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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요즘은 어떠하십니까 - 이오덕과 권정생의 아름다운 편지
이오덕.권정생 지음 / 양철북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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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아르바이트의 일환으로 동화를 양적으로 많이 접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기간에 얻은 게 좀 많다. 국내외 훌륭한 작품들로만 선별해 읽어서였을 수도 있지만, 무얼 읽든 자체만으로 완전한 기쁨일 수 있던 적은 아마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워낙 어릴 때는 책 자체에 흥미를 갖던 어린이도 아니었지만, 설사 읽은 기억이 있는 작품이라도 다시 보니 확실히 다른 게 보였고 사실상 처음 읽는 듯이 모든 게 새롭고 훌륭해 보였다.

갖던 편견을 버리게 된 것, 거의 모든 면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든 것들은 아동문학이 문학 안에서 갖는 어떤 중요한 지점들을 복기하게 해주었다.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난 지금 여전히 동화를 읽는 어른인가 하면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게 문제다. 헤아려 보니 한창 읽던 시기 이후 동화를 많대 봤자 열권 미만 정도로 읽은 정도인 게 다일까.

물론 책을 아무리 많이 읽는 사람이라도 부러 동화를 찾아 읽는다던가 하는 일은 흔치 않을지 모르겠는데, 어쨌든 발견의 기쁨인 듯이 몰입하고 열광하기까지 했던 내가 다시 한 장르를 통째로 망각해 버렸다면 한심하기 짝이 없을 일이다.

굳이 변명이라고 한다면 지금 당장의 삶과는 좀 먼, 괴리감이란 말로 설명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정서적 고요를 안겨주던 이야기들이 그런 식의 이유로 어느새 잠재워져서 여간하면 일지 못할 영역으로 즉 관심 밖 세상으로 영 밀려나 버린 것이다.

 


소설, 에세이, 인문학, 과학, 예술, 잡지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고자 노력하면서도 왜 유독 아동문학은 배제되고 마는 것일까. 아동문학이 다른 장르와의 경쟁에서 뒤쳐진다는 것은 비단 내 개인적 취향만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아동문학계가 안은 문제 중에서 이러한 외면의 아쉬움이 분명 존재하리란 생각이 든다

조심스럽게 생각해보면 이는 아동문학을 통해 보여주려는 어른들의 어떤 특정한 면 때문에 다양화의 실패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말하자면, ‘어린이들에게 무조건 아름답고 창의적이며 옳고 좋은 면만을 부각시켜서 보여주려는 어른들의 태도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과연 긍정만이 좋은 어린이로 성장시키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까. 거의 모든 아동 문학에서의 결과는 세상의 소외를 말할 때조차도 양쪽 어떤 면이든 아름다운 면만을 비추는 비약이 있다

물론 좋은 것만 보이고 싶은 부모들의 순진한 배려 때문이겠지만 정작 어린이들의 마음은 어떤가. 직접 쓴 시나 일기를 들여다보면 싫은 것, 불만투성이들로 그들의 눈이 이미 세상을 그리 아름답게만 보지 않다는 걸 어른들은 모르지 않는다.

어른이 생각하는 막연히 이상적인 것들만 작정하고 보여줘도 어린이의 마음에는 참으로 다양한 감정들이 돋아나 이러저러한 잣대로 판단된다. 한없이 좋고 긍정적이고 희망 찬 세상 보다는 보다 더 다양한 면을 보여주는데 큰 방점을 두어야 광의적 태도로 접근할 수 있다. 분명 아이들도 이면의 두려움, 불안, 부정성, 슬픔 등 행복이 아닌 귀결의 이야기도 힘들게 부딪힐 힘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세상이 한없이 아름다운 곳은 아니기 때문이다. 

종종 불행이나 아쉬움의 감정, 슬프게 끝나는 작품도 있지만 그런 책들은 넓게 읽히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좀 더 다양한 스펙트럼의 아동문학이 만들어진다면 또 그만큼 남녀노소 사랑받을 만한 이유는 충분해질 것이다.  



