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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 속의 영화 - 영화 이론 선집 현대의 지성 136
이윤영 엮음.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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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대해 사유하는 명사들의 진지한 관점들을 읽고 나니 새삼 영화의 스토리나 미장센, 연기 이외의 시각에는 한번도 물음을 던져본 일이 없다는 생각이 스친다. 그도 그럴것이 영화가 갖는 위상이란게 누구나가 태동의 역사부터 대충은 꿰고 있을 미술이나 음악 따위의 영역과는 사뭇 거리감이 있기 때문이다. 유구한 역사랄 것도 없는, 예술이라는 무대의 주연들이 잠시 주춤하는 새 나타난 광대역의 신인, 영화는 이쯤이랄까. 미적 창조가 돋보이는 명백한 예술의 고고한 성질 그것과는 때때로 대척점에 서서 극렬한 논란꺼리를 안겨주는 영화라는 장르는 어쩐지 달라도 뭔가 달라보이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이제 영화는 예술의 영역에서 자연스럽게 오르내리기도 하는 명실상부한 예술의 집에 자리를 잡았다. 어느새 영화의 역사가 어떤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 놓을만한 충격과 큰 감동을 선사해 주면서 여느 예술보다도 그 영역을 넓고 크게 확장하며, 열렬한 호응 속에 다 큰 성인이 되어 버렸다. 좋은 작품을 생산해 내는 영화 판이 존재하게 되었고, 그것은 정말이지 좋은 본보기로 자리잡아 갔다. 그러나 일면 예술의 본질에서 찾을 수 없는 다른 면을 보게 된다는 것이 영화를 좀 수상한 장르로 여기게 하는 문제일지 모르겠다. 그 예로 영화는 작품 이외에 제반되는 산업과 자본의 토대에서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는 태생을 지니고 태어났다. 독립영화가 있긴 하지만 독립영화만을 예술영화라고 볼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 분류란게 딱히 쉬운 일도 아니다. 만약 그 지점이 진정한 창조의 가치를 스스로 발하는지에 대한 점이라면 이 역시 아슬아슬 하기만 하다. 역자의 말처럼 영화는 예술의 제7이라는 숫자에서 머물거나 내쳐지거나 하는 애매한 위치에 서있다. 그럼 영화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영화가 예술이라는 명징한 영역 안에 있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다면 이는 어쩌면 현대사회에 태동한 새로운 잣대로써 가늠해 보는게 맞지 않을까. 그래서 예술이란 단어의 기준은 영화 하나로도 본질을 수정해야 할 만큼 조금 더 확장된 논란을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전하고자 하는 바는 바로 이렇게 애매한 관점으로부터 시작된 영화라는 장르에 예술적 실마리를 제공하고 그 시작점을 보여주고자 함이다. 영화를 만들어낸 사람보다 심리학자나 미술이론가, 기호학자, 작가 등 다양한 사유자들의 개성있는 논의들로 엮어 낸걸 보면 더욱 그 의도가 드러난다. 어떤 논문을 읽다보면 영화에 대한 사유라기 보다 사진예술이나 미술 등의 역사 공부를 하는 것 같아서 이것들이 대관절 영화와 무슨 상관이던가 싶을 때가 있다. 그러나 결국 영화라는 게 사진과 미술 음악 장르의 복합물이라는 걸 감안하면 각각의 뿌리를 더듬는 일도 필요하단 생각이 든다. 저마다 영화에 대해 가진 사유들은 시대를 이해하고, 심미안적인 예측과 함께 예술의 여러 속성과 맞물려 잘 녹아 있다. 요사스러운 시기도 없고 경외시하는 일도 없이 다분히 새로운 영역에 대한 세심한 진단이 이어진다.

특히 나는 앙드레 바쟁이 말한 자연이 예술가를 모방한다는 흥미로운 시각이 새로웠다. 사진은 창조력에서 예술가를 능가한다는 말은 발터벤야민의 진짜를 능가하는 가짜 그 진면모와도 상통하는 면이 있어 보인다. 영화가 아직 진정한 의미와 가능성을 포착해내지 못하지만 초자연적인 모든 것을 표현해내는 고유한 능력 그 특별함 속에 곧 시작점을 찍을거란 가능성을 열어 두는 관점이다. 만약 이들이 아바타나 매트릭스 같은 영화를 본다면 또 어떤 말을 꺼낼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영화는 스크린 안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함축적인 언어와 형태로 카메라의 앵글에 담겨 전달된다. 하나의 숏에 담을 수 있는 총체적인 가치나 혹은 소소한 단서들일지라도 빛과 말과 형태로 치환해 말을 걸어오는 일은 너무나 멋진 작업같아 보인다. 대관절 예술이면 어떻고 아니면 또 어떠랴.
 

