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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걸었고 세상은 말했다 - 길 위에서 배운 말
변종모 지음 / 시공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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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치했던 기억에 아무리 자학을 해보더라도 시원찮은 마음이 들 때는 머리가 과연 제대로 작동하는 사람인가 자책하지 않을 수 없다. 당연히 매순간 생각을 하며 살아간다지만 당장 꾸려낼 일상이나 일에 대한 생각이외에 지속적으로 세상이라거나 나 자신에 대한 질문을 품으며 살아가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종종 이런 돌발 상황을 만들어내는 장본인이 내가 될 수 있기도 하다는 게 마냥 자뻑하며 살 수 없는 주요인이다. 세상과 자신에 대한 성찰이나 진단 없이 현실의 나이만 먹다보면 이러한 실수는 얼마든지 튀어 나온다. 타인에 대한 배려보다 이기심이 발휘되기 십상이며 약자에 대해 관대함을 베풀기보다 은근히 밟고 올라가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속물이 될 가능성도 있다. 비약인지는 몰라도 세상에 물들고 어른이 되어간다는 말의 일정치에는 이러한 부정적인 조소가 없지 않다. 얼마가 되었든 나를 돌아보지 않고 세상에 대한 관심을 멀리해 나가면, 부조리나 불합리에 무뎌짐과 관망, 노예근성만 남게 된다.

 

물론 ‘지속적’이란 말을 떼내면 누구에게나 왜 진지한 성찰의 시기가 없었겠느냐는 항변을 들을 여지가 충분하다. 특정한 어느 시기를 돌아보면 그 한정된 시간 안에서는 누구나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진지함과 진정성을 발휘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소중한 경험들을 느껴보면 마치 광활한 우주라도 만난 듯 감격스러운 데가 있다. 후일 자신이 얼마나 진지한 사람이었는가를 떠올릴 때 자주 등장하는 레퍼토리의 전설로 남겨질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순간이 내일도 다음 주에도 계속 이어질리는 없는 것이다. 물론 이런 시간을 갖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반드시 무지하고 단순해지라라는 인과관계를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일상에 파묻혀 살다보면 고유의 시간들이 점점 귀찮아지고, 때로 진지함을 우습게 여기게 될 수도 있으며 더러는 밀려나가 완전히 사라지게 하는 문제들이 수순처럼 등장한다는 점이다. 세상에 대한 염치를 알고 나를 곧추세우며 추진하는 동력은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나를 끊임없이 돌아볼 줄 아는 최소한의 시간을 가질 때 나온다.

 

 

 

좋아하는 사람들로부터 지적인 또는 감성적인 자극을 받고 싶어 하는 이유를 사람들은 책이나 명사의 말로서 그 의미를 되짚곤 한다. 나는 주로 책이나 영화를 보게 되는 편이지만, 특히 자주 그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의 작품에 많은 눈길이 가는 편이다. 그중에서 변종모작가의 작품들이 주로 그런 사람에 속한다.

 

 

 

이번 신간 <나는 걸었고 세상은 말했다>에서는 길 위, 내 안, 두고 온 말이라는 세 가지 테마를 특정한 단어와 엮어서 깊은 사유를 경험하게 해준다. 여행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낯선 환경에 놓여 이질적인 기운을 느끼게 되는 일일이 떠오른다. 보고 듣는 것에 대한 체화를 몸소 내안의 에너지로 써먹을 수 있는 나만의 시간이 선사되는 일이다. 다시 말해 낯선 공간이 주는 긍정의 스트레스가 마법처럼 변환되는 일과 같달까. 변종모 작가는 이러한 공간과 시간의 마법을 사랑해서 자꾸 떠나는 것은 아닐까 싶다. 그러나 그에게는 떠난다는 말의 의미가 모호해서 우리와는 좀 다를 것이 분명하다. 그는 여행가이고 그러니 그에게 여행이 곧 일상이고 삶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여행은 익숙함과 낯선 의미들이 혼재되어 더 이상 다른 이원의 세계인냥 분리될 수 없을 것 같다.