서한집 <선생님, 요즘은 어떠하십니까>을 읽으니 아동문학에 대한 여러 문제들이 떠오르면서 좀 더 확장된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동문학가 권정생 선생과 평론가 이오덕 선생이 편지로 나눈 30년의 우정은 참으로 위대한 인간의 면을 다해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 두 분이 살아 계실 적만큼은 아동문학의 발전을 위해 진심을 다하는 노력이 찬란하던 시기였노라고 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단 두 사람의 태도는 속물주의에서 벗어나, 보다 많은 아이들이 동화를 읽게 되기를 희망하고 삶의 현명함을 가지도록 인도하는 진정한 선생의 모습이었다. 

아동에게 아동문학은 과연 왜 필요한가? 그것은 우리가 어른이 되어도 결코 잃지 말아야할 인간의 근본을 가르치기 위함은 아닐까.

부모는 좋은 책에 내재된 삶의 아름다움과 가치들을 가장 이상적 삶이라고 가르치지만 정작 그 아이가 커서 가치적 삶을 살고자 한다면 과연 흔쾌히 동의할 수 있는 부모는 몇이나 될까. 동화 속과는 상반된 삶을 지향하고 쫓게 된 어른들이 할 수 있는 말이라곤 그러한 삶이 이상적 가치에 불과한 것이라 꾸짖는 일 뿐일 것이다. 전혀 상반된 가치의 불균형으로 아동문학은 너무 무구하다는 편견 속에, 현실의 괴리를 안은 점점 도태된 장르로 치부돼 버린 것 같다. 옳고 가치 있는 일이 어리고 순진할 때야 믿고 따르는 일이라는 것은 비겁한 어른이 되고만 우리의 슬픈 자화상이다.




이 책에서 나눈 이오덕, 권정생 선생의 일상을 들여다보며 느낄 수 있던 점은 과연 어른이 되어서도 웬만한 유혹에 굴하지 않으며 강직한 믿음을 밀고 나가는 힘을 배울 수 있다는 점이었다. 진정 아이들이 꾸려갈 사회가 타인을 배려하고, 보이지 않는 소중한 가치를 실천하며, 희망을 갖는 어른으로 살게 되기를 몸소 보여주는 인생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두 사람의 사소하고도 진실한 배려나, 최소한의 부끄러움을 아는 태도, 존경하고 사랑하는 나눔, 이러한 진정한 미덕은 참으로 위대했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유언대로의 그 가치들도 다양한 방편으로 지속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 돌아보면 권정생 선생의 작품은 남녀노소 모두 동화를 사랑했던 유일한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언제고 삶의 의미를 새삼 복기하고 싶어질 때, 다시 꺼내 읽어보게 될 것 같은 따뜻한 책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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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편견
손홍규 지음 / 교유서가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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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담하게 써내려간 짧은 글의 자연스러움에는 들인 공보다는 일상의 맥을 함께 짚는 면에 더 초점이 가게 마련이라, 읽고 있으면 한없이 다양한 주제로 빠져드는 즐거움이 생긴다. 물론 쓰는 사람 입장에서야 그게 어디 쉽기만 한 글쓰기였을까 싶은데, 한정된 원고 매수를 지켜내느라 단어를 고르고 다듬는 시간이 몇 곱절은 더 들었을 작품이 있는 것이다. 이는 물론 읽는 사람 각자의 레이더망에서 어김없이 수신되는 일로, 작가는 작가대로의 치밀한 글쓰기를 감행해야 매끄럽고 자연스럽게 읽히는 인과일 수 있다.