어쨌거나 영화는 태동부터가 독자적이지 못하고 여러 재료의 결합으로 가능해진 것이었으므로 다양한 견해와 이해의 충돌은 끊임없이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이건 너무 당연하고 지극히 자연스럽기만 하다. 어떤 이는 영화가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이 아니라고 하고 어떤 이는 언어 그 자체라고도 하는 이 다양한 견해들을 모두 체득해 '안다'고 말할 수는 더더욱 없을 것이다. 다만 내가 생각하는 예술 속 영화란 '상상력에 움직이는 이미지를 창조하는 행위' 인 것 같다. 
영화가 영화적 발화를 하는 시점에 대해 그 상상력의 크기와 부피의 매력을 가늠해보면 예술에서 상상력이 지니는 절대적 가치와 그 맥을 같이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상상은 우리 내면에서 점진적으로 자라기도 하고 어느 순간 찾아오기도 하는데 영화적 상상력이란 이 순수한 상상에 어떤 장치들을 부여하는 행위이다. 이러한 장치로의 인위적 조작이 영화의 출발이었듯이 예술의 매듭 역시 상상력에서 끝날 것이다. 창조란 현실을 모방한 세계가 아니지만 현실의 일면을 간직하고 있으니까.  

여러 장에 걸쳐 이들이 영화에 대해 말하려는 것은 원리와 양식, 심리학, 기호학, 이데올로기 등 다양한 곳으로 부터의 접근이고 이 사람들이 다 영화를 예술에 넣을지 말지를 고민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에 대해 이토록 깊은 사유를 하는 동안 우리는 팝콘이나 먹으면서 한번도 고민해보지 않은 것들, 그러니까 영화의 이면 혹은 역사의 원리와 근본을 기웃거리기만 해도 된다. 알려 애를 쓴들 개념의 배치도 정도도 그려내지 못할 제로치 가까운 우매함만이 드러날 뿐인게 아쉽긴 하지만 말이다. 
<사유 속의 영화>는 영화가 일상의 줄기를 한 지점 한 지점마다 돌기를 새겨가며 자라나는 장르이고, 저마다 전에 없던 영화에 대한 사유를 조금이라도 하게 된다면 좋을, 그런 영화 사유 장려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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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 지은 집 한국 건축]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지혜로 지은 집, 한국 건축 - 우리 건축의 구조와 과학을 읽다
김도경 지음 / 현암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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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건축물 구조도를 천천히 보다가 문득 ‘나는 바보인가?’를 자문해 보았다. 분명 익숙하게 봐온 건축인데도 하나하나 그 이름을 따라 읽어 가다가 고작 ‘지붕, 기둥, 계단, 대들보’ 모르면 우스워질 단어들에 반가워하는 내 기색 때문이었다. ‘요즘 것들은 옛것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어르신들의 푸념이 온전히 내 탓이오라고 무릎이라도 꿇어 자책하고, 이 책이라도 열심히 익혀서 내 텅 빈 뇌에 공양 바치자는 심경으로 읽어내려 갔다. 
 

물론 여기에 나오는 거의 대부분의 용어와 지식들은 몰라도 될 만한 전문적인 것들이고, 돌아서면 쉽게 잊혀졌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고 나서 ‘우리 건축의 구조와 과학을 읽다’라는 문구의 제안처럼 정말 그렇게 되어있음을 인식하는 것은 큰 기쁨으로 다가온다. 우리는 우리네 건축이 어떤 구조로 만들어진 것이며 이 안에 세심히 박혀있는 과학적 논리가 어떻게 자연과 인간이 만들어낸 지혜인지를 알게 되는 일을 고스란히 이 책으로 배운다.

