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사냥꾼을 위한 안내서>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책 사냥꾼을 위한 안내서 - 제2회 중앙 장편문학상 수상작
오수완 지음 / 뿔(웅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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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그런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몰라’일 거라는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그래도 그 안의 의미가 더 별것 아니었다는 걸 감당해내지 못하는 것보다는 낫다. 어쨌든 책으로 하여금 그것이 존재하든 안하든의 문제는 일단 젖혀 두자. 그리고 그 자체로서 내뿜는 것, 이것의 정말 실재할 수도 있는 사건을 눈여겨보는 것이다. 읽는 내내 책이 하나의 유물이 되고 없던 감정에 가열이 생겨 에너지로 환원되고 정말 큰 아우라를 느끼해주는 과정은 분명 독창적이라 할만 했다. 그러니 기꺼이 사냥꾼이 되어서라도 찾고 말겠다는 동기를 주는 것을 이해할 수가 있는 것이다. 책은 어떤 특정 개인에 의한 생성이 아니라 온 생애가 발생시킨 작은 역사 그리고 인류의 거대한 역사가 만나 이루는 큰 폭발의 산물이다. 그것을 본 사람에게 어느 정도의 영적 파장을 안겼을지 상상만 해도 군침이 도는 것, 이쯤은 누구나 예측할 수 있다. 여기에는 책을 진짜 본 자, 눈으로 얼마간 읽어낸 선택된 자만이 그 크기를 가늠할 권리가 주어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책으로 가지게 된 열망이란 본디 보편적인 감정으로 생각해낼 도리가 없는 것이다. 특별하고 선택된 자에게서 생겨날 수 있는 성질이다. 적어도 책의 장을 열고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을 기대하는 자, 또는 열망 없이 시작했어도 한순간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황홀을 사랑하는 자 그런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인 것이다. 책은 내적 열망의 상징이자 위대함의 상징이고 한편으로 욕망의 덩어리인 셈이다. 이런 전제로 보면 <책사냥꾼을 위한 안내서>는 보편적인 사람들에게 큰 유대를 형성할만한 책은 아닌 것 같다. 이 책은 책을 탐닉하는 자, 거대한 도서관의 수많은 책의 눈에서 무시무시한 열망을 느껴본 자들에게 선보일만한, 말하자면 소수를 위한 책이다.

보는 내내 작가가 얼마만큼의 장서가일지, 독서광일지 가늠해보는 것도 사냥꾼의 뒤를 쫓는 일처럼 흥미롭다. 자료의 수집, 그리고 그 자료들이 이 소설과 연관고리를 찾는 일만으로도 머리가 뻐근해질 정도로 방대한 수준이다. 실재 존재하는 책인지 아닌지는 후반으로 갈수록 궁금하지 않아진다. 위대한 탐서가의 서재를 구경하는 일처럼 존경심이 이는 시간임을 즐기면 되고, 정말 그 책을 찾아보게도 만드는 설득에 종용당하면 되고, 때로 작가가 이룬 거대한 지적인 성에 갇힌 노예처럼 답답함이 들기도 하는 시간이었다. 수많은 책이 있는 곳에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에 선 미지의 공포랄까, 그것은 저 멀리 존재하는 섬에 점점 도달해가는 마음과도 같았다. 독자가 느낄 괴리감들을 작가가 몰랐을 것 같지는 않고, 어쩌면 이 수많은 책들이 마침내 책이게 된 각각의 배경 그 음험한 세계를 독자가 마음껏 상상하다가 길을 잃게 되기를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찾을 수도 없게 숨겨진 혹은 소멸돼 버린 이름 없는 섬 같은 소설을 쓰고 싶었던 걸까. 어쩌다가 가끔 옹색한 내 서재의 책들을 기웃거리게 된 것도 바로 이 책이 준 이상한 기운의 파장이다. 한권 한권 만약 헌책이기라도 하면 그것이 내 손으로 오게 된 경위와, 누구누구에게 라고 쓰여 있거나 한 사연들에 미소가 지어지고, 누가 쳐놓은 밑줄 부분을 다시 읽어보게 되는 것들 말이다. 책의 과거를 생각하는 것은 아주 이상한 소유욕을 안긴다.

