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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날들
메리 올리버 지음, 민승남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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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들이 이제 막 피고 만개한, 가히 꽃사태라고도 부를만한 이 봄날에 <완벽한 날들>을 읽게 된 것은 뭐랄까, 적정한 때에 맞는 수액의 기운처럼 아득하다. 알맞은 햇볕과, 온도와 습도, 물과 바람이 가장 좋은 채로 나무에 주는 일같이 머리에는 생기가 돌고 입술에 꽃을 머금은 향긋함이 있다. 그러나 고백하자면 메리 올리버의 글을 읽는 동안 싱그러움이 내내 느껴져서 봄이 연상된 것과는 조금 다른 기분들을 일단 설명해야 할 것 같다.

 

 

작가의 글은 오히려 겨울의 정서와 많이 닮았다는 인상이 짙다. 격정의 바다보다는 잔류되어 도는 호수가 어울리고, 무엇보다 자연에 대한 관찰과 그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니 내밀하고 조용히 흐르는 시간에 대한 분위기에 압도되고 만다. 그러다보면 그 고요가 마치 정지된 듯한 상태 즉 죽음을 포착해내는 일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녀의 글에 붙는 수식에 ‘슬픔’과, ‘텅 빈 아름다움’, ‘고독’과 같은 언어들이 따라오는 것은 아마 겨울적인 시선, 즉 침잠한 상태의 목격들이 주를 이루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생각에는 때로 박력이 넘치고 또 명료함이 전해지는 것과는 별개로, 상대되는 정서는 아니지만 집요함이라던가, 세밀함, 섬세함이 공유하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천생 시인이다’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일이다.

명징한 표현들이 그것대로의 세세한 이유들을 품고 가만히 정지되어 흐르는 흡사 ‘죽음’의 생각으로 이어 지는 것은 지독하게 묻고 또 목도한 겹겹의 시간에 대한 영원을 담고 있기 때문이리라. 이를 굳이 작가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여성 특유의 섬세함’과 같은 후진 표현으로 들먹이고 싶지는 않다. 시인이라면, 작가라면 무조건 섬세해야 하는 게 당연한 자질일 테니까. 그렇더라도 메리 올리버가 유독 눈에 띄게 섬세한 언어감각을 가진 작가인 이유라면 아마도 그녀가 다름 아닌 ‘고요’를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완벽한 날들>에 나오는 기본 정서는 격정이 훑고 지나간 고요의 자리를 읽고 그 경이로움에 대한 감정들을 자주 등장시킨다. 분주한 시간이 지나간 망가지고, 떠나가고, 남겨진 것들에 대한 경이로움은 왜 이토록 아름다운 걸까?

 

 

우리가 당장 보는 나무의 외연에는 아무런 변화도 감지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 어제와 오늘의 미세한 변화는 읽을 수 있다. 나무의 내면에는 언제라도 새순을 밀어 올리고 푸른 유전자를 생산해 내느라 분주할 움직임이 있는 게 분명하다. 마치 죽은 상태와도 같은 고요함의 그 속을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절대로 발견하기 힘든 내면의 화려함, 격렬함이리라. 이로써 메리 올리버의 글을 읽고 겨울의 정서 안에서 봄을 읽어내는 잠재를 동시에 읽을 수 있다는 설명을 할 수 있게 됐다.

 

 

이 책은 그녀가 사랑하는 시와 산문들이 큰 맥락에 상관없이 섞여 있다. 시의 작법에 대한 진지한 탐구들이기도, 사랑해마지 않는 작가에 대한 깊은 이해와, 자연에 대한 찬미가가 아름다운 시어들로 노래처럼 흐르기도 한다. 단지 그냥 하고 싶은 말을 할 뿐이라는 작은 파문이 긴 여정으로 돌고 돌아온 느낌을 준다.