 

 

여행자는 여행지에서 처음에는 우리와 다른 세계라는 것을 인지하게 되다가, 거듭되고 오래될수록 대게 비슷하고 같은 점을 보게 된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오랜 시간 여행을 경험한 작가에게 눈앞의 세상은 어떤 감정을 선사할까. 모르긴 몰라도 분명한 것은 어딜 가든 작가에게 이런 같고 다름의 세계만이 펼쳐지진 않는다는 것이다. 항상 떠남을 주저하지 않고 그곳에서 보고 듣는 모든 것들이 그저 ‘차이’로 존재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이제 좀 내밀하고도 자신만이 들여다보고 드나들 길이 열린 것이다.

 

 

언제나 작가의 글을 보면 그곳의 정취나 향기가 참 고유한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끔 해준다. 일상이 곧 여행지이고 얼마든지 자신만의 시선으로 만상을 들여다본다면 참 근사한 인생이라는 부러움이 인다. 그는 여행의 아름다운면만 부각하거나 낭만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종종 고단하기도 하겠지만 그마저도 인생의 쓴맛과 달콤한 양면을 말해주는 듯해 솔직해 보인다.

 

 

다른 세상을 탐험하고 동시에 나를 들여다보며 남기고 온 혹은 버린 수많은 언어들이 그의 글에서 빛난다. 그것은 부지런히 생각하고 깊이 탐험하는 자에게서 풍겨 나오는 특유의 향기이고 그래서 떠나지 못하는 자에게 여행을 종용한다. <나는 걸었고 세상은 말했다>에는 세상과 나에 대한 낱낱의 이해의 일, 그리고 책을 읽고 그 낯선 체험을 기꺼이 해보겠다고 마음먹은 독자에게 심장을 뛰게 할 작가의 세심한 한걸음이 있다. 그곳이 특정한 여행지여도 좋고 여의치 않은 사람에겐 내 안의 어느 쉼터에서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해본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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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24 12: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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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24 19: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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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 방황]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방황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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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어려운 순간을 만날 때 그 시기를 잘 견뎌냈건, 어거지로든 겨우 방어만 해냈건 낮은 한숨을 돌리고 나서 드는 생각들이 있다. 힘든 순간은 언제든지 또 얼마든지 찾아오는구나 싶은 생의 부림이다. 그러니 예감치 못할 일이 찾아오지 않으리란 순진한 기대보다는 공포의 순간이라도 기꺼이 맞이할 줄 아는 능수함이 필요하다. 현실의 중력에 매번 매복당하면서 다시 올라올 만큼의 불행을 가늠하는 경험치가 쌓여가는 것이 인생이다. 열심히 살아온 사람에게 마치 보은인 것처럼 좋은 일만 깃드는 삶이라면 얼마든지 노력만 하며 살겠지만 인생이 꼭 그렇지만도 않다 보니, 그저 자신의 방편대로 긴장과 이완을 꾸리며 삶을 엮여 가야 하는구나 싶어진다. 매일매일이 눈앞에 닥친 현실을 잘 풀어 나가는 여정이면서도 장기적으로는 고랑창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일이 없도록 터를 잘 다져나가는 자신만의 근육을 다져내는 일이다.  

 

 

 

정유정 작가의 첫 에세이 <히말라야 환상 방황>을 읽으면서 ‘히말라야’라는 공간이 주는 압도적인 인상과 더불어 산을 오르는 일이 인간에게는 인생을 비유하는 일과 같아서 자주 그 상징의 의미들이 중첩되곤 했다. 작가가 놓인 상황은 그가 만든 일이긴 해도 일단 짚고 넘어가야 하는 첫번째 관문처럼 여겨진다. 왜 하필이면 그곳인가 하는 물음은 느닷없기 보다 이미 작가 안에 잠복하던 명징한 것들을 눈 앞의 경험으로 재현하는 과정처럼 보인다. 마치 그녀가 큰 벽에 부딪힐 때마다 느꼈던 막막함이나 동시에 솟아오르던 투지들이 혼재되면서 그 너머의 상상을 확대 시켜주는 것이다. 그래서 여행 안에서 그녀가 보여주는 방황에는 자신의 과거와 만나는 조용한 만남이 있고, 소설 속 주인공과의 해후, 또 미지한 세계로의 탐험 등 여러 의미들이 맞닿아 있다.

