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충제는 대부분 비선택적이다. 없애려는 특정한 종만을 제거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맹독성이라는 단순한 이유 하나만으로 그 살충제를 사용하는 것이다.

살충제와 접촉하는 모든 생물, 가족들의 사랑을 받는 고양이, 농부가 키우는 가축, 들판에서 뛰노는 토끼, 하늘 높이 날아가는 종달새가 모두 위험에 빠진다. 이런 동물은 인간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다. 사실 동물들과 그 주변 환경의 존재 덕에 인간의 삶이 더욱 즐거워진다. 그러나 인간은 그 보답으로 갑작스럽고 무시무시한 죽음을 선사한다.

살아 있는 생물에게 고통을 주는 행위를 묵인하는 우리가 과연 인간으로서 권위를 주장할 수 있을까?

새들 역시 죽어갑니다. 무언가 대책이 있을까요? 이런 상황을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요?

아끼는 암말과 망아지를 돌보기 위해 일찍 일어난 어느 날 아침, 저는 지저귀는 새를 단 한 마리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기괴하고 두렵기까지 한 일이었습니다. 완벽하고 아름다운 이 세상에 인간은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일까요?

수많은 미국인에게 울새의 출현은 기나긴 겨울에서 벗어났음을 의미한다. 이 새의 등장은 뉴스를 통해 보도될 정도이고, 사람들은 아침 식탁에서 울새 이야기를 하느라 정신이 없다. 울새의 수가 점점 증가하고, 숲에 처음으로 녹색 안개가 피어오르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아침 햇살 사이로 울려 퍼지는 새들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새로운 봄날을 맞는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들은 모두 지나간 옛일이 되어버렸고, 언젠가부터 사람들은 새가 돌아오지 않는 것을 당연시 여기게 되었다.

새들은 ‘불행을 전혀 예상치 못한 채’ 자신들에게 익숙한 곳으로 다시 날아온 것이다.

치명적인 중독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울새를 멸종으로 이끄는 또 다른 요인이 있다. 불임이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모든 새에게 드리워지는 것이다. 불임은 농약과 잠재적 접촉 범위 내에 있는 모든 생물에게로 확대되고 있다.

무성한 관목 사이를 헤치며 날아다니다 낙엽 위에 내려앉아 바스락거리면서 먹이를 찾는 숲참새, 흰목참새도 농약에 희생되고 말았다.

새들도 자취를 감춰버렸다. 그중에는 진홍색과 황금색 머리장식이 눈길을 끄는 숲의 요정 솔새와 모기잡이새, 봄이 되면 떼 지어 돌아와서 나무 사이마다 다양한 생명의 색채를 퍼뜨리는 휘파람새가 있다.

나무 위에 사는 휘파람새는 중독된 곤충을 먹음으로써 직접적으로 중독되기도 하고, 먹이 부족이라는 간접적인 영향을 받기도 한다.

이제 여름날 아침에는 새의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남은 새라고는 그저 비둘기, 찌르레기, 참새뿐. 참기 어려운 비극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집 뒤뜰의 아름다운 새들이 모두 죽는 날이 올까봐 두렵습니다. 슬프고도 가슴이 메는 일입니다. 그러나 저를 더욱 좌절시키고 화나게 만드는 것은 도살자들이 목표로 한 일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점입니다.

살충제는 새를 죽이지만 그렇다고 느릅나무를 살리지도 못한다.

‘종 다양성 유지’

유독물질은 살충제와 직접 접촉을 하지 않은 새들의 다음 세대에까지 전달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독수리의 체내 조직에도 많은 DDT가 축적되었던 것이다. 농병아리·꿩·메추라기·울새 들처럼 독수리 새끼도 점점 줄어들고 있으며, 종의 연속성을 유지하기가 힘들어지고 있다.

새가 쉽게 이삭을 따먹지 못하는 옥수수 종자를 뿌리면 문제가 간단했을 것을, 농부들은 독극물로 새들을 없애버리기만 하면 간단하다는 용이성에 현혹되어 죽음의 사명을 띤 비행기를 띄웠다.

훼손되지 않은 자연을 찾아다니다 길을 잘못 든 사람들이 오염 지역에 발을 들이는 것은 누가 막을 것인가?

고요한 연못에 돌을 던지면 잔물결이 일듯이, 유독물질의 연쇄 작용을 일으켜 죽음의 물결을 퍼뜨리는 사람은 누구인가? 한쪽 접시에는 딱정벌레들이 갉아먹은 나뭇잎을 올려놓고, 다른 쪽 접시에는 유독성 살충제가 무차별적으로 휘두르는 몽둥이에 스러져간 새들의 잔해와 다양한 빛깔의 가련한 깃털들을 올려놓은 채 저울질한 사람은 누구인가?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하늘을 나는 새들의 부드러운 날개가 모두 사라져버린 황폐한 세상이 되더라도 벌레 없는 세상을 만드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결정한 사람은 누구인가? 설령 그런 사람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가 결정을 내릴 권리를 가질 수 있는가? 결정을 내리는 사람은 우리가 잠시 권력을 맡긴 관리들이다. 이들은 아름다움과 자연의 질서가 깊고도 엄연한 의미를 갖는다고 믿는 수많은 사람들이 잠깐 소홀한 틈을 타 위험한 결정을 내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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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고유한 복원력을 바탕으로, 대부분의 관목이 다른 나무의 침입에 강하게 저항한다는 사실을 이용한 것이다.

선택적 살포란 도로와 철로 변을 풀밭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직접 처치를 통해 키 큰 나무들만 제거하고 다른 식생들은 보존하는 것이다.