반디는 책에 운명적인 동경을 느꼈고, 그것은 몸의 반응으로도 사소하게 일어난다. 또한 그의 의식을 지배하는 관념들은 제단 위에 오른 책처럼 신성시되고 자체로서의 책으로 맹목성을 띤다. 이것은 애초에 위험한 사냥이었다.
우리가 책을 생각하는 관점은 저마다 다르다. 대상을 보는 관점이 제각각이듯이 그 책에 빠지거나 아니게 되거나하는 것은 제 각자 도달하게 되는 생각의 뿌리에서 시작되어 미친다. 그런데 읽다보면 애초 인물들이 매혹되었던 책의 존재와 의미 이런 것들이 사실상 큰 의미를 갖지 않게 되는 사냥을 위한 사냥으로 비춰진다. 책이 별을 세는 일만큼이나 부질없고 끝없이 쏟아져 나올 대상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이는 작가가 일면 구현한 허무의 증명인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나만 느끼는 감정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책의 헌터가 되어 찾아 헤매고 헌터를 쫓는 또다른 헌터가 현실 속에서 뒤죽박죽으로 일을 망치는 걸 바라보는 일이란 참 지루한 책을 읽는 눈처럼 피곤하다. 게다가 현실인지 가상인지 환상인지 점점 모호의 세계로 빠져드는 여러 부분은 책의 종말을 좀 더 극명하게 사멸시키는 행위처럼 보인다. 발사된 적 없지만 사냥꾼 총에 의해 장렬히 전사한 책의 최후처럼 그 존재란 것은 뻔한 것이다.

<레드 바이올린>이란 영화를 보면, 완벽한 소리를 내는 바이올린의 역사를 추적해봤더니 몇 백년에 걸친 엄청난 사연들이 있었더라 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어쩌다가 지금의 아름다운 소리까지 갖추게 되었나라는 의문은 역설적으로 추하고, 음탕하고, 가난하고, 아픔과 슬픔의 손길로부터 잉태된 소리라는 것이 밝혀진다. 위대한 책이란 어쩌면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무시무시한 어둠의 태동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윤선생의 제안은 마치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일처럼 위험하다. 반디는 오래 전부터 제가 가져온 열망의 책이 이 상자를 열어야만 나타나리라는 숙명적 깨달음을 얻는다. 그러니 상자 안에서 펼쳐진 온갖 세상을 감내해야 하는 비운의 사냥꾼이다. 이 책에서 맞서야 한 세상이란 건 생각보다 그리 심각한 수준은 아니다. 단지 더 이상 책이 존립하기에 어려운 현실 체계라는 것, 책 사냥에 열중한 나머지 곁을 지키던 사람과 재물은 다 사라져 버리고, 맹목적이고 시시한 인간종에게 배신당하는 어이없는 현실이라는 것 이정도 밖에는. 사실 반디가 모든 것을 잃고 도달하게 된 정점은 어이없게도 열망이 과하게 스파크 된 찰나이다. 전소되고 모든 열망과 기대는 한순간에 재가 되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게 된 지경이다. 한권의 책으로 바꾸는 거대한 불꽃놀이를 그렇게 지켜보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 아름다움은 금방 소멸되고 이제 다시 애초에 그랬던 것처럼 각자의 마음속으로 사라지는 차례다. 그러므로 문학이 사람을 구원하는 일 따위는 없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반디가 앞으로 펼쳐낼 운명의 한 권을 같이 기대해보는 일만은 지켜보고 싶어진다. 멈출 수 없으리란 걸 잘 알기 때문에, 그러니 여전히 많은 수많은 별 가운데에 시위를 당기는 용기를, 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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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심장부에서>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나라의 심장부에서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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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이들만의 진실이다. 지겹도록 가정하고, 의심하고, 분열하고, 구애하고, 의존하고, 착각하는 어리석음이어도 이들에게는 이들만의 방식이란게 있다.

멀리 달려가는 기차를 보고 있으면 마치 고향길을 향해 내달리는 사람의 마음처럼 서정적이고 풍요로운 배경이 선사될 것이다. 하얀 연기를 내뿜으며 달리는 그 고요한 그림을, 정적을, 정서를 사랑하지 않을수 없게 된다. 그러나 바로 옆의 현실은 어떠한가. 사실은 몸을 휘청이게 할 만큼의 위협적이고 형체를 제대로 알아 볼 수 없을 속도감으로 눈을 질끈 감게 되는게 가까운 그것의 실체이다. 
바로 이런 것이다. 그 시대를, 그 삶을 살아 본 사람이 아니면 절대 알 수 없는 것, 가까이 겪어내는 진실은 우리가 생각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진실이다.
이 책은 식민지땅의 억압과 모순과, 혼란을 멀리 불길을 응시하는 자리로 데려다 놓는다. 그것이 우리의 사색적인 성향의 기원이 될거라고 말한다. 우리는 지금의 위치에서 저마다의 방식과 사고로 그들의 격렬한 불길과 소용돌이가 있는 그 밖의 세상을 상상한다. 여기 이들이 이질적이고 설사 미쳐 보인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냥 그대로를 지켜볼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왜냐하면 이들은 이런 식으로 멀리 보는 우리에게 너무 아름다운 불길의 배경을 선사해주고 또 사색할 수 있는 고요함을 주기 때문이다.

