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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에 빠졌을 때
정호승.안도현.장석남.하응백 지음 / 공감의기쁨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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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시의 언어는 세상의 모든 말이기도, 가장 소외되거나 버려진 궁지의 말이기도 하다. 시를 읽다 보면 분명 익숙한 세상의 언어로구나 싶다가도, 매료되는 순간 마치 처음 본 눈동자에 끌리는 순간처럼 아늑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러한 감정은 아마 낯설다라고 표현할 것이다. 시는 소설과 에세이에서 처럼 우리의 삶과 주변에서 벌어지는 우리의 일과 목소리, 문득 물음표가 던져지는 사사로움을 말하려 한다. 다만 응축된 언어들의 배열이 낯설어서 우리는 시를 어렵다고 오해하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시는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잉태된 것이며 동시에 시인마다의 고유한 눈이 그 보편성을 단 하나의 언어로 변환시켜주는 혜안이 부려지는 일이다. 그러므로 모든 시는 가장 내 시야의 가장 대척점에 서서 낯선 얼굴을 하고 있는 게 틀림없는 것이다. 시인은 마치 세상을 사막 위를 걷는 방랑자처럼 떠도는 자, 우주의 별만큼이나 헤아릴 수 없는 모래의 무덤 위 그 세상의 가장자리를 응시한다. 그래서 시인은 어쩌면 소외된 언어를 줍는 수집가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시인이 부린 언어를 보고 있으면 천애 고아의 울음처럼 바람길 따라 퍼지는 울림에 그 끝을 모르고 막막함이 펼쳐지는 것 같다. 우리는 어째서 시를 사랑하는 것일까? 이리 슬픔만이 남아 떠도는데도. 물론 그렇지 않은 시도 많긴 하지만 대게 ’란 홀로 피어나고 바람결에 또 어디론가 날아가 버릴 이름 모를 홑씨 같은 습성이 있다. 슬픔의 대지 위에서 그 눈물의 샘을 먹고 자란 꽃, 그 꽃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자의 입김에서 붉어지고 터지는 가련한 숙명이 있다. 어느새 날아가 버린 수많은 홑씨들의 언어들이 아득한 세상의 언어처럼 알알이 박히는 일이다.

 

 

<우리가 사랑에 빠졌을 때>는 평생 시와 연애하는 네 명의 글쟁이들이 모여서 각자의 추억으로 또한 사랑만으로 이야기를 짓는다. 공통된 생각을 짚자면 이들이 생각하는 시는 변방의 풍경을 말하고 있다라는 점이다. 전형이거나 세계의 질서, 순응의 낱말과는 거리를 둔 전복적이고 일탈하며, 마구 움직이는 상상력의 세계관이 담겨 있어야 진짜 시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는 흡사 우주의 근성과도 같지 않나라는 생각을 해본다.

지구라는 중심에서 바라보는 규칙과 질서들은 알면 알수록 얼마나 우리가 틀린 존재들인가를 상기시켜 주기 때문이다. 내가 세상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버리게 되고 주변으로 시선을 옮기게 되면서, 변화와 상상력을 모색할 때 유연한 진실이 다가오게 돼 있다. 시 역시 세상의 가장 낯설고 뜻밖의 정경을 발견할 때 비로소 교감하고 정서적인 나눔이 생겨나는 것이다.

 

 

네 명의 눈에 들어온 몇몇 시를 보고 있자니 역시 그동안 읽지 않았던 시집들에 눈이 가게 되었다. 책장에 꽂힌 많지 않은 시집들의 목록을 죽 보면서 문득 최근 들어 시집을 전혀 사지 않았다는 실감에 부끄러웠다. 아닌게 아니라 나뿐만 아니라 요즘 사람들이 얼마나 시를 사 읽는지 모르겠다. ‘전혀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거의 읽지 않는다라고는 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책 프롤로그에 나오는 말이지만, 사람들이 시를 어렵다고 생각하고 읽지를 않는다는 사정을 토로하는 부분이 나온다. 여러 가지 사정이야 있겠지만 시를 읽는 마음의 여유가 많이 사라졌기 때문에 그럴거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디지털 시대의 도래로 손에는 항시 자판과 휴대폰이 쉴 틈을 주지 않고 끊임없이 여백을 지워나간다뭐라도 읽고 재미를 선사해주면 그만 아닌가 하면 또 모르지만 대개 이 매체들이 얼마만큼 유익한지는 미지수가 아닐까.

