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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 보고서
폴 오스터 지음, 송은주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3월
평점 :
절판


영화 <스모크>를 볼 때마다 뉴욕의 브룩클린 뒷골목을 기웃거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현란한 스케일의 미국영화도 좋지만, 미국의 7-80년대 풍경을 볼 수 있는 소박하고 작은 영화의 분위기는 따뜻하고 고유한 정서가 느껴진다. 여기에 인간적인 예민함, 이국적인 가정의 풍경,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지면 거의 환상성마저 느껴질 정도로 좋다이 영화의 배경은 평범한 동네의 특별한 주인공만으로 이야기가 흘러가지 않으면서도 각 인물들이 단지 그들의 일상을 사는 것, 일상의 반복, 필연 같은 우연들이 찾아드는 오묘한 분위기로 유유히 흘러간다

원작자이면서 직접 시나리오까지 맡았던 폴 오스터는 소설가로 좋아하는 작가였는데 어쩐지 영화를 두어 번 더 보고 나서야 둘의 연관관계를 알았고, 그의 여타 관심사에 대한 것도 알았다. 단편소설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는 읽지 못했던 탓이겠지만 나중에 책을 읽어보고 영화랑은 다른 느낌이 들어 또다른 흥미로움이 들었다. 고유한 특성들로 들러붙어 각각의 영역으로 딱히 어느 쪽이 손해랄 것이 없는, 대게 갖는 한쪽의 실망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게 다행이랄까. 아마도 같은 작가에게서 태어난 이유이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폴 오스터를 생각하면 그가 지금까지 거주한다고 알려진 브룩클린이라는 특정한 장소, 그리고 영화라는 이 두 가지의 인연을 떼어놓고 생각하지 못한다. 뉴욕에서도 브룩클린은 아직 지역 특색이 그런대로 남아 있는 곳이라고 하고, 토박이들이 비교적 많이 거주하는 곳이라고 알려졌다. 그는 뉴저지, 뉴욕 언저리 등지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성장했고, 영화보기를 좋아하는 예민한 소년으로 자랐다고 하는데 이러한 배경은 그의 작품 안에서 참으로 긴요하게 쓰이곤 한다. 그의 인생과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모티프, 요람과 같은 것들이 내내 함께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작 <내면보고서>는 제목에서와 같이 작가의 내면으로부터 웅얼거리며 올라오는 나만의 희미한 기억들을 흥미로운 시점으로 발화하는 자서전이다. 자신을 이루게 된 최초의 기억인 유아기부터 20대 초반 호기로운 시절의 방황과 열정을 소환해 내는 책이다

그것은 그러니까 정확히 지금과 다를 바 없다고 보는, 오로지 일 수밖에 없는 나이인 스물세 살 이전까지인 를 추억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마치 타인을 보는 관점으로 나의 내면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는 노년에 이르른 지금의 관점이라는 데서 또다시 중첩되고 어떤 의미로는 변형된 사실과 허구의 애매한 지점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정확히 그것은 최초의 기억인 지점부터 열두 살까지의 시기로 한 번 더 분절 된다. 열두 살 이후로는 더 이상 아이가 아닌 시절, 사실상 지금의 나에 한층 가까워진 나이로 보는 이유이다. 이러한 각 시절마다 어떤 내면의 사건이 있었는가는 그의 인생에 거의 모든 것일 수 있는 것들과의 만남이 있다.


  

아무것도 아니었을 시절의 생각, 즉 없는 것에서 무언가를 향해 나아갔다는 인식은 당신이라고 지칭하는 의 추진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고 어떻게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는가를 궁금하게 하는 동아줄이 된다. 길어 올린 파편의 기억을 빛에 비춰보고 여전히 남아있는 기질의 연원을 찾는 게, 그래서 과거의 로의 탐구이면 안 되는 것이다. 이 회고들은 거대한 사건을 중심으로 이뤄지거나 자신을 예외적인 연구 대상처럼 여기는 편견을 거스르고 누구나와 같은 보편적인 였던 원형의 모습을 보기 위한 회상이라고 밝힌다.

