 내려가도 포탈이 연결된 것처럼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이런 막막한 상황에 빠진 사람들은 결국 어떻게 될까? 극한적인 상황 설정은 일단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는데 성공한다. 독자는 이후 작가가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해나갈 것인지, 또 결국 어떤 결말로 치닫을 것인지 궁금해한다. 이 소설이 가진 미덕은 바로 이런 호기심을 한껏 자극하는 상황 설정과 여기에 처한 인물들을 묘사하는 방식이다.

  결국 불가사의한 사건과 맞닥뜨린 인물들을 그리는 작품이기 때문에, 얼마나 개성있는 인물들을 그려냈고, 또 생동감있게 묘사했는지가 관건이 된다. 아쉽게도 이 작품에 나오는 인물들이 그렇게 살아있는 인물처럼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물론 모두 다 똑같이 느껴진다거나 지나치게 도구적이고 인형처럼 보인다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이런 소설에 나올만한 전형적인 인물들이고, 조금 더 독특한 개성을 가진 인물이나, 실제 주위에서 볼 수 있는 것 같은 살아있는 느낌을 주는 인물은 등장하지 않는다. 읽으면서 작가가 각각의 인물들에 대해서 배경과 성격, 역할, 능력 등에 대핸 설정을 짰고 거기에 충실히 움직이는 캐릭터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대사들이나 행동이 의외성이 없고 이미 영화나 소설, 만화 등에서 나올법한 인물들이 각각 맡겨진 행동들을 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조금 더 색다른 인물들을 설정했다면, 다른 배경, 다른 성격, 다른 능력을 만들어냈다면, 그런 비틀림으로 인해 약간 전형적으로 흘러갈 수 있는 이 이야기가 어디서도 본 적이 없는 완벽하게 새로운 이야기가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 소설에서 나오는 능력들은 이미 기존에 있던 능력들이라 특별할 것이 없고, 인물들의 성격도 평범한 편이다. 물론, 여고생처럼 눈에 띄는 독특한 설정이나 능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능력의 의미나 역할은 별다를 것이 없었다. 제대로 된 설명이나 활용도도 떨어졌다. 다른 인물들에게 발현되는 능력들도 그 인물들의 사연과 사정에 맞춰서 나타나면 능력이 역시 여고생처럼 개성을 얻을 수 있고, 다른 식으로 캐릭터의 성격과 이야기가 뻗어나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 빠지면 꼭 광기를 드러내는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원래 악한이었다던가,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든가 하는 식은 너무 안일한 설정이라는 느낌도 들었다.(실제 경비원이 읽는다면 이 작품을 좋게 읽을 수 있을까? 일반적인 편견으로 만들어진 캐릭터들이 조금은 불편한 감도 있다. 인물들이 너무 기호적인 느낌이었다. 처음 수정의 묘사부터 행동이나 대사도 가볍게 그려져 불편하다가 나중에는 성격이 뒤바뀐 것처럼 캐릭터도 바뀌어버린다.) 전형적이라고 할까. 많은 작가들이 써먹은 일종의 클리셰 같은 느낌도 들었다. 인물들에게 조금 더 깊이를 부여했다면 어땠을까? 그렇다면 일단 지금 같은 분량은 불가능할 것이고, 속도감도 잃을 것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캐릭터에 짧은 심리묘사만으로는 이 작품을 지나치게 가볍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그보다는 개개인의 심리묘사에 좀더 치중하고, 『로스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인물의 과거 배경이나 트라우마 등과 연결해서 현재 사건을 바라보고, 연계되는 점이 있다면 소설이 더욱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풍성해질 여지가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인물이 진짜 살아있는 느낌을 줄 수 있었을 것이고, 예측한대로 흘러가는 게 아니라, 의외의 방향으로 계속 달려나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작품의 장점은 눈부신 속도감이다. 그야말로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가 다른 책들과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빠르다. 앉은 자리에서 몇 시간 만에 금세 다 읽어내릴 수 있을 정도로 빠르게 읽을 수 있는 것이다. 가독성이 높다고 할까. 쉬어가는 타임이 없이, 무조건 전개만을 외치고 달리는 소설 같다. 그 때문에 정신없이 끝을 향해 달려갈 수 있다. 이런 빠른 속도감은 빠르게 읽히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찾는 독자들에게는 잘 와닿는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가독성 높은 장르소설을 찾는다면 『게이트』는 충분히 좋은 선택이 될 것이다. 수많은 장르소설들이 끊임없이 지금도 출간되고 있지만, 이토록 잘 읽히는 책을 쓴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만큼 이 소설은 깔끔한 문장, 적절한 문단 길이, 영상적으로 연상이 잘 되게 장면 묘사, 군더더기 없는 스트레이트한 전개로 독자의 눈을 사로잡는 것이다. 이 소설의 강점은 바로 이 속도감이다.

