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몇몇 전문가가 아닌 다수의 일반 대중을 위해 글을 썼다.

생태계 전체를 조망할 줄 알았던 그녀는 생태학이 학문적으로 인정받기 전부터 이미 생태학자였다.

앨러게니 언덕을 헤집고 다니던 어린 시절, 그곳에서 발견한 조개 화석으로 인해 한때 이 일대를 뒤덮었던 바다 생명체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되었다.

그녀는 기사에서 굴 양식과 채취 방법의 변화, 폐기물의 해안 투기 규제 등을 강조했다. 기사에 ‘R. L. 카슨’이라고 서명했는데, 독자들이 필자를 남자로 생각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래야 사람들이 자신의 연구 결과를 좀더 심각하게 받아들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연계를 해석하고 이를 전달할 수 있는 작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전 세계 독자들은 복잡한 과학을 명쾌하게 설명해주는 그녀의 글과 바다 생명에 대한 관심, 자연의 경이에 대한 사랑에서 위로를 받았다.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아 수수께끼가 되어버린 세계에 관해 그녀는 믿을 만한 목소리를 내는 작가였다.

그녀는 과학과 기술의 산물은 ‘전체 생명계’의 안전과 이익에 따라 평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저 침묵하고 있다면, 나에게 평화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생물을 위험으로 몰고 가지 않는 적절한 양의 화학물질만이 살포된다고 믿는 사람이 있을까. 이런 화학물질은 ‘살충제’가 아닌 ‘살생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참아야 하는 의무를 지고 있기에 알 권리 역시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저 자연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녀는 강조했다.

부분이 생존하려면 결국 전체가 건강해야 한다. ‘인간이 몸담고 있는 환경 전체의 오염’으로 식물, 동물, 인간의 세포 속에 유해물질이 축적되고 유기체의 유전 구조가 변형되는 것이다.

인간의 건강은 환경 상태의 궁극적인 반영이라고 카슨은 믿었다. 이런 생각은 자연과 과학, 오염을 초래한 기술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바꿔놓았다. 과학계가 카슨의 이런 주장을 조금씩 인정하는 가운데, 우리 몸을 생태계로 인식하게 된 것은 그녀가 끼친 매우 중요한 영향 중 하나다.

업계에서 볼 때 카슨은 대수롭지 않은 현실에 문제를 제기하는 히스테릭한 여성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는 ‘새와 토끼를 좋아하고’, 고양이를 키우며 사는 여성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카슨은 유전학에 지나치게 관심이 많은 낭만적 경향의 독신녀에 불과했다. 한마디로 통제불능의 여성, 본분을 망각하고 과학 분야에서 도를 넘어선 존재였다.

자신이 목격한 진실을 전하기 위해 살아남아야 하는 도전에 모든 에너지를 집중했다. 그녀는 소란을 일으키고 혼돈을 불어오기 위해 노력했다. 물론 위엄과 신중함을 갖추고 말이다.

카슨은 한 개인이 사회를 어떻게 바꿔놓을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가 되었다.

DDT의 미국 내 제조는 금지되었지만 그 수출은 금지되지 않았으며 지구 대기층과 해양, 강물과 야생의 환경오염은 줄어들지 않았다.

DDT는 지구상 모든 해양의 새와 어류의 간에서 발견되며 여성의 모유에서도 발견된다.

"우주의 경이와 현실에 명확하게 집중할수록 인류 파괴의 고통을 덜 겪게 될 것이다. 경이와 겸손은 온전한 감정이고 파괴에 대한 욕망과는 절대 함께할 수 없다."

경이와 겸손은 《침묵의 봄》이 준 선물이다.

이 책은 천천히 음미해가며 읽어야 한다. 인간 본성의 어두운 측면이 아닌 생명이 지닌 가능성의 약속을 위해서.

미국 대륙 한가운데쯤 모든 생물체가 환경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마을이 하나 있다. 이 마을은 곡식이 자라는 밭과 풍요로운 농장들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데, 봄이면 과수원의 푸른 밭 위로 흰 구름이 흘러가고 가을이 되면 병풍처럼 둘러쳐진 소나무를 배경으로 불타듯 단풍이 든 참나무, 단풍나무, 자작나무가 너울거렸다. 어느 가을날 이른 아침 희미한 안개가 내린 언덕 위에서는 여우 울음소리가 들려왔고, 조용히 밭을 가로질러 달려가는 사슴의 모습도 때때로 눈에 띄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낯선 병이 이 지역을 뒤덮어버리더니 모든 것이 변하기 시작했다. 어떤 사악한 마술의 주문이 마을을 덮친 듯했다. 닭들이 이상한 질병에 걸렸다. 소 떼와 양 떼가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말았다. 마을 곳곳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듯했다. 농부들의 가족도 앓아누웠다. 병의 정체를 알 수 없는 마을 의사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갑작스러운 죽음이 곳곳에서 보고되었다. 이는 어른들에게만 국한된 일이 아니어서 잘 놀던 어린아이들이 갑자기 고통을 호소하다가 몇 시간 만에 사망하는 일도 벌어졌다.

낯선 정적이 감돌았다. 새들은 도대체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이런 상황에 놀란 마을 사람들은 자취를 감춘 새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새들이 모이를 쪼아 먹던 뒷마당은 버림받은 듯 쓸쓸했다. 주위에서 볼 수 있는 몇 마리의 새조차 다 죽어가는 듯 격하게 몸을 떨었고 날지도 못했다. 죽은 듯 고요한 봄이 온 것이다.

