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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철학의 풍경들
진동선 글.사진 / 문예중앙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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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셔터를 누르고 한쪽 눈의 시야에서 조리개가 닫혀 지는 찰나의 단순함, 이내 찰칵하며 최소한의 기계음만으로 전해지는 건조함의 마른 기운, 그저 이 순간이 전해오는 기쁨만으로 언제 어디로든 카메라를 들고 다니던 때가 있었다. 이윽고 인화되어 나온 작은 네모 안의 세상을 만나면 마치 봉인된 시간이 열리는 일처럼 세상과 사람, 사물과 마음이 온통 흔들려대는 타임슬립을 경험한다. 그 때 그 시간으로 흠뻑 빠지게 되는 일이 좋아서, 내 손이 포착해낸 찰나의 기록이라는 점이 좋아서 언제나 우쭐함의 경계어딘가를 간지럽히는 '사진'의 물성을 사랑했을 것이다. 분명 사진을 찍지 않을 때 내 눈이 한 일보다 사진을 좋아하게 된 이후의 내 눈이 더 나았다. 몇 배는 더 유심히 세상 안의 작은 것들을 들여다 볼 것이 종용되는 기쁨은 아주 큰 것이었다. 사진은 눈이 본 ‘기억’이라는 이름을 영원히 묶어두어 사람들에게 ‘남는 건 사진뿐이다’라는 추억의 증표로 존재의 가장 편리한 증거인 예술이 되었다.

사진이 가지는 여러 속성들 가운데서도 아마 '표현의 도구'로서의 의미가 사람들에게 가장 쉬운 접근 방식일 것이다. 언젠가 숲길을 걷다 죽은 뱀을 찍게 되었을 때, 놀이터에서 노는 꼬마들의 웃는 모습을 보고, 뻥튀기 장수와 무가지를 줍는 노인의 손을 포착해낸 순간들은 아직도 내 방 한쪽 벽면을 차지하는 소중한 일상의 기록이다.
지금의 내 사유를 표현하고 싶다는 행위는 일반적으로 ‘말’이 가장 편한 도구가 되겠지만 그것을 '기록'하고 싶어지면 사유는 ‘글’로 표현될 것이다. 여기에 나만의 창의적인 해석이 가미되면 ‘예술’이라는 이름의 ‘문학’과 ‘음악’과 ‘그림’이 된다. 사진은 가장 나중에 만들어진 기록의 산물이었는데도 지금은 가장 대중적인 예술의 한 장르가 되었다. 이제 현대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예술은 사진임에 틀림없을 것이고 미술의 중심에 사진이 있게 된 것도 예술의 놀라운 변화 가운데 하나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카메라를 들고 일상의 기록들을 사진이라는 일기로 저장할 수 있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 과거가 되어 버리지만 사진으로 남겨진 풍경은 존재가 거기 있었음을 말해주니 각인의 도구로 가장 적나라한 도구이다. 이러한 면에서 사진은 다른 장르보다 구사하기 덜 어렵다는 이유로 예술 안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경계에 서기도 했다. 그러나 이 논란의 중심에 백여년 넘는 세월 동안 서서히 '나도 철학이 있다'라는 방점을 찍고 나니, 현대예술에서의 사진은 이제 엄연한 '사진예술'이라는 명패를 달게 되었다.  