 

 

확실히 종이의 질감을 느끼면서 책을 한 장 한 장 읽어나가는 행위에는 최소한 간극이라는 시간이 존재한다. 그리고 자신의 가슴에 새겨질만한 순간이 포착되면 읽는 행위도 멈추게 되고 자신만의 영원한 시간이 펼쳐지게 된다. 이것이 소설을 읽든 시를 읽든 세상과 소통하는 가장 따뜻한 방법일 텐데 사람들은 이를 점점 외면하고 있는 것 같아 아쉽다.

 

 

책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시는 완벽한 풀이를 위한 것이 아니며, 무궁무진한 길이 펼쳐진 변화의 언어가 살아 움직일 뿐이다. 좋은 시를 읽었을 때 사람은 변화하고, 추억을 더듬기도 하는 시간을 선사 받는다. 비록 시의 언어가 우리가 말할 때와 같은 문법의 규칙대로 움직이지 않고, 전혀 가 박혀야 할 단어가 아닌데 있다는 다소 낯선 풍경이 펼쳐지기도 하지만 이럴 때야 비로소 시가 시다워 진다는 아이러니를 깨달아야 한다. 그것은 물론 내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말의 퍼즐을 맞추면 그만이기 때문에 그렇고, 이 논리의 함정에서 당당히 벗어나는 읽기가 가능해질 때 진정 시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 시는 항상 착란하고 세상 밖을 몽상하는 일로 풍부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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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락의 시간 - 도시락으로 만나는 가슴 따뜻한 인생 이야기
아베 나오미.아베 사토루 지음, 이은정 옮김 / 인디고(글담) / 2012년 7월
평점 :
절판


‘도시락’ 하면 학창시절이나, 소풍, 네모난 모양의 컵라면이 떠오르기도 하지만 이 책 <도시락의 시간>의 그것은 어딘지 경건함이 깨알처럼 뿌려진, 한 끼 식사 이상의 낱말을 지칭하는 것 같다. 들뜬 축제의 한 자락에 웃고 떠드느라 단무지만 들었어도 맛있었을 점심이 아니라, 또 어딘가 허술해보이는 엄마같은 여인이 새겨진 컵라면 속 MSG란 깊은 매력의 맛도 아닌, 그야말로 생존을 위해 먹는 흰쌀밥 그득한 네모상자를 지칭한단 소리다. 일하러 나온 사람들의 손에 들은 손수 만든 소박한 한주먹의 인생, 이것이 바로 잠시 잊었던 도시락이라는 진짜 이름이다.

 

 

사진들이 촬영물이라는걸 감안한 도시락이라 하더라도 이들이 먹는 평소와 다르지는 않다는 걸 보면 일본인의 도시락은 참으로 정갈함이 큰 장점인 식문화란 생각이 든다. 하나같이 '이렇게 맛있어 뵈는 점심이라면 매일이라도 먹고 싶겠구나'란 생각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 지고, 두세가지만을 넉넉하게 담은 우리네 도시락이 풍경과는 사뭇 다른 조금씩 다양하게 먹는다는 인상이 들었다. 마냥 이들의 소박한 잔치를 부러워 할 수 있을것도 같지만, 그게 또 그렇지만은 않아 진다. 이윽고 이 작은 도시락이라도 싸오기 위해 서둘렀을 아침의 부산한 한때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어떻게 드는 생각은 이러한 것도 있다. ‘자영업자 아닌 이상, 아니 왜 밥도 안주는 데서 일을 해야 하나’하는 푸념이 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라면 싸온 도시락에 대한 처연함이 그렁그렁 맺히는 노릇이다. 그러나 이들의 사정과는 아무 상관없는듯 도시락의 매무새는 하나같이 정갈하기 그지 없어서 아이러니 한 풍경을 연출한다. 고된 삶의 첫 시작 그 쩌렁한 스타트 총소리가 절로 정신을 일깨우는 것 같아 심란하지만, 한끼 식사만큼은 부릴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점심이어야 한다는 듯이 이들의 도시락은 참 예쁘다.