 

<지혜로 지은 집, 한국건축>은 크게 일곱장으로 나누어 평면에서부터 초석을 다져 기둥과 가구를 세우고 공포로써 유형을 결정하며 지붕을 올려 마감을 하는 건축의 모든 역사와 과정을 담고 있다. 놀랍게도 모든 페이지에 걸쳐 사진과 그림들이 아주 상세하게 설명돼 있어서 상상만으로 부족한 이해의 구체를 도와준다. 이 작업을 위해 작가가 얼마나 많은 발품을 팔고 역사를 공부했으며 나름의 시각으로 풀어냈을까의 과정을 생각해보면 숙연해질 정도로 반듯한 기분이 든다.
집은 곧 우주이고 자연이라고 말하는 그 뿌리를 더듬어 올라가는 여정이 이토록 치밀한 계산과 자연의 융화 과정이었다니, 정말이지 심지가 끝을 모르고 타내려가는 신비로움이 있다.
 

어느 고장의 어느 유적지를 들러도 옛 건축은 비슷한 모습으로 고즈넉한 기분을 선사하며 서있다.  단아한 지붕의 선과 그 밑의 화려한 공포의 멋, 이어진 하늘의 그림같은 풍경 정도를 탄복하며 바라보는 수순의 감상 정도가 고작일테다. 그저 자연 풍광의 그림 같은 한 채, 세세히 들여다본들 선조들이 살아내면서 세세하게 지어올린 지혜까지 엿보게 된다는 것은 우매해서가 아니라 알기 힘든 틈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때문에 이 책을 읽으면서 무엇보다 직접 살아내며 알게 될만한 소소한 지혜나 과학적 근거들을 목격하는 일은 소중하고 새롭다. 과학적 토대가 부실한 시대였다고 생각할 근거가 전혀 없을 정도로 정교해서, 오히려 지금의 과학이 못 따라가는 위대함이 어디에든 숨어있다는게 한없이 놀랍다. 과학적인 토대로써 균일하게 지어졌고 자연과 사상의 멋이 논리적으로 융합된 구조물로 거의 완벽하기만 하다. 우리 건축의 뼈는 선조들의 정신과 자연에 어울어지는 삶의 융화를 단단히 흙에 심어 올린 하나의 우주인 것이다.  

저자는 마치 그 시대로 가서 목수를 만나 인터뷰를 하고 스케치를 하고 온 시간여행자인 것만 같다. 그 시대의 혼마저 느껴질 정도로 역사의 맥을 짚어내고 그 틈을 살필 줄 아는 건축의 재단사인지도 모르겠다. 여러 환경과 지혜가 결합한 구도라는 이해는 당시의 법과 사상 종교 등 모든 면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건축물 하나로서 드러내는 한국미의 원형을 다 보여준다. 한국인이 구축해낸 정신과 환경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건축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이제 보니 건축 하나로 당시의 우주만큼 광활한 가치의 성취를 돌아볼 수 있는 것이었는지는 이 책을 보고 알게 되었다.

건축에 투영된 삶의 방식과 시대정신, 예술에 대한 지적 통찰력까지 추론하는 일, 집은 곧 우주이고 자연이라는 명제. 기둥과 기둥 사이의 비움이 곧 공간이 되고 이어 채움의 미학으로 충만해지는 조화로움은 얼마나 위대한가. 섬세한 우리 선조들의 실용이 보태지면 일상이 사물을 포용하는 가치가 어떻게 구현되는지, 건축이 왜 시대를 상징하는 명확한 증거가 되는지 모든 궁금을 풀게 한다. 모든 재료의 크기와 쓰임, 모양새와 틈에는 자연이 주는 조화가 담겨 있고 정신이 깃들여 있으며 궁극의 가치가 스며있다. 이것이 바로 한국의 건축이며 우리의 혼이고 뼈다.  