이러저러한 요소로 사진의 매력이 차고 넘치는걸 알지만 개인적으로는 각별했던 애정이 예전만큼의 크기로는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사진이 누구나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좋은 예술놀이라는 건 존중하지만 역설로 누구나가 전문가용 카메라를 들고 허세를 떠는 대상이 된데는 경계를 할 필요가 있게 됐다. 이른바 ‘셀카질’을 보는 것의 지겨움도 생겨나게 되었고, 혹은 사진이 더 이상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는 점에 동요된 이유일 수도 있겠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사진’의 잘못(?)은 아니며 본질과는 동떨어진 문제임을 안다. 누구나 할 수 있다고 해서 예술품으로 취급하지는 않듯이 말이다. 그것을 잘 알지만 사진만이 갖는 예술적 가치를 여전히 의문 없이 매력으로 느끼는가에 대한 물음에는 머뭇거려지는 것이 사실이다. 아울러 사진의 기술적 왜곡 자체가 불러일으키는 문제에 대한 불안함을 떨쳐버리기 힘들다. 책의 저자는 기술적 문제가 사진철학의 핵심 영역이 아니어서 의도적으로 언급을 자제하고 있다. 이 부분을 읽고서야 나만의 사소한 의문과 회의적 시선들이 사진예술이 가지는 가장 근본적인 터부시의 태도와도 상충됨을 알 수 있었다. 사진에 대한 회의적이고 왜곡된 시선은 사실 이 책이 말하려는 ‘철학’에 대한 부재와도 결부된다. 사진은 오랜 세월 회화의 조소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다른 예술 장르가 고심해 내놓은 ‘철학’적 사유를 논하는 장이 된다라면, 사진예술은 철학 없이도 쉽게 찍을 수 있다는 점에서 예술의 경계점 위에 서 있던 셈이다. 또한 사진은 누구나 찍을 수 있는 대중성을 가지고 있으니 다른 예술가처럼 기술적 차별화도 둘 수 없는 노릇이다. 가장 크게는 이 두 가지의 사실로써도 사진이 예술의 문턱에서 오르내리던 이유가 됐다. 물론 지금은 사진이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장르로 자리매김한 것이 사실이고 이 책이 설명하는 여러 철학적 사유를 충분히 읽어낼 수도 있게 되었다. 그러나 또 한 세기가 오고 디지털시대의 도래가 사진의 사실적 가치를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치명타로 그 이면을 장식하게 됐다. 이러한 문제에 저자의 시선은, 사진이 어떤 활용일 뿐 그것이 실재와 다를 여지는 충분히 있다고 말한다. 언제나 사실 그대로를 말하는 것은 아니며 왜곡과 변형이 가능함을 주장해왔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진의 객관적이면서도 주관적인 양면성을 가진다는 본연의 속성을 자꾸만 상기할 필요가 있겠다. 감각과 사실의 부분에서 작가가 전하는 내용을 깊이 이해하고 나서야 사진의 진면모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것 같다. 이런 대로라면 작가의 주장대로 사진은 ‘세상에 대한 거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은 언제나 양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적어도 지구라는 구체가 자전을 하는 만큼의 엎치락 뒷치락 정도는 수용해야 할 테니 말이다. 이를 읽으면서 비로소 조금 오해를 푼 계기가 된 것 같다. 역시 '사진'의 태생은 언제고 '진실'을 외친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진은 어떤 '시선'이며 그 안에 철학이 없다면 그것은 추억일 뿐 예술일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사진철학의 풍경들>에서 전하는 사진의 관점은 말 그대로 ‘철학’적 사유에 대한 출발로부터 관찰된 것들이다. 인간의 감각기관에서 불러일으켜지는 감각적 풍경의 일환으로 ‘보다’의 인식의 풍경에서, 사유를 하고 표현해내며 감상과 마음의 풍경에 이르는 다섯 테마로의 풍경을 담아낸다. 