불길한 망령은 우리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슬그머니 찾아오며 상상만 하던 비극은 너무나도 쉽게 적나라한 현실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오늘날 미국의 수많은 마을에서 활기 넘치는 봄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은 왜일까?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이 책을 쓴다.

20세기에 들어서 오직 하나의 생물종(種), 즉 인간만이 자신이 속한 세계의 본성을 변화시킬 수 있는 놀라운 위력을 획득했다.

"인간은 자신이 만들어낸 해악을 깨닫지 못한다".

이렇듯 시간은 생명체의 생존에 필수 요소였지만, 오늘날에는 그런 충분한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는 인간의 상상력이 고안해내고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그렇기 때문에 자연 상태에서는 어떤 대응 상대도 없는 합성물질에도 적응해야만 한다.

미국에서만 매년 500여 종의 화학물질이 등장해 사용된다. 이 놀라운 수치가 암시하는 것은 인간과 동물이 매년 500종의 새로운 화학물질에 적응해야 한다는 사실인데, 이는 생물학적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다윈이 제창한 적자생존론을 증명하듯, 곤충은 살충제에 내성을 지닌 놀라운 종으로 진화해갔다. 그러다 보니 이런 곤충에 사용하기 위한 더욱 강력한 살충제가 나오고 그다음엔 이보다 독성이 더 강한 살충제가 등장하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해충은 살충제 살포 후 생존 능력이 더욱 강해져서 오히려 이전보다 그 수가 많아진다. 따라서 인간은 이 화학전에서 결코 승리를 거두지 못하며, 그저 격렬한 포화 속에 계속 휩싸일 뿐이다.

살충제 선택처럼 사소해 보이는 일이 인간의 미래를 결정하게 되다니 정말 믿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미래의 역사학자들은 우리의 왜곡된 균형감각에 놀랄 것이다. 지성을 갖춘 인간이 원치 않는 몇 종류의 곤충을 없애기 위해 자연환경 전부를 오염시키고 그 자신까지 질병과 죽음으로 몰아가는 길을 선택한 이유를 궁금해할 것이다.

농산물 생산량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광범위한 살충제 사용이 필수적이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생산 과다’가 아닌가?

원시 농업 시대에 곤충은 농부들에게 별로 고민거리가 아니었다. 곤충으로 인한 문제가 심각해진 것은 농업이 본격화하고 대규모 농지에 단일 작물 재배를 선호하게 되면서부터다. 이런 방식으로 농사를 짓게 되면 특정 곤충의 개체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

자연은 자연계에 다양성을 선사했는데 인간은 이를 단순화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오늘날 해충 문제와 관련해서는 지리학적 배경과 역사적 측면을 고려해야 한다.

미국 식물도입국은 전 세계로부터 20만 종의 식물을 들여왔다. 미국의 식물에 해를 입히는 곤충 180여 종 중 절반 정도가 이렇게 외국으로부터 우연히 들어온 것으로 대부분은 식물을 수입할 때 무임승차해 미국으로 건너왔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사활을 걸어야 할 문제는 "그저 한두 종의 식물이나 동물을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고 엘턴 박사는 주장한다. 그보다는 "자연계의 균형을 유지하고 병충해의 폭발적인 위력과 새로운 공격을 약화시킬 수 있도록" 생명체의 특성, 생명체와 환경의 상관관계에 대한 기초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이 옳은지 구분할 수 있는 의지나 예지력을 잃어버린 것일까. 사람들은 효력도 떨어지고 훨씬 해로운 수단을 어쩔 수 없다며 그저 받아들인다.

치명적인 위험에서 아슬아슬하게 비껴서 있는 세상에서 살기 원하는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

내가 지적하려는 것은, 독성이 있고 생물학적 문제를 일으킬 잠재성을 가진 살충제를 그 위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의 손에 쥐어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에게 이 독성물질을 다루도록 허락했다. 그들에게 어떤 동의를 구하거나, 안전한 사용을 위해 필요한 지식을 알려주지도 않은 채 말이다.

전문가의 시대라고 하지만 각자 자신의 분야에서만 위험을 인식할 뿐, 그 문제들이 모두 적용되는 훨씬 더 광범위한 상황은 인식하지 못하거나 무시한다.

우리는 이런 잘못된 위안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에 입혀진 당의(糖衣)를 한시라도 빨리 제거해야 한다.

"참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면, 알아야 하는 것은 우리의 권리다."

유기물은 모든 생명체의 기본적인 작용과 연관되어 있지만 특별한 변형 과정을 거치게 되면 죽음을 초래하는 유독물질로 바뀌기도 한다.

탄소는 여러 개가 모여 사슬 모양이나 고리 모양 등 다양한 배열을 만들어내거나 다른 원소와 결합하는 데서 거의 무한한 능력을 발휘한다. 사실 박테리아에서 흰긴수염고래에 이르는 생명체의 놀라운 다양성은 탄소의 특징에 기인한다. 복잡한 단백질 분자의 기본 역시 탄소이며, 지방·탄수화물·효소·비타민 등에도 탄소가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수많은 무생물에도 탄소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탄소를 생명의 상징이라고 말할 수만은 없다.

어떤 주장이 옳은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 몸속에 건강에 해로운 화학물질이 축적된다는 점이 중요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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