짧은 글의 묘미는 작가의 분투적 활기를 확대경으로 보는 것 같은 응축된 생기로서의 재미가 돈다

 

 

 

보면, 서서히 그 감정을 드러내어 은은히 퍼지는 글이 있는가 하면 저변과 이면의 전체를 응축한 활발한 물결과도 같은 글이 있다. 여기에 실린 손홍규의 단편들은 후자의 힘에 더한 매력이 느껴지는 글이었다. 이는 그의 소설 <봉섭이 가라사대> <사람의 신화> <이슬람 정육점> 등에서 봐온 느낌들과는 사뭇 다른 면이라 좀 의외였는데, 무엇보다 재생의 힘이 강하게 느껴졌다. 소설을 읽으면서는 주로 시처럼 은은하고 탐색해 나가는 교감의 전개가 일품이었기에, 비소설에서도 이와 비슷한 감정의 전개를 기대한 모양이다아이러니한 소극 같은 정서, 슬픔을 희극으로 보여주는 소외된 사람들의 지혜, 그의 소설에서는 이런 식으로의 삶의 열패를 감행하며 극복해 나가는 인간의 한 과정들을 지켜보는 매력이 있었다. 계절의 그것처럼 어김없이 되풀이되는 살아가는 풍경들은 참으로 다양하고도 비슷한 향기들로 아련해지는 슬픔이 있다

작가는 이러한 감정들의 연장으로 산문에서도 역시 말하고자함의 삶의 면면을 다양한 이슈와 개인적 일화들로 이행시킨다. 다만 짧은 글이어야 했던 만큼 활기가 쏟아낸 굵고 강한 분리들을 담아내는데 주력하는 글쓰기를 한다. 영혼의 집인 고향을 말할 때 따뜻한 푸근함을 느끼게 해주다가, 현실의 고단함이나 시대의 사태, 부조리를 꼬집는 대목에서는 개인적 낙담에 멈추지 않고 빛나는 암시들로 가득해진다.

 

 

 

요컨대 사소한 전환을 통하여 변화를 꾀하는 귀중한 동반자 같은 면으로 작가는 존재한다. 그러나 그러한 행보는 달콤하거나 친절한 방편으로의 안내자라기보다 결여되고 쓴 맛에 가까운, 덤불의 초입의 서늘함을 전해주는이에 가까웠다. 이는 뒤로 갈수록 시대를 향한 담담한 어조로의 문제들을 말할 때 자주 그렇게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에서 익숙하게 봐온 배제되거나 소외된 사람의 이야기라면 더욱 들춰내 벼랑 같은 고개를 함께 걸어주던 연장에서 익숙한 면이다. 당장의 곤경을 외면하고 무시해 버리는 시대의 무리들을 작가는 굳이 드러내고 함께 모색해보자고 먼저 걸어 나간다.

현실을 둘러싼 대립과 갈등에 적이 답답해져 오는 마음을 외면하지 않고 기꺼이 함께 올라가려는 불편함을 그는 아마 두려워하는 것 같지 않다. 그 불편함의 한 쪽을 이해하기 위해서 작가는 다정한 편견이 필요해지는 이유라고 설명한다.

참다운 용기는 전염성이 강한 법이다라고 한만큼 최고의 효용으로서 용기가 한데 모여 힘을 이루고, 그 광막한 가능성을 아낌없이 지향하는 편견일수 있기를 바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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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적인 도시 - 뉴욕 걸어본다 3
박상미 지음 / 난다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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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미의 <나의 사적인 도시>는 원래 개인 블로그에 올려졌던 글이라 한다. 아무래도 좀 쉽고 발랄한 내용을 상상했었던 탓인지 이렇게나 밀도가 높은 책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타국에서 지인을 위해 근황을 알리는 목적으로 올린 글이었다고 하는데, 그런 이유치고 지나치게(?) 전문성이 높았던지 애초에 책이 될 운명으로 써진 글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블로그 글인데 수준이 높아서 제법이다란 말을 하려는 건 아니고, 어떻게든 이렇게 오랜 기간 꾸준하게 또 균질한 글을 써낼 수 있었는가에 대한 경외감이 들어, 이에 인상이 강하게 남는 책이다.



