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노든에 대해 뭐든지 다 아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사실 그들이 노든에 대해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 아무것도.

노든의 마지막에 대해서는 모르는 이가 없었다. 온 세상이 노든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노든의 처음에 대해서는 아무도 몰랐다. 슬픈 것은 노든 자신도 그의 처음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도 너만 했을 땐 그랬어. 조급해하지 마. 마음을 급하게 먹는다고 빨리 나이를 먹는 건 아니니까."

"눈이 멀어 이곳에 오는 애도 있고, 절뚝거리며 이곳에 오는 애도 있고, 귀 한쪽이 잘린 채 이곳으로 오는 애도 있어. 눈이 보이지 않으면 눈이 보이는 코끼리와 살을 맞대고 걸으면 되고, 다리가 불편하면 다리가 튼튼한 코끼리에게 기대서 걸으면 돼. 같이 있으면 그런 건 큰 문제가 아니야. 코가 자라지 않는 것도 별문제는 아니지. 코가 긴 코끼리는 많으니까. 우리 옆에 있으면 돼. 그게 순리야.

노든은 자신이 코뿔소의 겉모습을 가진 코끼리라고 생각했다. 코끼리는 강했다. 마음만 먹으면 바람보다 빨리 달려서 상대를 받아 버릴 수도 있었고, 물소 열 마리보다 무거운 몸통으로 상대를 깔아뭉갤 수도 있었다. 하지만 코끼리는 무모하지 않았다. 그래서 쉽게 화를 내지 않았다. 화를 내면 그것은 곧 싸움으로 번졌고, 싸움은 죽음을 부르는 일이었다. 코끼리는 스스로의 목숨도, 남의 목숨도 함부로 여기지 않았다. 그것이 코끼리들의 지혜였다. 노든은 현명한 코끼리들이 좋았다.

사람들은 겉에 드러난 것만을 보고 믿는다. 하지만 코끼리들은 바보가 아니다. 사람들은 이런 테스트로 코끼리를 시험했지만, 코끼리는 언제나 심사숙고 끝에 스스로의 앞날을 직접 선택했다.

그는 코끼리답게, 지혜롭고 현명하게 생각하려고 했다. 무모한 선택을 해서는 안 된다, 더 멀리 보고 더 많은 것을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너에게는 궁금한 것들이 있잖아. 네 눈을 보면 알아. 지금 가지 않으면 영영 못 가. 직접 가서 그 답을 찾아내지 않으면 영영 모를 거야. 더 넓은 세상으로 가. 네가 떠나는 건 슬픈 일이지만 우리는 괜찮을 거야. 우리가 너를 만나서 다행이었던 것처럼, 바깥세상에 있을 또 다른 누군가도 너를 만나서 다행이라고 여기게 될 거야."

코끼리답게 생각하려고 노력할 때마다, 그가 코끼리가 아니라는 사실이 더 분명하게 와닿았다.

"훌륭한 코끼리는 후회를 많이 하지. 덕분에 다음 날은 전날보다 더 나은 코끼리가 될 수 있는 거야. 나도 예전 일들을 수없이 돌이켜 보고는 해. 그러면 후회스러운 일들이 떠오르지. 하지만 말이야, 내가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 것들도 있어. 그때 바깥세상으로 나온 것도 후회하지 않는 몇 안 되는 일들 중 하나야."

코끼리 고아원을 떠나 바깥세상으로 나온 노든은 한동안 이곳저곳을 혼자 떠돌아다녔다. 혼자인 것도 그럭저럭 괜찮았다.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 갈 수 있었고,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었다.
가끔씩 노든의 발걸음을 멈춰 세우는 풍경들이 있었다. 저 멀리서 몰려오는 시커먼 먹구름이라든가, 그 속에서 번쩍이는 번개, 아침 해가 떠오를 때 주변의 풀들이 반짝이는 광경, 하늘에서 떨어지는 첫 빗방울이 남긴 자국, 그리고 키가 큰 풀들이 바람에 몸을 맡기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습에 노든은 압도되었고, 시간을 충분히 들여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감상했다.

