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는 공간이라는 요소뿐 아니라 시간이라는 요소도 함께 보유합니다.

‘이름의 발음은 그 이름의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에 관해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아. 그건 한자만이 알려 줄 수 있어.’ 에번은 이름을 그런 식으로 생각했던 겁니다.

에번이 맨 먼저 사랑한 건 제 이름이었습니다.
"들에 홀로 서 있는 오동나무, 환하고 아름답네."

오동나무는 예쁘게 생긴 낙엽수인데요. 옛날 일본에서는 딸이 태어나면 오동나무를 심어 뒀다가, 나중에 결혼할 때 그 나무를 베어서 혼수용 장롱을 만드는 풍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제가 태어난 날 심었던 오동나무를 외할아버지가 처음 보여 줬을 때가 기억나네요. 그때 저는 외할아버지한테 그 나무가 별로 특별해 보이지 않는다고 했지요.
"하지만 봉황이 내려앉아서 쉬는 나무는 오동나무뿐이란다."

가을이면 에번과 함께 차를 몰고 뉴햄프셔주의 민박집으로 여행을 가서 사과를 따는 게 좋았습니다. 제가 요리책을 보고 간단한 요리를 만들었을 때 바보처럼 신이 나서 웃는 에번을 보는 것도 좋았고요. 아침에 에번 곁에서 눈을 뜰 때만큼은 제가 여자라는 사실도 흐뭇하게 느껴졌습니다. 둘이서 논쟁을 하는 것도 좋았습니다. 에번은 자신이 옳을 때에는 열정적으로 주장을 굽히지 않았지만, 자기가 틀렸을 때면 점잖게 주장을 굽힐 줄 알았거든요. 제가 남들과 논쟁을 벌일 때 언제나 저와 같은 편에 서서 끝까지 지지해 준 것도 좋았습니다. 에번은 속으로 제가 틀렸다고 생각할 때조차도 그랬던 사람입니다.

에번의 전공은 헤이안 시대였는데, 에번이 말하길 일본은 그때 비로소일본다움을 이룩했다더군요.

제가 지은 단카에 처음으로 만족했을 때는 너무나 기뻤지요. 비록 잠깐이었지만 무라사키 시키부가 처음 단카를 완성했을 때에도 그런 기분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무라사키와 저 사이에는 1000년이 넘는 시간과 1만 킬로미터가 넘는 거리가 존재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을 거예요.

에번은 제가 일본계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게 해 줬고, 그 덕분에 저는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제가 에번을 정말로 사랑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멍청한 젊은이들 중에는 일제 물건을 불매하자고 난리 치는 애들도 있지만, 그 애들도 좋아하는 일본 만화의 다음 권이 나오면 부리나케 사러 갈 거예요. 그런 애들이 하는 소리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잖아요? 고작 그런 일로 화를 내는 건 자기 힘으로는 아무것도 이룬 게 없는 사람들뿐이에요.

중국의 슬픈 역사는 거의 다 애도받지 못한 채 묻혀 버렸어요.

기억 같은 거 어차피 먹지도, 마시지도, 입지도 못하잖아요.

서양 사람들은 중국을 이해하려고 하질 않아. 어쩌면 그냥 이해를 못하는 걸 수도 있고. 이 기자들, 상대할 필요 없어. 어차피 우리 말을 믿지도 않을 텐데, 뭐.

우리 삶을 지배하는 건 그렇게 사소한, 언뜻 보면 평범하지만 나중에는 턱없이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는 순간들입니다. 그런 우연은 자연계보다 인간 사회에 훨씬 더 많이 존재하지요. 그래서 물리학자인 저로서는 그 후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전혀 예상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에번의 조부모님은 일본이 상하이를 점령하고 세운 괴뢰 정부에 고용돼서 일했다는 이유로 종전 후에 부역자라는 딱지가 붙었습니다. 이 때문에 에번네 식구들은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가혹한 대우를 못 견디고 결국에는 미국으로 망명했지요. 전쟁은 그런 식으로 에번의 삶을 결정지었던 겁니다, 모든 중국인에게 그랬던 것처럼요. 본인은 그 여파를 다 알지 못했겠지만요.