  다만, 이 속도감을 얻으면서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인물들이 피상적으로 그려지는 단점을 지닌다. 게다가 지나친 전개의 폐해로 인해 작품에서 어색한 부분들이 속출한다. 독자가 생각을 정리하고 감정이입을 할 새도 없어 인물들의 심경 변화가 잘 와닿지 않는 면들이 있고, 몇몇 장면들은 전개를 위해 빨리 넘어가면서 어색함을 드러내기도 한다. 가령, 자기소개를 하다가 갑자기 철가방 랩퍼라면서 용식이 랩을 하면서 분위기가 밝아지는 부분은, 너무 급작스러워서 상황과 어울리지 않고 독자가 어색함과 민망함을 느끼게 되는 부분이다. 좀 더 많은 분량이 사용되어서 서로를 알아가고 생각을 정리하고 난 다음에 천천히 자연스럽게 분위기가 전환되었다면 그런 민망한 느낌이 들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빠른 전개를 위해 과도한 생략이 단점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분량이 더 늘어났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소설의 설정은 기존의 오컬트 설정과 불가사의하고 밝혀지지 않는 설정이 혼재되어 있다. 오컬트에서 쓰이는 설정들은 주석 등으로도 설명이 붙는데, 색다른 것이나 기묘한 것은 없는 편이다. 이미 기존에 오컬트 소설들, 만화, 게임 등에서 다룬 내용들이라 새로 알게 되는 것이나, 독특한 발상은 볼 수 없다. 이 기묘한 공간에서 인물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초능력을 발현하게 되는데, 일반적인 능력들이 주를 이루고 능력들을 조합하거나 독특하게 이용해서 독자의 허를 찌르는 면은 적어서 아쉬웠다. 즉, 오컬트 설정에서 신선하고 재미를 얻을 수 있는 요소는 적은 편이었다. 불가해한 설정들은 소설이 끝날 때까지 명확히 밝혀지는 부분은 없다. 공포를 자아내기 위해서는 미지의 상태로 남겨두어야 하는 것도 마땅하지만 어느 정도 암시를 해줄 수 있는 부분, 변화를 일으키거나 저항의 여지를 줄 수 있는 것도 필요한 느낌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공간에 머문다는 미지의 공포를 비롯해서, 악령을 연상시키는 존재, 그로 인한 고어적인 장면들은 각각 공포를 느끼게 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글로 고어적인 장면을 서술한다고 해서 그 공포가 제대로 와닿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상황을 통해서 연출이 되었다면 더욱 공포를 체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쉬운 작업은 아니다. 글로 공포를 전달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는 지금까지 나온 『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 시리즈를 봐도 알 수 있다.) 몇몇 고어적인 장면은 그냥 일반적인 영화에서 보던 이미지를 차용한 느낌이라 아쉬운 감이 있었다. 공포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독자가 체감할 수 있는 상황에서 오는 공포, 그리고 생생한 묘사를 통해서 가능할 것이다. 이 소설에서는 그런 손에 잡힐 듯한 묘사에서는 아쉬운 면이 컸다. 빠른 전개를 위해 묘사는 짧게 넘어가는 부분들이 많았다. 각각의 상황에 대해 새로운 표현, 단어들로 독자를 환기시켜줄 필요가 있었다. 가령, 피와 살점이 방에 난자한 장면에서 단순히 그 장면을 묘사하고, 반복적으로 ‘지옥’이라는 단어로 처참한 상황을 표현하려고 하는 부분에서는 같은 단어가 반복되면서 지겨운 느낌이 들었다. 지옥이란 단어의 진부함이나 단순함은 제쳐두고, 한 번 사용한 단어를 다시 재사용하는 것은 좋지 않은 방식일 수밖에 없다. 결국 처음에 와닿은 느낌은 단어가 반복되면서 희석되고, 단어로만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각각의 상황마다 다른 단어와 표현으로 매번 더 처절한 공포를 표현할 필요성이 있었다.