자연에서 살아가는 게 서툰 노든을 보고 아내는 엉뚱하지만 특별한 코뿔소라고 불렀다.

둥근 달이 높게 뜬 밤이면 훌륭한 진흙 구덩이를 찾아 달빛을 받으며 목욕을 즐겼다. 거기에 보슬보슬 비까지 내리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노든은 아내와 딸에 대해서는 항상 말을 아꼈다. 아내와 딸은 노든의 삶에서 가장 반짝이는 것이었고, 그 눈부신 반짝임에 대해 노든은 차마 함부로 입을 떼지 못했다.

펭귄들은 새끼를 키우는 것에 유난히 신경을 쓴다. 부모가 돌아가면서 알을 품는데 아무도 품지 않는 알이 발견된 것은 전에 없던 일이었다.

알이 부화를 하지 못하면 어쩌지부터 시작해서, 동물원을 싫어하지는 않겠지, 아빠가 되는 건 처음인데 잘할 수 있을까, 배가 아프다고 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어디가 아픈지도 모르면 어떡하지, 수영은 언제부터 가르치면 좋을까, 친구들이 괴롭히면 우리가 가서 혼내 줘야 하나,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훌륭한 펭귄으로, 아니, 그럭저럭 괜찮은 펭귄으로 키울 수 있을까……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하지만 ‘마지막 남은 하나’가 된 외로움은 언제나 노든의 곁에 있었고, 어느샌가 그를 잡아먹어 버렸다. 아카시아잎을 먹을 때도, 목욕을 할 때도, 악몽을 꿀 때도 노든은 혼자였다.

노든은 악몽을 꿀까 봐 무서워서 잠들지 못하는 날은, 밤이 더 길어진다고 말하곤 했다. 이후로도 그들에게는 긴긴밤이 계속되었다.

치쿠는 윔보와 지냈던 얘기들, 알을 품게 된 얘기들, 다른 펭귄들의 얘기들, 동물원에서 건너 건너 들은 다른 동물들과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쉬지 않고 해 줬다. 치쿠는 정말 아는 게 많았다. 치쿠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시간이 빨리 갔다.

노든은 목소리만으로 치쿠가 배가 고픈지 아닌지를 알 수 있게 되었고, 발소리만으로 치쿠가 더 빨리 걷고 싶어 하는지 쉬고 싶어 하는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우리’라고 불리는 것이 당연한 건지도 몰랐다.

그리하여 나의 가장 첫 번째 기억은 새까만 밤하늘과 빛나는 별들과, 별들만큼이나 반짝이던 코가 뭉툭한 코뿔소의 눈이었다.

"네가 어떤 기분일지 알아. 내가 그렇게 살아왔거든. 나는 항상 남겨지는 쪽이었지. 내가 바보 같지만 않았어도, 용감하게 가족을 지킨 내 아내를 구할 수 있었을지도 몰라. 내가 다리를 절지만 않았어도, 마음씨 고운 앙가부를 살릴 수 있었을지도 몰라. 내가 조금만 더 일찍 알아차렸으면, 유쾌한 치쿠는 죽지 않았을지도 몰라. 이런 생각들이 항상 나를 괴롭게 해. 차라리 살아남은 게 내가 아니었으면, 하고 말이야."

"그런데 포기할 수가 없어. 왜냐면 그들 덕분에 살아남은 거잖아

그들의 몫까지 살아야 하는 거잖아. 그러니까 안간힘을 써서, 죽을힘을 다해서 살아남아야 해."

노든의 말대로 살아남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노든은 어린 코끼리나 어린 코뿔소에 대해서는 잘 알았지만, 펭귄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노든이 펭귄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치쿠에게 들은 것이 전부였다.

