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어릴 때 죽으면 번식을 할 수 없다. 그래서 자연선택은 살아남은 생명체를 선호한다. 그러나 오래 살면서도 이성에게 어필하지 못하여 번식에 실패하면 아무런 보람이 없다. 번식에 성공하려면 살아남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생명체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후손을 낳는 것이므로, 짝짓기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유할 수만 있다면 안전은 어느 정도 포기할 수 있다.6 그렇다고 몸을 가누기 어려울 정도로 꼬리가 크면 번식을 하기 전에 포식자에게 먹힐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적정한 한계를 넘지 않아야 한다. 공작이 지금도 생존한다는 것은 그들의 전략이 제대로 먹혀들었다는 뜻이다(커다란 꼬리 때문에 과도한 대가를 치르진 않았지만 공짜는 아니었다. 수컷 공작은 포식자의 눈에 잘 뜨이기 때문에 암컷보다 생존 확률이 낮다).

미국의 심리학자 제프리 밀러Geoffrey Miller와 철학자 데니스 듀턴Denis Dutton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예술적 능력은 안목 있는 여성이 남성을 선택하는 기준"이라고 주장했다.

"나는 생존에 별 도움이 안 되는 예술 활동에 귀중한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할 정도로 남들보다 뛰어난 육체적 능력과 자원을 소유하고 있다!" 이 정도면 이성의 관심을 끌 만하지 않은가(홍적세의 예술가들은 분명히 빈민층에 속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예술 활동이란 재능 있는 예술가들이 눈 높은 여성을 짝으로 영입하는 홍보 수단에 불과하다.

스티븐 핑커는 언제부턴가 예술이 바로 이 피드백 회로에서 벗어나, 독립적으로 쾌락 중추를 자극하는 행위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즐거운 적응’을 위해 탄생했던 예술이 언제부턴가 적응이라는 타이틀을 던져 버리고 오직 즐거움을 창출하는 수단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중요하다고 해서 반드시 적응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엘렌 디사나야크Ellen Dissanayake는 "인류의 역사에서 예술과 종교는 일주일에 한 번쯤 관심을 갖거나, 딱히 할 일이 없을 때 시간을 때우거나, 마음대로 거부할 수 있는 여가 활동이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인간이 최종승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임기응변과 창의력,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회적 생활 방식을 추구한 덕분이었다.

디사나야크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은 인간이 친사회적 성향을 갖게 된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예술을 꼽았다.

예술을 매개체로 삼아 강렬한 감정을 공유한 사람들 사이에는 일종의 공동체 의식이 형성된다.

과학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이론이 상상력과 창의력의 산물임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현실이라는 견고한 성의 레고 블록을 완전히 해체한 후 새로운 방식으로 재조립하여,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간과했던 놀라운 진실을 발견했다. 그가 상대성이론을 구축한 과정은 가장 높은 수준의 창조적 예술 활동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캐나다 출신의 천재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Glen Gould(1932~1982)는 바흐의 음악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그의 선율은 전치轉置와 반전, 역행을 정신없이 반복하면서도 새롭고 완벽한 하모니를 창출한다… 이것이 바로 바흐가 천재임을 보여 주는 확실한 증거다."

아인슈타인의 천재성도 이와 비슷하다. 그는 기존의 이론을 쌓아 올린 벽돌을 낱낱이 해체한 후, 새로운 개념이 적용된 청사진을 토대로 처음부터 다시 쌓아 올렸다. 흥미로운 것은 아인슈타인이 자신의 연구 과정을 종종 음악에 비유했다는 점이다.

그는 가끔 방정식과 수학 기호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상대성이론이 지배하는 우주의 영상을 머릿속에 그려 보곤 했다. 우주의 리듬을 듣고 패턴을 상상하면서 현실 깊은 곳에 숨어 있는 통일성을 찾아내는 것. 이것이 바로 아인슈타인이 실행했던 예술이다.

치열한 전투에서 승리하려면 두 부대가 모두 필요하듯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려서 성공적으로 구현하려면 창의력과 결속력을 발휘해야 한다.

브라이언 보이드는 그의 저서 《이야기의 기원On the Origin of Stories》에서 "예술은 사회성을 키우고, 상상력을 자극하고, 스스로 개척한 삶에 자신감을 불어넣음으로써 인간과 세상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꿔 놓았다."고 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그날 있었던 일은 ‘안타깝지만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사고였을 뿐이다. 그러나 나와 우연히 마주친 개가(고의는 아니었지만) 나 때문에 죽었다는 것은 결코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었다.

미국의 시인 제인 허시필드Jane Hirshfield는 "새로운 이미지에 적절한 어휘를 구사하면 존재의 폭이 확장된다."고 했고,19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솔 벨로Saul Bellow는 인식의 폭을 확장시키는 예술 특유의 능력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진실의 겉모습일 뿐이다. 오직 예술만이 자부심, 열정, 지성, 습관을 초월하여 보이지 않는 진실에 다가갈 수 있다. 바로 이것이 또 하나의 진실이자 진정한 진실이다. 예술이 없다면 진정한 진실이 우리에게 던지는 힌트를 포착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존재는 실용적인 언어로 번역될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삶의 일부라고 오해할 것이다."2

경직된 믿음에서 벗어나 수천 년에 걸쳐 개발되어 온 창조적 본능은 콘래드가 말한 감정의 세계를 누비면서 솔 벨로가 말한 ‘진정한 진실’의 속삭임을 들었다. 특히 글을 쓰는 작가들은 주인공을 통해 인간사를 조명하는 가상의 세계를 창출하여, 독자들에게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기회를 제공했다. 복수와 충성으로 가득 찬 오디세우스Odysseus의 파란만장한 여행, 레이디 맥베스Lady Macbeth와 욕망, 자책의 갈고리, 홀든 콜필드Holden Caulfield와 주체할 수 없는 반항, 애티커스 핀치Atticus Finch와 침묵의 힘, 엠마 보바리와 인간관계의 비극, 도로시와 자신을 찾아 떠나는 구불구불한 길… 이 작품(소설)들은 다양한 이야기를 통해 예술적 진리를 통찰하고, 사람들이 대충 알고 있던 인간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시각과 청각에 기초한 예술도 마찬가지다. 음악과 미술은 콘래드의 말대로 "지식을 초월한 곳에서" 감정을 사정없이 자극한다. 벨로의 목소리는 우리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현실을 이야기하고, 프란츠 리스트Frantz Liszt의 ‘죽음의 춤Totentanz’*은 본능적인 육감을 자극한다. 또한 브람스의 교향곡 3번은 이루어지지 않은 소망을 떠올리게 하고, 바흐의 샤콘느Chaconne**는 숭고함의 극치이며,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의 ‘환희의 송가Ode to Joy’에는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희망적인 메시지가 담겨 있다. 가사가 있는 곡으로 레너드 코언Leonard Cohen의 ‘할렐루야Hallelujah’는 더할 나위 없는 진정함으로 불완전한 삶을 찬양하고, 주디 갈랜드Judy Garland의 ‘무지개 너머Over the Rainbow’는 어린 시절을 동경하는 순수한 마음이 담겨 있으며, 존 레논John Lennon의 ‘이매진Imagine’은 이상적인 세상을 그리며 부드러우면서도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누구나 인생에서 잊지 못할 순간이 있듯이, 평생 잊지 못할 감동을 받은 책이나 영화, 안무, 그림, 또는 음악이 있다. 우리는 이런 매혹적인 경험을 통해 삶의 본질적인 특성을 과도하게 소비하고 있지만, 일상적인 삶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있다고 해도 아주 드문) 통찰력을 제공하므로 ‘영양가 없는 음식’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음악적 선율을 들으면 무언가가 느껴진다. 그러나 노래를 들으면 ‘생각을 느낀다.’"

하버그의 말대로 생각은 지적인 행동이고 느낌은 감정적이지만, ‘생각을 느끼는 것’은 예술적 과정이다.

프랑스의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주장대로, 이것은 축하해야 할 일이다. 그는 오직 예술을 통해서만 다른 사람의 비밀스런 우주로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그것은 별과 별 사이를 오가는 진정한 여행이다. 의식이 개입된 직접적인 방법으로는 결코 이런 여행을 떠날 수 없다."

나는 프루스트의 관점이 현대물리학과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런 말을 한 적도 있다. "진정한 발견은 낯선 지역을 찾아갈 때가 아니라, 다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이루어진다. 다른 사람의 눈, 수백 개의 다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완전히 다른 세상이 모습을 드러낸다."

"자신의 얼굴을 보고 싶을 때는 거울을 보고, 자신의 영혼을 보고 싶다면 예술 작품을 보라." 1925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던 조지 버나드 쇼의 말이다.

성능 좋은 천체 망원경을 동원하면 수백만 년, 또는 수십억 년 전에 방출된 빛도 볼 수 있다. 이들 중에는 오래전에 수명을 다하여 죽은 별도 있지만, 빛이 지구에 도달하려면 수백만 년, 또는 수십억 년이 걸리기 때문에 여전히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 빛은 물체가 현존한다는 증거가 아니라, 한때 그곳에 존재했음을 보여 주는 흔적일 뿐이다.

당신과 나의 몸에서 방출되거나(복사) 반사된 빛 중 아무런 방해 없이 지구 탈출에 성공한 부분은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방대한 우주로 나아가고 있다.