  이 작품은 다른 작가의 단편에서 시작되어 장편으로 발전한 작품인데, 그런 면에서 보자면 단편의 아이디어를 확장했다는 점에서 무난하게 잘 소화했다고 할 수 있다. 장편인 이상 스트레이트한 전개 말고 플롯에 좀더 신경을 썼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이 공간이나 적, 여러 현상들이 명확하게 이 작품 내에서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을 상기할 때 이 책에 쓰인 방식이 최선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현대를 배경으로 불가사의한 상황과 빠른 속도감에서 김이환의 『절망의 구』(예담)가 떠올리는 면도 있다. 두 작품다 독자를 끌어들이는 흡인력이 상당하고, 불가사의한 현상에 끌려다니는 인간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게이트』는 빠른 속도감의 장르소설을 원하는 독자라면, 두말할 필요없이 추천할 만한 작품이다. 다른 매체나 소설에서 비슷한 경향의 작품들도 분명히 존재하지만, 국내 작가가 이런 형식과 분위기의 소설을 쓰는 경우는 흔치 않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다양한 성향의 작품들이 더욱 더 많이 여러 작가들에 의해 시도되기를 바라고 있다. 상당히 많은 한국 작가들이 천편일률적인 소재의 작품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런 희귀한 소재의 장르소설이 나왔을 때, 이 소설을 더욱 많은 독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읽어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더 많은 작가들이 새로운 시도를 할 테고, 좋은 작품들이 나올 수 있는 토대가 될 것이다.

  정신없이 질주하는 『게이트』의 끝이 과연 어떤 식으로 끝날지 궁금하여, 책을 받자마자 몇 시간도 안 되어서 읽어내려갔다. 마침내 끝을 다 읽고는 괜찮은 엔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후속권을 암시하는 듯한 느낌이라서, 2부가 나온다면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책을 접하자마자 순식간에 읽어내려간만큼 충분히 매력적인 소설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을 하고 싶은 독자라면 지금 당장 구매를 할 것을 추천한다. 후속권이 나온다면 이 책은 프롤로그에 지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정말이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은 아닐까. 이 공간을 외부에서 관측하려고 시도한다면, 이미 이 공간을 거치고 나서 현실로 돌아온 다른 이들이 있다면? 그런 무리에 접촉할 것인가? 달아날 것인가? 현실에 무수한 이런 공간이 또 있을까? 이능을 가진 인물들 중 일부는 이 공간을 지나친 것일까? 이 공간에서 보았던 불가사의한 존재들이 현실에도 나타날까? 모든 것을 없앨 수 있을까? 세상에 알릴 수 있을까? 은폐할 것인가? 은폐하는 세력이 있을까? 다시 그 공간에 들어서게 될까? 누군가를 찾게 될까? 작품 내에서 밝혀지지 않은 현상들과 설정들이 무수히 많기 때문에, 후속권에 대한 상상은 끝도 없이 사방으로 뻗쳐나간다.

  책의 판형이나 표지 이미지, 깔끔한 편집 등도 마음에 들었다. 작가가 상당히 신경을 쓴 것을 알 수 있는 점은 각 장마다 시작할 때 나오는 인용구인데, 적절한 내용이 들어가 있어서 글의 분위기를 전체적으로 잘 살리는 느낌이었다.