 

 

작가는 고백하건데 맏이로 자라 어머니로부터 아주 엄격한 역할을 부여받으며 성장했고, 막 성인이 되자마자는 덜컥 가족을 부양하는 가장으로서 생업전선에 뛰어 든 그리 순탄치 못한 시절을 감내 했다. 이런 인생을 예견한 것도 아닐 텐데 어머니의 가르침은 마치 그동안의 키워진 방어력을 실전에 맞설 ‘기회’(짓궂지만)인 듯이 그 필요를 절감하게 하였다. 이후 가정도 꾸리고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게 되어 전업 작가로 소설가라는 명성을 쌓기까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인생을 살았던 듯싶다. 그녀의 소설을 읽으면서 선이 굵은 이미지들이 떠오르곤 했는데 살아온 경험치들과 삶의 보편성들이 그녀로 하여금 유난히 단단하고 응집력이 강한 이야기로의 잉태를 가능하게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어진 현실에 잘 맞설 줄 알고 충실히 배워나간 덕에 작가의 소설에는 세상에 당당히 마주하는 다부진 용기들이 선연하다.

 

 

그러한 식으로 매번 작품을 써오고, 온 것을 쏟아 부어버리기를 반복하면서도 별 갈증을 느껴본 일 없는 삶이다가, 그녀에게도 고갈의 한계점이 오게 되었다. 일상으로부터 소진되어 버린 감정의 균열로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어버리는 일도 생겨버린 것이다. 이는 아마도 걷잡을 수 없이 커져버린 또다른 세계로의 앎에 대한 열망이면서 생존의 출구를 찾던 몸의 반응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녀는 저 먼 히말라야로 떠났고 그 세계를 만났다.

 

 

 

열병처럼 앓고 순수한 호기심만으로 떠나온 셈이지만 호락호락하지 않은 여정인 턱에 이 책을 보고 있으면 초보자가 겪어낼 좌충우돌 에피소드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무엇들이 있다. 일단 여느 여행기처럼 웃을 일이 별로 없고, 자주 포기하고 싶어진다거나, 그녀 안의 의문과 숙제들이 정말 잘 정리되고 풀어졌으면 하는 바람의 응원을 하게 된다는 점이다. 길지 않은 일정이긴 했지만 그녀가 당장 닥친 거대한 삶의 질문들에 잘 버텨낸 강한 모습을 보여 와서 이번 여행 역시 기꺼이 완주를 하게 되리라는 믿음들이 있었다.

그녀는 이곳을 다녀오고 나서 곧바로 여행을 떠났다고 한다. 단단히 여행의 맛을 알아버린 모양이다. ‘네팔병’을 언급할 때부터 그러한 기대가 들었으니까. 정유정의 방랑기라면 세상 어디로든 얼마든지 따라가서 듣고 싶어진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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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24 13: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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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청춘'이란 단어가 서점가의 화두처럼 급부상되기 이미 오래전, 작가 김연수의 <청춘의 문장들>은 '청춘'이란 말의 풋풋함과 어딘가 촌스러운 인상을 선점하며 등장했다. 화려하지만 혼란스러운 나날을 보낸 이십대의 솔직한 어제와, 참으로 빛나던 아름다운 고백이다 싶은 청춘에 대한 기록이었다. 

신간 <청춘의 문장들+>은 출간 이후 10년여 시간이 지난 작가의 그 이후의 감정에 대한 꾸러미이다. 변화된 관점이 비칠 수도 있고, ㄱ그간어떤 세월이 지나갔고 지금의 나이에 이르러 본 청춘은 작가에게 어떤 시간들이었을까. 수많은 시선에 대한 이야기들이 굼금해 지는 책이다.  