각 주제에 걸맞은 충분한 문제제시와 시대적 배경, 지식의 전달을 돕는 세심함이 돋보인다. 또한 작가가 전하는 또 다른 세계인 ‘생각하는 사진’의 이미지들은 주제를 보다 진지하게 생각하게 하는 깊이를 증폭시켜준다. 사진이 단순히 우리가 지각하는 세상의 단면을 보여주는 사물이라는데서 한발 더 나아가 어떤 식으로든 예술적 가치를 찾는 자발적 사유의 세계로 초대해준다고 말한다. 이 책은 특히 사진예술의 처음을 시대가 갖는 철학적 배경과 잘 버무려 설명해주고 혹시라도 잘못 인식되어 온 시선의 오류를 바로 잡고 매무새를 가다듬는 품위를 지닌다. 어떤 식으로 발전되어왔는가에 대한 과정을 알게 되는 것은 사진의 속성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결국 <사진철학의 풍경들>에서 작가가 주목하는 근본적인 사진철학의 관점은 두 가지 인식의 틀에서 나온다고 본다.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 인간의 내적인 본질을 가다듬는 일, 결국 바라본다는 것은 ‘나’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자아를 인식하는 최초의 출발이 ‘나를 바라 봄’이라는데에 있다. 다른 하나는 나와 마주한 세상과의 외면 세계를 인식하는 눈이다. 시선이 철학적인 성찰과 만나고 우리가 사는 세상에 어떤 물음을 던지고 나서야 방향을 찾게 된다라면 우리는 무조건 그 사진이 말하는 여러 풍경 이면의 세상을 볼 줄도 알아야 한다. 인식의 답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태에서 한낱 사소함으로도 가슴에 풍크툼을 남기게 되는 일, 이 경험을 상상하는 일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 같다. 영원히 알지 못하는 세계로 날아가 버리게 되더라도 그 많은 의문들은 가슴에 남아서 내 인식의 여과를 끊임없이 반복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유들의 부지런함과 세상의 양면성을 이해하는 일이야 말로 사진예술의 ‘철학적’면모를 이해하는 좀 더 풍성한 인식의 틀이 된다. 사진 한 장이 불러오는 영혼의 무게를 버겁게 인지하면서, 세상의 온기와 향기를 상상하는 일이 사진의 철학이다. 이러한 눈으로 본다면 네 꼭짓점이 펼쳐 보이는 세상의 길이가 얼마나 더 넓게 확장될지 그 크기를 가늠하기도 어려울 만큼 멋진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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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콥스키, 그 삶과 음악]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차이콥스키, 그 삶과 음악 우리가 사랑하는 음악가 시리즈 7
제러미 시프먼 지음, 김형수 옮김 / 포노(PHONO)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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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콥스키의 음악을 들으면 눈물마저 꽃이고 새잎이 된다. 상실의 추억을 간직한 어느 가을날의 아침으로 데려가, 그 때 그 눈물을 기억하는 낙엽을 한참동안 바라보게 하는 일. 붉은빛으로 감도는 잎새를 보며 우리는 수많은 과거와 조우하고 위안을 얻는다. 그의 음악을 듣는다는 건 바로 이런 일과 같다. 사소해서 기억해내지 못할 추억과 손끝까지 전해질만큼의 아픈 기억까지 모조리 일으켜 세우는 스위치 같은 음악, 이를 그의 예술세계라고 말할 수 있을까.
참으로 잔인한 일이지만 아픔도 아름답게 재생해내는 예술이란 이름을 우리는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위대한 창조물이라 일컫는다. 차이콥스키의 음악을 들으면 언제나 마음의 현이 모두 일어나 감정의 선들이 춤을 추는 그런 마법 같은 시간을 보낼 수가 있다. 
 