 

 

요즘에는 그나마 점심값 챙겨주는 회사들도 물가 상승률을 따져 주는 건 아니어서 아예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는 노동자가 부쩍 많아지긴 했다. 하물며 세계 최고 물가를 자랑하는 일본의 경우라야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우리네보다 훨씬 전부터의 풍경이라그런지 도시락을 싸오는 사람들의 사연에는 작은 불만마저도 느껴지지 않는다. 대부분 자족의 미소를 쓸쓸히 번져보이는 것 뿐, 그런 사람들의 부지런함에 놀라 자주 의아하고 쓸쓸한 생각이 들었다. 

 

만약 한국에서 이러한 소재의 책을 낸다면 힘겹게 살아가는 데에 대한 성토가 좀 더 많지 않았을까 싶다. 생각해보면 이 편이 좀 더 자연스러운 태도가 아닌가. 세상을 향해 좀 더 발언하고 처지를 개선해야한다는 목소리를 부리는 한국인의 도시락이 아마 몇 배는 더 사랑스러울 것이다.

 

 

 

이 책은 각자가 싸온 도시락의 풍경과 사연들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사람이 일을 하면서 먹고 사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전달한다. 사먹는 쪽보다 건강에 더 유익하다거나, 경제사정, 개인의 취향 쪽으로 방향을 틀고 보면 도시락의 낭만을 보다 사랑할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실제로 아이에게 싸준 도시락이나 할머니가 추억 삼아 싼 도시락의 그것에는 분명 그런 일상의 행복따위가 느껴지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분명 이것 만을 바라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문제는 이들이 저마다 시간에 쫓긴다거나, 사정상 도시락을 들고 나와야하는 그 빠듯한 생활에 있는 것이기에.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닥 작업 환경과 사회적 시스템의 문제로는 발언하지 않는 점이 조금 의아하다. 아닌 게 아니라 집밥이 훨씬 맛있다는 건 알지만 이런 이유로 부러 도시락을 싸온다는 사람은 별로 없지 않은가. 일단은 자족하더라도 얼마쯤은 자신의 처지를 조금씩 동정하고는 있는게 느껴진다. 알고 있지만 이렇게 사는 것이 제 분수에 맞다고 믿는 일이 좀 더 쉬운 선택이었을 뿐인 것이다.

게다가 차분히 앉아 담소를 나누며 밥알을 씹고 한숨 돌릴 여유도 없이, 서서 대충 때우는식의 주먹밥으로 허기진 배를 달래는 사람이 있다는 건 딱한 일이다. 아니 대관절 이 주먹밥은 어느 시대의 산물이란 말인가. 전쟁 때나 혹은 먼 길을 떠날 때 급히 먹던 암흑기도 아닌데 왜 이다지도 고된 식사를 해야한단 말인가.

주먹밥이 시간을 절약해주고 맛도 있다는 말은, 카모메식당 같은데서나 할 수 있는 소리겠고. 아내에게 미안해 직접 도시락을 싼다는 그이의 점심은 그래서 참으로 눈물겨운 배려로 말을 잃게 만든다.

 

 

그런 것이다. 대게 서민들이 힘겨운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흡사 전쟁과도 같은 치열함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지. 햄버거 가게에서 일하는 사람이 한 시간 꼬박 땀 흘려 버는 돈이 햄버거 한개 값도 못한 그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무표정하거나 혹은 쑥스러운 미소가 은은하게 번져 보이는 이들에게 분명 희망이 있을 테지만, 그 희망을 향하는 발걸음이 먼 길을 떠나는 자에게 느껴지는 결기마저 풍기는 것이라면 어느쪽으로 생각하더라도 참으로 딱한 노릇이다.

 

 

 

가족을 위해, 혹은 자신을 위해 밥을 푸고, 찬을 담는 일. 이 소중한 일이 작업장에서 소중한 한입으로 넘기며 또 힘내어 살아가는 인생들에는 반드시 너른 대지와도 같은 은총으로 내려지리라. 순응하고 제 일을 묵묵히 하느라 조금은 처량해 보이는 인생일지라도 일상을 만족할 줄 아는 이들의 땀에는 이래서 진솔함이 맡아지는 모양이다. 책을 보는 내내 한 장 그득히 윤기 나는 과일과 신선한 채소, 포실포실한 계란말이를 보고 있으면 당장이라도 엉덩이 들이밀고 노나 먹고 싶어지는 뻔뻔함이 부려진다. 이러고도 남을 인심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거듭 이들의 고된 하루 중 반이 남아 있는걸 응원하고 싶어지고, 덩달아 열심히 살아야 할 이유를 차고 넘칠만큼 상기해보고 싶어진다. 