 

 

 

 

 

 

일본에서는 물론이고 후지와라 신야의 작품을 좋아하는 세계의 독자들은 비단 그의 글만을 좋아하지는 않을 거란 생각이 든다. 평생 여행을 하면서 겪어낸 방랑자의 면모를 동경할 수도, 곧은 절개가 느껴지는 거침없는 언행의 카리스마를 존경할 수도 있는, 그야말로 삶의 행보로서도 충분한 매력을 보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를 더 알고 싶어지는 호기심은 그러나 사적인 면이 그리 많이 알려진것이 없는 게 한계였다. 

<겪어야 진짜>는 우리나라 기자가 직접 후지와라 신야를 만나 인터뷰를 한 것을 엮어낸 책이라 반갑다. 그의 생생한 언어를 들어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당장 읽고 싶어지고 만다. 그는 어떤 말을 구사하고 어떤 가치관을 가진 사람일까, 그의 입으로 일본에서는 이런 사적인 말을 한적이 없다는 말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책이다.        

 

 

 

 

 

요즘도 가끔 동화를 읽고 있으면 이 책이 왜 어린이들만 읽도록 '동화책'의 카테고리에 묶여있는가 하는 아쉬움이 들때가 많다. 정말 많은 책들이 어릴 때 보다는 어른이 되고나서 읽는다면 더욱 좋을 것 같은 책들이다. 

<다시 동화를 읽는다면>은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어릴 때 읽었던 동화를 다시 읽어보고 어른이 된 관점에서 느낀 또다른 감상들이 다양하게 실려있다. 이제 어른이 되었고, 지금의 눈에 비친 동화의 세계는 정상일까, 아름답다면 그건 왜일까, 그들 각자의 동화는 어떤 감상을 전해줄지 일일이 궁금해진다. 

 

  

 

  

 

 

 

 

<검은 수첩>은 미스터리소설의 기술적 이론에 대한 작가의 에세이가 맞물린 흥미로운 책이다. 추리소설이기에 앞서 소설은 무조건 재미있어야 한다는 작품관에 대한 입장, 자신의 작품을 예로 든 미스테리소설의 매력 포인트 등, 독자들에게 보다 쉬운 추리소설의 양상을 설명해준다. 추리 장르에 매료된 이유부터, 기술적 정립에 이르는 작가의 '추리'에 대한 생각이 두루 듣고 싶다.   

 

 

 

 

 

 

 






시인 천양희선생은 올해로 혼자 지낸지 39년이 되신다고 한다. 외로움이란 말이 시인과는 숙명이라는 듯 잘 버텨오신 세월이었지만, 숱한 나날 고독과 맞서는 단련된 언어의 춤사위는 슬프지만 아름다울 것 같다. 시인이 시어로 말하지 않으면 어떤 산문의 형태로 그 감정들이 전해져 올 것인지, 설레이는 마음으로 이 책을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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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문득 어른이 되었습니다 - 마스다 미리 산문집
마스다 미리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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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스무 살이 되더니, 어른이라는 명사를 감당할 준비나 비전도 없이 어영부영 어린 시절과는 안녕을 고하게 되었다. 책임질 일이 많아진다는 건 조금 안 채였지만 갖고 있는 막연한 두려움만으로 앞으로 누리게 될 자유에 대한 기대감이 감해 지는 일은 결코 없었다. 그간 인생의 목표나 다름없었던 대입을 이루고 나니 더한 기쁨도 없는 것 같았고, 명찰을 달지 않는다고 얻어맞거나 머리가 금발에 허리길이까지 온들 가위로 잘리는 일 없는 (당연한)일상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매우 달콤한, 인내의 선물 같았다. 과연 성인이 되고 느낀 해방감은 불합리와 단절된 아름다운 세상처럼 보였다.   

 

 

 

그러고 보면 어릴 때의 나는 어른이라는 사람들은 모두 현명한 생각을 갖고 도덕적인 완벽체인 줄로만 알았던 것 같다. 물론 커가면서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많다는 것을 알기는 했지만 별 깊은 인식까진 해본 적이 없고 다만 살아지면서 졸업장을 받는 일처럼 저절로 터득이 되며 얻어지는 일처럼 보였다. 당연하지 않은가, 그간 알고 느끼는 게 얼만데. 일면 어른이란 말의 근사함을 훼손하고 싶지 않았던 탓도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 시절 내가 생각한 어른의 삶이란 지금의 내가 한심하게 생각하는 딱 그 정도의 수준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말하자면 겨우 ‘별 생각 없이 나이든 사람’인 것을 말한다. 나이가 들어도 꾸준하게 배울 의사가 있어야 하지만 그걸 귀찮아 하고, 사회와 융화해 가는 진통도 겪어야 진짜 어른으로 거듭날 수 있지만 망각해 버린 사람 말이다. 