사람들은 과연 어떤 삶을 기억해 줄 것인가? 어떤 예술 작품이 오래 살아남는가? 우리의 삶과 작품이 그들과 함께하려면 어떤 조건을 만족해야 하는가?

랭크의 주장에 의하면 예술을 창조함으로써 죽음에 대항하는 것이야말로 죽음을 극복하는 올바른 길이다.

"모든 인간은 목에 굴레를 두르고 태어난다. 그러나 죽음이 코앞에 닥친 후에야 자신을 평생 동안 따라다닌 삶의 위험을 깨닫는다."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는 죽음을 부정하는 마음을 극단적인 문학으로 승화시켰다. "나는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질렀다. 손톱으로 허벅지를 긁었고,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관 바닥을 타고 흘렀다. 손가락 피부가 찢어지고 손톱이 닳을 정도로 나무 벽을 미친 듯이 긁다가 완전히 탈진해 버렸다."

미국의 시인 실비아 플라스Sylvia Plath는 이 정서를 좀 더 감정적으로 표현했다. "오, 신이여, 저는 당신과 같지 않습니다 / 당신의 공허한 어둠 / 그곳에 종잇조각처럼 빛나는 판에 박힌 별들 / 나는 영원이 지루합니다. 저는 그런 것을 윈치 않았습니다."

첼리스트이자 지휘자인 파블로 카살스Pablo Casals는 ‘평범한 행동에 열정을 부여하고, 일시적인 것에 영원을 달아 주는 것이 음악의 힘’이라고 했다.

우리는 음악을 통해 더 큰 무언가의 일부라는 느낌을 갖게 된다. 조지프 콘래드는 이를 두고 ‘외로운 마음들을 하나로 묶어 주는 막강한 힘’이라고 했다.

1960년대 말, 맨해튼의 한 초등학교 3학년 교실에서 저버 선생님Mrs. Gerber이 학생들에게 숙제를 내 주었다. "어른 한 사람을 골라서 직업을 물어보고, 그런 일을 하게 된 동기를 인터뷰해서 보고서로 제출하세요." 그 교실에 앉아 있던 나는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다가 가장 쉬운 방법을 떠올렸다. 오케이, 우리 아버지를 인터뷰하면 된다. 작곡가이자 연주자였던 아버지는 누군가가 자신의 학력을 물어올 때마다 "SPhDSeward Park High School dropout(시워드 고등학교 중퇴)"라며 익살스런 표정을 짓곤 했다.* 아버지는 10학년(고등학교 1학년) 때 교과서를 집어던지고 집을 나와 곡을 쓰고 노래하면서 전국을 돌아다녔다. 저버 선생님이 내준 숙제를 제출한 지도 근 50년이 넘었지만, 그때 아버지가 했던 한마디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 PhD는 미국에서 ‘박사’라는 뜻이다.)

나: 아버지는 왜 남들 다 다니는 학교를 버리고 음악을 택하셨어요?
아버지: 외로운 게 싫어서 그랬단다.

아버지가 1940~1950년대에 작곡한 발라드와 피아노곡을 지금도 가끔이나마 듣는 사람은 이 세상에 나밖에 없을 것이다. 나에게 이 곡들은 보물과도 같은 존재이며, 음악을 인생의 목표로 삼았던 젊은 시절의 아버지와 지금의 나를 이어 주는 유일한 연결 고리이기도 하다.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영웅, 헬렌 켈러Helen Keller가 바로 그 증인이다.

1924년 2월 1일, 뉴욕시의 WEAF 라디오 방송국은 뉴욕 필하모니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생방송으로 내보냈다. 때마침 집에서 라디오 앞에 앉아 있던 헬렌 켈러는 스피커의 진동판에 손을 얹고 불후의 명곡을 들었다. 아니, 손으로 ‘느꼈다’. 그녀의 손은 각 악기 소리를 구별할 수 있을 정도로 예민했다고 한다. "오케스트라의 화음이 격정적으로 치닫다가 갑자기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손은 그것이 사람의 목소리임을 금방 알 수 있었지요. 뒤로 갈수록 합창단은 점점 더 환희에 찬 목소리로 기쁨을 노래했고, 저는 심장이 멎는 듯한 감동에 빠져들었습니다." 베토벤의 교향곡은 헬렌 켈러의 영혼을 뒤흔들면서 영원을 향해 치닫는 것 같았다.

그녀는 감상을 마친 후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어둠과 멜로디, 그림자와 소리가 방안을 가득 메웠습니다. 그 순간, 그토록 위대한 곡을 만든 음악가가 저와 같은 청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을 떠올렸습니다. 청력을 잃은 고통 속에서도 사람들에게 그런 엄청난 기쁨을 가져다준 불멸의 정신력에 경탄할 뿐입니다. 저는 라디오 앞에 앉아서 스피커에 손을 얹은 채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환희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그와 내가 똑같이 느꼈을 고요함 속에서 거대한 파도처럼 부서지는 웅장한 교향곡을 느끼면서 말이지요.39

모든 문화권에는 영원히 변치 않는 숭고한 개념이 존재한다.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추상적 영원함’은 인간이 항상 동경해 오면서도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신기루였다. 거기에 남들보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간 사람은 삶의 관점이 통째로 달라지는 희귀한 경험을 겪곤 한다(행복한 만남이나 비극적인 만남, 명상적, 또는 화학적인 유혹, 종교적, 또는 예술적인 경험을 통해 시간이 사라진 듯한 느낌을 받는다).

수십 년 전에 나를 포함한 아홉 명의 청소년들이 버몬트Vermont주의 깊은 숲속에서 생존 훈련을 받은 적이 있다. 하루 훈련을 마치고 밤이 되어 모두 텐트 안에서 자고 있는데, 갑자기 훈련 교관의 불같은 명령이 떨어졌다. "모두 기상! 신속하게 옷 입고 텐트 앞에 집합!" 비몽사몽간에 대충 옷을 걸치고 나왔더니, 난데없이 야간 행군을 간다는 게 아닌가. 우리는 한 줄로 서서 컴컴한 숲을 헤치며 걷기 시작했다. 수시로 나타나는 아름드리 관목을 피해 가는 것도 문제였지만, 허리까지 빠지는 진흙 늪은 정말 압권이었다. 온몸에 오물을 뒤집어쓰고 물에 빠진 생쥐처럼 홀딱 젖은 채 추위에 덜덜 떨다가 마침내 공터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마치 천국에 도착한 것처럼 기뻐 날뛰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교관은 침낭 3개를 던져 주며 알아서 자라고 했다. 인원은 아홉인데 침낭이 달랑 3개뿐이라니! 그러나 우리는 항의를 해 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침낭의 안감을 끄집어내서 임시변통으로 이불을 만들어 덮고 잠을 청했다. 당연히 아이들 입에서는 불평과 원망 어린 한탄이 쏟아져 나왔다. 훈련을 포기하고 내일 아침에 집에 가겠다는 아이도 있었고, 아무 말 없이 눈물만 떨구는 아이도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밤하늘에 오로라aurora borealis*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정말이지 난생처음 보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밤하늘을 빼곡하게 채운 별을 배경으로 비단 자락 같은 빛줄기가 출렁대던 모습… 마치 다른 세상에 와 있는 것 같았다. 힘든 행군과 허리까지 빠지는 늪, 그리고 살을 에는 듯한 추위는 사람과 자연, 그리고 우주의 일부가 되어 멀리 사라져 버렸다.

지구의 한 지점에 서 있던 나는 춤추는 불빛에 에워싸였고, 결국 멀리 있는 별들에게 흡수되었다. 그날 새벽에 잠들 때까지,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오로라와 별을 쳐다봤는지 아무런 기억도 없고, 굳이 알고 싶지도 않다. 몇 분이건 몇 시간이건,(지속) 시간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날 내가 잠시나마 시간을 초월한 경험을 했다는 점이다.

우주의 겉모습이 아무리 안정적으로 보여도 그 안에는 변덕스럽고 불안정한 속성이 자리 잡고 있다.

진화가 만들어 놓은 구조를 엔트로피가 약화시키는 것은 사실이지만, 엔트로피와 진화가 반드시 반대 방향으로 진행될 필요는 없다.

볼프강 파울리Wolfgang Pauli(그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자네 생각이 느린 건 걱정 안 해. 자네의 논문이 그 느려 터진 생각보다 먼저 출판될까 봐, 그게 걱정이라구!"8)는 2개의 전자가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거리에 양자역학적 한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2개의 동종 입자는 동일한 양자 상태에 놓일 수 없다. 그러나 지금은 대략적인 설명으로 충분하다).

그렇다. 모든 만물이 그렇듯이 당신의 몸도 부피가 커지다가 결국은 산산이 분해될 것이다.

그렇다. 별로 달가운 사실은 아니지만, 우주가 팽창할수록 천문학은 퇴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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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과학 이론이나 상식에 위배되는 주장을 펼치면서 이를 뒷받침할 만한 데이터가 없고 앞으로 나올 가능성도 없다면 나는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다.

나 역시 가끔은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이나 전능한 존재를 떠올리며 일이 잘 풀리게 해달라고 기원할 때가 있다. 이런 것은 세상에 대한 나의 믿음에 부합되지 않지만, 소원을 빌고 나면 마음이 한결 편안해진다. 사실 과학적 논리를 잠시나마 벗어나는 것 자체만으로도 나에게는 소소한 기쁨이다.

