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인간을 사랑하면 인류 전체를 사랑하게 된다. 인간을 둘이나 사랑하면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고 꼼짝없이 사랑에 사로잡힌다.

그저 내 주위에 현실세계를 다시 창조하고 싶다. 설령 현실세계가 환상에 불과하고 이 터무니없는 공간이 진실일지언정 허구의 현실세계라도 되찾고 싶다. 걷고 달리고 뛰어오르고, 땅을 파고 초목을 기르고. 무슨 악마 같은, 공중의 권세를 잡은 괴물* 따위가 아니라 지상의 생물이 되고 싶다. 그것이 유일한 바람이다

이유를 따지는 건 인간의 헛짓이야.

내면에서 눈을 돌려 바깥세상을 바라보자. 내면세계의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되도록 내버려두자.

우리는 우리를 간단히 ‘우리’라고 칭할 뿐이다. ‘우리’는 자신이 어떤 생물인지 이해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생물이다.

우리에게 전해진 이야기는 시간과 공간을 벗어나면서 처음에 지녔던 특수성을 잃어버리는 대신에 본질적 순수성을 얻어 이야기 자체만 오롯이 남는다. 그리고 더 나아가, 혹은 우리가 선호하는 표현으로는 그러한 이유로,비록 그 이유가 무엇인지 무엇이었는지 우리 스스로는 알 수 없지만 비로소 우리가 아는 이야기가 되고, 우리가 이해하는 이야기가 되고, 우리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우리의 현재에 대한 이야기, 어쩌면 우리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게 바로 나야! 그녀가 외쳤다.

너무 비참해서 나는 아버지가 딸을 멸시하는 게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건강한 상태라고, 오히려 내가 여자로 태어난 게 재앙이라고 믿었어. 그런데 이제야 진실이 드러난 거야. 아버지는 탈이 나셨고 나는 멀쩡해. 아버지를 중독시킨 독이 뭐냐고? 아버지 자신이겠지.

이때 그녀는 흐느끼고 있었다. 정원사 제로니모는 그녀를 안아주며 인간이 비인간 연인에게 해줄 수 있는 보잘것없는 위로를 건넸지만 실은 그 역시 심각한 실존적 고민에 빠진 터였다.

의미란 여러 조각이 없어져버린 퍼즐과 같아서 인간이 친밀도를 바탕으로, 즉 자기가 잘 아는 파편들을 가지고 형성해가는 것이다.

그들은 서로를 통해 세상이 좋은 곳이라고 믿게 되기를 바랐다. 이 세계든 저 세계든 살아 있는 두 생명이 이렇게 마주 안고 마법의 주문을 외울 수 있는 세계라면.

사랑하는 법을 잊어버린 왕에 대한 근심에 그녀는 첫사랑의 기억을, 적어도 그녀를 처음 사랑했던 소년들의 기억을 포개어보는데, 그들도 처음에는 무시무시한 흑마신도 아니고 아버지의 적도 아니었다. 그 시절 자바르다스트는 귀엽고 진지한 소년 마법사였는데, 지극히 엄숙한 표정으로 각양각색의 우스꽝스러운 어릿광대 모자에서 정말 터무니없는 토끼를?실제로 존재한 적도 없는 괴상망측한 키메라 토끼와 그리핀 토끼를?끄집어내곤 했다. 끊임없이 재잘거리며 농담을 던지고 잘 웃던 자바르다스트는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아이였다. 주무루드 샤는 늘 자바르다스트와 정반대였는데, 근육이 울퉁불퉁하고, 말주변이 없어 웅얼거리기만 하고, 그렇게 말을 못해서 늘 심술궂었지만 둘 중에서 더 잘생겼다는 사실만은 부인할 수 없었다. 부루퉁한 백치미를 지녔다고나 할까, 아무튼 거대하고 멍청한 꽃미남을 좋아한다면.

마족은 일부일처제를 경멸하므로 지상에 비해 마계에서는 별 문제도 아니었건만 그들은 늘 그녀의 애정을 독차지하려고 경쟁을 벌였다.

지금은 기억도 안 나지만 아마도 둘 모두와 섹스를 했을 텐데, 어쨌든 그리 대단한 감명을 받지는 못했고, 그녀는 성에 안 차는 이 마신들의 구애를 외면하고 더 애처로운 인간에게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자바르다스트는 서서히 어둡고 냉혹한 성격으로 변해갔다. 아마도 그가 제일 많이 사랑한 듯싶으니 그녀를 잃은 상실감도 그만큼 컸으리라.