 

 

근본적으로는 삶을 바라보는 태도가 무척이나 맑아서 덕분에 진짜 세상이 돌아가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드는 그런 책이다. 참으로 고마운 사람들이 우리 곁에서 여분의 젓가락을 건네며 미소를 짓는것 같다. 도시락의 시간에는 그런 따뜻한 맛이 삶을 이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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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절반은 맛이다 - 박찬일 셰프 음식 에세이
박찬일 지음 / 푸른숲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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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면 시간을 분단위로 끊어 사는 정교함 부린 적 없이 용케도 꾸려 살아가는 듯하다. 비록 혀를 내두를 만한 결과물이나 업적, 돈과 담을 쌓기는 했어도 크게 남들 부러워하지 않을 만큼의 마음을 꾸린 일도 그리 무의미한 시간은 아닐 테니까. 조금 더 말하면 내게 시간이란 달리의 그림에서나 나오는 시계처럼 몹시 변형돼 있고, 한껏 늘어진 상징어에 가까운 것 같다. 수시로 협소해지고 길게 일그러지기도 해서 겨우 원형만을 유지하는, 그런 이미지에 불과하달까. 그래선지 객관적인 시간을 능수능란하게 다룰 줄 아는 보통의 사람처럼 살아가지 못하는 편이라 퍽 게으른 편이다. 그래도 그런대로 나는 한 살 한 살 먹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해본 일이 거의 없을 정도의 태평한 마음을 가꾼 편이기도 하다. 대게 그런 식으로 시간은 의식하지 않은 채 흘러갈 뿐인 것 같지만, 이게 또 그리 나쁘지 않았다.

 

 

다만 계절마다 피부에 와 닿는 온도들, 가령 해가 떨어지는 일몰의 풍경이나 하루하루 배가 고파지는 때가 찾아올 때, 이러한 순간의 존재하는 시간만큼은 조금 더 기억해보려고 의식한다. 가장 먼저 몸이 알아버리는 감지계를 항상 켜 놓아서인지 그나마 그 시간마다의 유효한 일을 꾸릴 수가 있다.

가끔은 썩 괜찮은 책을 만나는 때도 내 기질과는 상관없이 주어진 객관적인 시간들을 상기해보기도 한다. 이 때는 없던 조바심도 슬쩍 고개를 내미는 것이다. 말하자면 ‘아,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있었는데 가보지도 못 했구나’ 라든지 ‘끝내주게 맛있다는데 이 맛의 근처도 못가보고 헛살았구나’ 하는 생각 따위들. 겨우 이 정도의 순간에 시간의 무한함을 생각한다고 코웃음이 절로 나오는 노릇이지만, 뭐 어쩌겠는가 없던 조바심이 생긴다는데.

 

 

 

책의 목차를 죽 보고 있자니까 어김없이 한숨과 조바심이 드는게, 어떻게 이런 부지런한 삶을 살아보나 싶어서 마음이 자꾸 채근되는 것이었다. 매일 매끼 먹는 것만 잘해도 뭐가 되도 됐을 것을 어느 누구는 한 끼의 양식이 마음을 차고 넘치게 할 만큼 마음의 양식이 되어 돌아오는데 대관절 나란 사람은 입에 맞는 나물 이름 하나도 모르고 사니 한심하다지 않을 수 있을까. 

책의 작가는 일일이 궁금해 하고 그 역사를 알아낸 덕분에 쌓아 올린 뒤켠의 광 안에 보고 배울 게 그득해 보인다. 꼭 그처럼 많이 먹어보지 못해서 안달 난건 아니지만, 좋아하는 것에 대해 탐구하고 그 뿌리를 더듬는 태도의 노력이 멋져서 닮고 싶은 의미에서의 안달이 생겼다. 농담이 아니라.

