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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티멘털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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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언젠가 맡아본 냄새, 언젠가 와본 것 같은 낯익음. 책을 읽는 내내 이 알 수 없는 존재의 발현은 확실성의 구도가 일그러져있는 그저 ‘낯익다’라는 감각으로 시작된 여행처럼 어지럽고 막막하다. 체험된 유기적인 삶의 언어들이 뒤엉키고, 맞물리고 시간에 의해 제 모양이 만들어진 하나의 기억처럼 《센티멘털》에 나오는 각기 다르지만 낯익은 풍경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묻어져 사라진 줄 만 알았던 감각들을 이끌어 내준다. 이 이미지들은 작위적으로 발생된 것이 아닌 잠재의식이나 내적인 힘에 의해 촉발되느라 조금은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수고를 감내해야 한다. 어떤 반복되는 꿈을 꾸는 일처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면서 무의식을 지배하는 실체 없는 그림자만이 아득히 먼 곳에서부터 똑 똑 떨어지는 물처럼 아스라이 걸어오는 것이다. 환상에 질서와 언어라는 형태가 부여되면서 막연했던 느낌들은 그 진실을 드러내거나 혹은 왜곡된다. <청수>는 바로 이러한 은밀히 무의식속에 지배되는 기억의 흐름을 이야기 하고 있다. 막연하게나마 포착하고 그것을 현실로 의식해 내는 순간 그것은 태양으로부터 셀 수 없이 산발되어온 빛의 파편 조각처럼 흩어져 사라지고 만다. 주인공은 되풀이 되는 이 일상을 괴로워하면서도 ‘통제받지 않은 꿈’에 이끌려 맞추지 못할 퍼즐을 가지고 노는 마조히스트이다. 깊은 내면의 강에서 헤엄을 치며 은근한 즐거움을 누리는지도 모르겠다. 끝없이 맞물리고 순간이 죽음과 영원성으로 변하는 이미지의 환상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청수>가 몽환적인 이미지의 꼬리를 따라 존재의 본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했다면  <다카세가와>는 성적 본성에 의한 집요하리만치 정밀한 묘사로 짙은 인상을 풍기는 작품이다. 작가인 주인공과 잡지사 기자와의 정사 장면이 주를 이루는 이 소설은 남자의 자유로운 행위들을 통해 아픈 기억을 안고 사는 여자의 기억을 보듬어 준다. 결국 다카세가와 강에 던져지는 ‘팬티’는 여자의 낙태의 기억을 최고조로 이끌어 냄과 동시에, 끝을 알 수 없는 포용력과 정화력의 상징인 ‘물’에 버려짐으로써 죄를 씻어내고 상흔을 치유해주는 행위로 볼 수 있다. <청수>에서 죽은 비둘기가 손수건에 의해 덮여지는 이미지와, <다카세가와>의 플라스틱 병에 담아진 팬티를 버리는 행위는 이미지의 전복적인 전환이라는 점에서 닮아있다. <추억>은 낱낱이 흩어진 언어들이 형식의 일탈을 통해 깨어지고 원자화된 시적 느낌을 전해준다. 이 소설의 미학적인 반영은 내용에서처럼 형식의 파괴나 연못가의 차가운 침묵을 깨는 은빛의 가는 핀과 같은 예리함과 날카로움을 지녔다. 내실을 갖지 않은 형식으로 공허해 보이는 자율성은 비로소 예술이라는 형태에 한계를 확장시킨 셈이다. 연장선상 위에서 <얼음 덩어리>역시 같은 시간에 각기 다른 아픔을 가지고 사는 두 주인공이 나란히 서서 걸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형식이 꽤 재미있는 단편이다. 친어머니라는 근원적인 이끌림에 의해 매주 목요일 카페의 여자를 찾는 소년과, 불륜이라는 가책과 연민 사이에서 고민하는 여자가 서로 착각이라는 고리를 반씩 베어 물고 걸어가는 시선처리가 매우 독특하다. 딱딱한 덩어리로 차갑고 강렬하게 찾아와서는 한순간에 물이 되어 녹아 없어지고 마는 착각의 덩어리 바로 ‘물’이라는 정체를 이들 역시 체험한다.
  《센티멘털》은 네 편의 단편을 통해 서로 다르지만 낯익은 느낌들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던져놓고 독자로 하여금 제 각각의 기억을 응시하게 해준다. ‘물’이라는 형상화를 통해서 삶의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자아의 모습을 거울처럼 들여다보게 해주는 것이다. 눈앞에 강이 되어 흐르거나, 내면에 흐르거나 네 작품 안에서 각기 다른 색깔을 지니며 기이한 적요함과 헤어 나오지 못하게 하는 매혹적인 외침을 들려주는 것이다. 그래서 읽는 내내 독자들은 문장과 문장 사이에 가로막히게 되고, 침묵과 기억이 만들어낸 생의 편린들이 물의 자국처럼 남게 될 것임을 목도한다. 우리의 의식 속에 보편적으로 흐르는 슬픔이나 즐거움, 죽음, 사랑 이 외롭고 애처로운 강 위에 작가가 만들어 둔 나룻배를 타고 유유히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은 언제나 신비롭고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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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M & DAD 서평단 모집!
MOM & DAD -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 학부모 세계의 진실
로잘린드 와이즈먼.엘리자베스 래포포트 지음, 이은정 옮김 / 시공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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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아직 미혼입니다만, 평소 부모님과 관계가 좋지 않을 때 항시 생각해오던 다짐 같은게 있습니다. 부모가 되면 절대 우리 부모처럼 상처주지 않겠다.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부모의 역할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보곤 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한 교육인가에 관한.