관목이 터를 잡은 곳에서는 다른 나무들이 자랄 수 없다. 식물 생장을 조절하는 최선의 방법이자 최고로 안전한 방법은 화학약품을 뿌리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다른 식물을 이용하는 것이다.

대부분 한번 굳어진 습관은 바꾸기가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대규모 제초제 살포가 계속 이루어지고, 납세자들은 그 엄청난 비용을 책임져야 하며, 거미줄처럼 얽힌 생태학적 연결에 문제가 생긴다. 이런 사실이 잘 알려지지 않았기에 약물의 무차별 살포가 계속 번성하는 것이다. 만일 사람들이 마을 도로변에 제초제를 매년 한 번씩 뿌리는 대신 20∼30년에 한 번만 뿌려도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분개한 납세자들은 분명히 들고일어나 제초 방법의 변화를 요구할 것이다.

2,4-D를 뒤집어쓴 금불초는 가축들에게 좋은 먹이로 비쳐진다.
이런 문제가 일어나는 것은 화학약품이 식물의 대사 작용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화학약품이 식물의 당분을 일시적으로 증가시켜 동물들에게 먹음직스럽게 보이도록 하는 것이다.

"인간은 도자기 진열실에 들어간 코끼리처럼 자연을 짓밟고 있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곡식 사이에 자라는 잡초들이 모두 해로운지, 혹시 그중 어떤 것은 도움이 되지는 않는지 잘 알지 못한다."

네덜란드 식물보호국의 과학자들은 화학 살충제를 뿌리거나 토양에 약물을 살포하는 대신 장미나무 사이에 마리골드를 심으라고 제안했다. 순종원예주의자들이 잡초로 취급하는 마리골드의 뿌리에서는 토양 속의 선충류를 죽이는 물질이 분비된다. 공원 측은 이 충고를 받아들여 어떤 장미꽃밭에는 마리골드를 심었고, 몇 군데는 그대로 두었다. 결과는 놀라웠다. 마리골드의 도움으로 장미는 다시 건강하게 번성했다. 그런데 마리골드를 심지 않은 꽃밭의 장미는 이미 시들었다가 점차 죽어갔다. 오늘날 선충류를 해결하는 데 마리골드가 널리 사용되고 있다.

흔히 ‘잡초’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는 이런 자연적 식물 군락은 토양 상태를 나타내주는 지표 구실을 한다. 그런데 화학 제초제를 사용하면 이런 유용한 기능이 상실되게 마련이다.

"잡초를 없애기 위해 2,4-D를 광범위하게 사용했지만, 또 다른 잡초가 갑자기 늘어나 옥수수와 콩에 상당한 위협이 되고 있다."

자연을 제어하려는 노력이 부메랑처럼 원점으로 되돌아온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건초열의 원인이 되는 돼지풀이다.

대기 중에 날리는 꽃가루의 원인은 길가가 아닌 도시의 빈터나 휴경지에서 자라는 돼지풀이다.

상표 이름만으로는 성분을 절대로 짐작할 수 없는 이런 화학물질들에는 수은, 비소, 클로르데인 등이 포함되어 있다.

몇몇 도로변에서 선택적 살포가 성공을 거둔 것을 보면 농장, 숲, 목장 등에서도 생태학적으로 건전한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희망을 발견하게 된다. 이 방식은 특정 생물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 식생을 살아 있는 공동체로 인식하는 것이다.

생물학적 방제법은 원치 않는 식생을 조절하는 데 괄목할 만한 성공을 거두었다.

오늘날 우리를 괴롭히는 많은 문제는 자연이 이미 대면한 것이고 또 자연은 그런 문제를 나름의 방식으로 잘 해결했다. 인간이 자연을 관찰하고 열심히 따라할 정도로 영리하다면 성공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바람직하지 않은 식물을 방제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특정 식물을 먹이로 하는 곤충을 이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목초지를 관리하는 데 이런 가능성이 대체로 무시되었다.

곤충들은 자신이 원하는 식물만 먹이로 삼는데 그런 제한적인 식성을 잘 이용한다면 우리에게 상당한 이익으로 돌아올 것이다.

최근 몇 세기 동안의 역사를 살펴보면 서부 평원에 사는 버펄로의 도살, 시장에 내다 팔려는 사냥꾼들의 바닷새 남획, 깃털을 얻기 위한 해오라기 포획 등의 사례가 보여주듯 어두운 길을 걸어왔다.

여기에 무차별적으로 대지에 뿌려지는 화학 살충제에 의한 새, 포유류, 물고기, 모든 종류의 야생동물 살해라는 새로운 국면의 위협이 추가되고 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연의 그 어떤 존재도 농약살포용 기구를 든 인간을 가로막을 수 없다는 철학을 지닌 듯 보인다.

곤충을 완전 박멸하는 성스러운 전쟁에서 우연한 희생자는 대수롭지 않게 취급된다. 방제 대상인 곤충과 우연히 같은 지역에 살게 된 울새, 꿩, 너구리, 들고양이 또는 가축이 약물의 세례를 받더라도 그 누구도 항의하지 않는다.

새, 포유류, 물고기 중 어떤 종은 한 번 정도의 살충제 살포는 견딜 수 있다고 해도 사실 속으로는 엄청난 피해를 입고 있다.

살충제가 뿌려지는 지역이 넓을수록 생물의 기본적인 안전을 지켜주는 오아시스가 없어지기 때문에 피해는 더욱 심각해진다.