<나라의 심장부에서>는 소설이긴 하지만 시처럼의 분위기를 내는 아름다운 이야기다. 그녀의 언어는 내내 짧은 편린의 조각들처럼 붕붕 떠다닌다. 주인공인 마그다의 조각난 생각의 반영인 것이다. 그녀는 끊임없이 자신의 삶에 딴지를 걸고 의심하고 가정하는 인물이다.
평소에 과거를 가정하는 일처럼 할 일 없는 것도 없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면서도 '만약 그때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그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이라는 생각을 안하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는 어쩌면 의식 밖에서 저절로 일어나는 일일 것이다. 사람은 일어난 일에 대한 후회를 이런 식으로도 풀지 않으면 도저히 불안을 잠식시킬 수 없는 게 아닐까? 가정은 반성을 돕고, 비전에 대한 계획도 세우게 하는 인간의 과제처럼 의미롭기도 하다. 이러면서 내면의 고요함을 되찾게 된다면야.
변화의 욕망이란 건 어차피 사그라질 수 있는 성질도 아니다. 진보의 역사도 이로부터 출발함을 인정하듯이 그렇게 나아가는 것이다. 마그다가 하는 짓이라고는 매일 과거를 가정하는 일 뿐이지만 고립된 마을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것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일로 서서히 정체성을 찾아가게 되는 것이다.  
축복의 씨앗이 되지 못한 죄, 부모에 대한 원죄, 사랑받고 자라지 못한 죄, 아름답지 못한 죄, 나이 많은 죄, 위엄있는 상전이 되지 못한 죄 모든 현실이 그녀를 억누르고 슬프게 하는 것들이다. 그래서 그녀는 과거 속을 헤엄치게 되고 일시적으로 바꾸어 놓거나 아니면 더 엉망으로 만든 악동이 되고 만다. 어차피 그녀는 세상속으로 과감히 뛰어들 행위를 알지 못하고 처지를 인정하고 있다. 우주 속 소리의 여울 뿐으로 신음하는 가여운 껍데기임을 숙명으로 아는 것이다.
그래서 이 가정과 착각의 말은 그녀만의 특권의 역사다. 다시말하면 그녀가 하는 말이 사실이든 가정이든 착각이든 상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좀 더 확실하고 내밀한 준거들을 발견해야 그 책을 이해한 것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이 책은 우리가 아는 그대로만으로 더 이상을 요구하지 않게 태어났다. 모호함의 그대로도 좋은 것이다. 가장 아름다운 성분을 이해하려면 멀리서 바라 볼 것, 마그다의 특기인 착각의 작동을 켜놓고 응시할 것. 그러면 이 여자의 답답한 행동과 분열된 심경들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그녀라는 성분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유전자로 이루어진게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부재에 의해 만들어 졌다. 무엇보다 그녀는 자신이 부재하고 어둡고 먼 실재라고 믿는다. 특히 아버지는 그녀에게 부재하는 존재인 동시에 그녀 삶의 모든 것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바람을 가르는 칼날이나 탑으로 묘사하고 본인은 구멍으로 세상을 돌아다닌다고 고백하는 장면은 아버지에대한 심각한 집착을 말해준다.
구멍은 완전해질 수 없는 영원한 공허의 상징이다. 그것을 채울 수 있는 건 아버지만이 유일한 것처럼 보인다. 이를 새삼 오이디푸스컴플렉스로 환원해 보는 일은 안하고 싶다. 사람이라면 그 허공의 욕망을 그 무엇으로도 채우고 싶은 심경이라고 믿어 두고 싶다. 그런데 정말 아버지는 그녀 인생의 모든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오히려 아버지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아니었을까.
그녀는 이미 구멍을 통해 모든 세상을 본 게 틀림없다. 그래서 그녀가 미래의 목구멍 속에 '그 다음은 뭐지?'라는 암호를 넣고 용감히 돌진하는 건지도 모른다. 미련없이, 아무도 채워주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에 제거하고, 채우고, 또다시 비우고, 끊임없이 욕망하는 것만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하고 싶은 일이었는지 모른다. 이것이 영원한 삶의 원리임을 아는 듯이 말이다. 이 고백은 그래서 그녀의 생이 위대한 목격자로서 완성된 삶을 살고자 했음을 알게 해준다.  