 

 

그렇다면 그저 그녀의 바람처럼 책갈피에 몰래 숨어 앉아 숨만 쉬면될까? 그녀의 시는 한 번 읽고는 작은 고갯짓을 하게 하지만, 두 번째에는 눈을 감게 되고, 세 번째는 나의 작은 숲을 생각하게 되는 자연의 향기를 잔뜩 머금는다. 꽃들이 꽃비처럼 흩날리는 이 봄날에 어쩌다가 이 책을 만나게 된 건지, 조용히 숨을 들이켜 그윽한 자연의 내부 소리를 듣게 되는 깊은 밤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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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기술 밀란 쿤데라 전집 11
밀란 쿤데라 지음, 권오룡 옮김 / 민음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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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쿤데라가 이야기하는 소설의 여러 양태에는 작품 고유마다의 개성이 재생의 힘을 얻어 하나의 전형이 되고 기술이 되어 펼쳐진다. 시대와, 역사, 문화를 짚어낸 모든 틈바구니 속을 속속들이 헤아린 깊은 통찰과 이해의 긴 침묵이 서사처럼 유려하게 흐른다. 전에 없던 새로움을 발견해내는 안목범인류학적인 시선으로 소설을 이해하려고 애쓴 기록인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총체적으로 기술을 발견해내는 연구자임과 더불어 기존의 기술로부터 극복하려는 새로운 글쓰기를 이뤄낸 소설가이기도 하다. 시대와 인간에 대한 이해를 다만 어느 한가지의 표정과 관점만으로 이해하지 않은 위대한 예술가의 본질적 자세를 엿보게 해준다.

신화와 현실, 전통과 삶이라는 특수한 교차점들을 포착하여 집요하고도 조직적 확대의 이해를 도모한 흔적은, 왜 밀란쿤데라의 작품이 많은 사람들에게 지적 통찰력을 드러내는 유익한 책으로 읽히는지에 대한 명확한 답을 제시해준다.

 

 

세르반테스의 모험적 면모로 하여금 소설의 앎인 조건을 이야기로의 시작은 무척 흥미로운 출발이다. 돈키호테가 길을 찾아 나서는 여정을 통해 몇 번이고 삶을 견디며 실험해본 과정들이 고유한 자신의 면모를 발견해 내는 일인 동시 소설의 여정과 같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고독과 싸우는 자신과 타인, 세계와 단절이라는 양 극단의 역설적 상처를 주고받으며 잉태되는 일이다. 나를 알기 위해 길을 나서는 영혼들의 이야기, 아무도 가보지 않은 버림받은 세계에 무모한 첫 걸음을 내딛는 이야기가 바로 소설의 면모인 것이다. 우리가 전혀 알지 못했던 세상에 덩그러니 놓여 모험을 하게 되는 건 바로 돈키호테처럼의 에 대한 욕구가 소설의 근간이 되기 때문은 아닐까. 세상의 이해를 받지 못한 처량한 신세이긴 하지만 그의 모험에는 숭고한 희비극이 함께하고 의 세포가 분열을 일으켜 그만큼 성장하리란 기대를 엿보게 해준다.

 

 

밀란쿤데라가 바라보는 소설의 여러 특질들은 구체적으로 소설의 안과 밖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의미들 때문인지 그 가속에 힘이 부쳐 쉽게 읽힐 만한 책은 아니다. 여러 번 놓치고 상황의 문제들을 실상 동의하게 되면서도 지식의 창고에 쌓아 두기만 하는 일이 벅찬 일이기는 마찬가지다. 어쨌든 밀란쿤데라의 특정 소설에 대한 해석들이나 대담편, 구체적 언어와 용어에 대한 나름의 생각들을 읽으면서 이것들을 이루게 된 긴 시간에 대한 존경심이 절로 드는 건 당연한 일이다. 주제와, 관계의 모색, 관점의 복합적인 조건들, 역사와, 소설의 기술을 이루는 작가 특유의 개성, 이 모든 면을 깊은 애정으로 통찰한 예술가의 기술 연마의 과정은 참으로 위대하게 느껴진다.