가끔은 새로 발견된 것이 심하게 낯설고 기이해서, 현실 세계에 대한 기존의 이해 방식을 송두리째 갈아엎은 적도 있다.

그러나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하기 위해 일부러 낯선(또는 희한한) 방법을 동원하는 것은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다.

물리학 분야에서 새로운 발견은 거의 예외 없이 수백 년 동안 갈고 닦아 온 전통적 방법을 통해 이루어졌다.

통계로부터 얻은 결과가 틀릴 확률이 350만분의 1을 넘지 않아야 무언가를 발견했다고 주장할 수 있다(임의로 정한 값이 아니라, 통계이론에 입각하여 결정한 수치다).

찰스 다윈은 1872년에 출간한 그의 저서 《인간과 동물의 감정표현The Expression of the Emotions in Man and Animals》에서 "인간의 감정은 문화적 적응이 아닌 생물학적 적응과정의 산물"이라고 주장했다(자연선택을 최초로 주장했던 《종의 기원On the Origin of Species》은 1859년에 출간되었다).

과학은 지속적인 연구와 보정작업을 거치면서 객관적 진실에 조금씩 다가가고 있다.

가장 중요한 감정은 ‘두려움’이다.

과학 연구의 기초는 누가 뭐라 해도 수학과 실험이다. 이것은 동료나 후배에게 과학적 지식을 전수하는 수단이자 ‘숨은 진리를 찾는 능력이 입증된’ 유일한 도구이기도 하다.

물리학의 역사는 바깥 세계에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론과 실험으로 규명해 온 ‘발견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자의 자기쌍극자모멘트magnetic dipole moment는 이론으로 계산된 값과 실험실에서 측정한 값이 소수점 이하 9번째 자리까지 정확하게 일치한다. 그러나 신에 관해서는 정확한 데이터가 부족하기 때문에 양자역학만큼 신뢰가 가지 않는다.

우리의 두뇌는 복잡한 처리 과정을 거쳐 다양한 믿음을 양산해 왔지만, 그 믿음이 항상 진실과 일치하는 쪽으로 진화하지는 않았다.

모름지기 신뢰란 주어진 증거를 냉정하게 판단함으로써 생기는 것이다.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의 말대로 자연선택은 자녀에게 생존에 유리한 정보를 제공하는 부모를 선호하기 때문에, 부모가 자녀에게 하는 말은 진화적으로 의미가 있다. 아이가 자라서 성인이 되면 조사, 토론, 독서, 그리고 다양한 도전을 통해 자신만의 믿음을 갖게 되지만, 이것도 기존의 사상이나 다른 사람의 믿음에 영향을 받아 종종 한쪽으로 편향된다. 또한 많은 사람들은 스승이나 지도자, 친구, 직장 상사, 성직자 등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의 목록을 갖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다.

개중에는 과학에 기반을 둔 믿음도 있고, 개인이나 집단의 권위에 의존하는 믿음도 있으며, 직접, 또는 간접적인 강요에 의해 유지되는 믿음도 있다. 그 외에 오래된 전통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집단도 있고, 자신의 직관을 신뢰하는 사람도 많다. 그리고 마음속 깊은 곳에 은밀하게 숨어 있는 정보 처리 센터에서 위에 열거한 믿음을 다양한 방식으로 조합하여 자신만의 믿음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세상 그 누구도 수천 년 동안 쌓여 온 지식을 혼자서 재발견하거나, 그것이 옳다는 것을 증명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실 양자역학의 타당성을 증명한 실험 중 내가 직접 확인한 것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당신은 내가 양자역학을 아는 것이 아니라 ‘믿는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코앞에 닥친 것만 보는 사람은 바닥난 식량 재고나 은밀하게 다가오는 독거미를 간과하기 쉽다.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이 철저한 검증을 거쳐 형성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이로부터 유도된 예측은 틀리는 경우가 훨씬 많다.

파스칼 보이어의 말대로, "우리는 초자연적 존재가 마음속에 거주한다고 가정하고 있지만,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서 그런 존재를 수용할 수도, 거부할 수도 있다".

"주변 어디를 둘러봐도 삶과 죽음은 불가분의 관계임이 분명하다. 대지大地도 계절에 따라 삶과 죽음을 반복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조상들도 페르세포네의 여행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신화는 믿음을 강요하지 않으며, 이미 갖고 있는 믿음을 위협하지도 않는다. 신화의 시적詩的이면서 은유적인 서사는 그 안에 표현된 현실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창의적인 표현으로 내용을 강조하기 위해, 화자話者는 문장 곳곳에 은유를 뿌린다. 이것도 일종의 은유법인데, 아마 대부분의 독자들은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은유가 과도하게 남용되면서 은유법 특유의 설득력이 점차 증발하여(사실 증발하는 것은 물이지, 설득력이 아니다) 무미건조한 기법이 되었다(맛이 없고[無味] 마른 것[乾燥]은 음식이지, 기법이 아니다).

처음에는 시적인 표현과 은유로 가득 찬 이야기였는데,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은유에 담긴 의미와 시적인 감성이 거의 사라지고 문자만 남은 꼴이다.

과학은 객관적 현실을 추구하지만, 우리는 오직 마음이라는 주관적 과정을 통해 현실을 접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말하는 ‘객관적 현실’이란 주관적인 마음의 산물인 셈이다.

제임스가 말한 아름다움과 두려움, 약속과 목소리, 그리고 온화함과 웅장함에서 선과 악, 경이로움과 불안함, 외경심과 감사하는 마음에 이르는 모든 것이 내면 세계에서 탐험을 기다리고 있다. 자연에 존재하는 입자를 아무리 열심히 관찰하고 자연의 수학 법칙을 아무리 열심히 쫓아가도 이런 개념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여기 도달하려면 특정 입자들이 특정한 배열로 모여서 생각하고, 느끼고, 추론하는 능력을 획득해야 한다.* 융통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물리 법칙의 통제하에서 이런 입자 배열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놀랍고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난 수천 년, 또는 수백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종교적 수행을 실천하면서 의식를 치르고, 이 세상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립하고, 도덕심을 키우고, 예술적 영감을 떠올리고, 죽음을 초월한 이야기의 일부가 되고, 죽음이 끝이 아님을 되새기고, 가혹한 징벌을 두려워하고, 치열한 전쟁을 치르고, 죄인을 가두거나 죽이는 행위를 정당화해 왔다. 개중에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소름끼치는 것도 있지만, 이 모든 것들이 종교적 전통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나는 정말로 궁금하다. 작곡 과정에서 오직 자신의 마음으로만 들었던 소리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선사하리라는 것을 그는 어떻게 미리 알 수 있었을까?

신화와 종교에는 우리 조상들이 이 세상을 ‘여럿이 함께 이해해 온’ 역사가 담겨 있다. 의식儀式과 믿음이 반영된 전통은 우리에게 지금까지의 여정을 설명하고 앞으로 더 나아가도록 유도하기 위해 그에 걸맞은 ‘이야기’를 만들어 냈고(개중에는 열정이 담긴 이야기도 있고, 입에 담기 어려울 정도로 무자비한 이야기도 있다), 각 개인은 본능과 창의력을 발휘하여 생존력을 높이면서 집단과 같은 길을 따라갔다. 개인의 생존도 중요하지만, 집단과 융화되어야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숭고한 마음(드물긴 하지만 모든 세대에 존재하며, 대부분이 자연으로부터 형성되지만 가끔은 신을 상상하다가 떠올리는 경우도 있다)은 초월적 존재를 표현하는 새로운 방법을 개발했고, 이들의 창조적 여정은 유도誘導나 검증을 초월한 진실을 표현함으로써 ‘자신이 직접 겪지 않는 한 침묵을 지키는’ 인간의 본성에 목소리를 부여했다.

인간의 생존 기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패턴을 인식하는 능력이다.

당신이 나를 한 번 속였다면 당신은 짓궂은 사람이고, 두 번 속이면(다소 섣부른 판단이긴 하지만) 나에게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일이 세 번, 네 번 반복되면 내가 잘 속는 사람임이 분명하다.

지구인 중 일부는 무형無形에서 형태를 만들어 내기 위해, 또는 침묵에서 소리를 만들어 내기 위해 밤낮을 가지리 않고 깊은 사색에 잠긴다. 상상 속의 비전과 시공간의 패턴을 구현하기 위해 삶의 모든 에너지를 투여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결과물을 보고 감탄을 자아내건, 혐오감을 느끼건, 또는 아예 무시하건, 그런 것은 상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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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세계 명작 소설이나 소녀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책 속에 등장하는 낯선 문물에 열광했다.

음식 이야기는 언제나 나를 사로잡았다. 소설 속에서는 내가 한 번도 맛본 적 없고 만져본 적 없는 음식이 쏟아져 나왔다.

책이 불러일으킨 상상 속에서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었고, 어디로든 갈 수 있었고, 누구든 만날 수 있었다. 나와는 상관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살아보는 것. 그건 내게 주어진 어마어마한 자유의 경험이었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어른들이 내 주위에 그어놓은 한계를 넘어 종횡무진 활약했다.

백과사전이나 문학 교과서에 요약된 굵직굵직한 줄거리나 주제, 교훈 따위가 아니라, 그 주변에 흩어져 있는 낯선 단어들, 정체 모를 물건들, 신기한 음식들. 어떻게 보면 사소하기 그지없는 디테일이야말로 내가 다른 세상과 다른 삶을 꿈꿀 수 있는 마법의 주문이다.