막연하게 뉴욕의 일상에서 상상되는 화려한 삶의 자랑, 때때로의 투정, 외로움과 같은 감정적인 면을 주된 일상으로 기대한다면 이 책은 금방 방향을 잃게 만들고, 얼마 안가서 아예 놓게 만드는 고약함이 있다. 부럽도록 화려하다거나 대도시에서 살아가는 고투 정도를 넘어서 그 안의 그저 차분해 보이는 일상, 더불어 예술에 대한 전문가의 성실한 해석과 다양한 주제가 담겨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호의로서 편하게 인도되는 방편이 아니라 조금은 집중을 필요로 하는, 작가의 뚜렷하고도 철저한 편애만을 담고 있는 쪽에 가깝다.




우선 이 책을 막연히 떠올리면 어떤 사람에게는 특정한 장소가 애정의 모든 것이랄 수 있게 중요할 수 있구나 싶어 흥미롭다. 막상 가본 사람에게야 이해도 쉽고 관심이 더 가겠지만 그렇지 못한 이에게 특정한 장소란, 지속적 공감을 유지할 수 없으리란 아쉬움이 걱정되는 일이다. 때문에 뉴욕 근처에도 못 가본 사람으로서 어떻게 이 방대한 사랑의 헌사를 들어줄 수 있을까 공백을 앞서서 염려했다. 물론 기대 이상일 수도 있다란 생각이 있었지만 책을 다 읽고 나서는 이러한 걱정들이 전혀 중요치 않은 책이라는 걸 알게 됐다.


오히려 의외의 복병은 뉴욕을 잘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작가의 관심사에 얽힌 심도 있는 예술 이야기를 끊임없이 듣는 일이었다. 예술가이자, 번역가 등의 일을 전방위적으로 겸하다보니 일상을 말하더라도 허투루 감상을 올리는 법이 없다. 매우 전문적인 특색까지 이해해야 하기 때문에 거의 모든 글에 하나의 세계가 펼쳐지는 듯, 없던 학문적 호기심을 자극받아야 한다. 확실히 작가가 애정하는 모든 것과 그 시간들에는 겉핥기로 알 만한 그것들과는 엄연히 다르게, 깊은 데가 있었다.

공간에 집중된 낯선 면모를 드러내는 글쓰기를 하기 보다 자신에게 집중된 관심사의 연장에서 그 연결고리를 잇기 위한 공간이었다. 그곳은 시간의 투사를 공유한 공간이며 작가 주변에 펼쳐진 시간에 대한 증폭으로 공간이 떠올려 지는 일이었다.



특히 미술에 대한 이야기는 양적으로도 상당해서 조예가 깊지 않은 사람에게도 덩달아 찾아보게 되는 함양의 즐거움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그 방대함의 높은 장벽을 실감해야만 했다. 애초에 타인에게 읽힐 글로 써졌기 때문에 간략한 설명들이 있고, 어렵게 읽히는 것도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관심이 없거나 한 이들에겐 고약한 부분이 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게 된다. 그러니 더 관심이 가는 부분들은 내가 좀 아는 작가나 작품들에 쏠리게 되고, 인생에 대한 언급을 하는 부분, 주로 일상을 더듬는 글에 더한 관심이 가게 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내내 어떻게 이 오랜 동안 하릴없는 일상을 쓸 때 조차 각 주제와 목적을 이루는 글쓰기가 가능했을까(물론 편집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거듭 그 성실함에 찬사를 표하게 되었다.

미술은 물론이고 영화나 책, 소소하게 느낀 계절이 지나가는 감정이나, 작은 파티에서 만나 나눈 이야기를 전하는 순간에서도 예술적 통찰, 인생에 대한 작가의 철학은 어김없이 맞물려 녹아나는 이유다.




뉴욕의 삶은 늘 복잡하고 시끄럽고 스펙터클한 일상을 선사하는 것이지만 작가의 시선에서 그 패턴은 늘 몇 걸음 떨어진 차분하고도 냉정한 이성의 기운이 주를 이루는 가운데 있다. 그래서인지 화려한 도시에서의 온도가 뜨겁다기 보다는 오히려 조금은 서늘한 온도로 느껴진다.