이 단순한 생각조차 당연시 못한채 제 고집만으로 우기고 차단해 버리는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은 '이상한 어른들의 세상'을 황망히 알아버린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전혀 성장하지 않은 아이 때의 모습으로 평생을 살아가면 노인이 된 들 한심한 소리를 멈추지 못하는 듯 하다. 그러니 성장은 평생 동안 지속돼야 할 인간의 과업이구나 싶어지는 것이다.

      

   

   

 

십대의 어느 날 갑자기 우리는 몸의 변화를 겪게 되면서 ‘나는 어디서부터 온 걸까?’ ‘왜 태어났을까?’하는 정신적 혼란에 직면한다. 마치 어느 행성으로부터 날아온 메시지를 해석하는 일처럼 시도 때도 없이 궁금해지고 무기력해지며 그 낯선 느낌들의 통로가 궁금해서 끙끙 앓는다. 이 성장의 격변 속에서 뭔가 아리송한 답이라도 찾는듯 시절을 보내고 나면 어느새 몸의 어른으로 완성되고 부쩍 성장한 정신도 갖추게 된다. 

 


스무 살이 넘어도 성장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울타리의 안위에 벗어난 동시 삶에 대한 고단함이  밀려오고 각박과 불신, 불필요한 타협에 이르는 순수와의 이별을 호되게 겪기 때문이다. 만약 이러한 시련으로부터 계속 일어서려는 내안의 의지와 추진이 없다면 안타깝게도 그저 그런 어른으로밖에 남지 못하는 것 같다. 세상이 다 그런 법이기 때문에 나의 이기도 당연한 것이라는 이상한 논리가 몸 안 깊숙히 자리 잡는 사람을 너무 많이 봐왔다. 

나는 이러한 무치함들로 부터 벗어나는 의지가 세상을 더 많이 이해하고자 하는 힘으로부터 생긴다고 믿는다. 사춘기 시절 세상을 더 알지 못해 명쾌하게 내리지 못했던 것에 대한 답은 살아가는 내내 배워야 할 것들에 대한 빈공간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어른이란 사람들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된 계기는 내게 어떤 책을 만나고 부터 일어났다. 우리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관심이 없었고 그만큼 무지했던 시절, 이 책으로 진일보 할 수 있었다. 참으로 근사한 생각을 하는 이 사람을, 무작정 닮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책에서 언급되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싶어졌다. 나와 내 부모, 곁의 친구나 동료 정도로의 소통과 앎만이었던 삶에, 내가 사는 세상으로까지 인식을 확대하게 해준 말들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된 전이의 경험은 매우 특별한 것이었다. 알던 세상이 전혀 다르게 보였고 부끄러워지고 무조건 다 알아야겠다 싶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내가 가진 생각들은 그에 반하는 말의 타당과 끊임없는 의심들로 둘러 싸여 있다. 그러니 배우고 바꿔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진리와도 같은 것이다. 매번 또 다른 삶의 앓이를 경험하지 않고서는 타인에 대한 이해가 힘든 세상이다. 그것은 각자 어떤 특별한 계기로 이루어야할 어른이 되는 통과의례인 모양이다. 