노든은 한 존재가 다른 존재에게 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내게 주었다. 내가 아프거나 무서워서 잠들지 못하는 밤에는 악몽을 꾸지 않는 방법이라며 옛날 얘기를 해 주었다. 나는 노든의 가족과 코끼리들, 앙가부, 치쿠와 윔보의 얘기를 들으면서 밤을 견뎠다. 그러다가 내가 잠이 들면 노든은 나를 따뜻하게 감싸 주었다

노든은 나의 유일한 가족이자 친구였다. 우리는 한시도 떨어진 적이 없었다. 내가 바라보는 풍경을 노든도 보았고, 내가 있는 풍경 속에는 언제나 노든이 있었다. 나는 커다란 노든이 곁에 있어 주는 것이 좋았다. 노든 옆에서는 마음이 놓였다.

우리의 일과는 먹고 자고 걷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항상 하루가 너무 길다고 느꼈지만 노든은 하루가 너무 짧다고 했다. 오늘은 충분히 걷지 못했다고 아쉬워했고, 우리가 하루빨리 바다를 찾아야 한다고 했다. 둘 중 누구도 본 적이 없었고,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도 몰랐지만 우리는 어쨌든 바다를 찾아서 걷고 또 걸었다.

우리의 하루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은 잠들기 직전이었다. 말이 없는 노든이었지만 잠들기 전에는 꼭 나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기 때문이다.

모든 불행의 시작인 인간들에게 복수를 하면서 살아갈 것이라고 했다.

"죽는 것보다 무서운 것도 있어. 이제 나는 뿔이 간질간질할 때 그 기분을 나눌 코뿔소가 없어. 너는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오늘은 바다를 찾을 수 있을지, 다른 펭귄들을 만날 수 있을지 기대가 되겠지만 나는 그런 기대 없이 매일 아침 눈을 떠."

"생각해 보면 나는, 원래 불행한 코뿔소인데 제멋대로인 펭귄이 한 마리씩 곁에 있어 줘서 내가 불행하다는 걸 겨우 잊고 사나 봐. 아까는 미안했다. 자, 이리 와, 안아 줄게. 내일은 어느 쪽으로 가면 바다가 나올 것 같아? 펭귄의 감으로 얘기해 봐."
"음, 그럼 우리 내일은 저쪽으로 가 봐요!"

나는 물속에서 느낀 것을 노든에게 설명할 수 없는 것이, 그리고 노든과 내가 다르다는 것이 너무 서운했다.

그때 노든의 대답이 얼마나 기적적인 것이었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이 다른 우리가 서로밖에 없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그때는 몰랐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기적이었다. 윔보와 치쿠가 버려진 알을 품어 준 것부터, 전쟁 속에서 윔보가 온몸으로 알을 지켜 내 준 것, 치쿠가 노든을 만나 동물원에서 도망 나온 것, 마지막 순간까지 치쿠가 알을 품어 준 것, 그리고 그 마지막 순간에 노든이 있어 주었던 것……. 모든 것이 기적이라는 단어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때 내가 마주한 ‘수영’이라는 것이 그나마 기적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일이었다. 펭귄이 수영을 하는 데에 기적이 필요하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저거는 무슨 색이라고 불러요?"
"저렇게 예쁜 하늘 색깔에 이름이 있을 리가 있겠어?"

"누구든 너를 좋아하게 되면, 네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어. 아마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너를 관찰하겠지. 하지만 점점 너를 좋아하게 되어서 너를 눈여겨보게 되고, 네가 가까이 있을 때는 어떤 냄새가 나는지 알게 될 거고, 네가 걸을 때는 어떤 소리가 나는지에도 귀 기울이게 될 거야. 그게 바로 너야."

사막은 모래 속에 숨은 생명들로 가득했다. 살아남은 기적은 우리에게만 특별하게 일어난 일은 아니었다.

많은 것들이 내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변해 갔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수많은 밤을 보내 온 노든은 많이 지쳐 있었다. 나는 빨리 바다를 찾고 싶었다. 바다에 도착하면 노든도 괜찮아질 것만 같았다.