번역을 하는 일을 하다 보니 그 시절 미처 몰랐던 것들을 알게 되었다. 내게 그토록 신비롭게 들렸던 마법의 주문들 중 일부는 사실 잘못된 번역이었으며, 그 환상적인 뉘앙스는 번역가가 음식의 이름을 적절한 우리말로 옮기지 못해서 생긴 오해일 뿐이었다는 것. 그렇게 환상이 깨질 때마다 나는 당황했고 배신감마저 느꼈다.

나 스스로가 번역가이니만큼 섣불리 비난할 수 없었다. 외국 문물을 ‘적절하게’ 옮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아니까.

번역된 문장은 결국 번역가 자신이 쓴 문장이므로, 번역가 고유의 생각, 가치관, 판단, 개성이 개입되게 마련이다. 더 나아가 한국어로 번역된 문장이라면 한국어라는 언어가 비롯된 한국적 토양, 사회, 문화, 사고방식이 담길 수밖에 없다. 따라서 번역문은 원문의 의미를 잃을 뿐만 아니라, 원어에는 없었던 새로운 의미를 낳기도 한다.

‘라즈베리 코디얼’을 마시는 소녀와 ‘나무딸기 주스’를 마시는 소녀는 외모도, 성격도, 말투도 다를 것만 같다. 그러므로 진저브레드, 블루베리, 라즈베리 코디얼이 나오는 책을 읽은 독자의 경험과, 생강빵, 월귤, 나무딸기 주스가 나오는 책을 읽은 독자의 경험 역시 다를 수밖에 없다.

훌륭한 책은 번역판이 많이 나오면 나올수록 이롭다는 말이 있다. 다양한 번역이 나올수록 그만큼 다양한 의미가 생겨나고, 독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경험의 폭도 넓어지기 때문이다. 많은 소설을 읽을수록 다양한 삶을 체험할 수 있듯이 말이다.

이른바 세계 명작이라 불리는 작품들의 상당수가 서구 문학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오늘날 우리가 아는 문학이 얼마나 1세계 중심적인지 새삼 상기하게 된다.

사실 나는 문학 작품 속 음식에 대한 환상이라는 것이 구태여 큰 소리로 논할 가치가 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거나, 언젠가 제대로 된 지식을 접하고 ‘교정’되어야 할 사소한 오해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비슷한 책을 읽고 비슷한 환상을 떠올렸다면 그것은 더 이상 개인적인 오해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함께 나누고 이야기할 만한 공통의 ‘경험’인 것이다.

《하이디》에서 먹는 장면을 그렇게 자세하게 다룬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주인공들의 행복과 불행을 먹는 모습으로도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 소박하고 건강하고 자유로운 삶이 하이디에게는 행복이다.

도시에는 하이디가 사랑하는 것들이 없다. 할아버지도, 염소도, 향긋한 들꽃도, 바람에 흔들리는 전나무도, 하늘을 찬란한 빛깔로 물들이는 저녁노을도. 오로지 살풍경한 건물들만 빽빽이 늘어서 있는 도시의 삶이 하이디에게는 답답하고 무서울 뿐이다. 어른들은 하이디에게 알파벳 공부를 시키고, 복잡한 식사 예절과 공손한 말씨를 강요하며, 마음대로 밖에 나가서 뛰어놀지 못하게 방 안에 가두어놓는다. 하이디는 어른들의 구박과 업신여김 속에서 나날이 시들어간다. 밤마다 알프스가 그리워 눈물짓는 소녀에게 식욕이 생길 리 없다.

흰 빵은 하이디가 도시를 떠나야 하는 이유이지만, 한편으로는 하이디가 도시에서의 슬픔과 외로움을 끝까지 견딜 수 있는 힘이기도 하다.

길고 어려운 시기에 어떤 음식 하나가 우리에게 선사하는 힘이란 때로는 어마어마하다.

《하이디》의 등장인물들이 염소젖이나 치즈를 늘어놓고 그 색깔이며 질감이며 맛에 대해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 ‘먹방’을 펼치는 동안, 검은 빵은 그 배경에서 돌멩이처럼 아무렇게나 굴러다닐 뿐이었다.

내가 모르는 알프스 시골의 소박한 맛을 체험해보고 싶었다. 내가 겪어본 적 없는 ‘유럽식 가난’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아무리 가난이라 해도 한국의 구질구질한 가난과는 무언가 다를 것만 같았다. 김치나 소주 냄새와는 거리가 먼, 건강하고 고소하고 담백한 가난. 어린이책 삽화 속 백인 여자아이들처럼 예쁘고 깨끗한 가난.
이제는 그런 생각이 얼마나 철없는 것이었는지 안다.

한마디로, 나는 현실의 내가 절대로 가질 수 없는 모든 것을 ‘검은 빵’에 대입했던 것 같다.

역설적이게도, 내게 검은 빵이란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다.

공주의 삶을 생각하면 자동으로 왕자 또는 기사가 딸려온다. 마녀의 계략으로 죽음의 위기에 처했다가 왕자의 입맞춤으로 깨어난다든지, 이웃 나라 왕자와 정략결혼을 맺었는데 비천한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든지, 용에게 붙잡혔다가 기사에게 구출된다든지, 자신을 지키는 수호 기사와 사랑에 빠진다든지 하는 이야기들.

이렇게 보면 공주들의 삶이란 순전히 어떤 남자와 결혼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모든 것이 걸려 있는 것만 같다. 하지만 이건 공주들에 대한 편협한 고정관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공주들은 이외에도 다양한 인생 목표를 가지고 있을 테니까. 여왕이 되기 위해 제왕학과 외교술을 공부하는 공주들도 있다. 이웃 나라와의 전쟁에 나가서 용감무쌍하게 싸우는 무사 공주들도 있다. 문학과 예술의 후원자가 되어 수많은 예술가의 작품 활동을 지원하는 공주들도 있다. 철학과 그리스어, 고전 들을 섭렵하고 걸출한 논문을 써서 학계에 업적을 남기는 공주들도 있다. 그런가 하면, 백성을 잘 보살필 궁리를 하며 나라의 어둡고 외로운 곳들을 굽어보는 공주들도 있다. 굶주린 거지 소녀에게 건포도빵을 베푼 세라 공주처럼.

아버지 잃은 슬픔을 추스를 새도 없이 악독한 교장 선생에게 학대를 당하면서 춥고 배고픈 채로 나날이 노동을 해야 하다니. 한 아이에게는, 더구나 힘든 일 한번 해본 적 없이 곱게 자란 아이에게는 지나치게 가혹한 시련이었을 것이다.

세라는 단 하나의 일념으로 그 힘겨운 일상을 버텨낸다. 자신이 공주라는 생각. 비록 왕궁에서 쫓겨나 수모와 수치를 당하고 있지만 자신은 사실 공주이며,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지라도 공주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고 공주답게 처신해야 한다는 믿음.

세라가 생각하는 공주는 그렇게 왜곡된 이미지가 아니다. 그녀는 언제 어디서나 위엄과 기품을 지키고, 자신을 미워하거나 괴롭히는 사람들에게 너그럽게 대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무시하지 않고 그들에게 손을 내밀고, 작은 것 하나라도 베풀고 양보하는 공주이고 싶어한다. 그런 자세로 살고 싶어하고, 또 자신이 그런 사람임을 증명하고 싶어한다. 좋은 사람이고 싶다는 열망이 세라의 삶을 더 나은 곳으로 이끌고 고통을 견딜 정신적 힘을 준다. 세라가 자신이 공주라는 것을 잊지 않는 한 그 무엇도 그녀를 해치지 못할 것이고, 아무리 악한 세력이 그녀를 굴복시킬지라도 언제나 그들보다 그녀가 더 우월할 것이다. 이런 것을 우리는 고결함이라고 부른다.

대부분의 여자아이들은 분수에 맞게, 튀지 않게, ‘둥글게’ 주변에 맞춰 살기를 요구받으니까.

고통스러운 현실을 잊기 위해 그야말로 온갖 상상을 동원한다. 그럼에도 왕자에게 구원받는 상상은 단 한 번도 하지 않는다. 세라의 상상 속에서 그녀는 누군가에게 구출받는 존재가 아니다. 스스로 역경을 돌파하는 주인공이고, 고결한 이상을 수호하는 영웅이다. 세라가 상상하는 ‘공주’는 그 영웅 중 한 명이다.

《소공녀》의 결말에서 세라의 바람은 그대로 이루어진다. 잃어버렸던 재산을 되찾아서 그 돈으로 배고픈 아이들에게 빵을 나눠주는 일을 시작한 것이다. 세라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언젠가 유난히 춥고 배고팠던 겨울날, 기적처럼 손에 넣은 따끈따끈한 건포도빵 여섯 개 중 다섯 개를 자신보다 더 배고픈 거지 소녀에게 양보하는 선행을 베풀었기 때문이다. 그때 세라는 자신이 공주인 척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공주임을 자신에게 증명했다. 그녀가 원했던 대로, 영웅이 된 것이다.

영국인들은 건포도빵을 유독 사랑했다. 자연히 영국 및 아일랜드 소설 속에서도 건포도빵은 자주 등장한다. 소공녀 세라의 건포도빵을 필두로, 《피터 래빗 이야기》에서 엄마 토끼가 숲 건너 빵집에서 갈색빵 한 덩어리와 함께 사 오는 빵이 건포도빵이다. 제임스 조이스의 <우연한 만남>에서 학교를 땡땡이친 두 주인공이 강가에 앉아 나누어 먹는 빵도 건포도빵이고, 《비밀의 화원》에서 디콘의 엄마가 신선한 우유와 함께 바구니에 넣어 아이들에게 보내주는 것도 건포도빵이다. 열거하자면 수도 없이 많다.