재미난것은 책의 여기 저기서 구멍, 열쇠구멍, 목구멍, 방, 땅 속의 구멍 등 많은 부재의 공간이 끊임없이 반복되어 나온다는 점이다. 마그다에게 구멍은 그녀만의 요람인 동시에 두 번째 집이며, 회귀하고자 하는 몸부림의 놀이터고, 태초로의 회복이며, 도피의 공간이다. 그래서 그녀의 살인은 아버지를 구멍에 메우고서야 얻게 된 그녀만의 혁명이다. 아버지에 대한 보복으로도, 헨드릭이란 남자에게서 일말의 욕망을 채울 수 없게 된 걸 알게 된 이후로도 그녀는 좀처럼 채워지지 않는 허기를 느낀다. 같은 여자인 클라인 안나에게서 애정을 느낀다거나 하는 몸부림은 그래서 더 슬퍼 보인다. 이는 성적인 욕망이 아니다. 공허에 존재에 대한 또하나의 발견이며, 동질감이며, 위안이다. 안나에게서 그녀는 두 개의 구멍을 보고, 두 개의 공허를 느끼고 비로소 이 관계만이 이상적이고 희망적이란 걸 깨닫는다. 그녀를 구원하는 것은 채우는 일이 아닌 그 구멍 속을 향해 돌진하는 바로 그 행위 자체인 것이다.
현실은 그녀에게서 모두 달아나 버리지만 마그다는 당당히 자신만의 목소리로 이야기했음을 자랑스러워 하고 세상에 외쳐댄다. 그리고 너무 쉬워서 말하기도 민망한 지긋지긋한 버려진 땅의 이야기들을 돌아 보며 아름다운 죽음을 생각한다. 
우리가 결코 보지 못할 별의 심장부로 떠나는 마그다의 그 길고 차가운 여행을 진심으로 축복하고 싶다. 물론 멀리서, 바로 여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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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롱뇽과의 전쟁>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도롱뇽과의 전쟁
카렐 차페크 지음, 김선형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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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대건 크게 삼아진 문제들이 오늘날에도 반복되고 있다면 그것은 놀라운 일일까? 아마 아닐 것이다. 사실은 반복의 역사라는 것이 놀라울 것 없는 명제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진화하고 발전된 세상이 도래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삼십년 주기로 찾아오는 유행만큼이나 시시하고 비등비등하게 굴러가는게 인생사 이치인가 싶기도 하다. 다시 반복되는 감회에 젖기라도 하면 그냥 암묵적인 약속처럼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지구 안의 그저 작은 인간일 수밖에 없는 나를 돌아보면 그만 일것 같다. 많은 반복의 역사 그 가운데서도 특히 권력과 부의 줄다리기 싸움을 지켜보기란 참으로 고되고 지겨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단순하고 언제나 비슷한 형태로 반복되어 굴어가는 싸움이지만 우리는 미해결의 창고에 계속 적재 하는 부채자의 심정이다. 권력의 반대에 선 자는 단지 없는 자라서 잘못된 시스템 때문이라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권력의 노예로 속아 주는 슬랩스틱 바보역에 열연을 도맡아야만 한다. 언제까지 그들의 주머니만 채워주는 삽질을 계속 해야만 할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나니 세상이 생각보다 참 변화하기를 싫어하는구나 싶어진다. 아니 변화를 두려워 하는 권력자들에 의해 이렇게 더디기만 반복되는지도 모르겠다. 
평생 다이아나 진주목걸이는 커녕 설거지통에서 세젯물과 씨름해야 하는 다수의 사람들이 들으면 희망이고 뭐고 참 암담한 현실이고 미래다. 이게 다 인간의 야욕, 그 차고 넘치는 욕심 때문 아니던가. 한 번 쥐면 놓치고 싶지 않아지고, 왠만큼 쌓고 나면 또 제 자신의 존재를 설명하는 준거들을 찾게 되는게 인간이다. 문제는 이를 외적 치장에 좌우된다고 보는 걸텐데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것 같다. 정신적으로 빈곤한 사람일수록 강하게 드러나는 법이어서 이 소설에 등장하는 반토흐나 본디나 이 천박한 기호에 그야말로 꽂힌 군상들로 등장한다. 정신적으로 아무런 고결함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추악한 냄새나 풍기며 사태는 생각지 못한 수렁으로 빠지게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이 부와 물질로 재단되는 사회, 어떻게든 돈만 벌면 성공한 사회로 치부되는 사상의 부재, 여기서는 ‘진주’라는 기호의 버러지들이 우글대기 시작하면서 생각지 못한 도롱뇽의 세상이 펼쳐지고 있다. 더한 문제는 이 고급 기호를 둘러싼 생산 자체가 권력화 된다는 사실일 것이다. 소비하는 대중의 코드가 점점 어떤 계층에 속하는지를 증명해내고 싶어하다보니 자연히 사회적 코드가 혼선으로 위협되고 온갖 열패감으로 뒤돌아 볼 겨를없이 상실하게 된 것이다. 
허영은 더 큰 허영을 부르고 그 뒤에 생산자였던 도롱뇽들과의 괴리는 그만큼 더 벌어지게 된다. 이 급격한 격차가 인간의 또다른 형상을 하는 도롱뇽의 권력의지를 키우게 된 원인이다. 그러면서 서로 자신을 순결한 희생양인냥 착각하는 경박함은 추락의 끝을 모르고 밑천을 드러내는 인간들의 싸움을 닮았다. 근본적인 층위에서 자신의 삶을 들여다 볼 줄 모르면 대중과 권력을 쥔 층위간의 긴 갈등은 언제까지나 한쪽의 일방적인 상처로 휘둘려 지게 마련이다. 대중 각자가 이런 치사한 외적 요건들에 휘둘리지 않고 단단한 개인들로 거듭나지 않는 이상 이 너절한 기호 놀이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애초의 도롱뇽은 수줍음을 알고 제 분수에 맞는 충실한 손을 가진 사랑스런 동물이었다. 인간의 자본과 욕망이 쥐어 준 도구로 인해 이들의 사상은 급격히 진화하고 또 변질되었다. 그래서 그들의 손은 더이상 도롱뇽의 것이 아니다. 인간에게 전염된 좀비와 같다. 그들은 성가신 존재들로 전락하게되고 위협적이며 막강한 권력의 또다른 적이 되고 만다. 도구로 표상되는 이미지는 여기서 칼이다. 날카롭고 예리한 기술을 갖게 되자 겉잡을 수 없이 발전이란 걸 해내고 권력의 불가항력이 되어 버린다. 대체 이들의 손에 무슨 짓을 한건가? 
이렇다 보니 뒷통수치는 도롱뇽의 행태에도 배신감 보다는 씁쓸한 죄책감이 앞서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쯤에서 한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일개 도롱뇽이 자기의 동물적 신념(?)을 버리고 과감히 인간이 좋아할 만한 권력을 모방하게 되었는데, 왜 인간은 도리여 배울 만큼 배워준 자신과 똑같은 짓을 하는 이 단순함마저 제대로 대처해내지 못하는가? 인간은 정말 예상치 못했던 걸까?  
새삼 인간의 어리석음이란 거울 속 자신도 못알아 볼만큼 얕은 것이란 생각이 든다. 거울을 들여다 보는 일처럼 이 똑같은 도롱뇽의 재스춰조차 인간은 감당해 내지 못하고 어쩌면 그들의 지배라도 받을 기세처럼 나약함을 드러냈다. 이를 조금 비틀어서 인간과 인간의 싸움이라고 비유해본다면, 한쪽은 일방적인 성장에 감당하지 못할 만큼의 희생을 감수하고 있다는 말도 된다. 당황해서 삶의 원칙들마저 무너뜨리며 휘둘려 지친 모습은 보기 딱하더라도 한편으로 인과응보라는 생각에 눈을 질끈 감고도 싶어진다. 이런 식으로 역사가 왜 끊임없이 반복되는지를 실감하게 된다.   