"이리 와. 안아 줄게. 그리고 이야기를 해 줄게. 오늘 밤 내내 말이야. 오늘 밤은 길거든. 네 아빠들의 이야기를 해 줄게. 너는 파란 지평선을 찾아서, 바다를 찾아서, 친구들을 만나고, 우리 이야기를 전해 줘."

나는 세상에 마지막 하나 남은 흰바위코뿔소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가족을 위해 목숨을 걸고 뛰어나간 노든의 아내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직 죽지 않은 연인을 뒤로하고 알을 데리고 도망쳐 나오던 치쿠의 심정을, 그리고 치쿠와 눈을 마주쳤던 윔보의 마음을, 혼자 탈출하면 무슨 재미가 있겠느냐던 앙가부의 마음을, 코끼리들과 작별을 결심하던 노든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우리 삶에는 우리가 자초한 불행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불행도 있다. 코끼리 고아원 밖으로 나간 것은 노든의 선택이지만, 느닷없이 찾아온 사냥꾼들과 벼락처럼 떨어진 전쟁은 노든의 선택이 아니다. 전자는 내 몫으로 여기고 견딘다 해도 반복되는 후자의 고통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내 삶은 내 것이지만, 또 나만의 것은 아니기에 우리는 안간힘을 써서, 죽을힘을 다해서 살아남아야 한다.

이 작지만 위대한 사랑의 연대는 이어지고 이어져 불운한 검은 반점을 가진 채 버려진 작은 알에 도착한다.

그는 노든이 해 주는 말을 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자신이 받은 사랑의 크기만큼 단단하게 자라고, 마침내 자기 자신으로 살기 위해 거대한 바다를 향해 홀로 떠난다.

나와 친구를 지키는 것이 더러운 웅덩이를 별빛같이 만드는 일임을 알고 서로에게 기대어 오늘을 버티고 내일로 힘차게 나아가기를. 그러다 보면 언젠가 우리는 다시 인사하게 될 것이다. "코와 부리를 맞대고" 눈과 눈으로, 마음과 마음으로, 영혼과 영혼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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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색이란 물체(페라리)의 본질이 아니라 두뇌 깊은 곳에서 만들어진 표상일 뿐이다.

차에서 풍겨 오는 냄새도 마찬가지다. 차의 내부는 시트와 카펫, 플라스틱 등에서 방출된 방향성 분자芳香性 分子*로 가득 차 있지만, 그것을 맡아 줄 생명체가 없으면 냄새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페라리의 빨간색과 특유의 냄새가 창출된 곳은 자동차 조립 공장이 아니라 당신의 두뇌다.

약간의 비교 과정을 거친 후 "역시 페라리야!"라는 감탄사를 유발한다.

그라지아노는 이 결과를 살짝 다른 방향으로 몰고 갔다. 그가 제안한 이론의 핵심은 "당신이 세부 사항에 아무리 신경을 쓴다 해도, 정신적 표현은 항상 단순화된다."는 것이다.

주변 환경에서 접하는 모든 것을 마음속에서 단순화하는 것은 효율적일 뿐만 아니라, 마음이 생존에 필요한 다른 정보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오래전에 세세한 사항을 감지할 수 있는 생명체가 존재했다 해도, 데이터 분석에 집중하다가 포식자를 피하지 못해 멸종했을 것이다.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은 종은 생존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정보를 몇 개의 범주로 과감하게 통폐합시킨 종이었다. 페라리의 빨간색을 눈사태나 지진으로 바꿔서 생각해 보라. 살아남으려면 반응이 빨라야 하고, 반응이 빠르려면 불필요하게 세세한 사항을 무시해야 한다.

우리는 자동차, 눈사태, 지진이 아닌 동물이나 사람을 대할 때에도 위와 비슷한 단순화 과정을 거치고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물리적 외형뿐만 아니라 그들의 마음까지 단순화시킨다.