그림으로 말하자면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에서 본 정서와 닮았다고 할까. 복잡다단함 속에서 홀로 여유를 찾을 수 있는 힘은 그녀가 그곳을 충분히 이해하고 즐길 수 있었기에 가능했을 일이다.

호퍼의 그림에서 보았던 풍요 속의 고립, 단절된 고요, 무기력한 공허의 그림자들이 박상미 작가의 뉴욕으로 오면 조금 더 평온하고 자발적 고독의 서늘함 정도로 읽힌다.

이 고독은 누군가의 위로를 필요로 하는 그런 문제적 고독이 아니라 기꺼이 즐기기 위해 모인 사람들의 뉴욕을 상상하게 만든다. 시간 속에서 서서히 충만해져 오는 내면의 수호를 기다리는 듯한 그런 고요 말이다.

그래서 이 공간들은 안식의 침대처럼 딱 들어맞는 여유와 느슨함이 있는 집이 된다. 항상 한낮의 바쁘고 북적댄 하루를 이야기 하지만 그것을 써낸 숱한 밤의 호젓함의 기운으로 독자는 내내 느낄 수가 있는 것이다. 작가의 시선에서 보이는 뉴욕은 그 공허를 기꺼이 즐길 줄 아는 여유, 성실하고도 치열한 삶의 장을 준 셈이다.



이곳에서 비로소 사물을 응시할 줄 알게 되고, 관계를 맺을 줄 알게 되었으며, 외부로부터 오는 그 무엇들을 서서히 내 자신으로 물들게 하는 법을 배웠는지도 모르겠다.

요컨대 작가의 수많은 일상 속에 흐르는 침묵의 고요, 빈 공간에서 오는 충만함의 발견들이 오히려 그 공간을 좀 더 특별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무엇보다 자신에게 집중된 배움 속에서 살아갔고, 자신이 사랑하는 일에서만큼은 노력하고 세상과 끊임없이 부딪히며 이뤄갔기 때문일까, 작가는 더욱 공간을 이해하게 되고 사랑 역시 가능했을 것이다. 이는 작가가 언급한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인 들어 올림을 위한 완성의 과정과 닮아 있다. 그래서 이 일일의 글들은 뉴욕을 사랑한, 한 시절의 헌사와 같은 기록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 공간 안에서 완성된 한 사람의 풍요로운 성장기라 부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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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훈의 나는 왜 쓰는가
한창훈 지음 / 교유서가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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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문학작품으로 귀결되기까지 작가가 가장 공들여 신경 쓰는 과정 중 하나는 아마 ‘고쳐내기’ 작업이 아닐까 싶다. 이미 최선이다 싶게 고심했다 하더라도 작가는 더 나은 문체를 위한 단어를 선별하고, 오류는 없는지, 문맥에 맞는 흐름을 위해 의심과 고심을 인고하며 완성해 낸다. 숱한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만 원하는 결과물로 단장해낼 수 있는, '수정의 힘'이 글쓰기의 가장 중요한 핵심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러한 시간에 대한 투자가 반드시 좋은 결과물로 비례되는 일은 아니겠으나, 적어도 훌륭한 안목을 가진 작가에게 마침표를 찍게 되기까지의 노력은 응당한 보상일 수 있을 것이다. 성공적인 '고쳐내기'의 일환으로 가장 이상적 화합을 이루게 될 때 독자는 안전하게 흐르는 기류를 감지하며 감화 된다.

 

 

성공적인 작품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독자들은 그 안의 어떤 상반되는 가치들과 만나게 된다. 그 중 하나는 우리가 살아가는 어떤 일반적이고도 가치 전도된 보편적인 면이다. 매번 흔하고 비슷해 보이는 인생들을 보면서도 쉽게 몰입하고 위안을 찾게 되는 이유는 이것이 바로 나의 삶과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면에서 우리는 작가의 개성, 디테일한 기술의 발견을 통해 재미를 찾는다. 말하자면 작가만이 보유한 고유한 어투랄지 참신한 비유들, 독창적인 소재, 유연하게 흐르는 문장의 맥과 같은 창조적 발현에 따른 것들이다.

