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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 격하게 솔직한 사노 요코의 근심 소멸 에세이
사노 요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1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잘은 모르지만 1930년대 중후반에 태어난 소위 말하는 인텔리 여성(특히 이북 출신)의 기질이 좀 남달랐다는 소리는 익히 들어봤다. 이전 혹은 이후 세대의 인텔리에게 느껴지는 노골적인 특권의식이나 유달리 서구화된 과잉적 태도가 아닌 어딘가 독자적인 자유로움을 가진 세대. 긍정적인 기개나 주요 변곡점을 잘 활용하는 기질 등이 관습적인 느낌과는 구별되어 보이는 두드러진 세대랄수 있을 것이다.
무릇 불운한 시대의 흐름을 등에 업고 복합적인 사회적 양분을 삼아 전에 없는 자의식을 형성하게 된다거나, 혼란의 환국 속에서 잘도 헤집고 나만의 세계관을 구축해낸 사람들은 어디에든 있을 수 있다. 우리나라에도 소수지만 부모로부터 받은 풍부한 물적 자원, 유교적 가풍과 배격되는 서구 학문에 대한 흡수, 지역적 특성과 타고난 자질 등으로 본인만의 독립적인 자의식을 뽐내는 사람들이 있다. 시대의 변화와 흐름에 주요한 도화선을 제공하는 일이 적지 않기 때문에 마치 유물처럼 귀하고 유독 돋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게다가 그게 여자의 경우라면 더욱 흥미로운 인물로 평가받을 만하다.
일본 출신의 작가 사노 요코의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를 보며 작가를 검색해보다가 환히 웃는 얼굴을 보고 퍼뜩 이 고유한 세대의 기개나 자부심이 강하게 느껴졌다. 어느 곳이든 별반 다르지 않은 형태로 시대가 준 혜택과 시련을 동시에 흡수하며 어딘가 남다른 풍모를 풍기는 이들이 있다. 독립적으로 나아간 인물에게서는 눈여겨보게 되는 당당함, '생각하는 힘'에 대한 결연한 의지를 배우게 된다.
사노 요코가 사실상 노인 세대에서 벗어난 자립적 기질이나, 솔직함, 페미니즘 등의 특장점을 모두 헤아려 보면 일단은 무척 흥미로운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 개인 밖의 현실을 상응시켜 보면 현실적 아쉬움이 커지기만 한다. 30년대 생의 앞선 생각이 지금의 그것과 거의 괴리를 느끼지 못할 만큼 제자리걸음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자각과 푸념이다.
추측해 보면 작가가 청년시절이었을 5-60년대에는 무척 당돌하고 솔직한 매력으로 충분히 이름을 떨칠만한 흥미로운 인물이었음이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지금 21세기로 접어든지 십 수 년이 지난 지금에도 이러한 태도와 발언이 유효하게 들리는 이유를 생각해보면 반세기 넘게 여전한 편견과 사회적 지체현상을 상기하게 된다.
그녀의 유년시절부터 40대에 이르는 아이 키우는 엄마에 이르기까지 회고하는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를 읽다 보면 그녀의 까칠함이라던가, 특이하다는 수식이 좀 억지스럽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보다는 사실 평범한 사람에 가깝지 않을까. 나이와 성별, 편견에 갇힌 가치관으로 보면 그 발언이 다소 그렇게 보일 노릇이지만, 글의 어느 편 하나에도 보편성을 지나쳐 까칠하다거나 독특하다고 느낀 적은 없다. 그녀는 단지 당연한 결과로서 한 생각과 발언일 뿐 도드라진다거나 까칠해져 보이는 사람이 되려고 한적이 없다.
오히려 그 말을 하는 화자가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다면, 혹은 나이 지긋한 사람답게 참고 건전한(?) 방향으로 옮겨갔다면 조신하고 인자한 사람이 됐을텐데, 말에 갇힌 다름은 인정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까칠하다거나 매력적이라는 말의 함의에는 다소 여성이라고 받는 굴레, 으레 그래야 한다는 폭력적인 편견이 씌워져 있다.