그를 생각하면 따라 붙는 수식어가 있는지 모르겠다. 동성애라던가 자살이라던가 하는 자극적인 단어가 따라 붙는지도 알지 못했다. 공연장은 몇 번 갔어도 그의 생애에 관심을 둔 적은 없으니까. 문호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처럼 차이콥스키가 러시아인이라는 것 이것이 그를 아는 유일한 것이려나. 그래 새삼 그의 전기를 전해주는 책이 반갑고, 음악세계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 책이다. 


<차이콥스키, 그 삶과 음악>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차이콥스키가 전형적인 예술가의 기질을 타고난 사람이구나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불행한 삶을 예견하는 것이다. 바람과도 같은 성미를 지닌 사람, 섬세하게 불어대다가 때로는 본인도 다스릴 수 없을 정도로의 회오리를 몰아치는 격정적인 사람 말이다. 그렇다고 그에게 주어진 현실이 남들 보다 특별히 불행한 상황이거나 한 게 아니라는 현실을 따져보면 그 누구의 탓도 아니다. 현악기의 미세한 현과 같은 마음을 그가 만든 소리의 울림으로 헤아리고 공유하는 것은 그래서 안타깝기만 하다. 그 본연의 모습은 어려서부터 유약하고 남에게 상처를 잘 받는 타입이었던 것 같다. 그의 음악이 전반적으로 우울하다거나 근원의 상처를 건드리는 일은 별로 없으니 유별난 사생활이 있으리라곤 생각지 못했었다. 크게 불행한 삶은 아니었어도 그것을 감당해내는 입장에서는 때때로 자살까지 몰아가는 검은 그림자가 항상 따라붙는 삶이었던 것 같다. 그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쉽게 사랑에 빠지곤 했지만 그것은 거의 다 평범치 못한 결말로 치닫는다. 동성애이거나, 배신을 종용한 건지 진짜로 당한 꼴이 되어버린건지 아리송한 관계라거나, 애정 없이 불행하기만 한 결혼생활, 오랜동안 만나지도 못할 후원인과의 정신적 사랑 등 그는 어느 사람과도 일치 하지 못한 관계를 만들었다. 그의 죽음까지도 석연찮은 의문만 남겼듯이 차이콥스키의 인생은 어느 시절 하나 행복한 기억 없이 애매하고 불행한 쪽으로만 흘러간다. 그의 곡이 우울하거나 하지 않고 그만의 개성이 들어간 아름다운 선율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 놀라울 만큼 온 생애는 아슬아슬한 곡예와 같았다. 이 어두운 그림자를 따라가며 그의 생애를 알게 되고 다시금 음악을 들었을 때 느낀 감정은 가벼운 곡조의 선율에도 전에 없이 다른 면을 느끼게 해준다는 점이 었다.  



이 책은 차이콥스키의 생애를 주로 참고문헌을 편집하고 서간 자료를 토대로한 구성이다. 그러나 좀 더 밀착되고 구체적인 글쓰기를 선보이는 것은 아니어서 아쉽게도 그리 흥미로운 책은 아니다. 다만 몇몇의 편지 자료에서 느껴지는 그의 태도로 미루어 짐작하는 상상력을 발휘하게 되는 지점만이 재미있다. 그는 늘 자신에게만은 솔직하려고 노력한 사람이라는 것, 누구보다 성실한 삶을 살아낸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언제나 어설프고 상처 받는 결과를 낳은 관계를 이어갔지만 음악에서만큼은 이 체험들을 깊고 넓은 소리로 표현해낼 줄 아는 드넓은 상상력을 가진 예술가라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선생들로부터 받은 자극과, 철저하게 공부해온 작곡의 토대들이 어우러져 차이콥스키의 감성은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하게 만들어진 것 같다. 러시아인 특유의 기개가 느껴지고 각 곡마다의 개별적 완성도도 매우 높다. 그래서 그를 말할 때 교향곡, 협주곡, 독주곡, 오페라곡 등 많은 장르에서도 이름이 오르내리는 복합적이고 입체적인 음악가라고 일컫는지도 모르겠다. 
 

예술가가 자신이 상상하는 영감을 표현할 때 그 중 가장 어렵게 만들어지는 창조물은 음악이 아닐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보고 느끼는 그대로를 쓰거나 그리는 행위는 음악보다는 단순한 차원의 것이기 때문이다. 음악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지 않는 소리로 구현해 낸다는 점에서 보다 다각화된 상상력과 기술을 요한다. 그리고 그것을 듣는 청자 입장에서도 추상적이고 자의적인 판단을 들이댈 수밖에 없다. 차이콥스키의 음악을 들으며 새삼 이 수많은 곡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여 탄생한 것이며, 각 마디의 역사는 얼마나 길고 위대한 것인가를 떠올려 본다. 전율이 느껴지는 순간마다 훌륭한 음악은 결국 예술가의 수많은 시간들을 내가 잠시 빌려 마음에 새겨 넣는 일이 아닐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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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다다오의 도시방황]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안도 다다오의 도시방황
안도 다다오 지음, 이기웅 옮김 / 오픈하우스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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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만약 바닥에 닿을 듯 푹 꺼지는 쇼파에 앉아서 이리저리 눈알이나 굴리는 신세처럼 무료한 것이라면, 여행은 일단 무릎을 탁탁 털고 일어나 걷거나 뛰기를 반복해서 가슴이 부풀어 오르고 숨결이 가빠지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여행은 언제나 뜻밖의 상황으로 몰고 가 감정을 추스리지 못할 지경의 당혹감을 만들고 혹은 나도 미처 알지 못한 '나'이게 만드는 낯선 시간 제공자다. 돌발적이고 예기치 못한 우연이 많아지고 내 안의 비밀이 많아지는 것, 이를 여행이라 부르면 좋을 것 같다. 평온하던 일상의 파문을 일으켜선 격렬하거나 여러 가지 함정과도 같은 깊은 감정의 골을 만들어 내는 것, 낯선 땅과 낯선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거대한 아우라의 경계, 우리는 이곳을 끊임없이 넘나들고 싶어진다. 