주 정부에서 발표한 공식 자료에 따르면 풍뎅이가 나타났기 때문에 살충제를 살포했다고 한다. 정당성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사업이 시작되었는데, 주에서는 관련 인력을 제공했고 방제 사업을 감독했으며 연방 정부는 장비와 그 밖의 인력을 제공했고 지역공동체가 살충제 비용을 댔다.

비행기가 계속 방제 작업을 하면서 살충제가 마구잡이로 풍뎅이와 인간에게 살포되었고, 쇼핑을 하거나 일터로 나가거나 점심시간을 맞아 학교에서 나오는 아이들은 ‘아무런 해가 없는’ 독극물 세례를 받게 되었다. 주부들은 현관문과 도로에 떨어진 ‘흰 눈 같은’ 분말을 쓸어냈다.

살충제가 뿌려지고 며칠 뒤 비가 내렸는데, 웅덩이에 고인 빗물을 마시거나 그 물로 목욕을 한 새들은 심각한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이 사업이 거둔 변변치 못한 성과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는데 일리노이 주 생물학자들의 추정치는 최소 수준을 넘지 못했다. 만일 연구 사업에 대한 재정적 보조가 충분히 이루어졌더라면 놀랄 만한 규모의 생태계 파괴 실상이 밝혀졌을 것이다.

셸던에서처럼 화학물질 살포에 의한 총체적인 파괴라는 진짜 비용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또 이러한 판단은 포자 배양은 단 한 번이면 족하고, 초기 투자가 필요한 비용의 전부라는 사실을 무시하고 내린 결론임이 틀림없었다.

수년간의 연구 끝에, 몇몇 성공 사례가 보고되고 있다. 이 ‘놀라운 발전’이 확고하게 자리 잡으면 온전하고 균형감 있는 방제가 가능해질 것이며, 파괴 행위의 정점에서 진행된 중서부의 악몽 역시 정당화될 수 없을 것이다.

일리노이 주 동부에서 자행된 살충제 유포 사건은 과학적 문제뿐 아니라 도덕적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생명을 파괴하지 않고, 또 스스로 자부심에 상처를 입히지 않으면서 생명에 대한 잔인한 전쟁을 수행하는 문명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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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나이트로’ 계열의 화학물질 역시 제초제로 사용된다. 이 물질은 미국에서 사용되는 것 중 매우 위험한 물질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다이나이트로페놀은 물질대사를 급격히 촉진하기 때문에 한때 체중감량제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살을 빼는 데 알맞은 적정량과 중독 또는 죽음에 이르는 치사량 사이의 차이가 아주 미미하기 때문에, 몇몇은 사망하고 많은 사람이 만성중독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

방사능이 유전으로 인해 얼마나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보이면서 심각성 면에서 이와 비슷한 화학물질에 대해서는 왜 무관심한 것일까?

지구상의 많은 사람이 물 부족으로 고통을 겪는다. 인간이 자신의 기원을 망각하고 생존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인지 잊어버리는 순간, 물은 다른 자원과 더불어 무관심의 희생양이 되어버렸다.

단 한 종의 곤충을 없애기 위해 한 주(州)에서만 200만∼300만 에이커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살충제가 뿌려졌다. 이 살충제는 개울물에 직접 뿌려지기도 하고 나뭇잎을 타고 숲속 지표면으로 스며들어 바다를 향해 긴 여행을 시작하기도 했다. 또 곤충이나 설치류를 없애려고 농지에 뿌린 수백만 파운드의 농약이 비를 타고 씻겨 내려가 바다로 흘러가기도 했다.
시냇물과 우리가 마시는 물에 화학물질이 포함되어 있다는 증거가 도처에서 발견된다.

오염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는 매우 힘들다.

수질오염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지하수의 광범위한 오염이다. 어디에서든 물에 살충제를 살포하는 것은 결국 모든 수자원을 위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자연의 구성 요소들이 각기 폐쇄적으로 분리되어 작동한다면 이렇게 지구상의 수자원 전체에 문제가 생기는 일도 없을 것이다. 땅에 떨어진 비는 토양과 암석에 난 구멍과 틈을 따라 점점 더 깊은 곳으로 스며들어 마침내 모든 틈을 물로 채운다. 그러다 언덕 밑에 이르러서는 다시 솟아오르고 골짜기 밑으로 더 깊게 가라앉아 지표 밑을 따라 어두운 바다로 흐른다. 지하수는 느리게는 1년에 50피트(약 15미터), 빠르게는 하루에 0.1마일(약 161미터) 정도의 속도로 언제나 움직이고 있다. 이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수로를 따라 흐르다가 지표 위 샘으로 분출하거나 우물에 고여 들어 솟아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시냇물이나 강으로 유입된다. 비가 강으로 직접 내리거나 지면을 따라 바로 시냇물로 흘러드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흐르는 물은 대부분 지하수 단계를 거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지하수 오염은 모든 물의 오염을 의미하는 것이다.

두 가지 이상의 화학물질이 섞일 경우 강에 방류된 방사성폐기물과 화학물질 사이에서 상호작용이 일어난다. 방사능물질이 이온화하면 원자의 재배열이 쉬워지는데, 이때 화학물질의 본질이 완전히 변하기 때문에 그 결과를 예측하는 것은 물론이고 결과를 통제하기도 불가능해진다.

거의 2년 가까운 기간 동안 플랑크톤은 끊임없이 새로 태어나고 사라졌지만, 물속에서는 검출되지 않던 유독 성분이 세대를 거듭해 번식한 플랑크톤에서는 계속 발견되었다. 호수에 사는 동물들도 마찬가지였다. 화학물질 투입이 중단된 지 1년 후 실시된 분석에서 물고기, 새, 개구리 등에서도 역시 DDD가 검출되었다. 이 동물들의 체내에서 발견된 화학물질은 물속의 농축도보다 훨씬 더 강했다.