중국에는 성년이 된 젊은이가 친구들 사이에서 불릴 이름을 스스로 짓는 전통이 있는데, 그 이름을 뱌오즈라고 합니다. 지금은 홍콩은 물론이고 중국 본토에도 그렇게 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만.

창이 고모의 이름과 발음은 똑같지만 한자가 달라서, ‘순탄한 행복’이 아니라 ‘오래 남을 기억’이라는 뜻입니다.

임종 때 아버지는 제게 나중에 창이 고모가 어떻게 됐는지 알아내거든, 기일에 아버지 무덤을 찾아와 꼭 알려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저는 그러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에번이 특정한 시간대의 특정한 장소에 관찰자를 보내면 뵘­기리노 입자는 그 한 번으로 사라져 버리고, 그 지점으로는 아무도 다시 돌아가지 못합니다.

에번은 과거와 현재를 둘러싼 엇갈린 주장들과 끝없이 싸워야 했습니다.

저희는 포로들이 더 빨리 동상에 걸리도록 그들의 몸에 물을 뿌렸습니다. 팔이 꽁꽁 얼었는지 확인하려고 곤봉으로 때리기도 했습니다.깡 소리가 선명하게 나면 팔이 속까지 꽁꽁 얼었다는 뜻이자, 실험 준비가 끝났다는 뜻이었습니다.

그 소리는 나무토막을 때릴 때 나는 소리와 비슷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포로들을 ‘통나무’라는 뜻의마루타라고 불렀던 것 같습니다.

동상의 가장 좋은 치료법은 팔다리를 주무르는 것이 아니라 따뜻한 물에 담그는 것이라는 사실을 밝혀냈으니까요.

건강한 포로와 동상 실험을 마친 포로 모두 수술대에 올랐습니다. 팔다리를 다 절단당하고도 살아남은 포로는 생물학 무기 실험에 이용했습니다.

한참 후에 젊은 일본인 의사들이 모여 있는 수술실이 나왔습니다. 여자의 비명 소리가 들려서 저는 그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한 의사가 수술대에 누워 있는 중국인 여성을 강간하는 중이었습니다. 그곳에는 중국인 여성이 몇 명 더 있었는데 모두 나체였고, 수술대에 누운 여성의 팔다리를 붙잡고 있었습니다. 일본인 의사가 강간에 집중할 수 있게 말입니다.

저에게 정말로 충격이었던 것은 창이 고모가 벌거벗고 있었다는 사실도, 그 수술실에서 벌어진 일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고모가 너무나 어려 보였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때 고모는 열일곱 살이었습니다. 대학에 입학하려고 집을 떠날 때의 저보다 고작 한 살 어린 나이였습니다. 얼굴의 반점을 빼면 고모는 그 시절의 저를, 그리고 제 딸을 꼭 닮은 여자애였습니다.

저희는 대부분 여자 경험이 없었고, 살아 있는 여자의 생식기를 본 적도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고모를 위로하려고 했지만, 고모에게는 제 목소리도 손길도 닿을 리가 없었습니다. 제가 하는 위로의 말은 고모가 아니라 저 자신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고모에게 노래를 불러 주었습니다. 제가 어릴 적에 아버지가 불러 주곤 하던 노래였습니다.

萬里長城萬里長, 長城外面是故鄕
高粱肥, 大豆香, 遍地黃金少災殃
만리장성 일만 리 길, 그 장성 너머가 내 고향
고량이 영글고, 콩 냄새 고소한 곳, 도처가 금빛이라 재앙 없어라.

그렇게 저는 창이 고모를 알아가는 동시에 고모에게 영원한 작별을 고했습니다.

저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비탄에 빠졌습니다. 제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제가 해 온 일이 무엇인지 그제야 비로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의사가 되겠다는 욕심 때문에 저는 인간이라면 해서는 안 되는 짓들을 했습니다. 그날 일이 있고 나서 저는 다시 자백서를 썼고, 그 자백서를 읽은 보초병은 다시는 저에게 말을 걸지 않았습니다.

법은 우리에게 진짜 정의를 주지 못합니다.

저는 그러한 행위를 반인륜 범죄가 아닌 다른 말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생명이라는 관념 자체에 대한 부정이었습니다.

