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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과 쓸개
김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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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숨의 단편들을 읽어내며 나는 새삼 그냥 그 상태에 놓여있는 무심함의 미학을 엿본다. 꽉 차있는 분명함 보다는 뭔가 충분한 여백이 느껴지는 내밀함이 돋보이는 소설을 오랜만에 읽어낸 기분이랄까. 소설 안에서의 질서와 규칙들이 사회 안으로 포섭될 만한 경계를 흐리고, 더러는 모호하게 아주 자연스럽게 여닫아져서 조용한 문을 바라보는 기분이 내내 새로웠다. 이는 김숨 글이 보여주는 아주 특별한 권능과도 같아서 마치 한낮의 나른한 오후, 꿈을 꾸는 듯 몽환적인 감정이 살아나는 듯 하다. 

여기 각각의 인물들은 거의 소외라는 이름의 특권을 행사하는 기묘한 목소리를 아우른다. 그런데도 아무런 의심과 거부감 없이 잘 연출되어서 소외를 마치 독특하고 돋보이는 재치의 기술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소설의 강점들을 주류적으로 읽어낸다라면 일반 대중들에게 낯설고 신선한 느낌을 선사해줄만 하다. 그리고 그것은 김숨이라는 작가의 작품에서만 볼 수 있는 (거의 전작에서 그러한) 기묘하고 진중한 인상들을 만드는데 아주 중요한 요소의 나열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일상과 환상이 교묘하게 맞닿은 소설을 많이 봐온 독자라면 어쩌면 이 소설들은 그저 무난하게 무심한 소설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말하자면 <간과 쓸개>가 보여주는 여백은 독자가 어떤 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신선함과 무난함을 오가는 간극의 소설쯤이 될 것 같다. 그렇더라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소설을 어느 편에서 바라보느냐가 아니라, 그 어느 편에서도 설득력을 얻기에 충분하다는데 있다. 낯섦 속에서 일상을 바라보는 요소들이 흥미롭게 다가온 독자라면 그 자체로서 큰 의미를 가지겠고, 무난한 이야기라고 느낀 독자에게도 이 소설들은 진부함이 아닌 하나같이 매우 일정하고 잘 다듬어진 정교한 완제품으로서의 질감을 느끼기에 충분할 것이다. 이런 독특한 시선을 던지는 소설일수록 처음의 인상이 중요한 것이어서 눈으로 따르는 여정에 호기심과 온갖 낯설음쯤을 선사해주어도 벅찬 일이다. 비록 카프카의 <벌레>를 읽어 낸 인상만큼이나 기묘한 호기심을 자극하는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이런 일상 속에서 일탈을 꿈꿔본 독자라면 분명 이 소설을 온 마음을 다해 좋아할 것이다. 읽을수록 감칠맛나는 글을 좋아함에도 <간과 쓸개>는 이 시간 이후에 더 이상 보지 못한다해도 좋을 깊은 여운의 소설임에 틀림없다. 
 

여기 9편의 단편들은 각각 독립적인 형태를 이루지만, 한편한편의 파편적 단서들을 주어 담다 보면 보편적으로 흐르는 정서를 발견할 수 있다. 주목할 만한 것은 그 정서의 흐름이 과잉되거나 부족함 없이 아주 일정하고도 정확한 시점에서 투여된다는 점이다. 이는 이 소설이 재미있다고 느껴지는 가장 큰 맥락인, 구성의 힘이 적재적소에서 그 빛을 발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흥미로운 캐릭터들이 어떤 사건을 불러일으킬지 한 치 앞의 상상도 어려운 서사를 선사하는 점도 큰 매력이다. 빠르게 읽히지만 그만큼 자주 정지하게 만들어서 상상의 여지를 주는 여백의 힘은 그저 놀랍기만 하다. 메시지가 강하거나 혹은 없는 듯 보이는 가장의 기교이거나 그 어떤 의도에 치우침이 없는 무심함이 선선한 바람처럼 인다. 이는 전적으로 작가가 일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한 지독한 탐색과 탐닉의 흔적들일 것이다. 그녀는 아마도 소설이라는 그릇 안에 아주 평범한 얼굴을 한 사람들의 시선에서 가장 일상적인 이야기 속으로 약간의 틈과 파문을 주려는 건지도 모르겠다. 사소한 듯 보이지만 너무 이상하고 엉뚱해서 자꾸 어안이 벙벙해지는 순수한 매력 속으로 자꾸만 빠져들고 싶어진다.