아무리 소설의 힘이 세다고 해도, 입맛에 안 맞는 음식을 맞도록 만들기는 힘든 법이다.

프랭크 올리버는 엄숙하게 말했다.
"롤빵에는 우리에게 한없는 위안을 주는 무언가가 있어요."

롤빵을 구할 수 있는 곳도 없다. 프랜차이즈 베이커리에서도, 동네 빵집에서도, 천연 효모 제과점에서도, 마트의 빵 코너에서도, 백화점 식품관에서도, 디저트 카페에서도, 롤빵이라는 이름의 빵은 팔지 않는다. 패밀리 레스토랑에서는 부시맨 브레드를, 이탈리안 비스트로에서는 마늘빵을, 경양식 식당에서는 모닝빵을 주지만, 롤빵이라는 이름의 식전 빵을 주는 식당은 찾아볼 수 없다. 롤빵을 취급하는 곳은 오로지 소설책 속 세상뿐이다.

그 순간 둘 사이에는 강렬한 공감대가 오간다. 롤빵을 좋아하는 마음이 이심전심 통하면서 둘은 롤빵에 찬사를 보내며 서로 연신 맞장구를 친다. 그 빵은 참으로 맛있고, 참으로 달콤하고, 참으로 폭신폭신하고, 사람을 편안하게 해준다면서. 숙녀는 마침내 프랭크의 데이트 신청을 받아들인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에 나오는 클로이 아줌마에게도 옥수수빵은 특별한 음식이다. 그녀는 켄터키의 한 농장주 집안에서 요리사로 일하는 노예인데, 음식 솜씨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파이, 푸딩, 파운드케이크, 스튜 등 못하는 음식이 없는 그녀는 평소 주인 나리와 마님, 도련님의 식사를 살뜰히 차려낼 뿐더러, 만찬이나 파티를 열라치면 기막힌 음식들로 손님치레를 해내서 열렬한 찬사를 듣는다.
하지만 그녀가 요리사로서 가장 큰 보람을 느낄 때는 주인집의 으리으리한 저택에서 백인들을 위한 상차림을 감독할 때가 아니라, 자신의 아늑한 오두막에서 남편과 자식들의 식사를 준비하는 시간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입맛에 꼭 맞는 옥수수 팬케이크를 부치는 것만큼 행복한 일도 없다. 아내가 요리하는 동안 톰은 소박한 테이블에 앉아 열심히 알파벳 공부를 하고, 아이들은 펄쩍펄쩍 뛰어놀며 갓난쟁이 막내를 데리고 장난을 친다. 불빛이 새어 나오는 아늑한 오두막 앞 텃밭에는 딸기와 라즈베리, 능소화와 분꽃이 탐스럽게 자라난다. 화목한 가정과 안락한 집과 적성에 맞는 일까지 가진 클로이 아줌마는 자신이 노예 중에서도 아주 운이 좋은 축이라고 생각하며 만족한다.

그녀는 요리사로서 자기 분야와 능력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다른 흑인들은 물론이고 백인 나리들이나 심지어는 마님조차도 클로이 아줌마의 부엌일에는 함부로 간섭하지 못한다. 클로이 아줌마는 치킨 파이 껍질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잔소리하는 마님에게 "귀부인 주제에 주방 일에 참견하는 게 아니다"라고 면박을 주고, 백인 도련님에게 이렇게 맛있는 푸딩을 먹을 수 있는 집안에서 태어난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인지 알라며 거드름을 피우는가 하면, 어떤 백인 나리가 ‘훌륭한 파이에 필요한 몇 가지 요건’을 알고 있는 걸 보니 음식에 대해 제법 일가견이 있는 것 같더라며 백인의 지식을 평가하기까지 한다. 게다가 주인 나리가 돈이 없다는 이유로 톰을 되사 오지 못하자, 그녀는 도시의 제과점에서 제빵사로 일해 돈을 벌어 남편의 몸값에 보탬으로써 전문가로서의 실력을 유감없이 증명하기도 한다.

슬픈 일이다. ‘메리 포핀스’ 시리즈를 보다 보면, 나 역시 뭔가 아주 중요한 걸 잊어버린 게 아닐까 하는 조바심이 든다. 비록 나는 제인이나 마이클처럼 신나는 유년 시절을 보낸 것 같지는 않고 이제 와서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지만, 어쩌면 나도 나름대로 엄청나게 행복한 일들을 겪었는데 어른이 되면서 잊어버린 건 아닐까 싶은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무지막지한 손해가 아닌가! 하지만 그 시절을 아무리 돌이켜보려 해도, 그때의 기억들은 이미 반쯤은 잊혔고 반쯤은 돌이킬 수 없이 변형되어버려서 더는 알아볼 수가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메리 포핀스가 선보이는 마법을 지켜보면서, 그 마법이 나에게 알려주는 것들을 꿰어 맞춰보는 것뿐이다. 아주 조금씩이지만 거기에서 실마리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도 나이가 몇 살만 더 들면 그런 체험은커녕, 메리 포핀스라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조차 잊어버릴 것이다.

금종이들은 하늘에 달라붙는 것과 동시에 반짝반짝 빛을 내뿜기 시작한다. 그 광경을 본 제인과 마이클은 아연히 서로에게 묻는다. "별이 금종이일까, 금종이가 별일까?"

‘메리 포핀스’ 시리즈는 이 질문을 끊임없이 던진다. 현실과 환상을 던져놓고, 둘 중 어느 쪽이 진짜일지를 묻는다. 우리가 현실이라고 알고 있었던 것이 사실은 환상이고, 환상이었다고 알고 있었던 것이 사실은 현실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정확히 어느 쪽이 맞다는 답을 주지 않고 그저 질문만 남기면서 늘 이야기를 끝맺는다. 메리 포핀스의 마법은 바로 이 모호함에서, 매혹적이고도 혼란스러운 현실과 환상의 중간 지대에서 펼쳐진다.

우리 자신은 가상이 아니라는 보장이 있나? 어쩌면 우리도 어떤 책 속 인물들이고, 우리가 사는 이 세상도 책 속 세상이며, 누군가가 우리 삶을 지켜보면서 재미있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모든 게 아찔하게 뒤바뀐 이 세계에서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그것의 모방인지는 의미를 잃는다. 거울 속에 비친 무수한 거울들처럼 그것들은 모두 현실이면서 동시에 모두 환상이다.

제인과 마이클은 종이 별을 ‘영원히’ 간직하겠다는 다짐을 지키지 못하지만, 그래도 그리 슬픈 일만은 아닌지도 모른다. 그 금종이들은 하늘에 붙어서 영원히 누구나 볼 수 있게 되었으니까.

독자들의 궁금증을 해결하겠다고 시작한 글이 오히려 더 많은 의혹으로 이어진 것 같아 참으로 면구스럽다.

수프에는 원초적인 마법의 힘이 있는 것 같다.

마법의 수프에 정확히 무슨 재료가 들어갔는지, 어떤 맛이 나는지, 색깔이나 식감이 어떤지는 알 수 없다. 미하엘 엔데는 우리에게 그런 디테일을 전혀 알려주지 않는다. 그저 ‘맛있고 영양이 풍부한 수프’라고만 할 뿐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각자가 생각하는 최고의 수프를 떠올리기만 하면 된다. 육개장, 클램차우더, 굴라시, 콩소메, 보르시치…… 그 어떤 수프를 상상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동화가 발휘하는 강력한 마법의 힘이니까. 전세계의 어느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고 즐길 수 있는 이야기의 힘.

옛날이야기에서 이런 말썽을 일으키는 마녀는 한둘이 아니다. 마녀들은 사악한 저주가 걸린 물건을 선물하고, 공주를 영원한 잠에 빠뜨리고, 용맹한 왕자의 눈을 멀게 하는가 하면, 아리따운 아가씨를 탑에 감금해놓고, 마녀 집회에 참석하고…… 그렇게 바쁘게 돌아다니다가 집에 오면,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 참으로 부지런하게도, 수프를 끓인다.

얼마나 많은 여자가 자신이 저질렀거나 저지르지 않은 마법의 대가로 목숨을 잃었을까? 그리고 그들의 죽음 위에서 또 얼마나 많은 동화가 만들어졌을까? "옛날 옛적에……"로 시작해서 21세기까지 전해지는, 끊임없이 솟아나는 마법의 수프 같은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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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는 자아(‘저자’라고 생각되는 자아)가 일상생활을 하는 자아와 같지 않다는 이런 관념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불쌍한 어린 넬8을 죽음에 이르게 한 자가 자식들을 위해 부지런히 크리스마스 게임을 만들던 유쾌한 가장 찰스 디킨스가 아닌 게 확실한가요? 디킨스가 펜을 든 자신의 손이 무자비하게 넬을 죽이는 내내 눈물을 흘렸다는 사실을 떠올려보세요.

아뇨, 넬을 죽인 건 그의 내면에 잉크로 된 촌충처럼 도사리고 있던 시체 애호가였습니다.

