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나르는 잘생겼고 머리가 비상했으며, 존경하는 상관이 지니고 있는 우수함을 또한 존경할 줄 아는 훌륭한 청년이었다. 그는 라투르 신부의 모든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했고, 라투르 신부의 회고담을 들었으며, 라투르 신부가 이야기해 준 추억들을 소중히 여겼다.
「틀림없어요.」 주교는 사제들에게 말하곤 했었다. 「주님께서 내 마지막 남은 세월 동안 나를 도와주라고 이 젊은이를 내게 보내 주신 겁니다.」

그런 공기는 어쩌면 시간이 흐를수록 모든 지구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부족한 식량을 갖고 노숙을 하며 몸을 제대로 씻지도 못한 채 밖으로 나돌아 다니는 생활을 했지만, 그 누구의 집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적어도 그는 친절한 세상에 있다는 느낌을 받았으며 모든 사람의 화덕 옆에서 환영을 받았다고 했다.

여름철 바람이 옛 정원에 있는 라일락 꽃들을 흔들고 말밤나무 꽃들을 떨어뜨릴 때면, 그는 가끔 눈을 감고 나바호 숲에 곧게 줄지어 서 있는 나무들 속에서 아주 높은 음조로 노래하던 바람을 생각했다.

구세계에서 그는 신세계에 대한 향수를 느꼈다. 그것은 자기처럼 늙은 나이에 뉴멕시코에서 사나 프랑스의 퓌드돔에서 사나 별 중요하지 않다는 느낌이었는데, 뭐라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그래서 인간은 잔인한 삶으로 인해 잔인해져 있었다.

마음이 가장 아픈 때는 바로 이른 아침이었다.

그는 이제야, 오래전에 그가 시간이 날 때 그런 것들을 적어 두었어야 했다고, 좀 더 가볍고 유연성 있는 프랑스 모국어로 재빨리 기록해 놨어야 했다고 아쉬워했다.

그곳에는 부드러우면서도 야생적이고 자유로운 어떤 것이 있었다. 베개 위에서 귀에 대고 살며시 속삭이며 마음을 가벼이 해주고 슬그머니 열쇠를 돌려 빗장을 빼내고 감금된 정신을 바람 속으로, 파란색의 금빛 대기 속으로, 아침 속으로, 아침 속으로 풀어 놓아 주는 그 어떤 것이!

아름다운 환경, 학식 있는 사람들과의 교제, 고상한 여자들의 매력, 우아한 예술 등도 그에게 그런 느낌의 사막에서의 마음 가벼운 아침이나, 다시 소년으로 만드는 바람을 잃어버린 것을 대신해 줄 수는 없었다.

뉴멕시코에서 그는 늘 젊은이처럼 깨곤 했었다. 그가 일어나 면도를 할 때에서야 자신이 점점 늙어 가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유럽에 있는 나라들은 인간이 오래 살아온 곳이어서 인간을 위해 편리하도록 자연을 변경시켜 놓았기에 일종의 제2의 인간의 몸 같은 곳이었다. 거기 있는 야생초와 야생의 과일과 숲에서 나는 버섯은 먹을 수 있는 것이었다. 시냇물은 아주 맑고, 나무는 풍족한 그늘과 은신처를 제공했다. 하지만 알칼리성 사막 지대인 이곳에서 물은 독성이 있고, 식물은 굶주리는 사람에게 아무 쓸모도 없었다. 모든 것이 말라빠지고 가시투성이이고 날카로웠다. 스페인 사람들의 총검과 노간주나무와 명아줏과 관목과 선인장만 있을 뿐이었다. 도마뱀과 방울뱀만 있을 뿐이었다…….

베르나르는 라투르 신부의 마음을 이해했다. 언젠가 오래전에 젊은 주교가 앨버커키에서 오는 길을 따라 노새를 타고 오다가 처음으로 산타페를 본 때가 하루 중 그 시간이 될 무렵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종종 그들이 함께 산타페로 마차를 몰고 들어갈 때면, 주교는 언덕 꼭대기에서 베르나르와 멈추어 서곤 했었다. 그곳은 바일랑 신부가 그의 남은 인생을 바쳐 일을 하기 위해 콜로라도로 떠날 때 뒤돌아서 산타페를 보았던 바로 그곳이었는데, 결국 주교도 마지막으로 그렇게 하려는 것이었다.

산타페는 옛날에는 개성이 있었다고, 그 자체만의 스타일이 있었다고 했다.

우연히 떠오르는 그런 이야기들을 그때그때 적어 두게 하지 않으면 잊어버릴까 봐 걱정되기 때문이었다.