단편 모두에서 어느 누구하나 가족과 이웃이라는 테두리 안에 있지 않은 사람이 없는데도 하나같이 그들이 낯설기만 하다. 처절한 태도로 심각한 반응을 유도하기 보다는 ‘저러다 어쩌려고?’ 정도의 감흥만 일으켜서 솜씨 있게 사건을 이끌어가는 면도 세련돼 보인다. 사실 살아가는 우리 일상의 이야기만큼 우리의 마음을 진동시킬 수 있는 게 있나 싶다. 순간의 틈을 언제라도 돌아보게 하는 것, 그 힘이 이 작가의 눈에서 명석하게 빛난다. 평범하게 살아가는 일상의 이야기처럼 우리를 들뜨게 하는 것도 없는 것이다.

 

단편들은 상처 난 과일만 모아둔 옹색한 바구니처럼 덩그러니 놓여있다. 그리고 그 안의 곪거나 지나치게 익은 과일들이 ‘당신과 나’로 오롯이 남아있다. 그러니 이 바구니 안의 일그러진 형상들은 꼭 우리를 닮아있다. 평화로운 시간과 공간의 이면에는 우리가 만들거나 혹은 의도치 않게 남겨진 기묘한 사건들로 넘쳐난다. 그것이 당신과 내가 맞닿은 또 다른 현실이며 진실일 수도 있음을 말해주는 것 같다. 마치 <육의 시간>에서 말하는 박물관이라는 거대한 공간을 상상했을 때 더욱 명확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어쩌면 이들처럼 박제된 군중들의 다중적인 집합인 박물관은 아닐까. 어쨌든 이 박물관을 한 바퀴 돌고나면 삶에 별다른 희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깨닫게 된다. 희망과 꿈을 지닌 사람일수록 본인이 살아가는 삶에 대한 옹색함과 초라함을 버텨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어떤 불운한 순간과 무료함, 지나친 광풍이 이는 순간에도 이 시기를 관통한 사람이라면 분명 제 삶의 무게가 조금은 가벼워졌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정도로의 위안이어도 우리에게 무료한 일상을 살아갈 이유는 분명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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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들의 고군분투 생활기>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시인들의 고군분투 생활기
제스 월터 지음, 오세원 옮김 / 바다출판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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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주인공 맷의 경우처럼 전혀 무관해 보이는 일을 접목해보는 도전의 사나이에겐 무조건 멋지다 말하고 싶어진다.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그는 더 이상 금융맨이 아니라 완전한 시인이 되는 삶을 살아간다. 물론 그 도전은 실패하였지만 어쨌든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려는 인생에는 무조건적인 격려와 배려를 해주고 싶다. 이런 다양한 사람이 존재해야 풍부한 사회가 되고 이들이 결국 조금씩 나은쪽으로 변화하게 하는 숨은 실력자들이기 때문이다. 시인이 된 맷의 고군분투 생활기는 그래서 드높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좀 더 괜찮은 쪽으로 힘겨운 첫발을 내딛으려는 사람들에게 애잔하지만 더없이 큰 용기를 주는 책이다. 

 

금융과 시를 접목해 금융문학이라는 획기적인 정보물을 만든다는 것 자체가 실은 엄청난 리스크를 떠안은 모험이었다. 돈의 흐름을 모르면 절대로 섣불리 판단할 수도 없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돈이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보면 시대의 흥망이 보이고 그것은 결국 사람을 잘 알아야만 가능한 일이다. 재물만 쫓다가는 시야가 협소해져서 세상의 조망이 불가능해지고 이는 종국의 커다란 실패나 가져올게 뻔하다. 그런데 여기 주인공 맷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는 나름 유능한 신문사 일원으로 보다 미래지향적인 예측을 두고 시와 금융의 결합이라는 획기물을 세상에 내놓는다. 그러나 보기 좋게 기대감은 실패로 끝나 버렸다. 불행은 언제나 한꺼번에 밀려오듯이 아내는 부정을 저지르고, 살아온 인생의 증거인 집을 빼앗길 위기에 처했으며, 봉양해야할 아버지와 아이들은 그를 모든 상황을 최악으로 던져 놓는다. 그래서 선택하게 된 마약상 맷을 지켜보기에는 정말 그에게 지어진 짐의 무게가 얼마나 어마어마한지 가늠케 한다. 돈의 흐름을 가장 높은 위치에서 조망하던 관찰자 맷이 이제는 가장 낮고 음험한 뒷골목의 더러운 돈을 만지게 된 현실은 참 아이러니 하기만 하다. 그만큼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란 것은, 그 어떠한 안전망도 없으며 어렵게 성공을 이루어도 언제 바닥으로 곤두박칠지 알 수 없는, 불안한 사회라는 것을 새삼 일깨운다.  