이자크 디네센이 《지킬 박사와 하이드》를 읽은 게 아닌가 싶네요. 그녀라면 읽을 필요가 없었겠지만 말이지요. 그런 식의 변신이라면 몸소 겪어서 익숙했을 테니까요. 그녀는 평범한 인간일 때는 카렌 블릭센으로, 소설가일 때는 이자크 디네센으로 살았지요. 일부 여성 작가들처럼 지킬 박사에서 한 술 더 떠 성별까지 바꾸어서요.

《지킬 박사와 하이드》는 오랜 늑대인간 이야기(평범한 남자가 특정 상황만 되면 날카로운 이빨의 미치광이로 돌변한다는 이야기)에도 영향을 받았지만, 도플갱어에 대한 옛이야기에도 큰 빚을 지고 있습니다.

일부 아프리카 사회에서는 불행을 막기 위해 일란성 쌍둥이를 죽였는데 아직까지 우리는 일란성 쌍둥이를 뭔지 모르게 기괴하다고 여깁니다. 똑같이 복제된 생김새가 우리의 고유성을 부정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닮은꼴은 쌍둥이나 형제보다 더합니다. 그는 ‘나’이니까요. 나의 가장 본질적 특징(외모, 목소리, 심지어 이름까지)을 공유하는 나이지요.

스코틀랜드의 민속 신앙에서는 자신의 닮은꼴을 만나는 것을 죽음에 대한 징조라고 봅니다.

고대 그리스 신화의 나르시스 이야기는 자신의 닮은꼴을 만나는 상황을 경고하는 미신과 관련이 있을 수 있지요. 나르시스가 자신의 비친 얼굴, 즉 자기 자신이지만 반대쪽 수면에 비친 자신을 보고, 그 얼굴이 그를 죽음으로 유인하니까요.

누군가 여러분이 농가에서 소들에게 마법을 거는 장면을 봤다고 칩시다. 그런데 같은 시간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을 봤다는 증언이 나온 겁니다. 그러면 결백을 증명할 수 있겠다 싶겠지만 이는 오히려 여러분이 닮은꼴을 만들어낼 능력이 있다는 것을, 즉 마녀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결과만 낳습니다(법정에서 ‘유령의 증거’를 금지하고 나서야 뉴잉글랜드 마녀재판은 마침내 끝이 났지요).

〈스텝포드 와이프〉 〈디 아더〉 〈데드 링거〉와 같은 ‘닮은꼴’ 영화들을 본 영화팬이라면 알 겁니다.

유형의 ‘닮은꼴’을 다룬 초기 영문학 작품 중 하나가 제임스 호그의 《사면된 죄인의 고백》(1824)이지요. 구원받을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에 마음껏 죄를 지어도 된다고 확신하는 이 책의 주인공은 긴 잠에서 깨어난 뒤 자신과 똑같이 생긴 남자가 고약한 짓을 저지른 걸 깨닫고 대신 책임을 지게 됩니다.

에드거 앨런 포의 이야기 〈윌리엄 윌슨〉(1839)도 비슷하지요. 여기서 주인공은 양심적으로 참견을 해대는, 자신과 외모도 이름도 똑같은 남자에게 평생을 시달립니다. 그러다 결국 또 다른 윌리엄 윌슨, 고로 자신을 죽이면서 생을 마감하지요.

두 명의 윌리엄 윌슨은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죽음을 공유한 사이이므로 나머지 한쪽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당연히 마법의 그림 속 주인공, 도리언 그레이13(오스카 와일드의 소설 주인공―옮긴이)도 있습니다.

이 책의 교훈은 이겁니다. 마법의 그림이 있으면 함부로 건드리지 마라. 그냥 가만히 둬라.

여기에 보탤 이야기가 하나 더 있어요. 《다섯 손가락의 야수》14라는 묘하게 무서운 작품입니다. 적어도 10대 시절, 밤에 아기 돌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읽었을 때는 이상하게도 무섭더군요.

최고의 메타소설 《마녀의 망치》15에 나오는, 마녀의 꾐에 넘어간 음경이 주인의 몸에서 떨어져 나와 새둥지에서 잠을 잔다는 이야기를 떠올릴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은 코가 한 남자에게서 도망쳐서 제복 차림의 궁중 관리가 되었다가 마침내 붙잡혀 다시 몸에 붙여진다는 내용을 그린 고골리의 소설 〈코〉가 떠오르시나요?

삼촌이 죽고 손이 담긴 소포가 도착했을 때 그가 받았을 충격을 상상해보세요. 손이 유언장을 위조해 삼촌의 몸에서 자신을 잘라낸 뒤 우편으로 부치도록 지시하다니요. 멀쩡히 살아 있는 손은 밖으로 뛰어나와 커튼을 기어오르고 주인공을 괴롭히며 많은 닮은꼴들이 그런 것처럼 그의 인생을 망치기 시작합니다(이를테면 편지도 쓰고 주인공 이름으로 서명도 합니다. 손으로서는 불필요한 능력이 아닐 수 없지요).

남자가 손을 파괴하지만 손 역시 남자를 파괴하면서 이 책이 어떤 문학적 혈통을 물려받았는지 분명히 보여주지요.

만화 위에는 이런 설명이 붙어 있어요. "움직이는 손가락이 글을 쓴다. 집필을 끝낸 뒤엔 3주에 걸쳐 20개 도시로 북투어를 다닌다."16 물론 현실에서 북투어를 가야 하는 건 손가락이 아니라 불운한 인간의 몸입니다. 작가의 그 빌어먹을 손가락, 실제로 글을 써내려간 그 녀석은 북투어는 나 몰라라 하고선 혼자 어딘가에서 햇볕을 즐기는 동안 말이지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훨씬 멀리 나아갔습니다. 〈보르헤스와 나〉라는 작품에서 그는 그저 손이나 손가락에 만족하지 않고, 지킬 박사와 하이드라는 주제에 작가를 결합시켜 자기 자신(보르헤스)을 둘로 나눕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 보르헤스라는 사람에게 벌어지는 일이다."17 스스로를 ‘나’라고 칭하는 나머지 반쪽이 이렇게 말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보르헤스는 자신과 취향을 공유하지만 "헛되이 배우의 상징으로 바꾸는 방식을 취한다. 우리의 관계가 적대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과장일 것이다. 내가 살아가고, 내 자신이 계속 살아가게 하므로, 보르헤스가 용케 자신의 문학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고 그 문학이 나를 정당화시켜 주는 것이다"라며 말을 이어나가지요.

오직 나의 일부 순간들만이 그의 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그가 사물을 왜곡하고 과장하는 괴팍한 습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나는 조금씩 그에게 모든 것을 넘겨주고 있다.(…) 나는 나 자신이 아니라(만약 내가 어떤 사람인 게 맞다면) 보르헤스로 남을 수밖에 없다."

작가는 글을 쓸 때 자신을 작품(가식과 거짓 요소들을 품고 있지요) 속에 집어넣는데, 이렇게 하면 할수록 자신의 진짜 자아라 할 수 있는 것을 잃어버립니다. 하지만 심지어 이렇게 적으면서도 보르헤스는 글을 씁니다. 그는 이 역설을 잘 압니다. 다음 구절로 글을 마무리하는 걸 보면요. "우리 중 누가 이 글을 쓴 건지 모르겠다."

말하기의 역사는 길지만 글쓰기는 그렇지 않습니다. 말하기는 대부분 유아기에 습득하지만, 읽기는 평생 못 배우는 사람이 많습니다. 읽기는 해독이고, 해독을 하려면 임의적인 표식의 집합, 즉 추상적인 공식을 배워야 하지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글을 깨친 사람은 아주 소수였습니다. 읽기는 희귀한 기술이었으며, 글을 읽을 줄 안다는 건, 즉 이상하게 생긴 표식을 쳐다보면서 멀리 있는 누군가가 보낸 메시지를 술술 풀어내는 건 경외의 대상이었어요.

신도 구원받을 사람들의 이름이 적힌(그들이 직접 쓴 건 아니지만요) 책을 가지고 있었지요. 둘 중 어디든 한 번 이름이 오르면 지우기 어려웠지만, 그래도 언제나 악마의 악한 책보다는 신의 선한 책에서 이름을 없애는 게 더 쉬웠어요.19

기록된 글은 고정되고 변치 않는 성질을 얻게 되었지요.

주목할 건, 신약에 등장하는 예수는 이야기꾼이라는 겁니다. 예수는 우화로 가르치지 글로 적지 않습니다.20 그 자신이 말씀이요, 소망하는 곳으로 흘러가는 성령인 까닭이지요. 또한 음성처럼 유동적이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어요. 하지만 그의 원수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법문, 즉 기록된 글을 고수합니다.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책으로 배웠다는 점을 생각하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지요.

존 키츠는 자신의 묘비명에 다음과 같이 새겼습니다. "여기 물 위에 이름을 새긴 사람이 잠들다." 이름을 기록하면서 영혼의 유동성까지 한꺼번에 얻다니, 참으로 탁월한 안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카라바조의 그림에서 사도 마태가 그토록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의 손에는 펜이 들려져 있고, 곁에선 천사가 살짝 강압적인 표정을 지으며 뭐라고 쓸지 지시하고 있잖아요.

글쓰기는 마음에 부담을 주는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기록된 말은 증거와 흡사해요. 나중에 나에게 불리하게 쓰일 수도 있으니까요.