우리는 자연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그 어떤 것도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 세상이 어떻게 오염되고 있는지 좀더 확실하게 살피려면 지구상의 또 다른 자원인 토양에 관해 알아봐야 한다.

대륙의 표면을 덮고 있는 얇은 층인 토양은 인간을 비롯한 지상 모든 생물의 생존을 결정한다.

우리는 땅속 유기체들의 상호관련성과 그들이 사는 세계, 그 위의 세계에 관해 너무나도 모르고 있다.

토양 속의 생물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박테리아와 실처럼 미세한 균류이다.

박테리아, 균류, 해조류는 유기물을 썩게 만들어 동식물의 유체를 원래의 구성 원소인 무기물로 환원시키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한다.

이런 미생물이 없다면 토양과 대기와 살아 있는 생물들을 통한 탄소와 질소의 순환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화학물질을 사용하는 해충 방제는 토양이 아무런 반격도 하지 않은 채 독극물을 그대로 수용하리라는 추측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토양의 본성에 관해서는 아무런 배려도 없이 말이다.

토양에 뿌려지는 살충제에 관해 꼭 기억해야 할 것은 그 독성이 몇 달 또는 심지어 몇 년까지도 지속된다는 사실이다.

토양에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에만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식물 조직이 오염된 토양에서 흡수한 살충제의 양이 얼마나 되는지에 대해서도 신경을 써야 한다.

1960년 시러큐스 대학교에서 만난 일단의 과학자들도 이런 사실에 대해 의견 일치를 보았다. 이들은 화학물질이나 방사능물질처럼 ‘잠재적으로 위험을 지니며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은 수단’의 사용에 관해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인간이 행하는 몇몇 잘못된 시도는 토양의 생산성을 파괴할 것이며, 결국 절족동물이 이 땅의 주인이 될 것이다."

태양 에너지를 이용해 우리의 식량을 만들어주는 식물이 없다면, 인간의 존재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식물에 대해 우리는 정말로 편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즉각적인 이용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면 그 식물을 잘 키우고 보살핀다. 하지만 지금 당장 별로 바람직하지 않거나 관심 없는 거라면 즉시 이 식물을 없애버린다.

인간이나 가축에게 해를 끼치는 식물뿐 아니라 먹을거리를 제공해주는 식물이라고 해도 우리의 좁은 소견으로 볼 때 잘못된 시간, 잘못된 장소에 있다면 바로 제거의 표적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별로 원치 않는 식물과 연관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제거되는 식물도 있다.

식물과 대지, 식물과 식물, 식물과 동물 사이에는 절대 끊을 수 없는 친밀하고 필수적인 관계가 존재한다. 식물 역시 생명계를 구성하는 거대한 네트워크의 일부이다. 우리는 가끔 이런 관계를 교란하는 선택을 하는데, 그렇다고 해도 한참 후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사려 깊게 생각해야 한다.

어떤 일을 계획할 때에는 그 주변 역사와 풍토를 고려해야만 한다. 자연 식생은 그 환경을 구성하는 다양한 생물이 벌이는 상호작용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왜 이런 경관을 갖추게 되었는지, 왜 있는 그대로 보존해야 하는지 그 이유가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다. 마치 활짝 펼쳐진 책처럼 말이다.

우리는 그 펼쳐진 쪽조차 읽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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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몇몇 전문가가 아닌 다수의 일반 대중을 위해 글을 썼다.

생태계 전체를 조망할 줄 알았던 그녀는 생태학이 학문적으로 인정받기 전부터 이미 생태학자였다.

앨러게니 언덕을 헤집고 다니던 어린 시절, 그곳에서 발견한 조개 화석으로 인해 한때 이 일대를 뒤덮었던 바다 생명체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되었다.

그녀는 기사에서 굴 양식과 채취 방법의 변화, 폐기물의 해안 투기 규제 등을 강조했다. 기사에 ‘R. L. 카슨’이라고 서명했는데, 독자들이 필자를 남자로 생각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래야 사람들이 자신의 연구 결과를 좀더 심각하게 받아들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연계를 해석하고 이를 전달할 수 있는 작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전 세계 독자들은 복잡한 과학을 명쾌하게 설명해주는 그녀의 글과 바다 생명에 대한 관심, 자연의 경이에 대한 사랑에서 위로를 받았다.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아 수수께끼가 되어버린 세계에 관해 그녀는 믿을 만한 목소리를 내는 작가였다.

그녀는 과학과 기술의 산물은 ‘전체 생명계’의 안전과 이익에 따라 평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저 침묵하고 있다면, 나에게 평화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생물을 위험으로 몰고 가지 않는 적절한 양의 화학물질만이 살포된다고 믿는 사람이 있을까. 이런 화학물질은 ‘살충제’가 아닌 ‘살생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참아야 하는 의무를 지고 있기에 알 권리 역시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저 자연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녀는 강조했다.

부분이 생존하려면 결국 전체가 건강해야 한다. ‘인간이 몸담고 있는 환경 전체의 오염’으로 식물, 동물, 인간의 세포 속에 유해물질이 축적되고 유기체의 유전 구조가 변형되는 것이다.

인간의 건강은 환경 상태의 궁극적인 반영이라고 카슨은 믿었다. 이런 생각은 자연과 과학, 오염을 초래한 기술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바꿔놓았다. 과학계가 카슨의 이런 주장을 조금씩 인정하는 가운데, 우리 몸을 생태계로 인식하게 된 것은 그녀가 끼친 매우 중요한 영향 중 하나다.