 

그래도 중간 중간 맷이 전하는 금융문학을 읽어내는 중에는 그가 얼마만큼 건실하고 바른 사람인가를 느끼게 해주는 대목이 많다. 사실과 세태, 미래 시장의 전망을 버무려서 풍자적이고, 무엇보다 한 템포 물러서서 응시하게 하는 시선처리는 정말이지 놀랍다. 이런 의미에서 맷은 어쩌면 금융의 선구자인지도 모르겠다. 시대를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는 지점은 이제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결국 거대한 시스템에 놀아난 가여운 소시민의 힘겨운 한걸음 한걸음을 울지 못해 웃는 심경으로 지켜보는 건 참 기막히지만 용기를 얻는다. 끝내 좀 더 나은 현실이 주어지지 않고 실력과 설득력 있는 시도조차 허무맹랑하게 치부되는 것은 어쩐지 슬프고 아쉬운 현실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맷의 이상은 시대를 너무 앞서갔지만 현실의 맷은 시대를 뒤쫓기 바쁘다. 그러니 결과물은 보기좋게 시시하게 버려지거나 낡지 않았음에도 그 꿈은 버림받았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정말 놀라운 한걸음이었고 버려진 쓰레기통에서 가장 쓸만한 희망으로 머지않아 우리의 꿈이 될 것을 믿게 해준다.

 

맷이 해내는 시도들은 거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의 기로에서 가장 최악의 결과만을 낳는다. 맷이 말하길 세상은 마치 쟁기로 밭을 갈아엎듯이 우리를 엎어 버리고 나아가지만 그렇더라도 이 책은 우리에게 계속해서 실소를 터뜨리게하는 여유와 삶의 희망 같은 것을 전해준다. 가장 밑바닥을 전전하는 삶이어도 고결하고 순박한 우리네 진짜 모습이 아닐까를 생각해보면 참 많은 사람들이 위대해 보이기 시작한다. 읽는 내내 아픔이 가벼이 여겨질 만큼 너무나 유쾌하고 세련된 방식의 치환을 해내는 작가의 문장은 정말 내내 아름다웠다. 