<MOM & DAD>는 다소 한국 교육 풍토와는 동떨어진 면이 있지 있지 않을까 한 애초의 우려를 깼습니다. 보다 보편적이고도 중요한 문제들을 친절하게 접근하고 있더군요.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내가(부모로서의) 어느 부모 유형인가에 대한 보다 면밀한 '자기검증'을 할 수 있겠다란 부분이었습니다. 저의 교육철학(?)에 의하면 저같은 유형은 말없는 부모유형에 속하겠더라구요. 저 스스로가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해 온 부모로서의 위치, 역할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이 역시 그리 좋은 교육은 아닌 듯 했습니다. 결국 독자가 원하는 건 어떻게 해야 좋은 부모가 될 수 있겠냐하는 물음에 답해주는 것일텐데, 이 책에서는 어떻게 해라 라는 건 직설적으로 전하고 있진 않습니다. 다만 부모로서의 '내' 자신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의 반성되어야 할 부분에 대해 거침없이 비판해 줍니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아마 독자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돌아보게 될 것입니다.

'나'를 반성하는 일이 곧 자식에게 이어지는 좋은 가르침이 될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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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이 오기 전에
시게마츠 기요시 지음, 김성기 옮김 / 이레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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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직도 덜익은 밤 한톨을 꼬독꼬독 씹어 먹는듯 입안에서 개운치 않은 것들이 맴돈다. '그 날이 오기 전에'를 읽고 난 느낌이란 게 이렇다. 삶을 그리 진지하게 살아가지 않은 내게 뭔가 강펀지를 날리려고 작정하고 달려든 기세였다. 읽는 내내 '죽음'이라는 그림자는 내 얼굴을 그리 밝지 않은 인상으로 남기는데 성공했다. 진지함과 감동이라는 감정을 호소 혹은 협박당하며 그들의 주변을 차근히 보게 만들었다.

7편의 소제목에 따른 중단편의 한 목소리는 바로 '죽음'을 가까이 한 자들의 발자국들이다. 그게 나일수도 먼저 떠난 남편이나, 하나밖에 없는 혈육 내 어머니일수도 있다. 의외로 이 책이 마음에 든 점은 '죽음' 의 상황이 대놓고 눈물로 호소한다거나 하진 않았다는 점이었다. 각 상황들은 오히려 담담했고 초조하지 않은 얼굴로 죽음을 맛보도록 인도했다. 호들갑이라고 표현하는게 좀 뭣하지만 통곡에 나날로 여생을 보냈다 투의 분위기 조장의 틀은 애초에 없었다. 이를 계기로 하여 상대방을 좀 더 이해하고 과거를 정리하는 데 좋은 구실이 되었다 정도이면 모를까. 우리네 삶도 '죽음'이 무조건 삶의 마지막 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는 것 아닐까?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은 것은, 굳이 죽음을 슬프게만 받아들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각각의 주인공을 통해서 충분히 공감했기 때문이었다.    

- 매미는 땅속에서 7년을 보내다가 성충이 되어 지상으로 나오면 불과 보름 만에 죽는다. 어렸을 적에 책에서 읽은 내용이 새삼스레 머리 위를 짓눌렀다. 어쩌면 땅속에서 보내는 시기를 '유충'이라고 부르는 게 문제인지도 모른다. 매미는 원래 땅 속 생물이고, 지상에 나온 뒤의 모습은 '성충'이 아니라 '수의(壽衣)'라고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면 불과 보름밖에 남지 않은 생명을 슬퍼할 일도 없다. 매미는 이미 땅속에서 충분히 산거니까. 날개가 돋아난 뒤의 지상에서 보내는 시간은 '만년'에 불과한 거니까......   -p.115 중

아쉬움의 기로에서도 날개를 펴고 열심히 살았노라 충분히 느끼는 그 것. 그리고 내 날개를 매만져 주던 그들과의 사랑. 이것들을 함께 공유했다는 사실이 죽음의 끝을 끝이라 말하지 않게 해주는 건 아닐까. 

'그날이 오기 전에'가  좀 더 임팩트 있는 스토리나 기발함을 가졌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지만 각각의 중단편이 교묘히 맞닿아 흐르는 점을 찾는 재미는 흥미로웠다. '죽음'의 상황에 닥친 자들이, 혹은 이미 겪어낸 자들이 어떻게 내일의 날개를 펼칠 지 궁금한 독자들에게 권해주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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