  올 여름, 무더위에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시원한 독서 경험을 줄 수 있다. 폐쇄된 공간에서 열 명의 사람들과 한 마리의 고양이를 가지고 이토록 급박하게 이야기를 끝까지 끌고 가는 작가의 역량이 첫 번째 장편소설이라는 사실을 믿기지 않게 만든다. 재미있는, 기존 한국 장르소설과는 다른, 기대되는 이야기와 작가를 읽고 싶다면, 『게이트』를 추천한다. 누군가에게 선물해도 부담없을 만한 흥미로운 소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보이드 씨의 기묘한 저택 이타카
하지은 지음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얼음나무 숲』, 『모래선혈』 등을 노블레스클럽에서 출간한 하지은 작가가 디앤씨미디어에서 새롭게 내놓은 이타카 브랜드에서 『보이드 씨의 기묘한 저택』을 출간했다. 앞선 두 작품과 마찬가지로, 서점에서 팔리는 장르소설을 지향한 브랜드에서 나온 장편소설이다. 노블레스클럽의 첫 타자였던 『얼음나무 숲』은 호평을 받았고 몇 번의 증쇄를 기록했다. 그만큼 시장 반응이 좋은 편이었다. 하지은이라는 작가를 이 작품을 통해 알게 된 사람들이 많았다. 『모래선혈』은 『얼음나무 숲』의 작가라는 점에서 기대한 작품이었으나, 구성상 초반과 후반의 불균형 같은 약간의 아쉬움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번에 출간한 『보이드 씨의 기묘한 저택』 같은 경우는 『얼음나무 숲』과 같은 재미를 준 것은 아니었지만, 『모래선혈』에서 보인 아쉬움은 드러나지 않았다. 일단 구성이 안정적으로 짜인 것이 인상적이었다. 목차를 보면 ‘현관’에서 시작해서 1층부터 7층까지 쭉 올라가고 있다. 그러면서 이야기가 순차적으로 진행되는데, 전혀 어색함이 없고 오히려 앞과 뒤가 맞아떨어지기까지 하는 것이다. 먼저 인상적으로 다가온 것이 구성이라면 그 다음은 소설의 분위기였다. 앞선 두 작품과 차별화된 소설의 색깔이 마음에 들었다. ‘기묘한 저택’의 입주자들을 대상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는, 고딕 소설을 연상케했다. 사람들의 광기와 증오, 사랑이 다양하게 섞이면서 매력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낸 것이다. 국내 저자가 쓴 수많은 환상소설들 중에서 이렇게 책 한 권이 확연한 색깔을 띠고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이다. 그만큼 희귀한 소설이고,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

  문장은 이미 『얼음나무 숲』에서부터 호평을 받은 만큼, 단아하고 뛰어나다. 걸리는 문장을 찾기 힘들 정도로 자연스럽게 읽히고, 문장을 읽는 맛이 있다. 다만 이전 작들에 비해 화려한 묘사는 줄어든 느낌이 있다. 그보다는 대사나 상황 전달에 더 치중한 문체였다. 그 덕에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었고, 여러 인물들이 나옴에도 혼란스럽지 않고 빠르게 읽어나갈 수 있었다.

  이미 전작을 통해 하지은 작가를 접한 독자라면, 걱정할 필요 없이 이 책을 선택해도 좋을 것이다. 그만큼 읽는 재미가 있고, 안정적으로 쓰인 작품이다. 이 책에는 1층부터 7층까지 보이드 씨의 기묘한 저택에 살고 있는 여러 인물들이 나오는데, 이런 다양한 인물들이 나오면서도 인물이 겹치는 느낌이 없이 각기 생명력을 가지고 움직인다. 이렇게 많은 인물들을 다 특성을 가지고 살아있게 묘사하는 것은 감탄이 나올 정도다. 그 덕분에 이야기가 풍성해지고 여러 인물들과 상황들을 접하는 재미가 있다. 인물들마다 사연이 있기 때문에, 그 사연을 만나는 재미, 그리고 이야기들이 마치 연작소설집처럼 서로 영향을 주며 연결되는 구성은 이 작품의 백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작품의 주요 테마는 ‘소원’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군가 당신의 소원을 이루어준다면, 당신은 무엇을 빌고 싶은가? 그러나 이렇게 쉽게 간다면 이는 소설이 성립 될 수 없을 것이다. 소원은 딱 한 번만 가능하며, 이 소설에서 나오는 대부분의 인물들은 자신이 소원을 빌었는지도 자각하지 못한 채 상황들을 맞게 된다. 각기 다른 상황에서 다르게 소원을 빌어 그것이 때로는 진심이고, 때로는 진심에 반하는 것이고, 평생 후회할 만한 소원이고, 또 원했던 소원이고, 행복한 결말로 이끌기도 하고, 비극으로 이끌기도 하면서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보여준다. 소원에 얽힌 보이드 씨의 기묘한 저택 주민들의 이야기가 바로 이 소설 한 권에 담겨 있다.