이렇게 작품의 보편성과 독창성이라는 두 면이 상호보완적 긴밀함을 유지하게 될 때 좋은 완성을 위한 지지대를 올릴 수 있게 된다. 가령 똑같은 주제를 다룬 영화를 볼 때도 거장이 만든 훌륭한 영화와, 그저 그런 뻔하고 지루한 영화를 구분하는 이유는 총지휘자 즉 감독의 연출력에 그 차이를 읽기 때문인 것이다. 밀접하고도 이웃하는 두 가지 가치들이 합당하게 전개될 때 창조적 면모는 더욱 돋보이게 되고, 동시에 작품 안에서 우리 삶을 되돌아보는 보편적 타당도 가능해 지는 일이다.

 

 

 

<한창훈의 나는 왜 쓰는가>의 제목만 보면 사실 글쓰기에 대한 작가만의 어떤 기술적이고도 전문적 면모를 기대하게 되지만 그런 건 아니었다. 이 책에서 작가는 자신이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는가에 대한 사실상의 긴 여정과도 같은 필연 같은 삶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한참을 읽으면서 위에서 언급한 문학작품의 내부적 문제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라 작가에게 '쓰기'란 무엇일까란 물음을 떠올렸다. 

어쩌면 여기 나온 이야기들은 작가로 하여금 인고하며 '고쳐내기'를 반복돼 실천하는 문학적 인고와 참 많이 닮은 인생들이다. 보편적이고 독창적인 소설 내부의 균형을 맞추는 일 따위를 끊임없이 세상 속에서 헤집고 두리번거리며 찾는 일과 다르지 않다는 걸 말이다.

마치 한 편의 소설을 완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고치고 완성하는 일처럼 이 책에 언급되는 삶은 거듭된 오류를 목도해야 하는 고된 일이며, 조금씩 진보하려고 애쓰는 일이었다. 작가가 겪어내고 응시한 시간들은 거의 외부세계와의 고리를 찾기 위해 떠난 바람 같은 기록들인 것이다. 



그래서 ‘쓰기’를 위한 인생은 사실 별스러운 예술인으로서 살아가고자 결심한 순간에 있지 않고, 오히려 이미 벌어진 삶의 되돌아보기 속에서 찾아진 일에 가깝다고 돌아본다.

서문의 말마따나 왜 쓰는가에 대한 말은 이후에 붙여진 몇 가지 핑계처럼 만들어졌다. 이후에 생각해 낸 여러 현실적인 이유들을 보니 궁색하게 축조된 허술한 말처럼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 말들은 사실 너무나 타당하고 고결해서 애처롭기까지 하다. 사람이라면, 어른이라면 응당 갖추어야 할 현실적이고 보편적인 이유들인데, 차마 제 재능의 자랑을 드러내놓지 못하는 사람에게 이정도로만 비춰지게 됐다. 그의 겸손한 태생적 기질이 사회 맥락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을 놓고 가장 최적인 직업을 선택하게 한 모양이다. 한창훈에게는 왜 쓰는가, 왜 소설가가 되었는가에 대한 대답은 해질 무렵 자연히 돌아가야 할 바닷가 섬집처럼 절로 그 발걸음이 그려지는 일이었다. 

온 생을 걸쳐 만나 온 주변인들, 그들을 둘러 싼 기막힌 삶, 그리고 작가 개인의 소신에 합당한 직업인으로서의 소설가를 꿈꾸게 된 이야기꾼으로서의 상상은 이런 식으로 완성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작가가 말하는 주변인들에 관한 인생들을 지켜보면서 주의깊게 들여다 본 면은 이들의 삶과 존재가 구체적으로 작가에게 어떤 의미를 던져 주었는가에 대한 물음이었다. 책을 덮게 될 무렵에는 조심스럽게 그 감정이 아마 ‘연민’으로 귀결되는 숱한 무엇들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에서 이야기되는 숱한 사람들, 이야기들 속에는 삶의 저변을 확장해 볼 수 있는 보편적 의미들이 있다. 작가 개인사뿐 아니라 주변의 좋은 예술인, 흥미로운 사람들 이야기가 많이 나오긴 하지만, 곳곳 주목되는 평범한 사람들에게서는 조금 다른 면을 들추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무지하고 때론 무책임하며 처량한 몸부림을 치는 나약한 인간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것은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연민으로 이해됐을 수많은 인생의 가련함을 들추고 싶었을 것이다. 너무도 남루하고 왜소해져버린 인간의 내면을 보는 일은 동정 보다는 차라리 외면하고 싶어지는 불편함이 더러 있다.

