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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우리는 계속 읽는다 - F. 스콧 피츠제럴드와 <위대한 개츠비>, 그리고 고전을 읽는 새로운 방법
모린 코리건 지음, 진영인 옮김 / 책세상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지난 세기 긴 대공황의 발단은 미국이었다. 1929년에 발생한 주식시장의 대붕괴를 시작으로 시장은 급격히 무너졌고, 가혹한 실업사태와 심각한 디플레이션 등을 초래했다. 이는 당시 유명 경제학자들도 예측하지 못한 급작스런 나락의 시작점이었다.



소설 <위대한 개츠비>는 대공황이 촉발되기 직전 미국의 위태로운 자화상이 담겨있어 흥미롭다. 소멸되기 직전 아름답게 부유하는 총천연색 거품을 보는 듯한 인상을 준다. 소설을 읽으면서 곧 닥칠 미래가 어떤 모습일지 알기 때문인지, 이들이 누리는 호사와 풍요로움을 양가적인 감정으로 읽게 된다. 흥청망청 써대는 그야말로 돈으로 가득 찬목소리들을 시끌벅적하게 듣고 있다보면 아름답지만 마냥 그렇게 비치지는 않는 위태로운 이중적 배경에 매료되기도 한다.




작가 스콧 피츠제럴드는 작중 인물과 시대적 배경을 통해 곧 들이닥칠 위기의 사회상을 예측하려고 이 소설을 쓴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 시대를 이야기함으로 해서 어쩌면 유일하게 예측한 사람일 수 있게 된 사실이라는 점은 흥미롭다. 경제학자도 하지 못한 일을 소설가가 해낸 일은 과연 이상한 일인가. 문학작품 안에서 미래사회를 예견하는 장면 중에 실제 지금의 문명이 구현해 살아가는 걸 심심치 않게 보게 된다. 인간의 상상력이란 미래를 예견할 수밖에 없이 현재의 몇 배를 능가할만한 가능성의 힘으로 존재할 수 있다. 현실 밖의 이야기, 어쩌면 그것이 예술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때때로 이러한 상상력의 범주에는 지금을 가장 충실하게 드러내는 방식인 민낯의 본연에서도, 그 예측이 반영될 수 있는 일이다. <개츠비>에 등장하는 상류층의 허위의식과 이에 마찰하는 중산계급 출신 남성의 묘한 인연의 실타래를 보면서, 개인의 삶이 시대와 맞물려 어떻게 파국을 맞는가는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곧 개인의 삶을 집요하게 파헤침으로해서 그 시대를 바로 보고 예견하는 꼴이 된 셈이다.  

그렇기 때문인지 이 책은 영미문학사에서 가장 위대한 소설로 언급되거나, 수많은 작가들이 사랑하는 소설, <그래서 우리는 계속 읽는다>와 같이 오롯이 <개츠비>만을 위해 이야기되는 책으로도 칭송되는 일이 적지 않다

작가 모린 코리건이라는 이는 문학 비평가이기도 하지만 작품에 매료된 이래로 20년이 넘게 이 소설에 대한 강연을 전국구로 하며 다니는 열혈 팬이라고 고백한다.  

모린 코리건의 관심과 행보처럼 책을 읽을 때마다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게 있다면 거듭하게 되고, 그러다 작가의 일거수일투족을 연구하고 알아내는 기쁨이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사사로운 계기의 관심의 시작으로 한 사람의 인생이 한 소설만을 위한 일로 점철 될 수 있다는 사실은 무척 부러운 열정인 것이다. 