<지혜로 지은 집, 한국 건축>을 통해 한국 건축이 세상을 담은 우주고, 우주의 가장 위대한 '섬'임을 본다. 자연 위에 덩그러니 놓여만 있어도 왜 그토록 아름다워 보였는지를, 이 책으로 이제 좀 더 알게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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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시사인 만화]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본격 시사인 만화 - 신세기 시사 전설 굽시니스트의 본격 시사인 만화 1
굽시니스트 지음 / 시사IN북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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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나하는 궁금 정도는 매일 보는 뉴스와 신문에서 거의 해갈된다. 접근성을 생각해 볼 때 아마 신문보다는 텔레비전 뉴스를 보는 편이 쉽고 이해도 빠를 것 같다. 그러나 매체의 특성상 시간이 제약적이라는 것 때문에 종합적인 것을 다 다룰 수 없고 자세한 정보가 전달되기가 힘들다는 단점이 있을 수 있다. 여러 채널이 있다해도 그 순서나 논조까지도 거의 비슷하니 이를 보는 시청자가 생각할 여지를 갖기에는 충분치 않아 보인다. 또한 일방적인 전달 수단이란 걸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앵커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어야하는 입장에서는 여차하면 세뇌라도 당할 기세로 여과 과정 없이 내 생각인냥 그대로 흡수되어 소화까지 될 때가 많은 것이다. 물론 뉴스가 객관적인 사실을 전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위험한 발언을 할 확률도 적긴 하다. 다만 다른 어떤 정보력에 비해 훨씬 직접적이라는 면에서 오독될 가능성이 있고, 이는 바람직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견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차분히 나만의 생각을 정립하고자 하면, 지면 매체를 찾을 수밖에 없다. 글쓴이의 가치관과 논조를 충분히 고려하고서라도 자신의 기준에 빗대어 생각해 볼 수 있는 '나만의 생각'이 만들어지는 시간이다.   

생각해보면 나도 정도의 기준과 가치관이 생기기 전까지는 아무런 의심과 비판 없이 뉴스에 나온 말은 그대로 믿었던 때가 있었다. ‘법’이 전하는 정의와 도덕의 테두리 안에 무조건의 진실일테니 의심의 여지는 결코 없었다. 그러나 점점 앎이 생겨나고 비판의식이 생기기 시작하고부터는 세상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후지게 돌아가고 있구나 하는 것을 아프게 깨달았다. 집에서 보는 유명 일간지의 사설은 수능 하나 잘 보겠다고 거의 다 섭렵했을 정도인데, 지금 와 생각해보면 다 부질없는 짓이었고 오히려 꽉 막힌 사람이 되는 지름길이었다 자조한다. 편향된 시각만을 더 각인했을 것이다. 지면 역시 위험한 사람이 쓰면 폭탄을 머금은 것과 같은 것이다. 대중의 편에 약자의 편에, 사실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인 전달하는 정보는 의외로 많지가 않다. 그것들을 솎아내고 여과해내는 것은 역시 내 눈에 달려 있다. 결국은 각자 안목의 문제인 것이다.   
문득 홍세화 선생님의 <생각의 좌표>에 나오는 질문이 생각난다. ‘지금 내가 생각하는 것은 나의 생각인가?’하는 물음 말이다. 지금 내가 보고 듣고 있는 바를 남이 아닌 내 시선으로 보고, 귀를 활짝 열어 제대로 진단하며 따지고 있는가.
우리는 얼마만큼 내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걸까. 남이 말하는 것에 날을 세워 바라볼 줄 알며 세상이 돌아가는 사안에 끊임없이 질문할 줄 아는 제동을 항상 걸어 두고 있을까? 내 생각의 주체는 '나'로 부터 시작될 때 관점도 생기고 주관이 생겨나는 일이다.
이러한 태도와 맞물려 언론의 주체 역시 '진실의 눈'에 기반할 터다. 사실에 대한 객관적인 전달을 하면서도 글쓴이의 주관이 진실의 무게에 방점을 찍는다면, 이를 읽는 독자 역시 더이상의 유익한 대화가 없을 정도로 훌륭한 소통이 될 것이다. 
 