「얘야, 난 감기로 죽지 않아. 나는 지금까지 살아온 보람으로 죽을 거야.」

낮 동안에는 뉴멕시코에 대한 그의 향수병이 시들어 가다가, 저녁식사 시간이면 완전히 사라졌다. 그는 저녁식사와 포도주를 즐겼고, 또한 대개는 좋은 사람들로 이제는 은퇴한 세련된 사람들과의 교제를 즐겼다.

물결치는 모양으로 하얗게 회칠한 두터운 벽도 예전과 똑같았는데 소리를 차단시키는 그 벽은 세상과도 단절되어 정신에 휴식을 주곤 했었다.

「건물의 배경은 우연히 정해지죠. 건물이 그곳의 배경과 잘 어울려 그곳의 일부가 되는 경우도 있고, 그곳의 배경과 잘 어울리지 않아 그렇게 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죠. 건물이 처음부터 그곳에 있는 장소와 잘 어울리면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더 잘 어울리게 되죠.」

여기서는 잿빛 새벽이 너무나 오래 머무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이곳 프랑스는 만물이 깨어나 생기를 되찾는 데 너무 오래 걸렸다. 정원과 들판은 눅눅했고, 계곡에는 심한 안개가 끼어 있어 산은 희미했다. 태양이 나와 그 햇살과 온기를 마을에 퍼뜨리고 마을을 정화시키려면 한참 시간이 흘러야 했다.

이들은 온화하고 경건했으며, 예의 바르게 말을 했다.

위대함은 소박함으로 돌아온다는 생각은 늘 아주 매력적이었다.

그들이 거대한 평원을 가로질러 가다가 물도 떨어져 굶어 죽을 지경이었는데 한 젊은이가 말을 타고 가면서 그들을 따라잡더니 잘 익은 석류 세 개를 주고는 질주하여 사라졌다. 이 과일은 갈증을 해소시켜 줄 뿐 아니라 아주 영양가가 좋은 음식이어서 그들에게 생기와 활력을 되찾아 주었고 이로 인해 그들은 다시 기운 차게 하던 여행을 마저 할 수 있게 되었다.

예수님의 역사와 영광이 여러 세기가 지난 후 가난한 사람들 중에 가장 가난하다고 할 수 있는 겸손한 멕시코인 가족의 모습으로 현현했다니, 그것도 세상의 끝에 있는 황야에서, 천사들도 그들을 찾는 일이 거의 드문 그런 곳에서

초창기 프란체스코파 선교사들이 경험한 축복받은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이 황야를 헤매고 다니는 동안 작은 기적들이 무수히 꽃을 피웠던 것 같았다.

한번은, 유명한 후니페로 세라 신부와 그의 두 동료가 강을 건너가다 갑자기 푹 들어간 곳에서 목숨을 잃을 뻔하였는데, 맞은편 강가 바위에서 어떤 이상한 사람이 나타나 그들에게 스페인어로 물살을 따라 더 위로 올라가라고 하기에 그대로 따라 했더니 그곳은 여울물이 얕은 곳이어서 목숨을 안전하게 건질 수 있었다.

그중 초창기 생활에 대해서는 그가 얼마나 자주 회상했으며, 또한 그 시절을 떠올리기를 얼마나 좋아했었던지!

거기서 그들을 환대했던 것은 가족으로 현현한 예수님의 은총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가끔 막달레나나 베르나르가 들어와 무엇을 물으면, 그는 과거의 회상으로부터 현재로 다시 돌아오는 데 몇 초 정도가 걸렸다. 그는 그들이 그의 의식이 없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의 의식은 그의 삶의 더 대단했던 부분, 그들이 알지 못하는 또 다른 부분에서 아주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현재에는 남아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요셉 신부는 죽었고, 올리바레스 부부도 모두 죽었고, 키트 카슨도 죽었고, 그의 인생에 있어 그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던 사람들만이 현재에 남아 있었다.

그는 자신이 베르나르를 보는 것처럼 선명히 요셉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은 여전히 그들이 뉴멕시코에 처음 왔을 때의 모습이었다.

「우리가 미래를 알려고 할 필요는 없어요, 유사비오. 그러지 않는 게 더 좋아요. 그런데 마누엘리토는 어떻게 지내요?」

유사비오는 오래 머물지 않았지만, 내일 다시 오겠다고 했다. 산타페에 며칠간 묵으면서 볼일을 봐야 한다고 했다. 사실 그는 산타페에 볼일이 없었다. 하지만 라투르 신부를 보면서 그는 〈오래 남지 않았구나〉 하고 혼잣말을 했다.