이 말은 정확히 책의 독특한 화법이나 복합적인 구성을 차치하고서라도 그대로 전해지는 사실이 된다. 말하자면 포장되지 않은 그의 어린 시절이나 청년기 때의 시절을 보면 정말이지 평범한 아이일 따름으로 읽힌다.

공상이나 상상하기를 좋아하고, 월등하게 책을 즐겨 읽던 아이, 유아기와 더 이상 아이가 아니었던 시기에서 커다란 사건일 만큼 중요한 영화보기를 좋아 했던 아이, 한 여인을 향해 열렬히 흠모하던 마음을 숨기지 않은 순수했던 청년기 모두 그가 말하는 대로 평범하다.

 

 

물론 오스터는 누구나 아는 바와 같이 지금의 그라는 증명으로서 평범 보다는 비범한 인물에 가까울 것이다. 다만 이러한 시절로 추측할 수 있는 평범함이라고 것, 일상이 한 개인에게 이르면 어떤 포착과 시선으로 특정한 일이 되는가에 대한 기묘한 환상성으로 변모하기에 이른다. 그도 역시 우리와 비슷한 삶을 누렸지만 평범함 속의 비범이나 특별함을 보는 눈을 가진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님을 새삼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자신이기에 이르는, 그가 아니었던 시기의 나를 길어 올린 동아줄은 무엇이었나.

  

그것은 희미하게 느꼈던 여섯 살 무렵의 어떤 희열, 곧 자의식이라고 느껴지는 감정의 시작이다. 다시 말하면 사랑이라고 하는 원형의 결정체와 조우한 시절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거대한 세계가 아직 눈에 보이지 않던 시절, 작고 섬세한 일들과의 조우 그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사물이나 자연, 알 수 없어 명명할 수 없던 감정들의 복합체들부터 온 것들이다.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책이나 영화와의 만남, 그리고 한 여인에게 던진 사랑의 찬사들 이 모든 것이 아무런 의심과 거스름 없이도 내게 주어질 수 있었던 추진의 결정체가 되어준 알맹이들이다.

그의 소설이 어떤 거대한 사건보다는 작은 파편들로 이루어진 우연, 시간의 중첩으로 일구어낸 환상과 유머로 돋보이는 것은 어쩌면 이러한 어린 시절의 평범하나 결코 섬세한 시선 없이는 기억나지 않을 비범한 사랑의 눈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그에게 글쓰기는 자신에게서 비롯된 숱한 물음들을 해결하는 하나의 방편처럼 그의 인생 전반을 걸쳐 내내 함께한 동반자와 같다. 소설이란, 혹은 인생이란 수많은 일상의 무작위적인 반복과 우연적 사건들의 연대기일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이 책을 보면서 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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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 격하게 솔직한 사노 요코의 근심 소멸 에세이
사노 요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1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잘은 모르지만 1930년대 중후반에 태어난 소위 말하는 인텔리 여성(특히 이북 출신)의 기질이 좀 남달랐다는 소리는 익히 들어봤다. 이전 혹은 이후 세대의 인텔리에게 느껴지는 노골적인 특권의식이나 유달리 서구화된 과잉적 태도가 아닌 어딘가 독자적인 자유로움을 가진 세대. 긍정적인 기개나 주요 변곡점을 잘 활용하는 기질 등이 관습적인 느낌과는 구별되어 보이는 두드러진 세대랄수 있을 것이다.

무릇 불운한 시대의 흐름을 등에 업고 복합적인 사회적 양분을 삼아 전에 없는 자의식을 형성하게 된다거나, 혼란의 환국 속에서 잘도 헤집고 나만의 세계관을 구축해낸 사람들은 어디에든 있을 수 있다. 우리나라에도 소수지만 부모로부터 받은 풍부한 물적 자원, 유교적 가풍과 배격되는 서구 학문에 대한 흡수, 지역적 특성과 타고난 자질 등으로 본인만의 독립적인 자의식을 뽐내는 사람들이 있다. 시대의 변화와 흐름에 주요한 도화선을 제공하는 일이 적지 않기 때문에 마치 유물처럼 귀하고 유독 돋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게다가 그게 여자의 경우라면 더욱 흥미로운 인물로 평가받을 만하다.