학자들은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획득한 이 능력을 ‘마음의 이론theory of mind(우리는 직관적으로 모든 생명체들이 우리와 비슷한 마음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으로 부르기도 하고,32 ‘지향적 입장intentional stance(우리는 모든 동물과 인간이 지식과 믿음, 욕망, 그리고 의지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이라 부르기도 한다.33

빨간색 페라리를 바라볼 때, 당신은 자동차의 간편한 도식뿐만 아니라, ‘페라리에 집중하고 있는 당신’에 대한 간편한 도식도 함께 만들어 낸다. 페라리는 빨갛고, 매끄럽고, 반짝인다.그리고 당신의 의식은 빨갛고, 매끄럽고, 반짝이는 페라리에 집중된다. 이것이 바로 당신이 세상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이다.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는 상태만 부각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인식認識, awareness’이라 부른다.

환원주의적 관점에서 의식을 완벽하게 설명하려면 신경학neurology이라는 방대한 영토를 정복해야 한다.

나의 마음을 만들어 낸 기본 재료는 커피잔의 기본 재료와 동일하다.

커피잔을 구성하는 입자들과 그들 사이에 작용하는 바로 그 힘이 복잡다단한 마음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의식을 물리학으로 풀면 가치가 떨어지지 않고, 오히려 미스터리가 더욱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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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종이 동물원
켄 리우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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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은 창조의 어머니? 책을 읽으면서 다른 책, 영화 등이 동시에 떠올랐지만 여기 실린 모든 단편이 그대로 고유하다. 엄청나게 좋은 작품을 읽을 때 경험하는 모든 감정에 몰두해 멍해지기 수백 번! 아니 셀 수 없었다. 어느새 작가를 사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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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침묵의 봄 레이첼 카슨 전집 5
레이첼 카슨 지음, 김은령 옮김, 홍욱희 감수 / 에코리브르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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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다 읽고 20세기에 그녀가 참고한 자료의 그 방대함에 놀랐고, 모든 자료를 정리해서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냈다는 것도 존경스럽고, 오직 사실만 나열한 이 책이 고전의 반열에 오른 것도 당연하지만, 21세기에도 이 책의 내용이 유효하다는 점이 절망스럽다. 필독서란 바로 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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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5-16 19: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강렬한 100평이옵니다
라로님 *^^*

라로 2022-05-16 19:35   좋아요 1 | URL
하핫! 감사합니다, 그만큼 강렬한 독서였어요!!^^

psyche 2022-05-28 09: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똑같이 느꼈어요. 지금도 그 내용이 유효하다는 게 정말 절망스럽더라고요. ㅜㅜ

라로 2022-05-30 19:47   좋아요 0 | URL
이 책 저보다 먼저 읽으셨죠!! 저 요즘 설거지 할 때 세제 잘 안 사용하고 하려고 노력해요.^^;;
 

국가는 공간이라는 요소뿐 아니라 시간이라는 요소도 함께 보유합니다.

‘이름의 발음은 그 이름의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에 관해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아. 그건 한자만이 알려 줄 수 있어.’ 에번은 이름을 그런 식으로 생각했던 겁니다.

에번이 맨 먼저 사랑한 건 제 이름이었습니다.
"들에 홀로 서 있는 오동나무, 환하고 아름답네."

오동나무는 예쁘게 생긴 낙엽수인데요. 옛날 일본에서는 딸이 태어나면 오동나무를 심어 뒀다가, 나중에 결혼할 때 그 나무를 베어서 혼수용 장롱을 만드는 풍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제가 태어난 날 심었던 오동나무를 외할아버지가 처음 보여 줬을 때가 기억나네요. 그때 저는 외할아버지한테 그 나무가 별로 특별해 보이지 않는다고 했지요.
"하지만 봉황이 내려앉아서 쉬는 나무는 오동나무뿐이란다."