워낙 <개츠비>가 소설뿐만 아니라 여러 장르에서 재현 또는 재해석 된 터라 내용이나 작가의 개인사적인 일들, 개괄적인 작품세계에 대해서 아는 바는 없지 않았다. 다만 이 책으로 훨씬 더 피츠제럴드라는 작가의 사생활에 대해 알게 된 점, 이것에서 오는 선입견들이 <개츠비>를 해석하는데 큰 장애가 되지 않다는 점도 새롭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개츠비>의 작품세계에 새로운 재해석의 시선을 느끼게 된 면은 크지 않았는데, 이는 워낙 많은 작품 연구에서 비슷한 이야기가 돌고 있기도 한 이유겠고 무엇보다 이 책이 피츠제럴드 개인사에 더 초점이 가지는 인상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개츠비라는 인물은 자신이 만든 환상의 불씨에 불을 붙이기 위해 오랜 시간과 공을 들여 장작을 쌓아 올리는 노력형의 인물이다. 그의 환상에는 데이지라는 사랑의 대상이 가장 크게 자리 잡고 있지만 사실은 그 자신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환상만으로 쌓아올린 갖은 노력이 데이지라는 인물의 본연에 대한 사랑만을 위한 게 아니라 자신의 욕망에 덧씌운 허상적 인간에 불과했다는 생각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강박적으로 제 인생을 포장하고 한 대상을 위해 집착하는 과정은 편법적이고 추한 인간의 욕망을 잘 드러내 준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우리는 개츠비를 통해 자신의 열망을 위해 도전하고 마침내 이루어 내기까지의 순수한 열정, 그 숭고함을 엿본다. 그것은 안타깝고 나름대로 매혹적인 인간의 단면일 수 있기 때문에 그를 달리 평가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톰과 데이지가 사는 전형적인 물질만능주의가 있는 한 쪽닉과 개츠비처럼 신흥부자들이 일군 쪽 그 어디에도 정상적인 사람이라고는 없다비정상적인 것들이 이루어 낸 거품과 허상을 막아줄 탄탄한 다리는 놓이지 않은 것이다닉이라는 사람의 일인칭 화법이 주는 쓸쓸함의 온도로 그 예측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개츠비는 중산층 출신이지만 상류층을 선망했고, 노력하면 그것이 이루어질 수도 있었던 특기할만한 시대를 살아냈다. 개츠비가 살던 시대 이래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꿈처럼 요원하기 때문에 그야말로 개츠비는 위대한 개츠비일 수 있지는 않을까 싶다.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거라고는 이름하나였던 소년에서 제 스스로 이름을 바꾸고, 꿈꾸던 이상적 인물이 된다. 비록 그것은 영원히 잡히지 않을 꿈, 인간의 영혼마저도 소유하려고 드는 무모한 일이었지만 그 거품은 아름다운 것이었다





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작품을 관통하는 무언가가 느껴진다면 그것은 인간의 이상향과 낭만, 이에 반하는 욕망의 충돌이 서로 교차되고 동반되어 내려가는 지점일지 모르겠다. 이 책에서는 피츠제럴드의 글쓰기에서 가장 위대한 주제가 빠져죽을 상황에서도 물 밖으로 머리를 내밀기 위해 노력하는 고귀함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이라는 모티프로 상징되는 수면 안과 밖을 자주 언급하고 있다

즉, 내려갈 것을 알게 되어도 끊임없이 그 위를 향해서 올라가려는 발버둥을, 우리는 도저히 응원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개츠비로 하여금 인간의 복잡한 단면, 한 시대의 마지막을 본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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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컨드핸드 타임 - 호모 소비에티쿠스의 최후 러시아 현대문학 시리즈 1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김하은 옮김 / 이야기가있는집 / 2016년 1월
평점 :
품절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세컨드 핸드 타임>은 소비에트 연방 붕괴 이후 찾아온 인간의 자유와 상실에 대한 이야기를 다양한 육성기록으로 담아낸 책이다. 소비에트인으로 살아간 이들 중 핍박받은 생존자들의 증언만을 담은 게 아니라, 붕괴 이후의 세대가 보는 어떤 전환과 아이러니에 더 집중하게 되는 면이 어쩌면 이 책의 진면모라는 생각이 든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역시 내부자의 시선이기 때문에 적나라하고 날카로운 지점을 기대하면서 이 책을 읽어 나갔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본문 어디에서고 명확한 정치적 입장이나 역사관을 내비치는 일이란 없었다. 다만 작가가 갖는 경향과 뜻을 모르겠는 것도 아니어서, 책의 의도와 방향에 대한 충실한 독자이고 싶을 따름이었다.