지금에 와서 내가 생각해 보는 어른이란 더불어 살아갈 줄 아는 사람, 계속해서 주위를 환기하고 성장해 나가는 사람이다. 그 때 날 일깨워 준 소중한 만남이 있었기에 조금은 염치 있는 사람이게 되었고, 계속해서 내 주변의 사람들과 연대해가는 삶을 꿈꾸게 하는 닻이 내려 진 셈이다. 여전히 나는 책을 읽거나 소중한 개개인의 삶을 들여다보고 싶어진다. 모든 곳에 내 모자란 배움의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마스다 미리의 <어느 날 문득 어른이 되었습니다>를 읽으면서 과연 서른이 되고 마흔이 되어도 비슷한 고민들을 해 나가야 하는 구나 싶어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이런 어른이 있어 참 다행이고 고맙고 그래서 무척 사랑스럽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 작품의 묘미는 역시 공감일진대 한 시기를 지나오거나 맞이할 사람들 모두에게 위안과 격려를 준다는 점은 언제나 그녀의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만드는 중요한 정점이 된다. 

 

사십대를 맞이한 작가의 낯선 중년기가 어떤 일상과 맞물려 유쾌하게 엮여 가는지 지켜보는 것 만으로도 귀엽고 활력이 넘쳐 보인다. 염려하는 주름투성이 볼품없는 사십대로 보이기는커녕 여전히 사랑스러운 소녀가 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젊음과 결별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 내면을 가꿔야 하는 타당이라는 걸 그녀에게서 배우는 듯 하다.

 

 

이 책은 소소한 일상을 이야기하는 에세이긴하지만 결코 그녀의 하루하루가 가볍게 비춰지지 않는다. 그간 국내에 소개된 만화와 크게 다르지 않은 스타일로, 만화책이 몇 컷으로만 전해지는 짧은 말과 생각들로 상상되는 묘미의 것이라면, 이 책은 오롯이 그녀의 사생활과 주변의 이야기들로 픽션이 아닌 현실감으로 크게 다가오는 매력의 책이다. 그녀는 역시 하루하루 세상과 만나고 자신의 지혜를 베풀며 곁의 사람들에게 행복을 줄줄 아는 어른이다.

 

      

 

 

 

우리는 누구나 처음 살아보는 나이를 경험해야 하고 젊음과는 멀어지면서 괜한 쓸쓸함, 기대감으로 또 앞으로의 나이에 맞서는 낯섦을 겪는다.  

마스다 미리의 <어느 날 문득 어른이 되었습니다>는 나이가 들어서도 역시 변하지 않을 소중한 가치에 대한 견고함, 안일함엔 소심한 복수라도 할 줄 아는 용기, 세상에 좀 더 나은 ‘나’일 수 있는 의지가 돋보이는 책이다.  

여전히 세상을 배우고, 어제의 나보다 오늘이 나은 사람이기를 희망해 보는, 누가 뭐래도 지속가능해야 할 '어른'인 삶을 참 근사하게 살아보고 싶어지는, 용기가 전해지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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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 박람강기 프로젝트 3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안현주 옮김 / 북스피어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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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들의 우상이라는 호기심으로 알게 되어 몇몇 작품을 읽어본 바는 있지만 거장다운 아우라와 품위와 온화함이 넘칠 거라는 예상을 깨고, 어딘가 독립적이고 괴짜 같은 면모로 소설가 챈들러를 알게 되었다. 그의 작품이 하드보일드 소설의 역사를 만들어 낸 장본인이었는가에 대한 알려진 사실들은 다만 감정이 배재된 글이라는 게 가능한 것인가 하는 의문으로 내내 장애물처럼 함께했던 것 같다. 제법 독창적이고 유능하달 수 있는 유명 작가들이 챈들러에게서 영감을 받았다느니, 영향을 미친 작가로 손꼽히는 매력이란 과연 어떤 면이었을까 하는 포커스에만 너무 시선을 둔 탓일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지도 못한 채 단순한 인상만으로 그를 알고 있었단 착각만 남았다. 선입견만 지속될 뿐이어서 그 어떤 타이틀도 의식하지 않고 작품을 대해보리라는 다짐이 필요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비로소 알게 된 챈들러의 매력이란 그만의 ‘꿋꿋함’과 같은 사적인 태도에 대한 면이었다. 상당히 매료될만한 강단이 느껴지는 사람이라는 인상이 가장 먼저 든다. 더불어 지인들에게 호소하는 목소리에서 자주 그의 '화'와 '변'이 느껴지는 것이 오히려 인간적인 순수를 느끼게 해주었달까, 그는 다만 정말 글을 잘 쓰고 싶었던 사람이었을 뿐이란 생각이 들었다.