 

 

 

박찬일 작가는 요리사로서 음식에 대한 추억을 더듬지만 동시에 작가로서도 글의 품위가 뛰어나서 요리일화에 그치지 않는 그야말로 가니쉬가 풍부한 삶의 글쓰기를 선보인다. 무엇보다 여행을 사랑하고 그곳이 선사하는 자연의 맛을 잊지 않은 덕에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와 같은 책이 나왔으리라. 이탈리아에서 배우고 돌아온 이후에는 안타깝게도 가게사정이 악화된 최근까지 훌륭한 맛의 전도를 해왔다. 그의 가게에 들러 진한 토마토향이 풍기는 파스타 한입 먹어보지 못했다는 게 뒤늦은 아쉬움이지만 대신 2부에서의 이국적인 풍경하며 친절한 비법 소개와 에피소드들을 들여다보노라면 본토의 맛은 과연 어떨지, 그가 만드는 파스타의 맛은 어떨까 침이 잔뜩 고인 채로 상상의 즐거움을 맛보게 된다.

 

 

 

좀 더 인상적이었던 1부에서 특히 바닷가 음식 편에서 그가 음식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모든 전말이 나오기도 한다. 요컨대 이런 것이다. 허름한 가게에서 화려하지 않은 단출한 가짓수의 재료만 가지고 그 고장의 고유의 음식을 만들 것, 요란하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곳이 아닌 손맛의 진정성이 있는 곳일 것. 이는 먹는다는 것의 의미, 이와 관련한 모든 철학이 모든 재료가 되고 발효가 되어 하나의 음식으로 탄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3부에서 언급한 책들의 언급 역시 가지치기를 도와주는 흥미로운 글이었다.  

 

 

 

개인에게 주어진 시간은 어쨌든 그 끝이 있게 마련이어서 소중하게 일구고 잘 안배해서 살아가야 하는게 마땅하다. 돌아봤을 때 인생의 추억을 더듬는 맛의 찡한 울림이 전해지는 순간만큼은 잊을 수 없기에 시간의 영원성을 상기하게 되는 것 같다. 삶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만큼은 좋아하는 사람과 푸짐한 한 상의 음식으로 떠올려볼 수 있다면, 그렇다면 아마 대양과도 같은 미소가 그 끝을 모르고 스르르 번져나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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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 두번째 무라카미 라디오 무라카미 라디오 2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오하시 아유미 그림 / 비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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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변하는 가치조차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그 때 비로소 ‘아, 내가 어른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상식과 비상식이 참신한 구호로 떠오른 요즘이야 말로 참 아리송한 일 투성인데, 숱한 논쟁 속에 파묻힌 진부한 상식 논리가 과연 어른들이 이룩해내는 판 안의 일인지 헷갈리기만 하다. 사실 모든 문제랄 것들은 영원한 명제로 귀결되기 보다는 수많은 가지를 만들 뿐이 아닌가. 더구나 눈으로 볼 수 없는 문제들을 말할 때 사람들은 유독 관대함을 잃고 독해지며 삐뚤어진다. 무형인 가치나 진리 따위같은 진중한 사안 앞에 수호해야 한다는 마음의 조종은 수많은 가지만큼이나 어떨때 참 한심하게 발휘 되곤 한다. 함정에 빠진 홀 안의 문제들은 소위 어른이 하는 말과 행동이라기에 시간의 진보와는 상관없이 나아가기도 또는 퇴보할 수 있는 것다는 것을 참으로 극명히 보여주는 구멍이다.

 

우리가 아이였을 때, 어른이 되면 응당 자주적인 사람이 될 거라고 믿는 순진함이 있다. 이는 차라리 너무 아름다워서 처연하기까지 한 오해다균형을 지켜내는 절대적인 감각이 누구에게나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때의 충격이란 고스란히 어른이 되고 말았다는 흉터 같은 증거로 남는다. 어른이 되어버린 것, 삶은 이런 식으로 실망과 경이를 알아가는 과정인 것이다. 용케 이 시간이 주는 보상이라면 각각의 취향이라는 고유 감각 체계로 나누어 심는 일일 것이다. 이라도 생기게 되니 얼마나 다행인가.