 

 

 

작가는 소비에트 시대를 네 세대로 분류하는데, 그것은 스탈린 세대부터 고르바초프 세대에 이르는 장장 70여 년 동안의 시대의 구분이다. 그 중 작가는 마지막을 관통한 인물이다. 아울러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연방이라 불리게 된 지금의 이전 네 세대와는 또 다른 20년이 흘러서, 격동의 시절을 가장 오래 살아내고 있는 유일한 세대이기도 하다. 책에서는 새로운 인간의 유형인 호모 소비에티쿠스들의 증언을 통해 그야말로 이전과 현세대의 극명하고도 혹은 복합적인 사유의 충돌을 담아내고 있다.

 

 

 

처음 이 책을 읽게 되었을 때 거의 막힘없이 말을 늘어놓는 서사적 유려함에 놀라게 되는데, 이는 흡사 소설인 듯이 거침없고 윤색되지 않은 면이라 흥미로운 지점이다. 만약 반대의 경우라도 즉 이 책이 소설이었다고 해도 에세이 같은 느낌이 들었을 것 같은데, 이 점이 작가의 고유한 방식이다

육성을 그대로 전하는 식의 작법을 채택한 것은 전직 기자출신 다운 작가의 기록방식에서 유래했다는 생각이 드는데, 책이 끝나도록 개입을 줄이고 릴레이처럼 이어지게 만드는 것은 무엇보다 인간을 바라보게 하는 힘이 되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인터뷰처럼 집요하게 묻거나 어떤 방향성으로 이끌어가는 것이었대도 이상하지 않았겠지만, 화자의 계획했거나 혹은 무계획적인 발화의 진실에만 초점이 맞춰지는 식은 그것대로 의미가 있어 보인다.

즉 이 책의 탄생과 존재의 이유는 작가의 세계관과도 맞물린 점이 클 텐데, 오랜 세월 우여곡절을 견뎌낸 개인의 삶이 별 편집 없이 들려지면 좋겠다는 열망이 그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노벨상을 받은 소설을 비롯 작가의 소설 화법들이 이와 같은 목소리 소설의 형식을 띤다고 하는 점은 그녀 작품 세계의 가장 큰 부분이자 핵심일 것 같다.


 

 

워낙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데다 개인적 체험이 주 내용이다 보니 읽다보면 여러 가치관과 잣대로 인해 혼란이 증폭되기만 한다. 그 안은 개개인의 역사관이 극대점을 향해 달려가는 옳거나 그름, 다름과 같은 생각들로 산발적 충돌을 끊임없이 하고 있는 소용돌이이다

작가의 개입이 너무 없기 때문인지 이걸 고스란히 다 듣고있어야 하는 곤혹스러움이 내내 있다. 증언들을 듣고 어떤 생각으로 이어나갈지는 독자들 개개인의 몫일 일이라는 듯, 작가는 후일담 같은 말만 조금 거들 뿐이다. 단지 이런 식으로 조금씩 모아진 언급들로 결국 어떤 긴 여운 같은 것이 생기고, 마침내 어떠한 의도를 느낄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정 가운데를 관통하는 자유라는 개념에 대해서 사람들이 그토록 다양한 관점으로 생각한다는 걸 알았을 때 좀 놀라웠다. 마침내 주어진 자유를 각자의 삶의 방편과 잣대로 영위하였을 법한데, 정작 예상 밖의 말을 듣게 될 때의 당혹스러움이란 안타까운 일이다.