일본 출신의 작가 사노 요코의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를 보며 작가를 검색해보다가 환히 웃는 얼굴을 보고 퍼뜩 이 고유한 세대의 기개나 자부심이 강하게 느껴졌다. 어느 곳이든 별반 다르지 않은 형태로 시대가 준 혜택과 시련을 동시에 흡수하며 어딘가 남다른 풍모를 풍기는 이들이 있다. 독립적으로 나아간 인물에게서는 눈여겨보게 되는 당당함, '생각하는 힘'에 대한 결연한 의지를 배우게 된다.

 


사노 요코가 사실상 노인 세대에서 벗어난 자립적 기질이나, 솔직함, 페미니즘 등의 특장점을 모두 헤아려 보면 일단은 무척 흥미로운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 개인 밖의 현실을 상응시켜 보면 현실적 아쉬움이 커지기만 한다. 30년대 생의 앞선 생각이 지금의 그것과 거의 괴리를 느끼지 못할 만큼 제자리걸음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자각과 푸념이다.

추측해 보면 작가가 청년시절이었을 5-60년대에는 무척 당돌하고 솔직한 매력으로 충분히 이름을 떨칠만한 흥미로운 인물이었음이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지금 21세기로 접어든지 십 수 년이 지난 지금에도 이러한 태도와 발언이 유효하게 들리는 이유를 생각해보면 반세기 넘게 여전한 편견과 사회적 지체현상을 상기하게 된다.

그녀의 유년시절부터 40대에 이르는 아이 키우는 엄마에 이르기까지 회고하는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를 읽다 보면 그녀의 까칠함이라던가, 특이하다는 수식이 좀 억지스럽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보다는 사실 평범한 사람에 가깝지 않을까. 나이와 성별, 편견에 갇힌 가치관으로 보면 그 발언이 다소 그렇게 보일 노릇이지만, 글의 어느 편 하나에도 보편성을 지나쳐 까칠하다거나 독특하다고 느낀 적은 없다. 그녀는 단지 당연한 결과로서 한 생각과 발언일 뿐 도드라진다거나 까칠해져 보이는 사람이 되려고 한적이 없다.

오히려 그 말을 하는 화자가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다면, 혹은 나이 지긋한 사람답게 참고 건전한(?) 방향으로 옮겨갔다면 조신하고 인자한 사람이 됐을텐데, 말에 갇힌 다름은 인정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까칠하다거나 매력적이라는 말의 함의에는 다소 여성이라고 받는 굴레, 으레 그래야 한다는 폭력적인 편견이 씌워져 있다.  

다시 말하자면 사노 요코가 배우고 삶의 방편으로 옳다고 익혀온 것들이 지금 세대에도 여전하다는 걸, 우리는 아직 봉건시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나 하는 의구심마저 들 정도로 아쉬운 시대를 산다과연 우리는 시대를 너무 얕잡아 보는 건 아닐까.  



작가의 진짜 매력을 꼽으라면, 유머정도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이는 처음과 끝을 관통하는 그라는 사람의 모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무척 좋은 기질이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부터 40대의 일상까지 일부러 티 나게 애쓰거나 하지 않아도 충분히 즐거운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의 나날을 전개시킨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삶의 곳곳에서 느낄 수 있는 페이소스는 그녀 특유의 유머로서 녹아들고 한없이 가볍게 느껴지다 근심은 어느덧 날아가 버린다. 삶의 일부분으로 안착되어 인식되는 삶. 삶은 그렇게 누리는 마음만큼 커졌다 줄었다하며 자의식이라는 동력으로 충분히 자신을 다치지 않게 보호하며 움직일 수 있는 일 같다.