 

 

작가의 기질은 예민하게 혹은 각별하게 발휘되어 주목하게 되는 의식의 면, 요컨대 서구정신에 국한된 세계관을 부정 혹은 극복하려는 면이라던가 기존 체제를 부정하고 인류학적인 접근을 모색하는 점 등이 동의되는 만큼이나 요소마다의 깊이로 인지되곤 한다. 하나의 중심에서 자꾸 벗어나려는 의지가 있어야 비로소 전체가 보이는 것처럼 다채로운 이면을 보고자 하는 노력에서 이 책의 궁극적인 태도가 드러나는 것이다.

 

 

또한 밀란쿤데라는 음대 교수였던 아버지의 영향 때문인지 음에 대한 깊은 조예가 드러나는 것 역시 그 작품 세계만의 특질이라면 특질이라 하겠다. 구체적으로 음악이 그의 작품 안에 어떠한 식으로 쓰여졌는가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는 것도 흥미롭다.  

다면화된 인간을 형상하는데 음악이라는 예술은 단면적 관점을 파기하고 보다 양립되어 흐르는 상상력의 자극을 훨씬 크게 도와준다는 믿음이 컸던 모양이다. 명징함 보다는 지금 흐르는 이 소리가 흘러 과연 어디로 가는 지에 대한 애매하고 불확실한 물음표들로 큰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데 충분하다. 소설의 폭은 이러한 식으로 넓혀지는 일이다.

 

 

<소설의 기술>은 다만 소설을 이루는 기술적 혹은 미학적 요소들을 말해주지만 결국 우리가 본 소설의 모든 면이 소개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설의 안과 밖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밀란쿤데라의 예민한 눈으로 좀 더 명확하고 진실하게 보여지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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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마디]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마디
정호승 지음, 황문성 사진 / 비채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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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생각의 끝에는 한바탕 밀물이 밀고 들어온 소용돌이의 잔해 중에서도, 유독 마른 모래만이 남아 작게 반짝인다. 이야기를 잃은 이야기, 격정이 지난 자리의 적막함, 겨우 느끼게 되는 연민의 감정이 썰물의 풍경을 대신한다.

 

 

우리 삶은 바로 이러한 일처럼 가까스로 밀고 또 밀려나가는 순환의 풍경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닐지. 모든 게 다 사라지고 만듯하지만 가까스로 남은 연민이, 크고 작게 뚫린 구멍들을 스스로 메우는 자장력을 움직여 주는 일인 것만 같다. 이 호젓한 세상의 발견은 우리가 살면서 상처가 되는 일의 경험들을 고스란히 체화하고 또 밀어내면서도 구멍 안의 세계를 비범하게 만들어 주는 용기를 주는 일처럼 느껴진다.

삶을 좀 더 알아간다는 의미, 오롯이 내 것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사람이 살아가는 일이 아닐까. 이 과정들을 유독 예민하게 또는 혹독하게 겪어내 언어로 발화할 수 있다면 그가 바로 예술가일 것이다. 수많은 이유를 찾아내고 고민을 거듭하고 난 뒤에라야 비로소 감정이 배제된 연민이 그것들을 말하는 발화점이 되어 눈앞에 서린다. 이는 물론 사랑’이기도 하다. 사랑은 끊임없이 연민의 숨겨진 그림자처럼 모든 삶과 의미들을 헤집고야 마는 모든 감정의 본질이다. 과정의 기복에서 이 작은 알갱이들이 하나하나 모여 시인의 시어가 되고, 소설가의 문장을 이룬다. 그리고 이 안에 커져버린 연민의 정체가 단단한 열매로 맺혀져 우리는 그것을 이라 부른다.

 

 

<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마디>에서 정호승 작가는 대게 비슷한 시간의 적요를 감지한다. 가장 느슨해져 버린 시간들, 어스름한 저녁에서부터 아무도 깨어있지 않을 것 같은 새벽 세시반의 고요, 이 속에서 그것들을 가만히 바라본다. 왜 하필 밤일까. 밤은 오히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인데. 고단함에서 잠시 물러날 수 있는 시간, 나 밖의 시간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한 밤. 그런데 이 시간 속에서 우리는 깨어있는 때 보다 더 잠잠해진 의미들을 더 찾을 수 있을 때가 많다. 잠시 멈춤, 나 이외의 세상 풍경에서 비로소 나를 바라보게 됨, 이 두 가지의 의미를 함께 읽어낼 수 있는 놀라운 시간이 바로 밤인 것이다.