어쨌든 타고난 기질을 제외하고 나면 거의 환경에 의해 생성되는 게 대부분이기에 취향의 고착은 아주 서서히 그리고 일순간에도 심어지는 알 수 없는 영역의 일이다. 나쁘거나 좋음을 구분하고, 자신만의 감지 시스템이 24시간 가동되는 민감한 동물로 변화한다. 어른이 된 이상 더는 변화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 쯤도 알게 되는 게 유감이긴 하지만 어쨌든 인간을 타자로 다름을 인식하는 첫 번째 기준이 취향인 것만은 확실해지니 이는 살면서 참 중요한 개인 요소인 것이다.

그래 더는 꼰대 같은 말도 듣고 싶지 않아지고, 몸에 걸치는 브랜드가 보이냐 안 보이느냐로 고상의 유무를 따지며, ‘네가 게맛을 알아?’란 유행어도 3년이면 잊혀지는데 도를 아십니까?’로 십여 년간 같은 블록을 왔다갔다하는 치들의 머릿속을 헤아리거나 죽어도 못하겠거나 생각하는 일들 모두 각각의 몫이다. 우리 모두는 자신만이 가동 센서로 세상을 감지하면서 철저하게 개인의 패턴을 만들어 가고 그것을 유지 또는 보수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결국 취향의 문제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 주류건 비주류건 상식 안이건 밖에 있건, 그윽한 향기를 품건, 밍밍하건, 구역질나건 어떤 것이든 그 각자로 존중받아야 할 가치가 있다. 절대적일 리 없는 타인의 취향은 상하를 논할 수 없는 그런대로의 가치로 획일화에서 멀어질 수 있는 빌미를 주기 때문이다. 다르면 다른 대로 좋고, 비슷하거나 같거나해도 매력이 있는, 그러니 작가 하루키의 취향은 모든 감각을 총동원하게 하는 즐거운 경우라 할 수 있다.

 

 

하루키의 명성이야 지구 끝까지 따라가도 그림자 곱절만큼 따라 잡을쏘냐 싶으니 설사 고약한 취향이라 하더라도 그저 특별하게만 보인다. 무엇보다 그는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더라도 모를 듯한 미지의 사람 같아서 좋다. 시시콜콜하게 쏟아내는 유머 하나에도 내내 자문하게 하거나 수많은 자극이 되어주고, 상상하는 기쁨을 주기도 한다.

 

 

 

 

 

문득 왜 우리가 죽을 때까지 책을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이 떠오른다. 어쩌면 책이라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무뎌질 수밖에 없는 취향을 좀 더 날렵하게 가공하고 윤색해야할 윤활유 역할을 해주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하루키는 작가라는 특수한 직업인이라 세상을 보다 다르게 보고 체험하려는 갑절의 노력이 있다지만 보편적으로 사람들이 행할만한 노력들을 생각해보면 책을 읽고 각종 매체, 취미 생활과 여행, 사교와 같은 경험이 아니고서야 심히 취향을 갈고 닦을 일은 점점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갈수록 그리 다양해지지 못한다. 그렇다면 단언컨데 책이 가장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철저히 한 개인과 사회와 현상에 대한 역사로 안내해주므로 그러니 많이 읽을수록 자신의 오류를 발견할 가능성은 열리고 수정할 수 있는 자극제가 돼 준다. 더러는 종이가 아깝다고 느껴지는 한심한 책을 만날 때도 그런대로의 경험이 될 것이며, 운이 좋을때는 지진이 일어날 것 같은 깊은 울림의 증명이 일어나기도 하는 것이 바로 책이 주는 짜릿한 순간이다. 책은 일방적인 텐션을 주긴 하지만 우리에게 수많은 가지의 발현을 돕는 아주 좋은 취향의 윤활제다.