또한 자신의 인생은 다른 사람의 눈으로 지나치게 의식 되어서는 도저히 꾸려나갈 수 없는 자신의 고유 영역이라는 게 작가의 중요 철학이다. 지나치게 의식적으로 살다보면 인생을 남에게 내주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내다 버리는 참극이 벌어질 수 있으니 내 멋대로 살아야 옳다는 생각을 하게 해준다.


다시 말하면 언제라도 사회적 편견이 주는 눈으로부터 과감히 벗어나, 하고 싶은 대로 삶을 일구고 마침내는 아무도 자신을 비난하지 못하게 본인만의 스타일을 구축하라는 뜻이 될 수도 있다. 마치 마법과도 같은 능동력을 내내 발휘하고 살았기 때문에 가능해진 일이다. 어리석은 사람의 숱한 손가락질, 절망의 소리를 맞받아 내던질 수 있는 용기 즉 강한 내면을 가꾼 덕이다.

 

 

이런 식으로 그녀의 언행들이 좀 더 특별한 이유는 언제나 방향성과 능동성을 함께 발휘했기 때문일 것이다. 단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무기로 비롯된 일이었지만, 보다 솔직한 마음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일, 속박과도 같은 사회적 인식으로부터의 탈출이 왜 그렇게도 중요한 일인지 생각하게 한다.

자신의 삶의 증명이 이 책의 일상은 그럴싸한 훈시를 늘어놓는 경고와도같은 한 어른의 지침서가 아니라, ‘에 대해 생각하고 말할 줄 아는 태도, 동시에 타인에 대해 배려하고 이해하는 태도를 배우게 해준다.

 



우리가 이 작가에게서 감탄하며 엿보려 하는 것은 그 세대가 보이는 보편적(?) 태도를 거스르기 때문이란 생각을 해본다. 다소 무례하고 내다 버려도 좋을 관습적인 태도, 이타심이 부족해 이기에 가까운 모습을 보게 되기 때문인지 그렇지 않은 사람의 태도는 돋보인다. 철저하게 개인이 쌓아올린 질서와 규칙 안에서 움직이고 그러한 일상에서는 얼마든지 늙더라도 품위를 잃지 않는 어른의 모습일 수 있다는 방증을 보여 준다.

사실 어느 세대의 문제라기보다는 고갈된 자의식을 가진 어느 누구의 문제라도 될 수 있는 게 문제라면 문제일 것이다. 나에 대해 생각하거나 말할 줄 모르고, 사회적 지위나 명성, 보이는 게 전부인 냥 발악하며 품위를 상실한 사람들의 문제는 마땅히 지적받고 비난 받아야 한다.

움츠러든 자아를 다독이면서 자신의 상처를 보듬고 위로할 수 있는 격려의 방편으로 이 책은 그렇게 쓰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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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을 따라 유럽의 변경을 걸었다 - 푸시킨에서 카잔차키스, 레핀에서 샤갈까지
서정 지음 / 모요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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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더라도 먼 나라의 작가나 작품이라면, 숱하게 읽은 터라 사소함마저 다 안다고 자부하더라도 다시보면 생경해지는 그 무엇이 있다. 아는 게 진정 알았던 건지 싶은 엄연한 '다름'이 느껴지고 마는 일이. 마치 생전 처음 가보는 여행지에 덩그러니 놓이게 되는 스산한 기분 같은 것이다. 계절에 상관없이 느껴지는 거리감 같은 게 이와 같지 않을까. 상상 속에서만 벌어지는 풍경과 실제로 맞닥뜨린 현실적 당혹감의 괴리는 그렇게 쉽게 맞지점을 향해 달려갈 수 있는 거리는 아닐 것이다. 상상만 하든 실제로 찾아나서든 분명한 건 동경이라는 감정만으로 자신의 지식의 산을 이루는 분명한 동기를 준 셈이라, 그 감정이 어떤 발로로 이어질지에 앞서 중요하게 꼽고 싶어진다. 사실은 이 거리를 좋아해서 이대로 머무는 지도 모르기 때문에.