업계에서 볼 때 카슨은 대수롭지 않은 현실에 문제를 제기하는 히스테릭한 여성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는 ‘새와 토끼를 좋아하고’, 고양이를 키우며 사는 여성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카슨은 유전학에 지나치게 관심이 많은 낭만적 경향의 독신녀에 불과했다. 한마디로 통제불능의 여성, 본분을 망각하고 과학 분야에서 도를 넘어선 존재였다.

자신이 목격한 진실을 전하기 위해 살아남아야 하는 도전에 모든 에너지를 집중했다. 그녀는 소란을 일으키고 혼돈을 불어오기 위해 노력했다. 물론 위엄과 신중함을 갖추고 말이다.

카슨은 한 개인이 사회를 어떻게 바꿔놓을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가 되었다.

DDT의 미국 내 제조는 금지되었지만 그 수출은 금지되지 않았으며 지구 대기층과 해양, 강물과 야생의 환경오염은 줄어들지 않았다.

DDT는 지구상 모든 해양의 새와 어류의 간에서 발견되며 여성의 모유에서도 발견된다.

"우주의 경이와 현실에 명확하게 집중할수록 인류 파괴의 고통을 덜 겪게 될 것이다. 경이와 겸손은 온전한 감정이고 파괴에 대한 욕망과는 절대 함께할 수 없다."

경이와 겸손은 《침묵의 봄》이 준 선물이다.

이 책은 천천히 음미해가며 읽어야 한다. 인간 본성의 어두운 측면이 아닌 생명이 지닌 가능성의 약속을 위해서.

미국 대륙 한가운데쯤 모든 생물체가 환경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마을이 하나 있다. 이 마을은 곡식이 자라는 밭과 풍요로운 농장들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데, 봄이면 과수원의 푸른 밭 위로 흰 구름이 흘러가고 가을이 되면 병풍처럼 둘러쳐진 소나무를 배경으로 불타듯 단풍이 든 참나무, 단풍나무, 자작나무가 너울거렸다. 어느 가을날 이른 아침 희미한 안개가 내린 언덕 위에서는 여우 울음소리가 들려왔고, 조용히 밭을 가로질러 달려가는 사슴의 모습도 때때로 눈에 띄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낯선 병이 이 지역을 뒤덮어버리더니 모든 것이 변하기 시작했다. 어떤 사악한 마술의 주문이 마을을 덮친 듯했다. 닭들이 이상한 질병에 걸렸다. 소 떼와 양 떼가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말았다. 마을 곳곳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듯했다. 농부들의 가족도 앓아누웠다. 병의 정체를 알 수 없는 마을 의사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갑작스러운 죽음이 곳곳에서 보고되었다. 이는 어른들에게만 국한된 일이 아니어서 잘 놀던 어린아이들이 갑자기 고통을 호소하다가 몇 시간 만에 사망하는 일도 벌어졌다.

낯선 정적이 감돌았다. 새들은 도대체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이런 상황에 놀란 마을 사람들은 자취를 감춘 새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새들이 모이를 쪼아 먹던 뒷마당은 버림받은 듯 쓸쓸했다. 주위에서 볼 수 있는 몇 마리의 새조차 다 죽어가는 듯 격하게 몸을 떨었고 날지도 못했다. 죽은 듯 고요한 봄이 온 것이다.

불길한 망령은 우리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슬그머니 찾아오며 상상만 하던 비극은 너무나도 쉽게 적나라한 현실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오늘날 미국의 수많은 마을에서 활기 넘치는 봄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은 왜일까?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이 책을 쓴다.

20세기에 들어서 오직 하나의 생물종(種), 즉 인간만이 자신이 속한 세계의 본성을 변화시킬 수 있는 놀라운 위력을 획득했다.

"인간은 자신이 만들어낸 해악을 깨닫지 못한다".

이렇듯 시간은 생명체의 생존에 필수 요소였지만, 오늘날에는 그런 충분한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는 인간의 상상력이 고안해내고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그렇기 때문에 자연 상태에서는 어떤 대응 상대도 없는 합성물질에도 적응해야만 한다.

미국에서만 매년 500여 종의 화학물질이 등장해 사용된다. 이 놀라운 수치가 암시하는 것은 인간과 동물이 매년 500종의 새로운 화학물질에 적응해야 한다는 사실인데, 이는 생물학적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다윈이 제창한 적자생존론을 증명하듯, 곤충은 살충제에 내성을 지닌 놀라운 종으로 진화해갔다. 그러다 보니 이런 곤충에 사용하기 위한 더욱 강력한 살충제가 나오고 그다음엔 이보다 독성이 더 강한 살충제가 등장하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해충은 살충제 살포 후 생존 능력이 더욱 강해져서 오히려 이전보다 그 수가 많아진다. 따라서 인간은 이 화학전에서 결코 승리를 거두지 못하며, 그저 격렬한 포화 속에 계속 휩싸일 뿐이다.

살충제 선택처럼 사소해 보이는 일이 인간의 미래를 결정하게 되다니 정말 믿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미래의 역사학자들은 우리의 왜곡된 균형감각에 놀랄 것이다. 지성을 갖춘 인간이 원치 않는 몇 종류의 곤충을 없애기 위해 자연환경 전부를 오염시키고 그 자신까지 질병과 죽음으로 몰아가는 길을 선택한 이유를 궁금해할 것이다.

농산물 생산량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광범위한 살충제 사용이 필수적이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생산 과다’가 아닌가?