건축가 안도다다오는 평생을 이렇게 일상을 벗어나서 본인도 알지 못한 마음을 헤아리러 떠나는 수행자 같은 삶을 산다. 틈만 나면 난생 처음 가본 땅에 서게 되고, 의도적으로 헤매며, 여행지의 정취와 철학과 역사를 알러 떠도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 낯선 땅에서 거창하고 위대한 면을 보려하기 보다는 사소하기만 한 풍경과 소외된 사람을 보고, 사라진 역사를 보는 이면의 눈을 뜨고 바라본다. 작은 사물들이나 언어를 줍고 자기만의 공간에 차곡차곡 쌓는 수집가처럼 그의 발걸음은 천천히 또 오랜 여정을 기록하는 진득한 데가 있다. 

문득 재즈바에 들러 음악을 듣게 되면서도 그는 그 이질적인 풍경에 매료되어 엄청난 상상력의 자극을 받는다. 재즈의 즉흥성에 건축 속성과의 닮은 점을 생각해낼 만큼 그가 생각하는 건축에 대한 애정은 유별난데가 있다. 재즈바 공간의 어둡고 침침한 기운이 내뿜는 퇴폐나 불쾌의 정서를 경멸하지 않고 오히려 재즈 문화가 어떻게 태동하였는가를 깊이 이해하는 태도는 연구가의 자세가 어때야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악취를 풍기고 불쾌한데도 그 이면의 아름다움을 찾는 집요함이 있는 것이다. 그는 요즘 도시가 생명력을 잃은 듯 보이는 이유는 사회의 어두운 면을 모조리 드러낸데 있다는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한다. 오로지 밝은 면만을 보여주려는 획일화 된 도시가 아름다움을 말해주기 보다는 오히려 빛을 잃게 만드는 결과를 낳은 아이러니를 아프게 바라본다. 이러한 철학은 러시아편과 맞물려 그의 건축세계를 보다 확장해서 생각하게 해준다.


그가 러시아에서 알게 된 <제3인터내셔널 기념탑>이란 작품은 탄복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거의 모든 건축의 위대한 면만을 갖춘 극치의 작품이다. 이 건축에서 보여주는 가장 핵심적인 것은 예술의 사회적 역할이 되겠다. 이 작품은 지구와 우주의 상충관계를 자전과 공전의 과학적 토대로 잘 구현해 낸 매우 기하적인 매력이 돋보인다. 내부의 구체적 기능 역시 놀라우리만치 정교하고 거대한 역할을 수행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여기에는 건축 하나로 이념과 이데올로기를 대변하는 수많은 암호와 메시지가 담겨 있기도 하다. 말하자면 예술이 예술가의 단순한 표현수단이 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사회 참여의 수단이 되는 혁명의 표상이 되기도 한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안도다다오는 이 건축 프로젝트를 접하게 되면서 건축이 사회를 응시하는 수단이 될 수 있고, 많은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자문해보는 거울일 수 있기를 기대한다는 뜻을 내비친다.
훌륭한 건축물 하나로도 그 도시를 기억해 낼만큼 건축은 이미 순수 예술적 가치 그 너머의 이야기를 하는 상징물이다. 지향하는 바를 구현한 건축은 아무래도 지어올린 사람의 철학과 영혼이 살아 있어서 그것을 바라보거나 안에 머무르는 사람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앎의 시간을 선사해준다. 좋은 건축은 사람이 머무는 동안 질 좋은 산소를 내뿜어 주는 숲과 같은 역할을 해주는지도 모르겠다. 