위원장님과 소위원회의 의원 여러분께는 죄송하지만, 저는 미국 정부 역시 2차 대전 이후 731부대의 범죄자들을 비호했고, 그들이 고문과 강간과 살인으로 얻은 자료를 이용한 일을 인정하거나 사과한 적이 없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미국 정부에 대해 그러한 행위를 인정하고 사과할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가 부분적으로 부정과 은폐의 공범인 까닭은, 우리가 스스로의 양심보다 그러한 잔학 행위의 오염된 열매를 더 귀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우리 또한 죄를 지었습니다.

저희가 바라는 것은 오로지 진실을 밝히겠다는 약속, 기억하겠다는 약속뿐입니다.

진실은 빗자루로 쓸어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현 중국 정부가 미국 정부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희생자 유족과 중국 국민에게 정의가 실현될 수 없다고, 또 거대한 불의가 세상의 심판으로부터 가려지고 감춰져야 한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우리의 정신이 아닙니다. 웨이 박사는 우리에게 과거의 진실을 이야기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본 정부와 우리 정부를 향해 역사에 대한 공동의 책임을 당당히 다하라고 요구해야 합니다.

그들은 수없이 많은 조용한 마을과 도시와 외딴 벽지에서 죽어간 것입니다. 그런 곳에서 중국인들은 학살당하고 강간당하고 또 학살당했습니다. 그들의 비명은 차가운 바람 속에 흩어져 사라졌고, 결국에는 이름조차 지워져 잊히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기억될 자격은 있습니다.

웨이 박사가 품은 신념의 핵심은 진정한 기억 없이는 진정한 화해도 없다는 것입니다.

대사님께서 인용하신 것 같은 담화문이 발표될 때마다, 일본에서는 바로 얼마 후에 유력 정치인이 2차 대전 중에 일어난 사건의 진실성에 근거 없는 의혹을 제기하는 성명을 발표하곤 합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우리는 마치 두 얼굴의 야누스처럼 이야기하는 일본 정부의 이런 쇼에 익숙해졌습니다.

역사란 이야기를 다루는 일입니다. 그리고 진실한 이야기, 우리 존재를 지지하고 설명하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역사학자의 기본 임무입니다. 그러나 진실은 민감한 것이라서 적이 많습니다. 어쩌면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 연구자들은 진실 추구를 업으로 삼으면서도 대책과 수식과 단서 없이는 ‘진실’이라는 말을 거의 입에 올리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진실이 민감하기 때문에 역사는 언제나 다루기 힘든 주제였고, 부정론자들은 언제나 진실에 ‘픽션’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을 최후의 무기로 삼았습니다.

우리는 이야기를 사랑하는 생물이지만, 한편으로는 개개인의 이야기를 믿지 말라고 배우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야기는 만들어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진실에서 동떨어졌다는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지구는 완전한 구체도 아니고 평평한 원반도 아니지만, 진실에 훨씬 더 가까운 것은 구체 모형입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들보다 더 진실에 가까우며, 우리는 언제나 가장 인간적이면서도 가장 진실에 가까운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가 스스로의 약점과 주관성을 인정한다고 해서 진실을 이야기할 도덕적 의무가 면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설령 그 ‘진실’이 단일한 것이 아니라 일련의 공유 경험이자 공유 이해로서 다 함께 우리의 인간성을 구성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렇습니다. 만약 이 가정이 사실이라면 더더욱 그렇지요.

입만 살아 있는 용감한 남자들이 저를 힘으로 굴복시키고 이런저런 짓을 하는 합성 사진으로 자기들의 용기와 지성을 자랑했던 거지요.

아이다호주에 머무는 동안 에번은 세상이 가끔은 친절한 곳이라는 걸 다시 기억해 냈습니다. 암흑과 부정으로 가득한 곳이 아니라요.

과거에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과 아내인 제가 있는 현재에 충실해야 한다는 생각 사이에서 몸이 쪼개지는 기분이었을 겁니다.

알고 보니 역사는 한정된 자원이었는데, 웨이가 시간 여행을 떠날 때마다 결코 대체할 수 없는 과거가 한 뭉텅이씩 사라졌던 것이다. 웨이는 과거를 마치 스위스 치즈처럼 구멍이 숭숭 뚫린 덩어리로 바꾸어 놓고 있었다.

거대한 불의의 희생자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할 방법을 찾으려 하다가, 웨이는 그들 가운데 일부를 영영 침묵시키는 데에 그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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