 

 

하루키의 에세이는 많은 이들에게 깊은 사색의 시간을 선사해주고 더불어 끝내주게 부지런한 삶을 살으라 겁주는 엄숙함과는 거리가 멀다. 솔직할 수 있는만큼 솔직해서 그가 좋아하는 맥주한잔 함께 나누고 있는 청량함이 느껴진다. 있는 모습 그대로 즐거워 할 줄 알며, 건강한 비판을 하고마음이 시키는대로 하면서 늙어가도 추하지 않고 오히려 귀여운 어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해주는 어른이다. 나이든 남자들에게 풍기는 전형적인 향기가 나지 않고, 계속해서 근원적 가치를 따져 묻지 않는 종교인 같은 장엄함이 없어서도 좋다. 그만의 취향으로 살아가고 언제나 굳게 다물어 있는 입술의 다부짐을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으니 참 근사한 어른을 만난 기분이다.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에서 하루키가 보이는 일상의 태도에는 아침의 숲길 풍경 같은 맑은 기운이 흐른다. 오랫동안 다른 곳을 살아낸 풋풋함 때문일까? 끊임없이 다름과 같음을 골라낼 줄 아는 혜안이, 소소한 가치와 타인의 취향을 새끼고양이 혓바닥 다루듯이 섬세하게 관찰하는 천상 소년의 눈 같다. 느린 시간을 천천히 음미하게 하고, 하나의 조각품 같은 정형의 세계를 기묘한 방향에서 바라보게 하는 시각을 제시해주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은 타인의 성품을 감지하고, 익숙한 듯 다른 서로의 안목을 욕망하며, 남다르다고 믿는 자의식에 취할 줄 알고, 또 내가 갖지 못한 목록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부지런함을 신경 쓰게 되는 것일 테다. 영원히 오감으로 느끼며 투쟁하듯 흡수하고 버려내야 할 과정들을 왜 중요하게 다뤄야 하는지 하루키는 그 일상으로 보여준다.

그러면 적어도 스스로에게는 자주적인 사람이라 믿게 해주는 고마운 착각이라도 생길테니까. 언젠가 내게도 더 배우면 뭐하나 싶어지는 순간이 찾아올 때, 여기 이런 어른도 있는데 왜 나이 따위로 더이상의 삶을 바라지 않느냐 채근댈 수 있는, 항상 옆에 두고 싶은 책이 하루키의 책이다. 어떤 식으로든 나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면 언젠가는 하루키와 같은 근사한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와 같은 진정 누군가로부터 닮고 싶어지는 어른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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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 않는다는 말
김연수 지음 / 마음의숲 / 201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간혹 사람들이 그 순간 내가 살아있구나 하고 느꼈습니다라는 투의 자신을 체험하는 순간, 인생의 전환점같은 깨달음을 맞이한 순간의 경이로움을 말할 때 나는 퍽 의아했다. 그리고 말의 시작과 끝점에 이르는 단 한 점의 느낌도 이해하지 못한 자괴감에 빠졌다. 아니, 의아하기 보다는 살아있음의 말의 느낌 정도를 알 도리가 없어서 당황하고 의기소침해졌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나를 사랑한다라는 말이 주는 모호함 만큼이나 내가 내게 행하는 사랑의 가늠을 대관절 어떤 식으로 알게 되는 것인지 아직도 모르겠다는 것이다. 가령 누가 봐도 이기적인 행동을 하게 됐을 때 그 때 사람들은 , 난 참 바보같이도 나를 사랑하는구나하고 느끼는 것일까? 아니면, 격렬한 고통 뒤에 찾아온 러너스하이의 쾌감을 느끼게 될 때 아 내가 살아있어!’ 라고 왜 느끼게 되는 걸까? 도통 어떤 명확한 감정들이 나를 증명하는 정도로 남게 되는지 모르고 살고 있다.

 

 

 

딱하게도 이 두 문장과 등치시킬 만한 순간이 아직 찾아오지 않아서 희열 비슷한 것도 느끼지 못한거라면 또 부지런히 살아볼 요량이지만, 이 나이쯤 살아봤으면 또 모를 리 없지 않은가 싶어지면 돌연 한심한 노릇이어서 나는 좀처럼 감정의 고도를 올리기에는 무딘 인간이아닌가 싶어지는 결론에 이른다. 감정의 불구일까 아니면 기대치가 너무 높아 고작 이 정도에?’ 하고 무심코 넘겼을 일인지 답을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치과에 가서도 소리 한번 내지른 일이 없다면? 아프지 않았다는 건 절대 아니지만 사람들이 어느 정도의 고통에 신음하는지를 모르겠어서 고민하다 잘 참는다는 칭찬을 듣곤 했으니 끝내는 이런 소심함이 결정적 이유였을까감정을 숨기는 병이 깊어지면 내가 나를 느끼는 일 조차 저 멀리 은닉시켜 버리는 타고난 자학기질 때문일지도.