그렇더라도 결국, 사람만이 희망이다. 제 각자 본연의 길이 있음을 망각하지 않는 것, 그리고 질서를 존중하면서 키워나갈 것, 이 기본 토대를 상기해야 하는 것이다. 작가의 말처럼 인간에게 과거나 지금이나 행복의 능력이란 딱히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건 인류가 다같이 행복해질 능력 같은건 없을지 모르지만 개별적 인간에게는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사회적 질서라 부르는 틀에서 엉터리 군중에 섞여 억지로 함께 하는 한 우리는 불행할 것임을 경계하라고 말한다. 조금이나마 행복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다면 그건 각자의 길에서 같이 걸어갈 상대를 분명히 알고 나아가는 자유일 것이다. 우리가 자본주의에 살고 있는 이상, 좀 더 많은 부를 거머 쥐려는 욕망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다만 반드시 같이 걸어갈 상대의 손을 잡고 한계단 한계단 올라가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어쩌면 작가가 말하는 어느쪽이 양보해야 할지를 아는 우리의 자세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자본주의가 종말하는 그날까지 아마도 이 지겨운 행진은 또는 싸움은 계속 될 것이다. 그래서 도롱뇽을 그림자처럼 옆에두고 항상 경계하며 희망 반 걱정 반으로 살아가는게 우리 각자의 몫이고 사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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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토랩소디>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토마토 랩소디
애덤 셸 지음, 문영혜 옮김 / 문예중앙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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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서 나고 자라 매일 식탁에 올라오는 잎사귀하나 깻잎인지 시금치인지 구별해내지 못하는 무지함은 생각해보면 얼마나 딱한 일인가. 허물어져 새 빌딩이 들어선 고향 터 대신, 발길이 뜸할 것 같은 고갯마루를 한참이나 올라가 서서 나무와 바위 하나에도 신성한 전설이 살아있는 내 고향땅 바로 그런 곳이 어딘가에는 정말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한참 이 소설을 읽다보니 매일 먹는 쌀과 보리의 모양새도 가까이서 본 적 없는 삶은 삭막하다 못해 울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풍요로운 전원의 땅, 사람이라면 응당 이런 곳에서 나고 자라는게 맞지 싶어지며 황금색로 물든 곡식의 목처럼 한없이 고개가 숙여지고 만다. 맨발로 흙을 디디고, 밭을 일구고, 열매를 따고, 가축을 길러내고, 자연을 보고 자란다는 것, 이는 분명 인간이 꼭 누려야할 자산이며 사명처럼 보인다. 냄새를 맡고, 보고, 먹고, 느끼는 시간들을 누리지 못하면 당연히 자연의 소중함을 모르거나 미약하게 갖게 되고 이는 인생의 가장 큰 맛을 모르고 보내는 일처럼 허망해 보인다. 그렇기에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시골의 풍경과 이야기가 더없이 소중하게, 마치 그곳에 존재하는 사람처럼 유심히 그리고 수선을 떨어가며 지켜볼 일이다. 추억이 없는 이들에게 <토마토 랩소디>는 생생하고 흥미로운 시골 생활이 어떤지, 그 묘미를 마음껏 맛보게 해준다.