가령 스탈린 수용소에서 스스로 살아남은 자의 어린 시절은 그야말로 잔인한 인간의 끝 모를 저열함으로 몸서리치게 만든다. 또한 지금도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인상 좋은 이웃이 과거 자신을 죽음으로도 몰아넣을 수 있었던 밀고자였다는 말도 한다. 그러나 그가 갖는 감정이란 증오이기는커녕 오히려 상대가 알게 될까봐 두려워하는 이상한 심리이다. 공포의 시대는 개인의 감정을 이해하기도 힘들게 왜곡하고 일그러뜨렸다그래 듣다 보면 악과 선이 뒤엉켜 도무지 구별할 수도 없게 된 불치의 단면을 보게 되는 것 같아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책에서도 언급되는 공포는 사랑의 또 다른 형태라는 심리를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체념하고 정의한다. 사랑이 곧 공포일 수 있다는 체득을 진실인 듯 말하고, 공포로 인한 여러 감정을 왜곡하고 변형시켜 안착시켰다. 억압적 상황 속에서 순응하며 살아간 사람들의 정서적 아이러니는 사실 우리에게도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라 많은 생각이 드는 지점이고 이는 매우 안타까운 지점이었다.

 

 

과거를 회상하며 이들이 자주 언급하는 단어가 다름 아닌 사랑이라는 것 또한 맞물려 생각할 수 있는 주요한 지점이다. 떠올리는 과거의 영광이 고작 나에게 잘해준 사람의 온화한 미소라는 회상 장면은, 공포에 사로잡힌 인간의 한 단면 같았다. 미미한 온정을 사랑이라는 거대한 희망으로 포장할 수밖에 없는 우울한 시대의 면모인 것이다.



이 밖에 흥미로웠던 증언이라면 과거 문화적 부흥기를 누린 영광의 나라답게 소설의 언급이 종종 등장한다는 점이다. 러시아 문호들의 소설들이 본인의 안위적 체험과 낭만 속 재료로 공포정치를 살아가는 데에 얼마나 큰 위안이었는가를 이해하게 해준다.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경험 안에서 결국 그 개인의 사상과 생활태도가 만들어 질텐데, 이러한 사소함이 슬픈 미래를 예견하게 하는 것 같아 매우 안타깝다.



어떤 사람은 과거를 두고 치를 떨며 증오하는 반면 그리워하거나 칭송하는 사람이 있기도 하다. 분명 당시 증오했던 사람이었는데 지금의 안위에 오히려 무기력해진 아이러니도 목도할 수 있다. 냉전이 끝나고 그야말로 밋밋해져 버린 자유를 어떤 이는 여전히 바깥이라고 정의하며, 여전한 과거 속을 헤매는 불응적 유형으로 존재한다.

알다시피 이들의 지나간 시대는 분명히 실패한 체제였고, 지금을 더 잘 살아가야 하는 당위로서 자신의 과거를 충분히 비판하고 버려야 마땅했을 일이다. 그러나 여전히 안개 속을 걷는 중이라는 것을 어린 세대들의 모습에서도 보게 되는 게 이 책의 마지막이다.

소련 붕괴 이후 태어난 시대를 세컨드 핸드라 명명하는데 이들의 현재는 이전 세대들과는 얼마만큼 멀어졌을까를 보면, 유감이지만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아슬하게 지켜보게 된다.

 

 

 

 

인간의 근본적인 욕망은 자유주의적이라는데 있을 것이다. 개인의 본질적 측면이 개인성으로 존중될 수 있을 때, 자유는 존립할 수 있다

때때로 자유는 개인의 선택적 자유로 간주되곤 한다.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밀고자에게 갖는 연민 같은 것을 품을 자유가 이러한 경우이다. 그러나 이러한 역설적 감정은 인간의 성질을 좀 더 사실적이게 보이는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그보다는 어떤 환경에서도 단단히 묶여있을 영역, 인간이 이 영역을 어떻게 침범하지 않고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경계는 기필코 소중하다. 바로 이러한 삶의 소중한 가치에 대해 생각하고 침범하지 않는 정신적 무사가 가능하다면 얼마나 좋을까란 생각이 든다.