이 시대 가장 밑바닥의 삶들이여, 이 책을 보고 웃으라. 그리고 옆 사람과 함께 안단테로 묵묵히 걸어가라. 맷이 이렇게 우리에게 외치는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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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보이지 않는
폴 오스터 지음, 이종인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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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이렇게도 가혹하고 소외된 상상을 부려도 되려나 싶다. 적어도 이 작가에게 걸었던 애초의 상상력이란 이런 것이 아니었기에, 사실은 좀 밉기까지 하다. 몽환적이거나 애잔한 아픈 사연쯤을 품을 줄 알았지 숨죽이며 확장되는 문제들을 넋 놓고 바라보게 될 줄은 몰랐다. 예컨데 삶과 죽음의 무게와 순환, 존재의미와는 거리를 둔 다른 주제. 그런데 그게 정말 보이지 않더라. 이 소설은 모르긴 몰라도 작가가 진짜 하려는 의미를 찾는데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한 소설이다. 어쩌면 가장 알고 싶지 않은 감정의 요동같은 것만 명확하게 짚어내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불편한 생각들을 충분히 이야기해내는 고집같은 것, 어쩌면 그이기에 뜻밖의 정경도 만들어 내는것 같다. 물론 이 책의 문체와 시선들이 전작에 비해 크게 끔찍하거나 황당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건 아니다. 아무리 눈쌀찌뿌려 지는 장면이라도 그의 시선은 현실의 무게보다 훨씬 무덤덤하게 받아들여지는 면이 있다. 생경하기 짝이 없는 사건들과 거짓말같은 기록들을 판단하는 것은 확실성 보다 모호성을 주기 때문에 이 소설의 몽환적인 느낌을 강조하는데는 틀림이 없다. 마치 작가는 이 세상에 명확한 근거는 없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쨌든 당황스럽고 뭔가에 대한 반응의 파문만을 곰곰이 생각하게 만드는 시간임에는 틀림이 없다. 언제나 그의 소설에서 느껴지던 종국의 따뜻한 감정을 느끼는 것과는 사뭇 다른, 뭔가 가기 꺼려지는 지점으로 데려다 놓는 시도를 이해하기에는 시간이 꽤 걸린 셈이다. 그래서인지 그렇게 뒤죽박죽도 아닌 이야기를 가지고 나는 호되게도 어리둥절해 했던 것 같다. 무엇을 느껴야 하는지도 모르는 겁이 잔뜩 서린 무지랭이의 얼굴은 참으로 우스꽝스러웠을 것이다. 그만큼 폴오스터의 작품은 매번 다른 충격과 색다른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주변인 애덤 워커는 현실의 중심에서 비껴 나온 소외의 인간이다. 소외의 골이 깊어지던 찰나 만나게 된 보른과 마고는 평온했던 그의 삶에 닥친 시련의 장애다. 전에 없던 허기를 느끼게 되고 아무런 온도를 지니지 못한 워커의 눈에 에로티즘이란 것이 싹튼 것도 이들에 의해서다. 사실 이 소설의 배경을 생각해보면 당시 사회적 상흔에 의한 정치적, 문화적 여러 요인들과 한 인간이 어떤 식으로 맞물려 나아가는가를 담고 있다. 정치적 부조리에 의한 혼란과 전쟁, 특히 이 소용돌이에서 잉태된 보른이라는 괴물을 보는 것은 참으로 안타깝다. 보른에게서도 드러나지만 워커도 차츰 이러한 결핍과 한 몸인 욕구의 충족에 혈안인 모습을 보면 전이의 무시무시함이 느껴진다. 결국 워커에게 무의식적으로 발생되는 에로티즘이란 것은 소외의 밑둥에서 자란 거대한 암덩어리인 것이다. 때문에 관습이라는 이성적 사고에 의한 억제의 감정과 결핍에 대한 충족의 욕망은 공존하면서 워커를 내내 종용하고 기이한 인간으로의 성장을 낳는다. 중심에서 이탈하여 아주 후미진 곳에 이르러서야 조금씩 키우게 된 명확한 감정은 에로티즘이었다. 이는 주변의 사람들을 자신의 세계에 가두고 걷잡을 수 없는 환상의 자궁을 만든 요인이 된다. 이것이 무엇에 대한 아픔이든, 소외에서 온 결핍의 발산이든 워커에게 남겨진 과제는 이제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는 길만이 남는다. 2부에서 본격적으로 태동하게 된 누이와의 사랑은 워커에게 그 욕망의 근원이 얼마만큼 기이하게 펼쳐지는가를 보여주는 상징이다. 그러나 누군가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타자와의 분리를 인식하게 될 뿐, 자신의 실존적 모순을 자각하기에는 분명함이 없다. 오히려 그들과의 분리를 의식하게 됐을때 에로티즘은 자신을 고립하게 만든 원인임을 이해하게 된다. 말하자면 그에게 교감이란 것은 세상과 만나고 사람들과 융화되는 안도의 세계가 아니라 타자와 나를 분명하게 할 뿐인 단절의 수단이었던 것을 처참히 말해준다.

 