원시 농업 시대에 곤충은 농부들에게 별로 고민거리가 아니었다. 곤충으로 인한 문제가 심각해진 것은 농업이 본격화하고 대규모 농지에 단일 작물 재배를 선호하게 되면서부터다. 이런 방식으로 농사를 짓게 되면 특정 곤충의 개체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

자연은 자연계에 다양성을 선사했는데 인간은 이를 단순화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오늘날 해충 문제와 관련해서는 지리학적 배경과 역사적 측면을 고려해야 한다.

미국 식물도입국은 전 세계로부터 20만 종의 식물을 들여왔다. 미국의 식물에 해를 입히는 곤충 180여 종 중 절반 정도가 이렇게 외국으로부터 우연히 들어온 것으로 대부분은 식물을 수입할 때 무임승차해 미국으로 건너왔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사활을 걸어야 할 문제는 "그저 한두 종의 식물이나 동물을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고 엘턴 박사는 주장한다. 그보다는 "자연계의 균형을 유지하고 병충해의 폭발적인 위력과 새로운 공격을 약화시킬 수 있도록" 생명체의 특성, 생명체와 환경의 상관관계에 대한 기초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이 옳은지 구분할 수 있는 의지나 예지력을 잃어버린 것일까. 사람들은 효력도 떨어지고 훨씬 해로운 수단을 어쩔 수 없다며 그저 받아들인다.

치명적인 위험에서 아슬아슬하게 비껴서 있는 세상에서 살기 원하는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

내가 지적하려는 것은, 독성이 있고 생물학적 문제를 일으킬 잠재성을 가진 살충제를 그 위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의 손에 쥐어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에게 이 독성물질을 다루도록 허락했다. 그들에게 어떤 동의를 구하거나, 안전한 사용을 위해 필요한 지식을 알려주지도 않은 채 말이다.

전문가의 시대라고 하지만 각자 자신의 분야에서만 위험을 인식할 뿐, 그 문제들이 모두 적용되는 훨씬 더 광범위한 상황은 인식하지 못하거나 무시한다.

우리는 이런 잘못된 위안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에 입혀진 당의(糖衣)를 한시라도 빨리 제거해야 한다.

"참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면, 알아야 하는 것은 우리의 권리다."

유기물은 모든 생명체의 기본적인 작용과 연관되어 있지만 특별한 변형 과정을 거치게 되면 죽음을 초래하는 유독물질로 바뀌기도 한다.

탄소는 여러 개가 모여 사슬 모양이나 고리 모양 등 다양한 배열을 만들어내거나 다른 원소와 결합하는 데서 거의 무한한 능력을 발휘한다. 사실 박테리아에서 흰긴수염고래에 이르는 생명체의 놀라운 다양성은 탄소의 특징에 기인한다. 복잡한 단백질 분자의 기본 역시 탄소이며, 지방·탄수화물·효소·비타민 등에도 탄소가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수많은 무생물에도 탄소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탄소를 생명의 상징이라고 말할 수만은 없다.

어떤 주장이 옳은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 몸속에 건강에 해로운 화학물질이 축적된다는 점이 중요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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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는 잘생겼고 머리가 비상했으며, 존경하는 상관이 지니고 있는 우수함을 또한 존경할 줄 아는 훌륭한 청년이었다. 그는 라투르 신부의 모든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했고, 라투르 신부의 회고담을 들었으며, 라투르 신부가 이야기해 준 추억들을 소중히 여겼다.
「틀림없어요.」 주교는 사제들에게 말하곤 했었다. 「주님께서 내 마지막 남은 세월 동안 나를 도와주라고 이 젊은이를 내게 보내 주신 겁니다.」

그런 공기는 어쩌면 시간이 흐를수록 모든 지구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부족한 식량을 갖고 노숙을 하며 몸을 제대로 씻지도 못한 채 밖으로 나돌아 다니는 생활을 했지만, 그 누구의 집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적어도 그는 친절한 세상에 있다는 느낌을 받았으며 모든 사람의 화덕 옆에서 환영을 받았다고 했다.

여름철 바람이 옛 정원에 있는 라일락 꽃들을 흔들고 말밤나무 꽃들을 떨어뜨릴 때면, 그는 가끔 눈을 감고 나바호 숲에 곧게 줄지어 서 있는 나무들 속에서 아주 높은 음조로 노래하던 바람을 생각했다.

구세계에서 그는 신세계에 대한 향수를 느꼈다. 그것은 자기처럼 늙은 나이에 뉴멕시코에서 사나 프랑스의 퓌드돔에서 사나 별 중요하지 않다는 느낌이었는데, 뭐라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그래서 인간은 잔인한 삶으로 인해 잔인해져 있었다.

마음이 가장 아픈 때는 바로 이른 아침이었다.

그는 이제야, 오래전에 그가 시간이 날 때 그런 것들을 적어 두었어야 했다고, 좀 더 가볍고 유연성 있는 프랑스 모국어로 재빨리 기록해 놨어야 했다고 아쉬워했다.

그곳에는 부드러우면서도 야생적이고 자유로운 어떤 것이 있었다. 베개 위에서 귀에 대고 살며시 속삭이며 마음을 가벼이 해주고 슬그머니 열쇠를 돌려 빗장을 빼내고 감금된 정신을 바람 속으로, 파란색의 금빛 대기 속으로, 아침 속으로, 아침 속으로 풀어 놓아 주는 그 어떤 것이!

아름다운 환경, 학식 있는 사람들과의 교제, 고상한 여자들의 매력, 우아한 예술 등도 그에게 그런 느낌의 사막에서의 마음 가벼운 아침이나, 다시 소년으로 만드는 바람을 잃어버린 것을 대신해 줄 수는 없었다.