 

 

살면서 동경하는 그 어떤 것들과 마주하게 되는 일이란 쉽지 않은 일이다. 반복해 이야기해도 모자를 만큼 운이 따라야 하는 일이고, 마음 안의 열정이 내 발을 움직이게 만들 수많은 조건과 두려움에서 해방되어야 가능해지는 일이라 그렇다. 그래 마음에서만 일어나는 동요를 소중히 간직만 하며 살아가는 쪽도 충분히 응원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어쨌든 운이 좋아 기회를 갖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는 언제라도 부럽고 배울게 많지만, 그 열정의 바깥으로는 이해되는 부분이 협소해지는 건 어쩔 도리가 없다. 개인의 취향과 개성을 부러움만으로 흥미롭게 바라보게 된다 해도 그 공감대가 열정에 대한 부러움 하나라면 이내 설득력이 떨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가령 작가가 좋아하는 고유한 장소와 풍경, 소리와 냄새 따위들이 주는 밀접함이 자신의 공감대에 따라 완전한 일치가 되어 큰 몰입의 즐거움을 줄 수도 있지만 반대로 전혀 동요되지 않을 심드렁한 채로 그렇게 멀어질만한 일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거리감'이라는 말에는 작품의 높은 질적 수준과 진정성과는 별도로 다뤄져야 한다는 점이다. 아무리 훌륭한 글귀를 보더라도 각자의 마음을 울리는건 서로 다른 이유와도 같다.

 

 

<그들을 따라 유럽의 변경을 걸었다>는 그 일치와 가장 먼 가장자리의 심경으로 읽어도 좋은 책이다. 이상한건 익히 잘 알고 있는 작가의 챕터를 먼저 읽게 된 경우라도 새로 알게 되었다거나 하는 것 말고는 별 재미가 들지 않기도 했고, 잘 알지 못한 작가의 본고장 방문기는 감정의 절차에 따라 수순대로 밟고 지나간다는 생각으로 읽게 되는 점이 흥미로웠다. 이런 마음이 드는 건 저자의 노고에 대한 비례로 읽히는 일은 아님을 다시 한 번 밝히고 싶다

아무래도 이 책이 익숙한 기행기의 절차를 밟지 않는 이유가 클 것 같은데, 쉽고 편한 안내자로서구성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 같다. 우선 여기에 나오는 작가와 작품에 대한 바탕 지식이 고르게 있어야만 전반적인 풍경을 이해할 수 있도록 축조했다. 딱히 몇몇 작가와 여행지의 생소함을 제외하고는 유명한 인물과 장소의 발자취를 따르고 있는데도 저자의 마음대로 따라가기는 쉽지 않은 거리감이 있다. 소소하게 일상적 감상과 추억을 드러내는 식으로 접근한다고 해도 감상적이라는 인상이 드는 건 아니고, 열망적이거나 큰 깨달음 따위로 여운을 남기는 식이 아니어서 잔잔한 여정이라는 인상보다는 좀 학문적이라는 인상이 더 들기도 한다. 특정한 주제에 따라 전개되지 않는 면에서 거리와 차이를 느끼게 되는 것이 이 책의 특징이다.

 

 

 

저자의 예술적 애착에 대한 면은 꼭 문학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림과 음악에도 확장되어 다양한 면을 보게 되는 게 좋았다. 러시아인 푸시킨에서부터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 조르바, 고려인인 화가 니코라이박과, 고흐, 샤갈, 폴란드의 얼굴인 쇼팽 등 그저 유명인으로만 접했던 여러 예술가들이 살던 고향 또는 삶의 터전인 곳에서 직접 보고 탐구한다.