 

 

소련과 러시아는 극명한 구분으로 나뉘어질 수 있는가를 이 책을 보는 내내 생각했다.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판이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공감대가 형성되었다고 보기에는 여전히 미지수라는 걸 여러 인식의 차이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아직도 러시아는 전통적 가치와 위배된다는 이유로 무고한 사람을 살해하거나 폭력을 가행하는 세력이 존재하며, 그것을 경찰이 묵인하는 뉴스도 들은 적 있다. 야만이 지금의 이념에 부합되지 않는 극단적 세상으로 잘도 헤집어 나아가는 걸 보고 있으면, 이 책속에 묘사된 과거의 세계와 출간 이후의 또 다른 10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는 물론 한반도의 모습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은 거울처럼 빗들어 마치 위협처럼 들리는 부분이다.

 

 

주지하다시피 작가는 냉철한 역사학자이자 인문학적 관점으로 여러 인물들의 삶을 만나고 취재했노라 말한다. 그 안개와도 같은 역사의 현장에서 들려오는 생생함은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면서도 결코 멀리 뻗어나가지 않았으면 하는 소리이다

젊은 청년에게서 듣는 회귀로서의 말은 그들에게 펼쳐진 미래에 대한 경고처럼 귀에 가 박힌다. 이 책으로 세컨드 핸드 세대들이 지향하고 모색해야 할 세계, 마침내 편견과 억압에서 자유로워진 시간 위에서 진정 공정한 심판과 희망적 기대일 수 있는 현재이기를 기도해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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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정소설로 가장 유명한 공동 작가이면서, 어마어마한 장서가에 또 잡지발행인으로도 이름을 떨치는 엘러리 퀸의 신작이다. 특정 장르에 몰입하는 작가를 보다 보면 그 사적 애정이 유난히 크게 느껴지곤 하는데 이 책이 바로 평생에 걸쳐 바친 수집의 결과물이 될 것 같다. 거론되는 걸 봐도 성경에서부터 에드거 앨런포, 애거서 크리스티, 레이먼드 챈들러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방대함과 미스터리 및 범죄와 탐정물에 아우를 수 있는 뿌리와 줄기가 철저히 열거 되고 있다. 요람기에서 황금기를 거쳐 르네상스, 그 이후에 이르는 비유를 따라가면서 미스터리물의 넓고 깊은 한 작가의 역사 탐험을 나눌 기회가 될 것 같다






작년 한 해 동안 뜨겁게 떠오른 이슈로 '맨스플레인'이란 단어를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이 말의 의미를 세상에 내놓으면서 만연한 고정관념과 페미니즘에 얽힌 문제들을 생각하게 된 계기로서, 작가 리베카 솔닛을 오래 기억하고 싶어진다. 이 책 <멀고도 가까운>은 글 쓰는 작가로서의 쓰기와 읽는 것에 대한 단상, 사적인 관계에 대한 이야기, 인간의 삶과 죽음 등 평소 그녀가 사유한 일들의 기록을 소개한다. 앞으로 계속 주시하고 싶은 작가를 만난 것 같다







 




우리가 아이였을 때를 추억해 보면 대게 윤색되거나 도드라진 기억으로 그 시기를 돌아본다. 행복했었다면 모르겠는데 그렇지 않고 트라우마를 갖게 된 사람들에게 이 책은 선사될 것이다.

세계 유명 작가 스물일곱 명에게 본인의 어린 시절에 관한 이야기를 받고 그 수익은 비영리단체에 인세를 기부하는 것으로 엮여졌다고 한다.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뜻으로 흔쾌히 응한 글은 작가들의 어떤 자전적 일화들이 회기될 지 사뭇 궁금해진다.

 

 



 


 




이 책에 대한 명성은 익히 들어 알았지만 정작 읽어 본적이 없어서 많은 명사들이 인생의 책으로 거론한다는 사실 역시 모르고 있었다. 그동안은 대강의 느낌으로 미루어 볼 때 소설일거라고만 생각했는데 논픽션이라는데 다시 한 번 관심이 간다.