<토마토 랩소디>는 입체적인 매력이 돋보이는 구성의 오케스트라다. 평범해 보이는 시골마을과 그곳의 순진한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놀라운 이야기. 이 외에 반전은 없다. 완벽한 플롯과 응집되는 폭발적인 흥미를 유발하는 사건이 있는 것이 아니란 소리다. 다만, 이 소설의 이야기에는 저마다 깊고 유려한 역사가 존재한다. 개성있는 성격의 캐릭터가 인상적인 배경을 펼쳐 보이고 그냥 오늘을 살아가는 평범함이 오히려 돋보이는 소소한 개성을 말한다. 자신의 추억담을 이야기하는 모습을 통해서 가늠하는 정도이지만 작가가 얼마나 개인사에 공을 들였는지 그 장엄한 역사성에 놀랍기만 하다. 개인사든 그들이 살아온 시대든 이런 이야기가 한데 모여 소설의 깊이감을 더해주는 것이다. 때문에 인물이 주는 묘미는 독자로 하여금 그 시대와, 그들의 지난 역사, 인생사를 모두 맛보게 해주는 넉넉한 인심이 참 기분 좋은 맛이다.
 
전체적인 스토리만 봐도 거대한 사건을 부여해서 그것을 해결해나가는 방식이 아니라는 점은 왜 이 소설이 안정적인 흐름으로 결말을 맞이하게 되는 것인지도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만약 이 마을에 거대한 일이 벌어졌다면 분위기는 오히려 풍자와 익살스러움을 포기한 어중간한 이야기로 전락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이게도 주변에 흔히 일어날만한 설정들 즉, 중심과 주변의 갈등이라던가, 문화적 충돌, 인종(?)갈등, 로맨스, 치정, 욕망 등 다양하게 존재할만한 인생사 갈등들이 각각의 인물들에 의해 잘 버무려진다는 점은 상당한 매력으로 다가온다. 특별할 것 없는 사람들과 이야기들이지만 오히려 맛있는 코스 요리가 하나씩 꺼내지는 구성은 전체적으로 안정된 입체미를 부여한다. 그러나 이 소설이 전체적인 인상을 선택하는 대신, 한 개인에게 부여되는 캐릭터에 대한 애정은 좀 떨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아무래도 어느 한 인물만을 전면으로 내세운 구성이 아니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그렇더라도 전체 요리의 맛은 아주 일품이다.

이 소설이 선사하는 또 다른 묘미라면 희극과 비극을 버무려 놓은듯한 연극적인 요소들이라는 점일 것이다. 이는 가장 핵심적인 인상을 부여해주는 재미있는 장치이기도 하다. 몇 백년 전의 이야기를 하고 있기에 정통적인 숭고함을 느끼게도 해주고, 신화적인 요소들이나, 마법, 모험담 등은 놀라우리만치 개연성과 섬세한 이야기로 표현되는데 이것이 연극적인 요소들로 인해 무대 중심에서 연기하는 배우에게 익살과 풍자의 시선을 과감하게 던지는 아우라를 형성해준다. 고전적인 미를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소설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설정이다. 
또한 중간중간마다 독자에게 전하는 말따위를 섞어서 무대 위의 배우들과 거리감을 두어 가까이서 지켜보게 하는 장치는 새롭고 현대적이다. 무엇보다 인물들의 심리를 묘사하는 것에서는 상당히 치밀하고 현대적 감각의 묘사가 돋보여서 옛스러움과 현재의 강점을 아우르는 힘을 느낄수가 있게 된다.