소개되는 사진과 실제 작품들을 소개하는 볼거리를 상세히 제공함으로써 매우 충실하고 구체적인 정서적 정보를 얻게 된다

무엇보다 이 책의 강점은 이 모든 게 번역본이 아니라 우리 작가의 발자취로써 연구되고 정리된 형태로 읽을 수 있다는 것 자체라는 것인데 매우 희귀하다는 인상을 준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정보와 풍경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저자가 얼마나 예술작품에 대한 사랑과 열정으로 접근했는가, 그리고 상상의 세계에서 드디어 현실과 조우하는 기쁨을 기꺼이 누려도 좋을 성취감을 배우게 된다. 마침내 자신의 것으로 확장해 나가는 용기와 여정을 함께 지켜보는 재미로써 이 책을 누리면 되었다.

 

 


신록이 눈부신 유럽의 변경에서 많은 예술가들을 만나고 더 알게 되는 즐거움은 마치 초여름 아침의 상쾌함과 마주하는 인상으로 다가온다. 예술가들에게도 아침은 내면의 잠재된 창조성이 일깨워지는, 오감으로 기운이 돋아나는 새로움을 주는 시간이 아니었을지

언제라도 지속 가능한 꿈으로 간직하다가 마침내 현실에 마주하는 순수한 기쁨을, 그리고 공간과 시간을 더듬으며 흙을 밟고 주변을 살피는 진지한 모색의 성실과 열정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다음 여정의 단초가 되는 오늘이기를 바람하며 책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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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을 향해 쏴라
마이클 길모어 지음, 이빈 옮김 / 박하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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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미국 역사상 사형 제도를 부활시킨 장본인이며 가장 유명한 사형수 이야기라는 걸 들었을 때, 곧 끔찍하고 극악한 한 인간의 죄와 벌에 대한 생각으로 미쳤다. 말하자면 사이코패스와 같은 유형을 만나게 될 것이고 그 죄목은 불분명한 동기로 벌어진 무차별적인 살인행위일 것이며, 가책이라는 걸 모르는 무감한 인간을 보게 되겠구나 싶었다. 이 두꺼운 책을 이루는 개인사가 사실상 어떤 옹호와 질책들로 가득 차 있을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였고, 다소 겁났다.




책을 덮고 난 후 <내 심장을 향해 쏴라>의 제목은 애초의 허세와 위시적 목소리란 예감을 지나 전혀 다른 심장의 구멍으로 그 공허함을 메웠다. 살인자 게리 길모어는 사이코패스처럼 감정이 메마른 인간은 아니었고 적어도 그가 저지른 범행의 위험과 수위를 알았으며 여러 살인의 유형 중에서는 평범한 쪽에 가까웠지만, 사형 당했다.

무고한 사람의 목숨을 두 명이나 앗아갔다는 면에서 결과적으로 잔인한 만행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지만, 이 책의 이슈는 그가 본인 입으로 사형을 집행해 달라 주장했기 때문에 증폭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결국 그것은 그의 바람대로 이루어졌고 게리 길모어라는 이름은 유명해졌다. 그와 그를 둘러싼 삶으로 시대의 어떤 거울을 보게 된 것, 이 점이 책의 핵심이었다 .




책은 게리 길모어의 동생 마이클 길모어가 죽은 형의 그림자에서 서서히 벗어난 15년 후, 2년간의 자료수집과 집필기간을 거쳐 완성된 길모어 가문의 일대기이다. 그들의 부모와, 조부모, 증조부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이는 거의 1830년대부터 내려온 200여 년간의 자취를 흐릿하게나마 담고 있는 역사이다. 유명인이나 왕족이 아닌 다음에야 평범한 사람의 기록이 이렇게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흥미로웠는데, 구술에 의존하지 않고 정확한 고증과 증거자료로서 파악하는 자세가 책의 전반에 걸쳐 무척 중요한 객관적 유지로 다뤄진다