이 소설의 흥미로운 점은 역시 시점의 이동일 것이다. 시점이나 시시각각 변하는 사실의 왜곡과 감정의 선이 아무리 훼방 놓여지고 있다지만 결국 지극히 한 사람을 바라보게 한다는 점은 명확하다. 우리 각자에게 극치의 착각을 보도록, 그 극한의 환상은 애처롭지만 동시에 아름답기도 한 아픈 역사, 그리고 그 아픔이 낳은 어떤 쓸쓸하고도 고립된 한 사람의 일생을 들여다 보게 한다. 보이지 않지만 누군가는 그 보이지 않는 세계로 걸어가고 있다. 그가 괴물이든, 병자든 그 누구든 그런 사람을 만나면 따뜻한 눈길이라도 보내고 싶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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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들의 결탁>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바보들의 결탁 - 퓰리처상 수상작
존 케네디 툴 지음, 김선형 옮김 / 도마뱀출판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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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네이셔스의 뚱뚱한 풍체만큼이나 크고 웅장한 에드벌룬이 이 책의 시공간에서 시종일관 둥둥 떠다닌다. 그것을 저 하늘 높이 날아 올리는 힘은 그의 터질것 같은 뱃속 가스처럼 내내 가벼운 웃음을 유발하는 기운들, 그리고 도리질을 계속하게 만드는 에너지로 가능해 보인다. 읽는 내내 즐겁고 유쾌한 기분이 드는 것은 분명 큰 매력으로 작용하지만 그 못지 않게 조금만 더 가스가 찼다가는 펑하고 터져버리거나 보지 못할 먼 곳으로 날아갈것 같은, 과잉의 감정이 아쉬운 소설이다.
만약 이그네이셔스와 같은 사람을 만난다면 그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익살스러움을 넘어서 말도 안되는 상황을 제 의지와 잣대로 잘도 빠져나가는 밉상,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 없는 꾀돌이 캐릭터. 그러나 이 책을 덮었을 때는 분명 여기 나온 바보들의 매력에 흠뻑 빠지고 마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기꺼이 팬클럽 회장이라도 하고 싶은 생활의 활력과 에너지를 주는 고마운 사람들이다. 어이없을 정도로 무모하고 이해를 구하는 일이 책이 끝날 때까지 이어질만큼 끊임없이 사건을 만드는 나대기 사고뭉치 위인들은 이렇게나 오래 누군가에게 지켜보일 수 있다는 것만해도 소임을 다하는 듯 하다. 어쨌든 이 책의 캐릭터의 힘은 꽤나 크고 중요한 사건과 같다.  
그러나 만약 현실의 이그네이셔스를 상상해 본다면 그다지 호락호락한 삶을 살아내지는 않았을 것같다. 소설에 나오는 일보다 더 황당하고 어려운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 곁에서 그의 개성은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대못하나쯤 박혀 폐인이 되거나 부적응자로 의기소침해 있을 게 뻔하다. 그런데 다행이게도 이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현실 속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아주 독특한 성정을 지닌 이들이다. 다시 말하면 이그네이셔스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어딘가 모자라지 않으면 과잉된 감정을 가지고 있는, 그래서 이들을 보고 평범을 자부하던 우리가 대단한 우월의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그러나 이를 뒤집어보면 개성없이 점잖만 빼고 살아가는 우리의 가식을 반성(?)하게 만든다. 바보같은 모습을 숨기고 살아가는 사람의 풍자인지, 아니면 단순히 한 마을의 독특한 전경을 마음껏 상상하고 싶었는지 작가의 의도를 곰곰히 탐구하게 된다. 어쨌거나 이런 이들과 좌충우돌 이야기를 뚫고 지나가는 여정은, 한 놈만 패는 과격함과 안타까움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마음 편한 여행과 같다. 차라리 모두가 한 대씩 때리고 얻어 맞고 시작하는 모든 경계가 사라진 상태, 망가지고 우스꽝스런 루저들과의 동행길은 참으로 유쾌하다.


 
이 책이 온마음을 다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나는 ‘괴짜’를 인정해 주는 사회가 아닐까로 읽었다. 어느 사회고 괴짜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좁은 통로라는 것은 그가 내보이는 독특한 재능과 성격, 이것의 발현이 사회적 업적을 이룰만한 큰 성과를 올렸을 때나 활짝 열리는 법이다. 본능적으로 사람은 안정을 추구한다는데 괴짜들이 사회적 통념을 깨거나 이들의 기준에 어긋나는 비상식적인 언행을 보면 심한 거부반응을 일으키는게 당연하다. 결국 괴짜가 살아남는 법은 사회적 업적이라는 비례와 상충되어 높은 폭발력을 가졌을 때 긍정의 효과를 이끌어 낼 수 있다. 이렇게 됐을 때의 상황은 그가 평범한 환경에서 자랐고 온화한 성품을 지녔을 때보다 몇 배는 더 극대화된 반응을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이럴 때 ‘괴짜’를 괴물이 아닌, 매력있는 '비범한 자'로 읽을 수 있게 된다. 잘 알고 있는 미켈란젤로, 모차르트, 아이슈타인이라던가 하는 사람들을 우리가 특별히 기억하는 것도 어쩌면 이들이 괴짜였기 때문은 아닐까.
어쨌거나 성공한 괴짜는 화제를 몰고, 이그네이셔스는 짜증을 몰고온다. 여기 이그네이셔스는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 만한 요건이라고는 그가 딴 석사 학위뿐이고, 정작 제대로 된 직업하나 없어 일이나 벌리고 다니는 가여운 청년이기 때문이다. 그가 가진 괴짜적 요소들, 즉 사회를 비꼬고 변혁을 꿈꾸는 작은 외침들이 사람들에게 어필되기는 커녕 사고뭉치에 짓궂은 백수로 읽혀 진다는 것을 생각하면 안타깝고 씁쓸하기 그지 없다.  