<토마토 랩소디>는 무엇보다 감각의 발현이 충만히 빛난다는 점이 놀랍다. 토마토라는 소재를 통해 작가가 만들어낸 이 엄청난 상상력의 뿌리를 타고 여행하는 기분은 정말이지 놀라움의 연속이다. 토마토를 싣고 미지의 영토로 향했던 논노의 여정처럼 이야기가 전해주는 나래는 그들이 사는 풍경만큼이나 끝을 알 수 없게 넓고 아름답게 펼쳐진다. 작가는 거의 모든 문장에서 시각적이고 촉각적이며, 후각적인 원초적 감각들을 일으켜 세운다. 요리를 묘사하는 장면이라던지 인물의 생김을 묘사하는 장면, 전원의 아름다움을 설명하는 장면 등에서 그 능력은 정말 탁월하게 빛난다. 여기서 표현되는 말처럼 온몸의 감각이 일어나고 깨어나며 고양되는 그런 느낌을 충분히 전달받을 수 있다. 또한 토마토가 주는 색감의 느낌처럼 거의 모든 사람에게서 발산되는 본능적이고 섹슈얼한 감각은 마침내 소스가 되어 사람들의 입맛에 쾌락을 던져주는 일만큼이나 농축된 감각의 여정을 잘 표현한다. 빛과 맛, 햇볕과 토마토나 올리브가 빚어낸 이 시골마을의 한바탕의 꿈은 끊임없이 순환할 자연의 생리처럼 고요하지만 금방이라도 터질듯한 감각의 요람이다. 욕망의 덩어리 사랑과 애증의 덩어리 증오와 어리석음의 덩어리 그것의 열매는 정말이지 붉고 아름답다.   

결국 젊은이들은 원하는 사랑을 쟁취하고 악인은 벌을 받고, 우둔해 오해를 일삼던 대중은 그것을 바로 잡을 수있게 된다. 시골마을의 짓궂은 바람이 지나간 자리는 이상적으로 아름답운 빛깔로 행복을 전해준다. 이들의 오해의 역사와 화해가 담긴 따끈한 피자의 맛, 모든 감각들이 일어나 춤을 추는 이 아름다운 땅에서 붉은 즙이 만들어낸 그 융합의 맛을 한입 크게 베어 물고 싶어진다. 온 몸의 감각들이 일어설만한 그 붉은 맛 붉은 바이러스의 위력이 새삼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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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도 색깔이다
그리젤리디스 레알 지음, 김효나 옮김 / 새움 / 2010년 9월
평점 :
품절


고되고 지난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화려하게 치장을 하거나 지나칠 정도의 웃음기어린 표정에 행복을 가장한 사람을 본 일이 있다. 그녀는 오랜 세월 가난과, 아픈 가족들의 병수발, 내적 학대를 감내하면서 정작 가까운 누구에게도 표현한 일 없는 완벽한 라이어였다.  불행을 호소하며 동정을 구하는 대신 행복의 도가니에 자신을 넣고, 실재하지 않은 연기를 해내는 삶, 그녀는 마치 희극을 가장한 비극의 여주인공처럼 살았다. 
뒤늦은 고백으로 그녀의 진짜 모습이 공개 되었을 때, 조롱과 배신감 보다 경의를 표하게 되는 것은 그녀의 삶이 진정 위로가 필요한 시점임을 저절로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불행한 처지였다 하더라도 사람들에게 내보이는 순간 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이고 싶은 그 소박한 꿈을 그 누가 비난할 수 있을까. 여기 <검정도 색깔이다>에 등장하는 여인의 삶 고백 역시 끝없이 펼쳐지는 불행의 땅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걸어가는 삶이다. 그러면서도 오히려 호기롭게 풍파를 이겨내는 당찬 목소리가 온 세상을 검게 물들이려는듯 오랜 여운으로 남는다.   