이렇게까지 가문의 역사를 파헤치는 이유는 곧 피와 폭력의 역사가 어디에서부터 오게 되었는가를 알기 위한 오랜 탐색이었다고 저자는 밝힌다. 게리뿐 아니라 본인을 포함한 형제 네 명의 피에는 분노와 폭력성이 흐른다는 걸 부인하지 않으며, 깊게 뿌리박힌 가문의 성향이라는 확신이다. 넓게는 그들이 산 터전의 피의 역사 때문이기도 한 기원적 측면에서 오랜 역사적 탐구를 실행하고 있다.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 다음 세대에 답습하여 이어가게 되는가, 그것을 알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일단 그 혈통의 역사가 처음으로 어머니의 고향인 유타로부터 시작되는 것은 의아하면서도 의미심장한 데가 있다. 게리의 폭력성은 아버지의 숱한 매질과 거의 매일 반복되던 부모의 싸움에서 기인한 원인이 크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 폭력의 주도자로서 아버지 가문의 역사부터 나와야 자연스럽고 더 많은 비중으로 다뤄야져 할 것 같다. 그러나 모르몬교의 본고장에서 어떤 식으로든 피의 역사라 불릴만한 일들이 자행되었는지, 마이클은 상당히 오래전의 자료를 찾아 축약적이지만 구체적인 사건으로 독자에게 소개한다. 폭력의 본질적인 토대가 어떻게 형성됐는가에 초점을 맞춘 면으로 해석된다. 즉 어머니 가문이 살아낸 미국 역사의 한 단면으로 유타라는 지역 안의 기적과 박해의 현장이 어떻게 주조되어 갔는지를 응시하게 하는 것이다.

 

 

어머니 베시는 자비와 용서를 모르는 모르몬 교도 가문의 자손이고 그곳을 탈출하고 싶어 했다. 사실상 그녀는 결혼이라는 탈출구로 그 바람이 성공한 듯 했지만 평생 모르몬의 그림자에서 머무는 아이러니한 삶을 산다. 이 책의 마지막에 나오는 평생 발설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큰형 프랭크에 대한 출생의 비밀이 밝혀졌을 때 곧 보이지 않던 실마리의 비밀이 풀리는 듯 했다.

이들 형제의 형질 중 프랭크를 제외해버리고 났을 때 이내 어머니라는 공통분모만을 공유하게 돼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비약일까? 하지만 결국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라는 토대 위에서 그 시작을 보는 점은 의미심장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에 반해 아버지 가문의 역사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어머니 가문의 어떤 지역적이고 집단적 특수성에서 축적된 역사가 있다면, 아버지 일가에서는 유추해낼 만한 일이라고는 부풀려지고 은폐된 면을 배제하고 나면 사실상 사기와 배신으로 점철된 부랑자에 지나지 않을 가련한 인간상이 전부이다.

친할머니인 페이를 비롯하여 유령환영이라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이 이 책의 무척 흥미로운 지점이기도 한데, 마이클은 그 존재를 믿거나 추종하지 않지만 책의 처음과 마지막에서 상당 부분 그의 형태로서 반복되어 상기하고 있는 것은 벗어나기 힘든 전이의 부분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두 가문의 역사에서 미국이 외면한 그러나 마주할 수밖에 없는 어두운 면모를 단적으로 볼 수 있다는 점이 책의 핵심이기도 하다. 한 쪽에서 엄격하고 폐쇄적이었던 이민자들이 이룩해 낸 피의 역사를 볼 수 있었다면, 자본을 쫓아 끊임없이 절도와 사기를 일삼으며 부랑하는 아주 얕고 저열한 모습의 인간상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광기와 피의 역사는 혈통으로서 전달되었고, 유령과 환영 그리고 꿈이라는 형태로 전이되는 보이지 않는 정신적 유산이 이러한 식으로 세뇌되어 내려져 온 것이다. 길모어 집안의 집약체는 구조적 모순에서 비롯된 산물이며, 게리라는 인물의 죽음으로서 육신과 영혼이 산산이 무너지고 파괴되었다. 단 한명의 죽음으로 그 저주의 핏줄의 역사를 탐색하는 과정이 저자 마이클이 진정 세상과 마주하게 된 시간이 됐을 것 같다.