독자에게 열렬한 호응을 얻어내며 굽본좌라는 별칭까지 얻어낸 굽시니스트의 만화는 그래서 좀 특별하다. 2009년부터 시사IN에 연재된 만화를 <본격 시사인 만화>의 이름으로 엮어낸 작품 모음집인데 온전히 '그만의' 생각을 발견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두페이지의 만화 뒷면에는 ‘못다한 이야기’까지 실어서 말 그대로 컷 안에 다 담지 못한 정황과 에피소드들을 읽게 하는 구성이 흥미롭다. 만화를 읽어내면서 나는 어느 매체를 통해서도 느껴보지 못한 제동의 게으름을 경험했다. 날을 세우고 내 생각화하여 읽으려다가도 이내 굽시니스트의 글과 그림에 감복하고 전적으로 신뢰하려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런 나이브함이 오히려 반듯한 기분을 선사한다.
굽시니스트는 의외로 폐부를 찌를 만한 강심장은 아니구나 하는 인상이 들기도 한다. 분명 조롱할 만한 사람은 마음껏 놀리고, 호되게 역정도 내는 듯 보이지만 그렇게 직접적인 날을 세우지는 않는다. 이는 아마 최악의 상황을 제작한 최악의 사람에게라도 똑같이 응징하지는 않는 최소한의 인간적 예의처럼 느껴진다. 그의 시선은 심하게 냉소적인 편이 아니어서 가슴이 뻥 뚫릴만한 촌철살인 기술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지만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안을 주는 작가이다. 조근조근 따져내며, 풍자하는 쪽을 택해서인지 자주 피식 웃게 하거나 연신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반응을 유도한다.
또한 이 책은 작가가 주시하고 있는 디테일한 면면의 그림자를 따라가면 좀 더 다른 시각에 도달하게 하는 면이 색다르다. 미처 몰랐던 사안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던지게 한다던지, 오해한 부분을 수정하게 하고, 잊혀진 역사를 지금의 현실과 맞물려 생각하게 하는 여지를 세련미있게 던진다. 특히 국민의 가슴을 너무 아프게했던 소식을 전할 때는 자주 정지하게 만드는 진심의 말들로 여운이 오래 남는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그냥 현재의 시점에서 읽어내기 보다 과거와 판타지를 오가고, 젊은 작가답게 유행과 세태를 센스있게 잘 포착해내는 안목은 굽시니트스를 따라 갈 자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재치와 개성의 뭉치같다. 그래서인지 한심한 뉴스를 볼 때마다 굽시니스트의 만화가 실린 지면의 온도가 항상 생각이 난다.
사람들은 지친 소리로 ‘정치는 쇼다’라는 말을 자주 하는데 굽시니트스의 무대에 올라온 배우의 연기를 보는 일은 정말이지 개성으로 넘쳐나는 환상의 쇼같다. 다만, 굽시니스트와 우리의 바람처럼 화려한 무대 위 배우들이 좀 더 근사하고 상식적인 사람으로 거듭나주길 소박하게 기대해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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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명의 화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101명의 화가 - 2page로 보는 畵家 이야기 디자인 그림책 3
하야사카 유코 지음, 염혜은 옮김 / 디자인하우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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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 보이는 사물과 풍경들이 시시각각 변하여 화가들의 작품과 일치되거나 또 다른 변형체가 되어 아른거린다. 나는 지금 온갖 오브제들이 부유하듯 떠도는 소란의 방에 있다. 프리드리히의 방랑자처럼 안개가 드리워진 꿈의 세상을 내려다보는 꿈을 꾸고, 드가의 발레 소녀들이 금방이라도 나비처럼 날아오를듯한 마루를 보다가, 무심히 빵과 과자가 놓여진 식탁을 바라보며 싱그러운 질감을 상상해본다. 몬드리안의 선과 원색이 예쁘게 장식된 화장실 타일, 뒤샹 사인이 새겨진 샘에서는 연신 물이 쏟아져 나오고, 바닥 위 아메바 같은 피카소의 형상들이 노닌다. 정신을 차리려고 본 거울 속의 나는 어떤가. 저게 나인지 남인지도 알 수 없는 몇 겹의 내가 서있고, 창밖 풍경에는 마그리트의 신사들이 우산을 들고 비처럼 내린다. 꾹 눈을 감았다 뜨니 비로소 고요한 수련이 핀 모네의 정원이 내다보여서 이윽고 마음에 평화가 찾아 오는듯 하다. 모네가 살아생전 정성들여 가꾸었다던 수련이 핀 정원이, 이 봄을 말해주고 이러고 나서야 참 맑은 햇살과 아스라한 향기를 머금은 풍경이 고요하게 펼쳐진다.
때때로 이는 기시감은 작품을 더욱 특별하게 하는 반가운 조우을 돕는다. 이내 사라져 버리는 아스라한 기분까지 선사하는 것이 썩 근사한 마무리 같다. 여기 101명이나 되는 화가들의 생애를 조금씩 둘러보며 소소한 감성들이 살아나고, 그동안 미처 몰랐던 삶의 이해를 돕는 여행이 시작된다. 수많은 화가들의 아틀리에를 방문한 손님처럼 마음껏 향유하고 실컷 수다를 떨고나니, 들뜬 마음만이 남는다. 