"옳고 그름, 그리고 합리성에 대한 관심은 인간의 불행이야. 벼룩이 개의 불행이듯이. 마족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행동할 뿐, 선이니 악이니 하는 진부한 문제로 고민하지 않아. 그리고 마족이라면 누구나 알듯이 우주는 원래 비합리적이라고."

그날부터 그들은 그녀의 적이 되었고, 하루살이처럼 고작 하루를 살고 죽어버리는 인간에게 밀려 퇴짜를 맞았다는 굴욕감 때문에 인류를 증오할 이유가 하나 더 늘어났고,

아름다운 수다쟁이 엘라 엘펜바인, 누구에게나 상냥하고 자신의 몸을 자랑스러워했던 그녀는 때때로 제로니모보다 아버지 벤토를 더 깊이 사랑하는 듯 보였다.

정신 바짝 차려라, 넌 환상에 빠진 거야, 지금 두 발은 멀쩡히 지면을 딛고 있지만 머리는 까마득한 구름 속을 헤매는지도 몰라.

그는 자신의 괴로움이 향수병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h-빠진-바그다드의 계단통에 둥둥 떠 있는 블루 야스민과 시스터 올비, 올리버 올드캐슬과 철학녀를 그대로 두고 떠나왔는데, 멈춰버린 동영상 같은 이 장면도 다시 움직이게 해줘야 했다.

우리는, 나중에 태어나서 그때를 돌이켜보는 우리는 이미 잘 안다.

우리 시대가 정말 우리가 말하듯이 정상인지, 아니면 그저 그때와는 또다른 비정상인지는 모르겠지만.

진정한 주제는 그렇게 계속 주제가 바뀐다는 사실뿐인 듯싶고, 단 오 분이라도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고 결말까지 가는 이야기는 하나도 없으니 이렇게 정신없는 상황을 도대체 누가 견딜 수 있을까 싶고, 그런 환경에 무슨 의미가 있을 리 없으니 온통 부조리뿐이고, 거기서 붙잡을 만한 의미는 무의미뿐이다.

우리 역사에 따르면 바로 그 순간 그가 보여준 이 침착성에 미래가 갈렸으니, 그의 미래뿐만 아니라 우리의 미래도 함께 갈렸던바, 그는 재빨리 찬합을 집어들고 카프산의 비탈이 내려다보이는 발코니로 달려가서 그 치명적인 물건을 있는 힘껏 하늘 높이 던져버린다.

제로니모처럼 강인하고 과묵한 사람은 유난스러운 감사 표시에 당황했으리라.

험담이란 말로 빚은 진흙 같은 것, 진흙이 으레 그렇듯이 찰싹 달라붙기 때문이다.

복수에 대한 계획을 선왕에게 밝혔고, 선왕도 굳이 만류하려 하지 않았는데, 이미 죽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원래 마족은 억울한 일을 당하면 다른 뺨을 내주기보다 당한 만큼 갚아주기 때문이었다.

안락의자에서 눈을 뜬 제로니모 마네제스는 처음부터 이런 삶이 자신을 기다렸음을 깨달았다. 불확실한 삶, 당혹스러운 변화.

연인이 연인을 부르는 목소리가 아니라 위엄이 넘치는 지배자의 목소리, 예컨대 턱밑 사마귀에 털이 돋아난 할머니가 가문의 어린아이를 부르는 듯한 목소리였다.

오래전 브라질의 한 여성 예술가는 자국민에게 각자 자기 피부색의 이름을 지어보라고 청한 후 각각의 피부색을 구현한 물감 튜브를 생산하고 색상마다 그 피부색인 사람이 지은 이름을 붙였다. ‘크고 시꺼먼 사나이 색’, ‘백열전구 색’, 기타 등등. 요즘은 그녀가 생산하는 색상이 어찌나 다채로운지 튜브가 모자랄 지경인데, 우리 모두는 이런 현실이 매우 바람직하다고 널리 믿으며 두루 인정한다.

너는 네 정체를 모를 때도 무중력 병을 스스로 치료하여 지면으로 내려왔으니 앞으로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상상해보아라.

인간 자아는 모래시계에서 흘러내리는 모래를 주시하며 늘 다급하고 덧없는 삶을 살았던 반면에 새로 발견한 마족 자아는 시간을 가볍게 무시해버리고 연대표 따위는 그저 생각의 폭이 좁아서 생긴 병폐 정도로 여겼다. 외부세계와 자신을 지배하는 변화의 원리도 깨우쳤다. 별, 귀금속, 각종 보석 등 반짝이는 것이 점점 더 좋아졌다.