가을이면 에번과 함께 차를 몰고 뉴햄프셔주의 민박집으로 여행을 가서 사과를 따는 게 좋았습니다. 제가 요리책을 보고 간단한 요리를 만들었을 때 바보처럼 신이 나서 웃는 에번을 보는 것도 좋았고요. 아침에 에번 곁에서 눈을 뜰 때만큼은 제가 여자라는 사실도 흐뭇하게 느껴졌습니다. 둘이서 논쟁을 하는 것도 좋았습니다. 에번은 자신이 옳을 때에는 열정적으로 주장을 굽히지 않았지만, 자기가 틀렸을 때면 점잖게 주장을 굽힐 줄 알았거든요. 제가 남들과 논쟁을 벌일 때 언제나 저와 같은 편에 서서 끝까지 지지해 준 것도 좋았습니다. 에번은 속으로 제가 틀렸다고 생각할 때조차도 그랬던 사람입니다.

에번의 전공은 헤이안 시대였는데, 에번이 말하길 일본은 그때 비로소일본다움을 이룩했다더군요.

제가 지은 단카에 처음으로 만족했을 때는 너무나 기뻤지요. 비록 잠깐이었지만 무라사키 시키부가 처음 단카를 완성했을 때에도 그런 기분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무라사키와 저 사이에는 1000년이 넘는 시간과 1만 킬로미터가 넘는 거리가 존재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을 거예요.

에번은 제가 일본계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게 해 줬고, 그 덕분에 저는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제가 에번을 정말로 사랑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멍청한 젊은이들 중에는 일제 물건을 불매하자고 난리 치는 애들도 있지만, 그 애들도 좋아하는 일본 만화의 다음 권이 나오면 부리나케 사러 갈 거예요. 그런 애들이 하는 소리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잖아요? 고작 그런 일로 화를 내는 건 자기 힘으로는 아무것도 이룬 게 없는 사람들뿐이에요.

중국의 슬픈 역사는 거의 다 애도받지 못한 채 묻혀 버렸어요.

기억 같은 거 어차피 먹지도, 마시지도, 입지도 못하잖아요.

서양 사람들은 중국을 이해하려고 하질 않아. 어쩌면 그냥 이해를 못하는 걸 수도 있고. 이 기자들, 상대할 필요 없어. 어차피 우리 말을 믿지도 않을 텐데, 뭐.

우리 삶을 지배하는 건 그렇게 사소한, 언뜻 보면 평범하지만 나중에는 턱없이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는 순간들입니다. 그런 우연은 자연계보다 인간 사회에 훨씬 더 많이 존재하지요. 그래서 물리학자인 저로서는 그 후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전혀 예상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에번의 조부모님은 일본이 상하이를 점령하고 세운 괴뢰 정부에 고용돼서 일했다는 이유로 종전 후에 부역자라는 딱지가 붙었습니다. 이 때문에 에번네 식구들은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가혹한 대우를 못 견디고 결국에는 미국으로 망명했지요. 전쟁은 그런 식으로 에번의 삶을 결정지었던 겁니다, 모든 중국인에게 그랬던 것처럼요. 본인은 그 여파를 다 알지 못했겠지만요.

중국에는 성년이 된 젊은이가 친구들 사이에서 불릴 이름을 스스로 짓는 전통이 있는데, 그 이름을 뱌오즈라고 합니다. 지금은 홍콩은 물론이고 중국 본토에도 그렇게 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만.

창이 고모의 이름과 발음은 똑같지만 한자가 달라서, ‘순탄한 행복’이 아니라 ‘오래 남을 기억’이라는 뜻입니다.

임종 때 아버지는 제게 나중에 창이 고모가 어떻게 됐는지 알아내거든, 기일에 아버지 무덤을 찾아와 꼭 알려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저는 그러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에번이 특정한 시간대의 특정한 장소에 관찰자를 보내면 뵘­기리노 입자는 그 한 번으로 사라져 버리고, 그 지점으로는 아무도 다시 돌아가지 못합니다.