한 집안의 불우한 영혼의 뿌리를 더듬고 시대와 인간의 폭력, 광기에 대한 이야기를 어떤 일대기로 회술 하는지 궁금해진다





 



늙음과 죽음에 대한 진지한 고찰에 대한 생각을 이끄는 책인데 저자의 이름이 조너선 실버타운이라고 해서 조금 웃었다.

진화생물학을 전공한 작가의 이력으로 사람이 노화한다는 일, 과학적인 해석뿐만 아니라 신화와 역사, 문학과 만나는 해석의 노하우도 눈여겨 볼만 하다고 한다. 저자의 의문대로 진화하는 존재로서 인간은 왜 늙지 않고 죽지 않을 수 없는가에 대한 궁금증은 그 자체로서의 흥미롭다. 늙어가는 것과 죽어야 하는 운명, 그 여정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 영역에 걸치며 들을 수 있는 의미가 큰 책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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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살아보기 - 한껏 게으르게, 온전히 쉬고 싶은 이들을 위한 체류 여행
김남희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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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살아보기>의 김남희 작가는 직업이 여행가이니 당연히 언제고 그 어떤 이유를 달지 않고도 그냥 떠나도 좋을 일이다. 그러나 역시 작가에게 매번 이유 없는 여행은 없는 듯 하다. 이번 여행기에서는 또 재미난 이유가 붙여져 웃어버렸다.

다름 아닌 견딜 수 없는 추위 탓이라는 것. 물론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마음의 한기는 더 깊어졌고, 녹녹치 않은 서울 살이 체류비를 계산해볼 때 떠나는 쪽이 더 경제적이라는 이유가 더 붙긴 한다. 어쨌든 이 책은 셀 수 없이 다녀본 여행지 가운데서도 따뜻하고 살기 좋은 나라로 엄선된 네 나라의 200일간의 생활 기록이다.

김남희 작가는 겨울을 두려워해 따뜻한 나라로 떠나지만, 내 경우는 여름이 두려운 계절이다자외선을 쬐면 피부가 너무 맥을 못 추게 되어 낮에는 건물 사이로 그늘만 찾아 종종 거리는 신세가 된다. 이게 여간 성가시고 불편한 게 아닌데 정말 딱 작가의 이유처럼 부디 여름만이라도 좀 서늘한 나라에서 보내다 왔으면 하는 생각을 매년 하곤 한다. 평생을 같이 해도 도저히 적응하거나 그러려니 할 수 없는 일이란 있게 마련 아니겠는가. 떠남의 수많은 이유와 핑계 가운데서도 계절이 부르는 나라로 움직였다는 이유는 어쩐지 근사해 보이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여행지에서는 보고 먹고 노는 일 외에 달리 할 일이 없기 때문에 전문여행가가 할 일이라고는 종일 글을 쓰고 생각만 하는 것으로 많은 할애가 가능할 것이다. 하루의 소상한 일상을 소개하고 있고 그 내용과 질을 무척 견고하고 다부지게 구성한다는 것은 이런 나른한 계절과는 좀 상반된 인상을 주는데 그 점이 흥미롭다. 작가에게는 최적의 계절이라서 그럴 수도 있는데 그 일상은 게으르더라도 매우 촘촘해 보인다. 소개하는 내내 한껏 게으르게 생활했다는 말을 부지런히도 하며 독자의 게으름을 부축이지만 여유 속에서도 일일을 부지런히도 꽉 차 보이게 하는 작가의 생각이 내내 흐르고 있기 때문에 가능해진다

몸은 가만히 두더라도 생각은 항시 모습을 바꾸고 때로 윤색되거나 테를 깎아낸 변모된 모습으로 진면모의 그 장소를 기억하게 할 것이다. 이러한 시간의 할애가 곧 여행의 게으름을 만끽하게 하고 더욱 빛나게 하는 이유가 아닐지.