 

 

편지들의 주 내용은 어쩔 수 없는 일들에 대한 타협이 자기 안에 전혀 고려되지 않다는 고집의 관철, 작품이 늘어지거나 변형되는 것들로부터 무던히도 지키려 노력했던 것처럼 보인다. 자주 언성이 높아지고 더러는 절연되는 싸움의 나날이지만 그에게 관계의 모색이란 가장 먼저 고려되지 않아도 좋을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 같다. 그에겐 오로지 작품에 대해서만 고집할 수밖에 없는 이유들로 그럴싸하게 챈들러 스타일이 만들어졌다. 이는 자연히 작가로서의 독립적인 개성을 무한히 내뿜는 면모로 비춰지고 이러한 강단이 작품 속에서 잘 녹아들게 되었다.

     

     

 

 

챈들러의 냉철하고 고집스러운 성격은 인생을 외롭게 살게 한 원인이 아니었을까 하는 물음은 정작 다른 이유였음을 알게 된 대목도 중요하다. 말하자면 예술가로의 삶에서 본인이 믿고 추진한 작품에 대한 면면의 기술은 언제나 옳은 것이었고 그것은 다음 세대들의 귀감이 되는데 손색이 없다. 마침내 그만의 역사로 남게 된 것이다.

 

 

다만 작품에 대한 철저한 독립성과는 무관하게 그는 자신의 심장박동과도 같았던 아내의 죽음으로 자해를 하는 등 외로운 삶으로 귀결된 증거들은 어쩐지 쓸쓸해 보인다. 그를 외롭게 했던 삶의 경로들이 작품을 위한 담보로 맞바꾼 게 아니라는 건 다행스럽지만, 내내 발휘되던 냉철하고 독립적인 고집이 왜 자신의 삶에는 발휘되지 못했던 것인지 아쉬움이 남는다.

 

 

 

      

살아가다 보면 한 치 앞의 상황에 대한 판단의 잣대가 매번 신중하게 지휘되지는 않겠지만 상황의 경중을 떠나 기본적으로 발휘되는 기질은 분명히 있어 보인다. 개인이 어떠한 삶을 살아왔고, 어떤 가치관으로 걸어가느냐에 대한 릴레이 경주 같은 실시간적 판단과 유보치들이 누적되기 때문이다. 지금 한 생각이 결론적으로 옳았던지 짧은 생각이었던지 간에 시간이 흐르지 않고도 순간에 알아지는 정도의 판단 같은 것들은, 그래서 거의 적당하게 발휘된다. 이는 삶의 마디마디에 놓인 지혜와 경험치로 살아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차곡이 쌓아지는 생각과 판단들, 그것들이 결국 그 사람을 규정하는 어떤 이미지로 남게 되는 것 같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의 편지글들을 보면서 그야말로 어떤 삶을 꾸리며 살아온 사람인지를 알게 되는 묘미는 책을 읽는 동안 내내 전해지곤 했다.

 

 

    

 

그는 어떤 것에도 쉽게 찬사하지 않으며, 냉철한 눈으로 주변의 가장 후미진 곳을 들여다보려는 작가적 시선을 둔다. 시시한 것들의 교묘한 술수에 권위를 내려놓거나 쉽게 수긍하는 태도를 가장 경계했던 삶이었던지 친화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었고 원망을 사는 일이 잦았지만 이러한 모습들마저도 꿋꿋한 예술가의 고집으로 보인다.

 

 

대신 그는 대중이라는 가장 위대한 대상들과 타협하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그 바탕의 본연에는 늘 ‘재미’를 두어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을 늘 해온 성실한 작가였다. 진정 매일 눈을 뜨면 작품에 대해 생각하는 지독한 소설가적인 삶을 살았던, 단지 ‘소설가 레이먼드 챈들러’이면 그만인 그런 독립적인 삶을 꾸려냈다. 둥글둥글한 삶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생각을 오늘 해봤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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