에번은 과거와 현재를 둘러싼 엇갈린 주장들과 끝없이 싸워야 했습니다.

저희는 포로들이 더 빨리 동상에 걸리도록 그들의 몸에 물을 뿌렸습니다. 팔이 꽁꽁 얼었는지 확인하려고 곤봉으로 때리기도 했습니다.깡 소리가 선명하게 나면 팔이 속까지 꽁꽁 얼었다는 뜻이자, 실험 준비가 끝났다는 뜻이었습니다.

그 소리는 나무토막을 때릴 때 나는 소리와 비슷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포로들을 ‘통나무’라는 뜻의마루타라고 불렀던 것 같습니다.

동상의 가장 좋은 치료법은 팔다리를 주무르는 것이 아니라 따뜻한 물에 담그는 것이라는 사실을 밝혀냈으니까요.

건강한 포로와 동상 실험을 마친 포로 모두 수술대에 올랐습니다. 팔다리를 다 절단당하고도 살아남은 포로는 생물학 무기 실험에 이용했습니다.

한참 후에 젊은 일본인 의사들이 모여 있는 수술실이 나왔습니다. 여자의 비명 소리가 들려서 저는 그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한 의사가 수술대에 누워 있는 중국인 여성을 강간하는 중이었습니다. 그곳에는 중국인 여성이 몇 명 더 있었는데 모두 나체였고, 수술대에 누운 여성의 팔다리를 붙잡고 있었습니다. 일본인 의사가 강간에 집중할 수 있게 말입니다.

저에게 정말로 충격이었던 것은 창이 고모가 벌거벗고 있었다는 사실도, 그 수술실에서 벌어진 일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고모가 너무나 어려 보였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때 고모는 열일곱 살이었습니다. 대학에 입학하려고 집을 떠날 때의 저보다 고작 한 살 어린 나이였습니다. 얼굴의 반점을 빼면 고모는 그 시절의 저를, 그리고 제 딸을 꼭 닮은 여자애였습니다.

저희는 대부분 여자 경험이 없었고, 살아 있는 여자의 생식기를 본 적도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고모를 위로하려고 했지만, 고모에게는 제 목소리도 손길도 닿을 리가 없었습니다. 제가 하는 위로의 말은 고모가 아니라 저 자신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고모에게 노래를 불러 주었습니다. 제가 어릴 적에 아버지가 불러 주곤 하던 노래였습니다.

萬里長城萬里長, 長城外面是故鄕
高粱肥, 大豆香, 遍地黃金少災殃
만리장성 일만 리 길, 그 장성 너머가 내 고향
고량이 영글고, 콩 냄새 고소한 곳, 도처가 금빛이라 재앙 없어라.

그렇게 저는 창이 고모를 알아가는 동시에 고모에게 영원한 작별을 고했습니다.

저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비탄에 빠졌습니다. 제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제가 해 온 일이 무엇인지 그제야 비로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의사가 되겠다는 욕심 때문에 저는 인간이라면 해서는 안 되는 짓들을 했습니다. 그날 일이 있고 나서 저는 다시 자백서를 썼고, 그 자백서를 읽은 보초병은 다시는 저에게 말을 걸지 않았습니다.

법은 우리에게 진짜 정의를 주지 못합니다.

저는 그러한 행위를 반인륜 범죄가 아닌 다른 말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생명이라는 관념 자체에 대한 부정이었습니다.

위원장님과 소위원회의 의원 여러분께는 죄송하지만, 저는 미국 정부 역시 2차 대전 이후 731부대의 범죄자들을 비호했고, 그들이 고문과 강간과 살인으로 얻은 자료를 이용한 일을 인정하거나 사과한 적이 없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미국 정부에 대해 그러한 행위를 인정하고 사과할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가 부분적으로 부정과 은폐의 공범인 까닭은, 우리가 스스로의 양심보다 그러한 잔학 행위의 오염된 열매를 더 귀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우리 또한 죄를 지었습니다.