 

 

정호승작가가 말하는 삶의 제언에는 시간의 느슨해진 틈을 타 거의 모든 욕심들을 꼼짝없이 작동 중지시키고야 마는 힘이 있다. 이 책의 두께만큼이나 작은 이야기들이 모여 인생의 큰 골자를 숱하게도 생각하게 만들어 준다. 어디서 들어본 듯한 좋은 이야기들, 그것들은 어쩌면 너무나 사소해서 유별난 삶의 체험기도 아니며 가책의 충격을 주는 반성을 꾀하는 일도 아니다. 그러나 쌓여가는 호기심을 계속 자극시키는 일들임은 부인 할 수 없다. 만약 호기심 마저 없다면 변화를 구하는 체험 속에서 어떠한 시도도 없이 아무것도 아니게 되버릴 일 아닌가. 새롭게 세상을 보고, 더 나은 나의 모습을 찾아서 감정의 고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일이야말로 정말 중요한 생각이라는 인식이 든다. 그리고 그것은 나만의 안목이 좀 더 확장되길 꿈꾸는 일이기도 하다. 

 

 

결국 나는 이 책에서 두 가지를 본다. ‘연민느슨한 시간. 모든 살아가는 것들에 대한 사랑 없이는 감정의 전이도 없게 된다라는 것, 그것은 마치 죽은 상태와 다름없을 것이다. 또한 이 감정의 연장된 시선으로 느슨해져 버린 시간을 탐색하지 못한다면 결코 세상을 알지 못하고 나를 알지 못하는 눈으로 평생을 살아갈 것이다. 원숙한 사유를 한다는 것은 세상 읽기를 통해 미묘하고 다채로운 존재들의 색을 구분해 내는 힘일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작은 일상을 통해 그 행간 속에 숨은 삶의 의미들을 독자들이 진심으로 알아봐주길 바라는 쉬운 글쓰기를 했다. 새벽의 숲을 일깨우는 조용한 작가의 일일이 흙발자국 소리처럼 은은하게 나를 좀 더 흔들어 주기를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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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 2013-03-24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푸리울님의 리뷰는 제가 읽은 책들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을 되짚어 보게 해주네요.
감사합니다.

puriul 2013-03-25 14:42   좋아요 0 | URL
저야말로 라일락님 글보면서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들러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
 
[엄마와 함께한 마지막 북클럽]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엄마와 함께한 마지막 북클럽
윌 슈발브 지음, 전행선 옮김 / 21세기북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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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와 속깊은 대화를 하고 나면 가슴 한가운데부터 퍼져 나오는 온기로 한동안 배가 고픈 줄도 모르고 배시시 웃을 수 있을 것 같다. 가장 가까운 친구와 함께일 수도, 아니면 잘 알지 못하더라도 마음만 통하면 말을 나눈다는 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여기에 상황이나 분위기, 상대방의 신뢰가 바탕이 돼야 함은 물론이다. 개인이 가진 성품상 상대방의 이야기를 잘 이끌어 내고 공감하며 잘 경청하는 배려가 돋보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진짜 속마음을 표현하는 것 자체를 어려워하는 사람도 많다 

내 경우라면 아무리 친한 사이라 하더라도 속마음을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와, 좀 덜 친해도 오히려 더 터놓고 말하게 되는 친구가 있다. 물론 누구나 상대방을 봐가며 마음을 털어 놓는걸 테지만 그것이 꼭 친밀함을 전제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럴 수 있는 상대를 만나면 어떤 이야기라도 잘 할 수 있는 편이긴 하지만, 실상 왕왕 있는 일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누군가에게 그냥 속 시원히 말하는 것 자체를 좋아하는 타입이 있어서그저 묵묵히 들어주는 편으로 시간을 나눠 준다지만 이럴 때 결코 대화를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말을 주고받는 쪽에 무게를 두기 때문인지 그야말로 수다대화냐를 엄연히 다르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유익한 대화를 하기란 여간 쉽지 않은 일이다.