그 어떠한 전문적인 과정의 배움 없이도 안도다다오는 수많은 길을 만나며 배우고 사람들에게서 건축의 뿌리를 배운다. 진리를 찾는 한걸음 한걸음이 땅을 내딛는 일로 시작 되었으며 완성된 것이다. 이제 보니 그의 건축이 유난히 아름다워 보였던 이유는 이렇게도 오랜 세월동안 쌓아온 여행의 기적으로 가능했음을 알게 된다. 언제나 이면을 보는 날선 혜안이 있었기 때문에 안도다다오가 안내하는 세계 여러 도시들은 더욱 특별해 질 수도 있게 됐다. 그를 따라 낯선 땅을 밟고 알지 못한 냄새를 맡게 되는 일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건축 각각의 재료와, 단순하거나 미로처럼 복잡한 구조 속에서 그 안에 서린 역사를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일은 고스란히 건축가의 철학이 되고 상상력의 원동력이 된다. 그를 따라 마음껏 길을 잃게 되더라도 내 나름의 상상의 나래가 한껏 펼쳐져 깊고 넓은 뿌리를 만들어낼 것 같은 기대만이 든다. 아무리 죽은 땅이라도 안도다다오가 내딛은 토대 위라면 언 땅을 녹이고 새싹처럼 자라는 크고 위대한 우주가 우뚝 솟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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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과 문학에 나타난 그로테스크] 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미술과 문학에 나타난 그로테스크
볼프강 카이저 지음, 이지혜 옮김 / 아모르문디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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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예술은 우리가 갖는 상식과 질서, 형식들을 무너뜨리고 재설계한 또 하나의 세상이라는 면에서 그 본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기성을 허물고 망가뜨리는 것, 온 질서와 구도를 파괴하고 왜곡하며, 뭉개고, 덩어리지게 하는 것. 엄격한 질서와 대조를 이루며 예술의 세계는 미지를 구축하는 전복적 미학을 갖추게 되었다. 인류가 발명해낸 예술의 여러 속성들 가운데서도 ‘그로테스크’적인 면모는 단연 본질에 가장 근접한 개념이 아닐까 싶다. 우리가 그로테스크한 작품을 볼 때 여느 작품과는 다른 강렬한 인상을 품게 되는 것은 예술의 근간에 가장 인접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원석의 모양에 가까운, 아직 아름다워지기 전의 진짜 모습을 우리는 ‘그로테스크함’에서 볼 수 있다.
이런 작품은 대개 좋지 않은 감정인 불쾌함, 조금은 우스꽝스러움, 기괴하고 공포스러운 인상을 품으며 이상하고도 알 수 없는 세계의 문을 열어 준다. 그리고 이런 감정을 ‘그로테스크’라는 단어로 인지해왔다. 현실과 동떨어진 매력을 주지만 이는 사실 우리가 사는 어딘가에는 반드시 존재한다는 확신을 주는것이기도 하다. 언제라도 우리를 위협할 공포가 저변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로테스크함’이란 세상 어느 곳에라도 존재하는 희로애락의 틈에 잠재된 개념인 것이다. 


우리가 흔히 공포를 말할 때 그것을 둘러싼 정황이란 건 편하기 이를 데 없는 믿음의 성에서 출발함을 안다. 익숙한 계단을 오르내리고 오래 봐온 사람들과 편안한 교감을 나누는 자연스러운 상황에서 낯섦은 시작된다. 아무런 의심의 정황이 포착되지 않을 때 공포는 어느 순간 예고 없이 찾아오게 되어있다. 이를테면 반전 영화의 최고봉으로 일컫는 <식스센스>라는 영화만 보더라도 긴장감이 깔려 있긴 하지만, 아주 익숙한 상황에서 철저하게 제외했던 인물에게 역전의 상황이 닥친다. 여기에서 느껴지는 공포란 신뢰의 바탕이 엄연히 존재했기 때문에 배가 되는 것이다. 보는 이로 하여금 충격에 휩싸이게 하기 위해서는 공포의 감정이 아주 가까운데 있어야 하는 불문율이 있다.
여기서의 공포란 분명 생경하고 전혀 모르는 세계를 창조해 그곳에서 발생되는 이질감의 감정을 표현하려는 수단이 아니다. 오히려 아주 익숙하고 보편적 상식에서 비틀어지고 해괴하게 변모된 상태를 우리는 극대화 된 공포의 감정으로 수용한다. 이런 감정이 바로 그로테스크란 단어를 정의할 때 내려지는 가장 중요한 핵심요소이다. 생경해진 세계, 익숙하고 편안한 세상이 갑자기 섬뜩하게 다가오는 것, 이것이 ‘그로테스크’의 본질인 셈이다. 믿고 있던 세계의 신뢰가 무너지고 갑자기 그 세상이 없던 것이 되어 버릴 때 우리는 그 안의 거대한 기둥들이 도미노처럼 쓰러지는 것을 손놓고 바라본다. 이 광경들의 전율을 고스란히 공포의 감정으로 느끼고 뭔가를 깨닫는다. 