소설의 시작부터 끝까지 그녀는 참 당당했다. 마음껏 헤엄쳐 다니는 물고기처럼 온 세상을 떠돌아 다니는 사명이라도 받은 건지 물질을 멈추지 않는다. 불리한 상황에 빠져서도 그녀는 오히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저항하고, 수많은 남자들에 이용당하며 고생을 밥먹듯 하면서도 행복을 찾아 흙묻은 무릎을 툭툭 털고 일어나는 사랑스런 여인이다. 자신의 한심스런 처지를 가장 낮은 수위까지 내려와 비관하는 태도였다면 그녀의 삶은 일찌감치 그 심지를 다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또다른 흑인을 찾아 헤매고 자신과 아이들이 누울 작은 공간을 마련하고, 입에 들어갈 식량을 구하며, 부지런한 삶을 영위해 나갈 줄 아는 자주적인 여성이다. 물론 그녀가 하는 매춘이란 당위의 기로에서 선뜻 이해를 하기란 망설여지는 부분이 없지 않다. 그렇더라도 삶이 그렇게 흘러가더라 하는 체념어린 시선으로 참 안타까운 마음이 생기는 건 어쩔수가 없다. 삶은 언제나 간단한 도덕적 신념만으로 설명될 수는 없는 노릇일 테니까. 세상엔 참 많은 일들이 일어나기 마련이고 다양한 사람이 존재하는 것이다.  

매춘의 기로에 선 당시의 기억을 그녀는 '천국으로 통하는 치욕스런 비밀의 문'이었다고 고백한다. 역겨운 성체의 빵을 얻으려 그녀는 선을 넘게 되었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게 된다. 이 사소한 출발로 그녀의 삶은 엄청난 회오리 바람을 안고 정처없이 유랑하는 방랑자의 처지가 된다.  애초 빌을 사랑해 긴 여정을 떠나온 연유도 생각해 보면 참 단순하다. 순수한 사랑, 열정 이 하나뿐이었다는 것이 황당할 정도로 순수하며 순백색을 띤다. 흑과 백, 사랑과 증오, 불합리함과 투쟁, 구속과 자유. 그녀는 아이들과 빌을 비롯해 수많은 남자들의 입으로 들어간 빵을 얻기 위해 자신의 몸과, 살, 눈물로 이루어진 성체를 구하러 떠난다. 때문에 사람들이 말하는 매춘의 시선과 불합리한 처사를 동의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의 육체는 성스러운 빵을 위한 터전, 그녀만의 우주이기 때문이다. 그만의 우주에 돌을 던질 수 없다.   

삶의 생채기를 주었던 백인들에게 복수라도 하듯이 끊임없이 검정을 찾아 헤매는 삶은 참 이색적이다. 새로운 지옥을 찾아서, 유목민의 피를 확인하는 삶이기라도 하듯 떠돌고 내쫒기는 삶을 반복한다. 여기도 저기도 지옥이긴 매한가지, 돌아보면 애정 줄 일 없이 무심히도 불행은 지나가고 또 어느새 쫓아 버린 줄 알았던게 온몸을 덮치는 그림자와 같은 존재다. 좀 더 나은 세계를 향해 떠나는 그녀의 발치에는 항상 검은 그림자가 멤돌았다. 그러나 그 가녀린 체구를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가로막고 서있는 불행의 검정을 그녀는 '사랑'하는지 모른다. 그것은 그녀의 운명이었을까. 한사코 투쟁하며 쟁취하려 한 것이 이런 암흑 속의 한 줄기의 빛처럼 사소한 것이었다면 이 얼마나 가련한 삶인지. 생각해보면 불행의 씨앗인 블랙은 그녀를 더욱 영롱하게 빛나게 해준다. 왜냐하면 그녀는 블랙안에서 가장 자유를 느끼기 때문이다. 그녀를 좌절하게 만든것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과도한 세상의 시선인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내뱉는 삶의 자취는 감정에 호소하기 보다는 그저 지나간 날의 한 컷 한 컷 슬라이드로 흘려보내는 그 무심한 태도라는게 놀랍다. 그 무대에 선 여인은 '당신들이 들어주지 않아도 나의 투쟁은 계속 된다'라는 듯이 언제나 당당한 여운으로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결국 그녀는 끊임없이 떠도는 인생, 유목민의 피가 흐르는 '자유'에 대한 갈망으로 흘러보낸 인생사다. 자유롭지 않다고 느끼면 안위가 보장되더라도 가차없이 떠나는 당당하고 도도한 자신만의 신념이 살아있다. 이 순수한 매력때문에 기꺼이 더럽고 추악한 어둠으로 기어들어가는 삶을 반복하더라도 그녀를 응원할 수밖에 없다. 그녀가 평범한 삶을 거부한게 아니라 우리가 사는 평범함에 '자유'가 결핍된 게 아닌가하는 반성이 든다. 그녀는 단지 가장 본인답게 살고자 했을 뿐이었다. 우리 안에 진짜 '나'가 있을까?  

칠흑같이 어두운 밤 하늘의 떠도는 별은 영원히 빛날 것처럼 떠있다. 그녀는 세상의 온 검정을 가졌고 그녀의 혁명 또한 조용한 바람이 되어서 우주를 떠돌 것 같다. 검정은 거대한 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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