 

 

 

게리는 그 누구보다 사랑을 갈구한 마음 약한 사람이었고 언제나 재기를 꿈꾸었다는 데 의심의 여지는 없어 보인다. 그러나 끊임없는 세상으로부터의 배신과 속박으로 정신과 육신은 되돌리지 못할 만큼 스스로를 내몰았다. 결국 죽음의 선택으로 삶에서 탈출하는 선택을 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세상에 복수하고 굴복하지 않은 속죄의 방식을 택했다는 생각이 든다.

죽음이 어떤 출구일 수 있었듯이, 나머지 가족의 죽음 역시 결국에는 산 자에게 어떤 해방을 안겨 주었다. 격렬한 사랑과 폭력에 대한 안녕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죽음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 일가의 삶과 죽음으로 인간의 가장 얕고 저열한 면, 희생과 폭력,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염없이 애처로운 무한한 사랑과 절망에 대한 생각을 하게 해준 책이었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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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책을 읽는다는 것은 지적 호기심 뿐만 아니라, 나보다 훨씬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의 정보, 관심, 감정 등을 내게로 끌어오는 일이다. 어떤 작품을 좋아하게 되고, 작가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 그가 언급하는 모든 것까지 다 알고 싶어지는 열렬함은 언제라도 행복하다. 내게 삶의 활력이 되어주는 작가 중의 한 사람이 바로 폴 오스터이다. <디어 존, 디어 폴>은 폴오스터 만큼 유명 작가인 쿳시와의 서간문을 담아낸 책이라고 한다. 사적인 관심들, 노년의 두 작가가 어떤 지적 향연의 즐거움을 선사해 줄 지 정말로 기대가 큰 작품이다.








남의 서재를 들여다 보는 일은 그의 관심사를 알게 해주는 일면일 수 있어서 언제 봐도 흥미롭다. 평범한 사람의 경우도 그러한데 세계적이라는 타이틀을 붙일만한 사람이라면 말 할 것도 없겠다. 독서광 릭 게코스키는 이 책에서 사랑해 마지 않는 책들과 그 키워드들로 삶을 이야기한다

내가 읽은 책이 나를 만든다라고 언급 하는데 작가가 책과 얽힌 삶의 저변을 이야기하면서 어떤 인생론을 드러낼지 그 편력의 장에 들어서고 싶다.







 


종종 나이들면 서럽다라는 말을 하곤 하는데, 나이드는 행복을 말하는 쪽이 훨씬 좋지 않나 생각한다. 어차피 인생은 나아가는거라서 항상 지금을 긍정하지 않으면 우울해지니까. 늙게 되는걸 그런대로의 나로 존중하면서 느끼고 깨달아가면 좋을 것 같다

이 책의 저자는 나이가 들어 알게 된 삶의 지혜, 행복을 이야기한다고 한다. 은퇴 후 시골에 내려온 이래 젊은 시절 놓치고 살았던 사소하거나 중요한 가치를 짚는 일이 그것이다. 혹시 놓치고 사는게 있다면 이 책에서 충고하는 지점들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도 좋을 것 같다






신간인줄 알았는데 2001년작 <노티를 꼭 한 점만 먹고 싶구나>의 개정판이라고 한다. 어차피 읽은 책이 아니라 이참에 챙겨 읽어보고 싶다. 지금은 밥 한끼를 먹지 못해 배를 굶주리는 시대는 아니지만 분명 그런 사람들이 다수였던 시대를 음식 회고록 형태로 볼 수 있으리란 기대가 든다

보면 작가의 체험이 보통 사람으로는 겪지 못했을 독특한 일화가 많아서 음식에 얽힌 삶의 다양한 무지개를 보게 될 것 같다.


  








아티스트 한대수의 몇 권의 책을 읽었을 때 느낀 것이 참으로 예술적인 사람, 자유로운 영혼이라는 인상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성장하지 않아서 그럴 수 있었겠지만 어쨌든 이 나이대의 사람에게서 거의 기대할 수 없는 독특하고도 자유로운 정서가 무척 매력적인 아티스트이다. <바람아, 불어라>를 통해 예술에 대한 사랑, 가족, 사회문제 등 여러 생각들을 담고 있다니 멋지게 늙는 법을 배우게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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