뉴멕시코에서 그는 늘 젊은이처럼 깨곤 했었다. 그가 일어나 면도를 할 때에서야 자신이 점점 늙어 가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유럽에 있는 나라들은 인간이 오래 살아온 곳이어서 인간을 위해 편리하도록 자연을 변경시켜 놓았기에 일종의 제2의 인간의 몸 같은 곳이었다. 거기 있는 야생초와 야생의 과일과 숲에서 나는 버섯은 먹을 수 있는 것이었다. 시냇물은 아주 맑고, 나무는 풍족한 그늘과 은신처를 제공했다. 하지만 알칼리성 사막 지대인 이곳에서 물은 독성이 있고, 식물은 굶주리는 사람에게 아무 쓸모도 없었다. 모든 것이 말라빠지고 가시투성이이고 날카로웠다. 스페인 사람들의 총검과 노간주나무와 명아줏과 관목과 선인장만 있을 뿐이었다. 도마뱀과 방울뱀만 있을 뿐이었다…….

베르나르는 라투르 신부의 마음을 이해했다. 언젠가 오래전에 젊은 주교가 앨버커키에서 오는 길을 따라 노새를 타고 오다가 처음으로 산타페를 본 때가 하루 중 그 시간이 될 무렵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종종 그들이 함께 산타페로 마차를 몰고 들어갈 때면, 주교는 언덕 꼭대기에서 베르나르와 멈추어 서곤 했었다. 그곳은 바일랑 신부가 그의 남은 인생을 바쳐 일을 하기 위해 콜로라도로 떠날 때 뒤돌아서 산타페를 보았던 바로 그곳이었는데, 결국 주교도 마지막으로 그렇게 하려는 것이었다.

산타페는 옛날에는 개성이 있었다고, 그 자체만의 스타일이 있었다고 했다.

우연히 떠오르는 그런 이야기들을 그때그때 적어 두게 하지 않으면 잊어버릴까 봐 걱정되기 때문이었다.

「얘야, 난 감기로 죽지 않아. 나는 지금까지 살아온 보람으로 죽을 거야.」

낮 동안에는 뉴멕시코에 대한 그의 향수병이 시들어 가다가, 저녁식사 시간이면 완전히 사라졌다. 그는 저녁식사와 포도주를 즐겼고, 또한 대개는 좋은 사람들로 이제는 은퇴한 세련된 사람들과의 교제를 즐겼다.

물결치는 모양으로 하얗게 회칠한 두터운 벽도 예전과 똑같았는데 소리를 차단시키는 그 벽은 세상과도 단절되어 정신에 휴식을 주곤 했었다.

「건물의 배경은 우연히 정해지죠. 건물이 그곳의 배경과 잘 어울려 그곳의 일부가 되는 경우도 있고, 그곳의 배경과 잘 어울리지 않아 그렇게 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죠. 건물이 처음부터 그곳에 있는 장소와 잘 어울리면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더 잘 어울리게 되죠.」

여기서는 잿빛 새벽이 너무나 오래 머무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이곳 프랑스는 만물이 깨어나 생기를 되찾는 데 너무 오래 걸렸다. 정원과 들판은 눅눅했고, 계곡에는 심한 안개가 끼어 있어 산은 희미했다. 태양이 나와 그 햇살과 온기를 마을에 퍼뜨리고 마을을 정화시키려면 한참 시간이 흘러야 했다.

이들은 온화하고 경건했으며, 예의 바르게 말을 했다.

위대함은 소박함으로 돌아온다는 생각은 늘 아주 매력적이었다.

그들이 거대한 평원을 가로질러 가다가 물도 떨어져 굶어 죽을 지경이었는데 한 젊은이가 말을 타고 가면서 그들을 따라잡더니 잘 익은 석류 세 개를 주고는 질주하여 사라졌다. 이 과일은 갈증을 해소시켜 줄 뿐 아니라 아주 영양가가 좋은 음식이어서 그들에게 생기와 활력을 되찾아 주었고 이로 인해 그들은 다시 기운 차게 하던 여행을 마저 할 수 있게 되었다.

예수님의 역사와 영광이 여러 세기가 지난 후 가난한 사람들 중에 가장 가난하다고 할 수 있는 겸손한 멕시코인 가족의 모습으로 현현했다니, 그것도 세상의 끝에 있는 황야에서, 천사들도 그들을 찾는 일이 거의 드문 그런 곳에서

초창기 프란체스코파 선교사들이 경험한 축복받은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이 황야를 헤매고 다니는 동안 작은 기적들이 무수히 꽃을 피웠던 것 같았다.

한번은, 유명한 후니페로 세라 신부와 그의 두 동료가 강을 건너가다 갑자기 푹 들어간 곳에서 목숨을 잃을 뻔하였는데, 맞은편 강가 바위에서 어떤 이상한 사람이 나타나 그들에게 스페인어로 물살을 따라 더 위로 올라가라고 하기에 그대로 따라 했더니 그곳은 여울물이 얕은 곳이어서 목숨을 안전하게 건질 수 있었다.

그중 초창기 생활에 대해서는 그가 얼마나 자주 회상했으며, 또한 그 시절을 떠올리기를 얼마나 좋아했었던지!