평론가가 작가가 마침내 진짜 자기 ‘목소리’를 냈다고 비평하는 걸 본 적이 있나요? 당연히 작가는 ‘진짜’ 목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그 대신 목소리라는 ‘착각’이 들게끔 쓸 뿐이지요.

평론가들도 작가를 별로 의식하지 않아요. 그러기엔 너무 늦어서죠. 책이 나올 때면 텍스트는 완성됐고, 루비콘 강은 건넜으며, 작가의 일은 끝난 뒤니까요. 다음 책에는 지적인 비평이 어느 정도 도움이 되겠지만, 가엽게도 갓 출간된 책은 이 넓고도 사악한 세상에서 모든 것을 제 운에 맡겨야 합니다.

텍스트를 읽는 행위는 음악을 연주하면서 동시에 듣는 것과 비슷해요. 이때 독자는 고유한 통역가가 됩니다

작가와 독자는 서로를 모릅니다.

창조하는 행위와 작품을 손에 넣는 행위가 시기적으로 동떨어져 있는 데다 책을 무한정 복제하는 게 가능해진 탓이지요. 그런데 이 두 가지가 현대 작가들이 자신을 모호하게 바라보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어요.

인쇄 기술과 유통 방식이 개선되고 문맹률이 급속히 낮아지면서 별안간 작가들은 전에는 절대 상상할 수 없던 규모로 빠르게 인기를 끌고 엄청난 유명세를 얻게 되었어요. 즉, 실제보다 훨씬 거대하고 훨씬 훌륭한 존재로 비춰지게 된 거지요.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지는 책은 메가폰과 비슷한 역할을 합니다. 목소리는 확대시키지만 그 목소리를 낸 개인은 지우는 거예요.

자연스레 작가는 자신이 창조한 이미지에 의해 가려져버리지요.

바이런이 좋은 예입니다. 그는 하루아침에 유명인사가 되면서 자신의 시처럼 비장하고 낭만적인 인물이라는 이미지를 얻었지만, 몸무게가 늘자마자 독자들의 기대를 저버릴까봐 대중의 시야로부터 벗어났지요.

비장하고 낭만적인 바이런적 영웅이 되는 것은 심지어 바이런에게조차 젊은 시절에나 가능한 일이었던 겁니다.

어떤 이야기가 실은 꾸며낸 게 아니라 권위 있는 어르신들로부터 들은 실화라고 말하면 하찮은 거짓이 아니라는 뜻으로 오히려 타당성을 얻었지요.

누군가 천재적인 작품을 쓴다면 그 사람 자체도 틀림없이 천재라는 소리였지요. 언제나 말입니다.

알곤퀸 인디언,25 윌리엄 버로스,26 그리고 스티브 벨과 같은 몇몇 영국 만화가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사람의 항문이 그만의 목소리와 개성을 가진 완벽한 제2의 자아로 거듭나는 우화를 지었습니다.

시가 자아의 표현이라면 위대한 시인은 자기 안에 든 훌륭한 것들을 작품에 쏟아부었기에 인간으로서 남아 있는 게 많지 않다는 논리지요.

대문자 A인 작가Author와 그의 닮은꼴 존재, 그들은 교대합니다. 머리에 머리를 맞대고서 말이지요. 각자 자신의 중요한 본질을 비워내 상대방을 채워줍니다.

글을 쓸 때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우리가 하는 작업에 온전히 집중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두 층위의 에너지 사이를 위아래로 오가며 이중 도약한 이 세포가 내 손을 이끌어 종이 위, 이곳에, 이 점을 찍게 만든다, 바로 이 마침표를.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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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마침 내 생일이었는데,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절친했던 친구가 갑자기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정말이지 그날은…. 그러나 감사하게도 우리 곁에는 정서적 의존 관계 전문가가 있었고, 최고의 업무 능력을 갖춘 그녀 덕에 우리는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있었다.

그녀가 예순셋에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기사를 접하고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모른다. 그녀의 예순셋이란 여타 사람들의 마흔에 버금갔다.

「뉴욕 타임스」 기사에 따르면 당시 그녀는 많은 작가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리고 탄과 배리, 안젤루, 콜린스가 전화기 너머로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불러 주었다.

나는 명성 높은 여성에게 하고 싶은 질문이 참 많았고 그녀는 친절히 답을 들려주었다. 그녀는 말했다. 올해도 책 홍보 투어를 다니느라 자신이 돌보는 백합들이 피어나는 광경을 놓치게 되었다고. 그녀는 절친한 사이인 마이클 코다에게 스케줄을 바꿔 줄 수 없냐고 부탁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대작을 출판하기에 좋은 시기란 1년에 딱 한 번뿐이다.

참 놀랍게도 라임색 양말을 신은 남부 출신의 작가와 매력적인 금발의 신인 작가 두 사람은 이 인터뷰가 이어지는 내내 완전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가 쓴 글에서는 어떤 우울감이 풍겨난다. 그건 우울감과 똑같은 방식으로 작동해 악과 고통으로부터 아름다움을 건져 올린다.

한 방문 작가가 휠체어를 밀면서 들어왔다. 난 눈을 찡그리며 그를 보고 생각했다. ‘잠깐만, 내가 아는 사람인가?’ 그가 느릿하게 말했다. "매리언 위닉, 당신을 만나다니 정말 놀랍군요." 그는 예순다섯의 나이에 고통스러운 신경 질환을 앓으면서 신체적 손상을 입고 이르게 나이 든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의 태도는 어느 때 못지않게 따뜻했고 기억력은 나보다 확실히 더 나았다. 우리는 여전히 또 다른 문학 행사가 열리는 곳에 있었고, 그가 지적했듯, 집에 두고 온 백합들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사이에도 여전히 피어났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다른 작가들과 옛 제자들이 깊은 감정을 담아 쓴 추도의 글을 읽었다. 다들 그와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냈어야 했다고 말했다.

그는 사십 대 중반 이후부터 책을 출간했는데도 내가 아직 읽지 못한 그의 책이 일곱 권이나 되었다. 우리의 관계는 이제야 진정으로 시작된 참이었다.

젊은 시절 춤추는 걸 좋아했던 그녀는 꽤 괜찮은 남자들과 데이트를 즐겼다. 그때 그녀가 제일 즐겼던 일은 오스틴이나 샌안토니오까지 차를 몰고 가서 듀크 엘링턴이나 카운트 베이시를 보고 오는 일이었다.

"내가 좀 제멋대로였지." 나중엔 그녀도 인정했다. "그래도 난 수준이 높았다고." 재미있게도 그녀는 스물한 살에 한 남자와 결혼하겠다며 경영대를 다니다 말고 돌아왔다. 그 남자는 훗날 내 친구의 아빠가 될 사람이었다. 당시 그는 춤도 전혀 못 췄고, 확실한 직업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시내의 신용 조합을 넘겨받으려던 참이었기에 금전적인 면은 별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무도회장의 미녀가 어떻게 춤을 못 추는 남자와 결혼했을까?

친구는 아빠에게 섹스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 있었다. 엄마가 일하러 나간 사이 양육의 대부분을 아빠가 책임지고 있던 때였다. 아빠가 상황을 설명하자 딸은 말했다. "듣기론 아플 것 같은데요." 아빠가 말했다. "아, 그래. 처음엔 그렇지. 근데 그다음에는 말이야, 네가 그 남자를 붙잡으려 방 안을 돌아다니게 될걸."

우리는 그분들의 패션 신념에 대해 논했다. 친구 어머니의 신념은 피부에 닿는 마지막 옷가지까지 챙기는 것이었다. 만약 그날 핑크색 드레스를 입었다면 확신해도 좋다. 그녀는 분명 핑크색 브래지어와 핑크색 슬립, 핑크색 팬티를 챙겨 입었을 것이다.

그녀는 잘 때 입는, 얇게 비치는 나이트가운만 서랍 하나 가득이었다. 심지어 구십 대가 되어서도 약간의 레이스나마 달리지 않은 파자마는 입지 않았다.

내 친구나 나나 옷을 제대로 갖춰 입은 적이 없어서 둘 다 각자의 어머니에게 똑같은 소리를 자주 듣곤 했다.

하지만 언제나 의견을 맞추기 어려웠던 까다로운 여성이 내가 이룬 결과에 감탄하고 칭찬을 할 때면 어떤 기분이 드는지는, 우리 둘 다 알고 있다. 핑크색 실크 란제리는 당신의 영혼을 위한 것이었어요.

나는 텍사스, 이 외로운 별의 주Lone Star State를 사랑했던 만큼이나 친구네 가족을, 그들의 이야기, 말투에 깃든 억양, 요리, 관대함, 옷과 가구와 예술을 보는 탁월한 취향을 모두 사랑했다.

2년 간격으로 두 아들을 땅에 묻고, 남은 모든 걸 빼앗아가는 몹쓸 병으로 그토록 오랫동안 고생하고. "쉬잇, 다들 조용히 해 봐요." 그녀가 말한다. "여기 와서 저 석양을 좀 봐요. 이제껏 본 어느 하늘보다도 아름답지 않나요?"

그녀는 영민했으며 친절하면서도 엄격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딸의 결혼식에서 춤을 추었던 아버지는 딸의 이혼 파티에서도 춤을 추었으며, 딸의 두 번째 결혼식에서도 춤을 출 터였다. "얘야, 네가 행복할 수 있다면 뭐든 상관있겠니. 앞으로 쭉 나아가렴."

아버지는 딸이 자신을 따르도록 훈련하면서 동시에 상대를 리드하는 법까지 가르쳤다.