저희가 바라는 것은 오로지 진실을 밝히겠다는 약속, 기억하겠다는 약속뿐입니다.

진실은 빗자루로 쓸어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현 중국 정부가 미국 정부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희생자 유족과 중국 국민에게 정의가 실현될 수 없다고, 또 거대한 불의가 세상의 심판으로부터 가려지고 감춰져야 한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우리의 정신이 아닙니다. 웨이 박사는 우리에게 과거의 진실을 이야기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본 정부와 우리 정부를 향해 역사에 대한 공동의 책임을 당당히 다하라고 요구해야 합니다.

그들은 수없이 많은 조용한 마을과 도시와 외딴 벽지에서 죽어간 것입니다. 그런 곳에서 중국인들은 학살당하고 강간당하고 또 학살당했습니다. 그들의 비명은 차가운 바람 속에 흩어져 사라졌고, 결국에는 이름조차 지워져 잊히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기억될 자격은 있습니다.

웨이 박사가 품은 신념의 핵심은 진정한 기억 없이는 진정한 화해도 없다는 것입니다.

대사님께서 인용하신 것 같은 담화문이 발표될 때마다, 일본에서는 바로 얼마 후에 유력 정치인이 2차 대전 중에 일어난 사건의 진실성에 근거 없는 의혹을 제기하는 성명을 발표하곤 합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우리는 마치 두 얼굴의 야누스처럼 이야기하는 일본 정부의 이런 쇼에 익숙해졌습니다.

역사란 이야기를 다루는 일입니다. 그리고 진실한 이야기, 우리 존재를 지지하고 설명하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역사학자의 기본 임무입니다. 그러나 진실은 민감한 것이라서 적이 많습니다. 어쩌면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 연구자들은 진실 추구를 업으로 삼으면서도 대책과 수식과 단서 없이는 ‘진실’이라는 말을 거의 입에 올리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진실이 민감하기 때문에 역사는 언제나 다루기 힘든 주제였고, 부정론자들은 언제나 진실에 ‘픽션’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을 최후의 무기로 삼았습니다.

우리는 이야기를 사랑하는 생물이지만, 한편으로는 개개인의 이야기를 믿지 말라고 배우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야기는 만들어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진실에서 동떨어졌다는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지구는 완전한 구체도 아니고 평평한 원반도 아니지만, 진실에 훨씬 더 가까운 것은 구체 모형입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들보다 더 진실에 가까우며, 우리는 언제나 가장 인간적이면서도 가장 진실에 가까운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가 스스로의 약점과 주관성을 인정한다고 해서 진실을 이야기할 도덕적 의무가 면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설령 그 ‘진실’이 단일한 것이 아니라 일련의 공유 경험이자 공유 이해로서 다 함께 우리의 인간성을 구성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렇습니다. 만약 이 가정이 사실이라면 더더욱 그렇지요.

입만 살아 있는 용감한 남자들이 저를 힘으로 굴복시키고 이런저런 짓을 하는 합성 사진으로 자기들의 용기와 지성을 자랑했던 거지요.

아이다호주에 머무는 동안 에번은 세상이 가끔은 친절한 곳이라는 걸 다시 기억해 냈습니다. 암흑과 부정으로 가득한 곳이 아니라요.

과거에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과 아내인 제가 있는 현재에 충실해야 한다는 생각 사이에서 몸이 쪼개지는 기분이었을 겁니다.

알고 보니 역사는 한정된 자원이었는데, 웨이가 시간 여행을 떠날 때마다 결코 대체할 수 없는 과거가 한 뭉텅이씩 사라졌던 것이다. 웨이는 과거를 마치 스위스 치즈처럼 구멍이 숭숭 뚫린 덩어리로 바꾸어 놓고 있었다.

거대한 불의의 희생자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할 방법을 찾으려 하다가, 웨이는 그들 가운데 일부를 영영 침묵시키는 데에 그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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