  층 마다 다른 화자를 내세우기 때문에 이 소설은 연작소설집처럼 읽힌다. 그만큼 재미있는 에피소드와 재미없는 에피소드가 갈릴 수 있다. 처음 1층 걸작의 방은 마지막 층까지 이야기의 중요한 발단이기도 하면서, 이야기 측면에서는 크게 인상적이지는 않은, 프롤로그 성격의 글이다. 그러나 강렬한 이미지 덕분에 글에 호기심을 갖고 다음 장을 기대하게 만드는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2층 시인의 방은, 전작 『모래선혈』에서 작가를 등장시킨 것처럼 이번에는 시인을 등장시켜서 기묘한 느낌을 주는 에피소드였다. 1층 걸작의 방이 암울하고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였다면, 2층 시인의 방은 조금은 로맨틱하면서 의외로 밝은 결말까지 보여주는 에피소드였다. 기분좋게 읽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에피소드 중 하나라고 할까. 3층 연인의 방은 한층 더 흥미로운 에피소드였다. 귀족의 영애와 도망을 친 남자의 뒷 이야기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것을 상상해 본 작가의 결말은 충격적이면서도 충분히 납득이 될만한 이야기였다. 지나치게 암울하긴 하지만. 4층 부정의 방은 딸과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결말이 상당히 씁쓸했다. 5층 여인의 방은 가장 인상에 남은 에피소드였다. 중년 여인의 속내로 서술되는 시점이 신선했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잘 와닿은 것은 아니지만, 기억에 확실히 남았다. 5층과 바로 이어지는 6층 의사의 방 이야기. 의외의 에피소드였는데, 조금 아쉬움이 컸다. 이야기가 결말에 가까워질 수록 흐름이 예상이 갔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결국 후반부라고 할 수 있다. 후반부의 이야기 전개나 결말이 조금 아쉬웠다.

  누구나 소원을 빌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밤하늘에 떨어지는 별똥별을 향해서, 케이크위에 꽂힌 촛불을 끄면서, 두 손을 깜싼 채 기도를 올리면서. 소원들이 모두 이루어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니, 딱 하나의 소원만 이루어진다면 무슨 소원을 빌게 될까. 무심코 빈 소원이 이루어졌다면, 그것에 감사할 수 있을까. 아니면 자신이 진정 원하는 소원은 그게 아니었다고 분노하고 후회할까. ‘소원’이라는 단어는 많은 소설이나 영화, 만화에서 다루어진 단어다. 인간의 욕망을 표출하는, 만능적인 단어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그 ‘소원’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한 권의 장편소설을 훌륭하게 소화해내었다. 누군가의 소원을 들어주면서도 정작 자신의 소원은 빌 수 없는 한 남자와 그 남자에게 소원을 빈 여러 사람들의 각양각색의 이야기들이 독자의 머리를 자극한다.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힘이다. 사람들이 각자 무슨 소원을 비는지 궁금하다면, 보이드 씨의 기묘한 저택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면, 주저없이 이 책을 펼쳐들기를 바란다. 각 층마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갖고 있는 인물들이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을 것이다.

  페이지를 펼치는 순간, 보이드 씨의 기묘한 저택에 초대장을 받은 셈이나 다름없다. 둘러본다면 아마 당신도 그 저택이 분명 마음에 들 것이다. 한 번쯤 거주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 것이다. 롤랑 거리 6번가, 7층으로 이루어진 특이한 건물. 그곳은 입주자들의 다양한 사연을 품고 있는 보이드 씨의 기묘한 저택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