어머니는 간호사였고,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어. 매일 아침이면 도자기 잔에 담긴 커피를 들고 개들과 함께 나와 동네 개울가를 따라 걸었지. 아니 어쩌면 라마, 소 몇 마리, 닭 한두 마리도 함께했을 거야. 어머니는 앵무새야말로 가장 사회성이 뛰어난 새라고 말했어. 그리고 어머니가 가장 바라보기 좋아한 새는 왜가리였지."

친구와 친구의 오빠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마지막으로 동네 개울가를 따라 걸었다. 두 사람은 도자기 잔을 들고 걷느라 자꾸만 발을 헛디뎠다. 친구는 그곳을 떠나며 도자기 잔을 나무에 걸어 두었다.

의사는 펜타닐(코카인보다 훨씬 값싸게 봉투 하나를 채울 수 있는) 때문에 사망하는 사람이 이 병원에서만 매달 열다섯 명에 이른다고 말했다.

아, 내가 사랑하는 여자들, 내 진정한 친구들! 꽃병이 부서지고 뼈가 부러지고 자동차가 찌그러지듯, 무너져 버렸지. 완전한 회복은 불가능하고 아예 그럴 희망조차 사라질 만큼 무너져 버렸지. 그래도 말이야, 충분히 오래 기다리다 보면 어떻게든 고통은 잦아든다더라. 아주 조금씩, 아주 천천히, 한 번에 한 단씩. 내가 그 자리에 있을게, 맹세해. 내 눈으로 보고 싶거든.

그는 심장마비를 겪고 살아 돌아온 뒤에, 심장마비란 "마치 곰이 내 가슴 위에 앉아 스포츠 기사를 읽고 있는 느낌"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때 그는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내 인생을 바꾼 어느 한순간에 기여했다.

그는 좋은 남편이 못 되었다. 그는 네 번째 아내가 떠나자 결국 식기세척기 사용법을 배워야 했다. 그러다 나이 팔십 대 초반에 접어든 어느 날, 욕실에서 나오다가 넘어졌다. 그 자리에 그대로 누워 있다가 나흘 만에 발견되었으며 병원으로 옮겨지고 일주일 뒤에 세상을 떠났다. 스티로폼 컵에 테킬라를 담아 마시고 있던 늙은 친구들에게 둘러싸인 채였다.

우리의 우정에는 상식에 맞지 않는, 의아한 마법 같은 면이 있었다. 나보다 여섯 살 어렸고 손톱과 메이크업이 완벽했으며 맞춤복 바지를 입고 다니던 그녀는 마치 1960년대 스튜어디스나 꿈 많은 1학년 담임 선생님 같았다.

이 세계에서는 샤르도네 와인도 진통제 하이드로콘도 만족스럽지 못했다. 나는 닥치는 대로 타이 국수와 소고기 찜과 스파게티를 만들어 계속 차로 실어 날랐다.

엄마로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쥐었던 걸 내려놓아야 하는 수많은 순간들로 이루어진다. 그걸 친구는 너무나 느닷없이 이르게, 상상할 수도 없고 불가능한 방식으로 해내야만 했고 어쨌든 그 순간은 닥쳐왔다. 장례식을 마치고 8년이 흐른 어느 날, 나는 친구의 딸 결혼식장에 가서 한자리에 모여 있는 어여쁜 남매들의 모습을 보았다. 나 없는 이 세상이 어떻게 지속될지, 이보다 더 명확히 깨달을 수 있었던 순간은 없었다.

키가 큰 그녀는 더운 날의 물 한 잔처럼 확 끌리는 사람이었으며, 말이 많은 텍사스 출신의 금발머리였다.

이 화가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해, 어머니는 손녀의 대학 등록금에 보탬이 되고자 이 그림을 팔았다. 이 그림을 산 사람은 친절하게도 어머니가 요구한 금액보다 두 배는 더 가치가 있다며 제대로 된 가격을 치러주었다. 사실 언젠가 이 그림에 내 손에 들어오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지만 괜찮았다. 지금쯤은 화가의 딸이 스스로 대학에 가고자 할 것이다. 그녀 삶이 어땠을지 상상하기란 어렵다. 아마 그녀 역시 똑같은 방식으로 등록금을 마련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녀는 자기 침대에 누워, 자기 머리카락을 지킨 채, 자기만의 엔딩을 써 내려갔다. 끝.

"버티는 게 중요해PERSISTENCE IS KEY."

그는 무슨 일이든 제시간에 맞추는 법이 별로 없었고, 물려받은 재산이라도 있는 것처럼 돈을 썼고, 글 쓰는 속도가 느렸으며, 성적 욕망이 강했다. 또 그는 레스토랑에서 늘 특별한 주문을 청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초콜릿 케이크 한 조각을 다시 전자레인지 앞으로 보내면서 웨이터에게 살짝 녹여 달라고, 조지아 사투리로 말하는 식이었다.

그날 밤, 멀리 주차장을 향해 지루하게 걷는 길에서도 그랬다. 그에게는 매혹적인 면모가 있었다. 기사도적 예의와 삶의 기쁨과 느긋함이 흔치 않은 조합을 이루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친구였던 나는 마치 고통 없는 성형 수술을 겪은 기분이었다. 그는 나를 예전보다 조금은 더 아름답고 매력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개와의 동반 입장이 허락되지 않을 때 그녀는 답했다. "알았어요, 젠장!" 그러곤 티켓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집으로 갔다.

쾌활하고 자기 욕망을 기꺼이 즐기는 그녀였지만, 그런 그녀에게도 절망의 그늘은 있었다. 그녀는 외롭고 비밀이 많은 사람이었고, 나이 든다는 걸 더없이 끔찍하게 여겼다.

장례식은 그녀의 아파트에서 열린 칵테일파티로 대신했다. 그곳에서 난 그녀가 자신의 개를 보살펴 줄 사람들을 지정하고 유산을 남겼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 깨달았다. 나는 그녀와 다소 걱정스럽게 닮은 점들이 있었지만, 그래도 그녀보단 훨씬 운이 좋다.

난 운동선수였던 적도 없고, 비밀도 없다. 그리고 나라면 그 개를 두고 떠나는 일만큼은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젊은 작가를 키운 건 거의 자기 형이었다. 형은 기세등등하고 인기 높은 마약 거래상이었으며 자기 남동생을 필사적으로 보호했다. 형은 동생이 열다섯 되던 해에 아버지의 집에서 그를 데리고 나왔고, 길거리에 두는 일 없이 학교에 머물게 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정작 형 본인은 교육을 다 받지 못했지만 그래도 독서에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둘이 사는 집은 책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농구공들과 운동화 상자들도.

보통은 그녀가 북클럽에서 읽고 있다는 소설에 관한 의견을 나눴다. 그녀는 이 북클럽에 40년째 참석 중이라고 했다.

아이들 여섯 명을 낳아 기른 그녀는 결단력 있게 대응하고 엄하게 처벌하는 방식이 옳다고 굳게 믿는 사람이었다.

이제는 내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 본다. 제프리 유제니디스나 앤 패칫(미국의 소설가들-옮긴이)에 관해 떠드는 내 모습, 본인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내 모습.

나는 중요한 지점을 깨달아 가기 시작했다. 예술과 혁명에 관한 거창한 생각들이 얼마나 쉽게 자기 파괴라는 어리석은 로맨스에 물드는지.

"얼마나 이상하고도 흥분되며 경이로운 일인지 모르겠다. 언어와 음악과 현실의 삶을 통해 우리가 서로를 그토록 변화시킬 수 있다니, 서로를 그토록 사랑할 수 있다니." 그렇다. 두 사람은 정말이지 아름다운 커플이었다. 너무나 안타깝게도 우리 중 일부는 굳이 잘못된 생각을 택하려 했다.

"친애하는 엘라, 레슬리가 지난밤에 죽었어요. 안타까운 일이 갑작스럽게 벌어졌고 점점 상태가 나빠지다가 결국 떠났어요. 이 일은 일주일 전에 시작되었어요. 내가 어항을 청소하고 있었는데, 레슬리가 뜰채 밖으로 뛰쳐나왔죠. 좀 더 조심했어야 했는데! 그때 레슬리가 지느러미를 다쳤는데, 그 자리에 감염이 생긴 것 같아요. 며칠이 지나자 퉁퉁 부어오르더니 매끈했던 금빛 몸통이 흉한 빨간 반점으로 덮였어요. 지난밤 밖에서 저녁을 먹고 집에 돌아온 우리는 몸이 뒤집어진 채 수면에 떠 있는 레슬리를 발견했어요. 미동도 없고 핏기도 사라져 있었죠. 그런데 레슬리가 날 보더니 몸을 일으켜 흔들어 보려 했어요."

레슬리 노프는 원래 프레첼이란 이름으로 살다가 파양된 금붕어였다.

레슬리는 손님이 어항으로 다가온다는 걸 알아채는 순간 바로 헤엄쳐 올랐다가 꼬리를 흔들었고 매력적이고 앙증맞은 캉캉 춤을 췄다. 손님은 반투명한 복숭앗빛 꼬리지느러미와 등지느러미를 뽐내며 이리저리 헤엄치는 레슬리의 모습에 눈에 떼지 못하고 진솔하고 다정한 눈빛을 보냈다. 레슬리는 반복되는 이 의식을 전혀 지겨워하지 않는 것 같았고 나 역시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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