 

 

이 책에서는 공포의 궁극이 ‘죽음’을 느끼는 감정 때문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단지 죽음을 두려워해서 갖는 공포심이 아니라 내가 살아온 믿음의 세상에 등돌려진 불편한 조우, 이면을 목도하게 되는 일이 두려워서라고 말한다. 마치 악마에게 저당 잡힌 삶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영원히 내주어야 될지도 모른다는 인질의 감정과 비슷한 것이다. 공포의 대상은 분명 정체가 모호하고 미지의 무엇이며, 허상의 무엇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확연하지 않은 무엇이기 때문에 그로테스크함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오랫동안 잠재되어 있거나, 대체로 불안한 감정들의 복합체로 존재한다. 질서의 붕괴는 가장 극도의 불안감을 조성하므로 그로테스크를 표현한다는 건 비극을 향해 달려가는 가련한 불사새의 질주와 같다. 그리고 이 감정은 어디에라도 도사리는 불행한 역사의 이면이 키운 씨앗에서 키워진 것이다.
그럼 여기서 그로테스크가 왜 태동하게 되었을까란 의문이 다시 움튼다. 16세기부터 낭만주의시대와 20세기에 이르기까지의 예술 장르에 도드라진 그로테스크함이 어떤 이유로 등장했고 어떠한 의미로 이해되어 흘러갔는지 이 책이 말해준다. 물론 각 작품마다의 역사적 배경을 설명해주기 보다는 작품 자체만의 설명에 더 심혈을 기울여서 각각의 특질을 전체적으로 조망하기엔 무리가 있다. 이를 차치 해두고서라도, 그동안 막연하게 느껴오던 미술작품과 연극과 소설 등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그로테스크한 면모의 뿌리를 살펴보는 일은 애매하게 알아오던 개념의 확신을 돕는다. 그로테스크한 작품을 볼 때 우리는 그 안에서 말하는 역사적 진면모를 한 꺼풀씩 벗겨내 진짜 눈에 보이는 불편을 악마적으로 해석해 낼 필요가 있다.  
다시말하면 그로테스크의 등장은 인간의 불행이 그것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아주 직설적인 사고로 탄생한 것이다. 미지의 무엇이 과연 어떤 실체로 등장하는지, 사람들은 이에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상상하는 재미도 있다.

비로소 그로테스크한 작품에 그 시대가 표방하는 질서와 세계관을 강력히 저항한 몸짓이 존재함을 인상 깊게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이 예술적 가치가 얼마만큼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해왔는지, 사람의 심기를 건드리면서까지 가장 멀고 위험한 벼랑 끝에 서서 말하고 있는 이유들도 알게 되었다. 비록 ‘그로테스크’한 불편함에 다시는 그 작품이 보고 싶지 않다 해도, 우리는 이 비극의 광경들을 몇 번이고 곱씹어 봐야 하는 작은 의무가 지어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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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그림 보면 옛 생각 난다 - 하루 한 장만 보아도, 하루 한 장만 읽어도, 온종일 행복한 그림 이야기
손철주 지음 / 현암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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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폭에 갇힌 마을은 온통 미지의 세계인 것만 같다. 이곳으로 통하는 길은 청량한 기운이 돌고 사계의 아름다움이 잠든 고요의 숲이다. 길고 긴 역사의 숲길을 지나 이윽고 다다른 마을에서 장광하고 유려한 그림들이 펼쳐 있다. 그곳을 우리는 우주라, 무한공간이라 말하고 싶어진다. 자연의 위대한 섭리를 보고, 자연스럽고 때론 엄격히 흘러가는 질서를 엿본다. 감당하기 벅찬 지극히 고요한 사색의 시간이 펼쳐지는, 그야말로 혼자가 되는 공간에 와 있는 것이다. 
 