이그네이셔스가 결국 바람하던 변혁을 크게 일으키지는 못했지만, 그의 사회비판적인 글과 생각들은 적잖이 놀랍다. 그것은 충분히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자극을 주었음에 틀림없고 작은 불씨가 되었음을 믿게 해준다. 사람들은 그의 비정상적인 외모를 우스꽝스러워 하고, 비상식적인 언행을 깔보지만 사실 이그네이셔스의 생각은 그 나름의 상식적인 선 안에 있다. 말하자면 세상의 고정관념 안에 있기를 거부한 좀 더 확장된 상식 선의 잣대로 바라본 시선이라는 것이다. 부조리를 못견뎌한 것 뿐이며 다만 세상이 좀 더 상식적으로 바뀌었으면 했던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오랫동안 배워온 지식과 현실과의 괴리감이 아마 그를 더 괴팍하게 내몰고 외롭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를 보면 현대사회가 얼마나 괴짜들에게 살아가기 힘든 곳인가를 체감하게 된다.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야 말로 현대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우리는 바보 이그네이셔스에게 다양성을 존중하는 법을 배운다. 

이 책의 재밌는 점은 시종일관 사람냄새 나는 미국 한 마을의 정겨운 냄새와 수다를 들을 수 있다는 점이다. 특유의 언어가 싸구려 맥주집의 왁자지껄한 소음으로 떠들썩하고 맥주 냄새와 엉켜서 뉴올리언스라는 정겨운 마을의 이미지를 만든다. 주인공 개인이 뿜어 내지 못하는 전체적 인상과 풍광을 이 마을 사람들에게서 느껴진다. 사소하게 비꼬고 웃어 넘겨버릴 작은 이야기에도 이들에게 풍겨나오는 정신, 뿌리를 읽는 것은 어렵지 않다. 뉴올리언스는 재즈의 고장, 카트리나 재앙이 휩쓸고 간 곳으로 우리에게도 익히 알려진 곳이다. 모르긴 몰라도 이곳의 이미지가 책으로 말미암아 왜 재즈의 고장이라고 하는지는 충분히 느낄 수 있으리라. 티격태격 싸우고 바보들 아닌가 할 정도로 어리석어 보이지만 자신이 처한 삶의 애환을 노래로 치환시킬 줄 아는 지혜를 가진 소울이 살아있는 마을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소소한 사건들과 이그네이셔스의 독특한 벨탄샤웅이 충돌하는 싸움은 이 고장이기에 거대하고 멋진 에드벌룬을 띄우는 일로 승화된다. 그것은 작은 바람이라도 일으키고자 한 바보들의 작은 입김들로 모아진 멋진 비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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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기의 간주곡>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허기의 간주곡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윤미연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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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권의 소설은 작가의 '과업'처럼 다가와 꽂힌다. 전쟁을 체험한 작가들에게서 느껴지는 공통적인 것, 말하자면 시대를 이야기할 때 결코 그 때 그 사람들을 잊지 말아달라는 당부는 처절한 고발로 이어진다. 당연하게도 자신이 목도한 사실에 대해 말해야 한다는 어떤 사명감같은 것이 깃들 것이다. 시대를 살아간 자만이 알 수 있는 아우성을 토로하듯이 전쟁을 겪어 낸 소설가의 이야기는 우리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하는 역사의 허리를 담담히 관통하며 지나간다. 그래서 이분들의 이야기를 읽어내는 것은 언제나 특별한 감정이 솟는 일이다. 이제 전쟁을 겪은 1세대들이 점점 떠나가고 이런 식으로 기억되는 일조차 귀한 일이 되어 버릴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르 클레지오 작가의 소설은 언제나 고증 위에 아름다운 상상력이 얹어진 채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허기의 간주곡>이란 제목만 접했을 때도 이 소설이 얼마나 완벽하고 위대한 이야기일지가 먼저 떠올랐다. 겪어보지도 못한 허기의 기운이 거대한 먹구름처럼 몰려와서 가슴을 꽉 메우는 무시무시한 함축의 언어. 이 감정이 불행인지 그저 공허함 뿐인건지 알 수 없어 어리둥절할 때 마침내 들려오는 아름다운 선율같은 것은 우리가 가진 근원의 슬픔일까. 설사 이 우연이 아무것도 의미하고 있지 않아도 좋은 완벽한 조화, 그런 삶을 이야기 하고 있다.  