 

 

 

 

 

작가는 본문에서 여행이 곧 책이라는 생각을 전한다. ‘여행과 책이 둘은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게 하는 공통점이 있고, 우리가 사는 일상이 세계로 확장돼 균열을 일으키는 일을 가능하게 한다. 나아가 지금에 머물지 않고 더 넓은 지향을 꿈꿀 수 있는 자양분들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더 자세히 언급되지 않았지만 참 좋은 발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인물 보다는 어디로든 흐르는 편이 거대한 바다를 만나게 되는 지름길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항상 꿈꿔야 하는 이유는 필연적인 것이다

인생의 반을 반복하면서 겪게 되는 삶의 이해가 오늘 여행하면서 퍼뜩 깨달은 하루의 사건보다 낫지 않다면 어떨까. 여행은 삶이라는 그 오래고 퇴적된 연륜으로 얻어지는 회상보다, 어쩌면 더 나을 수도 있는 혁명과도 같은 일일 수 있다

여행자들이 그렇게 게으름떠남이라는 구호를 외치는 이유는 다름 아닌 이러한 기이한 체험에서 기인한 이유가 클지 모르겠다. 일상에서 누리지 못한 막연한 것들이 여행지에서는 전혀 다른 문제로 떠안겨 질 때의 당황, 이것은 기필코 내부의 여러 작용을 일으키곤 한다. 가령 마음껏 게을러지는 것에서 시간을 오롯이 나를 위해서만 쓴다는 자각의 일이 그것이고, 온통 낯선 것들로부터 오는 다름의 긴장이 내 삶과 잊고 살았던 주변을 더욱 밝히는 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프로 여행가답게 김남희 작가가 들려주는 모든 일상과 파편적 생각의 면에는 여행자에게 필요한 자세와 지혜의 몸가짐이 담겨 있다. 그것은 계산된 것이라기보다 거의 즉흥적인 것들이지만, 오랜 기간 누적해 쌓아온 노하우들이 그녀의 행동과 사고를 만들었기 때문에 보고 배우는게 유익해 보인다. 이러한 태도적 면모를 생각해 뒀다가 써먹을 날이 오면 좋겠다는 희망을 잠시 가져보기도 한다.

떠나 어딘가로 닿는 일은 자신의 주저된, 혹은 잃거나 버리지 못한 한덩어리의 짐을 발견하는 일이며 무엇보다 이것에서 벗어나는 용기를 주는 것 같다. 나아가라는 용기를 그 어딘가가 준다면 기꺼이 그곳에 가 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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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 - 시드니 걸어본다 7
박연준.장석주 지음 / 난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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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한 일 인건 인생이 바람 하던 쪽이 아니라 오히려 무관심했거나 이쪽이 아닌 저쪽의 편에 가까워지기가 더 용이하다는 사실이다. 마음의 주변부에서 맴돌던 것들이 도처에 머문 지도 몰랐다가 어느 틈에 밀고 들어와 기습을 당하는 꼴이란 참으로 고약한 후폭풍을 맞는 일이다. 전복되고 정중앙으로 안착된 이 황당한 상황을, 그렇지만 꼭 나쁜 결과라고 말할 수가 없다는 것도 인생의 흥미로운 아이러니 같은 일이다. 삶의 고착화되지 않은 다양한 경험을 쌓게 해준다는 면에서 그렇기도 하고, 돌아보면 이러한 일들이 교묘히 바란 일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기도 한다. 이런게 인생의 묘미라면 묘미랄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게 인생의 방향이듯 일방통행, 선회, 급선회, 비틀어지거나 유연하게 흐르는 삶의 지속성으로 우리는 끝없이 다져지는 존재인 모양이다. 마치 속내를 알 수 없는 바다를 항해하는 돛단배의 신세처럼 표표히 흘러가는 망망함으로, 인생은 걸려오는 그것이 무엇이든 만남의 연속인 것이다. 그것을 모두 만나고 견뎌야 한다. 