 

 

 

남이 흔히 경험하는 감각의 체화 따위도 아직일지 영원히일지 요원하기만 해서 자조 섞인 희망을 이제는 넘겨짚듯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아직 모르는 건 죽어도 모르겠지만, 남들이 고백하는 경이로운 순간에 대한 기록은 언제나 처음 먹어보는 과일의 즙을 훕- 하고 빨아먹는 순간처럼 달콤하기만 하다. 이런 남부러운 체험들이 쌓이다 보면 내게도 이럴 땐 남들처럼 살아있다고 느껴야겠군 하고 나도 모르는 기분이 처음으로 생길 수도 있을 것이다. 

 

 

 

<지지 않는다는 말>에서 작가가 말하는 과거와 현재의 일화들은 스스로를 어떤 식으로 격려하며 살아왔는지에 대한 모험 같은 이야기다. 아지트에 모여 가져온 과자 한 봉지에 여러 손이 모이고 함지박만 하게 벌어진 입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는 공간의 신비한 공기, 영원한 시간이 흐른다.

 

 

작가는 살아가면서 점점 매순간 살아가고 있다는 의식을 치르기 위해 지독한 개인으로 살아가기를 즐기는 사람 같다. 자신에게 유용한 깃대를 참 부지런히도 찾는 성실한 작가의 인생을 선택했으니까. 

그는 어떤 때 한 편의 짜릿한 느와르를 보여주기도 하고, 텅 빈 객석 앞의 초라한 배우 같기도 했다가, 요란한 퍼레이드를 즐기는 밸리댄서의 몸짓을 선보이기도, 호환마마로부터 달아나는 귀엽고 우스꽝스러운 얼치기 소년 같기도 하다. 삶은 어찌나 너와 내가 서도 닮았으면서도 다른 것이던가.

우리에게 주어진 삶은 그러고 보면 송연해지는 엄격함 때문에 참기 힘든 때를 버텨내야 하는 순간이 많지만, 그만큼 참 달콤하기도 해서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쯤 얼마든지 무시하고 무작정 내달리고픈 유한한 착각을 심어 주기도 한다각자를 고유한 개인으로 살아가게 하는 수많은 비밀을 품고 있는 살아가는 것, 하루하루 그것을 풀어내기 위해 살아가는 이유가 생기는 일이다.

 

 

 

특히 이 책에서 보여주는 작가의 삶에 대한 태도는 대단히 발랄하고 주도적으로 즐겁게 살아가려는 작은 실천들이 돋보인다. 이는 마치 내가 나 아닌 다른 존재로 의식되어 살아가기를 꿈꾸는 일이 왜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삶이다. 김연수작가를 보면 언제나 소년 같은 얼굴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역시나 끊임없이 꿈꾸는 자이기를 꿈꾼다는 것이, 얼마나 근사한 말인가를 곱씹게 된다. 그러고 보면 이 책은 결국 끊임없이 성장해가는 개인의 모습을 통해서 내게도 좀 더 나은 삶을 찾아보라고 언질을 주는 것 같다. 그렇다라면 나이가 무슨 상관이 있을까. 내가 아닌 나를 발견하기까지 숱한 를 만나게 된다는 것, 나이를 먹으면 그 땐 또 다른 내 모습이 있을터니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을 보며 어떻게 하면 내게 자극이 될 꺼리를 찾을 수 있을까를 계속 고민해 보았다. 당연하게도 내 삶을 마음껏 누릴 권리는 내게 있고제때 누리지 못하면 유죄라는 믿음은 조급하지만 묘한 기대감을 준다. 적어도 나는 이 책을 보고 내가 나를 느껴내는 일부터 배워야겠지만, 한 걸음 더 내딛어야겠다는 다짐은 내내 드니 큰 소득을 얻어 간다.

 

 

문득, 오늘 아침 나뭇잎에 고인 이슬이 어깨 위에 떨어진 찰나 같은 것- 을 두고 나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면, 그래서 내 삶의 작은 은총에 감사하게 됐다면 조금 나아졌다고 말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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