르 클레지오 선생이 우리나라에 머무셨을 때 꽤 많은 강연회나 낭독회에서 만나 뵐 기회가 있었다. 그 때 말씀하신 것들 중 결국 이 분이 소설을 쓰신다는 건 인간의 삶 속 풍경 중에 가장 슬프고 아픈 시간들을 이야기하고 싶어 하신다는 인상을 받았다. 선생에게는 이 시간들이 바로 유년에 머물러있다. 실제로 모리셔스섬에서 자란적이 있으며 프랑스 어느 시골마을에 꼭꼭 숨어 전쟁을 피해 사셨다 들었다. 폐허의 터전, 마음 졸이고 어수선했던 유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견뎌낸 시간들이 그에게 영원히 '말하는 삶'으로 바꿔 놓는다. 전쟁은 끝났고 오랜 세월이 흘렀다지만 이 때를 끊임없이 상기하는 이유를 작가는 너무나도 생생한 풍경과 함께 소상히 전하고 싶어 한다. 여전히 한편에서 끝없이 반복되는 전쟁들이 왜 이 아픈 이야기들을 쉬이 잊어져서는 안되는가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에게 남겨야 할 과업처럼 그렇게 오랜 세월 아픈 역사와 개인에 대한 이야기를 써냈다.


우리나라에 2년여를 머무르시게 된 연유도 본인이 몸소 겪은 역사와 우리네의 역사가 너무 닮았기 때문이라고 말하셨다. 무엇보다 우리나라 어느 지방 시골마을의 풍경이 사시던 고향집과 너무 비슷해서 주말이 되면 그곳을 자주 찾아가 보곤 하셨단다. 어쨌든 소설에서 발현될 정서적 고향을 우리 땅이 북돋아 준다는 우연도 그러고 보면 참 이유있는 일이다. 우리의 언어와 풍경들이 말해주는 느낌이 <허기의 간주곡>에서도 비슷하게 느껴지는 공감대가 있다. 가령
우리말 중에 '情'과 '恨'이라는 말이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정확하게 표현하지 않는 고유한 언어라고 놀라워 하셨다. 우리나라의 정서적인 뿌리에 情이라 불리는 사랑, 슬픔의 감정인 恨이 공존한다는 것이 바로 작가가 공감하는 실체적 단어이다. 실제로 이 소설에서도 情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프랑스어로는 어떤 단어로 쓰셨는지 모르지만 분명히 우리의 '情'이라는 정서적 개념을 상기하셨으리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어쨌든 이 책은 이대 기숙사에 머물면서 붕어빵과 알밥, 삼계탕 같은 소박한 음식을 즐겨하시며 태어난 작품이다. 그래서 선생님의 <허기의 간주곡>이 정말 많이 궁금했고 보고 싶었다. 한국 땅에서 잉태되어 전 세계의 아픈 역사의 땅에 울려 퍼지게 된 아름다운 간주곡을 이제 모두가 함께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유년의 에텔은 감수성이 풍부한 소녀다. 깊은 사랑을 품을 줄 아는 아이, 그만큼 상처를 잘 받고 외로움을 많이 타는 아이, 에텔의 내면은 구덩이가 커서 깊은 만큼의 세상을 볼 줄 아는 아이다. 그것은 그녀의 할아버지 솔리망의 내면과 아주 많이 닮았다. 속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말수가 적고 잘 표현하지 않는 성격이지만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 보이는 사랑은 세상에서 가장 넓고 위대한 것이어서 에텔을 언제까지나 꿋꿋하게 지켜주는 버팀목이 된다. 역사의 소용돌이가 휩쓸기 전의 땅에서 에텔은 솔리망의 정서적인 자양분을 받았고 진짜 사랑을 배우고 자란다. 그리고 그 정서적 완벽을 상징하는 것은 바로 그 둘만이 공유하던 '연보라색집'이다. 그러나 풍요롭던 시절도 잠시 에텔은 온전히 혼자가 된 세상에서 또다른 사랑과, 시련과, 공허를 배워 나간다.