 

 

 

가령 부모와의 경우를 예로 들면 이렇다. 친밀감이야 말할 것도 없는 사이지만 그리 다양한 주제로 말을 주고받는 사이는 못되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학교에서 안 좋은 일이 있거나 해도 솔직하게 표현해 본 일이 없으며, 엄마와 드라마 이야기로 수다를 떨 수는 있어도 정작 지금 어떤 생각을 하며 사는지 말한 적은 없는 그런 데면데면한 사이다. 부모가 그리 다정하게 경청해주는 편이 아니어서 그랬을까, 아니면 타고난 내 성격이 과묵한 편이어서 였을까 부모와 대화를 해본다는 건 어지간해선 상상이 잘 안되는 풍경이다. 이게 또 크게 불만인 것도 아니어서, 그저 부모와 친구처럼 친하게 시시콜콜한 이야기도 주고받는 관계를 보면 신기하고 부럽기도 하면서도 내겐 좀 먼 사람들 이야기처럼 보이고 마는 것이다. 대신에 지금의 나이가 되고 보면 간섭을 덜 받는다는 점도 크게 만족할 만한 수준이어서 딱 이 정도로의 거리를 적당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편이다. 그러니 내게 부모와 정기적으로 어떤 주제를 두고 생각을 교류하는 일은 가히 생경한 광경이 아닐 수 없다.

 

 

 

<엄마와 함께한 마지막 북클럽>을 보면서 어떻게 자기 엄마와 책에 대한 유익한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신기하다는 말을 하려고 장황하게도 말을 늘어 놓았다.

책에서 어머니인 메리 앤 슈발브 여사는 저명한 교육자이자 난민구조활동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을 해 온 특별한 분이어서 이런 질 높은 대화가 가능했겠구나 하고 금세 고개가 끄덕여 진다.

그러나 또 어떻게 생각해 보면, 암선고를 받고 죽음의 문턱에 가까워 오는 상황에서라면 이력이라는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자식들에게 고백하고, 유언처럼 앞으로 너희는 어떻게 살아가라는 당부 정도를 예상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럴 때 지식인이든 아니든 사람이라면 으레 비슷한 마음으로 추렴되는 상황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화학치료를 받기 전의 시간 틈에 아들과 책에 대한 대화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예상 밖의 일이거나 하는 놀라움은 없었지만 참 한결같다라는 인상은 새삼 놀라운 것이었다. 주변을 정리하거나 가능하다면 여행을 다니는 등 주로 행복한 시간을 보내려 노력하기 보다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알기 위한 노력을 지속해나가기 때문이었다. 이런 삶의 태도가 남은 어머니 삶에 큰 행복이었음을 증명해주는 가장 자연스러운 만남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읽게 된 책은 환자에게 희망만을 던져줄 수 있는 발랄하고 아름다운 책만을 고집하는 것도 아니고 그야말로 각자 그때그때 생각해둔 다양한 책을 선정한다. 그 중에는 어머니가 평소 난민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만큼 무겁고 풀어낼 수 없을 것 같은 진중한 문제작도 다수 포함된다. 이런 주제들 때문에 아들도 책 선정에 주저하거나 고민하는 흔적이 없지 않지만, 어머니는 결코 세상을 낭만적으로 바라보는 분이 아니기에 세상의 문제를 직시하고 방법을 아들과 대화로서 모색해 본다. 이런 모습들이 참 지식인의 면모를 엿보이게 해준다.