 

<101명의 화가>는 단 두페이지 뿐인 8컷 만화 안에 화가의 전 생애를 단축시켜 놓은 독특한 전기책이다. 물론 이 점은 몇몇 장단점을 한꺼번에 아우른다. 개개인의 가정환경을 짧게 소개하고 어떻게 성장했으며, 사랑을 하고, 꿈을 쫓아, 죽게 되는지 단순한 대강의 삶을 다룬다. 작가가 집요하게 찾아낸 점이 있다거나, 독특한 시선의 한 지점의 생애만을 다루었다면 이 책은 좀 더 깊은 맛을 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좀 더 많은 화가들의 생애를 다루는 쪽을 선택한 모양이고 때문에 작가의 포괄적인 이해를 돕는 정도로는 유용하다. 만화의 형식이라 이해가 쉽고 전개도 빨라서 그 인물에게 대표되는 대명사나 에피소드들이 왜 그 사람의 명성에 오르내리는지 한눈에 파악된다. 밑단에 곁들여지는 미술사적인 평가나 화가의 성격을 함축시켜 놓은 점 역시 지식함양으로서의 유익함을 쏠쏠하게 전해주려는 점이다. 무엇보다 전 세계를 대표하는 101명이라는 화가들의 알지 못한 삶의 평범한 면면을 알려주는 점과, 철학이랄 만한 근간 같은 것을 어렴풋이 전달해준다는 점 또한 매우 큰 소득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두페이지라는 아주 적은 내용만으로 화가의 일생을 다 말한다는 것은 무리이겠다. 그의 전 생애와 작품을 이해하는데 극히 일부의 내용으로 오도될 가능성도 있겠거니와 이 정보만으로 그를 '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이 책은 작가의 주관적 시선 따위가 별로 녹아있지도 않고, 작품세계를 설명해주는 책도 아니라서 깊은 지식이나 미술사의 흐름을 이해하는데 적합한 책은 아닌 것이다. 그리고 그 포인트적인 생애들이 제대로 된 뼈대를 의식하고 다룬건지에 대한 점도 의문이다. 그냥 가볍게 가십을 궁금해하는 파파라치의 시선 정도로 이해하면 좋을 것 같다. 
 

이 책의 목적은 미술사적인 화가의 업적이나, 기술적인 연구의 디테일에 있지 않다. 오히려 화가 개인의 위대한 면모보다는 그 뒷이야기를 전하려고 노력한 책 같아 보인다. 아닌게 아니라 천재라거나, 거장의 업적을 위시하는 장면은 한번도 없었던 것 같다. 그보다는 이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구나’ 하는 그림자만을 뒤쫓는 짖궂은 인상을 받게 된다. 과장하지 않고, 그렇다고 비하하거나 하는 일 없이 객관적인 시각으로 그들의 생애를 더듬는다. 이렇다보니 워낙 베일에 싸여 알지 못했거나, 그림 자체로서의 아름다움에 몇 겹으로 미화된 화가의 성격이나 자취들에 적잖이 기대심이 반감될 가능성이 있다. 뭐 그렇더라도 결국은 화가들 역시 우리와 같은 찌질한 삶을 살아낸 사람들이라는 점은 명확해진다. 이 책을 모두 읽고나면 어느 특정한 화가 몇몇은 좀 더 알아내야겠다는 호기심도 인다. 얼마나 찌질한 삶을 살았는지 더 알고 싶고, 그림이 말하는 스토리의 이면을 더 듣고 싶어진다. 그것은 이미 그들이 온 몸을 던져 한 폭에 담아내고자 한 어떤 생의 진실이며, 꿈이며, 그림이 곧 ‘자신’의 증거이기 때문은 아닐까. 언제고 이들의 그림을 보게 될 때마다 여덟컷의 짧은 생이 생각나고, 또 아릿한 기분까지 함께할 거란 예감이 든다.  