거기서 그들을 환대했던 것은 가족으로 현현한 예수님의 은총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가끔 막달레나나 베르나르가 들어와 무엇을 물으면, 그는 과거의 회상으로부터 현재로 다시 돌아오는 데 몇 초 정도가 걸렸다. 그는 그들이 그의 의식이 없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의 의식은 그의 삶의 더 대단했던 부분, 그들이 알지 못하는 또 다른 부분에서 아주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현재에는 남아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요셉 신부는 죽었고, 올리바레스 부부도 모두 죽었고, 키트 카슨도 죽었고, 그의 인생에 있어 그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던 사람들만이 현재에 남아 있었다.

그는 자신이 베르나르를 보는 것처럼 선명히 요셉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은 여전히 그들이 뉴멕시코에 처음 왔을 때의 모습이었다.

「우리가 미래를 알려고 할 필요는 없어요, 유사비오. 그러지 않는 게 더 좋아요. 그런데 마누엘리토는 어떻게 지내요?」

유사비오는 오래 머물지 않았지만, 내일 다시 오겠다고 했다. 산타페에 며칠간 묵으면서 볼일을 봐야 한다고 했다. 사실 그는 산타페에 볼일이 없었다. 하지만 라투르 신부를 보면서 그는 〈오래 남지 않았구나〉 하고 혼잣말을 했다.

「친구여, 이렇게 한번 만나고 싶었습니다. 사람을 보내 한번 와달라고 해볼까도 했었지만, 워낙 먼 거리라서 그렇게 하지 못했지요.」
늙은 나바호족이 미소를 지었다. 「이제는 그렇게 먼 곳도 아닙니다. 저는 기차를 타고 왔어요, 신부님. 제가 오늘 갤럽에서 기차를 탔는데 오늘 이렇게 여기 와 있게 되었어요. 우리가 함께, 제가 사는 곳에서 산타페까지 오던 때를 기억하시지요? 그때 얼마 걸렸었지요? 2주, 그쯤 걸렸었지요. 요즘 사람들은 훨씬 더 빨리 오갈 수 있어요. 그들이 행동을 더 잘 하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요셉 신부가 친구를 아주 잘 사귀기도 하지만, 한번 사귀면 오래도록 진실한 친구로 만들어 개인적으로 특별히 헌신하도록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한 가지 실례이다.

라투르 신부는 그의 대 교구가 경계선이 바뀐 것 말고는 변한 게 없다고 종종 말했다. 멕시코인들은 늘 멕시코인들이었고, 인디언들은 늘 인디언들이었다.

「얘야, 내가 두 가지 커다란 잘못을 바로잡는 것을 볼 수 있을 만큼 살았다니 다행이야. 흑인 노예가 없어지는 것을 보았고, 나바호족이 그들이 살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 살게 되는 것을 보았으니 말이야.」

그는 아주 어렸을 때 사촌들과 함께 지중해에서 보낸 겨울철과 성스러운 바티칸 시티에서 보냈던 학생시절이 M. 몰니가 도착해서 대성당을 건축하던 때만큼이나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그는 곧 몇 년도 몇 월 며칠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달력에 따른 시간에 대해서는 모두 잊어버리게 되었다. 그는 그 자신의 의식 한가운데 앉아 있었다. 이전의 일들은 그의 마음속에서 아예 잊히거나, 생각의 영역을 넓히거나 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것들은 모두 그의 손이 닿을 수 있도록 그 안에 있었고, 모두 이해가 되었다.

「주님께서 그런 잘못된 일들이 올바로 되는 행복을 내가 볼 수 있도록 오래 살게 해주셨구나. 옛날에 나는 인디언이 멸종할 것이라고 믿었었는데, 이제는 그렇지가 않아. 주님께서 인디언을 보호해 주시리라 믿어.」

살아남은 나바호족은 추방당한 지 5년 만에 그들의 신성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허용되었다.

나바호족이 그들이 얼마나 오래 그곳에서 살아왔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래 살아오던 땅에서 추방되는 것은 하느님께 소리쳐 호소해 볼 정도로 불공정한 일이라고 주교는 생각했다.

이제 늙어 아프게 되자 지나간 세월의 어둡고도 밝았던 그 모든 장면들이 주교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그곳에 백인의 세계보다 더 오래된 세계가 있었다. 그곳에는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신이 거주하고 있었다. 신부의 주님이 그의 성당에 있듯이 그들의 신들이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다문화 시대에 있어서 백인의 삶의 방식과 문화만이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유럽인이나 백인의 관점에서 본다면 인디언이나 멕시코인같이 가난하고 너무 옛것만 추구하며 살아가는 듯한 방식에도 그들 나름의 가치가 있으며 원칙이 있다는 면을 두 신부의 생각을 통해 작가가 보여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백인들은 자연을 정복하고 변화시키고 최대한 이용하려 하지만, 인디언들은 자연을 존중하고 자연에 자신들을 맞추고 순응하려 한다.

〈당신의 작품은 이 나라와 온 국민에게 주는 불후의 선물이며 그 안에 담겨 있는 광대한 정신의 진실과 박애는 길이 보전될 것입니다〉

목숨을 아끼지 않고 사명을 다하는 성직자로서 이 힘든 과정을 거치는 가운데 그들은 많은 원주민들과 사귐으로써 그들의 전통과 관습, 사고방식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이로써 그들은 시야를 더욱 넓히고 이해의 영역을 넓힌다. 백인의 문명과 삶의 방식만이 최고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들을 통해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들이 깨닫고 있듯이 젊었을 때 꿈꾸었던 일들을 실현시키는 것, 그것은 어떤 세속적인 성공도 대신할 수 없을 만큼 최고로 행복한 일이다.

라투르 신부가 이 세상에서 위대한 업적을 이룬 후 그로 인해 편안히 천국에 이르게 되었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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