 

<옛 그림 보면 옛 생각 난다>는 자연으로 우주로 가는 숲길 같은 책이다. 자연의 조짐들이 사계의 구분으로 미묘하게 나뉘고 옛 그림 안으로 정겨운 단어를 문 나비와 벌이 마음껏 날아다닌다. 계절이 다음으로 이동하려는 자연의 틈을 보게 되는 것은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모든 변화 앞에 경건하게 혹은 자연의 일부인 냥 멈춰서서 ‘옛 사람’을 만나게 해주니 이 얼마나 반가운 조우인가. 그림을 앞에 두고 감히 다른 상상일랑 할 수 없는 시간의 무한성이 고마워 내가 자연의 일부이고 그림 안의 모든 사람인 듯이 행동하게 된다. 그들과 함께 노닐고 싶어지는 순간, 어느새 옛 그림이 너무 친숙하다. 시간의 틈새에서 오롯이 나만의 시간을 나누는 기쁨이란 참으로 크고 깊다.  

 

이 책은 각 계절마다 17편의 작품을 선보이며 작가가 온종일 생각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노닐었을 여정의 기록을 담아낸다. 옛 그림의 정취와도 알맞게 글쓰기 역시 한 폭의 그림처럼 단아하고 맑은 얼굴로 시 짓는 듯이 펼쳐진다. 작가는 마치 조선의 어느 선비였을 법한 단정한 인상으로 시간안내자의 노릇을 톡톡히 해낸다. 처음 본 그림은 생경한 눈으로 보게 하고, 많이 봐온 그림에선 작가 손철주의 눈이 더욱 빛나서 도무지 같은 그림을 봐왔다고 할 수도 없다. 아무도 응시하지 않은 다름을 엿보는 안목, 오래 머물고 그 이면을 바라볼 수 있어야 알만한 빼어난 시선으로 시종일관 그림 안에서 유영한다. 그리고 이 그림들의 주인이 독자의 것이 될 수 있게 기꺼이 구름이 되고 한 마리 새가 되어 조연이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옛 그림 중에서도 각 계절마다 어울릴 그림을 선별하고 엄선한 까닭에선지 손철주만의 유별난 애착이 묻어나 보인다. 그의 글은 옛 시인처럼 삼라만상의 응축된 지혜를 엿볼 수 있는 안목으로 넘쳐나고 요즘 말로도 응축해 내보일 줄 아는 ‘시 언어’의 아름다움이 알알이 박혀있다. 
그의 그림 읽기에서 특히 우리 옛말에 대한 아름다움을 새롭게 알게 되는 점도 새롭다. 알고는 있었지만 거의 쓰이지 않던 우리말을 만날 때 고개가 크게 끄덕여 지는 반가움이 있고, 전혀 알지 못했던 순우리말에는 이렇게도 아름다웠던가 싶어지는 앎의 깨달음이 깊이 배어난다. 그림의 정겨움과 더불어 그의 언어들은 감정의 폭을 더욱 넓혀주는 샘과 같다. 역시 우리 그림에는 우리말의 어울림이 가장 조화롭고 아름답게 빛날 재료인 셈이다.  

 


또한 그의 글에서 읽을 수 있는 예리한 비판 역시 눈여겨 볼만하다. 제 고조부의 이름조차 알지 못하면서 정치계파의 이름은 술술 꿰는 괘꽝스런 사람은 되지 말아야지 싶어지고, 남 탓은 그만두고 세태에 맞게 처신하고 싶어지는 마음을 다잡는 계기를 준다. 옛 사람들의 정서와 태도로서 오늘의 우리를 돌아보게 하는 것, 이 책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이다. 
  
 

 

새삼 옛 것의 아름다움이 얼마나 메마른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지를 생각해본다. 우리는 옛 사람들이라는 자양분으로 자란 나무이므로. 하여 숲을 이루는 오랜 시간들을 한 권의 책으로서 돌아보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옛 그림과의 교신을 자청해야지 싶어지는, 참 정겨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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