 

이러한 장단점을 한 데 아우르는 가운데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 책이 극히 일부만의 내용을 가지고 전혀 알지 못했던 화가들의 자취를 상상하거나 이해해본다는 취지로는 꽤나 흥미로운 책이라는 점이다. 어차피 수많은 예술가의 전 생애를 다 알 필요도 없는 일이고, 알 수도 없는 일이며 오늘날의 명성과 비교해보는 일이 꽤나 색다르기 때문이다. 단편적이지만 우리가 그를 대표할 만한 에피소드 정도 하나쯤 알게 되는 것은 이 책을 읽는데 충분한 이유와 가치를 주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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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궁전>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한밤의 궁전 안개 3부작 3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김수진 옮김 / 살림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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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제대로 읽는 방법은 아마도 ‘보이지 않는 것’을 포착해내는 안목일터다. 여기서 보이지 않음이란 베일 속의 인물이거나 거대한 조직이거나 하는 막강한 힘을 발견해 내는 차원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안개에 드리운 한밤의 기운처럼 작가가 이야기 저변에 깔아놓은 음산한 키를 찾는 일에 가깝다. 말하자면 그것은 시대의 역사적 불운일 수도, 개인에 닥친 불가항력의 운명일수도 있는 어두운 이면의 암호를 푸는 일이다. 보다 근원의 자극을 감지하고 자각하는 힘, 그것은 참으로 풀기 어려운 실타래처럼 얽히고 설켜있다. 이 소설은 판타지 요소를 전면에 부각시키고 있지만 이러한 복잡한 설계에 의해 동시대의 삶의 맥락 차원에서 살펴보지 않으면 절대적인 공감을 이끌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던 여지의 과정들을 이해시키는 일은 전적으로 작가의 몫이라지만 이를 잘 포착해내는 일 또한 묘미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오랜 세월 참고 인내한 악마의 불쾌하고 공포스러운 입김의 여운이 차갑게 각인되는 소설이다.
그러나 가끔 작가의 명성에 걸맞는 ‘기대치’라는 장애물에 전면적 제동이 걸리게 되는 건 참으로 아쉽다. 어마어마한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기 전의 워밍업이 너무 길었던 탓일까. 정작 사연이 밝혀졌을 때의 충격은 그리 신선하지도 못하고 진부함마저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큰 반전과 같은 보다 자극적이고 흥미로운 이야기가 펼쳐졌더라면 하는 바람을 말하는 건 아니다. 어차피 성공할 확률이 낮은 지경까지 왔다면 반전만이 능사는 아니다. 오히려 예감대로의 스토리가 나왔어도 그 전개방식이 세련되기만 했더라면 문제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큰 이야기의 흐름을 쫓다 보니 작은 요소들의 반응에 숙고하지 못한 것이 아쉽게 드러난다. 전체적인 역사를 구성하고 어느 지점에서 폭발할 것인가에 대한 고심의 흔적이 부족했거나 혹은 적절하지 못한 탓이다. 판타지라는 긴 호흡을 전개해 나가는데 자신만의 독특한 서사가 돋보이지는 않은 오류는 결국 허상의 문턱에서 간신히 모면을 한 정도이다.
만약 8명의 아이들이 보다 디테일한 성격묘사로 어필되었다면 소소한 말투에서부터 그 개성이 드러났어야 했고, 서사에 중점을 두고 싶었다면 선이 굵은 지적인 전개를 펼쳐보였어야 했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깊은 인상을 남기지 못하고 회화적인 이미지뿐인 소설로 전락하게 만들었다. 인물들은 그들의 언행에서 자연스럽게 가공되기보다 애초에 ‘용감한’ ‘영리한’이라는 수식어로써 드러내는 촌스러운 방식을 구현했다. 특히 할머니가 과거를 한꺼번에 고백해내는 장면은 황당할 정도로 엉성하다. 서사 역시도 한권의 소설 안에 모두 담아내기에 그 역사와 배경이 부실하게만 펼쳐지고, ‘불’이 상징하는 지옥불이나 레드의 색감과 이미지들은 그리 인상적인 대치를 이루지 못하고 끝난다.