 

 

 

 

아들은 책에서 어머니에게 닥칠 죽음의 불행에 대해 좌절하고 무기력한 어조로 단 한 번도 표현하는 법이 없다. 어머니가 자신의 고통을 크게 표현하지 않는 분인 것처럼, 그도 아직은 어머니가 살아 계시니 얼마든지 표현할 수 있는 일이며, 함께 나누는 지혜를 발견하는 기쁨에 대해 담담하게 고백한다. 이들 가족에게 누군가의 죽음은 처음 있는 일이라, 나락으로 떨어지는 불행의 감정을 고스란히 떠안겠구나 하는 두려움들이 단 몇 페이지를 읽고는 싹 달아나 버렸다.

죽음으로 가는 사람과 보내는 사람의 가족 이야기일 수도 있었지만, 그보다 하고 싶은 일을 생애 끝가지 즐기면서 마음과 사랑을 나누는 진심이 다해지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끊임없이 삶의 지혜를 몸소 보여준 어머니의 이야기, 참으로 위대한 여성으로서의 삶을 살았던 한 여자의 이야기이자, 누구나 이런 멋진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 라는 또다른 인생의 단면을 보여준 가족의 이야기인 것이다.

어머니와의 북클럽 때문에 그동안 읽지 못해 책장의 한 구석에서 자꾸만 눈에 밟혔던 책을 비로소 만나게 된 작은 기적처럼, 익숙한 것을 새롭게 발견하고 또 다른 만남을 기약하는 일들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과정임을 상기시켜주는 것, 이것은 아무래도 근사한 풍경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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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만드는 기계]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이야기를 만드는 기계
김진송 지음 / 난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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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어떤 책들은 익숙하지 않은 구성으로 가능한 한 최대치의 세계를 상상하게 한다. 가령 작은 챕터의 글들이 모여 전체를 이루면 어떠한 회화를 연상케 한다든지, 드러내지 않은 실타래들을 타고 가다보면 어떤 주의를 말하고 있다든지 여러 다면적인 면모들 말이다. 시간 순으로든 잘 짜여진 플롯의 전개든 숱하게 봐온 차원을 벗어나 긴밀하게 의도된 텍스트 밖의 이미지’가 연상되면 상상의 확장은 무한대로 증폭되는 것이. 안의 이야기가 전하는 세계, 그리고 그 밖의 전능한 구축들이 이중적 혹은 다중적인 차원으로의 유기성으로 생동감을 더해 주는 힘은 낯설고 크다.

 

 

 

살면서 이런 책들을 많이 봐온 것은 아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는 건 흥미로운 발견이다. 우연이든 아니든 책의 작가들이 미학에 관심이 많다거나 미술계쪽 정통자, 예술가, 미술평론가이거나 하는 관심사가 비슷한 사람들이었다는 점이었다아무래도 학문적으로 이미지를 주요하게 다루다보니 자연스레 이야기 구조 외 이미지화 되는 문제, 텍스트 밖의 전체적인 유기성에도 신경을 쓰게 된 결과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다 그러한 의도나 배경이 있다고는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튼 텍스트 자체로서의 새로움 외에 좀 더 다른 영역의 교합을 시도하는 일은 꽤나 근사한 일이라 할만 하다. 사실 이야기만으로는, 보는 이에 따라 익숙함의 변형에 지나지 않는 문제일 수도 있는지라, 비틀어서 다른 방향으로 덧댈 수 있는 모색은 뜻밖의 산물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한국문학을 두고 더 이상 읽지 않겠다고 선언한 사람들도 보면, 더 이상 새롭지 않아서라는 이야기를 하곤 한다. 이유야 분분한 일이고,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도 진짜 문제인지 아닌지 명확하지 않은 일이며, 더 낫고 아니고를 따질 수는 없을지 모를 일이다. 본격문학을 하는 작가들이 들으면 허탈하고 섭섭한 소리라 하겠지만 좀 더 다양해진 소설이나 시를 기대하는 시대의 요구가 많아진 것이 사실이긴 하니까. 예술에 있어 참신함이란 그저 각자의 기준, 기호에 듣고 보기 좋은 것을 선택하면 그만인 거라는 생각이 들 뿐이다.