다시 말하자면 사노 요코가 배우고 삶의 방편으로 옳다고 익혀온 것들이 지금 세대에도 여전하다는 걸, 우리는 아직 봉건시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나 하는 의구심마저 들 정도로 아쉬운 시대를 산다. 과연 우리는 시대를 너무 얕잡아 보는 건 아닐까.
작가의 진짜 매력을 꼽으라면, ‘유머’ 정도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이는 처음과 끝을 관통하는 그라는 사람의 모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무척 좋은 기질이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부터 40대의 일상까지 일부러 티 나게 애쓰거나 하지 않아도 충분히 즐거운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의 나날을 전개시킨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삶의 곳곳에서 느낄 수 있는 페이소스는 그녀 특유의 유머로서 녹아들고 한없이 가볍게 느껴지다 근심은 어느덧 날아가 버린다. 삶의 일부분으로 안착되어 인식되는 삶. 삶은 그렇게 누리는 마음만큼 커졌다 줄었다하며 자의식이라는 동력으로 충분히 자신을 다치지 않게 보호하며 움직일 수 있는 일 같다.
또한 자신의 인생은 다른 사람의 눈으로 지나치게 의식 되어서는 도저히 꾸려나갈 수 없는 자신의 고유 영역이라는 게 작가의 중요 철학이다. 지나치게 의식적으로 살다보면 인생을 남에게 내주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내다 버리는 참극이 벌어질 수 있으니 내 멋대로 살아야 옳다는 생각을 하게 해준다.
다시 말하면 언제라도 사회적 편견이 주는 눈으로부터 과감히 벗어나, 하고 싶은 대로 삶을 일구고 마침내는 아무도 자신을 비난하지 못하게 본인만의 스타일을 구축하라는 뜻이 될 수도 있다. 마치 마법과도 같은 능동력을 내내 발휘하고 살았기 때문에 가능해진 일이다. 어리석은 사람의 숱한 손가락질, 절망의 소리를 맞받아 내던질 수 있는 용기 즉 강한 내면을 가꾼 덕이다.
이런 식으로 그녀의 언행들이 좀 더 특별한 이유는 언제나 방향성과 능동성을 함께 발휘했기 때문일 것이다. 단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무기로 비롯된 일이었지만, 보다 솔직한 마음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일, 속박과도 같은 사회적 인식으로부터의 탈출이 왜 그렇게도 중요한 일인지 생각하게 한다.
자신의 삶의 증명이 이 책의 일상은 그럴싸한 훈시를 늘어놓는 경고와도같은 한 어른의 지침서가 아니라, ‘나’에 대해 생각하고 말할 줄 아는 태도, 동시에 ‘타인’에 대해 배려하고 이해하는 태도를 배우게 해준다.
우리가 이 작가에게서 감탄하며 엿보려 하는 것은 그 세대가 보이는 보편적(?) 태도를 거스르기 때문이란 생각을 해본다. 다소 무례하고 내다 버려도 좋을 관습적인 태도, 이타심이 부족해 이기에 가까운 모습을 보게 되기 때문인지 그렇지 않은 사람의 태도는 돋보인다. 철저하게 개인이 쌓아올린 질서와 규칙 안에서 움직이고 그러한 일상에서는 얼마든지 늙더라도 품위를 잃지 않는 어른의 모습일 수 있다는 방증을 보여 준다.
사실 어느 세대의 문제라기보다는 고갈된 자의식을 가진 어느 누구의 문제라도 될 수 있는 게 문제라면 문제일 것이다. 나에 대해 생각하거나 말할 줄 모르고, 사회적 지위나 명성, 보이는 게 전부인 냥 발악하며 품위를 상실한 사람들의 문제는 마땅히 지적받고 비난 받아야 한다.
움츠러든 자아를 다독이면서 자신의 상처를 보듬고 위로할 수 있는 격려의 방편으로 이 책은 그렇게 쓰일 수 있을 것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