생각해보면 사람들은 이런 소설을 읽어 낼 때 어느 정도 예감에 적중하거나 빗나가는 것을 큰 문제로 삼지는 않아 보인다. 다만 그것을 구현해 내는 서사의 장중함이나 아주 사소하더라도 뭔가 지적인 자극을 주는 편을 훨씬 더 선호하는 것 같다. 이를 간과하고 마치 개벽과도 같은 엄청난 반전만을 향해 달려갈 때 자칫 그 흐름이 망쳐질 수가 있다는 걸 이 소설을 통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나름의 의미를 찾아낸다면 이런 것이 있겠다. 역사적 맥락에서 짚어지는 몇몇의 상흔들이 그것이다. 이는 작가가 제대로 구축했지만 우리에게 실패로 읽혀진 인물의 묘사 방식에서 좀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가령 영웅의 존재이다. 미약한 성격 탓에 처음에는 비범성을 모르겠다가도 주위 사람들의 믿음과 자신의 잠재된 힘이 폭발적으로 보태지면서 종국에는 영웅이 됐더라하는 전형적인 영웅담이 우리에게는 익숙하다. 그러나 주인공 벤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서사 속 영웅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인물이다. 벤은 사실 끝끝내 영웅다운 면모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저 나약한 소년에 불과할 뿐이고 심지어 이언이 늙어서 고백하는 부분에서도 영웅이 된 흔적은 없다. 오히려 용기를 낸 것은 그의 여동생 쉬어의 몫이었고, 주위 친구들의 도움과 희생을 통해서 난관을 겨우 극복해 내는 인물로 그려진다. 이는 단순히 캐릭터의 부실이었을까? 그렇게 보긴 어려울 것이다. 어쩌면 끝까지 나약한 벤의 모습에서 우리는 악마적 기질의 찬드라 혹은 자와할의 불멸시대가 끝났음을 목도할 수 있는 것이다. 찬드라가 킬리안의 마음과 지혜로움으로 운명을 새롭게 개척할 수 있었듯, 벤은 쉬어의 희생으로 저주의 고리를 끊고 살아갈 힘을 얻게 된다. 우리가 믿었던 실체적 영웅은 영웅이 아니라 악마였고 불멸하며 이어질 저주의 사신이었다. 그 지겨운 운명의 고리를 단번에 끊어버린 힘은 단 한명의 영웅이 아니라 시간을 공유하는 모두의 힘 때문이며, 이는 우정과 사랑이라는 단단한 믿음으로 가능한 일이었다는 것이다.
이들을 이렇게 강인함으로 무장하게 한 원인은 바로 인도의 사악한 도시 캘커타에서 자행된 끔찍하고 불편한 역사때문이다. 자와할이라는 이중적 악마를 생산하고, 그 죗값을 가장 아름다운 사람들의 죽음으로써 치러지는 역설의 아픈 역사를 상기하게 한다. 그러고 보면 참 불행한 시대였고 무고한 사람들의 희생이 당연시되던 한 많은 역사였다.


다시 ‘보이지 않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감각으로 돌아보자. 이제는 이언이 어려서부터 희미하게 목격했다던 ‘흰 것’의 정체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벤의 곁을 맴도는 천사의 기운 엄마의 손길, 아니 어쩌면 아버지의 손길은 아닐까. 지옥불 속을 헤치며 달리는 기차의 아우성, 수백 명의 아이들이 벤을 향해 맹렬히 달려오는 고통의 질주를 통해 우리는 많은 것을 한꺼번에 읽어낸다.
이제 그들이 돌아가야 할 자리는 각자의 무궁무진하게 펼쳐진 레일 위 기차의 기장이 되는 일이다. 차표는 이곳에서의 비밀을 영원히 숨기고 ‘평범함 삶’을 꿈꾸는 소박함 그것이면 되는 것이다. 제목이 ‘지터스 게이트’가 왜 ‘한밤의 궁전’일까의 의문도 이와 맞물려 생각해보면 그 실마리를 찾게 된다. 지터스 게이트에서 모든 사건이 펼쳐지긴 했지만 이들을 이렇게 만든건 오랜 세월 우정을 나누고 마음껏 상상하며 꿈과 배려를 키우게 한 ‘한밤의 궁전’이라는 요람 때문에 가능했다. 영원한 순수가 잉태된 궁전이야말로 모든 악과 두려움을 이기는 열쇠였다.
 


한 뼘은 더 크게 자랐을 아이들의 건강하고 순수한 악수, 희미한 안개의 도시에 희석되어 모든 두려움의 음험함이 사라지고 맑은 눈으로 돌아보게 되길 기대해본다. 마치 세상 어딘가에 ‘차우바 소사이어티’라는 명패를 단 ‘한밤의 궁전’이 존재할 것만 같은, 그래서 그곳의 문을 빼꼼히 열어보게 될 용기가 얻어질것 같은, 참 맑은 안개가 떠도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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