에텔이 깨닫게 되는 공허의 자락에서 가장 치명적인 것은 착각의 향기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온 정신을 흐릿하게 만들 정도의 아름다움을 가진 친구 제니아와의 사랑 혹은 우정, 이는 소녀들만이 공감할 수 있는 이 책의 가장 돋보이는 정서적 교류다. 할아버지의 죽음 이후 채우게 된 첫 번째 세상과의 만남이 바로 제니아와 나눈 교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녀는 처음으로 ‘다름’을 알고 이해하게 된다. 언제나 가난과 처지에 걱정이 많던 친구에게 에텔은 죄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시대의 격차와 부조리를 알게 된다. 그것은 제니아의 유난스러운 성격탓에 에텔로 하여금 자격지심을 품게 할만큼의 상처가 되고 만다. 언제나 그녀의 눈치나 보며 관계를 이어나가지 못할 걱정에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이미 제니아의 존재가 그녀에게 공허를 주리라는 예감을 들게 한다. 소소한 질투나 사랑, 이런 감정들과 맞물려 세상을 좀 더 알게 되고 이해하게 되는 에텔의 성장을 목도하는 일은 싱그럽지만 쌉싸름한 풋과일의 맛처럼 아리고 슬프다.  

에텔은 어려서부터 가정불화가 끊이지 않던 부모의 슬하에서 외톨이로 성장했다. 그녀가 바람하던 연보라색집의 실현이란 것도 결국 이런 부모라서 실현되지 못했다. 에텔에게 연보라색집이 있었다면 평생 그녀의 공허와 방황도 조금은 낫지 않았을까. 그녀에게 집은 내면의 큰 구멍을 메워줄 실현의 산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 자신도 고백하듯 애초에 그런 것이 지어지지 않을 거라고 예감했던 것 같다. 에텔이 바람하는 방향대로 흘러가는 것은 사실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솔리망의 부재, 허세욕만이 가득한 딱한 부모, 차갑고 냉소적인 제니아의 배신, 그리고 진짜 사랑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로랑을 향한 마음, 모든 관계라는 것이 공허를 메우는 일이었다기 보단 더 큰 구덩이를 파는 일이었다. 그녀 곁의 그 누구에게서도 채울 수 없는 허기였기에 연보라색집의 존재는 내면에서 점점 커지는 노릇이다. 언제나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삐걱거릴 때마다 그만큼씩의 구멍이 더 생기고 그녀가 균형을 잃고 헤맬때는 자신의 정신적 뿌리인 솔리망을 상기한다. 이렇게 겪어내는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 단순히 성장이라 이름 한다면 얼마나 잔인하고 허망한 일인가. 어른이 된다는 건 아픔을 감내하는 일, 텅 빈 공허의 구덩이를 점점 커지게 방관하는 과정일까. 에텔의 연보라색의 집은 세상 사람들이 사는 대지 위가 아닌 에텔의 내면 구덩이에서 터를 잡고 증축된다. 
 

새삼 작가의 시선이 얼마나 차분하고 담담한 고백인지가 인상깊게 느껴진다. 전쟁의 피폐함과 고통의 아우성을 이 책에서는 거의 찾아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들은 연보라색집이 가져다주는 이미지처럼 뿌연 안개 속, 허상의 집에서나 흘러 나올법한 아름다운 소녀의 노래처럼 들린다. 에텔 개인의 아픈 성장은 시대의 아픔과 맞물려 아름다운 허기의 멜로디로 대치된다. 역사가 한 개인의 삶에 얼마만큼 큰 소용돌이를 몰고 오는지 그 안타까운 과정을 말해준다. 작가는 어쩌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허기로운 역사를 한 편의 악보로 남기고 싶었던건 아닐까. 
그러니 우리는 여기 이렇게 연보라색 집에서 풍겨 나오는 허기의 소리를 듣고, 상상하며 기억해내는 일을 꼭 해야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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