예컨대 여고생을 짝사랑한 남성의 이야기에서는 덜컥 고백해 버리는 장면에서 뭔가 좀 아니다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비루한 인생의 한 빛 희망을 주는 우화처럼 읽어낼 수도 있지만 관점에 따라서는 그러한 두 사람의 행동은 참으로 무책임하며 일방적일 수 있는 것일 수도 있는 일이다. 이런 식의 일방통행으로 타자에게 혹여 폭력이 될 수 있지 않나, 쉬이 낭만으로 무마돼 버리는 일은 아닐까 생각해보는 것은 큰 무리가 아닐 것이다.

종종 폭력과 폭언이 나오는 일화를 들을 때도 무심하게 인간을 바라보는 게 다일 수밖에 없을까 하는 생각이 미쳐 결과적으로는 '이게 다인가'란 생각이 들어 허무했다. 작가의 ‘연민’이라는 관점에 좀 더 가지치기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좀 더 세밀한 배려의 개입도 기대하고 싶어진다. 가난하고 소외된 삶에서 보이는 폭력성이 슬픈 보편이라는 큰 덮개로 가려졌던 것은 그동안 많이 봐왔던 우리네 모습이다. 이제는 좀 더 날 선 비판적 시선을 기대하지 않을 수 없는 것 같다. 

 

 

 

작가는 고향에서 나는 바닷내를 맡아야 삶의 의미를 찾고, 비린내 풍기는 음식을 먹어야 살며, 가련한 삶의 입이 되는 글쓰기를 해야, 산다. 그렇기 때문에 물의 길처럼 언제나 새로운 한걸음을 내딛는 그런 소설가이기를 응원하고 싶다. 예술은 무엇보다도 변화 가능한 특권을 가졌기에, 부디 이 땅의 초라한 개인들에게도 변화될 모반의 열망이 가득해지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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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싫어하고 그래서 그만큼의 문화를 이룬 일본이란 나라의 어떤 일면의 대표적 인물이라 생각이 드는 '마루야마 겐지'의 신작이 나왔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유행처럼 부는 현상들 가운데 문제가 될 수 있는 면들을 작가가 작정하고 일침을 놓는다. 이를테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막연한 기대를 갖는 순진한 긍정성, 낭만으로 치부하려는 시각을 경계하라고 쓴 여러 에세이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마루야마 겐지의 입에서라면 이런 책이 잇다르게 출간되고 있는 사실이 무조건 반갑기만 하다. 

경계해야 하는 태도와 같은 맥락을 이루는 그의 문체 역시 날카롭고 응석은 통하지 않을 한 개인의 빳빳한 의식들이 느껴진다. 그야말로 통렬한 비판의식으로 목소리를 들려주니 진정 어른이란 생각이 드는 작가가 아닌가 싶다. 

그는 도시 생활을 접고 거의 한평생을 시골 생활을 해 온 경험으로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를 펴내며 요목조목 참으로 다양하고 디테일한 면을 드러내면서 순진한 생각을 버리고 현실을 직시하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런 그에게 이번에는 '정원'이 눈에 띄인 모양이다. 주변을 가꾸면서 일어나는 자연과의 여러 소통의 감각들을 담아 내는데에 우리는 또 어떤 모습을 감화받게 될까. 사랑으로 가꾸되 그 안에서 벌어지는 자연의 어떤 엄격한 질서들을 어떠한 식으로 보고 또 우리에게 뭐라고 전할지 기대가 되는 책이다. 