 

 

 

 

장석주와 박연준 두 작가의 연서와도 같은 에세이 <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를 보면서 맞닿을 듯 그렇지 않은 미세한 두 평행선 위를 걷는 관계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영원히 닿지는 못 할, 두 개의 평행선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역시 우리가 서로에게 항시 다른 사람이라는 인식을 하게 한다는 점 때문에 그렇다

늘 이해하려 노력해야 하고 전보다 가까워지는 사건이나 계기를 맞이하게 되지만, 그것은 언제라도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해 걷게 되는 단초일 수 있는 반복의 영속일 것이다.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아진다고 해서 같은 생각을 하게 되거나 완벽히 일치하는 지점을 만나는 일이란 영원히 요원하다. 다만 우리는 서로가 각자의 줄 위에서 조금 가까워지거나 필요에 의해 조금 멀어지는 유연을 부리며 같이 걸어가는 사이인 것이다.

여기 두 작가는 서로를 향해 십여 년을 그렇게 조심스럽고 천천히 물들어 가듯 배려하며 걸어간 흔적들로 다분하다. 이 책에는 그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하고 있지 않지만 지금까지의 토대를 단단히 쌓아 올린 시간이 느껴지기에 충분했다.

 

 

 

여기서의 시공간은 잠시 템포를 잃고 둘에게 쉬어가라는 선물처럼 시드니에서의 생활로 시작된다. 둘은 거의 똑같은 일상을 함께 하면서 느슨한 시간을 마음껏 만끽하는 것으로 끝난다. 

박연준 작가 시선의 시드니가 반, 뒤이어 장석주 작가의 시드니 이야기가 반, 이렇게 나란한 두 일상의 시선이 어떻게 다른가를 보는 게 묘미이다. 두 사람 모두 시드니의 소소한 자연과 만난 사람들, 모처럼의 여유와 낯선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지만 그 개성은 사뭇 다르다.

 

 

 

박연준 작가의 글에서는 그녀가 언급하기도 했던 생동에 대한 느낌으로 사로잡힐 때가 많다. 어리다는 것에 대한 설명으로 파닥임이라는 말을 꺼내는데 그 가운데서도 생동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어쩐지 작가의 글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과거를 이야기하거나 오늘 겪었던 일화들을 이야기하는 어느 때고 그 구체화된 생각의 생동감이 파닥이면서 친화적인 글쓰기를 한다는 인상을 준다. 웃음소리와 투정이 옆에서 들리는 것 같고, 웃거나 찌푸릴 때의 미간이 움직이는 게 보이는 언제라도 생각의 잠을 깨우는 발랄함이 느껴져 좋다.

 

 

 

반면 장석주는 완강한 말의 긴장이 느껴지는 글을 쓴다. 광활한 크기에 압도당할 막연한 공간에 서서 조망하는 입지로 물러난다. 작은 것을 보더라도 달아날 수 있는 만큼 아주 멀찌감치 둘러서서 자발적 외톨이로 자신을 오롯이 두는 것 같다. 일단 그런 거리에서 폭넓게 사고한 이후에 섬세하거나 자상함을 놓치는 법 없이 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글을 쓴다. 이러한 사고의 흐름을 따라 그곳을 이해하는 방법도 퍽 재미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 둘의 시드니 여행기가 어디까지나 여행기일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에서고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을 잊지 않게 되는, 현실의 연결을 생각하게 되는 이유를 상기하게 하는 글이다.



장석주 작가는 끊임없이 자신이 그곳에 서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주변을 이해하는 사람이다. 박연준의 글에서 시드니임을 한시도 잊지 못했다면 장석주의 글에서는 시드니를 자주 잊게 됐다. 이런 식으로 둘의 같거나 다른 일상의 시선, 내면에서 벌어지는 사뭇 다른 광경을 보게 된다

어느 편이 더 좋아서 편애할 수 없는, 나란히 이어지는 두 개의 선이 긴장과 이완의 탁월한 궁합으로 펼쳐진다는 생각이 든다.


숲길을 천천히 걸으며 깨끗한 숨을 들이키는 일처럼 반복될수록 좋은 일이 있다. 이 책은 두 번 세 번 읽을수록 좋을 그런 밤의 산책을 부르는 책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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