"적어도 하루에 열두 번씩 섹스를 못할 바에는 차라리 수녀가 되는 게 낫겠다, 얘. 너야 옛날부터 책을 좋아했고 솔직히 말하자면 인간도 사알짝 지나치게 좋아했으니, 물론 나야 널 사랑하지만 사실은 사실이니까, 그래서 너는 섹스를 안 해도 우리보다 잘 견딜 테고 그냥 책이나 읽으면 되겠지만 우리는, 얘, 우리 대부분은 그게 생활이잖니."

한창 잘나갈 때는 단 하루라도 헬스클럽이나 요가센터에 못 가면 하루를 헛살았다고 느꼈다.

아, 쥐랄. 술기운에 뭉개진 발음으로 중얼거렸다.

우리는 가속화에 중독되어 느림, 여유, 한가로움의 즐거움을 망각했고, 세 권짜리 소설도, 네 시간짜리 영화도, 열세 편짜리 연속극도, 끈기와 머무름의 즐거움도 잊어버렸다. 할일 있으면 어서 하고, 할 이야기가 있으면 털어놓고, 살 만큼 살았으면 꺼져버려라,빨리빨리.

그들은 신앙심의 필수 요소는 적개심이라고 믿었는데, 홀쭉이 옆에 뚱뚱이라고나 할까,

역사는 얼마나 불완전한가! 반쪽뿐인 진실, 무지, 속임수, 가짜 단서, 착오, 거짓말 등의 오리무중 어딘가에 진실이 묻혀 있으련만 우리는 믿음을 잃어버리기 쉽고, 그래서 다 허깨비다, 진실 따위는 없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누군가의 절대적 신념이 또 누군가에게는 망언에 불과하다, 그렇게 말하기 쉽다.

우리가 알지 못하더라도 진실은 분명히 존재한다.

제로니모는 평소처럼 느긋하게 움직이는 것만으로 주변의 모든 것을 느려지게 만들 수 있다니 참 흥미롭다는 생각을 했고,

새로 얻은 재간으로 그들을 살포시 지상으로 내려놓고, 불평을 들어주고, 책임을 인정하고, 사과하고, 포옹하고, 평범한 일상을 돌려주고, 그렇게 이 광기 속에서 그들을 구조하고 친구가 되어 함께 기뻐해야 했다.

바로 그 순간을 이 세상에 상식을 회복하는 신호탄으로 삼아야 했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제로니모 자신도 상식을 되찾는 일을 해야만 했다.

하강은 무심결에 해낸 일로 떠오를 때만큼이나 뜻밖이었지만 자신의 내면에서 일찍이 상상조차 못했던 비밀 자아가 눈을 뜬 결과라는 것도 이해했다.

그러나 지상으로 다시 내려오는 데 어쩌면 인간적 측면도 함께 작용했는지 모른다. 아무래도 잘못했다는, 자기가 잘못한 탓이라는 생각을 극복했기 때문이다.

허공에 떠 있던 외로운 시간 동안 그는 일생의 온갖 어두운 기억을 직시했다. 예전의 인생과 결별하는 아픔, 그를 외면하고 그 역시 외면했던 인생행로에 대한 번뇌. 그는 이 깊은 상처를 인정하고 자신에게 보여줌으로써 고통보다 강해졌다. 그리하여 중력을 되찾아 지상으로 내려왔다. 최초 감염자가 질병의 근원으로 끝나지 않고 치유의 근원이 되었다.

나이 따위는 생각에서 멀어지고 이제 내면의 눈 앞에 드넓은 가능성의 들판이 펼쳐졌다.

그녀는 바야흐로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은 비관주의만이 아님을, 상황이 나빠지기도 하지만 좋아지기도 한다는 점을, 가끔은 기적도 일어난다는 것을 비로소 실감하는 중이었다.

마치 일 년 반 전에 잃어버렸던 소중한 반지를 오랫동안 열어보지 않은 서랍 속에서 발견하듯이 잃어버렸던 희망을 거짓말처럼 되찾았으니, 모든 것이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었다.

삶을, 자신의 삶을, 인간으로서의 삶을 오롯이 되찾으려면 먼저 전쟁터에 승리의 깃발을 꽂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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