그의 첫 장편소설을 읽게 되면서 자연히 주목하게 된 이래 빠짐없이 작품들을 기대하게 되는 손홍규 작가의 산문이다. 

언제나 보여주는 작가의 소설 속 인물들은 아플만큼 사랑스럽고 아름다워서 헤어지는 것이 아쉽게 느껴지질만큼 그 세계를 완벽히 구축한 진짜 사람들이 사는 세상을 말한다. 가장 변두리에서 소외된 자들의 찬 손을 매만져주는 참으로 다정한 손길을 가진 작가만의 독특한 시선들이 있다. 손홍규 작가의 개성은 늘 이런 식으로 좀 서늘한 기운에서 온기처럼 퍼져나가는 아픔과 희망이 공존해 있는 삶의 진한 기운이 어린 글로 기억되곤 한다. 

<다정한 편견>은 작가의 매체로 연재된 여러 편의 산문 가운데 선별과정을 거친 작품으로 작가의 사적 경험 등 소설 밖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한다. 손홍규작가의 좀 더 사적인 말이 궁금한 독자라면 무척 흥미로운 면을 발견할 수 있으리란 기대가 드는 작품이다. 








김도언의 산문을 읽고 있으면 그가 완전하게 소설가구나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소설을 쓰지 않았다면 버티지 못했을 사람이라고 감히 생각해 본적이 있다. 사회와 주변의 내면에 깊이 개입하는 남다름이 보인다거나, 깊이 침잠해서 골몰하는 그의 태도가 어떨 때는 심하게 외로워 보여서 그는 정말 괜찮을까 하는 아슬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다행히 소설을 사랑해서 꿈꿀 수 있는 천직의 소설가라는 직업을 가지고 분투하는 그의 모습을 여러번 상상하고 또 안심했다. 물론 책을 출간해내는 소설가 이외의 직업이 따로 있기도 하지만 김도언에게 소설은 따로 떨어져 생각할 수 없는 완벽한 일치의 면이 있다. 

이번 산문집은 신문에 2년간이나 연재한 글을 묶어낸 책으로 그 주제와 관심사의 폭넓은 저변의 이야깃거리를 담고 있다 한다. 소설가에게는 어떤 열정의 소산으로서의 관심일수도, 에피소드나, 단순한 관찰일 수도, 때로 어떤 변명에 지나지 않을 주장일 수 있다고 전한다. 세상에 대해서 말하는 소설가의 다양한 형태의 이야기들이 작가가 독자에게 바라는 어떤 추궁으로 내게 물음표와 느낌표로 전해질 수 있길 바라본다.    






이 책은 이명세 감독과, 시인 채호기 두 사람에게서 오간 편지를 엮어 낸 책이다. 시인과 감독의 만남이라면 직업적 기질만으로 그 간극이 커 보이기 때문일까 이색적인 이야기가 많이 오갔을 것 같아 흥미롭다. 감독이란 자리는 협업이 가장 핵심이고 시인은 혼자 치열하게 겨루는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명세 감독은 워낙 영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으로 유명하고, 문학으로 말하자면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시처럼 축약된 미를 보인다는 면에서 채호기 시인과의 동질성을 기대하게 되기도 한다. 영화에 대해, 시인의 시에 대해 이야기되는 좀 더 개인적인 사담을 듣게 될 생각을 하니 궁금증이 크게 인다. 









사물들에 대한 애정을 담은 여러 책들을 봐왔지만, 이 책은 여자 시인들만으로 이루어진 편애에 얽힌 사물들이란 점에서 흥미롭다. 남자 시인이든, 여자 시인이든 그 섬세함을 말하는데 있어서 구분이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라 그냥 이 책은 시인들의 시선이란 면으로 생각해도 무방할 듯 하다. 어쨌든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의 이야기일 수도 혹은 내 주변에서 보던 흔한 사물일수도 있고 시인 각자가 이야기하는 경험과 자기만의 것들에 대한 애정을 살필 재미있는 시간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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