 

 

 

 

<이야기를 만드는 기계>를 보고 전형적인 소설이나 에세이를 벗어난 형식이란 것에 많은 호기심이 자극되어 좋았다. 작가가 손으로 빚어낸 작품들을 먼저 훑어보고는 영락없이 공예가인줄로만 알아서였을까, 다하지 못한 스토리를 더하기 위해 이 책이 나왔겠구나 하는 선입견으로 책을 넘겼다. 그런데 그가 출판기획자였고, 국문학과 미술사를 공부한 이력이 더 먼저였다라는 소개 글을 읽고 난 후로는 이내 이야기로의 관심이 나무인형에 쏠리게 되었다.

 

과연 한 사람의 인생이란 소설 속의 기승전결 보다 훨씬 더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펼쳐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성품이 맞지 않자 그렇다면 내가 직접 만들어보리라고 시작된 나무 깎이 인생이 전혀 다른 삶으로 인도해준 계기라니. 엉뚱하지만 이런 우연이 <이야기를 만드는 기계>를 읽으면서도 그 면면 기발한 상상력으로 넘쳐나 보였다.

중년의 인자한 미소가 번지는 익숙함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히려 십대의 풋풋함이 느껴지는 발랄한 기개가 돋보이는 것이 이 작품의 큰 특징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가 줄곧 관심을 갖는 것은 자연에 살고 있는 말하지 못하는 존재들, 우리의 세계이면서도 결코 주시하지 못한 이야기, 혹은 미지의 공간 등 주로 일상 밖의 가공의 세계를 그린다. 그것은 그가 나무를 깎고 또 다른 나무와의 이음새를 철로 잇는 이질적인 두 재료의 조우와도 참 많이 닮아 있다 

익숙하지만 다 안다고 할 수 없는 관계, 우리의 삶이지만 소외된 것들, 알 수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는 일, 대게가 그런식이고 익숙함 속에 낯설음이 언제라도 있다.

 

 

 

실존하는 재료와 가공의 이야기를 더해서 소설과, 이미지로의 재현을 꾸며낸 것은 김진송 작품세계에 참신함을 더하는 조합이다. 그가 만든 수많은 작품들은 주로 버려진 나무들에 의해 만들어 졌다. 투박하고 뿌리가 제거되어 잃어버린 생명의 작은 토막에 불과한 것들이 주인공으로 재탄생 된다. 용케도 작가의 눈에 띄어 깎여지고 다듬어져서 온기를 품고 서사를 잉태하는 일련의 과정들은 단 몇몇 사진의 과정으로도 증명된다. 그리고 그렇게 다듬어진 팔과 다리를 잇기 위해서 철이라는 이음새가 있어야 비로소 유연성을 갖는다는 것은 새삼 재미있다. 이질적인 두 서사가 만나 전혀 다른 세상을 그려내고 상상하게 하는 움직임이 그가 말하는 궁극의 핵심인 것처럼 보인다 

 

 

 

이 책의 이야기에는 철저하게 둘 만의 몰입의 순간이 빛나는 고요함이 흐른다. 혼자이든, 둘이든, 그 이상이든 그들만의 세상에서 가장 최소한의 단어와 간결함이 내제되어 있다. 그래서 각각의 이야기들은 마치 작가와 작품 속 자아의 둘 만의 이야기처럼 강렬한 물음과 대답들로 가득 차 있다. 이러한 몰입의 순간이 빛나는 이유는 나무라는 주재료가 주는 묘한 슬픔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 불에 태워지거나 부패될지도 몰라서 영원한 존재가 될 수 없는 숙명, 그것은 인간의 모습과도 너무 닮았기 때문은 아닐지. 이런 슬픔이 아마 내 앞의 존재에만 집중하게 하는 몰입의 시간을 선사하는 게 아닌가 생각해 본다.  

 

 

 

 

더 이상 이야기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살아 있는 세상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없는 나무인형이 가만히 앉아 계속 그렇게 날 바라봐 준다면 나는 영원히 행복할 수 있는 걸까? 부유하듯 떠돈 생각들이 기계 밖을 비집고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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