「친구여, 이렇게 한번 만나고 싶었습니다. 사람을 보내 한번 와달라고 해볼까도 했었지만, 워낙 먼 거리라서 그렇게 하지 못했지요.」
늙은 나바호족이 미소를 지었다. 「이제는 그렇게 먼 곳도 아닙니다. 저는 기차를 타고 왔어요, 신부님. 제가 오늘 갤럽에서 기차를 탔는데 오늘 이렇게 여기 와 있게 되었어요. 우리가 함께, 제가 사는 곳에서 산타페까지 오던 때를 기억하시지요? 그때 얼마 걸렸었지요? 2주, 그쯤 걸렸었지요. 요즘 사람들은 훨씬 더 빨리 오갈 수 있어요. 그들이 행동을 더 잘 하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요셉 신부가 친구를 아주 잘 사귀기도 하지만, 한번 사귀면 오래도록 진실한 친구로 만들어 개인적으로 특별히 헌신하도록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한 가지 실례이다.

라투르 신부는 그의 대 교구가 경계선이 바뀐 것 말고는 변한 게 없다고 종종 말했다. 멕시코인들은 늘 멕시코인들이었고, 인디언들은 늘 인디언들이었다.

「얘야, 내가 두 가지 커다란 잘못을 바로잡는 것을 볼 수 있을 만큼 살았다니 다행이야. 흑인 노예가 없어지는 것을 보았고, 나바호족이 그들이 살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 살게 되는 것을 보았으니 말이야.」

그는 아주 어렸을 때 사촌들과 함께 지중해에서 보낸 겨울철과 성스러운 바티칸 시티에서 보냈던 학생시절이 M. 몰니가 도착해서 대성당을 건축하던 때만큼이나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그는 곧 몇 년도 몇 월 며칠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달력에 따른 시간에 대해서는 모두 잊어버리게 되었다. 그는 그 자신의 의식 한가운데 앉아 있었다. 이전의 일들은 그의 마음속에서 아예 잊히거나, 생각의 영역을 넓히거나 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것들은 모두 그의 손이 닿을 수 있도록 그 안에 있었고, 모두 이해가 되었다.

「주님께서 그런 잘못된 일들이 올바로 되는 행복을 내가 볼 수 있도록 오래 살게 해주셨구나. 옛날에 나는 인디언이 멸종할 것이라고 믿었었는데, 이제는 그렇지가 않아. 주님께서 인디언을 보호해 주시리라 믿어.」

살아남은 나바호족은 추방당한 지 5년 만에 그들의 신성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허용되었다.

나바호족이 그들이 얼마나 오래 그곳에서 살아왔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래 살아오던 땅에서 추방되는 것은 하느님께 소리쳐 호소해 볼 정도로 불공정한 일이라고 주교는 생각했다.

이제 늙어 아프게 되자 지나간 세월의 어둡고도 밝았던 그 모든 장면들이 주교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그곳에 백인의 세계보다 더 오래된 세계가 있었다. 그곳에는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신이 거주하고 있었다. 신부의 주님이 그의 성당에 있듯이 그들의 신들이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다문화 시대에 있어서 백인의 삶의 방식과 문화만이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유럽인이나 백인의 관점에서 본다면 인디언이나 멕시코인같이 가난하고 너무 옛것만 추구하며 살아가는 듯한 방식에도 그들 나름의 가치가 있으며 원칙이 있다는 면을 두 신부의 생각을 통해 작가가 보여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백인들은 자연을 정복하고 변화시키고 최대한 이용하려 하지만, 인디언들은 자연을 존중하고 자연에 자신들을 맞추고 순응하려 한다.

〈당신의 작품은 이 나라와 온 국민에게 주는 불후의 선물이며 그 안에 담겨 있는 광대한 정신의 진실과 박애는 길이 보전될 것입니다〉

목숨을 아끼지 않고 사명을 다하는 성직자로서 이 힘든 과정을 거치는 가운데 그들은 많은 원주민들과 사귐으로써 그들의 전통과 관습, 사고방식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이로써 그들은 시야를 더욱 넓히고 이해의 영역을 넓힌다. 백인의 문명과 삶의 방식만이 최고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들을 통해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들이 깨닫고 있듯이 젊었을 때 꿈꾸었던 일들을 실현시키는 것, 그것은 어떤 세속적인 성공도 대신할 수 없을 만큼 최고로 행복한 일이다.

라투르 신부가 이 세상에서 위대한 업적을 이룬 후 그로 인해 편안히 천국에 이르게 되었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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